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쁠 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 때는 노래의 가사가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듣는 건 어떤 마음을 느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1980~90년대 포크 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 김창기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기타를 세심하게 매만지던 손으로 초크 대신 펜을 들고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내 인생에서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면 나 혼자 보내는 시간이야. 시원하고 맑은 물 위에서 세일링을 즐겨. 멋진 변화가 필요할 때라는 걸 알아. 내 인생은 미리 정해져 있어. 멋진 변화가 필요해. 알바트로스와 고래는 내 형제. 아주 특별한 느낌이 들어. 바다에 혼자 있을 때.”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홀로 고독을 즐기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이 곡은 호주의 록 밴드 ‘리틀 리버 밴드’(Little River Band)가 부른 ‘Cool Change’다. 1975년 호주 멜버른에서 탄생한 밴드로 당시 미국에서 인기가 상당했다. 음악성은 독보적이었지만 각자의 개성이 워낙 뚜렷한 탓에 다툼이 많아 내부 불화가 심했다. 심지어 녹음도 따로 하고, 버스도 따로 탄 채로 투어를 다녔다고 한다.
이 곡은 당시 리드 보컬 글렌 쇼록(Glenn Shorrock)이 가사를 썼는데, 혼자 있는 시간을 원하며 고독을 자청한다. 복잡다단한 인생에서 잠시 벗어나 거리를 두고 내 인생을 확인하고, 바다 위에서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멋진 변화를 시작하고 싶은 소망을 담았다. 훗날 그가 이 곡에 대해 “도와달라는 외침”이었다고 밝혔다. 여담으로 당시엔 세일링을 할 줄 몰랐지만, 곡을 쓴 후 세일링을 취미로 즐기기 위해 시드니 항구와 피지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진실한 대화
고독은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 혼자만 있는 상태를 뜻한다. 외로움과 비슷하지만, 의미가 미묘하게 다르다. 고독은 혼자인 상태고, 외로움은 고독한 상태로 인해 느끼는 쓸쓸하고 슬픈 감정이다.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을 조절하거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른다.
철학자들은 고독을 ‘참된 고독’과 ‘거짓 고독’으로 구분한다. ‘참된 고독’은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자신의 상태, 정체성과 방향성을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거짓 고독’은 고독으로 인한 외로움에 빠져서 자신의 진면모를 오롯이 직시할 수 없거나, 직시하기를 피하며 자기 연민에 빠진 상태라고 한다. 타인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상태가 바로 거짓 고독이다.
은퇴하면 가족들도, 심지어는 배우자도 나를 별로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낯설고 무서운 고요와 고독이 느닷없이 우리 곁에 다가와 친하게 지내자며 씩 웃는다. 떨쳐내고 싶지만, 고독은 삶의 한 조건이고 불가결한 과정이다. 필연적으로 고독은 외로움을 유발한다. 외로움은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고 싶은 본능이 제대로 충족되지 않을 때 생기는 감정인데, 우리는 외로움을 피하려고 참 바보스러운 짓을 많이 한다.
이때 필요한 덕목이 바로 ‘혼자 잘 지내는 법’이다. 100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에게는 시간이 매우 많아졌다. 보람찬 후반전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방법과 계획이 필요하다. 준비하지 못했다면 새롭게 찾아야 한다. 누군가와 함께 지내던 익숙한 삶의 방식과 결별해야 한다. 의존적인 습관을 버리지 못하면 외로움의 늪에 빠져 허덕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고독과 친해지는 연습이 필요하다. 고독은 자신을 이해하는 수단이자, 외로운 누군가의 마음을 보살필 수 있는 도구다. 삶과 관계에 대해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자신과 진실한 대화를 나눠보는 것이다. 혼자서 힘들다면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해보거나 종교를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본질을 잃어서는 안 된다. 충분히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자신이 바로 서야 남과도 잘 어울릴 수 있다.
혼자 잘 살아가는 힘이 있어야 함께하는 삶도 잘 살 수 있다. 결국 끝까지 함께할 이들은 배우자와 친구 몇 명이다.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고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고, 의존적이지 않되 정서적 지지를 보낼 수 있는 관계의 정립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고독과 마주하는 연습을 해야한다. 고독을 겪으며 자신을 성찰하고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성숙한 사람으로 발전하기를 거듭하면, 온전한 ‘자기’(self)에 가까워질 수 있다. 온전한 자신이 됐을 때 다른 이들과 함께 더 행복한 삶을 그릴 수 있다. 행복한 노후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Cool Change - Little River Band
리틀 리버 밴드는 호주의 5인조 록 밴드인데, 호주 팝 음악계의 선구자라 불러도 무방하다. 리드 보컬이던 쇼록이 우연히 지나던 길에 마주친 팻말에 적힌 ‘Little River’를 보고, 그룹명으로 정했다. 호주에서 탄생했지만 정작 호주인에게는 인기가 별로 없었다. 이 곡도 호주 내 차트에서 상위권에 들지 못했지만, 1980년 빌보드 차트에서는 10위를 기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2001년 APRA(Australasian Performing Right Association, 호주공연권리협회)가 75년 동안 가장 위대한 30곡의 호주 노래 중 하나로 선정했다. 실력이 출중한 뮤지션이 많았지만, 내부적으로 불화가 심해 그동안 구성원이 30명 정도 바뀌었다.
기쁠 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 때는 노래의 가사가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듣는 건 어떤 마음을 느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1980~90년대 포크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 김창기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기타를 세심하게 매만지던 손으로 초크 대신 펜을 들고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었죠. 천천히 빛나는 꿈밖에는. 두려움은 마음에 묻어두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어요. 세상의 풍파 속에서 나는 음악을 듣고, 눈을 감고 리듬을 느껴요. 음악은 내 마음을 사로잡아요. 이 얼마나 멋진 느낌인가요? 믿음이 현실이 된다는 것. 나의 열정을 현실로 만들고, 나의 춤을 추고 나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
위의 가사만 봐도 한 춤꾼의 애환과 열정이 느껴진다. 이 곡은 아이린 카라가 부른 ‘Flashdance What a Feeling’으로 1983년 개봉한 영화 ‘플래시댄스’의 주제곡으로 유명하다. 이 영화는 철공소에서 일하며 발레리나의 꿈을 꾸던 소녀가 역경을 딛고 일어나 자신의 꿈을 성취한다는 이야기다. 결말은 뻔히 보이지만, 제니퍼 빌스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멋진 춤과 노래는 혼을 쏙 빼놓는 한 편의 뮤직비디오 같았다.
시련을 딛고 꿈을 이룬 소녀처럼 영화는 대성공을 거둔다. 700만 달러로 제작해 2억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영화의 서사나 캐릭터는 미흡했지만 제니퍼 빌스라는 신선한 흑인 여배우를 주연으로 내세웠다. 그녀는 이 영화를 계기로 스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영상미를 돋보이게 했던 OST는 당시 빌보드 차트 상위권을 휩쓸었다. 신선한 배우, 화려한 연출, 신나는 음악. 이 삼박자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제작진의 열정이 만든 성공이라고 할까?
삶의 알맹이
‘열정’의 정의는 사랑만큼이나 다양하다. 비슷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정신의학에서는 열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열렬히 사랑하고, 매우 중요하다고 스스로 판단한 어떤 활동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열중하는 마음. 열정적인 활동은 나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강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내가 좋아하고, 스스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고 선택한 일을 할 때 열정적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긍정적이고, 명확한 동기와 남다른 열정을 가졌기에 필요한 지식을 더 잘 습득한다. 그들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긍정적 사고방식’(Mindset)을 기본값으로 가진다. 긍정적일수록 일에 몰입이 더 쉽고, 어려움이 있어도 해결책을 잘 찾는다. 잘 해결할수록 자신감도 커진다. 물론 열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위기를 극복하고 끝내 성취와 발전을 이루어내는 것. 고통과 기쁨이 공존하는 것. 그것이 열정의 기본값이다.
열정은 삶에서 도움닫기 역할을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모난 돌부리처럼 발목을 잡을 때도 있다. 전자를 ‘조화로운 열정’이라 부르고, 후자를 ‘강박적인 열정’이라 한다. 조화로운 열정은 기쁨과 보람, 자신감 같은 긍정적 감정을 삶에 불어넣고, 동시에 전체적인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나아가 한층 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반면 강박적인 열정은 집착의 성격을 가진 것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 일중독으로 인해 가정이나 윤리 등에 소홀하거나 피해까지 주는 경우를 말한다.
조화로운 열정은 삶의 만족으로 이어진다. 조화로운 열정을 지닌 사람은 결코 스스로나 남에게 열정을 강요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행동한다. 삶의 단계마다 놓인 문제를 스스로 판단해서 해결한다. 잘할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은 과몰입을 막고, 삶의 다른 부분도 돌보는 여유를 준다. 이들은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노년에도 조화로운 열정이 필요하다. 무엇이든 호기심과 열정을 갖추고 배우기 위해 노력하면 어떨까? 이를 통해 스스로 존재의 가치를 깨닫고, 삶 속에서 자신감을 찾자. 나만의 시간을 통해 스스로 성찰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자.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좋은 삶의 자세를 배우기 위해 열정적인 삶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맑은 정신과 더불어 삶 속에서 꽉 찬 알맹이를 쥘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멋진 느낌인가? 나의 열정을 현실로 만들고, 나의 춤을 추고 나의 삶을 산다는 것!”
Flashdance What a Feeling - Irene Cara
아이린 카라는 특이한 이력을 지닌 가수다. 배우로서 1980년에 개봉한 영화 ‘페임’에서 가수 지망생을 맡아 연기한 적도 있다. 동시에 이 영화의 OST를 불렀는데 당시에 인기가 상당했다. 이후 영화 ‘플래시댄스’의 주제곡 ‘Flashdance What a Feeling’도 그녀가 불렀고, 이 곡은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았다. 이 곡의 프로듀서 조르조 모로더는 1988년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를 쓴 작곡가로 유명하다. 카라는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하고, 8인조 그룹으로 활동했지만 빛을 발하지는 못했다. 가수로서 재능은 부족했지만 열정은 가득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기쁠 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 때는 노래의 가사가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듣는 건 어떤 마음을 느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1980~90년대 포크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 김창기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기타를 세심하게 매만지던 손으로 초크 대신 펜을 들고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안녕,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당신의 노래가 그렇게 빨리 사라질 줄 몰랐어요. 이제 겨우 그 노래를 배웠는데. 그렇게 빨리 사라지다니. 그렇게 빨리. 당신을 기억할 거예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매일 밤 우린 동틀 때까지 어울렸죠. 그때처럼 그렇게 오래 웃어본 적이 없었어요.’ 이는 1960년대를 주름잡았던 2인조 그룹 ‘사이먼&가펑클’의 마지막 앨범에 실린 ‘So Long, Frank Lloyd Wright’의 가사 일부다.
애달픈 사랑을 노래하는 곡 같은데, 가사 속 프랭크는 누구일까? 건축에 관심 있는 이라면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와 함께 현대 건축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건축가다.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이 그의 작품이다. 건축학도로서 건축가를 꿈꾸었던 가펑클은 평소에 프랭크를 존경했고, 프랭크를 추모하기 위한 곡으로 사이먼이 가사를 썼다.
훗날 밝혀진 바로는 사이먼은 프랭크가 누군지도 모른 채 작업을 했다고 한다. 사이먼은 오랜 친구인 가펑클이 존경하던 그의 영웅을 존중했고, 그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처럼 곡을 만들었다. 동시에 이 곡은 해체에 대한 암시를 담은 노래였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이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다. 동네 친구였던 둘은 음악적 스타일과 예술적 성향이 달라, 해체와 재결합을 반복하다가 이 앨범을 기점으로 서로 다른 길을 간다.
닮고 싶은 마음
가펑클이 프랭크를 동경했던 것만큼 나 역시 ‘사이먼&가펑클’을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앨범은 왠지 손이 가지 않았다. 그들의 2집에 큰 감명을 받았던 터라 이 앨범도 명반이라는 걸 알지만 혹여 2집에 못 미칠까 봐 걱정됐다. 듣고 나선 달라졌는데, 특히 위의 곡을 굉장히 좋아했다. 기쁨과 슬픔이 섞여 있어 복잡한 감정이 생기는 이 곡에 이상하게 끌렸다. 메이저 세븐 코드와 디미니시 코드를 잘 섞은, 브라질 보사노바 곡의 코드 진행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보통 장조는 기쁨을, 단조는 슬픔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그런데 장조 7번 화음(메이저 세븐)은 장조 같으면서도 단조처럼 들려서 감정적으로 복잡하고 묘한 화음이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꼭 이런 걸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메이저 세븐 화음은 향수와 그리움을 가장 잘 불러일으키는 화음이란다. 향수와 그리움은 과거로 회귀하고 싶은 갈망과 행복했던 추억이 합쳐져 슬픔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감정이다. 보고 싶지만 만날 수 없어서 슬픈 마음이 드는 동시에 그 시절의 행복이 떠올라 벅찬 기쁨을 맛보게 하는 감정. 이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장조와 단조의 중간인 이 화음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을까?
이런 복잡 미묘한 화음은 추모의 감정과 비슷하다. 사랑했지만 죽음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했던 누군가를 추모할 때 드는 감정. 그와의 추억은 행복했지만 그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슬픔. 진정한 사랑과 감사, 후회와 미안함, 안타까움, 그리움, 함께 나눈 기쁨과 고통을 통해 삶의 의미, 방향성, 그리고 희망을 동시에 느끼는 감정적 경험의 총합이 바로 추모다. 우리는 추모를 통해 누군가를 향한 사랑과 존경은 흑백논리가 아니라 이렇듯 복잡한 감정이라는 걸 깨우친다.
결국 진정한 추모란 그리워하는 누군가를 닮아가려고 부지런히 노력할 때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프랭크는 사라졌지만, 사이먼&가펑클은 그를 기리며 노래를 불렀다. 난 그 노래를 들으며 프랭크 같은 건축가를 꿈꿨지만, 현재는 그 듀오처럼 가수가 됐다. 가수로서는 생명을 다한 사이먼&가펑클을 내 맘속에서 늘 그려왔는지도. 작별은 슬프지만 추억은 달콤한 법이니까. 그들의 듀엣을 무대에서 다시 볼 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기타를 잡는다. 최고의 듀오 사이먼&가펑클을 닮기 위해.
So Long, Frank Lloyd Wright - Simon & Garfunkel
2인조 그룹의 원래 이름은 톰과 제리였다. 이름의 영향인지 몰라도 그들은 불화가 잦아서, 자주 해체와 재결합을 반복했다. 하지만 포크송 세대의 마지막 음유시인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서정적인 가사로 유명했다.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은 10주 동안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했고, 6개월 만에 800만 장이나 팔리며 경이로운 판매량을 기록했다. 1970년대 초반 한국에서도 이들의 영향을 받아 남성 2인조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는 그룹 ‘SG워너비’의 첫 두 글자도 이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언더그라운드 가수, ‘천둥 호랑이’가 되어 돌아온 권인하. 올해 나이 예순두 살. 그러나 나이가 무색하게 29만4000여 명의 유튜브 독자를 보유한 그는 여전한 현역으로서 젊은 세대의 열광을 받으며 인생 2막을 일구고 있다.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그가 40여 년이 지나 어떻게 다시 전성기를 열게 되었을까? 천둥 호랑이가 말하는 음악, 소통, 그리고 도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금 가수 권인하가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동안 잊힌 가수였던 그의 봄날은 유튜브 덕분에 찾아왔다. 그가 놀라운 것은 1980년대에 주로 활약한 과거 세대의 가수면서도 유튜브라는 새로운 포맷에 최적화된 가수로 다시금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 성공의 계기는 젊은 세대와의 적극적인 소통 덕분이었다.
우연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다
권인하는 본인이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목적으로 유튜브를 전략적으로 운용하지 않았다. 유튜브의 성공 사례 중 상당수가 그렇듯, 그는 우연과 기회가 겹쳤을 때 본인이 갖고 있던 본연의 실력을 적중시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 시작은 2015년 ‘복면가왕’에 출연했을 때부터다. ‘이 나이에 해도 되는 건가?’라며 긴가민가했던 출연 제의를 매니저가 적극적으로 권유해 나가게 되었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원래 ‘천둥 호랑이’ 채널은 내가 부른 노래들을 모아놓는 데이터베이스로 쓸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복면가왕’에 출연한 후 이슈가 되어 EBS ‘공감’에도 초대되었죠. 거기서 태연의 ‘만약에’를 불렀는데 본방에는 못 나갔지만 EBS에서 그걸 유튜브 채널에 따로 올렸어요. 그랬더니 화제가 되었고 순식간에 100만 뷰를 넘더군요. 그걸 본 아들이 본격적으로 유튜브를 통해 노래를 부르라고 권유했습니다.”
유튜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그는 태연, 엠씨더맥스, 노라조, 에일리, 아이유 등 후배 가수들의 노래를 적극적으로 리메이크하여 자기 식으로 해석했다. 1980년대 실력파 언더그라운드 가수였던 그가 까마득한 후배들의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도 신선했지만, 더 신선했던 것은 이미 장년의 나이가 된 그가 구사하는 생생한 창법이었다. 다양한 음역대를 오가지만 특히 고음을 원키로 힘 있게 확 질러버리는 그의 ‘천둥 호랑이 창법’에 ‘진짜 가수’를 찾던 젊은 세대는 열광했다.
권인하의 법칙은 연습과 소통
권인하가 나이를 먹어서도 여전히 전성기 시절과 다름없는 압도적 성량과 테크닉을 유지하는 비법은 연습이다. 그는 요즘 매일 기본 3시간, 때로는 10시간씩 노래 연습을 한다. 새로운 세대와 호흡하게 되니 가수로서의 삶의 방식도 달라졌다.
“젊어서는 연습 안 하고 대충 불러도 ‘이 정도면 됐지’ 하며 교만했죠. 하지만 유튜브를 하면서 진심으로 열심히 만들어 부른 노래에 대중이 열광하는 걸 보고 절대로 대충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는 밴드 후배들과 소주 한잔하면서 서운한 게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말하라고 했다. 후배가 자신이 느낀 점을 얘기하면, 깨끗하게 인정하고 사과한 다음 고친다. 당연히 처음에는 힘든 일이다. 하지만 후배로서나 그 자신으로서나 이러한 소통을 통해 더욱 개선된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그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는 자신의 노래를 듣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끊임없는 피드백을 통해 듣는 이들이 원하는 포인트를 계속 반영하며 진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또한 유튜브를 활용하면서 이제는 하나하나 다 기록으로 남기에 허투루 할 수가 없게 됐어요. 권인하라는 아티스트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기 때문에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계속 최고의 정신과 자기관리로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댓글로 만들어진 놀이 공간에서 노닐다
권인하가 자신을 찾는 젊은 세대와 소통하는 방법도 적극 그 자체다. 다양한 SNS 활용. 유튜브, 팬카페, 인스타그램 등을 활용하면서 댓글이나 쪽지에 일일이 답장은 못 하지만 최대한 확인하려고 노력하고 피드백을 최대한 수용하려고 한다. 그것을 위해 그가 중시하는 것은 댓글이다.
“비결은 구독자들이 달아주는 재미있는 댓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세대는 좋은 콘텐츠가 있으면 그에 대해 댓글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면서 놀이터처럼 소비하죠. 그런 재미있는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하면 콘텐츠 자체에 새로운 활력이 생깁니다. 단순히 노래하는 콘텐츠가 아니라 놀이 공간으로 변모하게 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구독자들이 달아준 재미있는 댓글 덕분에 콘텐츠가 계속 생명력을 얻고 재확산될 수 있다고 봅니다.”
2021년 3월 중순 현재 권인하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 수는 29만4000명, 곧 30만 명을 돌파할 기세다. 그 구독자들의 연령대는 대부분 20~30대라고 한다. 옛날이라면 환갑잔치를 열었을 가수라고는 믿기 어려운 팬층의 구성이다. 그걸 가능케 한 것이 바로 권인하의 소통 능력 아닐까.
현재 권인하의 모습은 최신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멀티테이너적 인상을 준다. 또 그것이 인기의 비결이기도 하다. 새로운 물결에 올라타는 그의 모습은 그의 삶을 이해하면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하다.
권인하가 요즘 보여주는 천생 가수로서의 모습만 기억하는 이라면 낯설 수도 있겠지만, 그는 과거에 한때 키보디스트이자 작사·작곡까지 하는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했다. 군대를 갔다 온 그는 1980년대 최고의 작곡가였던 이영훈과 고등학교 동창 한 명과 함께 셋이서 팀을 준비했고, 그때 이영훈의 곡을 보고 자극을 받아 작곡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처음 만든 곡을 이광조가 불렀을 정도로 그의 작곡가로서의 능력은 일찌감치 인정받았다.
권인하는 또한 사업가 경험도 갖고 있다. 신촌뮤직을 운영하며 박효신을 발굴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록 가수로서는 드물게 공중파 방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음악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다양한 방송 활동을 했다. 심지어 배우로서의 경험도 있다. 1992년에 방영된 MBC 미니 시리즈 ‘창밖에는 태양이 빛났다’에서는 주연, 2001년 MBC드라마 ‘가을에 만난 남자’에서는 조연으로 나왔다.
카멜레온처럼 자신의 역할을 바꿔가며 다양한 일을 한 그지만, 뼈아픈 실패 또한 그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음반 시장이 음원 위주로 재편되면서 기존 중견가수들에게는 혹독한 시절이 시작되었다. 권인하 또한 이에 대처하기 위해 미사리 카페를 운영하고 골프 사업도 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내가 “당신은 가만히 있는 게 돈”이라고 말할 정도로 사업은 실패를 거듭했다.
내가 도움이 되는 선배였다니 다행
성공과 사회적 인정, 그리고 실패들. 이쯤 되면 권인하가 가진 경험의 자산치가 보통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인플루언서로 변화할 수 있었던 비결도 다양한 경험에서 비롯된 본능적 감각이 일조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치지 않는 발전의 동력은 ‘어른’의 정의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나도 어른이 됐나 싶을 때가 있지만, 누군가의 본보기가 되고 롤모델이 되는 거라고 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어른됨이겠죠.”
그는 요즘 자신의 가장 큰 기쁨으로 ‘내 노래를 기다리는 호랭이들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기존 팬뿐 아니라 젊은 층에서 호응해주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을 꼽는다. 얼마 전 화제 속에 끝난 프로그램 ‘싱어게인’이 발굴한 스타 정홍일은 권인하의 ‘나의 꿈을 찾아서’를 인생곡으로 꼽았다. 1992년 앨범의 동명 타이틀곡이기도 한 이 노래의 가사는 지금은 힘들더라도 언젠가 찾아올 희망을 위해 꿈을 찾아 나아간다는 내용이다. 이 가사가 정홍일이 보여준 삶의 궤적과도 일치하기에, 더욱 살갑게 다가왔을 것이다.
“‘다행이다. 내가 저런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는 선배였다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미 너무 잘하는 친구이기 때문에 잘됐으면 좋겠어요. 함께 재미있는 그림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고요.”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노래가 필요한 시대
권인하는 ‘싱어게인’ 같은 오디션 프로의 매력은 참가자들의 순수한 열망과 간절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진짜 간절함’은 못 이긴다는 걸 느꼈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래 한 곡을 부를 때 진짜 진심을 담아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요즘 후배들은 보컬로서의 기술적인 측면은 전체적으로 상향 평준화됐습니다. 그러나 소리를 내는 방식이 다 비슷하기 때문에 음색이나 아티스트의 개성 자체가 차별화되지는 않는다고 보여요. 기술적으로는 다들 너무 잘하기 때문에 좀 더 자신만의 색깔과 개성을 음악에 담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청자들이 가수의 진심에 반응해야 감동은 오는 법. 노래에 대한 진심과 개성에 대한 권인하의 충고가 과거 송창식이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던 내용과도 일치하는 걸 보면, 어떤 경지에 도달한 거장급 가수들이 후배 가수에 대해 갖는 생각에는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는 모양이다.
“항상 즐거운 인생이지만 아직 못 다 이룬 꿈이 있기에 정진 중입니다. 이미 케이팝이 빌보드 차트를 점령하기 시작했잖아요? 우리 노래가 세계적 퀄리티라는 반증이죠. 10년 이내에 우리 세대의 음악도 훌륭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트렌디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권인하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안주하지 않고 계속 도전해서 시대에 맞게 진화한 아티스트로 기억되길 원한다. 요즘 시대에 예순두 살은 무언가를 하기에 시간이 넉넉한 나이임을 생각하면, 아직 그가 해야 할 일은 많이 남은 셈이다.
“나이가 들어도 계속 자신의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나이의 일반 개원한 의사들은 절대 쉬지 않아요. 여전히 현장 진료를 하고 신기술을 배우죠. 그걸 안 하면 환자들과 교류가 안 되니까요. 그래서 의사 친구들과 한잔할 때면 ‘그런 거 할 수 있는 게 어디냐, 못 하면 도태되는 거다’라고 말해주죠.”
멋있게 늙는 첫 번째 자질은 도전
권인하는 뒷전으로 빠지는 사람은 거기서 멈추는 것이라고 말한다. 의지를 갖고 접목시킬 게 무엇이 있을까 끝없이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멋있게 늙어갈 수 있는 첫 번째 자질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 또한 멈추지 않기 위해 요즘도 1년에 싱글을 두 곡씩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시도해야 결과가 나옵니다. 따라서 뭐든 하는 게 필요해요. 그 자체가 우리 나이에는 큰 용기를 주고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 아닐까요. ‘아, 할 수 있구나, 되네’ 하는 경험을 가지면 미래에 도전할 수 있게 되니까요.”
그는 자신이 한 말의 증인이기도 하다. ‘할 수 있구나, 되네’를 실현시켜 미래를 꿈꾸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가 만들어갈 인생 2막의 열정적 행보와 소통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기쁠 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 때는 노래의 가사가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듣는 건 어떤 마음을 느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1980~90년대 포크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 김창기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기타를 세심하게 매만지던 손으로 초크 대신 펜을 들고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지치고 괴로울 때, 다정한 누군가가 필요할 때, 아무것도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눈을 감고 나를 생각해, 내 이름을 불러. 네가 어디에 있든 내가 너에게 달려갈게. 어둠에서 너의 어두운 밤을 밝혀줄게. 희망을 잃지 말고 내 이름을 불러. 너에겐 친구가 있잖아.” 수려한 용모를 자랑했던 제임스 테일러가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한 곡의 가사다.
‘이런 친구가 나에게는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누군가에게 이런 친구가 되어주고 있나?’ 하고 자문해본다. 형제라고 생각했던 광석이를 어처구니없이 보낸 경험이 있는지라 더 냉정하게 자신을 평가하게 된다.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말을 떠올리며 내가 믿는 친구들의 모습을 한번 그려본다. 마음이 괜히 편해지고 여전히 곁에 있는 그들이 참 고맙다.
앞서 소개한 ‘You’ve Got a Friend’는 1960년대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었던 캐럴 킹이 1971년에 발매한 곡이다. 당시 캐럴은 유명한 작곡가였지만 가수로는 솔로 앨범을 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인이었고, 제임스 테일러는 어리지만 인기 가수였다. 연하남(?) 제임스의 수려한 외모 덕분인지는 몰라도 둘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한편 캐럴이 먼저 녹음한 이 곡에 반한 제임스는 같은 곡으로 녹음할 수 있도록 부탁했고, 그녀는 흔쾌히 허락했다. 덕분에 제임스 테일러는 이 곡으로 아주 유명한 가수가 됐다. 아울러 캐럴도 이 곡의 원작자로 널리 알려졌다. 둘의 우정이 명곡을 탄생시킨 것이다.
먼저 좋은 친구가 될 것
진정한 친구 관계란 서로 깊이 신뢰하고 존중하고, 서로에게 늘 발전적 자극이 되는 관계다. 그렇기에 사회적·정서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사는 사람과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다면, 자신을 그 친구의 삶과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상대방이 나를 존중하고 나에게 자극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좋은 사람과 진정한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는 본인이 먼저 좋은 친구의 조건을 갖추려 노력해야 한다. 이기적인 행동 대신 꾸준한 도움이 되어 신뢰를 주고, 친구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눠야 한다. 친구에게 시간을 투자하고, 모범이 되어 닮고 싶은 사람이 되고, 함께 발전하자고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 써놓고 보니 정말 좋은 친구가 되기도, 좋은 친구를 얻기도 너무 힘든 것 같다. 하지만 성인군자만 진정한 친구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엇비슷한 사람들끼리 서로를 보완하고 나누는 관계를 맺고, 더 키워나갈 수도 있다. 우리는 관계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인간이기에. 우정은 ‘성숙한 사랑’인 셈이다.
먹고살기 바빠서 친구의 필요성을 못 느낄 수도 있지만, 은퇴 후에는 가족과 친구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런데 예전 친구들과의 소통이 쉽지 않다. 상황과 시간의 불일치 때문이다. 느슨했던 관계를 더 끈끈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거나, 새로운 친구들을 만들어야 한다. 이때는 오래갈 친구를 알아볼 수 있는 선구안이 필요하다.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연구한 결과들을 보면 첫 번째로 꼽는 조건이 바로 ‘공감 능력’이다.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상대를 이해함과 동시에 상대의 신뢰를 얻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이타적인 언행이다. 이타심은 절제력과 함께 성숙한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이타적인 사람은 친절하고 따뜻하다. 성숙한 사람이 좋은 친구가 된다.
세 번째 조건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면서 서로에게 발전적 자극이 되는 사람이다. 서로 말과 생각이 통하고, 일상생활과 취미 활동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친구다. 넷째는 즐겁고 재미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해도 유머와 명랑함이 없으면 따분하다. 같이 놀기 싫다. 힘들 땐 잠시 현실을 잊고 지친 심신을 회복할 여유가 필요하다. 즐겁고 재미있는 친구가 필요하다. 갈 길은 멀고 함께 걸어줄 친구는 찾기 힘들다. 그래도 친구는 필요하다.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준다면 진정한 친구를 얻을 확률은 높아질 것이다. 좋은 친구가 되자.
You've Got a Friend - James Taylor
남녀 간의 우정이 가능할까? 저마다 답은 다르겠지만 제임스 테일러와 캐럴 킹을 보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캐럴과 제임스는 사랑보다 더 진한 우정을 오랫동안 나누고 있다. 킹은 인터뷰에서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이 곡을 쓴 것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제임스는 이 곡을 자신의 곡 ‘Fire and Rain’에 대한 응답이라고 표현했다. 한편 제임스는 캐럴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그녀가 지닌 가수로서의 장점을 눈여겨보고 솔로 활동을 적극적으로 권한 이가 바로 제임스였다. 캐럴이 자신의 곡의 녹음을 흔쾌히 허락한 것도 이런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10년엔 처음 같이 연주했던 공연장의 50주년을 기념하며 쓴 ‘Live at the Troubadour’를 발표했다. 둘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우정의 가치를 몸소 보여줬다.
가슴에서 잊히지 않는 추억 속 음악. 그 곡이 수록된 앨범은 지금까지 몇 장이나 팔렸고 현재 가격은 얼마일까. 그때 그 시절 추억의 영화음악과 희귀 음반의 가치를 살펴봤다.
추억 속에는 항상 음악이 있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즐겨 들었던 음악이나 연인과의 애틋한 시간을 만들어준 음악, 또 기쁘거나 슬픈 순간을 함께한 음악, 남자라면 군대에서 외로움을 달래준 음악도 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런 음악을 우연히 듣게 되면 의지와 상관없이 추억이 떠오른다.
그중에서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은 영화 속 추억의 장면으로 빠져들게 한다. 단순한 배경음을 넘어 스토리를 이끌어 몰입시키는데, 관객은 마치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이 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영화음악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추억의 명곡으로 회자된다. ‘영화는 가도 음악은 남는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영화 속 OST 앨범 얼마나 팔렸나
영화 ‘보디가드’(1992년)에서 배우 케빈 코스트너가 휘트니 휴스턴을 받쳐 안았을 때 나오는 음악 ‘I´ll Always Love You’는 보디가드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 당시 빌보드 차트 14주 연속 1위를 점령하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은 현재까지 가장 많이 팔린 음반으로 꼽힌다. 1993년 불황 속에서도 1000만 장 넘게 팔렸고, 현재까지 4500만 장의 누적 판매량을 기록 중이다.
1970년대 말 디스코 열풍을 전 세계로 확산한 ‘토요일 밤의 열기’(1977년)도 만만찮다. 무명 배우였던 존 트라볼타를 한순간에 청춘의 우상으로 만든 이 영화에는 영국 록 그룹 비지스의 사운드트랙 ‘Night Fever’를 비롯해 ‘Stayin´ Alive’, ‘How Deep is Your Love’ 등이 담겼다. 이 앨범에 수록된 사운드트랙 가운데 4곡은 싱글 차트 1위에 랭크되는 기록을 세웠고, 누적 판매량은 4000만 장에 달한다.
또 존 트라볼타의 영화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화해 대성공한 ‘그리스’(1978년)는 존 트라볼타와 올리비아 뉴튼존의 노래와 춤 앙상블로 기억된다. 이 영화 속 사운드트랙은 1978년을 미국 역사상 음반산업이 가장 맹위를 떨친 시절로 만들었다. 앨범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Hound Dog’과 그룹 마르셀스의 ‘Blue Moon’, 리틀 앤소니 앤 더 임페리얼스의 ‘Tears on My Pillow’ 등이 수록됐으며, 현재까지 3800만 장이 팔렸다.
‘더티 댄싱’(1987년)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에 패트릭 스웨이지가 제니퍼 그레이를 양손으로 받쳐 번쩍 들어 올리는 순간은 잊히지 않는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또한 춤을 소재로 한 영화인 만큼 사운드트랙의 인기도 엄청났다. ‘The Time of My Life’, ‘Be My Baby’ 등이 수록된 이 앨범은 1998년 5월에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앨범의 누적 판매량은 3200만 장이다.
셀린 디온의 목소리도 좋지만, 연주곡도 많은 사랑을 받은 ‘타이타닉’(1997년)의 사운드트랙 역시 추억 속으로 빠져들기 충분하다. 이 영화의 음악을 맡은 제임스 호너는 웅장하면서 서정적인 선율이 돋보인 음악을 넣어 감동을 줬다. 메인 테마인 ‘My Heart Will Go On’과 ‘The Sinking’, ‘Death of Titanic’ 등은 두 남녀 주인공의 애틋한 사랑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앨범은 그동안 3000만 장이 판매됐다.
◇시대를 대변하는 ‘옛 음반’의 가치
추억을 여는 열쇠는 영화 속 명장면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살아오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에는 늘 음악이 함께 있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언제든 원하는 음원을 다운받거나 스트리밍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구하고 싶은 LP(Long Playing) 음반은 인터넷 사이트나 옛 레코드 가게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찾는 앨범이 희귀 음반이라면 품을 많이 들여야 한다. 이젠 구할 수 없는 앨범도 있다. 생산량이 많지 않고, 대량 폐기됐거나 쉽게 버려진 탓에 남은 수가 매우 적어서다. 이런 희소성 때문에 소위 ‘상태가 좋으면 부르는 게 값’이다. 이런 앨범은 일부 음반 수집가만이 소유한 경우가 많은데, 이들의 거래 소식을 통해 그나마 대략적인 가격을 알 수 있다.
음반 수집가들이 뽑은 국내의 희귀 음반 중 최고가는 윤심덕의 ‘사의 찬미’(1926년)가 수록된 앨범이 꼽힌다. 이 곡은 윤심덕이 연인이었던 극작가 김우진과 현해탄에 투신하기 전 죽음을 결심하고 부른 노래로 알려지면서 당대 조선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국내에서 실체가 확인된 음반은 6장 정도로, 수집가들 사이에서 6000만 원에 거래된 적이 있다. 현재 중고음반 거래시장에서의 가격은 1억 원이 넘을 거라는 얘기도 나온다.
김연실의 ‘아리랑’(1930년)이 실린 음반은 초창기 한국 대중가요가 영화음악과 관련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현재 1000만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또 베를린올림픽 마라톤대회 우승을 기념한 채규엽·손기정의 ‘마라손 제패가’(1936년) 음반은 당대 최고 가수였던 채규엽의 노래와, 손기정 선수의 당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희소성이 높다. 이 음반 가격은 1500만 원 정도로 평가받는다.
퇴폐적인 가사라는 이유로 두 차례 금지곡이 된 박신자의 ‘땐사의 순정’(1959년)이 실린 음반은 1950년대 여성들의 춤바람이 사회적 문제가 된 시대상을 반영해 수집가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이 앨범은 200만 원에 거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조용필의 데뷔 앨범 ‘뮤지칼 사랑의 일기’(1971년)도 희귀 음반으로 구분된다. 재밌는 사실은 앨범 재킷 뒷면에 나온 이름이 ‘조영필’로 잘못 표기돼 있다는 점이다. 이 앨범은 300만 원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
◇세상에 한 장뿐인 음반 값은 얼마?
해외에서는 비틀스 멤버들이 베트남전쟁에 반대한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머리 잘린 인형, 피 묻은 고깃덩어리를 안고 찍은 사진을 재킷에 사용한 ‘Yesterday and Today’가 희귀 앨범에 속한다. 1966년 발매되자마자 재킷 사진 논란으로 회수 조치됐기 때문이다. 이 앨범은 지난해 경매에서 23만4000달러(약 2억7700만 원)에 낙찰됐다.
프린스의 열 번째 앨범 ‘The Black Album’은 원래 세상에 내보내지 않기로 한 앨범이었다. 1987년 프린스의 변덕으로 초판 50만 장을 출하 직전 전량 폐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홍보용 음반을 받은 관계자 몇 명이 폐기 약속을 어기고 몰래 음반을 간직하면서 희귀 앨범이 됐다. 2016년 프린스가 세상을 떠나고 1년 뒤 세상에 나온 이 앨범은 4만2298달러(약 5010만 원)에 팔렸다.
희귀 음반의 끝판왕이라면 힙합그룹 우탱 클랜의 앨범 ‘Once Upon a Time in Shaolin’일 것이다. 2008~2013년까지 녹음해 단 한 장만 찍은 앨범이기 때문이다. 우탱 클랜은 이 음반을 발매하면서 2103년까지 음반에 실린 곡들을 공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다만 단 한 장만 존재하는 이 앨범을 파티 등 공적인 장소에서 틀지의 여부는 소유자의 권한이라고 밝혔다. 2017년 이베이에서 102만5100달러(약 12억1400만 원)에 낙찰됐다.
회현지하쇼핑센터로 떠나는 ‘추억여행’
옛 레코드 가게가 있다는 서울 중구 회현지하쇼핑센터로 향했다. 예전에 이곳은 최신 가요와 팝송은 물론 희귀 음반도 구할 수 있다는 소문에 음악 좀 듣는다는 이들의 성지로 불렸다. 1990년대 중반까진 그랬다. 그런데 이곳을 찾은 날, 20~30대로 보이는 손님이 자주 보였다. 중장년층의 전유물로 생각했던 LP 음반인데, 최근에는 젊은 손님이 늘었다고 했다.
젊은층이 이 음반의 매력에 빠진 건 아날로그 감성 때문일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게 LP 음반은 모든 음역대를 왜곡 없이 담아낸다. 그러나 MP3와 CD는 고역대와 저역대의 일부를 잘라내서 인위적인 소리가 난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아날로그를 완벽히 대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곳의 터줏대감인 리빙사를 둘러봤다. 진열대 바닥부터 천장까지 LP 음반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총 8만여 장의 중고 LP 음반이다. 음반 찾는 걸 도와 달라고 하니 직접 찾아보길 권했다. 진열장을 하나하나 넘기다 보면 예상치 못한 희귀 앨범을 발견할 수 있다고.
고른 음반은 가게 안 턴테이블에 직접 올려 감상할 수 있다. 음반이 올라간 턴테이블이 빙글빙글 돌고 카트리지의 바늘이 내려앉으니 ‘지지직’ 짧은 잡음 뒤로 음악이 흘러나왔다. 입체감이 살아 있는 묵직한 소리가 세대를 거슬러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다.
한국 포크 블루스의 살아 있는 전설, 이정선의 음악 인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에게 오랜 활동의 원동력을 물으니 “다른 걸 할 줄 모르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렇게 그는 거의 모든 질문에 무심하고도 간단하게 답한다. 자신의 음악적 삶에 대해서조차도 “그냥 오래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1974년에 데뷔한 이후 그가 대중음악사에서 이룬 것들은 그저 오래해서 쌓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의 간결한 소리가 만드는 묵직한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억지로 갖다 붙이지 마요. 살면서 여러 길로 가다가 중간중간 우연히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는 거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겠다 해서 그렇게 사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이정선은 꾸며서 말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 모습은 마치 그의 노래 가사와도 같다. 그의 노래 가사들은 짤막한 단어들로 감성을 톡톡 건드려준다.
흘러가는 대로 구르는 대로
부딪히는 대로 밀리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구르는 대로
부딪히는 대로 밀리는 대로
우리네 인생살이 그렇게 가는 게지
그러다가 가끔 욕심이 나면
하고 싶은 일도 너무 많지만
그러다가 가끔 욕심이 나면
하고 싶은 일도 너무 많지만
산마루 구름처럼 쉬면서 가는 게지
그가 김현식에게 준 노래 ‘우리네 인생’의 가사다. 이 노래는 ‘인생은 그저 흘러가는 것’임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그 마음과 기타만 있으면 그 외에는 필요 없다는 듯이.
블루스 거장의 도피(?) 시절
“원래 꿈은 많았죠. 노래를 해야지 했던 건 한 1972년쯤에 생각했나. 제대 후에 돈을 잠깐 벌어야겠다 싶었죠. 왜냐하면 기타는 그 전부터 치고 있었으니까. 그때 막 기타 붐이 일었을 때였거든. 학비 정도는 벌지 않을까 했어요.”
이정선답다고나 할까, 찬란하고 눈부신 시작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산 기타로 기타를 접한 그에게 음악인으로서의 삶은 그저 생활의 연장으로서 부여됐을 뿐이다. 그 후 12장의 솔로 앨범과 신촌블루스 1, 2집, 해바라기 3집 등 가요사에 남는 명반들을 만들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포크 블루스의 거장으로 불리게 됐다.
“예전에는 곡을 만들고 여러 사람 주면, 그중에 그들이 안 부르는 노래가 생기잖아요. 그걸 제가 불렀어요. 그러다 보니 안 팔리는 노래만 불렀죠. 그런데 그 자체를 제가 즐기고 있는지도 몰라요. 저는 운이 좋게도 군대 제대 후 세상을 볼 수 있는 나이에 음악을 시작했어요. 친구가 음악을 하면서 스타가 되자 변질되거나 달라지는 것도 봤고…. 그런 여러 가지 과정들을 보며 저렇게는 안 사는 게 내 성격에 맞겠다 해서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도 있었죠.”
음악을 하다 보면 알려져야 하는 순간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정선은 “알려지기 싫어서” 그걸 피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도망갔다.
소극장 공연의 내밀한 즐거움
“위로 올라가기가 너무 싫었어요. 내가 가진 것 이상으로 평가받는 게 싫었던 거죠. 요즘은 그게 더 심해지는 게, 그것이 원하지 않더라도 사람의 이미지가 자꾸 확대가 되잖아요.”
스마트폰으로 모두가 미디어를 갖게 된 시대, 별것도 아닌 일이 인터넷을 수천 수만 번 떠돌면서 비대해지는 광경을 우리는 자주 접하고 있다. 되려 그렇게 되고 싶어서 부추기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이정선은 체질적으로 그런 것들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이다. 큰 공연은 안 하면서 소극장 공연만 3년째 꾸준히 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밴드가 7명인데, 처음 시작할 때 관객은 10명이었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관객 40~50명, 많아야 100명을 넘지 않는 공연을 계속하고 있다.
“큰 공연장을 가면 저도 과장을 해요. 오버하는 거죠. 필요 이상으로 잘하려 하고. 그런데 작은 데에선 관객과 얘기하듯 공연을 하죠. 음정이 틀려도 되고. 그대로 보여줄 수 있어서 편안합니다.”
소극장 공연의 즐거움은 아는 사람만 안다. 다분히 인간적인 감성으로 노래하는 가수와 공유하는, 그 작은 세계가 만들어지는 분위기는 다른 사람이 알 수 없기에 더 소중하다. 그가 고수하는 내밀한 세계는 확실히 대형 공연장의 요란함보다는 소극장에 더 어울릴 수밖에 없다. 쉽고 간결한 연주와 가사를 통해 삶의 냄새가 폴폴 느껴지는 편안한 소리가 이정선 노래다.
“밴드 멤버들에게 미안하죠. 제일 오래한 친구가 20년 됐고, 그 외에 지금 있는 친구들은 수입이 별로 없어도 음악이 좋아서 활동하는 친구들이에요. 멤버들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못 치는 음악은 기타를 안 잡는다
장인 같은 음악인 이정선. 그의 다른 모습으로는 교육인 이정선이 있다. 많은 사람이 그가 만든 기타 바이블 ‘이정선 기타교실’을 기억할 것이다. 처음 기타를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거쳐 가는, 말 그대로 교본이었던 책이다. 그는 1989년부터 대학 강의를 시작해 동덕여대에서 실용음악과 교수로 16년 재직하고 2016년 정년퇴임했다. 과묵하다 못해 하도 리액션이 없어 방송 PD들에게 기피 대상이었다던 그는 학교에 가서 자신이 좀 변했다고 했다.
“말이 많아졌죠. 짜식들이 말을 못 알아들어서.(웃음)”
그렇게 입게 된 옷이 꽤 맞았는지, 공연예술대학 학장까지 지냈다.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며 살았어요. 책 쓰고 가르치면서 음악을 했죠. 순간순간 해야 할 일은 그 자리에서 했죠. 그리고 이 일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전혀 다른 일에서 푸는 법을 알게 됐죠. 덕분에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도 참 편하게 지냈어요.”
그러고 보면 그에게 있어 음악은 생활의 연장으로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온 것 같다. 덤덤하고 까다로워 보이지만 삶과 생활에 자연스러운 흐름이 생기면 그것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이정선다운 것 아닐까.
“창작하는 사람들은 가슴속에 샘이 있는 거예요. 물방울이 하나씩 모이다가 넘치면 작품이 돼. 한결같이 물방울이 모이진 않으니까요. 하룻밤에 모일 때도 있고 몇 년 걸릴 때도 있고. 샘이 고갈되다가도 하룻밤에 넘쳐서 1시간 만에 뚝딱 하고 작품이 터질 때가 있지.”
음악에는 큰 힘이 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이정선은 치열한 경쟁이나 승부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엊그제 공연을 갔는데, ‘아이고, 외계인들 아냐?’ 싶더라고요. 너무 잘하니까. 옛날 같으면 다른 사람이 그렇게 잘하는 걸 보면 밤새 기타를 치기도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잘하는 놈은 잘하는 거고, 나는 내 음악 하면 되는 거다 합니다. 사실 젊었을 때도 좀 따로 놀았어요. 잘들 한다 그러면서.(웃음)”
요즘은 전 세계가 케이팝 열풍이라고 한다. 아무리 노래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9시 뉴스를 틀면 방탄소년단 소식을 듣게 된다. 한국 가요가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는 장면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래서인지 가요계에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가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수많은 가수, 특히 아이돌은 치열한 경쟁과 자본의 논리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처지들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궁금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밖에는 설명이 안 돼요. 음악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관이 달라진 거죠. 요즘 아이들이 음악을 하는 건 돈이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더 크게 지르고 더 크게 벌고. 예전에는 안 그랬던 사람이 더 많았죠. 노래를 좋아하다 보니 어느 날 먹고살게 되더라, 그런 분위기였어요. 지금은 노래를 돈 버는 수단으로만 생각하니…. 처음에는 안타깝다가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으니 어쩔 수 없다, 기준이 달라졌다고 봐요. 그래서 아이돌 그룹을 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죠. 그 친구들이 10년 후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노파심이죠.(웃음)”
그는 음악에는 돈벌이 수단보다 더 큰 힘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지금 나오는 가수들이 그걸 좀 느끼고 알면 음악에 대한 자세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은 게 그의 희망이다.
“아직 모르는 거예요. 인간다움이 있어야 하는데… 아유, 이러면 말이 너무 많아져.(웃음)”
존중과 인내로 만들어가는 부부관계
인터뷰 중 이정선이 유독 말이 많아지는 순간이 두 번 있었다. 하나는 음악에 대한 얘기, 다른 하나는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인터뷰 전 그가 ‘사랑꾼’으로 불릴 정도로 아내에 대한 애정이 깊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이해가 갔다.
“제가 머슴이죠.(웃음) 아이는 없어요. 우리 때는 애 안 낳는 게 애국하는 일이라고 해서. 덕분에 아이에게 들어갈 돈과 시간으로 두 사람이 하는 일이 많죠.”
두 사람은 여행을 참 많이 다녔다 한다. 그리고 취미생활은 서로에게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그 일이 정 싫으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준다. 부부관계가 오래, 다정하게 유지되려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존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나이 들어서도 아내와 잘 지내는 방법이요? 하고 싶은 걸 참으면 돼요. 강요하지 말고 참아야죠.”
그도 어느새 내년이면 칠순이 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많다고 한다.
“뭘 하려고 하면 이게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 생각하게 되죠. 가능하지 않은 일은 가능하지 않아서 욕심도 나는데… 아, 돈이 없어서 안 돼.(웃음)”
그는 여전히 기타리스트이며, 그 무엇보다 기타에 대한 애정이 충만하다. 집에 이미 50개쯤 있다고 한다. 아마도 세상을 관조하며 사는 그가 가장 욕심을 내는 몇 가지가 있다면 그건 바로 기타와 소리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악기들은 계속 개량되고 있으니까요. 내가 구체적으로 찾고 있는 소리가 있다기보다는, 내가 내는 소리에 노래를 맞추죠. 옛날에는 기타도 직접 만들고 싶었는데 거기에 빠지면 다른 걸 못하니….”
나이 들면서 더 간결해졌다
“나이 들면서 달라지는 점이라면, 심플해지는 거죠. 감정도 단순해지고. 요즘은 가사를 쓰는데 자꾸 짧아져요.(웃음) ‘배고프다’ 하면 그걸로 얘기가 다 되는데, 왜 배고픈지에 대해 구구절절 말할 필요 없죠. 그러다 보니 가사도 짧아지고 곡도 줄어지고.”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을 더 추구하며 미니멀리즘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이정선은 인생에 대해서도 ‘말 그대로 인생인데’라고 말한다. 인생 앞에 ‘인생’이라는 두 글자 외의 무엇을 더 붙일 필요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인생 전반을 차지하는 노래에 대한 생각도 단순했다.
“가끔 그런 질문을 받는데, 어떻게 대답하면 멋있을까 고민해봤어요. 그런데 노래는 그냥 제가 살아가는 만큼을 보여주는 정직한 사이즈예요. 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대로의 크기 말이죠.”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좋아하는 것. 그에게 노래는 그런 것이었다. ‘대가’에게 ‘대가’라는 말 외의 수식어가 필요 없는 것처럼.
감미롭기도 하고 강렬하기도 한 멜로디가 귓가에 맴돈다.
‘캔 리브~~리빙 이스 위다웃 유~’ 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애절하고도 달콤한 노래로 젊었을 때 팝송에 빠져있던 필자가 좋아한 노래 중 하나였다.
대표적인 가수로‘ 해리 닐슨’이 이 노래로 4주 연속 빌보드차트 1위를 장식했었으니 큰 성공으로 사랑받는 노래임이 틀림없겠다.
그 외에도 ‘머라이어 캐리’ ‘에어 서플라이’ 등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되며 널리 알려졌다.
느린 템포에 조용하고 그윽한 선율, 슬픔을 참으려는 내면적 고통이 아름답게 표현된 사랑의 상실에 대한 황폐한 고독을 담고 있는 이 노래는 알고 보니 참으로 쓸쓸하고 슬픈 이면이 있었다.
이 곡은 ‘배드 핑거’라는 4인조 록 그룹의 멤버 두 명이 서로의 곡을 접목해 완성한 곡이다.
필자는 젊었을 때 여러 장르의 수많은 음악을 즐겼다. 그중 가장 좋아했던 뮤지션을 꼽으라면 두말할 것 없이 ‘비틀즈’다.
‘배드 핑거’라는 그룹은 그리 유명하진 않았어도 이름은 알고 있었는데 매우 불운했다.
음악성도 좋고 노래도 괜찮았지만 ‘비틀즈’의 그늘에 가려 ‘비틀즈’의 아류라는 비아냥을 들어야만 했으니 말이다.
‘비틀즈’처럼 4명으로 결성된 ‘배드 핑거’는 그들 나름대로 음악을 펼쳤지만, 사람들은 ‘비틀즈’의 짝퉁이라는 시선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사실 제작자도 ‘비틀즈’를 표방해 이 그룹을 만들었다고 한다.
승승장구하던 ‘비틀즈’가 어느 날 해체를 선언했다. 수많은 열혈 팬들은 절망감과 함께 분노까지 느꼈다.
그래서 ‘배드 핑거’가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비틀즈’의 짝퉁 노래는 듣지 않겠다며 야유하고 거부했다고 한다.
훌륭한 실력을 갖췄음에도 시기를 잘 못 만났으니 안타까운 뮤지션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에 ‘배드핑거’ 멤버 두 명이 합작해 만든 곡 ‘without you'를 앨범에 수록했으나 팬들은 들으려 하지 않아 사장될 위기에 닥쳤는데 이 곡을 들은 ’해리 닐슨‘이 그들에게 그 곡을 사겠다고 제안을 했다.
앨범에 수록되었지만, 대중이 들어주지 않으니 그들은 ‘해리 닐슨’에게 헐값으로 노래를 팔았다고 한다.
그런데 1972년 ‘해리 닐슨’이 이 곡을 편곡해 발표하자 빌보드 차트에 4주나 연속으로 1위를 차지하며 사랑받기 시작했다.
발라드에 강한 비트가 들어간 당시로써는 차별화된 멋진 음악이라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자신들이 만들었음에도 대중의 눈길을 받지 못하고 싼 가격으로 팔아넘겼는데 그 곡이 명곡이 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니 ‘배드 핑거’는 상대적 박탈감을 이기지 못한 듯하다.
1975년 이 곡을 만든 ‘배드 핑거’의 ‘피터 햄’은 스튜디오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8년 후 1983년에는 공동작곡자인 ‘토마스 에반스’ 역시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사람들은 왜 ‘배드 핑거’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일까? 생각해 보면 매우 아깝고 안타깝기만 하다.
‘비틀즈’에 열광했고 지금도 그들의 수많은 명곡을 기억하며 멤버 하나하나 다 좋아하고 있지만 그렇게 유명한 그룹에 가려져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사라져 간 ‘배드 핑거’가 애틋하다.
그저 나의 좁은 소견으로 대중이 알아주지 않아도 열심히 곡을 만들고 꾸준히 활동했더라면 언젠가는 음악성을 인정받고 훌륭한 록 그룹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 한 감미로운 노래에 이런 사연이 있다는 걸 알게 되니 마음이 아프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은 쉽다. 오히려 나를 위해 사는 게 더 힘들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이제라도 시작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美베이비부머들의 ‘나를 사랑하는 길’을 들여다봤다.
정리 남진우 뉴욕주재기자
◇ 작가, 캐런 마이잔 밀러 : 정원 가꾸기는 나의 천직
20년 전 나는 25분 단위로 수당이 책정되던 직업을 포기했다. 그때 40세였으나 완전 기진맥진했다. 동료들이 왜 그리 급하게 현실에서 벗어나려 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모험적인 인생 2막으로 과감히 뛰어들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새 남편과 함께 서부로 와서 유서는 깊지만 버려진 헐값의 집을 사는 데 저축한 돈을 몽땅 털어넣었다. L.A. 교외에 있는, 80년 전에 조성돼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반 에이커(약 2023㎡) 규모의 일본식 정원이 있는 집이었다. 악취가 나는 연못과 무성한 잡초와 산더미 같은 낙엽이 가득한 정원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상적인 곳이라는 확신이 섰다.
남편은 좋아하는 우주공학 관련 일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이사로 내 진로는 막혀버렸다. 1년간 이력서를 보내고 인터뷰를 하면서 허송세월했다. 학교로 돌아가야 하나? 교사나 간호사 자격증을 따야 하나? 시간을 현명하게 쓰고 싶었지만 언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될지 고민이었다.
공백이 길어지면서 대답은 분명해졌다. 바로 여기가 시작이란 것을. 수년간 땀내 나는 밀짚모자를 쓰고 낡은 바지를 입고 무릎 굽혀 작업을 하면서 그 생활을 좋아하게 된 것을 깨달았다. 아무런 경험이 없었지만 남는 시간에 머리를 비우고 해왔던 정원 가꾸기가 천직이었던 것이다. 정원 가꾸기로 하루가 가고 수년을 보내면서 이보다 값진 것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땅 지킴이로 인생 2막의 꽃을 피우고 있다. 정원의 시간에 맞춰 살아가다 보니 잡초가 연못과 오솔길로 나를 인도하고 가을에는 낙엽이 나를 호출한다. 노력해도 금전적인 보상은 없지만 정원은 가장 이상적인 일자리다. 고요하고 끈기 있고 믿음직하며 창조적인 일자리다. 내가 실수를 해도 그들 스스로 바로잡는다.
부족한 내가 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아무도 내 자리를 탐내지 않는다. 남편 혼자 버는 돈으로 살지만 적은 돈으로도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많은 것을 탐하지 않으며 만족스럽고 행복한 결혼생활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정원에서 자라나는 것은 풀만이 아니다. 42세에 첫아기를 낳고 50세에 작가가 되었으며 선종 불교의 수련을 쌓아 그 결실도 얻었다. 계절의 느린 반복 속에 야망과 후회에서 벗어나 시간에 쫓기지 않는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됐다. 환갑을 자축하면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준 정원에 감사하며 항상 정원에서 살아갈 작정이다.
◇ 배우, 린다 카터 : 스컬, 잔잔한 강물 위에서의 명상
스컬(좌우의 노를 한 사람이 젓는 가벼운 보트)은 배우기는 쉽지만 마스터하기는 매우 어렵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스포츠를 배우는 것 자체가 즐겁다. 워싱턴 DC의 포토맥 강은 공연 연습을 하는 데 이상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나는 공연을 위한 신곡을 준비할 때면 스컬을 하면서 가사와 리듬을 내 몸속으로 완전 체화시킨다.
처음에 친구가 스컬을 권유했을 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포토맥 강을 따라 사이클링을 하다가 조정을 하는 모습에 끌려 요트클럽을 찾게 됐고 바로 좋아하게 됐다.
워싱턴 DC에 사는 사람이면 포토맥 강이 바로 옆에 있어서 쉽게 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신체단련에도 좋고 조용하고 아름다운 강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을 것이다. 보트가 좁고 길어 균형 잡기가 힘들며 뒤집어지면 올라오기 어려운 것이 최악이다.
어느 날은 스컬을 하다가 자살한 여자 시체를 발견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때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가족들은 행방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별로 무섭지 않았고 장례식에 참석해 조사(弔辭)도 낭독했다.
스컬을 시작한 2008년부터는 공연을 위한 신곡 연습을 보트를 타면서 했다. 아이팟만 있으면 연습을 할 수 있다. 바람이 없는 잔잔한 강물 위로 노를 저을 때는 물과 혼연일체가 되고 명상에 빠지기도 한다.
◇ 여행작가, 키티 빈 얀세이 : 멕시코 산 미구엘에서의 일주일
나는 데킬라 술잔을 들고 예술가들의 멕시코 메카에서 오랜 친구들과 건배를 하고 있다. 나의 동반자 배리와 친구 론니, 제인과 함께 이국적인 꽃들이 활짝 핀 파티오와 벽난로가 있는 세 개의 마스터 스위트룸을 갖춘 기막힌 빌라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산 미구엘의 임대 방식이 다 그렇듯, 일주간 반나절씩 일하는 가사도우미도 있다. 구릉진 자갈 깔린 길로 10분 정도를 걸어 다채로운 색상의 집을 지나면 고딕양식의 파로키아 성당과 광장이 있는 도심에 도착한다.
현지 주민과 관광객들은 잘 정리된 월계수 아래 벤치에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커피를 마시거나 무료로 와이파이를 이용한다. 낮에는 어린 학생들이 광장을 돌며 서로를 쫓아가기도 하고 저녁에는 연인들을 유혹하는 마리아치 세레나데가 흘러나온다. 나는 제인과 함께 노천시장에서 요가 수업과 쇼핑을 즐기고 부티크, 공방, 갤러리 등을 돌아본다. 식당에서는 채식주의자용 요리와 스시 그리고 군침 돌게 하는 멕시코 요리가 나온다.
예정된 일주일이 끝날 무렵 론니는 임대 아파트를 찾아 나섰고 나는 배리를 이끌고 부동산소개소로 갔다. 애틀랜타에서 만났던 한 여인이 산 미구엘은 마술의 소용돌이라고 묘사했는데 나는 왜 이제야 알았을까?
◇ 가수, 달린 러브 : 삶의 전부가 된 킥복싱
딸 로즈가 대단한 킥복싱 수업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미친 짓이라 생각했다. 킥복싱 동작을 배운 딸이 나와 몇몇 부인들에게 킥복싱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그 후 6년이 지나 76세가 된 나에게 킥복싱은 삶의 전부가 됐다. 운동과 노래는 젊은 시절 가장 중요한 일상이었다. 나는 항상 무언가 활기찬 것을 원했고 아버지가 목사로 있었던 샌안토니오의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했다.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우리 합창단이 할리우드 볼에서 냇 킹 콜과 공연을 한 것은 위대한 순간이었다.
L.A.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야구와 배구를 했다. 1958년에는 블로섬스 걸그룹에 합류했고 몇 년 후 필 스펙터와 계약을 하면서 ‘He’s a Rebel’로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다. 마침내 싱글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도 제인 폰다의 비디오를 보면서 운동을 계속했지만 너무 많은 당분을 먹어 체중이 자꾸 불었다. 먹으면 운동을 해야 하는데 나이가 들면 상황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킥복싱이 너무 힘들었지만 팔, 다리, 허리 등에 너무 좋았다. 남편이 딸의 교실에 데려다줬고 수업이 끝난 후 차를 탈 때는 눈썹 이외의 모든 곳이 쑤셨다. 그러나 점차 익숙해졌고 내 목표는 전보다 더 잘하는 것이었다. 지금 딸 교실의 수강생은 30명으로 늘었고 그중 내가 가장 나이가 많다. 그래서 수강생들은 “저 늙은이가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라고 말하곤 한다.
일주일에 5일, 오전 5시에서 한 시간 동안 킥복싱을 하지만 수업은 하루하루가 다르다. 웨이트 트레이닝과 다리 근육운동을 할 때는 서로 도와준다. 이제는 하나의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서로 기합을 넣으면서 동료애를 느낀다. 몸매를 유지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도움이 된다. 특히 공연을 할 때 그렇다.
이제 나는 더 많은 에너지로 충만해졌고 15파운드나 빠졌다. 하지만 때로는 승용차에서 넘어지고 정크푸드를 먹기도 한다. 이럴 때 꿈을 되새긴다. 물과 비타민을 섭취하고 운동을 하러 간다. 우리 몸은 인생이다. 몸을 돌봐야 마음이 몸과 함께 작동한다. 무대에서 노래할 때처럼. 나는 내 느낌을 청중들도 느낄 수 있기를 원한다. 그래서 한자리에서 노래하기보다는 청중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한다.
광복 70년의 역사에서 대중음악은 어떤 분야보다도 일반 대중의 정서와 우리 사회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포착하고 반영하면서 문화의 선두에 서왔다. 한국 사회의 발전상을 축약하면서 우리의 여러 세대와 계층이 알고 기억하는 가장 많은 스타들을 내놓은 곳이 대중가요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글 임진모 음악평론가
광복과 함께 대중음악은 산업적 덩치를 키운 것은 물론 서구의 문화를 창조적으로 수용한 갖가지 스타일을 만들어내면서 예술적 성장과 성숙을 거듭했다. 대중음악은 광복 이후 70년의 역사 속에서 찬란히 꽃을 피운 것이다.
광복 이전에도 대중이 사랑한 음악은 있었다. 이난영, 남인수, 현인, 고복수 등 일제 강점기에 활약한 가수들은 애초 세련된 음악이었으나 갈수록 서민대중의 호흡과 동행한 음악으로 남은 것은 이후 성인가요로 불린 트로트였다.
조금은 저학력과 가난 혹은 단순한 재미로 연결되는 음악이지만 트로트는 꾸준하게 서민대중의 희로애락을 반영하면서 지금도 명맥을 잇고 있다.
광복 이후에 트로트는 ‘엘리지의 여왕’ 이미자가 출현하면서 다시금 힘찬 날갯짓을 했다. 1964년 발표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역사상 최초로 100만장에 준하는 가공할 판매고를 수립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미자는 특히 1960-70년대 경제성장의 뒤안길에서 한과 설움을 삼킨 여인들을 대변한 비가(悲歌)를 많이 부르면서 한국 최고의 여가수, 세기의 가수라는 명예를 지키고 있다.
이미자와 남진 나훈아 라이벌전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반 우리 대중문화 사상 가장 치열한 라이벌전을 전개한 남진과 나훈아는 이미자를 잇는 트로트의 별이었다. 전국을 삼킨 두 가수의 인기대결은 국민 전체가 둘로 나뉘어 설전을 벌일 만큼 살벌했다. ‘님과 함께’를 비롯한 조금은 밝은 톤의 노래를 한 남진이 경제성장 시기의 빛이었다면 ‘물레방아 도는데’와 같은 구슬픈 노래로 이농(離農)의 고통을 표현한 나훈아는 경제성장 시기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단은 그러나 남진과 나훈아가 겨뤘던 때를 트로트의 마지막 전성기로 규정한다. 그때까지 어떤 장르들보다도 드높은 위용을 자랑했으나 이후에는 시장의 헤게모니를 다른 스타일에 넘겨주게 됐다는 것이다. 1970년대의 하춘화, 1980년대 주현미와 현철, 1990년대 태진아와 송대관, 그리고 2000년대 ‘어머나’의 장윤정으로 트로트계보는 쉼 없이 이어졌지만 위력은 갈수록 떨어졌다.
1960년대 중반까지 독점적 위력을 행사한 트로트는 광복 후 전국에 미군이 주둔하고 미국을 위시한 서구의 문화가 물밀듯 유입되면서 불가피하게 외국의 영향을 받은 음악들과 경쟁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용산 동두천 부평 대구 등 이른바 미8군 지역의 영내와 영외에는 우리 음악가들의 미군을 위한 공연활동이 러시를 이뤘고 이후 그들은 국내 무대에 진출해 한국 대중음악의 판도를 송두리째 바꿨다.
트로트 일색이었던 음악계에 그들이 들여놓은 음악은 미국의 재즈와 팝에 기초한 소위 ‘스탠더드 팝’이란 것이었다. 아직도 용어가 불분명한 이 스타일의 음악은 1961년 5·16 군사정변이 터진 해에 히트한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시작으로 현미, 김상국, 최희준, 위키리, 패티김, 정훈희 등의 스타를 배출했다. 발라드를 잘 소화한 스탠더드 팝가수들은 미8군 출신답게 팝송도 자주 불렀으며 노래에 영어를 자주 썼다. 이 가운데 ‘하숙생’의 최희준과 ‘서울의 찬가’의 패티김이 특급스타였다.
서구음악인 스탠더드 팝은 기조와 성격에 있어서 트로트와 대치되는 음악이었지만 국내 방송의 ‘10대 가수가요제’와 같은 프로그램에 의해 트로트와 병치되면서 같은 ‘어덜트(adult) 음악’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베이비붐 세대 이전의 전쟁세대라고 할 1930-40년대 생 인구의 음악에 머무르고 말았다고 할까.
‘록’ 신중현과 ‘포크’ 김민기
미8군을 통해 국내 소개된 음악 중 1950년대 생 이후의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는 청춘의 뜨거운 피를 담은 로큰롤, 즉 록으로(그때 말로는 ‘그룹사운드’) 궁합을 맞췄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에는 청춘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키보이스’를 위시한 그룹사운드가 판을 쳤다. 하지만 역사는 국내 최초의 록밴드 ‘애드포’를 결성한 신중현을 ‘한국 록의 대부’로, ‘한국 대중음악의 총설계자’로 상찬하며 고평을 집중한다. 블루스와 싸이키델릭 등 서구의 음악문법을 창조적으로 가공해 우리식 록의 프레임을 주조해냈다는 역사적 평가는 지금도 유효하다.
스스로 ‘아름다운 강산’, ‘미인’과 같은 명곡을 부른 가수인 한편 펄시스터즈, 김추자, 장현, 박인수, 김정미 등에게 ‘커피 한 잔’, ‘임은 먼 곳에’, ‘미련’, ‘봄비’, ‘봄’ 등 요즘 기준에서도 빼어난 수준의 음악을 잇달아 써준 프로듀서이기도 했다. 그의 도움을 받은 스타가수들을 언론은 ‘신중현사단’으로 일컬었다. 하지만 1975년 유신시대의 대마초와 금지곡 파동에 활동이 급정지된 그와 함께 한국의 록은 침체기로 접어든다.
록만이 아니라 베이비붐 세대의 또 다른 사운드트랙인 포크도 독재통치의 철퇴를 맞는다. ‘청통맥’ 즉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로 표현된 베이비붐 세대들의 꿈과 도약, 아픔과 좌절을 창의적으로 그려낸 많은 포크송 가수들이 활동금지를 당하거나 은둔의 처지에 몰렸다. 김민기, 한대수,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서유석, 이장희, 김정호 등이 한국 포크의 기수들이었다. 이들 음악은 전쟁세대보다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은 베이비붐 세대의 대학생들에게 어필했다.
포크 가수들은 대부분 자기들이 곡을 만들어 통기타와 하모니카로 연주하고 노래하며 이전의 악단과 전문 작곡가가 지배한 풍토에서 탈피, 소위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 시대를 개척했다. 대부분 자기가 쓴 곡을 담은 LP를 최초로 출반한 김민기에 자극받아 동시대의 많은 가수들이 자작곡을 내놓은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김민기는 록의 신중현과 같은 인물이다.
‘아침이슬’ ‘백구’ 등 그가 작곡해준 곡을 불러 유명해진 양희은은 김민기의 페르소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음악의 자가발전을 이뤘다는 점에서 포크를 ‘한국 음악민주주의의 시작’으로 정의하는 관계자들이 많다. 하지만 포크는 베이비붐 세대의 정서라 할 청춘스피릿이 당시 군사정부와 충돌하면서 대마초 파동이라는 암흑기를 초래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네 범주 가운데 어덜트 음악인 트로트와 스탠더드 팝이 1980년대에 들어 정체상태를 맞은 반면 시련을 맞은 영(Young) 음악인 록은 1977년 대학가요제와 밴드 ‘산울림’의 등장으로 힘차게 재도약한다. 참신하고 재기에 넘치는 가사와 실험적인 곡 전개를 특징으로 한 산울림은 흑인음악인 펑크(funk)를 실험한 ‘사랑과 평화’와 함께 록의 기운을 되살렸다. 포크는 1970년대 중·후반 이정선, 조동진, 정태춘을 거친 뒤 시대를 고발하는 민중가요를 낳았고, 1990년대에는 김광석이 활약했지만 장르의 파괴력은 2000년대 들어서 현저히 후퇴했다.
‘가왕’ 조용필, ‘10대 대통령’ 서태지
1980년대의 특급 스타들인 조용필, 윤수일, 김수철, 구창모 등은 대부분 록의 세례를 받은 가수들이었고 실제로 상당수가 밴드를 거느리며 대중적 록의 위용을 뽐냈다. 밴드 송골매와 벗님들은 TV에서도 맹활약했다. 하지만 1980년대는 훗날 ‘가왕’으로 통한 조용필의 것이었다. 그는 ‘단발머리’, ‘못 찾겠다 꾀꼬리’ 등 발랄한 록으로 10대 오빠부대를 이끄는 동시에 ‘허공’ 등 트로트 성향의 노래도 불러 다세대를 망라한 국민가수의 면모를 과시했다. 또한 앨범마다 혁신을 불어넣어 단일 곡이 아닌 앨범 전체의 미학과 음악적 완성도가 중요해진 흐름을 견인했다.
아마도 베이비붐 세대와 1960년대 중반 생 이후의 포스트 베이비붐을 함께 묶는 유일한 가수가 조용필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활약하던 1980년대는 가요계의 규모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던 때라서 이전 음악계에는 없던 갖가지 장르의 음악이 용암이 분출하듯 솟아올랐다. 김현식, 한영애, 들국화와 같은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젊은이들이 찾았고 ‘봄여름가을겨울’과 김현철은 재즈를 실험했으며 ‘신촌블루스’처럼 블루스를 시도한 음악가도 나왔다.
이문세에 곡을 준 이영훈과 비운의 천재 유재하는 뽕짝 즉 트로트 느낌을 완전 배제한 팝 발라드의 꽃을 피웠다. 이 음악과 함께 고학력 여성들도 시장의 소비자로 참여하게 됐지만 음악의 주도권은 하이틴으로 넘어가 나미, 김완선, 소방차 등 10대가 좋아하는 댄스음악이 각광을 받았다. 중심이 ‘10대’와 ‘댄스음악’이라는 트렌드를 정확히 간파해 시대를 가른 인물은 1992년 광풍을 야기한 ‘난 알아요’의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글로벌 시장에서 점프한 케이팝
새로운 음악인 랩을 가요에 접목한 서태지는 신세대인 X세대의 공격성을 노골화한 음악을 구사해 10대대통령 또는 문화대통령으로 불렸다. 그가 랩을 끌어들이고 잠시 후 김건모가 ‘레게’를 유행시키고 듀엣 ‘듀스’가 ‘힙합’을 퍼뜨리면서 1990년대 국내음악 판은 과거에는 홀대된 흑인음악으로 쏠려갔다. 한 사회학자는 “요즘 젊은이들이 흑인음악에 열광하는 것은 백인음악에 압도적으로 경도된 기성세대에 대한 은근한 반란”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서태지가 은퇴를 선언한 1996년부터 음악계는 댄스와 비주얼을 내건 대형기획사의 아이돌 가수들이 판세를 장악했다. 동아시아에 한류 붐을 터뜨린 ‘에쵸티’(H.O.T.)를 시작으로 2세대라고 할 ‘동방신기’, ‘빅뱅’,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투애니원’ 등 아이돌 댄스음악은 20년 가까이 된 지금도 대세를 몰이하며 장수하고 있다. ‘애들 음악은 5년을 못 간다!’는 속설을 깼을 뿐 아니라 ‘텔 미’의 걸 그룹 원더걸스가 등장한 2007년부터는 케이팝(K-Pop)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간 우리의 아이돌음악은 세계에 ‘다이내믹 코리아’의 문화이미지를 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상업적인 아이돌 댄스의 주류음악에 반발해 독립을 외친 인디음악이 소생하기도 했다. 크라잉 넛의 ‘말달리자’는 IMF 시절 넥타이부대의 찬가로 등장, 인디의 가능성을 알렸다.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요원했던 빌보드 차트에서 5주간 2위를 차지, 케이팝의 지평을 크게 올려놓았다. “케이팝 때문에 한국을 알았다”는 세계인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각 세대와 계층의 정서를 담아내면서 대중의식을 이끌어온 대중음악이 광복 70년 역사의 내공을 발휘하며 이제 내수시장이 아닌 지구촌 곳곳에서 찬란한 성공스토리를 써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케이팝이란 깃발 아래 우리 역사의 사운드트랙은 시제를 미래로 맞추고 있다.
△ 임진모 음악 평론가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후 경향신문과 내외경제신문기자를 거쳐 1991년부터 음악평론.
라디오 출연 등 전파. 인쇄매체에서 폭넓게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