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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시준 독립기념관 관장 “3·1운동은 대한민국의 어머니”
- 119만 평의 대지에 웅장한 건물, 그리고 바람에 펄럭이는 815개의 태극기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절로 뭉클해진다. 1919년 3월 1일 그날의 함성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다. 103주년 3·1절을 앞두고 천안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한시준(68) 독립기념관 관장을 만나 우리 역사에서 독립운동이 중요한 이유와 의의를 들어봤다. 지난해 제12대 독립기념관 관장에 취임한 한시준 관장은 평생을 ‘독립운동’을 연구한 역사학자다. 그는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인하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특히 1988년부터 2019년까지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한편, 한국광복군, 대한민국임시정부, 한중 공동 항일운동 등을 연구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한시준 관장은 “제 전공이 독립운동사여서 독립기념관이 만들어질 때부터 교육, 강의도 하고 자문을 하기도 했다. 2006년부터 2년 동안은 독립기념관 내에 있는 한국독립연구소 연구소장을 맡았다”며 독립기념관과의 특별한 인연을 얘기했다. 더욱이 그는 기존의 관습을 깨고 선출된 의미 있는 독립기념관 관장이다. 한시준 관장은 “독립기념관이 건립되고 대대로 관장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이 아닌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학자가 관장을 맡은 건 제가 처음이다”라고 밝혔다. 이는 그만큼 한시준 관장이 독립운동 전문가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벌써 1년을 보낸 그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리고 앞으로 독립기념관을 어떻게 이끌고 싶을까. “밖에서 볼 때와 관장으로 안에서 보는 게 다르더라고요. 독립기념관을 이렇게 크게 지어놓고, 국민뿐만 아니라 정부도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른다는 점이 매우 안타까워요. 독립기념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념관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기념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1900년대 20세기 전반기에 제국주의가 만연했고 많은 약소국들이 식민지가 됐죠. 식민지가 된 나라들은 독립운동을 했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거의 다 독립했어요. 그런데 독립한 나라들 중에 우리나라처럼 독립기념관을 엄청난 규모로 지어놓고 독립운동 역사를 공부하고 교육하는 나라는 없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독립기념관이 세계적인 기념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나라가 1945년에 해방했잖아요. 우리가 독립운동을 해서 나라를 되찾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미국이 일본하고 싸워서 이겨 어부지리로 해방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우리가 일본과 싸워서 나라를 되찾았다는 것을 알려야겠다는 생각도 크죠.” 독립운동의 중요성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 일제 강점기 시대에 우리 민족이 독립하기 위해 민족운동을 벌인 것을 독립운동이라고 한다. 특히 1919년에는 한국 독립운동 역사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게 된다. 한시준 관장은 독립운동이 우리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유에 대해 “한민족의 역사를 반만년이라고 하지 않나. 우리는 오랫동안 다른 민족한테 나라를 빼앗겨본 적이 없다. 그런데 1910년 처음으로 일본에 나라를 뺏겼고, 다시 되찾아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된 것이다. 우리 민족을 다시 살아나게 한 것이 바로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한시준 관장은 3·1운동에 대해 “대한민국의 어머니”라고 표현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일제의 폭압적 지배에 맞서 일어난 비폭력 만세 시위운동이다. 전국을 넘어 해외 방방곡곡에서 태극기를 든 사람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3·1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는 유관순 열사가 꼽힌다. 한시준 관장은 3·1운동에서 3·1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부분에 주목했다. 독립선언서에는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한 관장은 “이 핵심 문장은 대한민국이 건립되는 계기가 됐다”며 “3·1절과 대한민국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짚었다. 이후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됐다. 3월 1일에 독립국을 선언했기 때문에 국가 ‘대한민국’이 세워진 것. 그러나 이날을 대한민국 건국일로 보는 것이 맞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대한민국 건국일을 보는 시선은 두 가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4월 11일이라는 입장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을 건국일로 봐야 한다는 의견으로 갈린다. 한시준 관장은 “역사적 사실로 보면 1919년 4월 11일이 맞다.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날이다”라고 강조했다. 사실 그동안 암묵적으로 대한민국은 1919년 4월 11일에 세워졌다고 봤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보고 2008년 광복절에 ‘건국 60주년’ 행사를 열면서 잡음이 불거졌다. 이에 한시준 관장은 칼럼과 강연 등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뿌리”라며 1919년 4월 11일을 건국일로 인정받았다. 문 대통령은 2019년을 ‘건국 100주년’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건국일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고 확실하게 공식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다. “1919년에 대한민국이 세워지면서 우리나라 역사는 확 바뀌었어요. 단군 때부터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국가의 주인은 군주였죠. 그때는 국민이라고 하지 않고 백성이라고 했어요. 백성은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죠. 지금은 국민이 주권을 갖고 있고, 권리도 갖고 있어요. 우리 반만년 역사에서 주권을 처음으로 행사하게 됐으니 그때 국가가 세워진 것이 맞는 거죠.” 한시준 관장은 현재도 역사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그는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역사가 어떻게 연계되는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한 관장은 “1945년 해방 후를 현대사라고 한다. 보통 그때 우리 역사가 새롭게 출발했다고 생각하지만, 독립운동에서 계속 이어진 것이다. 독립운동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해방 시기에도 살고, 그 이후에도 살면서 계속 연결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임시의정원’이라고 국회도 만들었어요. 국군도 이미 독립운동 시기에 독립군, 광복군이 있었죠. 지금 대한민국 정부도, 국군도, 국회도… 한국의 현대사는 1945년 해방되고 시작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 시기의 역사적 경험이 그대로 이어진 거예요.” 독립기념관, 전 세계에 알릴 것 독립기념관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를 기리고 후세를 위한 산 역사의 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관련 사료와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민족 기념관이다. 1982년 건립이 추진됐고, 1987년 8월 15일 개관했다. 한시준 관장은 “국민들이 성금을 내서 부지를 마련하고 건물을 지었고, 관련 자료도 많이 기증해주셨다”면서 국민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독립기념관의 한 해 관람객 수는 약 180만 명이라고 한다. 지난해는 코로나19의 여파로 114만 명에 그쳤다. 한시준 관장은 “그러나 관람객 중에 외국인의 비율은 1%도 안 된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전시가 흥미롭지 않기 때문에 거의 오지 않는 것”이라고 문제점을 짚었다. 이에 따라 관장으로서 그의 목표는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고, 독립기념관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이다. 한시준 관장은 앞으로 2년 내에 ‘연합국(미국·중국·영국)과 함께한 독립운동’ 전시관 만들기를 추진하고 있다. 1000평의 대규모 전시가 될 전망이다. 독립기념관에서는 지난해 8월 ‘한중 공동 항전 특별전’을 열었고, 올해는 한미 수교 140주년을 맞아 ‘한미 공동 항전 특별전’을 개최한다. 한시준 관장은 “1945년에 광복군이 미국 OSS라는 정보기구에서 훈련을 받고 작전을 수행한 바 있다. 보통 6·25 때 한미 동맹이 맺어진 줄 알지만 이미 오래전 맺어졌다”고 설명하며, 이를 들은 미군 장교도 놀랐던 일화를 소개했다. 이렇게 특별전을 통해 자료를 풍부하게 수집해 최종적으로는 ‘연합국’ 전시를 열 계획이다. “독립운동가들은 우리 혼자 힘으로는 일본을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1910년에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해서 차지했는데, 한반도로 만족하지 않을 것을 알았죠. 일본이 중국, 러시아, 미국과도 충돌할 것을 예상했고, 일본이 그 나라들과 싸울 때 함께 전쟁한다는 전략을 세웠어요. 실제로 그분들이 예견했던 대로 일본은 중국을 침략했고, 1941년에는 미국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으며, 아시아를 차지하면서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도 침략했죠. 그래서 일본은 중국, 미국, 영국과 전쟁을 했어요. 우리는 그때 같이 연합해서 일본과 싸웠습니다. 우리나라가 연합국과 독립운동을 같이 해서 나라를 되찾은 것이죠. 그 전시를 보면 우리나라가 독립을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쟁취했다는 것을 알게 되겠죠.” 이처럼 독립운동가들은 전략가였다. 한시준 관장은 많은 독립운동가 중에서 조소앙 선생(1887~1958)의 업적을 특히 높게 평가했다. 더욱이 한 관장과 조소앙 선생은 특별한 인연이 있다. 20대 시절 한시준 관장은 사학과 학생이긴 했지만 사실 역사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군대를 가면서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군대에서 한 관장은 조소앙 선생의 조카를 만났는데, 그가 집에 있는 조소앙 선생의 책들을 갖다줬다고. 한시준 관장은 그 책들을 읽으면서 역사에 관심이 생겼다. 특히 독립운동을 전문적으로 파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현재에 이르렀다. “조소앙 선생은 독립하면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지 생각한 분이에요. 특히 선생은 삼균(三均)주의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했어요. 자본주의 국가도, 공산주의 국가도 각각 장단점이 있잖아요. 그래서 선생은 자본주의가 가진 장점, 공산주의가 갖고 있는 장점을 모은 국가를 만든다는 논리를 세웠고, 그게 삼균주의예요. 인류 사회에서 누구도 세우지 못한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 한 사람이죠.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고 안중근 의사, 청산리 전투 등도 모두 훌륭하지만 저는 우리나라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했던 조소앙 선생이 참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박상돈 천안시장은 독립기념관에 ‘K-컬처 전시관’ 건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시준 관장은 이에 대해 “독립기념관과 대한민국의 역사를 세계에 알릴 기회가 될 수도 있다”면서 긍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특히 그는 “백범 김구 선생도 문화 국가를 세워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했다. 독립기념관의 취지와도 맞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여 눈길을 끌었다. 돌이켜보니 그렇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현재의 대한민국이 있었을까. 그때의 나라를 되찾으려는 간절한 움직임이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으로 이어졌다는 생각도 든다. 한시준 관장은 ‘불가능에 도전하여 가능을 창조한 독립정신’이라고 말한다. 그 독립정신이 바로 대한민국 모든 역사의 출발점이었다. “여기 독립기념관에 오면 엄청난 정신, 기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독립운동 정신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거예요. 독립운동을 한마디로 비유할 때 달걀로 바위 치기라고 하잖아요. 우리는 달걀이고 일본은 바위죠. 달걀로 바위 못 깨잖아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과 협력하는 길로 갔잖아요. 독립운동가들이라고 달걀로 바위를 깰 수 있다고 생각했겠어요?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낸 것이 독립정신이죠.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갖고 독립기념관에 오면 독립정신,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정신을 받을 수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으로 많이 많이 오세요.”
- 2022-03-0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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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더듬어가며 바다를 품는 하루짜리 여행
- 바다와 사랑하는 사람은 돌아서면 그립다. 인천의 바다는 쉽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낮은 곳이거나 높은 곳에 올라 바다를 향해 바라보아도 자신을 숨기고 보여주지 않는다. 인천을 거쳐간 근대 역사를 더듬어가며 그리운 바다를 가슴에 품고 차이나타운과 개항장 거리를 걸으면 하루짜리 최고의 힐링 여행이 완성된다. 천천히 걸어도 반나절이면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개항기 역동의 세월 속으로 빠져들어갈 수 있다. 이국적 풍광의 인천개항누리길을 걸어보자. 코로나 시대 우리의 여행은 이렇게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여행 기분은 제주를 가더라도 비행기도 타고 면세점도 들러야 제맛이다. 전철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며 인천을 가는 여행은 비행기 타지 않고 해외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겨울 오후 지하철 안은 한산했다. 인천역은 서울시청역에서 1시간 9분이면 도착한다. 금방이라도 서해가 펼쳐질 것 같지만 지하철 1호선 종착역에서 내리니 차이나타운임을 알리는 황금빛 패루(牌樓)가 눈에 들어온다. 서해를 건너온 사람들이 처음 정착한 곳이다. 화교뿐만 아니라 여러 바다를 거쳐 건너온 사람들도 있다. 인천항은 조선시대에 근대 문물을 처음 받아들인 항구였다. 차이나타운과 일본인 거주지역은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확연한 건축 양식의 차이를 보인다. 차이나타운은 중국 특유의 현란한 붉은색 간판이 거리를 원색으로 물들인다. 반면 일본인 거리는 단색의 정돈된 이미지가 완연하다. 자장면 맛은 변함이 없지만 계단을 걸어 위쪽으로 올라가면 좌우의 석등이 다른 생김새로 각기 자기 나라의 고유 양식을 보여준다. 계단 끝부분에는 공자 상이 자리 잡고 서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자유로운 이동이 방해받는 시대, 서해의 겨울바다를 보려면 차이나타운을 천천히 30여 분 정도 걸어 다니다가 자유공원으로 올라야 한다.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곳에 이르면 비로소 바다가 보인다. 역사적 사건과 근대의 역동성을 보여주던 이 지구는 지금 조용하다. 간간이 마스크를 끼고 방한 장비로 중무장한 산책자들만 보일 뿐이다. 지나치는 사람들을 쳐다보면 간신히 눈만 빼꼼하다. 평소에는 식사시간이 되면 긴 줄이 이어졌다는 유명한 중화요릿집도 점심시간인데 홀이 한산하다. 자장면의 맛은 변함이 없지만, 풍경은 어쩐지 낯설다. 과장해서 말하면 손님보다 종업원이 더 많다. 차이나타운 상가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거의 개점휴업이다. 코로나 사태뿐만 아니라 영하 11℃의 한파도 한몫한 듯하다. 이 모든 현상은 전 지구적인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에서 비롯했다. 그렇지만 인류의 역사가 그렇듯 문제가 발생하면 답을 구해 슬기롭게 해결할 것이고 우리는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으리라. 인천은 최초에 대한 기록이 꽤 있다. 1882년 축구와 야구의 도입지, 서양과 맺은 최초의 조약 체결지, 이듬해 해관 설치, 1884년 청관(淸館)의 기원과 자장면의 발상지로 자리매김했다. 이 외에도 교회, 호텔, 공원, 전환국, 철도, 우체국 등 한국 근대사의 여명을 장식한 도시다. 현재 진행 중인 제4차 산업혁명이 인터넷과 디지털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근대의 전 지구적 접속은 항구가 중심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천이 선구적 위치를 점했다. 이동, 변화, 융합, 그리고 창조가 가능했던 국제도시였고 수도 서울의 관문이었다. 지금은 항구보다 세계적 허브공항의 이름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바다를 통해 문화는 교류되었고 이 도시는 교류 초기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것도 수많은 최초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개항도시 인천이다. 개항 이후 세계와 처음 만난 도시가 인천이고 이후 천지개벽의 역사가 펼쳐졌다. 운요호사건으로 일본과 1876년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는다. 1883년에는 부산, 원산에 이어 인천을 개항하기에 이른다. 속속 외세가 당도한다. 한국 화교의 태동은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했을 때 시작됐다. 화교들이 한국으로 이주해왔다. 당시 청나라는 3000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는데, 청군과 함께 한국에 온 화상 수는 40여 명이었다. 처음에는 대부분 중국 남방 출신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청국 조계지는 상징적인 조세는 냈으나 치외법권 지역이었고 경찰서, 감옥, 신문사까지 갖추고 있었다. 조선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소중국이었다. 의를 지키고 착하게 살라는 의미를 지닌 사당 의선당(義善堂)은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도교의 신 중 하나인 항해의 수호 여신으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포세이돈과 같은 마조신을 모시고 있다. 화교들이 터를 잡으면서 중국 문화가 인천으로 유입되었고 그렇게 자장면과 같은 중국적인 것들의 한국화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북적이며 향불이 끊임없이 타올랐던 의선당의 향불도 코로나 시대인 현재는 꺼져 있다. 수많은 최초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 일본은 자본의 침탈을 개시한다. 일본의 조계지였던 개항장 일대는 현재 역사 문화 거리로 조성되어 있다. 적산가옥이 즐비한 일본풍 거리다.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는 1882년에 건립된 일본 영사관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위세를 가늠하게 해주는 장소였다. 해가 잘 들고 산을 배경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를 선점했다. 구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건물은 1888년에 건립되었다. 인천의 최초 서양식 건물이다. 해운업을 독점했고 쌀과 잡화를 실어 나르는 기선을 운영했다. 인천은 대외 항구뿐만 아니라 강화를 거쳐 노량진에 이르는 국내 운송까지 겸하는 요충지였다. 일본 해운회사의 본점 또는 지점이 설립되었다.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은 개항 초기 조선의 쌀과 금을 일본으로 유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처음에는 출장소로 출발했고 1883년에는 인천지점으로 승격해 본격적인 은행 업무를 시작했다. 주로 사금과 금괴의 업무를 봤다. 이후 해관세에 대한 업무도 개시했다. 화폐로 사용했던 은폐에 대한 업무도 진행했다. 개항 전에 상평통보나 당오전을 사용했던 조선은 개항 후 돈의 가치가 하락하자 일본의 자금을 들여오기 시작한다. 인천과 경성에 전환국을 설치해 일본과 같은 신식 화폐도 발행한다. 구화폐를 신화폐로 바꿔주는 역할을 한 은행이 제58은행이다. 이후에는 1은행과 18은행에서도 업무를 같이 수행한다. 근대식 금융권이 최초로 인천에 밀집돼 있었다는 것, 세계 경제의 축소판으로 근대가 태동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인천은 자본가, 은행가 상인의 각축장으로 변모한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청나라와 일본이 인천의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지만 무역은 일본이 앞섰고 정치 외교에서는 청나라가 우세한 분위기였다.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이 앞서기 시작한다. 외국 자본의 횡포로 조선의 소가죽, 호피, 쌀 등이 헐값에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개항 이전의 인천은 200여 명이 거주하는 조그만 황무지에 불과했다. 이곳에 일본 세력들이 건물을 짓기 시작했고 서구 열강의 쇄도가 이어지며 외국인 커뮤니티가 생겨났다. 조합을 만들어 협약을 맺고 건축을 했다. 차별을 두는 지배자들의 속성을 잘 보여줬다. 우리나라의 건축 양식도 변화를 맞는다. 은행 건물들은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랐다. 초기 일본은 정치적 의도를 숨기고 우선 경제적 이익에 집중했다. 따라서 은행의 침투가 활발했다. 건축상의 변화는 벽돌을 쌓는 신기술에 있었다. 인천 개항장에 벽돌 건물이 대거 등장했다. 일본의 은행 건물은 벽돌과 나무로 지어졌는데 멀리서 보면 돌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일본도 기술 초기 단계여서 석재를 다루는 기술이 고도화되기 이전이었다. 나무로 전환된 신고전주의 양식이 인천에 많이 나타났다. 상부 목조 트러스 구조가 주종을 이루었다. 하부 2m 정도는 화강석이고 상부는 벽돌, 출입구는 석재로 축조해 건물을 지탱하도록 했다. 1883년부터 1910년까지 청일 조계지로 형성되었던 지역은 1910년 일본 상인의 거주지로 바뀌었다. 일본은 인천 일본인의 거주지를 확장하기 위해 홍예문까지 뚫는다. 1906부터 1908년까지 3년간 이어진 공사였다. 돌산을 폭파하느라 많은 희생을 내고 준공도 늦어졌다. 일본 명칭은 아나몬[穴門]인데 조선에게는 혈문(血門)이다. 서양인 사교클럽 제물포구락부는 각국 외국인들의 사교모임 장소로 활용된 시설이었다. 1901년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서양식 건물이다. 전망이 빼어난 곳에 서향으로 지었다. 인천 앞바다로 열려 있는 구조다. 개항기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다. 영사관, 무역회사 등 서양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전에 머무는 등 일제강점기 전의 개항 시기에는 외국인으로 북적댔다. 조계지가 철폐될 때까지 중요한 외교 장소의 임무를 수행했다. 조선을 합병한 일제는 1911년부터 1918년까지 조수간만의 차로 무역항으로서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던 인천항에 갑문식 도크를 건설한다. 조선과 세계를 잇는 근대과학의 출발점이었다. 결국 조수간만의 차를 이겨냈다. 백범 선생도 이때의 작업에 강제동원됐다고 백범일지에서 고백했다. 개항장에는 의미 있는 근대 건축물이 있다. 역사적 상처도 있다. 이국적 공간이자 부인할 수 없는 문화유산이다. 긴 안목으로 반면교사로 삼아 효율적 공간으로 꾸려야 할 일이다. 문호개방으로 인천은 신문물을 처음 접했고 근대과학 산업문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새로운 문명을 만나 근대도시가 된 인천에는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던 노력이 숨겨져 있다. 아픔과 슬픔 속에서 140년 전에 세워진 조선 최초의 국제도시다. 스스로 변하지 못해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았다. 개화시기보다 더 변화가 심한 제4차 산업혁명 시대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스스로 걸어야 하지 않을까? 최치현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로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 2020-12-31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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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랑한 한국의 가을
- 한국으로 돌아와 가장 행복한 하루였다. 거리에 노란 은행나무 잎이 수북하게 쌓인 가을 인사동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한국으로 돌아왔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덕수궁 돌담길, 인사동, 삼청동, 남산 가리지 않고 걸어 다녔던 내 젊은 시절의 거리들이 오늘 하루 종일 행복 세포를 일깨우며 알알이 기억을 일깨웠다. 늦은 밤까지 스산한 거리를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따스한 차 한 잔 앞에 놓고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의 ‘재클린의 눈물’(Les Larmes de Jacqueline: Jacqueline’s Tear)을 듣고 있다. 유독 가을이 좋다. 형형색색 화려한 옷을 갈아입은 자연을 보는 순간만큼은 걱정도 괴로움도 모두 사라진다. 그래서 가을만 되면 더 흐느적흐느적 돌아다니고 싶다. 얼마 전 공주에 갔다가 서울로 올라오다 문득 마곡사 표지판을 보는 순간 그곳의 가을을 보고 싶어 운전대를 돌렸다. 지난해 겨울바람 불던 어느 날, 마곡사 대웅전 옆 돌계단 위에 가만히 앉아 바람에 부딪혀 ‘찰랑찰랑’거리던 풍경소리가 갑자기 듣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풍경소리를 듣는 순간 ‘지금 이 순간이 그대로 정지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이 적막함과 평안함도 그대로 말이다. 오래된 사찰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내 취미의 시작은 아마도 산사의 풍경소리에 매혹됐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산사의 풍경소리가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면, 화려한 연등은 의외로 흥을 돋운다. 적막함 속 고요한 산사와 언뜻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고색창연한 기와에 화려한 연등은 안 어울리는 듯 어울리며 품격을 더해준다. 그래서 삶에 지친 이들이 산사에 가면 위안과 평안함을 얻고 그곳에서 잠시 평화를 얻은 후 돌아갈 곳에서의 인연을 생각하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찾은 마곡사는 역시나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품위 있고 격조 있는 마곡사의 가을 사진을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워낙 전통 있는 사찰이라 많이들 알겠지만 마곡사는 백범 김구 선생이 한때 출가해 승려 생활을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6년 일본군 중좌를 살해해 교도소에서 사형수로 복역 중 탈옥하여 1898년 마곡사에서 은신하다 하은당 스님 제자로 출가해 원종이란 법명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백범 김구 선생이 묵었던 전각은 ‘백범당’이라 불리고 있다. 백범당 바로 옆에는 김구 선생이 해방 직후인 1946년, 50여 년 만에 다시 마곡사를 찾아, 독립운동을 함께한 동지들과 기념식수를 한 향나무가 파랗게 자라고 있다. 당시 김구 선생은 마곡사의 대법당인 대광보전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주련은 사찰이나 서원 또는 한옥의 기둥이나 바람벽 등에 장식으로 붙이는 글씨를 말하는데 이 기둥에 시구를 걸었다는 뜻에서 주련이라고 부른다. 불교사, 서예사, 미술사적으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산사에서는 주로 부처님의 말씀이나 고승들의 말씀 등을 적어 걸어놓는다. 마곡사에 가면 대법당 대광보전 주련에서 이 문구를 한번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듯싶다. 김구 선생이 감개무량했다는 주련 문구가 마곡사 표지판에 소개돼 있다.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 (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구나 발걸음 닿는 곳 구석구석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이 땅. 한국의 가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이 지겨운 이, 오늘 당장 노란 은행잎, 빨간 단풍잎을 사각사각 밟아보자. 가을을 품에 가득 안는 것으로도 이렇게 행복한 날, 우리 인생의 앞날에 그 무엇이 무서울까? 무서울 게 없다.
- 2020-11-20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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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누리’를 알려준 석싱 씨
-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지게 목발 두드리며 노래 부르고 다니던 1960년대 공주 시골의 청년들 중에 석싱이라는 이가 있었다. 이름이 김석성인데, 어른들은 대충 석싱이라고 불렀다. 기남이도 기냄이라고 부르는 게 충청도 사람들인데 뭐. 내 또래인 석싱이의 동생은 석윤이었지만 서균이가 아니라 성뉸이라고 불렀다. 나보다 8~9세 많은 석싱 씨는 동네 새마을지도자였다. 아니, 그때는 새마을운동이 아니라 4H운동이었지. 4H는 1902년 미국에서 처음 조직된, 두뇌(Head)·마음(Heart)·손(Hand)·건강(Health)의 이념을 지향하는 청소년 단체다. 국내에서는 4H가 지덕노체(知德勞體)로 번역돼 농업구조와 농촌생활 개선을 위해 활동하는 협동조합 형태로 전개됐다. 조합원들이 행사 때마다 부르던 노래는 “씩씩한 흙의 용사 송정4H”로 끝난다. 동네마다 지명만 바꿔 부르던 4H 주제가다. 우리 동네 이름은 되찬이인데, 목숨을 되찾고 장수하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한자로는 전혀 뜻이 다른 송정(松亭)이 돼버렸다. 석싱 씨는 농사든 무슨 일이든 다 잘했다. 지도력도 있고 조직력도 있는 우두머리 청년인 데다 얼굴도 잘생겨 동네 처녀들이 애를 태웠다. 어느 집에선가 열리던 4H회의엔 나 같은 초등학생 조무래기들도 갔는데, 밤마실 나오듯 거기 참석하는 처녀들한테서는 석싱 씨를 의식한 분 냄새와 교태를 쉽게 맡을 수 있었다. 우스운 것은 석싱 씨의 할머니였다. 평소 며느리와 사이가 좋다가도 수틀리면 “연애 걸어 시집온 년”이라고 흉보며 욕했다. 그 당시 남녀 간에 연애를 거는 건 품행이 방정치 못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자기 아들과 연애를 해서 며느리가 됐는데도 그걸 흉을 잡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하여간 동네 처녀들은 석싱 씨와 연애를 걸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어린 내 눈에도 다 보였다. 그런 석싱 씨가 스타일 구긴 일이 한 번 있다. 어느 가을밤에 석싱 씨네 집에서 송정4H 주최 연극 공연이 열렸다. 무대는 마루, 객석은 마당. 동네 사람 다 모인 가운데 화톳불을 피우고 한바탕 판이 잘 벌어졌다. 일제 순사인지 북한 괴뢰군인지가 양민들을 괴롭히는 내용인 건 생각나는데, 연극 제목은 잊어버렸다. 웬일인지 석싱 씨는 주연이 아니라 일제 순사인지 북한 괴뢰군인지 악역을 맡았다. 일제 순사라고 해두자. 한 순사가 숨은 독립군을 찾아내라며 주인공 처녀를 마구 닦달했다. 처녀가 울부짖으면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반항할 때 그 순사의 상급자인 우리의 석싱 씨가 등장했다. 등장이랬자 방 안에서 마루로 나오는 건데, 목총을 든 석싱 씨는 방문을 거세게 열고 대차게 마루로 내려서면서 “에누리 없어 이년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소리를 지를 때 몸의 균형을 잃고 엎어져 사람들이 와 웃어버렸다. 울던 처녀까지 웃었다. 석싱 씨는 바로 멋쩍게 일어났지만 그다음 대사를 까먹어 연극이 영 거시기해졌다. 나는 그때 에누리가 무슨 말인지 몰랐다. 다만 각본에도 없는 말을 석싱 씨가 즉석에서 애드립(물론 이 말은 나중에 안 것)으로 외쳤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확 왔다. 에누리라는 말을 정확하게 안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다. 주로 물건을 깎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었다. 그러나 석싱 씨가 쓴 에누리는 ‘용서하거나 사정을 봐주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에누리는 1) 받을 값보다 더 많이 물건 값을 부르는 일, 또는 그 물건 값, 2) 값을 깎는 일, 3) 실제보다 더 보태거나 깎아서 말하는 일, 이렇게 세 가지 뜻이 있고 네 번째로 석싱 씨의 에누리가 있었다. “일 년 열두 달도 다 사람이 만든 거고 노래도 다 사람이 만든 건데 에누리 없이 사는 사람 있던가?”(박경리 ‘토지’), “토지는 극히 비옥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은 상해와는 딴판으로 순후하여 상점에 에누리가 없고 고객이 물건을 잊고 가면 잘 두었다가 주었다.”(김구 ‘백범일지’) 이런 문장이 예로 제시돼 있다. 그런데 요즘은 에누리가 물건 값을 깎는 의미로만 쓰이는 것 같다. 에누리가 유명해진 건 코미디언 살살이 서영춘(1928~1986)의 ‘시골영감 서울 가는 기차놀이’라는 노래 덕분이다.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라, 차표 파는 아가씨와 실갱이하네.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어? 깎아달라고 졸라대니 원 이런 질색. 기차는 삑 하고 떠나갑니다. 영감님이 깜짝 놀라 돈을 다 내며 깎지 않고 돈 다 낼 테니 나 좀 태워주. 저 열차 좀 붙들어요. 돈 다 낼 테니. 삼등차는 만 원이라 자리가 없어 옆의 칸을 슬쩍 보니 자리가 비었네. 옳다구나 땡이로구나 집어탔더니 삼등차에 이등칸이라 돈을 더 물어….” 이런 내용이다. 가사도 재미있지만 중간 중간의 웃음이 걸판지다. 에누리는 얼핏 일본 말 같지만 우리말이다. 세일이나 할인 이런 말보다 ‘에누리 몇 %’ 식으로 쓰면 참 좋을 것 같다. 값을 부풀리든 깎든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는 없겠지만 값을 더 부르는 에누리를 대놓고 광고하는 상인들은 없겠지. 석싱 씨는 그 뒤 어떻게 됐을까? 농사를 버리고 정든 고향을 떠나 대전인가 어디에선가 노동을 하며 산다는 말까지는 들었지만 그다음은 모르겠다. 하지만 에누리라는 말을 알려준 것 하나만으로도 석싱 씨는 내 삶에 의미가 있는 분이다. 선한 사람이니 어디에서든 부디 건강 평안하고 에누리 없는 복을 받으시기를.
- 2020-05-13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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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수의 미학에 새로운 영혼을 수놓다
- 자수의 미학에 새로운 영혼을 수놓다 작업 과정들만 봐도 그녀가 자신의 작품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 지독한 창작의 과정에서 받게 될 예술적 고통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고독과 괴로움이요? 말로 표현 못하죠.” 어째서 그토록 보통 사람이 보면 ‘사서 고생인 일’을 하고 있는 걸까? 그녀가 말하는 예술가의 정의를 들어보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예술은 끝이 없어요. 무한하죠. 그러니 좋아서 해야 하는 게 예술이에요. 생계를 위해서라든지 돈이 필요해서 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런 건 작가로서의 덕목에는 해당이 안 된다고 봐요. 어려울수록 더 좋은 작품이 탄생한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미칠 수밖에 없어요.” 가난하든 풍요롭든 타고난 예술적 유전자가 있으면 ‘올인’해야 하는 게 예술가라는 그녀의 말에는 예술에 대한 운명론적인 관점마저 느껴졌다. 어쩌면 운명으로서의 예술이란 손 작가에게 가장 적합한 표현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그녀는 그녀를 예술의 길로 이끈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무조건 창조하라”는 어머니 말씀 손 작가의 어머니 이경수 씨는 외할머니로부터 자수를 전수받은, 자수 전문가였다. 또한 초등학교 교장, 경상남도 초대 교육위원 등 교육자로서의 자질 또한 충실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딸인 손 작가를 보며 3대째에 이르는 자수 예술가로서의 미래를 발견한 것은 다분히 운명적인 면이 있었다. 7세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10세 때 자수를 손에 쥔 손 작가는 붓 대신 실로 그리는 그림에 미쳤다. 뒤돌아보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이화여자대학교 섬유예술학과에 진학한 뒤에는 자신의 운명적인 삶의 길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제대로 갖추지 않고는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게 어머니 말씀이었죠.” 손 작가가 밖으로 나온 것은 1976년이었다. 그때 제작한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 독립선언문 자수가 미국독립기념관에 소장되면서, 그녀는 본격적으로 자수 작가로서 이름을 올리게 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86년에 첫 개인전을 열면서 자수 작가로서 우뚝 섰다. 그러한 손 작가의 여정에서 어머니는 든든한 조언자이자 동지였다. 1500여 가지에 이르는 색실 또한 어머니와 함께 만든 귀중한 자산이다. 그런 그녀에게 어머니가 한 말들은 예술가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지키고 있는 금언들이다. “무조건 창조하라. 숲을 만들면 새와 호랑이는 찾아오게 되어 있다. 욕심을 버리고 모든 걸 나눠라. 본인 소유로 생각하지 마라. 교수도 하지 말고 인간문화재도 하지 마라. 일에 미쳐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세계와 공유해라.”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협업 그토록 노력해서 만들었는데 본인 소유로 생각하지 말라니? 언뜻 이해가 안 가는 말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 말은 자신의 작품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대한민국 소유로 생각하라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미래에는 문화전쟁이 시작될 것을 오래전부터 예견했다고 한다. 사실 그렇다. 1차 산업과 2차 산업이 기계 자동화와 AI 발달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상향평준화가 되고 있는 현재, 문화는 각국이 국가적 헤게모니를 걸고 벌이는 각축장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일찍이 백범 김구 또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말했던 게 아닐까. 말하자면 손 작가에게 있어 어머니가 말한 ‘숲’이란 한국의 예술을 통칭하는 셈이다. 실그림을 매개로 한국 예술이라는 큰 틀을 연결하고자 하는 손 작가의 도전의식은 그만큼 다양한 장르와의 결합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혼자서만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 그녀를 전통 장인들이 뒷받침해주고 있다. 기술적으로 각 분야 전통 장인들과 협업해야 작품을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하자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셈이다. 전통 장인들이 사라져가는 안타까움 손 작가는 자수, 배접, 백골, 조각, 옻칠, 매듭, 침선, 장석의 장인 등 여덟 파트의 전통 장인들과 35년 넘게 한 팀으로 목공예·목가구·보자기·장신구·조형물·병풍 등의 협업을 지속해왔다. 그러나 요즘 들어 고민이 늘어나고 있다. 전통문화계의 열악한 현실 때문이다. “장인들의 생계가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지고 있어요. 다 그만두는 추세이고, 맥이 끊겨 대를 잇지도 못하고 있어요. 협업할 수 있는 장인들이 사라져가고 있어 그 부분이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고통과 고독을 벗 삼아 즐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문화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현재에 정작 전통 장인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은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하기도 하거니와, 당장 작품 제작의 추진력을 잃게 될까 걱정하게 만드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에게 얼마 안 남은 장인들은 모두 소중한 존재들이다. 이러한 현실이 그녀 작품의 특징인 디테일을 더욱 강화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안 보이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만약 각 분야의 장인들이 없어지면… 이제는 그런 것까지 생각하며 작업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100년 후에, 우리 장인들이 없어졌을 때 작품을 복원하게 되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하면서 만들고 있어요.” 요즘 그녀는 15년 전부터 ‘전탁’을 다시 재해석해 이제야 옻칠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 100년 이후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실그림의 새로운 경지를 열다 손 작가는 자신을 과대평가하지도, 그렇다고 과소평가하지도 않는다. “나는 내가 좋아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하는 것뿐인 수평선인 사람”이라는 말에서 그녀 자신에 대한 판단이 느껴진다. 그녀는 주어지고 해야 할 마땅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다만 그 가치가 어느 정도가 될지 가늠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이는 그녀가 품고 있는 작가론과도 연결된다. “진짜배기는 한 분야를 정말 미치도록 좋아하면서 자신에게 정직한 작가죠. 일반 관객들은 자신을 속이는 작가를 처음에는 못 알아보지만 언젠가는 드러날 날이 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작가는 뭐라고 말해도 본인이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해요. 자신에 대한 인정도 본인이 해야 하고, 스스로 봤을 때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겠으면 시정을 해야 하죠.” 실그림이 자수 기법으로 제작되는 이상, 그리고 그 기법이 몇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실 한 땀 한 땀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상, 손 작가의 실그림 작품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작업에 들어가면 외부 노출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외부 노출을 보다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번 호 본지 표지 인물도 나서고 싶지 않았지만 사명감으로 용기를 내게 됐고 후배들에게 롤 모델이 되고 싶어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어쩌면 명맥이 끊기는 전통 장인들을 보며 느낀 바였을지도 모른다. 한층 새로워진 손 작가의 행보를 보며 실그림 예술이 한국 문화의 한 획이 되고, 그 길에 자신이 기여한다는 작은 자부심을 갖는다는 그녀가 만드는 숲이 어떤 모습이 될지, 그리고 그 안에 어떤 새와 호랑이가 모여들게 될지 자연스레 기대를 품게 된다.
- 2019-11-13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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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 크고 통은 더 큰 사람 백범, 그가 머문 숲
- 걷기 쉬운 둘레길이다. 산이 높지 않고 구간 거리도 짧은 편이니까. ‘백범 명상길’ 2코스(3km)를 걸을 경우 한 시간 반이 소요된다. 볼 것 많은 거찰, 마곡사 답사도 즐겁다. ‘정감록’은 마곡사 일대를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십승지의 하나로 꼽았다. 마곡사(麻谷寺) 들머리. 노보살의 허리가 기역자(子)로 휘었다. 향초가 들었을까? 야윈 등허리에서 작은 배낭이 대롱거린다. 그마저 무거워서겠지. 발걸음은 추를 매단 듯 더디다. 하지만 아랑곳없다. 안간힘을 다해 오르고 또 오른다. 노인은 오늘 불단 앞에 엎드려 알량한 아들놈의 복덕을 빌려나? 까마득한 고대에도 우리네 어머니들은 저렇게 절을 찾았을 게다. 부처 아니고선 기댈 언덕이 없어, 삶의 절박한 굽이를 만날 때마다 산을 올랐을 게다. 모든 어머니의 모든 기도는 시공을 초월해 애절하다. 불자들만 절을 찾는 건 아니다. 세상 쓴맛을 본 사람들도 곧잘 절집을 찾아든다. 백범 김구. 그도 마곡사에서 짧은 한때를 보냈다. 보리심(菩提心)에 이끌린 출가가 아니었다. 몸을 숨기려는 입산이었으니까. 간도 크고 통은 더 컸던 사람. 그의 행보엔 거침이 없어 파란도 많았다. 1896년, 백범 나이 스물하나 때엔 이른바 ‘치안포 사건’을 야기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에 대한 분노가 들끓던 때였다. 혈기 방장했던 청년 백범은 일본군 특무장교 하나를 척살했다.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집행일 직전, 탈옥(고종의 형집행정지 명령으로 가출옥했다는 설도 있다)에 성공했다. 그 뒤 마곡사에 은신했던 거다. 마곡사는 태화산 품에 안긴 절이다. 마곡사로부터 산 곳곳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엔 ‘백범 명상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백범이 명상했던 길이란다. 세상의 명명(命名)들은 왜 이렇게 화려할까? 도망자 신세가 된 백범의 뒤엉킨 젊은 가슴에 명상이 고일 자리가 있기나 했을까. 억울하고 서러워 갈피없이 흔들리지 않았을까. 그저 백범을 명상하는 길이라 읽자. 백범의 굳센 기개를, 은신의 고독을, 시대에의 울분을 헤아리며 천천히 걷기에 좋은 둘레길. 산이 있으니 물이 흐르고, 절이 있으니 향내가 번진다. 마곡사 경내엔 진초록을 뿜는 향나무 한 그루가 있다. ‘백범 향나무’다. 광복 직후인 1946년, 어느덧 노경에 접어든 백범이 마곡사를 다시 찾아 심은 나무라지. 옹골차게도 자랐다. 거목은 아니지만 거목이다. 백범이라는 거인의 아우라 아롱져서. 그렇다면 저 고결한 향나무, 백범이 후세에 건넨 숭고한 봉헌이라 해두자. 변하지 않는 세상의 실없음과 누추함을 질책하는, 신랄한 역설의 봉헌. 산길을 오른다. 도회의 익숙한 길에서 빠져나온, 이 들썩이는 기분은 해방감? 상가와 차량으로 너절한 도시에서와 달리, 숲에서 둘러보면 모든 게 순도를 머금고 다가온다. 풀들은 낮은 바닥에서도 얼마나 태연한가. 나뭇가지를 툭 치며 세차게 날아오르는, 저 조막만 한 새의 생존은 얼마나 자립적인가. 어쩌면 산에 사는 것들이야말로 진실을 구현한 존재다. 사람만 부질없다. 진실을 캔다 하고서 제 무덤을 판다. 그게 사람만의 일도 아니지. 역사도 시대정신도 대개 진실과 거리가 멀다. 암살로 생을 마친 백범의 불행이라니. 어처구니없음이라니. 궁색한 잡념을 굴리다 백련암에 들어선다. 백범이 은거해 도를 닦았다는 암자다. 산중턱 작은 암자라 별안간 앞이 탁 트인다. 모든 별안간 탁 트이는 순간들은 희열을 가져다준다. 그마저도 말 그대로의 순간일 뿐이고, 이내 기갈(飢渴)이 몰려든다. 백범은 작은 암자에서 어떻게 견뎠을까. ‘백범일지’를 보면, 그는 ‘굴갓 쓰고 염주 걸고 바랑 지고’ 한동안 중 생활을 했다. 개울가에서 삭발례를 하고, 원종(圓宗)이라는 법명까지 얻었으니, 위장 은신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는 아무나 닦는 게 아니다. 절구통처럼 진득이 눌러앉는 취미가 있는 자여야 수행에 목을 걸 수 있다. 백범은 그런 개성이 아니다. 그가 한 마리 잉어라면, 자기 배만 채우고 마는 게 아니라, 강물을 통째 퍼다 모든 배들을 채워줘야 직성이 풀리는 잉어가 아니었을까. ‘백범일지’를 또 보면, 그는 ‘중놈’이 된 것을 ‘자소자탄’하며 마곡사의 날들을 견디었다. 한마디로 고(苦)라! 진통제를 삼키고 돌아가는 세상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으니. 승냥이 우는 산방에 홀로 머물며 소나기처럼 울고 난 뒤였을까? 백범은 어느 날 홀연히 절을 떠났다. 은사에겐 금강산에 공부하러 간다 했다. 그러곤 광복운동 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숲길 군데군데, ‘백범 명상길’ 팻말이 걸려 있다. 명상은 오간 데 없으나, 마음엔 샘물이 고인다. 백범의 행장 한 자락 훔쳐보자니.
- 2019-10-0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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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윷판에 두 번째 인생을 던졌습니다”
- 평범한 세일즈맨의 일생이었다. 그저 그 누구보다 안정적이고 무난한 삶을 원하는 이 시대의 가장.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 또 하루를 지내다 보니 어느덧 베이비붐 세대라는 꼬리표와 함께 인생 후반전에 대한 적잖은 고민을 시작해야 했다. 지금까지 숨죽이고 조용히 살았으면 됐다 싶어 너른 멍석 위에 윷가락 시원하게 던지듯 직장 밖으로, 세상 밖으로 나와버렸다. 전반전 인생이 무채색이었다면 후반전은 돌고 도는 윷판 속에 수만 가지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다는 윷놀이연구소의 조광휘(趙光彙·56) 소장을 만났다. 용산구 효창원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멀지 않은 오래된 주택가 한 모퉁이에 윷놀이 연구소가 지난 5월 문을 열었다. 벽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긴 윷판이 부착돼 있고 박스와 작은 선반마다 윷놀이 세트가 눈에 들어왔다. “집이랑 가까워서 이곳에 연구소를 차렸습니다. 월세도 싸고요.” 한복을 입고 반갑게 많이 하는 조광휘 소장은 찾느라 고생이 많았다며 시원한 물과 커피를 내놓았다. 그저 명절이 되면 누군가 어디선가 꺼내 달력 뒤를 펴서 도, 개, 걸, 윷, 모 윷판을 매직펜으로 그려놓고는 동전 혹은 바둑알 색으로 편을 나누어 윳놀이를 한다. 언제부터 윷판 그리는 것을 기억해놓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다들 잘도 그린다. 윷판 위에 말을 올리고 놓는 것도 수준급. 다들 알고 있는 이 윷놀이에 무슨 매력이 어떤 새로운 점이 있어 윷놀이 연구소까지 열었는지 궁금했다. “저는 베이비붐 세대의 끝자락인 1963년생입니다. 부산 출신으로 KB국민은행에서 27년 6개월 동안 일하다가 2017년 희망퇴직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전환점을 윷과 함께 맞이했습니다.” 그가 회자될 때 불리는 직함은 바로 우리나라 1호 윷놀이전문강사(노사발전재단 금융센터 전문강사 양성과정 인증). 30년 가까이 고객 응대하던 친절한 행원이 한판 흥겨운 윷놀이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알리는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뭘 좀 준비하고 회사 밖을 나왔어야 하는데 사실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입행할 때 130명이 들어갔는데 현재 29명이 남아 일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좀 많으면 빨리 퇴직하더군요. 그리고 지점장까지 오른 사람들도 회사생활을 마감하고요. 지점장이 안 된 사람들은 오래 근무를 하더라고요. 지금까지 받아오던 임금의 반을 받으며 정년까지 일하는 임금피크제를 선택하든가 아니면 퇴직을 하는 거죠. 팀원 내에 계속 남아 있는 동기들은 여러 가지 사연 때문에 근무를 선택한 거죠. 저는 지점장은 아니고 팀원으로 퇴직했습니다. 굳이 진급 못한 이유를 굳이 따지자면 상급자에게 잘하는 방법을 잘 몰랐습니다.(웃음)” 은행의 지점에서 일한다는 것은 영업과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다.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가 있다. 임금피크제 대상자로 정년까지 근무하는 선배들의 뒷모습은 아련하기만 했다. 어제까지 선배 대우 잘해주던 후배도 임금피크제로 보직이 변경된 선배에게 색안경 끼고 행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저렇게까지 이곳에서 일해야 할까?’ 하는 의문과 회의감마저 들었습니다. 희망퇴직도 기간에 대한 보상이 있거든요. 특별 퇴직금이 있었어요. 제 인생을 생각해보니까 60세에 은퇴하면 할 수 있는 것도 못할 거 같았어요.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 하고 은행을 나왔습니다. 인생 후반전을 설계할 수 있는 기회비용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실 별생각 없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한 우물과도 같은 직장을 박차고 나왔으니 솔직한 마음으로 앞이 캄캄했다. 은행에 다니면서 땄던 자격증은 금융기관이 아니면 써먹을 곳이 없었다. 새 삶을 살려면 옛것을 버려야 했다. 지금까지 했던 것 말고 무엇을 하고 싶었고 어떤 것을 추구했는지 체크해볼 필요가 있었다. “구직활동을 해야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잖아요. 이력서도 내고 면접도 보고 시험도 보러 다녔습니다. 백세시대이다 보니 제가 노노(老老)케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쪽 일을 하려면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필요하더라고요. 자격증의 필요함을 느꼈다면 현직에 있을 때 땄겠지만 그때는 조직에 충성하기도 바빴습니다. 주5일 근무제가 되어 시간이 많아졌다지만 자기계발하는 친구가 주변에 없었습니다. 생각보다 스트레스 많은 직종이기도 하죠. 돈을 다루고 고객을 대하는 일이요. 지금은 비대면이 많지만 저는 온전하게 대면하는 은행원의 삶이었죠. 아무 대책 없이 인생 2막을 생각한 것이 후회스럽긴 합니다.” 은행 생활에서 윷놀이를 발견하다 윷놀이에 대한 관심은 은행원 시절부터 있었다고 했다. 조직에 있을 때 서무파트 담당을 많이 하다 보니 야유회나 체육 행사 계획을 도맡게 됐다. “1박 2일 혹은 당일 코스로 계획을 짤 때마다 윷놀이를 포함했습니다. 소통 놀이로요. 은행에 팀이 4개였는데 토너먼트로 윷놀이를 하면 분위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때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놓았는데 사람들 표정이 정말 행복해 보였어요.” 퇴직 후 보통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하는 활동 중 하나는 실질적인 구직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부에서 인가한 단체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다. “공덕동에 있는 노사발전재단에 좋은 프로그램이 많았어요. 그중 하나가 금융전문강사 양성과정이 있었어요. 처음 1주 과정을 마치고 나니 저더러 5분 스피치를 준비하라더군요. 다른 사람들은 스피치를 준비할 때 재무관리, 은퇴설계, 노후관리 등을 대부분 고르더라고요. 저는 금융강사가 되어보겠다는 절박함이 없었고 실업 급여를 받으려고 간 거였어요. 그래서 그냥 자유롭게 윷놀이로 주제를 정했습니다.” 은행에 다닐 때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마이크 잡고 말해본 적이 없었다. 50세 넘어 도전 과제가 생겼다. 남들 앞에서 뭔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 바로 프레젠테이션이었다. “금융전문강사 강습을 받고 스피치를 준비하면서 지금까지 신경써보지 않았던 것을 배웠어요. 윷놀이로 5분 스피치를 했더니 잘했대요.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 뒤 심화과정 있다고 해서 들었는데 이번에는 15분 스피치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때도 윷놀이가 주제였다. 반응이 또 좋았다. “15분 스피치 마치고 나서 며칠 후에 노사발전재단 강원센터에서 2시간 강의를 해보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제가 2017년 1월에 퇴직했는데 그해 8월 윷놀이로 첫 강의를 했습니다. 정말 짧은 기간에 강사로 서게 됐습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삶을 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는데 제가 강사로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윷판에 우리 역사와 삶을 담다 처음에는 어떻게 두 시간 동안 강의할까 걱정했는데 나중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말을 놓는 윷판에는 29개의 밭이 있습니다. 꺾어지는 곳은 모퉁이 밭이라고 해요. 윷판은 하늘의 북극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북두칠성이기도 하고, 땅위의 밭이기도 합니다. 윷판을 골똘히 보면서 그 안에 스토리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울릉도와 독도를 인터넷 검색으로 동서남북을 잡아 배치해서 윷판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근대사와도 접목했는데 그게 백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였어요. 그분들 일대기의 키워드를 윷판에 담았어요.” 윷판은 세상의 이치와 역사, 지도, 절기를 적절히 담아 설명할 수 있는 스토리보드였다. “첫 강의에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강의를 하니까 두 시간이 거짓말처럼 지나갔습니다. 스토리를 담은 윷판을 제작해 윷놀이 세트로 17개나 출시했죠. 인터넷 쇼핑몰에서 판매하는데 교육기관에서 관심을 가지고 구매하시더라고요. 오늘도 주문받아서 납품해야 해요. 기자님 가시면요.(웃음)” 윷놀이연구소의 든든한 조력자는 바로 노사발전재단에서 함께 금융전문강사 과정을 들었던 동기들이라고 했다. 과정을 모두 이수한 13명 중 10명이 윷놀이연구소 연구원으로 들어와 같이 의견을 나눈다고 했다. “노인대학처럼 인원이 많은 곳에 가면 200에서 300명 정도 되니까 혼자 가서는 감당을 못해요. 연구원 분들이 같이 가서 윷놀이 심판도 하고, 진행도 하십니다.” 물론 강사비가 발생하면 함께 나눈다. 앞으로 윷놀이 관련 강사 자격증도 만들 생각이다. “SNS에 윷놀이 전문 강사라고 띄워놓았는데 딴지거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 보니 제가 1호가 맞나봐요.(웃음) 인터넷을 쭉 훑어봤는데 예전에도 윷놀이가 너무 좋은 전통놀이니까 판을 키우려고 노력했던 분이 좀 있었나봐요. 수요가 따라주지 않으니 중도에 그만두셨더라고요.” 윷놀이판을 벌여놓았으니 할 일이 많기도 많다. 우리 전통놀이라고는 하지만 윷놀이에 관련한 제대로 된 자료가 없다. “구한말이던 1895년 미국 민속학자 스튜어트 컬린 교수가 한국, 중국, 일본의 놀이를 정리해서 쓴 ‘한국의 놀이(Korean Game)’에 보면 ‘한국의 윷놀이는 전 세계에 걸쳐 존재하는 수많은 놀이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요. 아직까지도 이를 반박하는 논문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윷놀이가 인도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인도에도 윷이라는 것이 있더라고요. 동물 뼈로도 많이 하고요. 윷놀이는 원래 조개로 했는데 고동으로도 할 수 있어요. 제대로만 정리하면 윷으로 대단한 발견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윷을 제대로 만나면서 시간가는 줄 모른다고 말하는 조광휘 소장. “몰라요. 윷에 미쳤습니다. 하루가 정말 즐겁게 갑니다. 일단 윷놀이는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옛날에도 우리와 함께했고 먼 미래에도 남아 있을 거예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워합니다. 며칠 전에 윷 문화와 관련한 자료를 찾아보려고 민속박물관에 갔다가 천문도에 대해 강연하는 80대 강사를 봤습니다. 솔직히 내용보다도 나이 들어서 강의하는 모습이 좋았어요. 나도 저렇게 가야겠다. 그때 딱 영감을 받았습니다. 나는 이제 다른 것을 안 본다. 윷놀이만 보자. 은퇴하고 오십 훌쩍 넘어 발견한 제 인생 최고의 아이템이 바로 윷입니다.”
- 2019-09-06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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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千佛千塔 이야기① 공주 마곡사(麻谷寺)
- 지난 6월 30일(현지시각),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의 산사(山寺) 7곳이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열세 번째 유네스코 세계 유산을 갖게 되었으니 7곳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다. 당초 통도사와 부석사, 법주사, 대흥사 등 4곳만 등재될 듯하였고, 봉정사, 마곡사, 선암사 등 3곳은 보류될 처지였으나 세계유산위원회의 21개 위원국이 만장일치로 한국이 신청한 7곳 모두를 받아들여 등재되었다.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등재된 7개 산사 외에도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대단한 절집들, 예컨대 송광사나 해인사, 화엄사, 직지사, 수덕사 등은 왜 누락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과정을 살펴보았다.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하기 위하여 전국의 절집들을 대상으로 전통사찰, 산지입지,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여부 등을 1차 선별기준으로 적용하여보니 전통사찰법에 의거 인정된 곳이 952곳이었으며, 이중 산지입지 조건을 충족시킨 곳이 785곳, 여기에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기준을 대입하니 63곳이 일차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7~9세기 창건 여부와 창건 시기를 증빙할 자료를 확인해본 결과 다음 25곳으로 압축되었으니 관룡사, 귀신사, 금산사, 기림사, 내소사, 대흥사, 마곡사, 무량사, 무위사, 범어사, 법주사, 봉암사, 봉정사, 부석사, 불영사, 쌍계사, 선암사, 선운사, 수덕사, 용문사, 운문사, 장곡사, 전등사, 직지사, 통도사 등이었다. 마지막으로 선원(禪院)의 운영과 원래 지형을 유지하는지 여부 등을 확인하니 최종적으로 위 7곳이 선정되어 등재 신청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쟁쟁한 사찰들이 누락된 이유는 무엇인가.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경우, 9세기 무렵 길상사라는 암자로 시작하였으나 지금의 대찰은 12세기 후반 보조국사 지눌에 의한 것이다. 7~9세기 창건에 한참 늦었으며 삼보사찰 중 팔만대장경을 보유한 법보사찰 해인사의 경우 9세기 창건의 기록은 확인되었으나 이후 고려시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다. 팔만대장경은 조선시대에 해인사로 옮겨진 것이며 특히나 근래 사찰의 원형을 변형시킬 만큼 많은 공사가 있었음이 그 이유였다. 또한 화엄사의 경우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사찰의 중수나 중창 자료가 불충분하며 직지사나 범어사, 선운사 등은 건물의 상당 부분이 변형되거나 원형 유지가 애매한 점 등이 그 이유였다. 여기서 최근 유서 깊은 절집들의 무분별한 중창불사나 대규모 확장 건설공사가 역사성이나 문화적 가치에 반하는 일임이 드러났으니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을 하나씩 답사해보기로 한다. 태화산(泰華山) 마곡사(麻谷寺)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의 태화산 동쪽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 본사이다.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고려 명종 때인 1172년 보조국사가 중수하고 범일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신라 보철화상 때 설법을 듣기 위해 계곡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형태가 삼밭의 삼대, 즉 마(麻)와 같다 해서 마곡사(麻谷寺)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도선국사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세조가 이 절에 들려 ‘만세에 망하지 않을 땅(萬世不忘之地)’이라 평가하고 영산전(靈山殿) 현판을 사액한 일도 있었다. 마곡사가 위치한 공주 유구 지역은 정감록 등 각종 비결서(秘訣書)에 전해오는 ‘십승지지(十勝之地)’에 해당되는 곳으로 그만큼 명당이라는 얘기이며,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라고 하여 봄날 생기 움트는 나무와 봄꽃들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이다. 마곡사에 아쉽게도 국보급 문화재는 없으나 5층 석탑(보물 제799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제269호)과 제6권(보물 제270호)이 있으며 범종과 청동향로 등 지방문화재와 세조가 타고 왔다가 두고 갔다는 연(輦)이 있어 오랜 전통과 유서 깊은 절임을 말해준다. 또한 마곡사는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시해사건 때 일본군 장교를 살해 후 숨어들어 승려로 지내기도 했던 곳으로 해방 후 찾아와 심은 향나무가 지금도 자라고 있어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는 곳이다. 불화(佛畵)를 그리는 화승(畵僧)들이 많이 활동하여 오늘날까지 화승들을 추모하는 다례제를 지내는 화소사찰(畵所寺刹)이다. 예전에 마곡사는 개울을 멀리 돌지 않고 허리를 뚝 잘라 옆구리로 진입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진입로를 잘 정비하고 주차장을 갖추어 놓아 누구나 자연스럽게 입구로 들어와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다리를 건너 북원 마당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됐다. 진입로 중간에 있는 일주문은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사실상 해탈문(충남문화재자료 제66호)이 마곡사의 첫 관문인 셈인데,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 중앙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면서 양편에는 금강역사상(인왕상)과 문수 및 보현동자상을 봉헌하였다. 해탈문을 지나면 사천왕문(충남문화재자료 제62호)이 나오는데 사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숭상하던 신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수미산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마곡사 사천왕상은 조선 후기 소조불로 봉안되었으며 발밑에 악귀상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눈길을 끈다. 이렇게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왼쪽의 영산전 영역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계류를 흐르는 다리를 건너니 마곡사의 중심영역인 오층석탑과 대광보전, 대웅보전이 나타난다. 오층석탑(보물 제799호) 꼭대기에는 보기 드물게 청동제 머리 장식을 얹었는데 고려 말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들의 라마탑을 본떠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1층 남쪽에는 자물쇠 모양을 새겼으며, 2층에는 사방에 불상을 새겼고 지붕돌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5층 지붕돌에만 1개가 매달려 있다. 마곡사의 중심 법당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모셔져 있는데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과 같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세계의 주인으로 서쪽에 앉아계신다지만 비로자나불을 왜 서쪽에 앉혔는지는 알 수 없어 궁금하다. 대광보전 뒤에 솟아오른 2층 지붕은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인데 안에는 석가모니와 서쪽에 아미타, 동쪽에 약사여래를 모셨는데 약사여래불이 약합을 들지 않고 아미타여래와 같은 수인을 하고 있다. 마곡사의 중심 영역 서쪽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백범당(白凡堂)이 있으며 그 옆으로는 1946년 이곳을 다시 찾은 김구 선생이 심은 향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 마곡사 개울가에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삭발 바위가 있어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이렇듯 마곡사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에 돌아 나오는 길에 해탈문과 사천왕문 옆 영산전을 찾아본다. 영산전(보물 제800호)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러 찾아왔다가 못 만나자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고 한다.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마곡사. 승가 공동체의 생활과 전통양식을 잘 보전하여 ‘한국의 산사’ 7곳에 포함되었고 불화를 그리는 유명 화승(畵僧)들의 맥을 이어가는 절집이다.
- 2018-08-2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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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과의 마지막 눈인사, 영정사진 찍으셨나요?
- 우리의 근대사 속 중요한 장면에서 등장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영정사진이다. 부산의 이태춘 열사의 사진을 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옆에 나란히 선 문재인 대통령의 사진이나, 이한열 열사의 영정사진을 든 이상호 의원의 사진은 그 장면만으로 아직까지도 상징성을 인정받고 회자된다. 영정사진은 고인이 누구였는가 설명하는 생의 마지막 수단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정사진을 마련하는 일을 꺼려하고 좀 더 뒤로 미뤄놓고 싶어 한다. ‘장수사진’이라는 선의가 느껴지는 명칭으로 바뀌어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영정사진이 언제부터 우리의 장례 문화에 자리 잡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가장 오래된 기록을 꼽자면 1934년 11월 일본 총독부에 의해 발표된 의례준칙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의례준칙 전문 중 기제(忌祭)의 서(序) 첫 번째 항목에 ‘제주지방(祭主紙榜) 또는 사진(寫眞)을 제위(祭位)에 봉안(奉安)함’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 전까지 영정(초상화)은 지금의 용도와는 조금 달랐다. 조선시대까지는 장례나 상례 때 등장하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에서 조상을 기리기 위해 신주나 지방 대신 사용했다. 사당을 이전에 영당(影堂)이라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일제에 의해 영정사진 탄생 실제로 일본에서는 훨씬 더 이전에 영정사진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개항을 통해 사진이란 문물이 수입된 이후 일본에선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했다. 또 세이난전쟁(1877년) 때 난을 진압하기 위해 파병되는 군인들에게 사진을 한 장씩 찍어줬다는 기록도 나오는데 이때의 사진을 일본의 최초 영정사진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 전통은 청일전쟁(1894년)에도 이어졌다. 국내에 사진이 본격적으로 들어 온 것은 1883년. 한성순보에 촬영국이라는 사진관에 대한 보도가 나오는데, 황철이란 사람이 세운 사설 사진관이다. 이후 지운영은 1884년 고종의 어진을 찍었다. 이들을 통해 많은 인물사진이 촬영된 것으로 전해지나 남은 기록은 거의 없는 상태다. 일제강점기 시절 영정사진 자료 역시 찾기가 쉽지 않다. 일제강점기의 고종 황제나 순종 황제 장례식에도 영정사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완용의 매일신보 부고 기사에는 그의 초상사진이 쓰였지만, 경성일보에 게재된 그의 장례식 보도사진 속 제위에도 영정사진의 모습은 없다. 광복 후인 1945년 7월 5일 당시 주한미국공보원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이 촬영한 백범 김구 선생의 장례식 영상자료에는 백범의 영정사진이 등장한다. 그의 사진은 운구행렬과 효창공원까지 함께했다. 을지대학교 장례지도학과 이철영 교수는 “과거 국내에선 장례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데 인색해 영정사진의 기록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발견되는 오래된 사진도 대부분 1960년대 이후의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일제의 의례준칙에 기록이 남아 있는 만큼 일본의 영향을 받아 장례 때 영정사진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장의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선 1982년을 기준으로 영정사진의 대중화가 이뤄졌을 것이라는 추론도 있다. 당시 부산에서 일본식 장례 상품을 그대로 들여온 상조회사가 영업을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의 영정사진 문화가 함께 들어왔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일본에서 영정사진이 장례식에 대중적으로 사용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라는 의견이 있다. 인식 바뀌어 웃는 사진 쓰기도 불과 얼마 전까지 영정사진 제작은 남겨진 자녀나 가족의 몫이었다. 따로 영정사진을 찍어두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불경스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 그러나 정작 가족이 사망했을 때 준비되는 영정사진은 증명사진이나 주민등록증 사진을 확대해 인화한 조악한 수준의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사전 준비의 필요성이 점차 커져갔다. 그러다 사진 장비와 기술 보급으로 사진관이 많아지고, 영정사진 촬영을 일종의 봉사활동 수단으로 삼는 사진가들이 늘면서 사진에 대한 걱정은 줄어들게 됐다. 또 이를 통해 영정사진에 대한 인식도 상당히 개선됐다. 영정사진 촬영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 한 동호인은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정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노인이 많았다”며 “그러나 최근에는 영정사진이 장수사진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사진찍기를 즐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심지어 2~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촬영해두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이제는 동네 노인정 등을 통해 영정사진을 파일 형태로 공동 보관하는 문화까지 생겼을 정도라고. 그렇다면 영정사진은 어디에서 준비하는 게 좋을까. 제일 만만한 곳은 역시 사진관이다. 영정사진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가족사진을 찍는 날 영정사진까지 함께 찍어두는 사람들도 있다. 또 최근에는 아날로그 감성을 느끼기 위한 인물사진 전문의 흑백사진관도 서울 북촌이나 연남동 등 일부 지역에서 생겨나고 있다. 가장 대중화된 사진 크기는 28×36㎝다. 현직 사진사들은 아직까지도 본인이 직접 와서 찍는 영정사진보다 생전 사진을 바탕으로 합성해 만드는 게 많다고 말한다. 물론 요즘은 자신의 장례식에 쓸 영정사진을 미리 준비해두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솜사탕 사진관 고용주 실장은 “영정사진을 찍으러 오시는 분들의 태도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져 치아가 보이게 웃거나 심지어 선글라스를 쓰고 측면 모습을 촬영하는 사람도 있다”면서 “만약 의상이 문제라면 평상복을 입고 촬영한 뒤 한복이나 양복으로 간단히 합성할 수 있고 비용도 6~7만원 선으로 장례식장에서 만드는 비용보다 저렴하니 미리 준비해두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 2017-10-27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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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 30년 그리고 지금
- 새봄 냄새가 짙게 풍기는 휴일, 친구들과 을미사변 때 희생된 항일 인물들을 배향하는 장충단에 모였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에서 성곽길을 따라 남산에 올랐다. 차를 타거나 아스팔트를 걷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맛을 느꼈다. 남산에 오르면 고층 빌딩이 가득한 시가지 모습에 감격한다. 높은 건물 몇 개뿐이고 삼일고가도가 웬만한 건물보다 높았던 시절, 반듯한 건물이 언제쯤 들어서나 부러워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남산타워가 우뚝 솟은 262m 높이의 나지막한 남산광장에는 붐비는 여행객 만큼 수많은 사연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지나온 60ㆍ30년이 문득 그리워졌다. 젊은 시절 케이블카를 타려고 줄서서 한참 기다렸었다. 중년이 되어서는 자동차 드라이브를 하였고, 이제는 건강을 위하여 걷기운동을 하는 장년이 되었다. 지금은 9살 손자의 오늘이다. 내 나이에서 60년을 빼면 지금의 손자의 이야기이고, 30년을 지우면 자식의 일이 된다. 손주의 오늘에 60년을 더하면 나의 오늘 모습이 되고 30년을 보태면 아들ㆍ딸의 이야기가 된다. 앞으로 전개될 60ㆍ30년은 내 후손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남산은 북악산ㆍ낙산ㆍ인왕산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하나이며 북악산과는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다. 남산의 정상에는 5개의 화구를 가진 목멱산 봉수대가 남아있는데 전국에서 올라오는 중요한 봉화가 서울로 집결되는 곳이었다. 남산은 소나무를 비롯한 각종 수목이 이루는 푸른 수림경관이 훌륭한데, 특히 조선시대에 소나무가 많이 자랐다고 전해지며 이곳의 소나무를 함부로 베어내지 못하도록 하였다. 산꼭대기에서는 사방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서울 시가지를 볼 수 있다. 수림은 잘 보호되어 대도시 도심부임에도 꿩을 비롯한 각종 산새ㆍ다람쥐 등 산짐승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서울시 전망을 조망하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정상부에는 탑골공원의 정자를 본뜬 팔각정과 N서울타워, 박물관, 레스토랑, 카페 등의 시설이 있고, 산정부에 한국의 경위도 원점이 있다. 남산 서쪽은 계단으로 이어진 세 개의 광장이 산허리를 타고 펼쳐져 있다. 맨 아래에 있는 광장은 녹지대를 포함하여 약 2,500평 규모의 어린이 놀이터다. 그 위에는 약 6,000평 규모의 백범광장이 있고, 위쪽 광장에는 남산 분수대를 중심으로 하여 그 북서쪽에 서울시 교육위원회 과학교육원이 있는데 서울시 교육위원회 과학교육원은 어린이회관으로 건립한 18층 건물이다. 그 맞은편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있는데 1970년에 건립하여 의사의 사진ㆍ유묵 등을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 주변에는 안중근의사 동상과 휘호ㆍ·장인이 새겨진 비석이 있고, 남산골 한옥마을, 장충단공원, 정도 600년 타임캡슐 등이 주변의 명소들이다. 남산에서 옛일을 회상해 보니 수십 년 세월 동안 쓰레기 분리수거와 야외 취사금지 성공으로 우리 서울이 엄청 깨끗해졌다. 다음 60ㆍ30년에는 더 좋은 발전이 있기 바랐다. 동대입구역으로 내려가는 순환로가 연인들의 산책로로 제격이다. 동대 정문을 거쳐 장충동족발과 막걸리 한 사발로 즐거운 남산 산책을 마무리하였다.
- 2017-03-06 1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