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웃음), 다시 생을 산다면 발레를 하고 싶어요.”
유년기에 발레리나가 꿈이었던 소녀. 그러나 너무 훈련이 고되고 건강이 따라주지 않아 도중에 그만둔 그 소녀는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가수로 거듭나게 된다. 가수 혜은이의 얘기다. ‘진짜 진짜 좋아해’, ‘당신만을 사랑해’, ‘제3한강교’ 등 수많은 이의 가슴을 울렸던 노래들의 주인공인 그녀는 지금 모든 것을 불사르는 듯한 무대를 선보이면서 여전히 가수로서의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마음을 확인해봤다.
아이돌이라는 단어는 1990년대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했지만, 그 의미 자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돌은 있었다. 혜은이를 1970년대를 대표하는 아이돌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1972년 10월 유신으로 시작되어 1979년 10·26 사건으로 끝나는 1970년대의 엄혹함은, 오히려 그렇게 엄혹했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더더욱 낭만을 꿈꾸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갈망을 채워준 가수가 혜은이였다. 동양적이고 발랄한 얼굴과 그와 대비되는 서구적인 길쭉한 체형. 길옥윤 사단이 만들어낸, 시대를 초월한 명곡들과 그 노래들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가창력. 혜은이라는 이름은 비주얼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당시 대중가요의 가장 세련된 경향으로서 역사에 새겨졌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다
KBS 음악 프로그램 ‘가요무대’ 출연을 준비하는 사이에 대기실에서 만난 혜은이는 조금 살이 빠진 느낌이었다. 10월부터 시작되는 공연들을 준비하느라 그런 것일까. 수도권과 대도시 위주로 했던 지금까지의 공연과는 달리, 이번에는 소도시까지 훑는 공연이 될 예정이다. 그녀로서는 새로운 도전인 셈이다. 문득 지난 호 남진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지방공연을 갈 때마다 굉장히 신나 한다고 말해준 것이 생각나 그대로 그녀에게 전해줬다.
“어휴, 선배님은 공연 안 하면 못 사는 분이야. 내가 무명일 때 그분 리사이틀에 찬조 출연한 적이 있어요. 열아홉, 스무 살 시절이었는데 공연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시지.(웃음)”
그러나 공연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론 혜은이도 못지않다. 데뷔 이후 어느덧 수십 년 세월이 흘렀고 수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혜은이의 노래는 더 진화하면 했지 퇴화하지 않았다. 그녀의 공연을 본 사람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예순이 넘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워풀한 그녀의 목소리와 뛰어다니며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 젊은 시절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관록과 에너지가 공연을 휘어잡고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이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노래가 천직이었다
45년. 공식적으로 혜은이가 데뷔해서 지금까지 가수로서 보낸 시간이다.
“사실은 더 오래됐어요. 정식으로는 45년이지만 어려서부터 아버지 따라서 노래를 불렀으니. 무명 시절이 4년 정도 있었고.”
인터뷰를 하고 있는 중에도 이제는 가요계의 대선배가 된 그녀에게 인사하려고 후배들이 끊임없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후배들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최고죠. 노래를 한결같이 똑같이 부르세요.”
한 후배 가수의 말에서는 음악인 혜은이를 향한 존경심이 느껴졌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처음부터 가수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한 상태로 노래를 불렀던 것이 아니었다.
“노래를 하면서 이게 나의 즐거움, 천직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어요. 어려서는 가장 노릇을 해야 했고, 생계형 가수로 살았죠. 어찌어찌하다 유명해져서 활동을 할 때도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죠.. 첫 결혼이 잘못돼 정신없이 살았고, 두 번째 결혼에서도 난리가 나서….”
쉽지 않은 얘기, 그러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그 얘기였다. 무대 위에서와는 다른 차분한 목소리가 그녀가 견뎌온 세월의 무게만큼 묵직했다.
뒤돌아보면 자식들이 보물
그동안 너무 힘들고 바쁘고 딴 곳을 쳐다볼 새도 없이 일하다 보니 ‘노래란, 가수란 나에게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러나 변화가 찾아왔다. 데뷔 30주년이 됐을 때였다.
“노래가 나의 천직이라고 생각한 것은 얼마 안 됐어요. 10년 남짓? 15년인가? 그러고 보니 나는 맨날 10년이라고 하네.(웃음) 그제야 ‘어 내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네?’ 깨달았죠. 가수가 아니었다면, 내가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녀는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더 많은 행복을 느끼며 살지 않았을까 후회하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이제라도 알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이냐며 흐뭇해했다.
“나를 단단하게 만든 거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고 하죠. 제 목적은 딸아이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어떤 모습이든 나를 기다려주는 팬들이 있었고요. 그것들이 제 목적이었죠. 그래서 버텼고 앞으로도 살아가지 않을까 싶어요.”
“뒤돌아보면 아무것도 없고 자식 둘이 전 재산”이라고 말하는 혜은이는 그 말처럼 딸과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헤어져 살았던 딸과는 ‘30년 기도해서’ 요즘 같이 살게 됐다고 한다.
“아이들이 정말 보통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면 좋겠어요. 그래서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라고 말해요. 결혼을 하겠다면 하고 아니면 말고. 아들은 요리에 관심이 많아 조리사 자격증 따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딸은 스킨스쿠버 강사로 일하는데 투잡해야겠다고 해서 얼마 전부터 시작했어요. ‘엄마, 한 가지 일로는 돈 못 모으겠어’ 하더라고요.(웃음)”
내 목소리 지키는 게 중요
후배들의 찬탄처럼, 혜은이가 가수로서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가수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 자신은 가수의 의미를 모른 채 오랜 세월을 보냈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가수를 철저히 직업으로서 여겼기에 그토록 자신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가수가 지켜야 할 본분에 대한 신뢰와도 이어졌다.
“옛날 가수들과 요즘 가수들을 실력으로 비교하면 요즘 가수들이 훨씬 잘하죠. 우리 때는 레슨 이런 게 있기나 했나요?(웃음) 타고난 게 있으면 가수가 됐고 작곡가들과 녹음할 때 연습하는 정도였죠. 지금은 기계적인 사운드가 발달해서 깜짝 놀랄 정도로 잘하는 후배가 많아요. 그래도 역시 반짝하는 후배들은 가창력이 없는 후배들이고 10년 넘게 오래하는 가수들은 노래를 잘하는 후배들이에요.”
그렇다면 공식 활동기간이 45년인 그녀의 현재 마음가짐은 어떨까?
“사람은 세월이 지나면서 타성에 젖어서 변하게 돼요. 안 변하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저는 요즘 노래를 더 잘 부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옛날의 내 목소리를 지키는 데 더 힘을 쏟고 있어요. 쉽게 말하면 에프엠대로 하는 거예요.”
사실 자기 목소리를 좋아하는 가수는 드물다. 혜은이 또한 임재범의 굵고 허스키한 소리가 좋다고 한다. 그녀의 맑고 소녀 같은 목소리를 떠올리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자신과는 다른 것에 끌리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신곡을 녹음할 때 다르게 부른다고 부르면 노래가 안 되더라고요. ‘선생님, 다시 한 번 불러보실까요. 조금 더 잘하면 좋을 거 같은데’라는 말 듣게 되고. 그러다 결국 찾아내는 건 내 원래 목소리예요. 지금은 옛날보다 노래를 훨씬 잘 불러요. 음량도 더 넓고 풍성하고. 그러나 예전의 그 순수했던 목소리는 못 내죠, 그래서 저에게는 그게 진짜 어려운 거예요.”
혜은이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에 대해 묻자 ‘물론 데뷔곡’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사실 애착 안 가는 노래가 있을까. 콘서트를 하면 시작, 중간, 끝 부분을 대표해야 하는 노래들이 있기 마련이죠. 내 경우에는 그 위치에 분명한 노래들이 있어서 공연 프로그램을 짤 때 편리하긴 하죠.(웃음) 요즘은 모든 공연의 피날레를 ‘열정’으로 맺고 있어요. 나온 지 한 30년 됐나? 그런데 마치 엊그제에 나온 것처럼 불러요.”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시절
“같이 있지 못하면 참을 수 없고, 보고 싶을 때 못 보면 눈멀고 마는 활화산처럼 터져 오르는 그런 사랑”이라는 가사가 담긴 ‘열정’은 그 가사처럼 활화산 같은 박력과 리듬감으로 관객을 방방 뛰게 만드는 노래다. 그 노래를 들으면 항상 모든 것에 열정적으로 도전하는 혜은이와 비슷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 말에 그녀는 다소 씁쓸하다는 듯 말했다.
“옛날에는 그랬어요. 그런데 사는 데 시달리고 힘들다 보니까…. 45년 가수 생활을 했지만 중간 20년 정도는 개인 사정으로 빛을 못 발휘했죠. 내 골든타임을 놓친 거예요. 사실 많이 억울하죠.”
그러나 이대로 그냥 마무리할 혜은이가 아니다 싶었다. ‘다시 새로운 도약을 해보자. 난 할 수 있다’라고 되새겼다. 혼자서는 못하지만 팬들이 있으니까 얼마든지 자신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 결심이 이번 공연의 핵심이다.
“혜은이를 사랑한 수많은 팬에게 노래로 갚아야 한다. 그래서 이번 공연 투어는 중소도시를 꼭 포함시켜야 했어요.”
측은지심에서 시작된 남편과의 의리
혜은이에게 깊은 사연이 된 남편 김동현 얘기를 여기서 반복해서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이미 너무 많이 얘기됐지 않았나. 그저 조심스럽게 물어볼 뿐이었다. 그 많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부부로서 잘 지낼 수 있었던 지혜가 있었는지. 어찌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그녀를 지탱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냥, 측은지심. 상대를 불쌍하게 생각하면 되는 거 같아요.”
그녀는 인간의 삶이란 항상 ‘맞다, 아니다’의 두 가지라고 말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 사람과 안 살려면 끝을 봐야 하지만, 함께 살려면 불쌍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나름대로 힘들었겠구나. 내가 이렇게 힘든데 당사자인 상대는 얼마나 힘들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아이만 봐도 그렇다. 아이가 아프다고 해서 내가 주사를 맞을 수는 없다. 그래서 아이가 아프면 마음으로는 아픔을 느끼지만 육체로는 느낄 수가 없다. 상대의 아픔을 알 수가 없으니, 그것에 대해 함부로 재단을 해선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제 종교가 기독교예요. 그래서 항상 ‘내가 저 사람 입장이라면’ 하는 생각을 해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그 사람이 실수했을 때, 무조건 질책이 아니라 한 번 더 생각하려고 노력해요. 그동안 인생 공부 무지 많이 했죠. 말로 다 할 수 없어요.(웃음)”
작은 일에 행복을 느끼는 여자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공식적인 혜은이의 출생 연도를 보면 1956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1954년생이라고 한다.
“제주도에서 태어났는데 목포로 나가서 호적 신고를 하느라 신고를 늦게 했대요. 호적에 나이가 그리 되어 있으니 다행이다 싶은데 마음이 그리 안 돼.(웃음) 그래도 ‘호적 나이대로 할래’라곤 못하겠어요. 2년이 어디야?(웃음)”
나이 얘기가 나오니 옆에 있던 매니저가 한마디 거들었다.
“팬들이 물어보면 호적이 아닌 실제 나이로 말씀하시는데, 그 얘기를 들으면 다들 ‘나는 나이를 줄이고 싶어 죽겠는데 왜 나이를 올리시지?’ 하더라고요.”
“언젠가는 호적 나이대로 할 거야. 아마 칠십이 가까워지면 그럴 수 있을 거야.(웃음)”
인터뷰 말미로 가면서 그녀의 웃음이 더 많아졌다. 준비했던 무대가 끝나서일까?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일까? 그 웃음 속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그 시절 그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앞으로는 공연만 생각하고 싶어요. 뮤지컬도 해봤는데, 뮤지컬은 아쉬운 게 개인 콘서트를 했을 때의 기쁨과 속 시원함이 없어요. 다 같이 하는 거니까요. 지금 나한테 절실한 건 노래하는 거예요. 나만을 위해 노래를 하고 싶어요. 그게 정말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아닐까요.”
많은 어려움과 맞서 싸운 사람
얼마 전 방송에서 혜은이는 45세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골든타임을 놓친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그렇죠. 그런데 실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또 그런 고생이 기다리고 있을까봐.(웃음)”
그녀는 오랫동안 미로와도 같은 길을 걸었고, 거듭 출발선에 서야 했다. 묵직한 울림과 고통을 알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더욱 응원한다. 그리고 그녀는 변하지 않는 가수로서의 자신으로 그들에게 보답한다.
“열심히 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가수로서도 아내로서도 엄마로서도 최선을 다했고 많은 어려움과 맞서 싸웠죠. 피하지 않고.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러길 참 잘했다 싶어요.”
혜은이의 시대는 계속 진행 중이다. 무대가 있는 한, 그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유독 중후한 가을의 정취와 잘 어울리는 클래식. 잔잔한 선율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때론 리드미컬한 멜로디가 일상의 생기를 더한다. 그러나 클래식은 어렵다는 편견이 적지 않다. 공부하려 작곡가와 노래 제목을 외우더라도 정작 그 곡을 듣지 않는다면 헛수고. 책을 읽으며 손쉽게 음악까지 감상할 수 있는 ‘이지 클래식’을 책방에서 만나봤다.
참고 도서 ‘이지 클래식’ 류인하 저 자료 제공 42미디어콘텐츠
일상에서 만나는 클래식 거장들의 음악
모차르트, 베토벤, 바흐 등 클래식 대표 음악가를 중심으로 영화, 드라마, CF, 만화 등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그들의 곡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개된 클래식을 바로 들어볼 수 있도록 동영상 링크가 연결된 QR코드를 수록했다. 글을 읽기 전후로 음악을 감상하면 그 내용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데 수월할 것이다. 음악가의 삶과 작품 탄생의 비화, 당대 작곡가들의 얽히고설킨 사랑과 우정 등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알차게 담았다.
작곡가별 대표 음악과 추천 음악 알아보기
제목과 음악가는 몰라도 귀에 익숙한 클래식 몇 곡 정도는 있을 것이다. 앞서 도입부에서 클래식의 제목, 작곡가 등을 매치했다면, 그다음은 각 음악가의 또 다른 대표곡과 저자의 추천 음악을 알아볼 차례다. 작품명에는 영문과 작품 번호 등을 함께 실어 유튜브나 해외 사이트 등에서도 쉽게 검색하도록 정리했다. 추천 음악의 경우 유명 연주자나 지휘자의 공연 영상이 QR코드로 연결돼 훌륭한 연주가 어우러진 명곡을 감상할 수 있다.
클래식과 더불어 즐기는 당대의 예술
클래식 관련 지식과 감상에만 치중하지 않고, 음악가들의 삶과 당대의 예술을 엿볼 수 있도록 다양한 이미지를 담아낸 것이 특징이다. 각 음악가의 초상화나 사진, 명화 속에 담긴 모습, 기념 동상, 악보, 악기뿐만 아니라 그들이 태어난 곳과 묘지 등 풍부한 자료가 더해져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장과 장 사이 ‘인터미션’ 코너를 마련해 클래식의 장르, 공연 감상 에티켓, 세계음악축제, 오케스트라의 종류 포지션 등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책에서 발견하는 또 다른 즐거움
plus 01
QR코드(Quick Response Code)란 세로줄 형태로 정보를 저장하는 바코드(Bar Code)와 달리 가로줄이 더해지며 격자무늬 형태로 나타나는 2차원 코드를 말한다. 스마트폰을 통해 쉽게 정보를 읽어내 활용도가 높다. 앱 스토어에서 ‘QR코드’를 검색하면 ‘QR코드리더’, ‘QR코드스캐너’ 등 관련 앱을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다.
plus 02
클래식을 자주 듣고, 관련 지식을 쌓다 보면 자연스럽게 악기에도 관심이 가게 마련이다. 책에는 오케스트라 편성 포지션과 더불어 클래식 연주에 사용되는 악기 종류가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익히 알고 있는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트럼펫은 물론 마림바, 피콜로, 비브라폰 등 생소한 악기들까지 그 모양과 특징을 정리했다.
plus 03
올 9월엔 한국을 넘어 전 세계를 대표하는 소프라노 조수미의 무대를 다양하게 만날 수 있다. 프랑스 파리를 테마로 한 ‘원 나이트 인 파리(One Night in Paris)’는 9월 5일 예술의전당(서울)을 시작으로, 7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전라)에 이어 8일 대전예술의전당(대전)에서 펼쳐진다. 이 외에도 ‘조수미 콘서트 판타지아’(9월 2일, 김해문화의전당), ‘조수미 파크 콘서트’(9월 9일, 올림픽공원 내 88잔디마당) 등의 공연이 다채롭게 마련돼 있다.
음악이란 소리를 조화롭게 엮어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이며, 이른바 ‘만국 공통어’라고들 말한다. 듣기 좋고 감미로운 노래는 거칠고 메마른 우리들의 감정을 잘 순화해준다. 훌륭한 명곡 하나로 풍요롭고 향기로운 분위기를 낼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 역시 가을이면 찾는 애창곡 하나가 있다.
우리 집 마당 뒤뜰에 울긋불긋했던 단풍이 낙엽 되어 땅 위를 뒹굴고 있을 때면, ‘고엽’의 멜로디가 내 귓가를 스치곤 했다. 그러면 어쩐지 신이 났고 즐거웠다. ‘고엽’은 사랑의 소멸을 마른 땅 위에 떨어지는 잎으로 비유한 자크 프레베르(프랑스 출신)의 시를 작곡가 조제프 코스마(헝가리 출신)의 노래로 재탄생시킨 곡이다.
'인생은 가도 예술은 남는다. 그래서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고 하지 아니했던가? 시인은 메말라서 죽은 잎만을 보고 시작(詩作)한 것이 아닐 것이다. 한 음악가를 만나 그의 시들고 마른 잎과 같은 삶까지 생생하게 변화시켰다. 이렇게도 훌륭하고 감명 깊은 곡에 얽힌 사연을 알고 난 뒤, 나는 이 노래에 더욱 애착을 갖게 됐다. 서서히 가을이 무르익고, 흩어졌던 낙엽이 쌓이면, 시들어 뒹구는 잎사귀 하나에서도 명곡의 아름답고 달콤한 향기를 맡아 보려 한다.
언제나 가을이면 튼실한 열매가 풍작을 자랑하듯, ‘고엽’을 열창할 준비를 한다. 광맥을 따라 금광을 채굴해 나가듯, 이 명곡을 나의 애창곡으로 삼아 힘껏 불러보고 싶다.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를 보고도 삶에 대한 감명을 느낄 수 있다. ‘고엽’을 부를 때면, 이 가을을 낭만과 아름다움으로 멋지게 색칠해보고 싶다.
시대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예술이다. 토양의 기운과 그 땅을 디디고 사는 사람들의 기질이 조화를 이뤄내는 것은 전통예술이다. 역사의 질곡에 이은 현대사회 전환기에 살았던 한 소년. 그는 음악에 눈뜨면서 막중한 임무처럼 국악계의 문을 두드렸다. 전통음악의 한계를 허물고 한국 예술 전반에 주춧돌을 쌓다 보니 어느덧 30여 년 세월. 우리 음악이고 예술이고 하고 싶은 것이 여전히 많다고 말하는 KBS국악관현악단 이준호(李準鎬·59) 상임지휘자. 대금과 소금 연주자를 거쳐, 작곡가 그리고 대한민국 예술의 중심에서 명성 높은 국악인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국악, 문턱 낮추고 저변을 넓히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던 7월의 어느 날, 여의도 너른 길을 걸어 한국방송공사(KBS)로 향했다. 24시간 잠들지 않는 방송사. 일하러 오는 사람과 그들을 보러 오는 사람으로 매일 인산인해인 곳. 여기에 KBS국악관현악단이 있다. 오전 연주 연습을 마치고 단원들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준호 상임지휘자와 마주했다.
KBS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로 살아온 지 올해로 14년째. 국악기를 손에 쥔 사람들 정중앙에서 음악이 갈 길을 제시하고 함께 호흡한다. 1985년 소금 연주자이자 창단 단원으로 KBS국악관현악단과 처음 인연을 맺었으며, 같은 해에는 국악실내악단 ‘슬기둥’을 결성해 대중과 눈 맞춤하기에 앞장섰다. 대금과 소금 연주자로서 활약은 물론, 작곡가로서 친근한 국악 창작을 위해 지금도 노력 중이다. 한국청소년국악관현악단(1988)과 경기도립국악단(1996) 창단에도 힘을 보탰다. 두 단체에서 또한 상임지휘자를 맡아 활동했다. 지난 6월에는 대금연구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우리 고유의 악기 대금 보존과 계승, 발전에 한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슬기둥’, 국악이 변화하다
지금은 소규모 국악 그룹이 넘쳐나지만 ‘슬기둥’의 등장은 파격 그 자체였다. 이준호 지휘자와 함께 KBS국악관현악단 창단 동기인 강호중, 김영동, 민의식 등 20대 국악 연주가들은 경계 없는 신선한 음악을 해보자는 마음에 ‘슬기둥’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가 공감하고 나누는 친숙한 예술을 선보이려고 애썼다. 특히 ‘슬기둥’이 세상에 나오면서 국악은 관객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던 옛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슬기둥 1집에 발표된 ‘산도깨비’와 ‘소금장수’는 교과서에도 실렸습니다. 슬기둥을 창단했던 저와 제 친구들의 선택이 맞았습니다. 모두가 국악의 정통성을 외칠 때였어요. 그런 역할은 국립국악원에서 충분히 하고 있잖아요. 영산회상(조선시대 후기 기악곡 형태의 풍류음악)이나 수제천(관악합주곡, 원곡명 ‘정읍(井邑)’)으로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어요. 일반 대중이 국악을 쉽게 느낄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뭘까 생각했습니다. 국악가요 같은 것을 따라 부르면 더 편하지 않나요? 민요도 전통음악이잖아요. 슬기둥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제가 작곡에 열을 올게 된 것이죠. 198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이준호 지휘자는 지금까지 국악을 바탕으로 1000곡 가까이 창작해왔다. 무용극, 뮤지컬, 연극, 창극, 마당극에 사용하는 공연음악과 TV드라마 음악 등 국악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국악의 대중화에 발 벗고 나섰다. 20여 편 되는 MBC마당극 중 일곱 개의 작품도 작곡가 이준호의 손에서 탄생했다. 국악과 현대음악을 접목시키고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고자 노력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후배들이 설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새로운 장르를 개발해서 국악에 몸담고 있는 후배들이 갈 길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길이 있어야 젊은 친구들이 국악을 공부하며 열정을 보일 거 아니에요. 전통음악이든 현대음악이든 음악계 전체가 풍성해져야죠.”
새로운 국악을 주창했던 슬기둥 원년 멤버들은 모두 국악과 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이준호 지휘자도 4년 전부터 모교인 추계예술대학교에서 대금과 작곡, 지휘를 가르치고 있다.
“음악 만들면서 현장에 있는 게 좋지, 학교에 있는 걸 원하지는 않았어요. 이제 제가 나이를 꽤 먹었다는 거겠죠.(웃음)”
트럼펫 대신 대금을 손에 쥐다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난 이준호 지휘자는 음악 하는 외삼촌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특히 외삼촌 주변에 학교 다니면서 브라스 밴드 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동네에서 행진곡 합주를 들을 기회가 많았는데 영향이 저한테 굉장했죠.”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브라스 밴드에 들어갔다. 다양한 서양악기를 접했고 트럼펫을 배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립국악원 연수를 한 달 정도 다녀온 음악선생님으로 인해 국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밤낚시를 가자고 하시더군요. 그곳에서 국악에 대한 깊이와 역사를 이야기하시면서 ‘국악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습니다. 듣고 잊어버려야 했는데 그 말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대전환이었다. 그때부터 트럼펫을 내려놓고 국립국악고등학교를 목표로 고입 준비를 해 입학했다. 대금과의 인연도 국립국악고등학고 입학과 함께였다.
“국악을 처음 접하는 거라 뭐든 생소했어요. 악기 주법과 모양새도 그랬고요. 국악기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이 학교에 들어갔어요. 결국에는 대금을 선택했는데 나하고 잘 맞았던 거죠.”
젊음으로 한바탕 놀다
이준호 지휘자가 추구하고 생각하는 국악의 장점은 언제든 변형 가능하고 다른 장르와도 잘 어우러진다는 점이다. 국악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면서부터 다양한 음악, 예술 장르와의 협연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KBS국악관현악단 혹은 슬기둥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해외 여러 나라에 나갔다. 그리고 우리 가락의 흥을 가지각색 협연 무대로 펼쳐 보이기도 했다. 사물놀이패는 물론이고 비보잉, 재즈, 록 등 국악과 접목할 수 있다면 뭐든 함께 무대에 세우고 실험을 이어갔다.
“언젠가 카자흐스탄에 한국어과가 있는 대학교에서 특강을 해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아무리 통역을 붙여 강의한다고 해도 재미없을 것 같아서 비보잉 그룹과 함께 갔습니다. ‘10분에서 15분만 내가 할 테니까 나머지는 너희들이 해라!’ 하고요.(웃음)”
우리나라 문화를 잠깐 소개하고 비보잉 그룹에게 바통을 넘겼다. 그 곳에서도 비보잉이 인기가 있었는지 20여 명되는 팬이 몰렸다. 우리 가락에 맞춰 한국 비보이에게 동작을 배웠다.
“그때 국악과 비보잉의 결합은 새로운 방식의 문화 융합이었습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열리는 하라레축제에 갔을 때는 기타리스트 김도균과 색소폰 연주자 이정식과 함께 공연했습니다. 그들에게 국악과 록의 접목을 보여주고 싶었죠. 그런데 공연 끝나고 뒤풀이가 더 오래 걸렸어요. 우리 예술인과 깜짝 협연이 열린거죠. 아프리카 사람들이 리듬을 좀 알잖아요. 우리 것을 다른 나라에 알리고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의미 있고 좋은 일입니다.”
창작은 멈추지 않는다
인터뷰를 하면서 인상적이었던 공간은 바로 국악관현악단의 연습실이었다. 방송 전파를 위해 존재하는 방송사 공간에 공연을 준비하는 이들의 아지트가 있다는 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KBS국악관현악단이 생기고 30년 동안 제대로 된 연습실이 없었어요. 라디오 공개홀에서 본관 뉴스센터, KBS별관으로 옮겨 다녔어요. 제가 여기 창단 멤버이고 오래 활동해서 아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3년 전에 공간 좀 제발 마련해 달라고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그때까지 국악관현악단 명의로 된 연습실이 없었답니다.”
방송사 건물이 한정적인 데다 사람과 장비가 늘어나 이해는 했지만 오랜 세월을 참고 참다 큰맘 먹고 연습실 문제를 알렸던 것이다.
“사실 방송사 내에 사무실 없는 분들도 있으니 그 사정은 지금도 이해가 돼요. 어쨌든 요즘은 연습이 중단되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일이 없어서 단원들이 좋아해요. 대신 저희는 열심히 뛰어야겠죠. 연주회도 하고 좋은 레퍼토리도 만들고요. 한국음악을 접하지 못하는 소외 지역이나 교도소, 군부대 등도 저희가 찾아가서 음악회를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공연으로 국민들에게 보답하면 됩니다.”
KBS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라는 높은 위치가 늘 행복하고 달가운 자리만은 아니다. 현재 이끌고 있는 악단과 단원들을 위해서 책임지고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나서야 했다. 정권이 바뀔 때 생각지도 못한 오해를 받거나 힘든 일을 겪기도 했다. 국민의 시선이 쏠려 있는 공영방송사 한 분야의 수장으로서 말을 아끼는 것이 ‘최고의 수’라는 것도 나이가 익어가면서 알아갔다. 그래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옆에 있는 단원들과 함께하는 예술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앞으로 어떤 것을 더 하고 싶냐고 물으니 당연히 국악 얘기로 다시 돌아온다.
“곡 써야죠. 작곡가니까. 판소리 5마당 중에서 심청가만 남았어요. 판소리만 한 대목 한 대목 연주해왔는데 그걸 전체 다 오케스트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산회상 전 바탕, 종묘제례악 합창가….”
지금까지 1000곡 가까이 작곡했다는 분이 아직도 정리할 곡도 많고 할 일이 많단다. 시간이 나면 KBS 신관 길 건너 연구동 5층 사무실에서 곡 쓰는 것이 낙이라고 한다. 이 열정을 어찌 말릴 수 있을까 모르겠다. 언젠가 휴식의 시간이 찾아온다면 펜도, 지휘봉도, 대금도 다 내려놓고 좀 쉬시기를 간청드려본다.
‘브라보 체조’와 함께 백세 인생 내 손으로 드디어 브라보 체조의 마지막 동작들입니다. 체력이 약한 시니어에게는 운동의 마무리도 매우 중요합니다. 체조의 마무리 과정인 만큼 몸에 쌓인 피로를 풀어주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심신이 편안해지면 불면 개선이나 숙면에 도움이 됩니다. ‘브라보 체조’의 후반부는 이러한 부분을 고려했습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시니어 건강을 위해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과 공동으로 만든 ‘브라보 체조’는 5070 시니어 세대를 위한 건강 체조입니다. 또 버클리 음대 출신 작곡가 지담의 참여로, 듣기만 해도 심신이 힐링되는 음악과 함께합니다.
감수 이자호 인천성모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모델 진민범 인천성모병원 물리치료사
무릎치기
다리를 대각선 방향으로 끌어올려 하지 외전근과 이상근에 스트레칭 효과를 준다. 내전근을 활성화해 보행 능력도 향상시킬 수 있다. 또 복부의 외복사근과 내복사근이 교대로 수축하는 효과가 허리 안정성 증가로 이어져 허리 통증을 예방할 수 있다. 운동할 때 허리를 굽히지 않도록 주의한다.
다리를 튕기듯 올려 무릎과 팔꿈치가 맞닿도록 한다. 한쪽을 2회 반복하며, 왼쪽과 오른쪽 모두 운동한다. 제자리 뛰기를 하며 한 바퀴 돈다.
제기차기
고관절과 무릎관절이 활성화할 수 있도록 다리의 외회전근과 내회전근을 사용하는 운동이다. 관절의 가동 범위가 넓어져 걸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통증을 예방한다. 난이도가 높은 동적 균형 운동으로, 자주 연습하면 낙상과 통증 예방을 가능하게 해준다.
1 발과 박수를 치듯 발의 안쪽 부분과 바깥쪽 부분을 번갈아가면서 손바닥에 댄다. 제기차기를 하는 것처럼 다리를 튕기듯 움직여 몸의 균형을 유지한다.
2 낙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균형 유지에 유의한다.
Y자 가슴 내밀기
어깨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 척추의 상부를 정렬할 수 있는 운동이다. 팔을 완전히 세우지 않고 약간 벌려야 어깨관절을 감싸고 있는 주변부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운동 후반부에 피로가 쌓인 몸을 풀어주는 스트레칭 효과도 있다.
1 발을 대각선으로 한 발 내밀면서 무릎을 굽혀 체중을 싣는다.
2 이와 동시에 팔을 벌려 들어올리며 Y자로 만든다.
숨쉬기
코로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뱉는 복식호흡을 통해 긴장되어 있는 몸의 각 부분을 풀어주고, 자율신경계를 활성화하는 동작이다. 자율신경계가 활성화하면 우울증이나 갱년기 극복에 도움이 된다. 또 심폐 기능을 향상시켜, 잠들기 전에 하면 불면증 개선과 숙면에 효과가 있다.
1 팔과 가슴을 벌리면서 코로 숨을 들이마신다. 이때 시선과 손바닥은 하늘을 향하게 해 공기를 많이 들이마시도록 한다.
2 몸을 숙이면서 입으로 숨을 내뱉는다.
3 팔은 겹치게 하고 손은 가볍게 주먹을 쥔다. 복식호흡의 효과를 위해 부드럽고 천천히 하는 게 포인트.
청중은 젊었던 지난날을 회상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면서 박수쳤고 파안대소가 터져 나왔다. 제2인생을 준비하는 은퇴자를 비롯해 교사, 시인, 사진작가 등 모인 사람들의 나이와 직업도 참 다양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에 몰입하는 이들 앞에 선 강연자는 이동순(李東洵·68)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다. 시를 쓰는 문학인이라는데 옛 대중가요에 심취해 살다 보니 ‘대중음악 연구가’라는 이름표도 늘 따라다닌다. 중절모를 쓰고 나타난 로맨스그레이 이동순 대표는 강의뿐만 아니라 그에 맞는 노래를 직접 들려주며 이해를 돕는다. 시대의 흐름을 온몸으로 일깨우며 살고 있는 이동순 대표의 이야기를 동년기자가 직접 들어봤다.
6월 말 만난 이동순 대표는 ‘대중가요로 풀어보는 서울미래유산’이라는 주제로 열띤 강연을 했다. 이야기경영연구소가 주최하고 서울미래유산과 서울시가 후원한 이 강좌는 서울미래유산(미래 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현재 문화재 등록이 안 된 서울의 근현대 유·무형 유산) 중 하나인 대중가요를 통해 서울의 옛 모습과 현재를 이어 역사를 이해하고자 마련된 프로그램이었다. 대중가요가 만들어진 배경이나 가수의 인생 스토리는 물론이고 서울의 옛 거리도 슬라이드 사진으로 더해졌다. 이동순 대표가 맛깔나는 목소리로 직접 노래를 부르면, 청중도 따라 부르면서 시간여행을 하듯 추억 속으로 함께 잠겼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대중가요 사랑과 전파에 쏟는 열정은 국보급이다. 이동순 대표는 대구 계명문화대학교 평생교육원의 특임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대중가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마음껏 음반도 듣고, 노래도 부르며 힐링하는 곳이 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에서 센터 이름을 지었다. 주 활동무대는 대구와 경상도 지역이지만 그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대중가요 연구가이기에 서울은 물론 전국에서 모시기 바쁘다. 지금까지 공연을 겸한 강연을 500회 넘게 한 것 같다고.
대중가요 사랑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이동순 대표는 대학 졸업 무렵이던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시를 쓰는 문인이자 학자로서 천재 시인 백석(白石, 1912∼1996)의 시를 엮어 ‘백석시전집’(1987)을 발간했으며 ‘백석문학상’ 제정에도 큰 역할을 했다.
문학인의 삶 외에 특이한 이력 하나가 바로 ‘대중가요 연구가’라는 타이틀이다. 대중가요에 심취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동순 대표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한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산달을 얼마 앞두고 한국전쟁이 발발했답니다. 피란도 못 가고 경북 김천 선산 가까이에 있는 초가에서 저를 낳으시곤 10개월 만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딸자식 둘은 계모 설움 안 받게 해 달라, 포대에 싸여 윗목에 누워 있는 어린 핏덩이는 곧 나를 따라올 테니 걱정 안 한다’는 유언을 남기셨답니다.”
유년 시절이 되니 어머니의 빈자리가 점점 커져갔다. 유난히 설움과 눈물이 많았고, 상처도 쉽게 받았다. 감수성 또한 섬세하고 예민했다. 이 시절의 성격이 시인이 되는 데 일조한 것 같다고 이동순 대표는 회고했다.
“전매청 창고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진공관 라디오를 켜놓고 ‘정오의 희망음악’이라는 방송을 듣곤 하셨어요. 이때 대중가요를 처음 접하게 됐습니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그리고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 같은 노래가 자주 흘러나왔어요. 여가수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엄마도 저런 목소리였을 거야’라며 상상하곤 했어요.”
라디오에서 여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빈 종이와 연필을 찾아 미친 듯이 가사를 옮겨 쓰기도 했다. 가사를 적으면 노래가 외워지면서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아련함이 그를 대중가요에 점점 더 몰입하게 만들었다.
음반 가득한 친구 집에서 자신을 발견하다
중학교 2학년 때 등하교를 같이하던 길목 친구가 있었다. 친구 어머니 방에는 탐나는 예쁜 전축과 함께 음반이 가득했다. 혼자 몸으로 철공소를 운영하던 친구 어머니는 술만 취하면 전축을 틀어놓고 흐느껴 울었다. 친구 어머니가 외출한 틈을 타 음반이 가득 꽂힌 방으로 들어갔던 어느 날, 온종일 노래를 들으며 대학노트 두 권에 193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의 노래 가사를 빼곡하게 써내려갔다.
“친구 집에서 기록했던 노래가 지금 내 머릿속에 다 들어 있어요. 한 480곡쯤 될 겁니다. 그게 지금까지 내 대중가요 연구의 밑천이 되었어요. 가요 평론가로 가요 해설가로 또 노래를 부를 때도 당시 기억을 다 써먹고 있습니다.(웃음)”
학창 시절 그는 여기저기 불려 다녀야 했다. 많은 노래를 알고 잘 부르기까지 하니 섭외 1순위가 당연했다. 수학여행, 장기자랑, 친구 집에 놀러갈 때 등 어디서든 칭찬받는 것이 좋아 능청스럽게 무대에 선 듯 노래를 부르곤 했다.
“마치 남자 기생이 된 거 같았어요. 심지어 군대에서도 그랬습니다. 선임이 노래 부르게 하고 술 한 잔씩 따라주곤 했거든요. 그야말로 노래 사역을 한 셈이었어요.”
꿈을 포기하고 대중가요에 빠져들다
이동순 대표의 젊은 날 꿈은 방송인이었다. 대학 시절 방송반 활동을 쭉 했기에 당연히 기자나 라디오 PD쯤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입사시험 신원조회에서 친척의 부역 기록이 발견됐다. 연좌제가 발목을 잡았다. 유년 시절부터 꿈꿨던 방송인의 꿈은 펼치지도 못하고 접어야 했다.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경북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누구보다 빨리 국문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아 27세의 젊은 나이에 경북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넉넉해진 주머니 사정 덕분에 고서와 음반도 사 모을 수 있었다. 천직처럼 느꼈던 대중가요 연구는 1980년대 충북대학교로 직장을 옮기면서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제가 알고 있는 노래를 살펴보니 일제강점기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 등 문화예술인이 대부분 가사를 썼더라고요. 그래서인지 가사가 굉장히 품위가 있고 훌륭했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대중가요를 ‘뽕짝’ 혹은 ‘딴따라’라고 불렀습니다. 자기모멸적이고 비하하는 말을 많이 했어요. 딴따라는 두드리고 다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거든요.”
당시 대중음악가들이 자해의식, 피해의식 등 상처가 많았다고 이동순 대표는 진단한다.
“대중음악가가 술집에서 서양음악을 하는 작곡가나 성악가를 만날 수도 있잖아요. 서양음악 가들은 대중음악을 음악으로 취급하지 않았어요. 음악계에 반상계급 의식이 존재했는데 당연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번지 없는 주막, 대중가요 연구에 심취하다
이동순 대표는 대중가요를 ‘문화적 번지를 잃어버린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음악도 아닌데, 언제부터인가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서양음악을 생각하면 답답했다. ‘가요’야말로 민족 예술이고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은 도구인데 ‘왜 이렇게 천대를 받나!’ 하는 생각에 1981년 충북대학교로 직장을 옮기면서 가요에 대한 에세이, 신문 칼럼, 논문을 수시로 썼다. 2001년 월간조선에 1년여 기고했던 옛 가요 관련 에세이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가요 연구가로서 대중의 인지도가 높아갈 즈음, 대구MBC에서 연락이 왔다. 옛 가요를 중심으로 한 시간짜리 라디오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싶다고 했다.
“놀라운 소식이었어요. 속으로는 좋아서 죽을 지경이었지요. 원래 방송인이 꿈이었으니까요. 기분 좋았는데 한편으로는 어떻게 진행하나 걱정이 앞섰어요.”
방송을 함께할 작가를 구해주기로 했으나 옛 노래에 대해 잘 아는 작가가 없었다. 결국 원고 준비에서부터 내레이션, 노래 선곡까지 이동순 대표 혼자 도맡아야 했다. 1인 방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다 했습니다.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이야기’라는 타이틀로 주말 저녁 7시부터 8시까지 방송을 했어요. 나들이 갔다가 길이 막힐 때 라디오를 트는 황금시간대였어요. 다행히 반응이 좋았어요. 즐겁고 행복했죠. 무엇보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방송 진행을 마음껏 할 수 있었잖아요.”
자부심도 대단했다. 5년 동안 이어온 방송 진행으로 가요 연구가로서의 인지도도 높아졌다. 지금은 전국에서 강연 초청이 물밀듯이 들어와 정신없다고. 청중에게 직접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 아코디언도 배웠다. 악기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생겨나 색소폰, 장구는 물론 판소리할 때 쓰는 소리북과 거문고 등도 익혔다.
“삶이 어떻게 보면 단조로울 수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만질 수 있는 악기가 늘어나니까 아주 풍성해지고 다양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이걸로 남을 즐겁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흥이 절로 납니다. 지금은 강연 반, 공연 반 이렇게 합니다.(웃음)”
악기를 배우고 보니 재능을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해 쓰고 싶었다. 경산에 있는 한 요양원을 찾아가 치매 노인들에게 옛 노래를 들려주곤 한다고.
“요양원 직원들이 제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치매 노인들을 미리 홀에 모아 앉혀놓습니다, 무표정한 얼굴, 목석처럼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노인들을 위해 연주해요. 그런데 신기해요. 10분, 20분이 지나면,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르고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거든요.”
그들의 잠자는 의식이 깨어나는 것을 느낄 때 전율이 일어난다고 했다.
떠돌이 유랑가수로 대중의 마음을 치유하다
노래방 가사책을 모두 꿰뚫고(?) 있다는 이동순 대표. 스스로를 걸어 다니는 노래방 가사책이라고 자부하는 만큼 전설처럼 전해지는 일생일대의 결투가 있다. 바로 김지하 시인과의 대중가요 부르기 대결이다. 김지하 시인은 가왕(歌王) 조용필도 꺾은 문단계 노래 지존으로 불렸다. 술만 마시면 혼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래를 불러댔다. 보다 못한 김지하의 후배가 “청주 시골뜨기가 더 노래를 잘 부른다”고 놀리자, 김지하는 “그런 놈은 우리가 꺾어야지” 하면서 대결을 신청했다. 배심원도 배석할 정도로 큰 대결이었다.
“같은 노래도 안 되고 상대방이 부른 노래도 부를 수 없고 별별 규칙을 다 만들어 노래 대결을 했습니다. 밤 9시에 시작했는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도 안 끝났어요. 김지하 씨가 ‘아이고, 저렇게 징그러운 놈은 처음 보네. 이런 끔찍한 짓은 다시는 안 할란다!’ 하면서 항복했습니다.”
배심원 중 한 명인 김성동 소설가가 이 일화를 이동순 대표가 1987년에 출간한 시집 ‘지금 그리운 사람은’ 발문에 쓰면서 더 많이 알려지게 됐다. 이 대결은 이동순 대표가 대중음악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됐다.
이동순 대표는 많은 노래를 알고 있고 잘 부르지만 특히 고운봉의 ‘명동 부르스’와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를 즐겨 부른다. 자신의 음색과 정서에 잘 맞기 때문이라고. 가슴에 사무치는 노래는 역시 이화자의 ‘어머님 전상서’, 백련설의 ‘어머님 사랑’, 현인의 ‘비나리는 고모령’ 등이다. 어머니와 관련한 노래나 글자가 나오면 눈물이 핑 돈다. 시간이 지나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으면 학자의 길을 걷지 않고 아코디언을 어깨에 메고 함경도나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유랑극단 악사를 하지 않았을까 상상한다는 이동순 대표. 스스로를 옛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 떠돌이 유랑 가수라고 말한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시인, 옛 노래를 섬세한 감수성과 예리한 시각으로 재발견하는 대중가요 연구가. 이동순 대표의 따스한 미소와 온화한 모습 뒤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대중가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혜안이 숨겨져 있다.
몇 달 전, 어느 술자리에서 그녀와 처음 마주쳤다. “반갑습니다. 윤승희입니다” 하고 인사하는 멋진 중년 여인의 인사에 “아니 그럼 당신이 ‘제비처럼~’의 그 윤승희 씨?” 하며 한량 이봉규의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명색이 나도 TV 출연 꽤나 한 방송인이지만, 이 왕년의 섹시가수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청소년기에 윤승희의 광팬이던 내가 환갑 나이에 그녀를 코앞에서 마주쳤기에 ‘꿈이야 생시야~’하는 기분이었다. 둘째는 내 기억으로 분명 나보다 최소한 5~6세 이상은 나이가 위였던 스타였는데 ‘어찌 이토록 젊고 섹시하나?’ 하는 감탄이었다. 감히 나이를 묻지 않았다. 아니 내가 실망할까봐 일부러 묻지 않았다. 윤승희가 히트할 당시의 시대와 내 나이를 얼추 계산해보니 그녀는 최소한 60대 중후반 정도는 되었다. 그런 여성이 이토록 섹시해 보이다니 나로서는 무척 드문 감정이었다.
1년 8개월의 짧고 굵은 가수활동
특별히 한량 이봉규만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 당시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남학생에게 윤승희는 최고의 섹시 스타였다. 여배우로는 당시 학생으로 나이가 나보다 한 살 어린 임예진이 청초하고 깜찍한 매력으로 남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윤승희는 피 끓는 청춘들의 애간장을 녹였던 섹시한 누나였다. 그 윤승희와 수차례 만나 얘기를 나눈 뒤에 한 첫 질문이 “그동안 뭐하셨어요?”다. ‘제비처럼’으로 한창 인기를 구가하던 그녀가 홀연히 브라운관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1년 8개월 동안 짧고 굵게 활동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그녀는 곧바로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노래를 하기로 남편과 약속을 했지만 임신하고 애 키우느라 자연스럽게 공백기가 길어졌다. 15년 정도 노래를 듣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노래를 들으면 노래하고 싶어서 튀어 나갈까봐 일부러 노래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그토록 좋아하는 노래를 버릴 정도로 남편이 좋았는지 궁금했다. 결혼과 남편 얘기로 화제를 옮겼다. 친한 언니가 남편을 소개해줬다. 세칭 소개팅으로 몇 번 만나 식사하고 데이트를 하던 중에 남편에게 갑자기 납치 당했다. 키스하면 결혼해야 되는 줄 알았던 당시 문화 때문에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인기 절정의 윤승희가 갑자기 브라운관에서 사라지니까 기자들이 취재하려고 난리가 났었다. 건설업을 해서 재력도 있고 터프한 남편은 기자들에게 술을 사주거나 밥을 사주면서 “윤승희는 내 꺼다!”라며 나쁜 기사를 못 쓰게 설득했다. 지금이야 어림도 없지만 당시 그 정도는 통했던 시절이다. 그렇게 시작된 결혼생활. 10년 정도 알콩달콩 살다가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났다. 이후 자연스럽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는 ‘졸혼’의 상황이 되어버렸다. “뭐든지 유행의 첨단을 걷는다”라고 애써 웃으며 안경을 닦는 표정이 복잡해 보인다.
신나게 놀다가 지치면 내게 오라
현재 남편은 부산에서 살고 윤승희는 서울에서 살며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통화한다. 친구 같은 사이다. 남편은 “내가 그동안 실컷 놀면서 할 짓 못할 짓 다하며 살았으니까 너도 신나게 놀다가 지치면 내게 오라!”고 말한다. 그녀의 남편은 이봉규보다 더 한량으로 살았나보다. 윤승희는 “억울하다”며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다. “애들 다 키우고 남편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니까 어느덧 늙어버렸다”며 목소리를 높였다가, 곧바로 “이제는 애인 같은 친구가 필요하다. 괜찮은 노인네 있으면 소개해 달라!”며 애써 차분해진다. 그녀의 외모와 어울리려면 연하의 남성이 맞을 것 같아서 물었더니 “나이는 많아도 마인드가 젊고 코드가 맞으면 된다. 요즘 그런 남자들이 많은데 내 주위에만 없다”고 심각하게 토로한다. 외로운 사람들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어느덧 노년의 나이로 접어든 왕년의 섹시 스타 윤승희에게도 스며든다. ‘졸혼’으로 남편과 헤어져 살지만 그 좋아했던 가수생활을 이어가지 못하고 도중에 그만둔 세월이 억울하고 야속해서 더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고 판단된다. “내 성격이 전형적인 혈액형 O형의 성격으로 낙천적이라 그나마 지금까지 잘 버티고 살아왔다. 만약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 죽었을 것. 파란만장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결혼과 함께 사라진 추억 속 윤승희
건축업도 했고 그동안 별별 장사 다 해봤다.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해 가수로 인기절정을 누리다가 생활전선의 여장부로 살면서 단맛 쓴맛 다 본 인생이다. 부산에서 해운업을 하던 아버지가 풍랑을 만나 행방불명되며 집안이 무너졌고, 이후 서울 이모의 집으로 올라와 살던 중 한 의상실 사장님의 권유로 모델 일을 시작하게 됐다. 1975년 12월에 TBC에서 방영된 각 분야별 노래자랑 성격의 프로인 ‘가요올림픽’에 모델 대표로 출연했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작곡가 이봉조 선생이 윤승희의 노래 실력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알아채고 “저 친구는 모델하고 붙이지 말고 전영록하고 붙여라!”고 주문했던 것. 그 결과 10 대 0으로 전영록을 간단히 제압하고 서라벌레코드사에 스카우트되면서 가수 인생이 시작된다.
데뷔한 지 1년 6개월 만에 ‘제비처럼’이 크게 히트하면서 대형 가수로 발돋움할 때 갑자기 결혼과 함께 브라운관에서 사라졌다. 팬들은 그저 추억 속 스타의 섹시하고 아름다웠던 모습만을 기억하지 그들 삶의 흔적은 제대로 알 수 없다. 중년을 넘어 노년까지 꾸준하게 활동하는 가수들도 많지만 젊은 시절 반짝 하고 활동을 중단해 팬들의 추억 속에서만 남아 있는 연예인들이 꽤 된다. 윤승희를 비롯해서 남성 듀엣 어니언스의 이수영, 여배우 정윤희 등이 대표적이다. 팬들 입장에 그들 삶의 궤적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단지 추억 속의 연예인이기에 더 그리운 것일까? 아니면 팬들 스스로 나이를 먹어가고 청춘 시절이 그립기에 추억을 떠올리며 당시의 노래와 스타를 대입시키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걸까? 아무튼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사라진 스타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노래주점에서 마이크를 들고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며 불렀던 노래가 바로 윤승희의 ‘제비처럼’이다.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과 지나간 일들을 돌이키며 그리워하는 ‘추억’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이 노래를 주인공 송강호에게 부르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부르는 ‘제비처럼’은 극중 인물의 심리 상태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노래 ‘제비처럼’이 주는 메시지
꽃피는 봄이 오면 내 곁으로 온다고 말했지 노래하는 제비처럼 언덕에 올라보면 지저귀는 즐거운 노래 소리 꽃이 피는 봄을 알리네 그러나 당신은 소식이 없고 오늘도 언덕에 혼자 서 있네 푸르른 하늘 보면 당신이 생각나서 한 마리 제비처럼 마음만 날라가네 당신은 제비처럼 반짝이는 날개를 가졌나 다시 오지 않는 님이여~
꼭 범인을 잡고야 말겠다는 형사의 집념은 어느새 범인에 대한 집착으로 발전한다. 묘하게 ‘제비’라는 단어도 범인의 이미지와 오버랩 된다.
‘제비’는 몸매가 날씬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비유한 말이지만 당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이른바 ‘제비족’을 연상케 해서 아름답지만 야비한 이미지다. 실제로 윤승희의 ‘제비처럼’도 당시 사회적 경종을 울리기 위해 가사를 지었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물 찬 제비’ 이미지의 아름다움과 ‘제비족’의 야비한 이중적 느낌으로 한 시대를 강타한 노래가 ‘제비처럼’이다. 가사 마지막 부분에 “당신은 제비처럼 반짝이는 날개를 가졌나 다시 오지 않는 님이여~”를 고쳐 윤승희 인생 3막에서는 팬들에게 “다시 오는 님이여~”가 되길 고대한다. 위에서 설명한 부정적인 의미의 ‘제비’가 아닌 흥부전에 나오는 긍정적인 의미의 ‘제비’ 말이다. 몇 년 안에 ‘70대 섹시 가수 윤승희’의 대박 씨앗을 가져다주는 ‘제비’가 오길 고대한다.
시니어의 평소생활은 늘 ‘조심조심’으로 일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두르다가, 격렬하게 움직이다가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지나치게 정적인 생활습관은 몸의 근력이나 균형감각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전정기관의 기능저하입니다. 때문에 낙상을 조심하는 생활뿐만 아니라 평소에 균형감각을 키울 수 있는 운동도 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브라보 체조’는 균형감각의 활성화까지 고려했습니다. 아울러 근력을 키울 수 있는 운동도 제작해 담았습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시니어 건강을 위해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과 공동으로 만든 ‘브라보 체조’는 5070 시니어 세대를 위한 건강 체조입니다. 또 버클리 음대 출신 작곡가 지담의 참여로, 듣기만 해도 심신이 힐링되는 음악과 함께합니다.
감수 이자호 인천성모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모델 진민범 인천성모병원 물리치료사
팔 벌리며 중간 숨 고르기
몸을 좌우로 이동시키며 균형감각 개선에 도움이 되는 운동. 다리를 굽히는 동작으로 하체의 근력 향상도 기대해볼 수 있다. 음악에 맞춰 속도를 유지하면 더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1 다리를 한쪽으로 벌리면서 몸을 좌우로 이동시킨다.
2 이때 몸의 이동에 자연스럽게 추진력이 생기도록 양팔을 몸 앞에서 교차시켰다가 쫙 펴준다.
3 양팔이 교차될 때 무릎은 살짝 굽혀준다.
4 제자리로 돌아올 때도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한 발로 다리 구부리고 펴기
한 발로 몸 전체의 좌우 균형을 유지하는 운동으로, 동적 균형 능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 시니어의 보행과 달리기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고, 일상생활에서 낙상을 예방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또한 지지하는 다리의 무릎관절과 발목관절에 체중이 실리면서 체중지지 훈련도 되며, 관절 안정성에 좋다.
1 양팔을 수평으로 벌린다.
2 한쪽 다리를 최대한 높게 들었다가 발끝만 땅에 닿도록 살짝 내려놓는다.
3 한쪽 다리로만 섰을 때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다리가 제대로 스트레칭되도록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동서남북 팔 뻗기
양팔과 다리를 동시에 사용해 몸 전체의 동적인 움직임을 향상시킨다. 팔의 움직임에 따라 시선이 이동하면서 전정기관을 활성화해 어지럼증과 현기증 예방에 도움이 된다. 또 가볍게 제자리 뛰기를 같이하면서 브라보 체조의 다음 순서인 무릎차기를 위한 준비운동을 한다.
1 가볍게 제자리 뛰기를 한다.
2, 3, 4, 5 양팔을 위, 앞, 옆, 아래 순서로 뻗는다. 한 방향에 두 차례씩 내민다. 팔을 움직이는 방향으로 고개를 움직여 시선을 일치시킨다.
액션, 공포, 애니메이션 등 몇 장르 영화는 극도의 피로감으로 보는 게 두려울 지경이다. 반면에 시대극, 서부극, 뮤지컬, 전기 영화는 시사회 초대를 마다하지 않는다. 최근 관심 갖고 본 다큐멘터리 알렉산드라 딘의 ‘밤쉘(Bombshell: The Hedy Lamarr Story, 2017)’과 스티븐 노무라 쉬블의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RYUICHI SAKAMOTO: CODA, 2017)’는 추억을 떠올리며 공부하는 자세로 보았다.
국내 영화 팬들이 류이치 사카모토를 알게 된 작품은 ‘마지막 황제’(1987)일 것이다. 편협한 일본 장교로 출연해 무척 의아하게 여겼는데 이름난 작곡가, 영화음악가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콧수염마저 얄밉게 보였던 그는 “왜 일본이 그토록 삭막한 만주 땅을 얻으려 했는지 모르겠다”라며 소신 인터뷰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1983)에서도 장도를 휘두르는 일본 장교로 출연한 바 있는데, 군더더기 없는 몸매에 강파른 얼굴 덕분이 아닌가 싶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와 오시마 나기사가 영화 음악 작곡과 연기를 다 요구했다니, 영화적 얼굴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류이치 사카모토의 영화 음악 덕분에 심취했던 작품을 열거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영화 팬이라면 기본적으로 본 영화들일 테니. 그중에서도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영화음악 작곡가로서의 사카모토를 잘 정리해주고 있다. 특히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에서 주인공이 광막한 설원 저 너머로부터 한 발 한 발 힘겹게 걸어와 관객 앞에 설 때까지 흐르던 음악은 압권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에서 사막 아지랑이 속에 한 점이 나타나고 점점 커진 그 점이 알리 족장임을 알게 되는, 너무도 유명한 롱 테이크 장면에의 헌정이다. 이는 ‘평원의 무법자’(1973)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등장하는 장면만큼이나 근사하고 감동적이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에서 류이치 사카모토는 당시 암으로 투병 중이었지만, 너무도 좋아하고 존경하는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츠 이냐리투의 제안이라서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작곡을 마다할 수 없었다고 밝힌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2012년, 인후암 판정을 받고 모든 활동을 중단했던 류이치 사카모토가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음악 작업으로 활동을 재개한 전후 5년여를 기록한다. 후쿠시마 지진과 쓰나미에 살아남은 망가진 피아노를 연주하고, 핵발전소 재가동 반대 시위에 참석해 발언하고, 암 판정 당시 심경을 고백하고, 숲과 남극 등을 다니며 소리를 채집하여 젊은 시절부터 함께 했던 컴퓨터와 피아노로 작곡하는 모습이 젊은 시절 활동 영상과 영화 출연 장면 등을 곁들여 소개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영화에 나오는 음악과 바흐의 코랄전주곡 같은 느낌의 음악, 약해지지 않고 울림이 오래가는 음을 찾고 있다는 등, 그가 현재 추구하는 음악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전한다.
9·11 테러 당시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그가 찍은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의 사진을 보면 사진작가로서의 재능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검버섯 가득한 얼굴과 백발에 표범 가죽 문양 안경을 쓴 그가 곱게 깎은 연필을 들고 오선지에 음표를 그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또 오로지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지구 이 끝에서 저 끝을 방문하는 집념을 보노라면, 세상에서 가장 고매한 직업은 예술 창작뿐이구나, 눈물이 날 지경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물 다큐멘터리도 그 인물에 얼마나 매료되었는가, 존경하는가에 따라 감상 진폭이 달라진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감독 후샤오시엔, 오시마 나기사, 알프리드 히치콕, 데이비드 린치 등의 다큐멘터리와 더불어 영화 세상에 사는 행복을 만끽하게 해준다.
시니어에게 안전사고는 곧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집니다. 젊을 때 무릎이 좀 까지고 마는 상황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골다공증 등으로 인해 약해진 뼈가 쉽게 부러지기도 하고, 뼈와 관절에 외상을 입으면 쉽게 낫지도 않습니다. 시니어에게 낙상이 치명적인 이유는 관절에 골절을 입을 경우 심각한 후유증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행동반경이 좁아지고 운동량이 줄어들면서 근육이 약해지고, 근육이 약해지면 행동반경이 더 좁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안전사고 예방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감각과 근력입니다. ‘브라보 체조’는 균형감각과 근력을 키울 수 있는 운동을 제작해 담았습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시니어 건강을 위해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과 공동으로 만든 ‘브라보 체조’는 5070 시니어 세대를 위한 건강 체조입니다. 또 버클리 음대 출신의 작곡가 지담의 참여로, 듣기만 해도 심신이 힐링되는 음악과 함께합니다.
감수 이자호 인천성모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모델 진민범 인천성모병원 물리치료사
골반 흔들고 기지개 펴기
허리와 고관절을 이완시킬 수 있는 운동이다. 몸을 앞으로 숙일 때는 본인의 허리 상태에 맞춰 너무 무리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상체를 내린다. 골반을 움직이는 과정에선 다리를 굽히지 않고 편 상태를 유지해 충분한 스트레칭이 되도록 한다.
1 양손을 맞잡은 상태에서 팔을 바닥 쪽으로 향하게 하면서 허리를 숙인다.
2 손을 그대로 유지하고 양발의 무게중심을 이동해 자연스럽게 골반을 좌우로 움직인다.
3 손을 맞잡은 상태에서 뒤집어 팔을 스트레칭하면서 상체를 일으킨다. 4 양팔을 하늘로 향하게 하면서 목과 허리를 쭉 편다.
발뒤꿈치 들기
다리 근육을 강화하고 굳어 있는 허리를 펴주는 운동이다. 다리를 굽힐 때는 몸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허리는 굽히지 않고 바로 세운다. 양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
1 양팔의 하완(손목부터 팔꿈치까지)이 자연스럽게 겹치게 한 후 양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려 기마자세를 취한다.
2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며 상체를 움직인다.
3 양팔을 X자로 교차시킨 뒤 팔을 힘 있게 내리면서 발끝으로 선다.
4 이때 양팔과 양다리가 모두 이완될 수 있도록 쭉 편다.
동서남북 발 옮기기
몸의 균형감각을 키우는 운동이다. 익숙해진다면 눈을 감고 도전해보는 것도 좋다. 다만 넓고 안전한 장소에서 자신 있을 때만 시도해야 한다. 음악에 맞춰 적당한 속도로 운동해야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1 허리에 양손을 얹고 준비자세를 취한다.
2 전후좌우 방향으로 한 걸음씩 옮겼다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3 양발이 이동할 때마다 무릎을 굽히며 살짝 앉았다가 일어난다.
4 리듬에 맞춰 몸을 늦지 않게 이동시키며 균형감각을 훈련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