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을 자주 들락거린 사람이라면 소아과 간판 앞에서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의문이 있다. ‘왜 노인과는 없는 거지?’ 실제로 병을 달고 사는 것은 노인인데 말이다. 정답부터 이야기하자면 노인과는 존재한다. 몇몇 병원을 중심으로 소소하게 운영되고 있어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곱씹어보니 고령화라면 세계 최고로 꼽히는 우리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일임을 금방 알게 된다. 이에 대해 정희원(39)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는 ‘노인의학’ 도입이 시급하다고 이야기한다.
“선진국에서는 고령화사회를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노년내과가 생겨요. 최근에는 정부가 주도해서 만드는 경우도 있죠. 나이가 들면 만성질환이 늘고, 노화를 부르는 요소들이 축적되죠. 신체 기능도 떨어지고요. 한꺼번에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죠. 이럴 때 건강한 성인을 기준으로 판단해서 치료하면 예기치 못한 문제들이 생길 수 있어요. 섬망, 욕창 같은 것이 대표적이죠. 안고 있는 다양한 질환에 대해 전문 치료과에서 각각 치료받으면 약이 많아지고 몸에서 섞이죠. 그러다 부작용이 생기면 또 그에 대한 약을 처방해요.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면서 비효율적이죠.”
노인의학은 생물학적 노화의 결과인 노쇠와 여러 가지 질병, 신체적·정신적 기능의 변화가 혼재된 상태에서 환자에게 맞춤 의료를 제공하는 전문 분야다. 특정 나이를 기준으로 몇 살부터 노년내과에서 담당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생리학적으로 노쇠의 특성을 가지는 인구 집단을 전문적으로 볼 수 있는 분야다.
정 교수는 설명 과정에서 ‘약을 정리한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말 그대로 현재 복용 중인 약 중 꼭 필요한 약물만 복용할 수 있도록 수를 줄이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과정을 말한다. 각기 다른 전문의가 처방한 약은 나름의 목적이 존재하지만 이것들이 충돌을 빚어 부작용이 생길 경우 이에 대한 또 다른 약을 처방하기보다는, 복용 중인 약물에 변화를 주어 불필요한 약을 줄이고 부작용도 없앤다는 뜻이다. 얼핏 보면 간단하고 단순한 일이지만, 모든 질환에 대한 경험과 약물 부작용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하지만 만나기 힘든 ‘노인의학’
물론 기존의 의료기관이나 진료과가 이런 부분에 대해 무책임하다는 뜻은 아니다. 현재 건강보험제도 구조상 환자가 처방전을 직접 가져다주지 않는 이상 다른 병원에서 내 환자에게 어떤 약을 처방했는지 의사는 알 길이 없다. 노년내과에서 현재 복용 중인 모든 약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개인에게 맞는 맞춤 진료와 치료가 필요하니까요. 같은 80대라도 사람마다 상태가 너무 달라요. 기대여명이 짧은 상태라면 무리하게 10년 이상을 바라보고 처방하는 약을 유지할 필요는 없어요. 부작용만 생기죠. 노인의학은 일종의 정밀의료로, 생물학적 상태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까지 고려해서 치료 계획을 세우는 일을 합니다. 치료와 함께 돌봄 계획도 수립하고, 연명의료도 논의하죠. 어디에 사는지, 환자분의 의향은 어떤지, 보행 속도나 악력은 어떤지도 고려해요. 물론 이 과정에서 약도 정리합니다. 이렇게 환자의 이런저런 일들을 챙기다 보면 환자 1명당 진찰 시간이 30분을 훌쩍 넘어가죠. 상업적인 병원에서 노인의학을 외면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에요.”
물론 환자 입장에선 ‘속 시원한’ 경험이다. 하루에 먹던 수십 개의 약이 정리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약값 부담도 줄어든다. 또 환자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 혹은 부모를 어떻게 모셔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도 찾을 수 있으니 걱정이 줄 수밖에 없다.
정 교수는 앓고 있는 질환이 여러 개여서 다니는 병원이 많고, 신체 기능이 떨어진 것 같다면 한 번쯤 노인의학 진료과를 찾아 전체적인 신체 건강 상태나 치료 방향을 점검해보는 것이 좋다고 추천했다. 노쇠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점검하는 기회를 가지라는 것이다.
국내에 노인의학 진료과가 등장한 것은 2007년이다. 분당서울대병원이 ‘노인병센터’를 설립했다. 이어 2009년에 서울아산병원에 노년내과가 생겼고, 2010년에는 신촌세브란스에 노년내과가 들어섰다. 짧은 기간에 연이어 노인의학 진료과가 신설되면서 대중화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의료계 내에서 진료 영역에 대한 갈등으로 반대 의견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노인의학의 필요성 때문인지 관련 진료과 설립은 계속 이어졌다. 삼성서울병원과 전남대학교병원, 건양대학교병원, 울산대학교병원, 은평성모병원 등 국내 10여 개 진료과에서 노인 환자를 대상으로 진료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김대중 정부 때 처음으로 시도됐다가 잘 안 됐죠. 공공의료가 잘 되어 있는 영국에선 내과 의사의 10%가 노인내과 간판을 달고 진료하고 있어요. 영국 정부는 각 과별로 따로 진료하고 처방하는 것보다 노인병을 전담하는 사람이 맡아보는 것이 효율적이고 보험 재정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개인과 사회 모두 중요한 지속가능한 나이 듦
정희원 교수는 최근 책을 한 권 출간했다. ‘지속가능한 나이 듦 : 노년의 질병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라는 다소 긴 제목의 책이다. 노인의학 의사이자 생명과학 박사까지 취득한 정 교수는 나이 드는 것을 노화 메커니즘이나 나이라는 숫자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변화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책은 총 3부로 나뉘어 있다. 노화의 생물학적 정의와 메커니즘을 다룬 ‘시간 : 노년을 맞이한다는 것’과 노인의료의 문제점과 사례를 다룬 ‘질병 : 노년의 질병,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지속가능한 사회 고령화에 대한 이야기 ‘사회 : 초고령사회의 지속가능한 미래’가 그것이다.
‘지속가능한’이란 표현이 눈에 띈다. 이 단어는 지난 몇 년간 경제 분야의 화두였다. 의료와는 다소가 거리가 멀어 보였다. 정 교수는 “나이 듦이라는 것을 극복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에 대한 반감에서 이 표현을 쓰게 됐다”고 설명했다.
“안티에이징이라는 표현이 있잖아요. 마치 나이 듦을 재앙처럼 여기려 하지만, 실제로 노화는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과정이에요. 노화를 받아들이고, 본인이 어떻게 디자인하느냐에 따라 그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요. 질병이나 노화의 축적을 예방함으로써 덜 고통받고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이죠. 만약 젊어서 만성질환을 관리하지 않고 운동 부족으로 신체 기능이 떨어진다면 노쇠는 남보다 빨리 오기 마련입니다. 살아가면서 장애가 생기는 것을 지연시키고, 노화를 맞이하더라도 삶의 질에 문제가 없도록 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나이 듦이라고 봤어요.”
정 교수는 이러한 관점이 단순히 개인의 삶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복지사회 정책이나 고령화를 맞이한 한국 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는 문제라고 이야기했다.
“현재 언론에선 마치 고령화가 사회의 종말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어요. 사회에서 고령의 구성원이 늘어나는 것이 파멸적인 것은 아니에요. 우리 사회는 지금 복지정책을 디자인할 때 과거의 기준과 잣대를 들이미는 실수를 하고 있어요. 65세가 도움이 필요한 약자였던 것은 수십 년 전의 이야기고, 지금의 65세는 그 기준이 세워졌던 시절 50대 수준의 신체적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정 교수는 우리 사회가 의료나 복지정책을 수립할 때 기준으로 삼는 ‘노인’에 대한 정의를 새로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노인의 기준을 무조건 나이로 가르려는 연령주의적 발상은 문제가 있어요. 65세가 되었다고 그 순간부터 갑자기 다른 종족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좀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나는 적어도 늙지 않았다는 분리 욕구를 가진 사람들의 부적절한 기준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관료적인 생각은 변화될 필요가 있어요. 이제 나이는 많지만 건강 상태가 좋고 독립적으로 오래 살 수 있는 분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정 교수는 그 이유를 삶의 폭이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결혼을 하고 첫아이를 갖는 시점도 과거에 비해 10년 가까이 늦춰졌고, 지금의 86세대나 X세대가 65세가 되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면 10년 전의 65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 적응 역량이 높을 것이라고. 나이라는 숫자는 같지만 생애 주기의 위치와 능력, 역할이 달라지는 변화를 정 교수는 ‘스냅샷의 오류’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나이 드는 것이 좋을까. 정 교수는 노화를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양한 상황에 처한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획일화된 노화 예방 상식으로 접근하다가는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자신이 처한 노화 스펙트럼에서의 위치에 따라 그에 맞는 건강 증진 활동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50대는 만성질환 관리를 잘하면 뇌졸중 등 질환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에 혈압이나 혈당 등을 철저하게 관리시키지만, 이미 노쇠한 어르신들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낙상이나 섬망 등 부작용이 생길 수 있어요. 단백질 섭취도 마찬가지예요. 젊은 성인은 단백질을 과다 섭취하면 노화 시계가 빨라져요. 그러나 운동이 어려운 어르신들은 근감소를 막기 위해 단백질 섭취를 권해야 하죠. 이렇게 생애 주기에 따라 예방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다른 목표를 설정할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보호자 ‘효자’ 되지만, 병원에선 ‘불효자’
앞서 설명한 것처럼 노인의학을 다루는 의료기관도 많지 않고, 병원 내에서도 입김이 셀 수 없는 진료 과목이다. ‘돈 잘 버는 효자’ 노릇은 애초에 기대하기 어려운 분야다. 그런데 왜 정 교수는 ‘노년내과’를 선택했을까.
“본과 4학년 때였어요. 섬망 증세로 응급실에 실려온 노인 환자가 있었죠. 일반적으로 내과 의사는 환자를 드라마틱하게 바꿔놓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선배 의사가 환자가 복용하던 약들을 종이에 끄적이더니 정리해주었어요. 그러고는 며칠 만에 멀쩡해져서 걸어 나가시는 걸 보았죠. 노인의학의 매력을 느꼈어요. 알아야 하는 분야의 폭도 넓고 깊은 데다, 복지정책이나 보험제도 등 사회의 기능적인 내용까지 알아야 하니까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지더라고요. 이런 것이 진짜 내과 의사가 아닐까 생각했죠.(웃음)”
정 교수는 내과 전문의이자 생명과학 박사이기도 하다. 그가 생명과학에 관심을 가진 것 역시 노인의학과 관련한 목마름 때문이었다고 한다.
“전공의 과정을 통해 노화와 노쇠, 근감소증에 대해 공부했는데, 아직까지 노쇠와 근감소증을 개선할 수 있는 효과적인 약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나이 듦에 따른 이런 변화가 생물학적으로 어떤 과정에 의해 만들어지는지 궁금했죠. 또 영양 섭취나 운동 등으로 긍정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지만, 모델 동물을 통한 생물학 연구에선 노인의학적 접근이 활발하지 않아 임상 의사로 직접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사람의 노쇠는 복합적 요인이 오랜 기간 축적된 결과이기 때문에 단순화된 실험으로는 쉽게 답을 낼 수가 없더라고요.”
정 교수는 마지막으로 노인의학 의사로서 노인의학 클리닉의 장점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혼잡한 종합병원에서 휠체어를 끌고 5~6개 진료과의 외래진료를 다니시던 분들이 통합된 한 곳에서 진료받으면 드시던 약을 정리할 수 있고 병원에서 고생하시던 시간과 진료비도 줄어듭니다. 몇몇 분들은 부모님을 병원에 모시는 것이 직업처럼 되어버리거든요. 이런 분들은 시간적·경제적 부담이 줄면 무척 기뻐하세요. 많은 분들이 이런 혜택을 경험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제 계획입니다.”
평범하게 지내던 노인이 돌연 기억장애, 착각, 환각, 피해망상 등 정신혼란 상태를 겪는 경우, 흔히 치매를 의심한다. 하지만 이런 증상이 특정 상황에서 갑자기 시작됐다면 의심해봐야 할 병이 있다. 바로 ‘섬망’이다.
섬망이란 갑작스러운 사고‧질병으로 신체적인 통증이 심하거나, 수술‧입원으로 생활의 리듬이 깨지고 환경이 급변할 경우 일어나는 의식 장애와 혼란 현상을 말한다. 수술 후 노인에게 발생하는 주요 합병증 중 하나인 섬망은 입원치료를 받는 75세 이상 노인 환자의 30%에서 나타날 정도로 흔한 질환이다.
특히 고령층, 입원 환자, 암이나 치매·뇌졸중·파킨슨병과 같은 뇌 질환을 앓은 환자 그리고 장기 기능이 떨어진 환자에서 잘 발생한다.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수술·감염 등의 자극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병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 약물 대사 능력이 저하된 노인이 치료를 목적으로 약을 복용하거나, 오랫동안 약을 먹다 끊었을 때도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가톨릭대학교 부천성모병원 이수정 교수는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지는 등 몸이 취약해졌을 때, 뇌에 일시적인 기능 변화가 발생하는데 이러한 변화가 섬망 증상으로 발현된다”라며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수술한 노인에게 자주 발생하는 증상이지만, 이들뿐만 아니라 급격히 건강의 변화를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발병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주요 증상은 치매와 비슷하다. 주의력과 판단력이 떨어지고, 가족을 못 알아보거나 시간‧장소를 혼동하는 등 인지 능력이 저하된다. 갑자기 말수가 줄고 우울해하거나 반대로 갑자기 말수가 많아지고 산만해지는 등의 인격 변화도 섬망의 특징이다.
치매와 다른 점은 우선 발병 양상이 다르다. 만성적으로 서서히 악화되는 치매와 달리 섬망은 대개 수 시간에서 수 일에 걸쳐 매우 신속하게 나타난다. 치매는 시간이 갈수록 증상이 심해지는데 반해, 섬망은 말기 치매 환자에게서 두드러지는 집중력‧지남력(자신의 상황을 인지하는 능력) 저하도 초기부터 두드러지는 경향을 보인다.
무엇보다 섬망과 치매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바로 치료 가능성이다. 섬망은 발병 원인이 교정되면 빠른 호전을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치매는 이전 상태를 회복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방심해도 되는 질병은 아니다. 이 교수는 “인지능력이 떨어진 환자가 중요한 주사라인을 빼거나 난폭한 언행을 보이는 등 안전사고의 위험이 커진다”라며 “또 섬망을 방치할 경우 심각한 뇌 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반드시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섬망이 치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서울시 보라매병원 정형외과 이승준·재활의학과 이상윤 교수가 고관절 수술 후 섬망 증세에 따른 치매 발생 위험성을 연구한 결과, 수술 후 섬망 증세가 나타날 경우 치매 발생 위험이 무려 9배 가까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상윤 교수는 "이번 연구결과 섬망은 한번 발생하게 되면 치매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큰 것으로 확인된다"라며 "노년층의 경우, 수술 후 의심 증상이 나타날 경우에는 조기에 적극적인 치료를 받아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섬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섬망을 유발한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가톨릭대학교 부천성모병원 이수정 교수는 “섬망을 일으킨 원인을 치료해 몸의 컨디션을 회복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섬망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라며 “극심한 열병을 앓아 섬망 증상이 발현됐다면, 빠르게 열을 내리고 건강을 회복하면 섬망 증상은 개선된다”라고 말했다. 다만 기저질환이나 체력 저하 등의 원인을 단기간에 교정하기란 쉽지 않은데, 이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섬망 증상이 심하면 이를 일시적으로 완화하기 위해 소량의 항정신성 약물을 투여하기도 한다.
섬망의 발생과 악화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빠른 원인 치료와 회복이지만, 환자가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환경조성도 중요하다. 이 교수는 “집이 아닌 병실은 환자에게 익숙한 환경이기 아니기 때문에 지남력을 상실하기 쉽다”라며 “가족과 지인들이 항상 자리를 지키며 안정감을 주고, 자주 사용하던 물건이나 가족사진을 병실에 배치하는 등 친숙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좋다”라고 조언했다.
해열·진통·소염제와 항정신병제, 삼환계 항우울제, 장기 지속형 벤조다이아제핀.
65세 이상 고령자라면 이와 같은 약을 복용하기 전에 의사나 약사 등 전문가와 상담을 받아야 한다. 건강하기 위해 복용한 약이 도리어 건강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2020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은 평균 1.9개의 만성질환을 앓고 있다. 특히 65세 이상 고령자는 만성질환을 앓고 있어 여러 약물을 동시에 복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지난 18일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가 어르신이 주의해야 할 의약품 정보를 발표했다. 식약처는 고령자가 주의할 의약품으로 해열·진통·소염제와 항정신병제, 삼환계 항우울제, 장기 지속형 벤조다이아제핀을 꼽았다.
①해열·진통·소염제
두통, 관절염, 척추염 등의 통증에 사용하는 해열·진통·소염제는 아스피린, 이부프로펜, 아세클로페낙 등이 있다.
약을 잘못 먹을 경우 소화불량·속쓰림, 위장관 출혈·궤양같은 위장관계 이상반응, 신장 기능 악화, 혈압 상승, 체액저류에 의한 심부전 악화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령자들은 가능하면 단기간 사용하는 것이 좋다.
②항정신병제
치매환자의 행동장애, 조현병 등 정신 질환 치료에 사용하는 약물이다. 주요 성분으로는 할로페리돌, 아리피프라졸, 클로자핀 등이 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정좌불안, 입 오물거림이나 눈 깜박임 등의 운동이상증, 졸림과 어지러움 등이 나타날 수 있다. 항콜린작용으로 인한 졸림, 어지러움, 변비, 체중증가도 항정신병제의 부작용 증상이다. 항정신병제로 인한 부작용은 회복이 늦고 치료가 어려워 예방이 중요하다.
③심환계 항우울제
우울증 치료와 신경병증 통증에 사용하는 대표적인 약물이다. 주요 성분으로는 아미트리프틸린, 아목사핀, 클로미프라민, 이미프라민, 노르트립틸린 등이 있다.
심환계 항우울제를 잘못 복용할 경우 갑자기 일어날 때 순간적으로 어지러움을 느끼는 기립성 저혈압이 나타날 수 있다. 졸림, 변비, 환각 증상도 대표적 부작용이다. 요저류, 착란, 섬망, 환각 등이 나타나는 경우에도 심환계 항우울제의 부작용을 의심해봐야 한다. 특히 녹내장이나 불안정협심증, 부정맥, 전립선비대증 환자는 증상이 악화될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④장기 지속형 벤조다이아제핀
심한 불안증 치료에 사용하는 약물이다. 클로르디아제폭시드, 클로나제팜, 디아제팜, 플루니트라제팜 등이 주요 성분이다.
불안을 가라앉히는 약물이기 때문에 진정작용이 과하게 나타나면 인지장애나 섬망이 나타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또 복용 후 움직이기 어려워져 자동차 사고나 낙상, 골절의 위험이 있으므로 뼈가 약한 노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의약품 부작용이 의심될 때는 지체 없이 의사와 약사 등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야 한다. 식약처 관계자는 “이상사례 발생 빈도도 증가할 수 있으므로 환자 상태에 맞는 세심한 의약품 사용과 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년기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치매다. 치매는 단순한 하나의 진단명이 아니라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나타나는 인지기능 저하 및 일상생활 수행 능력 저하를 뜻한다. 원인에 따른 치료 전략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조기검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조기검진에는 뇌영상, 인지기능평가 등이 포함될 수 있다.
치료되지 않은 우울증은 치매로 이어질 위험성을 높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증상만 봤을 때도 우울증이 마치 치매처럼 보이는 경우가 매우 흔하게 관찰된다.
가장 많이 알려진 치매 증상은 기억력 저하다. 임상적으로는 기억력 저하뿐 아니라 다양한 증상으로 내원하는 사람이 많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치매를 포함한 노년기 정신건강의 주요 포인트를 짚어보겠다.
사례 1 ▶ “옛날 기억은 정확하게 하는데, 최근 일들은 깜빡깜빡 잊어버려요.”
사례 2 ▶ “갑자기 치매가 온 게 아닌가 걱정이 돼요, 수술한 뒤에 자주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사례 3 ▶ “사소한 일에 자꾸 짜증을 내고 고집을 피워요.”
사례 4 ▶ “몸이 여기저기 아픈데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면 별다른 이상이 없대요.”
사례 1의 경우는 인지기능 저하를 평가하러 어르신을 모시고 온 보호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치매는 최근의 기억 저하가 주된 특징으로 나타난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어린 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한다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최근 일을 기억하는 게 유난히 어려워지고, 익숙하게 쓰던 단어나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면 지체 없이 전문가를 찾아가 상담을 받는 게 좋다.
사례 2의 경우에서 가족들이 가장 많이 걱정하는 것은 ‘갑자기 찾아오는 치매’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발병하는 치매는 극히 드물다. 다양한 신체적, 환경적 변화가 있거나 약물 등을 사용할 때 동반되는 일시적인 섬망일 가능성도 있다. 전문가의 진단을 받아봐야 한다.
사례 3과 4에서 명심해야 할 부분은 우울증이나 신체화증상에 대한 평가다. 기억력이나 인지기능 감퇴 없이 성격 변화를 보이는 치매도 있다. 신체화증상을 주로 호소하는 노년기 우울증에 대한 적절한 평가 및 개입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사례 4는 동네병원이나 타 과에서 검사를 하면 이상이 없는데 본인은 몹시 괴로운 경우다. 이러한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우울증이나 화병 같은 심리적, 정신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
“괜찮겠지, 나이 들면 다 그런 거지” 하며 진료를 미루면 안 된다. 미리 전문가를 찾아 인생 후반전의 정신건강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게 백세시대를 사는 시니어들의 올바른 자세다.
노년층이 수술한 후 나타날 수 있는 주요 합병증 중 하나인 섬망이 치매 발생 위험을 크게 높인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서울대학교병원운영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공동 연구팀(정형외과 이승준 교수·재활의학과 이상윤 교수)은 2003년부터 2018년까지 고관절 수술 환자에서의 치매 발생 비율을 조사한 전향적 연구를 바탕으로 이 같은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
섬망이란 신체 질환이나 약물 등으로 인해 뇌에서 전반적인 기능장애가 나타나는 증상을 말한다. 노년층에서 주로 발생하고 주의력과 인지 기능 저하가 발생한다는 점에서는 치매와 동일하나, 섬망은 갑자기 발생해 보통 1~2주 내 증상이 회복되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이번 연구에서 최종적으로 6건의 연구에 참여한 844명의 임상 지표가 분석에 활용됐으며, 분석 결과 수술 후 섬망 증세가 나타날 경우 치매 발생 위험이 무려 9배 가까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팀은 총 844명 중 265명에서 섬망을 진단했으며, 그중 101명에게서 수술 후 평균 6개월의 추적기간 내에 이전에 없었던 치매가 발생한 것으로 분석돼 수술 후 섬망 증세가 치매 발생의 유의한 위험인자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승준 교수는 “낙상과 골다공증으로 인한 고관절 골절 및 퇴행성 질환은 고관절 수술에 있어서 주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며 “고관절 골절과 퇴행성 질환은 고령환자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수술 후 섬망 증세가 나타날 경우 치매가 발생할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치매를 앓다가 코로나19에 걸렸던, 인천 지역 최고령 환자인 93세 여성이 약 한달 만에 무사히 퇴원했다.
가천대 길병원은 지역 내 최고령 코로나19 환자로, 전혀 거동이 불가능했을 뿐더러 발열 및 산소포화도 저하에 시달리던 치매 환자 김모(93) 씨가 31일 퇴원했다고 밝혔다.
수년 전부터 치매를 앓던 김 씨는 평소 살던 안동에서 코로나19로 확진됐다. 현지에서 입원 치료를 시행했지만 거동이 불가능한 중증 치매로 인해 치료가 쉽지 않은 환자였다. 또 현지에 중증환자를 치료할 병원이 부족해, 지난 달 9일 국가지정병상이 있는 가천대 길병원으로 이송돼 음압병동에서 치료를 진행했다.
특히 김 씨는 현지에서 코로나19 확진 당시 산소포화도 저하 판정까지 받았다. 높은 발열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저산소증이 동반됐고 현지 의료기관에서 산소 치료를 시행했음에도 정상적으로 회복되지 않아 기관삽관 등의 치료가 필요했다.
긴급으로 가천대 길병원 음압병동으로 입원한 김 씨는 고령임을 감안해 기관삽관 없이 치료가 이뤄졌고, 다행히도 산소 포화도가 호전됐다. 하지만 지속되는 섬망과 고령에 따른 낮은 면역력과 체력은 치료의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추가로 요로감염증까지 발견돼 코로나19와 더불어 항생제 치료가 병행해야 했다. 의료진의 헌신 덕에 김 씨의 상태는 차츰 좋아졌고, 요로감염증도 완치됐다. 산소포화도도 정상으로 회복됐다.
김 씨는 이후 코로나19 검사에서 지속적인 양성상태로 입원 치료를 받던 중 지난 달 30일과 31일 두 차례의 코로나19 검사에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았다. 의료진은 김 씨의 상태를 감안해 최대한 빠르게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고, 퇴원을 진행했다.
김 씨를 담당했던 감염내과 시혜진 교수는 “90세 이상 초고령의 치매 환자였고, 산소 포화도 저하 및 낮은 치료 순응도로 인해, 처음 입원 당시 치료가 매우 어려운 환자로 분류됐다. 섬망과 요로 감염 등이 동반돼 어려움이 있었으나 다행히 잘 회복돼 산소투여 없이도 건강히 퇴원하게 됐다”며 “너무 늦지 않은 시기에 전원이 진행됐고, 국가지정병상 의료진들의 수십일 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