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여자는 결혼을 하면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출산을 하고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하면서 살다 보면 젊은 시절의 경력은 온데간데없어진다. ‘이렇게 사는 것이 여자의 일생이지’ 하면서 단념하려던 순간,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잘해보겠다고 다짐하며 빛을 따라 즐겁게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던 소년은 색약 판정으로 꿈을 저버리고 만다. 절망으로 보낸 질풍노도의 시기, 그를 붙잡아준 건 한 그루의 나무였다. 어떤 악조건에도 가지를 뻗어가는 나무가 보여준 단단한 삶의 태도. 그렇게 얻은 인생의 가르침을 보은으로 여기며 우종영(禹鍾榮·64)은 아픈 나무들을 위해 나무의사가 됐다. 어느덧 인생 후반, 나이가 들
난로 위에 올려놓은 “변또“(옛날 양은도시락)의 모습에 추억이 새록 새록. 임시 개관한 서울생활사박물관을 관람하며 추억 속에 빠져들었다. 세월 따라 쌓여온 숱한 삶의 기록들이 잘 전시돼 있다.
이런 물건들을 어떻게 구했을까? 시민들이 기증했단다. 옛날의 구식 오락기 앞에 앉아 기기를 만지며 노는 아이들도 즐거움이 가득한 모습이다.
서울시 노원
한국 근대미술이 한 곳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다. 2시간마다 해설도 있다.
전시회 이름은 이태준의 소설 ‘꽃나무는 심어 놓고’에서 차용해 왔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30명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좋은 기회다. 김환기,
전쟁 직후이니까 한 해를 보태면 70년 전 일입니다. 그해 겨울을 간신히 지내고 이듬해 이른 여름에 저는 ‘길에서 주워온 아이들’을 돌보는 ‘시설’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저는 6세에서 12세까지 아이들 여섯 명이 기거하는 방에 배정을 받았습니다. 기묘한 구조의 커다란 한옥 구석방이었는데 햇빛이 들지 않았습니다. 저까지 모두 일곱 명이 나란히 누울 수도
딸의 방에서 우연히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내 어머니인 할머니가 내 딸인 손녀에게 보낸 편지다.
80세 넘은 어머니는 공교육을 받지 못했다. 글을 읽거나 쓸 줄을 몰랐다. 그런 문맹 상태로 한평생 시장에서 옷가게를 하여 우리 삼 형제를 키우셨다. 70세가 다 되어 장사를 그만두신 후 첫 번째로 하신 일이 ‘학력 인정 성인학교’인 ‘양원초등학교’에 입
주변에서 어려운 노인들이 늘어나는 요즘 다시 생각나는 오래 된 일 하나. 10여년쯤 됐나? 동료 노인들에게 선행을 베풀다 간 노인의 장례식.
행색이 초라한 노인들이 장례식장 안에 삼삼오오 모여 고인의 넋을 기리고 있었다. 고인의 오랜 친구들도 잘 모르는 낯선 노인들이었다.
노인들은 하나같이 "천사 같으신 분이 돌아가셔서 가슴이 아프다."라고
3월 초, 이제 막 새 학기를 시작한 동아대학교 캠퍼스는 꽃다운 청춘들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학생들 못지않게 바쁜 사람이 또 있었으니, 바로 하형주(河亨柱·58) 동아대학교 예술체육대학 학장이다. 35년 전 국민들 손에 땀을 쥐게 했던 LA올림픽 유도 금메달의 주인공. 그를 만나 당시의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어무이~ 내 보이나? 이제 고생 끝났심더
‘살다 보면 잊는다’란 말을 종종 하게 된다. 시간이 가고 나이 듦의 가치 중 하나가 ‘기억의 희석’일 게다. 무뎌지다 사라지기도 하고, 아련하게 추억이란 이름으로 저장된다. 그것이 좋았건 슬펐건 간에 말이다. 새로운 이야기가 매일 쌓이는 것이 인생. 그렇게 흘러가기만 하면 좋으련만 뜬금없이 연극처럼 플래시백(과거의 회상을 나타내는 장면)을 경험할 때가 있
화려한 액세서리, 깔끔한 외투, 잘 정돈된 소매와 옷깃. 센스 있는 옷차림은 눈길을 끈다. 하지만 향기로운 사람에겐 눈길이 머문다. 길을 걷다 우연히 코끝을 스친 향기는 절로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패션의 완성은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향수다.
보이지 않는 패션, 향수
어떤 향기를 맡고 자연스레 내가 만났던 사람, 어린 시절 추억의 한 장면이 떠올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