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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난감 1호 ‘오디오’와 연애하다
- ‘논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빈둥빈둥하는 것도 노는 것이지만 바쁘게 노는 건 방향이 있고 의미가 있는 놀이일 것이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말처럼 인간은 먹고살기 위한 일 외에는 놀면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놀이에서 예술 활동이나 스포츠 활동이 생겼다는 사실을 보면 논다는 게 단순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혼자서 놀아도 그 방식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내 경우 직장이 없어 노는 게 맞지만 그렇다고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아내를 도와 집안일을 하는 거야 누구나 할 테고 그런 일을 빼고 나면 취미생활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는 삶의 영역을 노는 것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 본격적으로 나의 ‘집에서 혼자 놀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얼마 전 ‘힘들지만 즐거운 여름나기’라는 제목으로 전원생활의 빛과 어둠을 비교해 글을 썼다. 즐거운 것 중 하나로 매실주 담그는 얘기를 했는데 늦가을인 요즘, 애주가로서 그때 담근 매실주를 조금씩 마셔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열심히 골프를 치러 다녔다면 이런 맛을 즐기는 호사를 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 친구가 은퇴 후 10년이 된 나이인데도 테니스를 열심히 치러 다닌다 해서 좀 부러웠다. 나는 젊은 시절 치다 이마를 다친 후 손에서 놨다. 하지만 코트 위의 검투사처럼 사각 틀 속에서 온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테니스의 매력은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친구는 체력은 문제없는데 같이 칠 파트너를 찾기가 점점 어려워진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서글픈 현상이지만 어찌할 것인가. 골프나 테니스에 대한 나의 희미한 갈망은 텔레비전 중계로 풀곤 한다. 재미 들린 작은 농사 스포츠도 에너지를 소모하는 운동이지만 꽃과 나무들을 돌보는 데도 에너지를 많이 쓴다. 꽃나무들은 사올 때처럼 예쁘게 가만 있지 않는다. 보기 흉하게 자라지 않도록 가꿔줘야 한다. 그냥 놔두면 야생의 숲처럼 돼버린다. 하루 작정하고 나가 일하면 겉옷 속옷 할 것 없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린다. 일을 끝내고 샤워 후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면 그 즐거움이 스포츠 활동과 진배없다. 무언가를 생산했다는 보람까지 느끼면 쾌감이 더 오래간다. 꽃나무뿐만 아니라 40~50그루 규모의 블루베리 농사도 짓고 있다. 열매를 1년 내내 생으로 또는 가공해서 먹을 수 있어 좋다. 블루베리는 면역력 향상은 물론 건강에 좋은 식품으로 소문이 나 있는데 눈을 좋게 해주는 효능도 크다. 실제로 연전에 돋보기를 맞춰 뭘 읽을 때마다 써보니 영 거추장스러워서 아예 빼닫이에 넣어놓고 있었는데 블루베리 농사를 짓고부터는 지금까지 돋보기 찾을 일이 없다. 한번은 쓰고 다니는 근시 안경이 맞지 않아 안경점엘 갔는데 시력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믿기 어려운 현상 아닌가.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다. 7년 전 블루베리 2년생, 그 어린것을 심어놓고 밤낮으로 물 주며 돌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키가 2m를 넘는다. 커갈수록 일은 더 많다. 잡초 뽑고 오래된 가지 베어내고 더 이상 크지 않도록 긴 가지는 잘라주고, 누운 가지는 지지목을 대주기도 한다. 품종별로 익는 시기가 달라 열매 따기는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또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집어서 따야 한다. 수확 시기가 되면 우리 부부의 블루베리 열매 따기 걱정이 시작된다. 내가 “좀 덜 따고 놔두면 어때? 떨어져서 개미가 먹으면 안 될 일이 있나?”하며 늑장을 부리면, 아내는 “1년 내내 먹을 블루베리잼은 어떻게 만들죠? 그렇게 좋아하는 작은애한테는 뭘 보내주죠?” 한다. 블루베리 농사는 벌써 9년째에 접어들었다. 돈 생기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가족들과 나누고 지인들에게도 한 번씩 맛보게 하려면 고생스러워도 해야 한다. 사는 게 그런 것 아닌가. 작은 농사를 지어도 이렇게 배우는 게 많다. 스포츠와 농사를 비교한다는 건 좀 웃기는 일이다. 그렇지만 여럿이 하는 스포츠에 비해 농사는 혼자서도 할 수 있고 집중을 하다 보면 나름대로 지혜도 는다. 명품 매실주 담그기 매실주 담그는 재미에도 푹 빠졌다. 애주가로서 담금 매실주를 조금씩 마시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은 매실로 주로 우메보시를 만들어 먹는데, 우리처럼 청매를 쓰는 게 아니라 다 익은 황매를 이용한다. 익은 열매는 나무 밑에 보자기를 낮게 매달아놓고 가지를 털면 잘 떨어진다. 우리 부부는 그런 준비까지 할 여유가 없어서 그냥 긴 대나무 장대로 털어낸 뒤 주워서 모으는 방식으로 수확을 한다. 그렇게 두어 시간 몰입해 작업을 하고 나면 만족감이 든다. 큰 플라스틱 용기에 쌓이는 굵고 누런 매실이 얼마나 듬직해보이던지. 수확 후에는 세척하고 말리는 데 하루를 다 써야 한다. 다음 날에는 큰 유리 용기에 담금용 소주를 붓고 매실주를 담근다. 매실을 저울에 재서 일정량을 쏟아 넣고 거기에 맞춰 소주를 부으면 된다. 자그마치 큰 용기 두개, 작은 용기 한 개. 세 용기에 채워놓고 나면 뿌듯하다. 이런 상태로 5년은 숙성해야 마실 만한 명품 매실주가 된다. 좋다. 5년을 기다려보자 하면서 작업을 마쳤다. 흐뭇한 마음으로. 독서와 음악 감상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지내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항간의 말은 맞다. 알면서도 못하는 건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 또한 맞다. 학교 다닐 때 취미를 기록해 써낼 때가 있었는데 특별한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쉽게 피아노, 바이올린, 축구, 노래하기 등을 써넣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독서, 음악 감상 같은 걸 취미라고 기록했다. 커가면서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한 취미가 없으면 그때마다 독서 아니면 음악 감상이 등장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독서를 취미로 할 만큼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음악을 즐기는 사람도 흔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음악을 좋아하는 걸 큰 다행으로 여긴다.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노래방을 찾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우리 생활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부분은 실로 엄청나다. 전국노래자랑, 복면가왕, 히든싱어, 나는 가수다,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 케이팝스타, 위대한 탄생, 미스트롯, 미트터트롯 등 텔레비전 프로그램만 봐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노래와 음악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요즘 프로그램만 꼽아봐서 그 정도이지 노래와 함께하는 것들을 다 열거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민족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클래식 듣기를 좋아해 지금도 집에 들어오면 일단 오디오나 텔레비전 음악 채널을 틀어놓는다. 이 글을 쓰면서도 음악을 듣고 있다. 고교 시절, 서울에 올라와 지내는데 어느 날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 선율을 듣게 됐고 푹 빠져버렸다. 그렇게 ‘대단한 경험’을 하고 나서부터 나는 클래식 음악만 들려오면 귀를 기울이곤 했다. 좋은 오디오와 LP 음반을 많이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어 종종 그 집에 가서 감상을 하거나 빌려와 들어보기도 하면서 음악 감상 취미를 길러왔다. 매혹적인 나만의 ‘소리’에 취하다 20여 년 전 비엔나에서 근무할 때 덴마크 산 뱅앤올룹슨(Bang&Olufsen, B&O)을 제법 비싸게 사서 듣고 다녔다. 그 후 여기저기 옮겨 다닐 때도 늘 잊지 않고 챙겼다. 지금도 제주 집에 놓고 수시로 음악을 듣는다. 나는 한 번씩 서울에 가면 교보문고에 들러 음악 시디를 아낌없이 사온다. 아내는 이 기기에 ‘남편 장난감 1호’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생일 때 선물로 받은 노트북, 소니 카메라는 2호쯤 될 것이다. 어쨌든 이 음향기기는 딱 한 번 고장이 나서 회로를 교체하는 등 수리를 한 적 있지만 아직까지 처음의 성능을 잃지 않고 있다. 무얼 더 바랄까. 내가 듣는 음악, 우리가 듣는 음악은 정말 다양하다. 나는 클래식은 말할 것도 없고 각국의 대중음악을 다 좋아한다. 샹송, 팝송, 칸초네, 칸시온, 컨트리, 탱고, 파두 등등. 라디오 방송 중 클래식 다음으로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KBS클래식FM의 ‘세상의 모든 음악’이다. 세상의 모든 음악 속에는 세상의 모든 삶이 녹아들어 있다. 감상하다 보면 그 사람들과 교류하는 느낌이다. 적어도 그런 감성으로 모든 음악을 듣고 즐기고 이해한다. 스페인 음악을 듣다 보면 ‘코라존(Corazon)’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데, 번역하면 Heart, 즉 마음, 사랑, 애인이다. 노래를 듣다가 이 가사가 나오면 시공을 초월해 사랑에 빠진 남녀가 상상된다. 클래식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니 이렇다 저렇다 하기는 좀 그렇지만 고전음악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삶의 기본을 생각하게 해주는 느낌이 든다. 대중음악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의 감정을 고양된 형태로 표현해주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많은 천재 작곡가들이 온 정열을 바쳐 만든 음악을, 최고의 기예를 뽐내는 천재 연주가들이 빚어내니, 그 소리는 바꿔 말하면 천상의 소리에 지상의 양식이요 품격인 것이다. 그러니 음악에 빠졌다는 건 엄청난 경험이자 행복이라 할 수 있다. 하우스 콘서트를 열다 아마추어일 뿐인 음악 애호가로서 크게 한 번 객기(客氣)를 부린 일이 있다. 부모님을 통해 알게 된 재영 바이올리니스트 줄리아 황이 한국에 요양차 한두 달 머무르는 기회에 남산 언저리에 있는 우리 집에서 하우스 콘서트를 연 것이다. 런던에서 연주활동을 하는 그는 7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바이올린을 배웠고 9세 때 신동으로 등장한 젊은 음악가다. 고교 시절에는 공부를 너무 잘해 케임브리지대학교와 왕립음악원에서 입학 허가를 받고 전자를 선택했다. 1688년에 제작된 과르네리우스의 악기로 연주하는데 그 소리가 형용할 수 없이 좋았다. 그는 나흐트무지크(Nachtmusik)란 이름으로 그날 여섯 곡을 선사했다. 좁은 집이었지만 여남은 명이 참가해 나름 성황을 이뤘다. 처음 해본 하우스 콘서트치고 성공이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제주와 서울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어보고 싶다. 음악 애호가가 많을수록 세상이 평화로워진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순진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클래식 음악의 본질이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주 가는 이태원에 루체(LUCE)라는 시니어 아마추어 성악가 모임이 있어 이따금 그들의 연주를 듣는다. 모두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음악의 힘이다. 글 쓰면서 혼자 놀기 집에서 혼자 놀기 중 내 시간을 가장 많이 쓰는 건 글쓰기다. 이젠 취미가 됐다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 글을 써서 어디 기고를 하면 원고료도 나오니 돈 써가며 하는 취미가 아니라 시간도 잘 보내면서 돈도 생기는 취미다. 글 써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은 일이라서 어떨 때는 지겹다고 한다. 나는 다르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 정기 필진으로 참가하고 있는데 한 달에 한두 번꼴로 글을 쓴다. 주제와 형식이 자유롭다. 단, 원고료는 없어 일종의 재능 봉사라 할 수 있겠다. 글이라는 건 아무 때나 써지지 않는다. 글 한 편 쓰기 위해 평소에 늘 글감을 생각하면서 지낸다. 이게 또한 재미다. 이번 행사에 참여하면 어떤 글이 나올까, 그 공연은 어떤 글감이 될까, 저 활동을 하면 어떤 글로 이어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내니 심심치 않다. 글을 발표하면 주변 친구들과 지인, 동창, 각종 단체에도 보내는데 갖가지 독후감을 보고 듣는 재미도 있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자유를 느낀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쓰지는 않는다. 잘 쓰고 싶은 욕심에 나름의 원칙을 갖고 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은 두 가지 기준을 충족한다. 첫째, 읽는 사람이 재미를 느껴야 한다. 둘째, 많은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나는 일로서든 취미로서든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겠지만 이 두 가지 기준에 충실할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한순간 한순간이 좋은 글을 만들기 위한 생각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 2019-12-2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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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라언덕 넘어 김광석골목까지, 시간을 거슬러 걷는 길
- 대구 청라언덕으로 가는 길에 가곡 ‘동무생각’을 흥얼거렸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어릴 적 배운 노래인데도 노랫말이 또렷이 떠올랐다. 우리나라 근대 풍경을 묘사한 벽화 골목을 지나자 야트막한 언덕이 나타났다. 정원으로 가꾼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지은 서양 주택 세 채가 그림처럼 자리했다. 청라언덕은 상상했던 것만큼 아름다웠다. 걷기 코스 동대구역▶ 버스▶동산 청라언덕▶ 3·1만세운동길 계단▶ 계산성당▶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마당깊은집▶ 교남YMCA▶ 대구기독교역사과(구 제일교회)▶ 약령시한의약박물관▶ 진골목(종로)▶ 화교협회(화교소학교)▶버스▶ 김광석골목 청라언덕에서 부르는 연가 1890년대 조선에 들어온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들은 동산언덕을 사들여 주택, 교회, 병원을 지었다. 푸른 담쟁이넝쿨이 붉은 벽돌로 지은 주택을 휘감았다. 대구읍성 동쪽 언덕이었던 동산은 이때부터 푸를 靑(청)과 담쟁이 蘿(라) 자를 써 ‘청라언덕’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1910년경 선교사들이 지은 서양 주택 세 채가 남아 있다. 선교사 이름을 딴 스윗즈 주택, 챔니스 주택, 블레어 주택이 그것. 미국식 방갈로 형태로 지은 주택 둘레에 나무가 우거진 정원과 산책로를 조성해 이국적 정취를 더했다. 이 건물들은 각각 선교박물관, 의료박물관, 교육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00년대 전후의 서양 의료기기들과 외국인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 3·1운동 역사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챔니스 주택과 블레어 주택 사이에서 대구 출신 작곡가 박태준(1900~1986)이 곡을 붙인 ‘동무생각’ 노래비를 찾았다. 이 노래에 작곡가의 러브 스토리가 담겨 있을 줄이야. 박태준이 고교생 시절 한 여학생을 짝사랑했는데, 훗날 이 사연을 들은 이은상 시인이 노랫말을 써줬다고 한다. ‘동무생각’의 ‘동무’는 동성 친구가 아닌 이성이었던 것. 청라언덕에서 계산동으로 넘어가기 위해 3·1만세운동길 계단을 내려간다. 좁고 가파른 이 계단은 1919년 대구 3·1만세운동 당시 고교생들이 일본의 눈을 피해 집결지로 이동했던 통로였다. 계단 중간쯤에 멈춰 서니 가로수 위로 우뚝 솟은 계산성당 쌍탑이 보인다. 대구의 예술가를 만나는 골목길 계단을 내려와 큰길을 건너면 곧 계산성당 앞이다. 계산성당은 100여 년 동안 이 터를 수호하듯 하늘을 향해 뾰족한 쌍탑을 얹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외국인 여행자들 눈에도 멋있어 보이는지 성당을 배경 삼아 기념 촬영을 하느라 분주하다. 성당 뒤쪽에는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민족운동가 서상돈(1850~1913)의 고택이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이상화는 1934년부터 1943년 사망하기 전까지 이 집에 살면서 수많은 항일 시를 남겼다. 그가 해방된 조국을 보았다면 자신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대한 답시를 짓지 않았을까. 두 고택 앞을 지나는 골목에는 시인 이상화, 소설가 현진건, 화가 이인성 등 대구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모여 살았다 하여 ‘예술가 골목’으로 불리기도 했다. 최근 이 골목에 한국전쟁 직후 대구를 배경으로 한, 한 소년의 성장소설 ‘마당 깊은 집’(1988)의 문학체험공간이 들어섰다. 이 소설은 김원일(1942~)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한데 드라마로도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다. 이곳에서 5분 정도 걸으면 3·1만세운동 때 주요 지도자들이 회의했던 대구 구 교남YMCA 회관과 1893년에 지은 대구기독교역사관(구 대구제일교회)을 만난다. 모두 문화재로 지정된 근대건축물이다. 한약재 향 머금은 약전골목 대구기독교역사관 옆에는 약령시한의약박물관이 자리했다. 2층에서는 사상체질 진단, 무료 한방차 시음, 족욕 체험, 한방비누 만들기 등의 다채로운 한방 체험을 할 수 있다. 한의약박물관 골목 일대는 한약재상이 밀집한 약전골목이다. 카페에서도 한방차를 판다. 이 골목에선 늘 한약재를 달이는 냄새가 달달하게 풍겨온다. 약전골목을 빠져나와 조선시대 영남지방 선비들이 과거 보러 한양 가던 길, 영남대로를 걷는다. 대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한약재 상점과 음식점, 카페 등이 모여 있는 좁은 골목길이다. 과거 보러 가는 선비에 얽힌 이야기를 그린 담장 벽화가 소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벽화보다 눈길을 끈 것은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선 칼국수집이다. 대기하던 손님이 “이 집이 유명한 원조 칼국수집인데요, 빵게를 넣고 얼큰하게 끓여 맛이 기가 막혀요” 하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다. 김이 펄펄 솟는 칼국수 찜통을 아쉽게 바라보며 다음 대구 여행을 기약한다. 넓은 종로 긴 진골목 영남대로에서 한 블록 위로 올라가면 열십자 모양의 대로인 종로가 있다. 종로 인근에 부자 동네였던 진골목과 약전골목이 있어 요정, 권번 같은 유흥 시설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한약재상과 음식점, 전통시장, 백화점 등이 자리한 대형 상권을 이루고 있다. 종로에는 화교의 역사도 공존한다. 근대에 화교들이 정착해 요식업, 포목업 등을 하며 살았다. 이들은 대구 갑부 서병국의 저택을 매입해 화교협회 건물로 사용했고, 그 앞에 화교 소학교를 세웠다. 근대건축물인 화교협회 건물은 예약(053-255-0561)한 후 관람할 수 있다. 차와 사람이 뒤섞여 지나다니는 종로를 걷다 진골목으로 숨어든다. ‘진’은 ‘길다’의 경상도 사투리 ‘질다’에서 비롯됐다. 조선시대에도 있던 골목이며, 근대에는 재력가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진골목 명소인 정소아과의원은 1937년에 지은 서양식 주택으로 소설 ‘마당 깊은 집’에도 등장한다. 노인들과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미도다방도 이곳 터줏대감이다. 한때 유학자가 많이 방문해 양반다방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골목이 긴 만큼 옛이야기도 끊이지 않는다. 또다시 김광석다시그리기길 진골목까지 둘러본 뒤 버스를 타고 방천시장 인근 김광석골목을 찾아간다. 대구에 오면 왠지 꼭 들러야 할 것 같다. 애잔한 그의 목소리와 어울리는 계절, 늦가을엔 더욱더 그렇다. 김광석(1964~1996)이 방천시장 골목에서 태어난 인연으로 이 골목이 조성됐다. 350m쯤 되는 골목 입구에서 김광석의 기타를 본뜬 대형 조형물이 반긴다. 골목 담벼락에는 한몸 같았던 기타를 품에 안고 하회탈처럼 웃음 짓던 김광석과 그의 노래들이 벽화로 되살아났다. 오토바이를 탄 김광석은 그림 속에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실감난다. 그가 포장마차에서 우동 한 그릇을 건네는 벽화 앞에 앉아 골목으로 흐르는 노래를 듣는다.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오늘도 그의 노래에 위로받는다. 주변 명소 & 맛집 안지랑 곱창골목 안지랑 동네의 넓고 긴 골목 양옆으로는 곱창집이 늘어서 있다. 식당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상가 규모가 크다. 안지랑에서 곱창을 주문할 때는 1인분, 2인분 단위로 주문하지 않는다. 꼭 한 바가지, 두 바가지로 주문할 것. 한 바가지는 500g이다. 매운 양념을 한 불곱창과 곱창, 막창 등의 메뉴가 있는데 숯불에 한 번 더 구워 불맛을 더한 불곱창이 인기다. 메뉴를 고르기 어려울 땐 반반 주문을 해보자. 동인동 매운찜갈비 골목 대구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즐겨 먹는데, 그 이유는 여름에 너무 더워서란다. 이열치열로 더위를 이기겠다는 전략 음식인 셈이다. 서문시장에 매운양념어묵이 있다면, 동인동에는 매운찜갈비가 있다. 굵게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를 아낌없이 넣어 만든 새빨간 양념이 갈비를 뒤덮고 있다. 보기보다 맵진 않다. 매콤하고 짭조름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조화롭다. 양은이나 스테인리스로 만든 양푼에 찜갈비를 내놓는 것이 특징이다. 낙영찜갈비, 봉산찜갈비, 싱글벙글찜갈비 식당이 유명하다. 별난 먹을거리 천국 서문시장 대구 최대 시장인 서문시장에는 5000여 개의 점포가 성업 중이다. 대구가 패션 섬유 도시로 이름난 만큼 원단, 한복, 의류 관련 제품을 파는 매장이 많다. 먹을거리도 풍성하다. 납작만두, 칼제비, 삼겹살자장면, 매운양념어묵 등 타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독특한 음식을 판다. 납작만두는 당면으로 만든 엄지손톱 크기의 만두소를 얇은 만두피로 감싸 지진 것이다. 매운양념어묵은 맵게 조린 어묵 위에 콩나물을 수북이 올린 것인데 아귀찜과 흡사하다. 자장면에 노릇하게 구운 삼겹살 열 조각을 올려주는 삼겹살자장면이야말로 서문시장의 독보적 아이템이다. 여행 정보 걷기 Tip • 중구 도심의 근대문화유산을 탐방하는 걷기 코스 ‘근대로의 여행’은 총 5개 코스로 이뤄져 있다. 본문에 소개한 코스가 가장 인기 있는 2코스 ‘근대문화골목’이다. 매주 토요일 10:00, 14:00 두 차례 무료 정기해설을 진행한다. 신청은 대구시 공식 홈페이지에서 하면 된다. • 서문시장은 2코스 걷기 전후에 가면 좋다. 걷고 난 뒤 들를 경우 김광석골목을 먼저 둘러보고, 2코스 근대문화골목길을 역순으로 걸으면 된다. 청라언덕에서 서문시장까지는 도보 10분 거리다.
- 2019-11-28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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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잊고 지낸 청춘과 건강을 함께 누리다
- 뭔가 복잡하고 제대로 풀리는 게 없는 듯한 요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지치기 마련이다. 그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놓치고 있는 청춘과 건강을 되찾아주기 위한 특별한 행사가 마련된다. 바로 시니어 공감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브랜드 행사 ‘브라보! 헬스콘서트’다. 올해로 어느새 4회째를 맞이하는 ‘브라보! 헬스콘서트’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사회공헌을 위해 준비한 무료 행사로서 건강 정보를 나누며 콘서트를 즐기는 축제 한마당이다. 이번 행사는 ‘건강과 청춘을 위한 Healthy Senior Life’를 주제로 오는 6월 13일 목요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서울 마포구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에서 열린다. 1부는 현직 의사에게 의학 정보를 듣는 시간으로 구성했다. 한설희 건국대학교병원 의료원장과 이재동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장, 이병진 콩세알튼튼예방치과의원 원장 등 의료계 명의들을 초빙해 강의를 듣는 시간으로, 시니어의 삶과 직결되는 키워드인 치매, 치아건강 잇몸질환, 장수음식 등 3개의 세션으로 나뉘어 1시간 동안 진행된다. MC는 스포츠 중계로 유명한 김정일 SBS 아나운서가 맡아 특유의 에너지 넘치는 말솜씨를 보여줄 예정이다. 2부에는 8090시대의 추억을 공유하며 열정을 불태우게 할 청춘콘서트가 100분 동안 펼쳐진다.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로 데뷔하고 드라마 ‘아이싱’ 배우로 출연한 당대 미남 가수 조정현, 명곡 ‘이별 아닌 이별’로 가요계를 평정했던 로커 이범학, ‘꿈결 같은 세상’을 부르고 이선희의 명곡들 ‘나 항상 그대를’,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 ‘한바탕 웃음으로’의 작곡가이자 뮤지컬 연출가인 송시현 등 ‘다시 돌아온 8090세대 아이콘’ 가수들이 무대에 오른다. 화려한 레퍼토리에 수많은 라이브 콘서트를 치러온 베테랑들답게 밴드와 함께 20여 곡의 노래를 선보이며 떼창의 진수를 보여줄 예정이다. ‘브라보! 헬스콘서트’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독자들은 물론 50+세대 모두를 환영하는 자리다. 봄이 가고 여름을 맞이하는 이 시기에 새롭게 삶을 충전시킬 수 있는 ‘브라보! 헬스콘서트’로 자신을 위한 선물을 주는 게 어떨까. 이번 행사는 종근당, 아모레퍼시픽 ‘동의본초연구 잇몸치약’, 동국제약, 유한킴벌리, 서울시 50플러스재단이 후원한다.
- 2019-05-23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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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문화캘린더
- 가족과 함께하는 싱그러운 5월, 이달의 추천 문화행사를 소개한다. (공연) 나빌레라 일정 5월 1~12일 장소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출연 강상준, 이찬동, 진선규, 최정수 등 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 ‘나빌레라’는 ‘다음(Daum)’ 웹툰 연재 순위·독자 평점 1위에 오른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발레를 소재로 청년과 노인의 교감과 성장을 그려낸 이 작품은 ‘세대 간 소통’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축제) 제45회 보성다향대축제 일정 5월 2~6일 장소 한국차문화공원 (보성차밭 일원) 보성다향대축제는 영화 및 CF 촬영지로 유명한 보성차밭 일원에서 열린다. 이번 축제에는 전국사진촬영대회, 녹차요정 퍼포먼스, 녹차 스탬프 투어, 화관 상상 무도회 등의 프로그램이 신설됐다. 이외 녹차비누·녹차향초 만들기, 한지공예 등 다채로운 체험도 할 수 있다. 잔디공원에는 관광객이 차를 마시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그린티 쉼터’도 마련돼 있다. (콘서트) 2019 조수미 콘서트 ‘Mother Dear’ 일정 5월 8일 장소 롯데콘서트홀 늘 재미있고 즐거운 감동을 주는 성악가 조수미가 ‘사랑하는 어머니’를 주제로 한 공연을 선보인다. ‘맘마미아’, 이탈리아의 어머니 노래, 한국의 창작가곡 등 서정성이 돋보이는 곡들을 중심으로 따뜻한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테너 겸 기타리스트인 ‘페데리코 파치오티’도 함께한다. (오페라) 오페라가 들리는 48시간 이탈리아 여행 일정 5월 12일 장소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출연 소프라노 홍혜란, 테너 최원휘, 해설 김문경 휴양의 도시이자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공연이다.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와 푸치니의 작품 위주로 구성되며 해설자 김문경이 음악 중심의 이탈리아 5개 지역 명소를 소개하며 숨은 이야기도 들려줄 예정이다. 따스한 봄, 낭만적인 음악 여행을 떠나보자.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일정 5월 17일~7월 14일 장소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구 삼성전자홀) 출연 김소현, 김우형 등 톨스토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작품. 주인공 ‘안나’를 통해 보편적인 삶의 가치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실제 스케이트장 같은 무대 연출, 원작 공연에 출연한 러시아 스케이터도 참여해 풍부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오페라) 가족과 함께하는 금난새의 오페라 이야기 일정 5월 26일 장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출연 금난새, 김순영, 김성현, 유동직 등 베르디의 걸작 ‘라 트라비아타’를 ‘콘서트오페라’로 특별 구성했다. 콘서트오페라는 무대 장치와 의상 없이 콘서트 무대에서 하는 공연이다. 이번 공연은 지휘자 금난새가 지휘와 해설을 맡아 보다 쉽고 재미있게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다. 줄거리를 따라 작품 속 숨은 이야기를 들으며 아름다운 아리아의 선율에 빠져보자.
- 2019-04-30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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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에 실려 온 하남석, 지치지 않는 청춘의 삶을 살다
- ‘바람에 실려’, ‘밤에 떠난 여인’ 등으로 7080세대 청년들의 마음을 울렸던 하남석. 최근 24세의 나이로 사망한 비정규직 청년 김용균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 ‘천화’와 나이 들어서도 꿈을 꾸는 청춘의 노래 ‘황혼의 향기’가 유튜브에 소개되며 그가 다시 대중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철학을 표현하는 올곧은 뮤지션으로 여전히 노래를 부르는 그는 1949년생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은 정신으로 무장해 있었다. 여전히 지혜와 담론이 담긴 노래를 부르길 멈추지 않겠다는 몽상가, 칠순의 하남석이 꾸는 꿈은 무엇인지 들어봤다. 1974년, 포크와 싱어송라이터의 전성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깊이 새긴 가수가 대중 앞에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하남석. 데뷔 앨범 ‘바람에 실려/밤에 떠난 여인’에는 총 10곡이 실렸고 타이틀곡인 ‘바람에 실려’와 ‘밤에 떠난 여인’은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이후 TBC 라디오 DJ로도 활약하며 그 시대의 다운타운가를 장식했다. 나지막하면서도 쓸쓸한 음색의 목소리로 청춘의 아이콘이 된 그는 7080세대의 가슴에 남게 됐다. 청춘들을 위로해온 목소리 그가 첫 앨범을 발표한 지 어느새 45년이 흘렀다. 강산이 다섯 번은 바뀌었을 그 긴 시간 동안 하남석은 결코 지치거나 꺾이지 않았다. 그동안 낸 앨범이 무려 14집. 소위 ‘대박을 친 노래’가 없어서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졌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절대로 놓지 않고 있었다.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해온 그 긴 시간이 놀랍다. 대표적으로 그의 14집 앨범에 실린 타이틀곡 ‘몽상가’를 들어보면 그가 자신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어떻게 넓혀왔는지 알 수 있다. 재즈 음악을 기반으로 한 편곡에 블루지한 색채의 관조적인 목소리 톤이 잘 어울리는 이 곡은 칠순이 넘는 가수의 노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되면서도 고급스럽다. 그가 젊었을 때보다 도리어 더 젊어진 감각으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계속 발전시키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젊었을 때보다 더욱 젊게 사는 70대 하남석이 최근 푹 빠져 있는 가수는 호주 출신으로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라이 엑스(RY X)라고 한다. 그는 아예 그들처럼 공연을 해보고 싶은 게 꿈이라 말한다. 처음에는 싱어송라이터라고 하기에 자신처럼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는 가수로 생각했단다. 그런데 확인해보니 포크와 일렉트로니카를 결합시킨 포크트로니카 장르의 뮤지션에 온갖 악기들을 활용하는 다채로운 스타일의 가수였다. 보컬 스타일도 요즘 팝 음악계에서 소위 ‘대세’인 얇고 호소력 있는 고음을 구사한다. 심지어 국내에는 많이 알려지지도 않은, 아는 사람만 알고 있는 젊은 실력파였다. 하남석의 음악적 감각이 남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그의 데뷔가 1973년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가 가수를 하게 된 데에는 그보다 먼저 1960~70년대를 풍미한 형 하남궁의 영향이 컸다. “형은 프랭크 시나트라, 앤디 윌리엄스 등 주로 팝송 레퍼토리로 노래를 불렀던 중후한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가수였죠. 특히 김희갑 씨가 형 목소리를 좋아해 곡을 많이 줬어요. 그런데 1973년에 형이 가수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떠나버렸죠.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수에 대한 꿈이 있었어요. 그래서 형의 빈자리를 채우면서 노래를 하게 됐죠.” 진정한 뮤지션으로서 묵직한 존재감 그러나 그는 형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에만 만족할 가수가 아니었다. 장르를 넘나드는 창법, 그리고 트렌디한 작곡과 작사 등 예상 가능한 부분이지만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발전시키는 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요즘 매일 산에 다녀요. 그 이유가,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길을 알게 돼서죠. 거기가 지금 제 아지트가 됐어요. 사람들이 없으니까, 산에 갈 때면 그곳에 꼭 들러 음악 들으면서 연습을 하거든요. 옛날에는 소리를 지르는 노래가 별로 없었어요. 저음 가수를 선호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승철, 김종서, 김건모 등 고음을 잘 지르는 가수가 세상에 나오게 됐어요. 저도 시대를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쪽으로도 창법 연습을 하고 있어요.” 그가 최근 발표한 노래를 들을 때 느낄 수 있었던 세련된 변화는 그러한 꾸준한 연습 덕분으로 보였다. “30대부터 연예인이 아닌 진정한 뮤지션이 되고 싶었죠. ‘진정 좋은 음악을 이 세상에 남기자’ 그게 원동력이 돼서 지금까지 활동한 거예요.” 사회의 약자들을 보듬는 ‘몽상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젊어지고 있는 하남석의 감각은 시대의 아픔과 정서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가 2004년에 내놓은 ‘거리의 아이들’은 방황하는 가출 청소년들을 보듬는 노래이고, 2010년에 나온 ‘넌, 특별한 사람이야’는 장애우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만든 노래다. 2011년에 발표한 곡 ‘길 위의 남자’는 노숙자들의 애환을 담았고 최근에 작사·작곡한 ‘천화’는 태안화력발전소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한 비정규직 청년 김용균을 추모하며 만든 곡이다. 그런 이야기들을 노래로 만드는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자꾸 눈길이 그쪽으로 가더라고요” 한다. 그가 가수 활동을 시작했던 시절의 포크가 청년의 정서를 대변했던 만큼, 여전히 청년의 마음을 지녔다면 시대의 고통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제 노래는 돈 많고 신나게 사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는 아니죠. ‘몽상가’처럼 살아왔고 ‘몽상가’라는 노래를 만들어 세상에 던진 이상 그렇게 계속 해야죠.” 사회, 정치, 음악, 문화가 너무 흔들리고 있다며 각 분야가 주체성을 갖고 가고자 하는 길을 확고하게 가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이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삶에서 노래를 건지고 그 노래가 삶과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이였다. 결국 뮤지션일 수밖에 없더라 하남석의 노래들 중 ‘나이 듦에 대하여’는 제목 그대로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생각을 담은 노래다. 나이 듦에 대하여 걱정 말아요 나이 들어가면 갈수록 그대는 더욱 멋지고 아름답죠 더 깊고 더 넓게 세상을 바라보죠 커다란 고목나무 그 나무처럼 더 많은 그늘을 만들어 사랑을 주죠 나무가 되어 그늘을 만들고 그 그늘을 통해 사랑을 주자는, 나이에 대한 철학이 담긴 노랫말을 보고 문득 궁금해졌다. 45년이 넘는 긴 시간을 같은 일을 하면서 그 또한 지치고 힘들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디며 지냈을까? “현실은 항상 돈 문제가 있으니까, 위기의식은 늘 있었죠. 그래서 미사리, 평택에서 가게도 하면서 꾸준히 라이브를 했지요. 그런데 장사를 하려면 철저한 장사꾼이 해야 해요. 자존심 다 버리고 어떻게 해서든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한다는 프로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런 게 없었죠. 노래 부르는데 술 취한 사람이 올라와 방해하면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고. 그런 게 쌓이면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을까’ 하며 자괴감이 들었죠. 결국 작년 8월에 가게는 정리했어요.” 자신이 할 일이 아닌 것 같아서 그만뒀다는 것은, 결국 하남석은 가수이자 뮤지션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자각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는 최근 후배들에게도 곡을 주기 시작했다. “후배들에게 준 곡이 많지는 않아요. 저는 전문 작곡가도 아니고 싱어송라이터니까, 주제넘게 누구에게 곡을 주나 싶은 생각도 했고. 그런데 그동안 200곡 정도를 만들었는데, 알려지지 않으면 그저 묻혀버리는 것 아니겠어요? 히트나 상업적인 결과를 원하는 것은 아니에요. 이제부터라도 주변 후배들에게 주자는 마음이 든 거죠.” 비록 외로울지라도 할 수밖에 없다 “삶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돈만 벌고…. 제가 활동하는 통기타 쪽은 애초에 그런 것과는 거리를 둬야 하는 것 같아요. 의미 있는 이야기를 가사에 담고 싶고…. 이 나이에 판 팔고 다시 인기 얻으려고 음악하겠어요? 좋아서 하는 거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그게 삶의 ING죠. 그래서 안주하고 있는 동료 가수들을 보면 속으로 화가 날 때가 있어요. 선배가 후배들에게 가교역할을 해야지 옛날 노래만 갖고 인사나 하고 돈이나 벌려고 하는 그런 모습들이 참….” 그는 자신과 같은 이른바 ‘선배 가수’들이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일들에 대해 얘기하면서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어쩌면 가수들 중에서도 그이라서 볼 수 있었던 드문 격정이었다. “나라도 하자, 외로울지라도. 하다 보면 멜로디가 생각나고 책을 보다가 이게 좋겠다 싶으면 노래로 풀어나가고…. 어차피 완성은 없지만 그래도 근사치에 가까워지는 것, 그래서 계속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는 거죠.” ‘책과 음악 그리고 자연’.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황혼의 향기가 이 세 가지라고 말한다. “정말 좋은 음악을 남기고, 누군가가 나중에 인정해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그를 보면서 젊음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그에게 시간의 흐름은 자신의 목적과 비교하면 큰 의미를 갖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나이가 들어 불편할 수 있고, 달라지는 부분들 또한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변치 않을 것을 끝까지 품에 안고 있는 사람이었다. 젊음이란 그렇게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을 가진 사람이어야 지켜지는 것 아닐까. 여전히 치열하게 도전하는 하남석의 노래가 펼쳐 보일 젊음에 기대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보다 더 오래 남게 될 그의 노래에 실릴 새로운 꿈을 응원한다.
- 2019-04-24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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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90세대의 아이콘 조정현, 송시현, 이범학
- 이토록 유쾌한 웃음과 유머가 자연스럽게, 핑퐁게임하듯 오간 자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가요계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아이돌’ 조정현, 송시현, 이범학이 이제 중년이 되어 우리들에게 돌아왔다. 그간 노래와 삶과 추억을 공유하며 살아온 이들은 의기투합해 세대를 아우르는 청춘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오십 중반이 됐어도 여전히 맑고 청년다운 기운이 넘실대던 그들과의 인터뷰. 조정현, 송시현, 이범학을 공통적으로 아우르는 표현으로 뭐가 어울릴까. 이들이 활동했던 장르는 정통 포크도 아니고 발라드도 아니고 댄스는 더욱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이 조금씩 섞여 있으면서도 도시적 세련미를 갖고 있다. 듣자마자 바로 와 닿는, 스며들기 좋은 노래들이라고나 할까. 한국 대중가요를 말할 때 컨템포러리로서 분명한 계보를 가진 이들이다.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가요계를 사로잡았던 세 명이 최근 뭉쳤다. 함께 콘서트를 열기 위해서다.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로 변진섭과 최성수를 제쳤던 조정현의 목소리로 인터뷰가 시작됐다. 세 가수들의 의기투합 “송시현이 나를 만나고 싶어 했고, 나는 돌파구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만났죠. 보통 음악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애가 굉장히 강한데, 대화를 해보니 진실성이 느껴졌어요. 그래, 같이 앨범을 만들어보자 했고 바로 그렇게 결정된 거예요.” 가수 이선희의 지원으로 1987년 ‘꿈결 같은 세상’을 발표하면서 히트 가수가 된 송시현과 조정현의 만남. 그리고 이 둘의 인연에는 1991년에 ‘이별 아닌 이별’을 발표하며 에너지를 태우던 이범학이 있었다. “정현이 형과는 고교 선후배 사이예요. 시현이 형은 한창 활동할 때 공연장에서 자주 본 사이였고요. 그러다 보니 굉장히 친해졌죠. 셋은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관계였어요.” 이범학은 최근 활동을 같이했던 사람들이 다시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래서 조정현에게 콘서트를 함께하자고 제안을 했다. 문제는 이범학의 계획으로는 세 명이 모여서 하고 싶었는데 나머지 한 명이 섭외가 안 되는 상태였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정현이 형과 시현이 형 두 분이 함께 앨범을 만든다고 해서, ‘잘됐다’ 싶었죠. 올해 이렇게 셋이 함께 앨범을 준비할 수 있어 너무 좋아요.”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된 송시현 그동안 많은 세월이 지났다. 청춘의 아이콘처럼 여겨졌던 이들도 이제 50대 중반의 나이가 됐다. 이범학은 20대에는 노래를 아무 생각 없이 불렀던 거 같다고 말했다. “때로는 올라가고 싶지 않은 무대에도 서고…. 노래에 절실함이 없었던 거 같아요. 지금은 세월이 담기게 됐죠. 그러면서도 정현이 형도 시현이 형도 저도 변하지 않은 게 좋아요.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 우리들의 케미가, 그동안의 인생 등 많은 걸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송시현은 지금까지 직업란에 가수라고 써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의외였다. “저는 어릴 때부터 지휘자, 작곡자가 꿈이었죠. 그러다 이선희 씨에게 곡을 줬는데 ‘이건 네가 부르니 더 좋다, 음반 한번 내볼래?’ 해서 본의 아니게 가수가 된 거예요.” 시집도 여러 권 낸 송시현의 노래들은 개인의 내밀한 감정을 잘 표현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노래를 부른다기보다는 세상과 사람들과 내 생각을 교감하기 위해서’ 그 시절 활동을 했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면서 달라진 건 노래의 힘에 대해서 좀 더 큰 확신을 갖게 됐다는 거예요.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사회와 나라와 구성원들을 좀 더 정의롭고 나은 방향으로 데려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음악을 해야겠다는 마음도 컸죠. 두 사람을 만났으니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노래 없이는 살 수 없었던 이범학 송시현의 고백으로 인터뷰는 그들의 꿈에 대해 묻는 쪽으로 흘러갔다. 이범학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수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2 때부터 밴드를 했고 끊임없이 노래를 만들었죠. 사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것도 가수가 되기 위해서였어요. 철학이 담긴 가사를 써보고 싶었거든요. 개론부터 낙제를 받긴 했지만.(웃음) 지난 20년 동안 중간에 뮤지컬도 했고요. 모든 목적은 ‘앨범을 내야겠다’였어요. 그러다 본의 아니게 ‘이대팔’을 하게 됐는데….” ‘이대팔’은 록커의 피가 흐르는 이범학이 트로트를 부르겠다며 내놓아 화제가 된 노래다. 2012년의 일이었다. 그는 그 노래에 대해 손사래를 쳤다. “당시 매니지먼트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죠. 하면서도 ‘이건 내 길이 도저히 아니다’ 싶었어요. 그래도 노래가 나름 알려져 공연장에 가면 사람들이 불러달라면서 ‘이대팔’ 앙코르를 외쳐요. 그래도 절대 안 불렀어요.(웃음)” 조정현의 꿈은 아이스하키 선수였다고 한다. 중1 때 가수로 바뀌었지만, 그의 아이스하키 선수로서의 경력이 국내 최초의 아이스하키 드라마 ‘아이싱’에 자리를 마련하게 했다. “‘마지막 승부’를 연출한 PD 장두익 형이 후속편을 준비하면서 저랑 얘기할 일이 있었어요. ‘정현아, 내가 드디어 아이스하키 드라마를 만들 것 같아’ 하더라고요. 아이스하키협회에서는 난리가 났죠. 무조건 도운다고. 저는 주연 장동건을 키우는 선배 역할을 맡게 됐죠. 대사가 많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중간에 작가와 좀 틀어진 일이 있었어요. 그래선지 갈수록 대사가 줄더라고.(웃음)” 조정현, 세월의 아픔을 품다 노래로 정상에 서보고 당대 최고의 PD가 만드는 드라마에서도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다. 아이돌 연예인으로서 성공적인 삶의 흐름이었던 셈이다. 그랬던 조정현이, 어느 날 우리들 앞에서 사라졌다. 가수생활을 하면서 겪은 안 좋은 일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너무 상처를 받아서 더 이상 가수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함께 자리한 매니저는 “정현이가 개인적인 문제가 없었으면 립서비스가 아니고 정말 큰 가수가 됐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대형 레코드사와 송사에 휘말렸던 것이다. “제작사와 소송이 있었습니다. 긴 싸움이다 보니 다른 제작사와 스튜디오에서 못 받아주는 상태가 됐어요. 음악을 포기하고 미국을 갔죠. 그러다 다시 돌아와 2집 앨범 ‘비애’를 냈는데, 성공했어요. 문제는 그 과정에서 대학교 친구와 초등학교 친구 둘을 잃어버려야 했죠. 이 일은 나랑 안 맞는가보다 싶었죠. 그래서 3집은 녹음하고도 안 냈어요.” 속사정을 알고 있는 이범학이 “그 아픔까지 사랑해야죠”라며 조정현의 대표곡으로 농담 반 진담 반 위로를 건넸다. 그러나 조정현은 허공을 보며 “힘들어” 하며 웃었다. 말을 아끼며 헛헛한 웃음을 짓는 표정에서 그가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울림과 여운이 있는 3인 콘서트 가수로서, 작곡가로서 대중들과 떨어져 있는 동안 송시현은 그야말로 뮤지컬에 ‘미쳐’ 살았다. 한국적인 뮤지컬 작품을 만들고 싶어 철저하게 기획단계에서부터 한국적인 뮤지컬이 돼야 한다며 그의 천재성을 드러내며 심혈을 기울였다. “원래는 음악만 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내 음악을 지키려면 연출을 해야 했던 찢어질 듯한 사연들이 있었어요. 저는 평생 새로운 시도만 해서 가족들의 걱정이 많았어요. 작곡하는 사람이 뮤지컬 연출을 한다는 게 얼마나 큰 모험이에요? 그래도 대학원 가서 연출 공부하고 지금까지 뮤지컬 70편을 만들었죠.” 작곡자로서 송시현의 가장 유명한 노래는 이선희의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일 것이다. 실제 그의 꿈속에서 나온 스토리와 가사를 그대로 옮겨 적어 완성된 곡이란다. 천재적이라는 말이 맞다. 저작권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그의 노래는 무려 4000여 곡이나 된다. 70여 편의 뮤지컬 연출 경력과 그가 만든 수천 곡의 노래를 보면 그의 삶이 음악으로 꽉 차 있음이 느껴진다. 이선희의 히트곡 중 상당수가 그의 작품. 나 항상 그대를, 겨울애상, 사랑이 지는 이 자리, 한바탕 웃음으로, 그리운 나라 등등 자신만의 색을 담은 곡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선희 씨가 활동을 왕성하게 하면 저작권료가 많이 들어오고 뜸하면 안 들어오고.(웃음) 저를 음악인으로 살게 한 은인이시죠. 그때도 여러 가수에게 곡을 주는 작곡자들이 있었는데, 저는 노래가 자신의 음악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니 한 시기에는 한 가수에게만 곡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선희 씨가 함께 작업하면서 제 곡을 너무 아껴주셔서 행복했죠.” “고 대목에 첨언을 하자면” 하고 매니저가 대화 속에 끼어들었다. 이제는 뭔가 약방의 감초 같은 느낌이다. “작품을 남발하지 않는 것은 아티스트가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좋은 거라고 봐요. 작품을 남발하다 보면 진이 빠지거든요. 에너지 관리가 필요해요. 시현이는 천재적인 작곡가예요. 그런데 그만 뮤지컬을 해서….” 매니저 머릿속은 온통 ‘기승전뮤지컬’이어서 다들 웃음보가 터졌다. 정말 서로를 잘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만난 듯한 느낌이 확 들었다. 이런 즐거운 우정이라면 앞으로의 삶도 행복하지 않을까. 모두 나이가 오십을 넘었고, 그동안 각자의 굴곡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삶에 찌든 모습이 안 보였다. “세 명 다 굉장히 맑아요. 다행이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맑음으로 그들이 준비하는 콘서트는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했다. “우리가 중년의 나이가 됐잖아요. 우리 다음 세대에 대한 헌사가 필요한 시기가 됐다고 봐요. 우리 2세들도 청년이 되어가는 중이니까요. 이번 공연은 그쪽으로 잡아보자 했죠. 사실 지금 청년 세대가 겪는 상대적 박탈감, 고통 등은 어느 세대이든 다 있었어요. 그러니 우리가 겪은 경험과 노하우를 알려주고, 자녀와 손잡고 온 옛 팬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했죠. 자녀와 부모 세대의 소통과 공감으로 이어지는 용기와 희망 그리고 응원을 이번 공연 콘셉트로 잡았어요.” 10대 후반에서 20대인 아이들에게 공연을 보여줬을 때 ‘진부하다’는 말을 들으면 안 된다는 게 그들의 다짐이었다. 50대 중견가수들이 보여줄 보편성과 트렌디함이 섞인 공연이라니 기대가 됐다. 어쩌면 그들의 노래가 가진 세련미가 그를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이런 시도는 후배들에게도 하나의 귀감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음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범학은 인생 자체가 음악이었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여태까지 그것만 위해서 살았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냥 뮤직 이즈 라이프(Music is Life).” 송시현에게 음악은 다양한 향유였다. 그는 음악이 시간이기도 했고 숨 쉬는 것이기도 했고 추억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갈급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곡을 쓸 때면 그 시대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는데, 그렇게 그 시대와 함께 보낼 수 있었죠.” 조정현에게 음악은 시간을 버티게 해준 매개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물음에 그는 순순히 동의했다. 그는 음악을 떠났다고 말했지만, 노래를 멈춘 적은 없었다. “요즘은 매일 연습해요. 연습할 때만큼은 저만의 시간에 빠져들어 너무 좋아요.” 서로를 알아보며 무르익는 3인 인터뷰를 마칠 시간이 되니 그들의 요즘 생활과 계획이 궁금했다. 영원한 의리 ‘형님’ 조정현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 “가게를 한참 하다 보니까 동업하자는 유혹을 아직도 받아요. 장사는 현실이니까 잘못되면 바로 헤어지기 때문에 심사숙고하는데…. 외국에는 어느 장소를 가도 음악을 들으면서 즐길 수 있는 곳이 있어요. 우리나라에는 왜 없을까요. 그게 안타까워요. 우리나라는 특이한 게, 음악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부르는 문화예요. 그냥 놀면서 즐길 수 있는 그런 뮤직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이범학은 일산에서 해물요리 전문점을 5년째 하고 있다. 요리를 좋아해서 시작했지만 난생처음 해보는 일이다. “1~2년은 매일 제가 연안부두와 노량진을 왔다 갔다 했죠. 가수로서가 아닌 다른 보람이 있죠. 그리고 그걸로 생활이 되니 가기 싫은 무대 요청이 들어와도 거절이 돼요. 요즘은 가게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요. 그래서 이제 슬슬 하고 싶은 걸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송시현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여전히 ‘뮤지컬’에 집중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지나친 관심을 받으며 살았는데, 창작자로서 편한 게 아니었어요. 어디를 갔을 때 피아노 쳐 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하면서 내내 불편해지고…. 이제는 굳이 내색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저를 잘 모릅니다. 그게 오히려 자유롭고 편해요.” 왕년에 모두 전성기를 누려봤기에 세 사람은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것에 일희일비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과거는 과거일 뿐 미화하는 것도 싫다고 했다. “과거만큼 영화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무대에 안 서는 것도 아니니까요. ‘노래를 이렇게 부르니 옛날보다 사람들이 더 좋아하네’ 같은 작은 걸 하나 깨닫는 것도 너무 행복해요.” 그들은 이제 나이 들었고 그간 굽이굽이 인생의 여러 고초도 겪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청년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남아 있다. 세 청춘이 맑은 모습으로 새로운 미래를 얘기할 때, 그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겸손함 덕분일 것이다. 셋이라서 그 깊이와 울림은 더 커 보였다. 새순이 돋아날 기운과 따뜻한 햇빛이 함께할 그들의 두 번째 청춘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브라보, 유어 라이프!
- 2019-03-08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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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이’ 전영록, ‘뮤직 셰프’로 돌아오다
- 마치 1980년대 극장가를 휩쓸었던 영화 ‘돌아이’의 주인공 황석아가 다시 돌아온 느낌이었다. 전영록은 어리숙하면서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뜨거운 청년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채 인터뷰 내내 유쾌함을 잃지 않았다.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불티’,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와 같은 명곡들을 부른 주인이자 ‘바람아 멈추어다오’,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등 히트곡 작사 작곡자, 그리고 영화비디오테이프, 만화책, LP판, 심지어 피규어까지 수집하는 소문난 마니아다. 다양한 재능과 취미를 갖고 있는 전영록을 만나 그때 그 시절 7080 추억들을 꺼내 감성과 낭만의 시간으로 꽉꽉 채웠다.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 속에서 만능 엔터테이너의 모범을 보여줬던 이로 전영록을 지나칠 수는 없다. 당대 최고의 가수이자 흥행 배우로서, 그리고 작사 작곡까지 하는 아티스트로서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최고의 자리에 서 있었던 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들려온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그가 심각한 암 환자였고 사경까지 헤맸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아니 그게… 용종이 좀 큰 상태였는데 방송에서 이홍렬이 한 말을, 그걸 편집해서 사람을 암 환자로 만들더라고. 환장하는 줄 알았어요. 난 오래 살 거예요. 아니, 오래 살 거 같아.(웃음)” 일단 그가 암 환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정말 다행이었지만 이번에는 코미디언 이홍렬 씨와 그가 친구라는 게 또 놀라웠다. 그가 동안의 대명사라 믿기지 않았지만 실제로 이홍렬 씨와는 65세 동갑내기이며 중학교 동창이라 했다. 그는 여전히 젊다. 그러나 그 젊음이 외모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요즘은 블랙핑크가 좋다 “예전에 보람이에게 ‘난 티아라보다 포미닛이 좋다. 현아가 있어서’라고 말한 적이 있었죠.(웃음) 큰아들은 요즘 아이린을 좋아해요. 둘째는 쯔위를 좋아하고. 저는 블랙핑크가 좋아요. 걸크러시잖아요. 제가 이러고 살아요. 음반사에서 레드벨벳 포스터 구해놨다고 하면 얼른 가져와서 아들 방에 붙여주고.(웃음)” 전영록의 딸 전보람은 걸그룹 티아라의 멤버였다. 티아라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포미닛은 티아라의 라이벌 그룹이었으니, 그는 딸 앞에서 딸의 라이벌 그룹이 더 좋다고 칭송(?)한 셈이다. 요즘 아이돌 그룹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면 그가 말하는 아이린, 쯔위, 블랙핑크와 레드벨벳이 누구인지 이해가 잘 안 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모두 요즘 잘나가는 걸그룹과 아이돌 이름이다. 전영록의 취향 안테나는 그렇게 여전히 현재를 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골프 좀 치러 다니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난 아들들 케어해주는 게 더 좋아요.” 삶의 보람, 두 아들과 눈 맞추기 그 말처럼 두 아들 전유빈, 전효빈 군은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아들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요즘 아이들이 왜 부모와 얘기를 안 할까 고민해봤어요. 결론은 부모의 태도예요. 아이들이 대화를 좀 해보려 해도 대부분의 부모들은 ‘네가 뭘 알아, 어서 밥 먹고 공부나 해’라고 말하기 일쑤죠.” 그는 자식들을 존중한다. 어떤 때는 거의 친구처럼 대할 때도 있다고 한다. “‘아빠가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응원이야. 물질적인 지원은 없어’라고 말하곤 해요.(웃음)” 그의 이러한 태도가 그를 젊게 만드는 걸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일상에도 여전한 젊음이 있었다. 연예계에서 손꼽히는 마니아 전영록은 요즘도 행복한 마니아로 살아가고 있었다. “음반을 한 20억 원 어치 정도 샀어요. 피규어 레진은 지금도 모으고 있고. 피규어는 한 3억 원 어치 샀을 거예요. 영화, 만화, 게임 관련 자료들도 모으고 있고…. 물론 아내가 싫어하죠.(웃음)” 음반, 피규어를 사는 데 수십 억을 썼다면 집 안은 거의 박물관 수준이 아닐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얼마 전에 해결책이 생겼다. “평창 알펜시아에 세계에서 가장 큰 피규어 박물관이 들어선대요. 친한 동생이 2층은 스튜디오로 쓰고 1층은 박물관으로 만든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 거 다 가져가라고 했죠.(웃음) 이런 제 취미 때문에 그동안 마음고생한 집사람이 그 얘길 듣고 너무 좋아하더군요.” 영화계와 만화계의 만남을 주선하다 물론 전영록의 ‘특별한 취미’가 아무 의미 없이 아내에게 스트레스만 준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나라 영화계가 만화를 소재로 영화로 만들기 시작한 게 바로 자신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이장호 감독에게 만화책을 갖다 준 건 ‘돌아이’ 시리즈 3편이 나올 무렵이었다. 처음 이 감독의 반응은 ‘야, 장난하냐?’였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형님, 보시고 별로면 버리시고, 이 만화로 영화를 만들어볼 의향이 있으면 이현세라는 만화가에게 연락해보세요’라고 했다. 그때 그가 건네준 만화책이 바로 이현세 원작의 ‘공포의 외인구단’이었다. 이 만화는 영화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만들어져 대성공을 거뒀다. 이 작품이 1980년대 중후반 한국 영화의 흥행을 이끌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다. ‘돌아이’를 제작한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은 전영록의 이러한 감각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전영록에게 메가폰을 잡아보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제가 액션 신을 찍으려면 카메라가 여러 대 필요하니 다섯 대만 준비해 달라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이 사장님이 ‘미친놈, 돌아이 짓 또 하네’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래서 못했어요. 정말 하고 싶었는데.” 내가 스티브 잡스를 싫어하는 이유 전영록의 얘기를 듣다 보니 그는 유행의 최첨단을 걷는, 독특한 얼리어답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스마트폰의 ‘스’ 자도 모르는 사람이다. 20년 동안 폴더폰을 쓰고 있는데 한 달 전에 고장이 나서 스마트폰 기능이 있는 폴더폰으로 겨우 교체했다. 당연히 카카오톡도 모른다. “얼마 전에 지인을 통해 전유성 선배 어머니 부고 소식을 듣게 됐어요. 그런데 오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을 페북에 올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물었죠. 페북이 뭐냐고.” 그는 아날로그가 좋다고 말한다. 그래서 고장 난 폴더폰을 또다시 폴더폰으로 바꿨다. 그러니까 그는 새로운 것이라고 무조건 받아들이고 애정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오랜 세월 빚어진 자신만의 공고한 세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요즘 세태를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제가 스티븐 호킹 박사를 좋아하는데, 그분이 스티브 잡스를 싫어하셨어요. 저도 스티브 잡스를 싫어해요. 호킹 박사는 스마트폰에 매달리면 인성이 없어질 것이라 했거든요. 그 말대로 요즘 세대는 인성이 부족한 것 같아요. 애들이 잘못 배우고 있는 거예요.” 그는 최근의 미디어 문화와 예능 프로그램들에 대해 걱정이 많다. 요즘 사회가 점점 험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미디어에서는 절대 나쁜 말, 나쁜 행동을 하면 안 돼요. 그런데 처음에는 재미있어서 한 건데 그걸 방관한 게 문제였죠. 아이들이 예능인들의 거친 행동과 말투를 보고 자라면서 인성이 사라졌다고 봐요. 힙합만 봐도, 랩은 거의 욕이고 남을 헐뜯는 내용이잖아요? 그걸 왜 놔두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가수가 맛있게 불러주면 그걸로 만족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냐고 물으니 전영록은 ‘뮤직 셰프’라고 답했다. 그가 요즘 꾸준하게 밀고 있는 명칭이다. “뮤직 셰프란 음악에 MSG를 쳐서라도 맛있게 들려준다는 의미예요. 아구찜이나 갈비찜에 설탕 풀어넣어 보세요. 정말 맛있어져요.” 음악인 전영록은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최고의 가수이자 작사 작곡가다. 그래서 그가 ‘요즘 애들은 다 베껴서 창작이 없다, 공부를 안 한다’고 한탄할 때 그 말에는 자연스럽게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쓴 것은 40곡이고 드린 분은 여섯, 일곱 명 정도 돼요. 인순이 씨에게는 초창기에 줬던 게 있고 정수라, 김희애, 양수경, 이은하, 민해경… 얼마 전에는 남진 선배에게 ‘잘살고 싶소’를 드렸죠.” 그는 25년 동안 곡을 안 썼다. 이유는 간단했다. ‘싫어서’. 그러나 어느 순간 다시 곡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진 선배를 필두로 선후배 가수들에게 자신이 만든 노래를 주고 있다. 그가 마음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자식들에게 유산을 남기고 싶은 거죠. 저작권료는 사후 70년까지 나오니까. 쓸 만큼, 먹을 만큼, 입을 만큼은 남겨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계속 만들고 있어요. 이 나이에 서점 가서 사전 보면서 작업하니까 재밌어요. 예전에도 가만히 있질 못했던 편이죠. 맛있는 거 나오네? 괜찮겠네? 그럼 썼으니까요.” 그는 선후배 가수에게 노래를 줄 때 작사 작곡비도 안 받고 그냥 줬다고 한다. 히트곡을 엄청나게 보유한 사람인데 아무것도 안 받았다니,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러나 아쉽지 않다고 했다. 그저 가수가 자신이 만든 노래를 맛있게 잘 부르면 그걸로 족하다는 것이다. 과연 뮤직 셰프다운 대답이었다. 연예인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 연예인 생활 46년 동안 어려운 순간을 잘 이겨낸 원동력이 무엇인지 묻자 ‘사람과 잘 안 만나고 그 시간에 하나라도 더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만큼 그는 음악을 체질적으로 업으로 삼았다. 문득 그의 집안이 연예인 가족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의 아버지는 200여 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영화배우 황해, 어머니는 ‘봄날은 간다’를 부른 가수 백설희다. 심지어 딸 둘도 아이돌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갑자기 가족이 연예인인 집안 분위기는 어떨까. 자연스럽게 궁금해졌다. “나쁘죠. 안 바빠도 바쁜 척, 아닌 척해야 하니까. 방송 촬영은 아침부터 나와서 김밥 먹으며 리허설을 계속해야 하니 그것도 힘든 일이고.” 그는 부모님에게 ‘유전자만 물려받았다’고 했다. 꽤 엄격한 부모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 다 벽이었어요 벽. 당장 당신들이 인정을 안 하는데 뭘. ‘아버지, 연기 지도해주시면 안 돼요?’라고 물은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내가 너에게 지도를 해주면 넌 황해가 된다. 전영록은 없어’라고 대답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자식들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해라’ 잔소리 안 해요. 그러면 전영록이 되는 거니까요. 알아서 해야지.” 죽을 때까지 노래 만들고 싶다 최근 오랜만에 그의 싱글 앨범이 나왔다. 작사 작곡가 전영록의 부활과 함께 가수 전영록 또한 출격을 준비해왔던 것이다. “전유성 선배가 어머니 빈소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갔어요. 그런데 조덕배와 이문세가 먼저 왔다 갔더라고요. 얘기를 들어보니 덕배도 요즘 곡을 쓰기 시작했답니다. 덕배의 음악세계를 좋아하는데 반가운 소식이었어요.” 그는 음악 활동과 함께 연기도 다시 시작했다. “이천희가 주연인 영화를 찍었는데, 거기 카메오로 나와 달라고 해서 오프닝과 엔딩에 등장해요. 그리고 현재 제작 중인 드라마에 방송 PD 역할로 나갑니다. 좋잖아요.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거니까. ‘나 암 환자 아니다’라는 거고.(웃음)” 12월 미국 공연을 준비 중인 그는 여전히 공연의 엔딩곡을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로 끝낼 거라 한다. 팬들과 함께 부르기에 좋기 때문이다. “팬들은 저와 과거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들이 제 노래를 들으면서 자기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인터뷰 중 그의 30주년을 회상하면서, 그때 그에게 헌정하기 위해 모인 가수들이 기라성 같은 이들이었음을 얘기했다. 그러자 “이제 그들은 다 원로가 됐고, 나는 고스트가 됐다”고 말했다. 함께 한바탕 파안대소했다. 스스로를 ‘고스트’라고 칭하는 이 유쾌한 남자의 미래 계획은 ‘죽을 때까지 지인들에게 곡을 주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노래를 만들겠다고 다짐하는 ‘고스트’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나 이 영원할 것 같은 젊음의 아이콘은 그 말이 안 되는 일을 말이 되게 만들 것 같다.
- 2018-11-14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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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만 송이 장미’의 나라 라트비아 ‘리가’
- 발틱 3국 중 ‘라트비아’가 한국인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국내 대중 가수, 심수봉이 불렀던 ‘백만 송이 장미’라는 번안곡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노래의 원곡은 라트비아의 가수가 불렀다. 특히 이 노래 가사에는 ‘특별한 사연’이 담겨 있다. 그루지아의 한 화가가 프랑스 가수를 흠모해 바친, ‘서글픈’ 백만 송이 장미. 라트비아 수도인 ‘리가’에 두 번째 방문하는데도 그 유행가 선율이 계속 머릿속에 감돈다. 두 번째 만남이 더 행복한 ‘리가’ 필자는 현재 4개월 여행의 막바지에서 핀란드에 와 있다. 가을이 짙은 핀란드 경치를 바라보면서 ‘최고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 여행을 하면서 많은 나라, 도시를 만났다. 기억나는 곳들이 많지만 그중 한 곳이 라트비아 리가다. 러시아 프스코프에서 버스를 타고 에스토니아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 리가로 향했다. 4년 전 늦가을, 잠시 발만 딛고 떠나버렸던 리가. 어떻게 변했을까? 시외버스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중앙시장 건물이 반갑다. 다우가바(Daugava) 강 제방 위에 열 지어 서 있는, 다섯 개의 거대한 홀 모양의 건물. 현재는 시장 건물이지만 원래는 독일이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할 목적으로 지은 체펠린 비행선 격납고였다. 전쟁이 끝난 후 리가로 그대로 옮겨져 현재는 활황을 누리는 재래시장 건물이 됐다. 잠시 눈인사로 대신하고 여행자들의 ‘숙제’와 같은 숙소 찾기에 나선다. 그런데 4년 전의 버스터미널이 아니다. 여행 안내소가 생겼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친절한 여행 안내원이 있다. 올드 타운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길이 울퉁불퉁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시내버스 타고 숙소로 갈까?”라고 물었더니 ‘고작 7분 거리’라면서 걸어가란다. 터미널에서 올드 타운으로 들어서는 골목길이 제법 정돈되어 캐리어를 끄는 데 크게 힘들진 않다. 저렴한 가격의 숙소 또한 훌륭하다. 낡은 건물이지만 에스컬레이터가 있어 무거운 짐 옮기는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실내도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조식 제공에 오이와 자른 레몬을 넣은 음료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한껏 편한 마음으로 어슬렁어슬렁 올드 타운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도심의 거리는 화려하고 활발하다. 관광 인파로 넘실대는 골목의 카페에서는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와 흥을 돋운다. 같은 장소를 두 번 방문하는 일은 생각보다 좋다. 기억을 더듬는 것도 좋고, 못 본 곳들을 재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4년이란, 충분히 도심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시간 같다. ‘백만 송이 장미’로 더 친숙하게 다가온 나라 제정 러시아 시대에 ‘리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에 이어 제3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활황을 누렸다. 러시아에서 발원한, 리가의 젖줄인 다우가바 강은 수로로 이용하기에 좋은 요새였다. 당시 리가는 ‘동유럽의 파리’, ‘동유럽의 라스베이거스’라 불렸다. 동유럽에서는 최고로 유흥산업이 발달했던 도시. 한국인에게는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로 알려진 나라.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는 라트비아 작곡가 라이몬즈 파울스가 만들고, 라트비아 여가수 아이야 쿠클레가 처음 불렀다. 이 노래를 알린 사람은 러시아 여가수인 알라 푸가체바다. 노래 가사는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의 시다. 한 화가가 살았네/홀로 살고 있었지/그는 꽃을 사랑하는 여배우를 사랑했다네/그래서 자신의 집을 팔고, 자신의 그림과 피를 팔아/그 돈으로 바다도 덮을 만큼 장미꽃을 샀다네/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붉은 장미… 이 시는 그루지아(현 조지아)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가 프랑스 출신 여배우에게 사랑에 빠졌던 일화를 바탕으로 쓴 것. 한 가난하고 외로운 무명화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살고 있는 고장에 유명하고 아름다운 여배우가 순회 공연차 오게 된다. 그녀를 흠모하던 화가는 단 하루밖에 없는 그 기회를 이용해 특별한 방식의 사랑 고백을 계획한다. 여배우가 묵고 있는 호텔 광장에 장미를 가득 뿌려놓겠다는 것.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 장미 백만 송이를 산 그는 그녀가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모든 곳에 장식했다. 이 노래는 동유럽 일원에서는 흔히 들을 수 있는, 길거리 음악의 대명사가 됐다. 구시가 골목 즐기기 긴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골목길. 자꾸만 길을 잃게 만들면서 블랙헤드 길드 광장 앞으로 안내를 한다. 이 광장은 리가의 랜드마크로 건물에 금박이 박혀 있어 금세 눈길을 끌어당긴다. 예전 상인들의 숙소와 연회장이었던 건물. 눈길을 끄는 천문시계에는 처음 주문한 길드가 시계공의 눈알을 빼버렸다는 전설이 흐른다.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동유럽의 흔한 전설 중 하나다. 그것보다 이 건물의 특징은 블랙헤드다. 금박 건물에 이들의 수호성인인 성 마우리티우스가 새겨져 있다. 그는 북아프리카 흑인 출신의 로마 전사였다. 그래서 블랙헤드라는 건물명으로 지칭된 것. 이 전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건물의 80%가 파괴되었는데 라트비아가 재건축(2001년)했다. 현재 박물관과 관광안내소가 함께 있다. 길드 앞에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 조형물은 1510년, 리가의 길드 회원들이 커다란 전나무를 세워놓고 각양각색의 화려한 장식을 해 밤새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자리에 있다. 작은 트리 조형물. 왠지 억지스럽다. 그보다 광장 뒤쪽에 있는 성 피터 성당의 뾰족한 첨탑이 눈길을 끈다. 1209년에 건설된 이 성당은 1666년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가 현재는 1941년의 모습 그대로다. 이 성당은 시대에 따라 가톨릭 성당, 루터 교회, 그리고 박물관 등으로 여러 차례 기능이 바뀌었다. 종교와 상관없이 이 성당을 찾는 이유는 첨탑(123m)으로 올라 시내를 조망하기 위해서다. 탑 위까지 걷지 않고 리프트를 이용할 수 있다. 구시가지의 붉은 가옥과 강, 좁은 골목길, 그리고 사람들을 구경한다. 특히 반가운 것은 한국의 유명 기업 상호가 새겨진 멋진 고층 건물이다. 성당 뒤쪽으로는 독일 형제 작가인 그림 형제의 유명한 동화 ‘브레멘 음악대’에 나오는 동물들의 동상이 있다. 이외에도 독일인들이 이 땅에 와서 처음으로 지은 돔 성당도 여러 번 만난다. 이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6768개의 파이프를 가진 오르간. 제작(1884년)될 당시만 해도 이 파이프 오르간은 세계에서 가장 컸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에서 네 번째 크기가 됐다. 스웨덴 문과 아르누보 건축 그 어떤 곳보다 필자의 관심을 끈 곳은 스웨덴 병사와 리가 아가씨의 사랑 이야기가 흐르는 스웨덴 문 주변이다. 누군가의 설명을 듣지 않으면 눈여겨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아치형 문.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애달파서일까? 좁은 골목길에서 풍겨나오는 향취가 남다르다. 케케묵은 연륜이 고스란히 남은 건물 모퉁이의 작은 카페들. 올드 타운의 화려하고 시끌벅적함과는 미세하게 색깔을 달리한다. 카페를 장식하고 있는 화단에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 때면 커피향이 그립다. 스웨덴 문을 지나면서 만나는 리가 성은 1330년, 리보니아 기사단의 기지로 강변 옆에 건설되었다. 리가의 구시가지를 빠져 나와 동쪽으로 가면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다. 1935년에 세워진 자유의 기념물 옆 공원의 작은 개울에서는 보트를 빌려 탈 수 있다. 또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화약탑(1621년)과 리가에서 가장 큰 러시아 정교회의 모습도 보인다. 라트비아의 시인이자 사회운동가인 라이니스의 동상도 만날 수 있다. 리가 여행의 숨겨진 보석은 신시가지 거리의 아르누보 건축물이다. 리가의 아르누보 건축 설계는 미하일 에이젠슈타인이 했다. 1899~1914년에 조성된 이 건물은 요즘 들어 많은 관광객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필자는 그가 남긴 화려한 건축 양식보다는 그의 아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당시 세르게이는 러시아권의 유명한 영화감독이었지만 그 흔한 동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의 흑백영화는 무성시대의 찰리 채플린을 무색케 할 정도다. Travel Data 교통편 발틱 3국은 버스 편이 용이하다. 탈린이나 리투아니아에서 리가 행 버스를 타면 된다. 교통정보 대부분 걸어 다녀도 된다. 시내 교통카드는 편의점에서 판매한다. 맛집 퓨전 레스토랑이 많다. 구시가지 쪽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해서 음식값이 비싸다. 반면 동쪽 호텔 뒤쪽으로 가면 저렴하면서도 맛 좋은 음식점이 즐비하다. 숙박 고급 호텔을 비롯해 아파트, B&B, 호스텔 등 다양하다. 고급 호텔은 가격이 비싸지만 도미토리룸은 1인당 2만~3만 원 선에 이용 가능하다. 대표 술 리가 블랙 발삼(Riga Black Balsam)은 러시아의 여황제 예카테리나의 병을 낫게 한 술로 유명해졌다. 그 외 리가는 러시아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 보드카가 많다. 라트비아 최고의 맥주는 알다리스(aldaris)다. 시차 한국보다 7시간 느리다. 날씨 리가의 기온은 전형적으로 14°C에서 23°C. 5월부터 9월 중순까지는 날씨가 온화해서 여행하기 좋다. 그러나 11월부터는 급격하게 온도가 떨어지고 일교차가 커서 두터운 겨울옷이 필수다.
- 2018-11-0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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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의 문화행사
- (연극) 어둠상자 일정 11월 7일~12월 2일 장소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출연 송흥진, 신안진, 백익남 등 이강백 작가의 신작 ‘어둠상자’. 고종의 마지막 어진을 찍은 황실 사진사 4대의 고난에 찬 분투극이다. 극중 인물들의 여정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함축적이고 흥미롭게 표현했다. (영화) 언더 더 트리 개봉 11월 8일 장르 드라마 출연 시구르더 시거르존슨, 토르스테인 바흐만 등 층간소음, 주차문제 등 요즘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이웃 간의 갈등을 다뤘다. 나무 한 그루 때문에 이웃과 돌이킬 수 없는 다툼을 벌이는 영화 ‘언더 더 트리’는 제74회 베니스영화제와 제42회 토론토국제영화제 등 전 세계 11개 영화제에 초청되어 9개의 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축제) 여수동동북축제 일정 11월 10~11일 장소 전라남도 여수시 용기공원 및 선소일원 올해 여수에서 처음 선보이는 동동북축제에서는 전문 아티스트와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초대형 북 퍼레이드를 비롯해 ‘북·드럼 전시’, ‘북·드럼 경연대회’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전시) 러빙빈센트展 일정 11월 16일~2019년 3월 3일 장소 M컨템포러리 2017년 11월 개봉해 4주간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차지한 영화 ‘러빙 빈센트’에서 사용된 원화와 제작 과정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아티스트들이 반 고흐의 기법으로 캔버스 위에 유화로 재현한 6만5000여 장의 프레임 중 엄선된 120점을 공개한다. 또 영화 ‘러빙 빈센트’의 비하인드 영상 클립과 소품으로 사용된 코스튬, 고흐의 방을 만나볼 수 있다. (국악) 다시 만난 아리랑-엇갈린 운명, 새로운 시작 일정 11월 22일 장소 롯데콘서트홀 분단 이후 잃어버렸거나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북한 작곡가들의 관현악곡을 처음으로 선보인다. 바이올린 협주곡 ‘옹헤야’, 단소 협주곡 ‘긴 아리랑’, 북한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관현악 ‘경축’ 등 총 5개 작품이 소개된다. (전시) 황금인간의 땅, 카자흐스탄 일정 11월 27일~2019년 2월 24일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특별전시실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유라시아의 중심에서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보여주는 전시로 총3부에 걸쳐 구성했다. 동물 모양 금판과 관모 장식, 누금기법을 사용한 드리개, 문자가 새겨진 잔 등을 통해 당시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초원에서 이룩한 물질문명과 삶을 엿볼 수 있다.
- 2018-10-2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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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속은 개인의 것만이 아니다
- 지금까지 어떻게 하면 내 재산을 후대에 잘 이양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봤다. 이번에는 돈을 어마어마하게 벌어놓은 세계 부호들이 준비하는 인생 마무리에 대해 풀어볼까 한다. 세상 돈 많기로 소문난 부자들 미담 대부분 역시 돈. 똑똑하게 굴려놓은 재산을 내 자손뿐만 아니라 사회 모두가 쓸 수 있도록 물려주는 부자 이야기를 한 번 들여다보자. 죽기 얼마 전 유언장 다시 쓴 리처드 커즌스 회장 작년 12월 31일. 호주 시드니 근교에서 관광용 수상 비행기가 추락해 조종사 포함 6명이 전원 사망했다. 비행기에 타고 있던 이들은 세계 최대 식음료 출장 서비스 업체 영국 컴퍼스 그룹의 리처드 커즌스(58) 회장 일가족이었다. 두 아들은 물론 커즌스의 약혼녀, 약혼녀의 딸까지 한날한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기업 회생 전문가였던 커즌스. 그는 생전 기울어가는 회사들을 살리고 고용 안정을 이끌어내던 탁월한 전문 경영인으로 평가받아왔다. 사고 후 잊히는가 싶었던 커즌스 회장의 이야기가 8월 말 해외토픽을 타고 날아들었다. 그가 남긴 유산 4100만 파운드(약 600억 원)가 영국에 근거지를 둔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에 기부됐다는 소식이었다. 당초 커즌스는 두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기로 했다. 그러나 죽기 1년 전 혹시 두 아들과 자신이 모두 죽게 될 경우 재산 대부분을 옥스팜에 기부하겠다는 ‘공동비극조항’을 유언장에 삽입했던 것. 사고만 없었더라면 훗날 두 아들이 받을 유산이었다. 그렇다면 왜 커즌스는 옥스팜을 굳이 지목했을까? 한국에도 지부가 있는 옥스팜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활동하는 국제구호기구다. 그러나 2011년 아이티 대지진 이후 구호 현장에서 벌어진 옥스팜 활동가의 성 매수 파문으로 도덕적 치명타는 물론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이로써 7000여 명의 정기후원자가 집단 탈퇴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뜻하지 않았던 고인의 유언 덕에 기적적으로 구호 중단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유언에 따른 커즌스 회장의 기부 소식과 함께 옥스팜 이름이 거론되면서 스캔들 때문에 잠시 잊었던 구호의 중요성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린 것은 아니었을까. 내 재산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작년 7월 미국 CNBC의 에미 마틴 기자가 CNBC 인터넷 판에 쓴 ‘자식에게 유산을 남기지 않기로 한 7명의 억만장자’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흥미로운 통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녀의 68%가 상속을 기대하고 있는 반면 부모는 40%만이 자식에게 유산 상속 용의가 있다고 했던 것.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와 투자 왕으로 불리는 워런 버핏이 재산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않기로 선언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들은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것에 대해 우려섞인 말을 했다. 게이츠는 “부모가 남긴 돈을 자식들이 온전하게 지킬 수 없을 뿐더러 그들의 인생을 제대로 걸을 수 없게 한다”고 했다. 버핏 또한 1986년 경제전문지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자식들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충분한 돈을 남기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기 싫을 정도의 유산을 남기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게이츠 부부는 2011년 영국 ‘데일리메일’을 통해 “재산 810억 달러 중 자녀 3명에게 각각 소량의 돈을 상속할 것”이라고 했다. 버핏 또한 3명의 자녀에게 각각 20억 달러만 남겨줄 계획이라고. ‘포브스’에 따르면 버핏의 개인 재산은 올해 기준 840억 달러다. 게이츠 부부는 2000년 ‘빌앤멜린다게이츠재단’을 설립해 개발도상국 사람들이 질병과 가난, 굶주림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아낌없는 투자를 하고 있다. 이후 버핏도 막대한 재산을 빌앤멜린다게이츠재단과 죽은 부인의 이름을 딴 ‘수잔톰슨버핏재단’ 등 5개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올해 기부액만도 34억 달러다. 유산을 자식에게 남기지 않겠다는 또 다른 이가 있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크다. 2015년 첫딸 맥스가 태어났을 때, 그와 아내 프리실라 저커버그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딸이 살아갈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기를 원하기에 재산의 99%를 기부하겠다고 말이다. 딸만을 위한 세상이 아닌 모든 미래세대를 위한 준비를 하고 싶다는 것이 이 젊은 부호 부부의 생각이었다. 영국의 인기 셰프 고든 램지 또한 순순히 남매들에게 재산을 남기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4남매는 각자 일을 해서 교통비와 전화사용료를 낸다고. 단, 남매들이 각자 자립할 때 아파트 보증금의 25%는 줄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자녀들이 밥 먹는 일도 흔하지 않은 일이고 여행할 때 일등석에 태우는 일도 결코 없다고 영국 신문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를 통해 알린 바 있다. 이외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 ‘캐츠’의 유명 작곡가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 또한 2008년 영국 일간지 ‘미러’와의 인터뷰에서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그가 벌어들인 돈을 극장에 투자하고 음악가를 돕는 데 쓰고 싶다고 했다. 영화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 감독, 영국 가수 스팅 또한 상속 대신 기부를 선택한 인물로 꼽힌다. 알리바바 창업주 마윈 회장의 은퇴 계획 중국 IT업계 거물이자 세계적인 유통 사이트 ‘알리바바’ 창업주인 마윈(馬雲·54) 회장이 내년 9월 10일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마윈의 쉰다섯 살 생일이자 친구 17명과 함께 중국 항저우의 작은 아파트에서 알리바바를 창업한 지 20년이 되는 날이다. 연매출 41조 원, 지난해만 3300명이 훨씬 넘는 일자리를 창출해낸 마윈은 종종 은퇴에 관한 얘기를 해왔다. 구체적인 날짜와 시기를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은퇴와 맞물려 그가 꺼낸 카드는 교육을 기반으로 한 자선사업이다. 최근 알리바바가 공식 웨이보에 공개한 마윈의 새 명함에는 ‘회장’이라는 직함 대신 그 자리에 ‘교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중국 저장성 ‘항저우 사나이’라는 문구와 함께 ‘알리바바 탈빈곤펀드 주석’, ‘마윈 공익펀드 창업자’, ‘농촌교사대변인’ 등 자선사업 관련 약력이 눈에 띈다. 마윈은 이미 2014년도부터 마윈재단을 설립해 농촌의 교육 환경 개선과 자선사업에 불을 지피고 있다. 평소 롤모델을 빌 게이츠라고 말해왔던 마윈이기에 자선사업과 관련한 은퇴 계획에 귀추가 주목되는 것이다. 2017년 기준 ‘포브스’가 집계한 마윈의 재산은 43조 원에 달한다. 한국 부자들은 어떻습니까? 상속이 기부로 이어지는 사례 혹은 은퇴 후 재단을 설립해 자선사업가로 변신한 사례는 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가 발간한 ‘2018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상속과 승계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사회 환원에 대한 고민이 전년에 비해 높아졌다고 한다. 상속과 관련해 ‘재산의 일부 또는 전부를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의견은 지난해 1.5%에서 8.7%로 7.2%포인트 증가했다. 금융자산 50억 원 이상 보유자는 사회 환원 의향이 17.4%에 달했다. 자식이 아닌 사회를 위한 기부에 자산가들의 관심이 부쩍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부금액은 OECD 회원국 36개국 가운데 23위다. 자산가들의 사회공헌 활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만큼 한국에서도 기부왕이 나왔으면 한다.
- 2018-10-18 1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