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를 쓰는 게 아닌 그린다고 말하는 사람. 한글 디자이너 이용제(51)의 이야기다. 활자를 연구하고 그려온 지도 어언 30년. 절반인 15년은 계원예술대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런 그에게 활자는 생활이자 인생이며, 존재의 이유다. 50이 되던 해 탄생시킨 글꼴 ‘천명’처럼 한글을 그리고, 이를 알리는 일을 하늘의 뜻으로 여기며 자연인 이용제의 삶도 그려나가고 있다.
이용제 교수는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재학 시절부터 글꼴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한글 디자인 분야는 불모지와 같았다. 사람들은 별다른 인식 없이 문서 프로그램에 깔린 서체들을 사용했고, 폰트 파일을 자유롭게 주고받았다. 한글 디자인에 관한 교과서 같은 서적도 거의 없었고, 전문 정보도 찾기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기생 중 한글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은 이 교수뿐이었다니, 개척자의 길을 택한 셈이다. 수십 년간 한눈팔지 않고 정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묻자 “둔해서인 것 같다. 좋아하는 걸 하면 주변을 잘 안 보는 편”이라고 답했다. 한편 주변은 꽤 달라졌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무료 폰트·나눔 글꼴의 등장으로 유료 폰트, 즉 돈을 내고 글꼴을 사용한다는 인식이 높아진 점이다. 그밖에 이 교수가 체감하는 변화는 무엇일까?
“참 안 변한 것 같기도 한데, 하나하나 뜯어보면 꽤 많이 변했더라고요. 일단 글꼴 제작 환경이 많이 바뀌어서 개인도 폰트를 만들 수 있게 됐다는 거죠. 덕분에 완성도에 신경 쓴 개성 넘치는 폰트들이 다양하게 탄생한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는 저작권, 정확하게는 글꼴 사용료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다는 겁니다. 예전엔 ‘폰트를 왜 돈 주고 쓰냐’라고들 했다면, 요즘엔 ‘폰트를 막 썼다간 법적 책임을 질 수도 있겠구나’ 여기는 것 같아요. 유통 측면에서 보면 전에는 패키지 형태 구매로 가격 부담이 있었지만, 요즘은 필요한 글꼴만 월 구독 형태로도 판매하죠. 그런 변화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해요.”
공공재와 같은 활자, 그 본질은 ‘쓰임’
이렇듯 기분 좋은 변화에 이 교수도 일조했을 테다. 한글 디자인에 대해서라면 대학 강단 이외에도 전국 팔도를 누비며 알리고자 했고, 관련 내용을 담은 단행본과 잡지 출판, 온라인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통한 콘텐츠 공유까지,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모습에는 열정이라는 단어가 맞춤해 보이지만,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에게 열정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듯해요. 어떤 강한 에너지를 발휘한다기보다는 그냥 좋아서 계속하고 있거든요. 물론 초반에는 재미있어서 좋아했는데, 이제는 이 일이 소중하고 중요해서 좋은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힘들고 괴로운 시기도 있었죠. 선배들이 ‘밥은 먹고사냐’고 인사치레할 정도로 열악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이유로, 내가 힘들다고 방치할 수는 없었어요. 좋아서 이어왔지만 계속 이 길을 걷다 보니 책임감이라는 게 생기더군요. 후배들이, 학생들이 ‘저 한글 디자이너 될래요’ 했을 때 그들이 먹고살 토대는 내가 마련해줘야죠.”
아직 그가 활동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여전히 개선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바람’체를 만들 당시 텀블벅 펀딩을 통해 글꼴 제작 과정을 공개하기도 했다. 대개 펀딩은 후원금을 목표로 하지만, 그보다는 한글 디자이너들의 노고와 처한 환경을 알리기 위함이 더 컸다. 실제 글꼴 하나가 탄생하기까지 적게는 6개월에서 1년이 걸리고, 이를 정교하게 다듬어가는 작업까지 포함하면 평생에 걸친 작업이 될 때도 있다. 게다가 영어의 경우 대소문자만 고려해 52자만 디자인하면 되지만, 자음과 모음이 어우러지는 한글은 최소 2350자에서 많게는 1만 자 이상 그려야 한다. 때론 폰트 제작비로 큰 금액을 제시받기도 하지만, 완성도를 갖출 시간 확보가 어렵다면 고사할 수밖에 없다. 오랜 기간 공들이는 작업에서 그가 가장 염두에 두는 건 바로 활자의 쓰임이다. 그게 곧 활자의 본질과 같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글자와 활자는 좀 다르죠. 활자는 인쇄를 위한 거니까요. 그런 활자 디자인에서 쓰임을 빼면 만들 이유가 없어요. 활자를 통해 어떤 글을 인쇄한다는 건 그게 지식이든 정보든 다수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하기 위함이잖아요. 단순히 보관이나 기록의 용도라면 필사본이나 복사본을 제작하면 되죠. 활자의 본질은 필사의 한계를 넘어서 대량으로 인쇄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공공재라고 봐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 쓰임을 절대 배제할 수 없어요.”
좋은 글꼴, 가독성만 보지 말아야
쓰임을 고민하며 탄생시킨 글꼴들. 사용자 입장에서는 어떤 점을 고려해 선택해야 할까? 앞서 이 교수가 언급했듯 읽을거리를 염두에 둔 활자이기에 흔히 가독성을 따질 때가 많다. 가끔 가독성이 높아야 좋은 글꼴이라 평하기도 하는데, 이 교수는 다소 협소한 견해라는 입장을 드러냈다.
“가독성처럼 활자의 기능적인 부분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요. 그보다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좋겠어요. 가령 어떤 매체나 대상에 적합한 가독성을 갖춘 글꼴만 논한다면, 대한민국에 폰트 50개 정도만 있으면 돼요. 그럼에도 우리는 왜 자꾸 새로운 폰트를 만드는 걸까요? 그건 한글 디자인도 문화이기 때문이죠. 오랜 역사 속에서 비슷한 서사의 소설이 계속 나오고 같은 장르의 노래가 계속 나오는 것처럼, 활자도 마찬가지예요. 가령 과거의 정서와 문화를 담은 옛 글자체가 있듯, 현재를 반영하는 새 글꼴도 필요한 거죠. 한글 디자인도 결국 창작인데, 문화의 관점으로 보지 않는다면 창작은 존재할 수 없어요.”
또 한 가지 사용자들이 살펴볼 부분은 ‘활자의 인상’이라 말했다. 즉 특정 글꼴을 썼을 때 나타나는 분위기나 느낌이다. 같은 글자라도 어떤 글꼴을 쓰느냐에 따라 장르와 메시지가 다르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다시 창작자의 입장으로 돌아오면, 이러한 활자의 인상을 감안해 글꼴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때론 창작자의 생각과 의식이 간접적으로 담기기도 한다. 이 교수가 만든 ‘생명’체도 그중 하나다.
“창작자마다 다르긴 하지만, 저는 이름을 먼저 생각하고 글자를 그리는 편이에요. 그렇게 큰 틀과 방향을 마련해두고 인상을 신경 쓰며 작업합니다. ‘생명’ 같은 경우 사실 처음 떠올린 건 ‘맑은 물’이었어요. ‘그냥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 같은 글자체였으면 좋겠다. 물은 바닷물도 있고 강물도 있고 냇물도 있지만, 이건 계곡 상류에서 어떤 돌 위에 똑똑 떨어지는, 부드럽지만 단단한 느낌이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면서 만들었죠. 그러던 중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고, 이후 ‘생명’이라 바꾸게 됐어요. 우리는 ‘생명’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면서도 너무 쉽게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죠.”
이용제를 한글 디자이너로 대중에 알린 건 ‘바람’체다. 가수 아이유의 ‘꽃갈피’ 앨범에 쓰이기도 했는데, 특유의 감성이 느껴지는 세로쓰기 디자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세로쓰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설명했다.
“일상에서는 주로 가로쓰기를 하고, 의뢰받는 작업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의심이 들더군요. 가로쓰기에 좋은 서체가 세로쓰기에도 좋을까? 가로쓰기 글꼴의 장점과 특징이 세로쓰기에도 적용될까?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탐구하고 알게 된 것들을 통해 확인해보기로 한 거죠. 이후로는 모든 작업을 가로쓰기와 세로쓰기로 구분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세분화에 세분화를 거쳐 진행했어요. 그러다 보니 공이 더 들 수밖에 없었죠. 누군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런데 제 눈에 달리 보이기 시작한 걸 외면하고 이전과 똑같이 작업할 순 없었어요. 창작자에게 그런 계기를 마련해준 ‘꽃길’체가 제 인생의 전환점과도 같습니다. 그게 세로쓰기 글꼴의 첫걸음이었으니까요.”
‘존재’의 탄생, 올해부터 다시 시작
‘꽃길’체는 그 이름처럼 이 교수의 삶에 새로운 꽃길을 내어준 듯 보였다. 이름 붙이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는 그는 중년 이후 고민이나 깨달음 등을 글꼴명에 반영하게 됐단다. 그 시작은 ‘존재’였다.
“예전엔 정말 작업 벌레였어요. 하루는 아내가 ‘당신 머릿속에 가족은 있냐’고 하는데, 그 말이 되게 마음 아프더라고요. 당시 어머니께서도 건강이 좋지 않으실 때였거든요. 그동안 교육자로, 창작자로 이용제는 그럭저럭 열심히 살았는데, 한 가정의 자연인 이용제는 빵점이었던 거죠. 그렇게 나를 되돌아보고 고민하며 ‘존재’를 작업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50세가 되던 해에 ‘천명’을 그렸어요. 흔히 쉰을 지천명이라고 하는데, 거기서 착안한 것이죠. 그 뒤에는 ‘해’(楷)를 작업했는데, 모범이라는 뜻의 한자예요. 쭉 엮어보면 ‘내 존재의 이유는 모범이 되는 활자체를 제시하는 것, 그것이 나의 천명’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더군요. 한글 디자이너로서의 목표를 묻는다면 그것이라 할 수 있겠어요.”
앞으로의 여생도 창작자의 길을 계속 걸어가겠다는 이 교수다. 그는 특별히 올해를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를 담아 ‘초(初)해’로 삼았다. 중년 이후 찾아온 고민들이 정리되고, 존재의 이유를 깨닫고 나니 뭔가 다시 출발점에 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지금껏 해온 활동을 60세 정도까지는 이어가려고 해요. 그 이후로는 직업인이나 사회인으로서의 이용제는 조금 내려놓을 생각입니다. 물론 작업인, 창작자로서의 이용제는 계속될 거예요. 그건 죽을 때까지 남을 제 모습이라고 봐야죠. 계속 활자를 작업해보니 삶과 비슷한 부분이 많더군요. 활자가 존재하는 이유, 내가 존재하는 이유, 맥이 닿은 부분도 있고요. 완성된 활자를 고쳐가며 더 완벽해지게끔 노력하고, 그 쓰임과 시대에 따라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내듯 저 또한 그렇게 다듬어지고 변화해가며 성장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가오는 한글날. 한글 디자이너에게 명절과도 같은 날일 테다. 이미 빼곡한 스케줄로 쉴 틈 없는 10월이 예약된 이 교수다. 그는 한글날을 맞아 한 가지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동안 한글날을 대하는 대중의 시각을 보면, 한글을 한국어와 혼동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글을 문자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음성 언어를 표기하는 하나의 도구처럼 여기는 거죠. 한글 디자이너로서 그 부분이 참 아쉽습니다. 한글은 굉장히 뛰어난 창작의 결과인데, 애초에 창작자인 세종대왕이 누가 언제 어떻게 쓸 것이냐, 즉 쓰임을 염두에 뒀기에 가능했다고 보거든요. 저 또한 그런 세종대왕의 마음과 정신을 새기려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창작자만 재미있고 만족스러운 결과물은 의미가 없죠. 제가 만든 글꼴이 사용하는 사람, 우리 사회와 문화, 나아가 자연에도 도움이 됐으면 해요. 그게 바로 ‘좋은 글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경북 울진과 강원도 삼척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 산불 피해가 8일째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연예인들의 성금 기부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산불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을 위로하며 피해 수습·복구·지원에 성금이 쓰여지기를 바랐다.
배우 김희선과 가수 영탁은 적십자를 통해 성금 1억 원을 기탁했다. 김희선은 적십자사를 통해 “예기치 못한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웃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산림재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기부하게 됐다”며, “어려움을 겪는 이재민들이 하루빨리 일상으로 복귀하고, 산불로 소실된 산림이 조속히 복원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가수 임영웅은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1억 원을 기부했다. 그는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분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됐으면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임영웅의 팬클럽 '영웅시대' 또한 회원들의 동참으로 모인 2억 6000만원을 사랑의열매에 전달했다.
유재석은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이하 희망브리지)에 “산불 피해로 아픔을 겪는 이재민들을 위해 써달라”며 1억 원을 기부했다. 대형 산불 피해가 커진다는 소식을 접한 유재석은 이재민들을 돕기 위해 긴급 구호 등 피해 지원 명목의 기부를 결정했다고 전해졌다.
유재석은 앞서 2019 태풍 피해, 2020 수해 피해 긴급구호 캠페인, 코로나19 피해 지원 성금 등 희망브리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기부해왔고, 기부 금액이 8억여 원을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재석의 선한 영향력이 새삼 입증됐다.
이달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인 스타 커플 현빈과 손예진도 희망브리지에 기부금 2억 원을 함께 전달했다. ‘절친’ 정우성과 이정재도 희망브리지에 1억 원을 각각 기부했다. 정우성은 소속사를 통해 “산불로 피해를 입은 지역 주민들과 밤낮으로 힘쓰시는 모든 관계자분들께 작게나마 도움을 보태고 싶다”라고 전했다.
김은숙 작가와 드라마 제작사 화앤담픽쳐스의 윤하림 대표는 산불 피해 이웃돕기 성금 6천만 원을 희망브리지에 기부했다. 더불어 우크라이나 전쟁 피해자 돕기에 4천만 원을 기부했다.
가요계를 대표하는 3사도 기부에 동참했다.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와 SM엔터테인먼트, 그리고 YG엔터테인먼트는 희망브리지를 통해 5억 원을 쾌척했다. JYP엔터테인먼트는 국제구호개발 NGO 월드비전에 3억 원을 기부했다.
이 외에도 송강호, 김혜수, 송혜교, 신민아, 한지민, 이제훈, 김우빈, 이종석, 박민영, 김고은, 박보영, 아이유, 수지, 방탄소년단 슈가, 전현무, 김연아 등도 1억 원을 기부하며 산불 피해 구호에 동참했다.
강원도 산불은 지난 5일 오전 1시 8분 강릉시 옥계면 남양2리에서 주민 이모(61)씨의 방화로 시작돼 8일째 이어지고 있다. 11일 오전 울진-삼척 지역 산불이 꺼지지 못한 채 진화율 75%를 기록하고 있다.
정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에 따르면 동해안 산불로 인해 이날 오전 6시까지 2만 3 993ha의 산림 피해(산불영향구역 면적)가 추정된다. 이는 역대 최대 규모인 2000년 동해안 지역 산불의 피해 면적인 2만 3천 794ha를 넘어섰다.
이날 오전 5시까지 산불로 648개 시설이 피해를 입었다. 주택 358채, 농·축산시설 48곳, 공장 및 창고 167곳, 종교시설 75곳이 피해를 봤다. 인명 피해로 확정된 사례는 없다. 방화를 저지른 이모 씨의 모친(86)이 산불을 피해 대피 도중 다치면서 숨진 바 있지만, 경찰은 평소 모친이 거동이 불편했기 때문에 산불로 인한 연관성은 적다고 봤다.
사진은 즐거웠던 여행에 대한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다. 아름다운 여행지에서 배우자나 자녀와 즐거운 모습을 담으려고 카메라를 든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매번 똑같은 모습과 자세가 사진에 담긴다면? 지금부터 소개하는 인생샷을 위한 4가지 방법으로 새롭게 도전해보길 권한다.
1. 카메라를 똑바로 봐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그만!
시니어들 뿐 아니라 젊은이들도 두 손을 모은 어색한 정자세와 손으로 브이를 그려보는 일반적인 자세에 익숙하다. 하지만 자세를 조금만 바꾸면 다양한 느낌을 사진에 담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거나 위쪽으로 시선을 향한다. 또 뒷모습을 찍거나 손으로 머리카락을 살짝 넘기며 기본 자세에 다양한 변화를 주는 방식이다. 같은 자세로 배경만 바꾼 사진 여러 장보다 순간순간의 가족의 모습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담은 사진 한장이 추억을 더 색다르게 만든다.
2. 목과 눈은 수평선에서 멀리
바닷가에서 사진을 찍을 때 수평선이 인물의 눈이나 목을 지날 정도로 배경에 얼굴이 갇히면 사진이 답답한 느낌을 준다. 수평선을 배경에 담을 때는 상반신이나 얼굴을 수평선보다 높게 잡는 것이 좋다. 바다가 낮게 깔리고 하늘과 얼굴이 하나가 되면 시원한 바다와 맑은 하늘을 한껏 담을 수 있다.
3. 손목을 몸쪽으로 꺾어 8등신 만들기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아이유의 전신사진을 보면 꽤 키가 커보인다. 그런데 아이유는 실제로 키가 큰 편은 아니다. 그렇다면 키가 커 보이게 사진을 찍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 방법이 있다. 스마트폰으로 상대방을 찍을 때 스마트폰을 든 손을 배꼽 정도의 위치에 두고 손목을 최대한 몸쪽으로 꺾는다. 이때 스마트폰을 거꾸로 들어 카메라가 아래로 가게 하면 더 효과적이다.
4. 역광을 피하고 조명을 활용한다
많은 사진작가들은 인생샷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조명을 꼽는다. 사진은 빛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우리가 보는 빛과 카메라가 보는 빛은 다르다. 특히 역광에서도 우리 눈은 사람 얼굴이나 대상을 또렷하게 볼 수 있지만 카메라는 밝은 빛에 가려진 대상으로 어둡고 칙칙한 물체 수준으로 인식한다. 이렇기 때문에 역광에서 사진을 촬영하면 얼굴뿐 아니라 전체적인 사진 분위기가 칙칙해 보일 수 있다.
따라서 낮에는 해를, 밤에는 조명이 얼굴과 몸을 마주 보고 비춰 주는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얼굴이 더 화사하게 보인다. 얼굴에 살이 있는 편인 사람은 조명이 한쪽 얼굴을 향하게 해 음영을 주면 얼굴의 입체감을 살릴 수 있다. 이때는 자신이 좋아하거나 사진이 잘 나오는 얼굴 방향을 잘 선택해야 한다.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인생샷을 찍으려고 도로에서 교통 법규를 위반하거나 출입금지 구역을 침범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무리한 도전은 인생샷보다 인생사고로 먼저 부를 수 있다. 더 좋은 구도를 잡기 위해 도로에 차를 멈추거나 절벽 근방까지 가는 것은 절대로 금물이다. 예쁜 사진도 좋지만 무엇보다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딥페이크(Deepfake) 기술을 악용해 가짜 영상을 만들고, 금전을 요구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어 시니어들의 주의가 요구된다.
딥페이크는 딥러닝(deep learning)과 페이크(fake)의 합성어로 인공지능(AI)을 이용해 특정 인물의 얼굴, 신체 등을 원하는 영상에 합성하는 기술이다. 쉽게 말하자면 내 몸에 타인의 얼굴을 넣거나 다른 사람의 몸에 내 얼굴을 넣어 가짜 영상을 만드는 기법이다.
지난 2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에서 20대 실험 참가자 세 명이 각자의 부모에게 그들의 얼굴이 합성된 가짜 영상을 보낸 뒤 신용카드 정보를 요구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마치 자식이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한 것처럼 꾸며낸 영상을 보내 놀란 시니어들이 개인정보를 의심 없이 보내게끔 유도한 셈이다.
영상을 받은 부모들은 “카드 번호를 누구한테 불러줘? 엄마랑 지금 통화하자”, “너 아닌데, 아들 맞아? 어느 병원?” 등의 질문으로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세 명 중 두 명의 부모가 신용카드 사진을 전송했다. 자식이 걱정돼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다.
세 명 중 두 명이 속을 정도로 딥페이크 기술은 정교했다. 최근에는 영상의 화질이나 처리되는 데이터의 질에 따라 딥페이크 영상과 원본 영상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는 추세다.
지난 4월 20일 MBC 뉴스데스크는 딥페이크 기술의 심각성에 대해 보도하면서 가수 아이유의 몸에 아이언맨으로 유명한 해외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로다주)의 얼굴을 합성한 영상을 내보냈다.
해당 영상은 외국의 한 누리꾼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상을 보면 아이유가 팬들에게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영상에 갑자기 얼굴만 로다주로 바뀌는데, 싱크로율이 매우 높아 시청자들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웃는 모습과 입 모양, 얼굴의 작은 떨림까지 실감나 얼핏 로다주가 실제 아이유를 흉내내는 듯 보이기도 했다.
이 같은 광경에 누리꾼들은 "이렇게 깔끔하게 합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작정하고 합성하면 가짜 영상인지 모를 것 같다" 같은 반응을 보였다.
특히 딥페이크 기술은 성범죄에 악용된다. 음란물에 범죄의 타깃으로 삼은 사람의 얼굴을 합성해 영상을 만들어 협박하는 것이다.
관련 사례도 있다. 20대 여성 A씨는 지난 1월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하다가 섬뜩한 경험을 했다. 200만 원을 보내지 않으면 A씨 얼굴을 합성한 딥페이크 음란물을 유포하겠다는 협박성 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A씨는 이 계정을 경찰에 신고했다.
이런 사례가 늘어날수록 시니어들의 한숨은 늘어간다. 54세 B씨는 “딸의 얼굴을 합성한 가짜 영상으로 협박을 당한다면 수치심에 치를 떨 것 같다”고 분노했다. 또 58세 C씨는 “음란물뿐 아니라 병원복을 입은 내 자식 얼굴을 본다면 놀라서 평정심을 잃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성행하는 딥페이크 범죄에 대한 대응책으로 최근 카이스트 연구진이 딥페이크와 사진의 위·변조를 구별하는 애플리케이션 ‘카이 캐치’를 선보였다. 동영상의 한 부분을 캡처해 이미지로 만들어 카이캐치 앱에 업로드하면 손쉽게 딥페이크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분석 결과는 0에서 100 (%) 값으로 표시되며 숫자가 높을수록 딥페이크일 확률이 높은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애플리케이션 개발로 범죄를 완전히 차단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보안 기술 개발 기업 시큐어앱의 임한빈 대표는 “딥페이크 범죄가 점점 고도화되고 있어 완벽한 예방이 쉽지 않다”며 “누구나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어 “딥페이크 기술을 기반으로 한 응용 범죄의 종류와 정도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개인이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며 “놀라서 돈을 보내는 행동을 먼저 하기보다 관련 수사기관이나 보안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책”이라고 조언했다.
언더그라운드 가수, ‘천둥 호랑이’가 되어 돌아온 권인하. 올해 나이 예순두 살. 그러나 나이가 무색하게 29만4000여 명의 유튜브 독자를 보유한 그는 여전한 현역으로서 젊은 세대의 열광을 받으며 인생 2막을 일구고 있다.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그가 40여 년이 지나 어떻게 다시 전성기를 열게 되었을까? 천둥 호랑이가 말하는 음악, 소통, 그리고 도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금 가수 권인하가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동안 잊힌 가수였던 그의 봄날은 유튜브 덕분에 찾아왔다. 그가 놀라운 것은 1980년대에 주로 활약한 과거 세대의 가수면서도 유튜브라는 새로운 포맷에 최적화된 가수로 다시금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 성공의 계기는 젊은 세대와의 적극적인 소통 덕분이었다.
우연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다
권인하는 본인이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목적으로 유튜브를 전략적으로 운용하지 않았다. 유튜브의 성공 사례 중 상당수가 그렇듯, 그는 우연과 기회가 겹쳤을 때 본인이 갖고 있던 본연의 실력을 적중시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 시작은 2015년 ‘복면가왕’에 출연했을 때부터다. ‘이 나이에 해도 되는 건가?’라며 긴가민가했던 출연 제의를 매니저가 적극적으로 권유해 나가게 되었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원래 ‘천둥 호랑이’ 채널은 내가 부른 노래들을 모아놓는 데이터베이스로 쓸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복면가왕’에 출연한 후 이슈가 되어 EBS ‘공감’에도 초대되었죠. 거기서 태연의 ‘만약에’를 불렀는데 본방에는 못 나갔지만 EBS에서 그걸 유튜브 채널에 따로 올렸어요. 그랬더니 화제가 되었고 순식간에 100만 뷰를 넘더군요. 그걸 본 아들이 본격적으로 유튜브를 통해 노래를 부르라고 권유했습니다.”
유튜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그는 태연, 엠씨더맥스, 노라조, 에일리, 아이유 등 후배 가수들의 노래를 적극적으로 리메이크하여 자기 식으로 해석했다. 1980년대 실력파 언더그라운드 가수였던 그가 까마득한 후배들의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도 신선했지만, 더 신선했던 것은 이미 장년의 나이가 된 그가 구사하는 생생한 창법이었다. 다양한 음역대를 오가지만 특히 고음을 원키로 힘 있게 확 질러버리는 그의 ‘천둥 호랑이 창법’에 ‘진짜 가수’를 찾던 젊은 세대는 열광했다.
권인하의 법칙은 연습과 소통
권인하가 나이를 먹어서도 여전히 전성기 시절과 다름없는 압도적 성량과 테크닉을 유지하는 비법은 연습이다. 그는 요즘 매일 기본 3시간, 때로는 10시간씩 노래 연습을 한다. 새로운 세대와 호흡하게 되니 가수로서의 삶의 방식도 달라졌다.
“젊어서는 연습 안 하고 대충 불러도 ‘이 정도면 됐지’ 하며 교만했죠. 하지만 유튜브를 하면서 진심으로 열심히 만들어 부른 노래에 대중이 열광하는 걸 보고 절대로 대충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는 밴드 후배들과 소주 한잔하면서 서운한 게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말하라고 했다. 후배가 자신이 느낀 점을 얘기하면, 깨끗하게 인정하고 사과한 다음 고친다. 당연히 처음에는 힘든 일이다. 하지만 후배로서나 그 자신으로서나 이러한 소통을 통해 더욱 개선된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그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는 자신의 노래를 듣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끊임없는 피드백을 통해 듣는 이들이 원하는 포인트를 계속 반영하며 진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또한 유튜브를 활용하면서 이제는 하나하나 다 기록으로 남기에 허투루 할 수가 없게 됐어요. 권인하라는 아티스트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기 때문에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계속 최고의 정신과 자기관리로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댓글로 만들어진 놀이 공간에서 노닐다
권인하가 자신을 찾는 젊은 세대와 소통하는 방법도 적극 그 자체다. 다양한 SNS 활용. 유튜브, 팬카페, 인스타그램 등을 활용하면서 댓글이나 쪽지에 일일이 답장은 못 하지만 최대한 확인하려고 노력하고 피드백을 최대한 수용하려고 한다. 그것을 위해 그가 중시하는 것은 댓글이다.
“비결은 구독자들이 달아주는 재미있는 댓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세대는 좋은 콘텐츠가 있으면 그에 대해 댓글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면서 놀이터처럼 소비하죠. 그런 재미있는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하면 콘텐츠 자체에 새로운 활력이 생깁니다. 단순히 노래하는 콘텐츠가 아니라 놀이 공간으로 변모하게 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구독자들이 달아준 재미있는 댓글 덕분에 콘텐츠가 계속 생명력을 얻고 재확산될 수 있다고 봅니다.”
2021년 3월 중순 현재 권인하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 수는 29만4000명, 곧 30만 명을 돌파할 기세다. 그 구독자들의 연령대는 대부분 20~30대라고 한다. 옛날이라면 환갑잔치를 열었을 가수라고는 믿기 어려운 팬층의 구성이다. 그걸 가능케 한 것이 바로 권인하의 소통 능력 아닐까.
현재 권인하의 모습은 최신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멀티테이너적 인상을 준다. 또 그것이 인기의 비결이기도 하다. 새로운 물결에 올라타는 그의 모습은 그의 삶을 이해하면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하다.
권인하가 요즘 보여주는 천생 가수로서의 모습만 기억하는 이라면 낯설 수도 있겠지만, 그는 과거에 한때 키보디스트이자 작사·작곡까지 하는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했다. 군대를 갔다 온 그는 1980년대 최고의 작곡가였던 이영훈과 고등학교 동창 한 명과 함께 셋이서 팀을 준비했고, 그때 이영훈의 곡을 보고 자극을 받아 작곡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처음 만든 곡을 이광조가 불렀을 정도로 그의 작곡가로서의 능력은 일찌감치 인정받았다.
권인하는 또한 사업가 경험도 갖고 있다. 신촌뮤직을 운영하며 박효신을 발굴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록 가수로서는 드물게 공중파 방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음악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다양한 방송 활동을 했다. 심지어 배우로서의 경험도 있다. 1992년에 방영된 MBC 미니 시리즈 ‘창밖에는 태양이 빛났다’에서는 주연, 2001년 MBC드라마 ‘가을에 만난 남자’에서는 조연으로 나왔다.
카멜레온처럼 자신의 역할을 바꿔가며 다양한 일을 한 그지만, 뼈아픈 실패 또한 그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음반 시장이 음원 위주로 재편되면서 기존 중견가수들에게는 혹독한 시절이 시작되었다. 권인하 또한 이에 대처하기 위해 미사리 카페를 운영하고 골프 사업도 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내가 “당신은 가만히 있는 게 돈”이라고 말할 정도로 사업은 실패를 거듭했다.
내가 도움이 되는 선배였다니 다행
성공과 사회적 인정, 그리고 실패들. 이쯤 되면 권인하가 가진 경험의 자산치가 보통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인플루언서로 변화할 수 있었던 비결도 다양한 경험에서 비롯된 본능적 감각이 일조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치지 않는 발전의 동력은 ‘어른’의 정의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나도 어른이 됐나 싶을 때가 있지만, 누군가의 본보기가 되고 롤모델이 되는 거라고 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어른됨이겠죠.”
그는 요즘 자신의 가장 큰 기쁨으로 ‘내 노래를 기다리는 호랭이들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기존 팬뿐 아니라 젊은 층에서 호응해주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을 꼽는다. 얼마 전 화제 속에 끝난 프로그램 ‘싱어게인’이 발굴한 스타 정홍일은 권인하의 ‘나의 꿈을 찾아서’를 인생곡으로 꼽았다. 1992년 앨범의 동명 타이틀곡이기도 한 이 노래의 가사는 지금은 힘들더라도 언젠가 찾아올 희망을 위해 꿈을 찾아 나아간다는 내용이다. 이 가사가 정홍일이 보여준 삶의 궤적과도 일치하기에, 더욱 살갑게 다가왔을 것이다.
“‘다행이다. 내가 저런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는 선배였다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미 너무 잘하는 친구이기 때문에 잘됐으면 좋겠어요. 함께 재미있는 그림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고요.”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노래가 필요한 시대
권인하는 ‘싱어게인’ 같은 오디션 프로의 매력은 참가자들의 순수한 열망과 간절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진짜 간절함’은 못 이긴다는 걸 느꼈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래 한 곡을 부를 때 진짜 진심을 담아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요즘 후배들은 보컬로서의 기술적인 측면은 전체적으로 상향 평준화됐습니다. 그러나 소리를 내는 방식이 다 비슷하기 때문에 음색이나 아티스트의 개성 자체가 차별화되지는 않는다고 보여요. 기술적으로는 다들 너무 잘하기 때문에 좀 더 자신만의 색깔과 개성을 음악에 담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청자들이 가수의 진심에 반응해야 감동은 오는 법. 노래에 대한 진심과 개성에 대한 권인하의 충고가 과거 송창식이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던 내용과도 일치하는 걸 보면, 어떤 경지에 도달한 거장급 가수들이 후배 가수에 대해 갖는 생각에는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는 모양이다.
“항상 즐거운 인생이지만 아직 못 다 이룬 꿈이 있기에 정진 중입니다. 이미 케이팝이 빌보드 차트를 점령하기 시작했잖아요? 우리 노래가 세계적 퀄리티라는 반증이죠. 10년 이내에 우리 세대의 음악도 훌륭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트렌디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권인하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안주하지 않고 계속 도전해서 시대에 맞게 진화한 아티스트로 기억되길 원한다. 요즘 시대에 예순두 살은 무언가를 하기에 시간이 넉넉한 나이임을 생각하면, 아직 그가 해야 할 일은 많이 남은 셈이다.
“나이가 들어도 계속 자신의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나이의 일반 개원한 의사들은 절대 쉬지 않아요. 여전히 현장 진료를 하고 신기술을 배우죠. 그걸 안 하면 환자들과 교류가 안 되니까요. 그래서 의사 친구들과 한잔할 때면 ‘그런 거 할 수 있는 게 어디냐, 못 하면 도태되는 거다’라고 말해주죠.”
멋있게 늙는 첫 번째 자질은 도전
권인하는 뒷전으로 빠지는 사람은 거기서 멈추는 것이라고 말한다. 의지를 갖고 접목시킬 게 무엇이 있을까 끝없이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멋있게 늙어갈 수 있는 첫 번째 자질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 또한 멈추지 않기 위해 요즘도 1년에 싱글을 두 곡씩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시도해야 결과가 나옵니다. 따라서 뭐든 하는 게 필요해요. 그 자체가 우리 나이에는 큰 용기를 주고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 아닐까요. ‘아, 할 수 있구나, 되네’ 하는 경험을 가지면 미래에 도전할 수 있게 되니까요.”
그는 자신이 한 말의 증인이기도 하다. ‘할 수 있구나, 되네’를 실현시켜 미래를 꿈꾸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가 만들어갈 인생 2막의 열정적 행보와 소통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봄바람 살랑살랑 불어오는 요즘. ‘방콕’이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분들 계신가? 부부가 혹은 가족끼리 또는 동성 친구끼리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곳, 게다가 ‘먹방’까지 기대할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볼까 한다.
경춘선 기차여행[김유정역]_실레마을 이야기길 따라 점순이를 만나다
7호선과 경의중앙선이 교차하는 만남의 장, 상봉역. 춘천 가는 기차는 대성리, 가평을 지나 출발한 지 72분 만에 멈춘다. 내린 곳은 근대문학 ‘봄봄’, ‘동백꽃’의 산실, 실레마을이 있는 김유정역. 역사 맞은편으론 ‘비단으로 병풍을 두른 산’, 금병산이 포근하게 안아준다. 역사를 빠져나와 약 5분 정도 걸었을까. 버선발로 마중 나온 ‘점순이’를 만난다.
“그새 좀 컸는가? 반갑단 말보다 다짜고짜 키부터 재 보는데 잘 봐야 내 겨드랑 밑에서 넘을락 말락. 또 고갤 숙일밖엔 도리가 없다. 딸이 더 자라야 성례를 시켜줄 수 있다며 차일피일 미루고 일만 시키는 장인, 아버지를 못마땅해하면서 나를 충동질해대는 점순이, 반발하다가도 끝내 이용만 당하는 나는 정말 어리석은 머슴이던가. 빙장님, 올가을엔 꼭 성례를 시켜줘요. 더 이상은 못 참아요. 장인의 약속을 반신반의하며 뒷골 콩밭으로 향한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린 비로 안 그래도 고즈넉한 잣나무, 소나무 숲 사이 길은 더없이 폭신폭신. 그 순간이다.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그녀들이 다가오는 게 아닌가. 결코 머물 수 없는 눈웃음의 그녀들이.”
아주 치명적이었던 들병이들 ‘눈웃음 길’을 스치듯 빠져나오면서 그 들병이 꾐에 빠졌던 근식이가 걷던 그 ‘한숨사연 길’을 돌아본다. 오죽하면 자기 집 솥을 훔쳤을까? 세월의 무게만큼 겹겹이 쌓인 잣나무 가지들을 밟고선 심호흡 여러 번에 팔다리도 죽죽 펼쳐본다. 오전 10시에서 12시 사이에 가장 많이 뿜어낸다지 아마. 이윽고 마주한 두 갈림길. 어느 쪽을 택할 텐가? 동백꽃(생강나무) 길 따라 정상도 좋겠고 산골나그네 길 따라 터벅터벅 걸어도 좋겠고. 오늘은 기어코 산골나그네가 병든 남편을 끌고 사라진 으슥한 산 저편으로 가볼 텐가?
김유정역 실레마을에선 김유정문학촌을 구경하고 난 다음 둘레길인 ‘실레마을 이야기길’을 반드시 한 바퀴 산책해야 한다. TV 프로그램 ‘알쓸신잡’의 그곳, 인쇄박물관이 지척에 있는데 많은 분들이 모르고 그냥 지나치고 만다. 김유정 선생이 귀향해 야학을 일으켰던 곳, 금병의숙(錦屛義塾)에서의 인증샷도 의미 있겠고 기차카페로 개조된 폐김유정역에서 타임킬링도 가성비 있다. 인근엔 레일바이크 장도 있고. 또 '먹방'도 빠질 수 없으리. 춘천 하면 닭갈비 아닌가? 역전에서 ‘점순네’를 찾으시라.
꽃 피고 새 우는 고궁 산책[창덕궁]_덕혜옹주가 남긴 마지막 메모를 찾아서
4월 어느 날. 마침 하늘빛은 미세먼지를 걷어내고 바깥 기운도 그리 차갑지 않다. 어제 생일을 챙겨주지 못한 아내를 위해 함께 집을 나섰다. 막상 어디로 가야 하나? 눈치를 살피는데 그냥 ‘가까운 곳’으로 가잔다. 더 어려운 숙제라고?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반겨주는, 다리품 많이 팔지 않아도 되는,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은 어떨까.
1405년 태종 때 제2의 왕궁으로 창건되어 임진왜란 이후 불타버린 경복궁을 대신한 곳. 마지막 임금 순종 때까지 약 270여 년간 왕조의 정궁 역할을 한 곳. 그나마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시크릿 가든’인 후원이 있어 자연과의 조화미와 전통의 조경미를 만끽한 적 있으신지. 그러나 오늘의 관심사는 따로 있다.
바로 낙선재! 경복궁의 건청궁이 그러하듯 창덕궁 내 단청을 하지 않은 유일한 곳. 여인의 '비운' 같은 게 서려 있다고나 할까?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가 말년을 보낸 곳(정확히는 낙선재의 우측 끝에 있는 수강재). 두리번두리번 돌아서 드디어 만난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어쩌면 혼신의 힘으로 써내려간 것일까. 그녀의 마지막 편지(메모)에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옹주는 1989년 4월 12일, 향년 77세로 이곳 낙선재에서 운명한다. 새들이 우짖고 꽃들이 피어나는 4월이면 다시 찾아오고 싶은 곳. 올봄에 방문하신다면 한 가지 추가할 곳이 생겼다. 작년 말에 재개관한 창경궁 대온실이 바로 그곳. 후원 쪽으로 가면 이웃한 창경궁과 연결되는 출입구가 있는데 지척이니 함께 둘러보면 ‘엄지 척’ 장담할 수 있다.
세종마을 도보여행_이 골목 저 골목 헤매기 좋아라
세종마을은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사이에 있는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부 지역을 말한다. 경복궁 서편에 있다 하여 북촌에 대비해 ‘서촌’으로 소문난 곳이다.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입구를 나와 대로를 따라 걷노라면 이윽고 우리은행 건물이 나타난다. 도보여행은 여기서부터 ‘딱’이다.
좌측 골목길로 접어들면 세종마을의 주요 목적지 중 하나인 ‘이상의 집(터)’이 나온다. 백부의 권유로 건축과에 입학한 시인은 1929년 3월, 수석으로 졸업하는데 화가의 꿈을 늘 간직하고 있었다고. 얼핏 카페 같은 이곳엔 비밀의 문이 있는데 그곳을 통하면 잠시나마 그와 호흡할 수 있다. 한 걸음 두 걸음 올라선 다음 이내 날개를 펼쳐 오래된 기와지붕 위로 훨훨 날아올라보라. 이걸 놓치고선 여길 다녀갔다 말할 수 없으리.
할머님과 며느님께서 푸근한 미소와 여유로 차근차근 귀엣말하시듯 이곳저곳 소상히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있는 헌책방’이 다음 코스다. 고인이 된 창업주 할아버지가 결혼하면서 부부의 가운데 이름을 따서 상호로 정했다는 곳, 대오서점이다. 분수를 아는 즐거움 정도로 해석되는 가훈 이야기, 다락방 사연, 풍금 이야기, 드라마 ‘상어’의 주인공(손예진과 김남길) 뒷담화(둘은 흥행작 ‘해적’에서 다시 인연을 이어간다)까지 줄줄 풀어놓으셨는데 그동안 세월이 좀 흘렀나보다. 없던 액세서리 진열대도, 사진 촬영금지 팻말도 보이고 그새 입장료(2500원)도 훌쩍 인상됐다. 오늘따라 주인장도 안보이고 대신 시니어 알바께서 맞이해준다. 가수 아이유가 앨범사진을 찍었다는 상업적 내음 물씬 나는 설명엔 노코멘트할밖에.
좀 걷다 보면 공통으로 생각나는 건 뭐? 때맞춰 신기하게 나타난 곳이 ‘통인시장’이다. ‘골라먹는 맛과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잡도리 쉼터 파라솔 아래에서 ‘셀프’로 즐기기도 편하다. 먼저 1인 5000원 하는 도시락을 구입하면 되는데 엽전 열 냥을 제공하니 하나에 500원인 셈. 그 복잡한 골목길에서 기다랗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 박노수미술관을 지나서 수성계곡 물소리를 벗 삼아 기린교를 건너는 상상도 분명 힐링이다. 다리품을 팔아 ‘시인의 언덕’에 오르면 북한산은 물론 북악산 아래 청와대, 경복궁 일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교통 편리한 역세권에 세종대왕, 정철을 비롯해 수많은 다양한 인물들이 살다 간 흔적이 이리도 집약된 곳 또 어디에 있을까? 종로구에 신청하면 해설사와의 동반 투어도 가능하니 봄날엔 놓치지 마시라. 서촌에 바람이 부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인가? 봄날은 가고 있다.
서울시 지하철 1호선 동묘역과 6호선 창신역 사이의 창신동은 최근 예쁜 옛 동네로 주목받고 있다. 낡고 오래되면 ‘뉴타운’이라 이름 붙여 첨단 건축물을 세우고 땅값을 올리는 것이 불과 몇 년 전까지 도시의 운명이었다. 창신동은 개발을 거부하고 주민들의 푸근함을 담아 이른바 재생의 길을 택했다. 창신동 구석구석 남아 있는 기억 중 하나가 바로 동덕여자중·고등학교다. 1960년대, 단발머리 어린 숙녀 박혜경(朴惠慶·66)은 창신동 이곳저곳을 누비며 추억을 쌓았다.
우리 학교 동덕여자중·고등학교
박혜경 동년기자에게 창신동은 동덕여중·고 시절 기억과 함께한다. 1986년에 학교가 서초구 방배동으로 이전해 사실상 그 시절의 흔적이라든가 추억 한 자락 남은 것이 없었다. 운동장이 있던 자리에는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섰다. 참새방앗간 드나들듯 다녔던 문방구는 반찬가게가 돼버렸고 말이다. 하지만 박혜경 동년기자의 눈은 기자의 눈과 달랐다. 아파트 입구를 보며 학교 정문을 설명하고, 그 너머 너른 학교 운동장과 숱한 세월의 더께가 앉은 수위실이며 귀밑머리 1cm를 외치는 규율부 학생들을 회상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추억 속 교정을 거니는 듯 말이다.
“지금 창신동 두산아파트 자리가 바로 우리 학교가 있던 자리예요. 요즘은 가수 아이유가 나온 학교로 유명하더라고요.(웃음) 우리 때는 시험을 쳐서 들어갔는데 저도 무사히 잘 붙어서 동덕여중·고를 다녔어요. 일제강점기 때 조동식 박사가 우리 민족이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우선이고, 여성도 교육받아야 한다며 세운 게 우리 학교거든요.”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우승 주역인 탁구선수 정현숙 씨와는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다. 동덕여고는 사라예보대회로 세계에 이름을 날리기 전에도 탁구로 유명한 학교였다. 당시 이에리사 선수(서울여상)를 제외한 정현숙, 나인숙, 박미라, 김순옥 선수 모두가 동덕여고 출신이다. 방과 후 특별활동으로 무용을 할 때마다 강당 한 편에서 열심히 운동하는 탁구선수 친구들을 봐왔다.
민족학교이자 독립운동가의 산실
여기서 잠깐! 현재 동덕여자고등학교 사서교사이자 59회 졸업생인 이숙희 씨의 추억 속을 좀 들춰보기로 하자. 옛 사진을 구하기 위해 동덕여고에 연락을 했더니 마침 이 학교 졸업생인 이숙희 씨를 소개해준 것.
“동덕은 순수 민족자본으로 세운 민족학교입니다. 1908년 스물두 살이던 조동식 박사가 동원여자의숙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빨리 독립을 하려면 여성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어요. 옛날 양반 댁은 딸들을 동덕여고로 보냈다더군요. 그리고 여성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학교이기도 합니다.”
3·1운동 만세사건 때 동덕 학생들이 태극기를 몸에 숨겨 만세 현장으로 가서 전달했다. 현재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에는 동덕여고 시절 단짝이었던 18회 이효정과 박진홍이 눈물의 상봉을 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석고상이 설치돼 있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돼 1935년 4월 이곳에서 재회했다. 일제강점기 학교의 명성 또한 높았다고 덧붙였다.
“그 시기 우리 학교는 전국구 학교였어요. 함경도 함흥, 명천, 경상도 봉화, 울주, 마산, 전라도 고창, 제주도 등지에서도 동덕을 왔으니까요.”
지방의 한 중학교에서 우등상을 놓치지 않았던 이숙희 씨 또한 1972년 서울로 유학을 올 때 여성 교육의 전통적인 명문의 이미지를 가진 동덕여고를 선택했다.
동대문 아파트와 낭만의 스케이트장
다시 박혜경 동년기자의 추억으로 돌아가서 학교 주변 이야기에 대해 들어보자. 학교 밖을 나와 학생들 사이의 핫 플레이스는 바로 동대문 스케이트장이었다. 이곳도 안타깝게 남아 있는 것 하나 없이 찜질방 건물이 들어서 아쉬움을 남겼다.
“동대문 친구들이랑 자주 가서 놀았어요. 얼음 바닥 정리 시간이 되면 다들 스케이트장 밖으로 나가잖아요. 그때 매점에서 남학생들을 만나는 거예요. 일종의 즉석만남이요.(웃음) 음악소리가 들리면 스케이트장으로 가서 기차를 만들 듯 길게 늘어서서 같이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어요.”
1964년 1월에 문을 연 동대문 스케이트장은 우리나라에 생긴 첫 실내 스케이트장이었다. 스케이트가 붐이었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스케이트를 타려면 논바닥이 꽝꽝 어는 겨울을 기다려야만 했다. 사시사철 얼음을 지칠 수 있는 실내 스케이트장의 출현은 일대 사건이었다. 오전 8시부터 밤 9시까지 연중무휴로 운영된 동대문 스케이트장은 성황을 이루다 롤러스케이트장의 출연과 다양한 놀이 시설 도입으로 경영 악화를 겪다가 여러 번의 폐점 위기에 봉착하더니 1990년대 중반 자취를 감췄다.
동대문 스케이트장 바로 옆에는 연예인들이 많이 살았다 하여 ‘연예인 아파트’로 불리던 동대문 아파트가 있다. 1965년 완공된 7층짜리 건물로 지은 지 50년이 넘은 이 아파트는 지금까지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고급 아파트였던 동대문 아파트는 중앙정원형으로 지붕이 없는 형태로 요즘 건축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로 만들어졌다. 영화 숨바꼭질의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현존하는 아파트 중 두 번째로 오래된 동대문아파트는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창신동 일대 입학과 졸업 철이면 발 디딜 틈 없이 문전성시를 이루던 진고개 식당을 끝으로 박혜경 동년기자와의 데이트를 마무리했다. 창신동 이곳저곳을 거닐며 아이처럼 좋아하던 박혜경 동년기자의 웃음소리가 지금까지도 들리는 듯하다. 창신동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도 많지만 여전히 남아 함께 숨 쉬고 있는 것도 많다. 동대문 아파트도 그렇고 백남준의 생가를 복원한 백남준 기념관, 곳곳에 옛집들도 남아 있다. 창신동의 추억이 있는 독자라면 날씨가 풀리는 어느 날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산책 나가 보시기를 권한다.
접하는 순간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곧 칠순을 앞두고 있는 최백호(崔白虎·68) 가 부르는 노래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 소리는 흐르는 세월 속에서 수만 가지 감각들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예술품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그렇게 자신만의 독보적인 세계를 만들어낸 흔치 않은 예술가의 자리를 갖게 된 그가 이제 영화감독이라는 오랜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 않고 종합적인 예술인으로서의 자신을 완성해가고 있는 최백호를 만나 미래로 나아가는 그의 모습을 확인해봤다.
청년 최백호는 친구 매형의 라이브 카페에서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1977년에 첫 앨범을 낸 이후 어언 40년, 이제 그의 목소리에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두터운 세월의 결이 느껴진다. 그러나 1950년에 태어나서 전후 베이비붐 세대와 함께 살아오면서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낸 그는 지금 ‘은퇴’라는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가수 중 한 명일 것이다. 이적, 아이유, 박주원 등 젊은 실력파 후배들과의 협업과 월드 뮤직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도전 등 최백호는 새로운 피로 자신의 감수성을 뜨겁게 채우고 있는 중이다.
계획하며 살지 않는 사람
그뿐만이 아니다. 최백호의 예술적 취향은 일찌감치 화가 쪽으로도 뻗어서 다수의 작품 전시회를 가졌다. 그리고 2018년 4월에 열릴 다섯 번째 전시회도 준비 중이다.
“스무 점 정도 올릴 예정이에요. 테마는 나무고요. 제가 나무밖에 못 그리기도 하고.(웃음)”
그는 자신이 계획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런데 그의 ‘그때그때 대충대충 살아왔다’는 말은 ‘먼 계획을 세우기 어려울 정도로 그때그때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의미도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주변 사람만 피곤하죠.(웃음) 41주년이 되는 올해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영화감독에 도전하고자 합니다. 갑작스런 일이 아니고 사실 오래 준비해왔어요. 시나리오를 썼고 홍보 계획도 세웠고.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없어서 못 만들고 있었죠. 마음에 딱 맞는 사람이 없었어요.”
영화 제목은 ‘미사리’. 그는 남자 주인공으로 가수를 생각하고 있다 했다. 영상과 음악 위주의 영화가 될 것이기에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해선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영화감독으로의 새로운 도전
기왕 미사리 얘기가 나왔으니 미사리와 음악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시니어에게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미사리에서는 4~5년 정도 공연을 한 적 있어요. 지금은 미사리 카페가 두세 군데 남았나.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조금 있어야 했는데, 우리나라는 뭐든 잘된다고 하면 다 달려들어서 하려다가 힘이 더 드는 지경이 되고 말아요.”
미사리가 쇠퇴한 이유는 가수 출연료 때문이었다고 한다. 인기를 끌자 라이브 카페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출연 가수들 출연료가 치솟게 됐다. 그런데 문제는 가수 출연료가 오르면 음식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노래가 좋다고 해도 음식 맛이 없으면 누가 찾겠는가.
“그래서 가수들이 모여서 출연료를 올리지 말자고 얘기했어요. 출연료 기준은 송창식 선배에게 두자고 했죠. 그런데 그게 안 지켜지더군요. 그래서 시장이 흐려졌고…. 우리나라는 참 낭떠러지가 있는데도 밀려가요.”
혹시 미사리 같은 음악의 대안공간을 다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그러한 궁금증에 선유도가 좋은 공간이 될 수 있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선유도 안에 공연장이나 레코딩 스튜디오를 만들고, 코너마다 버스킹을 할 수 있게 한 다음 입장료는 3000~5000원 정도 받으면 좋은 이벤트 공간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요. 홍대와도 연결돼서 다리에서 버스킹도 가능할 테고, 좋은 관광코스로도 활용할 수 있죠.”
과거에는 자연주의적인 느낌이 있었지만 요즘은 도로가 나고 식당이 난립해서 이제 변해버린 미사리의 운명에 대하여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이 배어나왔다. 그러한 느낌이 그가 만들 영화에도 담기게 될까 궁금했다.
“영화감독은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어요. 원래는 미대를 가고 싶어 그림 공부를 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대학을 포기하고 군대를 갔죠. 그런데 군대에서 몸이 안 좋아서 나오게 됐고, 생활 때문에 노래를 시작했죠. 영화는 머릿속에 계속 갖고 있던 생각인데, 아마 이번 영화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예요.(웃음)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로 만들고 싶어요.”
최백호의 고민
사단법인 한국음악발전소 대표, 그리고 문화관광부와 마포구가 협약해 만든 음악 창작공간인 뮤지스땅스 대장으로도 일하고 있는 최백호는 어찌 생각하면 가수 일 이상으로 행정적인 영역들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런 입장에서 나오는 목소리에는 현장에서 부딪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현실감이 있었다.
그가 이끄는 한국음악발전소는 무소속 프로젝트라 하여 소속사 없는 실력 있는 뮤지션들을 모아서 경연대회를 하고 있다. 413개 팀들 중 8팀을 뽑아서 앨범을 만들었고 지난 연말 12월 15일에 홍대 상상마당에서 공연을 했다. 연령, 장르 제한은 없다. 덕분에 힙합부터 국악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독립음악가들을 발굴하는 콘테스트로 참여율이 높은 편이다. 그런데 올해가 4회째인데, 예산이 없어서 문제가 되고 있단다. 지원해주던 단체에서 지원을 끊은 것이다. 다행히 3회는 CJ에서 지원해 무사히 프로젝트를 마칠 수 있었다. 그에게 행정가로서 겪어야 하는 이러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음악창작소 프로젝트가 있는데 정부에서 전체 운영자금으로 10억 원 규모를 책정했어요. 원래 시작은 전국 세 군데에서 했어요. 그래서 세 곳으로 자금이 나뉘어 지원됐죠. 그런데 지방에서도 참여하기 시작해서 지원해야 할 곳이 여덟 군데로 늘어난 거예요. 문제는 인디밴드가 없을 것 같은 지역에도 지원금이 들어간다는 거죠. 인디밴드를 한다는 사람들은 다 서울로 오는 게 현실인데, 여덟 곳으로 늘어났어도 세 군데일 때의 예산으로 계속 쓰고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면 말도 안 되잖아요? 그래서 15억 원으로 늘려달라고 요청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죠.”
뮤지스땅스 대장으로서 속 터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도 자체 운영이 잘되고 있으며 후배들이 좋아한다는 게 보람이다.
한마디 잘못하면 삶이 무효가 되는 세상
단체의 장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 만나는 일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음악 작업 차원에서도 인디밴드부터 아이돌 등 10대부터 노년까지 남녀노소를 다 만나며 사는 것이 최백호의 요즘 삶이다. 그렇게 많이 만나다 보면 사람 보는 눈이 생기지 않을까.
“특별히 사람을 평가해서 만나는 건 아니에요. 거리를 어떻게 두느냐의 차이죠. 그런데 오랜 경험으로 처음 보고 대화를 한 번 해보면 대충 그 사람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나이 들면서 더 멋있어 보인다고 하자 그는 너털웃음을 날렸다.
“젊었을 적에 워낙 별로여서 나이 드니 조금 나아진 거지.(웃음) 나이 들수록 조심해야 될 게 많아요. 사람을 사귈 때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그래요. 가장 중요한 게 말이죠.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해요. 우리말이 거칠고 극단적이어서 잘 써야 하거든요. 아주 품위 있는 말도 가능하고 정말 천박한 말도 가능하고. 외국어에 비해 그 폭이 훨씬 크니 상처를 주게 되는 게 우리 말이죠.”
그러고 보니 그는 SBS 라디오에서 ‘최백호의 낭만시대’ 진행을 맡고 있다. 대중과 소통하는 중심에 있으니 당연히 말에 대해 더욱 민감한 경험을 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올해 10년이 되죠. 라디오를 하고 있어서 그런 경험을 많이 했어요. 요즘은 한마디 잘못하면 삶이 리셋되는 세상이에요. 그래서 말을 조심하려면 되도록 사람 만나는 걸 줄여야 해요.(웃음)”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것처럼, 그도 사람들이 SNS를 하는 것을 이해 못한다고 말했다.
“특히 연예인들이 SNS에서 서로 모여 왜 자기 생각을 그리 밝혀야 하는가 싶죠. 책임을 지려면 사회적 활동을 하든지…. 저는 모르겠어요. 자기 일만 열심히 해도 될 텐데.”
최백호의 희로애락
최백호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라고 회고했다.
“재수할 때였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노래를 한다고 3~4년 고생했죠. 결핵을 앓았어요. 생활은 안 되고. 그 시절 너무 심한 고생을 했기 때문에 지금도 어지간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의 아버지는 고 최원봉 국회의원. 제2대 국회의원이었으며 스물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당선됐지만 최백호가 태어난 지 5개월 되던 때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아버지에 대해선 무한한 존경심이 있어요. 비록 일찍 돌아가셨지만 그 존재는 계속 제 곁에 있었고, 제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딸이 태어났을 때, 그리고 그녀가 시집갔을 때를 꼽았다.
“딸아이는 사정 때문에 다섯 살 때 미국으로 갔어요. 처가가 미국에 있거든요. 그때부터 딸을 일 년에 두 번 정도 보면서 살았죠. 딸이 사춘기를 겪었을 때 아내는 옆에 있었지만 나는 없었어요. 그 아이가 스무 살에 한국으로 잠시 왔는데, 그때만 해도 저와 거리가 있었고 자주 싸웠죠.”
그 시기 이후 딸은 다시 공부를 하러 외국을 가게 됐고 나이를 먹으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아버지가 왜 자신을 그렇게 멀리했나를 이해하면서 굉장히 친해졌어요. 이젠 뭐 친구처럼 모든 걸 알고 지내요. 결혼식도 예식장에서 하지 말고 바닷가에서 하라고 했더니 정말 바닷가에서 했고. 저도 딸을 이해하게 됐죠. 딸아이도 저에 대해선 이제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구나 싶어요. 정말 큰 행복이죠.”
가진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얻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능력에 비해 많이 성공했다 싶죠.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그림도, 음악도 따로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가진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얻었어요.”
시간은 그를 성장시켰고 변화하게 만들었다. 그는 옛날에는 곡을 써도 남을 안 줬다고 한다. 자신이 불러야 하는 노래다 싶어서 욕심이 나서 계속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탐이 나는 곡이라도 주변 후배들에게 준다. 히트곡을 더 만들고 싶은 욕심은 없기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생긴 또 다른 변화, 그는 좀 더 세심해졌다. 그가 현재 부산에서 진행하고 있는 ‘깡깡이 마을 프로젝트’도 과거 같으면 벌써 끝났어야 할 일이다. 깡깡이 마을 프로젝트는 과거 조선소가 있었던 마을을 문화마을로 키우려는 공공예술 프로젝트다. 이 작업에 그는 두 달간 매달려 있는 상태다. 그러나 시간이 늦어져도 그만큼 결과물이 좋아지니까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젊을 때 성격이 급했고 지금도 급한 편이라고 말하는 그는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변화된 모습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있다.
“새해 소망은 올가을부터 만들기 시작할 영화를 잘 완성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하니까 자금을 마련하는 일이 큰일이 되겠죠.”
원로임에도 고고하지 않고 일가를 이뤘음에도 계속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가 가진 그러한 소탈함이 단단한 철학으로 다듬어져 있는 것이야말로 그는 영원히 예술가이며 계속 우리 곁에 있으리라는 안정감을 주는 것 아닐까. 최백호의 새로운 도전인 영화가 어떤 미학을 보여줄지 기대되는 이유다.
2017년 정유년의 한 해도 저물고 있다. 올해는 국정농단으로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져 5월 9일 조기 대선을 통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에 당선돼 취임하는 등 격변의 한 해였다. 대중문화계 역시 세월호 특별법 서명, 야당 후보 지지 등의 이유로 송강호, 정우성, 김혜수 등 수많은 연예인을 포함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와 김여진, 문성근, 김미화, 김제동, 김규리 등 82명의 연예인을 좌파 연예인으로 규정해 여론 조작, 방송계 퇴출 등을 시도한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보고서가 공개돼 큰 파문이 일었다. 또한 사드로 촉발된 중국 당국의 한한령(限韓令·한류금지령)으로 대중문화 산업계가 직격탄을 맞는 등 크고 작은 일이 많았다.
2017년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고 유행을 선도한 대중문화 트렌드와 키워드는 무엇일까. 우선 영화계에선 역사적 사건과 인물 등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쏟아져 흥행에 성공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 트렌드다. 한국 민주화에 큰 역할을 한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 병자호란 당시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을 소재로 한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상화한 , 2007년 미 의회 공개 청문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사죄결의안 통과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용수 할머니의 가슴 아픈 실화를 모티브로 한 , 일제 강점기 일본 하시마 섬에 강제 동원된 800여 명의 조선인 참상을 다룬 ,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으로 가 항일운동에 매진했던 독립운동가 박열을 전면에 내세운 , 1986년 명성황후 시해범을 죽이고 사형선고를 받는 등 청년기의 김구 선생을 다룬 등 많은 영화가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뤄 눈길을 끌었다. 가 12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로는 15번째 1000만 영화로 등극하는 등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룬 실화 영화들이 흥행도 호조를 보였다.
올해 방송 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은 ·· 등 검사나 변호사, 재벌 등 권력과 자본의 탐욕과 비리를 다루거나 · 등 언론계를 조명한 작품들과 을 비롯한 갑질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거나 화제가 됐다는 점이다. 이들 드라마는 지도층의 부패가 심각하고 갑질이 심화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대중문화계의 큰손으로 등장한 20~40대 여성들의 절대적 지지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남자 스타들이 압도적 흥행 성적을 거둔 것도 2017년 대중문화계를 지배한 트렌드 중 하나다. 12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송강호 주연의 , 718만 명이 본 현빈, 유해진 주연의 를 비롯해 ··· 등 올해 들어 흥행 상위를 차지하는 영화들이 한결같이 남자 주연 영화였다.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케이블 TV 드라마 사상 최초로 20%대를 돌파한 공유 주연의 (tvN), 28% 시청률을 기록한 지성 주연의 (SBS), 20%대를 유지한 남궁민 주연의 (KBS2) 등 성공한 드라마 모두 남자 주연 작품이다.
대중의 관심이 높은 예능 프로그램은 (SBS), (MBC에브리원), (JTBC), (JTBC2), (JTBC), (OLIVE), (KBS1), (TV조선) 등 외국인 출연 예능과 (채널A), ·(tvN), ·(TV조선), ·(E채널), ···(SBS), (KBS2), (KBS드라마), (MBN) 등 연예인의 남편, 아내, 자녀, 부모 등이 출연한 연예인 가족 예능이 대세를 이뤘다. 또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지 말고 지금의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는 ‘욜로(YOLO)’와 혼술·혼밥 등 급증하고 있는 ‘1인 가구’의 문화가 예능 키워드로 등장해 (SBS)에서부터 (MBN)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로 활용됐다.
2017년 대중음악계는 신세대 가수와 아이돌 그룹의 1970~1990년대 히트곡 리메이크 열풍이 강타했다. 양희은이 1991년에 불러 인기를 얻은 ‘가을 아침’과 1970년대 정미조가 불러 히트한 ‘개여울’이 올해 아이유의 노래로 재탄생해 음원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큰 인기를 얻었다. 아이유는 9월 발표한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2’에서 정미조의 ‘개여울’,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등 1970~1990년대 히트곡을 완성도 높게 리메이크해 큰 관심을 모았다.
걸 그룹 마마무의 솔라도 김도향의 ‘바보처럼 살았군요’,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 해바라기의 ‘행복을 주는 사람’ 등을 리메이크한 앨범을 발표해 젊은층뿐만 아니라 50~60대 중장년층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올해 대중음악계를 관통한 리메이크 트렌드는 젊은 세대에게 과거의 명곡들을 소개하는 동시에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을 선물하는 효과가 높아 대중음악의 수용층을 확장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세대 간 이해의 접점을 확대했다.
1996년 H.O.T. 데뷔를 시작으로 젝스키스, S.E.S., 핑클 등 1990년대 중·후반 본격화한 아이돌 그룹 시대는 2000년대 들어 2PM, 슈퍼주니어, 원더걸스, 소녀시대 등 2세대 아이돌 그룹 중심으로 세대 교체가 됐다. 올해 들어 원더걸스, 씨스타 등 많은 아이돌 그룹이 해체되고 소녀시대의 멤버 서현이 탈퇴하는 등 2세대 아이돌 그룹들이 본격적으로 퇴장했다. 올해는 방탄소년단, 트와이스, 여자친구, 블랙핑크 등 2015년 전후로 데뷔한 3세대 아이돌 그룹이 국내 음악계를 평정하고 K팝 한류를 이끄는 주체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연예계에 안타까운 일도 많았다. 큰 사랑을 받던 스타들이 숨져 대중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KBS2 주말극 촬영을 끝낸 지 얼마 안 된
4월 9일 중견 스타 김영애가 췌장암으로 66년간의 삶을 마무리했다. 46년간 연기자 생활도 끝나는 순간이었다. “연기는 내게 산소이자 숨구멍 같은 의미예요. 배우가 아닌 나를 생각할 수가 없어요.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다시 배우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천생 배우였던 김영애는 20세에 연기를 시작해 , , , , , , , 까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정교한 연기력과 빼어난 캐릭터 창출력으로 시청자와 관객에게 감동을 줬다.
와 사극 등에서 보인 강렬한 카리스마 연기에서 영화 의 일상적 연기까지 스펙트럼 넓은 연기로 관객과 시청자에게 기쁨을 준 중견 배우 윤소정은 패혈증으로 6월 16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73년의 삶 중 연기자로 살아온 세월이 55년에 이를 정도로 윤소정에게 있어 배우라는 직업은 삶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57년 동안 연극무대에서, 스크린에서 그리고 TV 화면에서 빛나는 조연 연기와 사투리 연기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중견 배우 김지영도 폐암으로 2월 19일 79년간의 삶을 마감했다.
2017년 10월 30일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빼어난 연기를 선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펼친 김주혁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김주혁은 선 굵은 연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김무생의 아들로 1998년 SBS 탤런트로 연예계에 데뷔한 뒤 드라마 , , , , 영화 , , 등 수많은 작품에 주연으로 나서 아버지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다. 20년간의 배우생활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난 김주혁의 나이는 45세였다.
1972년부터 1979년까지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디바 정미조가 오랜 우회로를 거쳐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개여울’과 ‘휘파람을 부세요’와 같은 다양한 히트곡들이 가수 정미조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르겠지만, 사실 그녀는 가수로서의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화가로서의 인생 2막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인생의 제3막에서 가수로 돌아온 그녀는 그동안 쌓은 세월의 깊이를 유감없이 선보이고 있다. 웅숭깊고 밀도감 있는 호흡을 가지게 된 그녀의 노래와 함께 삶의 궤적을 들여다봤다.
글 김영순 기자kys0701@etoday.co.kr
1972년, ‘개여울’로 데뷔한 정미조는 그 후 7년 동안 대한민국을 휘어잡았던 시대의 디바였다. ‘휘파람을 부세요’, ‘그리운 생각’, ‘아! 사랑아’와 같은 히트곡들로 차트의 정점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1979년이 되자 돌연 가수생활을 접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미술을 공부해 박사 학위까지 받은 그녀는 1993년 한국으로 돌아와 화가이자 미대 교수로서의 삶을 살며 인생 2막을 열었다. 그리고 이제 인생 3막. 다시 가수로 복귀한 그녀가 기자 앞에 앉아 있다. 브라운관에서 볼 수 있었던 젊은 시절의 에너지 넘치던 모습은 이제 온화한 무게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38년 만에 나에게 맞는 옷을 찾았다”
“2015년에 23년간 일했던 교수직에서 은퇴했죠. 마음이 홀가분했어요. 은퇴한 사람들은 흔히 ‘저녁에 집에 가면 뭘 하지?’ 하는데 난 행복했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됐으니까요.”
37년. 정미조가 수원대학교 조형예술학부 서양화과 교수로 있다가 다시 무대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이다. 그 시간 그대로, 그녀는 ‘37년’이라는 제목으로 2016년 자신의 앨범을 내놨다.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싶어 걱정됐죠. 그리고 CD로 앨범을 만들어 내놔야 하니 부담감과 책임감이 컸죠. 그런데 이주엽 JNH뮤직 대표님이 정말로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목소리였다고 응원해주셨고 제가 부르게 될 노래들의 가사도 너무 마음에 들었고요.”
그리고 지난 11월 17일, 그녀는 앨범을 또 발표했다. 이번 앨범의 제목은 ‘젊은 날의 영혼’. 라틴 음악, 팝 재즈, 모던 포크 등 수록된 14곡에는 다양한 음악적 시도가 들어 있다. 그녀는 ‘38년 만에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았다’고 표현했다. 마침 올해는 그녀의 가수 데뷔 45주년이기도 하다.
“이번 앨범에서는 젊은 친구들과 함께했어요. 음악감독은 재즈 기타리스트 정수욱씨가 맡았습니다. 그리고 집시 기타리스트 박주원 씨가 작곡한 노래가 있고요. 박주원씨 어머니가 제 팬인데, 박주원씨가 그런 어머니를 위해서 작곡한 곡이에요. 편곡이 얼마나 좋은지, 기타와 다른 악기 연주자들과의 합이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Mnet의 오디션 프로그램 에서 나왔던 제주소년 오연준과는 듀엣으로 손자와 대화하듯 노래를 불렀죠.”
대한민국이 사랑한 목소리
오래전 얘기다. 가수로 데뷔하기 전 정미조는 이화여대 안에서 노래 잘 부르기로 유명한 스타였다. 그러나 학교 안에서만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녀로선 갑갑한 일이었다. 그런데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레코드 회사 사장이 직접 그녀를 찾아왔다. 당연히 그녀의 이름을 건 앨범을 내고 싶다는 제안이었고, 서양화과에서 4년 동안 과 대표를 내리 맡을 정도로 성실한 학생이었던 그녀는 본격적으로 ‘가수를 하느냐, 마느냐’라는 갈림길에서 고민에 빠졌다. 그런 그녀의 고민을 해결한 것은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학과장이자 지도교수인 은사의 한마디였다.
“해봐라, 내 나이 되어 그때 한번 해볼걸 하며 후회하지 말고. 너는 공부 잘하니까 일단 가수로 활동하다가 나중에라도 대학원 가서 다시 공부하면 된다.”
지도교수의 한마디, 그리고 그녀의 결심은 적중했다. 세상 밖으로 나온 그녀의 목소리에 대한민국이 사랑에 빠진 것이다.
화가로서 자리매김한 인생 2막
“유학을 떠나서 몽마르트 언덕 8층 건물 꼭대기에서 살았어요. 한국에서 매니저, 운전기사 등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다가 혼자 지내며 밥까지 스스로 지어 먹어야 해서 너무 힘들었어요. 막 울기도 했고.”
그러나 힘들다고 돌아올 수는 없었다. 한국을 떠날 때 은퇴를 공언했고, 당시 최고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TBC(옛 동양방송) 예능 프로그램 에서 신인가수로 막 데뷔한 최백호 한 명만을 초대가수로 초청한 고별 특집까지 했었다.
“최백호 선생은 거기서 처음 만났어요. 정민섭 선생이 그때 나를 위해 ‘나 여기 있어요’를 써줬는데 그 노래를 중간쯤 불렀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거예요. 내 의지로 떠나는 거라 눈물이 안 나올 줄 알았어요.”
그렇게 했는데 파리까지 가서 다시 돌아올 수는 없었다. 그녀는 물방울 그림으로 유명한 김창렬 작가의 추천으로 파리에 있는 두 개의 국립학교 중 아르데코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 후는 가수가 아닌 재불 화가로서의 삶이었다. 6년 3개월 동안의 박사과정을 완료했고 모나코 전시회에서 상까지 받으면서 성공적인 서양화가로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1993년부터 수원대학교 교수로 지내면서 화가이자 교육자로서의 인생 2막의 삶을 살았다.
최백호, 손성제, 이주엽과의 인연
“어떤 전시회에 갔을 때 보니 최백호 선생이 자신의 그림 3점을 출품했더라고요. 그 그림들을 보니 너무 좋았어요. 미술계에서는 내가 중견이었으니까, 그림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다시 최백호 선생과의 교류가 다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교수생활을 한 20년쯤 했을 때, 최백호 선생이 점심을 먹자는 거예요.”
최백호가 정미조를 만난 이유는 간단했다. 다시 가요계로 돌아와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녀는 최백호를 통해 앨범 ‘37년’의 음악감독을 맡은 색소포니스트 손성제, 제작을 맡은 이주엽 JNH뮤직 대표 등 그녀와 함께 작업하게 될 음악계 인사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음악적 성과를 알고 다시 시작될 가능성을 확신했던 그들의 조력을 통해 그녀는 가요계를 떠난 1970년대와는 너무도 다른 환경 속에서 오래 닫혀 있었던 자신의 문을 다시 열었다.
“저는 37년 만의 녹음이라 잠도 못 이뤘죠. 그런데 손성제 교수가 굉장히 속도감 있게 작업을 잘했어요. 어떤 노래는 녹음하자마자 오케이 사인을 했어요. 첫 곡이 가장 좋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어렸을 때는 정말 신나게 불렀었구나 싶었다
마침 얼마 전에 나온 아이유의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둘’에는 정미조의 대표곡인 ‘개여울’이 리메이크되어 실려 있다. 아이유 특유의 여리고 애조가 깃든 곡 해석은 비슷한 나이대의 정미조가 보여줬던 목소리의 힘과 비교하면 묘한 재미가 있다. 아이유가 구사하는 창법은 ‘37년’ 앨범에 실린, 리뉴얼된 ‘개여울’에 더 가깝다. 그런데 막상 정미조는 자신의 인생 1막을 채웠던 가수로서의 엄청난 인기와 삶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제 인생 1막은 20대였는데, 한국에 돌아와 그 시절의 모습을 다시 보니 ‘아, 내가 정말 신나게 불렀구나, 젊음의 설익은 패기로 마구 전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많은 경험이 인생에 녹아들면 그 경험이 바로 소리가 되죠. 옛날의 제 소리가 시원시원해서 듣기 좋았다면 지금은 삶의 서러움, 슬픔이 배어든 소리가 됐어요.”
그녀의 말대로, 지금 그녀의 목소리는 젊었을 적 목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깊은 호흡, 긴 감성, 나이 든 이의 여백과 회한이 묻어나는 그녀의 창법은 한때 전설이었으나 오랜 시간을 돌아 다시 무대에 선 그녀의 모습에서 저 저명한 아프로 쿠반 밴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여성 보컬인 오마라 포르투온도가 떠오르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어른의 음악이 사라진 시대, 전설이 돌아오다
인터뷰에 함께 동석했던 이주엽 JNH뮤직 대표의 말대로 지금 한국은 ‘어른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어른의 음악에는 인생의 끝자락에 이른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서가 담겨 있기 마련이다. 7년 동안 우리나라 가요계를 뒤흔들고 사라졌다가 37년 만에 다시 나타난 정미조의 노래에는 그런 마법 같은 순간들이 담겨 있었다.
“이번 앨범은 곡들을 너무 잘 만났고 덕분에 제대로 만들었어요. 그러나 우여곡절이 유난히 많은 앨범이기도 했죠. 예를 들어 믹싱과 마스터링까지 다 됐는데, 들어보니 너무 화려해서 제가 가진 오리지널함이 줄어든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그 시점에서 완전히 새로 고치기도 했어요. 듀엣을 하기로 한 제주 소년 오연준군은 목소리는 아이인데 아이 같지 않은 성숙한 느낌이 있었죠. 그런데 막상 함께 불러보니 처음에는 음역대가 안 맞아서 노래가 제대로 안 나오기도 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극적으로 노래가 완성됐죠.”
이번 앨범 ‘젊은 날의 영혼’에는 정미조가 작곡한 노래들도 세 곡 들어갔다. ‘오해였어’는 작사와 작곡을, ‘난 가야지’와 ‘비 오는 오후’는 공동 작사·작곡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녀가 이번 앨범에 갖고 있는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열정은 그녀의 인생 3막이 금방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인생을 살아보니 때가 있어요. 수십 년 동안 이 노래들을 위해 시간을 보낸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는 들지 않았던 감정이죠. ‘지금이 내 때가 온 건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