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배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집 안에서든 집 밖에서든 내 편이 없어.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라는 말이 딱이지.” 20년간 국회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은퇴한 김상호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앞으로의 인생이 막막하기만 하던 어느 날, 치과 의자에 누워 임플란트 시술을 받다 문득 생각했다. ‘요즘은 기술도 좋아졌는데, 이빨이 빠졌다고 옛날만 그리워하고 있을 게 아니라 임플란트를 해서 새 이빨로 힘차게 살면 되지 않나?’ 김상호 씨는 그렇게 유튜버 ‘임플란트 타이거’로 새롭게 태어났다.
임플란트 타이거의 ‘내편TV’는 정부의 제도, 복지정책 등 몰라서 못 받는 혜택을 쉽게 설명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채널이다. 공문서에 쓰이는 언어에 익숙한 그로서는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전문 분야를 고른 셈이다.
“시니어나 저소득층 같은 사회적 취약계층은 유용한 정보를 모를 뿐만 아니라, 도움이 필요할 때 어디를 찾아가야 하는지조차 몰라요. 게다가 은퇴 후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부 정책이나 제도 관련한 용어를 읽기 어려워한다는 걸 알았어요. ‘이거 되겠는데’ 싶었죠.”
내편TV의 콘텐츠 제작은 영상이 주가 되는 타 유튜브 채널에 비해 간단하다. 조용한 환경에서 스마트폰으로 녹음하고, 자료가 되는 문서를 캡처해 화면을 구성하고, 거기에 녹음해둔 음성을 붙여 컷 편집을 하면 끝난다. 귀찮은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일명 ‘귀차니즘’ 성향 덕분에 개발해낸 포맷이다. 영상용 촬영을 안 해도 되니 어디서나 영상 제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 덕분에 언젠가 김 씨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한 달 살기를 한다 해도, 내편TV 콘텐츠는 계속해서 업로드될 것이란다.
내편TV의 성공 이후 포맷, 콘텐츠까지 그대로 따라 하는 유튜버가 왕왕 생겼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정보성 채널 1세대가 겪어야 할 숙명쯤이라 여기고 콘텐츠를 꾸준히 올리는 데에만 집중한다. 이를테면 여행 기간 내 올라가야 할 콘텐츠를 미리 제작해 업로드 일정을 예약해두고 여행을 떠나는 식이다. 이때는 미리 만들어야 하니, 5월의 종합소득세 신고 관련 정보처럼 시기를 타는 정보보다 그렇지 않은 것들 위주로 영상을 제작한다.
“제 채널은 코로나19로 사람들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로가 많이 사라지면서 역으로 수혜를 본 케이스죠. 그래서 당시에 우후죽순으로 내편TV의 형식을 따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처음에는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이제는 신경 쓰지 않아요. ‘처음이라 선례를 따라 해보는구나’라고 생각하죠.”
유튜브 코리아에서 선정한 유튜버 50인에 선정되었고, 내편TV 구독자 60만 명 달성을 앞두고 있는 김 씨는 새로운 정보 제공 채널 ‘어그래TV’를 지난 5월 개설했다. 그의 실제 지인들과 통화하며 나눈 음성을 따 영상화함으로써 생활 밀착형 언어로 생활 정보 혹은 시사 상식을 전달하는 것이 콘셉트다. 아직 성장세는 미미하지만 내편TV의 성공 경험을 믿고 꾸준히 운영해보려 한다. 조만간 보건복지부, 문화체육관광부 등 국가 부처의 국민소통실과 협업해 정책과 제도를 안내하는 영상을 만들 예정이고, 또 유튜버가 되는 방법에 대한 책을 내기 위해 원고 작업을 하고 있다. 튼튼한 새 이빨을 갖춘 호랑이는 도전을 멈출 기미가 없어 보인다.
바야흐로 인플루언서 시대. 누구나 도전할 수 있지만, 아무나 스타가 되는 건 아니다.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통찰력을 나누며 인생2막 스타를 꿈꾸는 시니어 인플루언서 3인 소개한다.
유튜브 ‘내편TV’ 임플란트 타이거(1969년생)
국회 공무원 출신 ‘임플란트 타이거’ 김상호 씨는 ‘내편TV’를 통해 정부 제도나 복지 정책 등의 정보를 알기 쉽게 제공한다. 최근 새로운 정보 제공 채널 ‘어그래TV’도 선보이고 있다.
유튜브 ‘강철헬스전략’ 강철진(1953년생)
수학교사 출신 강철진 씨는 ‘강철헬스전략’을 통해 시니어를 위한 운동 정보와 방법을 일러준다. 자칭 건강전도사로, 63세에 생활스포츠지도사 자격증까지 취득해 전문성을 더하고 있다.
유튜브 ‘꽃중년’ 허은순(1967년생)
아들의 권유로 패션 유튜브를 시작한 허은순 씨. 이제는 그의 콘텐츠를 기다리는 팬들도 생겼다. 삶의 기록처럼 유튜브를 하며 ‘나이 들수록 푸르게 살자’는 일종의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
#장면 1 자동차 안 : 그러니까 남편이지
모처럼 교외 드라이브에 나선 어느 부부. 조수석에 앉은 아내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며칠 전 OOO 교수가 쓴 글 봤어요? 그동안 참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번 글은 좀 실망이네요. 균형감을 잃었고,너무 부분적으로 알고 섣불리 판단한 것 같아요. 팔로어 많다고 자랑하는 것도 좀 그렇고….”
“그래? 나도 그 글 잠깐 봤는데 전혀 그렇게 생각되지 않던데. 그리고 한 번 정도 갖고 실망하고 성급해 보이네, 당신. 그분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데.”
이렇게 시작된 논쟁에 점점 불이 붙습니다. 말을 할수록 아니꼬워진 아내는 그 사람 안 좋은 점만 들추어내려 애씁니다. 상대가 여자 교수라 더 기분이 나빠진 건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입니다.
“아니, 당신은 그 여자 책 한 권도 안 읽고 일면식도 없으면서 평생 같이 산 나보다 그 여자 편을 들어요? 그렇게 잘 알아요?”
급기야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맙니다. 외출을 망치고 집에 돌아와 생각할수록 분이 풀리지 않는 아내. 왜 내 편을 안 드느냐고 실컷 따지고 싶은데 치사해서 참으려니 속이 말이 아닙니다. 흥! 그러니까 남의 편, 남편이라 그러는 거지!
#장면 2 형광등을 가는 참 딱한 내 편
화장실 등이 나가자 평소와 달리 자기가 갈아주겠다고 큰소리 치는 남편. 요즘 전등은 가는 방식이 까다로워 해보지 않으면 헤매기 십상입니다. 이렇게 해봐도 저렇게 해봐도 뚜껑조차 열리지 않아 땀을 뻘뻘 흘리는 남편. 팔짱을 끼고 옆에서 얼마나 잘하나 지켜보던 아내가 참다못해 “이리 주고 그만 의자에서 내려와요!” 명령을 합니다.
희한하게도 쌔가 빠지게 돈 벌어다주는 남편은 밉고, 허구한 날 돈 갖다 쓰는 자식새끼는 예쁜 법입니다. 퇴직한 남편이 은행 일, 살림살이 물을라 치면 ‘그것도 못 하냐, 그것도 모르냐’며 통박에 구박을 얹어 핀잔하기 일쑤입니다. 반면 자식이 세상 물정, 시시콜콜 온갖 문제 물어보면 세상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답하는 우리 아내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장면 3 부부 동반 모임
“닥쳐.” 앞자리에 마주 앉은 부부 중 아내가 남편한테 큰소리를 냅니다. 순간 좌중이 고요해지고, 나머지 부부들은 그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놀라서 서로 얼굴을 쳐다봅니다. 남편이 한 얘기가 가당치 않다고 그랬다는데, 남들 앞에서 그 정도로 남편을 모욕하는 아내가 집에서는 얼마나 남편을 잡을지 안 봐도 뻔합니다. 심지어 70대 부부로 이뤄진 친목 모임에서 그랬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입니다.
깜짝 놀라셨나요? 아니 우리 부부 얘기를 어떻게 알았냐고요? 이 세 장면은 주변에서 직접 겪거나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열두 번째 마음 미장공은 부부 싸움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댁의 남편은, 댁의 아내는 안녕하십니까?
님 놈 남 : 님이 남이 되는 순간
1992년 세상에 나온 이 노래, 가사부터 살펴볼까요?
도로남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고
님이 되어 만난 사람도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 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
가슴 아픈 사연에 울고 있는 사람도
복에 겨워 웃는 사람도
점 하나에 울고 웃는다
점 하나에 울고 웃는다 아 인생
돈이라는 글자에 받침 하나 바꾸면
돌이 되어버린 인생사
정을 주던 사람도 그 마음이 변해서
멍을 주고 가는 장난 같은 인생사
가슴 아픈 사연에 울고 있는 사람도
복에 겨워 웃는 사람도
정 때문에 울고 웃는다
돈 때문에 울고 웃는다 아 인생
정곡을 찌르는 노랫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도로남’이 되려면 그 사이에 ‘놈’이 되는 과정을 거칠 때가 많습니다. 최근 일반인 부부들이 겪는 실제 갈등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화제입니다. 출연한 사람들 연령대에 관계없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바로 말입니다. 서로를 부르는 말, 특히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말에 화들짝 놀랍니다. ‘야’, ‘너’는 다반사고 말끝마다 ‘X새끼’, ‘XX새끼’ 소리가 따라다닙니다. 심지어 자녀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말합니다. 말이 짧아지면 마음도 짧아지고, 그러다 몸도 상처로 골병들게 마련입니다.
살리는 말, 죽이는 말
우리는 말로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서로 나눕니다. 말이 없는 부부도 문자메시지는 주고받습니다. 말, 글, 언어를 떠나서 소통하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가족과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이 가진 힘은 큽니다.
‘체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말이 씨가 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등 말에 대한 속담이 참 많습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법정에서 증언 한마디가 무죄 판결을 끌어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를 내 마음 밭에 뿌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이 던진 말을 그냥 흘려보냈으면 큰 사달이 나지 않을 텐데, 그 말을 내 마음 밭에 툭 떨어뜨려 씨를 뿌리는 순간 그 말에 뿌리가 생기고 줄기가 뻗어나가고 잎이 생기고 결국 열매를 맺어 그 말대로 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요?
누가 나쁜 말을 하더라도 우리 마음 밭에 뿌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쁜 말이 자란 가시덩굴에 긁히고 찔리지 않도록 아예 마음 밭에 들이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남도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남의 편을 진실한 내 편으로 만들어 서로 지키고 살리는 지름길은 없을까요?
말 한마디, 언덕
나를 살리고 남도 살리는 비법은 바로 말에 덕(德)을 붙이는 것입니다. 덕 중에서 가장 큰 덕이 바로 ‘언덕’(言德)입니다. 덕을 베풀려면 보통 물질이나 자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돈 한 푼 안 드는 게 이 언덕입니다. 또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습니다. 말에 덕을 붙이면 그 사람도 잘되고, 그 말을 하는 나도 덩달아 잘됩니다. 덕과 득이 되는 말이 있고 독이 되는 말이 있습니다.
덕(德)이라는 글자는 누군가를 도와 혜택을 받게 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득(得)도 마찬가지로 화폐를 손에 쥐고 있는 모습, 즉 재물을 획득한 모습을 뜻합니다. 덕과 득은 비슷한 의미를 지닙니다. 말에 덕을 붙이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을 잘되게 하는 것, 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언덕(言德)은 덕담(德談)과 일맥상통합니다. 남 잘되기를 비는 것이 덕담이니까요. 생판 남을 만나서 님이 될지, 놈이 될지, 또 무심결에 던진 한마디 말이 덕과 득이 될지 아니면 독이 될지는 오로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말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니까요.
내 삶의 기준은 하희라 씨입니다!
남편 얘기가 나올 때마다 번번이 소환되는 연기자 최수종 씨. 우주 최강 ‘아내바라기’ 일등 남편으로 등극한 뒤 한 번도 왕좌를 내주지 않는 그 남자. 아내 하희라 씨가 14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자, “지금까지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거고, 마지막 그 순간까지 정말 잘해낼 겁니다”라며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항상 옆에서 지켜보며 함께할 거라고 사랑을 다짐하며 약속합니다. 예전에는 그런 표현이 방송용 가식이나 위선이 아닐까 삐딱한 시선도 없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 진심이 사무치도록 감동을 줍니다.
무조건 내 편, 있습니까?
친정에 갈 때면 아버지는 식사 뒤 커피 한잔 해야지 하시며 믹스커피 봉지를 따십니다. 그걸로 부족한지 달디단 커피에 꿀을 듬뿍 넣어주십니다. 꿀 같은 아버지 사랑에 온몸과 맘이 따뜻해집니다. 무조건 언제나 든든한 내 편 1호입니다. 그렇다면 남편은 내 편 몇 호일까요?
내가 혹 잘못된 판단을 해도, 내가 한쪽 얘기만 듣고 흥분해 길길이 뛸 때도, 내가 어처구니없는 고집을 피워도, ‘당신 말이 맞아! 당신이 잘했어! 누가 감히 우리 여보를 화나게 했어? 다 죽었어!’라고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꼭 필요합니다. 만약 없다면 당신이 먼저 무조건 그의 편이 되어주면 어떨까요.
마음 미장공 열두 번째 이야기이자 2022년 마지막 인사로, 남편을 떠올리며 썼던 제 글 한 편을 대신 올립니다. 한 해 동안 제 편에서 마음 다해 응원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저도 무조건 당신 편입니다.
내 편
무조건 나를 믿어주는 사람
헤맬 때도 기다려주는 사람
때로 속여도 넘어가는 사람
미워도 예쁘다 해주는 사람
야속해도 허허 넘기는 사람
실수조차도 묻지 않는 사람
허물 모른 척 덮어주는 사람
종종 가슴 아픈 말 하는 사람
최고라고 추켜세우는 사람
훌륭하다고 말해주는 사람
귀신같이 우울함 아는 사람
딱 그때 술 한잔 권하는 사람
난 그런 사람이 좋더라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아침 뉴스쇼를 보는데 구역질이 났다. TV를 끄고 싶다.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다. 그래도 켜놓는다. 저것들의 사악함에 치가 떨리지만 지켜본다.” 어떤 칼럼니스트가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그 기분을 완전히 이해하고 충분히 공감한다. 그래서 구역질에 대해 찾아 공부하면서 이리저리 생각해보게 됐다. 고치는 방법까지 연구하지는 못했다.
구역질은 구토와는 좀 다르다. 속이 메스꺼워서 구토하려 하는 상태가 구역질이다. 바꿔 말하면 욕지기(토할 듯 메스꺼운 느낌)다. 오심(惡心)도 비슷한 상태다. 위가 허하거나 위에 한(寒)ㆍ습(濕)ㆍ열(熱)ㆍ담(痰)ㆍ식체(食滯) 따위가 있어 가슴속이 불쾌하고 울렁거리며 구역질이 나면서도 토하지 못하고 신물이 올라오는 게 오심이다. 이 단계를 넘으면 반위(反胃), 구역질을 해 위에 들어갔던 음식이 입으로 다시 올라오게 된다.
욕지기가 나서 몸이 괴롭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향해, 지 몸에 대해 욕지거리를 하게 된다. 그런데 경남 통영의 욕지도 출신 언론인은 즤네 고향의 거리 이름이 욕지거리라고 하더라. 그럴듯한 농담이지만 고향을 그렇게 욕보이면 되겠나. 욕지(欲知)는 불교 화엄경 구절에서 따온 좋은 말인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유배 시절 시에는 울다가 앓다가 딸꾹질에 구역질에 대낮에도 이불을 끼고 방구석에 엎드려 있는데, 강진 사람 윤시유(尹詩有, 1780~1833)가 목이 긴 술병에 석 자가 실히 되는 농어를 들고 와 손수 회를 떠주어서 함께 먹고 즐겼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배부르고 취한다고 병이 나으랴만 당장의 괴로움을 그렇게 해서 잠시 잊었다고 한다.
구역질이라는 거부반응은 신체적 원인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이유에서 빚어지는 현상인 경우가 많다. 단종실록엔 단종이 즉위하던 해에 “내가 본래 구역질이 심하다”며 자주 통곡했다는 기록이 있다. 열두 살 소년이 실록의 표현대로 혈기가 아직 충실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재위 3년 만에 비극적으로 몰려나야 했던, 소위 계유정난(癸酉靖難)의 한 조짐으로 읽힌다.
명종~선조 연간의 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은 절친했던 대암(大庵) 박성(朴惺, 1549~1606)이 타계하자 아래와 같은 제문(祭文)을 지어 애도했다. “아, 슬픕니다. 공은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와 같이 여겨 구역질을 했습니다. 더불어 눈 마주치기를 부끄러워하고 혹 서로 가까워질까 두려워했는데, 지금 혼이 올라간 하늘에서도 저들의 추악함을 차마 보실 수 있겠습니까?[嗚呼哀哉 公之疾惡 如臭斯嘔 羞與交目 恐或相狃 今也魂升 能忍彼醜]” 미추(美醜)와 은원(恩怨)의 시비가 없다는 저세상에서도 더러운 꼬라지는 못 볼 만큼 개결(介潔)한 분이라는 말이다.
구역질은 트림, 재채기, 기침, 하품, 기지개와 함께 자연스러운 신체반응이지만 점잖은 자리나 어른 앞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부모나 시부모가 계신 곳에서는 (…) 감히 구역질하고 트림하며, 재채기하고 기침하며, 하품하고 기지개 켜며, 한 발로 기울여 서거나 기대지 않으며, 곁눈질하여 보지 않으며, 감히 침을 뱉거나 코를 풀지 않는다”고 나와 있다. 추워도 감히 옷을 껴입지 않으며, 가려워도 감히 긁지 말라니 하지 말라는 게 너무 많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문집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동지(動止)에도 하지 말라는 행동이 참 많다. 그러니까 글 제목이 그렇게 돼 있겠지만.
-남이 보는 앞에서는 가려운 데를 긁지 말고, 이를 쑤시지 말고, 귀를 후비지 말고, 손톱을 깎지 말고, 때를 밀지 말고, 땀을 뿌리지 말고, 상투를 드러내지 말고, 버선을 벗지 말고, 벌거벗고 이[蝨]를 잡지 말고, 잡은 이를 화로에 던져서 더러운 연기가 나지 않게 하며, 손톱에 묻은 이의 피를 씻지 않아 남이 추하게 여기게 해서는 안 된다.
-말할 때 몸을 흔들지도 말고 머리를 흔들지도 말고 손을 흔들지도 말고 무릎을 흔들지도 말고 발을 흔들지도 말며, 눈을 깜빡이거나 눈동자를 굴리지도 말고, 입술을 삐쭉거리거나 침을 흘리지도 말며, 턱을 받치지도 말고 수염을 쓰다듬지도 말고 혀를 내밀지도 말고 손바닥을 치지도 말고 손가락을 튀기지도 말고 팔뚝을 뽐내지도 말고 얼굴을 쳐들지도 말며, 자리를 긁지도 말고 옷을 끌어 잡지도 말며, 부채 머리를 거꾸로 던지지도 말고, 허리띠 끝을 돌리지도 말라.
구역질에 관한 대목도 있다. “거울을 늘 손에 쥐고 눈썹과 수염을 매만지며 날마다 고운 자태를 일삼는 자가 있는데, 이런 짓은 부녀의 행동이다. 옛날 어떤 천부(賤夫)가 거울을 보고 찡그리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등 온갖 모습을 짓다가 남의 이목을 기쁘게 할 수 있는 태도를 택해 습관적으로 용모를 꾸미는 일이 있었는데 남들은 그를 사랑했지만 그 같은 사람은 나를 구역질나게 만드는 존재다.”
그런데 왕 앞에서 구역질 핑계를 댄 사람이 있었다. 성종 때의 병조참판 김순명(金順命, 1435~1487)은 유명한 술꾼이었나보다. 성종이 아침부터 비틀거린다고 지적하자 “신은 평소 구역질이 나서 숨이 막혀 얼굴로 올라와 그런 것이지 술에 취했던 게 아닙니다”라고 변명했다. 그러자 성종은 “거의 넘어질 뻔한 걸 내 눈으로 봤다”면서 “병조는 직임이 가볍지 않으니 이 뒤로는 몹시 취해 직무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훈계했다는 기록이 있다.
11년간 일기를 써서 널리 알려진 미암(眉庵)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가문의 생활수칙이라 할 수 있는 ‘정훈(庭訓)’ 내편(內篇)에 이렇게 썼다. “무릇 존자(尊者) 앞에 앉을 때에는 반드시 머리를 조금 낮추고 머리를 들지 않는다. 비록 방기(放氣, 방귀)는 소리 없이 내더라도 구역질이나 트림이나 재채기나 기침이 나오면 머리를 돌려 피해야 한다.” 해도 괜찮은 게 있으니 그나마 참 다행이다. 소리만 내지 않으면 어른 앞에서 방귀를 막 뀌어도 되는가보다(근데 냄새는 어떡하지?).
이덕무도 ‘해도 된다’를 넘어 하라고 권장한 게 많다. 앞에 인용한 그 글이다. “글을 읽다가 옛 사람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정의를 위해 강개한 나머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일이 적힌 대문을 만나면, 마땅히 비장강개한 마음으로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신이 그 일을 당한 것처럼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의 설화로만 보지 말고 두고두고 생각하여 비록 나라에 몸은 바치지 않았을망정 나라에 난리가 나거든 정의를 위해 절개를 지키고,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을 것을 기약해야 한다.”
그런데 구역질을 어떻게 참고, 눈물을 어떻게 만들어 내나. 그게 맘대로 되는 건가. 어쨌든 뉴스를 보고 구역질을 하는 사람이여, 잘못되고 추하고 더러운 것은 계속 구역질하며 미워하시되 정의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를 갚도록 노력해보시게나.
싫은 사람이 있으면 안 보면 된다. 부득이 마주치게 되면 피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마주치게 되는 관계가 고등학교 동창생들 모임이다. 비슷한 환경에서 만나 50년을 지내왔으니 친한 관계이다. 그런데 그 중에도 친소관계는 있게 마련이다.
A는 동창회 모임에 좀 늦게 도착했다. 한정식집이었다. 인기 있는 반찬은 먼저 바닥난다. 간장게장이 인기 품목이었다. A가 종업원을 불러 간장게장을 더 갖다 달라고 하자 B가 “늦게 온 주제에 네 돈 내고 사 먹어라”라고 한 것이다. 이 말에 다른 친구들도 같이 웃어 넘겼다. 간장게장은 추가로 주문하면 2만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A는 늦게 온 죄로 간장 게장 맛도 못보고 다른 반찬으로 대충 식사를 한 후 자리를 끝냈다. 그러나 B에 대한 원망이 가슴 속 깊이 박혔다.
며칠 후 A와 B는 같이 골프 라운딩을 할 일이 있었다. 4명을 채운다고 후배 2명도 불렀다. 그런데 B가 지나가는 말로 A의 골프바지가 노인네처럼 헐렁하다며 핀잔을 줬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바지 폭이 좁다며 후배들의 날씬한 바지를 가리켰다. 그날 밤 A로부터 단톡방에 “B와 절교한다”는 내용이 올라 왔다. B에게 보낸 카톡도 복사해 붙였다. “후배들 앞에서 망신을 줬다”는 이유였다. 앞으로 모임에 안 나갈 수는 없겠지만, B와 엮는 일은 피해달라는 뜻이다.
고등학교 동창 관계는 가장 스스럼없는 관계이다. 그래서 서로 간에 비속어도 쓰고 못할 말 없이 다한다. 그러다 보니 도를 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이제까지는 그래도 문제가 없었는데 슬슬 문제가 발생한다.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적어진 탓인지 그동안 쌓였던 미움이 한꺼번에 터지는 것인지 분란이 생긴다. 건강이 안 좋아지면 쉽게 짜증이 나기도 한다.
동창들은 A를 설득했다. 50년 친구와 절교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요지부동이었다. 그전에는 나이 70세가 되면 남자 노인은 ‘옹(翁)’을 붙였다. ‘드물다’는 뜻으로 ‘고희(古稀)’라고도 했다. 지금은 수명이 길어지다 보니 70세라도 그 용어를 안 쓴다. ‘옹고집(壅固執)’도 있다. 한번 고집 부리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꺾는다. 다른 동창들이 B에게도 사과하라며 설득했다. 그러나 역시 요지부동이었다. “못할 말 했느냐?”며 오히려 당당했다.
동석했던 친구들이 중간에 화해를 시키려고 했다가 A와 B 모두에게 원망을 들었다. “왜 내편을 들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누구 편을 들고 말고 할 일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결국 둘은 친구들의 중재로 악수하면서 화해하는 것으로 했다. 그러나 악수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악수를 했더라도 속마음은 안 풀어지는 사람도 있다. 여자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는 남자들처럼 행동만 사과하는 척 악수를 쉽게 하는 사람도 있다.
필자가 속한 대학원 동창생들 사이에도 비슷한 일이 종종 벌어진다. 한 친구가 말투가 좀 시비조이고 전투적이다. 항상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상처 받는다. 그 때문에 설전을 벌이거나 화가 나서 뛰쳐나가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그 버릇을 못 고친다.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마음도 그런 편이다. 지기 싫어하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한다. 당구를 쳐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 친구는 당구를 칠 때 지나치게 승부욕이 강하고 억지를 잘 부린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도전한다고 해서 누구랑 같이 갈 것이냐고 물으니 혼자 간단다. 트레킹이 힘들기 때문에 자기 성격으로는 같이 간 사람과 다툴 가능성이 많다는 이유였다. 자기 성격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필자도 이 친구와 다툴 일이 많이 있었지만, 그냥 넘어갔다. 그런 사람은 피하면 된다. 당구도 다른 핑계 대고 같이 안 친다. 모임에 나가도 그냥 얼굴만 보는 것이다. 굳이 절교 선언까지는 필요 없다. 그래 봤자 여생이 살아온 날보다 길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며 성격은 고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
평사원 때였다. 직속상관으로는 주임, 계장, 과장, 지점장이 있었다. 체력단련일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야유회를 갔던 날, 족구도 하고 배드민턴도 하면서 오전 시간을 보낸 뒤 오후에는 부서별 술판이 벌어졌다. 술은 친목을 도모하는 윤활유 역할도 하지만 지나치면 싸움판이 되기도 한다.
그날도 삼삼오오 나뉘어 술을 먹다가 다른 곳에서 온 행락객과 시비가 붙어 싸움이 일어났다. 누군가 뛰어와서 과장에게 필자가 싸우고 있다고 허위보고를 했다. 멀리서 필자와 비슷한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급히 알려야 한다는 마음에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당시 간부급 술자리에는 계장, 과장급이 여럿 있었고 최고 책임자인 지사장도 있었다. 필자가 싸움의 주동자였다면 소속 과장으로서 지사장 보기에도 면목이 없고 동료 과장들한테 얼굴 들기도 난처한 상황이 된다. 보고를 받은 과장은 “아니야, 그 친구는 절대 말썽 부릴 친구가 아니야. 다시 알아봐” 하고는 보고자를 돌려보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나중에 과장과 함께 있었던 선배 동료로부터 들었다. 선배는 “야! 과장님이 아주 널 잘 보고 있더라! 대번에 그 친구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던데!”라고 말했다. 여러 명의 부하 직원 중 한 사람일 뿐인 필자를 과장이 그렇게 생각해줬다는 것이 우선 고마웠다.
다음 해에 필자는 서울의 한 야간대학 편입을 준비했다. 그런데 학교에서 회사 대표의 동의서를 요구했다. 근무지가 수원이어서 서울로 학교를 다니려면 퇴근시간 전에 회사를 나와야 했기에 동료들 눈치도 보였고 무엇보다 사장의 허락이 떨어질지도 의문이었다. 혼자 고민을 하다가 용기를 내어 과장에게 말했다. 그랬더니 흔쾌히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지겠다면서 각서까지 쓰고 사장 추천서를 받아다 줘서 무사히 편입을 할 수 있었다.
물론 학교 다닌답시고 일찍 퇴근하는 것을 직원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사시(斜視) 눈들이 하이에나처럼 여기저기서 필자를 노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미움받지 않기 위해 새벽같이 출근해 사무실 청소도 하고 남들이 남기고 간 일들도 깔끔히 처리했다. 주말에는 용무가 생긴 사람의 숙직을 대신 서주는 등 처신을 잘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필자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일찍 퇴근할 수 있도록 감싸주며 배려를 해준 과장이 있어 든든했다.
더욱 감동적이었던 일은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회사에서 직계에게는 상조규정이 있었지만 3촌(三寸) 이상의 가족에게는 아무런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달랑 본인의 휴가만 하루 인정해주는 정도였다. 그때 아무도 문상을 오지 않았는데 과장이 휴가를 내서 일부러 장지까지 찾아와줘서 깜짝 놀랐다. 장지는 주소도 불명확하고 교통도 불편하다. 지리를 모르면 큰 고생을 하게 된다. 그런데도 찾아와준 과장을 보는 순간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범벅이 되었다.
요즘은 연로하셔서 함께 술을 먹거나 나들이를 못한다. 설날이 되면 찾아뵙고 세배를 하고 전화 안부만 가끔씩 하지만 마음속의 끈끈한 정은 여전하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급훈을 ‘엄마가 보고 있다’로 바꾸자 아이들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남자는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는 말이 있다. 그 시절 과장이 믿어줬기에 필자도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바른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한다.
느닷없이 옛날 일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 기억의 편린들을 더듬어가다 보면 즐겁고 행복했던 날보다 아팠던 상처들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딸들을 향한 시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며느리인 필자가 극심한 차별을 당했을 때, 또 그때마다 단 한 번도 아내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던 남편. 눈앞의 억울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기를 수없이 반복했던 시절이다.
이럴 때 여자들은 대부분 친구나 지인을 만나 수다로 그 상처를 달래고 스트레스를 푼다. 그들은 함께 화내고, 욕하고, 흥분하면서 한마음이 되어준다. 그렇게 한편이 되어주는 게 우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필자도 결혼 초에는 친구들과 이런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푼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러나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어가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런 방법은 품격만 떨어뜨릴 뿐이라는 것을. 그 후로는 절대로 친구나 지인 앞에서 가정사를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고통 속에서 힘겨운 날들을 보낼 때마다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지지해주면서 필자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필자의 두 언니들이다. 남편과 심하게 다투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언니들에게 당장 이혼하겠다고 하면, 큰언니도 작은언니도 이렇게 말했다.
“네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선물로 준 사람이니 좀 봐주면 안 될까?”
“하나님이 네 짝으로 맺어주셨잖니. 우리가 그 뜻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더 기다려보면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또 딸들의 잘못은 감싸주면서 며느리인 필자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워 나무라는 시어머님과는 억울해서 더는 같이 못 살겠다고 하면, 이렇게 말했다.
“한 치 걸러 두 치라고, 며느리가 미워서가 아니라 딸들을 너무 사랑하다 보니 미처 며느리 입장을 헤아릴 여유가 없어서 그럴 거야. 시어머님보다 친정어머니에게 마음이 더 가는 우리들 입장과 같지 않겠니? 언니들 생각에는 네가 그렇게 이해하고 마음을 푸는 게 건강에도 좋고 네 마음도 평안해지지 않을까 한다.”
남편이 사업 실패를 해서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을 때도 다른 사람들 같으면, 제 가족도 못 지키는 무능한 남편과는 이혼하는 게 낫다고 말해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언니들은 그러지 않았다.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놓여 삶이 막막해도 너는 엄마니까, 네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어려울수록 부부가 힘을 합해야지. 네 남편이 고의로 사업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잘살아보려고 애쓰다가 그렇게 된 건데, 남편 심정은 지금 어떻겠니? 너도 힘들겠지만 이런 때일수록 네가 옆에서 위로하고 격려해주고 용기를 주면 좋겠다. 그런 게 부부가 아닐까?”
언니들은 단 한 번도 함께 화내고, 욕하고, 흥분한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늘 지혜로운 조언을 해주면서 필자를 한결같이 지켜줬다. 어릴 때는 언니들의 존재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언니들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세상의 모든 언니들이 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이 든 지금에서야 언니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되었으니 참 철이 없는 막내다. 그런데도 한 번도 언니들에게 고맙다는 말도 해본 적이 없다. 이제야 가슴 벅차게 마음을 전해본다.
“몇십 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버팀목이 되어준 언니들! 고맙습니다~”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선생님이 한 분쯤은 있다. 필자에게도 그런 선생님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던 이인기 선생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필자도 없을 것이다.
필자는 충남 태안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의 또래가 모두 겪었듯 필자도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지 못했다. 필자는 소위 보릿고개를 체험한 마지막 세대다. 먹고사느라 바빠 부모의 교육열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대표로 한 명만 중학교 이상의 상급학교에 다니는 ‘특권’을 누렸다. 우리 집에서는 둘째 형님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너는 초등학교 졸업하면 산에서 나무도 하고 농사일도 좀 도와라.”
아버지의 말씀 한마디에 공부와는 더 담을 쌓게 되었다. 진학을 위한 공부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이었다.
“재산이는 학교의 명예가 있어서 꼭 중학교 입시를 봐야 합니다. 입학은 안 해도 좋으니 시험만이라도 보게 해주세요!”
담임선생님이 중학교 입시원서를 직접 들고 집으로 찾아오신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후다닥 달려가 보니 선생님께서 염화시중의 미소로 필자를 바라보셨다. 중학교 입시만 보는 조건으로 마침내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낸 것이다.
그때부터 필자는 그동안 손 놓고 있었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변변한 참고서도 문제집도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중학교 입시를 치르고 드디어 합격자 발표날이 되었다. 하지만 필자는 합격을 해도 중학교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애써 발표장에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 지역신문인 태안일보 기자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필자가 수석을 차지해 중학교 3년간 수업료 전액을 장학금으로 지원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필자 밑으로 여동생은 물론 조카들이 다섯 명이나 있었고, 타지로 학교를 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하숙비 문제가 또 앞을 가로막았다. 입학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입학 마감 하루 전날 중학교에 입학해도 좋다는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졌다.
담임선생님의 제자 사랑이 지금의 필자를 만들어준 것이다. 이인기 선생님은 그 시절 유일하게 필자 편에 서서 끝까지 응원을 해주신 은인이었다.
입학식을 마치고 주말에 선생님을 뵈러 갔다. 펄쩍 뛰시며 애들처럼 좋아해주시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선생님은 평생 꼿꼿한 성품 때문에 손해를 많이 보고 사셨다. 평교사로 정년을 맞이한 것도 성품과 무관해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인생을 후회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선생님은 재작년에 작고하셨다. 몇 년 전 스승의 날에 찾아뵈었을 때의 일이다. 대전 시내 아파트에서 사모님과 단둘이 사셨는데 필자가 방문한다고 하니 한참 떨어진 버스정류장까지 나와 필자를 기다리고 계셨다. 사모님 말씀에 의하면, 자식들이 온다 해도 한 번도 그러질 않았는데 필자가 도착하기 서너 시간 전부터 버스에서 내리는 손님들을 쳐다보며 계속 서성거리셨다고 한다.
“난 선생질 40년 동안 재산이가 가장 기억에 남아. 인생 더 멋지게 살아야 돼!”
그날 헤어지는 게 섭섭하셨는지 필자 손을 꼭 잡으신 선생님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머리를 박박 깎은 녀석들이 1월의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드넓은 논바닥 옆 부대 정문 앞에서 기간병들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대열을 이룬다. 불안감을 감추기라도 하듯 허허롭게 웃으며.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녀석들과 같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열차를 탔다. 눈치껏 빈자리를 찾아 웅크리고 앉았다. 객차 한가운데 분탄 난로 근처가 최상의 자리였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앉으려 하지 않는다. 옷차림새도 다시는 안 입을 요량으로 집에서 가장 남루한 것을 골랐는지 하나같이 꾀죄죄하다. 거지보다 아주 조금 나아 보이는 행색이다.
모두들 잠을 자지 않는다. 열차가 달릴수록 말수들이 확 줄고 이상한 침묵이 흐른다. 어두워질 무렵 논산훈련소 옆 신체검사 대기 막사에 도착했다. 배정을 받고 들어갔는데 미리 도착해 자리를 차지한 전라도 병력이 서울내기는 다마내기라며 자리 양보를 안 했다. 누구도 선뜻 끼어들지 못했다. 눈치껏 틈새를 비집고 잠을 자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체격이 월등히 좋았던 필자가 틈을 비집고 한가운데로 들어서자 그제야 하나둘 끼어들었다. 하지만 비좁은 막사에 워낙 많은 병력 인원을 집어넣다 보니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모두 옆으로 누워야 잘 수 있었다. 앞 사람 등에 배를 붙이고 자는 소위 칼잠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필자 앞에서 자던 전라도 김제에서 온 녀석은 3일 전에 도착해 신체검사를 다 받았는데도 일찍 훈련소 들어가기 싫다며 뭉그적댔다. 녀석이 필자 손을 잡고 신체검사장을 안내하듯 데리고 다녀 그날 하루에 검사를 다 마칠 수 있었다.
서류도 함께 제출하고 훈련소도 같은 날 들어가게 된 녀석은 군번이 나보다 하나 빠르다고 자기가 고참이라고 우겼다.
그 후 자대 배치가 달라 녀석과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져 각자 군대생활을 했다. 그런데 의장대, 병기근무대, 유격대에서 근무하던 중 공수부대 차출을 명령받아 필자가 김포로 간 날 전라도 친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같은 기수로 온 것이다. 군번이 하나 빠르다고 고참이라 우겨댔던 친구는 필자를 보더니 얼싸안고 엉엉 울었다.
훈련을 마친 뒤에는 자대 복귀가 원칙이었다. 그 친구는 백마부대로 필자는 유격대로 가야 했다. 그런데 필자 몸에 이상이 생겨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해 한 달 반을 보냈다. 이후 친구를 만나고 싶어 유격대가 아닌 백마부대 근무를 신청했는데 도착해 보니 녀석이 없었다. 월남 팀에 합류해 오음리 훈련장으로 가버린 상황이었다.
필자도 친구 따라 월남 팀에 지원을 하고 오음리 훈련장으로 갔지만 이미 앞 기수들은 훈련을 마치고 일주일 휴가 중이었다. 결국 친구는 만나지 못했다. 필자가 훈련을 시작한 첫날 그들이 월남으로 출발했다는 소식만 들었다. 이후 필자도 훈련을 마치고 일주일 휴가를 받았다. 그런데 몸에 또다시 이상이 생겨 수도육군병원에 재입원하게 되었고 월남 팀에 합류하지 못한 채 자대인 유격대로 되돌아와야 했다.
어느 날이었다. 교육생들끼리 대화를 하는데 그 친구 이름이 들려왔다. 혹시 동명이인인가 해서 자세히 물으니 전사를 했다는 것이다. 육군본부를 찾아가 확인했다. 사실이었다. 비좁은 막사에서 같이 칼잠을 잤던 친구. 얼싸안고 부둥켜안으며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었던 친구. 그 친구는 지금 필자 곁에 없다.
요즘은 관계를 맺거나 끊는 것이 아주 쉽다고들 한다.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기능을 이용해 한 줄 보내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만남도 쉽지만 이별할 때도 카톡으로 통보를 한다고 하니 기성세대가 살았던 시절과는 참 많이 달라진 세상이다.
어느 사진작가는 나무 사진을 찍을 때 나무 둘레를 천천히 한 바퀴 쭈욱 돌아본다고 한다. 사진 찍는 걸 나무가 동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동의를 구했을 때만 좋은 사진이 나온다는 말을 필자는 믿는다. 나만 좋으면 그만인 이기적인 마음에는 소통되지 못한 불협화음이 남아 있다. 그저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즉각 무시하거나 툭 잘라내는 행위는 일상의 기쁨을 느낄 줄 아는 평범하면서도 선한 마음을 잃은 흔적일 수 있다.
이제는 사람과의 관계보다 나만의 나무 한 그루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모두들 함께하는 시간보다는 개인적인 시간을 더 추구하는 시대다. 굳이 누가 내 편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내 일과 내가 원하는 장소, 도구만으로도 소통을 하고 위안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문명의 이기가 있다. 개인주의적 삶에 익숙해지고 있는 세대들에게 문명의 이기가 선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그것들이 창조되고 흡수되는 과정에서 잠깐씩 가까운 이들을 잊고 살기도 한다. 심심할 때는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고 불편할 때는 도움도 준다. 반드시 사람을 통해 위로받아야만 인간적이고 따스한 감정이 전달된다고 믿었던 시절과는 많이 달라진 요즈음이다.
기성세대들은 흔쾌히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문명의 이기가 삶이 동력이 되고 있는 시대의 메시지는 진취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사람들에게는 제각각의 결핍이 있다. 그래서 위로를 받고 누군가 내 편이 되어주길 바라기도 한다. 반면 상대의 그런 마음을 아프게 건드리는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는 사람도 있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자신이 진정성 있는 위로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의 모습도 본다. 허약한 인간의 마음과 각자의 결핍이 만들어낸 어두운 그림자다. 필자도 최근에 가까운 사람에게 그런 식의 상처를 받고 인간이 주는 위로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인간이 주는 위로가 낡은 가치로 전락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사회와 문명사회의 장단점을 자신에게 맞게 부분적으로 수용하면 된다. 물론 인간과 만나 풀어야 할 문제까지도 기기들에게 의존하고 위안을 받는 요즘 세대들을 바라보며 공감하지 못하는 시니어도 있다.
그러나 삶의 방식에 정답은 없다. 새로운 문명사회를 억지로 이해하기보다는 인정해버리면 된다. 그렇게 두 시대를 공존할 수도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적당한 어울림. 그 속에서 각자 자신에게 맞는 위안을 찾으면 된다. 어쩌면 이 둘은 서로의 결핍을 보완해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끊임없이 상처를 받으면서도 내 편이 되어줄 대상을 찾으며 의존적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시대 변화에 맞춘 또 다른 삶의 방법도 찾아야 한다. 오직 인간 속에서만 본연의 가치를 찾기보다는 급변하는 세상에 맞춰 자유롭게 사는 방법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살면서 자신을 더욱더 사랑하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