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줄 몰랐다. 인천시 부평구에 일제가 만든 대규모 군수 병창 시설이 생생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는 걸. 1941년에 완공해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각종 무기를 생산했던 일본육군조병창(이하 ‘조병창’) 유적이다. 조병창의 터는 광활했다. 2023년 인천시에 반환된 미군기지(캠프마켓)와 부영공원 일대의 부지 115만여 평에 갖가지 시설물을 지었다. 건립 당시의 원형을 유지한 건물 30여 동이 현존한다. 허공으로 높이 치솟은 굴뚝과 대형 건물들의 규모에서 일제가 조병창에 쏟아부은 공력과 품은 야욕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가 부평에 거대한 무기 생산 공장을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1년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해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촉발했다. 이렇게 전쟁의 규모가 확산되면서 무기의 대량생산과 보급이 필요했던 것이다. 조병창에서 생산한 병기는 다양했다. 소총과 탄환을 주로 만들었지만 자동차, 잠항정, 항공기 부품까지 생산했다. 이곳에서 생산된 무기는 부평을 가로지르는 철길을 통해 인천항으로 운송됐다. 전국 각지에서 수탈한 놋그릇, 제기, 엽전 등 무기 제작의 재료도 철길을 통해 날랐다. 이 철길은 풀덤불에 묻혀 현존한다.
일제의 수탈 정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며 알 수 있는 국내 유적은 오늘날 대부분 철거돼 사라졌다. 부평 조병창은 다르다. 다수의 건물이 원래대로 남아 참혹했던 옛일을 웅변하는 게 아닌가. 침탈의 역사 한 자락이 이렇듯 증거물과 함께 숨을 쉰다. 이는 일본이 패전 뒤 달아나면서 버린 조병창을 미군이 접수해 80여 년 동안 사용했기에 가능했다. 개발 바람이 침투할 수 없는 영역이었던 것이다.
한편 조병창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는 극비문서까지 발견됐다. 경향신문은 2021년 8월 7일자 보도에서 ‘일제는 한반도를 총알받이로 쓰려 했다’는 제하의 기사를 썼다. 조건 동북아역사문화재단 연구위원이 일본 방위성 문서철 속에서 찾아낸 조병창 관련 극비문서에 관한 기사였다. 극비문서의 제목은 ‘1945년 3월 예하 부대장 회동 시 상황 보고, 인천육군조병창’이다. 120쪽에 달하는 이 비밀문서를 분석한 경향신문은 두 가지 사안에 주목했다. 하나는 ‘조선인을 강제동원해 조병창을 지하화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일본 도쿄 조병창을 부평으로 옮긴다’는 것.
일본엔 여러 개의 조병창이 있었다. 극비문서는 그중 도쿄의 조병창을 부평으로 이전하고 지하화함으로써 거둘 수 있는 전략상의 이점에 착안했음을 보여준다. 일제는 도쿄가 미군의 폭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도를 모색했던 것이다. 즉 전쟁은 이어가되 위험은 한반도에 전가하려 했다. 조병창이 운영되면서 부평은 사실상 전쟁 한복판으로 끌려들어갔다. 만약 일제가 항복하지 않고 전쟁을 지속했다면? 거대한 병참기지였던 부평은 미국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됐을지도 모른다.
극비문서에서 조선인 강제동원을 명시한 대목도 참담한 감정을 야기한다. 조병창을 지하화하고 도쿄의 조병창을 수용하는 데에는 방대한 공사와 노동력 투입이 필연적이었다. 일제는 이를 강제동원한 조선 노동자들을 통해 해결해나갔다. 극비문서는 ‘1945년 3월 1일, 부평 조병창에 소속된 노동자 중 9000명이 조선인’이라고 기록했다. 이후 1만 5000명을 추가로 동원할 계획도 수립했다. 강제동원은 전방위적으로 감행되었다. 인천과 경성은 물론, 경상도와 전라도 등 각지의 조선인을 강제동원했다. 주목할 것은 학도 동원이 많았는데 초등학생까지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더 있다. 조병창에서 있었던 독립투사의 행적이 그것이다. 조병창에서 무기 조작 기술을 익혀 독립운동을 하고자 잠입했다가 붙잡힌 오순환, 조병창에서 고려재건당을 만들고 무기를 입수해 임시정부에 넘기려다 체포된 황장연 등이 조병창의 어두운 역사에 한줄기 빛을 뿌렸다.
어린 학생들까지 강제동원돼
발길은 이제 부평구 산곡동 함봉산 자락에 닿는다. 이곳엔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만든 인공동굴들이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동굴만 27개로 통틀어 부평 지하호라 부른다. 이 지하호들은 일제가 획책한 조병창의 지하화 작업에 따라 만들어진 것들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침략전쟁에 광분한 나머지 남의 나라 지하까지 마구잡이로 파고들어 무기 생산을 도모한 만행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또렷한 증거니까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동굴들이 조병창에 딸린 군사시설인 걸 알지 못했다. 독립군들이 판 굴이라는 풍문이 나돌았지만, 흔히 새우젓 저장 창고로 알았을 뿐이다. 비로소 굴의 정체를 확인해낸 사람은 김규혁 부평문화원 과장이다. 굴의 정확한 내력을 알고 싶어 조사활동에 나선 그는 2016년, 이곳에 강제동원돼 굴 파기 노역을 했던 증언자들을 찾아내 실체를 규명했다. 이후 조병창 지하화를 계획한 극비문서가 발견되었고, 이로써 굴의 실체가 확연하게 밝혀졌다. 그는 중학생 신분으로 굴착 작업에 강제동원됐던 이로부터 노무자 대부분이 어린 학생이었다는 증언을 듣기도 했다.
부평동에 있는 ‘미쓰비시 줄사택’도 희귀한 역사 현장이다. 줄사택은 일제가 강제동원한 조선인들의 노동력을 쥐어짜 무기를 제작, 이를 조병창에 납품했던 전범기업 미쓰비시가 운영한 노무자 합숙소였다. 애초 143개 동에 1000여 명의 노무자들이 살았으나 광복 이후 점진적으로 줄어 현재는 4개 동만 남아 있다. 상처의 전시장이라 할까. 줄사택의 형상은 낡고 찌들어 간신히 버티어 선 고목등걸처럼 처연하다. 하지만 이 역시 일제강점기의 비극을 내장한 유적이다. 인근 주민들은 줄사택을 도시 경관을 해치는 흉물로 간주했다. 동네 집값을 떨어뜨리는 애물단지로 여겼다. 철거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이에 따라 부평구는 모두 뜯어내고 공영주차장을 설치할 계획을 수립했으나 사회단체들의 보존 요구에 떠밀려 추진을 중단했다. 문화재청 역시 줄사택을 보존할 가치가 있는 근대문화유산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부평구는 2021년 지역사회 각계 인사들을 구성원으로 포함한 ‘미쓰비시 줄사택 민관협의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아직 문화재 등록도 되지 않았으며, 보존과 활용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지 못한 상황이다.
조병창, 지하호, 줄사택, 이 모두 일제가 획책한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을 증명하는 역사유적이다.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일본 수구세력, 그리고 그들의 주장에 장단을 맞춰주는 일부 국내 세력은 물론 모든 사람에게, 나아가 세계인에게 알려야 할 가치와 당위가 충분한 역사 현장이다. 그럼에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골방에 방치된 형국이니 아쉽다. 기억만으로 간직한 역사는 연약하다. 오독되고 편집되고 훼손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장의 생생한 단서로 존재하는 역사는 강철처럼 굳건하다.
신동욱 부평문화원 원장
조병창 유적, 어떻게든 보존해야
인천시 부평구는 예로부터 곡창지대였다. ‘수확이 많은 넓은 들’이라는 뜻을 지닌 부평(富平)의 지명을 통해 전통적인 농업지대였음을 알 수 있다. 현대에 와서는 산업지구로, 베드타운으로 급속히 전환됐다. 외지인 유입도 매우 활발하다. 신동욱 원장은 이러한 부평의 특색을 문화에 접목하고자 한다.
“전라도나 경상도의 도시들과 달리 부평엔 토박이가 드물다. 겨우 8%에 불과하다. 전국 각지에서 온 주민들이 혼재됐다는 특색을 지닌 것인데, 이와 같은 다양성을 문화로 융합해 조화로운 도시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
부평의 역사 가운데 주목할 만한 대목은 어떤 것일까?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사회상에 큰 변동이 있었다. 일제가 만든 대규모 군수공장이 미친 영향, 광복 후 설치된 미군기지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조성된 부평산업단지가 불러들인 경제 효과 등도 부평에서 펼쳐진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부평엔 일제에 의한 조선인 강제동원의 수탈사를 볼 수 있는 조병창 유적이 있다. 조병창이 부평에 들어선 배경은?
“육로나 해양 수송로가 발달한 한편, 전시에 식량 조달이 용이한 곡창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 같다. 공습 차단을 위한 지형이나 기후 여건도 고려한 걸로 본다. 일본인들은 부평을 숫제 경성시로 만들 장기적인 플랜도 구상했다.”
신 원장은 조병창을 비롯한 강제동원 관련 유적들의 보존과 활용 필요성을 처음으로 지역사회에 제기했다. 현재의 진척 상황은 어떤가?
“보존 가치를 인식한 이들이 많지만 아직 진척된 게 없다. 보존 쪽으로 가자는 결정조차 완전하게 나지 않은 상황이니까. 이는 주도권을 가진 인천시장의 의지에 달린 문제다.”
유적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가능성은?
“가능성은 높지 않다. 원형이 훼손된 부분이 있어서.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되는 일이다. 이는 어렵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예산이 여의치 않다며 보존사업에 박차를 가하지 않는 지자체의 태도다. 그들은 역사유적을 문화공간으로 재생해 거둘 수 있는 경제 효과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줄사택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이보다 나은 역사 교육장이 드물겠다.
“철거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어떻게든 보존해야 한다. 너무 퇴락해 보존이 어렵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는 단견이다. 현대의 기술로 재생하지 못할 리가 있겠나.”
반환된 미군기지의 활용 방안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대형 식물원이 있는 공원을 만든다고 하지만 안일한 방향이다. 조병창 재생과 고품격 공연장 건립을 첨가한다면 유수의 관광지구로 부상할 수 있다. 특히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조병창을 역사문화공간으로 살린다면 세계적인 명소가 될 것이다.”
문화원의 역점 사업 하나를 소개한다면?
“부평에선 매년 풍물축제가 열린다. 이 축제를 주민 화합의 매개로 삼고 싶다. 주민들 각자 출신 고향의 고유한 풍물을 축제에서 자랑 삼아 경합할 수 있는 공연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섬에 들어가는 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꾸물거렸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두 좋았다.” 드라마 ‘도깨비’의 대사가 아니어도 이런 날씨도 나름 괜찮다. 날이 안 좋아서 하늘 사진이 예쁘게 찍히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이 모든 날들이 고마운 건 무조건 긍정 마인드이어서가 아니다. 아마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만들어준 것이 아닐지. 나이를 먹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다. 날씨는 짓궂더라도 섬이 주는 위로가 있음을 안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흐린 날의 강화 본섬은 안개 섬처럼 신비롭다. 하늘은 흐렸고 강화대교 아래 서해가 여유롭게 흐르고 있었다. 곧이어 나타난 긴 교량. 강화도와 석모도를 연결하는 석모대교(席毛大橋)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섬이었는데, 2017년 석모대교 개통 덕분에 언제든지 쉽게 가볼 수 있게 되었다.
섬을 잇다, 석모대교
석모도 여행의 시작은 이제 석모대교다. 참고로 석모대교를 건너 왼편으로 돌면 바로 언덕 위로 미니공원과 함께 전망대가 있어서 강화도와 석모도를 잇는 다리와 서해의 출렁이는 바닷물을 상쾌하게 즐길 수 있다. 그 섬을 쉽게 건넜으니 마음껏 달리며 돌아볼 차례다. 강화도의 서편 바다 위에 길게 이어진 작은 섬 석모도. 긴 다리 하나가 주는 편리함으로 실컷 석모도를 놀아보면 된다. 자동차를 달려 알찬 하루 코스 강화섬 속의 섬 석모도다.
나룻부리항과 어류정항
먼저 가까운 나룻부리항을 들러본다. 강화나들길 11코스에 속한다. 한때 여객선이 드나들던 항구였지만 이젠 나룻부리항 시장으로 그 기능을 대신한다. 오가는 이 드문 어시장 뒤 오도카니 섬을 띄운 바다 위로 갈매기의 날갯짓이 한가롭다.
나룻부리항과 어류정항은 가까워서 간 김에 두 곳 다 돌아보는 것도 좋다. 바다낚시를 좋아하는 이들이 찾는 곳으로 수산물직판장과 편의시설을 잘 갖추고 있지만 아직은 한산하다. 텅 빈 항구에서 맞닥뜨린 세찬 바닷바람에 머릿속이 개운해진다. 사람 없는 한적한 바닷가 바로 옆을 달리다 보면 섬의 길목마다 손맛 좋은 집과 전망 좋은 카페가 기다린다. 자동차로 섬을 달리다 풍경 좋은 구간에선 우선멈춤이다. 낯선 포구와 산길 어디든 걷기에도 좋다. 석모도 바람길이란 이름에 걸맞다. 다만 어쩌다 ‘유실지뢰 주의’나 ‘해안 출입금지’를 접하면 북쪽과 가까운 최전방임을 실감한다.
민머루해변과 언덕 너머 호젓한 장구너머항
어류정항에서 자동차로 5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석모도의 유일한 해수욕장이며 생태관광지로 지정된 민머루해변이 있다. 민머루해변의 고운 모래밭을 걸을 때는 푹푹 빠지는 발에 힘이 들어간다. 모래밭 군데군데 텐트 속에선 캠핑족의 정담이 두런두런 들린다. 조용히 캠핑 의자에 앉아 먼 바다를 바라보며 여유롭게 힐링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 또한 힐링이다. 물이 빠지면 드러난 갯벌 위로 생물들이 꼬물거리는 게 생생하다. 이럴 때 맨발로 갯벌의 감촉을 맛보아야 한다. 수십만 평의 드넓은 갯벌 위로 갈매기가 사람과 공존하는 바다. 특히 천연기념물 제205호로 지정된 저어새의 번식지이기도 하다. 건강한 생태의 보고다.
민머루에서 서쪽으로 언덕을 올라 넘어가면 자그마한 항구가 나온다. 산마루가 장구처럼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 장구너머항이다. 오르는 길에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민머루의 질박한 풍경이 운치 있다. 뒤엉킨 그물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고 갯벌 위엔 바닷새와 고깃배가 쉬고 있다. 방파제 부근의 횟집과 수산물 판매하는 가게 역시 한가롭다. 산과 바다와 갯마을이 그림처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민머루에 가면 빠뜨리지 말고 들러야 할 곳이다.
서해 풍광을 품은 사찰, 보문사
석모도 하면 천년 고찰 보문사를 누구나 떠올린다. 신라 선덕여왕 4년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보문사는 양양 낙산사 홍련암, 남해 보리암과 함께 이 땅의 3대 해상 관음기도도량이다. 문제는 오르막 입구부터 가파르다는 것. 대웅전 진입까지 10분 이내의 거리지만 숨이 턱까지 찬다. 정 힘들다면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승합차를 이용해도 된다.
사찰 마당에 들어서자 열반에 든 부처의 모습을 한 거대한 와불과 사리탑을 중심으로 오백나한이 맞는다. 옆으로 석굴암처럼 천연 동굴에 지은 석실은 보문사의 명물이다. 극락보전과 대웅전, 용왕전, 삼성각, 선방, 범종각 등의 문화재가 고색창연하다. 일반적으로 사찰은 그 역사와 유적으로 가치를 내세운다지만, 오랜 고목 아래서 땀을 식히는 이들에겐 그 앞마당에서 수백 년 자리를 지킨 향나무의 그늘이 고마울 뿐이다. 그리고 시야를 가리지 않고 바다가 내다보이는 서해 풍광이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보문사를 품은 낙가산은 그리 높지 않은데 가파른 오르막은 또 있다. 경사가 가파른 계단 400여 개를 올라야 닿는 보문사 꼭대기의 마애관세음보살이다. 이곳에선 이른바 눈썹바위 아래 새겨진 마애석불을 마주하고 앉아 경건하게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사람들을 늘 볼 수 있다. 기도발이 아주 좋은 곳이라 알려져 찾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서해의 노천탕, 석모도 미네랄 온천욕
보문사에서 자동차로 3분 거리에 뜨거운 해양 심층 온천수가 솟아난다. 입구에 들어서니 가족과 함께 온 어린아이가 앞서 달려가며 말한다. “난 여기 오는 게 제일 좋아.” 아이들에겐 따끈한 물놀이일 수도 있겠다. 온 가족이 온천탕에 발 담그고 앉아 몸과 마음을 씻고 마음의 안정을 취하는 시간이다.
강화 석모도 미네랄 온천탕은 바다와 인접한 노천탕으로 매일 천연 원수만 사용한다고 한다. 60℃가 넘는 특급 온천수다. 노천탕뿐 아니라 황토방, 족욕탕, 실내탕이 따로 있다. 관절염, 근육통, 아토피피부염 등에 효험이 있으며,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즐기며 피로를 날려버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무엇보다 눈앞에 바다가 펼쳐져 노을이 질 무렵에는 노천탕에 몸을 담근 채 환상적인 풍광에 푹 빠질 수 있다.
숲은 이제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숲 기운을 받으며 산책하고 사랑스러운 장미터널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수목원은 석모리 일대 계곡을 따라 천혜의 자연환경을 품었다. 특히 숲 체험 프로그램으로 목공예 체험학습을 진행하고 갖가지 테마식물원, 생태체험관, 전시온실 등 테마별 탐방을 하며 자연을 관찰하고 배우는 시간을 갖는다. 산과 바다가 공존하고 숲과 자연을 교감하는 기회다.
수목원 입장료는 무료다. 예까지 왔으니 자연휴양림 숲속의 집에서 하루나 이틀쯤 머물며 푹 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터. 이제 초록초록한 색감 속으로 들어가는 초여름이다.
자동차로 석모도 당일 여행
서울 기준 자동차로 1시간 30분~2시간
주소 인천시 강화군 삼산면 석모리 산 154-1
여행 코스 석모대교→(2분)나룻부리항→(3분)어류정항→(10분)민머루해수욕장→(10분)보문사→(2분)
미네랄 온천→(10분)석모도수목원
언덕을 오르면 무슨 일이 기다릴까. 종로구의 그 골목으로 접어들면 거대한 고목이 중심을 잡고 있다. 권율 도원수 집터의 은행나무다. 여름이면 주변을 시원하게 할 만큼 초록이 울창하고 가을이면 온 동네에 노란 은행잎이 흩날린다는 이야기다. 오래전 살던 집을 찾기 위한 단서로 붉은 벽돌집과 바로 이 큰 나무가 있는 은행나무골 1번지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딜쿠샤의 역사를 언덕 위의 은행나무는 지금껏 지키고 있었다.
거의 100년 전 개인의 공간이 당시와 거의 흡사하게 복원되었다. 딜쿠샤는 그 시절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에 있던 저택으로 3.1 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AP통신 특파원 고 앨버트W.테일러(Albert Wilder Taylor)와 메리L.테일러(Mary Linley Taylor)부부가 살던 집이다.
두 외국인 부부의 취향이 가득 담긴 공간이 우리의 오묘한 역사의 흔적과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이야기가 깃든 딜쿠샤는 그 시절의 디테일한 분위기와 일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탈바꿈되어 공개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탄광 개발을 위해 아버지와 한국을 찾은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 출장차 일본에 갔다가 운명의 여인 메리를 만난다. 영국 출신 배우 메리와 1917년 인도에서 결혼을 하고 한국에서 신혼 생활을 하게 된다. 어느 날 한양도성을 산책하다가 은행나무골로 불리던 행촌동(杏村洞)의 은행나무에 반한 메리가 이곳에 집을 짓고 싶어 한 것이 딜쿠샤의 시작이었다.
1923년에 정초석을 세우고 1년 만에 완성된 딜쿠샤(Dilkusha). 이국적인 이름 딜쿠샤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 희망, 이상향'을 뜻한다. 부부는 인도에서 딜쿠샤라는 궁전을 보고 그들의 스위트홈이 완성되면 딜쿠샤라 할 생각이었다. 드디어 한국에서 정착해 살면서 창 밖으로 은행나무가 보이는 딜쿠샤에 살게 된 부부는 고통스럽고 혼란했던 시기의 한국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기업인이자 연합통신 특파원으로 고종의 장례식 취재를 의뢰받았던 테일러는 기사 내용에 3.1 운동을 추가하게 된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마침 아들 브루스가 태어난다. 메리는 출산 직후 세브란스 병원 창문을 통해서 고종의 장례 행렬을 보았다고 했다. 이때 병원에 왔던 테일러는 갓 태어난 아들 브루스의 침대 밑에 숨겨진 종이 뭉치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기미독립선언문이었다. 이것을 동생 윌리엄의 구두 뒤축에 숨겨서 도쿄에 가서 타전했고 마침내 뉴욕타임스에 3.1 운동 기사가 실리게 된 것이다. 이 뿐 아니라 테일러에 의해서 제암리 학살사건을 비롯해서 3.1일 운동을 제압하기 위한 일제의 각종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금광사업과 특파원으로 갖가지 일을 겪으면서 테일러 부부는 점차 조선에 깊은 애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위기가 찾아왔고 테일러는 구금되고 메리도 가택연금 상태가 되어 결국은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이 땅을 떠나게 된다.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캘리포니아에 상륙한 테일러는 줄곧 한국행을 꿈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1948년에 세상을 떠났다. 메리는 한국을 사랑한 남편의 뜻에 따라 테일러의 유해를 가지고 그해 한국을 찾아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딜쿠샤에도 들렀다. 앨버트 테일러는 현재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아버지와 함께 잠들어 있다.
이토록 다사다난했던 역사 속의 사실을 이들이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방인이었지만 한국을 사랑했고 위험 속에서도 한국을 위한 일을 서슴지 않았던 앨버트 테일러, 마지막 안식처로 한국에서 잠들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게 테일러와 메리 부부의 딜쿠샤가 잊혀 가던 중 아들 브루스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을 찾고 싶다고 한 것이다. 그동안 소유권이 몇 번이나 바뀌고 국가 소유가 되었지만 귀신이 나오는 집이라 불릴 만큼 방치되었던 집, 한국 전쟁 후 집 없는 많은 사람들이 버려진 딜쿠샤의 공간을 쪼개서 살았다고 한다. 2006년 66년 만에 딜쿠샤를 찾은 부르스는 이것을 보고 그동안 어려운 이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주어 감사해했다고 전한다.
이후 서울시는 딜쿠샤의 복원 및 재현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특히 메리는 다재다능해서 글과 그림이 뛰어나 남겨진 많은 그림과 기록이 전시되었고 그녀의 기록이 복원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테일러 씨의 손녀 제니퍼 린리 테일러는 딜쿠샤 관련 자료 1026건을 기증했다. 2018년부터 시작한 복원 작업 끝에 역사전시관으로 재탄생되어 2021 3월에 개관에 이르렀다. (2017년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등록)
1층과 2층의 전시장은 그들이 살던 1920년대의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파티나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던 1층은 거실 내부를 상세히 재현했다. 부부의 결혼과 입국, 한국생활을 보여준다. 메리의 그림이나 호박 목걸이 이야기도 전시되었다. 테일러가 메리에게 청혼할 때 준 호박 목걸이는 미국으로 추방되어 살면서 한국에서 살던 기억을 바탕으로 쓴 책의 제목이 '호박 목걸이'다. 그리고 금광 사진이나 금강산 여행을 그림과 기록으로 남긴 것들, 벽난로…. 모두 그들의 숨결이 깃든 추억들이다.
2층에는 테일러 부부가 여가를 보내는 공간이다. 영상으로 딜쿠샤의 복원 과정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전시물 중에는 메리가 한국의 주변 사람들을 그린 초상화가 인상적이었고 테일러의 언론활동 모습도 남겨져 있다. 한국의 병풍이나 고려청자, 램프나 테이블 등 동서양이 조화를 이룬 집안이 전체적으로 아름답다.
수많은 시간들을 견뎌낸 널찍한 거실의 창문으로 햇살이 환하게 들어온다. 당시에는 언덕 꼭대기 집이어서 멀리 지나가는 기차가 보이고 남산과 한강이 시원하게 들어오는 전망 좋은 집이었다는데 지금은 아파트와 건물들로 가로막혀있다. 다만 옆의 창문을 통해서 은행나무의 풍경은 고스란히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딜쿠샤는 종로구 사직터널 오른쪽 축댓길로 오르면 언덕 위의 2층 붉은 벽돌집이다. 이제는 복원되어 겉모습이 살짝 새것 느낌이 들긴 하지만 1923년부터 추방되던 1942년까지 테일러와 메리 부부 가족이 살던 100년 전의 테일러가(家)이다.
◇ 가는 길: 서울의 서대문역이나 독립문역에서 나와, 김구(金九) 선생의 사저였던 경교장(京橋莊)을 거쳐 돈의 박물관을 지나면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이 나타난다. 행촌 성곽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변을 오가는 이들의 여유로운 산책길이다. 월암근린공원에서 곧바로 나타나는 홍파동 언덕배기의 홍난파 가옥을 지나면 저 앞으로 400년이 넘는 수령의 우람한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그 은행나무에 마음을 빼앗겨 집터를 선택한 메리의 시선으로 나무를 바라보기도 하며 발걸음을 하다 보면 “DILKUSHA 1923” 명판이 새겨진 붉은 벽돌집 딜쿠샤가 맞아준다.
◇ 딜쿠샤 방문은 사전예약제로 진행한다.
- 예약 방법 :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 검색 → 딜쿠샤
https://yeyak.seoul.go.kr/web/reservation/selectReservView.do?rsv_svc_id=S210226112026774583
- 문의 : 딜쿠샤 전시관(070-4126-8853)
수덕사는 오래된 사찰이지만 종교와 상관없이 친숙함이 느껴진다. 낯선 느낌이 없다. 덕숭산 수덕사(德崇山 修德寺)라는 편액을 걸고 있는 일주문 주변을 둘러싼 고목들도 그저 오래 보아온 듯 덤덤하고 듬직하다. 경내가 시작되는 일주문을 넘어 유서 깊은 고찰의 기운을 받으며 고요히 걷는 맛 또한 편안하다. 이처럼 수덕사는 오래전 마을에 들어서는 듯한 기분이다.
어릴 적 가족들과 수덕사에 갔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아무리 떠올려봐도 내 기억 속의 수덕사는 지금처럼 큰 절은 아니었다. 어찌된 일인지 산속의 조그만 절로만 떠올려진다. 당시 절 마당에 들어서니 무슨 영화 촬영을 하고 있었고, 마침 내가 아는 배우도 있었다. 유난히 까만 눈과 얼굴이 어쩌면 저리도 하얗고 작은지 신기했다. 구경하다가 지나가는데 갑자기 영화 관계자인 듯한 분이 내게 와서 하는 말, 교복 입은 옆모습이 영화 속에 찍혔다는 것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막 중학생이었던 나는 수덕사에 교복을 입고 갔다. 그리고 정작 영화 제목도 모른 채 거길 나왔지만, 수덕사는 내게 늘 그날의 풍경으로 기억되고 있다. 괜히 떠올렸나 보다. 열서너 살의 쪼끄만 아이, 와락 그립다.
수덕사는 백제 침류왕 2년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경내에서 백제 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기도 했고, 학계에서도 백제 후기에 창건되었으리라 추정한다. 또한 관세음보살의 화신인 덕숭 낭자와 수덕 도령의 설화도 전해온다. 그리하여 수덕 도령의 이름을 따서 수덕사라 하고, 낭자의 이름을 따 덕숭산이라 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수덕사의 주불전인 대웅전은 멀리서 봐도 목조 건축의 숨결이 느껴진다. 수덕사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건물이다. 1937년 전면적으로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기록으로 고려 후기 1308년에 건축되었음이 밝혀졌다. 정확한 이 기록은 우리나라 목조 건축물의 연대를 측정하는 기준이라고 한다. 수백 년을 그 자리에서 버틴 꿋꿋함을 한 번쯤 쓰다듬어본다.
전각이 중심인 법당 대웅전은 무엇보다 형태미가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다. 고려 시대 목조 건축의 전형이라는 평이다. 특히 단청이나 전체적인 색감을 보수하지 않은 모습이 세월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군더더기를 배제한 수더분하고 단정해 보이는 겉모습이다. 거대한 세월 속에서도 나뭇결과 창호지의 숨결이 전해지는 듯하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정면의 창문이 미닫이거나 여닫이가 아닌 들려 있는 듯한 모습으로 독특하고 멋스럽다. 국보 제49호다.
수덕사와 세 여성 이야기
대웅전 옆으로는 관음전이 있고, 일엽 스님이 입적한 환희대가 다보탑을 앞세우고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일엽 스님을 기리고자 세운 원통보전이 보인다. 1896년 평안남도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이화여전 졸업 후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일엽 스님은 당시 여성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로 언론인, 시인, 수필가, 승려로서 삶의 흔적을 남겼다. 이토록 당차고 자유분방한 삶을 살다가 1928년 입산하여 1933년 만공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여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엽 스님이 수덕사의 견성암과 환희대에서 수도했던 사실은 지금껏 뭇사람들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또 한 여성은 나혜석. 사랑에 용감했고, 여성의 사회적 활동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당대 최고의 화가 다. 수덕사 입구에 있는 수덕여관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한때 시인 묵객들이 드나들던 사랑방과 같았던 여관이다.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로 화백의 고택으로, 지금은 임시 휴관 중이다.
일엽 스님과 나혜석 화가의 사연 말고도 수덕사는 또 다른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수덕사를 떠올리게 하는 유명한 옛 노래, ‘수덕사의 여승’. 원로가수 송춘희는 이 노래를 1966년에 불렀다. 수덕사라는 절 이름이 들어간 노래가 요즘 말로 대박을 치고 가수의 인생이 달라진 것이다. 송춘희는 현재 불자 가수 백련화라는 법명으로 팔십이 넘은 지금도 음성포교사로 나눔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임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 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경내를 걷다 보면 곳곳에 경사가 있어서 간간이 오르내리게 된다. 수덕사는 산이나 땅의 언덕을 깎거나 다듬기보다 그 높이를 그대로 활용했다. 유난히 층층이 계단도 많아서 걷다가 때로 숨찰 때도 있지만, 주변의 산과 계곡물이 자연스럽고 사찰과 함께하는 이 모든 게 하나의 자연으로 다가온다.
입구의 일주문과 부도전을 지나면서 금강문과 사천왕문, 화려한 건물의 황하정류, 범종각과 범고각, 세월을 말해주는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당당하다. 백현당 뒷길의 기도발이 잘 받는다는 관음바위에서 간절한 기도 한 번 하고, 대웅전 앞의 삼층석탑, 석등, 그 옆의 관음전, 환희대, 원통보전, 템플스테이, 1080 돌계단, 산 위로 올라가면 선객들이 줄을 잇는 정혜사 능인선원, 뚝 떨어진 견성암과 수많은 암자들…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이 많은 것들을 품은 제법 규모가 큰 사찰이다.
덕숭산의 정기를 이은 천년 고찰 수덕사, 내포 땅 가야산 남쪽의 덕숭산 중턱에 자리 잡고 무수한 이야기를 담은 절,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준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지금은 노래 가사처럼 인적이 드문 편이다. 차분하게 마음의 안식을 얻고 내려가다, 수덕사 주변의 산채나물과 더덕막걸리로 물씬한 계절의 내음을 느껴보는 것 또한 빠뜨릴 수 없다.
봄날 고택 나들이, 예산 추사고택
고택 툇마루에 앉아 봄볕을 쬐며 누리는 여유가 그리울 때다. 봄나들이를 고택으로 떠나는 것은 심신을 위한 선물이다. 어제의 시간 속에서 오늘의 내가 사색과 성찰을 얻을 수도 있다. 수덕사에서 조금만 달리면 조선 시대 대갓집 형태의 집이 나타난다. 선비의 고고함이 배어 있는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6칸 대청의 안채와 2칸의 안방과 건넌방, 부엌과 협문, 그리고 사랑채. 돌아보노라면 문설주와 기둥마다 추사의 글씨가 있고, 어디선가 묵향이 나고 추사의 기침 소리가 들릴 듯하다. 고택 왼쪽으로 천연기념물 백송과 함께 널찍한 잔디밭과 추사의 묘소가 시원하다. 그 옆에 자리한 추사기념관에서는 영상과 함께 추사의 업적과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화려함이나 스피드를 내세우는 시대다. 아찔한 익스트림 체험이나 출렁다리를 건너는 짜릿함을 강조한다. 그런 가운데 하루쯤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을 조절할 기회를 가져보면 어떨까. 슬로시티 예산 수덕사의 고적함에 이어 추사고택의 반질한 툇마루에 앉아 크게 호흡해본다.
예산 수덕사 &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예산 수덕사
주소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사천리 20)
041-330-7700
서울(남부 T)→예산터미널(07:20~19:05,
하루 4회, 2시간 10분 소요)
KTX(용산역)→천안아산역(05:20~20:30,
하루 13회, 37분 소요)
자동차 서울→서해안고속도로→대전당진 간
고속도로→예산·수덕사 IC→예산→국도 45호→
지방도 622호→수덕사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주소 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
041-339-8242 / 매일 09:00~18:00
왕궁리 유적지로 들어가면서 ‘여유롭다’란 말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유적지든 공원이든 시설물로 가득가득 채워지고 볼거리가 많음을 보여주려는 듯한 복잡한 풍경이 늘 아쉬웠던 터다. 널찍한 익산의 왕궁리 옛터엔 휑한 여백의 미가 팍팍, 신선한 바람 맞으며 헐렁한 여유감으로 벅차기까지 하다. 물씬한 황량함이 어쩐지 더욱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그 넓은 터에 혼자 온 듯한 여행자 두 사람만이 각자 이쪽저쪽에서 뚝 떨어져 호젓하게 둘러보고 있었다. 유난스러운 유적지의 시스템이 있을 법한데 여긴 그렇지도 않다. 딱히 꾸며진 모습 없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널널한 풍경이 된 역사 속을 걷는다. 관람 동선 안내문이 있지만 이 넓은 공간을 그냥 발걸음 닿는 대로 자유롭게 오가면 된다. 입구에서 호위하듯 고목이 숲을 이룬 길을 산책하듯 홀린 듯 걸으며 유적지를 돌아보는 맛,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멀리서도 홀로 오롯한 왕궁리 오층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포토존 프레임 안으로 바라보는 석탑 또한 기품 있다. 오랜 세월 너른 터에 우뚝 서서 품격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왕궁터를 돌아보건대 세련되고 웅장했을 백제 옛터다. 끊임없는 보존 노력으로 이제는 풍경이 된 역사 속에 서본다.
주변으로 몇 개의 건물터, 금당터가 자리를 지키고, 왕궁 둘레를 감아 도는 길에 단을 높인 대형 배수로의 흔적도 보인다. 왕이 휴식하던 후원과 공방, 화장실까지 옛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도록 조성했다는 설명서를 읽으니 그 시절 장인들의 디테일한 기술이 놀랍다. 이런 길을 따라 궁궐과 정원의 멋을 누렸을 백제 시대의 영화를 마음의 눈으로 그려보고 상상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공주, 부여와 함께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지구로 당당히 자리 잡은 후에도 여전히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천년 넘는 역사 속의 백제 문화유산은 무궁무진할 터.
왕궁리 유적 옛터에 내리는 노을을 보러 저녁 시간에 다시 와볼 생각이었는데 딴전 피우다 결국 그러지 못했다. 일몰이든 일출이든 천년이 훨씬 넘는 왕궁터가 배경이 되어준다면 그 풍경은 더 말할 게 없을 듯하다. 푸른 하늘과 늦가을 왕궁리의 조화가 이렇게나 멋진데, 날씨 따라 변화하는 백제 옛터 왕궁리의 사계는 또 어떨까.
미륵사지 석탑이 품은 이야기
왕궁리 유적지에서 미륵사지 석탑까지는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다. 정문에 들기 전에 ‘미륵사지 미디어아트 쇼’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게 뭐지’ 하면서 보고 있는데 이 지역 주민인 듯한 분이 지나다가 얼마 전에 진행된 행사라면서 참 볼 만한 쇼였다고 말해준다. 미륵사지 석탑 동·서쪽에 프로젝션 매핑 및 드론을 이용해서 다양한 빛과 형상을 표현하고 음악을 활용한 종합 미디어 쇼로 구현된 행사였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익산 지역의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인 미륵사지 석탑의 가치 확산과 관광 활성화를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입구에 들면서부터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이렇게 너른 대지에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모습이 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보았던 미륵사지 석탑, 백제 시대 최대 사찰이던 미륵사지는 국보 제11호다. 원래는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절반 이상이 붕괴된 모습이다. 그동안 꾸준히 보강하고 섬세한 복원 작업을 해온 결과, 지금은 미완의 6층 석탑으로 우뚝 서 있다. 복원 작업 중 해체 수리하면서 내부에서 사리장엄구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현재 내부는 입장할 수 없다.
우리의 기술로 거의 완벽하게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 옛 석탑을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개방해 들어가 보았더니 시원하다. 그 서늘함이 그 옛날의 기운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길 양옆의 연못이 차분하다. 연못 속으로 비치는 석탑의 반영이 오랜 세월 속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거길 지나 미륵사지 앞마당에는 동·서 방향으로 당간지주 두 기가 서 있다. 다가가 보니 생각보다 매우 크다.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당간은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놓는 돌기둥이다.
미륵사지 주변으로는 큼직한 돌이나 파편들이 몇 군데 자리 잡고 있는데 석탑의 노반 덮기 돌이라고 한다. 동원 금당터가 있고 몇 군데 터마다 목탑이나 석탑이 있었지만 화재로 사라지기도 하고 지금은 이렇게 기단만 남아 있는 상태다.
집에 와서 사진을 정리하다 유적지를 돌아보는 젊은 커플이 내 사진 속에 몇 번씩 담긴 걸 보았다. 널찍널찍한 터에 스며 있는 역사적 사실을 꼼꼼히 살피며 다니는 모습을 보며 참 예쁘구나 했다. 한적한 미륵사지 터를 돌며 데이트하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그저 그림이다. 백제 유적지의 풍경 속에서 그들만의 하루는 참 멋진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그뿐일까.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지나가는 가족의 모습 또한 아름답다. 이렇게 가족과 나들이하며 우리의 문화유산을 접해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즐거움일 것이다. 특히 백제 무왕의 흔적이 가득한 익산의 모습을 보려면 이곳 미륵사지를 빠뜨릴 수 없다.
한옥마을에서 호젓하게 하루
익산으로 떠나면서 그곳의 숙소를 검색했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어찌된 게 이 시기에 빈방이 없다고 나오는 곳도 제법 있다. 시내를 벗어난 곳의 숙소를 클릭해보았더니 한옥 숙소가 있다. 이름도 낯선 ‘함라’라는 곳에 위치했다. 일단 통화를 해보았다.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예약을 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익산시에서 20~30분 정도 달려 해질 무렵에 도착한 ‘함라마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통 보이지 않는다. 한적하고 조용하다. 체크인하고 밖으로 나와해 저무는마을 골목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농촌 지형을 그대로 살린 울퉁불퉁 돌담길의 자연스러움, 토담에 매달린 주먹만 한 호박과 노란 호박꽃, 가을을 알리는 담쟁이들의 뒤엉킴…. 알고 보니 토석담이 주를 이루는 함라마을의 이런 토담, 돌담, 화초담 등의 전통 담장이 등록문화재 제263호라고 한다.
그리고 시·도문화재로 지정된 함라 삼부자집의 조해영 고가, 김안규 가옥, 이배원 가옥 사랑채는 오래된 전통 가옥으로, 토석 담장과 한옥 기와지붕이 어우러진 전통적 경관이 볼 만한 곳이다.
함라 삼부자가 베푼 인심은 호남을 대표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숟가락 하나만 있으면 배고픔을 면할 수 있고 노잣돈까지 얻어 갔다는데, 당시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들이었다고 전한다.
이른 아침에 눈을 떠 아무도 없는 마당에 서니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정원의 꽃들이 선명하다. 풀잎에 아침 이슬이 송송송… 잔디 마당을 걸으니 운동화가 촉촉해진다. 관리동 어르신이 지나가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시며 이 먼 데까지 뭐하러왔냐신다.이렇게 조용한 거 처음이라니까, “조용하기로야 예가 절간이지 뭐” 하신다. 더러 시끄러울 수도 있을 테지만 하루 있는 동안 정말이지 한 점 소음이 없었다.
마을 바로 위쪽으로 함라향교가 마을을 품듯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조선 세종 19년에 세워진 함라향교는 겉으로 보기에도 아주 오래된 느낌이다.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쌓였지만 여전히 실용적인 향교로 건재한 채 지금껏 이어져오는 듯했다. 어르신도 말하신다. “이게 우리 아버지 때도 있었던 향교지요. 그때도 지내던 제를 지금까지 빠짐없이 이렇게 지냅니다.” 점잖고 선한 인상으로 꼭 존대어를 하신다.
한옥 숙소엔 도문대작이라는 식당이 있다. 허균(許筠)이 함열 유배 시절인 광해군 3년, 전국 팔도의 식품과 명산지에 관해 정리한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저술했다고 한다. 함열관아 객사터 가까운 곳이 허균 선생의 유배 생활공간이었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바탕으로 이곳 함라 숙소의 식당 이름이 ‘도문대작’이다. 정이 넘치는 마을분들이 차려주신 수수한 한 상으로 흐믓했던 아침 시간이다.
그냥 시내의 흔한 숙소에서 묵었다면, 따끈한 온돌의 맛도 모르고 덜컹거리는이중 창호문여닫이도 못 해봤을 것이다. 아침 이슬 촉촉한 담장이 이어진 멋진 아침 산책도, 새벽 정원의 이슬도, 정다운 아침밥상도, 점잖으신 향교 어르신도 못 뵈었을 텐데. 교외로 조금 더 달려가서 묵은 조용한 한옥마을의 하루가 기억 속에 이렇게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호젓해보기의 진수, 익산 여행은 확실한 힐링이었다.
지금은 방송 종료되었지만 '간이역'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자그마한 소도심을 지나는 기차역의 아련함이 누구에게나 마음속의 추억처럼 자리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 간이역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였다고 한다. 이제 간이역은 시간 속의 이야기가 켜켜이 스민 폐역이 되어 아날로그 감성을 소환한다. 오랜 시간 기차가 달리지 않아 녹슨 철길은 때론 사색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잔잔한 풍경 속에서 인생 샷을 담아내는 곳이 되었다.
남원의 구 서도역은 전라선 기차역이었다. 1934년에 역무원 배치를 시작해서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로 역사(驛舍)를 신축 이전했던 서도역이 차츰 간이역으로 격하되었다가 폐역이 된 것은 10여 년 전 일이다. 그 세월의 이야기를 간직한 자리에 봄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 그리고 겨울이 흐르고 있는 중이다.
1930년대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채 구 서도역 목조건물의 간이역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래서인지 근래 들어 영화 동주, 미스터 선샤인, 해어화 등의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로, 뮤직비디오 촬영과 유명 모델들의 화보 촬영으로 부쩍 재조명받고 있는 곳이다. 사실 서도역은 그 이전에 최명희의 소설 '혼불'이 시작되는 장면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둔 채 그 자리를 지킨 덕에 문학적 공간이 되기도 하고 시대적 묘사에 무리 없이 잘 어울린다.
남원의 숨은 보석 10선 서도역이라는 하트 표지판을 지나 역 내부로 들어가 본다. 역 대합실에는 그 시절 삶의 애환을 함께 했던 기차역의 이야기를 필름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미스터 선샤인의 유진 초이 복장과 촬영장의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들여다보면서 드라마와 영화의 추억이 스멀스멀할 것이다. 대합실 밖으로 나가면 역시 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고애신과 행랑아범, 함안댁이 걸어 나오고 철로 목조 위에 앉은 구동매가 아기씨와 나누던 대화, 이렇게 다시 뵙습니다. 아기씨. 이 새벽 기차역에서... 절에 다녀오는 길이네. 그들의 당당하거나 애잔했던 눈빛. 이곳이었구나... 드라마의 힘은 아주 세다.
그 옆 서도역 역사관의 옛 책을 한번 뒤적이고 풍금도 눌러보고 나오니 젊은 커플들의 사진 촬영이 한창이다. 그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방향을 돌렸다. 서도역이 소설 혼불의 첫 배경이다 보니 작품 속의 내용을 표현한 정크 아트 길이 이어져 있었다. 덕분에 잠깐 작품 속의 몇 줄씩을 읽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기차가 다니지 않아서 마음 놓고 이리저리 다닐 수 있어서 좋다. 오래전 기차가 멈춘 녹슨 기찻길은 직선과 곡선과 원형의 철길이 독특한 곳이다. 메타세쿼이아와 등나무의 짧은 터널 옆에는 흰색으로 잘 단장된 역무원 관사가 있다. 그 옆의 역장 관사는 영화 동주의 하숙집으로 촬영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1930년대의 고풍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살려 다다미가 깔린 일본식 가옥으로 영화 촬영은 물론이고 체험학습도 하는 곳이다.
요즘 들어 옛 모습에 손을 대어 때 빼고 광낸 모습으로 변신시키는 생경함에 종종 놀랄 때가 있다. 적어도 구 서도역의 겉모습은 약 90년 전 모습을 살려둔 듯해서 정겹다. 서도역은 전라선이 신설되어 이전할 때 철거계획이었다고 한다. 이때 남원시에서 서도역을 매입하고 보수하여 지금의 고즈넉한 아날로그 감성의 문화공원이 된 것이다. 옛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철도 관련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몫 역시 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기차역, 고요한 이른 아침 운해가 몽글몽글하면 간이역과 더 잘 어울린다. 철길을 둘러싸고 있는 나이 많은 고목은 전라선 완공 당시 심었던 벚나무들이다. 눈부신 봄날의 서도역이 미리 그려진다. 바삐 걷다가 잠깐 다리를 쉬는 곳처럼 구 서도역은 남도 여행길에 빠뜨리면 서운할 그런 곳이다.
☞Info 구 서도역
♤주소: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길 32. 구 서도역영상촬영장.
♤문의처: ☎063-620-6165
♤교통: 남원역에서 523 버스가 하루 4회 운행. 대중교통 접근 불편. 택시나 자동차 이용이 편리하다.
♤휴무일 없이 연중무휴 방문 가능. 주변 1.4km 거리에 혼불문학관이 있다.
-최명희 작가의 숨결을 담다. 혼불 문학관
구 서도역에서 남쪽으로 자동차를 달리면 5분 거리에 혼불 문학관이 있다. '그다지 쾌청한 날은 아니었다'라고 시작되는 대하소설 ‘혼불’의 첫머리와는 달리 하늘은 푸르고 문학관은 평온하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1940년대 몰락해 가는 남원의 양반가 종부 3대(代)와 그들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그린 최명희의 소설 '혼불'. 그 소설의 배경이 되는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에 문학관이 자리했다.
돌계단을 오르면 널찍한 잔디마당이 방문객들에게 쉼을 안긴다. 문학관 내부에는 작가의 생전의 모습이 군데군데서 맞는다. 작가의 집필실로 재현된 방에는 유품으로 작품 일지와 만년필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펼쳐진 육필원고를 들여다보노라니 작가의 숨결이 느껴지면서 숙연해진다. 실내를 빙 돌다 보면 소설 속의 장면들을 디테일한 사진이나 모형으로 전시된 작품 속으로 한 걸음 들여놓게 한다. 그리고 작가와 친분이 있는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도 어느덧 누렇게 색이 바래가는 채로 보여주고 있다.
방송작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글에는 작가의 면밀한 내면이 스친다.
"너는 노트북 컴퓨터를 배워 이제 글씨는 안 쓰겠는데...... 나는 경향신문에 만년필을 쓰는 기쁨, 이라는 글을 썼단다. 나는 참 더딘 사람이다. 지난번에 말한 책도 이제야 부치고 내 살아온 생에 대한 자각도 이제 생기니 장자의 말이 절감이 된다. 行年 五十而知 四十九非. 나이 오십에 이르러서야 마흔아홉 가지가 그릇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혹은 안다, 는 이 한 절, 요즘은 이 말을 정말 깊이 생각해, 나의 非들. 얼음장처럼 가슴이 서늘해지지. 하지만 오십에 새 눈(芽)이 트이지 않았다면 어찌 四十九非를 말할 수 있으며 새 눈(眼)이 뜨이지 않았다면 제 그릇됨을 볼 수 있으랴... 그 芽와 眼이 새 희망을 준다."
약 6,000평의 문학관 건너편의 꽃심관이라는 한옥 쉼터에는 사랑실과 누마루가 있다. 건물 모퉁이의 정자에 올라 혼불문학관을 바라보며 소설 속 삶의 한 자락을 느껴볼 만하다. 살아생전 우리말을 사랑하던 작가 최명희 작가의 혼불. 작품의 어휘 하나하나 직접 취재하고 토속어를 찾아서 우리 문화의 정신을 문학 속에서 형상화했다고 한다. 혼불 속의 청호저수지 주변으로 울타리처럼 둘러있는 솟대들은 길게 목을 빼고 노봉마을을 건너다보는 듯하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던 기억 속의 간이역을 찾아 사람들이 온다. 작가의 숨결이 담겨있는 문학관에 들어 이 땅에 서린 삶의 한 자락을 가슴에 품는다. 전라도 남원고을에 가면 이렇게 쉬엄쉬엄 산책하듯 둘러볼 곳들이 기다리고 있다.
☞Info 혼불문학관
♤주소: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노봉안길 52.(입장료 무료)
♤문의처 :☎ 063-620-5744~46
♤운영시간 평일 : 09:00~18:00(매년 1월1일, 매주 월요일 휴관) 하절기(7월~8월) 09:00~18:00 동절기(11월 ~ 2월) 09:00~17:00
가을이라 해도 날씨는 여전히 온화하다. 강릉으로 떠나며 날씨를 검색해보았더니 기온이 뚝 떨어질 거라는 예보다. 환절기의 쌀쌀함을 즐길 때는 아닌 것 같아 머플러랑 니트를 주섬주섬 더 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릉은 언제나 따스했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고, 그곳은 언제나 따스하게 날 맞는다. 아마 앞으로도 또 그럴 것 같은 강릉.
명주동 거리, 강릉의 ‘핫플레이스’이라고 했다. 명주(溟州)는 신라 시대에 강릉을 이르던 지명으로 ‘바다와 가까운 아늑한 땅’이란 뜻이다. 1500년 전의 고도 명주는 예부터 문화·행정의 중심지이던 곳인데 강릉 시청이 옮겨가면서 한물간 구도시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런데 이젠 달라졌다. 구도심 귀퉁이 마을인 명주동 일대가 요즘의 레트로 바람을 타고 찾아가고 싶은 원도심으로 변신했다.
가을볕 아래 명주동 문화마을 천천히 걷기
강릉 대도호부 관아 건너편에서 시작해 그 주변 동네와 골목 한 바퀴를 느릿느릿 걸으며 시간 여행을 시작한다. 어릴 적 추억도 소환하고, 숨겨진 예쁜 가게를 발견하는 재미가 걷는 내내 이어지는 풍경. 드라마 시대극을 연상케 하는 오래된 주택과 상점들이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나미 명주. 시나미는 ‘천천히’ 또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을 뜻하는 강원도 말이다. 산책하듯 천천히 걷다 보면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공존하는 뉴트로 강릉의 모습이 보인다. 시공을 넘나드는 이 골목에서는 저절로 천천히 걷게 된다. 그게 오히려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벽돌담 모퉁이를 돌면 유년의 뜰에서 늘 보았던 백일홍이 옹기종기 모여서 피어 있다. 반쯤 열린 나무 대문 앞으로 한 무더기씩 뿌리내린 채 꽃을 피워 올린 소박한 식물들이 예쁘다.골목 여행을 하는 이들을 위한 주민들의 자발적 배려다. 저절로 따스함을 얻는다. 낡은 담벼락에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이 바른 글씨체로 세 줄 적혀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세월이 느껴지는 담장에 켜켜이 스며 있는 옛이야기를 느끼며 그 길을 걸어간다. 쭉 걷다 보면 빈티지하면서도 멋스러운 건물들이 간간이 눈길을 끈다. 담쟁이덩굴이 뒤덮은 ‘봉봉 방앗간’ 건물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장면으로 더 유명해진 집이다. 근처의 작은 공연장, 박물관, 예술마당, 프리마켓 등의 문화공간에 슬슬 가을 분위기가 덧입혀지는 중이다. 골목길을 걷다 잠깐 앉았다 갈 수 있도록 가게 앞에 의자를 놓은 인심이 더 멋진 풍경을 만든다. 그 의자에 한 번씩 앉아 사진을 담는 여행자들 덕분에 아예 포토존이 되기도 한다. 이제는 찾아가 보고 싶은 ‘인싸들의 강릉 여행지’가 되었고, 곳곳에 젊음의 생기발랄한 에너지도 풍겨난다.
오래된 건물을 현대적 감각으로 새 단장한 소박한 점포들, 골목상권의 소상공인을 여행자와 연결해주고 쇠락한 골목길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신구(新舊)가 공존하는 원도심 거리답게 옛집을 개조한 카페 ‘오월’의 격자무늬 창문 너머로 동네 할머니가 뒷짐 지고 걸어가시던 골목길 풍경 또한 가을볕에 아련하다. 정겨운 가을날이다. 강릉의 구도심을 온몸으로 느끼며 마실 가듯 천천히 느릿느릿 타박타박 걸었던 명주동 골목 나들이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
명주거리를 벗어나기 전에 건너편 강릉 대도호부 관아(사적 제388호)에 들어가 보는 것도 의미 있다.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곳이다. 강릉 임영관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객사문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안으로 들어가면 전대청이 있는데 '임영관'이라고 쓴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낙산사 가는 길에 들러서 쓴 친필이다. 현재 객사문은 이 터의 남측에 국보 제51호로 지정 보존되어 있고, 서측은 임진왜란 이후 경주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다 봉안했던 집경전(集慶殿) 터다. 해설사님의 해박하고 구수한 해설로 역사적 사실이 더욱 흥미롭다. 누구나 원하면 미리 신청해서 해설사님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 관아 곳곳에 우뚝 선 고목이 되어버린 은행나무는 가을이 한창이었다.
바다 언덕 위에 펼쳐진 예술 세계
이제는 시원한 바다를 보며 예술과 자연, 인간이 공존하는 전시 공간에서 감성을 충전할 때다. 묵은 스트레스도 날려버릴 시간이다. 강릉의 괘방산 자락을 배경으로 등명마을에 자리 잡은 ‘하슬라 아트월드’. 산과 바다와 하늘과 바람과 햇살이 함께하는 아트월드다.
조각가 부부가 힘을 모아 만들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새로움을 선보이고 있는 하슬라 아트월드. 하슬라는 고구려 때 부르던 강릉의 옛 지명이다. 현대 미술관, 아비지 갤러리, 터널 설치미술, 체험학습실, 피노키오 박물관, 마리오네트관 등 볼거리가 한가득이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가 터널을 통과하고 고래 뱃속 터널을 지나 지하 계단, 그리고 피노키오 전시관과 마리오네트 전시관까지 감상하는 내내 눈이 즐겁고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곳. 발길 닿는 곳마다 포토존이다.
해안 절벽 위에 위치한 야외 조각공원은 예술 정원으로 3만3000평의 드넓은 자연 속에 있다. 어딜 돌아보아도 산과 바다. 이처럼 바다가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 또 어딜지. 이어지는 스카이워크를 통해 다시 한번 자연을 만끽한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건강하게 로스팅한 산야초 커피를 마시는 것도 좋다. 문화예술 공간에서 하루나 이틀 쉬고 싶은 이들을 위해 아트월드 안에 호텔도 있다.
설화 속의 월화거리 즐기기
강릉을 떠나기 전 전통시장인 강릉중앙시장에도 잠깐 들러봐야 하지 않을까. 강릉역으로 가는 길에 들른 시장통엔 매스컴을 통해 이미 유명해진 아이스크림호떡과 치즈호떡을 맛보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맛집들이 즐비하다. 마늘빵과 닭강정 역시 인기여서 사람들이 찾아드는 모습이다. 군것질을 하며 시장 구경을 즐기다 보면 여행은 더욱 흐뭇하다.
중앙시장을 지나 KTX를 타러 가는 길목에 월화거리로 가는 화살표가 있다. 강릉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교동의 ‘월화거리’는 강릉 도심을 지나던 폐철도 부지에 조성된 공원 시설이다. KTX 강릉선 개통으로 강릉 도심 철도가 지하화되면서 옛 지상 철길은 유휴지로 남게 됐다. 강릉시는 기차가 달리지 않게 된 이 공간을 공원화한 것이다. 컨테이너로 이루어진 월화 풍물시장은 기존에 있던 시장을 리모델링해서 만들어졌다. 메밀전병이나 감자떡 등 강원도 토속음식은 물론이고 다양한 간식거리로 옛 분위기를 느끼며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월화거리는 강릉 월화정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 시대 화랑 무월과 강릉 지방 토호의 딸 연화는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경주로 돌아간 무월에게서 연락이 없고 연화는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상황에 처한다. 이에 연화는 산책하던 연못의 잉어에게 편지를 전달함으로써 두 사람이 다시 만나 혼인하게 된다는 것이 월화 설화의 주요 내용이다. 사랑의 메신저가 잉어라니. 무월과 연화의 이름에서 따온 월화정이 있는 이곳을 월화거리로 만들어낸 것이다. 걷는 내내 눈길을 끄는 갖가지 구조물이나 꽃 조형물들이 시민들과 여행자들에게 힐링을 선사한다. 강릉역에서 부흥마을까지 걸을 수 있는 길이지만 노선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조절하면 된다.
시장과 월화거리를 지나며 강릉역이 저편으로 보인다. 2017년 12월에 서울 강릉 간 KTX가 개통되면서 114분 만에 강릉에 도착할 수 있어 강릉 당일 여행이 쉬워졌다. 강릉선은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청량리-상봉-양평-만종-횡성-둔내-평창-진부-강릉 도착이다. 일상을 벗어나 바다도 보고 하루쯤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보고 싶을 때 강릉이 있다.
터를 닦고 기틀을 탄탄히 마련하면 전성기가 찾아오기 마련. 1대 김성식 씨가 터를 닦고, 2대 김용세 막걸리 장인이 기틀을 마련한 신평양조장은 당진평야에 고목(古木)처럼 자리 잡았다. 3대 김동교 신평양조장 대표는 양조장에 ‘문화’라는 색채를 입혔다. 문화의 힘이 날로 세지고 있는 요즘, 양조장도 전통주 문화를 발굴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통주 문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국내 양조 문화에 대한 개인적 아쉬움 때문이에요. 17세기 즈음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국가가 세금을 걷기 위한 수단으로 양조장이 생겨났습니다. 그 이전에는 양조장이랄 게 없었죠. 대신 집집마다 각자의 재료와 방식으로 빚는 가문의 술이 있었어요. 와이너리나 브루어리 같은 지금의 상업적 양조장은 근대화의 산물인데, 우리나라는 안타깝게도 자력으로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국내 양조장 역사가 짧고, 서양에 비해 덜 과학화됐죠. 대신 집집마다 고유한 술을 빚는 가양주 문화는 남았다는 것이 강점입니다.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에 전통주 문화를 알리고 널리 전파하기 위해 우리만의 강점으로 승부하자는 거죠.
어떤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나?
술만 빚는 것이 아니라 쌀과 술을 빚고 남은 부산물로 누룩전을 만드는 등, 술과 어울리는 전통음식 조리법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누룩전 만들기는 체험 프로그램으로도 발전시켰어요. 또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막걸리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두레를 만들어 함께 일하고, 술을 빚어 잔치를 벌이며 동고동락하던 우리네 농경문화를 새로이 답습하기 위함입니다. 다양한 교육·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고, 양조의 역사나 술의 의미를 인문학적으로 풀어 전달하려는 노력도 그 일환이고요.
연잎주 말고 새로운 술을 개발할 계획이 있나?
전통은 전통대로 두고, 현대인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술을 만들기 위해서 현재 연구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가양주를 빚는 분들을 찾아가 많이 배우고 있고요. 다른 양조장을 운영하는 분들이나 막걸리, 양조 전문가들과의 교류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연잎주를 두고 그리하셨듯, 저 또한 전통과 현대의 요소를 접목해 새로운 제품을 기획하려 하고 있어요.
미래의 신평양조장의 목표는?
전통주 문화의 성지로 거듭나고자 합니다. 프랑스의 와이너리나 독일의 브루어리 등 외국에는 오래됐지만 과학적으로 체계화된 양조장과 양조 문화가 자리 잡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경우 가양주 문화가 남아 있지만 상업적인 부분은 여전히 약합니다. 그래서 신평양조장과 막걸리를 통해 약점은 보완하되 강점을 더욱 살리려고 합니다. 와이너리나 브루어리 투어처럼 전통주 생산 과정을 견학하고 체험할 수 있는 전통 양조 문화 기반 관광 콘텐츠 개발에도 힘쓸 계획이에요. 근현대 양조 문화를 연결하고 계승하는 연결고리를 맡는 동시에 새로운 양조 문화를 제시하고 싶습니다.
습도가 제법 높았던 날이었다. 다녀온 지 시간이 좀 지났어도 머체왓 숲길은 아직도 가슴 깊이 스며들어 있다. 지금도 그 숲이 그대로 느껴지는 건 단지 안개비 뿌리던 날의 감성이 보태져서는 아니다.
햇살 쏟아지는 한낮이거나 숲이 일렁이며 바람소리 윙윙거리는 날이었다 해도 신비롭던 풍광의 그 숲은 여전히 내게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숲은 저만치서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수수한 풍치에 끌리듯 다가갔다. 거길 걷는 이들의 오롯한 순례는 머체왓이기에 가능했다. 빼곡했던 숲의 적막함 속으로 걸어 들어간 발걸음 소리마저 자연 속에서 일부가 되었다. 머체왓 숲은 그런 곳이었다. 오감이 열리던 그날의 시크릿한 숲의 언어를 기억한다.
머체왓 숲은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에 있다. 머체왓이란 낱말은 제주도민에게도 익숙지 않다. '머체'는 '돌이 엉기성기 쌓이고 잡목이 우거진 곳', '왓'은 '밭'을 의미하는 제주 방언이다. 이를테면 돌과 나무가 우거진 척박한 숲길이라는 뜻이다. 오르내림 경사의 난이도도 거의 없는 쉬운 길인데도 말 그대로 군데군데 이끼 낀 돌무더기가 있고 쭉 평탄하지는 않다. 제주엔 무수한 오름과 둘레길이 있지만 이처럼 손이 덜 탄 머체왓 숲길은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아 한가롭게 걸을 수 있다.
입구 안내판의 머체왓 숲 프로그램과 숲길 안내도를 들여다본다. 희망자는 체험 프로그램이나 숲길 탐방코스별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숲길은 두 개의 코스가 있다.
1코스는 머체왓 숲길(느쟁이왓 다리- 방애 혹- 제밤낭 기원 쉼터- 조록낭길- 전망대- 옛집터- 서중천 전망대(다리)- 숲터널- 올리튼물- 연제비도를 돌아 6.7㎞, 약 2시간 30분),
2코스는 머체왓 소롱콧길(방사탑 쉼터- 움막 쉼터- 편백낭 쉼터- 소롱콧 옛길- 중잣성- 편백낭 치유의 숲- 오글레기도- 서중천 습지- 숲터널- 전망대(다리)부터는 1코스와 중복되는 6.3㎞, 약 2시간 20분).
그 외 남쪽으로 3㎞의 서중천 탐방로가 있다. 진입하다 보면 저류지 공사를 하는 곳이 있어 코스를 조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머체왓 숲길은 지난번 태풍 복구 작업으로 탐방로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문을 걸어놓았다.
머체왓 소롱콧 숲길에 들기 전, 눈앞에 새하얀 메밀밭이 펼쳐졌다. 마치 이효석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문장처럼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한 그 광경이었다.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은 아니었지만 초입의 드넓은 목장지대 초원을 뒤덮고 자잘하게 피어난 메밀꽃이 비에 젖어 촉촉했다. 고립무원처럼 적막하던 숲에 젊은 남녀 한 팀이 들어서니 비로소 자연과 사람의 어우러짐이 조화롭다.
소롱콧길은 일대의 지형지세가 작은 용(龍)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코’의 의미는 ‘코지’, ‘곶’의 의미로 해석된다고 한다. 서중천 주변으로 흐르는 작은 하천 둘레로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서 피톤치드의 숲 내음이 늘 고여 있는 듯하다. 빼곡한 숲 틈으로 가끔씩 하늘이 열리고 조금씩 걸어 들어갈수록 청정 숲은 마치 제주의 속살로 파고드는 듯 신비로웠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초원을 지나 온통 숲인데도 돌담이 가끔 보였다. 밭을 둘러친 돌담을 밭담, 무덤 둘레의 돌담을 산담이라 하는데 경계를 짓기 위함이라고 한다. 집과 집을 구획하는 울담, 전통 초가의 외벽에 쌓은 축담 등 역할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지닌 돌담들은 경계의 의미를 넘어 있는 그대로를 삶 속에 끌어들인 제주 사람들의 혼이 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밭 한가운데 돌담이 둘러친 묘지가 독특했다. 자손들이 밭을 매다가 "할무니이~" 하고 불러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잠깐 쉬면서 할머니에게 가슴속에 담아둔 고자질도 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에 돌무덤이 어쩐지 정겨워 보였다.
조금씩 비바람이 불기도 했지만 숲길은 고요했다. 이끼와 고사리가 자라는 길을 걷다가 오래된 고목 아래 펼쳐진 젖은 평상에 앉아봤다. 이따금씩 이렇게 쉼터가 나타나고 숲놀이를 할 수 있도록 배려된 공간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나무에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고 길 옆 아래에선 저속으로 흐르는 서중천의 물소리가 들려왔다. 숲의 운치와 편백나무 향의 상쾌함으로 머리가 맑아지는 게 느껴진다.
가만히 앉아 바라보는 숲과 초원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된다. 어디서든 바다를 볼 수 있는 제주에서 이렇게 작은 냇물을 끼고 걷는 소소한 맛이라니, 그저 좋다. tvN 예능 프로그램 '바퀴 달린 집'에 머체왓 숲이 나왔을 때 배우 공효진이 "여기 가만히 있으니까 정신이 사납지 않고 너무 좋다"라고 말했다니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미지의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신비로운 숲, 인적 없이 적막해도 생동감이 넘친다. 곳곳에서 꿈틀거리는 생명력도 느껴진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건강한 기운이다. 마음껏 숨을 쉬어도 안전한 곳. 자연이 주는 자비로움에 둘러싸여 복 받은 느낌이다. 요즘 너무 흔해져버린 힐링이란 말을 이곳에서는 쓰고 싶지 않다. 머체왓이나 소롱콧처럼 제주만의 토속적인 말이 따로 없을까. 초원, 꽃, 나무, 하늘, 구름, 빗방울, 돌, 물, 바람까지 제주 근원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는 숲이다.
이토록 순수한 머쳇골에도 제주의 역사가 서려 있음을 상기할 일이다. 진입로에 들어서자 시비가 눈에 띈다. 비석에 '시비를 세우는 뜻'이라는 글이 있다. "한남리 머쳇골은 제주 역사 속에 '잃어버린 마을이다'. 초등학교 시절까지 머쳇골에 살았다는 문태수(78세) 씨는 ‘4.3 이전까지는 조상 대대로 대여섯 가구가 목축업을 하며 살아왔다’라고 회고했다. 오승철 시조시인은 머쳇골 집터의 무늬, 4.3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터무니 있다'라는 시로 2014년 오늘의 시조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에 한남리 주민들과 서귀포문인협회에서는 '잃어버린 마을'의 기억을 복원하고 제주 역사의 한 페이지로 복원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다. 이것은 뜻있는 다양한 작가들의 재능기부로 제작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오승철 시조시인의 시 '터무니 있다'도 새겨져 있다.
홀연히/ 일생일획/ 긋고 간 별똥별처럼/ 한라산 머체골에/ 그런 올레 있었네/ 예순 해 비바람에도 삭지 않은 터무니 있네// 그해 겨울 하늘은/ 눈발이 아니었네/ 숨바꼭질하는 사이/ 비잉 빙 잠자리비행기/ 중산간 마을 삐라처럼 피는 찔레// 이제라도 자수하면 이승으로 다시 올까/ 할아버지 할머니 꽁꽁 숨은 무덤 몇 채/ 화덕에 또 둘러앉아/ 봄 꿩으로 우는 저녁
아름다운 제주가 아픔의 땅이기도 한 것을 숲길을 잠깐만 걸어도 알 수 있다. 원시의 자연을 내어주며 쉬다 가라고 숲은 말하지만 그 안에는 뼈아픈 통증도 새겨져 있다. 발걸음을 늦추고 놀멍, 쉬멍, 걸으멍 정글 탐험하듯 미로와 같은 길을 걸으며 그들을 기억한다. 머체왓의 생생한 자연 속에 풍덩 빠져서 치유의 시간을 만나며 삶의 에너지를 얻고 가벼워지는 곳, 기어이 다시 올 수 있도록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의 한 구절처럼 또 다른 길을 남겨두었다.
*머체왓 숲길 방문객지원센터: 서귀포시 남원읍 서성로 755
주변에 가볼 만한 곳과 맛집
△머체왓 식당
머체왓 식당은 머체왓 숲길 지원센터와 같은 건물에 있다. 주변엔 식당이 없고 오직 여기뿐이다. 그렇다고 밥상이 허술하지 않다. 오리백숙이나 옥돔구이 정식처럼 한상 차림도 있지만 단품 메뉴도 있다. 반찬이 깔끔하고 정갈하다. 맛도 괜찮다. 줄 서서 먹는 맛집보다 이렇게 그 자리에서 길 가던 사람에게 먹을 만한 밥 한 끼 내어주는 집이 정겹다. 머체왓 식당이 그런 곳이다(머체왓 숲에 들면 음주가무, 흡연, 음식물 반입, 취사 행위가 금지된다). -서귀포시 남원읍 서성로 755
△보룡제과
성산읍으로 나오면 시내에 유명한 빵집이 마주 보고 있다. 그중 보룡제과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오랜 역사를 보여주듯 클래식한 빵집의 분위기가 친근하다. 시그니처 마늘바게트를 비롯해 가격도 합리적이고 서비스도 후하다.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2747-28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글라스 하우스’
머체왓에서 성산으로 나왔다면 섭지코지에 한번 들러보는 건 어떨지. 성산일출봉 옆 섭지코지는 제주엘 가면 누구나 가보는 곳 중 하나다. 게다가 영화나 드라마 촬영 단골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에 멋진 건축물이 제주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바로 글라스 하우스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축물이 제주에 제법 많은데 그중 글라스 하우스는 제주의 자연과 풍광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제주의 햇살과 바다와 바람을 은유적으로 시각화했다는 건물 앞에서 인생 샷을 찍거나 실내의 전망 좋은 카페에 들러봐도 좋다.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46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시비(詩碑) 거리
성산포를 사랑한 이생진 시인의 시비공원이 성산포 해안에 조성되어 있다. 성산 일출봉이 건너편으로 보이고 제주의 바닷바람과 햇살이 시비 위로 뿌려지는 곳. 오가는 이 별로 없는 그 바닷가에 지나듯 들러 시인의 시를 천천히 읽어본다면 여행의 기억이 더 풍성해진다.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 305-1
※ ‘운수 좋은 날’은 운세 전문 사이트 '운세사랑'으로부터 띠별운세 자료를 제공받아 읽기 쉽고 보기 좋게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
◈ 쥐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작은 일이 큰일로 나타나니 미리 조심하라. 눈앞에 이익만을 생각하다 후에 화를 입을 수 있으니 신중히 결정하는 것이 길할 것이다. 성급한 속단은 금물이니 자중하라.
•84년생 : 답답한 하루이니 가던 길을 조용히 감이 재수를 부르는 길이다.
•72년생 : 재운이 침체되고 머리 아픈 사건이 생길 조짐이니 단속하라.
•60년생 : 요행수는 무리이고 공들인 만큼은 들어오는 운이다.
•48년생 : 재수는 좋으니 어떤 일에 나서기보다는 바보가 되면 얻음이 크다.
◈ 소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하, 건강운 : 상)
오늘의 일진은 믿고 살아야 하는데 세상이 어지러워 믿을 사람이 없으니 힘만 든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혼자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하다. 타의 손을 빌리고자 하나 귀인은 멀리있구나. 일신이 곤고해진다.
•85년생 : 재수는 길하나 친구 애정 문제가 힘들어 애먹는 운이니 잘 돌 보라.
•73년생 : 원앙 문서이니 초대받아 인연 생기고 재수도 길하다.
•61년생 : 문서 단속만 잘하면 재수는 대길하니 투자도 좋다.
•49년생 : 우선 할 일을 다하고 다른 일을 생각하면 잘 풀려 나간다.
◈ 호랑이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뜻밖의 일로 구설이 분분하니 어떤 일이 생기는지 잘 관찰하라. 예상하지 않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니 일신이 곤고해진다. 일을 행하기 이전에 잘 살펴봄이 길 할 것이니 망동하지 말라.
•86년생 : 어려운 고비는 넘어 갔으나 다시 성의를 다해야 뒤가 쉬운 법이다.
•74년생 : 연인과 다툼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다투면 큰 일이 생긴다.
•62년생 : 친구를 찾아봄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고 도움을 받는다.
•50년생 : 고목에 꽃이 피는 격이라 오래는 못 가니 속전 속결로 처리하라.
◈ 토끼띠 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용기와 힘을 줄 수 있는 좋은 말을 해보면 다 함께 좋으리라. 어려운 환경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일의 실마리를 찾을 것이니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말은 큰 힘이 될 것이다.
•87년생 : 친구에게 칭찬해준 일이 이제 나에게로 돌아오니 일이 쉽다.
•75년생 : 다정한 말 한마디가 막혔던 사이를 풀어주니 재수도 대길하다.
•63년생 : 재수는 없으니 오히려 말조심하고 지내면 무사하리라.
•51년생 : 두 마리 토끼를 쫓으면 한 마리도 못 잡으니 한가지만 충실하라.
◈ 용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모든 준비는 마음이 제대로 정리됨이니 안정되면 모든 것을 해낸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먼저 스스로를 잘 다스려야 할 것이다. 어지러운 마음으로 행하다 화를 당할 우려가 있다.
•76년생 : 좋은 일만 생기는 하루가 되니 마음을 활짝 열면 안 되는 일이 없다.
•64년생 : 초조불안은 하나 하나씩 해결기미가 보이니 안정하고 정진하라.
•52년생 : 사방에 문서가 난동하니 문서 도장을 조심해야 손해가 적다.
•40년생 : 좋은 새로운 연분이 생기는 운이라 만나보면 마음에 든다.
◈ 뱀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많이 있을 때 절약하는 정신을 살리는 것이 어려움을 당해도 이겨낸다. 재운이 기하여 많은 재를 취하게 될 것이나 후에 어려울 시기를 대비하여 저축하는 자세가 필요할 시기이다.
•77년생 : 주머니에 구멍난 듯 재물이 새는 운이라 출입에 신경을 써라.
•65년생 : 손재수가 붙어오니 두문불출하면 일부는 막을 수 있으리라.
•53년생 : 마음은 불편하더라도 주석을 만들어야 일이 풀려나간다.
•41년생 : 마음을 비웠다면 조용한 가운데 상큼한 일이 나를 반겨준다.
◈ 말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어려운 고비를 넘어보지 않으면 힘든 세상을 살아가기가 어렵다. 스스로를 채찍질 할 것이니 좀더 나은 미래에 대한 노력이 될 것이다. 다소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잘 이겨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78년생 : 좋은 방책을 찾기 전에 일에 무리하는 것을 먼저 삼가라.
•66년생 : 동료와 구설수로 마음은 불편하나 금전 면에 이익이 있다.
•54년생 : 가기 싫고 하기도 싫은 일도 해보니 예상외로 소득이 크다.
•42년생 : 힘 빠지는 일만 생기고 속상하는 일이 많으니 출입을 삼가라.
◈ 양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도리를 지킴은 사람이 살아가는 근본이니 잘 지키면 나에게 더 좋다. 인간관계를 돈독히 할 것이니 후에 길함이 함께 할 것이다. 자신의 사리사욕만 채우지 말고 두루 살핌이 길할 것이다.
•79년생 : 사고력이 떨어져 실수할 염려가 많으니 조심해서 진행하라.
•67년생 : 분통터지는 일이 생길 수가 있으니 사전에 미리 보완하라.
•55년생 : 주장도 누가 받아줄 때 하는 것이니 상황을 잘 살펴서 처리하라.
•43년생 : 터무니없는 일로 답답한 운세라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
◈ 원숭이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비가 오는 곳도 있고 맑은 곳도 있으니 희비는 엇갈리는 것이다. 길흉이 번갈아 있으니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잘 살피어 행하는 것이 길할 것이다. 세상사 사람 마음먹기에 달렸으니 노력하라.
•80년생 : 기분만 가지고 덤비면 힘드는 일이 많으니 잘 살펴보고 진행하라.
•68년생 : 오전은 흐리고 오후가 맑으니 어려운 일은 오후에 잡음이 길하리라.
•56년생 : 갈등이 심하니 모든 일에 냉각기를 가져봄이 해결의 근본이 된다.
•44년생 :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 기분이 안 좋아도 먹을 것은 먹고 생각하자.
◈ 닭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하늘과 땅 사이 넓고 좁음을 시시비비 말고 순응함이 득이 되리라. 일신에 곤고함이 찾아 들 것이니 망동은 금물이다. 구설과 시비가 분분하니 하루를 자중하며 보내라.
•81년생 : 이성으로 인한 망신수가 비치니 조심하면 재수는 안 막힌다.
•69년생 :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곳에 가지 마라. 시비가 사람 잡는다.
•57년생 : 울창한 숲도 겨울에는 앙상해지니 때를 읽을 줄 알면 능히 해결하리라.
•45년생 : 대접받을 일이 생겨 즐겁고 새로이 들어오는 것이 많다.
◈ 개띠 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어떤 일이든지 결단력을 필요로 하니 때가 되었을 때 내리는 것이다. 지지부지하다 흐지부지 되는 것과 같으니 적절한 시기에 빠른 판단력으로 길함을 받을 것이니 시기를 놓치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82년생 : 싸움에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니 지고도 이기는 법을 배우자.
•70년생 : 한 번은 크게 얻으리라. 어려운 결정에 이익이 크다.
•58년생 : 욕심을 내어보는 운이니 꾀임만 조심하면 재수가 대길하리라.
•46년생 : 문서 일이 조금 늦어지나 좋은 소식으로 일이 성사된다.
◈ 돼지띠 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어차피 한 번 시작한 인생이라 명분만 세운다면 어려운 일이 없다. 실리를 추구하기 보다 일신의 명예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후에 길할 것이다. 눈앞의 작은 실리는 명예를 실추 시킨다. 망동은 금물이다.
•83년생 : 묘수가 사람 죽이는 일이 되니 잔꾀를 부림은 화를 자초한다.
•71년생 : 잡힐 듯 하던 일이 어긋나니 새로 점검해봐야 길이 열린다.
•59년생 : 머뭇거림은 오히려 손해를 초래함이라 밀고 나감이 좋으리라.
•47년생 : 일은 잘 돌아가는데 돌아가는 만큼 소득이 안 오르니 답답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