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국민의 30% 가까이가 65세 이상인 나라, 일본. 세계에서 고령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국가 중 하나인 일본의 소식을 발 빠르게 전합니다.
일본 맥도날드 구마모토 시모토리점에는 여성 최고령 크루(직원)가 근무하고 있습니다. 90세, 혼다 다미코 씨입니다.
23년 전 혼다 씨는 67세 나이로 정년퇴직한 뒤 맥도날드 크루에 합류했습니다. “더 일하고 싶다”는 혼다 씨의 말에 딸이 크루 모집 공고를 알려준 것이 계기였습니다. 지난 28일 일본 매거진 에쎄 온라인에 혼다 씨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구인을 보고 전화해서 신청하자마자 ‘내일부터 와주세요’라고 들었습니다. 고맙게도 그 이후 일하게 해주었네요.”
정년 제도가 없는 맥도날드에서 혼다 씨는 2000년 7월부터 청소 크루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주 5일, 아침 7시에 출근해서 10시 반경까지 일합니다. 동료는 모두 젊습니다. 점장은 손자뻘. 심지어 15세 크루도 있지만 혼다 씨를 부르는 호칭은 ‘다미짱’으로 격의 없습니다.
최근 혼다 씨는 미디어에 소개되며 지역 명사가 됐습니다. “‘늘 깨끗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해 주는 분도 많습니다. ‘저도 일하고 싶은데 70세라서 거절당합니다. 90세인데 일할 수 있다니 부럽습니다’라고 하는 분도 있고요. 그 말을 듣고 아직 일하고 싶은 사람이 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럴 때마다 회사에 감사하지요.”
일하며 살아있는 보람을 느낀다는 혼다 씨는 “100세까지” 맥도날드 크루이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남고 싶다고 합니다.
“손님이 기뻐해 주는 모습에 매일 마음 가득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도 가능하면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모토로 하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가능하면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젊은 사람들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자신의 미래를 안정화하기 위해 매일 노력하고 있을 겁니다. 저를 포함해 어느 세대도 스스로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가 주위에 폐를 끼치게 되면 그만 둘 때인가 하고 생각할 겁니다. 제 자신도 그 의식을 가지고 일을 마주하고 싶네요”
우리는 일상에서 유니버설 디자인을 만나고 있다. 그런데 유니버설 디자인은 사회적 약자, 그중에서도 특히 고령자에게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줄까. 김진유 경기대학교 도시·교통공학과 교수와 함께 유니버설 디자인이 적용된 금천구 G밸리, 동작구 스페이스 살림 일대를 탐방해봤다.
김진유 교수는 도시계획 전문가로서 유니버설 디자인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김 교수는 “요즘 세계적으로 지향하는 도시계획 방향은 인클루시브(Inclusive) 시티, 즉 포용 도시다”라고 말했다. 이어 “포용 도시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소득, 신체, 지식 등과 상관없이 도시에서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줘야 한다는 것이다”라면서 “포용 도시가 되면 장애인, 임산부, 노인 등 사회적 약자한테만 혜택이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전체가 혜택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김진유 교수는 그 예로 저상버스를 언급했다. 장애인을 위해 저상버스가 도입됐지만, 실제로 장애인이 이용하는 비율은 0.1%라고 한다. 이용률 99.9%를 차지하는 비장애인은 편하고 안전하기 때문에 저상버스를 선호한다. 김 교수는 “그래서 유니버설 디자인이 도입되면 우리 모두가 혜택을 보는 것”이라며 “우리가 다 같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설계하고 포용적인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계속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유니버설 디자인 중 특히 노인을 위한 디자인은 무엇일까. 김진유 교수는 “노인은 많이 걷거나 계단이 많으면 힘들어한다”면서 “지하철 엘리베이터와 같이 대중교통을 바로 이용할 수 있게 조정하거나 설계하는 것을 유니버설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노인분들은 손에 힘이 없지 않나. 적은 힘으로도 열리는 문이나 자동문이 좋다. 또한 영어로만 된 간판은 노인분들이 알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큰 글씨의 한글 중심 간판을 추천한다. 더 좋은 것은 멀리서도 알아보기 쉬운 심벌형 간판이다”라고 덧붙였다. 예를 들어 맥도날드의 ‘M’은 멀리서도 보이는데, 이와 같은 심벌형 간판이나 안내판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유니버설 디자인은 왜 확대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김진유 교수는 “아무래도 건축비나 운영비가 많이 들기 때문일 것”이라고 짚었다. 김 교수는 “그런데 가정을 해보자. 돈을 아껴 건물을 지었는데, 노인이나 장애인이 그곳 시설을 이용하다가 다쳐서 병원에 가게 되면 사회적으로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된다”고 했다.
이어 “이게 전체적으로 보면 사회적인 비용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니버설 디자인을 도입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보면 플러스가 될 수 있다”면서 “지자체에서 공기업이든 사기업이든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하면 인센티브를 주는 등의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G밸리 2·3단지
곡선형 도로
“보행로 사이에 있는 도로길을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만들었죠. 이것을 트래픽 카밍(Traffic Calming)이라고 할 수 있어요. 구조물에 의한 교통 통제라는 뜻인데, 도로를 곡선으로 만들면 아무래도 차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사고가 줄어들죠. 그리고 차도와 인도를 잇는 돌을 연석이라고 하는데, 연석의 턱이 없고 보행로와 높이가 같죠. 노인분들의 보행이 편하실 겁니다.”
고원식 횡단보도
“방지턱처럼 높이를 높여서 만든 횡단보도를 고원식 횡단보도라고 합니다. 횡단보도를 높이면서 연석과 수평을 이루었죠. 보통의 횡단보도는 노인분들이 이용하려면 계단을 내려가듯 아래로 내려갔다가 건너서는 다시 위로 올라가야 해요. 다리가 아픈 노인분들에게는 힘든 과정이죠. 그런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유니버설 디자인입니다.”
턱 없는 출입문
“출입문에 턱이 없어야 휠체어를 탄 노약자분들의 이용이 편해지죠. G밸리 내의 건물은 모두 턱이 없네요. 특히 지반을 높여 길과 출입문이 수평을 이루게 해둔 곳도 있네요. 디테일이 돋보입니다.”
많은 휴식 공간
“길 중간중간 의자가 많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네요. 노인분들한테는 걷다가도 앉아 있을 공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이곳에 있는 손잡이 의자는 앉고 일어설 때 의지할 게 필요한 노인분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스페이스 살림
대중교통, 건물과의 연결성
“도시계획에서는 내부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외부와의 연결도 매우 중요해요. 스페이스 살림은 지하철역과 연결되어 있죠. 이런 것은 노약자분들이 이용하시기에 굉장히 유용해요. 건물과 건물이 연결되어 있지 않을 경우 옆 건물로 가려면 내려갔다 올라가는 것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런 불편함이 많이 줄어든 거죠. 그리고 여기는 길이 직각으로 되어 있어서 방향성이 명확한 것도 장점이에요. 길이 사선이나 미로처럼 되어 있으면 노약자분들이 길을 잃기 쉽거든요.”
노약자 위한 손잡이
“건물 전체에 출입문 턱을 없애서 노약자분들의 보행이 편하도록 했네요. 더불어 출입문에 있는 손잡이 봉을 보면 매우 긴데요. 이 역시 유니버설 디자인입니다. 보통의 짧은 손잡이와 달리 이렇게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길게 만든 이유는 키가 작거나 휠체어를 탄 사람도 봉을 쉽게 잡도록 한 거예요. 같은 이유로 보행길과 계단에 핸드 레일을 낮은 위치에 설치해놓았죠. 무엇보다 노인분들은 경사가 있는 길에서 낙상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데 레일을 잡으면 사고를 막을 수 있어요.”
경사도 낮은 길
“요즘은 계단 옆에 휠체어를 타고도 이동이 쉽게 경사로를 마련해두죠. 휠체어가 이동하려면 경사도가 완만한 것이 좋아요. 일반적으로는 경사도가 매우 가파른 곳이 많은데, 이곳은 세심한 배려를 기울인 것을 알 수 있죠.”
동반 화장실
“스페이스 살림에는 남녀 화장실 외에 동반 화장실이 따로 있네요. 장애인분이나 어르신 같은 경우 화장실에서 혼자 일을 보기가 힘들어요. 옷을 내려준다든지, 뒤처리를 해주는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동반 화장실을 따로 만들었다는 것은 노약자분들을 많이 생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벌 안내판
“유니버설 디자인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나 외국인, 눈이 어두운 사람도 시설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책, 지하철 모양 같은 심벌로 간판을 하거나, 화살표로 방향을 알려주면 글을 몰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죠. 유니버설 디자인은 색깔도 중요해요. 색깔로 구분해놓으면 길을 찾기가 더 쉬워집니다.”
장애인 주차장
“주차장에서 장애인 주차 구역이 엘리베이터 바로 옆에 있네요. 차에서 내려 바로 엘리베이터로 이동할 수 있게 만든 거예요. 제가 계속 강조하듯이 이동 거리를 줄인 거죠. 여기도 마찬가지로 턱이 없고 문을 열어두어 휠체어를 타고도 쉽게 이동할 수 있게 했습니다.”
김진유 교수 경기대학교 스마트시티공학부 도시·교통공학과 교수다. 한양대학교 도시공학과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20년간 국내외 주택과 부동산 정책, 도시계획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전세’, ‘주거복지, 갈 길을 묻다(공저)’, ‘미래를 바꾸는 도시계획(공저)’ 등이 있다.
“정년퇴직 후 다시 일하고 싶은데 정보를 얻기도 쉽지 않고 받아주는 곳도 많지 않은 게 현실이에요. 고양시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하죠. 면접 본 곳에 꼭 합격했으면 좋겠어요.” (60대 여성 구직자)
지난 14일 경기도 고양시 고양꽃전시장에서 ‘Bravo! 2022 고양시 중장년일자리박람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경기 고양시와 고용노동부가 공동으로 개최한 대규모 중장년일자리박람회로서, 이날 1000여 명의 시민이 참석했다.
중장년의 시민 대부분이 박람회 현장을 찾은 이유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다. 이번 행사는 온·오프라인 동시에 개최됐다. 앞서 고양시는 지난 3일부터 13일까지 박람회 홈페이지에 마련된 ‘온라인 채용관’을 통해 이력서 사전 접수를 진행했다. 미처 접수하지 못한 이들은 현장에서 이력서를 작성했다.
중장년층은 온라인에 취약한 세대이기 때문에 사전접수 인원보다 현장접수 인원이 두 배 정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 관계자는 “사전 접수를 하신 분들은 미리 회사에 대해 파악하고 면접 준비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준비된 느낌이 든다”라고 설명했다.
현장접수를 한 시민들은 “마트에 가다가 안내문을 보고 오게 됐다”, “평소처럼 산책하던 길에 박람회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고 우연히 들르게 됐다. 구직 활동도 하고 다양한 체험도 하게 되어서 좋다” 등 다양한 사연을 전했다.
이날 현장면접 기업은 총 29개사, 이력서 접수대행 기업은 5개사였다. LG이노텍, 쿠팡, 맥도날드 등 대기업도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현장면접은 구인기업 인사담당자와 구직자의 1:1 면접으로 진행됐다. 중장년층이 대상인 박람회인 만큼 채용 직종은 생산직, 물류직이 대부분이었다.
인사담당자는 채용과 관련해 “아무래도 경력이 있거나 관련 기술을 보유한 분을 선호하게 되는 것 같다”라면서 ”지원자분들의 역량이 우수해 선발에 있어 고민이 많이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현장면접관에서는 특정 기업들에 지원자들이 몰리는 경향이 나타났다. 중장년층의 기업 선호 경향과 관련해서 한 관계자는 “아무래도 지원자분들은 급여가 높은 업무를 선호하신다. 스케줄 근무는 주말에도 일할 가능성이 있어서 여성분들이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식품 생산직 근로자를 뽑는 ‘더채움’, ‘뜨레봄’은 지원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무역사무원을 채용하는 주식회사 ‘씨에어허브’의 인기도 뜨거웠다. 한 관계자는 “씨에어허브는 올해 처음 함께한 기업인데, 사무직을 뽑기 때문에 더욱 인기를 끈 것 같다”라고 말했다. 세 회사 모두 2명을 채용한다고 했는데, 지원자는 몇 십 배에 해당했다.
반면 마을버스 운전원, 지게차 운전원 등 해당 분야의 자격증이 있어야 하는 기업은 지원자들의 발길이 적은 편이었다. 안내문에는 경력 무관으로 적시 되어 있지만 실무 경력이 없거나 적성이 맞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에 이 같은 결과가 나타난 것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취업클리닉관에서는 일자리 상담은 물론 이력서 작성 및 면접 기술 등에 관한 컨설팅이 시행됐다. 잡(JOB)학다식관에서는 일자리유관기관에서 진로설정을 위한 직업훈련과 기업지원정책, 생애설계 등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런가 하면, 이번 중장년일자리박람회의 차별점은 현장 면접 50%, 진로 상담 50%로 구성됐다는 점이다. 은퇴 후 제2의 직업을 갖고자 하므로 자신의 적성을 파악하기를 원하는 중장년층을 위해 이 같이 구성됐다.
특히 4차산업의 도래에 따라 미래유망일자리관이 마련됐다. 드론교육지도사, 도시농업관리사, 유튜브 크리에이터, 병원동행매니저 현직자가 참석해 시민들에게 멘토링을 해줬다.
드론교육지도사 현직자로는 위즈윙의 곽승계 대표가 참석했다. 그는 50+센터 등 드론교육지도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중장년층도 채용 수요가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도시농업관리사는 베란다, 텃밭 등에 농작물을 심는 것도 포함되고 모두에게 열려 있는 직업이다. 9종의 국가기술자격증 중 하나를 취득하거나 도시농업전문과정을 이수하면 도시농업관리사로 인정받게 된다. 자격을 갖추는 것도 쉽고, 취미를 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기에 중장년층에게 특히 추천된다.
또한 귀농귀촌귀어관과 창업관에서는 상담과 지원제도에 대해 알려주고 성공 멘토도 이야기를 전했다. 아울러 고양시통합일자리센터의 신중장년 강사양성 프로그램을 수료한 강사스쿨 1기생들의 발표회와 일자리와 관련된 메타버스 체험 등 부대 행사도 참가자의 흥미를 끌었다.
마당에 널어둔 육쪽마늘 씨알이 참 굵다. 주말 내내 마늘을 캤으니 온몸은 쑤시고, 흘린 땀으로 눈은 따가워도 수확의 기쁨이 모든 것을 이겨낸다. 이틀간 내 손같이 쓰던 ‘마늘 창’을 놓으니 가뿐하면서도 무언가 허전하다. ‘마늘 창’이란 모종삽보다 조금 큰 손잡이에 쇠스랑보다는 작은 창살이 두 개 혹은 세 개 달린 농기구다. 꼭 50년 전 이즈음, 마흔이 되기 전의 젊은 부모님과 마늘이며 감자를 캘 때에는 없던 녀석이다. 하얗고 통통한 마늘에 앳된 소년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시골 소년답지 않게 뽀얀 피부의 소년이 삽과 호미로 열심히 마늘을 캐고 있었다. 수업료와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서 조례시간에 담임에게 호명이 되었다. 급우들 형편이야 다들 비슷한 처지였건만, 이번 분기에는 어찌 다들 납부하고 몇 명만 미납이었다. 마늘을 캐서 팔아야 수업료를 낼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소년은 기말고사를 앞둔 시점에도 마늘 캐기에 열심이었다.
상고에 진학해서 농협 직원이 되어 가계에 보탬이 되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다. 맏이는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주장이었다. 평소 남편 의견에 무조건 순종하던 어머니는 맏이의 대학 진학과 관련해서는 요지부동이었다. 어머니가 자기주장을 그토록 강하게 하신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지막이자 두 번째는 여동생을 대학에 보낼 때였다. 인근 조선소에서 깡깡이(녹슨 배에 페인트칠을 하기 전에 망치로 녹을 떼어내는 작업)를 하고, 쉬는 날에는 농사를 지으며 손톱이 빠지도록 일한 어머니의 교육열은 아버지도 말릴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망치로 녹을 떼어내는 일을 하고 돌아온 어머니의 덜덜 떨리는 손을 보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진학한 뒤에는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해야 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위해 과외 교사와 학원 강사를 병행해야 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유학생의 처지는 다 비슷했으리라. 대학생활 내내 과외와 학원 강사를, 그리고 운 좋게도 졸업 전에 취업해서 월급을 받았지만 늘 지난한 삶이었다. 농사로는 가족 건사가 힘들어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사고로 몸져누웠고, 어머니는 아버지 병간호와 7남매를 혼자서 건사할 수 없었다. 첫 월급은 23만 원,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버지 병원비와 동생들 학비를 위해 집으로 송금했다.
36개월 군대를 마치고, 복학해서 재학 중 취업하고 1년간 직장생활과 학업을 병행한 뒤에 졸업장을 딸 수 있었다. 입학식에는 와보지 못했던 가족들이 졸업식에는 모두 상경해 함께했다. 거리 사진사에게 2000원인가 2500원인가를 주고 찍었던 가족사진은 아직도 우리 집 거실에 걸려 있다. 사진 속에서 어머니는 참 환하게 웃으며 학사모를 쓰셨다. 어머니에겐 그게 고된 삶의 보상이었으리라.
뒤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사는 게 삶의 우선순위였다. 사업에 실패하고 술독에 빠져 살다가 겨우 정신 차리고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사고를 당했던 아버지처럼 되기는 싫었다. 손으로 밤낮없이 바닷물에 녹슨 페인트 덩어리들을 쳐대는 노동으로 남자보다 거친 손을 한 어머니. 어머니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막냇동생이 대학에 입학하던 1986년, 동생 등록금을 납부해주면서 항상 어깨를 짓누르던 장남의 책임에서 조금 가벼워졌다. 동생들도 졸업하고 취업해서 자리를 잡고 있었고, 아버지는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고 어머니도 드디어 깡깡이를 그만둘 수 있었다.
장남 대신, 이제는 한 여자의 남편, 그리고 두 아이의 아빠라는 책임이 더 깊어졌다. 부서 경리로 일하던 아내와 사내 커플로 만나서 결혼했다. 회사 비품 하나도 살뜰히 아끼고, 부서 살림을 맵짜게 운영하던 모습에 반했다. 연애는 짧았어도 이 여자가 내 일생의 반려자다 싶었다. 연년생 두 아이를 키우면서 결혼 후에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억척스레 일했다. 아내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1986년부터 1988년은 내 인생의 첫 번째 전성기였다. 아시안게임부터 올림픽까지 내가 일하던 회사에서 참여했고, 참여 팀의 주요 팀원 중 하나였다. 건국 이래, 아니 단군 이래 가장 큰 행사가 내 손을 거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밤낮없이 일했고, 주말도 잊은 채 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미련한 일이었다. 또한 아내에게 너무나 미안한 일이었다. 두 아이의 육아를 아내에게 맡긴 채 회사 일에만 몰두했으니, 그래서 지금은 항상 아내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회사 일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아내의 희생 덕분이긴 했지만, 두 아이가 잘 자라고 있었고, 생애 처음으로 ‘내 집’, 아니 ‘우리 집’이 생겼다. 서울 외곽의 작은 주택이었지만 사글세도 전세도 아닌 ‘우리 집’이었다. 아이들이 벽에 낙서를 해도, 대문을 꽝 닫아도, 마당에 오줌을 싸도 한소리 듣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는 라면만 먹어도 배부를 것 같다며 아내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아침엔 영어학원, 저녁엔 중국어학원에 등록했다. 30대 후반에 접어드는 나이라도 시대의 흐름에 뒤처질 수는 없었다. 특히 외국과 일하는 것이 많은 업무 특성상 영어는 기본이고, 점점 발전하고 있는 중국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직은 미수교국이지만 조만간 중국과 국교가 수립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992년 중국과 국교가 수립되자마자 회사에서는 중국 지사 설립과 중국 공장 설립을 위해서 미리 준비하고 있던 팀을 중국에 파견했다. 팀장이 되어서 중국에 첫발을 내딛었다. 장기출장 가방을 싸주며 근심이 가득하던 아내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공산국가, 적대국의 이미지가 강했던 중국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지사가 설립되고 3년 뒤에 중국에 온 아내는 생각과 달리 많이 발전된 모습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1997년까지 중국에서 발판을 다지고 어느 정도 성과를 올렸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성과에 맞는 승진 자리를 얻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모든 기대를 베어버리는 IMF 구제금융 시대가 닥쳤다. 자고 일어나면 부도 소식이 들렸다. 재무 쪽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1달러라도 더 모으기 위해서 다들 혈안이었다. 달러 부족으로 흑자도산하는 기업들도 부지기수였다. 회사에서의 하루하루가 칼날 위를 걷는 듯했다. 가만히 있어도 불편하고, 무슨 일을 하려 해도 불편한 시기. 자칫 썰려나지 않기 위해 모두가 작두 위에서 위태롭던 시간이었다.
혹독한 시간, 책상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자리는 지키지 못했다. 핵심 인력이라 생각했던 내가 자르다 남은 인력이 되어버렸다. IMF의 파고는 조금 작아졌지만 개인들에게는 정말로 하루 앞을 알 수 없는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살얼음을 걷는 하루하루, 눈을 감으면 아내가, 눈을 뜨면 아이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톡 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끊어질 것 같은 지푸라기를 잡고 있는 이유였다. 그리고 어머니, 7남매의 무탈만을 위해 살아온 어머니의 이마에 주름 하나를 더 늘릴 수는 없었다.
엄혹한 시절이 지나고 조금씩 훈풍이 불었다. 훈풍을 따라 IT벤처 열풍이 불었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부터 인터넷 기업, 닷컴 기업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겼고 이내 한국에도 수많은 IT 기업들이 강남 테헤란로를 점령했다. 회사에서도 젊은 직원들을 모아 새롭게 도전해볼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20~30대 젊은 직원들이, 그것도 IT 관련이나 기술 관련 전공자들이 젊은 혈기로 뛰어드는 사업이라는 이미지를 ‘벤처’ 기업은 갖고 있었다. 이미 십수 년간 조직에 몸담아 회사원으로 살아왔던 구태가 몸에 밴 사람들이 섣불리 도전하기 쉬운 게 아니었다. 회사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렵게 IMF를 넘기고 새롭게 투자하는 사업인데 아직 혈기왕성한 젊음만 믿고 도전하는 직원들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었다. 회사라는 조직을 운영하고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어차피 남는 인력이었고, 그대로 버티고 있는다고 다시 원하던 자리가 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꼰대’ 소리 듣는 나이가 되어가는데 더 늦기 전에 도전을 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잘린다고 어디 가서 밥이야 굶겠는가. 아직 초등학생, 중학생인 아이들이 걸렸지만 마지막 도전이다 생각했다. 살아오면서 가장 큰 결심이었다.
사내 벤처팀의 사업계획서를 보았지만 처음엔 내용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십수 년간 해온 일과는 전혀 접점이 없던 사업 계획이었고, IT 분야는 전혀 알지 못했다. 주판을 쓰고 수기로 장부와 기획안을 쓰던 시기에 입사해서 경리가 타자를 쳐주던 시기를 지나왔다. 독수리 타법은 벗어났고 워드프로세서 정도는 다룰 수 있었다. 영어와 중국어를 배웠듯이 이제는 젊은 직원들에게 단어 하나하나, IT 관련 사업 하나하나를 배워가야 할 때였다.
많게는 스무 살, 적게는 띠동갑 정도 되는 직원들은 세대 차이를 넘어서 나에겐 아득한 존재들이었다. 오렌지족, X세대 등으로 불리던 그들은 나와는 다른 나라에서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 같았다. 여동생이 대학에 갈 때, 시대가 바뀌어서 이제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며 눈물을 흘리던 우리 어머니가 느끼던 그 감정 같은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 감정보다 더 멀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꼰대짓’을 하는 것만큼이나 보기 흉하다.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20대 때, 30대 때 열심히 일했던 나처럼, 벤처팀들도 자기 선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지켜봐주는 것이 중요했다. 대신 적절한 예산과 범위 내에서 그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면 되는 것이다. 닷컴 버블과 시작된 사내 벤처는 의외로 성공을 거두었고 젊은 청년들이 성공담에 한 줄을 보탤 수 있었다. 지금은 인터넷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지만 함께했던 청년들은 지금 여러 곳에서 맹활약 중이다. 가끔씩 들려오는 그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분당에서, 강남에서 밤을 새던 때가 떠올라 미소 짓게 된다.
사업 론칭이 성공하고 나서 다시 본사로 돌아왔고 중국 지사에 다시 갔다. 3년 후에 본사로 돌아오니 지천명을 넘긴 나이가 되어 있었다. 회사에서는 부속품처럼 25년 가까이 일하고 배터리처럼 방전되었다. 정년을 5년 남짓 남긴 그때, 회사 내 권력에서 밀려나 있어서 임원이나 사장단에 도전하기에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더 이상 도전할 여력이 내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바쁘게 살아온 시간에 어느새 훌쩍 커버린 두 아이는 스무 살을 넘어 성인이 되었으니 제 앞가림을 할 터였다. 늦은 나이에 방통대에 입학한 아내는 그동안 하고 싶어 했던 상담 관련 공부를 시작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이제는 진짜로 잉여가 되는 것은 아닌가, 출근길도 퇴근길도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건강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술과 폭식으로 인한 고혈압에 고지혈증, 당뇨까지. 쉰을 넘긴 몸은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IMF 시절 이후 다시 백척간두에 선 느낌이었다. 시간은 갈수록 빠르게 지나가고 머지않아 환갑을 넘길 텐데 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다. 부모님 세대의 쉰과 우리 세대의 쉰은 다르다. 또 우리 뒷세대, 그리고 지금 20대가 쉰이 되었을 때의 그 ‘쉰’이 주는 느낌은 전혀 다를 것이다. 나이와 직급에 얽매여 권위를 찾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벤처 일을 할 때 깨달았다.
이 나이쯤엔 이 정도 재산이나 이 정도 사회적 직위를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도 사회적 관습에 의한 고정관념이었다. 20대에 대학을 가고, 30대에 결혼을 하고, 40대에 내 집을 갖고… 이렇게 컨베이어벨트처럼 이루어진 한국인들의 삶을 한 장면으로 나타내며 비판하는 카툰을 본 적이 있다. 그렇게 정해진 대로만 산다면 60대에는 손주들을 돌보는 삶을 살아야 하리라.
참으로 평범하게 모나지 않게 살아온 50년이었다면 이제 남은 생은 그 컨베이어벨트에서 이탈해서 다른 곳에는 뭐가 있는지 살펴보며 살아도 좋지 않을까? 은퇴에 대해 처음으로 아내와 이야기했을 때 아내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당신처럼 꽉 막힌 일벌레가 이런 생각도 하다니 대견하다면서.
정년은 금방이었다. 30년 넘게 일했으니 미련이 없을 만도 한데 사원증을 반납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들과 술을 마시면서 처음으로 취한 날이기도 했다. 시원함 반, 아쉬움 반, 거기에 임원에 대한 미련 한 꼬집. 눈물이 핑 돌던 밤이었다.
퇴직 후에 딱 1년만 쉬자고 했지만 달리던 자전거는 그리 오래 멈춰서 쉴 수 없었다.
딱 가족이 먹을 것만 소일거리로 농사지으며 1년을 보내던 중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고상하고 우아한 취미생활은 거리가 멀었다. 몸을 쓰고 현장에서 뛰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맥도날드 시니어 알바도 해보고, 편의점 알바도 해봤다. POS를 익히는 것이 제일 어려웠지만 그래도 한때 IT 벤처에서 일했던 가닥에 그 뒤로도 꾸준히 컴퓨터를 다루다 보니 온갖 할인이나 쿠폰을 다루는 데도 익숙했다. ‘아직은 청춘!’ 이런 마인드가 아니었다.
40년 전, 내가 스무 살 때는 없었던 일들을 해보며 우리 아이들과 주변의 청년들이 어떻게 사는지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패스트푸드점 복장과 편의점 조끼를 입은 나를 보며 아내와 아들들은 누구보다 좋아했다. 가족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가족과 다시 하나가 되는 느낌, 참 오랜만에 받는 느낌이었고 이때부터 다시 나의 제2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같은 시기에 퇴사한 동기와 무역업을 시작한 것은 한참 뒤였다. 다 잊어버린 중국어를 떠듬거리며 중국전자제품을 수입했다. 거창한 사업도 아니고 동기와 나 두 사람 소소한 용돈벌이로 시작했다. 그래도 저가 저품질 제품을 다량으로 떼다가 파는 일은 하지 않는다. 적정 가격의 적정한 품질의 제품을 파는 게 목적이었다. 사업을 키울 생각은 없었지만 몇 년 새 규모가 커져갔다. 욕심을 부리지 말자,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하자. 시작할 때의 다짐은 잊지 않고 지켜가고 있다. 주말 농장과 아내, 손주들과 함께할 시간은 빼두고 일하는 것이 가장 먼저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다운 할아버지가 지금 내 삶의 목표 중 하나다. 할아버지가 아닌 ‘노땅’이나 ‘꼰대’가 되는 것이 문제 아닐까? 푸근하게 가족과 이웃을 품어줄 수 있는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다운 할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오늘 하루도 웃으며 시작한다.
이제 마늘을 엮어 공기가 잘 통하는 곳에 걸어둘 때가 되었다. 장마철을 무사히 보낸 마늘은 농막 처마 밑에서 더욱 단단하게 맵고 달달하고 향긋한 마늘로 익어갈 것이다. 그처럼 내 안의 할아버지가 더 할아버지다워졌으면 좋겠다.
새해가 되면 나이 드는 걸 무턱대고 슬퍼하기만 해야 할까. 무조건 서러워하고 쓸쓸해하기보다는 흘러가는 세월의 흐름을 노련한 서퍼처럼 즐길 수는 없을까. 당당하고 지혜롭게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 바로 웰에이징(Wellaging)이다.
몇 해 전 영국의 한 TV 채널에서 ‘멋진 패셔니스타(Fabulous Fashionistas)’란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다. 이 프로그램에는 6명의 80대 여성이 등장하는데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확고한 패션 취향을 드러내며 스타일 배틀을 펼쳤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말미에 한 출연자는 이렇게 외쳤다.
“나이 든다는 것이 이토록 흥미로운 일이라는 걸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어!”
과연 나이 든다는 것이 큰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처럼 두려운 일일까? 그 먹구름을 피해 무조건 도망쳐야만 할까? 새해에는 제대로 나이 드는 일, 즉 웰에이징 계획을 세워보자.
장수 과학자라 불리는 박상철 교수는 자신의 책 ‘웰에이징’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웰빙(Wellbeing, 참살이)이라고 한다면 사람답게 늙는 것은 웰에이징(Wellaging, 참늙기)이고, 사람답게 죽는 것은 바로 웰다잉(Welldying, 참죽음)이다. 생명의 노정을 억지로 인위적인 방법을 통해 거스르는 행위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웰에이징이란 결국 자연에 순응하며 삶의 가치를 극대화시켜가는 자기 혁신의 과정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수십 년 전 패션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이 했던 말, 즉 “여성을 늙어 보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젊어지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내용과도 통한다. 어떻게 하면 젊어 보일까를 고민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나다워 보일까를 고민하라는 것이 웰에이징의 핵심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패션은 빠트릴 수 없는 영역이다. 앞서 소개한 ‘멋진 패셔니스타’처럼 패션은 자신을 더 잘 알게 하고, 또 질리지 않는 취미생활이 될 수도 있다. 그건 교복을 고쳐 입던 10대에도, 노년기로 접어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패션 안에서 어떻게 ‘웰에이징’을 실천할 수 있을까.
우선 자신만의 패션 기준을 만들자. 일상을 ‘루틴’하게 만들수록 머릿속은 가벼워진다. 옷을 고를 때도 마찬가지다. 가령 스커트는 미디 길이의 A라인 스커트, 니트는 굵은 짜임보다는 코가 조밀한 것, 구두는 굽이 5cm 이하 등 자신의 특징을 고려해 일정한 기준들을 만든다. 이런 식으로 쇼핑을 하면 거울 앞에서 후회하는 일도(주로 늙어 보인다는 푸념과 함께) 자연히 줄어들 것이다.
두 번째로는 트렌드보다는 클래식에 집중하자. 오늘날의 패션 앞에는 ‘패스트’라는 단어가 붙는다. 맥도날드 햄버거처럼 금세 먹고 치워버리는 것, 그것이 요즘 패션의 특징이다. 그 속도에 헐떡이며 맞춰갈 필요는 없다. 클래식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들어 있는 아이템들(예컨대, 캐시미어 카디건이나 캐멀 컬러의 코트, 진주목걸이 등)은 당신의 부모 세대에도, 그리고 당신의 자식 세대에도 여전히 옷장에 걸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젊음이 아닌, 영원을 선물할 것이다.
세 번째로는 옷을 사는 것만큼 관리하는 일에도 신경을 쓰자. 나이는 우리만 드는 것이 아니다. 옷장 속 코트 소매에서도 나이는 느껴진다. 옷 역시 사람처럼 관리가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겨울 소재는 솔을 이용해 먼지를 털어주고, 신발 역시 슈트리를 안에 넣어 보관하자. 화분을 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옷에도 신경을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애착이 생긴다. 그게 오래 가는 ‘멋’의 시작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소홀하지 말자. 일본에서는 노인들에게 립스틱 바르기를 권장했더니 기저귀 사용률이 줄었다는 보고가 있다. 동양 의학의 근본정신 중 하나는 사람의 몸과 마음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나이 듦에 대해 객체가 되어 지켜만 볼 것인가, 아니면 주체가 되어 그 속도를 조정해갈 것인가. 립스틱을 바르는 것은 자신에게 관심을 놓지 않겠다는 아주 작은 표식이다. 언제나 그랬듯 파도는 작은 물결로부터 시작된다.
나이라는 감옥에 갇혀 다가온 새해를 두려워하지 말자.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즐기는 것, 이보다 중요한 삶의 목표는 없을 테니.
얼마 전에 어느 여성 국회의원이 발언 중에 비정규직 급식 요원을 ‘밥 하는 아줌마’로 비하했다고, 매스컴의 공격을 받고 발언자가 당사자들인 급식요원 앞에서 공개 사과하고 곤욕을 치룬 일이 있었다.
옛날 우리 모두가 못 살던 시절, 서울의 웬만한 중산층 가정이면 거의 대부분 ‘밥하는 아줌마’인 가정부를 집에 두고 살았다. 다만 한 식구라도 먹는 입을 줄이기 위해 빈곤한 농촌에서 어린 딸을 서울로 올려 보내 흔히들 말하는 상주하는 식모살이를 시켰다. 당시엔 식모라고 불렀으나 언제부터인가 파출부나 가정부로 변하더니 요새는 가사 도우미로 명칭이 바뀌어서 조선족들이 그 일을 많이 하고 있는 걸로 안다.
그 시절 추석이나 음력 설 때가 되면 가정부 언니들이 자기 시골집에 다녀온다고 해서 주인이 차비랑 시골 식구 선물 꾸러미를 안겨서 잘 다녀오라고 보내면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행방불명되어 사라지는 일도 있고 또 다른 집으로 스카우트 당하는 일도 있었다. 우리 친정도 물론 필자가 결혼 할 때까지도 아줌마가 계셨고, 또 결혼 후 시댁에서 시집살이를 할 때도 살림을 돌봐 주는 도우미가 언니가 있었다.
금자 씨는 시골에서 초등학교 졸업을하고 어려서 우리 시댁에 들어와서 우리 시어머니 시중을 들며 자란 시댁의 도우미 언니였다. 금자씨는 46개 띠인 필자와는 띠 동갑으로 58 개띠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3살 때 우리 집으로 들어와서 28살에 결혼하는 날까지 15년을 우리와 함께 살았다. 금자 씨의 한문이나 영어 등의 중등 교육은 시어머니가 학습지를 배달 받아서 직접 시키셨다. 금자 씨가 어느 정도 자라서는 시어머니 대신 우리 집 가사 일을 책임지게 되었다. 사실 금자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사나 육아에 꽝인 필자가 그 시절로는 드물게 결혼 후에도 워킹 맘으로 활동을 하면서, 승진을 하고 또 총수 비서실장의 꼬리표를 달 수 없었을 것이다.
금자 씨가 나이 들어 결혼 적령기가 되자, 필자는 당시 시동생이 사장으로 있던 중소기업인 의료기 회사의 기술 사원과 선을 보고 두 달만에 결혼을 시켰다. 데이트는 주로 아파트 앞 정원에서 만나 외식은 압구정동 맥도날드에서 했다. 신랑은 가방 끈은 짧지만, 손재주와 머리가 좋고 A/S 기술도 좋아 회사에서 매우 촉망 받았던 의료 기구 기술자였다.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대학을 포기 했다고 수줍게 말하는 청년이었다.
필자의 아들을 내 대신 키워 준 금자 씨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던 필자는 마치 본인의 결혼처럼 설레고 신이 나서 가구 시장을 함께 돌아다니며 혼수 감을 준비했다. 물론 비싼 물건을 사서 주지는 못했지만 당시 유행하던 티크 장롱과 설합장을 구입했다.
금자 씨 부부는 시어머니가 해준 미아리 방 한 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고 나중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난 후에는 동대문 지하상가에 조그만 의료 소모품 및 의료 기구 상회를 차렸다.
점차 사업이 안정되고 애들이 자라자 부부는 자연스럽게 자녀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금자 씨의 아들은 아빠를 닮았는지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더니, 그 어렵다는 의대를 입학하고 거기서도 우수해서, 요즘 제일로 쳐준다는 안과를 선택하여 수련의를 마치고, 동료 의사인 방사선 여의사를 만나 얼마 전에 결혼했다.
이제 금자 씨는 의사 아들에다 의사 며느리까지 둔 시어머니가 되어,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받으며 남들이 그토록 바라는 행복한 사람이 됐다. 금자 씨, 그대가 부러워요.
요즘 TV를 켜면 , , 등 식욕을 자극하는 먹는 방송, 줄여서 ‘먹방’ 프로그램들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먹방이 주요 콘텐츠로 자리를 굳히면서 함께 생겨난 음식 관련 신조어를 모아봤다.
찍먹부먹
탕수육이 소스와 따로 배달되면서 소스를 찍어 먹는 ‘찍먹’과 부어 먹는 ‘부먹’의 대립(?)이 시작됐다. 소스가 스며들어 촉촉하고 새콤달콤하게 풍부해진 맛을 선호하는 부먹파와 튀김의 바삭한 식감과 적당한 양의 소스를 추구하는 찍먹파가 순간 충돌하는 것이다. 소스가 탕수육과 따로 배달된 순간 그 누구도 ‘찍먹 vs 부먹’의 논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은 찍먹을 선택할 것인가? 부먹을 선택할 것인가?
A 나 찍먹하게 소스는 따로 줘.
B 탕수육한테 안 미안해? 찍먹이 뭐니? 탕수육은 부먹이 진리지!
단짠단짠
단어에서 단맛과 짠맛이 느껴지듯이 ‘단짠단짠’은 단 음식을 먹은 후 짠 음식을 먹고 이를 반복하면 끊임없이 먹을 수 있다는 뜻으로 중독성이 있는 달고 짠맛을 의미한다. 단짠단짠이 유행하면서 맥도날드는 솔티드카라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내놓았고 기타 식음료 업계에서도 이를 겨냥한 식품들을 출시했다.
A 아 우울하다….
B 우울한데 단짠단짠 고?
아아/따아
처음 들었을 때 무슨 뜻인지 짐작하기도 힘든 이 단어는 첫 음절만을 따서 만든 신조어다. 자칫 감탄사로 들릴 수도 있지만 ‘아아’와 ‘따아’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따뜻한 아메리카노의 줄임말이다. 딱히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뜻은 없지만 여럿이 주문할 때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A 커피 뭐 마실래? 아아?
B 이 시렵다. 오늘은 따아.
혜자롭다/창렬하다
배우 김혜자를 모델로 내세워 만들었던 편의점 도시락이 가격 대비 상품의 질과 양이 상당히 높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어떤 음식이 가격보다 실속 있을 때 ‘혜자롭다’, ‘혜자스럽다’라는 말로 소비자의 만족스러움을 표현하게 됐다. 한편 가수 김창렬을 모델로 내세워 판매한 인스턴트 음식은 가격에 비해 다소 양과 질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으며 네티즌들이 ‘창렬하다’, ‘창렬푸드’, ‘창렬스럽다’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A 김밥 속에 꽉 찬 참치 좀 봐. 진짜 혜자롭다.
B 내 김밥은 왜 이렇게 창렬하지? 너한테 참치 다 넣어주셨나보다.
얼리어먹터
얼리어답터(Early adopter, 남들보다 먼저 신제품을 사서 써보는 사람)와 ‘먹는다’는 의미를 섞은 단어로 새로 나온 음식을 먼저 접하는 부류의 사람을 뜻한다. 예를 들어 벚꽃 시즌에 맞춰 새로 나온 맥주 ‘호가든 체리’, 2017년 한정판으로 나온 라면 ‘핵 불닭볶음면’, 신제품 과자 ‘꼬북집’ 등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아직 생소한 음식을 먼저 찾아서 먹어봤다면 얼리어먹터라 할 수 있다.
A 너 이번에 새로 나온 호가든 체리 마셔봤어?
B 당연하지~ 내가 누구야~ 얼리어먹터잖아~
아파텔, 호피스텔, 벅세권, 맥세권, 스세권, 알파룸, 베이, 팬트리, 갭투자, 깡통주택 등의 신조어가 등장한 시기는 각각 다르지만 현재 부동산 시장에서 쓰이는 말들이다. 부동산 관련 용어는 주로 건축법 등에서 자주 쓰이지만 새로 등장하는 표현 중 일부는 건축업계 등의 주거용 부동산 마케팅 전략에서 만들어져 통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신조어는 현 세태를 반영하는데, 들여다보면 나름대로의 시사점도 있는 부동산 풍속도다. 오피스텔(Officetel), 아파텔(Apartel), 호피스텔(Hofficetel) 등의 신조어에는 호텔(Hotel)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고급화를 지향하는 최근의 부동산 트렌드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패스트푸드 배달 서비스가 가능한 지역을 뜻하는 부동산 용어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지하철 역 주변 지역을 의미하는 역세권 개념을 모방해, 맥도날드와 스타벅스 배달 가능 지역을 맥세권, 스세권 등으로 만들어 부르고 있다. 이러한 신조어는 역세권에 위치한 집을 선호하듯 특히 1인가구의 젊은 세대가 프랜차이즈 등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을 중시해서 생겨난 말이다. 이는 도시 외곽의 주택보다 도심 주택을 선호하는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알파룸(α room), 베이(Bay), 팬트리(Pantry) 등 주택 실내공간과 수납공간 디자인을 지칭하는 신조어와 함께 갭투자와 깡통주택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깡통주택의 피해자는 세입자들이다. 요즘은 부동산 투자 개념 변화 등에 따라 주택 구입과 전세 또는 월세에 대한 생각들이 예전과 많이 다르다. 집값 상승이 확실하지 않으면 목돈을 투입해 주택을 소유하는 것이 부담이라고 생각한다. 건물 감가상각과 함께 수리 유지비용만큼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파텔(Apartel) 건축업자들이 만든 신조어로 주거용 오피스텔을 말한다. 아파트의 편리함에 오피스텔의 장점이 결합된 형태로 아파트와 오피스텔의 합성어다. 발코니가 없고 욕실에 욕조 설치를 할 수 없다. 그 외는 아파트와 비슷하다. 주로 상업지역에 지어지기 때문에 고밀도로 짓는 양상을 보인다.
체크포인트 : 아파트와의 전용면적 비율 비교
오피스텔(Officetel) 오피스(Office)와 호텔(Hotel)의 합성어다. 오피스텔은 업무용 오피스텔과 주거용 오피스텔로 구분된다. 건축법에서는 오피스텔을 업무시설로 분류하고 있다. 다만 주민등록 전입신고가 되어 있으면 취사시설 등 거주시설 구비 및 실제 사용하는 용도 등을 종합해 주거용 오피스텔 여부를 판단한다. 주거용 오피스텔일 경우 이외에 다른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 다주택자로 인정되어 처분할 때 양도소득세가 중과될 수 있다.
체크포인트 : 세금과 관리비, 주차문제, 시설수리 부담, 임대수요와 회전율
호피스텔(Hofficetel) 오피스텔(Officetel)과 호텔(Hotel)의 합성어로 숙박시설을 의미한다.
체크포인트 : 지분형 숙박시설, 숙박시설 운영과 관리 부담, 고객 수요
벅세권 버거와 역세권의 합성어다. 처음에는 맥세권이라 하여 맥도날드 같은 외식업체들이 배달 서비스가 가능한 지역을 뜻했는데, 맥도날드 이외 다른 패스트푸드점들도 배달 서비스를 하고 있어 보다 포괄적 개념인 벅세권이란 용어로 바뀌었다. 스세권은 스타벅스와 역세권의 합성어다.
체크포인트 : 역세권, 주변 유흥시설, 정서문제
알파룸(α room)고객이 원하는 대로 만드는 공간을 의미하며, 아파트 평면을 설계할 때 남은 자투리 공간을 활용한다. 입주자 선택에 따라 오픈형 서재로 만들거나 벽을 올려 방이나 수납공간으로 바꿀 수 있다. 보통 드레스룸, 서재 등으로 활용한다.
체크포인트 : 자투리 실내 공간 활용과 편리성
베이(Bay) 아파트의 전면부 거실 쪽 공간을 말한다. 베이는 전면 발코니를 기준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이다. 전면부에는 대개 거실과 안방이 각각 한 개씩 위치하는데 이를 ‘2베이 구조’라고 한다. 3베이란 거실과 방 2개가 발코니를 통해 외부로 배치되는 구조이고, 4베이는 방 3개와 거실이 전면에 노출되는 구조다. 전면부 공간수가 많으면 집 전체가 밝아지는 장점이 있다.
체크포인트 : 실내공간 규모와 배치
팬트리(Pantry) 팬트리는 다양한 물건을 수납하는, 창고처럼 사용되는 공간을 말한다. 붙박이장을 대신해 대형 팬트리를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원래는 식료품을 보관하는 작은 방을 의미한다. 주방 옆에 설치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요즘에는 복도나 작은 방에도 설치한다.
체크포인트 : 고객수요 반영 정도, 실내공간 활용
갭투자 아파트 매매 가격과 전세 가격의 차이(Gap)가 최저치로 줄어든 상황에서 전세가율이 높은 지역 급매물을 매입한 후 기존 전세 가격보다 높게 임대해 투자 자금 회수는 물론 시세 차익을 추구하는 방식을 말한다.
체크포인트 : 주택가치 판단, 시장분석, 담보대출
깡통주택 집주인이 집을 매매해도 대출금이나 세입자 전세금을 다 갚지 못하는 주택을 말한다. 주택담보대출금과 전세보증금을 합친 금액이 주택 매매 가격의 80%가 넘을 경우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체크포인트 : 전세가격 비율, 등기부등본, 시장분석
부동산 시장, 앞으로 어떻게 될까?
지금과 같이 경기침체가 지속되면 수요자들은 도심 역세권의 소규모 실속형 임대를 더욱 선호할 수밖에 없다. 부동산 시장의 지역 차별화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또한 주택 공급과 세금, 금융정책 등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세 가격 상승과 주거문제는 여전히 큰 숙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신혼부부, 소외계층 임대주택 제도도 도심 주택 공급의 한계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부동산 시장은 복합 시장이다. 경제를 말하고 문화를 보여주는 시장이다. 부동산 트렌드와 신조어를 살펴보면 사회 분위기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건설사와 부동산 개발 업계는 이런 수요와 분위기를 감안해 마케팅을 한다. 중요한 것은 일시적 미봉책이 아닌 장기적 안목으로서의 부동산 정책과 주거용 부동산 개발과 공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양질의 도심 부동산 공급의 지속성, 환경과 에너지를 고려한 개발 환경 조성이 숙제가 되었다. 주택정책은 어렵더라도 늘 기본원칙이 중시되면서 공감과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다음 문제들을 풀어보세요
오피스텔 임대 수익률을 계산할 때 실수하는 것은 무엇일까?
해설과 답
임대수익률=연간 임대료(월 임대료×12개월)-대출이자/분양가격-보증금-대출금
재임대 상황 발생 시 소요시간을 생각해야 하고, 이러한 임대 공백으로 인한 월 임대료 감소는 연간 총임대료 중에서 통상 한 달 치로 추정한다. 시설 수리비용, 월세 수납관리에 따른 부담, 관련 중개수수료, 세금, 임차인이 지급하는 관리비도 적정성 등을 판단해야 한다. 오피스텔 적정 임대수익률은 보통 정기예금 금리보다 3% 내외를 더한 것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건물, 토지 등 자산가치도 물론 중요하다. 토지의 크기, 지분비율, 모양 등과 연관된다. 오피스텔 투자에 있어, 입지와 시설에 강점이 있는 좋은 오피스텔은 주변 공급물량이 많아도 매력적이며, 반대로 겉으로 나타나는 임대수익률만 높은 오피스텔은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좋은 오피스텔은 주변 공급물량이 많아도 매력적이며, 반대로 겉으로 나타나는 임대수익률만 높은 오피스텔은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김정렬(金淨烈) 한국일반행정사협회 전임교수
국내 최초로 부동산 전문가들로 네트워크를 구성, RE멤버스를 설립하고 부동산써브 대표를 역임했다.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자산신탁, 기업체, 금융기관 등에 부동산 자문을 꾸준히 하고 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딸아이의 결혼식을 앞두고 박명수(59·여)씨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양가 하객을 50명씩만 초대하기로 했는데, 남편과 딸의 손님, 친척들을 꼽다 보니 자신이 부를 수 있는 친구는 10명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겨우 친구 몇 명을 추려 결혼식을 마쳤지만, 그 후가 더 골치 아팠다. 왜 자신은 부르지 않았냐며 섭섭해 하는 친구들을 달래기 바빴고, 기껏 청첩장을 주었는데 오지 않은 친구 때문에 실망감도 컸다. 고향 친구, 동창, 회사 동기, 동네 이웃도 모자라 SNS로도 친구를 맺는 요즘, 박씨처럼 친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많거나 관리를 잘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이들이 늘었다. ‘진정한 우정은 친구의 수가 아니라, 그 깊이와 소중함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영국 극작가 벤 존슨의 명언처럼, 몇 명의 친구를 사귀는가보다는 어떤 친구와 어떻게 지내느냐를 고민해야 할 때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도움말 윤선현 베리굿 정리컨설팅 대표
참고 및 발췌
베리굿 정리컨설팅 윤선현 대표의 저서 를 살펴보면 “가장 친한 친구를 꼽아보고, 왜 그가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말해보세요”라는 물음에 90%가 넘는 사람이 어렸을 적부터 오랫동안 알아온 친구를 말한다고 한다. 윤 대표는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옛 속담이 있지만, 어느새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관계란 오래될수록 성공적이다’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오래된 친구가 가장 친한 친구일 경우도 있지만, 응답자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그들 중 절반 이상이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당연히 그렇지 않으냐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 친구 관계, 이상과 현실 사이
‘오래된 친구가 좋은 친구다’라는 말처럼 흔히들 착각하는 게 ‘친구는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윤 대표는 “자신의 인맥과 범위를 자랑하는 이들이 있다. 집으로 비유하자면 ‘우리 집엔 비싼 물건이 엄청 많아 창고가 세 개나 있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비싼 물건이 많다는 것은 부유함을 나타내지만, 그 부유함이 꼭 사람을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거나, 그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나타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조언한다. 몇 명을 알고 있는지와 그 사람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왜 친구가 없을까?’라는 불안한 마음에 인맥을 채우려 한다면, 우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관계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음 체크리스트를 참고해 내가 꿈꾸는 관계와 실제로 관리할 수 있는 관계는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자.
1. 나의 VIP(아주 친한 친구)들은 1년에 [ ]번은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2. 나의 보통 친구들은 1년에 [ ]번은 직접 만나고 싶다.
3. 각각 친구 수를 곱해서 두 숫자를 더한다. 이것은 1년에 약속이 [ ]번 있다는 뜻이다.
4. 나는 한 달에 [ ]번 정도 약속에 나갈 수 있다.
5. 내가 1년에 나갈 수 있는 약속은 [ ]번 이라는 뜻이다. (4×12)
3 의 숫자와 5의 숫자의 차가 클수록 내가 꿈꾸는 관계와 현실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관계의 괴리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년에 나갈 수 있는 약속 수(5)보다 내가 나가고 싶은 약속 수(3)가 많다면, 뜻대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버거운 상태일 것이다. 윤 대표는 “한 사람에게 필요한 관계의 양이란 결코 다른 사람이 정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을 위한 시간을 먼저 제외하고, 가장 소중한 가족과 VIP들에게 쏟고 싶은 시간을 제외한 뒤, 그 외의 시간에 감당할 수 있는 관계의 한계를 가늠해야 한다”며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시간부터 확보하고 나면, 양부터 먼저 채우려던 마음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스마트한 세상의 똑똑한 친구 관리
윤 대표는 인맥을 정리할 때 가장 유용한 방법으로 ‘휴대폰 연락처 삭제’를 추천한다. 아마 일일이 전화번호를 외우거나 수첩에 적어 다니던 시절에는 불필요한 연락처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휴대폰만 있다면 단 몇 초 만에 연락처를 저장할 수 있고, 외워야 하는 부담도 없기 때문에 요즘은 친한 사이가 아니더라도 의례적으로 휴대폰 번호를 입력해 둔다. 채우기 쉬웠던 만큼 정리도 쉬운 게 휴대폰 연락처다. 다음 기준을 참고해 지금 바로 연락처를 삭제해보자. ‘그래도 연락할 일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은 과감히 버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 1년 이상 연락을 주고받지 않은 사람
- 앞으로 서로 연락할 일이 없는 사람
- 내 삶을 방해하거나 안 좋은 감정을 주는 사람
- 연락처가 변경된 사람
이 방법을 통해 윤 대표의 한 지인은 휴대폰에 있는 전화 목록 중 무려 600명을 삭제했다고 한다. 스마트한 세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SNS 친구다. 대체로 친구를 쉽게 만들고 초대할 수 있어 정신없이 친구가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 윤 대표는 “몇 년 전 맥도날드에서 페이스북 친구 10명을 지우는 사람들에게 햄버거를 공짜로 주었더니, 1주일이 채 되지 않아 23만 명이 넘는 사람이 페이스북 친구 리스트에서 지워졌다고 한다. 쉽게 맺은 관계일수록, 쉽게 끊어지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휴대폰 연락처처럼 친구 목록을 보며 정리도 하고 내가 하는 SNS 특성에 맞게 관계를 유지해보자.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에서 차는 발이나 다름없다. 차가 없으면 누구나 꼼짝도 할 수가 없다. 이민 가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운전 면허증을 따는 일이었다. 그리고 차를 구입해야 하는데 그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낯선 땅에 천지가 어리둥절하고, 가난한 이민살림에 비싼 새 차를 산다는 것은 엄청난 사치였다.
필자는 두 번에 걸쳐서야 겨우 캘리포니아 운전면허증을 취득했다. 미국면허증을 따는 일은 만만치가 않았다. 필기 시험은 그렇다 해도, 실기시험의 시내주행은 지금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운전 라이센스를 어렵사리 얻어내고 드디어 필자 소유의 중고차 한대를 구입했다. 남편이 타던 싸구려 중고차는 온 가족이 타기에 작고 좁기도 했지만 틈만 있으면 골치를 썩였다.
남편과 함께 하루 종일 쏘다니며 미국인 자동차 매매상뿐만 아니라 멕시칸, 한국인 자동차 판매상을 돌아다녔다. 결국은 한국인에게 하얀 색 밴 한대를 구입했다. 낯선 땅에서 소유한 첫 재산이었다. 남편은 신이 나서 몇 번씩이나 차를 닦아 대더니 기념으로 바람을 쐬자며 온 가족을 출동시켰다. 아이들은 세탁소 근처에 있는 ‘인 앤 아웃’ 햄버거를 먹고 싶다고 했다.
그 햄버거는 한국사람들 그리고 대체로 미국인들에게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필자도 이따금씩 먹고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이유는 모든 재료가 냉동 식품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당시 ‘인 앤 아웃’은 백인이 아니면 종업원으로 채용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은 하늘을 치솟아 몇 십분 씩 줄 서는 것은 보통의 일이었다.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고 남편은 싼타모니카 언덕을 지나 대단한 미국의 거부들이 살고 있는 어마어마한 동네로 구불구불 구경을 시켜줬다. 그 유명한 해변도로 1번 후리웨이를 타고 멀리까지 약 두어 시간은 돌아 다닌 것 같았다. 어느 작은 해변 골목길로 들어설 때쯤에 차가 덜컹 덜컹하더니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편은 하얗게 당황해 안절부절 야단이 났다.
덩달아 아이들도 불안해 했다. 차에서 내려서 왔다 갔다 하더니 문제가 생겼다며, 시동이 걸리지 않아 더 이상 갈수가 없다고 했다. 필자도 갑자기 어찌 해야 하는지 몰라 멍청히 서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동네에서 졸지에 발없는 미아가 된 것이다. 필자는 어딘가 연락을 해야 했지만 그때는 핸드폰도 없었다.
얼마 후에 세리프(경찰차)가 왔다. 자초지종을 묻더니 라이센스(운전면허증)와 보험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차는 우선 길가의 한편으로 안전하게 옮겨놓아야 한다며 도와주기를 시작했다. 여러 사람이 힘으로 이리 밀고 저리 밀고 하더니 자리를 잡았다. 어느새 캄캄한 밤이 되어 쌀쌀한 바람이 옷 속으로 스며 들었다. 바닷가 옆이라 더 바람이 불어왔다.
옷을 벗어 아이들을 감싸 안고 대책을 연구했다. 차를 그 자리에 일단 그대로 놔두고 내일 다시 와서 처리하기로 했다. 남편은 이리저리 둘러 보더니 다행히도 세탁소가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다며 그냥 걸어가자고 했다. 가족들은 터덜터덜, 대략 한 시간 넘게 밤길을 걸어온 것 같았다.
멀리 필자의 세탁소가 보이기 시작할 때는 그야말로 환희였다. 밤11시, 차가 없으니 집으로 갈수가 없다. 그렇다고 교회사람들을 불러 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도착 후, 밤늦게 다시 캄캄한 세탁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기분이 묘했다. 일단은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했다. 여기저기 찾아보니 한국라면이 있었다. 세탁소 안에서 냄새를 풍기며 라면을 보글보글 끓여 먹었다. 구수한 라면 맛이 기가 막혔고, 가족들은 기분이 좀 풀린듯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세탁소 안에서 하룻밤을 지내야만 했다. 필자는 궁리 끝에 우선 걸레를 만들어, 가족이 잠잘 공간만큼의 바닥을 깨끗하게 닦아냈다. 맨 밑에는 푹신한 담요를 몇 장 깔았고 그 위에 깨끗하게 빨아놓은 손님들 이불 몇 개를 두둑하게 깔아놓았다. 손님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또 깨끗이 다시 빨아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손님들이 찾아가지 않았던 옷들과 수건을 꺼내어 돌돌 말아 베게도 만들었다. 아주 부잣집 몇 천불 짜리 고급 거위 털 이불도 꺼내어 덮기로 했다. 네 식구가 두 다리 쭉 뻗고 자기에는 아주 훌륭한 잠자리가 만들어 졌다.
아이들은 마치 캠핑을 온 것 같다며, 아늑하게 꾸며진 잠자리 위에 벌러 덩 눕더니 두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가며 좋다고 했다. 남편도 웬만한 텐트보다 좋다며 따뜻한 커피한잔을 타 먹자고 했다. 나름대로 낭만이 흘렀다. 온 가족은 중고차와 씨름한 덕분으로 피로가 몰려와 어느새 골아 떨어졌다. 결국 가난이 가져다 준 중고차 경험은 전혀 색다른 캠핑세계를 맛보게 해주었다. 비록 힘겨운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그것은 또 생각하기 나름이었고 받아들이는 자의 긍정적 위안이었다.
차디찬 세탁소 콘크리트 바닥에서의 하룻밤은 이민자가족에게 커다란 추억거리를 안겨주었다. 언제 또 필자 가족이 그러한 잠자리를 맛볼 수 있을 것인가라는 생각에 오히려 감사했다. 아이들도 생전처음으로 맞이한 낯선 경험에 불만 없이 잘 잤다고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모닝커피를 먹기 위해 맥도날드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깔깔대는 웃음이 가득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처럼 지난날의 고된 이민생활은 결국 필자 삶의 커다란 재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