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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중년을 노크하다 PART4] 열정을 묻다
- 역사상 중년이란 연령층이 이처럼 주목을 받은 적이 있을까? 중년은 생물학적으로 꺾이면서 신체적 노화가 본격화되는 시기다. 여기에 조기 퇴직 등으로 사회경제적 위기와 불안이 가세하는 시기다. 위기의 중년에 주목해온 사회학자 김찬호는 중년에 부딪히는 난감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오로지 앞으로만 내달려왔건만 인생의 절반에 이른 가파른 고비에서 이정표가 갑자기 사라진다. 앞길은 온통 오리무중, 가속 페달을 밟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속도를 늦출 수도 없다.” 중년은 이렇듯 위기와 불안을 표상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찬미되고 있다. ‘꽃중년’ 등 중년을 지칭하는 수식어는 중년을 과거와 다른 ‘새로운’ 세대로 호출한다. 유례없는 일이다. 지금의 중년담론은 이렇듯 두려움과 찬미, 불안과 영광의 양면을 지닌다. 그동안 세대담론은 늘 청년의 몫이었다. 청년은 시대의 아픔이자 시대정신의 표상이었다. 청년은 수구와 기득권의 저항에 맞서는 변화를 상징했고 펄펄 끓는 청춘은 그 자체로 사회의 ‘희망’이었다. 반면 중년은 노년과 청년 사이에 끼어 묵묵히 자식 뒷바라지나 하고 부모 부양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특별한 자기 정체성을 갖기 어려운 연령층이었다. 중년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40대부터 50대 초반까지가 생물학적 중년에 가장 가깝다. 이 연령대 중 상당부분이 80년대 대학을 다녔거나 그 시기의 직·간접적 문화권에 있었던 386세대와 겹친다. 주지하다시피 이들이 청년일 때는 학생운동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이끌었다. 이들이 사회에 진출한 시기는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기로 별다른 스펙과 준비 없이도 사회에 진출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20대에서부터 30대까지 한국사회의 변동기에 정치적, 사회경제적으로 열린 기회를 맘껏 누릴 수 있었고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다. 지금의 중년담론은 80년대 청년담론의 주역이었던 386세대가 중년이 된 시대, 이들을 주연으로 다시 호출하는 담론인지도 모른다. 이미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으로 이 사회의 주류가 되거나 기득권이 된 386세대는 이렇게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지평 위에서 중년을 조망할 때만이 중년에 대해 제대로 접근할 수 있다. ◇ 중년여성, 당당한 주체로 성장한 세대 현재 중년담론의 가장 큰 축은 중년에 맞닥뜨리게 되는 신체적, 사회경제적 위기에 대한 것이다. 중년의 위기와 불안은 여러 방면과 층위에서 엄습한다. 일자리 불안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 불안한 노후와 건강 문제, 그리고 자식세대인 청년층의 불안도 지금의 중년층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중년의 위기와 불안에 대한 담론은 대체로 남성을 염두에 두고 전개된다. , 등과 같이 중년남성을 염두에 둔 힐링서는 도처에 깔려 있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정작 지금의 자신은 초라하고 지질해져 버린 이들에게 바치는 위로와 토닥임이 주 내용이다. 물론 ‘꽃중년’ 등과 같이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문화적으로도 세련되며 외모의 측면에서도 충분히 매력적인 남성들이 등장해 갈채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극히 소수의 예외적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중년의 위기를 담고 있는 담론에서 중년여성은 비켜서 있다. 중년여성에 대한 서술은 다른 결을 지닌다. 기존의 중년여성은 육체적으로 퇴화한 ‘여성’ 아닌 ‘여성’으로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젊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중년여성은 그냥 ‘아줌마’일 뿐이었다. 하지만 의학의 발달로 인해 아름다움에서 젊음이 차지하던 절대적이고 독보적 위치가 약화되고 있다. 경제적 여력이 뒷받침된다면 의학의 힘을 빌려 얼마든지 시간을 멈추거나 심지어 되돌릴 수도 있다. 여기에 내면의 성숙미와 우아함까지 가세할 경우 20대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광고카피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중년여성은 과거의 중년여성과 다르다.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중년여성이 청년이었던 80년대와 90년대, 성장의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시기는 우리 사회 전반에서 민주주의가 본격화된 시대였다. 여성들도 자연스럽게 성평등 의식을 받아들이면서 남성과 대등한 여성으로서의 주체성, 가부장제에 속박되지 않는 ‘자아’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오로지 아내로서, 엄마로서 ‘희생’해온 엄마 세대와 달리 지금의 중년은 이미 청년시절부터 여성으로서의 주체성을 고민해온 것이다. 중년여성들이 청년이었던 시기, 한번쯤은 접했을 공지영의 소설 는 가부장제 문화와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한 반감과 아울러 여성의 독립성과 주체성을 보여준 상징적 작품이다. 가족의 행복, 자식의 행복에 앞서 하나의 주체로서 자신의 삶과 행복을 고민하기 시작한 세대, 그것이 바로 지금의 중년여성이다. ◇ 문화와 소비의 주체 문화의 영역에서 중년여성은 중요한 향유층이자 소비 주체다. 이들은 성장기였던 80년대와 90년대 대중문화를 즐기면서 문화적 감수성을 습득했다. 취미와 여가도 적극적으로 즐기며 자신에 대한 투자에도 인색하지 않다. 엄마 세대들에게서 종종 나타나곤 했던 ‘여고 동창회’에서의 과시적, 사치적 소비와는 달리 그 소비는 ‘나’라는 자아, 주체를 향한다. 1968년생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는 중년여성들을 극장으로 대거 불러냈다. 극장을 가득 메운 중년여성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에 환호했고 공감했다. 등 중년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는 불륜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었지만, 한 여성이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주체로서 일어나는 과정에서 ‘불륜’을 설득력 있는 소재로 삼았다. 많은 중년여성들이 주인공 김희애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열광했다. 최근 중년여성의 불륜이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가 잦은데, 소위 ‘막장’ 성격보다는 여성이 주체로 일어서는 과정에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기 위한 소재로 활용되는 측면이 적지 않다. 한 드라마 평론가의 분석처럼 “결혼이란 제도로 자기 정체성과 삶의 결정권을 잃어버리는 여성이 자아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그 발단을 만드는 자극제로서 ‘불륜’만큼 강렬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 행복의 주체로서 중년여성 행복에 대한 조사를 보면 특이한 대목이 있다. 40대 중년 중에서도 남성과 여성 간 차이가 극과 극에 이른다는 점이다. 한국심리학회가 2010년 발표한 한국인의 행복지수에 따르면 전 연령층 중 40대 남성이 가장 불행했고 40대 여성이 가장 행복했다. 이 조사에서 40대 남성들은 다른 집단과 비교할 때 자신의 성취·성격·건강 등과 같은 개인적 측면은 물론 인간관계·소속집단과의 관계와 같은 사회적 측면 모두에서 만족 수준이 가장 낮았고 삶에 흥미를 느끼는 정도도 전 연령층 중 가장 낮았다. 반면 가장 행복한 집단인 40대 중년여성은 긍정적 정서면에서 모든 연령집단을 통틀어 가장 높았다. 40대 중후반이면 자녀들이 어느 정도 성장해 자신만의 시간을 누릴 여유가 생기고 경제적으로도 안정기에 이르는 시기다. 40대 여성의 높은 행복도에는 이러한 점도 일정 부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중년여성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행복을 갈망하고, 고민하며, 일상에서의 실현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바라는 행복은 다다를 수 없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충분히 실현가능한 소박한 것에 가깝다. 따뜻한 차 한 잔의 여유, 지지와 공감을 할 수 있는 친구, 기댈 수 있는 이웃 등. 이처럼 중년여성의 행복은 외부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직접 찾고 얻어낸 것이다. 행복에 이르는 길과 방법을 아는 중년 여성, 그래서 이들은 행복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다. ◇ 행복의 조건과 장애물 중년여성들에게 행복의 조건은 단순하다. 이들은 경제적 안정, 사회적 성공 등과 같이 이루기 어려운 세속적인 욕망을 좇기보다 일과 여가의 조화, 공동체에 대한 헌신 등 다른 길을 찾고 있다. 여가와 놀이는 중년여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핵심 요인이다. 여가를 통해 자신을 성찰할 여유와 힘을 얻게 되고 삶을 아름답게 가꿀 수 있다. 이들은 문화적 소비와 자신에 대한 투자에 인색하지 않다. 그동안 가족에 헌신하느라 잊고 지냈던 ‘자아’를 돌아보고 친구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여행을 통해 지나온 삶을, 그리고 함께 나이 들어감을 나누고 공감하는 중년여성들은 도처에 있다. 여기에는 한비아, 김남희 등 여성 여행 작가들의 기여가 적잖다. 자유롭게 자아를 찾아 떠나고 여행을 통해 당당하고 멋지게 성장하는 모습은 중년여성들의 로망이다. 이들은 지침 없는 성장과 변화를 꿈꾼다. 공동체에 헌신하는 중년여성들도 이전과 달라진 변화다. 가족 안에 갇힌 시선을 외부로 돌려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는 중년여성이 늘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분노한 앵그리맘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차고 나와 부당함을 제기하고 변화를 외칠 때, 이들의 존재감은 그 누구보다 묵직하다. 이들의 사회적 지평의 확대는 정치사회적 사안에서도 남편이나 자식에게 속박되지 않고 주체로 서고 있음을 시사한다. 중년여성의 달라진 위상은 일터에서도 확인된다. 임원 및 관리자급 중년여성들이 많아졌다는 양적인 측면을 넘어 질적인 측면에서 이들은 과거와 다른 존재감을 뿜어낸다. 공감능력, 수직적 위계가 아닌 수평적 연대, 위로와 치유 능력 등은 갈수록 팍팍해져가는 사회 속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해진 덕목들이다. 공감과 배려를 갖춘 여성의 존재는 그 자체로 소중하며 힘이 된다. 수직적 위계 속에서 가파르게 승진하는 사람이 아니라 동료와 교감하며 함께 가는 법을 체득한 중년여성이 존중받는 사회로 변하고 있다. 중년여성들의 아킬레스건은 무엇일까? 역시 자식이다. 이들의 주체성과 자아가 자식 앞에서는 무력해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헬리콥터맘’과 같이 자녀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고 엄마 마음대로 설계하려는 경우 불행한 결과는 예정되어 있다. 이는 자녀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자녀를 통해 대리충족하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식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는 분리 불안증은 중년여성이 넘어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이다. ◇ 중년여성, 새로운 ‘이륙’이 준비된 층 인생의 절정을 누리고 있는 그들의 삶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원칙은 중년의 정체성 확립, 일과 여가의 조화, 용감한 현실주의와 성숙한 낙관주의의 조화, 자신과 타인에 대한 배려의 조화, 진지한 성찰과 과감한 실행의 조화, 자신만의 자유와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의 조화였다. 이는 중년여성의 삶 속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항목들이다. 중년은 착륙의 시기가 아니라 또 다른 ‘이륙’이 가능한 시기라고 한다. 역사상 어느 세대보다 행복을 갈망하고 실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집단, 개인의 행복을 넘어 좋은 삶에 대한 고민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 집단이 바로 지금의 중년여성이다. 착륙이 아닌 새로운 이륙을 위해 중년여성은 이미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다. >> 글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hgy4215@hani.co.kr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회학과를 다녔고 여론분석전문기관 한국사회여론연구소를 거쳐 지금은 한겨레신문사 경제사회연구원에서 사회조사센터장을 맡고 있다. 사회적 변화와 트렌드를 여론이란 프리즘으로 분석하는 일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 한겨레신문과 한겨레21에서 정치사회적 이슈는 물론 세대와 문화 등을 주제로 정기적으로 칼럼을 쓰고 있다.
- 2015-11-27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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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세 결혼 알아봅시다③]소개팅 이것만 알고 갑시다!
- 남성과 여성이 만나는 일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무엇보다 첫 만남은 뜨겁고 강렬할 것이다. 기대도 크다. 그러나 자칫 어이없는 실수로 그 설렘과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첫 만남은 중요하다. 어떻게 해야 첫 만남에서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지 베테랑 커플매니저 김희경 팀장에게 물어봤다. 1. 커플매칭을 했을 때 남성이 좋아하는 매력녀는? 매력은 자신을 표출하는 외모와 성격의 총체적인 결과물로, 나를 다시 만나고 싶게 만드는 어떤 요소라 할 수 있는데요. 그 요소 중 으뜸은 외모입니다. 남성은 예쁜 여성을 좋아하니까요. 하지만 외모가 다는 아니에요. 아무리 예뻐도 공주과나 조용한 성격의 여성은 인기가 없습니다. 외모, 성격과 더불어 직업도 중요한데 사회생활을 해 봐야 남성의 사회생활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직업이 있는 여성이 인기가 많습니다. ‘밝고 활달하고, 애교와 배려심이 있고, 취미든 일이든 자신의 분야에 열정이 있는 착하고 예쁜 여성’ 남성이 커플매칭 용지에 가장 많이 작성하는 희망상대 유형입니다. 2. 커플매칭을 했을 때 여성이 좋아하는 매력남은? 남성은 외모보다 그야말로 인상이 중요한데요, 잘생긴 외모도 좋지만 푸근하고 선한 인상의 남성이 인기가 많습니다. 너무 마른 사람도 인기가 없지만 체중이 많이 나가는 경우 게으른 성격일 거라는 느낌을 주어 기피하는 편으로, 적당한 체격에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연출하면 되니, 외모로 봤을 때는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유리한 것이 사실입니다. 여성이 커플매칭 용지에 가장 많이 작성한 희망상대 성격은 ‘성실하고 책임감 강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자신감과 열정이 있고, 적당한 유머감각과 배려심이 있는 남자다운 성격’으로 외모보다 성격이 더 좋아야 여성에게 어필할 수 있습니다. 3. 여성이 ‘이것만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여성이 저와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성격도 그랬지만 몸에 걸치고 나온 게 수천만 원은 되더라고요.” 이런 피드백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부모님 덕에 명품으로 치장한 여성은 사치스럽다고 싫어합니다. 결혼하면 남편인 자기가 다 해주어야 할 몫인데 얼마나 부담스럽겠어요. 나이와 경제적인 수준에 걸맞게 자신을 가꿀 수 있는 지혜로움이 있어야겠지요. 또 한 번은 식사를 하자고 했더니 자신이 잘 아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가서 스테이크와 비싼 와인을 시켜 몇십만 원을 쓰고 왔는데 마음에도 안 든 여성이라 너무 아까웠다는 피드백을 받은 적도 있어요. 첫 만남에서 꼭 식사도 하고 집 앞까지 바래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있는데, 첫 만남은 간단히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하고 서로 호감이 가면 식사로 이어지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것 같아요. 그리고 남성이 식사를 대접했다면 장소를 옮겨 차를 마실 때 계산은 여성이 해 주는 센스 정도는 발휘해야겠지요. 4. 첫 만남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어떤 것일까요? 미국 명문대 박사 출신에 대기업 연구소에 근무하는 37살 된 남성이 있었어요. 여성이 선호하는 스펙이라 소개팅은 무척 잘 되었죠. 하지만 막상 애프터를 하면 받아 주는 여성이 없어서 몇 년째 교제가 안 되는 거예요. 여성의 피드백을 받아 보니,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자세로, 질문 공세를 펼쳐서 기업체 면접을 하고 온 것 같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남성의 어머님께 첫 만남에서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취미생활이나 일상적인 대화를 하면 호감을 얻기 쉽다고 알려 드렸고, 결국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나를 선택하려면 하세요’ 하고 첫 만남에서 성장과정과 현재 상황을 다 말하는 분이 있는데 이것은 좋지 않아요. 특히 결혼하면 부모님과 함께 살 거라며 여성을 떠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질문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여성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니까요. 다음 만남을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게 되고, 결국 확신이 서지 않는 상태에서 대부분의 여성은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거든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만나면서 알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5. 남성과 여성이 각각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팁이 있을까요? 남성은 소 같은 여자보다 여우 같은 여자를 더 좋아합니다. 때문에 상냥한 모습을 보이면 좋습니다. ‘난 애교가 없지만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날 거야’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소개팅은 첫 만남에서 결정되는 만큼 좋은 인상을 주어야 다음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거울을 보고 밝게 웃는 연습을 해 보세요. 웃으면서 대화하면 친근감이 느껴지거든요. 청바지나 너무 캐주얼한 복장은 자칫 예의 없다는 느낌을 줄 수 있으니까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춘 복장을 추천합니다. 낯가림을 해서 활발한 남성을 추천해 달라는 분이 제법 많은데, 아무리 활발한 남성이라도 단답형의 대답만 하는 여성 앞에서 분위기를 리드하기는 어렵습니다. 상대의 말에 리액션을 해 주고 서로 대화가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남성에게는 세미캐주얼 정장을 추천합니다. 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이끌어 주세요. 약속 장소를 정할 때 주도적으로 하면 좋습니다. 여성은 사소한 것에 감동을 받기 마련이라 식사를 한 경우 화장실에 다녀오는 척 하면서 미리 계산을 한다면 더 멋있어 보이죠. 또 작은 것이라도 상대의 장점을 찾아 칭찬해 보세요. “좋은 향이 나는데 어떤 향수를 쓰세요?”, “나이에 비해 무척 동안이네요.”, “웃는 모습이 아주 선해 보이시네요.” 등 조금만 살펴보면 칭찬거리는 많습니다. 다시 만나지 않을지라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주선자는 피드백을 통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게 되고, 좋은 피드백을 받으면 적극적으로 추천할 수 있으니까요. 6. 남성이 ‘이것만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여성을 기분 상하게 하는 피드백으로 대표적인 것이 “저는 결혼 생각이 별로 없는데, 부모님이 나가보라고 했어요”입니다. 상대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일 텐데, 정말로 그렇더라도 이런 표현은 상대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나이가 어리다고 첫 만남에서 반말을 하는 경우, 약속이 있다며 30분 만에 일어나는 경우, 만남 전 카톡에서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몇 번 대화만 주고받다 흐지부지 만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실물과 사진은 다른 경우가 많으니 한 번 정한 약속은 꼭 지켰으면 합니다. >>>도움말 김희경 팀장(신한은행 WM사업부 커플 매칭 담당)
- 2015-11-19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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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중년을 노크하다 PART1] 서드 에이지(third age), 어떻게 지나갈것인가
- 지금 우리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고령사회’는 인류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지(未知)의 세계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이토록 많은 노인들이 동시에 생존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행여 아들 며느리로부터 정성스레 효도 받던 옛날을 그리워한다면 그건 시대착오적 환상에 가까울 것이다. 어차피 장수(長壽)가 축복으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에,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았던 소수의 양반층에서나 가능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고령화 사회를 향해 첫발을 내디딘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노인이란 부양의 대상이자 사회적 부담의 온상이란 부정적 표현이 주를 이루었고, “부모님을 모신 마지막 세대요, 자식으로부터 버림받는 첫 세대”란 자조적 표현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회색빛 실버(silver) 세대 대신 ‘황금빛 골드(gold) 세대’란 애칭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날이 갈수록 그윽한 풍미를 자랑하는 ‘와인 세대’란 별칭도 얻게 되었다. 여기서 와인(wine)이란 현명하게(wisely) 인생을 하나로 엮어내는(integrated) 신(new) 노년(elderly)의 첫 글자를 딴 조어(造語)라 한다. 오늘날 생애주기 이론가들은 성인 이후의 나이 듦을 향해 세심한 관찰과 흥미진진한 해석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삶의 단계를 유년기, 사춘기, 오디세이기(성인으로 진입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음을 강조하기 위해 고안된 용어), 성인기, 은퇴 후기(後期), 노년기, 이렇게 6단계로 업데이트하기도 했다. 또, 성인발달과정에 애정을 쏟아온 윌리엄 새들러는 마흔 이후 30년을 ‘서드 에이지’라 명명하면서 이제 “안전벨트를 매고 착륙할 준비를 해야 하나 보다” 하고 인생을 관조하려던 중년을 향해, “다시금 새 타이어(re-tire)로 갈아 끼우고 이륙할 준비를 하라”는 충고와 더불어, 20세기 부모님 세대의 경험 속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신선한 길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노후의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난 요즘 부동산, 펀드, 주식 투자 등 경제적 준비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사회적 상실감을 딛고 정서적 성숙함과 심리적 안정감을 위한 준비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충고를 들려주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일본에서의 정년 65세란 인류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연령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고, 독일에서 은퇴를 65세로 못 박았을 때는 연금 수령 자격이 있는 모든 이들이 그 이전에 세상을 떠날 것으로 가정했다 한다. 결국 인간은 죽을 때까지 몸을 움직여 의미 있는 활동을 해야 한다는 암시가 담겨 있는 게 아닌지. 우리가 특별히 서드 에이지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이 시기가 인생의 쇠락기가 아니라 2차 성장 및 성숙이 이루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새들러가 만났던 주인공들은 ‘중년의 위기’란 허상에 사로잡혀 상실과 허무감에 허우적대기보다, 오히려 역동적이고 활기찬 생을 즐기면서 성공적으로 라이프스타일 이주(移住)를 실천하고 있었다 한다. 일례로 갱년기를 지난 여성들이 삶의 재충전을 위해 스포츠에 도전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관찰되었는데, 이들 여성이 선택하는 스포츠는 번지 점프, 산악자전거, 록클라이밍 등 예상외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거친 종목들이었다고 한다. 50대 후반 여성들은 거친 스포츠에 도전하면서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찾았음은 물론 삶의 에너지를 풍성하게 충전하게 되었음을 고백하였다. 뿐만 아니라 은퇴 이후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도전하거나, 숙련된 기술을 습득하는 데 성공한 경우는 우리 뇌 내부에 이전엔 없던 구조가 만들어지는 기적적 현상도 관찰되었다고 한다. 물론 서드 에이지를 지나가는 과정은 때론 복잡하기 그지없는 미로를 통과해야만 하는 상황도 기다리고 있고, 그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때도 무수히 많은 데다, 한 번에 풀기 어려운 역설적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난관에 봉착하기도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삶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향해 성큼 발을 내디뎌보는 것이란 조언은 우리에게도 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첫째 서드 에이지의 ‘위기의식’과 ‘도전’ 사이에서 긍정적 정체성 확립하기, 둘째 ‘일’과 ‘쉼[休]’의 조화를 이루기, 셋째 ‘자신에 대한 배려’와 ‘타인에 대한 배려’의 균형을 유지하기, 넷째 ‘현실주의’와 ‘낙관주의’ 사이에 다리를 놓기, 다섯째 ‘진지한 성찰’과 ‘과감한 실행’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성숙한 선택지를 찾아가기, 여섯째, ‘개인의 자유’와 ‘타인과의 긴밀한 관계’를 동시에 실현하기. 이들 6가지 과제 속엔 언뜻 보면 서로 반대되는 의미로 들릴 수 있는 두 요소들 간의 조화와 균형의 필요성이 설득력 있게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직장과 가족을 책임지고 돌보느라 정작 자기 자신을 배려하고 돌보는 법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세대를 향해, 서드 에이지를 지나며 필히 수행해야 할 과제가 바로 ‘자신을 배려하는 법’이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어 오면서 자신의 존재는 잠시 묻어둔 채 쫓기듯이 살아온 한국의 중·장년들에게 새삼 눈시울을 젖게 할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상자에 갇힌 듯한 직장 생활을 답답해하면서도 정작 이로부터 탈출했을 때 오는 해방감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의 지평을 확대하면서 일과 쉼의 조화를 꾀하라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구조조정 및 정리해고가 일상화된 삶 속에서 늘 불안감에 허덕여야 하는 우리들을 향해 유연한 생각의 미덕을 일깨워주는 것 같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생(生)에 관해 진지하게 성찰해 온 경험이 빈곤한 우리네로선, 더 늦기 전에 지금부터 30년 이후의 삶을 그려보며 상상의 기쁨과 도전의 의욕을 다질 수 있길 소망해본다. >>글 함인희 (咸仁姬)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에모리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 , 등이 있다.
- 2015-11-12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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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어머니] 치매 어머니와 사는 남자
- 우리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치매 판정을 받는다면? 아무리 효자라도 악몽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 7년 동안 치매 어머니를 모시고 산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치매로 말미암아 가족 모두를 변화시킨 어머니도 있다.그 사연은 무엇일까? “아빠는 책상 앞에서 하루 종일 책 읽고 일하면 중간에 허리도 좀 펴고, 스트레칭도 좀 하지 지금 죽으려고 작심한 거야?” 일주일에 20권의 책을 읽고, 수도 없이 많은 원고를 쓰며 책상 앞에서 일을 놓지 않았던 한 소장에게 그의 딸이 언성을 높인다. 딸에게 30분 정도 호되게 야단(?)을 맞으면서도 귀엽다는 듯이 아이를 쳐다본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면 저럴까?’ 방에서 소란이 일자 다른 방에 있던 한 소장의 어머니 박외조씨가 지팡이를 짚고 그 광경을 지켜본다. 치매로 인해 이성을 잃을뻔했지만 손녀에게 역정을 내지도 않고 그저 지켜만 볼 뿐이다. 30분 정도가 지나 소란이 잠잠해지자, 슬그머니 한 소장의 옆으로 다가온 어머니가 한마디 한다. “네가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 사실 일과 어머니를 한꺼번에 돌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모시기로 결심한 초기에는 가사 도우미를 고용해 그가 집에 없는 시간에 어머니를 돌볼 수 있도록 했다. 처음 2년은 어머니와 정서적으로 교감을 잘하는 아주머니가 많은 도움을 줬지만, 그녀가 관두고 난 뒤에는 모두 못 버티고 그만두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한 소장은 생각했다. ‘내가 어머니를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라고. 그러고는 결심했다. 단둘이 지내보기로 말이다. 그 일은 큰 용기를 필요로 했지만 몇 개월 지내며 어머니가 파악되면, 어머니 성격에 맞는 다른 도우미 아주머니를 모시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소장은 7년동안 어머니를 모시며 새로운 깨달음과 영향을 받았다. 그 전까지는 몰랐던, 아니 알면서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 지나쳤을 수 있는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것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한 소장 자신의 인생에 더 큰 변화를 준 사건이었다. ◇찌개를 끓이는 남자 한 소장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자 홀로 된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고 동생들은 아우성이었다. 퇴행성관절염 수술을 위해 병원에서 한 달하고도 보름이라는 시간을 보낸 어머니는 온몸의 감각을 잃어버린 듯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아들의 안부 전화를 얼마 전에 받아 놓고도 그 사실을 까맣게 잊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치매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무턱대고 병원 신세를 지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한 소장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책임지기로 했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한 소장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어머니를 위해 찌개를 끓인다. 아침에 끓인 찌개가 남아 있어도 저녁에는 새로운 메뉴를 요리한다는 것이 그만의 철칙.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치매를 앓고 계신 어머니에게 유일한 낙은 자는 것과 먹는 것이죠. 그중에서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먹을 것을 해결해드리는 일인데, 그것을 잘할 수 없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한 소장은 요리를 하면서 어머니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소한 어머니의 음식 취향조차 말이다. 이러한 고민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자 많은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다. 도움이라고 해봐야 치매 어머니에게 해 드릴 만한 음식 레시피를 공유해주는 것 정도였지만, 요리에 서툴렀던 한 소장에게는 천금과 같은 내용이었다. 한번은 블로그 이웃이 추천해 준 레시피로 치아가 좋지 않아 고생을 하는 어머니께 갈치찜을 해드린 적이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기껏 해드렸더니 어머니는 두어 젓가락을 들고는 이내 내려놓았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났지만 어머니에게는 표현을 할 수 없는 노릇. 예전에 어머니를 모셨던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하고 나서야 알게 됐어요. 어머니가 갈치를 못 드신다는 것을요. 어머니가 천막 공장에서 일하셨을 때 한여름에 상한 갈치를 드시고는 크게 고생한 적이 있으셔서 그 이후로는 못 드신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런 사소한 것조차 몰랐던 것이죠.” ◇침묵의 어머니 “어머니는 저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요. 어떤 걸 싫어하시고, 하루 종일 어떤 일이 있으셨는지 말이에요. 한번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후 내내 잠만 잤다는 걸 알아채서 어머니에게 왜 말 안 했냐고 여쭌 적이 있어요. 어머니가 그러시더군요. ‘내 걱정 할까 봐.’” 올해 83세인 어머니는 늘 그랬다. 시어머니에게 순종하고, 말없이 해야 할 일을 해가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들처럼 말이다. 홀로 시부모를 모시고 6남매를 키웠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연민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환갑이 지나서까지 시어머니를 모시며 고생이란 고생을 다 했으면서,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며 칠순이 지날 때까지 일을 놓지 않았던 어머니였다. 한 소장은 요즘 이런 생각이 든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음식을 해드리는 것 빼고는 어머니가 나를 보호하는 건지, 내가 어머니를 모시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어머니는 침묵으로 올바른 인간관계를 알려주신 스승님입니다. 치매로 정신이 없으시다가도 제가 잠을 자면 열이 많은 것을 알고, 창문을 살짝 열어주시고 가시곤 하죠. 이 나이가 돼서야 그 사소한 것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치매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 “결혼을 한 뒤에 일에 빠져 있었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잘 몰랐습니다. 여자도 사람도 말이죠. 하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알아야 사랑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어머니는 어느 날 한씨에게 전기밥솥과 세탁기를 조작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일터에서 끊임없이 일을 하고도, 집에 돌아와서는 집안일에 또 다시 일을 하는 아들에게 부담을 주는 느낌이었을 게다. 그도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건강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한 소장은 어머니의 그 말과 행동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모습을 봤다고 얘기한다. 어린 시절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고 배려했던 모습들 말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머니가 행하는 모성애는 치매에서 회복되는 모습이었을 테니 말이다. 이러자 한 소장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일밖에 모르고 살았던 때는 배려라는 감정을 잊고 살았다. 아내와의 결별도 그때 즈음이었다. 그런 그에게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는 배려와 공감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어머니를 모시면서 생각을 해보니 사랑한다는 표현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뽀뽀하고, 안아드렸어요. 어머니도 처음에는 어색해하시다가 지금은 익숙해지셨나 봅니다.” ◇치매로 뭉친 가족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가장 많이 변한 것이요? 우리 가족들의 우애예요.” 처음에는 침대 하나만 있으면 어머니를 모실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불철주야 일을 하면서 어머니를 돌본다는 것은 현실과의 싸움 이전에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 소장은 그런 어려움을 동생들에게 내색하지 않는다. 6남매의 장남으로서 당연히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고 느끼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를 홀로 모시는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어머니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그다. “제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어머니와 있었던 일들을 일기처럼 써놓곤 했죠. 그리고 어머니를 모시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담은 책을 내니 동생들이 많이 반성하더라고요.” 한 소장의 블로그에 글이 올라오고, 6월에는 는 책이 나오자 남매들에게 변화의 미동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생판 모르는 남들도 책을 보고 나서 눈물을 쏟아낸다는데, 누구보다 한씨의 사정을 잘 아는 동생들이 장남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동생들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거나 직접 찾아뵙는 횟수가 이전보다 많아지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변화였다. 무엇보다 형제간에 좋지 않았던 감정과 오해를 풀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 더 큰 소득이었다. “책 팔아서 받는 인세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어머니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해진 것이 더 감사하죠. 이게 어머니가 살아 생전에 남기시려는 선물이 아닌가 싶어요.” 한 소장은 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동생들이 그럽니다. 홀아비랑 과부 둘이서 아주 잘 살고 있다고요. 그래요. 어머니! 홀아비랑 과부 둘이서 연애하면서 잘 삽시다. (웃음)”
- 2015-11-05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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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건강 이에 달렸다 Part 9] 老心 잡아라, 달라지는 치과들
- 치과에 중장년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지난 4월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14년에 치과를 방문한 55세 이상 환자 수는 2010년에 비해 47%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부터는 노인틀니가, 지난해부터는 임플란트 건강보험 적용이 시작된 데다, 치아 건강을 찾고자 하는 환자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에 치과들도 달라지고 있다. “어머니, 다음 주 월요일에 오셔야 하는데요, 너무 일찍 오시면 힘드시니까 아침에 ‘별이 되어 빛나리’ 보시잖아요? 그 드라마 보시고 나서 천천히 나오세요.” 신당동의 한 치과에서 고령의 환자를 진료한 치과위생사가 다음 진료 약속을 잡기 위해 하는 말이 이채롭다. 약속 시간을 잡을 때 형식적인 숫자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좀 더 쉽고 잘 기억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화를 준 것이다. 한양여자대학교 치위생과 황윤숙 교수는 “의료기관과 환자 사이에서 정보 전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소통입니다. 각 세대나 연령층은 그들에게 맞는 고유한 언어방식이 존재하는데, 이 부분을 맞춰 가족과 같은 공감을 얻어내야 효과적인 건강관리가 가능합니다”라고 설명한다. 요즘은 치과도 환자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기실에 소파 대신 온돌의자를 비치한다거나, 테이블에 돋보기를 준비하는 등의 작은 배려는 이제 기본이 됐다. 이런 변화는 동네 치과의원들만의 것이 아니다. 대형 대학병원들도 마찬가지인데,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의 경우 시니어 진료실을 따로 운영하면서 연령에 따른 특화된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고,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은 노인구강진료실을 만들어 운영할 계획을 추진 중에 있다. 이런 변화는 학술 분야도 마찬가지여서 노인의 구강건강이나 효과적인 치료법을 연구하기 위한 치과의사들의 모임도 활발하다. 2004년 설립된 대한노년치의학회가 그 대표적인 단체로, 치과에서 노인 환자들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활동도 활발해지고 있다. 학회 김경선 부회장은 “예전에는 나이 든 치과의사 모임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분위기가 확 달라졌습니다. 젊은 치과의사들도 중장년층 환자들을 좀 더 잘 치료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학구열이 높아지고 있고, 학회 내부적으로도 치료법뿐만 아니라 시니어 구강관리 전문가 과정 도입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의료용 기기나 구강용품 등도 중장년의 치료와 관리를 위해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의치를 위한 임플란트도 바이오 신기술을 이용한 노인맞춤형 임플란트 출시를 눈앞에 두고 있고, 입냄새의 심한 정도를 숫자로 보여주는 측정 장비도 이미 시중에 선보여, 일부 치과에선 사용 중에 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자일리톨 껌 역시 의치에 잘 붙지 않고 단단해 씹는 운동도 겸할 수 있는 제품까지 등장했다. 또 최근에는 미래 의료시장을 좌우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3D 프린팅’ 기술을 이용한 치과치료 기술이 적극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최근 세미나를 위해 방한한 독일 Envisiontec社의 도미닉 크루거 연구원은 “새로 개발되는 기술이 병원에 적용되면 치료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돼, 오랜 치료시간을 힘들어 하는 중장년층에겐 희소식이 될 것입니다. 또한 정밀도도 향상돼 의치의 수명도 향상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 2015-11-04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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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투어] 스위스는 가는 곳마다 ‘너무 좋아’
- ‘아름다움’은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정의가 필요치 않은 것은 기본이 충만할 때다. 스위스의 전 지역에 대한 평가는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치 않다. 스위스는 가는 곳마다 ‘아! 너무 좋다’, ‘이 도시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 아름다움 속에서 살아온 덕분일까? 스위스 사람들은 여행객들에게 한결같이 친절을 베풀어 준다. 보드라운 속살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다가와 상대를 배려한다. >>글 이신화 여행작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베른에서 만난 아인슈타인 필자는 알프스를 기대고 있는 프랑스 남부의 안시(Annecy)에서 국경을 벗어나 제네바(Geneve)에 도착한다. 제네바의 레만 호수에는 하늘 높이 분수가 솟구치고 있다. 롤렉스 간판들, 거리의 꽃시계 등이 시계의 나라임을 다시 인식시켜 준다. 주마간산으로 도심을 돌아보고 베른(Bern)으로 장소를 이동한다. 스위스의 수도, 베른은 가을비에 촉촉하게 젖었다. 수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작다. 기차역 주변 말고는 인적도 뜸해 번잡한 구석을 찾을 수 없다. 숙소에서 준 대중교통 프리 티켓도 필요치 않다. 그저 작은 소읍의 풍치를 걸어 다니면서 보면 된다. 베른은 스위스 최초로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구 시가지의 골목에는 유럽에서 가장 긴 아케이드가 이어진다. 베른 도시가 생성됐던 12세기 후반에 지어지기 시작해 16세기 중반에 완성된 건물들이다. 그 건물에는 저장고 형태의 반 지하 상점이 늘어서 있다. 엇비슷한 건물 형태에 잠시 길을 잃을라치면 그럴 때마다 이 도시의 시계탑이 랜드마크 역할을 해준다. 시계탑은 감옥탑 이전에 베른의 출입구 역할을 했던 곳. 매시 정각 4분 전, 곰들과 광대들이 나와 춤을 추는 시간. 그 즈음이면 관광객들은 고개를 외로 꼬고 있다. 아랑곳하지 않고 시계탑 아래로 버스들이 오간다. 그것 말고도 자꾸만 시선과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은 다양한 테마로 만들어진 인형과 석조물이 아우러진 작은 분수들. 거기에 가는 곳마다 만나는 곰 형상들. ‘베른’이라는 이름 자체가 도시를 세운 체링겐 가문이 곰 사냥을 해서 시작됐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뉘데크 다리 건너편에는 곰 공원도 있다.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미공원 가는 길목이라서 으레 발길을 멈추지만, 왠지 어설프기만 한 곰 공원에 배시시 웃음 짓는다. 그 외 스위스 최대의 고딕양식 건물인 대성당(높이 100m)과 국회의사당 등이 포인트다. 욕심 없이 베른 시가지를 배회하다가 한 유명한 인물을 만난다. 아인슈타인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이 많을 텐데 왜 베른에서는 거대한 아인슈타인 박물관을 만들었을까? 아인슈타인과 베른은 어떤 연계가 있을까? 아인슈타인은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취리히 공과대학을 다녔고 베른에 온 것은 직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력은 어느 곳에서나 많이 나오니까 생략하기로 하고 흥미로운 사적인 삶을 들여다보자. 아인슈타인은 취리히 공과대학 동창으로 상대성 이론 논문 작성을 거들었던, 첫 아내 밀레바 마리치와 결혼했다. 그가 결혼해 살았던 아파트는 구 시가지에 ‘아인슈타인 하우스’로 남아 있다. 그런데 역사박물관에서 더 자세하게 아인슈타인의 사생활을 엿보게 된다. 그의 첫사랑은 물론이고 그가 사랑했던 마지막 사랑까지 소개되어 있었다. 오직 연구만 하는 ‘샌님’이라는 고정관념이 확 깨지는 순간이었다. 아인슈타인에게는 몇 명의 여자가 있었던 것일까? 아인슈타인은 결혼생활 16년 만에 이혼했다. 이혼 사유는 아인슈타인의 간통이었다. 이혼 위자료는 아직 타지도 않은 노벨상의 상금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혼 후, 달랑 넉 달 만에 내연의 관계였던 사촌 엘자 뢰벤탈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바람기는 재혼 후에도 잠들지 않아 평생 비서와 유부녀, 소련의 여성 스파이 등 여러 명의 연인을 두었다. 더불어 그는 아이들도 살갑게 돌보지 않았다. 밀레바와 혼전에 얻었던 딸은 출생 이후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혼 후에는 두 아들과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둘째 에두아르트는 아버지가 가족을 버렸던 일을 평생 용서하지 않아 두서없는 원망의 편지들을 보내곤 했고, 결국에는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쳤다. 아인슈타인은 1932년 히틀러 집권 3주 전에 아슬아슬하게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미국에서도 생활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하여튼 유명인들의 ‘가십(gossip)은 오랫동안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젊은 처녀의 어깨’라는 융프라우 요흐에 올라 베른에서 기차로 툰(Thun)호수 - 스피에츠(Spiez) - 인터라켄(Interlaken)까지 40분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융프라우 요흐((Jungfrau Joch, 3454m)까지 오르려면 산악열차를 타야 한다. 시작점은 인터라켄의 동역(Ost)이다. 동역에서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까지 올라가 다시 열차를 갈아타면 북벽 아이거 바로 밑 동네인 클라이네 샤이덱(Kl Scheidegg, 2061m)에 멈춘다. 이곳은 융프라우 정상과 그린델발트(Grindelwald, 1034m)로 가는 열차가 두 갈래로 나뉘는 환승역이다. 만년설을 가득 덮고 있는 위풍당당한 아이거 북벽이 우뚝 서 있다. 설산을 눈앞에 두고 마을 길 따라 1~2시간 정도 트레킹을 즐긴다. 가까스로 오르내리는 산악열차와 넓은 초지에 펼쳐지는 야생화, 햇살과 시간에 따라 바뀌어가는 산 그림자, 그림 같은 집들, 작은 호수, 레포츠를 즐기는 사람 등. 그 아름다움의 매력은 군더더기 말이 필요치 않다. 이 마을을 비껴 융프라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악열차에 오른다. 아이거와 묀히의 암반을 뚫고 설치한 톱니바퀴 레일은 총 9.3㎞. 1896∼1912년 건설되었으며, 최대경사도 25도의 압트식(Abt-System)으로 오르는 데 50분이 걸린다. 열차를 내려서는 그저 화살표만 따라가면 된다. 레스토랑도 있고, 초콜릿을 직접 만들어 판매도 하고 한 조각 선물도 준다. 얼음궁전(Ice Palace)을 관람한 후 통로를 따라 나가면 900m 두께의 눈밭, 플래토(Plateau)에 도착한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스핑크스 전망대(3571m)가 있다. 북동쪽에는 묀히와 아이거, 남동쪽에는 알레치 빙하, 남쪽에는 알레치호른, 더 멀리에는 몬테로사 산이 있다. 하지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기상 때문에 온전한 풍치를 보는 일은, 순전히 운에 맡겨야 한다. 결국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클라이네 샤이덱 주변에 펼쳐지는 풍광과 그린델발트 마을을 에둘러 봤으니 충분히 행복한 여정이다. ◇007 촬영지, 쉴트호른의 길목 마을, ‘뮈렌’ 아름다워 융프라우보다 느낌이 더 좋은 곳은 쉴트호른(Schilthorn, 2970m)이다. 라우터브루넨(806m)을 기점으로 찾아가야 한다. ‘울려 퍼지는 샘’이란 뜻을 가진 라우터브루넨은 정말로 아름다운 산골 마을이다. 247m의 슈타우프바흐 폭포를 비롯해 70여 개의 폭포가 연이어 높은 암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1749∼1832)는 1779년, 이곳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낭만파 음악가 멘델스존(1809∼1847)은 폭포 앞에서 괴테와 함께 그림을 그리며 보냈다. 시인 바이런(1788∼1824)도 이 폭포에 시를 남겼다. 폭포를 지나 마을 농장 길을 따라 4㎞ 정도 걸어가면 쉴트호른 케이블카를 타는 곳이다. 5~6번 정도 정차와 운행이 반복된다. 특히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산비탈을 등지고 사는 뮈렌(Murren, 1650m)이라는 마을은 그림 같이 아름답다. 고요할 정도로 조용한 고산 마을, 거칠고 척박한 높은 산봉우리 속에서도 화사한 꽃 화분으로 예쁘게 꾸미고 가꿀 줄 아는 사람들. 이 마을에 어찌 반하지 않겠는가? ‘이 높은 곳에서 뭐 먹고 살지?’ 하는 한국식 사고가 부끄러워지는 마을이다. 쉴트호른 전망대는 융프라우하고는 다르다. 터널이 아닌 시원한 야외 공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융프라우 요흐를 비롯해 묀히와 아이거 봉우리 3개가 한눈에 들어온다. 또 이곳은 유명한 시리즈 영화인 007 촬영장소로 활용되어 마치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재미도 준다. 전망대의 식당(피츠 글로리아, Piz Gloria)’은 야외 풍경을 보면서 즐기라고 뱅글뱅글 움직이고 있다. ‘007 제6탄-여왕 폐하 대작전’에서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식사한 곳에서 주인공인 것처럼 파스타를 먹는다. 분명코 융프라우만 보고 왔다면 반쪽 여행만 하게 되는 꼴이 될 것이다. ◇귀족, 부자들이 만든 휴양도시, 생 모리츠 한국 여행객 대부분이 융프라우 다음으로 가는 곳은 루체른(Luzern)이다. 필자는 루체른을 거쳐 생 모리츠(ST.Moriz)로 향한다. 스위스 여행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열차 여행이다. ‘Express’라는 이름으로 열차 관광 상품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중 빼어난 명품 열차가 베르니나(Bernina) 익스프레스다. 베르니나는 스위스를 가로질러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오래된 산악 열차다. 2008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열차 코스가 있다. 투시스(Thusis) ~ 생 모리츠(61.6㎞, 알불라 라인), 생 모리츠 ~ 티라노(Tirano)(60.6㎞, 베르니나 라인)를 합친, 122㎞ 구간이다. 이 열차 구간에 생 모리츠가 있다. 생 모리츠는 스위스 동쪽 끝 부분인 그라우뷘덴(Graubunden) 주의 엥가딘(Engadin)산맥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세계적인 휴양도시다. 스위스에서는 가장 일조량이 많다. 365일 중 320일이 맑은 마을. 그래서인지 생 모리츠에 도착하면 ‘그 맑음’에 눈이 부시다. 이 마을에는 예로부터 이름난 명사(코코샤넬 등)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스위스가 관광산업을 시작했을 때 돈 많은 영국 귀족들이 유서 깊은 호텔을 세웠고 스위스에서 가장 먼저 전기를 끌어들인 곳도 바로 생 모리츠다. 봅슬레이가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당시엔 영국 귀족들의 스포츠였다고 한다. 그 흔적들이 생 모리츠에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을은 고산을 기대어 터전을 잡았고 그 중간에 호수가 있다. 가파른 언덕이 있는 도르프(Dorf)와 온천이 모여 있는 바트(Bad), 두 마을로 이뤄져 있다. 도르프란 독일어로 ‘마을’, 바트는 ‘온천’이라는 뜻인데, 예로부터 온천으로 유명해 붙여진 이름이다. 호화로운 호텔과 부호들의 별장이 즐비하고, 류머티즘이나 심장병에 효험이 있다는 온천 근처에는 리조트도 들어서 있다. 그저 휴양도시라서 오래된 문화유적도 없다. 긴 역사의 흔적도 없다. 마을에 짙게 내린 가을 풍치와 산정의 겨울 풍치를 보면서 호숫가를 에돌아보면 된다. 흰 설국이 된다면 더 멋질 것이며, 이 도시는 엄청나게 북적거릴 것이다. 생 모리츠를 벗어나면서 자꾸만 미련이 남는다. 너무 아쉬워서 베르군(Bergun, Bravuogn) 역에 내려 한참이나 시간을 소요했다. 또 취리히로 나오는 길목에서는 ‘마이엔펠트(Maienfeld)에서 하룻밤을 유했다. 이 마을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배경이 된 곳. 이 마을에는 하이디와 할아버지가 살았던 집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박물관이 있다. 조용한 스위스의 시골마을에서의 하룻밤. 와이너리가 유난히 많은 이 마을의 호텔 바에 앉아 와인 잔을 기울인다. 동네사람들만 왁자하게 떠들던 그날 밤, 여행객의 상념은 깊어간다. 왜 스위스를 떠나는 게 이리도 힘이 드는 것일까? 단지 고국 떠난 여행객의 짙은 외로움만은 아니었으리라. 교통편 한국에서는 취리히 공항을 경유하는 게 일반적이다. 또 파리,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각지에서 열차가 수시로 연결된다. 취리히 공항에서 베른까지는 1시간 단위로 열차가 오간다. 각 여행지 선택은 다음 일정에 의해 결정하면 된다. 생 모리츠는 이탈리아와 인접해 있고, 베른, 제네바는 프랑스와 통한다. 현지 교통 정보 스위스는 철도가 발달된 도시. 대부분 기차로 이동하면 된다. 스위스 카드 구입하기 스위스 패스는 아주 유용하다. 카드마다 특전이 다르므로 선택을 잘 하는 것이 좋다. 패스를 이용하면 열차는 물론 포스트버스 등 대중교통 대부분을 이용할 수 있으며 케이블카 할인, 박물관 무료 등 혜택이 많다.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다면 날짜에 맞는 카드를 구입하면 된다. 또 스위스 철도는 유레일패스로도 이용할 수 있지만 할인 적용이 다르다. 열차 시간표는 홈페이지(www.rhb.ch)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운행 시간은 유럽 전역에서 아주 정확하다. 대표 음식들 퐁뒤(Fondue)가 있다. 기본적으로 긴 꼬챙이 끝에 음식을 끼워 녹인 치즈나 소스에 찍어 먹는 요리다. 18세기 초 알프스의 사냥꾼들이 사냥 중 모닥불에 치즈를 녹여 마른 빵을 부드럽게 적셔 먹은 것에서 유래했다. 또 초콜릿이 유명하니 선물용으로 구입해도 좋다. 숙박정보 스위스는 우리나라에 비해 환율이 높다. 비싼 호텔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값싼 호스텔을 이용하면 된다. 융프라우나 쉴트호른을 가려면 으레 라우터브루넨을 경유해야 한다. 라우터브루넨의 작은 마을의 밸리 호스텔(Valley Hostel)은 편하게 잘 되어 있다. 생 모리츠는 휴양지라서 숙박 가격이 비싼 편. 유스호스텔을 이용하면 아주 좋다. 스태프들이 친절하고 음식이 아주 맛이 좋다. 화폐단위 유로 대신 스위스 프랑을 쓴다. 언어문제 스위스 인들은 노인층까지도 영어를 잘 구사한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아 관광 안내소에는 한국어로 된 팸플릿도 있다. 유의할 점 여행 떠나기 전, 융프라우에 대한 정보는 많이 복잡할 수 있다. 미리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현지에 가면 관광체계가 잘되어 있다. 역에 가서 목적지만 말하면 그들이 알아서 표를 끊어준다. 한국에서는 할인 티켓을 프린트해 가는 게 좋다. 또 여행 중 농장의 철조망을 유의해야 한다. 전류가 흐르고 있어서 가까이 가면 감전의 우려가 있다.
- 2015-11-04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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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대공감]韓·美·日의 웃음코드...유재석-오브라이언-아리요시의 공통점
- 개그맨 유재석이 연일 화제다. 한동안 주춤하다 싶더니 종편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호사가들을 분주하게 만든 데 이어 가요제라는 형식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공중파 방송사들이 자료 영상을 종편 채널에 제공 또는 판매하지 않는 것은 유재석을 빼앗긴 데 대한 복수’라는 다소 선정적인 내용의 기사가 눈에 띈다. 유재석이 대단한 능력자임은 익히 알았지만 거대 방송사들이 치졸한 복수극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영향력이 큰 줄은 미처 몰랐다. 글 김유준 프리랜서 dongbackproject@gmail.com 일본에서는 아리요시 히로이키(有吉弘行)라는 코미디언이 득세하고 있다. 어떤 이는 연수입이 5억 엔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10억 엔이 넘는다고 할 만큼 채널을 가리지 않고 맹활약 중이다. 개그 스타일은 유재석과 정반대다. 독설이 거침없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수갑을 찰 만한 성희롱도 서슴지 않는다. 미국의 코미디언이며 방송 진행자인 코넌 오브라이언은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높다. 코미디 프로그램의 작가 출신으로 현상을 비트는 지적 유머가 장기로 알려져 있다. 유재석과 아리요시 히로이키, 그리고 코넌 오브라이언. 코미디 스타일은 제각각이지만 세 명에게는 공통점이 많다. 첫 번째는, 세 명 모두 한때 코미디언으로서 몹시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 역경을 너끈히 뛰어넘었다. 유재석은 10년 넘게 무명이었다. 이따금씩 정보 프로그램에 출연할 기회를 잡았을 때는 선천적 방송 ‘울렁증’ 때문에 더듬거리기만 하다가 속절없이 마이크를 내려놓아야 했다. 라는 옛날 프로그램에서 에피소드들을 과장을 섞어가며 재미나게 풀어내지 못했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리요시 히로이키는 데뷔와 거의 동시에 스타덤에 올랐다. 여느 일본 코미디언들이 으레 그렇듯 데뷔 초창기에는 고생이 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루간세키(猿岩石)’라는 이름으로 코믹 듀오를 이루고는 1996년부터 히치하이크로 세계 여행하는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해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그때의 이야기를 쓴 책이 250만 부, 음반이 120만 매 판매됐다. 나중에 아리요시는 방송에 출연해 “믿거나 말거나 경제 효과 1조 엔”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후로는 지독한 내리막길이었다. 인기가 한 번 추락한 이후 7년 가깝게 섭외가 없었다. 아리요시는 “사루간세키 시절에 번 돈을 모두 까먹은 시점이 되고서야 슬슬 출연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다시 찾아온 기회를 아리요시라는 똑똑한 코미디언은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았다. 나라별 다른 코미디 스타일 코넌 오브라이언은 뒤늦게 위기를 맞이했다. 출발은 거짓말처럼 순조로웠다. 유명 코미디 프로그램 과 인기 애니메이션 등에서 방송작가로 활약하다가 소질을 인정받고 방송 진행자로 데뷔한 이후, 미국 코미디 프로그램 하면 으레 떠오르는 늦은 밤의 토크 프로그램( )을 잇따라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다가 자신을 키워준 방송사 NBC로부터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다. 또 다른 코미디언인 제이 레노의 프로그램을 신설하며 의 방송 시간대를 맡기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NBC가 의 방송시각을 60년 만에 변경한 까닭은 단 하나, 시청률 때문이었다. 쇼를 맡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와 같은 모욕을 당하고 오브라이언은 방송 하차를 결심했다. 계약 조건 때문에 한동안 방송 활동을 할 수 없었음에도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오브라이언은 쇼를 그만두고 방송 대신 전국 투어를 선택했다. 성공적일 것 같지 않던 코미디 여행은 결국 대성공을 거뒀다. 트위터 같은 SNS가 홍보에 큰 몫을 담당해준 덕분이었다. 현재 오브라이언은 케이블 방송사 TBS에서 를 진행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두 번째 공통점은 그들이 현재 한미일 세 나라를 각각 대표하는 코미디언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다. 세 번째는 그들이 현재 한미일 세 나라의 코미디 스타일을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의 진짜 주제는 바로 이 세 번째 공통점에 관한 짧은 생각이다. 유재석은 점잖다. 코미디언이라면 한 번쯤 겪을 법한 스캔들을 단 한 번도 거치지 않았다. 오히려 주위에 미담만 가득하다. 최근에만 해도, MBC의 에 방영돼 화제가 된 일본의 우토로 마을에 10년 전부터 몰래 기부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또 한 번 우리를 놀라게 했다. 방송 진행 스타일도 마찬가지다. 동료 선·후배 코미디언들은 그가 “게스트들을 놀랍도록 배려한다”고 입을 모은다. 오랫 세월 동안 ‘질 안 좋은 친구’처럼 코미디 뒤꽁무니를 쫓아다녔던 주먹질이나 성적 비하 발언은, 그의 프로그램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여타 코미디언과 다르게 유재석은 우격다짐이나 욕설 한마디 없이 우리들을 웃긴다. 유재석은 보기 좋은 일만 하고 듣기 좋은 말만 하면서도 얼마든지 방송을 재미있게 이끌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희귀한 모범답안이다. 남자들에 관한 은밀한 주제를 거침없이 드러낸 같은 프로그램이 실패한 것은, 유재석의 그런 이미지와 동떨어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스튜디오 안에서의 얌전한 방송이 강호동에게 맞지 않는 것처럼,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패널이나 방청객의 치부를 드러내는 방송은 유재석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오랫 동안 인기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는 아마도 그가 만들어내는 ‘지저분하지 않은 웃음’이야말로 제대로 된 웃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거침없는 입담, 그러나 점잖다 일본인들은 딴판이다. 아리요시 히로이키가 그의 표현대로 ‘지옥에 떨어졌다가’ 다시금 인기를 얻게 된 계기는 ‘별명’이다. 동료 선·후배들에게 별명을 붙여주면서 인기가 급상승한 것이다. 코미디언이 지어낸 별명이 얌전해서야 인기를 끌기 어려울 터. 그의 입에서 작렬하는 별명은 상대의 얼굴이 벌게질 만큼 공격적이었고, 그래서 웃겼다. 심지어 아리요시는 일본 방송계의 원로 여성 진행자 구로야나기 데쓰코(黑柳徹子)에게 ‘똥할매’라는 놀라운 별명을 선사하기까지 했다. 이라는 토크 프로그램을 40년 가까이 진행해온 전설적 진행자의 면전에서 원초적인 욕지거리를 퍼부은 것이다. 모든 사람이 배꼽을 잡는 가운데 80세가 넘는 할머니만 웃지 못했다. 그렇다고 방송에서 대놓고 화낼 수도 없는 노릇. 할머니는 다만 “별명이 아니라 그냥 욕일 뿐”이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다시 스타덤에 오른 뒤 아리요시의 거침없는 입담은 더욱 불을 뿜었다. 함께 진행하는 여성 아나운서에게 통통하다는 이유로 “돼지새끼”라고 욕을 퍼부었으며, 미모가 좀 떨어지는 아나운서에게 “얼굴은 못생겼는데 가슴은 크다”고 놀려댔다. 남자 연예들에게는 더 매서웠다. ‘쓰레기’ ‘똥’ ‘바보’ 같은 욕지거리가 입에서 떨어질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일본 시청자들은 그를 사랑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의 코미디를 유심히 살폈다. 아닌 게 아니라 아리요시는 무척 재미있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만큼 폭언을 일삼지만 웃음을 선사하는 코미디언으로서의 임무도 잊지 않는다. 폭언을 들은 상대는 그냥 웃고 만다. 스스로의 설명처럼 아리요시는 영리하게도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 사람들이 생각하는 한계와 우리의 그것은 판이하다. 아리요시가 일본에서의 잣대를 그대로 유지했다가는 우리나라 프로그램에서 입도 벙끗하지 못할 것이다. ‘구구이 비점이고 자자이 관주’라는 의 표현을 빌려 쓰면, 아리요시의 멘트는 ‘구구이 폭언이고 자자이 성희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웃긴다. 그래서 일본에서 인기가 많다. 우리나라 시청자들이 ‘웃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일본 시청자들은 ‘어쨌든 웃기면 된다’고, ‘웃기지 못하는 얌전한 코미디보다는 웃기는 욕지거리 코미디가 더 낫다’고 여기는 듯하다. 이를테면 웃음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랄까. 코미디는 언제나 사회현상이 주제 코넌 오브라이언이 선사하는 웃음은 한국과 일본의 코미디와 성격이 좀 다르다. 그의 코미디는 언제나 사회 현상이 주제다. 그것도 남녀 사이의 자잘한 연애나 동료 연예인들의 잡다한 경험담 따위가 아니라 제법 굵직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화제가 코미디의 소재가 된다. 그러므로 그의 코미디가 유재석이나 아리요시의 코미디보다 수준 높다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르지 않을까 싶다. 일상의 사소한 웃음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코미디의 핵심인 풍자가 부족하다고 단정 짓기도 어렵고, 신문 앞면에 날 법한 사회현상을 다룬다고 해서 풍자가 넘치리라 지레짐작하는 것도 성급하다. 분명한 것은 정치적, 사회적인 이유와 관습으로 우리와 일본 사람들에게 풍자가 제법 부족하다는 것, 그에 비해 미국인들은 ‘지적인 피해의식이 있는지’ 의심될 만큼 풍자에 집착한다는 것, 그리고 코넌 오브라이언이 사회현상을 꼬집고 비트는 풍자에 재능이 넘친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던 다트머스 대학 졸업식 연설은 그 진수라 할 만하다. 하버드 대학 출신인 오브라이언은 그 연설에서 자신의 지적 유머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현실을 비판함과 동시에 사회로 진출하는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고무했다. 그러면서 웃음을 선사했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미국인들이 추구하는 유머의 최고봉이었다. 우리에게는 웃음이 필요하다. 그 웃음을 선물하는 작업은 대우받아 마땅하다. 유재석과 아리요시와 오브라이언은 각자의 스타일대로 그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우리에게 웃음을 주고 있다. 한미일의 웃음 코드는 세 코미디언의 차이점만큼 크게 벌어져 있지만, 모두가 웃음을 원한다는 사실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다. 어떤 코미디가 더 수준 높은지 따지는 것은 나중 일이다.
- 2015-10-19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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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손인숙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관장, 실로 그려 나가는 실그림 인생
- “나의 실그림은 예술 혹은 창조 자체를 실행에 옮기는 나의 삶이자 나의 우주다.” 여기 자신의 혼을 온전히 실어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예술가가 있다. 예순 중반의 나이에 자수를 통한 ‘실그림’이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손인숙(孫仁淑·64)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관장을 만났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전재현 사진 작가 손인숙 관장의 작품들은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9월 18일부터 6개월 동안 프랑스 국립 기메박물관에 초청 전시돼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한국의 멋을 서구의 예술 애호가들에게 펼쳐 보일 예정이다. 지금까지 작품 한 점 팔지 않고 이 같은 영광이 오기까지 그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삶과 예술혼이 하나로 어우러진 자기절제와 수행으로 작업정신을 펼쳐나간 실그림 거장. 예원(藝園)의 삶이 작품보다 더 감동적이다. 전통 자수의 현대적 계승을 통해 일가를 이룬 손인숙 관장과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의 손을 보게 됐다. 고사리 같은 손이다. 그러나 그 손이 만들어낸 예술 세계는 고되고 독보적인 영역에 있었다. 실그림이라는 그 예술 세계는 손 관장의 어머니 직계로 3대째 이르는 대를 잇는 길이기도 했다. 실그림 예술 세계의 알파이자 오메가, 어머니 “외할머니는 못 뵈었습니다. 저를 실제로 가르친 건 어머니였죠. 아버지는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일 때 돌아가셨고…. 하지만 어머니는 교육자여서, 제 소질을 계발하기 위해 제가 학교를 갔다 오면 따로 숙제를 내주곤 했어요. 그림을 그리게 한 거죠.” 손 관장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로 평생 교편을 잡았던 분이다. 자수 스승이었던 어머니는 손 관장의 유년 시절부터 함께 수를 놓았고 어떤 문양인지, 어떤 색을 고를 것인지 항상 옆에서 눈으로 가르쳐주었다. 매일 매일 틈 날 때마다 수를 놓으며 지냈던 일상의 잔잔한 시간들. 일상의 사색과 자수를 대하는 자세를 배우는 인고의 시간들이 그의 작품의 원천적 에너지인 동시에 자수와 자신이 일체가 되는 아우라로 계승됐다. “나에게 자수란 어느 한 땀도 사색이 반영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어느 한 땀도 내 몸속으로부터 나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듯 나의 자수에 대한 기본적 세계관은 어머니로부터 비롯됐고 주변 사물에 색과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자수에 대한 나의 항해 또한 어머니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손 관장의 어머니는 변화할 미래를 예견하기도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일찍이 미래에는 문화전쟁이 온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혜안이 있으셨어요. 어머니 말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합니다. 계속적으로 문화를 창조해야 생존할 수 있는 현재가 됐기 때문이죠. 그때 어머니는 저에게 한국의 문화를 세계 최고로 만들어라, 교수도 하지 말고 인간문화재도 하지 말고 일에 미쳐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세계와 공유하라고 충고했습니다.”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예술가가 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자수를 전공하면서부터 꿈을 현실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게 됐고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오늘이 왔습니다.” 오늘이 왔다는 것은 그가 갖게 될 영광에 대한 표현이었다. 올해한국과 프랑스의 수교 130주년이 된 걸 기념해 프랑스 국립 기메박물관에서 그의 250여 작품을 6개월 간 전시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전시회의 제목은 다. “결국은 미쳐서 해야 하는 겁니다. 똑같은 걸 만드는 건 누구나 하기 때문이죠. 나만의 세계가 있어야 해요. 제가 여기까지 올 때는 고통을 즐겼다고 보면 돼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했다면 답이 없었을 겁니다.” 손 관장은 작품을 하면서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출입을 삼가고 작업에 몰입하면서 보낸 시간은 하루에 13시간. 기메박물관의 전시 허가가 난 다음에는 사람들을 만나야 했기 때문에 그게 불가능해졌다고 하니 박물관 전시라는 사건은 공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그를 만나고 싶었던 이들에게도 다행인 일이지 싶다. 내년까지 이어지는 전시가 프랑스에 이어 영국까지 추가 예약돼 있다. 세계 인류를 위한 문화를 공유한다 손 관장의 작품 세계는 실그림을 축으로 해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로 채워지고 있다. 불교미술, 인물화, 풍속화, 민화, 산수화, 서예, 한방문화, 추상화에 이르는 그 수는 어림잡아 20여 가지. 그중에 건축까지 들어 있다니 그가 추구하는 예술적 자유로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만들어지는 작품들 중에는 20년째 작업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그야말로 예술가로서의 강렬한 자의식과 가치 부여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그는 조각 장인·옻칠 장인·매듭 장인·배접 장인 등 각 분야 전통 장인과 30여 년 동안 한 팀처럼 작품을 함께 만들어왔다. 자수는 그가 하지만, 목공예와 결합하거나 노리개에 응용하는 등 퓨전 작업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의 자수 작품은 목공예·목가구·보자기·장신구·함·병풍 등 21가지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할 거예요. 사실 이게 고통이지만….” 그렇게 고통스럽다면서 어째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답 또한 너무도 예술가다웠다. ‘제가 못 다한 게 너무 많아서’라는 것이다. “이걸 제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모두 다 한국 문화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 인류의 문화를 만든다는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개인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생각은 또한 제 어머니의 철학이기도 해요.” 그는 아직도 깊이 못 들어간 장르가 있다고 아쉬워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면 그 못 해 본 걸 완성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전통에 도전, 전통 자수를 뛰어넘다 이렇듯 자유롭게 사고하고 도전하는 손 관장에게 전통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전통은 나에게 무의식적인 소재의 바다였고 의식적으로 넘어야 할 산이었으며 긴 시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의 대상과도 같았습니다. 동시에 나를 있게 한 존재의 근원이기도 했죠.” 악귀를 물리치고 복을 불러오는 전통 자수 문양은 그 숫자의 한계가 있었으므로 그는 좀 더 다양한 문양을 새겨 넣기도 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복잡하고 섬세하며 화려한 감성은 바로 색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형태뿐 아니라 패턴의 느낌만으로도 다양함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녀가 다다른 예술적 지점들 중 하나였다. 그러면서도 작품 표현에서 전통 복식, 목공예, 불화와 같이 종래에 있었던 수많은 전통 예술들이 그의 예술 세계 속에서 차용됐다. “전통을 전통으로만 보면 오늘이 없어집니다. 전통에 도전해 자신만의 색을 마련할 수 있어야 예술이죠.” 그의 작품들 중에 가장 강렬하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은 풍경화와 추상화, 그리고 그 중간쯤에 위치한 순수 창작 실그림들이다. 특히 마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 것 같은 추상 작품들은 그녀가 색을 다루고 형상을 파괴하면서 실의 질감을 파격적으로 과감히 살리고자 한 결과물일 것이다. 힘들다고만 생각하면 끝이 없어 손 관장은 작업을 하면서 가장 힘든 때를 작업하는 장인, 즉 파트너들과 호흡이 맞지 않을 때를 꼽았다. 그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함께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이는 공동 작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점이다. 그러나 손 관장은 ‘힘들다’는 감정에서 멈추지 않았다. “저는 힘들다는 생각을 반대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요. 힘들다고만 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힘듦을 즐겨야 합니다. 과거에 물난리가 나서 작업장이 잠긴 적이 있었어요. 기가 막히잖아요? 하지만 그때 저는 손해를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일을 마음에서 던져버렸죠. 오너인 제 입장에서 함께 일하는 그분들과 같이 힘들어 하면 안 되죠. 정말로 힘들면 그만두면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 토막을 잘게 끊어서 크게 붙인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과연 오너다운 말이랄까, 그는 자신을 오너로서 대함에 있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다양한 장르를 실험하느라 다양한 장인들과 함께 해야 하는 그의 작업 특성상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인터뷰 내내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제가 하는 작업은 저 혼자서 될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자꾸 감사해요.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힘을 놓지 않고 살았다 “자수는 나입니다. 그리고 자수는 우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나의 우주란 사실은 나의 일상이며 내 사고들의 집합체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자수를 시작했습니다.” 손 관장이 자신의 작품 세계의 시작을 설명하는 말에서, 예술가의 가족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예술계의 신화랄까, 예술가가 작품에 몰입해 완전히 빠지면 뒤에 남는 예술가의 가족들은 불행해진다는 이야기. 손 관장의 가족들은 그를, 쉬지 않고 만들고 있는 우주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남편은 내 예술을 기꺼이 이해해줘요. 그리고 엄마가 하는 일을 보는 딸 둘도 너무 착하고. 심지어 시댁에서도 제가 하는 일을 인정해주었죠.” 손 관장의 예술은 남편과 자식에 더해 친정과 시댁 모두가 인정하고 지원해줘 만들어질 수 있었다. 흔치 않은 집안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이제 세계가 인정하기 시작했다. “저는 한 번도 일상적으로 작아 보이는 것들을 가볍게 본 일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 어떤 것이라도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내 감성으로 사로잡는 일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어요.” 그가 설명하는 일상적이고 작아 보이는 것들에 대한 감수성에는 ‘유혹이란 상대에 대한 배려로부터 나온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 충실함은 한눈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완성돼 있어야 한다는 그녀의 철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손 관장에게 후계자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실그림이라는 영역은 후계자 양성이 어려운 분야라고 선선히 밝혔다. “요즘은 둘째 딸이 내 작업을 도와주는 중입니다. 뭔가를 만드는 건 아니고 우선 제 일을 지원해주는 거죠. 4대째 예술가의 기질이요? 그건 두고봐야죠(웃음).” 그는 오전 3시부터 새벽을 열며 새벽빛을 고민하다가 상념에 한 땀을 시작하면서 일상적 우주를 어떻게 실그림으로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고 있다. 한순간에 깨닫거나 진보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실그림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질문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작품세계에 반해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이사장직을 흔쾌히 맡은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은 수서에 자수박물관을 짓는 데 힘껏 돕고 있다. 조만간 착공될 계획이란다. 손 관장이 사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 경남아파트 1층의 60평쯤 되는 갤러리에는 그의 작품과 자수 관련 민속품이 빼곡하게 모여 있다. 2009년부터 이곳에는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됐다. 해외에서 더 알아주는 팬클럽이 생길 정도다. 이제 우리나라 자수예술의 미를 한 단계 높이고 세계인이 모두 함께 느끼고 좋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것이라는 그의 약속을 입증한 셈이다.
- 2015-10-07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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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들의 요리PART2] 요리는 놀이다
- 미술 작품이 여기저기에 걸려 있고, 아름다운 재즈 선율과 즐거운 웃음소리가 흐르는 이곳이 ‘남자만을 위한 요리교실’?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요리교실인 행복남 요리 교실의 모습. 쿠킹앤 행복남 요리교실은 복잡한 레시피에 지친 남자들을 위해 쉬운 요리 방법에 특유의 센스를 더한 수업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요리를 통해 삶을 한층 풍부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맛과 멋을 아는 남자들의 요리교실을 살펴보았다. 밤섬과 한강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서울 마포구 상수동에 위치한 쿠킹앤의 행복남 요리교실은 남성들만을 위한 특화된 요리교실로 유명하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나 임직원, 대학교수, 금융기관 은퇴자 등 사회 고위층 남성들이 주 수강생이다. 한희원 행복남 요리교실 대표는 SK, 도래이첨단소재, 신한은행, 롯데 등 기업들과 함께 ‘쿠킹&팀워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요리에 소외된 사람들을 중시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개인보다는 조직을, 그리고 요리 교육에 쉬이 접근할 수 있는 여자와 아동을 빼면 청소년과 남자가 남더군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요리 교육은 힘들 것 같았습니다. 남자를 대상으로 하는 요리 교육을 하자고 결정하게 됐습니다. 요리를 배우려고 찾아봤는데 자격증 위주로 된 곳만 많다는 하소연도 그 결정에 한 몫 했죠.” 여자의 요리는 직관적, 남자의 요리는 매뉴얼적 한희원 대표가 작금의 남자 셰프 붐보다 앞서서 ‘남자를 위한 요리교실’을 만들기로 한 것은 블루오션을 찾기 위한 모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게 어느새 3년 차. “주 연령대는 40대 후반부터 50대 이후가 많습니다. 그 정도 나이대가 되어야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게 가능해져요. 교육은 1조를 2인에서 4인의 구성으로 만들어 진행합니다. 너무 인원이 많아지면 교육의 의미가 없거든요. 그리고 남자분들은 손이 많이 가요(웃음).” 한 대표는 여자들은 요리를 직관적으로 많이 하는 편이라고 평가했다. 여자인 만큼 요리에 관해서는 살아오면서 봐온 것이 많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의외로 여자들 중에서는 레시피대로 안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반면 남자들은 레시피의 토씨 하나도 안 틀리고 그대로 하려고 한단다. 또한 요리에 대해 계속적인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요리는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남자의 비법 “저희는 남자들이 요리를 배워서 집에서 계속 요리를 하게 만드는 게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봅니다. 그래서 남자가 요리로 가족이나 지인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실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일수록 가정에서는 헛돌게 되기 마련이다. 아버지들이 겪어야 하는 주말의 집안 풍경을 떠올려 보자. 아이들은 모두 스마트폰만 보고 있고 아내는 아내대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고된 노동의 나날을 마치고 얻게 된 쉬는 날, 아버지가 가정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집에 있어도 자신은 없는 존재 같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 현실을 극복하고 가족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요리다. 그래서 한 대표는 ‘요리를 한 가지라도 하셔라’라고 말한다. “그래서 일상식 계열보다는 스페셜한 이벤트성 요리를 가르칩니다. 만들어서 내놨을 때 가족들이 ‘우와, 이걸 아빠가 했어’ 하는 그런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요리 말이죠. 남자는 리액션이 있어야 의욕이 생기거든요(웃음).” 한 대표는 일상식으로서의 밑반찬은 만들기가 의외로 어렵다고 설명했다. 매일 먹어도 물리지 않는 맛의 요리가 나와야 할 텐데 그 맛이 안 날 수도 있고, 그러면 좌절하게 되고 요리에 관한 관심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관심이 생기면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요리를 통해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 한 대표는 남자 요리교실이 단순히 요리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문화를 접하게 하기 위한 준비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저희들은 요리하는 사람이지만 요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리를 갖고 무얼 하느냐가 중요하죠.” 한 대표의 기억에 남는 수강생 중 70대 CEO가 있다. 부인이 몸이 안 좋아진 상황이었고, 개인적으로 요리를 배우고 싶었는데 일 때문에 못한 이였다. 그는 70대라는 나이가 되니 부담 없이 갈 데도 없어진 상황에서 소개를 받고 요리교실에 들어오게 됐다. 그의 집에는 주말이면 아들이 며느리와 함께 방문한다. 그런데 며느리가 음식을 안 해서, 결혼 후에 단 한 번도 며느리의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요리교실을 다니게 된 후, 하루는 주말에 그가 요리를 해서 아들 부부에게 내놓았다. 의외의 상황에 며느리가 깜짝 놀랐다. 더군다나 맛있기까지 했다. 며느리는 ‘제가 해야 하는데…’라며 말을 흐렸다. 그러나 이내 분위기는 굉장히 좋아졌고 그 다음 주에는 아들의 결혼 이후 처음으로 며느리가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할 줄 아는 감식안 있어야 남자요리가 콘텐츠의 대세가 된 현재를 한 대표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녀는 요리에 대해 쉽게 접근하자는 관점은 좋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염두에 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요리를 할 때는 제철 식재료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먹거나 만드는 음식에 뭐가 들어가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좋은 것이 뭔지, 나쁜 것이 뭔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요즘 트렌드는 너무 간결하고 빠르게 만든다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그 부분이 취약해지고 있어요. 모르면 속게 되어 있어요. 요새는 먹거리로 장난을 많이 치니까요.” 한 대표는 요리교실의 미래를 소통이라는 키워드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밥상에 소통을 더하다’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기도 한다. 한국인이면 밥은 삼시세끼를 먹게 된다. 한 대표 생각에는 하루에 세 번이라는 그 좋은 소통의 기회를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뺏어먹을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먹느라 소통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밥 좀 처먹지 마세요(웃음).’ 함께 먹는 사람을 생각해야죠. 아무 말도 없이 밥만 먹는 사람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겠어요? 그런 사람을 보면 밥맛 떨어진다고 하죠. 배려하지 않는 식사이기 때문이에요. 그게 비즈니스 자리라면, 거래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죠.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한국 남자 직장인들은 그렇게 먹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못 먹어서 밥을 먹는 게 아니잖아요? 맛집을 찾아가면 뭐해요? 거기 가도 그렇게 먹을 텐데. 뭘 먹었는지 누구와 먹었는지 기억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요리로, 식사로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 한 대표는 식사가 곧 소통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도 실천을 못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좀 더 주어진 것을 즐기고 소통을 즐기라는 게 그녀의 조언이었다. “왜 공기밥은 맛없을까요? 꾹꾹 눌러 담아서 그래요. 그래서 저희는 밥 푸는 법도 가르쳐요. 주걱으로 던지듯이 퍼담는 건 안 되죠. 아래 위를 잘 섞어서 공기가 잘 들어가도록 토실토실하게, 밥알을 살리듯이 담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 옛날에 어머니가 이렇게 담았지. 복 들어가라고’라며 새삼 깨달으시더군요.” 남자들에게 ‘요리’가 단순히 음식을 만들거나 끼니를 때우기 위한 행동을 넘어 가족 간의 사이를 좁혀주는 ‘소통’이며 70 평생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던 주방을 기웃거리게 만드는 ‘관심’이고 서툴지만 정성 가득한 한 상을 아내에게 바치는 ‘희생’이 될 수 있다는 걸 한 대표는 보여주고 있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닌 상대를 위해 만드는 즐거운 놀이로서 요리에 접근해보자. 삶의 변화와 기쁨이 보장된, 그것만큼 즐거운 놀이가 어디 있을까?
- 2015-10-02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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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와 함께1] 손자바보의 행복
- ‘행복한 노후’ 즉 은퇴 이후 시작되는 ‘시니어 라이프’를 행복하게 영위하기 위한 조건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얘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의식 구조 속에서는 노후 생활의 행복은 자식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특히 자신의 분신인 손자들을 자주 만날 수 있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특별히 중요한 조건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 나의 분신, 현우와 승우 제게는 지금부터 4년 여 전, 거의 비슷한 시기에 두 손자가 태어났습니다. 녀석들이야 서로 4촌 간이지만, 저로서는 마치 쌍둥이 손자를 안은 느낌이었습니다. 두 아들 집을 왔다갔다 하며 녀석들을 어르기도 하고, 사진도 찍어주고 하던 어느 날, 마침내 대오각성(大悟覺醒)의 순간이 다가오더군요. “두 손자 현우(炫宇)와 승우(承宇)는 내 피를 받아 세상에 나온 나의 분신들이며, 앞으로의 내 인생에서는 이 녀석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중대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밤 안으로, ‘앞으로 살면서 손자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의 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두 손자들은 제가 앞으로 많은 시간과 정성과 마음을 쏟아서 사랑해 주어야 할 제 인생의 소중한 열매들이니까요. 나중에 아들, 며느리들과도 협의를 거쳐 완성한 리스트 가운데는 ‘두 손자들과 몽골의 초원에 누워 밤하늘의 별 바라보기’ ‘유치원 시절부터 두 손자들에게 한자 가르치기’ ‘사진을 바탕으로 한 손자들의 육아일기 쓰기’와 같은 항목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 뒤로 손자들에게 가급적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손자바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 녀석도 유달리 할아버지를 좋아해 주었으며, 특히 먼저 태어난 현우는 집도 가깝고 해서 두 돌이 되기 전부터 종종 제 곁에서 자고 가기도 했지요. ◇ 블로그에 올리는 두 손자의 육아일기 요즘도 변함없이 수시로 손자들의 사진을 찍고 간단한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는 일을 지속하고 있는데, 앞으로 2년 쯤 후에 만약 여건이 된다면 ‘바보할배의 육아일기’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볼까 생각중입니다. 이 목표가 성사된다면 아마도 손자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손자들이 가슴 속에 아름다운 꿈을 간직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 그리고 손자들을 정서적인 사람으로, 또 배려심을 갖춘 사람으로 키우는 일에 특히 노력을 해 왔습니다. 어린이집을 거쳐 금년에 유치원에 들어간 손자 녀석들이 지난 7월 말에 난생 처음으로 방학이란 걸 했습니다. ◇ 농가주택에서 두 손자를 위한 캠핑 두 손자의 아비, 어미들이 한참 전부터 두 아이의 방학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를 두고 많은 생각들을 하기에, 제가 아이들에게 춘천 농가주택에다 여름캠프를 만들어서 일주일쯤 데리고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얘기했지요. 일단 두 손자 녀석들은 서로 무지하게 좋아하는 사촌 형제와 일주일 동안을 같이 지낸다는 사실에 잔뜩 흥분을 해서 어쩔 줄 모르더군요. 그리고 녀석들을 보내는 입장의, 최근에 둘째 아이를 낳아서 육아에 여념이 없는 둘째 며느리 현우어미도, 직장생활을 하는 큰며느리 승우어미도 큰 걱정을 하나 덜어낸 홀가분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미리미리 손자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다양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 나무 그네와 수영장 텃밭에다 벤치형 나무 그네를 사다가 설치했고, 한쪽으로는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놀 수도, 잘 수도 있도록 평상을 만든 다음 평상 위에 두꺼운 비닐 장판을 깔았습니다. 또 전기선을 끌어다 텐트 안에 예쁜 전구와 함께, 모기나 나방을 잡는 ‘블랙홀’이라는 기구도 설치했습니다. 또 장난감 가게에 가서 전시용으로 사용하던 미니 플라스틱 수영장을 사다가 낮은 평상 위에 설치를 끝냈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중간에 무료하지 않도록 수영은 물론 물총, 비눗방울 기구, 그리고 종이찰흙 등 자질구레한 장난감 소품들도 몇 가지를 사다 놓았지요. 마침내 7월 24일(금), 두 손자를 데리고 춘천으로 와 아내와 같이 상당 기간 연구를 하고 정성을 다해 준비한 여름방학 캠프를 녀석들에게 선보였습니다. 녀석들의 반응이 어땠냐고요? 상상 이상이었지요. 아이들 말로 ‘뿅!’ 가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캠프 생활에 녀석들은 잘도 적응해 주었습니다. 해주는 대로 밥도 척척 잘 먹었습니다. 특히 야채 종류는 입에 대기도 싫어하던 승우 녀석이 사나흘 지나더니 밥상 앞에 앉으면 스스로 손바닥에 상추 한 잎 올려놓고, 그 위에 밥과 삼겹살 한 점, 쌈장을 얹은 다음 입속으로 밀어넣고 우걱우걱 씹는 모습이란… 세상에 그보다 더 할아버지, 할머니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모습이 또 있을까요. 밤이면 두 녀석이 제 양 옆을 차지하고는 제 팔을 베고 누워서, 제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서서히 꿈나라로 빠져 들어가는 그 사랑스러운 모습들… 그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앞으로 또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8월 1일 저녁까지, 8박9일에 걸친 손자들의 여름캠프는 성공적으로 끝이 났습니다. 일주일을 목표로 하기는 했지만, 일주일을 넘어 9일 동안을 할아버지, 할머니와 잘 지내주었습니다. 집에 갈 때도 얼마나 서운해하며 돌아갔는지 모릅니다. 손자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니 이틀 정도는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늘어지더군요. 그러나 참으로 즐겁고 행복한 피로였습니다. 그 모습을 SNS를 통해서 본 어떤 분이 “손자를 위해 희생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그래 봐야 학교 들어가고 나면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는 건 그걸로 끝인데, 왜 그렇게 애를 쓰느냐”고 물으시더군요.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참 이기적인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투자하지 않고, 수고하지 않고 얻어지는 행복이란 게 과연 있을까요?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자주 못 본다고 해서, ‘9일 간의 캠프생활’이란 그 아름다운 기억마저 녀석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리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그분의 글에 이렇게 답글을 남겼습니다. “세상에 투자 없이 얻어지는 건 아무 것도 없을 겁니다. 저는 손자들과 함께하는 행복이란 할아버지, 할머니의 수고에 대한 훈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손자들이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바탕으로 바른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자랄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한 어떤 투자도 다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면 제가 행복하니까요.” >>>글·사진 조용경 전 포스코엔지니어링 부회장
- 2015-09-30 1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