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박박 깎은 녀석들이 1월의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드넓은 논바닥 옆 부대 정문 앞에서 기간병들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대열을 이룬다. 불안감을 감추기라도 하듯 허허롭게 웃으며.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녀석들과 같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열차를 탔다. 눈치껏 빈자리를 찾아 웅크리고 앉았다. 객차 한가운데 분탄 난로 근처가 최상의 자리였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앉으려 하지 않는다. 옷차림새도 다시는 안 입을 요량으로 집에서 가장 남루한 것을 골랐는지 하나같이 꾀죄죄하다. 거지보다 아주 조금 나아 보이는 행색이다.
모두들 잠을 자지 않는다. 열차가 달릴수록 말수들이 확 줄고 이상한 침묵이 흐른다. 어두워질 무렵 논산훈련소 옆 신체검사 대기 막사에 도착했다. 배정을 받고 들어갔는데 미리 도착해 자리를 차지한 전라도 병력이 서울내기는 다마내기라며 자리 양보를 안 했다. 누구도 선뜻 끼어들지 못했다. 눈치껏 틈새를 비집고 잠을 자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체격이 월등히 좋았던 필자가 틈을 비집고 한가운데로 들어서자 그제야 하나둘 끼어들었다. 하지만 비좁은 막사에 워낙 많은 병력 인원을 집어넣다 보니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모두 옆으로 누워야 잘 수 있었다. 앞 사람 등에 배를 붙이고 자는 소위 칼잠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필자 앞에서 자던 전라도 김제에서 온 녀석은 3일 전에 도착해 신체검사를 다 받았는데도 일찍 훈련소 들어가기 싫다며 뭉그적댔다. 녀석이 필자 손을 잡고 신체검사장을 안내하듯 데리고 다녀 그날 하루에 검사를 다 마칠 수 있었다.
서류도 함께 제출하고 훈련소도 같은 날 들어가게 된 녀석은 군번이 나보다 하나 빠르다고 자기가 고참이라고 우겼다.
그 후 자대 배치가 달라 녀석과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져 각자 군대생활을 했다. 그런데 의장대, 병기근무대, 유격대에서 근무하던 중 공수부대 차출을 명령받아 필자가 김포로 간 날 전라도 친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같은 기수로 온 것이다. 군번이 하나 빠르다고 고참이라 우겨댔던 친구는 필자를 보더니 얼싸안고 엉엉 울었다.
훈련을 마친 뒤에는 자대 복귀가 원칙이었다. 그 친구는 백마부대로 필자는 유격대로 가야 했다. 그런데 필자 몸에 이상이 생겨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해 한 달 반을 보냈다. 이후 친구를 만나고 싶어 유격대가 아닌 백마부대 근무를 신청했는데 도착해 보니 녀석이 없었다. 월남 팀에 합류해 오음리 훈련장으로 가버린 상황이었다.
필자도 친구 따라 월남 팀에 지원을 하고 오음리 훈련장으로 갔지만 이미 앞 기수들은 훈련을 마치고 일주일 휴가 중이었다. 결국 친구는 만나지 못했다. 필자가 훈련을 시작한 첫날 그들이 월남으로 출발했다는 소식만 들었다. 이후 필자도 훈련을 마치고 일주일 휴가를 받았다. 그런데 몸에 또다시 이상이 생겨 수도육군병원에 재입원하게 되었고 월남 팀에 합류하지 못한 채 자대인 유격대로 되돌아와야 했다.
어느 날이었다. 교육생들끼리 대화를 하는데 그 친구 이름이 들려왔다. 혹시 동명이인인가 해서 자세히 물으니 전사를 했다는 것이다. 육군본부를 찾아가 확인했다. 사실이었다. 비좁은 막사에서 같이 칼잠을 잤던 친구. 얼싸안고 부둥켜안으며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었던 친구. 그 친구는 지금 필자 곁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