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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 생활의 유일한 탈출구는 시골이다!
- 초록으로 꽉 찬 산기슭이다. 널따란 농장 사방에 온갖 나무들이 길차게 자라 수려하다. 터의 가장자리로는 맑은 도랑물이 흐른다. 살짝 높은 지대다. 그래 세찬 골바람이 농장을 후려칠 일이 잦을 것 같지만 산의 품에 새 둥지처럼 깃들어 끄떡없다. 경관도 안전성도 결함이 없는 입지다. 적막감마저 깊으니 온갖 꿍꿍이와 아귀다툼으로 소란한 속세를 잊고 오붓하게 은거할 만한 피안(彼岸). 그러나 농장주 김기완(75, 평달교육농장)은 은거에 관심 없다. 가만히 눌러앉아 ‘멍 때리기’로 소일하는 건 도대체 그의 적성에 맞지 않다. 차라리 일벌레다. 해 뜨기 전부터 농장 일을 시작하는 식의 습성을 고수해 볼 것 많고 즐길 것 많은 체험교육농장을 꾸려 끌고 왔으니까. 김기완이 서울을 벗어나 이곳 충북 옥천군 산골짝에서 새로운 삶을 구가한 지 어언 20여 년. 귀농 왕고참이다. 그러니 얻은 경험이 많다. 덩달아 견해도 많다. 그가 지닌 견해의 요점을 미리 말하자면, 귀농이든 귀촌이든 귀향이든 시골에 넘실거리는 자연과 깊은 친선 관계를 맺을수록 삶의 품질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즉 그는 자연과 더불어 여생을 한바탕 재미있게 살아보겠다는 용무를 가지고 고향 산골로 이주했던 거다. 그리고 그 용무를 이미 완수했다는 게 그의 자평이다. 김기완은 서울에서 건축자재상을 해 기반을 야무지게 다졌다. 고향에서의 성장기는 곤궁하기 그지없었다지. 또래 연배들이 흔히 그랬듯 생일에나 겨우 미역국에 쌀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 얄궂은 운명의 횡포에 저항하기 위해 그는 15세에 상경, 닥치는 대로 일을 해 밥을 벌었다. 도둑질 말고는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지경으로 서울이라는 정글을 바지런히 누빈 결과 중년 즈음엔 어엿한 자수성가의 본을 이룰 수 있었다. 취미 하나 가질 겨를 없이, 돈 한 푼 허투루 쓴 일 없이 오직 경제적 기반을 잡기 위해 천신만고와 맞붙어 싸운 덕분이었다. 피땀을 쏟아 목표로 삼았던 산정에 올랐던 것. 산꼭대기에 오르면 비로소 산 아래가 훤히 보인다. 징글징글한 가난의 기억이 싫어 아예 잊었거나 잊어버리고 싶었던 고향의 산천과 풍정이 사물사물 가슴으로 스며든다. 그렇게 향수가 소리 소문 없이 그를 방문했다. 몹시 지독한 그리움으로 끙끙 앓았던 것 같다. 이제 가야 할 곳은 고향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마치 연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듯이 그는 흔쾌히 낙향했다. “귀향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거라는 얘기를 하더라. 출세한 사람은 제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현실을 떠나지 못하고, 망한 사람은 창피해서 못 내려간다는 것이다. 나는 귀향할 수밖에 없었다. 진달래꽃을 따 먹고 도랑에서 가재를 잡았던 고향이 너무도 그리웠으니까. 언젠가는 내려가겠어, 기어이 고향에서 살겠어, 그렇게 오랫동안 벼른 끝에 드디어 귀향했던 거다.” 객지보다 오히려 심적 부담이 클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가급적 고향을 피해 귀농하는 게 좋다는 얘기도 있던데. “처신하기 나름이다. 나도 처음엔 텃세 비슷한 걸 겪었다. 그러나 아량으로 포용하면 마찰이 생길 리 없거니와, 아하 이게 바로 고향 좋다는 거구나, 그렇게 안도할 만한 일은 더 많이 벌어진다.” 처음엔 혼자 내려왔다지? 부인은 서울에 머물고. 귀향 문제를 놓고 부부간에 이견이 있었나? “한창 일할 54세에 무슨 귀향? 아내는 그렇게 생각했다. 너무 이른 은퇴라 봤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일에서 스스로 퇴직시키고 귀향을 결심한 터라 혼자서라도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가장으로서 할 역할을 다했는데 망설일 게 뭐란 말인가. 게다가 뭔가에 수틀려 ‘자연인’처럼 살겠다는 것도 아니니 보류할 이유가 없었다.” ‘나 홀로 귀농’으로 부부 사이에 금이 가는 경우도 있더라. “난 성격상 매사 치밀하게 숙고해서 최선책을 찾은 뒤에 움직인다. 아내를 전적으로 존중하는 버릇도 있다. 따라서 아내와 억지 동행을 하는 대신 일단 내가 먼저 내려가서 아내를 맞이할 준비를 해두겠다는 쪽으로 일을 구상했다. 나 먼저 내려가겠으니 당신은 마음 내킬 때 천천히 내려오시오! 아내에게 선택권을 준 것이다.” 그토록 합리적인 처신을 하다니. 그렇더라도 부인이 마침내 내려올 거라 장담하긴 어려웠겠지? 세상의 아내들 대부분이 시골 생활에 호감을 갖지 않으니까. “아내의 마음에 쏙 들게 터전을 가꾸는 게 관건이라 봤다. 이건 새들의 행태에서 얻은 힌트다. 어느 날 TV에 수컷 새가 암컷 새를 유혹하기 위해 근사한 둥지를 짓는 장면이 나오더라. 죽기 살기로 멋진 집을 지어 마침내 마음에 드는 암컷을 짝으로 끌어들이더라고. 아, 바로 저거다! 농장을 제대로 꾸며놓으면 아내가 제 발로 내려올 거라는 생각을 한 건데 이건 적중했다.(웃음)” 화재로 공들여 지은 집을 잃기도 김기완이 귀향을 해 홀로 산골에서 보낸 세월은 자그마치 6년. 고독한 독신남도 아니면서, 끈 떨어진 홀아비도 아니면서 6년을 외롭게 정진했다. 정진? 아내를 한시 빨리 불러들이겠다는 생각 하나에 쏠린 채 오로지 농장 구축에 전념했으니 말 그대로 정진이며, 심지어 득도를 목표로 삼은 고행에 맞먹을 고달픈 행진이었을 게다. 술이나 담배는 애당초 입에 붙이질 않았으니 근로가 주 종목이었다. 터는 넓어도 겁나게 넓어 처음 사들인 1만 평에 나중에 사들인 것까지 도합 3만 5000평이나 된다. 허리 휠 신역이 자심했을 테다. 그러나 즐겁더란다. 매번 성취감을 맛보며 피곤하지 않더란다. 허풍이 아닌 게, 그는 스스로 기꺼이 뛰어든 일엔 뭐든 툴툴거리거나 남몰래 돌아앉아 한숨을 토해내는 나약한 성향의 소유자가 아니다. 요컨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처럼 행복한 게 없다’는 인생의 공리를 그는 몸소 실행하는 기쁨을 맛봤던 것 같다. 그는 결국 체험교육농장의 틀을 완비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아내가 합류했다. 아내를 각별히 사로잡은 건 김기완이 손수 밑그림을 그려 지은 살림집이었다. “아내를 위해 지은 크고 보기 좋은 캐나다식 2층 목조주택이었다. 차를 좋아하는 아내를 배려해 다실까지 만들었다. 암컷 새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의도가 가미된 집이었다.(웃음) 나중에 그 집이 누전 화재로 잿더미가 되고 말았지만.” 다시 지은 집 역시 2층으로 매우 크다. 굳이 커다란 집을 지은 이유가 있겠지? “자식들이나 친지들이 방문할 경우 편히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새집은 다시는 불이 나지 않게끔 나름의 대안을 가지고 지었다. 건물 골조를 불에 약한 목재 대신 콘크리트로 세웠고, 외벽도 불에 강한 벽돌을 마감재로 썼다. 지붕 역시 구리 자재를 도입해 화재를 단속하고자 했다. 팔각형 구조로 방들을 배치한 것도 만약의 화재 대비에 가장 뛰어나다고 판단해서였다. 이 모든 구조는 화재의 충격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싶어 동원한 방책이다.” 교육농장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나? “당시 농업의 새로운 트렌드가 교육농장이었다. 주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갖가지 농사 체험과 놀이 프로그램을 마련해 운영하는 게 교육농장이다. 이건 부부가 함께 즐기며 일할 수 있는 괜찮은 분야라 판단했다. 하지만 운영이 힘들더라. 관내에 폐교되는 학교가 속출하고,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지금까지 불황을 면치 못하고 있다.”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해선 방향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닐까? “그냥 이대로 갈 참이다. 난 귀농을 통해 농업 현실을 다각도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귀농으로, 농사로 돈 벌기 어렵다는 걸 주변 농가들의 실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거다. 가끔 귀농 강의를 할 때면 빼먹지 않고 하는 얘기가 있다. 돈벌이를 목적으로 삼은 귀농은 위험하다는 걸, 돈을 벌려면 도시가 훨씬 낫다는 걸 말해줘야 하는 것이지.” 현실이 그럼에도 당신은 태연하다. “난 서울에서 실로 열심히 일했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는 신념 하나로 살았다. 덕분에 먹고사는 데엔 전혀 지장이 없다. 한편 아이들과 어울리는 농장 생활은 본질적으로 가치가 있고 재미가 있다. 운영은 부실하지만 불만이나 불안은 없다. 농장 잔디밭에서 깔깔거리며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보석처럼 아름답더라. 뜰에 심은 나무들이 자라는 걸 바라보며 자연의 순리와 교감하는 순간 역시 행복하다. 여기에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래서 그냥 이대로 지속하기로 했다.” 어라! 개와 멧돼지가 어울리더라 손에 쥔 것 없이 귀농했다면, 경제적 불확실성이 컸다면 김기완의 양상은 달랐으리라. 다시 말해 그는 충분히 자족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농업으로 더 이상의 부를 확장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냉철한 인식도 현실을 긍정하게 하는 배경이 됐을 테다. 즉 그는 오랫동안 삶의 주된 이슈였던 경제문제에서 벗어나, 이젠 자신과 아내의 행복을 증진할 수 있는 쪽으로 날랜 머리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자연이라는 막대한 매력 덩어리를 내면에 들여놓을 경우 행복을 거머쥐기가 더 쉽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단언하건대 인간관계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도시 생활의 유일한 탈출구는 시골이다. 정신마저 피폐해지는 과도한 인적 관계에서 자연과의 관계로 무게중심을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괴롭고 복잡한 삶에서 해방돼 자연과 소통하며, 생명 가진 것들을 존중하면서 한적하게 지내는 일보다 다행스러운 게 있을까?” 이른바 태평농법으로 농사를 한다지? 이건 자연을 존중하는 방식의 하나인가? “사람과 농작물이 싸우지 않고 서로 태평하게 공존하는 게 옳다는 생각에서 해온 농법이다. 농장에서 문득문득 깨닫는 게 많다. 내가 멧돼지를 퇴치하기 위해 개를 기른다. 그런데 가만 보니 개와 멧돼지가 어울려 놀더라고. 이거 재미있지 않나? 아, 저게 자연의 이치구나. 멧돼지 역시 원래 이 터전의 주민이었구나. 그런 값진 성찰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참다운 진수는 노경(老境)에 구현된다는 얘기가 있다. 황혼길을 걸어가는 당신의 초상이 어떤 것이길 바라나? “문전박대를 당하더라도 술 한잔 마시고 시 한 수 읊으며 홀연히 떠나가는 김삿갓의 풍모를 선망한다. 이건 욕심을 다 내려놔야 가능한 경지지만.” 그의 얘기는 자주 럭비공처럼 튀어 핵심에서 이탈했다. 이 역시 그가 보유한 생태 경관일 텐데, 반짝이는 뼈가 들어 있는 말이 드물지 않아 지루하진 않았다. ◆김기완이 주는 귀농 Tip◆ •농토를 구입할 경우 2년쯤은 벼르며 판단하라. 값이 싸다고 덜컥 샀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정이 가는 농토를 구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내 공간이 된다. •맹지 매물을 소개하면서 ‘차후 잘 협의하면 길을 낼 수 있다’는 부동산 중개인의 말을 믿지 마라. 매입 후 곤욕을 치르기 십상이니까. •귀농 이전에 밑그림을 충실하게 구상하자. 목표 설정을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 있어서다. •가급적 전답, 산, 냇물과 동시에 접한 토지를 사라. 그래야 활용도와 생산성이 높아진다. •국유림과 접한 농토는 이상적이다. 불필요한 개발 행위가 원천적으로 차단돼 한결 안정적인 농사를 할 수 있어서다.
- 2022-10-25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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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이원종 “내 삶의 기둥은 연극”
- 배우 이원종(56)과의 인터뷰는 2시간 넘게 이어졌는데,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본 기분이었다. 그와 나눈 이야기에는 희로애락이 녹아 있었으며, 그의 다양한 모습도 깃들어 있었다. 이원종은 연기에 관해 얘기할 때는 한없이 진지했고, 재밌거나 행복한 이야기를 할 때는 세상 깊은 보조개 미소를 지었다. 특히 그 미소에서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보았다. 사실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이원종은 연극배우로 연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무대에 설 때 가장 행복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연어처럼 편안하다. 지난 8월 연극 ‘더 테이블’로 2017년 이후 5년 만에 무대에 오른 이원종. 한껏 고무된 그는 10월에 ‘가면산장 살인사건’으로 다시 무대에 선다. “저는 연극무대에 계속 서고 싶지만, 돈이 안 되기 때문에 집에서는 달가워하지 않죠. 하지만 10년간 쌓은 연극 경력이 자양분이 되어 지금까지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대에서 연극을 하는 것이 배우로서 누린 혜택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연극은 제게 보약이고, 링거예요. 드라마나 영화로 열심히 달렸으니 연극으로 열심히 잘 쉬기도 해야죠.” 타고난 배우의 우연한 탄생 지금은 천명과도 같은 배우의 길. 역사의 서막은 우연히 시작됐다. 경기대학교 재학 당시 이원종은 예쁜 여학생을 보고 따라서 연극반에 들어갔다. 연극반 활동을 하면서도 배우에 큰 뜻은 없었다고. 그러다 강원도 최전방으로 입대한 후 신의 계시 비슷한 것을 느꼈다. “군대에 있다 보니 1, 2학년 때 연극했던 것들이 생각나는 거예요. 그래서 휴가 나오면 도서관에 가서 연극에 관한 책을 무작위로 골라 읽었어요. 연극의 ‘연’ 자도 몰랐는데 책을 읽다 보니 너무 재밌는 거예요. 복학한 후 본격적으로 연극을 해보자고 마음먹고 공부도 열심히 했죠.” 배우를 업으로 삼기로 결심한 이원종은 무작정 대학로로 향했다. 여러 극단을 전전하던 끝에 마침내 그는 극단 ‘미추’에 들어갈 수 있었다. 미추는 과거 MBC와 마당놀이를 공동 주최하던 유명한 극단이다. “실전 무대 연기에 대해 극단에서 많이 가르쳐줬어요. 연극배우는 많은 탤런트를 가지고 있어야 하거든요. 탈춤이나 한국무용, 발레 같은 현대무용도 해야 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 것이 좋죠. 그런 것들을 배우고 자신을 채우면서 배우들은 ‘연극뽕 맞았다’는 표현을 썼어요. 저는 연극뽕을 아주 제대로 맞았죠. 하하.” 이원종은 미추에 들어가고 이듬해인 1992년 ‘오장군의 발톱’ 주연을 맡았다. 그 작품으로 러시아에 공연도 하러 가고, 연극계에 이름을 알린 그는 “정말 운이 좋았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연극배우의 가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는 아니다. 1990년대는 이원종에게 가난의 시대로 기억된다. 이원종은 1994년, 6세 연상의 아내와 결혼했다. 아내는 연기 선생님으로 두 사람은 가진 것 없이 사랑으로 가정을 이뤘다. 그는 “마당놀이 한 번 하면 50만 원 번다. 공연을 3개월 동안 하는데, 연습은 또 석 달 한다. 그러면 1년이 거의 다 지난다”라며 1년 연봉이 50만 원 수준이었다고 설명했다. 부부가 살기에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기 때문에 그는 젓갈 장사도 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명세 감독이 이원종에게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출연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이원종은 ‘연극은 순수예술, 영화는 대중예술로서 결이 다르다’고 생각해 거절했다. 이명세 감독도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러브콜을 보냈고, 마침내 이원종은 마음을 바꿨다. 결과적으로 끝내 출연을 거절했으면 그는 평생 후회할 뻔했다. “감독님이 저의 거절에도 대본을 주시고, 배역도 저한테 고르라고 하더라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형사 역할과 짧게 등장하지만 강렬한 짱구 역할이 있었는데, 결국 형사 역할을 했어요. 장장 7개월 동안 촬영했죠. 그때는 필름으로 촬영해서 한 신 한 신이 무척 소중했고, 연기 연습을 더 철저히 했어요.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때 거의 다 배웠죠.” 이후 이원종은 2001년 영화 ‘달마야 놀자’에서 현각 스님, ‘신라의 달밤’에서 조폭 마천수로 등장하며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다. 그리고 이듬해 SBS 인기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종로 두목 구마적을 연기해 유명세를 얻었다. 특히 극 중 구마적과 김두한(안재모 역)의 대결 장면은 분당 최고 시청률 64%까지 오를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이원종은 “ 20년이 지났는데 저는 아직도 구마적”이라면서 “구마적은 내게 행운이자 숙제”라고 표현했다. “가수도 평생 히트곡 하나 남기기 어렵다고 하는데, 배우로서 닉네임 하나를 가졌다는 것은 행운이죠. 반면 역할이 제한된다는 단점도 있어요.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어요. 시트콤에도 출연하고, 코믹한 연기도 많이 했죠.” OTT의 유행, 또 다른 전성기로 올해 이원종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을 펼치고 있다. 먼저 그는 넷플릭스 드라마 ‘종이의 집:공동경제구역’(이하 ‘종이의 집’)에 모스크바 역으로 출연했다. ‘종이의 집’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동명의 스페인 드라마가 원작이다. 이원종은 원작의 모스크바와 싱크로율이 높아 제작진이 캐스팅 1순위로 점찍을 정도였다는 후문이다. ‘종이의 집’은 통일을 앞둔 한반도를 배경으로 벌어진 사상 초유의 인질 강도극을 그린다. 원작의 성공으로 기대감이 매우 높았으나,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후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원작을 따라 하려는 것이 느껴져 이질감이 강하게 들었다는 반응이다. 이원종은 이에 대해 안타까운 탄식을 했다. “우리가 조폐국을 털었잖아요. 우리나라 돈은 유럽 전역에서 쓰이는 유로화와 달리 남북한에서만 쓰이는 돈이에요. 그리고 원작에서는 조폐국에서 10억 유로, 한화로 1조 3700억 원 정도를 털었지만, 우리는 4조 원을 털었어요. 그것을 어떻게 운반할지도 재미가 될 수 있죠. 겨울에 후반부인 7~12부가 공개될 예정인데, 한국적인 스타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본격적으로 재밌어질 예정입니다.” 또한 ‘종이의 집’을 통해 젊은 배우들과 호흡한 이원종은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전종서의 연기에 대해 “날것의 매력이 있다”면서 칭찬한 바 있다. 이원종은 전종서를 비롯한 젊은 세대의 연기를 칭찬한 것이라고 짚었다. “전종서는 제가 지금까지 봐온 것과 다른 연기를 하는 거예요.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사물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른 거죠. 참 신선했고 같이 연기하는 내내 즐거웠어요. 저는 현재 50세가 넘었고, 그 친구는 20대잖아요. 지금 20대는 이렇게 행동하는구나 느꼈고, 30대, 40대가 되면 어떤 연기를 할까 궁금해지더라고요.” 또 이원종은 쿠팡플레이 드라마 ‘범죄의 연대기’에 출연한다. 범죄물에 유독 많이 출연하면서 형사와 범죄자를 오간 이원종. 이번에는 피해자 대표 역을 맡아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이원종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 사전조사를 철저히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 예로 그는 OCN ‘손 the guest’에서 박수무당 역을 연기했는데, 무당을 직접 여러 명 만나보고 탐구했다. 덕분에 실감 나는 연기가 가능했다. “‘범죄의 연대기’에서 맡은 역할은 대학교 강사인데 사기를 당한 사람이에요. 아는 변호사한테 부탁해서 기록물도 확인해봤는데, 실제로 교수들이 사기를 많이 당하더라고요. 그리고 작가님이 어떤 과 교수인지는 제가 결정할 수 있도록 열어두셨어요. 제가 관심이 많은 철학과 교수로 설정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이원종은 ‘가면산장 살인사건’으로 무대에 오른다. 10월 4일부터 11월 27일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삼성홀에서 공연이 열린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원작으로, 외딴 산장에 모인 남녀 8명과 한밤중에 침입한 은행 강도범의 인질극을 그린다. 이원종은 극 중 도모미의 아버지 노부히코 역을 연기한다. “20대부터 50대 후반까지, 배우 13명이 무대에 올라 연기를 펼쳐요. 요즘 이런 연극을 마주하기가 쉽지 않죠. 무엇보다 살인사건이라고 하면 어두운 이야기일 것 같잖아요. 그런데 범인을 추리해가는 과정이 엉뚱하고 독특해요. 거기서 나오는 재미를 자신합니다.” 실제 이원종은 어떤 아빠일지 궁금했다. 슬하에 두 딸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동안 언론에 노출된 적이 없다. 이원종은 “아버지가 굉장히 가부장적인 분이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다. 그래도 최대한 자상하고 친근한 아빠가 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애들이 제가 자상하다고 느낄지 아닐지는 또 모르는 일이죠. 큰딸은 현재 직장을 다니고 있고, 둘째 딸은 외국 대학교에 다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집에서 줌으로 수업을 듣고 있어요. 저는 큰딸한테 한 달에 월세 개념으로 30만 원씩 받고 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립심을 길러주고 싶어서죠.” ‘기회는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원종은 어떤 작품이든 어떤 역할이든 노력을 쏟는다. 그래서 매 작품 다른 모습이 나오고, 새로운 연기가 보인다. 외국 작품처럼 우리나라 작품의 주인공도 나이가 많아지고 다양해지고 있다. 이원종이 주인공 그 자체인 작품도 조만간 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어떤 배역을 맡아 연기하든지 ‘이원종이라는 배우, 참 재미있더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 저는 물리적인 나이에 맞는 배역을 맡아 잘 소화해내는 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1965년생인데 내년에는 제게 맞는 작품이 뭐가 될지 아직 모르죠. 그런데 50세든 60세든 마음은 똑같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나이는 먹었지만 저도 청춘이에요. 늘 사랑하는 것을 느끼죠. 그러니까 60대도 60대에 맞는 사랑과 이별이 있는데, 그게 제게 연기로 주어진다면 잘 소화해내고 싶다는 거예요.”
- 2022-10-0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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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장년 건강관리, 실버테크로 기술적 도약 이뤄
- 고령자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기술을 일컬어 실버테크(Silver Tech)라 한다. 과거엔 기술이 좋아도 사용자의 접근성이 떨어져 무용지물이 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디지털 친화력이 강한 시니어가 늘면서 실버테크도 더욱 각광받는 추세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이 화두인 만큼, 치매를 비롯한 질병의 진단 및 치료·예방에 쓰이는 다양한 기술을 살펴봤다. Step 01. 진단테크 ◇ 치매 진단 간단하게, 알츠가드 디지털 치료제 전문기업 ‘하이’의 ‘알츠가드’(Alzguard)는 스마트 기기를 통해 초기 치매 환자를 선별하는 경도인지장애 자가진단 프로그램이다. 디지털 도구로 소비자의 생리학적 데이터를 측정하는 ‘디지털 바이오마커’ 기술이 핵심이다. 기존의 바이오마커가 특정 혈액이나 소변, DNA를 측정하듯, 디지털 바이오마커는 IT 기기로 대상자의 디지털 정보를 수집해 질환을 선별한다. 먼저 사용자가 스마트폰 앱을 받은 뒤 7가지 영역의 인지 능력 검사를 진행하면, 목소리(보이스마커), 동공 움직임(아이트래커), 심박수 변화(HRV) 등을 분석해 진단을 내린다. 알츠가드의 경우 초기 치매 환자를 88% 정확도로 선별하는데, 사례가 축적될수록 인공지능을 통한 예측도는 더욱 높아진다. 현재 순도 높은 데이터를 위해 치매안심센터나 기업을 중심으로 보급 중이며, 차후 일반 소비자를 위한 공유 체계도 마련할 계획이다. ◇ 치매 분석과 건강관리, 알츠윈 알츠하이머를 이겨내겠다는 뜻을 담은 ‘알츠윈’(Alzheimer+Win)은 디지털 헬스 케어 기업 세븐포인트원의 인공지능 비대면 치매 진단 솔루션이다. 김기웅 분당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연구팀이 10여 년간 3차례, 총 2000여 명에 대한 임상 연구를 진행해 그 실효성을 인정받았다. 2021년 7월 게재된 논문에 따르면 알츠윈 기반 기술의 정확도는 일반 의료진에 의한 ‘MMSE’(간이 정신 상태 검사)와 유사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알츠윈은 인공지능 기술 기반으로 치매 초기에 저하되는 언어유창성 능력 등을 평가해 치매 위험 진단 시 지역치매안심센터나 의료기관과 연결해 선별검사와 치료를 신속하게 돕는다. 아울러 네이버와 합작해 ‘알츠윈 인지케어콜’을 개발, 인공지능을 활용한 인지 건강관리까지 폭넓게 제공하고 있다. Step 02. 치료테크 ◇ 톡으로 인지 기능 개선, 새미톡 경도인지장애로 손상된 인지 기능의 재활과 개선을 위한 디지털 치료제다. 중장년에게 친숙한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인지 훈련과 더불어 인지 기능 저하 여부도 진단받을 수 있다. 별도의 앱 설치 없이 카카오톡 채널에서 ‘새미톡’을 검색 후 ‘채널 추가’ 버튼만 누르면 된다. 특별한 장치 없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스마트폰을 활용함으로써 디지털 표적치료제의 장점을 극대화한 모델이다. 해당 서비스는 유료로 30일 9900원, 1년 5만 9000원에 이용 가능하다. 기업용 B2B 상품도 있다. ◇ 인지 훈련 로봇, 보미 현재 치매를 근본적으로 낫게 하는 약물은 없는 상태로, 비약물적 치료에 대한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이대목동병원 로봇인지치료센터에서는 치매 고위험 환자를 대상으로 로봇을 통한 인지중재치료를 제공한다. 센터에서 활용하는 일명 손자로봇 ‘보미’는 환자의 얼굴, 목소리, 동작을 인식하고, 로봇을 손자처럼 기르는 개념을 접목했다. 일상에서 필요한 인지 기능 향상을 돕는다. 실제 경도인지장애 단계 환자들이 보미를 활용한 5개 프로그램을 4주간 하루에 60분씩 이용했을 때 대조군보다 작업 기억력이 더욱 향상된 것이 입증됐다. 보미는 환자에게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해 밥을 주게끔 하고(미래 기억 훈련), 장 보러 가서 사야 할 물건을 기억하고 계산하며(기억력 및 계산 능력 훈련), 보미가 원하는 옷을 맞게 입혀주는(시공간 능력 훈련) 등의 행위를 통해 인지력 향상을 돕는다. Step 03. 예방테크 ◇ 손쉬운 인지 훈련, 슈퍼브레인 디지털 치료제 개발 기업 ‘로완’의 ‘슈퍼브레인’은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후원으로 각계 전문가들에 의해 개발된 인지 훈련 프로그램이다. 인지 중재 치료에 기반 하여 경도인지장애환자, 경도·중증도 치매 환자를 대상으로 병원에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행위평가 신청 후 비급여 처방 및 실손보험 청구가 가능하다. 슈퍼브레인은 미국, 유럽 등에서 널리 사용되는 치매 예방 프로그램(Finger 프로그램)을 한국 어르신 눈높이에 맞게 기획했다. 재미있고 친숙한 생활 속 콘텐츠를 한눈에 확인하고 직관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점이 특징이다. 아울러 AI 치매 중재 시스템을 통해 인지능력 변화 빅데이터를 분석하고 실시간 맞춤형 가이드를 제공한다. 최성혜 인하대학교 교수팀이 임상에서 인지 학습과 혈관 위험인자 관리, 운동, 영양, 동기 등 5개 영역에서 다중 중재 효과를 입증했다. 현재 재가형(인터넷 기반)과 기관형으로 구분해 50여 개 병·의원, 치매안심센터, 복지관 등을 통해 서비스 중이다. 아울러 지난해 LG유플러스와 업무협약을 체결하며 치매 예방 관리를 위한 각종 디지털 콘텐츠 및 솔루션 사업도 확장할 계획이다. ◇ VR 기술로 우울증 개선, 센텐츠 가상현실과 의료 기술을 융합한 스마트 케어 솔루션 ‘센텐츠’는 9단계로 조정된 인지 자극 콘텐츠가 35주 과정으로 구성됐다. 기존 가상현실 프로그램과의 차별점은 회상요법을 접목해 개발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VR 회상요법’이란 가상현실 기술을 활용하여 노인의 기억 속 과거 환경을 구축해 젊은 시절을 회상하고 경험하게 하는 방법인데, 이를 통해 우울증 및 치매 예방 효과를 볼 수 있다. 2018년 MIT 연구팀은 VR 회상요법이 노인의 정신 활동을 자극해 고립감을 해소하고, 인지 능력 등을 향상시킨다고 밝혔다. 센텐츠 사용자들은 머리에 VR 기기를 착용하고 고향, 계절, 풍경 등 50여 가지 스토리를 가상 경험함으로써 과거를 회상하고 기억력을 증진할 수 있다. 현재 가정방문 요양 서비스 패키지에 포함하거나, 데이케이센터 등에 그룹 형태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실버테크 아이템 1) 스마트 기저귀 어르신이 사용하는 기저귀에 센서를 부착해 기저귀의 오염 정도를 파악하도록 설계됐다. 센서등과 스마트폰 알림을 통해 기저귀를 언제 갈아야 하는지 알려줘 욕창이나 요로감염, 발진 등 2차 질병을 예방한다. 2) 꿈의 자전거 자전거 사이클을 이용해 가상현실을 주행하며 기억력 증진 및 근력 향상과 치매 지연에 도움을 주는 기기다. 실내에서 사용해 안전하고, 주행 방향이나 속도 등의 조정이 가능하며, 훈련 데이터를 관리해 환자의 재활 능력을 수치화할 수 있다. 3) 톡톡스틱 음성 안내 기능이 탑재된 스마트 지팡이다. 넘어지거나 낙상할 경우 지팡이가 이를 감지해 내장된 스피커와 스마트폰을 통해 SOS 전송 및 음성 도움 기능을 제공한다. 또 사전 등록한 보호자에게 위치 전송이 가능해 실종 사고 등에도 대처할 수 있다. 4) 스마트 벨트 노인의 보행 속도를 확인할 수 있는 웨어러블 기기다. 김광일 분당서울대 노인병내과 교수가 노인의 보행 속도 저하에 따른 근감소증의 연관성을 분석하기 위한 연구에 활용했다. 보행 속도 외 사용자의 허리둘레, 과식 및 활동 습관 등도 확인 가능하다.
- 2022-09-01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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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을 세상의 중심으로 삼아 즐거운 귀촌 생활
- 전북 정읍시 산자락으로 귀농한 송정섭(67, ‘꽃담원’ 대표)은 자칭 ‘꽃미남’이다. 아내 역시 ‘꽃미녀’로 쌍벽을 이룬단다. 외모를 내세우는 ‘자뻑’이 아니다. ‘꽃에 미친 남자’와 ‘꽃에 미친 여자’가 함께 사는 걸 빗댄 얘기니까. 못 말릴 강태공은 낚싯대 하나로 만족한다. 다인은 끽다로 세상을 건넌다. 좋아하는 일에 푹 빠져 사는 것보다 나은 게 있던가. 송정섭은 오나가나, 앉으나 서나, 매양 꽃과 동행한다. 귀농을 한 것도 꽃에 제대로 미치기 위해서였다. 그게 인생의 쓸쓸한 황혼을 북돋울 가장 유력한 방안이라 보았다. 송정섭의 거처는 온통 녹음이다. 600평에 이르는 너른 터에 자라는 온갖 식물이 초록을 내뿜는다. 하늘을 반쯤 가린 저 앞의 푸른 준령은 내장산이다. 범람하는 산기(山氣)로 한여름의 무더위는 물론 속기마저 씻어낸다. 산 위로 흐르는 구름은 또 어떻고? 꽁무니에 바람을 매달고 유유히 흘러 번잡한 세상사를 잊게 한다. 어디를 보더라도 진부한 게 하나 없는 산골 풍경이다. 개중에 흐벅진 건 송정섭이 귀농 8년간 꾸민 정원 경관이다. 이 정원에선 나무들의 제전, 꽃들의 향연이 한창이다. 원래 감나무 세 그루뿐이었다. 외갓집 묵정밭이었다고 한다. 쓸모를 잃은 땅에 정원을 꾸려 쓸모는 물론 미감까지 고스란히 살려냈다. 애쓴 흔적, 공들인 자취가 완연하다. 식물에 관한 단순한 애호를 넘어선 빙의? 화초류만 하더라도 자그마치 350여 종이라지. 게다가 본때 있는 솜씨로 적재적소에 배치해 조화롭다. 이곳에서 철 따라 도도한 자연의 순환과 드라마가 펼쳐질 걸 짐작할 만하다. 그렇다면 송정섭은 일쑤 무아지경을 느끼나? 그러고 싶어 꽃에 미쳤나? “농촌진흥청 화훼 분야 연구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직장 생활 30여 년간 꽃을 전공으로 삼았던 것인데, 은퇴 이후 노년의 30여 년 역시 고향으로 내려가 꽃과 더불어 살고 싶었다. 꽃을 비롯한 식물이 지닌 매력과 선한 영향력을 잘 알기 때문이었지. 후회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귀농하지 못했다는 점일 뿐이다.” 귀농이 만족스럽다는 뜻인가? “조직 안에서 의무감으로 움직여야 하는 직장 생활에 비할 수 없는 만족을 느끼며 산다. 난 정년 2년 남긴 시점에 명퇴했다. 더 일찍 물러나 정원 가꾸는 시골 생활을 시작했다면 좋았을 텐데, 한결 나은 생활을 괜히 유보했던 셈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목적과 지향이 분명할 경우 귀농은 빠를수록 좋다.” 십중팔구 세상의 아내들은 남편의 귀농 제안에 일단 반기를 든다. 고생살이가 빤히 보여서. 이 대목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우리 부부는 주로 수원시에서 살았다. 10여 년은 단독주택에 살며 정원 가꾸는 재미를 충분히 맛봤다. 아내 역시 꽃에 관한 경험과 조예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꽃을 중심에 둔 귀농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웠다.” 정착하기까지 초기의 갖은 애환을 면제받기 어려운 게 귀농이라지? “퇴직하자마자 혼자 곧바로 이곳에 내려와 텐트를 치고 살았다. 오랫동안 홀로 종일 일하고 밤이면 막걸리 한잔하고 잠을 잤지. 기반을 닦는 과정이었다. 몸이야 고달팠지만 좋아하는 일, 원하는 일이라 힘든 줄 모르고 지냈다. 물론 모든 게 순조롭지만은 않았지만.” 가령 어떤 점이 어려웠나? “이 터가 원래 맹지였다. 길을 내는 게 무엇보다 화급한 과제였다. 그러나 쉽지 않더라. 경계면에 있는 남의 땅을 사들이는 수밖에 없었는데 지주가 팔지 않았다. 시세의 두 배를 주겠다고 해도 통하지 않더군. 실로 어렵사리 길을 만들어내는 데 긴 시간이 소요됐다. 그 때문에 귀농 2년여가 지나서야 살림집을 지을 수 있었다.” 향후 목표는 치유정원 집을 짓고 아내가 합류할 즈음 정원 역시 어엿한 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뿌리고 심고 가꾼 것들이 생육을 거듭했던 것. 비와 바람과 햇볕만 식물의 성장을 도왔으랴. 송정섭은 원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식물의 성장을 뒷바라지할 수 있는 경륜과 기술로 정원 만들기에 가속을 붙였다. 말하자면 그는 식물 재배에 도가 텄다. “사실 ‘화류계’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도움을 준 이들도 많았다. 시골에 내려와 정원을 만든다는 소식을 들은 지인들이 보내온 나무들만 해도 자동차 14대 분량이었다. 덕분에 정원 조성 작업이 순탄했다.” 시골 정원을 열심히 가꾸다 몸을 망가뜨리는 경우도 있더라. 강철처럼 일어서는 풀들과 실랑이를 하다가 나동그라질 수 있으니 가급적 작은 정원을 즐기는 게 현명하다는 충고도 흔하다. “프로에겐 얘기가 다르다. 하루에 두 시간 정도 몸을 쓰면 꽃 관리, 잡초 처리 등은 충분하다. 전지는 1년에 한 차례로 마무리한다. 나는 단순히 꽃을 가꾸고 즐기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나만의 특별한 생태정원을 구축하는 한편, 꽃을 보급하고 정원 만들기 지원 활동을 하며 시민정원사를 양성하고 있다. 체험 프로그램과 꽃 아카데미를 운영해 식물의 인문학을 강의하기도 한다. 이 모든 부문이 다행스럽게 잘 돌아간다. 거의 날마다 체험자들과 수강생들이 찾아드니까.” 결국 공직 은퇴 이후 꽃과 정원으로 새 직업을 발굴한 셈인가? “이곳에 귀농해 열심히 정원을 가꾸는 나를 주민들은 의아해했다. ‘저 사람은 무엇 때문에 저토록 꽃을 잔뜩 가꾸지?’ 그런 궁금증으로. 꽃 가꾸기가 소득과 연결될 수 있다는 걸 그들은 미처 몰랐던 것이지.” 그는 민박업도 병행한다. 귀농 초기에 사용했던 농막을 다듬어 에어비앤비(Airbnb, 국제적인 홈스테이 네트워크)에 가맹, 투숙객을 받는다. 이 역시 순항한단다. 자신이 보유한 물적 자산을 최대치로 활용하고 있으니 그의 두뇌가 기민하게 움직이는 걸 알 만하다. “민박 수요는 넘친다. 그러나 적당한 선에서 자제한다.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다. 주된 목적인 정원과의 동행에 전념해야 하니까. 향후 치유정원으로 확장할 작정이다.” 치유정원? 그게 뭐지? “의사들의 데이터를 보면 꽃이 치매까지 개선한다고 한다. 이렇게 원예로 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데 착안한 게 치유정원이다. 독일이나 네덜란드에선 오래전부터 치유정원이 활성화돼 있다. 환자를 무조건 병원으로 보내는 게 아니라 치유정원으로도 보내는 것이지. 국내에도 치유정원을 표방하는 원예농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자신의 전공과 경륜을 고스란히 살려 인생 2막을 열어젖힌 뚝심이 인상적이다. “귀농에 대한 로망은 아파트에 살던 시절에 이미 움텄다. 옆집에서 누가 죽어 나가도 모르고, 좋아하는 꽃을 기껏해야 베란다에서 기를 수밖에 없는 답답함에 질렸던 것이다. 그러면서 일찌감치 생태정원을 구상했다. 개인이 가진 기능을 지속적으로 활용하는 게 좋은 삶이라는 인식은 뿌리 깊은 것이었고.” 식물의 능력은 사람보다 뛰어나다 그는 갑갑한 도시를 벗어나 우선은 ‘나’를 즐겁게 하고 싶었던 거다. 즐겁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겠는가? 오욕칠정으로 탁류처럼 흐르는 인생일망정 내 길을 내가 가는 한 뒤에 남을 미련한 미련이 적어진다. 그는 귀농으로 삶이 부과하는 갈등과 갈증을 해소했다. 귀농하며 가슴에 새긴 건 세 가지였단다. 변화한 상황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자연을 소중하게 대하기. 죽을 때까지 공부하기. 개중 결연한 건 공부 욕심이 아닐까. 그런데 그가 가르침을 청하는 선생은 꽃이며 식물이다. 풀꽃 하나에서 생명의 신비한 노래를 듣고, 바람에 떠는 나뭇잎 하나에서 우주의 율동을 보는 영혼이 드물지 않은데, 송정섭의 사유 역시 비슷한 계보에 속하는 것 같다. “호기심을 가지고 식물들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면 얻을 것이 많다. 이를테면 꽃들은 무엇으로 대화를 할까, 그걸 공부하다 보면 향기에 답이 있음을 알게 된다. 심지어 식물은 사람의 말뜻까지 알아듣기도 한다. 사실 식물의 능력은 인간의 재능을 뛰어넘는다.” 좁쌀보다 작은 상추씨가 흙을 들어 올려 싹을 틔우는 기적을 바라보면 천하장사는 저리 가라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얘기는 재고되어야 할지도. “강의를 할 때 자주 하는 얘기가 있다. ‘꽃처럼 살자’는 거다. 꽃에서 배우자는 뜻이다. 그럼 무엇을 배우나? 한 가지 예를 볼까? 지구상의 꽃은 25만여 종에 이른다. 이 모든 꽃이 다 다르다. 저만의 개성으로 존재한다. 이는 개성을 살리기보다 욕망을 따라 달려가는 인간의 양상과는 사뭇 다른 게 아닌가.” 꽃인들 속 터질 일이 없을까마는 사람보단 덜 아등바등한 것 같다. “우리가 자주 잊고 지내는 게 있다. 식물이 내뿜는 산소를 마시며 숨 쉰다는 걸. 인간의 생존에 이모저모 절대적인 기여를 하는 식물의 헌신을 기억하기만 해도 삶이 한결 나아질 거라는 얘기다.” 식물 예찬이 길게 이어진다. 새삼스러울 게 없는 얘기지만 새삼스럽게 들리는 건 외면하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귀농으로 일군 꽃 농장은 송정섭에게 세상의 중심이다. 세상의 한 귀퉁이를 꽃으로 채워 향기를 흩뿌리는 삶이란 얼마나 떳떳한가. 게다가 안정적인 소득 기반까지 다졌다. 그는 바야흐로 썩 괜찮은 인생의 열매를 거두는 시절로 접어든 셈이다. 귀농을 통해 마침내 얻고 싶은 걸 얻었고, 하고 싶던 걸 하게 됐다. 그렇다면 그가 으뜸으로 치는 귀농 수칙은 어떤 것일까. “가장 중요한 건 주민들과 화학적 결합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마을의 문화와 풍토를 존중해야 하는데, ‘3척’만큼은 피해야 한다. 시골에서 아는 척, 잘난 척, 가진 척을 하다가는 거의 죽음과도 같은 고난에 빠질 수 있다.” 허튼 우월감은 버려라? “자세를 낮추는 게 좋다. 시골 사람들이 무슨 법 같은 것엔 무심할망정, 자신들이 경험한 사실 외엔 함부로 말하지 않는 신중함이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직접 겪은 불화 경험은 없었나? “불화라기보다 귀농 초기에 다소 서툰 처신을 해 미운털이 박힐 뻔한 경험이 있다. 마을회의 같은 곳에서 박사랍시고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이다. 그러자 분위기가 이상해지더라. 아하, 내가 팽당했구나! 뒤늦게 깨닫고 태도를 바꾸었다.” 딱히 죄를 지은 것도 없이 코너에 몰릴 수 있는 게 귀농 생활이라는 얘기다. 나를 내세우기보다 타자의 얘기에 먼저 귀 기울이자는 조언이고. 세상의 도처가 교실인 셈이다. 송정섭이 주는 귀농 Tip 꽃 농원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많다. 그러나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뜻을 이루기 힘들다. 우선 식물에 관한 공부를 미리 충실하게 해둬야 한다. 재배 기술 숙지는 기본이고, 식물심리학과 식물의 인문학까지 섭렵하는 게 필요하다. 농원의 공간 디자인도 핵심 요소다. 개성과 미감을 살려 구조를 설정해야 한다. 효율적인 동선 조성 역시 중요하다. 입지로는 들판보다 숲속이나 산자락이 이상적이다. 주변에 축사나 고압선 철탑이 있는 곳은 피하라.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근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점이다. 유난히 텃세가 심한 곳은 피해야 하는데, 단기간이나마 미리 살아보고 풍토를 판단하는 게 좋다.
- 2022-08-19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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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에 부는 청춘 감성, 귀촌의 새로운 바람
- 요즘 시골에서는 아기 울음소리를 듣기 어렵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이촌향도 현상이 심화된 까닭이다. 그러나 고요했던 마을이 최근 청년들의 웃음소리로 다시 들썩이기 시작했다. 일자리 부족과 주택난을 피해 ‘탈도시’한 젊은이가 하나둘 늘어서다. 이들은 지역의 값진 자산과 톡톡 튀는 감성을 한데 버무려 새로운 귀촌 문화를 이끌고 있다.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격언이 만들어진 건 그만큼 도시가 많은 장점을 갖고 있어서일 테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출세 기회가 주어졌고, 경제·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거듭된 경제 위기와 물가 폭등으로 도시는 더 이상 탄탄한 직장과 아늑한 내 집을 보장해줄 수 없게 됐다. 농어촌에 대한 이미지도 달라졌다. 고즈넉한 마을에서 묵묵히 밥을 지어 먹는 TV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휑한 부지에는 탁 트인 논이 펼쳐진 ‘논 뷰’(View) 카페가 들어선다. 가장 시골스러운 것이 오히려 가장 세련된 것으로 변모했다. 팍팍한 도시 생활을 뒤로한 채 시골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사람도 늘었다. 그러나 실행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새로운 아이디어 부족이다. 무작정 귀촌에 도전했다간 기대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젊은 귀촌인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중에서도 지역의 문화적 특성이나 자원에 아이디어를 덧대 새로운 경제를 창출하고,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청년 ‘로컬크리에이터’들을 소개한다. 지역과 귀촌인은 ‘상생’해야 충북 괴산에 둥지를 튼 ‘뭐하농’은 농부도 흙투성이의 고된 삶을 벗어나 얼마든지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청년들이다. 같은 뜻을 가진 젊은이들이 주식회사를 만들고, 자금을 모아 인프라를 구축하면서 수익 구조도 짠다. 무언가를 하는 농부들의 공간이라는 뜻의 ‘뭐하농 하우스’는 반딧불이를 방사하는 행사를 무료로 진행하거나, 도시 청년들에게 창업·창농을 가르치는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충북 청주시 문의면 꿀카페 ‘해밀당’의 최고야 대표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남편과 시댁으로 귀농했다. 해밀당은 부부가 직접 채집한 달콤한 벌꿀로 메뉴를 구성한다. 수해와 병충해로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이 농촌과 뗄 수 없는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그 뒤로는 상품을 생산할 때 최소한의 포장재를 사용하고, 작물을 기를 때 친환경 재료를 사용하려 한다. 더불어 마을 환경 캠페인도 진행한다. 경북 문경시 산양면의 ‘화수헌’은 청년들로 이루어진 기업 ‘리플레이스’가 운영한다. 화수헌은 문경의 700평 규모 고택을 트렌드에 맞게 개조한 한옥 카페로, 냇물이 워낙 맑고 깨끗해 비단결 같다는 금천과 현리마을의 한옥들이 어우러져 안온한 분위기를 풍긴다. 포털 사이트에서 ‘문경 카페’를 검색하면 상단에 뜰 정도로 명소가 됐다. 오미자차, 매실차, 미숫가루 등 대부분의 메뉴는 문경에서 나고 자란 식자재로 만들어 지역 특색을 살렸다. 이외에도 사진 스튜디오 ‘볕드는 산’, 폐양조장을 보수한 복합문화공간 ‘산양정행소’를 차례로 열며 문경의 작은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별별 귀농·귀촌 유튜브 채널 ●귀농다큐 KTV 국민방송에서 운영하는 다큐멘터리 채널이다. 귀농·귀어·귀촌을 선택한 사람들의 삶을 따뜻하게 담았다. 인기 동영상으로는 ‘150억 원 들여 만든 국내 1호 민간 정원!’, ‘우리는 4600만 원으로 여유를 샀습니다’ 등이 있다. ●리틀타네의 슬기로운 생활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싶어 시골 전원생활을 시작한 30대 리틀타네와 영국 특파원 20대 망고로아의 유학 생활이 번갈아 올라오는 자매 채널이다. 두 사람은 비슷한 듯 다른 생활을 보여주며 묘한 재미를 느끼게 한다. ●귀농빚쟁이 30대에 귀농한 쨍이 씨의 채널이다. 빵빵한 청년 농부 지원책에 귀가 솔깃해 로망을 갖고 혼자 시골로 왔다. 그러나 추가 시설비, 농약비 등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닥쳤다. 쨍이 씨는 재치 있는 입담으로 농촌의 현실을 풀어낸다.
- 2022-08-16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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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근함의 깊이 깃든 인문학 여행지 '청주'
- 소로리 볍씨와 생명문화도시 생명문화도시 청주라고 말한다. 지역마다 일컫는 상징적 수식어가 있듯 이곳은 명칭마다 생명이 함께하는 걸 본다. 청주시 청정자연의 푸르름을 뜻하는 ‘생이’와 미래창조의 빛을 머금고 있는 ‘명이’가 결합된 캐릭터로 생명과 창조의 도시 청주를 상징한다. 이렇듯 청주에서 생명을 주제로 한 콘텐츠를 쉽게 볼 수 있는 건 당연하다. 공원도 생명누리공원이고, 정자는 생명정이다. 생명과학단지는 바이오 산업 전문으로 첨단의료 복합단지다. 가을이면 청원생명축제가 열린다. 생명과 연결된 것 중에 당연히 먹는 것이 빠질 수 없다. 청원 생명쌀은 전국 최초로 15년 연속 한국표준협회로부터 인정받은 고품질 쌀이다. 이제 대한항공 기내식 밥으로도 공급되어 전 세계인이 맛볼 수 있게 되었다는 최근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밥은 한국인의 일상과 아주 밀접하다. 인사나 만남의 경우에도 꼭 밥이 등장한다. 밥은 먹었니, 밥 한번 먹자… 이런 밥. 밥 이전 벼농사의 기원이 중국이 아닌 한국일 거라는 주장 관련 근거가 청주 소로리에서 발견됐다. 2003년 청주 소로리에서 발견된 볍씨가 국제적 검증 끝에 거의 1만 50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고, 고고학자 콜린 렌프류도 쌀의 기원을 한국으로 수정했다고 전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출토된 충북 옥산의 소로리는 명실공히 세계 최고 농경문화 중심지로 떠올랐다. 국토 중심지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충북 청주는 생명문화의 고장으로 입지를 굳혔다. 부근의 오창읍엔 쌀의 일생과 역사를 알려주는 단아한 한옥의 벼전시체험관과 미래지농촌테마공원이 있다. 이곳에 소로리의 유적인 볍씨가 소개되어 눈여겨볼 만하다. 옛날 옛적 벼농사를 지었던 우리 땅에서 출토된 소로리 볍씨 59알로 한반도 고대국가의 형성을 이해할 수 있다니, 우리가 매일 먹는 밥, 알고 먹는다면 밥맛이 다를 터. 올 초에 세상을 떠난 이 시대의 문화 지성이라 일컫는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청주를 사랑하고 응원했다고 한다. 생전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소로리 볍씨가 출토된 것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와 함께 청주가 세계적인 생명문화도시라는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 말했다. 더불어 친환경 두꺼비 생태공원과 가로수길, 초정 약수 등의 문화 원형을 분석하며 가치 발굴에 관심을 보였다. 또한 청주의 한 무덤에서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젓가락이 출토되었는데, 쌀과 젓가락은 생명문화의 원형이라며 지구촌 유일의 생명문화도시 청주에서 젓가락 페스티벌을 열도록 제안도 했다. 청주를 향한 깊은 애정으로 그는 청주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간 김에 오창호수공원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예전에는 청주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한참 가야 했던 오창이었다. 이젠 길이 달라졌고 교통수단도 좋아져서 드라이브 삼아 자동차로 20분 정도 휘익 달리면 된다. 핫한 카페나 맛집은 물론, 자연친화적 생태놀이터와 등산로가 건강한 시간을 제공한다. 자연 속에서 마음껏 하루를 누릴 만한 문화휴식공원이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 호수가 있다. 내가 갔을 때는 저수지 준설공사로 물을 모두 뺀 상태였지만, 물을 가득 채워 호수에서 뿜어내는 분수가 솟아오르면 가슴 후련한 풍경이 펼쳐진다. 그 옛날 문전옥답에 물 대주던 방죽이 지금은 멋진 호수가 되어 현대인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휴식처로 변모했다. 세종대왕이 가끔 쉬던 곳에 나도 간다, 초정행궁 또 한 군데 들러볼 곳으로 초정행궁이 있다. 청주나 오창에서 20분 정도 거리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야기 끝에 늘 초정약수의 눈병 치료가 따라 나오곤 한다. 바로 그곳 초정이다. 과거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행차하여 머물며 한글 창제를 마무리했던 역사적 사실을 기초해서 조성되었다. 옛 임금의 행궁이나 이전 대통령들의 전용 휴양지(청남대)로 청주를 택했던 걸 보면 사색과 휴식의 환경에 적당한 도시였구나 싶다. 초정 행궁마을은 도심에서 뚝 떨어져 아늑하다. 조선시대 옛 거리를 걷듯 한옥마을을 느릿하게 거닐다가 투호를 던지거나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에 참여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독서당에서 책을 읽다 전통찻집에서 보약처럼 진한 대추차 한잔 마시는 것도 좋은 시간이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물론 초정리에 갔으니 세계 3대 광천수로 탄산과 칼슘, 풍부한 미네랄을 함유한 초정약수를 느껴볼 일. 한동안 코로나19의 여파로 중단되었던 초정원탕 행각에서는 야외 족욕체험장이 개방 운영되고 있다. 땅속 깊은 화강암층에서 퐁퐁 솟아나는 광천수로 이색 체험까지 알차게 챙겨보자. 한옥 스테이는 예약 필수다. 역사와 현재가 공존하는 조용한 공감 청주는 그동안 진입로의 가로수길이나 도심을 둘러싼 상당산성과 중심부를 흐르는 무심천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육거리 전통시장은 더 말할 게 없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면서도 빠뜨리면 섭섭할 중앙공원도 청주의 역사 속 중심이다. 뭘 모르는 사람들은 청주 중앙공원이 이제는 탑골공원처럼 되어버렸다고 하지만, 괜히 중앙공원(中央公園)이 아니다. 전국 각 지역마다 하나씩 있음직한 중앙공원은 그 지역을 대표한다. 이름 그대로 센트럴파크다. 한쪽 코너에는 시민극장이 있었다. 청주 극단인들의 연극도 올리던 곳이었다. 유형문화재인 목조 2층의 누각과 구석구석 유적들은 제각각 옛이야기들을 품었다. 무엇보다 천년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는 전설을 지닌 채 계절마다 압도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중앙공원 골목으로 들어서면 지금은 쫄쫄 호떡이 유명하지만 그 이전엔 할머니의 빈대떡이 유명했다. 그 옆으로 50년이 훌쩍 넘은 공원당 우동은 특히 청주를 떠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장소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 약속 장소로 정하기 좋은 곳.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공원당에서 만나자’고 할 수 있는 점포다. 도시가 사람을 품어주는 맛이 있고 따뜻하다. 이젠 어딜 가나 나타나는 거대한 관광 콘텐츠, 덕후들의 핫플이나 힙하다는 맛집 풍경 인증샷은 지겹다. 어느 여행지를 말할 때 ‘노잼’이나 ‘핵잼’ 타령으로 섣부르게 구분 짓는 이들의 기준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그 골목을 나와 바로 보이는 용두사지 철당간. 시내 중심에 우뚝 서 있지만 늘 그 자리에 있으니 다들 무심한 듯 지나간다. 고려시대의 귀중한 문화유적이라 여행자들이 찾아와 올려다보곤 한다. 바로 앞으로 청주극장과 현대극장이 기역자로 거의 붙어 있었다. 학생들의 단체 영화 관람이 있는 날은 그 앞이 교복 입은 학생들로 바글거렸다. 지금은 영플라자 뭐 그런 것들이 새 옷 입은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언제부턴가 성안길이 된 본정통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핫한 거리다. 입구부터 시네마 거리다. 청주가 의외로 영화관이 많았고 유명 연예인이나 문화예술인을 다수 배출했다는 사실, 또한 수많은 드라마나 영화가 촬영된 곳이란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울에서 가깝고 역사와 현재가 고루 존재하는 특이한 장소가 꽤 있다는 것. ‘제빵왕 김탁구’의 수암골은 이미 성지가 된 지 오래고, ‘태양의 후예’, ‘덕혜옹주’, ‘은교’, ‘베테랑’, ‘국가대표’, ‘프리즌’…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다. 청주를 떠나기 전 국립현대미술관을 들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갈 때마다 들르지만 이번엔 시간이 늦었다. 그렇지만 미술관 앞마당에 서는 것만으로도 가슴 저릿하다. 오래전 담배공장이었던 곳이 문화예술공간으로 변신한 근대문화유산 동부창고,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눈앞에서 조금씩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미술관 광장에서 바라보는 코끝 찡한 저녁노을, 운이 좋았다.
- 2022-08-11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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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 고향납세 경쟁, 기부액 늘리려 납세 사이트 ‘우후죽순’
- 일본 지방자치단체들이 고향납세 유치를 위한 경쟁을 벌이면서 기부를 모으는 납세 대행 사이트가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다. 고향납세 종합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2014년 2개였던 기부금을 모으는 고향납세 사이트가 2022년 30개를 넘어섰다. 지역 발전기금 ‘고향납세’ 일본 정부는 2008년 고향납세 제도를 도입했다. 고향납세는 거주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지역에 발전기금을 내고, 2000엔(약 1만 9500원)을 넘으면 세액공제를 받는 제도다. 일본에서는 세테크의 하나로 관심을 많이 받고 있다. 특히 2015년부터는 지자체들이 기부금의 30% 한도 내에서 지역 특산물을 답례품으로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원하는 답례품을 받으려 고향납세를 하는 이들이 크게 늘었다. 2008년 당시 814억 원이었던 고향납세액은 2019년 4조 8754억 원으로 약 60배 증가했다. 처음으로 제도를 도입했던 홋카이도의 경우 가미시호로 마을은 지난 2014년 약 43억 원의 고향납세를 받았다. 1년 주민세의 2배이며, 고향납세 인구는 마을 주민의 5배가 넘는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2021년 전국 지자체가 받은 고향납세 기부 총액은 8302억 엔(약 8조 770억 원)으로 최고치를 경신했다. 기부를 한 사람은 740만 명, 건수 4447만 건으로 모두 역대 최고치다. 우후죽순 늘어나는 고향납세 사이트 시루미루연구소의 ‘고향납세 사이트에 대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고향납세를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 중 ‘고향납세 사이트’를 이용한 사람은 92.7%에 달했다. 고향납세를 하는 이유는 ‘답례품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에’가 89.1%로 가장 많았다. 이어 ‘소득세 환급과 주민세 공제를 받을 수 있어서’(60.4%), ‘유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49.5%) 순이다. 고향납세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답례품과 세금 공제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향납세를 할 때 사이트를 사용하는 이유로는 ‘답례품을 검색할 수 있어서’가 71.9%로 가장 많았다. 또한 ‘답례품 종류가 많아서’(60.1%)가 다음이었다. 한 사이트에서 어떤 답례품이 있는지 검색으로 알아볼 수도 있고, 사이트에 등록된 지자체가 많을수록 찾아볼 수 있는 답례품의 종류도 다양해진다는 것. 이에 고향납세를 할 수 있는 플랫폼 성격의 사이트도 올해 30개까지 늘어났고, 기부금을 늘리기 위해 여러 개의 사이트를 사용하는 지자체도 많아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반찬 가게 주인이 배달을 위해 배달의 민족, 요기요, 쿠팡잇츠 등 배달 플랫폼 여러 개에 가게를 등록해 판매 경로를 넓히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다. 고향납세 종합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지자체의 34.4%는 3~4개의 사이트를 이용했다. 가장 많은 사이트를 활용하는 지자체는 21개의 사이트를 사용했다. 가장 많은 지자체가 사용하는 1위 사이트는 ‘고향초이스’(ふるさとチョイス)다. 1642개의 지자체가 등록되어 있다. 2위인 라쿠텐(楽天)에는 1409개, 3위 사토후루(さとふる)에는 1113개의 지자체가 있다. 고향납세 종합연구소는 “지자체를 홍보하는 사이트 수를 늘리면 기부액도 완만하게 비례해서 늘어나긴 하지만, 지자체 운영이 복잡해지고 답례품 재고 관리 등의 문제 발생 확률이 높아진다”면서 “무조건 포털 사이트를 늘리기보다는 지자체의 특색을 살리는 전략을 취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답례품 경쟁에 정부 제동 고향납세를 하는 사람들이 답례품에 관심이 많다는 걸 인지한 지자체는 앞다투어 더 좋은 답례품을 제공하려 경쟁하고 있다. 주로 계란이나 과일 등의 신선식품 위주였던 답례품은 여행사 쿠폰, 가구, 가전, 귀금속 등 다양한 답례품을 주고 있다. 정부 지침인 ‘기부액의 30% 이내’라는 답례품 기준을 어기는 지자체들도 나타났다. 오사카의 이즈미사노(泉佐野)는 해당 지역과 관계없는 다른 지역의 특산품 등 900여 종의 답례품을 내걸기도 했다. 2018년에는 상품권이나 선불카드를 답례품으로 내건 지자체도 있었다. 사가현 미야키초(みやき町)는 기부금의 50%를 현금처럼 쓸 수 있는 비자 선불카드를 제시했다. 이즈미사노는 기부액의 30%를 전자상거래 플랫폼 아마존의 상품권으로 돌려주겠다고 했다. 여기에 고향납세 사이트들이 사이트 이용자를 늘리기 위해 5~10% 수준의 아마존 상품권을 환원해주는 이벤트를 내걸었다. 이에 일본 총무성은 지침을 지키지 않은 12개 지자체를 언급하며 “권고를 지키지 않으면 고향납세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그럼에도 지자체의 답례품 경쟁이 사그라지지 않자, 지침을 어긴 지자체 대상으로 교부세 배당액을 줄이고, 그래도 지침을 어긴 지자체들은 고향납세를 받지 못하도록 했다. 지자체 세수를 채우는 방법으로 활성화된 ‘고향납세’ 제도는 여전히 몸살을 앓고 있다. A지역 주민이 B지역에 고향납세를 기부하고, 세금 공제를 받으면 해당 환급금은 A지역에서 줘야 한다. B 지역의 세수는 늘어나고 A지역의 세수는 줄어드는 셈이 된다. NHK에 따르면 특히 요코하마시, 나고야시, 오사카시 등 도시에서 지방으로의 세금 유출이 이뤄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자체의 답례품 경쟁에는 제동을 걸면서도, 고향납세 제도 자체는 지역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며 앞으로도 더욱 활성화될 수 있도록 운용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 2022-08-05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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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귀촌의 형태, 관계인구를 만나 정착한 사람들
- 귀촌(歸村), 촌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오는 것. 보통은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지방으로 이주하는 현상을 ‘귀촌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역에 살지 않고도 귀촌한 것처럼 그 지역에 참여하는 새로운 인구가 나타났다. 지역과 마음이 이어지든,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누군가와 마음이 이어지든, 관계인구는 그렇게 지역의 무엇과 엮인다. 열렬한 응원이든, 묵묵한 응원이든 지역에 관심을 갖다가 물들듯이 자연스럽게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그들은 또다시 지역의 느슨한 연결자가 된다. 1. 서동민 가가책방 대표 ‘언젠가 책방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채, 여느 직장인처럼 서울에서 책을 추천해주는 회사에 다니던 서동민 대표. 독서 모임으로 알고 지내던 권오상 대표가 게스트하우스를 열었다는 소식에 공주에 내려왔다가 이곳에 책방을 열게 됐다. 6개월 동안 공주 이곳저곳을 돌아보다 2019년 6월 무인 책방 ‘가가책방’을 열었다. 동네 곳곳에 버려진 재료들을 모아 손수 책방을 꾸몄다. 젊은 청년이 무언가를 뚝딱거리자 옆집 무궁화회관 사장님은 ‘밥은 먹고 있느냐’며 식사를 챙겨주기도 했다. 동네 어르신들은 오며 가며 ‘동네 어디에 가면 물건이 있다’고 알려줬다. 알음알음 가가책방을 찾은 사람들은 ‘나만의 비밀 공간이 생긴 기분’이라며 ‘부디 오랫동안 운영해달라’고 편지를 남겼다. 책방을 운영하며 동네 가이드 일을 하던 서 대표는 2021년 2월 ‘마을스테이’의 안내소 역할을 하는 ‘가가상점’을 두 번째로 열었다. 그의 공간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를 통해 공주와 연결된다. 2. 천재박·김현정 부부 천재박 대표는 ‘쌈지농부’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7년을 일했다. 아내 김현정 대표는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에서 브랜드 제품 기획 일을 오래 했다. 천 대표는 2018년 ‘농부가 우리 사회의 공유 자산’이라는 의미를 담은 ‘어프로젝트’라는 회사를 차렸고, 농업회사법인 ‘어콜렉티브 그레인’을 세워 우리나라의 장을 연구하는 일을 해왔다. 공주가 고향이었던 김 대표는 2018년 아버지 생신 잔치할 곳을 찾다가 봉황재를 우연히 알게 됐고, 원도심에서 하루를 묵었다. 오래된 역사를 담고 있는 원도심에 반해 2020년 봄, 집을 보지도 않고 매물로 나온 한옥집을 매입해 U턴했다. 이곳에서 부부는 우리 곡물이 가진 가능성을 탐구하는 카페 ‘곡물집’과 ‘곡물 연구소’를 운영한다. 한 편에는 ‘데시그램북스’라는 책방도 있다. 김 대표의 친구가 운영하는 문학 전문 서점이다. 두 사람은 곡물과 문학이 가진 느슨한 연결 지점을 가지고 ‘식경험디자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3. 김광호 마을건축가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건축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을 떠났던 김광호 마을건축가. 프랑스에서 18년 정도 살다가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삼성 계열사의 건축소장으로 일하던 때 ‘전국이 나의 현장이라면 꼭 서울에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공주, 부여 등 여러 도시를 둘러보았는데, 도시와 교통이 잘 연결되어 있으면서 1500년이 넘는 역사가 서린 공주가 살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0세로 접어들면서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며 살아도 짧다’며 삶의 방향을 정리했다. 공주에 살 곳을 알아보다가 100년 역사를 가진 노인회관을 매입했는데, 막상 집으로 사용하려니 마땅치 않았다. 그러다 권오상 퍼즐랩 대표를 알게 됐고, 이들이 마을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 듣게 됐다. 그들의 가치관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김 건축가는 노인회관을 10년 동안 무상 임대해주었다. 지역사회에 내려와 기반을 잡고자 하는 청년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편하려면 내 주위가 편해야 한다’는 프랑스 친구들의 말을 전하며, 지역사회가 잘되어야 나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ㆍ김광호 마을건축가 인터뷰 Q 귀촌할 때 어떤 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나? A 아파트는 제외했다. 그러니 신도시는 당연히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긴 세월 동안 주거지로 검증된 지역을 찾았다. 몇십 세대에 걸쳐 사람이 늘 살던 곳들이다. 집은 오래됐겠지만, 고쳐 살면 되니까. 공주는 역사에 나온 것만 해도 천 년이 넘어가니 딱 좋았다. 공주에서 현재 사람이 더 많이 사는 곳은 북쪽 신도시인데, 과거 수도였던 웅진이라는 곳은 공산성을 끼고 있는 공주 원도심이다. 사실 전원의 조건을 다 갖춘 집이라면, 도심 한복판에서 도시의 편리함도 누리고 전원도 즐기는 게 가장 좋다. 심야에 슬리퍼 신고 편의점에 갈 수 있다는 게 도시의 좋은 점 아닌가.(웃음) 공주나 부여 규모의 지역이라면 전원의 맛도 있으면서 도시가 주는 혜택도 누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생활권이 수도권에도 있으니, 교통이 가장 편한 공주를 택했다. Q 귀촌을 한 이유가 궁금하다. A 건축은 문화예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랑스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고 철저히 수도에 모든 게 집중되어 있다. 그러니 서울을 떠나면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집 앞에 미술관이 있는 곳에서 가질 수 있는 무형의 어떤 권리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내 나이 60이 되면서 삶의 방향을 정리한 게 있다. 앞으로 길어야 20년 아니겠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며 살아도 시간 짧겠더라. 아마 젊었으면 쉽게 서울을 떠나지는 못했겠지.(웃음) 나이가 들고 한 분야의 일을 오래 하면 모든 걸 쫓아다니지 않아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방향성도 많이 좁혀질 테고. 그렇다면 서울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Q 지역에서 마을을 만들어가는 청년들에게 무상임대를 해주었다고 하던데.. A 내가 살 집을 찾다가 노인회관을 소개 받았다. 이 건물을 잘 고쳐봐야겠다 했는데, 막상 내가 원했던 집의 구조가 아니었다. 그런데 집이라는 게 쉽게 사고 팔고 하기가 어렵지 않나. 그러다가 퍼즐랩에 권오상 대표를 알게 됐는데, 이들이 원하는 공간으로 노인회관이 적합했다. 어차피 나는 쓰지 않을 공간이니 그들이 필요한 공간으로 활용하고 나도 그 안에서 무언가 해보고자 했다. 지역사회에 내려와 기반을 잡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친구들의 좌충우돌하는 시간이 잘 적립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유럽은 복지 제도가 잘 되어있는데 열심히 일하고 떼어가는 세금을 보면 그들도 허탈해 할 때가 있다. 그런데 "내가 편하려면 내 주위가 편해야 한다."고 하더라. 내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가 편해야 나도 행복하다. Q 새로운 지역에 녹아드는 게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먼저 귀촌한 사람으로서 팁을 준다면? A 조급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이가 들어 새로운 것에 적응하려다 보면 마음이 급해진다. 우린 시간이 없지 않나.(웃음) 건축과 비슷하다. 특히 지방에 정착해 활동할 때는 거기에 맞는 정도의 건축, '적정 건축'이라고 하는데, 가장 이상적인 설계다. 한정된 예산으로 어디까지 고치고 어떻게 손을 대야 할까 고민하는 거다. 너무 지나치게 다가가고 가까워지는 것 보다, 어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를 잘 유지해 나가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 2022-08-04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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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만들고 지역 오가는 ‘관계인구’된 사람들
- 귀촌(歸村), 촌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오는 것. 보통은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지방으로 이주하는 현상을 ‘귀촌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역에 살지 않고도 귀촌한 것처럼 그 지역에 참여하는 새로운 인구가 나타났다. ◆마을 만드는 디렉터형 관계인구 1. 루치아의 뜰 석미경 대표는 서울에서 출판사 편집자로 11년을 일하다가, 남편이 공주에 있는 대학 교수가 되면서 1995년 공주로 귀촌했다. 차에 관심이 많았던 석 대표는 차 문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2012년 버려진 한옥을 발견하고 뼈대를 살려 지금의 ‘루치아의 뜰’을 열었다. 공주에 살며 동네 산책을 하다 보니 골목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14년에는 주민참여 프로젝트로 ‘잠자리가 놀다 간 골목’이라는 도시재생 활동을 제안해 선정됐다. 현재는 공주풀꽃문학관 운영위원, 공주문화도시 정책위원 활동도 하면서 청년들의 공주 정착을 돕고 있다. 먼저 귀촌한 사람으로서 누군가 공주로 와 무언가를 도전할 때, 묵묵히 지켜보며 그의 시도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리라 믿고 있다. 2. 사회문화예술연구소 오늘 여러 지역에서 도시재생이나 문화기획 일을 하던 임재일 소장은 유독 공주에서 일할 기회가 많았다. 10년 가까이 공주에서 공공미술을 하던 그는 2018년 자연스레 공주로 귀촌했다. 30년 동안 하숙집으로 사용되다 버려진 3층짜리 폐가를 사들여 연구소를 옮겼다. 공주의 과거와 현재를 잇고, 공주 사람과 이웃 사람을 잇는 장소를 만들고 싶어 ‘대안카페 잇다’도 열었다. 그는 공주 근대문화거리, 하숙테마거리, 제일감리교회 기독교박물관 조성, 국고개 문화예술거리 조성사업 등 공주 원도심 도시재생 사업을 기획·실행했다. “주민 300여 명을 인터뷰하고 기록한 내용으로 ‘하숙집의 세 딸’이라는 연극도 기획하고, 문화의 날도 만들었어요. 연구소 내에 ‘공주 정보 자료관’을 만들어 도시재생 과정에서 기록하고 모은 공주의 모든 자료를 전시하고 있죠. 공주로 귀촌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공주에 대해 알기 위해 조사차 우리 연구실을 한 번은 들러요. 저는 그들에게 공주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죠.” 문화를 통해 공주의 관계인구로 지내다 귀촌한 그는 이제 다른 관계인구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ㆍ임재일 소장과의 인터뷰 Q 공주에 유독 귀촌 하는 사람이 많은 듯 하다. A 충청남도에서 대학이 가장 먼저 생긴 곳이 공주다.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이 있다 보니 선생님이나 전문 분야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많다. 교직에 있었거나 직장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은퇴를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꽤 있는 듯 하다. 그저 공주가 살기 좋아 오는 사람도 있고. 공주로 모여드는 사람들은 꽤 다양하다. Q 고향은 세종시(구 연기군)인데, 공주에 자리 잡은 이유가 있나? A 거리를 조성하거나 환경을 개선하는 공공미술 일을 오래 했다. 특히 지역의 역사 문화를 활용한 프로젝트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자원이 많은 공주에 우연히 초대를 많이 받았다. 공주대학교에서 9~10년 정도 겸임교수 생활도 했고. 지역을 살리는 프로젝트를 하면 건축, 인문학, 미술, 행정 등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모인다. 자연스럽게 문화 기획을 하게 됐는데, 이제 나이가 어느 정도 드니까 마지막으로 정착할 곳을 찾게 됐다. 연기군이 고향이긴 하지만 학창시절을 공주에서 보냈기에 친구들도 다 이곳에 있다.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다. 지금은 문화 소프트웨어, 문화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젊은 친구들과 공주를 연결하는 일을 한다. Q 공주에 이주하려는 이라면 이곳 연구소를 한 번은 꼭 들른다는 데, 그들을 돕는 이유가 있나? A 재미있으니까.(웃음) 그동안 공주에서 했던 모든 작업물들을 이곳에 모아두었다. 공주 문화 투어를 하면 가이드가 가장 마지막으로 연구소에 들른다. 그럼 나는 작업 기록집들을 펼쳐 공주의 지난 시간을 보여준다. 이주를 하려면 집이 가장 중요한데, 빈집 조사도 했어서 어디에 가면 빈집이 많은지도 알려준다.(웃음) 하던 일이 그렇다 보니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많이 알아서 자연스럽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게 됐다. 나도 공주가 발전되어가는 걸 기대하고 지켜본 것처럼,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도 그들의 기대만큼 성취를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 Q 기록을 통해 공주와 사람들이 이어지는 듯 하다. A 과거를 상기하고 싶어하는 분들이 있다. 당시의 기억을 이야기 하고 싶은 거다. 지금은 현재만 남아있으니 과거 그 자리가 무엇이었는지 모르지 않나. 노인 한 사람이 박물관이라고 하는 것처럼, 누구나 이야기를 가지고 산다. 공주는 백제시대 수도였다 보니 그만큼 이야기가 더 많은 셈이고. 일종의 오픈 뮤지엄처럼. 3. 이미정갤러리 이미정 관장은 공주 토박이다. 귀촌을 한 건 아니지만, 그를 통해 공주와 관계 맺는 사람이 늘었다. 이 관장은 2016년 3월, 그림이 팔리기는커녕 그림 보러 오는 사람도 없을 거라고 여겨지던 공주 원도심에 갤러리를 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지역을 떠나 있던 작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윤상원, 정영진 등 원로 작가들이 이미정갤러리에서 전시를 하고 그림이 팔리면서 작가로 입지를 다졌다. 정영진 작가는 U턴 했고, 윤상원 작가는 이주를 준비 중이다. 이 관장은 이들을 ‘1986년도 공주의 미래였던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최근에는 ‘월전 귀향’이라는 주제로 공주가 직장이거나, 공주가 고향이지만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작가들을 모았다. “공주의 인구는 줄고 있지만, 공주로 유입되는 인구는 늘고 있어요. 화가일 수도, 감상자일 수도, 소장자일 수도 있겠죠. 열 명이 오면 여덟 명은 공주를 돌아보고 가요. 공주와의 관계가 생기는 거죠. 이전에는 공주 출신 작가들하고만 교감했다면, 이제는 공주에서 일하거나 공주에서 유학하거나 고향이 공주지만 다른 지역에 살거나 공주에 인접한 지역에 있는 작가들까지 연결하고 있어요.” 어쩔 수 없이 타지로 나가는 작가들조차 공주에 반드시 작업실을 두고 두 지역을 오가고자 노력한다. 이미정갤러리를 통해 공주에 살든 살지 않든 생활권을 공주에 두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난 셈이다. ㆍ이미정 관장과의 인터뷰 Q 갤러리를 열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A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 갤러리를 여는 건 로망이다. 미술 작가로 활동하면서 30여 년 미술 학원을 운영하고, 대학 강의도 나갔다. 일을 그만 두면서, 전업 화가로 살 것인가 전업 주부로 살 것인가 고민을 했는데 둘 다 어렵더라.(웃음) 갤러리가 수익 사업은 아니지만, 작업실의 연장으로 해볼까 싶었다. 7년째 자리를 지키다 보니 작가들도 모이고, 이 주변으로 작년에 두 개, 올해 두 개 갤러리가 개관하기도 했다. Q 갤러리 운영뿐 아니라 작가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프로그램도 만든다고 들었다. A 한 평론가의 말을 인용하자면 "갤러리스트는 대중과 예술가의 중간 역할자다." 원로 작가들이 공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획전을 열거나, 그림을 판매할 수 있는 판로를 만들고 있다. 이 감영길을 '공주의 인사동'으로 만들어 보자고 행정기관에 제안했다. 작가 한 명에게 행정기관이 지원하는 금액을, 그림을 사는 사람에게 지원금 형태로 주자고 했다. 그래서 공주문화재단에서 '그림 상점로'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했을 때 갤러리로 참여했다. 그림 상점로는 그림 구매자에게 일정 금액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지난해에는 예술가 약 7명을 단순 지원할 금액으로, 1억 4000만 원의 예술품 거래를 만들어냈다. 7~80명 화가의 작품들이 팔린 거다. 올해는 참여 작가도, 작품 수도 더 늘었고 상반기에만 지난해만큼의 거래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공주를 오고가는 사람들은 이 주변을 둘러보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시게 된다. Q 젊은 작가들과 활발하게 소통한다고 하던데.. A 각자의 이유로 언젠가는 공주를 떠날 수도 있지만, 공주와의 관계성을 잃지 않도록 젊은 작가들과 자주 소통한다. '영영 아티스트'라는 20대 화가들의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작가들이 공주에서 개인전을 안 한다. 대전이나 서울처럼 큰 곳으로 간다. 공주를 떠나고 싶어 그런 게 아니다. 커뮤니티를 만들고 그림을 놓치지 않도록 도움을 주다 보니, 젊은 작가들이 학업이나 생계로 어쩔 수 없이 공주를 떠나더라도 작업실만큼은 공주에 두려고 하게 되더라. 이곳 감영길에서 누군가 그림을 전시하고, 누군가는 감상하고, 누군가는 소장한다. 그렇다면 예술 생태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Q 이미정갤러리를 중심으로 작가, 관객, 공주가 모두 연결되는 느낌이다. A 어린 학생들이 갤러리를 자주 온다. 한 학생이 “저도 대학을 졸업하고 예술을 하려면 공주로 와야겠네요”라고 했는데, 무척 기특했다. 아이한테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며 아이 손잡고 오는 엄마도 있다. 공주에 갤러리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찾아오는 작가들도 꽤 있다. 사람들이 건강하게 그림을 즐기고, 여러 이유로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던 작가들도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중간 역할자인 갤러리스트로서 역할을 다 하고 싶다. 앞으로는 공주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 공주에서 태어난 사람, 공주에서 일하는 사람 등 공주와 관계 있는 작가들도 연결하려 한다. ◆지역 오가는 더블로컬형 관계인구 1. 퍼즐랩 권오상 대표는 경기관광공사에서 15년 동안 해외 마케팅 일을 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공주에 매력을 느꼈다. 어느 날 마음에 드는 한옥을 발견하고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겠다며 회사를 그만두고 귀촌했다. 그는 근교인 세종시에 거주하면서 공주 원도심을 살리는 일을 한다. ‘봉황재’를 찾는 사람들에게 원도심의 맛집과 볼거리를 안내하다 보니 ‘마을스테이’를 꿈꾸게 됐고, 2019년 퍼즐랩을 창업했다. 2021년도 행정안전부 청년마을 만들기 공모사업에 이어 올해도 청년들의 지역 탐구와 정착을 지원하는 ‘자유도’를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참여한 청년들이 다음 기수에서는 프로그램 스태프로 참여했다가 결국 공주로 귀촌하는 사례가 생기기 시작했다. 정부 사업을 하기 전에도, 사업이 끝난 후에도 그는 공주를 느슨하게 연결하는 일을 이어갈 계획이다. 2. 다이얼팩토리 이병성 대표는 서울에서 권오상 대표와 독서 모임을 하던 사이로, ‘봉황재’에 놀러 왔다가 공주에 매료됐다. 그는 12년 동안 플랜트 설계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사이드 프로젝트로 ‘교육’을 주제로 독서 모임을 했다. 느슨하게 연결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아 ‘공동체 디자인’을 하고 싶었다. 공주 원도심은 그 꿈을 구체화할 수 있는 곳이었다. 서울에 살면서 공주에 코러닝스페이스 ‘와플학당’을 만들고, 청년마을 ‘자유도’를 통해 여러 프로그램과 워크숍을 기획했다. 커뮤니티가 마음에 든 청년들이 공주를 찾아 머무르기 시작했다. 이 대표는 올해 와플학당을 운영하는 기업 ‘에듀커넥트’를 다이얼팩토리로 리브랜딩하고, 커뮤니티 디자인과 대화 워크숍을 더욱 구체화했다.
- 2022-08-03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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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모한 귀향은 그만, 머무르지 않는 ‘귀촌’ 증가
- 귀촌(歸村), 촌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오는 것. 보통은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지방으로 이주하는 현상을 ‘귀촌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역에 살지 않고도 귀촌한 것처럼 그 지역에 참여하는 새로운 인구가 나타났다.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귀촌이 본격화됐다. 도시로 상경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U턴, 지방 출신이지만 다른 지방에서 정착하는 J턴, 도시 출신인데 지방으로 이주하는 I턴이 가장 흔했다. 경제적 이유, 가족의 사정, 한가로운 전원생활에 대한 환상 등이 주된 이주 이유였다. 이제는 ‘그 지역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어서’ 귀촌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 지역에 가서 반드시 살아야지’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어느 동네에 놀러 갔다가 그곳 사람이 혹은 마을이 좋아서 자연스럽게 물들듯 귀촌하는 것이다. 혹은 그 지역에 살지 않더라도 도시와 지역, 근교와 지역을 오가며 머무르지 않는 귀촌 생활을 하기도 한다. 여러 지역과 관계 맺는 사람들 어떤 지역에 살지는 않지만, 그 지역에 호감과 관심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든 지역사회에 참여하는 사람을 ‘관계인구’라고 말한다. 관계인구는 관심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가고 지역 발전을 응원한다. 지역 특산물을 구매하거나 커뮤니티에 참여하기도 한다. 일종의 ‘팬’이 되는 것. 그런 지역은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일 수도 있다. ‘관계인구’라는 말은 식품 생산자와 생산품 정보를 제공하는 일본 소식지 ‘도호쿠 먹거리 통신’의 다카하시 히로시 편집장이 그의 저서 ‘도시와 지방을 섞다 : 타베루 통신’에서 처음 사용했다. 2016년 처음 소개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지역과 ‘소통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더불어 개인의 행복뿐 아니라 지역의 행복까지 생각한다. ‘인구의 진화’ 저자 다나카 데루미는 책에서 “관계인구는 이주·정주에 대한 사람들의 심리적 장벽을 낮추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도 넓힌다”고 말한다. 자연스럽게 지역을 오가면서 결국 정착하는 사람이 나타날 가능성도 높아진다. 지역재생 전문 잡지 ‘소토코토’의 사시데 가즈마사 편집장은 ‘미래 시대는 관계의 시대’라고 말하며 관계인구를 네 부류로 나눈다. 지역에 살며 행정기관과 협력해 마을을 만들어가는 디렉터형, 도시와 지역을 홍보하는 허브형, 도시에 살지만 지역에도 거점이 있는 더블로컬형, 무조건 그 지역이 좋다고 하는 단순 소통형이다. 관계인구 개념이 지역 소멸을 해결할 열쇠가 될 것이라 생각한 사람들이 도쿄에 모여 ‘시마코토 아카데미’를 열었다. ‘이주하지 않아도 지역을 배우고 싶고 참여하고 싶다’는 모토로 관계인구라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장소, 사람과 지역을 연결하는 일이다. 아카데미에 참여한 사람들이 처음부터 지역에 관심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프로그램이 끝날 즈음이면 마음에 변화가 생긴다. 6년 동안 6기를 진행해 수강생 83명 중 29%가 지역에 정착했다. 다나카 데루미는 이 아카데미의 목적이 ‘이주를 촉진하기 위함’이 아니라, ‘떨어져 있더라도 관계를 맺고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있다고 평가한다. 각자가 삶의 문제의식을 고민하면서 전진한 결과라는 것. 그는 관계인구를 ‘동료’라고 표현했다. 지역에 얽매이지 않는 '관계 귀촌' 일본 정부도 관계인구에 관심이 많다. 정주인구 증가를 목표로 했던 지방창생정책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관계인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일본 국토교통성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주요 3대 도시권에 있는 관계인구는 약 1800만 명이 넘는다. 1800만여 명이 대도시에 살면서 크든 작든 다른 지역에 직접 이바지하는 활동을 한다는 뜻이다. 일본과 똑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도 농산어촌에 유동인구로 존재하는 관계인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의 ‘농산어촌 마을 패널 조사사업’(2/10차연도)에 따르면 농산어촌 마을 평균 77.4호 중 5.6호는 지역에 주소지를 두지 않은 가구다. 보고서는 관계인구가 있는 마을의 비중이 30.4%라고 분석했다. 마을당 약 20명의 관계인구가 있는 셈이다. 행정안전부는 2018년부터 ‘청년마을 만들기’라는 청년 정착 지원 프로그램으로 청년과 마을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사시데 가즈마사 ‘소토코토’ 편집장은 지역이 관계인구를 만들려면 ‘관계안내소’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관광안내소가 지역의 명소나 맛집을 안내한다면, 관계안내소는 지역에서 재미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장소, 지역과 연결될 수 있는 방법 등을 안내하는 곳이다. 관광안내소 같은 어떤 건물이 아니라 마음 편한 장소나 커뮤니티를 의미한다. 앞서 언급한 ‘시마코토 아카데미’가 대표적인 예다. 인구 감소 시대에 새로운 귀촌으로 관계인구가 떠오른다는 건 귀촌이 더 이상 지역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서울에 살면서 제주의 농부를 응원하고, 강원도의 커뮤니티에 참여하며, 충남 공주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는 활동을 하는 식의 관계 귀촌을 하는 이들이 늘어난다면 말이다. 이번 호에서는 공주 원도심의 관계인구가 되었거나 귀촌한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새로운 귀촌이 어떤 모습인지 들여다보려 한다. 공주 원도심에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를 가지고 곳곳을 느슨하게 연결하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귀촌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역을 보여줄 뿐이다. 그렇게 공주와 연결된 사람들은 지역에 살지 않아도 마치 지역에 사는 것처럼 활동한다.
- 2022-08-03 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