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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중한 내 퇴직연금, 어떻게 굴리면 좋을까?
- 망망대해에 고깃배 한 척이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떠 있다. 주변에는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이 바다에 튕겨 하늘로 솟아오르는 빛의 잔치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배를 때리는 파도소리만이 심해와 같은 적막에 미세한 균열을 내고 있을 뿐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 바다놀이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팽팽한 긴장감으로 서늘한 느낌마저 든다.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온 고깃배가 자동항법장치와 통신장비의 고장으로 항구로 돌아가지 못한 채 닻을 내리고 구조되는 행운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를 할 수도 있지만 연료가 소진되기 전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큰일이다.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정답이 아님을 선원들은 잘 알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에 실린 음식물이 바닥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현재 우리나라 퇴직연금 가입자들도 좌표를 잃으면 망망대해에 정박해 있는 고깃배의 선원들처럼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원리금보장 상품에 몰린 퇴직연금 적립금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6년 말 기준 우리나라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전년 말보다 16.3% 늘어난 147조원이다. 이 중 약 131조원, 즉 전체 적립금의 89%가 원리금보장 상품에 몰려 있다.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되어 있는 적립금은 10조원 정도로 전체 적립금의 6.8%에 불과하다. 나머지 4.2%는 운용을 기다리고 있는 대기성 자금이다. 대기성 자금은 운용 지시가 있을 때까지 원리금보장 상품에 보관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전체 적립금에서 원리금보장 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95.8%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는 우리나라 퇴직연금의 경우 사실상 자산배분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산배분은 위험과 수익구조가 상이한 상품에 분산투자함으로써 안정적으로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여러 개의 원리금보장 상품에 적립금을 나누는 것은 자산배분이라 할 수 없다. 퇴직연금 적립금이 원리금보장 상품에 집중된 결과 2016년 총비용 차감 후 퇴직연금 적립금 수익률은 1.58%에 머물러 있다. 물가 상승을 감안하면 사실상 제로 수익률인 셈이다. 원리금보장 상품의 수익률은 1.72%, 실적배당형 상품의 수익률은 -0.13%이다. 퇴직연금 가입자의 안전지향적 적립금 운용 형태는 적어도 2016년만 보면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러나 장기수익률을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2016년 기준으로 5년 연환산 수익률과 8년 연환산 수익률은 2.83%와 3.68%로 1년 수익률보다 각각 1.25%p와 2.10%p 높다. 이는 과거의 원리금보장 상품 금리가 지금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8년 수익률만 놓고 보면 실적배당형 상품의 수익률(5.61%)이 원리금보장 상품의 수익률(3.05%)보다 2.56%p나 높다. 수익은 위험의 대가라는 기준에서 보면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역사적 저금리 기조와 길어진 수명에 대한 인식이 많이 제고된 그간의 상황을 감안하면 원리금보장 상품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경도되어 있는 우리나라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 행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이는 닻을 내리고 구조의 행운을 기다리고 있는 고깃배 선원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처럼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상이 우리나라 퇴직연금시장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원인은 아주 복잡한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단순하다. 퇴직연금시장의 적립금 운용 관련 행태와 인간의 의사결정을 지배하는 뇌 구조라는 양 측면에서 살펴보자. 목표가 없는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 먼저 우리나라 퇴직연금시장에서 가입자의 적립금 운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살펴보자. 자신이 적립금 운용에 대한 책임을 지는 확정기여형에 가입한 근로자는 사용자가 납부한 부담금을 어떤 방식으로 굴릴지 결정을 해야 한다. 이를 운용 지시라고 부른다. 앞에서 살펴본 원리금보장 상품과 실적배당형 상품이 바로 운용 지시의 결과물이다. 감독기관의 통계는 이처럼 아주 단순하게 집계해 발표되지만 원리금보장 상품에도, 실적배당형 상품에도 수많은 상품들이 존재한다. 개별 가입 근로자가 수많은 상품을 일일이 비교해 자신에게 적합한 상품을 고르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운용관리기관이라는 퇴직연금사업자가 선별해 제시하도록 하고 있는 게 우리나라의 퇴직연금제도다. 퇴직연금사업자는 상품을 제시할 때 원리금보장 상품과 실적배당형 상품을 함께 제공한다. 이를 상품 라인업이라고 하는데, 가입 근로자는 라인업된 상품 중에서 자신의 적립금을 굴릴 상품을 선택한다. 모든 사업자는 두 부류의 상품을 함께 제시하며 자산배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산배분이 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바로 자산배분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적배당형 상품에 적립금의 일부라도 배정하면 자산배분이라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자산배분은 목표수익률을 정하고 가입자가 감내할 수 있는 위험수준 내에서 목표수익률을 달성할 수 있도록 적립금을 다양한 상품에 분산투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산배분의 핵심은 목표수익률을 정하는 것인데, 희망하는 목표수익률을 묻는 수준에서 그치는 게 우리나라 퇴직연금시장의 현주소다. 정확한 목표수익률을 정하기 위해서는 근로자별로 노후 준비에서 퇴직연금이 차지하는 몫을 계산하고 현재의 퇴직연금 부담금 규모와 앞으로의 전망치, 예상되는 가입기간, 금융시장 상황 등을 종합해야 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근로자가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은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 전문가 집단인 퇴직연금사업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퇴직연금사업자는 이런 역할을 포기하거나 모른 체하며 “저금리 시대엔 실적배당형 상품을 편입해야 합니다! 중위험·중수익 투자가 필요합니다!” 등의 쉬운 방법을 동원한다. 이 정도 방법과 노력으로 ‘퇴직금은 손해보면 안 된다!’는 강고한 유산을 깨트릴 수 없음은 원리금보장 상품에 극도로 치우쳐 있는 현실이 증명하고 있다. 근로자별로 목표수익률을 쉽게 산출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스템 개발 및 운영 인력 등 투자가 필요하다. 동물적 특징에 지배당하고 자극하는 현실 인간의 역사는 선택의 역사다.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이를 낳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등 삶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이들 선택은 심사숙고 끝에 내리는 것이 있는가 하면 무의식적으로 이뤄지는 것도 있다. 또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선택이 있는가 하면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선택도 있다. 어쨌든 수많은 선택들은 인간의 뇌에서 이뤄지는 신경학적 반응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뇌에서 선택과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분이 전두엽(frontal lobe)과 대뇌변연계(limbic system)다. 전두엽은 대뇌반구 앞에 있는 부분으로 이마엽이라고도 한다. 전두엽은 인간의 역사에서 볼 때 비교적 최근이라 할 수 있는 15만 년 전에 발달한 뇌의 한 부분으로서 합리적 판단과 장기계획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뇌변연계는 대뇌반구 내측 벽의 대뇌피질 아래에 고리처럼 감겨 있는 부분으로, 인간의 감정적·본능적 반응을 담당한다. 대뇌변연계는 작은 위험신호라도 감지되면 즉각적인 36계를 종용함으로써 인간의 생존을 담당해온 중요한 부분이다. 즉 전두엽은 우리에게 장기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하지만, 대뇌변연계는 즉각적인 만족을 얻는 것을 요구한다. 퇴직연금처럼 장기간 운용해야 하는 자금은 전두엽의 결정을 따르는 게 맞지만 대뇌변연계가 자꾸 훼방을 놓는다. 린다 그래튼과 앤드루 스콧은 이란 책에서 “인간은 주로 대뇌변연계에 따라 움직이며 즉각적인 만족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다. 삶이 험악하고 야만스럽고 짧은 경우에는 즉각적인 만족에 굴복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기대여명이 길어지고 장기적으로 더 나은 결정을 하려면 합리적인 전두엽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좀 더 현명하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퇴직연금은 장기자산이니 자산배분을 통해 적절히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높은 기대수익을 추구하는 게 맞다고 전두엽은 말하지만, 대뇌변연계는 퇴직연금은 안전하게 굴러야 하니 원리금보장 상품에 넣어두라고 고집을 부린다. 우리는 은연중에 대뇌변연계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는 개미투자자들의 실패한 투자 경험도 한몫한다. 퇴직연금 가입자의 이런 성향을 부채질하기라도 하듯 퇴직연금사업자들은 금리가 1bp(0.01%)라도 높은 원리금보장 상품을 제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기본적으로 보수적 성향이 강한 퇴직연금 가입자의 속성과 영업실적에 대한 부담을 무시할 수 없는 퇴직연금사업자의 속성이 맞물려 나온 결과가 원리금보장 상품 일변도의 적립금 운용행태인 셈이다. 퇴직연금 잘 굴리려면? ‘100세 인생’이 약방의 감초처럼 일상 대화에 등장하는 요즘 퇴직연금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과 같은 저출산, 수명연장의 흐름이 바뀌지 않는 한 후세대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공적연금 확대는 기대하기 어렵다. 노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자조노력 연금시대도 거스르기 힘든 대세다. 노후의 재정적 안정은 퇴직연금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답은 뻔하다. 공부를 해야 한다. 좋은 고과를 얻기 위해, 승진을 위해 내가 맡은 일과 관련한 지식을 습득하듯 금융과 연금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 한다. 지난 호에서 말했듯 퇴직연금은 제2의 임금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연구에 의하면, 금융 지식이 해박한 투자자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똑같은 수준의 리스크를 감내하면서도 연간 수익률이 1.3%p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아주 큰 차이다. 만약 10만 달러를 10년 동안 투자할 경우 금융 지식이 많은 투자자들은 1만6000달러를 더 번다. 20년 동안 투자할 경우에는 4만2000달러를 더 벌고, 30년 동안 투자할 경우에는 14만5000달러를 더 번다는 결과가 나온다. 문제는 금융 지식이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조조정이 일상화되고 있는 시대에 금융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서는 퇴직연금사업자들이 제공하는 상품들의 수수료율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수수료율이 높다고 그 상품이 좋은 상품이고 수익률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퇴직연금 가입자들은 금융 회사들이 제시하는 표면적인 금리수준이나 기대수익률 또는 과거의 성과만을 보고 상품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수수료율을 체크포인트의 하나로 꼭 첨가하자. 개별 금융상품의 수수료 관련 정보는 고용노동부 퇴직연금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확인할 수 있다. 제도적으로 보장된 기회를 잘 활용하는 것은 금융 지식과 연금 지식을 제고하는 좋은 방법임을 잊지 말고 실천하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퇴직연금 가입자 교육을 법정 의무교육으로 하고 있다. 퇴직연금 가입자 교육은 법적으로 보장된 가입자의 권리다. 이 권리를 내팽개치지 말고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이를 통해 금융과 연금 지식을 제고하고 자산배분에 도전해보자. 자산배분을 했다면 그것에 안주하지 말고 주기적으로 자산배분 비율을 조정하는 리밸런싱을 해야 한다. 이를 무시하면 자산배분 노력이 도로아미타불이 되거나 원리금보장 상품에 묻어놓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퇴직연금사업자는 가입자들이 퇴직연금 적립금을 잘 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특히 가입자들이 목표수익률을 정확하게 설정하고, 리밸런싱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상생의 길이다.
- 2017-08-17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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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나물 주말농장 세운 신왕준씨 “자연으로 출근, 인생이 달라지는 길입니다”
- 그 선택은 누가 봐도 모험이었다. 준공무원급으로 평가받는 안정된 직장을 스스로 박차고 나와 산으로 들어갔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위험한 가장의 선택이었다. 그래도 그는 “조금 더 빨리 들어왔으면 어땠을까?” 하고 말한다. 경상북도 청송에서 만난 신왕준(申旺俊·53)씨의 이야기다. 신왕준씨가 고향인 청송 ‘부곡마을’로 돌아온 것은 2015년 3월. 선산이 있는 고향이라고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 상경한 후 청송은 그에게 명절 때 가끔 찾아오는 곳일 뿐이었다. 여생을 이곳에서 보낼 결심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연고가 없는 곳에 내려온 것과 다름없었죠. 이웃들의 얼굴을 익히는 것부터 자연에서 사는 법, 작물을 키워내는 방법 등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습니다.” 느닷없는 귀촌을 결심하게 된 것은 그가 다니던 산림조합중앙회의 직원 대상 명예퇴직 신청이 계기가 됐다. 막연히 인생 후반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고민하던 그에게 선산을 활용해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명색이 산림경영팀장이었으니까. “가족과 상의 없이 명퇴신청서를 제출했어요. 당시 아내는 펄쩍 뛰었지만, 지금은 제 선택을 존중해주고 있어요. 아내도 자신의 삶이 있고, 저도 여기에서 완전히 자리가 안 잡힌 상태라서 주말부부처럼 지내고 있지만 함께 살 시기를 앞당기려고 노력 중이에요.” 자연 속의 삶, 현장에서 배우고 익혀야 한다 ‘마을 주민’이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웃들과의 친분을 쌓기 위해 그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서울에선 중년에 속했지만, 주민들의 평균 나이가 60대 후반인 마을에서 그는 젊디젊은 청년이자 막내였다. “동네에 가만히 있으면 하루에 한두 분 뵙기도 힘들어요. 아침에 눈뜨면 마을회관에 들러 일찍부터 나와 계신 할머니들에게 인사하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어요. 그리고 밭일을 돕기도 하고. 그렇게 얼굴을 익혀나가자 동네 주민 자녀들이 제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더라고요. 부모님에게 연락이 안 되거나 급한 일이 생기면 절 찾기 시작한 거죠. 그렇게 이곳 구성원이 됐어요.” 서울에선 산림경영 분야의 전문가 대접을 받던 그였지만 산은 ‘초짜’를 알아봤다. 명예퇴직 후 1년간 다시 전문 분야 수업을 들으며 귀촌을 준비했지만, 결국 현장에서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다. “이론과 현실은 많이 다르더군요. 새로 배우면서 많이 반성했습니다. 또 노력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었죠. 올 초 가뭄이 심했을 때는 정말 아찔했습니다.” 그래도 서두르지 않고 체계적으로 준비한 것은 조금씩 성과를 냈다. 그가 제안한 산림복합경영단지 조성사업은 산림소득 사업공모에 뽑혀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았고, 이를 기반으로 밭이 아닌 산속에 자리 잡은 최초의 상업용 산나물 주말농장 청송 뫼살이 농장을 시작했다. 5평짜리 텃밭 90개를 분양해 일반인들도 쉽게 곰취나 잔대, 미역취 같은 산나물을 심고 수확할 수 있도록 한 농장이다. 수확된 산나물은 대신 팔아주기도 한다. 자연에서는 농사도 사업도 천천히 흐른다 서울에서 살던 그가 자연으로 들어온 후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는 ‘스트레스 없는 삶’을 가장 큰 변화로 꼽았다. “제가 이 산의 대표이자 의사결정권자니까요. 계획한 대로 차근차근 실천해나가면 스트레스받을 일은 많지 않아요. 신선한 새벽 숲의 공기를 마시고,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산길을 산책하는 일은 정말 즐겁죠. 딱히 일이 없어도 정해진 시간에 숲으로 출근하는 것은 그 때문이에요.” 아직은 작은 농장에 불과하지만 이제 그의 꿈은 기지개를 펴고 있다. 먼 미래를 보고 계획을 세운 뒤 하나하나 진행 중이다. 산속에 전기를 들이는 일도 3년에 걸쳐 진행했다. 산농사는 초기 투자가 많고 수확을 하려면 2~3년 걸리기 때문이다. “7만4000평 규모의 산에서 활용하는 땅은 5000평이 안 돼요. 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단순히 농작물을 심고 수확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에게 자연과 숲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체험공간을 제공하고 싶어요. 요즘 주목받는 야외활동인 오리엔티어링(orienteering, 지도와 나침반만을 이용해 목적지를 찾아가는 야외 스포츠)이나 라디엔티어링(radienteering, 지도와 나침반 대신 라디오를 지참하고 정해진 주파수에서 방송되는 안내에 따라 정해진 지점으로 이동하는 게임) 같은 서비스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자연으로 오셔서 맘껏 즐겨주세요(웃음).”
- 2017-08-17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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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정권 ‘어르신 공약’ 중간 점검
- 문재인 정부가 지난 대선에서 발표한 노인 관련 공약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피부로 느끼기에는 아직 이르다. 우선 지난 4월 발표된 ‘어르신을 위한 문재인의 9가지 약속’이라는 공약을 보면 기초연금 매월 30만원으로 인상, 치매 환자 국가 관리, 틀니 임플란트 본인 부담금 절반으로 절감, 찾아가는 건강 서비스, 보청기 비용 보험 확대, 경로당을 생활복지관으로 리모델링, 농산어촌에 100원 택시 도입, 어르신 일자리 확대 및 수당 인상, 독거노인 맞춤형 공공임대주택 제공 등 9가지다. 일단 개인적으로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기초연금은 하위 소득 70%여야 하는데 거기에 못 낀다. 치매는 아직 염려할 나이가 아니다. 틀니보다는 임플란트가 더 효과적이니 틀니는 아예 해당 없고 임플란트는 아직 대상 치아가 없다. 찾아가는 건강 서비스는 스스로 정기검진을 받고 있고 온다고 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집을 비울 때가 대부분이라 역시 해당 사항이 없다. 보청기도 아직 해당이 안 된다. 경로당에 갈 나이도 아니다. 농산어촌 100원 택시는 도시민이므로 해당되지 않는다. 어르신 일자리 확대 및 수당 인상은 해당이 되지만 아직 변화가 없고 두고 볼 일이다. 독거노인 맞춤형 공공임대주택 제공도 아직은 이르다. 그러므로 필자에게는 대부분 해당이 안 되는 정책들이다.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예산을 확보해야 하고 실제 적용하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다 돈이 들어가야 해결되는 문제인데 돈을 어떻게 마련할지도 숙제다. 이렇게 노인복지를 확대하자는 데 한편으로는 지하철 노선이 적자라고 애꿎게 노인 무임승차가 그 원인이라며 경로우대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선,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은 호스피스 재택 방문 서비스, 독거노인 피부양자 제도 등의 개선이다. 빠르게 진전되는 것 같다. 노인일자리는 현재 지킴이, 도우미, 돌봄이 범주에서 벗어나 직무 중심의 민간 일자리 확보가 바람직하다. 방향도 복지와 함께 직무 중심의 시장형 노인 일자리 창출이 필요하다. 국회 예산정책처 발표로 작년 노인 일자리 사업의 67.7%가 공익활동인데 보수가 12년째 월 20만원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민간 분야 일거리 비중은 10%대에 불과하다고 한다. 한 포털 사이트 회사에서 노인들을 고용해서 운영하는 하는 인터넷 회사는 매출이 급증했다는 등의 좋은 사례를 참고로 할 필요가 있다. 급격히 인상된 최저 임금제의 역습으로 일하는 시간을 줄이거나 아파트 경비원 감원 등도 문제로 보인다. 새 정부가 100대 국정과제로 ‘인생 3모작’을 들고 나온 것은 귀 기울일 만하다. 인생 2모작은 이미 광범위하게 퇴직 후의 인생으로 인식되어 있으나, 인생 3모작은 새로 나온 용어로 65세 이상의 노인도 생산 가능 인구의 범주로 보고 지원하겠다는 정책이다. 50~60대를 ‘신중년’으로 보고 취업성공 패키지의 사각지대에 있던 중위소득 초과 ‘신중년’을 대상으로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신중년 인생 3모작 패키지’를 내년부터 신설한다고 한다. 노인도 실업수당의 대상이 되며 노인을 고용할 경우 장려금도 지급한다고 한다. 사회공헌에서 재능기부도 자원봉사의 영역으로 포함하는 등 관련법을 개정하고, 정부로부터 받는 소액의 활동수당도 사회공헌형 일자리와 공익형 노인일자리를 확대하기로 했다. 공익형 노인일자리 수당은 올해 22만원에서 2020년 최대 40만원까지 높인다고 한다.
- 2017-08-1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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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촌 통해 천연염색가로 변신하다
- 늙음 뒤엔 결국 병과 죽음이 대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건 하나의 애환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살아갈 길은 있다는 뉴스는 비 오듯 쏟아진다. 비곗살처럼 둔하게 누적되는 나이테에 서린, 쓸모 있는 경험과 요령을 살려 잘 부릴 경우, 회춘과 안락을 구가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문제는 삶의 후반전, 그 인생 2막을 열어 내딛는 발걸음의 방향에 달려 있다. 이 풍진 세상의 사이즈는 간장종지 같은 게 아니고 바다처럼 크넓다. 타성과 습성에 안주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전혀 새로운 삶의 파노라마 속으로 족히 여행하거나 방랑할 수 있으며, 그럴 때라야 세월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부질없이 낭비하는 결례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대전에서 학원을 경영하며 분주하게 살았던 진연순(57)씨 부부는 귀촌으로 인생 2막의 첫발을 내딛었다. 충북 옥천군 군북면의 시골마을이다. 진씨네 집을 들어서며 받은 첫인상은 매우 준수하고 청결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너른 살림채와 푸르른 농장 그 어느 구석 한 곳에서도 먼지나 잡풀을 찾아보기 힘들다. 난장판에 가깝도록 사물들을 널브러뜨린 채 살아가는 나에게는 거의 충격적인 풍경이다. 비지땀을 흘려 밤낮없이 근로를 하고, 청소를 하고, 미화작업을 하고서야 직성이 풀리게 되어 있는 성향의 부부가 사는 집임을 단박에 알게 한다. 사실 이 부부는 바지런하기가 헤집어놓은 개미굴 속의 병정개미와도 같다. 근면과 성실로 지상에 태어난 자의 사명을 다하길 습관처럼 거듭해 도시에서의 학원사업을 번듯하게 꾸려왔다. 그러다가 6년 전에 다 정리하고 후다닥 시골에 입장했다. 시골의 무엇이 이 부부를 호명했을까? 진연순씨에게 묻자 돌아오는 답이 이렇다. “남편이나 저나, 나이 들면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오래전부터 있었어요. 도시와는 달리 시골에선 스트레스나 피로를 덜 느끼고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죠. 그래서 10여 년 전에 남편의 고향인 이곳에 농토를 구입해 주말농장으로 활용했어요. 서둘러 귀촌하는 대신 미리미리 준비를 했던 거예요. 저희 슬하엔 남매가 있는데요, 이 녀석들이 커 독립을 한 시점에서,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년 전에 비로소 이곳으로 완전한 이주를 했어요. 시골 정착이 비교적 순조로웠던 건 그렇게 나름의 준비기간이 있었기 때문이죠.” “수강생이 수백 명에 달했다죠? 멀쩡하게 잘 운영되던 학원을 정리하기 아깝진 않았어요?” “사실 결혼하면서부터 부부가 함께 공들여 키워온 입시학원이라 애착도 있었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여러모로 힘에 부치더라고요. 제가 전공인 수학을 강의하며 운영했는데요, 아이들은 나이 든 아줌마 강사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입시철이면 피를 말리는 긴장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두통으로 늘 시달렸죠. 귀촌을 하고 나서는 그런 게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어요.” “저는 말이죠, 수학여행은 좋아했지만 수학은 참 싫었어요(웃음). 인생을 과목에 비유한다면, 수학 선생님이었던 당신의 인생은 어떤 과목을 닮았다고 보시죠?” “흠. 도덕? 제가 원래 어떤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도덕적인 성격이에요. 모범생이라고 할까? 덕분에 큰 굴곡 없이 순탄하게 살아왔어요. 자유분방이라는 걸 용납하기 힘들었고요. 그런데 시골에 와서는 제가 천연염색에 푹 빠져 삽니다. 염색이라는 게 공예의 한 분야이고, 이른바 ‘끼’라는 게 요구된다는 걸 자주 실감하는데요, 그러고 보면 저에게도 뭔가 숨은 끼가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해요(웃음).” “남편은 아로니아 농장을 운영하고, 아내는 천연염색을 하고, 매우 이상적인 배합으로 보여요. 처음부터 그러자는 발상을 했을까?” “아녜요. 제가 일찍부터 천연염색에 취미가 있긴 했지만, 그게 직업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남편의 농사 역시 처음엔 깨끗한 먹거리를 길러 식구들 건강이나 챙기는 정도의 소소한 수준에 불과했죠. 그런데 일이 커졌습니다.” 천연염색은 색채의 향연을 즐기는 일 취미는 삶에 재미와 흥미를 보태준다. 권태롭거나 지겨운 일상에 생기를 부여한다. 지나친 탐닉으로 허영과 낭비의 골짜기로 빠질 수도 있는 게 취미생활이다. 진연순씨의 취미는 썩 근사한 방향으로 비약했다. 대전에 살 때부터 틈틈이 천연염색 공부를 해왔던 그녀는 시골에 살며 한결 더 진도를 냈다. 재미가 있어서였다. 그게 하나의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는 효과를 자아낼 줄은 자신조차 미처 몰랐다지. 취미로 사귀었던 천연염색이 어느덧 직업으로 진화한 거다. 미리 예상하지 못했던 이 기꺼운 변동! 이제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인생을 만족스러운 쪽으로 끌고 가는 행운아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귀촌 초기에 저는 골방 하나를 놀이터 삼아 혼자 천연염색이나 즐기며 지냈어요. 당시엔 사실 시골생활이 외롭고 힘들었거든요. 그걸 견디게 해준 게 염색이었어요. 남편은 이 마을이 고향입니다. 낙향한 셈이죠. 마을의 많은 주민들이 남편의 친척이나 친지, 선후배들이에요. 그들을 만나 술도 마시고, 농사일도 거들고, 수많은 단체에도 가입하고. 아무튼 남편은 밖으로만 나돌았어요. 저는 외톨이처럼 그저 집에 틀어박혀 염색작업에 간신히 마음을 붙이고 지냈어요. 그러면서 서서히 실력이랄까, 솜씨랄까, 그런 게 늘었던 것 같아요. 자신감이 붙으면서 염색작업 내용을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제 블로그를 본 한 학교에서 학생들의 염색 체험학습 의뢰를 해왔습니다. 그게 직업화의 신호탄이었죠.” “단기간에 널리 알려지고, 순조롭게 자리 잡힌 건가요? 천연염색을 직업으로 삼아 체험장을 운영하는 귀농인들이 가끔 있지만 시원치 않다고들 해요.” “제가 운이 좋은 걸까요? 빠르게 자리가 잡혔어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학교와 청소년 단체, 가족, 성인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수강을 해요. 시설도 점차적으로 늘렸어요. 실내외 교육장은 물론, 전래놀이 체험장, 잔디구장, 염료식물 재배장 같은 걸 구비했죠.” “천연염색의 매력은 뭐죠?” “순수하게 자연에서 얻어온 식물 재료들로 색채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는 거죠. 자연물에서 갖가지 신비한 색들이 나온다는 게 마음을 사로잡아요. 나뭇잎에서는 그냥 연둣빛만 나올 것 같지만 노란색이나 빨간색도 나옵니다. 쪽풀에서는 가슴 시린 파란색이 나와요. 마치 마법처럼 신기해요. 매염제를 사용하면 더 다양한 색상을 만들어낼 수 있고요. 염색으로 수입까지 발생한다는 점도 매력!” “금상첨화?” “일거양득!(웃음)” ‘라온뜰 농촌문화체험농장’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진씨 부부의 거처에 말이다. 진씨가 천연염색으로 자신의 취향과 희망을 일구듯이, 남편 박용규(59)씨는 아로니아 농장에 심혈을 기울인다. 귀촌 즉시 사업이라는 걸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단다. 이왕 시골에 살 거라면 유유자적까지는 아니라도 골치 아픈 속세의 일에서 해방돼 취미나 삼삼하게 즐기며 휘적휘적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흥청흥청 주야로 신바람 나게 노니는 일에도 대찬 내공이 필요하거니와, 부부의 적성 자체가 ‘놀자’ 과(科)가 아니라서 무위(無爲)란 그들의 소관사항이 아니었으렷다. 귀촌생활을 발랄하게 영위하는 비결 부부는 도시에서처럼 자연스럽게 다시 일로 뛰어들었다. 아내는 천연염색을 또 하나의 배필처럼 감미롭게 맞이했고, 남편은 몸에도 좋고 벌이에도 유망하다는 아로니아 재배에 열애하듯 뜨겁게 뛰어들었다. 말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라는 남편 백씨는, 근로를 숭상하고 농사를 애호하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하는데, 그는 전쟁을 연상시키는 농업 사업 특유의 경쟁에서 낙오될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타고난 근면으로 안착에 이르렀다. “남편의 농사엔 실패가 많았어요. 시행착오를 거듭했어요. 천마를 심었다가 실패했고, 왕벚나무를 심었다가 타산을 맞추기는커녕 포클레인으로 다 뽑아냈고요, 검정콩도 심어봤지만 본전도 건지지 못했어요. 이후 옥천군 농업기술센터의 지원을 받은 아로니아 재배로 비로소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던 겁니다.” “한때 블루베리의 채산성이 좋았지만 너도나도 덤벼드는 통에 과잉 생산이 돼 이젠 폐업하는 농가가 속출한다고 해요. 아로니아의 수익성은 아직 안정적일까?” “아로니아도 이미 과잉 생산에다 수입산까지 마구 들어오면서 위기에 직면했어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차별화된 고품질 상품을 생산해 단골 소비자를 확보해야만 해요. 남편이 생산하는 아로니아는 친환경 무농약 인증과 ‘GAP(우수농산물관리제도) 인증’을 받았어요. 덕분에 순항하고 있어요. 블로그와 홈페이지를 통해 전량을 직거래로 판매하고 있고요.” “시골살이를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농사를 권장할 생각은 있나요?” “농사란 참 힘들어요. 아아, 너무 힘들었어요. 처음엔 풀인지 모종인지 구분조차 못해 다 뽑아냈어요. 지금은 남편이 농사를 전담하지만, 남편 역시 고생이 많아요. 초심자라면 시행착오를 각오해야 해요. 남들 말만 듣고 작물을 선택하는 건 필패의 비결이고요. 처음 몇 해의 부진을 감당하려면 자금력이 있어야 해요. 이건 매우 중요합니다. 염색의 경우에도 노동과 시간과 수고가 필요해요.” “귀촌을 후회하진 않았어요? 도시도 매력적인 삶터인데 공연한 일탈을 했다는 의기소침이 없지 않았을 것 같다는….” “후회할 정도로 바보스런 선택을 하진 않아야죠. 가장 힘든 건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었어요. 남편은 빨리 적응했지만, 저는 너무도 더뎠어요. 혼자 집에 박혀 염색만 했으니까. 이웃들이 불편해하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자칫 왕따 당할 상황이었죠. 그래서 태도를 바꿨어요. 마을 아줌마와 할머니들에게 염색을 가르쳐드렸고, 염색한 손수건을 선물했어요. 때론 식사 대접도 했고요. 이후 서로 흐뭇한 관계를 유지하게 됐어요.” 어린애는 볼수록 예쁜 짓을 하지만, 나이를 푸지게 먹어가면서는 미운 짓만 골라 하기 십상이다. 황혼의 광야에 서서, 마음 문고리를 안으로 닫아걸고 나 잘난 멋에만 안주하고서도 귀촌생활을 발랄하게 영위할 비결은 거의 없다. 자리이타(自利利他)라,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아마도 그게 길이겠지.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 2017-08-08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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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울 학(學)을 가르쳐주신 조부모님
- 과거에 필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사회생활을 하다가 7년 만에 스스로 학비를 벌어 대학을 가려고 하자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대학 교수가 얼마나 너를 가르칠 수 있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네가 크게 배울 것이 없을 것 같다.” 할머니의 손자 사랑이 지나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했다. 할머니는 당시 필자가 5남매의 장남으로서 동생들 학업을 지원하면서 생활하는 것을 기특하게 여기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할머니의 말씀은 학문보다는 인격에 대한 표현이었던 것 같다. 필자가 뒤늦게라도 대학의 문으로 들어선 것은 참된 지식을 깨우쳐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학문이란 무엇이며 왜 대학이라는 과정을 이수해야 하는지도 궁금했다. 필자의 선택은 훌륭했다. 학문의 세계는 깊고 넓었다. 필자는 곧 국내외 경제의 흐름과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터득하게 되었다. 어려서는 법대에 진학해 법관이 되고 싶었지만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공직자들의 고충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상대를 나와 사업자의 삶을 살겠다는 생각으로 전공을 바꿨다. 할머니는 만석꾼의 딸로 태어나 세 살이나 연하인 할아버지와 결혼하셔서 일가를 이루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었다. 호남에서 제일가는 부잣집 딸을 아내로 맞은 할아버지는 일제 치하에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훗날 독일 백림대학을 나온 친구 김준연씨와 함께 학교에 갔다가 증조부님에게 매를 맞고 집에서 쫓겨나 한동안 처가에서 지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필자는 아름다운 미모에 고매한 인격의 할머니를 두게 된 것이 어릴 때도 여간 자랑스럽지 않았다. 어릴 때 방학이 되어 시골에 가면 일꾼들을 두고 농사를 짓고 생활하시던 생각이 난다. 시골에 왔다고 특별히 달걀 하나를 뜨거운 밥 속에 넣어주시던 기억도 난다. 할머니는 누구를 크게 호통치는 법이 없었다.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사람들도 그렇게 대하니 할머니가 싫다는 친․인척들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말씀이 별로 없는 과묵하신 분으로 기억된다. 그래도 손자가 방학이라고 시골집에 인사를 가면 혹시 집안 내력도 모르는 상놈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염려되어서인지 족보를 내어놓고 집안 내력을 이야기해주셨다. 그래서 필자가 족보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거창 신가 집안의 32대 손이고, 고려시대 대장군으로 몽고군과 끝까지 항쟁하신 집자 평자 조부님은 물론 조선시대까지 문무 고관대작의 집안이 되었던 내력을 소상하게 이야기해주셨다. 필자는 당시 할아버지에게서 배울 학(學)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확실하게 배웠다. 만일 필자가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다면 한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하나의 한자만 가르쳐주셨을까? 살면서 항상 배우면서 살라는 깊은 뜻이 있었을 것 같다. 할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필자는 지금도 학문이 좋고 즐겁다. 어쩌면 학자를 많이 배출해낸 집안 내력 때문일 수도 있다. 작고하신 부산의 숙모님은 결혼 전에 선도 보지 않고 할머니만 보고 결혼했다고 이야기하실 정도로 할머니는 기품이 있고 위엄이 있는, 그러면서도 친절함이 넘치는 그런 분이었다. 이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조부모라는 사실은 항상 필자를 기쁘게 했고 긍지를 갖게 해주었다. 95세까지 장수하신 조부모님의 영정을 필자의 집에 모시고 싶다. 그리하여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해 양반 가문의 전통을 이어온 집안의 자랑스러운 이야기를 우리 손자들에게도 들려주고 더욱 빛나는 가문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 또 후손들이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봉사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 2017-08-07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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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부터 지원 대상 확대, 호스피스 병원이 하는 일은?
- 호스피스는 임종이 가까워진 환자가 육체적 고통을 덜 느끼고 심리적·사회적·종교적 도움을 받아 ‘존엄한 죽음(well-dying)’에 이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의료 서비스다. 하지만 아직 의료기관 중에는 호스피스 서비스를 갖추지 못한 곳이 많다. 이와 관련,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관한 법률이 8월부터 시행된다. 말기암 환자를 대상으로 시행되던 호스피스가 ‘연명의료결정법’ 시행으로 비암성 말기 환자(만성폐쇄성폐질환, 간경변, 후천성면역결핍증)에게도 서비스가 확대되는 것. 이로 인해 관련 질환 환자도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시범사업을 위한 의료기관도 지정했다. 일산서구 탄현동 소재 연세메디람내과에서 호스피스 병동을 운영하고 있는 황의동 원장을 만나 호스피스의 역할에 대해 들어봤다. 호스피스 지원 대상이 확대된다던데 어떤 서비스인가요? 말기 환자는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의 가능성이 없고, 점차 증상이 악화돼 담당 의사로부터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진단받은 환자를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암 관리법에 따라 말기암 환자만 호스피스 혜택을 받을 수 있었지만 8월부터는 만성간경화·후천성면역결핍증(AIDS)·만성폐쇄성폐질환 말기 환자도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왜 이런 법률이 시행됐나요? 대형 병원은 대기 환자가 넘쳐나고 다른 환자에 비해 호스피스 대상 환자의 수가도 떨어져 병원 입장에서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말기 환자가 많이 찾는 대형 병원들의 상황이 이처럼 엉망이니 보건당국이 나서서 호스피스 대상도 확대하고 시범으로 운영할 병원도 지정한 거죠. 5월 말 기준으로 전국 상급종합병원 43곳 중에서 16곳만이 호스피스 병동과 병상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보건당국이 8월 4일부터 호스피스 서비스 시범사업을 의료기관 45곳에서 시행합니다. 호스피스 병원을 설립한 이유는 뭔가요? 대형 병원은 치료 중심의 병원이다 보니 아무래도 호스피스나 완화의료에 대한 관심이 낮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 부족한 부분을 완화의료기관에서 보완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생각했고 의사로서 사회적인 책임도 느꼈어요. 이제 설립 4개월이 조금 넘었는데, 도심에 호스피스 병원이 부족해서인지 100일 넘게 집에 못 들어 갈 정도로 치료를 받으려는 환자가 많습니다. 일반 병동과 호스피스 병동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일반 병원은 환자-질병-치료-퇴원의 흐름을 생각하는 게 대부분인데, 호스피스 병원은 환자 및 가족-증상조절-육체적·심리적·영적 안정을 목표로 하는 게 차이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증상이 호전되어 퇴원하는 환자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환자는 퇴원보다는 병원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것을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죽을 준비’를 하는 환자의 심리는 어떤 상태인가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임종의 심리단계를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이라는 다섯 단계로 구분해 설명하고 있어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이 다섯 단계가 똑같이 적용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한 가지 공통된 심리상태는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입니다. 그래서 저희 병원에서는 임종을 앞둔 환자의 가족을 위한 상담이나 환자가 임종한 후 유가족들이 직면할 수 있는 개별적인 법률, 보험 등의 문제에 대한 조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일대일 케어 서비스가 특별해 보이는데 간병인과 다른 점이 있나요? 저희 병원은 환자와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병원을 목표로 설립되어 모든 병실을 개인 병실로 구성했습니다. 또 간병은 가족 간병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가족 간병이 안 되는 예외적인 환자의 경우 간호사와 직원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줍니다. 저희 병원은 환자 수 보다 직원 수가 더 많고 앞으로도 인력 충원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관리 프로그램을 알고 싶습니다. 호스피스 병원은 환자의 ‘통증 완화’가 가장 기본적인 목표입니다. 그다음이 종교적 접근입니다. 전담 목사가 환자 예배와 종교 상담을 하고 있고 천주교, 불교 등에서도 내원합니다. 미술 치료, 아로마 치료, 원예 치료, 음악 치료, 마사지 치료 등도 하고 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은 목욕·미용·말벗·성가봉사·연주회 등 다양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말기암 환자에게는 심리 치료가 더 중요해 보입니다. 통증이 우선 해결되고 호흡곤란 등이 해결되어야 심리적인 접근을 할 수 있습니다. 의학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심리적인 접근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숨이 차고 아픈데 환자에게 무슨 소리를 해준들 들리지 않겠지요. 따라서 심리적 접근은 의학적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나서 의료진, 사회복지사, 가족이 참여하는 회의를 통해 환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프로그램 위주로 접근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잘 죽는다’는 의미를 남다르게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글쎄요. ‘잘 죽는다’는 의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잘산다’와 일맥상통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삶의 마지막까지 육체적으로 편안해야 하고 또한 정신적으로도 안정이 유지되어야겠지요. 호스피스 병원의 간호사들은 특별 교육을 받나요? 저희 병원의 모든 간호사는 채용 전 반드시 60시간 호스피스 완화의료 전문인력 표준과정을 수료해야 하고, 입사 후에는 보수교육 이수가 의무사항입니다. 또한 병원 프로그램을 통한 반복적 교육으로 환자에 대한 서비스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다면요? 병원에 입원했던 모든 환자들이 기억에 남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첫 환자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나이가 저보다 어렸던 30대 여자 환자였는데 마음을 열 때까지 가족들과 직원들을 많이 힘들게 했어요. 하지만 가족과 의료진이 함께 기도할 때 임종 순간을 편안히 맞이했습니다.
- 2017-08-03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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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 무명가수 케니 김의 ‘나의 인생, 나의 노래’
- ‘고향 떠나 긴 세월에 내 청춘 어디로 가고 삶에 매달려 걸어온 발자취 그 누가 알아주랴 두 주먹 불끈 쥐고 살아온 날들 소설 같은 내 드라마…’ -케니 김 1집 ‘내 청춘 드라마’ 케니 김(70). 그는 LA의 트로트 가수다. 한국에서 온 연예인도, 주체할 수 없는 끼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소심한 성격에 낯가림도 심하던 그가 무대 위에서 그것도 뽕짝을 부르는 가수가 됐다. 연매출 200만 달러의 식품회사 경영권도 아내에게 넘기고 말이다. 올해로 데뷔 7년 차. 1집 ‘노신사의 노래’에서 따끈따끈한 신곡 ‘무명가수’까지. 그의 노래 속에는 43년간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5개의 직업, 불도저 케니 김 1946년 경북 대구에서 나고 자란 그의 집안은 지독히 가난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20대.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돈 없고 빽 없고 가방끈까지 짧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작은아버지 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군대에 지원해 월남에 갔어요. 월남전 막바지라 참 위험했는데 나에게는 막막한 세상으로부터의 탈출구 같았습니다.” 베트남에서 처음 만난 미국은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꿈을 꾸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나라, 가난하고 힘없고 배운 것 없어도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때마침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한국에도 미국 이민 문호가 활짝 열렸다. 머나먼 그곳에 친척 고모 한 분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단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기술 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고압용접 자격증을 땄다. 1973년, 스물다섯의 청년 김종길은 그렇게 고국 대한민국을 떠나왔다. 그리고 미국 땅에서 케니 김이 되어 살아온 지 어느덧 43년이다. “먼 친척 고모뻘 되는 분이 살고 있는 오하이오 주 데이톤으로 무조건 갔죠. 물론 얼굴 한 번 본 적 없었고요. 300달러 손에 쥐고 공항에 내렸는데… 이상하게 겁이 하나도 안 나더라고요. 오히려 정말 원했던 것을 이뤘다는 희열을 느꼈어요. 걸리는 것은 딱 하나, 한국에 두고 온 약혼자 순이였죠(웃음).” 용접기술을 배워간 덕분에 취업도 쉬웠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이 작업에만 열중하는 그를 사장들은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인데도 말이다. 6개월 만에 비행기 티켓을 마련해 약혼자에게 보냈고 꿈에 그리던 순이는 미국으로 와서 케니 김과 결혼했다. 지금의 아내, 우순이(68)씨다. 이듬해 두 사람은 뉴올리언스로 이주한다. 당시 뉴올리언스는 석유 시추의 선봉에 서 있었다. 시추선에서 작업하는 고압용접 기술자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만큼 위험하고 고된 일이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석유 시추선에 한 번 오르면 2주일은 그곳에 머물러야 했어요. 물론 동양인은 나 하나였죠. 그래도 일만 하면 되니까 괜찮았는데 문제는 아내였죠. 당시 첫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거든요. 나 없을 때 아기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설마설마하던 일이 진짜 생기더라고요.”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병원에서 아내는 홀로 아기를 낳았다. 첫딸 제인이었다. 어쩔 줄 몰라 울기만 하던 아내와 시추선 위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남편. 이제는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참 고단하던 시절이었다. “둘째 지나가 태어난 이후로는 정말 손이 무르도록 일만 했어요. 아내가 일했던 세탁소와 가발가게가 두 딸의 놀이터였죠. 겨우 돈을 좀 모아 자동차 바디숍을 인수했는데…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됐어요. 후에 미시시피 강에서 모래를 파 올리면 돈이 된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그해 여름 허리케인으로 모든 것이 다 떠내려갔고요. 주저앉아 울 틈이 어디 있어요? 새끼들 데리고 살아야 하는데. 그야말로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었지요.” 시푸드 레스토랑의 성공으로 기반을 다진 부부는 1994년 지금 살고 있는 샌디에이고로 이주한다. 이곳에서는 농사꾼이 되어 오이, 참외 등을 기르기 시작했다. 농사의 ‘농’ 자도 모르던 케니 김씨는 한국농촌진흥청까지 날아가 오이농사 비법을 배워왔고 결국은 농장 사업도 크게 성공시킨다. 하지만 또다시 시련이 찾아온다. 지인으로부터 멕시코 농장 투자 사기를 당한 것. 김씨는 수십만 달러의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돈도 돈이었지만 믿었던 사람의 배신은 오랫동안 김씨를 괴롭혔다. “화재로 잿더미에도 앉아보고 홍수로 다 떠내려가기도 했고 사업도 수차례 망해봤지만 한 번도 좌절한 적은 없었어요. 다시 시작하면 됐으니까요. 그런데 믿었던 사람한테 속은 것은 정말이지… 힘들더라고요. 홀로 멕시코 시골에 틀어박혀서 1년을 지냈는데 그때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가수 선언! “나도 가수다” 가발가게, 세탁소, 피자가게, 시푸드 전문점, 패스트푸드점, 야채농장, 광산개발, 부동산, 콩나물 공장… 어느 날은 부부가 작정하고 미국에서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봤다고 한다. 종사했던 비즈니스가 25가지나 되었다. 이들 부부가 남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는 데에는 케니 김씨의 역할이 크다. 우순이씨는 남편에게 ‘불도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뭐 하나에 꽂히면’ 기필코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마디했다.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는 양반이에요!” 김씨는 1998년 해조류 가공업체 ‘켈프누들’을 설립, 재기에 성공한다. 다시마를 가공해 만든 국수 ‘씨탱글’이 주력 상품이었다. 그는 에스콘디도 산자락 불모지에 공장을 지었다. 버려진 컨테이너로 공장 건물을 올리고 국수를 뽑아내는 기계는 직접 설계해 만들어냈다. 대부분 고물상에서 구입한 고철들을 용접으로 붙여가며 이루어낸 작업이었다. 이어 영어에 능통한 딸들을 불러들여 시장을 공략했는데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웰빙바람으로 ‘씨탱글’은 무섭게 팔려나갔다. 현재 켈프누들 제품은 홀푸드, 마더스 마켓 같은 미국 최대의 유기농 마켓에 납품되며 유럽 등 10개국에도 수출되고 있다. 연매출 200만 달러에 이르는 알짜배기 기업이다. 전쟁 같던 이민생활에 조금씩 평화가 찾아오고 어느덧 두 딸도 짝을 만나 슬하를 떠났다. 이제 겨우 숨 좀 돌리려고 보니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 젊은 시절 함께 고생하던 친구가 병을 얻어 덧없이 가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헛헛했다. 장례식을 다녀온 날 김씨는 큰 결심을 하고 가슴에 꼭꼭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래, 나 하고 싶은 것 한번 해보자 했죠! 중학교 때 학원비 떼어먹으며 배운 기타가 내 음악 인생의 전부이지만 한 번도 가수에 대한 꿈을 저버린 적은 없었어요.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이야기겠지만 진심으로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하하.” 가장 놀란 사람은 아내 우순이씨였다. 남편의 트로트 사랑이 유별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수라니. 그것도 자기 노래를 만들어 앨범을 내는 진짜 가수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허투루 말하는 법이 없고 한 번 결심하면 무슨 일이든 해내는 사람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아내는 기분 좋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자기를 위해서는 평생 1달러도 안 쓰던 사람이에요. 야채 농사를 지어 LA로 배달을 나갈 때 왕복 4시간 운전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떠올랐어요. 아, 이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이었구나… 마음이 찡하더라고요. 그래 그렇게 열심히 살았으니까 선물을 하자. 그래서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했죠. 그런데 앨범 하나로 끝날 줄 알았는데 벌써 4집까지 나왔네요. 하하하.” 아내의 허락(?)이 떨어지자 과연 불도저답게 밀어붙였다. 한국에 나가 고시텔에 묵으며 직접 가사를 쓰기 시작했고 곡을 붙여줄 작곡가를 수소문했다. 작곡가 김준규씨와의 만남은 그야말로 운명이었다. 김준규씨는 1980년대 가수 주현미를 스타로 만들었던 트로트 메들리 앨범 ‘쌍쌍파티’의 제작자다. 2010년 케니 김 1집 ‘노신사의 노래’가 나오기까지는 꼬박 1년이 걸렸다. 매일 4시간씩 노래 지도를 받았고 모든 노래 가사를 직접 썼다. 케니는 따근따끈한 자신의 앨범을 훈장처럼 품에 안고 돌아왔다. 그렇게 케니 김은 63세에 늦깎이 가수가 되었다. 당신께 바치는 노래 이때부터 아내 우순이씨는 가수 케니 김의 매니저이자 팬클럽 회장이 됐다. 한인 라디오 방송국 ‘라디오코리아’에 남편의 앨범을 보냈고 이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곧 방송을 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가수 케니 김의 사연과 노래가 미 전역의 이민 1세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그들 모두가 척박한 미국 땅에서 눈물과 땀을 쏟아냈던 또 다른 케니 김이고 우순이였다. 방송이 나간 후 팬이 되고 싶다는 전화와 편지들이 쏟아졌고 부부는 이들에게 하나하나 앨범을 선물했다. 밑지는 장사였지만 케니 김은 행복했다. “애당초 음반을 팔아 돈 벌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그저 힘들게 위로가 되었던 노래가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게 부른 노래가 또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데뷔 7년. 어느덧 케니 김은 4집 앨범까지 낸 어엿한 중견가수가 됐다. 크고 작은 한인 행사에 초대가수로 불려가고 종종 한국에서 오는 가수의 공연에 오프닝 무대를 장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돈벌이는 여전히 안 된다. 초대받은 행사에 가서 출연료는커녕 기부금까지 내고 오기 일쑤다. 몇 해 전부터는 5월 어버이 날이 되면 100여 명의 노인들을 집으로 초청해 효도잔치를 하고 있다. 그 역시 효도를 받을 나이이지만 누군가를 섬길 수 있다는 것을 큰 기쁨이자 보람으로 생각한다. “어느 해 집 주위에 매실이며 살구가 너무 실하게 열렸더라고요. 우리 둘이 먹기에는 너무 많아 주위의 노인분들에게 오셔서 따가시라 했죠. 너무들 좋아하시더라고요. 미국에 살면서 나들이도 제대로 못하며 살았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어요. 잔치 한번 열어드리려 한 것이 연중 행사가 되어버렸어요. 맛있는 것 실컷 먹고 노래 실컷 부르면서 즐기시는 거 보면 덩달아 기분 좋습니다. 친구 생각,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도 나고요. 뭐 이게 사는 재미 아니겠습니까.” 아메리칸 드림이 별거 있더냐 케니 김씨는 자신만을 위해 시작한 노래를 이제 다른 이를 위해 부르고 있다. ‘수많은 날들 비바람에도 쉬지 않고 걸어온 우리, 여보 정말 고생 많았소~’ 덤덤한 노랫말이 인상적인 ‘무지개’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노래이고, 귀에 착 감기는 미디움 템포의 ‘아메리칸 드림’은 먼 이국땅에서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모든 이민자들에게 바치는 노래다. 성공을 위해 별의별 일을 다 해본 이민자 케니 김은 아메리칸 드림은 별게 아니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의 진솔한 고백이다. “아메리칸 드림이요? 이루었죠!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에요. 돈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죠. 많은데도 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하면, 없어도 많은 것처럼 살 수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나에게 꿈과 희망이 있냐는 것입니다. 한국을 떠나오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실패해도 두렵지 않았던 것은 또다시 꿈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을 향한 그의 열정과 집념은 삶의 원동력이다. 열심히 바쁘게 살면 늙을 시간도 없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불도저 케니 김이 요즘 푹 빠져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뮤직비디오 제작이다. 아마추어 친구들이 힘을 모아 ‘아메리칸 드림’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는데 무척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훨씬 쉽게 노래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노래를 부르고 듣기에도 참 좋아진 세상이에요. 저는 좋아하는 가요 카세트테이프를 겨우 구해서 늘어질까봐 아끼고 아껴서 듣던 시절에 살았어요. 캘리포니아에 이사 오면 한국어로 라디오가 나오고 트로트를 실컷 들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당시엔 샌디에이고까지는 잘 안 나오더라고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아무튼 노래듣기에도 가수하기에도 참 편하고 재미있는 세상입니다.” 지난 4월, 따끈따끈한 새 음반이 두 장이나 나왔다. 하나는 ‘쌍쌍파티’의 리메이크 앨범 ‘케니 김 주연하의 쌍쌍파티’, 또 하나는 케니 김의 4집 앨범이다. ‘쌍쌍파티’는 현재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절찬 판매중이다. 지난달 음반 판매 수익금 88만원도 받았다. 데뷔 7년 만에 처음으로 번 돈이다. 4집 앨범의 타이틀 곡은 ‘무명가수’, 흥겨운 댄스곡이다. 물론 이번에도 직접 가사를 썼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노래 불러요 스트레스 날리고 장단에 맞춰 박수치며 노래 불러요 행복의 바이러스 드리겠어요 나는나는 무명가수야 우리들에게 행복의 바이러스를 주겠다는 LA의 무명가수 케니 김.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꿈이 자리 잡고 있다. 장인의 노래가 18번이라는 든든한 첫째 사위와 CCM가수인 둘째 딸 지나와 함께 가족 콘서트를 여는 것이다. 딸과 함께 부르는 트로트 메들리도 멋지지 않겠나. 매니저이자 팬클럽 회장에서 이제는 의상 코디며 메이크업까지 담당하고 있는 아내는 가만히 미소짓는다. 아내의 미소는 늘 케니 김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주곤 했다. 머지않아, 그의 새로운 도전이 또다시 시작될 것이다.
- 2017-07-31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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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미술 쉽게” 네이버 ‘헬로!아티스트' 4년 만에 작가 100인 소개
- 다소 난해한 현대미술의 문턱을 낮춰 대중과 소통하자는 취지로 네이버문화재단의 창작자 지원사업, 헬로!아티스트가 지난 18일 오종 작가를 통해 100번째 예술작가를 소개하게 됐다. 2013년 6월 시작해 4년째를 맞이한 네이버문화재단의 이 전시사업은 대중들이 시각예술에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온라인 콘텐츠로 작가들을 소개하고 창작활동과 전시 기회를 지원하고 있다. 특히 기존 미술평론가나 미술계 수용자의 정형화된 작가 소개 방식에서 벗어나 작가가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작품과 작업 이야기를 하여 대중들의 호응을 받고 있다. 헬로!아티스트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폭발적이어서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950만 페이지뷰(PV)와 영상 51만 회 재생수를 기록했다. 네이버문화재단 관계자는 “작가 전시 기록이 다양해지고 풍부해질수록 이용자가 늘고 있다”고 밝혔다. 작가선정위원으로 참여한 기혜경 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미술관 운영부장은 “헬로!아티스트는 4년 동안 온오프라인으로 영역을 확대하며 동시대 미술 흐름을 접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했다고 평가했다. 이들의 전시활동은 오프라인으로도 이어져 2014년부터 매년 헬로!아티스트 오프라인 전시를 열고 작가 도슨트, 아티스트 토크, 온스테이지 인디 뮤지션 라이브 공연도 함께 진행해 대중들에게 새로운 전시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한편 헬로!아티스트는 지난 11일부터 고가 보행길인 ‘서울로7017’에 헬로!아티스트 서울로 전시관을 개관하고 첫 번째 현대미술 전시를 진행 중이다. 헬로!아티스트 서울로 전시는 이우성 작가 전시를 시작으로 9월에 정혜련 설치미술가, 11월에 김종범 디자이너, 2018년 1월에 최윤석 작가의 전시로 이어질 계획이다.
- 2017-07-1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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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자생한방병원, 하동지역 고령자 ‘건강 도우미’ 자처
- 창원자생한방병원과 자생의료재단은 지난 18일 하동군 악양농협에서 한방의료봉사를 실시했다. ‘농업인 행복버스’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번 행사에는 자생한방병원 의료진과 봉사단 10여 명이 지역 고령자 등 의료 취약계층 200여 명을 대상으로 한방치료를 시행했다. 현장에서 의료진은 각종 척추관절 질환에 대한 건강상담과 함께 개인별 침 치료, 약제 처방 등을 진행했다. 창원자생한방병원 윤승규 원장은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주민들에게 한방치료를 해 줄 수 있어 보람을 느꼈다”며 “앞으로도 농업인 행복버스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농업인 행복버스는 의료진 등이 전국의 농어촌지역을 방문해 의료지원‧장수사진 촬영 등을 지원하는 농촌 복지서비스로 농협중앙회와 농촌사랑범국민운동본부 등이 주관하고 있다. 자생의료재단은 지난 2013년 원년부터 의료지원기관으로 참여하고 있다.
- 2017-07-19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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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이상희 헤어팝’ 이상희 원장
- 그녀는 뽀얗고 하아얀 뭉게구름 같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색다르고 기발한 발상이 피어오른다. 집중해서 듣자니 성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이상희 헤어팝’의 이상희(李相熙·56) 원장. 직업은 미용사인데 그녀 인생에서 봉사를 뺀다면 삶이 심심할 것만 같다. 손에 익은 기술을 바탕으로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니 말이다. ‘누군가를 돕는다’란 말에 백만 개의 하트풍선이 ‘뿅뿅’ 터지는 그녀의 환한 얼굴과 마주했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가 감사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하루하루가 감사해요. 저는 되게 감사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감사’라는 단어를 꺼낸다. 열 손가락이 성한 가운데 기술을 배운 것도, 그 기술을 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있어서 감사하단다. “미용기술을 배울 때 돈만 벌기 위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한 달에 네 번 봉사를 간다면 나머지 시간은 봉사를 가기 위해 미용실에서 일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거든요. 제 이름이 서로 ‘상’에 빛날 ‘희’거든요. 말 그대로 상희답게 사는 거죠.” 어려운 이들을 만나면 뭔가 해줄 수 있어 좋고 자신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후배들이 잘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이상희 원장을 만난 것은 5월 말. 본인 스스로가 정한 인생의 안식년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미용실을 계속하면 쉴 수 없겠더라고요. 원래 하던 넓은 미용실을 4월 30일까지만 하고 5월 1일 철거했어요. 저와 오래 일했던 디자이너들이 일할 곳을 마련해 지금의 아파트 상가로 옮겼어요. 이성적으로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철거하던 날 잠이 안 오더라고요. 안식년이라 해도 두 손 다 노는 게 아니라 그런지 다음 날부터는 잠이 너무 잘 왔어요.” 그런데 그 안식년이란 것 말이다. 대부분 휴식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한다. 이상희 원장은 그 하고 싶다던 일(?)에 더 빠져보려 미용실 운영 대부분을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맡겼다. 벌여놓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 당장 앞두고 있었던 새터민 결혼식에 피부 관련 사업, 매달 있는 봉사, 새로운 봉사, 미용인의 처우 개선 등 쌓이고 쌓인 일을 보니 이게 안식년인가 싶다. 봉사와 업(業)이 하나인 인생을 구상하다 전라북도 정읍 출신인 이상희 원장은 성공하려고 미용계에 입문했다. 미용실에 갔더니 기술을 배우면 서울도 갈 수 있고 해외도 갈 수 있다고 말해줬다. 솔깃한 말에 응시한 미용 자격증 필기시험에 떡하니 붙었고 곧바로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학원 안 다니고 미용실에서 연습했어요. 고등학교 친구들 데리고 가서 머리 잘라주면서 두세 달 정도 훈련했고 합격 1년 정도 후에 상경했죠.” 서울에 오자마자 당시 유명했던 미용실에 취업한 이상희 원장은 일주일을 못 다니고 그만뒀다. 줄지어 서 있는 거울에 헤어디자이너의 이름이 아닌 번호가 붙어 있었다. “큰 미용실 가야 성공한다기에 들어갔는데 거기선 사람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요. 적응하기 힘들더라고요. 제가 시골 애였지만 자존감은 있었거든요.” 서울살이 초반 20대의 이상희는 걷기도 많이 걸었다. 집이 있던 상도동을 지나고 한강다리 건너, 숙대, 남대문시장.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신호등 앞에 있는데 파마가 막 말아지는 거예요. 다시 미용을 해? 돈 많은 남자 만나서 미용실을 열어? 가난해서 걷고 고민하면서도 걷고. 그렇게 내린 결론이 나를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 성공하겠다는 거였어요.” 머리 자르는 미용기술 외에도 머리를 올리는 ‘업스타일’에 ‘메이크업’ 기술도 할 수 있어야 했다. 다니던 미용실 원장과 선배, 동료에게 양해를 구해 시간을 마련했고, 잘살던 친구에게 학원비를 부탁해 메이크업 학원에 등록했다. 선후배 관계가 수직적이고 딱딱하던 시대였지만 업무시간을 배려받고 학비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더욱 완벽한 미용사로서 비상을 꿈꿨다. “후배들에게 돈과 시간이 없어서란 변명을 하지 말기를 당부해요. 꼭 해야 할 일이고 열정이 있으면 누구든 도울 테니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해요.” 20대는 미용사 이상희로서 삶을 채우는 시간이었다면 30대는 그것을 바탕으로 존중하고 돕고 깨치며 살아갔다. ‘높임말’과 ‘봉사’는 철칙 서른 살의 나이, 자신의 이름을 단 미용실을 열었다. 개업과 함께 이상희 원장이 철칙으로 삼았던 두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직원들 사이에 높임말 사용이었다. 당시는 손님이고 미용사들이고 서로에게 함부로 하던 시절이었다. “저희 때는 디자이너와 스태프가 같이 앉아 밥도 안 먹었어요. 솔직히 미용기술에는 차이가 있지만 사람 차이는 없잖아요. 그래서 오픈할 때부터 높임말을 사용했어요. 혹여 함부로 하는 손님이 있으면 더 예의를 갖춰 말했어요. 구두며 유니폼도 갖춰 입었습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바꿨어요.” 두 번째는 바로 봉사다. 한 달에 한 번은 전 직원이 봉사하기로 했다.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좋은 일에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교, 지역 그 어떤 것도 따지지 않고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어려운 이웃과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 찾아서 봉사했던 곳이 가난한 마음의 집이라는 곳이었어요. 1990년대에는 메이크업이 아주 강할 때였어요. 장애우들이 저희를 보고 놀라서 숨는 거예요(웃음). 그래도 몇 번 가니까 친해졌어요. 봉사하다 보니 새터민과도 연결이 됐어요.” 어렵던 시절 동료들과 친구의 도움으로 메이크업을 배운 것이 두고두고 고맙다는 이상희 원장. 좋은 마음이 모여 얻은 기술이기에 봉사를 할 때 더없이 기분이 좋다. “미용실 열고 1년쯤 돼서 어떤 손님이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러시아 여자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민이 결혼식을 하는데 메이크업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요. 제가 메이크업을 한다는 걸 몰랐던 손님인데 말입니다. 당연히 좋다고 했죠.” 봉사한다는 게 알려지면서 놀이처럼 재미있고 기획력 있는 봉사가 이어졌다. 정부 지원이 어려운 틈새 청소년들을 위해 일일찻집을 열고, 산골 아이들을 위해 자전거도 사주고 고아원에 세탁기도 기증했다. “손님들에게 이건 꼭 약속했어요. 우리 미용실에 와서 머리를 하면 그 일부는 다른 사람들 위해 쓰인다고요. 제가 그렇게 좋은 일을 하면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 복을 받는 거잖아요.” ‘K뷰티’와 ‘뷰티엔젤’ 봉사의 중심에 서다 2000년대 중반에는 한·일 미용인 간의 세미나가 자주 있어서 일본에 갈 기회가 많았다. 그때 일본의 성년의 날과 우리나라의 성년의 날에 대한 의문과 고민이 일었다. “일본에 갔는데 일본 젊은이들이 기모노를 많이 입더라고요. 예쁘기도 하지만 그 나라 문화잖아요. 그런데 일본의 ‘성인식’은 공휴일인데다가 자치단체에서 큰 잔치를 열어요. 기모노 입고 화장과 머리를 하고. 이 모든 게 다 미용실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함께 일본에 방문하고 온 미용실 원장들에게 우리 청년들을 위한 성년의 날을 특별한 날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메이크업과 머리손질은 미용실에서 도움을 주고, 한복은 당시 이상희 원장이 다니던 우석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미르’에서 만난 지인이 공급해주기로 했다. “연세대학교 다니는 손님한테 학교 대동제 때 성년식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했어요. 단, 스마트폰으로 한복 입은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학생들에게만 기회를 주기로 했어요. 2011년 5월에 이틀 동안 저희가 준비한 성년식에 300여 명이 참여했어요.” 이 행사를 계기로 K뷰티디자인협회의 시초가 된 한국업스타일협회를 창설했다. “일본에 같이 다녔던 미용인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서 좋은 일도 하고 미용실 손님도 우리 손으로 오게 하자고 말씀드렸어요. 한국업스타일협회는 이후 좀 더 의미를 넓혀 지금의 K(Korea)뷰티디자인협회가 됐습니다.” 이상희 원장의 또 다른 활동 영역은 뷰티엔젤이다. 미용실 개업 초기 직원들과 다니던 봉사가 주위 미용인들과 함께하는 한국미용봉사회로 이어지다가 누구든 함께 참여하는 연합봉사 형태의 ‘뷰티엔젤’로 탄생했다. 한국 봉사는 물론 캄보디아 미용기술 지원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미르’의 박문희 원장님이 의료진하고 캄보디아 봉사를 간다고 머리를 하러 오셨어요. 제가 ‘의사들은 너무 좋겠다, 다른 나라 가서 봉사도 하고’ 그랬더니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봉사를 하게 된다면 저는 미용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게 진행이 됐어요. 그쪽 아이들 미용기술 가르칠 생각을 시작하니까 잠이 안 왔어요.” 캄보디아 봉사는 이상희 원장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20년 넘게 많은 사람을 도우며 살아왔지만 처음의 그 에너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캄보디아 봉사를 앞두고 느꼈어요. 왜 잊고 있었지? 친구 한 명의 도움으로 내가 20대를 살았는데 지금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난해도 여자가 기술을 배우면 자식교육 시킬 수 있고 생활고에서 나아지니까 공부는 늦게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두 번의 캄보디아 미용기술학습프로그램을 통해 20명을 지원했다. 학비뿐만 아니라 숙식과 생활보조금까지 지원하는 사업이라 매년 할 수 없다고 한다. “캄보디아 아이들과도 약속한 것이 있어요. ‘너희가 성공을 하면 한 사람을 가르쳐라.’ 그게 약속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캄보디아에 미용실 오픈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곳 아이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거죠.” ‘미용복지사’라는 직업 멋지지 않나요? 안식년이라는 본인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매달 13일 레드엔젤(청년응원단체)과 함께 K-컬처 콘서트를 개최한다. 2~3개월에 한 번씩은 다른 봉사단체와 연합활동도 한다. 캄보디아는 물론 올가을 새터민 합동결혼식도 계획 중이다. 미용인으로서의 고민도 남다르다. “미용은 보건의 개념도 있지만 지금 사회에서는 복지의 개념입니다. 형편은 되는데 거동이 힘들어서 미용실에 못 오시는 경우가 있잖아요. 현재 미용은 이동 미용이 안 됩니다. 환자 외에는요. 미용복지사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미용사의 새로운 직업에 대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고령화 사회 시니어들의 복지에 대한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다. 이외에도 한류로 인해 유입되는 외국 여행객에게 보다 친근하게 한국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뷰티존’을 만들어 세계에 한국 문화와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단다. 미용실을 작은 평수로 옮기면서 ‘손아당(蓀雅堂)’이라는 공간도 만들었다. 뜻 맞는 사람들이 모여 봉사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허브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근데 저는 생각하는 게 예쁜 거 같아요. 끊임없이 꿈을 꾸는 거 같아요. 내가 만일 미용 일에서 손을 뗀다면 내 직함을 뭘로 하지?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 이상희로 불리면 어떨까 하는데 되겠죠?”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를 꿈꾸는 그녀의 입에서는 이쁘다(예쁘다)라는 말이 참으로 많이 흘러나온다. 자주 쓰는 단어에는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이 담겨 있다. 그녀의 이쁜 마음이 영원하길 지지하고 응원한다.
- 2017-07-10 1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