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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놀이 말고 공연·전시 보자… 4월 문화소식
- ●Exhibition ◇유람일지: 유(儒)를 여행하다 일정 4월 21일까지 장소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에서 만나는 충청 유교 문화유산’을 주제로 하는 전시는 조선시대 선비의 삶을 ‘고택’, ‘서원’, ‘구곡’(九曲)으로 나눠 소개한다. 집, 학교, 자연이라는 공간을 통해 나고 자란 선비의 삶의 궤적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닮았다. 1부 ‘고택유람’은 충청도 명문가인 파평 윤씨 가문의 명재고택을 중심으로 한다. 윤증의 초상 초본, 문중의 교육 공간인 종학당의 디오라마(실물 축소 모형) 등을 볼 수 있다. 2부 ‘서원유람’에서는 충청도 유일의 유네스코 등재 서원인 돈암서원을 통해 배움과 실천을 지향한 선비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예학을 정립한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 그리고 송준길, 송시열은 서원의 대표 선비로 꼽힌다. 3부 ‘구곡유람’에서는 율곡 이이의 정신적 이상향이자 선비들이 자연에 은둔하며 학문을 수양했던 공간인 ‘구곡’을 디지털 화폭에 담아낸 수묵 미디어아트 영상을 전시한다. 최병구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선비들이 이야기하는 시대정신, 일상의 가치, 타인을 대하는 태도, 자연을 품은 풍류 등을 통해 현재의 우리를 되돌아볼 수 있는 힐링 시간을 갖길 바란다”고 전했다. ◇우제길 : 빛 사이 색 일정 5월 12일까지 장소 전남도립미술관 평생 ‘빛’을 쫓으며 독창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한 우제길(1942~) 작가의 회고전. 총 100여 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1부 ‘기하학적 추상의 시작’은 ‘빛’을 주제로 하기 전인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그의 과도기적 작품을 살펴본다. 2부 ‘어둠에서 찾은 빛’에서는 절단된 면의 틈 사이로 솟아나는 빛 작품들과 어두운 배경에 작가 특유의 직선이 강조된 대작들을 소개한다. 3부 ‘새로운 조형의 빛으로’는 1990년대 중반 이후 구도가 다양해지고 밝은 색채가 등장하며 확장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4부 ‘색채의 빛’은 원색의 빛을 다양한 실험적 방식으로 구현한 작품들을 소개하며, 5부 ‘지지 않는 빛’에서는 신작들을 만나볼 수 있다. ●Book ◇어른의 말습관(김진이·다른상상) 같은 말이라도 어떤 사람은 반감을 사고, 어떤 사람은 호감을 얻는다. 그 이유는 바로 ‘말하기’의 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경인방송 아나운서이자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 김진이는 책 ‘어른의 말습관’을 통해 성숙하게 말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어른답게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분명히 말할 줄 알고, 그 말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또 서로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고 관계의 중심을 단단하게 지킬 줄 안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이는 단순히 말투만 바꾼다고, 기술만 답습한다고 되지 않는다. 내 말 속에 숨어 있는 디테일과 패턴, 즉 말하는 습관을 돌아보고 바꿔야 한다. 노력만이 말습관을 기르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책에서는 서투른 언어를 다듬어 말하는 법, 각각의 상황과 내가 의도하는 바에 따라 말과 태도를 장착하는 법, 사람들과 주파수를 맞춰나가며 내 세계를 확장하는 법, 부정적 말의 패턴을 소거하는 법, 감정을 차분히 다스려 담백한 말로 갈무리하는 법 등 여러 가지 말하기 방법을 소개한다. 자기 말의 주인이 되어 일, 관계, 인생을 더욱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 보자. ◇멋진 인생을 위해 오십부터 해야 할 것들(김옥림·미래문화사) ‘가슴이 뛰는 한 영원한 청춘’이라는 시인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나답게 사는 것이 인생 후반기를 행복하게 보내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위험하고 매혹적인 제로 이야기(찰스 세이프·DKJS) 제로(0)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자 철학, 종교, 수학, 물리학의 근간이다. 저자는 0의 출현, 억압, 성장 등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다. ◇시니어를 위한 슬기로운 디지털 생활(조진화·임지윤·포레스트북스) 디지털 전문 강사인 모녀가 합심해 만들었다. 스마트폰·키오스크 사용법 등 부모님이 알았으면 하는 디지털 정보 10가지를 안내한다. ●Stage ◇러브레터 일정 4월 4일 ~ 4월 27일 장소 LG아트센터 서울 연출 김민정 출연 정보석, 박혁권, 하희라, 유선 연극 ‘러브레터’는 30개 언어로 공연된 세계적인 스테디셀러 작품이다. 밀도 높은 2인극이 특징으로, 무대에는 50년 동안 편지를 매개로 서로의 인생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앤디와 멜리사만 존재한다. 글을 사랑하는 모범생 앤디 역은 정보석과 박혁권이 맡아 연기한다. 그림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영혼 멜리사 역에는 초연 당시 몰입도 높은 연기를 보여준 하희라와 함께 유선이 캐스팅됐다. 제작사 측은 “깊은 내공으로 다져진 베테랑 배우들을 무대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사랑과 이별, 그 무수한 사연들도 디지털 기기의 버튼 하나로 정리되는 요즘, 잊고 있었던 우리의 순수성을 깨워주는 작품이 될 것이다”라고 전했다. ◇친정엄마 일정 4월 20일 ~ 5월 26일 장소 서울 한전아트센터 연출 김재성 출연 김수미, 이효춘, 신이현, 선예, 김도현, 박장현 등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그린 ‘친정엄마’는 2004년 원작소설 출간 이후 연극, 뮤지컬, 영화로 제작되며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특히 뮤지컬은 주크박스 뮤지컬의 진수로 통하며, 실력파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이번 시즌에는 하루에도 열두 번 넘게 딸을 걱정하는 친정엄마 봉란 역에 김수미와 이효춘이 캐스팅됐다. 김수미는 초연부터 봉란 역을 연기하고 있으며, 이효춘은 뮤지컬에 첫 도전한다. 엄마와 티격태격하다 이내 사랑을 깨닫게 되는 딸 미영 역은 신이현이 지난 시즌에 이어 연기하며, 원더걸스 출신 선예가 새롭게 합류했다. ◇클로저 일정 4월 23일 ~ 7월 14일 장소 플러스씨어터 연출 김지호 출연 이상윤, 진서연, 김다흰, 이진희, 최석진, 유현석, 안소희, 김주연 연극 ‘클로저’는 1997년 초연 이후 50개국 100여 개 도시에서 공연됐으며, 2004년에는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다. 극은 현대 런던을 배경으로 앨리스, 댄, 안나, 래리라는 네 명의 남녀가 만나 서로의 삶에 얽혀드는 과정을 그린다. 국내 공연은 8년 만인 가운데, 원더걸스 출신 안소희가 연극에 첫 도전해 눈길을 끈다. 앨리스 역을 맡은 그는 “연극이라는 무대와 관객들과의 교감에 긴장과 더불어 설레는 마음이 있다”며 좋은 연기를 보여주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 2024-04-0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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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위도 잊게 만드는" 최근 볼만한 공연ㆍ전시는?
- ●Exhibition ◇에릭 요한슨 사진전 Beyond Imagination 일정 2022년 10월 30일까지 장소 63아트 스웨덴을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에릭 요한슨은 사진가이자 리터칭 전문가다. 그의 작품은 여타 초현실주의 작가의 작품처럼 단순한 디지털 기반의 합성 사진이 아니다. 그는 작품원(園)의 모든 요소를 직접 촬영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세계를 사진 속에 가능한 세계로 담아낸다. 요한슨은 상상의 풍부함이나 표현의 세심함, 특히 포토샵을 이용한 이미지 조작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미디어로 탄생한 요한슨의 작품을 입체적으로 느껴볼 수 있으며, 다양한 연출로 구성된 여러 포토존을 통해 에릭 요한슨의 작품 속 인물이 될 수도 있다. 요한슨은 해학과 풍자를 내포한 현실 세계에 대한 비판과 상충적 개념의 이미지 충돌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신선한 문화적 충격을 안겨준다. ◇상상의 정원 일정 11월 28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상상의 정원’은 조선 후기 ‘의원’(意園) 문화에서 탄생했다. 18~19세기 조선의 문인들은 경제적 형편에 제한받지 않고 마음껏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의원, 즉 ‘상상 속 정원’을 경영했다. 동시대 ‘의원’을 염두에 둔 이번 덕수궁 프로젝트에서 작가들은 정원의 역사, 실천을 다시 생각하면서 다양한 초점을 지닌 열린 정원을 만들어낸다. 각 작품은 자체로 이야기가 있는 하나의 정원이면서 동시에 서로 조화와 긴장 관계를 이루며 더 큰 정원을 구성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의 전통 정원은 기존의 자연을 최대한 살리면서 담의 안과 밖을 자연스럽게 이어준다. 인위적인 조경을 최소화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즐기도록 조성해 동선도 자유롭다. 방문객은 다음에 이어지는 작품 설명 순서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마치 전통 정원을 산책하듯 덕수궁을 느긋하게 거닐며 작품을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다. ●Book ◇50 이후, 더 재미있게 나이 드는 법 (스벤 뵐펠·갈매나무) 우리는 100세 인생이 더는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은 이제 괜한 수사가 아니다. 밀라논나도 윤여정도 청년들의 롤모델을 넘어 자신의 분야에서 인생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50대라고는 믿기 힘든 ‘동안’을 자랑하는 셀럽들의 이야기가 이제 놀랍지도 않으며, 50은 인생의 고작 절반을 상징하는 숫자가 됐다. 50세 이후, 즉 중년이 길어지고 있다. 보통 70세가 가까워질수록 암과 심혈관 질환 또는 심리 질환 같은 문명 질병으로 사망할 확률이 급격히 높아지는데, 이때 삶의 질은 50세 이후 기간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나이 들어서도 자신을 가꾸며 젊게 생활하려는 ‘신중년’(Young-Old)으로서의 삶이 인생 후반기를 좌우한다는 뜻이다. 독일에서 사회 경제 분야와 연계해 선구적으로 노화 연구를 개척해온 스벤 뵐펠(Sven Voelpel)은 중년의 건강관리가 노화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 ‘늙지 않는 7가지 공식’(마음가짐, 식사, 운동, 수면, 호흡, 이완과 휴식, 사회관계)을 정리해 책으로 엮었다. 학문 연구와 사례를 바탕으로 건강하게 나이 드는 방법을 담은 이 책은 2020년 독일 아마존에서 베스트셀러로 많은 독자의 관심을 받았다. 유튜브 등을 통해 그는 재치와 활력 넘치는 모습으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몸소 보여준다. 선구적 노화 전문가가 제안하는 과학적 일상 루틴 가이드에 따라, 인생 후반기를 건강하고 즐겁게 보내보자. ◇다산의 철학 (윤성희·포르체) 빠르게 변화하며 소란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내게 알맞은 속도를 파악하고 그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기에만 급급한 우리에게 이 책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다산의 철학을 보여준다. ◇면역 습관 (이병욱·비타북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불안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보완통합의학 권위자인 이병욱 박사는 이럴 때일수록 면역과 개인 위생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삶을 고치는 암 의사 이병욱 박사가 말하는 올바른 면역 습관에 귀 기울여보자. ◇나는 내 딸이 이기적으로 살기 바란다 (정연희·허밍버드) “딸아 처음부터 너는 너였단다. 누구의 딸, 아내, 며느리, 엄마가 아닌 네 이름으로 살아가기를.” 눈부신 삶을 살아갈 사랑하는 딸에게 엄마로서, 한 시대를 먼저 산 여성으로서 ‘누구의 딸, 아내, 엄마가 아닌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라는 애정 어린 당부를 전한다. ●Stage ◇지킬 앤 하이드 일정 10월 19일~2022년 5월 8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데이빗 스완 출연 류정한, 홍광호, 신성록, 윤공주, 아이비, 선민 등 국내 최초 스릴러 로맨스 뮤지컬로 150만 관객을 열광시키고 가슴 설레며 기다리게 한 뮤지컬 ‘지킬앤하이드’가 다시 무대에 오른다. ‘지킬앤하이드’는 1886년 초판된 영국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사건’을 원작으로 선과 악, 인간의 이중성을 ‘지킬과 하이드’라는 인물을 통해 조명하는 작품이다. 무대를 압도하는 배우들의 연기력과 더불어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극대화하는 연출로 관객에게 강렬한 쾌감을 선사한다. ‘지킬앤하이드’는 2004년 초연 이후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신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작품이다. 누적 공연 횟수 1410회, 누적 관객 수 150만 명, 평균 유료 객석 점유율 95% 등 압도적인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리어왕 일정 10월 30일~2022년 11월 21일 장소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연출 이현우 출연 이순재, 소유진, 지주연, 오정연, 서송희, 이연희 등 아름다운 시적 표현으로 인간 존재와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아우르는 ‘리어왕’은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가장 압도적인 걸작이라 평가받는 작품이다. 이번 공연은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와 올해 데뷔 65주년을 맞은 연기의 거장 이순재, 대문호와 대배우의 역사적인 만남으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지금껏 수많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연출해온 이현우 교수가 기존의 공연에서 간과됐던 부분까지 면밀히 분석해 셰익스피어 본연의 ‘리어왕’을 선보일 예정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일정 10월 8일~11월 21일 장소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 연출 김봉건 출연 박해미, 김예령, 고세원, 임강성, 임주환, 태항호 등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초연 직후인 1948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미국 남부 명문가 출신의 한 여성이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급변하는 미국 사회, 특히 남부 상류사회의 쇠퇴와 산업화 이후를 다소 충격적으로 전개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번 공연은 각색을 통해 주요 인물들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묘사해 더욱 밀도 높게 극을 이끌어갈 예정이다.
- 2021-10-20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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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청이가 심 봉사에게 만들어준 김부각, 어떻게 만들까?
- 심청이는 효심만 깊은 게 아니라 음식 솜씨도 좋았나 보다. 특히 심청이가 만든 김부각은 맛있기로 소문이 자자해 양반집이나 이웃 절에 불려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인당수에 제물로 바쳐졌다가 환생한 심청이는 왕비가 된 후 아버지를 만나려 맹인들을 잔치에 불러모았다. 오매불망 그리던 아버지를 위해 김부각을 정성껏 만들어 잔칫상에 올려놓았다. 심 봉사가 김부각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본 심청이는 아버지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심 봉사가 즐겨 먹던 부각은 옛날에는 아무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궁중이나 사대부 집에서 내려오는 고급음식인데, 지금은 누구나 즐기는 주전부리가 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대한민국 식품 명인 제25호 오희숙 명인의 공이 컸다. 그는 우리나라 유일의 전통 부각 분야 식품명인이다. 명인을 만난 건 강남역의 식품명인 홍보체험관에서였다. 이곳에선 토요일마다 명인들에게 한국전통식품 비법과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정부가 공식 지정한 식품명인들과 함께 술이나 한과, 김치, 장류 등을 만드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어 한 번 발을 디디면 자꾸 찾아가게 되는 곳이다. 어른, 아이 모두 즐기는 부각이어서인지 다른 날에 비해 가족 체험객이 많았다. 오희숙 명인은 거창의 파평 윤씨 종갓집에 시집을 오면서 시어머니로부터 부각 제조법을 배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크고 작은 집안 행사 때면 몸을 반쯤 넣어야 손이 닿는 커다란 항아리에 부각 거리를 꺼내 튀겼다. 손님들의 취향을 기억했다가 각자 기호에 맞는 부각을 튀기면 저마다 좋아했다고 한다. 명인의 이야기를 듣던 한 어린이는 “빨리 만들고 싶어요”라며 큰소리를 외쳤다. 명인을 재촉하는 꼬마 체험객 덕분에 웃음꽃이 터졌다. 부각은 재료에 찹쌀풀을 발라 건조하여 튀겨낸다. 전통부각의 제조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간다. 재료를 손질하고, 찹쌀풀을 만들어 바르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말린 후 다시 튀기는 등 12번의 손길을 거쳐야 탄생하는 정성 어린 음식이다. 체험은 준비된 재료에 찹쌀풀을 바르는 것부터 시작됐다. 테이블마다 찹쌀풀과 김, 다시마, 미역이 준비돼 있었다. 손끝에 풀을 묻힌 후 김과 다시마에 골고루 펴 바르기만 하면 되니 아이들도 쉽게 따라 했다. 미역은 찹쌀풀과 함께 손으로 조물조물하면 된다는 명인의 말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손에 쥐고 놀이하듯 즐겁게 풀을 입혔다. 이렇게 찹쌀풀을 바른 재료들은 햇볕에 잘 말려야 한다. 부각 만들기 마지막 단계는 말린 재료를 빠르게 기름에 튀겨내는 것이다. 김, 미역, 다시마는 물론 감자, 우엉, 연근 등 각종 부각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거무스름한 미역이 기름에 튀겨지면서 하얗게 변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하얀 게 아까 바른 찹쌀풀이냐”고 재차 묻기도 했다. 막 튀겨진 부각을 그 자리에서 맛보았다. 기름에 튀긴 음식이지만 담백했다. 씹으니 ‘바삭바삭’ 경쾌한 소리가 났다. 고소하면서도 식재료마다 본래의 맛이 그대로 느껴져 재미있었다. 아이들은 부각이 수북이 쌓여있는 접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건 뭐야? 저건 뭐야?” 부각들이 어떤 식재료로 만들어진 것인지 물었다. 편식하던 아이가 우엉이나 연근도 맛있다고 손을 바삐 움직이는 모습에 부모들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삼국유사에 보면 시집오는 신부가 함 속에 부각을 넣어 왔다는 기록이 나온다. 천년도 넘는 세월을 지내며 명문가에 전해져 온 부각이 이제는 컨테이너 속에 담겨 일본, 미국 등 12개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국내산 제철 원료만을 사용하고 화학적인 색소나 조미료를 첨가하지 않았으니 안심하고 먹을 수 전통부각.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Han Style snack’ 혹은 ‘Oriental natural chip’ 등으로 외국인의 입맛까지 사로잡고 있다.
- 2018-05-16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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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을 구한 조선 도공의 후예 박무덕(朴茂德)
-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가 조선 도공 후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90년이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 외상으로서, 전쟁 회피와 종전 교섭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이 조선인 후예였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름은 박무덕(朴茂德). 조선인 피를 받은 그가 어떻게 그런 높은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걸까? 의문을 풀기 위해 애썼지만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는 철저한 일본인으로 살았던 우수한 관료였다. 그러나 그가 외무성 관료로 활동한 시기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극심했던 시절이어서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사찰로 악명 높았던 일제 경찰이 까다로운 외교관 임용 신원조사를 왜 그토록 허술하게 했을까. 이것이 제일 큰 의문이었다. 그의 출신지와 가계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조선 도공의 후예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일본 제국의 마지막 각료로 패전을 맞을 때까지 그에게는 ‘조선인 후예’라는 천형 같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조선인 피를 가진 사람이 대신이 되어 폐하를 모시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가 두 번째로 외상이 되었을 때 이 같은 괴문서가 정부와 시가지에 뿌려진 일이 있었다. 극우세력이 저지른 일이었다. 군 내부에 동조 세력이 나타나 술렁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옥에 갇히게 되자 사람들은 더 흥분했다. 그의 고향 가고시마(鹿兒島) 현 미야마(美山) 옛집에 돌팔매까지 했다.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이 떨어졌을 때 ‘전범이므로 나쁜 사람’이라는 낙인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을 민족 절멸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사람’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의 옛집에 세운 공덕비 비문에는 “종전(終戰) 공작의 주역을 맡아 대업을 완성하고 일본국과 국민을 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비문은 당시 일본 관방장관 사코미즈 히사쓰네(迫水久常)가 썼다. 그 뒤 그의 집이 있던 자리에는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들어섰고, 그를 연구하는 모임까지 생겨났다. 이러한 현실은 시대 조류의 급격한 역류를 의미하고 있다. 도고 시게노리에 관한 이야기는 도예가 ‘14대 심수관’으로부터 들었다. 1990년 7월 미야마에 있는 그의 가마를 찾아갔을 때였다.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는 옛 이름으로 유명한 ‘사쓰마 야키(薩摩燒)’ 발상지 취재차 찾아간 특파원에게 그는 고향 자랑을 하면서 ‘도고 센빠이(선배)’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외무성 관료가 되어 금의환향한 그가 모교에 찾아왔을 때 “심수관이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심수관이 손을 들고 나가자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도공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을 입구에 “거짓말하지 말라, 지지 말라, 약한 자를 괴롭히지 말라, 도고 선배를 본받자”는 내용이 쓰인 팻말이 세워져 있었던 때라 그는 어깨가 으쓱해졌다고 한다. 평생을 시게노리 현창(顯彰) 사업에 바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은 그가 발의해 사업 추진까지 도맡았다.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의 도자기 작품을 수집해 미술관에 기증한 사람도 그였다. 시게노리의 아버지가 뛰어난 도공이자 유능한 사업가였다는 사실도 세상에 알렸다. 시게노리는 1882년 나에시로가와 심수관의 이웃집에서 박수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수승은 세상을 읽는 눈이 뛰어난 사업가였다. 메이지 정부의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로 사족(士族) 신분을 박탈당하고 관요(官窯)가 폐지되어 나에시로가와 도공 마을에 찬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각자도생의 길을 헤쳐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역경이 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도쿄 요코하마를 무대로 외국인들에게 도자기를 팔고 수출하는 사업에 눈을 뜬 것이다. 그 재력을 바탕으로 가고시마 시내로 이주, 명문 도고(東鄕) 가문의 족보를 사들여 도고 성(姓)을 취득한 그는 당당한 일본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박수승은 ‘도고 주카쓰(東鄕壽勝)가 되었고, 네 살배기 무덕은 ‘시게노리(茂德)’가 되었다. 시게노리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아이였다. 사족 가문 성을 가진 데다 뛰어난 두뇌와 아버지의 재력 덕에 사족 출신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교 가고시마 제일중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족 출신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폐번치현 이후 나에시로가와는 ‘옹기마을’로 불리며 급속히 ‘천민부락’으로 전락했다. 그가 옹기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급우들이 다 아는데 어떻게 사족 대접을 받았겠는가. 대접은커녕 ‘가짜 사족’ 놀림까지 받았다. 도고시게노리기념사업회가 펴낸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그는 입학 후 점점 말없는 소년이 되어갔다. 사정을 알아주는 친구 하나를 제외하고 어울리는 친구가 없었다. 그는 무섭게 공부에만 매달렸다. 영어사전의 단어를 다 외우고 그 페이지를 찢어 씹어 삼켰다는 일화는 가고시마의 전설이 되었다. 손자 도고 시게히코(東鄕茂彦)가 쓴 ‘할아버지 도고 시게노리의 생애’에 나오는 일화는 그의 치밀하고 느긋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소학교 시절 하굣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친구들은 다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 비를 피하는데 시게노리만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시게노리, 뭐하는 거야? 빨리 뛰어와!” 하고 소리쳤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쪽에도 비가 오는걸요.” 그렇게 말하고는 집까지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1901년 제일중학을 졸업한 뒤 그는 가고시마 7고에 입학한다. 문부성 직할 구제 고등학교였다. 학교 이름에 번호가 붙었다 해서 ‘넘버 스쿨’로 불리던 일본의 명문고교였다(1고는 도쿄, 2고는 센다이, 3고는 교토, 4고는 가나자와, 5고는 구마모토, 6고는 오카야마, 8고는 나고야에 있었다). 그해 개교한 7고에는 각 넘버 스쿨 입시에 낙방한 학생들이 몰려들어 경쟁이 치열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재들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사투리가 심해 학교 측은 고심 끝에 가고시마 방언과 표준어로 된 두 가지 안내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시게노리는 7고를 졸업하고 도쿄대학교 문학부 독문학과에 진학한다. 아버지는 법대를 나와 내무성 관리가 되기를 원했지만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던 시게노리는 아버지 염원을 배반했다. 그러나 끝까지 아버지의 소원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졸업 후 외교관 시험에 도전, 3수 끝에 합격의 영광을 얻는다.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외교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를 의식한 탓도 있지만, 고향 선배 외교관의 영향이 컸다. 독일 문학에 몰입했던 대학교 시절의 이상이었던 ‘동서양 문화의 조화’를 실현할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첫 부임지는 만주였다. ‘펑톈(奉天) 일본국 영사관 영사관보’가 공식 직함이었다. 펑톈은 지금의 선양(瀋陽)이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그는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해 열차로 만주에 부임했다. 뒷날 발견된 당시의 메모에는 열차로 한반도를 종주하면서 느낀 감회는 한 구절도 없었다. ‘경복궁’과 ‘한강’. 아무 감상 없이 언급한 고유명사만이 조선과 관련한 메모의 전부였다. 아마도 그의 의식을 지배하던 ‘조선 트라우마’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고 부임을 준비하던 무렵,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수모를 겪는다. 결혼을 약속한 도쿄의 명문가 규수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해온 것이다. 이유는 끝내 밝히지 않았지만 출신성분 조사에서 조선 도공의 후예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게 일본 외교가의 정설이다. 그 뒤로 그는 결혼을 포기하고 살다가 37세 노총각 시절 아이가 다섯이나 딸린 독일인 이혼녀 에디 드 라론드와 결혼, 뒤늦게 가정을 이룬다. 그가 트라우마를 가졌다 해서 조선인의 피를 부끄럽게 여긴 흔적은 없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금의환향했을 때 옥산궁(玉山宮)을 참배한 일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옥산궁이란 나에시로가와에 있는 단군 사당이다. 비록 일본 관복 차림이었지만, 마을 수호신을 찾아 고마움을 표하며 합장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단군의 후예라는 뿌리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외교관 시절의 일화도 있다. 외무성 본부 국장 시절, 퇴근길에 조선인 과장 장철수를 허름한 술집으로 데리고 가 “사실은 내게도 조선인 피가 흐른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게, 인내라는 말을 소중히 하고!” 하면서 동족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독일대사, 소련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거치며 ‘외교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들어온 그는 마침내 외무대신 자리에 오른다. 미국과의 사이에 전운이 감돌던 1941년 대미 교섭 임무를 짊어졌던 첫 외상, 종전 교섭의 사명을 띤 두 번째 외상 직무의 하이라이트는 1945년 8·15 광복 직전의 무조건 항복 결정이었다. 연합국 수뇌들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지만, 전쟁광 집단인 일본 군부는 결사항전 태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덩달아 언론도 연일 군부의 ‘1억 옥쇄론’을 부채질하는 사설을 내보내던 때였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까지 참전한 상황에서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수상을 필두로 한 군부는 미치광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원자폭탄 피해의 심각성을 파악한 시게노리는 천황을 찾아가 전쟁 종결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각료들에게도 같은 주장을 거듭했지만 군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교착상태에서 또 하나의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그날부터 일본 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무조건 항복이냐, 결사항전이냐를 앞에 둔 운명의 갈림길에서 시게노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쿠데타설과 암살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종전 결정의 불가피성을 설득해나갔다. 군부의 위세에 눌려 입을 닫고 있던 각료들은 13일 각료회의에서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라”는 수상의 요구에 12명은 ‘포츠담선언 수락’ 또는 ‘수상 결정에 위임’, 3명은 반대 의견을 냈다. 14일 어전회의에서 천황은 외무대신의 전쟁 종결 의견에 각료 다수가 찬성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나는 연합국의 포츠담회담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했다. 만주 침략으로 시작된 길고 긴 15년 전쟁의 종결 선언이었다. 전후 시게노리는 연합국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을 선고받고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50년 7월 23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68세. 도쿄재판 도중 그에게 조선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아사히신문은 “도고는 꼭 외국인이 일본어를 말하는 것 같은 억양으로 진술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보도했다.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에둘러 강조한 것이다. 한 신문은 ‘과거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지역 출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조선인 출신이라는 낙인이 천형처럼 그의 이마에 찍혀 있었던 셈이다. 1990년 미야마에 처음 갔을 때 시게노리 생가는 폐가처럼 버려져 있었다. ‘A급 전범’이라는 멍에 탓이었다. 마당에는 잡초가 키 높이로 자라 있었고, 대문에는 각목을 X자로 못 박아놔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가 일전되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경제번영의 격양가 속에 자연스레 ‘민족 절멸의 위기에서 일본을 구출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2010년 남규슈 여행길에 들렀을 때 가 보니 생가 터에 아담한 기념관이 들어서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사코미즈 히사쓰네의 비문이 선명하게 보이는 송덕비, 그 오른편으로는 시게노리의 동상이 서 있다. 기념관 안에는 도쿄대학교 시절 시게노리의 모습과 외상으로 지냈을 때의 초상화, 복역 중일 때 가족과 면회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말과 일본말로 나에시로가와 마을과 조선 도공을 설명하는 안내서도 걸려 있다. “나에시로가와에서는 메이지 시대가 끝날 무렵까지 조선의 풍속과 언어가 남겨져 있었다. 조선 도공의 수호신이 된 옥산궁 신사에서는 머나먼 고향을 그리워하는 제사가 행해졌다.” 안내문의 한 줄 내용에 이 마을의 400년 역사가 함축되어 있었다. 도공 박문(朴門)의 업적을 소개하는 안내문에는 “박정관이 제작한 백 사쓰마 도자기가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사쓰마 도자기 이름을 유럽까지 알렸다”고 씌어 있다. 안내문에 나오는 박정관(朴正官)은 근세 사쓰마 야키를 일으켜 세운 사람으로 추앙되는 인물. 정유재란 당시 사쓰마에 끌려온 도공들의 리더 박평의(朴平意)의 후손이다. 시게노리의 손자는 할아버지 일대기에 “할아버지 가문이 박평의 후손이라는 근거는 없지만, 그때 끌려온 도공 가운데 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고, 같은 도공이었다는 점에서 할아버지와 피가 통하는 관계로 본다”고 썼다. 시게노리와 에디 사이에는 이세(いせ)라는 이름의 딸이 유일한 혈육이다. 시게노리는 외동딸을 자신의 비서관 출신 외교관과 결혼시킨 뒤 사위를 양자로 삼았다. 그는 훗날 주미대사를 역임한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다. 사위 겸 양아들 후미히코와 딸 이세 사이에는 아들 쌍둥이가 있다. 1945년생인 손자 시게히코는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나와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아사히신문 기자를 거쳐 워싱턴포스트로 옮겨 오랜 기간 도쿄 특파원으로 지냈다. 동생 가즈히코(東鄕和彦)는 도쿄대학교를 나와 3대 외교관이 되었다. 북미국장 주미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두루 거쳤고 퇴직 후에는 미국, 대만 등지의 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활동했다. 2007년에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강의한 적도 있다. 그는 역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외교관으로 유명하다. 현역 시절 김대중 납치사건, 문세광 사건 등 한일 현안 문제에 관여한 경력이 있으며, 2006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중단을 요구하는 회견으로 일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 2018-01-2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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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 여동생 문근영의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 장충단 공원길은 필자에겐 참으로 익숙한 거리이다. 필자가 결혼하고 장충동 주택가의 시댁에서 5년간 사는 동안 많은 시간을 이 공원에서 보냈다. 속상한 일이 생기면 공원 깊숙한 벤치를 찾기도 했고 아이가 두세 살 무렵엔 포대기로 둘러업고 산책 나오기도 했다. 공원 한 바퀴 도는 동안 아기는 새근새근 잠들고 공원 안의 평화가 참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보았던 어린이 야구장이 아직도 건재해서 많은 경기가 이루어지고 있다니 기분 좋은 일이다. 국립극장에 가려면 전철 동국대역에서 나와 장충단 공원길 코너를 돌아 국립극장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가면 된다. 공연 시각 전까지 관객들을 무료로 극장 안마당까지 태워다 주어 매우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는 고마운 교통수단이다. 국립극장은 매우 큰 공연장인 해오름과 중간의 달오름 그리고 소극장인 별오름이 있다. 별오름에서 본 연극공연은 대학로의 여느 소극장과 비슷한 규모의 아담한 공간이었다. 필자가 가끔 보는 공연은 주로 달오름 극장이다. 국립극장에 가기 위해 장충단 공원길을 걸으니 새삼 결혼 초의 옛 생각으로 무언가 그리운 느낌의 감회가 새롭다. 이날은 국민 여동생이라 불리는 여배우 문근영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이 있는 날이다. 많은 연예인 중에서도 유독 마음 가는 여배우가 있다면 문근영 양이다. 아역부터 시작했으니 나이 어린 배우라 해도 경력이 만만치 않은 중견이다. 더구나 어린 나이임에도 기부를 많이 하고 있다는 착한 배우라서 좋은 이미지로 떠오른다. 문근영의 눈을 보면 선량하다는 게 무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커다랗고 동그란 눈동자는 사람을 끄는 매력으로 호수처럼 맑아 보인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이날 공연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그러니 어떤 내용이 펼쳐질까보다는 배우들이 어떤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여줄지의 기대가 더 컸다. 거기엔 예쁜 문근영이 줄리엣을 맡아 연기한다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팸플릿을 보니 요즘 TV에서 볼 수 있는 감칠맛 나는 조연인 유명 배우들과 아이돌처럼 예쁜 남자 연기자들이 출연하고 있다. 물론 실물로 본 문근영은 정말 예뻤다. 내용은 잘 아는 연극이지만 무대 활용이나 공간을 이용하는 방법이 독특했다. 배우들이 갑자기 뒤편에서 나타나 좌석 옆 계단으로 종횡무진 등장하는가 하면 객석의 관객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는 등 관객과 함께한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무대를 이어나갔다. 너무나 많이 알려진 내용이므로 다 이해한 줄 알았는데 실은 마지막에 가짜 독약을 마신 줄리엣을 보고 로미오가 어떻게 죽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극에 몰두하여 보았다. 다들 잘 아는 이야기로 베로나지방의 유명 가문 캐플렛가와 몬테규가는 원수 집안이다. 캐플렛가의 파티 날 장난스럽게 숨어 들은 로미오는 줄리엣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두 원수 집안의 아들과 딸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렇게 사랑에 빠진다. 그들이 보여준 순수한 사랑과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죽음까지 불사하는 불꽃 같은 열정은 낭만을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될 것 같다. 줄리엣의 사촌과 대결 중 그를 살해하게 된 로미오가 만투스로 추방당하고 이미 저희끼리 결혼맹세를 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시작된다. 명문가문의 자제와 결혼을 명한 아버지의 명령에 신부님을 찾은 줄리엣은 가짜 독약을 마시고 42시간만 잠들어 있기로 하고 약을 마신다. 그 소식을 로미오에게 알려야 하는데 만투스 지방에 역병이 돌아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되고 줄리엣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로미오는 줄리엣이 안치되어있는 회당에 찾아와 미리 준비해 온 진짜 독약을 마시고 숨을 거둔다. 이에 42시간 만에 깨어난 줄리엣은 죽은 로미오를 보고 너무나 슬퍼 칼로 심장을 찔러 자살하고 로미오 옆에 눕는다. 아름다운 젊은이들의 죽음이 있고 난 뒤에야 잘못을 깨달은 두 가문은 화해한다. 잘 아는 내용이지만 생동감 있게 펼쳐진 연출에 필자 자신이 극에 참여한 듯 즐거운 관람을 할 수 있었다. 어떤 이야기인지 잘 안다고 해도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력에 따라 참신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게 연극이라는 생각으로 재미있는 시간을 즐겼다.
- 2017-01-10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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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ML 칼럼] 아무도 모르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 인간은 언제부터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해온 것일까요? 나라는 존재는 상대가 없으면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개념인지도 모릅니다. 그 상대적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성찰함으로써 나의 독자성, 개별성을 알게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 시조에 재미있는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누가 지은지 몰라 무명씨 작으로 돼 있습니다. “내라 내라 하니, 내라 하니 내 뉘런고/내 내면 낸 줄을 내 모르랴/내라서 낸 줄을 내 모르니 낸동 만동 하여라.” 이 시조에는 ‘내’가 아홉 번, ‘낸’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언어유희 같기도 한 말을 통해 자아에 대한 탐구의 진지성을 알게 해줍니다.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이 의문이 무명씨의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우리 옛시조에 이렇게 자아를 탐구한 작품이 있다는 게 자랑스럽고 다행스럽습니다. 수직적 질서와 순종적 윤리 덕목에 의해 유지되던 왕조시대에는 나에 대한 자각, 개인의 자유와 독자성에 대한 인식이 계발될 수 없었습니다. 두드러지는 개별적 자아는 장려되기는커녕 오히려 모진 수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표암 강세황(1713∼1791)의 69세 때 자화상(1782년)에는 이런 화제(畵題)가 씌어 있습니다. “저 사람이 누구인가. 수염과 눈썹이 하얗구나. 머리에 오사모를 쓰고 야인의 옷을 입었네. 이것으로 알 수 있지. 마음은 산림에 있지만 이름은 조정에 오른 것을…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스스로 낙을 찾아 즐길 따름일 뿐.” 표암의 모습은 갓 쓰고 자전거를 타거나 트레이닝복 차림에 베레모를 쓴 격입니다. 자화상이 이렇게 특이한 이유는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산림에 은거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그는 집안이 몰락해 초야에 묻혀 살면서 서화로 이름을 날리다 60세가 넘어 영조의 배려로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명문가 출신이 벼슬 욕심이 없을 리 없었지만 막상 벼슬살이를 해보니 다시 산림이 그리워진 것입니다. 한 화면을 통해 드러난 두 마음은 이율배반이나 이중성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인간감정의 발로라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상(1910~1937)의 시 ‘거울’은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다,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다, 거울 속의 나는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왼손잡이다, 거울 속의 나는 참 나와는 반대지만 또 꽤 닮았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다” 등의 말이 이어집니다. 이런 현대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옛글에서도 자신을 들여다보는 작품을 쉬 볼 수 있습니다. 자화상에 마음을 부치기도 하고 거울 속의 자신과 대화하거나 죽음을 앞두고 삶을 차분히 정리하기도 합니다. 참된 나를 찾는 모습은 자만(自挽) 자명(自銘) 자전(自傳) 자지(自誌) 자찬(自讚) 등 다양한 문체를 통해 드러납니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살다 간 선비 홍길주(1786~1841)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도 그런 글입니다. “나는 자네와 일심동체일세”라고 말을 걸기 시작한 이 글은 자신의 독서 경향을 질타하고 경계하면서 반성을 촉구하더니 “내가 자네와 함께 도에 나아갈 수 있다면 아주 큰 행운이겠네”라고 말합니다. 요즘 말로 쉽게 이야기하면 청언소품(淸言小品), 즉 짧고 감성적인 에세이만 즐겨 읽으려 하는 자신에게 “그러지 말고 사서삼경 등 고전으로 돌아가라”고 일깨우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교훈적이고 딱딱한 고전만 읽을 수 있겠습니까? 밥도 먹고 군것질도 해야 하고 술도 마셔야지요. 그런데 홍길주가 살던 시대는 청언소품이 크게 유행해 글쓰기 방식마저 달라지는 바람에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으로 지식인들을 윽박지르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기분열과 갈등의 문장, 남들에게 자신의 ‘알리바이’를 밝히는 글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재미있다기보다 딱하고 안타까운 글입니다. 다시 현대로 돌아와 김광규의 시 ‘나’의 전문을 읽어봅니다. “살펴보면 나는/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나의 아들의 아버지고/나의 형의 동생이고/나의 동생의 형이고/나의 아내의 남편이고/나의 누이의 오빠고/나의 아저씨의 조카고/나의 조카의 아저씨고/나의 선생의 제자고/나의 제자의 선생이고/나의 나라의 납세자고/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나의 친구의 친구고/나의 적의 적이고/나의 의사의 환자고/나의 단골술집의 손님이고/나의 개의 주인이고/나의 집의 가장이다.//그렇다면 나는/아들이고/아버지고/동생이고/형이고/남편이고/오빠고/조카고/아저씨고/제자고/선생이고/납세자고/예비군이고/친구고/적이고/환자고/손님이고/주인이고/가장이지/오직 하나뿐인/나는 아니다//과연/아무도 모르고 있는/나는/무엇인가/그리고/지금 여기 있는/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나는 무수히 많고, 모순되기도 하고, 다 아는 것 같아도 아무도 모르는 존재입니다. 더욱이 이걸 하고 싶은데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고, 이렇게 행동하고 있지만 속마음은 정반대인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경험하며 삽니다. “차가운 진실보다는 따뜻한 기만이 낫다”는 말도 갈등을 느끼게 합니다. 제도와 규율 때문이든 체면과 위신 때문이든 자신을 절대적으로 속이지 않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와 나의 화해 또는 통일이며 나와 남의 조화입니다.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 “군자는 남과 함께 어울리되 같지 않지만 소인은 남과 같은데 어울리지 못한다”는 논어의 말도 이런 조화를 강조하는 것이겠지요. 이 말이 나와 남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면 文質彬彬 然後君子(문질빈빈 연후군자), “겉과 속이 함께 빛나야 군자”는 나 자신의 조화와 균형의 중요성을 알게 해주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는 나는 남이 아는 나와 다르고, 내가 아는 남은 남이 아는 남과도 다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알기는 참 어렵습니다. 자기보다 큰 적은 없다고 합니다. 중국 송 나라 때의 보제(普濟)선사는 “나 말고 누가 나를 괴롭히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것도 나, 나를 망치는 것도 나입니다. 그러니 자기부터 이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논어에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라”는 극기복례(克己復禮)가 나옵니다. 노자 도덕경 3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로울 뿐이지만 자신을 아는 자라야 명철하다. 남을 이기는 자는 힘이 센 데 불과하지만 자기를 이기는 자라야 진정한 강자이다.”[知人者智 自知者明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남을 아는 것은 상대적 분별이지만 스스로를 아는 것은 절대적 자각입니다. 바로 이 절대적 자각을 탐색하고 궁구하는 것이 인류역사이며 사상사의 발전이 아니겠습니까? 한 해가 바뀌는 시점에는 누구든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지나온 일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삶을 위한 다짐에는 ‘자지자명(自知者明)’의 가르침이 절실합니다. 그런 자지자명의 반성으로 이제 ‘BML 칼럼’을 접으려 합니다. 2년 동안 서투르고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길이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해묵은 손때’를 떠나보내려 합니다. >> 임철순(任喆淳)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 2016-11-23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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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추석에 무슨일이 생겼나고요?
- 직장과 가정을 함께 꾸려나가는 맞벌이 주부는 슈퍼우먼이 아닌 한 힘이 든다. 게다가 명절날 시댁 가서 이런저런 일을 거들고 집에 오면 녹초가 다 되니 무슨 핑계 거리라도 만들어 시댁에 안 가거나 음식 장만에 열외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만도 하다. 일도 해본 사람이 한다고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곱게만 자라 시집 온 대부분 며느리들이 명절증후군을 느낄 만도 하다. 명절음식은 가짓수도 많고 양도 많다. 잘못했다고 야단맞을 까봐 겁도난다. 심지어 명절 후유증으로 이혼하는 사례도 있다하니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지난 추석때 힘든 시댁 일을 피하기 위해 가짜로 아픈 척 깁스를 하는 며느리가 늘었다고 한다. 방송에서도 가짜깁스 판매업체에서 나와서 하는 말이 “(매출이) 한 100%정도 올랐다고 보시면 돼요. 명절 앞두고 가사노동이나 개인적인 핑계거리가 없어서 필요하신 분들”이라고 한다. 물론 연출용 깁스가 며느리만 애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나 연극에 소품으로도 쓰이고 결근(결석)이나 조퇴용으로도 사용하니 전부 명절 때문에 늘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차례나 제사음식을 간소화하는 음식문화 혁명이 필요하다. 조상에 대한 정성이라고 하여 한 상 그득 그득 쌍아 올리고 겨울에 수박을 다 올린다. 주부들의 말을 빌리면 ‘그래도 명절인데’ 초라한 음식상은 친척들 눈치가 보이고 ‘그래도 조상님 제사상인데’ 정성스럽게 최고급품을 준비해야지, 하는 유교적 효의 문화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어 간단히 하기도 어렵다. 예절과 관련한 음식문하는 주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림이나 국가에서도 물꼬를 터주고 각 가정에서도 열린 마음으로 가족회의를 열어 원만하게 해결하였으면 한다. 명절 때 남은 음식처치에 집집마다 골머리를 앓고 있고 명절 후에는 각 방송사에서 남은 음식 조리법이 어김없이 방영된다. 음식물 쓰레기로 쓰레기 하치장이 몸살을 앓을 정도로 넘쳐난다. 사회 지도층 인사부터 명문가에서부터 달라진 시대상을 반영하여 차례상, 제사상을 간소화 하는데 앞장서고 각종 언론에서도 이를 널리 홍보하면 차츰차츰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연출용 깁스를 사용하는 일이 비록 일부의 일이라고는 하나 이런 세태까지 등장한 것은 집안일을 분담하지 않는 낡은 가부장적 문화와 어떻게든 과중한 책임에서 벗어나보려는 ‘이기주의’의 ‘잘못된 만남’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가족회의를 통해 음식준비를 줄이고 음식 장만에 가족 모두 역할분담을 새롭게 만들어 즐거운 명절, 진심으로 조상을 섬기는 제사상 차림이 되었으면 한다.
- 2016-10-14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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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
- 경기도 남양주시에는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 내에는 그의 생가인 여유당과 선생의 묘가 있고 다산 문화 관, 다산 기념관등이 있다. 참다운 지식인을 대표로 하는 남양주시가 교육의 도시로 거듭난다. 다산 정약용, 한국학의 바다라 일컫는 조선후기 최고 ‘실학의 집대성자’라고도 한다. 19세기초 실학파의 철학적인 입장을 확립한 다산은 ‘다산 학’이라는 거대한 실학의 봉우리인 자신만의 독창적인 학문을 완성한다. 또한 천연두 예방법에 대한 체계적인 글을 썼던 의사이기도 하지만 르네상스적인 인물 이었다고 한다. 그의 관심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영역과 주제들에 이르렀다. 민중의 편에 섰던 그는 선구적인 사상가이며 저술가였으며 법학 가였다. 시인이면서 음악학자 또한 조선의 차 문화에 활력을 일으킨 조선 차의 연구자로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다산은 단지 꿈꾸는 자만이 아니고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했다. 결국 오랜 세월 속에서 각고의 노력과 탐색으로 독창적이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이 탄생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남양주시의 다산 문화 관에는 그에 대한 많은 저서들로 간단한 소개가 있으며 직접 체험 가능한 체험학습도 있다. 다산 기념관에는 수원 성 축조 과정에 쓰였던 거중기, 녹로 그리고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 다산 초당의 축소 모형 등이 전시되어 그의 위대한 업적들을 한눈에 볼 수가 있다. 그는 출세가도를 달리던 명문가의 고위관료였지만 반대파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남녘의 외진 곳에 유배를 간다. 그러나 신세한탄이나 절망을 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떠한 굴욕과 탄압 속에서도 용모를 단정히 하고 의로움에 기 죽지 않으며 마음만은 자유를 만끽하며 당당하게 살아간다. 산수를 벗삼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거나, 때로는 핍박을 받는 백성들을 향한 한없는 사랑으로 펼쳐낸 국가의 총체적 개혁서인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익숙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부패하고 썩어가는 국가의 현실을 새롭게 바꾸고, 허물어진 주춧돌을 단단히 하는데 평생을 바친 다산에게 돌아온 것은 18년동안의 혹독한 유배생활뿐이었다. 그는 고향에서는 죽기 전까지 ‘먼 미래를 기다린다’는 사암(俟菴)이라는 호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끔찍이 사랑했던 두 아들에게 보냈던 편지의 내용을 기술해본다. “지식인이 세상에 전하려고 책을 펴내는 일은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책의 값어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해서이다. 나머지 욕하는 사람들이야 신경 쓸 것 없다. 만약 내 책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너희들은 그가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설령 적대시하던 사람이라도 그와 결의형제를 맺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이 근간이 되어 남양주시가 교육의 도시, 문화의 도시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 2016-08-29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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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5 기획... 이 독립투사에 꽂힌 이유] 노름판 파락호 김용환을 아시나요?
- 개인의 뜻과 삶이 달라도 그 인생을 행복하다 할 수 있을까? 대개는 자신의 높은 뜻을 현실이 받쳐주지 못할 때 좌절하고 자신의 불운을 탓한다. 일부는 자신의 숭고한 뜻을 위해 열악한 현실을 기꺼이 감수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들을 영웅이라 부른다. 그러나 자신의 옳은 뜻을 이루기 위해 생전에 인격적 모멸과 비난을 자초한다면 그런 삶을 우리는 무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식민지 시절을 살아낸 김용환은 모든 재산을 평생 노름판에 탕진한 파락호다. 주위 사람들의 질시를 받고 가족까지 고개를 돌리게 한 사람. 그는 매일 밤 도박으로 밤을 새웠고 잃은 날은 새벽녘 ‘새벽 몽둥이야!’를 외쳐 미리 잠복해 두었던 방망이 든 무리를 시켜 투전판을 싹쓸이하기도 했던 부도덕한 인물이었다. 그가 더욱 멸시를 받았던 것은 번듯한 가문의 종갓집 자식이라는 점이다. 바로 학봉 김성일 선생의 13대손이다. 학봉은 퇴계 이황을 승계한 영남학파의 거두였다. 가만히 있어도 명문가의 자제로서 평탄한 삶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는 왜 노름꾼의 삶을 살았을까? 그것이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안전하게 보내려는 방편이었음이 알려진 것은 그가 죽은 뒤다. 아무리 독립이란 높은 뜻이 있더라도 이렇게 치명적인 삶을 택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처음 일본에 대해 반감을 품은 것은 어린 시절의 충격적인 경험 때문이다. 할아버지 김흥락이 죄 없이 왜경에게 무릎을 꿇는 모습을 코앞에서 본 것이다. 그것은 김흥락이 사촌인 의병대장 김희락을 숨겨준 것에 대한 대가였다. 어린 그에게 이 기억은 어른이 되어서도 아픈 상처로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이 진창 같은 현실을 보고 그는 항일을 결심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독립운동 가담 때문에 죄 없는 가족이 해를 당하게 하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결심으로 그는 가족까지도 감쪽같이 속이며 만신창이의 삶을 산 것이다. 김용환은 많은 평범한 이들이 ‘비루한 뜻’을 감추기 위해 ‘위선’의 삶을 사는 것과는 반대로 ‘위악’의 삶을 통해 고매한 뜻을 성취하려 한 것이다. 해방 이듬해 죽음의 순간에 독립군에 군자금 전달을 맡았던 친구가 진실을 밝힐 것을 권하자 이런 말을 남겼다. “선비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이런 담담한 모습은 어디에서 나오는 힘일까. 그는 뜻을 위해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현실과 뒤엉켜 싸우기보다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을 택한 것은 아닐까? 그는 뜻을 다 이루었으니 자신의 삶이 어떻게 평가되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진정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미루어 짐작건대 삶을 제물로 바쳐 광복을 얻은 그는 마지막 순간 어느 누구보다 행복하지 않았을까? 용기없어 지리멸렬한 삶을 살아가는 필자에게 ‘반영웅’ 김용환은 색다른 위안이 아닐 수 없다.
- 2016-06-28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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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태형의 한문산책] 새해에 마시는 술 도소주
- 개인적으로 중국대륙을 명멸(明滅)한 수많은 문인들 중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진사왕(陳思王) 조식(曹植)을 들며, 가장 좋아하는 문인을 들라면 동파(東坡) 소식(蘇軾)을 꼽는다. 조식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의 천재성 때문이며, 소동파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낙관적 삶의 태도 때문이다. 그의 불후의 명작이자, 인류의 소중한 문학유산인 는 바로 그의 이러한 삶의 태도가 가져다 준 결과물이라 하겠다. 명문가 출신에 과거까지 장원급제하여 승승장구하던 그는, 44세 되던 해 소위 오대시안(烏臺詩案)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 무고(誣告)를 받아 투옥된 후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 이후 여러 사람들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46세 되던 2월에 호북성(湖北省) 황주(黃州)에 유배되는데, 이때 마몽득(馬夢得)이란 지인이 제공한 몇 고랑의 땅을 출생 이후 처음으로 경작하여 기근을 면하여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니, 그 고초와 역경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의 호를, 고생 끝에 손수 개척한 ‘동쪽 언덕’을 뜻하는 ‘동파(東坡)’ 또는 ‘동파거사(東坡居士)’라 칭하게 된다. 그가 거처하던 황주에는 적벽강(赤壁江)이란 조그만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 궁벽진 촌구석의 쪽강에 쪽배를 띄워놓고, 당시로서 약 1,100년전 가어현(嘉魚縣)의 북동, 양자강(揚子江) 남안의 적벽(赤壁)에서 벌어졌던 삼국시대 적벽대전(赤壁大戰)을 상상하며 지은 글이 바로 다. 주목할 점은 이 천고의 명문 어디에도 그가 겪는 생활의 고초에 대한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생각건대 아마도 이러한 상상의 나래가 그 어려운 나날을 지탱해 나가도록 만든 원동력이었을 것 같다. 이달엔 그가 섣달 그믐밤 상주성(常州城) 밖에서 야숙을 하며 지은 란 시의 마지막 두 구절을 소개할까 한다. 이 시의 소개에 앞서, 당시 중국사람들이 새해를 맞아 마시던 도소주(屠蘇酒)란 약주(藥酒)를 먼저 설명하여야 할 것 같다. 이시진(李時珍)의 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새해 아침에는 온가족이 동쪽을 향해 앉아, 나이어린 사람부터 나이 많은 사람 순으로 도소주를 마시니, 도소주를 담그고 난 약재를 우물 속에 던져 넣어 한 해 동안 이 물을 마시면 병을 앓지 않는다.’ 보통 술을 마실 때는 나이든 사람부터 먼저 마시는 것이 예법인데, 도소주만은 그 반대로 연장자가 가장 늦게 마시니, 연장자가 젊은이처럼 오래 장수하길 바라는 마음이 스며 있는 예법이라 하겠다. 但把窮愁博長健(단파궁수박장건) 곤궁함의 근심을 붙잡아 늘 건강함으로 바꿀 수 있다면 不辭最後飮屠蘇(불사최후음도소) 도소주 마지막에 마시는 것쯤이야 사양치 않겠네... 나이가 드니, 병도 나고 생활의 곤궁함도 피할 수가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이러한 처지를 오히려 역설적으로 외친다. 나이 먹는 것과 건강함을 바꿀 수만 있다면, 나이 먹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사양치 않겠노라고... 같은 의미지만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것이다. 에 나오는 두보의 구절과 비교해 보시라. 필자가 소동파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多病所須唯藥物(다병소수유약물) 여러 가지 병 때문에 구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약물이니, 微軀此外更何求(미구차외갱하구) 미천한 이 내 몸이 그 외 무엇을 구하리오 하태형(河泰亨) 뉴욕주립대(빙햄턴) 경제학박사 보아스 투자자문 대표이사 수원대 금융공학대 학원장 등 역임 현재 현대경제연구원장
- 2015-02-06 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