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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풍경 푸르러 첫눈에 싱그럽다. 청명한 정취를 느끼게 하는 마을이다. 한갓진 산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택들. 산야의 초록과 고택의 수묵색이 차분하게 어우러져 푸근하다.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에 있는 군자마을이다. 원래 2km 정도 저 아래 ‘외내’에 있었으나 1974년 안동댐이 들어설 때 이곳으로 집단 이주했다. 수몰을 피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고택과 고택 사람들의 몸살이 자심했을 테다. 억지 춘향으로 밀려났으니까. 군자마을만이 아니라 안동의 많은 전통마을이 불운을 맞이했다. 일부 마을은 그대로 수몰됐으며, 군자마을처럼 문화재로 지정된 마을의 고택은 이건(移建)으로 살아남았다. 당시 안동의 유림에선 논의가 많았더란다. 결국 ‘문중을 지키는 소리(小利)보다 국가가 도모하는 대의(大義)에 승복하자’는 쪽으로 뜻을 모았다고 한다.
군자마을은 ‘외내’에서 통째 옮겨온 고택 20여 채로 이루어져 있다. 이건 이후 어언 반백 년이 지났다. 상처를 씻어주는 건 언제나 세월이라는 약이다. 이건 과정에서 곁들인 새 단장으로 고택 마을 특유의 고졸한 맛은 덜 익었지만 찾아오는 이들이 흔해 생기가 감돈다. 답사객들, 또는 한옥 스테이 같은 체험 프로그램을 즐기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어서다. 유구한 세거로 이어진 후손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져 지금은 소수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마을이 지닌 역사성과 고건축이 지닌 미감을 힘으로 삼아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옛 마을의 생존 방식과 풍속이 이렇게 진화한다. 마을 앞에 있는 느티나무도 우람하게 자라 너른 그늘을 드리운다. 마을을 에워싼 숲과 전면으로 탁 트인 조망도 빼어나다. 풍경의 절반은 청산이요, 나머지 절반은 하늘이거나 구름이다. 군자마을은 이렇게 자연 안에 있다. 쉴 만한 곳이며, 눈요기할 만한 곳이고, 기억에 남길 만한 곳이다.
군자마을은 광산 김씨(光山金氏) 예안파(禮安派)가 조선 초기부터 600여 년 동안 세거한 곳이다. 입향조는 농수 김효로(聾叟 金孝盧, 1454~1534)다. 그는 생원시(生員試)에 붙었으나 출세에 뜻이 없어 매양 초야에 묻혀 살았다. 퇴계가 김효로를 일컬어 ‘결백한 절개를 지켰다’고 한 걸 보면 정치의 탁류에 발 담그기를 싫어한 인물이었음을 알 만하다. 김효로를 사표로 삼아 성장한 덕분인가? 그의 친손과 외손 중에 학덕 높은 선비들이 많이 나왔다. 이른바 ‘오천 7군자’라 불리는 이들이 바로 그렇다.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는 안동부사로 재임할 때 이곳을 방문했는데, “이 마을엔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탄복했다지. 이후 군자리라 부르게 됐다.
돌계단을 걸어 올라 후조당(後彫堂) 대종택으로 들어선다. 군자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이며, 마을의 깊은 유서를 웅변하는 대표적 건물이다. 입향조 김효로의 장손인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이 1567년에 초창, 자신을 호를 따 ‘후조당’(後彫堂)이라 이름 붙였다. 후조당은 안채, 사랑채, 사당, 별당 등으로 구성됐다. 대종택답게 규모로나 건축 미학으로나 빼어나다. 특히 후조당 별당의 가구(架構)와 구색이 흥미롭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ㄱ’자형 건물로, 서편엔 6칸 대청을 설치했다. 대청 동편엔 2칸의 온돌방을 배치했고, 잇달아 마루 1칸과 가마 형태의 작은 온돌방 1칸을 덧붙여 위트가 실린 건물 형태를 연출했다. 천장 부위에 설치한 소슬 대공은 매우 희귀한 받침 형식인데, 여말선초의 기법이라 한다. 화각을 한 마루 대공의 화려함도 수작으로 평한다. 6칸 대청의 칸마다 단 사분합문(四分閤門)의 묘미는 또 어떻고? 모조리 들어 올려 걸쇠에 걸면 단박에 외경이 안으로 들이친다. 햇살과 바람이 밀려든다. 사분합문은 이렇게 풍경을 변주한다. 아울러 공간을 확장하는 기능을 해 문중의 제례나 회합 같은 대형 행사를 너끈히 치를 수 있다.
선비가 쓴 요리책 ‘수운잡방’
후조당 별당에 걸린 현판은 퇴계가 썼다. 군자마을 선비들은 다들 퇴계를 스승으로 삼았는데 김부필 역시 제자였다. 후조당에선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건을 위한 건물 해체 때 지붕 아래 합각에서 고서, 문집, 교지, 토지문서, 노비문서 등 희귀한 문화유산이 다수 발견돼 큰 화제가 되었던 것. 문중 선조들이 600여 년간 은밀하게 소장했던 고문서와 전적들이 천장에서 쏟아지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기상천외한 축제 분위기로 들썩였겠다. 당시 발견된 수천 점의 유물 중 일부는 보물 제1018호와 제1019호로 지정됐다. 사람들은 대개 군자마을의 고택에 관심을 갖지만, 이곳 문중 사람들의 자긍심을 돋우는 건 바로 이 기록유산들이다.
그렇다면 군자마을의 군자들이 지닌 정신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은 명민해 학문에 밝고 처신에 맑았다. 흔히 탈속한 풍모와 깨끗한 운신을 일삼아 세상의 농간과 꿍꿍이에 초연했다. 그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싶지만, 도학자란 세속보다 산림에서의 은거와 공부로 오히려 삶의 진수를 건질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지 않았던가. 군자마을 ‘7군자’의 중심인물이었던 김부필은 과거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은둔했다. 임금이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스승 퇴계가 벼슬을 권했지만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때 퇴계가 읊은 칠언절구가 있다. ‘후조당 주인은 소박하고 절개가 굳어/ 임금의 임명장이 내려와도 기뻐하지 않았다/ 매화와 마주 앉아 빙설 같은 향기를 맡으며/ 그저 도(道) 공부에만 매진하더라.’
이제 탁청정(濯淸亭)을 볼까. 입향조 김효로의 둘째 아들 김유(金綏, 1491~1555)가 1541년에 살림집을 지으면서 바로 옆에 함께 건립한 별당 정자다. 군자마을엔 두 개의 종가가 마을의 기풍과 질서를 주도해왔다. 항렬로 보아 큰집인 후조당 종가와 작은집인 탁청정 종가가 바로 그렇다. 탁청정의 이름은 김유의 호에서 따왔으며,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썼다. 한석봉은 도산서원의 현판을 쓰기도 했는데, 서예가들에 따르면 탁청정 글씨가 도산서원의 것보다 빼어나다고 한다. 탁청정은 정면 3칸, 옆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정자로 매우 아름답다. 허전한 구석 없이 당당하고 흠결 없이 수려해 당대 최고수 목수가 지은 집임을 짐작케 한다. 영남 지방의 개인 정자치고 탁청정처럼 웅장하고 우아한 정자가 없다는 평을 듣고 있다. 뜰에 있는 연못에선 여름이면 연꽃 향기가 은은하게 피어올라 누각으로 스며든다.
이토록 경탄할 만한 정자를 지어놓고 김유는 무엇으로 소일했나? 그의 뇌에 세팅된 최고의 가치는 유유자적(悠悠自適)이지 않았을까. 그는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무과엔 실패, 그 길로 벼슬을 포기하고 향촌에 살며 도학자로서의 영일(寧日)을 구가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김유는 ‘어찌 명리(名利)를 좇으랴. 삶이란 즐거워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그의 학덕은 드높았고 인격도 고매했다. 즐기는 방식에도 기품이 있었다. 부모 봉양과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대접함)에 충실함으로써 선비의 본분을 다했다. 특히 접빈객에 공을 들였다. 그는 열 살 연하의 퇴계를 비롯해 당대의 시인 묵객들과 두터운 교유를 했다. 정자 마루에선 청담(淸淡)과 풍류가 화개(花開)처럼 번졌으리라. 이름난 이들만 접대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걸인에게도 대접을 했다는 게 아닌가. 그의 집 주방에선 늘 술이 익어가고 음식이 요리됐다. 김유는 요리책 ‘수운잡방’(需雲雜方, 보물 제2134호)을 저술하기도 했다. 남존여비의 비루한 관념이 엄연하던 시대에 선비가 요리책을? 깜짝 놀랄 만한 일이다. 아마도 김유는 삶이라는 여행을 경계 없이 넘나든 게 아니었을까. 수신(修身)이 깊지 않고선 가능치 않은 경지다.
권석환 안동문화원 원장
유교 자체에 무슨 폐단이 있으랴
‘안동학’이라는 게 있다. 안동 지역의 역사·문화·지리·민속 등을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지역학이다. 이 흔치 않은 학문 장르의 존재를 통해 안동의 문화적 광량(廣量)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안동 사람들은 흔히 유교 문화와 불교 문화는 물론 민속 문화까지 번성한 곳으로 안동을 능가할 지역이 없는 걸로 본다. 권석환 안동문화원 원장을 통해 안동의 문화와 안동문화원의 일에 대해 들었다.
“‘안동정신’의 핵심은 ‘의’(義)를 중시한다는 데 있다. 여기엔 역사적 맥락이 있다. 일찍이 고려 건국 때 안동의 지도자 김선평·권행·장정필이 정의로운 편에 섰다. 일제강점기 때엔 전국 어느 곳보다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게 왜 그런가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안동 출신으로 성리학의 태두였던 퇴계 선생의 정신에서 영향을 받은 게 그 배경이 됐다. 즉 의리를 본분으로 가르친 퇴계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왔다는 얘기다.”
안동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를 표방하고 있다. 이른바 ‘선비정신’이 여전히 살아남은 지역이라는 뜻을 담은 슬로건인가?
“현대의 다양화된 사회에서 올곧은 선비정신을 가지고 살 수야 있겠나. 그러나 유교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이 바르게 사는 길을 가르치는 게 유교니까. 다시 말해 선비정신을 어떻게든 이어가자는 게 안동의 바람이다. 사실 안동은 전통과 예절이 그나마 잘 지켜지고 있는 고장이다.”
개인의 자유와 자아실현을 중시하는 요즘 세상에 유교가 가르치는 모럴이 지닌 폐단은 없을까?
“옳은 삶을 가르치는 유교 자체에 무슨 폐단이 있을까? 다만 가르침을 시늉만 낼 뿐 실제로는 이기심을 채우는 얌체들은 이 지역에도 많다. 매사 조상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은 처신을 하는 게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권 원장님은 전통 유가의 후예로 오랫동안 유림활동을 했다. 일상의 처신에서 중시하는 가치들이 있다면?
“기본적인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지키고자 한다. 상경여빈(相敬如), 즉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 대하듯이 하라는 가르침과, 입장 바꿔 생각하자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역시 현대사회에서도 요긴한 미덕이라 믿는다.”
얼마 전에 펼쳐진 ‘차전장군 노국공주 축제’는 시민 중심의 참여형 축제로 성황을 이뤄 호평을 받았더라.
“안동문화원이 주관한 축제로 성과가 컸다. 안동문화원이 부각되는 효과를 낳기도 해 보람을 느낀다. 향후 젊은 층을 축제에 적극 끌어들여 질적 성장을 도모할 참이다.”
안동의 문화답사 때 놓치지 않고 찾아보길 바라는 명소를 꼽아달라.
“도산서원을 찾아가 사당에서 절을 하는 걸로 퇴계 선생을 뵙고 그 정신을 담아오면 좋겠다.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담긴 월영교에서는 사랑의 의미를 생각해보길 바라고. 이 둘만으로도 안동이 오래가는 기억으로 남을 게 틀림없다.”
그는 안동만의 먹거리를 추천하기도 했다. 500년 전통의 종가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수운잡방 체험관’을 통해 음식의 낙원을 경험하라는 것.
어릴 적 주입식 교육의 힘은 아주 세다. 우리 모두가 흔히들 아는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말고도 그 시절엔 각 지역의 특색이나 지역명은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지 않았나 싶다. 그중에 영주도 있었다. 영주라 하면 무조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부석사 무량수전이 따라붙었다. 강산이 무수히 바뀌고 세상은 달라졌어도 부석사 무량수전의 고장, 경북 영주다.
또는 영주 사과일까. 선비의 고장답게 사찰이나 서원은 당연하다. 추억의 풍경이 곳곳에 남겨져 있어 도심과 골목길에서 가슴 뭉클한 그리움도 솟는다. 그리고 무섬마을을 지키며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둘러보면 어디서든 수백 년 혹은 수십 년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영주 여행은 옛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해도 괜찮을 듯하다.
물 위에 뜬 섬, 무섬마을의 외나무다리
영주의 내성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너른 모래톱, 그 위로 S라인의 곡선이 길게 이어진 무섬마을 외나무다리의 풍경이 무심하다.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고 해서 무섬마을이다. 물 수(水), 섬 도(島). 수도리의 물섬이 무섬이 되었고,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가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준다. 외나무다리 저편으로 수도교라는 콘크리트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300년 넘도록 무섬마을과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이 다리였다.
홍수라도 나면 다리는 강물에 잠겼고 휩쓸려 내려가, 그럴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다리를 다시 놓곤 했다.
폭 20~30cm, 높이 60cm, 총길이 150m. 폭이 좁아 걸을 때면 아슬아슬해서 장대에 의지하기도 했다. 한 사람만 걸을 수 있는 폭이어서 예전에는 건너편에서 오는 사람이 보이면 지레 모래톱에 앉아 기다렸다고 한다. 지금은 외나무다리 중간의 몇 군데에 마주 오는 이를 피할 수 있는 ‘비껴다리’가 놓여 있다. 걷다가 어질하거나 자칫 기우뚱하다가는 물에 빠질 듯한 두려움도 생긴다. 다리 위를 걷는 발끝만 보며 걷다가 강의 물결에 취하면 낭패다. 그래서 강 건너를 잇는 이 다리는 그 옛날엔 시집올 때 가마 한 번 타고, 죽어서야 상여 타고 한 번 지나간다는 애환이 서려 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물돌이 마을, 무섬의 느린 시간 속에 잠겨 모래톱에 주저앉아 저편을 바라보면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랫빛…’ 이 노래가 절로 입안에 맴돈다.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운 외나무다리는 이제 영화나 드라마, TV 예능과 CF 등의 촬영지로 알려지고 있다.
잠시 숨을 고르며, 무섬마을
“십 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 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에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 시인 조지훈은 서울로 유학을 떠나면서 무섬에 남겨둔 아내와의 이별을 ‘별리’(別離)라는 시에 담았다. 조지훈 시인의 처가로 알려진 김뢰진 가옥은 마을 첫머리쯤에 있었다.
무섬의 집들은 새롭게 조성된 한옥마을과는 달리 늘 그 자리에 있던 풍경이다. 한때 100여 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50여 가구만 사는 작은 마을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무섬마을은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다. 우리나라에서 일곱 번째라고 한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선정되었다. 만죽재(晩竹齋), 해우당(海愚堂)을 비롯해 지정문화재가 10곳이고, 100년 넘는 고택도 그대로 남아 있다. 울 밑에 선 봉숭아도, 풀숲 가득한 곳에 피어난 들꽃들도 물씬한 그리움을 소환한다. 수백 년 켜켜이 쌓인 깊은 역사가 그대로 전해지는 옛집들이 고스란히 무섬마을이었다.
마을이 어찌 이리도 조용할까. 발소리조차 민망하다. 걷다가 호박이 매달린 담장을 향해 셔터를 누르니, 마당에서 일하시던 어르신이 “그게 뭐 볼 게 있기나 한가. 쓸데 있으면 그 호박 따가”란다. 그래도 되는지 싶어서 괜찮다고 하니 직접 두 개나 따주셔서 황송한 마음에 보물처럼 잘 모시고 왔다.
영주라 하면 부석사
유홍준 교수는 자연과 건축이 제자리를 지키며 조화를 이루는 최고의 문화유산 부석사는 그 어떤 표현으로도 나타내지 못한다고, 오직 한마디 위대한 건축이라고 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조선 땅 최고의 명상로’라 칭송한 부석사 당간지주 인근 은행나무 산책로는 여전하고, 그 길 위에서 홀로 명상에 잠겨볼 만하다.
천년고찰 부석사의 하이라이트 무량수전.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중 하나다.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그 앞으로 펼쳐진 백두대간 능선의 풍광에 넋을 잃어보는 것도 부석사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온통 경사진 경내를 돌기엔 다리가 뻐근하고 숨찰 때도 있다. 하지만 영주까지 와서 어찌 유구한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는 목조건물 부석사에 들지 않을 수가 있을까.
마음 내려놓고, 소수서원과 선비촌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공인된 사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인정받았던 곳이다. 조선 중종 때 주세붕이 세운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당시 향교나 서원은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해당되는 교육기관이다. 향교는 국립인 반면 서원은 사립학교라 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한 소수서원의 역사와 향기가 물씬하다.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때맞추어 선비 복장으로 글을 읽는 이들의 소리도 들을 수 있고, 하얀 고무신이 가지런한 그 뜰에 앉아 가만히 옛 선비들의 기운을 전해 받을 수도 있다. 선비교를 따라 너른 뜰을 지나면 선비촌으로 접어든다. 옛 선비정신과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고래등 같은 양반님네 고택의 안마당과 대청마루, 담 너머로 철 따라 피어나는 꽃들과 배롱나무, 그리고 강학 시설과 저잣거리도 조성되어 있어 옛 선비마을의 풍취가 가득하다.
오래된 골목길을 걷다, 근대역사문화거리
현대 일상에서 찬찬히 되돌아보기 좋은 곳으로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가 있다. 영주 원도심에 가면 근대 생활 모습과 건축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근대 산업 시기의 양곡가공업을 짐작해볼 만한 풍국정미소, 문을 밀고 들어가니 여전히 동네 주민의 머리를 깎고 계시던 80년 전통의 영광이발소, 몇 걸음 건너편에 고딕 건축양식의 영주 제일교회가 붙어 있고, 근대 시기의 주거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영주동 근대 한옥은 주변으로 풀밭이 무성하다.
또한 관사마을은 역사문화의 공간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에 영주-안동 간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고 철도 역무원들의 관사가 지어지면서 형성된 마을이 바로 이곳이다. 그래서 불리게 된 관사골은 반세기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칠이 벗겨지고 낡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일식 목조 관사 주택의 전형인 5호와 7호 관사를 볼 수 있었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니 집주인이 수리를 하는 중이다. 예전에는 집 안에 욕실과 화장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신기해하던 집이었지만, 근대 건축이라고 지정만 되면 뭐하냐 넋두리 한다. 낡고 헐어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수리를 할 수밖에 없다는데 곤란한 점이 많은 모양이다. 도시생활사적 가치가 크다지만 변화에 따른 관사골 주민들의 환경과 지속 가능한 삶의 여건도 염두에 둘 일인 듯하다. 그럼에도 낡은 지붕과 담벼락, 포도가 주렁주렁 달리던 안마당의 텃밭에서 정 깊은 추억이 솟는다. 관사골 저편 언덕 위로 부용공원이 내려다보고 있다. 흑백 필름 같은 풍경 속에서도 현재와 이어지는 스토리텔링은 계속된다.
어찌된 셈인지 가슴을 후벼 파는 일이 잦은 게 인생살이다. 애초 뜻밖의 고난을 만나 나동그라지도록 기획된 게 삶이지 않을까. 고통을 통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소식은 비처럼 쏟아진다. 옛 선비들은 수상한 세상에 질려 일쑤 산야로 스며들었다.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 1503~1557)도 그랬다. 그는 잘나가던 스승 조광조가 훈구파에 몰려 유배되자 세상에 염증을 느껴 산골짝으로 들어갔다. 그러고선 줄곧 산중 원림을 가꾸며 살았다. 그게 소쇄원(瀟灑園)이다.
소쇄원의 들머리엔 대숲이 성성하다. 대나무를 청허자(淸虛子)라 이른 건 맑게 속을 비운 겸허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마디마디 단단하게 맺혀 올곧게 쭉쭉 자라는 품새는 절개를 상징한다. 세상의 풍상이 사납다고 굽힐까보냐, 부러질까보냐, 대나무가 하는 말이 그렇다. 양산보가 원림 초입에 대숲을 조성한 까닭이 쉬 읽힌다.
대숲 사이 조붓한 소로를 지나자 소쇄원의 내부가 훤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가 ‘천국’이라 탄복한 소쇄원의 가경(佳景)이. 이곳이 천국이라면 대숲 저 바깥은 감옥인가. 대숲으로 차안과 피안의 경계를 삼았다? 그리 봐도 지나칠 게 없겠다. 양산보는 권력의 횡포로 어지러운 속세를 헌신짝 버리듯 팽개치고 산야에 은둔했다. 소쇄원의 조영을 통해 꿈에서나 만났을 법한 이상 세계 건설을 추구했다. 지지고 볶는 세속만이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걸, 자연 속에 몸을 두고 풍성한 내면의 선율을 즐기는 삶이 한결 낫다는 걸 오롯이 구현했다.
소쇄원의 구조물들은 깊지 않지만 옹골찬 맛을 풍기는 계곡 좌우의 경사지와 둔덕으로 펼쳐진다. 대청마루 정갈한 작은 집, 모정(茅亭), 연못, 담장, 화단, 외나무다리 등 세우고 꾸미고 덧붙인 것들이 많다. 그러나 짜임새가 좋아 답답한 구석이 없다. 탁 트인 느낌을 준다. 부지의 면적은 1400평쯤으로 널찍하다. 조선의 원림치고 이 정도 넓이를 가진 곳이 드물다.
일찌감치 젊은 시절에 세상을 등진 산림처사 양산보. 그에게 벼슬은 멀고 가난은 가까웠다. 그리운 건 그저 마음의 평화? 밖으로는 문을 닫은 대신 안으로는 광활한 사이즈의 자유를 들여놓고 유유자적하고 싶었을 테다. 그러하니 빈 마음으로 꾸린 원림이다. 그렇다면 오두막 하나와 탁족하기 좋은 계곡의 나무 그늘 하나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랴. 양산보는 그러지 않았다. 대범하고도 활달하게 구조물들을 조성했다. 번듯한 원림으로 자신의 뜻과 지향을 면밀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를테면 삿갓지붕을 올린 자그만 정자엔 대봉대(待鳳臺)라 이름 붙여 봉황을, 즉 성군(聖君)을 갈망하는 마음을 담았다. 소쇄원의 두 축인 광풍각(光風閣)과 제월당(霽月堂)의 당호는 송나라의 명필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품을 예찬하며 쓴 글귀 ‘광풍제월’(光風霽月)에서 빌렸다. ‘맑은 날의 바람, 비 갠 뒤의 달’을 닮은 인품을 선망했던 거다. 이렇게 보면 소쇄원은 세월을 낚는 낚시터가 아니다. 마음을 닦는 교실이요, 깨어 있는 정신의 전시장이다.
산중에 사는 이에겐 고독마저 기껍다. 적막이야 연인이고. 양산보가 공들여 소쇄원을 꾸린 건 내면의 웅장한 심지를 남들에게 티 내고 싶어서가 아니었을 거다. 우선은 내가 나를 만족시키고서야 이타(利他)도 헌신도 가능한 게 사람이지 않던가. 양산보는 유한한 인생을 산중의 독존(獨存)으로 요긴하게 활용했다. 유유하게 노닐었다. 지상의 주인으로 살았다. 그랬으니 소문나지 않을 리가. 양산보가 소쇄원을 꾸리고 소쇄하게(맑고 깨끗하게) 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인걸들이 숱하게 찾아들었다. 기대승, 고경명, 정철, 송순, 임억령 등 당대의 스타급 문사들이 드나들며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었다는 게 아닌가. 기대승은 양산보를 일컬어 ‘만사를 낙관하는 군자’라 했다.
소쇄원은 아름다워 정들기 쉽다. 물소리 바람 소리는 귓전을 스치며 덧없는 세상을 너무 용쓰지 말라 한다. 매인 것 없이, 다툴 것 없이, 그저 살갑게 물처럼 구름처럼 흐르라 귀띔한다. 이래저래 경탄할 만한 옛날 정원이다. 놓치지 말 게 하나 있다. 정조 임금이 ‘호남의 공자’라 부른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48영시’다. 제월당 마루에 편액으로 걸려 있다. 소쇄원의 경관을 48수 오언절구로 노래한 것인데, 이 시편들은 소쇄원의 풍광에 혼을 훅 불어넣었다.
삼가헌(三可軒).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다. 야트막한 산 아래, 아늑한 터에 자리 잡은 고택이다. 뒷산 솔숲을 병풍으로 삼아 청명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조선 양반집이다. 저마다 특유의 개성이 있어 음미할 만한 매력과 가치를 지닌 게 고택이다. 대충 눈요기로 훑고 지나기엔 아깝다. 후루룩 주마간산을 하면 명산이나 야산이나 그게 그거다. 마찬가지로 볼 게 많은 고택을 대강 보고 말면 보잘것없어진다. 가급적 눈여겨보고 뜯어보자! 이렇게 속으로 되뇌며 삼가헌으로 들어선다.
삼가헌은 사육신의 하나인 박팽년의 11대손 박성수가 1769년에 초가로 초창한 집이다. 이후 그의 아들 박광석이 초가를 허물고 규모를 키워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기와집을 새로 지었다. 1874년엔 박광석의 손자 박규현이 원래 있었던 서당을 부분적으로 개조한 별당 하엽정(荷葉亭)을 조성해 대미를 장식했다. 4대에 걸친 연쇄적 건축으로 어디에 내놔도 처질 게 없는 명품 주택을 완결한 셈이다.
선대가 지은 집을 고쳐 다시 짓거나 늘리는 데엔 신중한 고려가 많았으리라. 주거 공간에 대한 선조의 이상과 정신을 바탕에 깐 건축으로 문중의 풍기를 돋우고 싶었을 테니까. 이렇게 보자면 삼가헌은 선대와 후손의 대화가 아롱진 집이다. 대청마루에 앉은 핏줄들의 의논과 자랑과 속삭임이 환(幻)처럼 아른거린다.
삼가헌 사랑채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지붕이 이상하다. 왼쪽은 팔작지붕인 반면, 오른쪽은 비교적 구조가 단순한 부섭지붕(벽이나 물림간에 기대어 만든 지붕)이라 흥미롭다. 균형미보다 기능성을 구현한 대목이겠다. 사랑채 전면에 세운 원주(圓柱, 두리기둥)도 도드라진다. 조선 시대 민가의 기둥이 대부분 방주(方柱, 네모기둥)인 것은 원주의 사용을 법으로 금해서였다. 원주의 격을 방주보다 높게 쳐 궁궐과 서원, 사당 같은 곳에만 원주의 채택을 허용했던 것.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선 선비들의 집에도 원주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결 폼 나는 원주를 세워 건물의 품위와 위용을 은근히 과시했던 거다.
삼가헌의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중문에 초가지붕을 얹은 데에도 다 뜻이 있다. 염치를 알고서야 반듯하게 서는 게 선비의 체통이다. 집이건 처신이건 요란한 위세는 천격(賤格)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딱 부러지는 양반집을 짓더라도 초가 한 채 슬쩍 끼워 넣어 청렴의 상징으로 삼았다. 초가의 소박한 태를 마음에 들여놓고 매사 오버하지 않는 처세의 한 가지 푯대로 여겼다.
사랑채 대청마루에 걸린 현판 ‘삼가헌’은 조선 후기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의 작품이다. 창암은 물처럼 흐르는 서체, 이른바 ‘유수체’(流水體)의 달인이다. 풍설에 따르면 추사로부터 ‘신필’(神筆)이라는 찬사를 받았다는 인물이다. 정반대로 추사에게 ‘시골 훈장의 솜씨’라 혹평을 들었다는 얘기도 전해지니 묘하다. 호불호 쑥덕공론을 몰고 다닌 인물이었을까? 대청마루 한편엔 미수 허목의 글씨를 집자한 편액 ‘예의염치효제충신’(禮義廉恥孝悌忠信)이 걸려 있다.
이제 삼가헌의 서쪽 담장으로 난 쪽문을 통해 하엽정으로 들어선다. 이 별당은 원래 파산서당(巴山書堂)이라는 이름의 강학 공간이었으나 후대에 위치를 조정하고 누마루 한 칸을 덧붙이면서 모습이 확 바뀌었다. 누마루를 달아낸 건 전면으로 펼쳐지는 연못과 정원 풍경을 한결 완연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산골 생활의 풍미는 자연과 더불어 노니는 데에 그 진국이 있다. 담장 밖 산경이 이미 오롯하지만, 담장 안에도 풍경을 꾸려 즐기는 게 조선 선비들의 도락 방식이었다.
그저 즐길 풍경을 꾸미되 격식에도 소홀치 않았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라는 동양의 전통적 우주론을 고스란히 반영한 저 연못의 품새를 보라. 땅을 상징하는 네모꼴 테두리를 구축하고, 그 중심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천상계를 축약했다. 인간의 광활한 상상이 내려앉은 연못이다. 몹시 아름다운 자태로 돋보이는 연못이기도 하다. 연꽃은 아직 올라오지 않았다. 연두색 연잎들만 먼저 설레어 수면에 살을 비빈다. 허공엔 적막과 하얀 햇살의 기묘한 칵테일. 하엽정의 초여름 한낮이 농익어 찬연하다.
답사 Tip
삼가헌 지척에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을 기리는 사당 육신사(六臣祠)가 있다. 육신사 경내의 태고정(太古亭, 보물 제554호)은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 지은 별당 건축이다.
국도를 벗어나 냇물 따라 이어지는 소로로 접어들자 풍경이 환하다. 물은 맑고, 물가 바위는 훤칠하다. 마을 동구, 냇가의 느티나무들은 또 어떻고? 늙었으나 우람하고 당당하다. 느티나무 아래로 흐르는 냇물은 연둣빛으로 순정하다. 경북 영양군 입암면 연당마을이다. 마을의 집들은 검정 기와를 올린 개량한옥 일색이어서 차분하다. 서석지(瑞石池)는 마을 한복판에 있다.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정과 함께 ‘조선의 3대 원림’이라 소문나면서 서석지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엄청 늘어났다.
나직한 대문을 통해 서석지로 들어서자 이제 조선이다. 조선 시대의 건축과 연못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시간을 초월한 공간이다. 보수가 잦았으나 원형을 훼손하진 않았다. 조선 광해군 때의 선비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이 조성했다.
서석지는 이곳의 연못 이름이지만, 담장 내부의 별서 공간을 통틀어 서석지라 부른다. 자연을 바라보는 산림선비들의 눈엔 경계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풍치를 내 것으로 삼았다. 정영방이 그랬다. 그는 서석지를 내원으로, 주변 일대의 산천경개를 외원으로 간주했다. 자연을 무한풍류의 대상으로 관조한 선비들이었으니 하늘의 달과 별빛인들 나의 것이 아닐 리 있으랴. 또 그들에겐 자연이 경전(輕典)이었다. 수신(修身) 교과서였다. 담벼락으로 내·외부를 가를 일이 아니었다.
정영방은 매우 신중한 캐릭터의 소유자? 그는 10여 년에 걸쳐 서석지를 구상했다. 이후 완성까지는 다시 17년이 걸렸다지? 풍수지리에 밝았던 그는 주변 산수의 형국을 면밀히 고려해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었다. 정자의 이름은 경정(敬亭)이다. 경(敬)! ‘섬김’이다. 매사 예를 다해 삼가고 섬기는 게 성리학자의 본분이자 이상이었다. 정영방은 퇴계학파의 문인. 정자를 짓더라도 분수에 넘쳐 도학자의 체통을 스스로 구기는 일을 할 리 없는 인물이었다. 정자보다 서재인 주일재(主一齋)를 먼저 지은 데에서 그의 됨됨이가 읽힌다. 음풍영월을 즐길 정자를 지을지라도 일단 공부부터 해두자! 그런 뜻으로 공부방부터 지었던 게 아닐까.
정영방이 한층 심혈을 기울인 건 연못이다. 터의 대부분을 연못 공간으로 활용했다. 조선의 연못은 네모꼴이 일반적이다. 서석지 역시 네모 모양이다. 괜히 네모가 아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로 본 성리학적 자연관을 적용했다. 연못의 물은 동북쪽 귀퉁이에서 들어와 서남쪽으로 나간다. 이 수로의 방위 역시 조선 연못들이 공통으로 지닌 특징이다. 풍수를 중시했던 옛사람들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물을 역수(逆水)로 봐 배제했던 거다. 이래저래 서석지는 전형적인 조선 연못이다.
그런데 서석지엔 특별한 게 있다. 연못에 있는 90여 개의 크고 작은 돌들이 그렇다. 정영방은 못을 팔 때 나온 이 바윗돌들 일부에 이름을 붙였다. 생김새에 맞춰 물상의 이름을 주기도 했고, 도학의 이상세계를 표현해 명명하기도 했다. 이 명명보다 흥미로운 건 돌들과 못물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미감이다. 정영방은 ‘돌엔 문기(文氣)가 있다’고 했다. ‘숨어 사는 군자를 닮았다’고도 했다. 돌을 동행할 만한 벗으로 삼았던 셈이다.
경정은 규모가 꽤 큰 정자다. 6칸 대청마루에 올라 내려다보는 연못 경관이 압권이다. 연꽃들 소담히 피어오르는 계절엔 아찔하리라. 꽃에 마음을 두고 은거의 고독과 허기를 달랬으리라. 그런데 성리학자의 유토피아를 상징적으로 구현한 게 원림이요 연못이라지만, 오직 은둔을 일삼노라면 삶이 맨송맨송해지니 유토피아고 뭐고 별 의미 없어진다. 허세꾼의 여흥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럼 무엇으로 허기진 마음을 채우나? 정영방에겐 공부가 처방이었다. 서재 주일재에 틀어박히는 날이 많았다. 서재 앞에는 소나무와 대나무 등 고상한 것들을 심어 족집게 레슨 교사로 삼았다. 아예 연꽃이 보이지 않도록 나무들로 못을 가린 건 독공(獨工)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였을 테다.
정영방은 진사시에 붙었으나 한 번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렇다 할 취직한 적 없이 살았다. 조선 양반들이야말로 ‘금수저’의 레전드였으니 요상할 거 없다. 밥벌이 걱정 없이 그저 무욕을 길잡이로 삼아 노닐 것 다 노닐되 공부에도 부끄럽지 않게끔 열을 내는 사람이라면, 그는 인생 최고봉에 오른 게 아닐까. 백수도 이쯤이면 진흙을 딛고 올라온 연꽃에 뒤지지 않는다.
답사 Tip
서석지가 있는 연당마을은 운치 있는 전통 마을이다. 돌담길 따라 한 바퀴 돌아볼 만하다. 아랫마을엔 정영방의 후손이 지은 양반 가옥 태화고택이 있다. 서석지 들머리에 있는 천변의 바위벼랑 석문(石門)도 빼어나다.
조선 중기를 소란스레 살다간 거유(巨儒),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년)이 머물렀던 별서(別墅)다. 남간정사(南澗精舍)라 이름 짓고 ‘남간노인’(南澗老人)이라 자칭했다. 집으로 얻은 안심도, 쌓인 정도 많았던가보다. 파란과 질풍노도의 한세월을 통과한 말년의 핍진한 마음 한 자락 여기에 걸쳐두고 살았으리라. 우암이 돌아간 지 300여 년. 집주인 떠난 줄 모르는 대숲은 세한에도 푸르다.
남간정사로 들어서자 허옇게 언 연못부터 눈에 들어온다. 자그만 못이다. 가운데쯤엔 함지박 엎어놓은 듯 작은 섬이 있으며, 거기에 우람하게 잘 자란 왕버들 한 그루가 있다. 삼신산(三神山), 즉 신선의 세계를 상징하는 섬이다. 별서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물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자연관에는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추구하는 신선사상이 내재해 있었다. 도교의 영향을 받아서다. 삼신산이 있는 저 작은 연못에서 그러한 사상의 습합과 유행 경향을 읽을 수 있다. 인간과 우주의 본성을 궁구하는 성리학의 이상향을 담은 상징 체계로 그냥 봐도 좋겠다.
우암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남간정사를 짓고 들어앉은 건 일흔일곱 나이 때였다.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이름이 우암 송시열이라지? 3000회 이상씩이나. 명민한 석학이었으며 권력의 산정에 오르길 거듭했으니 쓸모도 많고 논란도 많은 인물이었다. “무슨 석학? 독선적인 정치가였을 뿐이다!” 그런 야박한 소리까지 들리는 걸 보면 그의 생애에 신산(辛酸)도 많았을 걸 알 만하다. 그러니 낙향엔 둔세(遁世)의 뜻도 서렸겠다. 산수 간에 마음을 풀어놓고 모처럼 노년의 영일을 구가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버릴 수 없는 건 학자의 본분. 그토록 배우고도 더 배우고 싶었을 테다.
그런데 노인의 공부는 서책보다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야 진국이다. 피고 지는 풀꽃 하나에서 천지간의 비밀을 보는 관조의 눈이 열리는 일. 이거야말로 노경의 참된 기쁨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우암은 자연의 일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남간정사를 지었던 것이다. 강학에도 뜻을 두었겠지만.
남간정사 일곽의 건축 구색은 조촐하다. 중앙부엔 정면 4칸, 측면 2칸에 홑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남간정사가 있고, 뒤란의 언덕 위엔 사당인 남간사가 보인다. 대문 쪽 연못가에서 좀 궁색하게 끼어든 기국정(杞菊亭)은 저 너머 대전시 소제동에 있었던 우암의 처소로 1926년에 여기로 옮겼다.
담박하기는 정원도 마찬가지다. 인위적 손길을 가급적 배제해 조경하는 게 우리 전통 별서정원의 특징이다. 구미에 맞는 나무 몇 그루 심으면 그만이었다. 사계 따라 변전하는 자연의 드라마 감상이야 그저 주변 산야로 눈길을 던지면 충분하니까. 별서 일대의 풍광을 통째 정원으로 삼기를 낙으로 삼았을 뿐, 뭘 더 보태거나 빼질 않았다. 조경보다 차경(借景)을, 눈 호사보다 수신(修身)을 추구했다.
그런데 기발한 기법 하나가 여기에 있다. 남간정사의 대청마루 밑을 관통해 연못으로 흘러가는 물길 조성이 그것이다. 지금은 갈수기라 물이 없지만, 물이 흐를 땐 물소리로 청신해 한층 운치를 돋우리라. 여름엔 시원할 테고. 대청마루를 떠받친 나무기둥 밑에 기다란 초석을 괸 건 습기에 썩지 말라고 취한 조치다. 뒷산에서 흘러오는 물을 굳이 집의 외부로 돌리지 않았으니 오롯이 파격이자 창의다. 우암의 센스와 위트가 비친다.
우암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그는 유능했으나 당쟁의 축이었다. 서인-노론의 우두머리로 정권을 쥐락펴락했다. 정적을 치는 데엔 비정했다. 공부는 산처럼 많아 우뚝했지만, 그가 마르고 닳도록 존앙한 주자의 경전 해석을 조금이라도 수틀리게 하는 이들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다. 과격한 돌출이 잦아 부메랑으로 돌아온 고초도 잦았다. 유배와 이배(移配)를 톡톡히 섭렵했으니.
남간정사에 살며 우암이 뿌듯하게 경청한 산야의 소식은 장강대하였을 게다. 꽃 타령인들 없었으랴. 고상한 흥이며 평정심인들 왜 없었으랴. 그러나 그는 정치를 놓고는 못 견디는 캐릭터였다. 왕세자 책봉 문제로 임금에게 저항했다가 마침내 사약을 두 사발이나 받고 운명했다. 죽기 얼마 전에 남긴 시의 요지는 구슬펐다. 말 한마디 잘못한 죄로 궁한 신세가 됐구나! 우암의 주검은 운구 과정에서 잠시 남간정사에 머물렀다지. 혼이나마 기꺼웠겠다.
답사 Tip
대전시 동구 가양동 우암사적공원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왼편에 있다. 남간정사 대청마루 아래로 난 물길 구조를 놓치지 말고 살펴보자. 우암사적공원 내 유물관에선 송시열 문집인 ‘송자대전판’(宋子大全板)을 볼 수 있다.
여름이 아무리 비바람과 태풍을 몰고 와 몸부림을 쳐도 가을은 온다. 처서(處暑), 백로(白露)가 지났으니 틀림없다. 뜰 앞 감나무의 감이 그렇고 대추와 밤송이만 봐도 가을이 다가옴을 알 수 있다. 조만간 벼는 누렇게 익어 황금물결로 출렁일 것이다. 푸른 산과 들도 붉고 노랗게 물들어가리라. 가을은 이렇게 변화 속에 설렘으로 다가온다. 나는 가을을 특히 좋아한다. 하지만 사계절이 있다는 건 더욱 감사한 일이다. 언젠가 더운 나라에서 온 총각들이 함박눈을 보며 놀라워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생전 처음 보는 하얀 눈이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니 얼마나 신기했을까? 우린 사계절을 통해 온갖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으니 이만저만 축복이 아니다.
가을이 오면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 하늘은 푸르고 높다. 코스모스가 바람에 하늘거리고 고추잠자리는 높게 떠서 난다. 시원한 대청마루에 다리 쭉 뻗고 책을 읽으면 좋을 계절이다. 밤이면 풀벌레 소리가 크게 들린다. 그러다 나뭇잎이 하나둘 뚝뚝 떨어지면 왠지 모를 쓸쓸함과 우수가 밀려오기도 한다. 그래서 가을에는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인생을 논하고, 삶을 논하고,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요 사색의 계절이다.
오랜만에 책꽂이에서 법정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를 꺼내 봤다. ‘가을은’이란 제목이 눈에 띈다. 스님은 가을을 어떻게 느꼈을까?
“사람이 산다는 게 뭘까? 잡힐 듯하면서도 막막한 물음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은, 태어난 것은 언젠가 한 번은 죽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생사필멸(生死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 그런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노상 아쉽고 서운하게 들리는 말이다. 내 차례는 언제 어디서일까 하고 생각하면 순간순간을 아무렇게나 허투루 살고 싶지 않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얼굴을 익혀두고 싶다. 이다음 세상 어느 길목에선가 우연히 마주칠 때, 오 아무개 아닌가 하고 정답게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익혀두고 싶다.
이 가을에 나는 모든 이웃들을 사랑해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가을은 정말 이상한 계절이다.”
스님 말씀대로 정말 가을은 이상한 계절인가보다. 평소보다 뭔가를 더 생각하게 되고 느낌도 풍부해진다. UN 세계인구전망 자료에 의하면, 2020년 세계 인구는 총 77억9500만 명이다. 그중 한국인은 5178만 명이라 한다. 지구촌을 하나의 가족으로 본다면 누군가와의 만남은 78억 명 중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이 중 몇 사람이 나와 인연을 맺고 살까? 얼마 전 전라도 지리산으로 며칠 여행을 했다. 내가 아는 사람도 없지만,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도 없었다. 육십 평생을 이 좁은 땅에서 한국인으로 살았는데 다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한 번이라도 눈웃음을 건넨 사람이라면 참 대단한 인연인 셈이다. 스님 말씀이 무리는 아닌 듯싶다. 이 가을엔 가까운 사람들에게라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소중히 생각해야겠다.
법정 스님의 글이 따뜻하게 다가왔다면, 윤동주 시인의 시 ‘가을이 오면’은 살아가는 데 이정표로 삼고 싶을 만큼 큰 울림을 준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고 인생의 가을이 오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자문자답하듯 말한다. 그러고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라고 끝을 맺는다.
법정 스님이나 윤동주 시인의 마음이 하나의 물줄기가 되어 가슴으로 다가온다. 가을은 이렇게 마음을 돌아보게 한다. 내가 살아 숨 쉬는 이 공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함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깊은 인연인지 알게 한다. 이 가을에는 풀벌레 소리도 더 귀 기울여 듣고, 모든 이웃에게 따뜻한 눈길을 나눠야겠다.
경남 함양을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지리산 자락이 숨겨놓은 보물’.
별 기대 없이 찾아간 곳이었다. 이리저리 여행 코스를 검색해 봐도 딱히 눈길을 끌 만한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논계 서원을 방문하고 함양에서 몇 군데 돌아볼 곳을 리스트업했다. 여행자 추천 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추천해준 개평 마을로 운전 경로를 입력했다.
하회 마을 버금가는 기품 흐르는 ‘개평 마을’
한옥 마을은 어디에 있는 곳을 방문해도 좋다. 최근에 지어져 콩기름 반짝이는 한옥만 아니라면 말이다. ‘좌안동 우함양’이라고 하더니 옛말 그르지 않게 개평 마을은 고즈넉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여행객을 반겨줬다.
안동 하회 마을의 시끌벅적한 투어리스트들의 소음이 불편하다면 우클릭하여 함양의 개평 마을을 거닐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안동 하회 마을 버금가는 개평 마을에는 조선 성종 시대 대학자인 일두 정여창 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드라마가 촬영된 곳이다. 3000여 평의 너른 대지에 12동의 건물이 배치된 남도지방의 대표적 고택으로 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돼 있다.
흔히 안동이나 경주를 방문할 때 느껴지는 관광지의 익숙함이 싫어질 때가 있다.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수백 년 전의 삶들을 유추해보고 싶은데 관광지에서는 그런 생각이 정지된다. 그저 관광객 물결에 휩쓸려 돌아다니다 어느새 그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되는 순간들이 언제부턴지 싫어졌다.
그런데 함양은 달랐다. 나에게 느리게 말을 거는 듯싶었다. 마치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듯 말이다. 개평 마을 일두 정여창 고택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나지막한 담을 한참 바라보았다. 또 골목 어귀 길들을 구석구석 다니며 오랜 세월의 흔적을 이리저리 살펴보기도 했다. 만족스러웠다. 안동 하회 마을 버금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향유하기에는 하회 마을보다 훨씬 더 풍성한 품이었다.
굽이굽이 모래 섞인 오도재 길, 불빛 받는 밤이면 반짝거려
개평 마을을 떠나 오도재를 넘어보기로 했다. 오도재는 이 지역에서 지리산으로 가기 위해 꼭 넘어야 했던 고개다. 말이 고개이지 정상에 있는 지리산 제일문이 위치한 높이가 750m가 넘는다 하니 작은 산이다.
이 산을 넘어 지리산에 갈 수 있도록 길을 닦으면서 180도 굽이굽이 오도재 길이 만들어졌다. 오도재 길로 인해 경남 내륙에서 보다 안전하게 지리산을 갈 수 있게 되면서 이 길을 통과하는 이가 많아졌다고 한다.
원래 이곳 토양은 모래가 많이 섞인 땅이라 지반이 매우 약해, 급경사로 길을 낼 경우 무너져 내릴 수 있어 경사를 최대한 완만하게 만들게 됐단다. 함양의 원래 토양인 모래와 흙이 섞인 마사토(자잘한 모래와 흙이 섞인 토양을 일컫는 일본식 조어)를 섞어 도로를 포장하면서 밤이면 불빛에 반짝이는 모래알들이 더욱 환하게 길을 밝힌다.
이 장관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몰려들어 오도재의 낮과 밤을 렌즈에 담았고 그렇게 오도재 길은 2006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됐다.
비운의 천재, 최치원이 조성한 함양의 산소 탱크 ‘상림공원’
함양에는 상림공원이 군 중심부에 큰 숲을 이루고 있다. 상림공원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천령군(현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이라고 한다. 비만 오면 마을이 잠기고 논밭이 유실되는 것이 안타까워 함양을 흐르는 강에 둑을 쌓아 상림과 하림을 만들었다는데 현재 하림은 유실됐고 상림만 남아 함양을 대표하는 공원으로 사랑받고 있다.
상림공원에는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몸통이 합해져서 하나가 된 연리목이 있다. 부부간의 금실이나 남녀 간의 깊고 애절한 사랑을 연리목 혹은 연리지로 비유한다. 상림공원 안에 있는 연리목은 수종이 다른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 몸통이 결합돼 더욱 상서로운 나무로 여겨진다. 이 나무 앞에서 손을 잡고 기도하면 부부간의 애정이 돈독해지고 남녀 간의 사랑도 이루어진다니 갈등과 불화에 시달리는 남녀라면 함양으로 가볼 일이다.
상암공원 연리목 앞에는 연리목을 설명하는 게시판이 세워져 있다. 게시판 설명에 따르면, 연리목은 워낙 상서롭고 귀한 나무로 여겨져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도 등장한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연리목에 대한 기록이 총 4번이 나온다는데 ◆신라 내물왕 7년 ◆고구려 양원왕 2년 ◆고려 광종 24년 ◆성종 6년이다.
서암정사 암반에 새겨진 석공들의 10년 불사
장마 끝자락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찾아간 서암정사는 함양에서 가볼 만한 곳을 검색했을 때부터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곳이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낮은 안개가 계곡을 굽이굽이 감싸며 올라간다. 이 집중 호우에 사찰을 찾는 이 누가 있으랴?
차에서 내려 쏟아지는 비를 피하며 요리조리 산길을 올랐다. 마침내 서암정사 입구가 눈앞에 나타났다. 벌어진 입이 닫히지 않았다. 여기가 어드메냐? 한국인가? 아니면 천상계 어디인가? 한국의 사찰 중에 이런 곳이 있었다고?
자연 암반에 새겨진 사천왕상을 옆으로 하고 위로 쭉 뻗은 돌계단을 밟아 오른다. 돌계단을 하나하나 오를 때마다 마치 천상계로 올라가는 입구를 걷는 듯하다. 서암정사는 조계종 해인사의 부속 사찰로 인접해 있는 벽송사의 암자였다. 창건주인 원응 스님이 벽송사에서 참선을 하던 중 서암정사의 자연 석굴을 발견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그 어느 지역보다 빨치산과 국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 벽송사는 당시 빨치산들의 야전 병원이었다고.
폐허가 된 사찰을 보듬고 재건하면서 인근 서암정사의 자연 석굴을 발견하고 이곳에서 석불 불사를 일으켜 전쟁으로 죽은 원혼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서암정사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1988년 암자까지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가 개설되자 이듬해부터 석굴 불사를 시작했다. 서암정사를 천년만년 도를 닦는 만년 도량으로 만든다는 계획 아래 석공 6명이 30년 동안 조각한 석굴과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이 곳곳의 자연 암반에 새겨져 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장엄하고 이국적인 사찰. 한여름 쏟아지는 장맛비 헤치고 올랐던 꿈같은 여행이었다. 장대비로 제대로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었던 것이 한이 돼, 오는 가을 다시 한번 서암정사로 가볼 참이다. 서암정사의 가을 모습은 어떨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창덕궁 건너편에 위치한 서울 돈화문국악당(예술감독 강은일)의 국악 공연 온라인 생중계가 문화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전국민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고 이에 따라 문화계의 모든 공연 취소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서울 돈화문 국악당 역시 지난 2월 25일부터 계획됐던 모든 공연을 취소한 바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따르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으나 공연이 취소되면서 국악인들은 공연 사례비를 받지 못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됐다.
돈화문 국악당은 서울시가 국악당을 설립한 목적이 공연활동 지원을 통해 전통예술을 계승하고 있는 국악인들의 경제적 자립을 도와주겠다는 설립 취지인 만큼 공연을 계속해 경제적인 지원은 계속하되 코로나 19 바이러스로부터 관객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무관객 온라인 생중계라는 아이디어를 실현하게 된 것이다.
서울 돈화문 국악당 측은 페이스북과 유튜브 온라인 생중계에 기술적으로 문제는 없는지 점검 후, 곧장 2월29일 토요일에 잡혀있던 대금 연주자 정소희씨의 ‘신화와 현실의 어딘가에, 대금’ 을 관객 없는 무관중 공연 온라인 생중계로 선보인 것이다. 국악공연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온라인 생중계라 네이버 포털과 국악방송에서도 큰 관심을 나타내 3월19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된 ‘운당여관 음악회’는 네이버V라이브와 돈화문국악당의 페이스북 라이브로 7일 동안의 공연이 모두 온라인 생중계되기도 했다. 현재 유튜브 국악방송 채널에서는 3월19일부터 29일까지 열렸던 공연 모두를 감상할 수 있다.
한편 '운당여관 음악회'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 고(故) 박귀희 명창이 돈화문로에서 실제 운영하던 ‘운당여관‘에서 착안한 공연으로 1950~80년대 종로를 찾는 예술가들의 사랑방이었던 운당여관의 모습을 젊은 국악인들이 다양한 장르로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아래 링크는 유튜브 국악방송 채널에 올라와있는 ‘운당여관 음악회’ 영상이다.
https://youtu.be/9JVglLOEl3w
https://youtu.be/qaDQo76N26c
https://youtu.be/jDuzp4d7n04
https://youtu.be/vXG7Gy5FiCA
https://youtu.be/hv7ntmXbFDM
https://youtu.be/k0_wy_t0lHw
국악인들의 사랑방이었던 운당여관을 모티브로 국악인들의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보여준 ‘운당여관 음악회’ 영상은 전통문화의 현대적 해석으로 주목받고 있다. 유튜브 영상 화질도 매우 높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방콕인 요즘 매우 적합한 문화생활이 아닐 수 없다.
운당여관 음악회를 이야기 하면서 운당여관 이야기를 안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한국 국악계의 대모인 박귀희 선생이 운영하던 운당여관 스토리로 들어가본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그토록 원했던 한옥호텔의 원조라 할 운당여관은 종로구 운니동 65-1번지에 위치해있었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양반 가옥으로 순조 임금 시절, 궁중의 내관이 왕으로부터 목재를 하사 받아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1951년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인 박귀희 선생과 남편 윤길병씨가 이 한옥을 구매한 후, 이웃한 시인 한상억 선생의 고택을 포함, 3~4채를 합쳐서 1958년부터 이름을 '구름 속에 있는 집' 혹은 '스님들이 좌선하는 집'을 뜻하는 '운당(雲堂)'이라 짓고 여관으로 운영하였다.
본래는 박귀희 선생이 제자를 가르치고 국악인들의 사랑방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 가옥을 구입하였으나 6.25 전쟁 이후 생계 유지를 위하여 부득이하게 여관으로 운영하게 됐다고 한다. 운당여관은 싸고 저렴하면서도 한옥의 정취가 품격 있게 유지돼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화가, 작가 등 예술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운당여관은 1959년부터 한국 바둑의 최고봉인 국수전, 명인전, 국기전 등 주요 기전의 400여 대국이 벌어져 한국의 최고수를 배출해 내는 등 한국 바둑사에서도 중요한 곳으로 기록되고 있다.
의외로 사업 수완이 좋았던지 손님이 많아지자 1960년에는 정릉에 있던 순종의 비 윤씨의 별장을 이전 복원해 종로 한복판에 450평 한옥에 31개 객실을 가진 한옥여관으로 확장, 운영되기도 했다.
한편 박귀희 선생은 1989년 운당여관을 매각한 20억원을 서울 국악예술고에 기부하면서 국악인 후진 양성에 큰 힘을 보탰고 이후 운당여관 일부 한옥은 경기도 남양주 종합촬영소로 이전, 헐린 터에는 돈화문로 월드오피스텔이 들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하는 나만의 슬기로운 문화생활 Tip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내려 창덕궁 쪽으로 걷다 보면 계동 현대그룹 사옥과 창덕궁 돌담길 사이 코너에 최근 인스타 핫플레이스로 각광받고 있는 베이커리 카페 ‘Onion’이 눈에 띈다.
한국 스타트업 회사들이 모여 있는 성수동에서 금속공장을 개조해 도시 재생 카페로 첫선을 보였던 Onion이 이곳 계동에서는 대청마루 너른 곳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좌식형 카페로 선을 보여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추천하고 싶은 곳은 이곳보다는 김수근 선생이 설계한 건축사무소 공간 1층에 위치한 프릳츠를 추천한다. 요즘 커피 좀 안다는 마니아들 사이에 인기 급상승중인 프릳츠는 독특한 커피 맛을 앞세워 각 지역마다 프릳츠 스티커를 붙인 원두공급업체로도 상종가를 치고 있다.
공간의 적벽돌 건물을 감상하며 1층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마시는 커피 맛이 일품이다.
커피를 마시고 창덕궁 쪽으로 계속 걸어 내려오다 삼거리에서 길을 건너서 돈화문국악당으로 들어가본다. 국악당 대문이 활짝 열려있다면 언제든 들어가서 잔디밭 의자에 앉아 파란 하늘과 형형색색의 늘어뜨린 천과 잔디의 초록색의 어울림을 감상할 수 있다. 1층 안내 데스크 오른쪽에 마련된 대청마루에 신발을 벗고 올라가면 확 트인 창으로 창덕궁 입구가 환하게 보인다.
좌탁이 마련돼있어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쓰며 잠시 감성에 빠져 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다. 창덕궁을 바라보며 대청마루에 앉아 언제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 나만의 슬기로운 여가생활 보내기다.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 벤치.
분명 태생은 긴 의자 같은데 어느 틈에 가지런히 쪼개져 개별의자 같기도 한 아리송한 벤치가 있다.
긴 의자 중간중간에 뜬금없는 팔걸이가 겉돈다. 개개인의 자리를 보장하고, 모르는 사람과의 접촉을 방지하는 장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노숙자가 누워 긴 의자를 다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반응은 엇갈린다. 인심 메말랐네, 정 없네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벤치는 침대가 아니라며 많은 사람들이, 노숙자 눈치를 보며 불편을 감수해야 하냐고 잘 했다는 반응도 있다.
어느 나라나 노숙자는 있기 마련이라 이런 일에 대한 논란은 다른 나라에서도 적지 않다,
영국에서는 유명 레퍼가 ‘적대적 디자인’이라 불리는 벤치 팔걸이에 항의해 제거하는 퍼포먼스를 벌였고, 프랑스에선 노숙자가 앉거나 머무르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상가 앞 철심 박기가 보도되기도 했다.
결국' 사람을 쫓는 벤치라는 말과 함께 근본대책도 없이 맨바닥으로 노숙자를 내몬다는 아린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벤치가 사람을 쫓는 것이 아니라 노숙자가 사람을 쫓는 것이라는 항의성 반론도 나온다. 자기 집 대청마루 쓰듯 벤치를 점령한 노숙자들 때문에 쉬고 싶어도 서성대다 그냥 돌아선다는 것이다. 한파에 동사도 예방하고 다수의 고통을 덜어 준다는 공감의 목소리도 나온다.
그런데 사람들은 알까.
이런 이유로, 저런 이유로 인해 온기도 없이 말소리도 하나 없이 덩그러니 홀로 남겨져 외로운 벤치의 마음을. 도란도란 주고받는 사람들의 속내를 살짝 엿듣고 싶은 비어있는 벤치의 가슴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