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견이 없었다. 지금 이 시대를 대표하는 어른은 누구일지 고민했던 편집회의에서 기자들은 나태주 시인을 꼽았다. 만장일치였다. 대중도 마찬가지다. MZ세대를 포함한 모든 세대에게 그는 인기를 넘어 추앙에 가까운 현상의 주인공이 됐다. 하지만 그는 이제 막 낯익어진 마이너한 시인일 뿐이라고 말한다.
“흔히 말하는 팬덤 같은 것이죠. 날씨도 팬덤이 되고 계절도 팬덤이 돼요. 눈과 비가 고르지 않게 한꺼번에 내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몰리는 것뿐이죠. 낯익고 익숙한 것을 찾는 거예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얘기다. 최근 출간된 그의 신간 ‘좋아하기 때문에’는 발매 2주 만에 1만 부나 팔렸다. 요즘같이 책을 멀리하는 시대에 꿈같은 이야기다. 사람들이 단지 친숙함에 습관처럼 살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그는 책을 통해 “시인은 세상 사람들의 감정을 돌보는 서비스맨”이라고 말했는데, 아마 그것이 통했던 것 같다. 마치 ‘풀꽃’의 한 구절처럼 나를 자세히 그리고 오래 봐주길 기대했기 때문일까. 책을 내놓을수록 20~30대 사이에서 강한 소구력을 발휘했다. 그 소감의 물결에선 희망과 위로, 치유 같은 단어들이 떠다녔다.
타인 감수성과 꼰대
이런 공감대 속에는 어른다움이 있다. 젊은 세대가 ‘꼰대’에 저항하는 이유를 그는 어른의 이해와 변화가 없어서라고 말했다. 그는 이해의 기준으로 ‘타인인지 감수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미투 현상’이 사회를 뒤흔들 때 익숙해진 ‘성인지 감수성’에서 온 말이다. 이제 세상은 내 입장만 고집하며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타인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주변에선 ‘타인 감수성’이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니까, 시인은 더 좋은 표현이라며 그 말을 되뇌었다.
“세상은 나 하나와 나머지의 너로 나뉘어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요. 나를 빼면 모두 ‘너’이기 때문에, 너를 감지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자꾸 나 때만 얘기하려 들고, 네 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네 때는 그렇구나, 그거 참 힘들겠다 하고 관심 갖고 보살필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한 거죠.”
그는 책 속에서도 꼰대를 상징하는 신조어 ‘라떼’를 지적했다. 어른과 젊은이 쌍방이 조금씩 물러서서 상대를 이해하기를 기대했다. 어른 쪽에서 권위를 내세우며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젊은이도 변화할 것이라고 믿었다.
소위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른 만큼 다양한 약속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지만, 가장 즐거운 일정이 있다. 젊은 세대와 만나는 강연회다. 특히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거절하는 법이 없다.
“아이들을 만나서 어려운 점, 괴로운 점, 그늘진 점을 봐요. 겉으로는 멀쩡하고 좋아 보이는 청춘들도 소통을 해보면 문제가 있어요. 결혼이 싫은 여성, 학교가 힘든 선생님, 취업이 힘든 청년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의 그런 이야기를 듣고,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해주려 노력하고 있죠. 아이들이나 젊은 사람들을 나무라지 않고, 기다려주고, 도움 주는 말을 했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낳아주고 길러주는 것만으로 부모 노릇이 끝났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져주고,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해요. 어른이 됐다는 건 졌다는 것이니까요.”
젊은 세대가 갖는 아픔에도 주목했다. 학자금 대출 등으로 ‘젊은 빚쟁이’가 되고, 구직난에 직장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지만, 망가진 경력은 쉽게 되돌릴 수 없어 ‘손닿는 직장’을 선택하기도 어려운 고충에 대해서다. 그는 “가서 막일이라도 해라”가 어른 눈에는 맞는 말 같지만, 쉽게 하지 못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심정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달라진 세상에 대해 어른들이 더 주목해주길, 그리고 스스로도 변화하길 당부했다. “우리 사회는 이제 유교 사회도 농본주의 사회도 아니에요. 편리한 것, 새것을 좇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이미 젊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데 무조건 어른을 따르라 요구할 수 없어요. 또 같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떠도는 (디지털) 유목 사회가 됐어요. 내가 만든 우유 한잔도 휴대폰을 뒤져보지 않으면 팔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모두가 노마드처럼 살고 있는데 과거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죠.”
바뀐 세상에 맞춰 그 스스로도 변화를 택했다. 그는 “나 역시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한창 일했던 시기보다 정년퇴직 후 내 생활은 더 많이 바뀌었죠”라고 말했다.
모두 비워내야 좋은 어른
최근에는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고민하는 어른이 많아졌다. 인문학 강좌의 주제로도 인기가 많다. 세대 간 갈등이 부각되면서 스스로를 고민하는 기성세대가 늘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나태주 시인은 이러한 모습을 ‘굉장히 좋은 상태’라고 이야기했다.
“젊은 시절은 스스로를 채워야 하는 기간이에요. 이기적인 삶이 되죠. 가지고 싶은 것도 많아요. 돈도 명예도 지위도 얻으려면 채우는 데 집중해야 해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달라요. 이타적인 삶의 태도를 취해야 해요. 공부도 마찬가지예요. 젊을 때는 남을 이기기 위한 공부를 하지만, 나이 들어서는 상 타는 것도 돈 버는 것도 아닌 내 내면의 기쁨을 위해서 공부하는 겁니다. 철이 드는 과정이죠. 이것을 위해서는 젊을 때 스스로를 꽉 채워놓을 필요도 있어요.”
그는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안정을 통정성에 빗대 이야기했다. 살아온 삶 전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면 스스로의 잘못도 인정할 수 있게 돼요. ‘그 대목은 참 미안하게 됐다. 어쩔 수 없었고, 지금 같으면 안 할 텐데 그때는 내가 그랬다’고요. 어른이라면 자신을 속이거나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고, 자기 잘못까지 인정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해요. 우리 사회나 국가 운영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젊을 때 맘껏 채우고 나면 이후에는 비우는 과정이 찾아온다. “나이 먹은 사람들은 생각을 해야 돼요. 어떻게 비우고 갈 것인지. 때려 부숴서 비우고 갈까, 곱게 정리해서 도움이 되게 할까 말이죠. 지금 운영하는 풀꽃문학관도 나를 비우는 작업이에요. 그간 모아놓은 것들을 쓰레기가 아닌 보물이 되도록 정리하고 있어요. 이것들을 욕심내 집에 데려가는 순간 쓰레기가 될 거예요.”
그렇게 잘 비우고 간 인물 중 하나로 나태주 시인은 이어령 선생을 꼽았다. 청년 시절 누구보다 채우기에 열중했고, 말년에는 자기를 완전히 비워놓은 ‘선비’ 같았다고 평가했다.
“옛날 교사 시절, 태풍이 휩쓸고 간 운동장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모아다가 태운 적이 있어요. 아직 푸르름이 남아 있는. 그 잎들을 태우면 아주 역겨워요. 아직 살아갈 수 있는 여력이 남아 그런 것 같아요. 그에 반해 가을이 되어 탈색되고 말라 떨어진 낙엽들을 태우면 냄새가 고숩고, 가볍게 훨훨 타요. 모두 비워냈기 때문이고, 사람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요.”
다가오는 선거로 인해 정치적 성향이나 세대, 지역 사이의 갈등이 점점 커지는 요즘이다. 서로가 상대의 생채기를 기대하며 날선 감정을 말과 글에 담아 던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는 성숙한 어른이라면 그럴 이유가 없다고 단언한다.
“산 정상에 올라가면 사방팔방이 열려 동서남북이 다 보여요. 산꼭대기에 올라간 사람이 왜 동쪽 사람, 서쪽 사람, 남쪽 사람, 북쪽 사람에게 욕지거리를 내뱉나요. 다 동지고 친구죠. 인생의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죽일 사람도 살릴 사람도 없어요. 성인들처럼 훌륭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해요.”
BTS와 이생망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도 고민이다. 앞길이 창창한 청년들은 가야 할 길이 멀어 고민이지만, 중년이 넘으면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이 급해진다. 나태주 시인은 청년과 중년 혹은 노년은 접근이 달라야 한다고 조언한다.
“청년들은 미래를 위해 10년짜리 계획이 필요하지만, 중년은 5년 계획을 세우고, 그 다음 5년을 준비하는 방식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청년은 차근차근 꿈을 이뤄나갈 수 있도록 충분한 기간을 갖고 준비해야 하고, 중년은 꼭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요.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방식도 달라져요. 젊은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잘하는 일만 하려다가는 더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상처를 입어요. 좋아하는 일은 노력하면 잘할 수 있지만 잘하는 일이 좋아지긴 어렵죠. 길게 보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해야 해요. 그래야 중도에 포기하거나 지치지 않고 성공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반대예요. 잘하는 일을 선택해야 남은 인생 동안 성공을 맛볼 수 있을 테니까요.”
늘 말과 글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는 그는 요즘 말에도 관심이 많다. 신조어와 노래 가사 등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BTS의 노랫말을 모티브로 한 노래산문집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야기 나누는 동안 요즘 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젊은 엄마들이 쓰는 ‘육퇴’(육아퇴근)가 그랬고, ‘독박육아’나 ‘라떼’(꼰대를 상징하는 말)가 그랬다. 그는 ‘이생망’을 지목했다. ‘이번 생은 망했으니 돌이킬 수 없다’는 뜻으로, 젊은이들이 자조적으로 하는 줄임말이다.
“요즘 말 중에 가장 마음 아픈 말이에요. 절망적이죠. 왜 망했다고 생각해요? 이번 인생이 망했으면 다음 인생도 망한 인생이 돼요. 좀 부족해도 모든 사람의 인생은 아름답고, 포기할 수 없어요. 모두 성과에 급급하니 나오는 말이에요. 사회적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써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청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줘요.”
그는 젊은 세대에 대한 당부를 이어갔다. 많은 장소에서 만난 힘들고 지친 청년들이 잊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청년들에게는 너무 큰 꿈에 매이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커진 꿈을 원해요. 마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악마와 계약을 맺듯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바치려고 하죠. 하지만 집채만 한 큰 것을 바라다가 안 되면 부숴버리고 싶고, 포기하고 싶고, 주저앉고 싶어져요. 그래서 이룰 수 있는 꿈을 꾸고, 그것을 성취하는 아름다움을 느껴보길 권하고 싶어요.”
‘지역 문화유산 순례기’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다양한 지역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지역N문화는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역문화원이 함께 발굴한 다양한 지역 이야기를 서비스하는 지역문화포털입니다. 기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역N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3세에 이미 ‘천자문’을 떼고 6세부터 본때 있는 글을 썼다. 딱히 스승이 없는 채로 독학을 해 유학의 최고봉으로 부상했다. 평지돌출한 인걸이다. 뉘신가. 이른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 조선 말기 유학자들이 개화에 반대하면서 내세운 사상)으로 당대의 격변에 대응한 이론가이자 실천가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다. 산 많은 양평군에서도 외진 서종면 노문리에 그의 생가가 있다.
요즘 사람들은 외진 곳일수록 반색한다. 산수경관이 살아 있어서다. 화서의 생가 마을 일대에도 중구난방으로 들어앉은 전원주택이 흔해 어수선하다. 그러나 시야에서 집들을 거둬내고 풍경을 바라보면 상황이 다르다. 높거나 낮은 산들은 조율한 듯 조화롭고, 산 사이론 벽계천이 흘러 오롯이 수려하다. 산자수명을 본연으로 지닌 곳이다. 낮엔 초목이 초록을 토하고 밤하늘엔 별들이 모여 소곤거린다. 박순, 김창흠, 남언경 등 조선 중후기 거유들이 이곳에서 살았던 이유를 알 만하다. 자연 풍경에 관한 관조를 최고의 공부이자 최상의 낙으로 삼은 게 선비들이지 않던가. 화서가 영위한 웅장한 삶의 원천적 비결은 이곳 산수를 젖으로 삼아 성장한 데에 있을지도 모른다.
생가를 볼까? 물소리 들려올 듯 벽계천 가까이에 있는 남향집이다. 집의 전체적인 모습은 좌우로 긴 ‘ㅁ’자를 닮았다. 대문을 통해 들어서자 공간을 확연하게 양분한 담장이 보인다. 담장 왼편에 안채가, 오른편에 사랑채가 있다. 담장에 난 중문을 통해 안채와 사랑채를 오갈 수 있다. 흔히 앞쪽에 사랑채를, 뒤쪽에 안채를 두지만, 이 덩실한 고택은 특이하게도 안채와 사랑채를 병렬로 배치했다. 전형에서 벗어난 구성이다. 야산 자락 경사지를 깎아 확보한 대지의 면적이 협소해 사랑채를 앞쪽으로 끌어내기 어려웠던 것 같다. 이렇게 보면 범례보다 합리와 실용성을 중시한 건축이다. 사랑채엔 방이 유난히 많다. 묵어가는 이들이 많았던 걸 알 만한데 ‘청화정사’(靑華精舍)라 쓴 현판이 걸린 이 집에서 화서의 강론이 펼쳐지기도 했다. 공부가 많아 유학의 산정에 올랐으니 흠모하여 따르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강론이 다반사였으리라.
화서는 소가 닭 보듯 벼슬에 별 관심이 없었다. 거의 한평생 이곳 향촌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 화서에게 자연과 사교하는 일은 일상의 루틴이었다. 퇴계가 ‘도산구곡’을, 우암이 ‘화양구곡’을 경영하며 만족을 구가했듯이, 화서 역시 이곳의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겼다. ‘노산8경’이 바로 화서가 애호한 경승이다. 풍경에 시를 헌정하고 이름을 부여해 자연을 찬탄했다. 그렇다면 화서는 은자로 살았나? 세사엔 식상해 차라리 눈을 감았나? 정반대다. 그의 DNA에 초야의 생리가 박혀 있었겠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에 오감의 플러그를 빼놓고 살 성격은 아니었다. 고종 임금에 따르면 화서는 ‘밝고 슬기로우며, 강직하고 과감하여 뭇 사람을 초월한 인물’이다. 비록 산림에 묻혀 자족했지만 시국과 정세에 관한 지론이 깊어 주창과 직언도 많았다. 모름지기 사대부의 말년이란 산수간으로 물러나 세상일 따위는 흘러가는 뜬구름에 맡기는 게 상책이라고 보는 유가의 전통도 있었지만, 화서의 계보는 다른 쪽에 속해 있었다. 현실참여형 지식인의 본이었다.
산골에 칩거한 재야 지식인이더라도 학식과 덕망이 높으면 바람에 실린 송홧가루가 천리만리를 날아가듯, 결국은 그 이름이 멀리까지 알려진다. 제자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면서 튼튼한 세력을 형성하게 마련이다. 세력으로 힘을 쓴다. 이렇게 되면 조정이 그를 부른다. 화서 역시 임금의 부름을 자주 받았다. 그러나 화서는 벼슬에 초연했다. 별별 임명장이 수시로 내려왔지만 곧바로 사직했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 때는 동부승지에 임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에 화서는 75세 노구를 이끌고 상경, 조정에 사직서와 함께 상소문을 제출했다. 상소문의 요점은 이렇다. 서양과 화친하지 말고 적극 싸우라는 것. 서양과 손잡는 건 짐승의 삶을 자청하는 꼴이라는 것. 백성을 수탈하지 않으면 백성이 스스로 고무돼 적을 몰아낸다는 것. 간명하고도 격렬한 상소문이었다. ‘위정척사’의 필요성과 실천적 대안을 역설한 글이었다. 매천 황현은 이 상소문을 ‘100년 이래 가장 유명한 상소문’이라 평가했다지.
당대의 격변과 풍랑을 잠재우는 길은 오직 나라의 문을 닫고 저항하는 데에 있다는 게 화서의 솔루션이었다.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 조짐을 통찰하는 한편, 일본의 조선 침탈을 예언했던 그의 광활한 현실 인식은 이른바 ‘화서학파’의 학통으로 전수돼 항일 독립운동의 밑불로 타올랐다. 화서의 사상적 상속자인 최익현, 유인석, 양헌수 등이 한말 국권사수의 전위에 서지 않았던가. 박은식과 김구도 화서의 계보에 든다. 그동안 화서는 반근대적인 골수 보수주의자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외세의 불량한 본질을 간파하고 국권의 자주성 강화를 역설했다. 이런 주장에 박힌 줏대와 혜안을 외면하는 건 불공정하다. 한쪽 날개만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를 봤다는 허풍처럼 초라하다.
용문사 명물, 1000년을 산 은행나무
이제 발길은 용문사에 닿는다. 용문면 용문산 아래에 있는 천년 고찰이다. 화서 생가가 양평의 정신적 유적이라면 용문사는 불교 문화유산의 대표다. 일주문을 지나 냇가로 난 소로를 따라 30분쯤 오르면 용문사 경내가 환히 드러난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지장전, 관음전, 삼성각, 종각 등이 펼쳐진 품새의 위용으로 보면 큰 절이다. 유서도 깊다. 신라 신덕왕 재위 때인 913년에 창건됐다. 일설에 따르면 원효가 초창하고 도선이 중창했다. 내력이야 어쨌든 첫 산문은 초막이나 토굴로 시작됐을 법하다. 그러던 게 천년 세월을 거치면서 대찰의 외양을 갖추어 번듯하다. 용문사에서 득도한 이도 한둘에 그치지 않을 텐데, 이를테면 고려 말의 선승 정지국사가 이곳에서 정진했다. 그는 중국 연경으로 건너가 만행을 하기도 했다. 이미 중국에 들어가 있던 무학대사와 나옹화상을 만나 교유도 했고. 이후 무학과 나옹이 명성을 얻은 반면 정지국사는 자취를 감추고 수도하길 거듭하다 72세에 홀연히 입적했다. 용문사엔 정지국사를 기리는 부도와 비가 있다. 빼어난 조각 기법으로 아름다운 금동관음보살좌상도 이 절의 성보(聖寶)다.
용문사에서 가장 유명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은행나무 노거수다. 수령 1000년 이상으로 국내 은행나무 중 최고령이다. 나무의 건강을 위해 가지치기를 대대적으로 해 현재 높이는 40m 정도지만, 이전엔 60여 m에 달해 유실수로서는 동양권 최대 거목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한 알의 씨앗에서 출발한 나무가 천년을 살다니. 단지 물과 햇빛을 취하는 광합성으로 기적적인 생육을 하다니. 그 도도한 생명력에 인간은 그저 압도될 수밖에 없다. 뭐랄까, 바위라거나 강물이라거나 거목이라거나, 묵연히 유장한 것들은 길을 일러주는 선생에 가깝다. 인간을 감싸주는 고요한 포용력으로 보면 부처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겠지, 오늘도 은행나무 아래 사람들이 모인다. 저 노거수를 보고 무너진 희망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돌아간 이가 한둘이랴.
최영식 양평문화원 원장
“분원(分院)까지 네 곳 만들어”
경기도 양평군은 자연경관이 생동하는 곳이다. 특히 강 풍경이 수려하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하는 두물머리에 몰리는 인파를 보라. 사시사철 쉴 만한 물가다. ‘굴뚝 없는 청정지구’ 양평으로 아예 이주한 이들도 많다. 그래 인구가 늘어났다. 곳곳이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묶여 문화적 성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은 아쉽다. 가령 지하에 묻힌 옛 유물을 발굴하기가 어렵다. 최영식 양평문화원 원장의 얘기는 이렇다.
“전통문화의 전승엔 다소 취약점이 있다. 반면 현대 문화가 확장돼 지역민들의 문화 향유 욕구를 채워준다. 이는 현대에 이르러 도드라진 인구 증가를 배경으로 한 긍정적인 현상이다. 양평문화원은 이런 지역적 특성을 토대로 다양한 문화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근래에 있었던 문화원 사업 가운데 큰 성과를 거둔 한 가지를 소개한다면?
“하나만 꼽기는 어렵지만 무엇보다 ‘추억의 영화 상영’으로 주민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지난 6년간 300여 편의 영화를 상영했는데, 무려 1만여 명의 주민이 영화를 감상했다. 우리 문화원은 모든 문화 혜택이 주민들에게 고루 돌아가야 한다는 걸 지향점으로 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영화 상영은 매우 주효한 프로그램이다.”
2024년에 펼칠 새 사업을 소개해달라.
“지방문화원은 지자체의 예산 지원을 받아 사업을 한다. 그런데 지자체들이 대부분 2024년엔 긴축 예산을 편성하고 있으며, 양평군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양평문화원 예산이 대폭 삭감됐다. 신년에 새 사업을 전개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한 셈이다. 기존 프로그램들을 점검하며 유지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이는 안타까운 대목이다. 열정은 많지만 예산 문제로 늘 고민하는 게 지방문화원의 현실이다. 양평문화원은 학예사 같은 인적 자원을 갖추고 참신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하지만 예산이 부족해 벽에 부닥치는 일이 잦다.”
주민의 문화원 프로그램 참여도는 어떤가?
“양평문화원엔 현재 600여 명의 회원이 있다. 인구 대비 타 지방 문화원보다 많은 인원이다. 관내 4개 지역에 분원(分院)도 설립했다. 이는 사례가 드문 방식이라 판단한다. 문화원에 조경을 해 쾌적한 환경도 갖추었고.”
양평 하면 용문사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양평을 불교 문화 융성지로 봐도 될까?
“그렇다. 천년 고찰 용문사 외에 상원사나 사나사 등 유서 깊은 고찰이 더 있다. 용문사에서 유명한 건 1000여 년의 수령을 가진 은행나무다. 양평문화원은 매년 10월, 이 나무의 장생과 군민의 안녕을 비는 ‘영목제’를 거행한다.”
양평엔 여느 군에 드문 군립미술관이 있어 돋보인다.
“양평엔 650여 명의 문화예술인들이 거주한다. 이런 배경으로 군립미술관이 설립됐다. 문화원 원사(院舍)에도 회화와 지역 유물을 볼 수 있는 상설 전시관이 있다.”
문화원 현관엔 직접 발간한 책들이 진열돼 있다. 주민 누구나 무료로 가져갈 수 있는 책이다. 진취적인 서비스 기법이다.
▪그냥 밥 먹자는 말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양희경·달
집밥을 중요하게 여기며 ‘부엌놀이’를 즐기는 배우 양희경이 에세이를 펴냈다. 책은 총 4부로 이루어졌으며, 양희경의 가족·요리·연극 이야기 등이 담겼다.
▪나는 시니어 작가로 새 인생을 산다 나예심·미다스북스
청소노동자이자 마지막베이비붐 세대인 저자는 60세에 시니어 작가라는 제2의 직업을 하나 더 갖게 됐다. 책에는 자신의 인생과 책 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순례 박범신·파람북
박범신 작가가 등단 50주년을 맞아 산문집을 냈다. 1·2장은 히말라야와 카일라스 순례기, 3·4장은 산티아고 순례기와 폐암일기다. 작가는 인생 자체가 순례라고 말한다.
▪낭만 고고학 김선·홍림
유명 유적지 발굴에 참여해온 24년 차 고고학자인 저자가 그간 경험하고 사유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은 책이다.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가득하며, 연구자로서의 고뇌도 담겼다.
●Exhibition
◇민속이란 삶이다
일정 7월 5일까지 장소 국립민속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은 민속의 가치와 의미를 폭넓게 살펴보는 특별전 ‘민속이란 삶이다’를 7월 5일까지 연다. 전시는 민속과 관련된 유물과 아카이브 자료 600여 점을 통해 민속이 근현대에 어떻게 학문으로 자리 잡고 영역을 확장해나갔는지 돌아본다.
전시에서는 우리나라 최초 아키비스트(기록물 관리 전문가)이자 민속학자 송석하(1904~1948)가 정리한 일제강점기 민속 현지조사 원본 사진카드 486장이 공개됐다. 약 90년 전 북청사자놀음과 봉산탈춤 등을 조사하고 카드별로 명칭과 지역, 날짜를 기록했다. 전시실에 설치된 키오스크를 통해 관람할 수 있다. 추억의 물건들도 민속의 이름으로 등장해 눈길을 끈다.
1970~80년대 혹은 1980~90년대 삶의 모습이 ‘뉴트로’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를 입증하듯 그 시기의 민속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됐다. 필름카메라,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워크맨’, 286 컴퓨터, 3.5인치 디스켓 등이다. 온라인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민속 물품도 전시되어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을 통해 한국을 모자의 나라로 각인시킨 갓, 미국 아마존에서 대박 신화를 쓴 영주 호미,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등장해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은 달고나 등을 만날 수 있다.
◇조미수교와 태극기
일정 7월 7일까지 장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조미수교와 태극기’ 특별전을 통해 1882년 작성된 최초의 태극기 도안을 공개했다. 최초의 태극기 도안은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2017년 미국 의회도서관 슈펠트 문서에서 찾은 것으로, ‘슈펠트 태극기’로 불린다. 원본은 도서관에 있고, 이 교수가 촬영한 사진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전시에서는 1882년과 1899년에 미국 해군부가 발간한 책 ‘해양국가의 깃발’과 그 안에 실린 태극기 도안도 공개됐다. 특히 1882년 최초의 태극기 도안과 그해 나온 ‘해양국가의 깃발’ 속 태극기가 매우 흡사해 화제를 모았다.
●Book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이어령·열림원)
지난 2월 별세한 고(故)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가장 사적인 고백이 담긴 산문집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가 새롭게 출간됐다. 2010년 초판 출간 이후 12년 만이다. 개정판에는 개신교 신앙 고백에 관한 인터뷰를 담은 ‘나는 피조물이었다’가 빠졌다. 1~4부 모두 이어령의 산문으로만 채워졌다. ‘나는 피조물이었다’는 ‘이어령 대화록’ 시리즈에 담겨 출간될 예정이다.
책에는 이어령 문학의 ‘우물물’이 되어준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메멘토 모리’의 배경이 되는 여섯 살 소년 이어령의 고향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1부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에서 이어령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책’, ‘나들이’, ‘뒤주’, ‘금계랍’, ‘귤’, ‘바다’라는 여섯 가지 키워드로 풀어낸다. 2부 ‘이마를 짚는 손’, 3부 ‘겨울에 잃어버린 것들’에서는 이어령의 사색적이고 섬세한 필치를 느낄 수 있다. 특히 4부 ‘나의 문학적 자서전’에서는 이어령의 문학이 어떠한 과정으로 완성돼왔는지 엿볼 수 있다. 이어령은 어머니부터 외갓집, 고향, 그리고 문학론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감각조차 남아 있지 않은” “묵은 글들” 속 또렷하게 남아 있는 향수를 전한다. 특히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진심이 절절하게 느껴지며 공감을 이끈다.
◇생존자들(캐서린 길디너·라이프앤페이지)
임상심리학자인 저자가 25년간 심리치료를 하며 만난 내담자들 가운데 특별한 네 사람을 소개한다. 어린 시절의 비극적인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저자는 대화를 나누며 함께 성장하고 치유받는데, 그 과정이 감동을 준다.
◇민낯들(오찬호·북트리거)
우리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열두 가지 사건을 담은 책이다. 故 변희수 하사, 故 설리(본명 최진리) 등의 문제적 죽음을 응시하고, 코로나19 팬데믹과 n번방 사건, 세월호 참사, 낙태죄 폐지 등을 되짚으며 한국 사회의 민낯을 폭로한다.
◇독일은 왜 잘하는가(존 캠프너·열린책들)
자존심 센 영국인이 독일을 극찬하는 책이다. 저자는 뼈아픈 과거에서 배운 교훈, 품위 있는 민주주의와 공동체 의식, 문화를 존중하고 시민의 안전한 생활을 책임지려는 리더십 등 전후 75년간 현대 독일의 놀라운 변화를 분석한다.
●Stage
◇웃는 남자
일정 6월 10일 ~ 8월 22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연출 프랭크 와일드혼
출연 박효신, 박은태, 박강현, 민영기, 양준모, 신영숙, 김소향, 이수빈, 김승대, 최성원 등
뮤지컬 ‘웃는 남자’는 EMK뮤지컬컴퍼니가 제작한 두 번째 창작 뮤지컬로 세계적인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2018년 월드프리미어와 2020년 재연에 이르기까지, 한국 뮤지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수작으로 호평받았다.
‘웃는 남자’는 신분 차별이 극심했던 17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끔찍한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순수한 인물인 그윈플렌의 여정을 통해 사회 정의와 인간성이 무너진 세태를 비판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의 가치에 대해 깊이 있게 조명한다.
지울 수 없는 웃는 얼굴을 가진 채 유랑극단에서 광대 노릇을 하는 관능적인 젊은 청년 그윈플렌 역에는 배우 박효신, 박은태, 박강현이 출연한다. 박효신은 2018년 이후 4년 만의 귀환이다. 박은태는 뉴 캐스트로 이름을 올렸고, 박강현은 2018년 초연, 2020년 재연에 이어 세 번째 시즌까지 함께하게 됐다. 또한 우르수스 역에는 민영기와 양준모, 조시아나 역에는 신영숙과 김소향이 각각 캐스팅돼 기대감을 더한다.
◇번지점프를 하다
일정 6월 22일 ~ 8월 21일
장소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
연출 심설인
출연 이창용, 조성윤, 레오, 최연우, 이정화, 고은영, 정재환, 렌 등
‘번지점프를 하다’는 이병헌·이은주 주연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이다. 2012년 초연돼 2018년까지 세 시즌을 거쳤다. 아름다운 스토리와 서정적인 음악으로 관객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극은 국어 교사 서인우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의 시점을 오간다. 국문과 대학생 인우는 당돌한 미대생 태희와 운명적인 사랑을 하지만 안타까운 이별을 맞이한다. 오랜 세월 마음속에 태희를 간직하고 살던 인우 앞에 그녀와 같은 버릇, 같은 행동을 하는 남학생 현빈이 나타나면서 인우는 혼란에 빠진다.
◇마타하리
일정 5월 28일 ~ 8월 15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권은아
출연 옥주현, 솔라, 김성식, 이홍기, 이창섭, 윤소호, 최민철, 김바울 등
뮤지컬 ‘마타하리’가 5년 만에 돌아온다. ‘마타하리’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이중 스파이 혐의로 프랑스 당국에 체포돼 총살당한 아름다운 무희 마타하리(본명 마그레타 G. 젤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이다. 2016년 초연과 2017년 재연에 참여한 옥주현이 마타하리 역으로 다시 관객과 만난다. 이와 함께 마마무 솔라가 뮤지컬 무대에 새로운 도전장을 던질 예정이다. 또한 마타하리의 유일한 사랑인 아르망 역은 김성식, 이홍기, 이창섭, 윤소호가 연기한다.
※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 이어령·열림원
지난 2월 별세한 고(故)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산문집이 다시 출판됐다. 이어령의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메멘토 모리’의 배경이 되는 여섯 살 소년의 고향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생존자들 캐서린 길디너·라이프앤페이지
임상심리학자인 저자가 25년간 만난 내담자들 가운데 특별한 네 사람을 소개한다. 어린 시절의 비극적인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저자는 대화를 나누며 함께 성장하고 치유받는다.
민낯들 오찬호·북트리거
우리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열두 가지 사건을 담은 책이다. 故 변희수 하사, 故 설리(본명 최진리) 등의 죽음과, 코로나19 팬데믹과 n번방 사건, 세월호 참사, 낙태죄 폐지 등을 되짚어본다.
독일은 왜 잘하는가 존 캠프너·열린책들
영국인인 저자는 뼈아픈 과거에서 배운 교훈, 품위 있는 민주주의와 공동체 의식, 문화를 존중하고 시민의 안전한 생활을 책임지려는 리더십 등 전후 75년간 현대 독일의 놀라운 변화를 분석한다.
영화배우 강수연과 시인 김지하가 세상을 떠났다. 잇단 문화계의 비보에 대중은 큰 슬픔에 빠졌다.
강수연은 지난 7일 향년 55세로 별세했다. 지난 5일 자택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왔지만, 끝내 의식을 찾지 못했다.
강수연의 영결식은 오는 11일 오전 10시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된다. 영화진흥위원회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생중계될 예정이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현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이 장례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임권택·배창호·임상수·정지영 감독, 안성기·김지미·박정자·손숙·박중훈 배우 등이 장례위원회 고문을 맡았다.
4세 때 아역 배우로 활동을 시작한 강수연은 영화 ‘고래 사냥 2’(1985),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 등에 출연하며 청춘스타로 떠올랐다.
특히 1987년에는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로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월드스타 타이틀을 최초로 거머쥐었다. 삭발을 하며 연기혼을 보여준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로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도 최우수여자배우상을 수상했다.
1990년대에는 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9), ‘경마장 가는 길’(1991), ‘그대 안의 블루’(1992),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등 숱한 화제작을 내놓았다. 대종상영화제,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2001년에는 SBS 드라마 ‘여인천하’의 주인공 정난정 역할로 오랜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했다. 이 작품은 최고 시청률 35.4%를 기록하며 공전의 인기를 누렸고, 그해 강수연은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고인은 ‘써클’(2003), ‘한반도’(2006), ‘주리’(2013) 등 영화에 간간이 출연했지만 2010년대 이후로는 작품 활동이 거의 없었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는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최근에는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SF 영화 ‘정이’(가제)에 주연으로 캐스팅돼 단편 ‘주리’(2013) 이후 9년 만에 스크린 복귀를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정이’는 고인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의 작품을 남긴 김지하 시인은 지난 8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토지문화재단에 따르면 시인은 최근 1년여 동안 투병생활을 한 끝에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타계했다. 빈소는 연세대 원주 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유족으로는 장남 김원보 씨(작가)와 차남 세희 씨(토지문화재단 이사장 겸 토지문학관 관장)가 있다.
1941년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했다. 1969년 시 ‘황톳길’로 등단한 후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민족문학 진영의 대표 문인으로 꼽혔다. 이후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1980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1973년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했으며, 1975년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 로터스상과 1981년 국제시인회 위대한 시인상과 브루노 크라이스키상을 받았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2년에는 ‘타는 목마름으로’ 시집을 발표하며 저항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외에도 고인의 대표 저서로 ‘생명’, ‘애린’, ‘황토’, ‘대설(大設)’ 등이 있다. 2018년 시집 ‘흰 그늘’ 산문집 ‘우주생명학’을 마지막으로 절필을 선언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9일 페이스북을 통해 “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은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우리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고 시인을 추모했다.
서울에서 레코드숍을 운영하는 그녀는 작은 체구지만 단단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푸른 자연 속을 뛰놀면서 자란 그녀는 어릴 때부터 간직한 꿈이 있다. 바로 ‘지구별 여행자’가 되는 것. 그녀는 오늘도 레코드숍에서 세계 각국의 음악들을 들으며 음악의 본고장을 여행하는 꿈을 꾼다.
이는 어떤 영화의 스토리가 아닌, 도서 ‘여행을 수놓다’의 저자 신명숙 작가(68)의 이야기다. 신 작가는 ‘늦었다 싶을 때가 이르다’는 생각으로 60대의 나이에도 여행과 모험을 즐기고 있다. ‘오늘이 나의 가장 젊은 날’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신명숙 작가에게 받은 에너지를 시니어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신명숙 작가는 2007년 50대에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해 67개국을 다녀왔지만, 아직도 갈 곳이 많이 남았고 힘닿는 데까지 여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 누군가는 편하게 크루즈, 패키지 여행을 즐겨야 할 나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왜?’라고 반문한다.
신 작가가 문학계에 이름을 올린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녀는 2016년 미래에셋 수필부문 공모에 당선됐고, 2018년 계간지 ‘주변인과 문학’ 수필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2018년 나온 여행 에세이 ‘지구본 위를 거닐다’, 2020년 나온 시집 ‘웅이와 라넌큘러스’가 있다. ‘여행을 수놓다’는 지난 8월 출간됐다. 담백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레코드숍, 그리고 여행
섬세한 글을 쓴 그녀가 여행 작가 이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했다. 실제 만난 신명숙 작가는 예상보다 더 호탕하고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역시 평범한 삶은 아니었다. 신 작가는 무려 23년간이나 레코드숍을 운영했고, 그러면서 늘 여행 준비를 해왔다고 밝혔다.
“생각해보면 분명한 것은 레코드숍을 하면서 늘 새로운 세계를 꿈꿀 수 있었고, 새로운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의 본고장에 가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꾼 것 같아요. 힘들기도 했죠. 하루 종일 일하다 보면 스트레스도 많이 쌓이고, 서울에서 분당을 왔다 갔다 하느라 매일 밤 12시에 집에 들어오곤 했어요.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고 호황도 겪었지만, MP3가 나오고는 사양 산업이 되어 결국 가게를 정리했지요.”
2004년 레코드숍 문을 닫았다. 매일 바쁘게 일하던 사람이었기에 쉼표는 어색했다. 일상이 무료했고, 우울증 비슷한 것도 겪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가 되는 법. 신 작가는 기분 전환을 위해 성남문학원에 다녔고, 여행자의 삶도 시작됐다. 오랫동안 품었던 꿈에 가까워졌다.
첫 여행은 딸과 함께한 중국 패키지 여행이었다. 이후 몇 차례 패키지 여행을 경험한 뒤 신 작가는 여행의 참맛을 맛보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이에 2007년 패키지가 아닌 배낭여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혼자 타국을 여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배낭여행 동아리에 가입했고, 사람들과 함께 인도 여행을 떠났다. 책 소개에도 적혀 있듯이, 이 인도 여행은 신명숙 작가가 여행자의 삶을 사는 터닝 포인트가 됐다.
“두 명씩 현지 가정에서 숙박 체험을 했어요. 저는 한 총각과 아잔타 석굴 뒤편에 있는 집에 가게 됐어요. 거기가 정말로 더러워요. 화장실 하나 없는 곳이더라고요. 제가 간 집은 애들이 되게 많았어요. 그곳 사람들 주식이 짜파티라고 부침개처럼 생긴 것에 달밧이라는 것을 앙금처럼 부어서 먹거든요. 그런데 세상에 그거를 한 일곱 식구가 7~8장을 놓고 먹는 거예요. 그 사람들한테 모자란 양인데, 거기서 또 한 장을 제게 주는 거예요. 사람이 이렇게도 사는구나, 충격을 많이 받았죠. 그리고 18세 아기 엄마가 있었는데, 내가 아이섀도 바르는 걸 그 큰 눈으로 쳐다보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쓰던 것을 줬더니 좋아하더라고요. 그때 저를 보던 눈빛이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사람들이 인도에 갔다 오면 인생관이 바뀐다고 하던데 저도 그랬어요. 한국으로 돌아와서 애들이 반찬을 남기면 ‘너네들은 인도 한 번씩 갔다 와야 해’라고 말했어요.”
이후 2008년부터는 남편과 함께 여행했다. 여행 동반자가 된 부부는 서로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여전히 금슬 좋은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은 과거 펜팔로 만난 사이라고. 신명숙 작가는 예전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했고, 그 기본에 연애편지와 일기가 있는 것 같다고 웃으며 말한다. 일기는 지금도 매일 쓴다고.
“제가 남편한테 같이 여행 다니자고 꼬셨죠.(웃음) 여행하면서 좋은 것들을 많이 보고 오는데 남편과 공감이 안 되는 거예요. 얼마나 서글퍼요. 그래서 제가 나이 들어 공감하면서 얘기할 수 있게 같이 여행 가자고 했죠. 2008년에 중국 장자제에 갔는데, 남편이 반한 거예요. 2009년에는 북인도에 갔고, 그렇게 주기적으로 1년에 두 번은 여행을 갔어요. 지금은 제가 우리를 ‘2인조 시니어 여행단’이라고 불러요. 저는 바람잡이, 남편은 행동대장이에요. 처음에는 제가 다 리드했거든요. 지금은 역전되어 남편이 어디 가자고 예약도 다 하기 때문에 전 신경도 안 써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요.(웃음)”
발칸, 중동, 시베리아 여행을 수놓다
‘여행을 수놓다’는 2017~2018년의 여행기다. 신명숙 작가는 책에 나온 순서와 반대로 발칸, 중동, 시베리아 순으로 여행을 했다. 책에 실린 여행지는 러시아, 발칸 지역의 루마니아,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코소보,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중동 지역의 이스라엘, 요르단, 이집트, 그리고 그리스, 포르투갈이다.
책을 읽으면 신명숙 작가와 함께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가본 적 없는 곳이지만 설명을 읽다 보면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이는 신 작가가 태블릿 PC에 여행의 순간순간을 기록했기에 가능했다. 그 메모들이 쌓여서 여행기가 됐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책으로까지 나왔다. 신명숙 작가는 ‘여행을 수놓다’가 천편일률적인 여행책과는 다르기를 바랐다.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느낀 것까지 쓰자면 아마 책 몇 권은 되겠지만, 그런 책들은 시중에 이미 많죠. 저는 그것들을 전부 배제하고 진솔하게 긴장된 부분을 이겨낸 후 제 자신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부각하려고 했고, 의도한 부분을 함께 여행하는 분위기로 공유했으면 했습니다. 그리고 글을 쓰고 문학을 가까이하다 보니 말장난을 하기 싫었어요.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 아닌 산문식으로 썼고, 차별화하려고 했어요.”
신명숙 작가는 여행지 중에 “발칸 지역의 알바니아, 마케도니아가 좋았다”고 회고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계획을 바꿔서 다른 곳을 가게 될 때가 있는데, 두 국가가 그랬다. 사전지식 없이 갔지만 좋았고 인상에 남는다”고 이유를 덧붙였다.
특히 여행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책을 보면 신 작가도 여행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도움도 받았다. 그 수많은 인연 중에서 신 작가는 알바니아에서 ‘저주받은 산’으로 통하는 세스산을 같이 트레킹한 사람이 제일 생각난다고 말했다.
“스물네 살의 프랑스 아가씨인데, 처음에는 배낭 큰 거 메고 당당했거든요. 그런데 한산한 산장에 내리니까 기가 확 죽는 거예요. 혼자 무서우니 계속 우리한테 따라붙는 거죠. 그래서 트레킹을 같이 했는데, 그녀의 가방이 너무 크고 무거우니까 계속 가다 쉬고 가다 쉬고를 반복했죠. 겨울 산행은 빨리 올라가고 빨리 내려와야 위험하지 않아요. 그런데 놓고 갈 수도 없고, 정말 책에 표현한 대로 내버리고 싶더라고요. 그 아가씨 부모님이 의사예요. 우리나라 정서를 생각하면 돈이 많겠다 싶은데, 두 분이 공공기관 의사라서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그녀는 자립심을 키우고자 혼자 6개월 동안 여행을 하는 건데, 1달러에도 벌벌 떨고 그러더라고요. 제가 책에서 ‘깍쟁이’라고 표현했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배운 게 많아요.”
반대로 시베리아 여행은 예상보다 잔잔했다고 기억되는 듯하다. 시베리아 여행 후기는 횡단 열차 탑승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바이칼호를 보기 위해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72시간을 내리 기차 안에 있어야 한다. 때문에 책 내용 또한 기차 안과 밖의 풍경,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신명숙 작가는 기차처럼 달리고 싶었나 보다. 역시 에너지가 넘치는 신 작가다.
코로나19, 다시 열린 여행길
“1년에 두 번은 여행을 나가야 견딜 수 있었다”는 신명숙 작가.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막혀 답답했을 터. 그래도 남편과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캠핑을 즐기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단다. 또한 언젠가 다시 여행을 떠난다는 마음으로, 건강 유지를 위해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매일 등산을 포함한 운동을 1시간 이상 한 지도 30년이 됐다고 한다. 외국에서도 등산을 많이 해본 신 작가는 안나푸르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여행을 다녀온 67개국 중에서 가장 좋았던 나라를 묻자 어떻게 한 나라만 꼽을 수 있겠냐고 고심하더니 칠레라고 답한다. “칠레를 바람의 땅이라고 하는데, 호수가 정말 많다. 그런데 호수 빛이 다 다르고, 라마들이 능선에서 돌아다니는데 정말 아름답다.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제 해외여행길이 다시 열리고 있기에, 그녀는 다음 목적지로 중앙아시아를 생각하고 있다.
“내년에는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상반기에 안 되면 또 6개월을 기다려야겠죠. 중앙아시아, 그러니까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아제르바이잔 등을 가보고 싶어요. 아직 안 가보기도 했고요. 비행기로 5시간 내로 갈 수 있는 곳은 다 남겨뒀어요. 일부러 먼 곳만 갔죠. 중남미 쪽은 비행기만 20시간 넘게 걸려요. 하루라도 어릴 때 멀리 다녀온 거죠. 아, 유럽도 나중에 가도 될 것 같아서 일부러 남겨뒀어요. 노후에도 심심하면 여행을 가야 하잖아요. 지금까지 늘 해왔던 것처럼 건강 관리하고 여행을 가야죠.”
신명숙 작가는 여행 외에 글쟁이, 그리고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목표도 있다. 그것은 신 작가에게 ‘제2의 인생’ 희열을 느끼게 해준 손주들과 관련 있다. 손주들, 그러니까 두 딸의 자녀들은 각각 열 살, 일곱 살, 다섯 살이다. 신명숙 작가는 손주들이 태어날 때부터 기억에 남는 순간을 모두 기록해뒀다. 나중에 손주들에게 단 하나밖에 없는 책을 만들어서 선물해줄 계획이다. 과거 바쁘게 사느라 엄마로서는 부족했을 수도 있지만, 할머니로서는 다르고 싶은 마음이다.
“저는 손주들을 정말 사랑하고, 그애들을 잘 데리고 다녀요. 이번 여름에도 제가 자진해서 수영장, 해수욕장에 데리고 다녔어요. 요즘 애들은 정서적으로 시골 이런 것에 너무 고갈되어 있어요. 우리 애들도 호텔이나 가려고 하니까, 그거를 제가 대신 해주는 거죠. 내가 시골에서 자라서 심성도 악하지 않고 순수함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손주들에 대해 쓰고 있는 것도 나중에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 할머니의 흔적을 볼 수 있으니까요. 우리 애들이 안 하니까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고요. 그리고 두 딸에게 속죄하는 마음도 있어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내 빈자리를 매정하게 다그치는 것이 바르게 세우는 것이라 믿었고, 엄마의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곁에 없어 어릴 적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비가 온다’고 전화하면 ‘조금 더 기다렸다가 그래도 멈추지 않으면 뛰어서 가라’고 했던 말이 그렇게나 서운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지요. 그래도 그런 흔들리는 날들이 쌓여 지금에 이르렀음을 두 딸에게 고백하는 마음도 전하고 싶어요.”
신명숙 작가 인생의 좌우명은 ‘리드하는 삶을 살자’다. 누군가한테 끌려가거나,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내 삶은 내가 키를 잡고 살자는 생각이다. 평생 활기차게 진취적으로 살아온 신 작가는 늦은 나이에 꿈 또한 실현하고 있다. 그녀는 인생에서 늦은 것은 없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자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도 배낭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많은 시니어분들이 배낭여행을 못 떠나는 이유는 안정적인 현시점에서 탈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 거예요. 굳이 배낭 메고 힘들게 가야 여행이냐, 패키지로 얼마든지 편하게 갈 수 있는데…. 그거에 갇혀서 못 나가는 거예요. 내 주위 사람들만 봐도 나를 부러워하면서도 오히려 패키지만 열심히 찾아다니더라고요. 제가 만든 말이 있어요. ‘삼잘’이라고.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고라는 뜻이에요. 너무 ‘삼잘’에 연연하지 말고, 여행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많은 시니어분들이 내 책을 보고 도전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김주영, 그는 청송의 기적이다. 맹자 어머니는 맹자를 장터에 둘 수 없다며 결연히 거처를 옮겼지만, 주영의 어머니는 장터 한복판에 아들을 뒀다. 맹자 어머니는 맹자를 학교 부근에 묶어두었지만, 주영의 어머니는 아들이 학교를 가는 둥 마는 둥 온종일 장터를 맴돌아도 그냥 내버려뒀다. 그리하여 맹자는 당대에 가장 말 잘하는 사람이었지만 작가가 되지 못했고, 주영은 장터를 샅샅이 뒤진 덕에 대한민국 최고 작가 반열에 올랐다. 이쯤 되면 맹모삼천지교가 무색하다. 적어도 주영에겐. 그러기에 기적이라는 것이다. 장터와 길 위의 작가 김주영, 그는 지금도 돌아다니는 중이다.
청송의 기적, 보부상 문학을 낳다
“보이는 것은 머리 위 하늘과 사방의 산뿐이었죠. 마치 항아리 속에 갇혀서 세상을 보는 것 같았어요. 하루에 한두 번 완행버스가 다녔는데 버스 안의 사람들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는 거예요. 차창 밖으로 던져주는 사과 껍질을 받아먹으며 저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 사는 걸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하고 넋 놓고 바라보았지요. 그러다 장이 서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는 거죠. 왁자지껄 흥정에, 욕설에, 국밥에, 막걸리에…. 장날엔 학교는 뒷전이고 장터에 눌어붙어 있었지요. 제게는 장터가 학교였어요.”
그의 고향은 경상북도 청송의 첩첩산중 외딴 마을. 1939년생인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도 그런 가난이 없이 자랐다. 초등학교 6년 내내 도시락 한 번 못 싸 다녔을 뿐 아니라 교과서도 없이 잡기장 하나 들고, 그의 표현에 의하면 ‘그저 바퀴벌레처럼 왔다 갔다’ 했다. 푸른 소나무의 고장, 그래서 ‘청송’이지만 정작 그는 푸른 소나무를 그려본 적이 없다. 늘 흰 소나무를 그렸다. 왜냐하면 크레파스를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까. 사정사정해서 친구들한테 빌릴 수 있는 색은 오색 중에서 제일 안 쓰는 흰색이었으니까.
그는 지금도 옥수수, 감자는 먹지 않는다. 수제비, 칼국수도 질리고 물렸다. 그의 소설 ‘잘 가요, 엄마’에는 반죽부터 썰기까지 칼국수 만드는 과정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어머니가 칼국수 만드는 걸 하도 많이 봐서 그렇단다. 그가 시인이 되겠다고 하자 모친 왈 “지금까지 굶은 것으로도 한이 덜 찼냐?”였다니. 그래서 그랬을까,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나온 그는 시 빼고는 다 쓰는 작가다. 운문 말고 산문은 소설부터 동화까지 가리지 않고 쓴다.
감수성 예민한 산골 소년의 외로움과 소외감, 육체적 허기와 정서적 따돌림을 운명처럼 보듬으며 그를 키운 8할은 장터였다. 소년 주영은 작가로서의 토양이 되어준 장터 속으로 자연스럽게 걸어 들어갔고, 성년이 되어서는 팔도의 장터를 마당마냥 누볐다. 길 위에서 먹고, 길 위에서 자고, 길 위에서 글을 썼다. 그에게는 길을 가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이 동일한 일이며, 길 위의 삶이 그의 인생의 메타포가 되었다.
“결혼해서도 한 달에 집에 가는 날이 열흘이나 됐을까요? 습관이 돼서 일 없이 여관에서 잠을 잘 때도 있었지요. 하하.”
토속어 풍미 짙은 ‘객주’와 객주문학관
2013년, 34년 만에 대망의 10권으로 완간된 ‘객주’는 장돌뱅이들의 행로를 따라 저잣거리를 치열하게 답사하며 1878~1885년 조선 후기 보부상들의 애환과 시대상을 담은 소설이다.
그는 보부상 작가다. 보부상은 ‘보상’과 ‘부상’을 합친 말이다. 보상은 보자기나 걸망에 걸머지는 봇짐장수를, 부상은 등이나 지게에 지고 다니는 등짐장수를 가리킨다. 1979년 6월부터 5년간 총 1465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연재한 ‘객주’는 김주영이 대학 노트를 봇짐으로 걸머지고, 카메라를 등짐에 진 채 ‘팔고 다닌 물건’이다. ‘객주’를 쓰기 위해 보부상의 발자취를 따라 200개에 달하는 시골 장터를 누볐다. 글은 길에서 써서 길에서 송고했다. 분량을 줄이려고 펜촉을 뒤집어 최대한 작은 글씨로 썼다. 말 그대로 깨알 같은 크기로 대학 노트 한 쪽에 200자 원고지 35매를 빼곡이 채웠다.
“처음에는 장터를 묘사하는 중편소설 정도를 써보고 싶었는데 남쪽 땅끝에서 휴전선 턱밑까지 전국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다 보니 그만 대하소설이 되어버렸어요. 보부상에 대한 자료도 없고, 역사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어서 어디 가서 물어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지요. 조선 후기 상업사에 관한 논문만 100편 쯤 읽고 관련 서적도 200권 넘게 읽었지요.”
‘객주’의 작품 가치는 조선 천지의 토속어가 총망라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빛난다. 방방곡곡 장터와 산골을 누비며 옛말을 수집하고, 여기에 작가적 상상력과 고증이 버무려져 독특한 풍미의 소설이 탄생한 것이다. ‘객주’에는 중노미(음식점, 여관 따위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남자), 지청구(아랫사람의 잘못을 꾸짖는 말), 반거충이(무엇을 배우다가 중도에 그만두어 다 이루지 못한 사람), 매나니(무슨 일을 할 때 아무 도구도 가지지 아니하고 맨손뿐인 것), 복장거리(마음이 쓰리고 아프도록 걱정스럽거나 성가신 일), 새물내(빨래하여 이제 막 입은 옷에서 나는 냄새) 등 국어사전에도 미처 오르지 못한 토속어들이 활어처럼 튀어 오른다.
그가 주축이 되었던 보리회(대구 경북 출신의 문인 모임, 보리문둥이란 뜻)에서 함께 활동한 언론인이자 소설가 이상우 씨는 김 작가에 대해 “낭만적이고 낙천적인 성정을 가졌죠. 술도 엄청나게 좋아해서 마셨다 하면 같은 회원이었던 이문열, 김원일 등과 함께 2, 3일간 쉬지 않고 마셨어요. 기질이 그렇다 보니 일생을 걸고 끈덕지게 민속 언어를 발굴, 수집하고 다닐 수 있었을 겁니다. 걸어 다니는 민속 언어 사전이라고 할 만큼 탁월하고 독보적인 존재입니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2014년, 고향 청송에 그의 문학 세계를 오롯이 보여주는 3층 규모의 객주문학관이 개관했다. 전국의 50여 개 문학관 가운데 객주문학관은 알찬 전시실과 옹골진 자료를 갖춘 곳으로 주목받고 있다. 고향이 그에게, 그가 고향에게 가장 잘한 일이다. 객주문학관은 그에게 또 다른 장터다. 여느 문학관과 달리 작가가 관람객들을 직접 맞이하고, 함께 어울려 떠들썩하게 대화 마당을 펼친다. 어릴 때는 벗어나고만 싶었던 고향이 이제는 그의 가장 친근한 벗이 된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것이 제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인 것 같아요. 저의 작가적 영혼을 낳고 길러준 곳이니까요.” 문학관과 함께 그의 생가 및 주막, 전통시장 등을 복원하여 보부상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테마 마을도 조성되어 있다.
어머니, 아 어머니!
김주영의 작품은 ‘객주’를 비롯해 ‘활빈도’, ‘천둥소리’,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화척’, ‘홍어’, ‘멸치’, ‘빈집’, ‘아라리 난장’ 등 나열하기도 벅찰 정도다. 1971년 ‘휴면기’로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이래 200여 권에 달하는 작품으로 유주현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그의 작가적 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가난, 외톨이, 떠돌이, 약자 의식 등을 들 수 있겠으나, 가장 밑바닥에는 어머니가 원형처럼 자리하고 있다. 김주영 문학의 원천이라 할.
“참 고생 많이 하셨지요. 아니 고생하셨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혹독하고 가혹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당시에는 흠이라 할 재혼까지 하셨지만 여전히 끼니를 잇기조차 어려웠지요. 96세에 돌아가신 후 호적 정리를 하다 보니 두 번의 혼인 모두 신고가 되어 있지 않더라고요. 가족 내의 위치조차 없었던 분이니 그 한평생의 신산함이 어떠셨겠어요? 글도 읽지 못하고 숫자도 구분 못 하신 분이었어요. 저는 70 평생 어머니를 봐왔지만 정작 어머니를 몰랐습니다.”
그의 소설에는 유독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앞서 언급한 ‘잘 가요, 엄마’는 불효한 자신의 참회록이라고. 한 달이면 쓸 수 있는 분량임에도 일 년 반이나 걸려 겨우 끝낼 수 있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어머니를 소환해내는 것이 그만큼 힘들었다는 의미일 터. 그의 가장 큰 불효는 너무 늦게 어머니를 발견했다는 것이니, 어머니를 등장시킨 소설은 어느새 가족소설로, 가족소설은 성장소설로 잇대어졌다.
“소설이나 시를 쓰는 행위는 거짓이 개입되지 않은 반성문 같은 거예요. 말하자면 자기 인생의 변형이 소설인 거죠. 특히 성장소설은 비록 좁고 제한적인 경험이지만 인생에서 가장 순수했던 유년 시절의 내밀한 시선으로 더듬어나간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감동을 주는 거지요. 서로 미워하는 아버지와 외삼촌 사이에서 집 나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성장하는 소년의 이야기 ‘멸치’는 저의 대표적 성장소설입니다.”
소설은 작가의 감수성을 타고 흐른다. 그는 삶에서 감수성을 잃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고 말한다. “나이 들면 몸도 뻣뻣해지고, 가슴도 뻣뻣해지고, 감수성도 무뎌지죠. 홍시처럼 말랑하던 살결이 딱딱하게 굳는 것과 같고, 기름 떨어진 차와 같아요. 차에 기름이 없으면 아무 데도 못 가잖아요. 감수성을 유지하려면 연애를 해야 해요. 반드시 이성과의 만남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나무 한 그루를 봐도 애정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사랑이 뭡니까. 애틋하고 뿌듯한 감정 아닙니까. 연애를 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해 그 감정을 품는 것이니, 많이 보고 많이 느낄 수 있어야 글이 나옵니다.”
그래서일까. 객주문학관에는 소설 도서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평생 그가 모은 소설이 빼곡이 서가를 메우며 방문객들의 메마른 감수성을 적셔주고, 동료 문인들의 마르지 않는 감수성의 원천이 되고 있다.
“저는 단편소설을 한 편 써도 반드시 배경이 되는 곳을 직접 가봅니다. 1987년에 나온 ‘쇠둘레를 찾아서’를 쓸 때도 배경이 된 철원을 세 번이나 갔지요. 그 고장은 어떤 모습이며, 어떤 사람이 사는지, 말씨는 어떠한지 철저히 조사하고 답사합니다. 제게 문학은 사실을 기초로 하여 상상력의 집을 짓는 것이니까요. 31세에 데뷔해 83세인 지금까지 참으로 많은 글을 썼어요. 제가 쓴 글을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죠. 그만큼 많이 다녔다는 뜻도 되지요. 요즘은 그간 쓴 제 작품 모으기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소설 한두 편을 더 쓰고 남은 시간은 제 삶을 돌아보려고 합니다.”
그는 작가 인생 50여 년을 결산하며 지난 5월, 신작 장편소설 ‘광덕산 딱새 죽이기’를 냈다. 2017년에 출간한 ‘뜻밖의 생’ 이후 4년 만이다. 시간에 곰삭아 웅숭깊은 성찰의 샘에서 길어 올린 신작은, 전통을 지키며 자연과 함께 삶을 일궈나가는 한 마을에 문명과 자본이 밀어닥치면서 마찰과 갈등을 빚는 내용이다. 김 작가 특유의 입체적인 인물 설정과 입심 가득한 해학적 문장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자문하게 한다.
울고 싶을 땐 오히려 웃는 남자
그에게 문학은 길이요, 생명이다. 그의 생명력의 원천이 되는 문학을 길 위에서 떠돌며 만났기에.
“보부상이 그랬듯 우리 모두는 뜨내기이자 떠돌이로 오늘이란 시간을 살아갑니다. 떠도는 인생은 세파에 시달리며 때론 현실에 적응하기 힘들지요. 제가 80세에 쓴 ‘뜻밖의 생’은 바보가 주인공이에요. 바보는 이리 치이고 저리 당하지만 긍정심을 잃지 않지요.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을 수용하는 절대 긍정성, 산다는 건 결국 그런 거지요.”
한 시대를 오롯이 관통해온 대작가의 눈에 비친 현대인의 표상은 어떨까.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내면과 관계는 피폐한 세대를 향한 따스하지만 따끔한 일침이 있을까.
“저는 영락없는 외톨이에 철저한 약자였어요. 그러나 그 한계를 이겨낼 수 있는 내면적 힘도 동시에 있었던 것 같아요. 제게는 글이 그 힘이었지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동력은 누구에게나 있어요. 너무 쉽게 좌절하고 스스로를 내던져버리지만 않는다면. 돈이라는 것도 그래요. 돈은 매우 중요하지만, 돈보다 소중한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돈보다 가치 있는 것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10가지라면, 저는 20가지쯤 나열할 수 있어요.”
노령의 작가에게는 강인한 삶의 신념이 있다. 모든 고통과 아픔에 의연히 대처하는 것이 그것이다. 고통, 아픔, 슬픔, 사랑도 모두 내 것이니 비빔밥처럼 한데 섞어 견디고 인내하는 것. 그는 글을 통해 인생의 파고를 넘었지만, 누구에게나 잠재된 에너지가 있다는 말이 위로가 된다. 그는 잘 웃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한다. 울고 싶을 땐 오히려 웃는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잘 웃는다. 80 평생 울고 싶은 날이 더 많았다는 뜻이리라.
신섭(83) 씨는 젊은 시절 약품을 옮기는 자전거 배달원으로 시작해 30대에 수십 개 회사를 운영하는 CEO로 발돋움했다. 뜻하지 않은 시련으로 몇 번의 좌절을 겪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재기했다. 은퇴 후 현재는 시니어 모델로 활동 중이다. 그를 만나 7전 8기의 여정과 더불어 포기하지 않는 삶의 가치와 의미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두산 등 대기업에서 본부장 및 대표이사를 두루 역임하고, 업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며 가는 곳마다 경영인으로 승승장구했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CEO, 지자체장과 같은 리더를 대상으로 리더십 및 동기 부여에 대해 강연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팬데믹이 닥쳤고, 그것은 하나의 기회이자 또 다른 전환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 됐다.
“1년의 반은 해외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했는데, 팬데믹 때문에 출국이 요원해졌어요. 처음엔 좀 갑갑했지만, 나중엔 방전한 것을 채우라고 준 기회로 여겼죠. 바빠서 못 읽었던 책들도 읽고, 구상했던 책을 출간하기 위해 틈틈이 글도 썼어요. 건강을 위해 사이클도 다시 시작했는데, 우연히 한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시니어 모델 공고를 봤어요. 밑져봐야 본전이라 생각하고, 그때부터 모델 아카데미에 다니기 시작했죠.”
젊은 시절 주위에서 모델을 해보라는 권유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형편이 어렵고 먹고사는 게 바빠서 차마 도전하지 못했던 모델의 꿈이 인생 후반전에 그렇게 찾아왔다.
“그간의 커리어와 다른 길이었지만 정말 열심히 했어요. 모델 아카데미 1등 출석을 한 번도 놓친 적 없을 만큼 열정을 다해서 임했죠. 모델 도전은 처음이라 서툰 게 많았고 힘들기도 했어요. 청년 시절에 운동을 꽤 많이 했던 터라 몸으로 하는 건 자신 있었는데, 모델 동작을 익히는 게 쉽지 않았어요.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도 다시금 이렇게 설렘을 맛볼 수 있어서, 새로운 삶을 사는 기분이었죠.”
첫 무대와 캐스팅
지난 5월 패션모델 선발대회 ‘2020 더룩오브더이어 클래식’(THE LOOK OF THE YEAR CLASSIC)에 시니어 모델로 처음 참여했다. 첫 무대에 선 기분은 어땠을까?
“오랜 세월 강연자로 무대에 섰기 때문에 첫 무대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참가자에 비해 덜했어요. 오히려 연습할 때가 더 힘들었지요. 워킹은 굉장히 근사해 보이지만, 직접 해보니 신체적으론 다소 불편한 걸음이에요. 숙달하려면 적어도 만 번 정도는 연습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더군요. 타고난 끼나 재능은 부족했기에 노력을 많이 했어요. 동작 하나라도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연습했어요. 다행히 본무대는 긴장하지 않고 무사히 마쳤는데, 운 좋게도 포토제닉상을 받았어요.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고, 모델로 나아가는 데 용기를 불어넣어준 상이에요”
한편 포토제닉상은 또 다른 기회로 이어지는 교두보가 됐다. 바로 전속모델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캐스팅을 제안한 알렉스 강 EMA 대표는 “모델에 대한 간절한 의지가 눈망울에서부터 느껴졌다. 7전 8기의 삶에서 마주친 시련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다시금 재기한 끈기와 인내의 여정이 시니어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고, 내면의 미를 가진 모델로서의 가능성을 보았다”라고 말했다.
자전거에서 고급 승용차로
모델 이전의 그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교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하지만 사업가였던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그는 자전거 핸들을 잡았다.
“당시 교사 봉급으론 동생들 뒷바라지하기에 턱없이 부족했죠. 사업가로 자수성가해서 집안을 일으키고 싶었어요. 차근차근 시작하기 위해 서울의 약국에 약품을 배달하는 자전거 배달원으로 살았어요. 후발주자였던 탓에 도심의 약국으로는 물건을 납품할 수 없었고, 서울의 변두리로 많이 다녔죠. 지금이야 길이 워낙 좋지만, 그 당시엔 정말로 길이 험했어요. 약품 상자를 가득 싣고 무악재 고개 같은 곳을 넘어 다니는 건 상상 이상의 중노동이었죠.”
그는 고구마 하나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부지기수였지만, 영어사전을 곁에 두고 늘 단어를 외웠다. 몇 달 지나자 고정 거래처도 생겼고, 짬이 날 때마다 영어 단어를 외운 덕분에 웬만한 도매상보다 약품을 더 해박하게 알 정도였다. 특유의 수완을 발휘해 차 한 대 분량의 물건을 대형 제약회사로부터 받아 일주일 안에 판 것이 도매상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
“처음 도매상을 할 때는 화물차를 임대해서 전국으로 다녔어요. 배달량이 많아진 이후로는 아예 화물차를 샀어요. 그것을 발판 삼아 나중엔 운수회사를 차렸죠. 운수회사와 더불어 주유소와 가스충전소도 운영했어요. 그렇게 건설, 중장비 등 관련 있는 사업체를 하나둘씩 늘려서, 30대 초반에 재벌 소리 들을 정도로 경영인으로 성공했죠. 20대 시절 기필코 10년 안에 자전거 대신 고급 승용차를 운전하겠다는 꿈을 세웠는데, 6년 만에 그 꿈을 이뤘어요.”
자살미수와 판매왕
그것도 잠시, 그가 자수성가로 쌓은 부와 명예는 한순간에 먼지처럼 전부 사라졌다. 그때 그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당시 제가 마약을 한다는 등의 음모성 투서부터 시작해 각종 루머와 더불어 세무사찰이 진행됐어요. 물론 모두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사업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 결과적으로 회사를 도산해야 했어요. 정말 하늘이 무너진 기분이었죠. 피땀과 눈물로 이룬 성취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면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만, 그때는 그 구멍조차 생각할 여력이 없었어요. 삶을 포기하려고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어요. 물론 가족이나 친척에 의해 미수로 그쳤지만요. 제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이었죠.”
당시 아내의 권유로 3년 반 정도를 기도원에서 지내면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스스로에 대한 실망 등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버리고,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을 버릴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몸이 불편한 장애인을 돌보는 것이 제 주요한 일과였는데, 봉사하면서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꿈을 품었어요. 힘들다고 삶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보람차게 살기 위한 워밍업을 그때 한 거죠. 술과 담배, 골프 같은 유흥도 그때 끊었고, 지금까지 안 하고 있어요.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결연한 의지이자 맹세였거든요. 그곳에서의 시간은 재기의 큰 밑거름이 됐어요.”
기도원에서 나와 미국 브리태니커 한국지사 외판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질은 고급 승용차 한 대 가격과 맞먹었다. 경영인 출신을 우대한다는 공고만 보고 지원했는데 바로 합격했다.
“외판원 이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어요.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었거든요. 아이들은 뿔뿔이 남의 하숙집에서 살고, 아내는 아프고, 가족이 한 집에 모이려면 돈을 벌어야 했죠. 그때 체면과 자존심을 다 내려놓았어요. 첫 고객은 회장 시절 운전기사였어요. 가서 무릎 꿇고 사달라고 부탁했죠. 저의 간절함을 보고 흔쾌히 사주더군요. 하지만 파는 일이 마냥 쉽지는 않았어요. CEO를 하는 친구들을 찾아갔는데 회사 앞에서 잡상인 취급받고 쫓겨나기도 했어요. 마지못해 산 친구에게는 다음 날 육필로 쓴 전보를 보냈어요. 정말 미안하고, 앞으로 성공하면 이 빚을 제대로 갚겠노라고. 우여곡절이 참 많았죠.”
그는 “노크를 하고 들어간 방에서 팔지 못하면 시신으로 나오겠다”라는 심정으로 그 일에 임했다. 받을 수 있는 수수료가 매출액의 16%에 불과했지만, 그는 첫 달 월급으로 단칸방을 얻을 만큼 성과를 올렸다. 덕분에 뿔뿔이 흩어졌던 식구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됐다. 그의 절박함과 진심을 눈여겨본 고객들은 그에게 다른 고객들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덕분에 그는 54개국에서 판매 성적 1위라는 기록을 세웠고, 외판원 시절 글로벌 판매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비우는 삶
판매왕 이후 동아프라임, 한미약품, 일양약품 등 유수의 기업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경영인으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너무 혹사한 탓일까? 원인 모를 고열로 병원에 40일간 입원하며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기적같이 살아서 돌아온 후 택시 기사로 한동안 살았죠. 그 이후 삶이 더욱 소중해졌어요. 스스로 몸과 마음을 돌보면서 작게나마 선한 영향력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었어요. 당시 IMF 시절이라 스카우트 제의도 뜸했고, 서울에서 오랫동안 살아 지리에 밝았어요. 내비게이션도 없을 때였지만 서울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손님들과 좋은 얘기를 많이 나눴죠. 기사를 하면서 손님들로부터 좋은 기운을 얻은 덕분에 다시 재기할 수 있었고요.”
택시 기사, 외판원 등 자존심과 체면을 내려놓는 선택을 했을 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내와 가족의 묵묵한 응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은 우리 가족을 만난 것이에요. 사모님 소리 듣던 사람이 외판원, 택시 기사 아내로 변했는데도 한 번도 만류한 적이 없어요. 묵묵한 내조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택시 기사나 외판원을 할 때 자식들이 저를 창피해하지 않았어요. 그게 제일 고맙고 미안해요. 형편이 어려워서 아내가 면사포를 쓰지 못한 채 시집을 왔는데 올해 아내 생일날 자식들 덕분에 리마인드 웨딩을 할 수 있었어요. 애들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KO를 당하고 다시 일어나 경기에 임하는 권투선수처럼 고비마다 난관을 헤치고 나아갔다. 이러한 삶으로부터 그는 무엇을 배웠을까?
“시련은 위장된 축복일지도 몰라요. 뜨는 해는 언젠가 지는 법이에요. 해가 진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잖아요. 해가 사라지면 별이 가득한 밤을 볼 수 있죠. 그래서 낙심하지 않는 자세가 중요해요. 건강한 사람에게도 마음의 고통이 있듯이, 알게 모르게 누구나 아픔과 상처가 있죠. 시련 속에 있을 때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요. 자신을 믿고 조금씩이라도 정진하는 자세.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 그게 필요해요. 걸림돌이 디딤돌이 되면 더 멀리 가요.”
끝으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시니어에게 조언과 더불어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부둣가에 묶어만 두면 배는 영원히 출항하지 못해요.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실천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삶이라는 항해에서 출항하지 않는 배로부터는 배울 수 있는 게 적어요. 출항을 시작했으면 목표를 세우고 끝까지 완수해야죠. 인생 2막의 목표는 비우는 삶이에요. 옷이나 책도 다 정리해서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했어요. 산문집과 마케팅 서적을 출간할 예정인데, 이 책의 수익도 다 기부하려고요.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간소하게 살고 싶어요. 모델이란 꿈을 이뤘지만, 명예에 목을 매고 싶지는 않아요. 무대에 선 그 순간을 즐기는 모델이 되고 싶어요.”
잠시나마 엿본 그의 삶은 마라토너를 닮았다. 그에게 시련은 마라톤의 사점(死點)과 같았다. 마라톤에서는 극한 고통이 따르는 사점을 넘어야 완주가 가능하다. 그는 시련을 극복하면서 자신만의 레이스를 완주했고, 더 나은 단계로 조금씩 나아갔다. 그것은 1등을 하겠다는 조바심이 아니라 완주를 목표로 한 간절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양의 유명한 철학자는 인간은 방황하는 한 노력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방향성 없는 방황은 애매한 재능만큼 괴롭다. 시련 속에서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자신을 믿고, 남들이 비웃을지언정 자신만의 방향성을 잃지 않은 덕분이었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는 힘은 자신의 소신을 잃지 않는 뚝심과 한 발짝이라도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다. 새로운 삶의 출발선에 놓인 그가 새로운 레이스를 멋지게 완주하기를 응원하며 마친다.
※ 신한은행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공동 주최한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심사는 6개 부문으로 나뉘어 공모된 작품을 신중하게 살펴보고 공정하게 심사를 진행했다.
심사위원장인 김주영 작가를 중심으로 윤정모 소설가, 장석주 시인, 안도현 시인, 부희령 작가, 신아연 작가 등 6명이 심사위원을 맡았다.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분야에는 장르가 아주 많습니다. 시, 소설, 동화, 희곡, 평론, 수필, 수기 등. 그 밖에 보고문학, 기록문학 등도 있습니다. 이 다양한 장르는 각기 구성 형식이 다릅니다. 콩트는 결말을 뒤집어야 하는가 하면, 시는 압축의 정수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글로 표현되는 모든 구조의 바탕 원료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삶과 인생의 관조입니다.
이번 ‘50+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에 출품된 글들도 대체로 형식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사색의 깊이와 수사와 문장에서 갈고닦은 흔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먼저 시 ‘부록’입니다. 이 작품은 인생 관조의 절창이었습니다.
다음 동화 ‘마음우체통’입니다. 우선 동화적 골격이 단단했고, 무엇보다도 아이에게 소중한 낡은 청바지를 실수로 버린 새엄마가 그 청바지를 기어이 되찾아주는 노력을 클라이맥스로 설정한 것이 참신했습니다.
단편소설 ‘부적 쓰는 여자’는 사랑하는 남편을 전철 방화로 잃었고, 나중에 남편을 죽게 한 방화범의 부인이 찾아와 죽은 방화범을 위한 부적을 써준다는 줄거리입니다. 남편으로부터 맘껏 사랑을 받았던 자신과, 평생 애만 먹이다 죽은 방화범 아내의 사연을 씨줄 날줄로 엮었습니다. 도입부의 팽팽한 긴장은 대단한 흡인력이 있었고 얘기를 엮어가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았습니다만, 새로운 남자가 등장하면서부터 단편이라는 형식의 틀이 비좁게 느껴졌습니다. 새 남자를 얻었다는 것은 그렇게라도 새 출발을 하고 싶었던 의지임은 충분히 알 수 있었으나, 그에게 차를 사주었던 것, 아이들이 싫어해서 헤어졌다는 이야기까지 서술이 필요했다면 이건 중편 형식을 취했어야 마땅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편소설은 한 가지 주제, 그것조차 압축이 필수입니다. 육성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고도의 객관화를 요구하는 것이 단편소설의 특성입니다. 새로운 남자의 등장 대신 남편의 빈자리와 삶의 함수관계,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의 상실감을 관찰하고 보완해줄 방법을 찾았다면, 방화범의 아내, 아이를 잃어버린 그 불행한 여인의 아픔이 더 진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좀 더 덜어냈다면 최고의 수작이 되었을 텐데 아쉬웠습니다.
‘대륙에 길을 묻다’는 미니 자서전입니다.
유럽 어느 철학자가 그랬던가요? 인생에는 난이도가 있고 성공한 사람은 난(難), 그러니까 어려움을 잘 극복한 사람이고 그 기간과 결과는 대체로 10, 20, 30년으로 본다던가요. 대륙에서 길을 물은 서술자는 한 번에 세 가지를 다 잃고 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타향에서 10년을 살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곧장 새 일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많은 일을 열정적으로 해냅니다. 한 사람이 10년 동안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경탄에 이어 의심스럽기도 했습니다만, 저도 중국과 단동 취재를 했던 경험이 있어서 상황의 진실을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밝힌 전망도 망상이 아닌 실제적 이론에 기반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북한의 경제 개방 문제입니다. 북한이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 해도 경제적 개방은 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은 세계 여러 학자들도 이미 진단하고 있는 사항입니다. 남북이 정치적 통일까지 하게 되면 경제 대국을 향해 빠르게 독주할 것이다, 가능한 한 통일까지는 막아야 할 것이라는 농담 같은 기사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자서전 서술자의 관심사는 개인 영달이 아닌 국가와 민족입니다. 그가 펼쳐둔 일들, 진행 중인 일들을 잘 마무리하라는 뜻에서 대상을 결정했습니다.
부문별 우수상을 받은 6개의 작품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는 여정의 찬란함을 잘 그려낸 작품입니다.
김영창 씨의 산문 ‘생각의 관성’은 은퇴로 인해 관성적인 일상이 멈춘 자리에서 방향을 전환, 생각의 관성을 달리하는 여유와 도전 정신이 돋보였습니다. 단편소설 부문 박상희 씨 ‘그녀의 이름은 김순자입니다’는 영화 장면과 상상이 오버랩되는 설정을 통해 노년의 사랑을 경쾌하고 따스하게 묘사한 점이 빛났습니다.
심사위원들이 주저 없이 선택한 미니 자서전 부문 은정남 씨의 ‘마침내 무한 변신’은 퇴직 후 전방위적으로 과감하게 도전하면서 후반 인생의 정체성을 새롭게 써내려가는 작품입니다.
배홍숙 씨의 동화 ‘왕릉의 전설’은 역사 속 인물에 호기심과 긴장으로 다가가는 쌍둥이 남매와 비밀의 열쇠를 쥔 할머니의 반전 묘미가 독특했기에 호평을 받았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인생의 여정을 바다의 거친 풍랑에 맞서 싸우는 항해사에 비유해 심도 있게 표현한 이석재 씨의 시 ‘바다는 잠들지 않는다’는 시적 언어의 능력과 감각이 돋보였습니다.
김석철 씨의 동영상 ‘인생 2막에서 날아 오른 팔색조’는 8개의 직업을 갖기까지 인생 2막을 설계하는데 마중물이 된 요소를 짜임새 있게 구성한 기획과 영상 편집이 탁월한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모든 응모자님들 수고하셨습니다. 아울러 이 무료하고 답답한 시간에 읽을거리를 선사해주신 것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