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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여름이구나!”
- 계절은 색깔을 지닙니다. 우리 다 아는 일입니다. 봄은 버드나무의 늘어진 가지가 연한 녹색을 띨 때부터 스미는 것 같습니다. 여름은 아예 온 세상이 진한 녹색입니다. 그러다가 가을이면 서서히 황갈색으로 대지가 물들여지면서 마침내 겨울은 다시 온 세상이 흰색으로 덮입니다. 당연히 이런 색칠은 사람 따라 다릅니다. 하지만 철이 서로 다른 색깔로 채색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계절은 이에 더해 제각기 자기 소리를 지닙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봄은 졸졸거리는 시냇물 소리를 냅니다. 조심스러운 희망이 흐릅니다. 겨울은 아예 침묵입니다. 고요를 잃은 겨울은 겨울답지 않습니다. 가을은 현의 낮은 울림 같은 소리를 냅니다. 고마움이 거기 실립니다. 그리고 여름은 작약(雀躍)하는 환성입니다. 삶의 약동이 그대로 자기를 소리칩니다. “와, 여름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외칩니다. 지나치게 전원적인 정서라고 마땅찮아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계절을 간과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질 ‘도시’의 삶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여름에 김장김치를 먹고(이런 묘사가 얼마나 소통이 될지 불안하지만), 한겨울에 빙수를 사먹는 세상인데 철을 일컫는다는 것은 낡아도 한참 낡은 농경사회의 의식을 드러낸 것일 터이니까요. 그렇지만 계절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은요. 봄은 여전히 추위를 물리칠 만큼 따사롭습니다. 여름은 무덥고요. 가을은 서서히 을씨년스러워지는 계절이고 겨울은 모질게 춥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계절을 보내고 맞습니다. 기다리기도 하고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걱정하기도 하고 무사하게 넘겼다고 안도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철의 바뀜조차 알지 못하는 철딱서니 없는 철부지 아니고야 철을 모를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야흐로 여름입니다. 온 세상이 싱싱하게 짙푸른 색깔로 뒤덮인 정경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리고 온갖 곳에서 터져 나오는 “와, 여름이다!” 하는 환성이 합창처럼 들립니다. 소리만이 아니라 모습조차 집 안에서, 길거리에서, 들에서, 산에서, 바다에서 보입니다.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갑자기 서둘러집니다. 나도 어서 배낭을 찾아 메고 어디론지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바다여도 좋고 산이어도 좋습니다. 아니, 벌써 나는 여름의 한복판에 이르러 있습니다. 나는 동무들과 고추를 다 내놓고 내에서 미역을 감고 있습니다. 여름이니까요. 소쿠리를 들고 모래무지나 미꾸라지를 잡으러 동네 형들과 나갔는데 나는 물속 풀숲에서 뱀을 덜컥 손으로 쥡니다. 여름이니까요. 원두막 위에서 주인 할아버지가 주신 참외 세 개 중에서 두 개를 먹고는 나머지 한 개를 배가 불러 마저 먹지 못해 얼마나 아쉬운지요. 가져오기는 했습니다만. 그러다가 외할아버지를 따라 대천 해수욕장에 갔을 때의 그 황홀한 바다와 파도와 황혼, 모래사장과 해파리와 조개껍질들, 그리고 천막 안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설친 잠. 돌아와 검은 살갗이 끊임없이 벗겨지는데 그렇게 온몸이 햇볕에 탔는데도 아프지 않았느냐는 누님의 물음에 “아니!”라고 나는 대답합니다. 마치 영웅이듯이. 여름이니까요. 세월이 가도 여름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사내 녀석 둘과 네 식구가 배낭을 짊어지고 포항에서 속초까지 해안을 따라 갑니다. 바다가 보이는 민가에 들러 천막을 옆에 치고 물과 반찬을 얻어먹으며 그렇게 열흘을 걷고 타고 쉬고 자곤 합니다. 여름이니까요. 우리는 설악산에 올라 겹겹이 쌓인 능선을 향해 “야호~!”라고 외쳤고, 속초에서는 바다의 끝 수평선을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야~!” 하고 소리쳤습니다. 삶의 꿈과 열기가 하늘을 찌릅니다. 여름이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미꾸라지 잡던 형들도 없습니다. 누님도 없습니다. 원두막도 없고, 외할아버지도 계시지 않습니다. 산에서 바다에서 목이 터져라 소리치던 사내 녀석들은 이제 나이가 쉰을 넘었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기억조차 투명하지 않습니다. 연대기조차 흐려져 30년 전인지 40년 전인지 사뭇 헷갈리기만 합니다. 한데 여름이 옵니다. 여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라질 까닭이 없습니다. 계절의 바뀜은 우주의 운행인걸요. 여름의 환성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귀를 막아도 들릴 여름의 함성이 다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면서 몸조차 들썩이게 합니다. 곧 냇가로, 바다로, 산으로 나갈 듯합니다. 그런데 햇볕에 이리 눈이 부실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색안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따갑게 더울 수가 없습니다. 토시를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쩐지 창피해집니다. 배낭에 이것저것 넣고 짐을 꾸려야겠는데 벌써부터 어깨가 아픕니다. 신발을 찾아 신어야겠다고 하는 순간 발이 지레 무겁습니다. 갑자기 함께할 친구가 없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함께 평생을 살아온 내 반쪽도 다르지 않습니다. 생각도 건강도 따로따로인 채 함께 살아온 세월이 여름 나들이를 권할 만큼, 아니면 사양할 만큼, 서로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윽고 여름이 서서히 낯설어집니다. 여름인데, “와, 여름이다!”라는 환성이 천천히 멀어지면서 나는 마침내 “아, 여름이구나!” 하는 탄성을 조금은 시무룩한 음조로 발언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는 것이 슬픈 정경은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살아간다고 하는 것, 나이 먹으며 인생의 길을 걷는다는 것, 생각하면 계절의 지냄과 다르지 않은데, 이미 우리는 되풀이되는 것은 아니어도 봄도 여름도 우리 삶의 깊은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가을마저 겪으며 그 깊은 끝자락에 이르렀고, 겨울조차 현실인 오늘을 살고 있기도 합니다. 세월은 계절을 내재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말투가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와, 봄이다!”가 아니라 “오, 봄이구나!” 하면서 내 봄을 회상하고, 그러면서 그 봄이 이어 펼쳤던 내 여름을 다시 회상하면서 “와, 여름이다!” 하기보다 “아, 여름이구나!” 하면서 그것이 빚은 내 가을을 되살피고, 이윽고 그 가을에 이은 겨울의 고요 여부를 헤아려야 하지 않을는지요. 환성의 언어를 탄성의 언어로 조용히 다듬을 필요는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나무 그늘이 시원한 강가에서 물을 바라보다가 “와, 여름이다!” 하는 환성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터져 나오는 순간, 자식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자식에게 자기가 집을 보아줄 테니 마음껏 여름을 즐기고 오라는 약속을 기어이 받아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열흘 동안 자식 집에서 보낸 그 여름이 이제까지 지낸 여름 중에서 가장 행복했노라고 말했습니다. 짐작이 됩니다. 사는 모습 제각각인데 어떻게 사는 것이, 어떻게 여름을 보내는 것이 좋은 것인지 판단할 절대적인 척도란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깊은 가을이나 초겨울을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와, 여름이다!” 하고 소리치고 덤벙거린다면 쑥스러워질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 환성은 크게 외쳐져야 합니다. 여름을 사는 친구들에게요. 여름은 생동하는 삶의 푸르디푸른 절정이니까요.
- 2017-06-29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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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에도 퀄리티가 있다, 장수학자 박상철 교수 “하자, 주자, 배우자”
- 장수는 누릴 수 있으면 축복이고 누릴 수 없으면 재앙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장수하라는 말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은 나빠지고 삶의 질은 하락한다고 생각하기에, 차라리 병들기 전에 깔끔하게 죽는 게 좋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내 장수학계의 전문가인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뉴바이올로지 전공 석좌교수는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백세를 만나봤을 그가 밝히는 얘기는 충격적인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 고령화시대 백세청풍(百世淸風)의 기운으로 장수하는 사람들의 패러다임을 박 교수의 시각으로 들여다봤다.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뉴바이올로지 전공 석좌교수는 2000년에서 2009년 사이에 국내 최초로 백세인구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해 장수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꾼 인물이다. 그가 백세인구를 조사하게 된 이유는 매우 현실적이고 당연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됐다. “사람이 늙으면 신체기능이 점점 떨어지는데 아주 늙었을 때는 어떤 모습일까, 그때가 되어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독립적으로 사는 게 가능할까? 저는 그것이 가장 큰 의문이었습니다.” ‘100세 정도 되면 생활이 형편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박 교수는 막상 조사를 하면서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만나자마자 힘자랑하던 백세인 “전남 곡성에서 만난 홍순갑 어르신은 당시 102세였는데 만나자마자 힘자랑을 했습니다. 마당에서 팔굽혀펴기 100개를 하고 계시더군요. 구례 산동면에 사는 101세 임종철 어르신은 뵈러 갔는데 지게를 메고 오시더군요. 그리고 손자가 100세 어르신을 모시는 게 아니라, 100세인이 쉰 살 손자를 데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더 기가 막힌 분은 쇼지 사부라 박사입니다. 102세 때, 저녁에 식사를 하다가 이 양반이 갑자기 한국말로 ‘한국에서 왔습니까?’ 하고 묻더군요. ‘예’라고 대답하니 ‘그럼 우리 한국어로 이야기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65세 정년에 딱 퇴직하여 ‘한글을 배워야 한다’ 싶어 한글을 배웠고 80세에는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100세 때 러시아어를 배웠고 104세 때 브라질에서 이분을 초청했는데 그때부터 포루투칼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90대가 인터넷을 하는 마을 박 교수가 조사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만난 국내 장수인들은 대략 250여 명에 이른다. 백세인들의 사례를 보니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새로운 깨달음이자 분명한 성공 좌표들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젊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공동체마저 만들고 있었다. “도쿠시마에 가미가쓰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농업학교를 막 졸업한 젊은 사람이 농협의 직원으로 들어갑니다. 가서 보니 마을 주민이 2000명인데 65세 이상이 1000명이 넘었던 겁니다. 50% 이상의 인구가 노인인 초고령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인들은 자주 티격태격 싸웠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손쉽게 얻으려고만 했습니다.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아 ‘우리 일을 합시다’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도쿠시마 산속 마을에 있는 재료들로 일본 요리 장식용 패키지를 만들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동네 어른들이 단번에 그런 일을 하겠다고 했을 리가 없다. 겨우 3명이 시작했는데 이게 팔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물건이 팔리자 할머니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주문을 뺏어가려고 했던 거죠. 젊은 사람이 70~80세 사람들의 싸움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람이 꾀를 냈죠. ‘주문은 인터넷으로 받아가시오’라고. 그러자 처음에는 어르신들이 무슨 인터넷이냐며 난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딱 버텼고, 2년이 지나니 70~90대 마을 주민들이 컴퓨터를 하게 됐어요. 세계 최고령 인터넷 마을이 돼버린 거죠. 그렇게 해서 마을이 발전한 지 30년 이상이 됐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흉내를 내려고 해도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 돈이 많이 든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걱정하고 있다. 박 교수는 반대로 생각한다. 저비용 장수사회를 만들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장수인이 건강하게 일하며 생산 인력으로 생활할 수 있으면 되는 일이다. 앞서 소개된 고령화 마을의 기업화가 그 좋은 모델이란다. 그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슈퍼 노인의 시대가 오고 있다 “‘나이가 들어도 잘 살 수 있는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당당할 수 있는가?’ 있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생기는 많은 문제점들만을 생각했었는데 위에서 소개한 분들을 보면 안 그렇습니다. 그러니 패러다임을 바꿀 때가 온 거예요. ‘패러다임 시프트(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가 일어나야 합니다.” 박 교수는 ‘지금 놀라운 시대가 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슈퍼 노인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일본이나 유럽에는 100세인의 육상대회가 생겼습니다. 영국의 파우자 싱은 102세의 나이에 마라톤 풀코스를 8시간에 걸쳐 완주했습니다. 그는 단축 마라톤인 10km를 1시간 30분 만에 완주하기도 했습니다. 나가오카 미에코라는 100세 할머니는 수영 마라톤 1500m를 완주했습니다. 미국 돌푸드 사의 데이비드 머독 회장은 94세 때, 캘리포니아의 자기 목장에서 아침마다 한 시간씩 말을 타고 다녔습니다. 지금은 99세인데 아직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100세 장수가 보편화되고 있는 현실은 여러 통계 지표로도 증명되고 있다. 제대로 장수하며 일하는 사람들 빠른 속도로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있다. 평균 수명이란 것은 어디까지 갈 것이냐. 실제 사람들이 많이 죽는 나이인 최빈사망연령은 0세부터 100세까지 중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사망하는 연령의 개념으로 평균수명보다 더 길다. 최빈사망연령은 1950년부터 계속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82세, 최빈사망연령은 90세가 넘었다. 이제 고령사회에서는 실제 사람들이 제일 많이 죽는 나이가 중요하다. “최빈사망연령 표준편차를 보면 옛날에는 10년 정도였는데 지금은 6년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 나이의 표준편차가 작아진다는 것은 죽는 사람들 나이의 차이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장수의 보편화’가 이뤄지고 있는 겁니다. 옛날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장수했는데 지금은 ‘somebody’가 아닌 ‘everybody’입니다.” 100세가 넘는 인구는 일본이 6만 명이지만 우리나라는 3000여 명이다. 미국은 7만 명, 중국은 5만 명 정도다.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건강한 노인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지표다. “옛날에는 70이라는 나이는 죽어야 할 나이였죠, 지금 70이란 나이는 일을 못해서 안달 난 나이입니다, 저도 70입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죠. 건강한 노인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는 건강한 노인에게 ‘dependent Life(의존적인 삶)’를 가지게 하지 말고 ‘Independent(독립된)’할 수 있게끔 제도적인 문제를 바꾸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제대로 장수시켜버리자.’ 그러면 병원비가 안 듭니다. ‘장수인은 일을 시켜버리자.’ 그러면 복지비용도 안 듭니다. 이게 제 주장입니다.” 무조건 부지런하라 박 교수는 사람이 아무리 늙어도 변하지 않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그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20대 때 헤어진 애인이라도 딱 들으면 ‘아, 그녀’라고 생각이 납니다. 그다음에 변하지 않는 것은 ‘성격’, 즉 마음 씀씀이입니다.” 박 교수가 제시한 사례들 덕분에 백세가 되어도 인생은 젊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구체적인 방법을 들어봐야 할 때다. 건강하게 장수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법론을 묻자, 박 교수는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를 꺼냈다. “다산 선생이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때 만난 사람이 황상(黃裳, 1788~1870)이란 사람입니다. 이분이 글을 잘 쓰셨는데, 라는 문집에 다산 선생과의 일화가 나옵니다. 다산 선생이 이분에게 ‘공부하라’고 말해서, ‘내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 수 있습니까?’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산 선생이 한 말씀이 세 글자였습니다. ‘부지런해라, 부지런해라, 부지런해라.’ 사실 장수라는 것도 이 3근계(勤戒)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장수도 그냥 이뤄지지 않습니다. 건강장수라는 것은 다 부지런해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많은 장수인들에 대해 연구할 때, 무엇을 먹느냐, 어떻게 생활하느냐가 주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 공통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장수는 성실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백세라도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꿔라 부지런하라는 것은 무언가를 실행하라는 말과도 같다. 박 교수는 그 실행 부분을 간단하게 세 가지로 나눠서 설명했다. “‘무엇이든 해버려라.’ 나이가 들었다고 핑계대지 마라. 못할 이유가 뭐 있냐. 그리고 나이가 들면 ‘받으려고 하지 마라, 줘라.’ 마지막으로 나이가 들면 ‘배워야 한다.’ 배워야 줄 것도 생기고 할 것도 생긴다.” ‘하자, 주자, 배우자. Do it, Give it, Prepare it. 行之 與之 習之.’ 그가 던지는 장수시대의 실천강령이다. 백세인들에게서 ‘움직이고(動), 적응하고(應), 머리를 쓰며(判), 느끼고(感), 절제(適)’라는 공통점이 발견됐다고 한다. 그는 “장수를 위해서는 유전자, 성격, 환경 등의 자연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운동, 영양, 관계, 배움, 참여 등의 생활습관이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중 ‘관계’가 가장 중요한 비결인 것 같다며 여기에는 부지런함이 포함된다고 했다. 결국 나이가 들수록 의존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스스로 독립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존재가 되는 게 중요하다. “백세인들 중 고혈압, 관절염, 위장병이 있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당뇨는 거의 없어요. 당뇨는 생활습관 질환인데, 결국 장수와 생활습관도 연관이 있다는 거죠.” “98세에 시집을 내서 100만 권이 팔렸다는 시바타 도요 할머니가 쓰신 시 중 ‘비밀’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99살이라도 사랑도 하는 거야, 꿈도 꿔, 구름도 타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100세가 돼도 연애하면 안 되겠습니까? 김형석 교수가 올해 한국 나이로 98세이신데, ‘뭐가 가장 하고 싶으냐?’ 물었더니 ‘연애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박상철 (朴相哲) 교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생화학 전공으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80년부터 2011년까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과학기술부 우수 연구센터인 노화세포사멸연구센터와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가천의대, 이길여 암·당뇨연구원장을 거쳐 현재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노화고령사회연구소 고문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등이 있다.
- 2017-06-05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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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에 사는 차기설·정현숙씨 부부, 연꽃처럼 맑게 순하게
- 서울이라는 ‘황야’를 누벼 먹이를 물어 나르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새벽 침상에서 와다닥 일어나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 실려 가는 출근길부터가 고역이다. 직장에선 너구리 같은 상사와 노새처럼 영악한 후배들 사이에 끼어 종일토록 끙끙댄다. 퇴근길에 주점을 들러 소주병 두어 개를 쓰러뜨리며 피로를 씻어보지만, 쓰린 속을 움켜쥐고 깨어난 이튿날 새벽이면, 황급히 넥타이를 목에 동여매고 다시 일터로 달려가야 한다. 이 치열하고도 고단한 양상은 일과처럼 반복되기 십상이다. 그러는 사이에, 세월이라는 도둑은 사람의 청춘은 물론, 꿈과 희망, 체력과 정력까지를 앗아가고, 급기야 생의 강 하류에 우리를 내동댕이친다. 정년(停年)이라는 일종의 날벼락이 도래하는 건 이즈음이다. 올해로 13년째 시골생활을 하는 차기설(62)씨의 귀농 계기도 정년을 앞둔 시점에서의 고민에서 주어졌다. “쉰 살에 가까워질 때였어요. 정년 뒤엔 뭘 할까? 뭘 해서 먹고 살까? 어떻게 살아야 노년의 안정을 구가할 수 있을까? 별안간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아파트 경비원을 하기는 그렇고, 날마다 기름내에 절어 살아야 하는 통닭집을 하기도 싫고, 대체 무얼 하면 좋을지 궁리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문득 어! 농사? 옳지, 농사가 괜찮지 않을까? 그건 정년이라는 게 없지 않은가? 그런 착상을 하게 됐어요.” “세상에 못 믿을 직업이 농사라고, 과히 권장할 일이 아니라고 홍보하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게다가 선생은 농사 경험조차 전무했다죠?” “섬세하게 재거나 따지지 않았어요. 일단 농사에 필이 꽂히자 자못 매력적인 직업일 거라는, 가망성 있을 거라는 결론에 곧장 닿았어요. 일테면, 상당히 무모하게 귀농한 것이죠. 그러나 무작정 귀농을 하면 실패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 알고 있었기에 준비랄까, 공부랄까, 그런 건 미리 좀 해뒀죠.” “흔히 아내들은 귀농을 꺼려합니다. 고생길이 뻔히 보여서. 부인께선 아마도 반대했겠죠? 당신 혼자 잘해보소서! 그러며….” “어, 잘 아시네? 제 아내(정현숙·56) 역시 결사적으로 반대했어요. 처음 딱 한 번 내려와 보고 나서는 발걸음을 끊어버립디다. 3년 정도가 지난 뒤에야 합류를 했죠. 농사를 한답시고 혼자 먹고 자는 저의 몰골이 형편없어서였죠(웃음).” 차기설씨는 건축 관련 잡지사 편집장을 끝으로 서울생활을 청산했다. 검게 그은 피부, 소탈한 매무새, 거칠어진 손…. 농사꾼으로 변신한 지 오래인 그의 외형은 날렵한 도시인의 그것과 다르다. 억실억실 전신에 무르녹은 농부다운 풍색을 통해 그가 이미 머리 대신 몸을 쓰는 근로와 근면을 숭상하는 사람으로 변한 걸 짐작할 수 있다. 그가 과거에 지녔던 인생에 대한 관점과 사유도 새로운 지평을 굽이치고 있을 법한 일. 여하튼, 유한한 인생에 흥미와 생기를 부여하기 위해선 반전과 반동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차기설씨는 귀농으로써 방향타를 휘익 돌려 미지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연꽃에 심은 꿈 차기설씨의 농장엔 ‘우리 맘 연애(蓮愛) 이야기’라는 달달한 이름이 붙어 있다. 연꽃을 테마로 한 농원이다. 연(蓮)을 길러 거두어 연잎밥, 연잎차, 연근차, 연근환 같은 가공식품을 생산한다. 요새는 전국 도처에 연꽃농원이 산재하지만, 그가 연 농사에 뛰어들었던 당시엔 미답의 영역이었다지. 어떤 내력으로 연 농사를 시작했지? “귀농을 준비하며 가장 고심한 건 작목 선택이라는 문제였어요. 저의 성향과 실력에 부합하는 작목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죠. 흠. 나름대로 파악을 하고 보니, 쌈채류는 돈은 되는 대신 매우 부지런해야 하는 작목입디다. 날마다 꼬박꼬박 상품을 출하해야 하니까. 그러나 저는 몹시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라 적합하지 않다 봤어요. 과수는 어떤가? 이건 노련한 전지(剪枝) 등 갖가지 노하우가 필요하고, 벼농사의 경우는 장비 구입에 비용이 너무 많이 먹힌다는 걸 알았어요. 포기해야 할 작목들이었죠. 그럼 뭘 하나? 별다른 장비 없이 최소의 농토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작목, 1차 농업이 아닌 가공 농업, 그게 뭘까, 오래 고심했는데, 어느 날 문득 연꽃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래, 연이다, 연꽃에 꿈을 심자, 그런 작심에 이르렀던 겁니다.” “시인의 영감처럼, 별안간 연꽃 농사를 발상한 거예요?” “아닙니다. 제가 40대 중반 즈음, 공주 시골에 사는 친척 형님의 부름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그 형님을 찾아 내려갔는데 아, 글쎄 1만 평에 달하는 연밭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 양반의 요점이 뭐냐 하면, 앞으로 연 농사가 유망할 것이다, 연을 활용한 각종 가공식품이 각광받을 것이다, 뭐 그런 얘기였어요. 심드렁히, 건성으로 들어 넘기고 말았죠. 당시엔 귀농이라는 걸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거니와 시골살이에 동경 같은 것도 전혀 없었으니까. 그런데 몇 년 뒤, 그 형님의 연 농사 권장에 썩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일이 시작됐어요.” 은인을 만난 셈이다. “초기 한동안은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너무도 힘들었거든요. 온통 몸으로 때워야 하는 일들이라서 말이죠. 게다가 연 재배나 가공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었어요. 비용도 생각보다는 많이 들었죠. 연 방죽에 드디어 연꽃이 만개했을 때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지만, 뭐 변변히 팔 게 없었어요. 사람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만 잔뜩 쌓이더라고.” “부인의 불평불만도 쌓였고?” “남편으로서 스타일 구겨지는 상황이었죠. 당시에 팔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수련뿐이었어요. 그래 간간이 수련을 팔며 활로를 모색했는데, 사람들이 요구하길 수련을 아예 자배기에 심어달라고들 하는 게 아니겠어요? 당장에 자배기를 들여오고, 덩달아 갖가지 항아리며 질그릇을 왕창 떼다가 전시 판매하게 됐어요. 뜻밖에도 그게 먹혀들었어요. 연꽃 농원이지만 그릇 장사로 재미를 봤고, 그게 정착의 기반이 됐습니다. 이후, 연 가공식품의 생산과 판매에 탄력이 붙었죠.” 차기설씨의 농원은 목 좋은 곳에 있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광평리, 휴일이면 나들이 인파가 바글거리는 궁평항이나 제부도를 지척에 둔 곳이다. 자연스럽게, 수월하게 구매자들이 출입할 수 있는 입지인 셈. 애당초 나들이객들이 오가는 길목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터를 잡았더란다. 몸을 주로 쓰는 게 농사라지만, 머리라는 건 녹슬도록 마냥 놀려 먹이라고 있는 물건이 아니다. 차기설씨는 농원의 성장을 위해서는 일단 완전한 자연산 고품질 연 가공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철칙을 세우는 한편, 홍보에 주력했다. 연꽃축제를 매년 거하게 개최해 사람들을 유인했으며, 블로그와 홈페이지를 개설해 농원을 열심히 소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목적을 마음의 평온과 안락에 두었지만, 차기설씨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농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일을 1차적 목표로 삼았다. 이는 지당한 실사구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바야흐로, 그의 농사는 성장세를 타고 있다. ‘느림의 미학’을 배우는 삶 “무슨 일이건 10년은 한 우물을 파야 빛을 본다죠? 농사도 마찬가집니다. 저희는 5년 만에 흑자를 보기 시작했지만 10여 년이 흐르고 나서야 안정궤도에 접어들었어요. 그러나 통장을 보면 지금도 마이너스예요. 왜냐, 재투자가 계속되기 때문이죠.” “귀촌이나 귀농을 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어려움이 있다면 그건 뭐죠?”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 맺기일 겁니다. 교류에 실패하고 소외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일단 시골에서 살고자 한다면 도시의 아파트식 사고를 빨리 버려야 해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도시와, 거의 완전히 오픈된 시골의 풍습은 매우 다르니까. 가령, 시골 노인네들은 이웃 사람이 외출을 할 때 꼬치꼬치 물어오는 경우가 흔합니다. 어딜 가느냐, 언제 돌아오느냐. 이걸 기분 나빠할 일이 아녜요. 노인네들은 이웃이 언제 돌아올지를 미리 알아두었다가 그 집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가장 좋은 건 동네잔치를 가끔 하는 거죠.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녜요. 국수를 삶아 함께 나눠 먹으면 되니까.” “농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향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단연, 매우 게으른 성향의 소유자죠. 그런 분들은 아예 안 내려오는 게 정답이에요.” “다소 게으른 건 미덕일 수도 있죠. 노력이나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게으름이 아니라, 일테면 유유한 태도 같은 거, 매사에 너무 악착 떨기를 스스로 자제하는 거….” “그걸 ‘느림의 미학’이라 해도 되겠죠. 제가 원래 매우 성미 급한 사람이었어요. 시골에 살면서부터는 많이 변하더라고요. 마음이 편해졌어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힘이 좀 생긴 것 같아요. 때가 되면 되겠지 하는 태도랄까. 천천히 자라나는 작물들을 바라보면서 배운 덕이죠. 농작물만이 아니라 시골의 묵묵한 자연 순환이나 풍경들에서도 좋은 영향을 받습니다. 도시에서 사람의 삶이 초침(秒針) 단위로 돌아간다면, 시골에선 분침도 아닌 시침(時針) 단위로 돌아간다고 비유하고 싶어요.” “연꽃의 매력은 뭐라 보시는지?” “연꽃만이 아니라, 모든 꽃들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죠. 막말로 성격 나쁜 사람도 꽃 앞에선 꽤나 순해지지 않던가? 저처럼 말이죠(웃음).” 시골의 산천 안에 살다 보면 유심히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슬쩍 열린다. 가만히 소소한 들꽃 한 송이를 들여다보는 중에 굳었던 감관이 깨어난다. 이윽고 사는 일의 본연에 생각이 닿게 마련이다. 귀농으로 한결 느긋해지고 순해졌다는 차기설씨의 토설에 솔깃해진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 2017-03-27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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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택연금으로 가택연금 피하자
- 손성동 한국연금연구소 대표 ssdks@naver.com A(65세)씨는 요즘 원치 않는 혼족 생활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친구들 모임에 열심히 나갔으나 지금은 발길을 뚝 끊은 상태다. 한때 동기회 회장까지 맡았던 그는 몇 년 동안 일체 연락도 하지 않은 채 두문불출하고 있다. 친구들 모임에 나가면 즐겁지만 식사비와 가벼운 음주 비용마저 두렵기 때문이다. 지금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TV뿐이다. 그는 지금 강남의 10억 정도 하는 아파트에서 소파를 침대 삼아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TV를 보고 있다. 밖에 나간 아내가 빨리 들어오지 않아 분을 삭이면서. 대기업 부장으로 재직하다 55세에 퇴직한 A씨는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아내와 함께 고품격 해외여행은 물론 뮤지컬 관람 등 문화생활을 즐겼다. 이른바 액티브 시니어로서 그동안 고생한 보람을 맘껏 누렸던 것이다. 그러나 고가의 아파트도 있으니 어찌 되겠지 하는 맘으로 5년을 즐기는 동안 어느새 저축해놓은 돈이 동나버리고 말았다. 그 허전함과 불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정했던 아내와의 사이는 벌어지기 시작했고 A씨는 집 안에 틀어박혀서, 아내는 밖으로 나도는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A씨가 다시 액티브 시니어로서 활기찬 노후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주택연금 가입하면 얼마나 받을 수 있나? A씨가 가택연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주택을 활용하는 방법밖에 없다. 10년 동안 일을 쉰 65세의 은퇴자에게 재취업의 길은 멀기 때문이다. A씨는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를 처분해 주택연금에 가입할 수 있는 9억원 이하의 아파트로 이사하면 1억원 정도의 여유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 A씨가 9억원짜리 아파트로 이사한 뒤 바로 주택연금 신청을 하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주택연금 월 수령액은 신청 당시의 연령과 주택가격, 지급방식, 보증료 크기 등에 따라 다르다. 만일 A씨가 매월 일정한 금액을 종신지급받는 조건으로 가입할 경우 월 227만4000원 정도를 받게 된다([표 1] 참조). 현재 A씨는 국민연금으로부터 매월 약 70만원을 받고 있으므로 국민연금과 주택연금을 합치면 300만원 정도의 생활비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생활비를 250만원 정도로 낮추면 7억짜리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고, 200만원까지 낮추면 5억짜리 아파트로 이사할 수도 있다. 월 생활비를 250만원으로 낮추면 3억 정도의 여유자금을 확보할 수 있고, 200만원으로 줄이면 5억원의 여유자금을 손에 쥘 수 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액티브 시니어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 주택연금 신청자 얼마나 되나? 주택연금은 2007년 7월에 도입된 이후 가입자 수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누적 가입자 수는 2012년 말 1만1393명에서 2016년 말에는 3만4444명으로 증가했다. 매년 주택연금에 가입하는 신규 가입자 수는 2012~2015년 5000~6000명 선에서 2016년 처음으로 1만 명을 넘어서기에 이르렀다([그림 1] 참조). 2016년 신규 가입자 수(1만309명)는 2015년보다 58.9% 증가한 수치다. 이처럼 지난해 주택연금 신규 가입자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내집연금’ 3종 세트 출시와 가입요건 완화 덕분이다. 주택연금이 고령층의 주요 노후준비 수단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한편 2007년 7월 주택연금 출시 이후 2016년까지 주택연금 가입자의 평균 연령은 71.9세, 평균 주택가격은 2억8300만원, 월 평균 수령액은 98만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주택 유형은 아파트가 84.0%로 가장 많았고, 주택 규모는 85㎡(약 25.8평) 이하가 78.9%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집연금’ 3종 세트란? ‘내집연금’ 3종 세트는 2016년 4월 25일 출시된 상품으로 다음 3개의 주택연금을 묶었다. ① 일시인출 한도를 70%로 늘여 만 60세 이상 고령자의 주택담보대출을 상환하고 주택연금을 이용할 수 있게 한 ‘주택담보대출 상환용 주택연금’, ② 40~50대가 보금자리론을 이용하다가 향후 주택연금으로 전환할 때 최대 연 0.3%p의 전환장려금을 지급하는 ‘주택연금 사전예약 보금자리론’, ③ 1억5000만원 이하의 주택을 보유하고 있는 60세 이상 고령자에게 월 지급금을 최대 15% 더 많이 주는 ‘우대형 주택연금’. 첫째, 주택담보대출 상환용 주택연금은 부부 중 한 명이 만 60세 이상이고 부부 기준 9억원 이하 1주택 소유자 또는 다주택 보유자의 경우는 보유주택 합산 가격이 9억원 이하이면 가입할 수 있다. 합산 가격이 9억원을 초과하는 2주택자는 3년 이내에 비거주 주택을 처분하는 조건으로 가입 가능하다. 주택연금에 가입할 때는 주택가격의 1.0%를 가입비 형태로 초기보증료를 납부해야 하며, 매년 연금지급 총액의 1.0%를 연보증료를 납부해야 한다. 보증료는 월 지급금 보장 및 미래손실 충당을 위한 재원으로 사용된다. 보증료는 연금지급 총액에서 자동 공제되므로 직접 납부할 필요는 없다. 연금지급 한도의 70%까지 일시에 인출해 주택담보대출 상환에 활용할 수 있다. 일시 인출한도 금액은 주택가격과 연령에 따라 다르므로 주택금융공사에 문의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만일 인출한도 전액을 사용했음에도 주택담보대출 전부를 상환하기 어려울 경우에는 최대 1000만원 한도 내에서 서울보증보험의 내집연금연계신용대출을 이용할 수 있다. 부부 모두 사망하거나 주택소유권을 상실했을 경우, 그리고 1년 이상 거주하지 않을 경우에는 주택연금이 종료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종료 시점에 주택가격이 연금수령 총액보다 많을 경우에는 남는 부분이 자녀에게 상속되므로 주택연금 가입 후 주택가격이 오르면 손해 보는 것 아니냐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연금수령 총액이 주택가격보다 많으면 부족분에 대한 청구는 하지 않으므로 혹시라도 자녀에게 빚으로 떠넘기면 어떻게 하나 걱정할 필요도 없다. 둘째, 주택연금 사전예약 보금자리론은 40~50대 중·장년층이 주택연금 가입을 미리 약속할 경우 이자 혜택을 주는 연금상품을 말한다. 주택금융공사가 취급하는 장기 주택담보대출로 보금자리론을 빌려 집을 살 때 주택연금에 가입할 것을 약속하면 연금전환 시점까지는 대출 원금과 이자를 갚다가 전환 시점이 되면 빚을 일시에 상환한 뒤 남는 돈을 연금으로 수령하는 방식이다. 부부 중 한 명이 만 40세 이상이고 무주택자 또는 부부 기준 9억원 이하 1주택 보유자일 경우 이용할 수 있으며, 주택 소유자 또는 배우자가 만 60세가 된 후 희망하는 시기에 주택연금으로 전환할 수 있다. 주택연금 전환가능 여부는 전환신청 당시의 주택연금 가입요건에 따라 결정된다. 만일 전환신청을 했는데 가입요건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에는 주택연금 가입이 거절될 수 있다. 초기보증료는 주택가격의 1.5%, 연보증료는 연금지급 총액의 0.75%다. 주택연금 종료 사유는 주택담보대출 상환용 주택연금과 동일하다. 이 주택연금은 금리를 0.15%p 우대해준다. 또 은행에서 만기 일시상환식 변동금리부 주택담보대출을 이미 받은 사람이 보금자리론으로 갈아타면서 주택연금 가입을 약정하면 추가로 0.15%p를 우대받아 총 0.3%p의 금리 인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우대이자는 60세 연금 전환 시점에 전환 장려금으로 일시에 받을 수 있다. 가령 만기 일시상환식 변동금리부 은행 대출을 가진 45세 B씨(3억원 주택 소유)가 보금자리론으로 갈아타고 주택연금 가입을 예약하면 주택연금으로 전환되는 60세에 296만원을 받는다. 사전예약 보금자리론에 가입한 뒤 주택연금으로 전환할 경우 조기상환 수수료는 면제된다. 단 주택연금 전환 이후 해지할 경우에는 면제된 조기상환 수수료를 납부해야 한다. 셋째, 우대형 주택연금은 부부 기준 1.5억원 이하의 1주택 보유 고령자의 노후생활비 지원을 위한 연금상품으로 일반 주택연금보다 월 지급금이 8~15% 정도 많다. 대출한도의 45% 이내에서 필요에 따라 수시인출을 할 수 있는 것도 이 상품의 장점 중 하나다. 기존 주택담보대출이 대출한도 45%를 초과하는 경우에는 자기자금으로 초과하는 금액을 상환한 뒤 우대형 주택연금에 가입할 수 있다. 자기자금이 부족할 경우에는 주택담보대출 상환용 주택연금을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 상품의 초기보증료는 주택가격의 1.5%, 연보증료는 연금지급 총액의 0.75%다. 주택연금 종료 사유는 앞의 두 상품과 동일하다. 주택연금 가입 방법 주택연금에 가입하려면 ‘상담→가입신청→주택연금 약정 및 실행’이라는 3단계를 거쳐야 한다. 상담은 콜센터(1688-8114)를 이용할 수 있고, 가까운 주택금융공사 지사나 은행 지점을 방문해 받을 수도 있다. 방문상담을 할 경우에는 예약상담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예약을 하지 않고 그냥 방문하면 오래 기다리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예약상담은 홈페이지(www.hf.go.kr)나 콜센터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가입신청 단계에서는 필요서류 제출 및 주택연금 보증신청이 진행된다. 필요 서류는 신분증, 주민등록등본 2부, 주민등록초본 1부, 전입세대열람표 1부, 가족관계증명서 1부, 인감증명서 2부 등이다. 가입신청을 하기 전에 거래할 은행을 정하고 대출 가능 여부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주택담보대출 잔액이 있는 은행에서 주택연금에 가입할 경우 조기상환 수수료가 면제된다. 주택연금 약정 및 실행 단계는 주택금융공사에서 은행으로 보증서를 발급한 뒤 고객이 거래은행을 방문해 주택연금 약정을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 연금이 통장으로 들어온다. 주택연금 이용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은? 주택연금은 노후준비가 부족한 고령자들이 노후 생활비를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연금을 수령하다 중도에 해지하면 초기보증 수수료를 날리게 되므로 배우자와 자녀 등 주택의 이해관계자들과 충분한 의견을 나눈 뒤 신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007년 7월 주택연금 도입 이후부터 2016년 말까지 주택연금에 가입했다 중도에 해지한 사람은 총가입자(3만9429명)의 12.6%인 4985명이나 된다. 주택 소유자가 사망한 뒤 배우자가 계속 연금을 받으려면 배우자가 채무를 인수해야 한다. 배우자가 채무인수 및 소유권 이전 등기를 완료할 때까지 주택연금이 일시적으로 정지되기 때문이다. 주택연금에 가입할 때 사전에 채무를 넘겨받는다는 약정, 즉 사전채무인수약정을 맺으면 주택 소유자 사망시 추가 약정을 맺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 소유권 이전 등기는 소유자 사망 후 6개월 이내에 해야 한다. 주택연금 이용 중 이사를 할 경우에는 담보주택을 변경해야 주택연금을 계속 이용할 수 있다. 단, 이사하려는 주택가격(평가액)에 따라 월 지급금이 달라지거나 정산을 해야 할 수도 있으므로, 사전에 주택금융공사에 문의해보는 게 좋다. >>손성동(孫盛東) 한국연금연구소 대표 삼성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 역임. 현재는 ‘한국연금연구소’ 대표로 있으면서 1인기업가를 꿈꾸고 있다. 공식블로그 ‘꿈꾸는 은퇴와 연금’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부산 동아대와 동서대에 출강하고 있다.
- 2017-02-28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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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행복 노후 은퇴 설계 멘토가 된 정기룡 전 대전중부경찰서장 "퇴근 후 2시간, 퇴직 후 20년을 위한 골든타임"
- ‘수십 통의 전화도 이젠 스팸 문자 달랑 세 통. 식탁 내 자리는 아내가 차지했네. 아이고 내 신세. 장롱 속에 철 지난 옷들, 통 넓은 양복바지 저 주인이 누구였었나 이젠 짐 덩어리. 아~ 지나간 시간, 아~ 그리운 시간, 있을 때 잘할걸, 퇴근 후 2시간’ 정기룡(鄭基龍·59) 미래현장전략연구소 소장 겸 삼성에스원 충청 상임고문이 작사한 노래 ‘퇴근 후 2시간’의 가사다. 노래 속 그의 어깨는 처져 있지만, 이제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현역 때 못지않은 바쁜 일상을 살고 있다. 물론 하루아침에 일어난 변화는 아니다. 지금의 행복한 시간이 있기까지, 그의 두 번째 인생 시계는 10여 년 전부터 돌아갔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1990년 그가 대전 서부경찰서에서 수사과장으로 지내던 시절의 일이다. 무심코 텔레비전을 보는데 대전 보문산에 경찰 서류 800건이 버려져 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큰 사건이었지만 “우리 관내가 아니니 문제없다”고 보고했던 그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가보니 자신이 소속된 대전 서부경찰서의 수사과 서류였다. 한 직원이 사무 감사를 앞두고 업무에 부담을 느껴 서류들을 산에 버렸다는 것이다. 그 일로 담당 직원은 구속되고, 당시 서장도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떠나가자 그도 위기의식을 느꼈다. “아내가 걱정하면서 ‘중징계 먹으면 퇴직해서 다른 일을 알아보라’ 하더라고요. 정말 나가야 할 일이 생기면 그래야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막상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는 거예요. 뭘 해야겠다는 답도 없고. 다행히 별일 없이 지나갔지만, 언젠가는 정년이 올 거라 생각하니 지금처럼 가만히 있을 수는 없더라고요.” 당시 그의 나이 마흔셋. 퇴직 후를 생각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금 떠올리면 그때 그런 마음이 생겨서 참 다행이라는 정 소장이다. 사건 이후, 그가 대전 정부청사 경비대장으로 일하던 시절에 확실한 전환점이 찾아왔다.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후배 경위가 어딜 바쁘게 가는 거예요. 물어보니까 학원에 요리 배우러 간다더라고요. 언제까지 경찰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정년 이후를 생각해서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준비한다면서요. 후배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그동안 뭐하며 시간을 보냈나 싶었죠. 퇴근하고 나면 소주 한잔하고, 집에 가면 티브이 보고 쉬는 게 전부였으니까요.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 싶어 일단 내가 좋아하는 것부터 찾아 시작하기로 했어요.” 제과·제빵, 떡, 두부 배우기에서 노무사 준비까지 그가 근무하던 대전에는 ‘성심당’이라는 유명한 빵집이 있다. 근처 성심당 제과·제빵학원에 등록한 그는 퇴직 후에 근사한 빵집 주인을 하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1년 3개월을 투자해 자격증까지 따냈지만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어렵게 자격증을 따고 학원 원장에게 ‘제가 빵집을 차리면 빵이 잘 팔릴까요?’라고 물어봤죠. 근데 ‘요즘은 프랜차이즈 빵집이 대세라 개인 빵집은 문을 닫는 추세다’라고 하는 거예요. 미리 알려줬다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텐데. 어찌나 야속하던지. 그래도 한번 해보고 나니 다른 것도 해볼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그다음에는 떡집에 찾아가서 떡도 배우고, 손두부 가게에 가서 두부 만드는 법도 배웠죠. 콩 가는 기계도 사고 솥도 걸었는데 집에서 하려니 잘 안 되는 거예요. 이렇게 저렇게 따져보니 지금까지 했던 것들로는 전혀 승산이 없겠더라고요.”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은 ‘사’자가 들어간 직업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노무사에 도전하기로 했다. 주말마다 새벽 첫차를 타고 서울 신림동 고시학원에 다니며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지만 아무리 해도 오르지 않는 영어 점수 때문에 결국 그만둬야 했다. 빵을 배우기 시작해 노무사 자격증을 내려놓기까지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가 자격증을 따느라 들인 돈만 해도 수천만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격증만 딴다고 해결되는 게 아닌 거예요. 그동안 투자한 시간이 얼마고 쓴 돈이 얼마인데. 근데 그거보다 더 속상한 게 이런 고민을 같이 이야기하고 들어줄 수 있는 멘토가 없다는 거였어요. 그러다 아내가 데일카네기연구소에서 하는 리더십 강의를 받으라고 권유했죠. 3개월에 240만원이라는 거금을 내야 해서 망설였는데 아내가 ‘자신을 위해 그 정도도 투자 못 하느냐’고 해서 결국 마음먹고 등록했어요.” 3개월간의 리더십 과정을 이수하고, 4회 코치를 하고 나면 강사로 활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코치 마무리 과정까지 총 2년이라는 시간을 들이고도 강사 실습 과정을 또 거쳐야 했다. 그때 나이 쉰,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 포기하는 순간 이혼이야. 지금 과정 수료 못 하면 당신 평생 후회할 거야!”라는 아내의 협박(?) 덕분에 강사 과정에 합격할 수 있었다. 정년퇴직 후 ‘이제 강사로 활동하면 되겠다’ 생각했는데 아직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아 있었다. “공무원 교육원에 강의를 나간 적이 있는데 그때 진행자가 저를 ‘프리랜서 정기룡씨’라고 소개하더라고요. 이전에는 명함 한 장이면 나에 대한 소개가 끝났는데, 퇴직하고 나니 한 30분 정도 내가 무엇을 했고 지금은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을 해야 했어요. 이런 고충을 이야기하니 아내가 차라리 연구소를 열면 어떠냐고 제안을 하더군요. 그렇게 ‘미래현장전략연구소’를 만들고 새 명함과 직책이 생겼어요. 소속감, 명함 등 현역에 있을 때는 당연했던 것들인데 퇴직하고 나니 그 소중함이 느껴지더라고요. 아침마다 하던 ‘다녀올게’라는 평범한 인사도 그런 것 중 하나였죠.” 아내의 꿈을 키워주는 것도 은퇴 준비 정 소장은 퇴직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내가 앞으로 어떤 명함을 쓸지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어떤 명함이 나의 얼굴이 될지 상상하면 마음이 그곳에 가기 때문에 은퇴 후 계획을 세우는 데 동기부여를 느낄 수 있다고. 물론 그에게는 ‘아내의 강력한 조언’ 역시 동기부여 역할을 했다. 그렇게 인생 2막을 준비한 것은 정 소장만이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뭘 해도 같이 배우고 함께하자고 약속했어요. 아내는 결혼하고 집에서 살림만 했는데, 제가 은퇴 준비를 하면서 한 가지를 하면 아내도 무엇이든 한 가지를 시작했죠. 분야는 다르지만 자격증 공부도 같이하고 석사, 박사 과정도 동시에 이수했어요. 지금은 어엿한 직장인이 됐죠. 최근에는 사회복지사를 준비했는데 부부가 나란히 합격했습니다.” 그는 은퇴 후 자신의 계획이 뚜렷하지 않을 때는 아내의 재능을 발견하고 역량을 키워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노후의 삶은 경제력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 주체가 자신이 아닌 아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내가 꽃을 좋아한다면 꽃꽂이를 배우거나 플로리스트 자격증을 따서 꽃가게를 차리도록 도울 수도 있고, 요리를 좋아하면 조리사 자격증을 따서 강사로 활동하게끔 지원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내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지, 잘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주부들은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보다 자기계발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에 그만큼 성과도 빠르게 나타난다. 반대로 남편들은 사회생활을 하며 시간을 할애하는 게 벅찰 수 있다. 야근과 회식이 잦은 우리 직장인들에겐 더욱 엄두가 안 나는 일이기도 하다. 정 소장 역시 이러한 이유로 ‘퇴근 후 2시간’ 투자가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은퇴 후 직업을 찾는다고 해서 현재의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되겠죠. 맡은 바 업무를 다 하고 자기계발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려면 나름의 노하우가 있어야 해요. 나는 경찰서장이 되면 절대로 회식이나 무리한 야근으로 직원들의 저녁시간을 빼앗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축하할 일이 있거나 논의할 문제가 있으면 점심시간을 활용하고, 퇴근 후엔 각자 취미활동을 하라고 권했죠. 그렇게 11년을 생활했는데 오히려 직원들도 업무시간에 더 충실한 태도로 임하더라고요. 무엇보다 가장 큰 수혜자는 그 시간을 알차게 사용한 나였죠.” 퇴직 후 20년 준비 완료, 이제는 나이 드는 준비 중 수많은 수험서와 빵 굽는 오븐, 두부 가마솥 등은 지난 꿈의 산물로 남아 있다. 은퇴 설계 전문 강사로 활동하는 그에게는 실패의 잔상과도 같지만, 그때의 경험은 그가 하는 강의의 좋은 재료로 쓰인다. 정말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본 그이기에 조언을 구하는 이들에게도 더 현실감 넘치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 그가 고군분투하던 시절 필요로 했던 ‘멘토’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보람도 더욱 크다. 직장생활에 한계가 있듯, 지금의 삶 역시 유한할 터. 그는 이제 노인이 되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혜롭고 너그러운 노인이 되기 위해 세 가지를 연습하고 있어요. 첫째는 내려놓는 것인데, 내가 가진 것이나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거죠. 둘째는 의존하지 않는 연습입니다. 배우자 없이도 혼자 살아갈 수 있어야 하잖아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자식 또는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도 잘해낼 수 있는 준비를 해야죠. 마지막으로는 신앙심을 키우는 것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누구나 두려워하죠. 이를 초월하고 소멸에 대한 마음가짐을 단단하게 하려면 무엇이든 종교를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강사로 활동하며 말하는 것 하나는 자신 있다는 그에게는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바로 ‘설교 잘하는 목사’가 되는 것이다. 내년 3월이면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는 그는 이전부터 롤모델로 삼은 이찬수 목사의 설교 유튜브 영상을 보며 매일 연습한다고 했다. 자신의 강점을 살리면서도 노인으로 살아갈 준비를 골고루 하고 있는 셈이다. “은퇴 준비 하면서 피아노도 배웠거든요. 시골 교회에 가서 직접 반주도 하고 설교도 하면서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사회복지사랑 직업상담사 자격증도 땄으니 어려운 중·장년을 위해 직업상담을 하는 것도 좋겠고요. 사실 아들이 신학대학을 다닌다고 하니 아내가 ‘당신은 신학대학원이라도 다녀서 아들에게 도움을 줘야지’라고 해서 시작했어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했는데 아들이 진로를 바꾼다지 뭐예요. 그래도 덕분에 또 다른 꿈이 생겼으니 이번에는 실패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 2016-11-2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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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나이를 즐기면 삶이 즐거워진다" 인문학자 김경집의 <나이듦의 즐거움>
- 인생에서 가장 좋을 때는 언제일까? 순진무구하고 혈기왕성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인문학자 김경집(金京執·57)은 “지금 내 나이가 가장 좋다”고 말한다. 그는 중년 이후의 삶은 ‘의무의 삶’을 지나 ‘권리의 삶’을 사는 시기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즐거움을 만끽하며 살기에 가장 좋은 때는 바로 ‘지금’이라는 것. 그런 생각을 담아낸 책이 바로 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책을 쓸 때 그는 40대 후반이었다. ‘나이듦’에 관해 이야기하기엔 덜 늙은(?) 게 아닌가 싶지만, 10년이 흐른 지금도 그때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한다. 제목에 쓴 ‘나이듦’이란, ‘늙어감’이 아닌 ‘제 나이를 사는 즐거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 그가 이야기하는 ‘제 나이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려서는 어른처럼 성숙해 보이려 하고, 반대로 어른이 되면 한 살이라도 어려 보이고 싶어 하죠. 그러니 정작 제 나이를 살아본 적이 없는 거예요. 오히려 자기 나이를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죠. 그렇게 힘들일 것 없이 제 나이에 맞춰 자연스럽게 즐기며 사는 편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늙는 것을 막을 수도 없잖아요. 그렇다면 자기 삶의 결대로 즐겨 보자는 거죠. 그런 마음으로 제 나이를 인식하고 누릴 방법을 찾다 보면 진정으로 내 나이가 좋아져요.” 그가 나이 들어 좋은 것 중 하나는 ‘자유로운 삶’이다. 의무감으로 바쁘게 살아왔던 지난날 못해 본 것들을 하나씩 해나가는 기쁨이 크다고 한다.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유’ 역시 나이가 들어 얻게 된 것이니, 지금의 나이가 고마울 수밖에. 5차선 곡선도로를 달리며 음미하는 풍경 그는 40대에서 50대로의 변화를 도로가 4차선에서 5차선으로 확장되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그동안 달려온 4차선 도로는 직선이었지만, 현재의 5차선 도로는 자유로운 곡선형이라고 한다. 바뀐 것은 도로만이 아니었다. “운전할 때 속도를 올리는 것만 신경 쓰면 주변 풍경을 놓쳐 버려요. 풍경을 감상하면서 가려면 속도는 떨어지고요. 초보 운전 때(젊은 시절)는 노련하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이제는 적당히 속도를 내면서 동시에 풍경도 볼 수 있는 나이가 됐죠. 직선도로의 속도와 곡선의 여유로움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어요.” 차선이 하나 더 늘어나며 생긴 변화도 있지만, 그의 인생에 가장 큰 변곡점은 교수로 지내던 가톨릭대학교를 떠났을 때다. 당시 그의 나이 쉰넷이었다. 정년까지 10년은 더 남았기에 그의 행동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도 용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 그려 보았던 인생 계획을 실천해 내기 위함이었다. “서른 살 무렵에 막연히 ‘나는 25년은 배우고, 25년은 가르치고, 25년은 마음껏 책 읽고 글 쓰며 문화운동에 뜻을 두고 살겠다’는 꿈을 꿨었어요. 누구에게 말한 적도 없고 혼자 괜히 무게를 잡은 건데, 살다 보니 잊고 지냈었죠. 근데 쉰이 넘어서 갑자기 떠오른 거예요. 한편으론 두렵더라고요. ‘이걸 정말 해, 말아?’ 결국 하자고 결심했고, 교수생활 딱 25년을 채우고 미련 없이 학교를 나왔어요.” ‘나였던 그 아이’와 ‘나인 그 아이’가 만나는 시간 계획대로 세 번째 25년을 살고 있는 그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꿈들을 되새겨 보곤 한다. 일하느라 바빠 잊힌 꿈도 있고, 이룰 수 없기에 애써 잊은 꿈도 있었다. 그는 삶의 무게를 한 꺼풀 덜어 낸 지금이야말로 꿈을 되찾고 이뤄 나가기 좋은 때라고 했다. “젊어서는 능력도 부족하고 여유가 없어 하기 어려운 일이 많죠. 나이가 들면 그동안 형성한 네트워크나 삶의 노하우가 더해져 꿈을 실현할 가능성이 커져요. 오래전 꿈을 자꾸 돌이켜보고 새로운 꿈도 꾸며 작게나마 이뤄갈 수 있는 것도 나이 들어 즐거운 일 중 하나죠.” 그는 “꿈을 실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이라며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에 나오는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라는 문장을 인용했다. “사람들에게 ‘행복하세요?’라고 물으면 흔히들 ‘그렇다’고 해요. 돈은 많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고, 아이들 건강하게 잘 컸으니 이만하면 행복하다는 거죠. 그런 분들에게 ‘그럼 지금의 삶이 어렸을 적 꿈꾸던 그 삶입니까?’라고 되물어요. 그러면 대답을 잘 못 해요. 그 이유가 ‘나였던 그 아이’하고 ‘나인 그 아이’를 만나게 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해요. 꿈은 ‘나였던 그 아이’가 꾸는 게 아니라 ‘나였던 그 아이’가 꾼 꿈을 ‘나인 그 아이’가 지금 실현하는 거예요. 꿈이 없다는 건 ‘나인 그 아이’가 없거나, ‘나였던 그 아이’를 잊은 거죠.” 이 두 아이가 대화하고 서로 격려하며 때론 갈등도 하면서 자주 만나야 내적인 삶이 더 풍부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런 그는 꿈을 잘 이뤄가며 사는지 궁금했다. “‘꿈을 이룬다’보다는 ‘꿈을 누리다’라는 말이 더 좋더라고요. 꿈은 성취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리고 있는 현실 자체가 즐거운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획득하려고만 하죠. 젊어서의 꿈은 목표지향적일 수 있지만, 나이 들어서의 꿈은 과정을 즐기는 데 의미가 있어요.” 그는 현재의 삶이 과거 꿈꾸었던 삶과 어느 정도 맞는 편이라고 했다. 30대 때 이루고자 했던 25년 단위 인생 계획도 잘 지켜가고 있다. 그러나 100세 시대라 불리는 요즘, 네 번째 25년에 대한 계획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는 10년쯤 후에 생각해 보겠다고 답했지만, 어느 정도 밑그림은 그려 놓은 듯 했다. “75세쯤 되면 무언가를 생산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이어 주고, 다음 세대를 격려해 주는 일을 해야겠죠. 문화공동체운동 같은 걸 계속해 나가려고 해요. 아무리 좋은 뜻으로 만나는 모임이라도 부딪히는 일이 생기죠. 그런 갈등을 풀어 주고, 다시 연결하는 ‘매개 점’ 역할을 하는 게 어른의 몫이라 생각해요. 꿈은 혼자 이루는 것도 있고, 함께 해 나가는 것도 있죠. 혼자 악악거리며 사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꿈에 벽돌 한 장 쌓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새해 첫날 쓰는 인생의 끝자락 매사 꿈을 꾸라고 조언하면서도 그는 해마다 1월 1일이면 유서를 쓴다. 지난해 서랍에 넣어두었던 유서를 꺼내 읽고 새 유서를 쓰는데, 그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이 남다르다고 한다. “열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예닐곱 살쯤 아버지랑 산에 갔다가 못 내려오게 됐는데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이런 말씀을 하셨죠. ‘저 별이 아무리 예뻐도 너만큼 사랑스럽고 아름답지는 않아. 아버지는 널 제일 사랑해’라고요. 조금 오글거릴 수도 있는데 지금까지 그 말이 살아서 마음이 흔들리고 어려울 때마다 생각나요. 그 한마디가 나를 지켜 준 것처럼 우리 아이들에게도 인생을 사는 데 좌표가 될 만한 이야기를 남겨야 하잖아요. 언젠가 제가 떠나고 나면 서랍 속에 담아 뒀던 유서가 그 역할을 할 수 있겠죠.” 매년 쓰는 유서는 일종의 인생 계획서이자 지침서가 된다. 다음 해 유서를 풍요롭게 채우기 위해 올 한해도 허투루 살지 않아야겠다는 다짐도 하고, 자기 성찰도 하며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의미 있는 유서이지만 모아 두지는 않는다. 그런 행동도 집착이고 결국 얽매이게 된다는 것이다. “새 유서를 쓰기 전에 한 번 읽으면서 ‘올해 결산 괜찮네!’ 하고 탁 태워 버려요. 그러고 깔끔하게 잊어버리죠. 내가 정해 놓은 거지만 가끔은 쓰기 싫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땐 ‘그럼 음력설에 쓰지 뭐’ 그래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남의 눈치 봐야 하는 일도 아닌 내 자유니까요.”
- 2016-10-0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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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욕탕에서 일어난 일
- 추석 전날이다 가족이 있는 제주도 도민이라면 이런 날은 제사준비다 음식 장만이다 집 떠난 가족들이 올 것이니 그 준비다 하여 바쁠 것을 예상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조용하리라 생각하고 이 날을 택하여 목욕탕을 이용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목욕탕이 평소보다 사람들이 더 많다 많은 사람들 중에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보였다. 자식들에게 잘 보이려는 어르신들 미용일거다. 추석이 가까워 오면 시골의 미용실은 엄마들 파마하는 손님으로 언제나 성시를 이루곤 했다 필자와는 좀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몸 겨누기도 힘 드는 연세가 지긋이 드신 분이 스르르 탕의 바닥으로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엇~ 하면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그 옆의 중년의 부인이 얼른 할머니를 안았다 워낙 부축한 중년여인의 동작이 재빨라 할머니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봉사가 몸에 배였는지 할머니를 잘 가누어 잠시 쉬게 했다. 쉰 후에는 우유도 드리고 전신 맛사지를 하여 정신이 금방 드셨다. 그리고는 친절한 부인은 할머니를 깨끗하게 씻겨 드렸다 다른 친절한 부인도 거들어 머리를 감겨 드리고……. 사고 뒤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었다. 필자가 목욕을 마치고 옷장이 있는 방으로 나오니 그 할머니도 나오셨는데 옷장을 찾을 수 없는지 우왕좌왕했다. 옷장의 키도 잃어버렸고 어디쯤인지도 모르고 난감한 사태다. 누군가 먼저 탕에서 나와 준비가 된 아주머니 한 분이 친절하게 집전화 번호를 묻고 집이 어니냐고 물어보아도 아는 것은 전무……. 다행이라면 춥지 않은 기온이다. 목욕탕의 손님들 중 친절한 마음씨의 손님들이 이리저리 뛰면서 할머니를 도우려는 동안 카운터의 주인을 대표하는 사람은 남의 불 보듯 구경만 한다. 친절한 손님이 탕에 까지 들어가 목욕하고 있는 사람 중에 이 할머니를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큰소리로 도움을 구한다. 할머니에게는 목욕탕에 달린 미용실에서 가운을 얻어다가 입혀드리고 난리 통이 한동안 지속되었건만 여전히 주인 쪽에서는 아무 조치가 없다. 아직은 제주도 특유의 인정사회가 완전히 메말라 버리지 않았다 추리력이 있는 사람들이 머리 합하여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할머니 옷은 찾았다 옷을 입고 나니 그 때 들어온 손님이 할머니 집이 어디라고 일러준다. 목욕탕에서 일어난 일은 손님들의 손에서 종결이다. 단순한 이웃의 일일까? 필자는 이런 상황을 이번까지 세 번 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세 번 모두 상황의 마무리가 주인의 손이 아닌 손님들의 협동이란 것이다. 그 가게에서 일어난 사고인데 1차 해결의 책임자가 가게주인이니 가게 주인이 부재라면 주인을 대행할 종업원이어야 한다. 책임의 주체는 남의 일처럼 소극적인 협조정도이고 할머니를 직접 적극적으로 도운 사람들은 같은 손님이다. 가게 측에서는 도와준 손님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말도 없다 이웃에서 일어 난 불상사이니 이웃끼리 도우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인가? 대중목욕탕에는 노약자에 대한 어떤 경고문도 없고 제한도 없다 뜨거운 찜질방에는 경고문이 붙었으나 일반 탕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경고문도 없고 사고 후의 처리도 오로지 손님들의 호의로만 이루어지는 사고대처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다. 이 태도가 미풍양속이라고 안일하게만 생각 할 수 있는 것인가.
- 2016-09-19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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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더스 어드벤쳐(The Adventurer: The Curse of the Midas Box)'
- 가족용 어드벤처 판타지 영화이다. 영국, 스페인, 벨기에가 무대로 나오고 조나단 뉴먼 감독이 만들었다. 주연에 아뉴린 바나드(머라이어 역), 마이클 쉰(채리티 역), 레나 헤디(모니카 역), 샘 닐(루거 역)이 나온다 무엇이든지 손에 닿기만 하면 금이 된다는 신화처럼, 무엇이든 상자 안에 담기만 하면 황금으로 만든다는 전설의 마이더스 박스를 찾아 모험한다는 줄거리이다. 원제는 '마이더스 상자의 저주'라고 번역된다. 이 상자가 악당의 손에 들어가면 단순히 그 악당만 부자가 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무제한으로 금을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에 경제학적으로 금의 희소가치가 떨어지면 전 세계 금융 질서가 무너져 대 혼란이 온다. 각국 은행이 보유한 금이 무용지물이 되어 금 본위 경제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다. 금을 보유한 것에 바탕을 두고 화폐를 찍어내야 화폐 가치가 유지되는데 금 보유 없이 화폐를 찍어 내면 화폐 가치를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상자는 공신력 아래 엄격히 통제 되어야 한다. 희소 광물인 금은 희소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용도도 많다. 광물에서 채취해야 하지만, 만들어낸다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그것도 화수분처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면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복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금을 만들어 내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해 왔다. 그러나 여전히 금은 희소 광물이다. 금을 만들어 내는 방법이 없으니 이렇게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악당 루거는 박스를 열 열쇠를 차지하기 위해 머라이어의 부모와 동생을 납치한다. 부모님의 오랜 친구 채리티 대위가 부모와 동생이 있는 곳에 가려면 배를 타고 섬에 있는 호화 호텔에 잠입하여 박스를 찾아내야 한다며 머라이어가 가라고 한다. 머라이어는 섬에 도달하자마자 호텔 짐꾼으로 취업한다. 호텔은 온천이 여러 가지 질병에 효험이 있다 하여 손님들로 북적인다. 일손이 부족한 것이다. 머라이어는 호텔 짐꾼으로 일하면서 호텔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한다. 머리이어의 제복을 만들어준 여자 모니카에게 협조를 요청하지만, 일자리를 잃고 싶지 않다며 거절한다. 그러나 결국 머라이어의 요청을 들어 준다. 부모를 찾겠다는 절실함도 읽었지만, 머라이어에게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은 이성간에 끌리는 힘이 있어 그 사람이 좋으면 조건 없이 같은 편이 된다. 그렇게 시작한 모험은 머라이어가 가진 부적으로 문이 열리고 비밀 통로 등이 나타난다. 비밀의 방을 뒤지다 보니 호텔 전 주인이 살해당했다는 사실도 알아낸다. 지하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는 동생 펠릭스도 찾아낸다. 드디어 마이더스의 상자도 발견한다. 악당 루거는 머라이어를 추적하고 아버지 친구 채리티가 나타나 이들을 구해 낸다. 호텔에 오래 전부터 잠입해 있던 왕실 비밀요원들도 합세하여 드디어 악당 루거 일행을 처단한다. 마이더스 상자는 왕실에 바친다. 장차 원하면 왕실 비밀요원 자리는 추천해준다고 한다. 머라이어를 도왔던 여자 모니카는 아버지를 잃었지만 머라이어가 같이 살자고 권한다. 사랑으로 결실을 맺는 것이다. 마이더스 상자를 찾았으니 머라이어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장면은 없다. 돈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돈은 오히려 충분하기보다는 알맞게 관리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마이더스 상자를 들춘 순간 재앙이 시작된다. 요즘 추세로 볼 때 이 영화는 유치하다. 스토리 전개가 뻔하다. 거대한 기계실, 비밀의 방, 마이더스의 상자 등이 등장하지만, 다른 데서 그 이상의 자극적인 소재를 많이 접하다 보니 그 정도는 만화 수준이다. 그러나 가족이 같이 보는 영화로는 그런대로 볼 만하다. 가족애가 있다. 상상이 있고 모험이 있다. 그리고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금의 가치에 대한 경제학적 분석도 아이들 교육에 도움이 될 것 같다.
- 2016-09-12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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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콕여행기] (2)대중교통 능숙하게 이용하기
- 피부로 느끼는 여행의 설렘은 비행기 바퀴가 이륙하는 그 순간부터다. 요행히 공항에 일찍 도착한 덕에 차지한 비상구 자리는 이코노믹 증후군에 안전한 편이었다. 하긴 5시간 10분 정도면 비행기 여행치고 그리 먼 곳은 아니다. 어쩌다 까다로운 티케팅 직원을 만나면 필자 같은 쉰 세대에게 그 자리는 어림도 없다. 정말 위급한 상황이 일어나면 승객 대피에 도움은커녕 민폐만 끼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영화 2편과 식사 1번으로 가볍게 도착한 방콕이 딴 나라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은 여권 검사자의 느려터진 동작에서부터다. 외국인에게도 허락된다면 인천공항처럼 자동 검색기에 등록하고 싶을 지경이다. 참으로 느긋하다. 이 또한 느림의 미학이라 해야 할지. 그들은 말씨마저 ‘~카아’ 하며 친절하게 쭈욱 뽑아대니 영화 의 나무늘보가 생각날 지경이다. 그런데 방콕에서 신기하게도 빠른 것이 있다. 물론 사람은 아니고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다. 마치 놀이동산에 온 것 같아 신이 나기도 하지만, 서울에서 온 우리는 적응이 안 된다. 이렇게 빠르면 고령자들은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 느린 사람들이 씽씽 오르는 에스컬레이터를 멀쩡하게 타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가 아이러니다. 느린 그들은 인내심도 대단하다. 서울을 능가하는 방콕의 교통 체증에도 모든 차는 조용히 기다린다. 도심 골목골목도 다 차들로 가득한데 불행히도 주차된 차가 아니고 시동 걸린 차다. 필자가 볼 때 그들은 거의 득도의 경지다. 일 년 내내 더위를 견디다 보니 그런 인내심이 생긴 건지 불교 신앙의 탓인지 그것이 알고 싶다. 도심 곳곳은 물론 심지어 쇼핑센터 앞에도 불상, 향 피우는 곳과 간단한 제물들이 놓여 있으니 종교 덕분도 있는 듯하다. 방콕에서 여행자가 이용하기 손쉬운 교통수단은 택시와 지하철이다. 택시를 이용할 때에는 합법적인 ‘우버 택시’가 좋다. 우선 우버 앱을 스마트폰에 깔고 서울에서 카카오택시 부르듯이 전화만 하면 된다. 택시를 부르는 순간부터 그 차가 진행하는 것이 휴대전화 지도상에 뜬다. 요금도 정확히 찍혀 나오니 흥정하거나 싸울 일도 없다. 한 가지 중요한 팁은 우버 택시를 처음 이용할 때에는 약 9천 원 정도를 깎아준다. 두 사람이 가면 두 번을 아주 싼 값에 이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우리도 공항을 오갈 때 사용해 택시비를 한 번에 3천 원 정도로 해결했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순간이다. 지하철의 시설은 우리나라보다 못하지만, 요금은 더 합리적인 편이다. 정거장 수에 따라 대여섯 가지로 차등을 두었다. 정기권이 아닌 경우 매표기에서 사야 하는데 반드시 동전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은 불편했다. 지폐밖에 없을 때는 일일이 창구에 가서 동전으로 바꾸자니 번거로웠다. 왜 지폐도 되는 매표기를 놓지 않는 걸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정류장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이 같은 곳에 선다는 점이다. ‘~행’이라고 쓴 것이 우리나라처럼 조금 더 가거나 덜 가는 거려니 하고 무심코 탔다가는 엉뚱한 곳으로 마냥 갈 수도 있다. 외국어라 발음이 낯설어 언젠가는 방송이 나오려니 하다가는 국제 미아가 되기 십상이다. 여행자가 많은 방콕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이 다 모이지만, 중국 사람은 매번 싸우듯이 떠드니 어디서나 튀어 실제보다 더 많아 보인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도 만만치 않다. 매일 한국말이 어디선가 들린다. 요즘은 대개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부르거나 채근하는 소리다. 그것도 주로 빨리하라는 얘기다. 오늘도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뭐든 빨리 못해 애가 탄다.
- 2016-07-14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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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머리 자르는 날
- 필자는 남편과 한 달에 한 번 실갱이하는 날이 있다. 바로 머리 깎는 날이다. 남편은 그날이 오면 지루하게 앉아 있을 접이 식 조그만 의자, 싹싹 갈아 보관한 날렵한 가위, 미국에서 사온 100V짜리 전기 바리 깡, 주섬주섬 주어 모은 각양각색 못 생긴 빗들, 한국의 220V에 끼우려면 다운 트렌스까지 좁아 터진 목욕탕 변기뚜껑 위에 늘어놓는다. 총 출동한 도구들은 필자의 손길을 기다린다. 백인 동네 미용실은 겁이 난다고 가기를 꺼려했다. 미국 살 때부터 화장실 한쪽 구석에서 치뤄 지던 행사가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다. 제발 미용실 좀 가라고 해도 한 손 번쩍 들어 손 사래를 절레절레 친다. 무조건 당신이 최고라며 엄지 손가락 번쩍 들어 힘차게 한눈을 찡긋거리면 가라 앉았던 마음도 슬슬 꿈틀거려 온다. 필자는 마지 못해 무거운 몸 추슬려 무기를 찾아 놓고 다시 실갱이 전쟁터로 나갈 채비를 차린다. 어느 새 수북하게 자라버린 머리 잡초들 사이로 나이 먹어 처져버린 어깨 위에 커버를 씌운다. 넙적한 등 한 대 툭 때리고 물을 뿌려 곱게 빗질을 한다. 서툰 솜씨로 손가락 꼬물꼬물 가위질에 혼신을 다하면 등 짝에는 어느새 땀이 흘러 내린다. 허리 세워 거울을 바라보며 긴장하던 남편은 그새 고개가 꾸뻑질을 한다. 이때다 싶어 선무당 미용사는 머리 위로 한 방을 쥐어 박는다. 힘 들어 죽겠는데 잠이 오냐며 속 시원하게 또 한 방을 때려본다. 깜짝 놀라는 남편은 치사하다고 내려 앉았던 두 눈을 흘겨 뜨며 힘껏 노려 본다. 그러게 나가서 하라니까 말을 안 듣는다고 짜증을 내면 다소곳이 자세를 낮춰 머리를 번쩍 들어 준다. 피식 웃어 대는 초보 기술자는 오늘만큼은 대장이 따로 없다. 20분 남짓 걸려 이리 돌려 대고 저리 돌리고 하다 보면 아수라장 작품은 기막힌 새 사람으로 아무리 봐도 그럴듯하다. 어느덧 십 여 년 세월에 서툰 고수가 됐다. 최고의 손 놀림으로 덥수룩하던 노인이 머리가 청년처럼 훤 해졌다. 맘에 드냐고 물으면 거울 속으로 요리조리 돌아 보다 그냥 좋다고 한다. 며칠 있으면 또 자라는데 무슨 대수냐고 걱정 말라며 뒷 거울에 한 눈 찡긋 또 다음을 기약한다. 하얗게 쉰 머리가 싱글벙글 웃음으로 입을 쪽 내민다. 미용실 가는 게 귀찮아서 일까. 진짜 미숙한 손 맛이 좋은 걸까. 아님 마누라와 실갱이가 싫지 않은 걸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툭툭 털어 끝내고 난 뒤 아이고 허리야 엄살 떨면 아수라장 남은 뒤처리는 완전히 그 사람 몫이 된다. 그래, 이제 한 달이나 남았다. 조금 힘은 들지만 좋다는데 또 어쩌겠는가. 혼자 지껄인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그 까짓 것 못해 주랴. 함께 늙어 가면서 오로지 등 기대고 사는 데 그 무엇은 못해주랴.
- 2016-06-14 1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