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해가 짧지는 않습니다
이 길고 굽이 많은 세월을 ‘브라보’는 참 잘 견뎌냈습니다
- 정진홍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어느 시인의 ‘황혼’이라는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흘러간 시간이 참 짧아서
시간으로 셀 수가 없네
사족을 달 겨를도 없네
‘브라보’가 태어난 지 벌써 여섯 해라니요. 시간이 빠른지, 세월이 짧은지 참 알 수가 없습니다. 세월이 흐른 듯 머문 듯하여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기에도 모자란데 어느덧 그렇게 나이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여섯 해가 짧지는 않습니다. 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이제 졸업반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니 대학에 들어간 손자가 졸업하고 군대까지 마쳤다고 생각해보세요. 내가 은퇴할 때 꽃다발을 안겨주던 후배가 불쑥 자기도 이제 물러나게 되었다며 찾아온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여섯 해 짧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여섯 해는 세상이 변하고도 남을 만큼 긴 세월입니다. 게다가 지난 세월에는 ‘코로나19 사태’라는 뜬금없는 일로 사람살이가 바닥에서부터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길고 굽이 많은 세월을 ‘브라보’는 참 잘 견뎌냈습니다. 어느 세월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곤혹스러운 때인데 꿈을 지니게 해줬고 힘을 내게 해줬으며, 위로도 주고 즐거움도 주었습니다. 읽어 그러했고, 눈으로 보며 그러했으며, 기다리며 그러하기도 했고, 친구들에게 권하면서 그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부럽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생각을 되생각하기도 했고 조금은 자신이 가난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브라보’가 내 삶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참 고맙습니다. ‘브라보’를 내는 데 힘을 쏟고 계신 모든 분들에게요.
그리고 감히 부탁 말씀 올립니다. 이제는 중학교 1학년으로, 군대를 마치고 직장에 들어간 초년생으로, 나아가 10년 넘는 후배를 맞는 선배로, ‘브라보’도 세상과 더불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틈에 ‘브라보다움’의 울에 갇혔을지도 모르는 자기를 되살피면서요.
거듭, 참 고맙습니다.
가치 창조와 행복한 사회를 육성하는 길잡이
- 김형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요사이는 일의 가치가 행복의 가치였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지난 인생의 3분의 1을 가난하게 살았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부양가족 11식구의 가장이 되었다. 집도 없었다. 그래서 돈과 수입을 위해 고생스럽게 일했다.
안정기에 들어선 후에는 일의 가치를 찾아 일했다. 돈보다 일을 위해 일했다. 그 결과 일이 또 다른 일을 만들었기 때문에 더 많은 일을 했고, 수입도 증가했다. 일 자체가 행복했다. 일에서 인생의 가치를 높여간다는 체험을 했다.
70대 후반기부터는 일의 더 높은 가치를 깨달았다. 100사람이 100의 일을 하면 일의 목적이 100인 줄 알면서 살았는데, 100사람의 일의 목적이 다 같은 하나라는 체험을 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의 목적은 그 일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정치, 경제, 교육, 의료사업… 모두가 꼭 같은 하나의 목적을 갖는다. 그들의 일의 혜택으로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누가 가치 있는 일을 하는가. 돈을 벌어서 즐겁게 살려는 사람이 아니다. 수입이 적더라도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일이다.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무능한 교통부 장관보다 버스 운전기사가 수많은 손님들에게 미소와 안일을 주는 일이 더 귀하다. 출세나 명예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정치가보다 정직과 진실을 위하는 보통 사람들이 존경받아 마땅하다.
최선의 인생을 사는 사람은 누구인가. 더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사랑이 있는 고생’을 대신하는 사람이다. 그들이 희망과 행복을 주는 주인공인 것이다.
‘브라보(My Life)’가 그런 가치 창조와 행복한 사회를 육성하는 길잡이가 되어주면 감사하겠다.
한 해가 또 저뭅니다. 언제 시작했는지, 어쩌다 끝에 이르렀는지, 그저 망연하기만 합니다. 세월 흐름이 너무 빨라서요.
그런데도 참 알 수가 없습니다. 한 해 견디기는 왜 그리 긴지요. 해마다 그랬지만 올해는 이런 느낌이 한껏 더했습니다. 아무래도 코로나 탓이겠죠. ‘그놈의 옘병[染病]’이 퍼져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나날이 한 해 내내 이어졌으니 어서 끝나기만 기다리는 마음에 하루하루 지내는 일이 마냥 지루하기만 했던 거지요.
입마개 하기, 거리 두기, 생으로 사람 떼어놓기, 나돌아다니지 않기에서 비롯하여 집에 박혀 있기, 학교나 직장 제대로 못 가기에 이어 가게 문을 열 수도 닫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면서 익숙한 ‘일상’이 한꺼번에 무너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누구나 ‘다른 모습’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카톡에 매달리기, 주문배달 이용하기에서 비대면으로 공부하고 사업하기 등등에 이르기까지 그 변화는, 낯설고 불안하고 불편한 채, 누구나 살아가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시대 구분을 해야겠다는 말이 실감이 날 만큼 우리는 달라진 생활 환경에 들어선 거죠. 이런 것을 생각하면 올해는 고역스럽게 긴 한 해였습니다.
자연스레 이러한 사태에 대한 여러 발언이 들립니다. 코로나19 이전이 새삼 아쉬워 탄식하는 소리도 그 하나입니다. 참 좋고 감사하고 감격스럽기조차 한 것이었는데도 그 귀함을 알지 못했던 게으름에 대한 참회, 마땅히 아니라고 하면서 삼가고 고치곤 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마냥 분수없이 살던 어리석음에 대한 저린 후회가 그 소리에 담겨 있습니다. 조금은 낭만적이지만 자신을 추스르는 마음이 잔잔하게 전해집니다.
이와 이어진 생각의 자리에 있는 거겠지만 전혀 다른 소리도 들립니다. 아예 이 기회에 개인의 생각과 태도를 포함해서 사회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격한 소리가 그렇습니다. 잘 사는 공동체를 지으려면 다스림을 위한 힘을 절대화해야 한다는 논거를 코로나19 사태에서 찾아 펼치는 주장이 그러합니다. 섬뜩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 판단이 뒤흔들립니다.
이런 발언들을 듣다 보면 올 한 해는 코로나19를 기화로 우리네 삶의 온갖 모습들이 한꺼번에 드러난 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개인도 사회도 자기를 되살피게 한 거죠. 게다가 이 일을 온 세상이 동시에 겪고 있으니 이 ‘성찰’의 충동이 어쩌면 인류사의 흐름에 커다란 획을 그을 거라는 예상이 공허하게 들리질 않습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개인도 사회도 코로나19 앞에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진단을 받아 더 나은 ‘인류의 삶’을 구축하는 치유의 계기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찰의 내용입니다.
어떤 외신에 흥미로운 기사가 있더군요. 코로나19 사태로 대학 등록생이 지난 학기보다 이번 학기에 대략 3분의 1이 줄었답니다. 그런데 해설이 주목할 만한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학생을 포함한 시민들이 ‘대학이 개인과 사회를 위해 과연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곳인가?’ 하는 물음을 묻고 있는 것으로 이 현상을 읽고 있었습니다. 같은 조사에서는 학생들의 3분의 1 정도가 비대면 수업을 대면 수업보다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이미 생활 양태가 근원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는데 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거죠. 또 있습니다. 대학은 비대면 수업 때문에 일어나는 심각한 문제로 학생들의 부정행위의 폭발적인 증가를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도 들고 있습니다. 해설은 재앙을 기묘하게 이용하는 인간의 ‘사악한 적응력’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 조사 결과를 일반화하는 일은 조심스럽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올 한 해 겪은 코로나19의 문제는 실은 코로나라는 ‘역병’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되살펴보는 삶을 늘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도 인간이고, 변화가 이미 깊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것을 못 보고 안 본 것도 사람이고, 재앙조차 자기 이익을 위해 교활하게 ‘활용’하는 것도 인간이니까요.
새해에도 이 고약한 병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제는 같이 살아야죠. 재앙이 없었던 때가 언제는 있었나요? 그런데 그런 것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자리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나를 살펴 자기를 잘 건사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못된 것이 제풀에 풀려 물러납니다. 이런 다짐으로 새해를 맞으면 칙칙했던 올해를 그나마 잘 보내는 게 되지 않을는지요.
새해는 더 밝고 맑고 따뜻하길 빕니다.
한강을 낀 동네에 이사 와 산 지 이제 스무 해가 좀 넘었습니다. 그러니 한강 둔치를 걷는 일도 그 세월만큼 흘렀습니다. 이제 걷는 일은 제 일상입니다. 호흡과 다름이 없습니다.
걷기는 그 이전에도 제 일상이었습니다. 탈 거리가 드물기도 했습니다만 전쟁이 끝나고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저는 읍내에서 하숙이나 자취할 여유가 없어 집에서 학교까지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기간이 두 달 남짓했으니 오랜 일은 아닙니다만 새벽 5시에 집을 나서면 8시쯤 학교에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학교가 파하면 다시 그렇게 걸어 집에 돌아왔습니다. 하루에 여섯 시간 남짓을 걸은 셈이죠. 신작로는 지루했습니다. 너무 단조로웠죠. 그래서, 지름길이라고 했지만 그리 시간이 단축되었던 것은 아닌데, 저는 산길로 들어서서 오르내리며 그 긴 길을 걸었습니다. 그 길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요즘 차를 타고 내비게이션에 나타나는 거리로 보면 대략 12.3㎞쯤 됩니다.
그러나 그때 걷던 일은, 실은, 걸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헐레벌떡 학교에 늦지 않기 위해 달려간 것이어서 내가 지금 걷고 있다는 자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 탓이겠습니다만 저는 걷는 것이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역시 교통비와 무관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에 다닐 때도 종로 5가에서 가정교사하던 신설동까지 늘 걸었습니다. 걷는 것이 그냥 좋았습니다.
‘내가 지금 걷고 있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걸은 것은 오랜 뒤의 일입니다. 나이가 예순에 꽉 차게 이르렀을 때쯤부터 서서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한강 가에 와서 살기 시작했을 즈음입니다. 그러나 이때도 제 걷기가 제법 그럴 듯한 소요(逍遙)는 아니었습니다. 건강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저를 충동했고, 그래서 걷기라기보다 뜀박질로 강 둔치를 달렸습니다. 저는 한강철교에서 시작해 동작대교까지, 그리고 다시 그곳에서 출발한 곳까지, 온 힘을 다해 그야말로 질주를 했습니다. 때로는 두 왕복을 하기조차 했습니다. 겨울에도 온몸이 땀에 젖었지만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몸은 낡아갑니다. 얼마 뒤부터 저는 달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윽고 저는 속보를 하게 되었고, 그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거리를 터벅거리며 오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은 아예 어슬렁거립니다. 바야흐로 소요의 경지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겨우 이제 걷기를 하는 셈이죠.
어쩔 수 없습니다. 낡고 쇠해가는 몸이 저리게 느껴집니다. 이래저래 겪는 상실감이 뚜렷하게 진해집니다. 걸음걸이는 늙음을 드러내주는 가장 뚜렷한 표지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늙었는지 확인하려면 걸어보는 일보다 더 효과적인 측정 도구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슬렁거리는 지경에 이르면서 잃은 것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달리기할 때는 보이는 것이 동작대교와 한강철교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왕복을 끝내면 그 성취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달리기를 그만두고 속보를 하면서 저는 처음으로 제가 달리는 길이 보였습니다. 옆의 나무들도 실루엣처럼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마저 그만두고 터벅거리게 되자 하늘도 강의 물결도 내 호흡과 더불어 내 안에 안겼습니다. 나는 갑작스럽게 펼쳐지는 낯선 세상을 만나면서 놀랍고 경이로웠습니다. 달리기에서 이룬 성취감으로는 짐작하지 못한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슬렁거리는 요즘에는 바람 소리도 들리고 햇빛의 흔들림조차 보입니다. 물결이 일고 꽃이 피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바람과 하늘과 구름과 꽃과 나무와 그늘과 길이 어우러져 자기네들의 이야기를 펼쳐놓는 것조차 보이고 들립니다. 제가 그 대화에 끼어들기도 합니다. 낡아간다는 것은 잃어간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꿈도 꾸지 못한 많은 것을 새로 얻어간다는 일이기도 합니다. 걷다 보면 그렇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걸음조차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몸을 가진 인간이 안 아프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망발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걷지 못해 얼마간 한강 둔치에 나가 걷는 일상을 접어야 했습니다. 아쉽다 못해 절망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길이, 한강 둔치에 뻗어 있는 긴 길이, 저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너 기억하니? 서쪽을 향해 걸을 적에 만났던 황혼을! 너 그 신비 속에 안기고 싶다고 그러지 않았니? 내 끝이 거기 닿아 있는데 네가 내 위를 걸었던 것을 기억만 해도 나는 너를 그리 데려다줄 거야! 더 내 위를 걷지 못해도!”
달리기가 아닌 어슬렁거리는 걸음만으로도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넉넉한 지복(至福)의 경지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지난주부터 저는 다시 한강 둔치를 흐느적거리며 걷기 시작했습니다. 황혼의 신비로 이끌어줄 길과 더불어 내가 걷는 일이 이리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춥지 않은 겨울이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겨울은 겨울이어서 추위를 견디지 못해 숨을 죽였던 풀들이 봄이 되니 새싹을 돋우고 마침내 찬란하게 꽃을 피웠습니다. 나무들은 움을 돋아내더니 곧 신록을 우거지게 했습니다. 참 좋습니다. 올봄은 황사조차 심하지 않아 더 봄이 봄답습니다.
그런데 이 봄을 누리질 못합니다. 누리기는커녕 꽃을 찾아 예쁘다는 탄성조차 낼 수 없습니다. 봄바람을 쐴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혼자서도 그렇거니와 여럿이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합니다. 이제 봄은 없습니다. 있어도 없습니다. 아니, 옛날의 봄은 온갖 그때의 알알하게 황홀했던 기억들을 다 싸안은 채 사라지고 지금은 그 찬란한 봄을 우울한 방구석에서, 그것도 가뜩 움츠린 두려움 속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겹겹이 가려진 병동에서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이 보입니다. 장례조차 치를 수 없는 죽음의 소식이 끊이질 않습니다. 의료진의 탈진한 모습이 몇 컷 사진을 통해 아프게 다가옵니다. 우리만의 일이 아닙니다. 온 세상이 난리입니다. 나라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벽을 쌓고, 담을 쳤지만, 그 짓을 해서라든지 하지 못해서라든지 말도 많지만, 결국 속수무책인 채 우리는 ‘인류의 재앙’ 앞에 가린 것 하나 없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 가라앉히고 고이 생각해보면 이 난리가 그리 낯선 일은 아닙니다. 세상 보기 나름인데 만약 우리가 질병이나 재앙을 준거로 기술한다면 인류사는 간격의 길고 짧음은 있어도 실은 재앙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천재지변은 말할 것도 없고 전염병의 창궐이 얼마나 참혹한 일이었는지 역사를 조금만 읽어보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우리가 겪는 바이러스의 재앙은 이전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세계가 동시에 어디서나 겪는 일이라는 거죠. 이전에는 대체로 재앙이 국지적이었는데 이제는 범세계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재앙에서 가장 절망적인 것은 피할 곳이 없다는 건데 지금 형국이 그렇습니다. 세계화를, 환한 미래를 줄기차게 주창하면서 그 일이 전염병의 세계화도 동시에 지닌다는 사실을 왜 우리가 미처 짐작하지 못했는지 지금 생각하니 참 후회스럽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일 때문에 속속들이 드러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바라보는 시야가 짧고 좁았는지, 얼마나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분간하고 살지 못했는지, 얼마나 자기도취에 빠져 건방졌는지, 얼마나 자기 혼자만 살면 넉넉하다고 어리석게 살았는지 조금은 짐작이 됩니다. 결국, 자기 딴에는 가장 현명하게 산다면서도 내가 나를 속이면서 산 건데 이보다 더 한심한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기를 속이는 일처럼 못난 삶이 또 있겠나 하고 생각해보면 부끄러워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을 통해 새삼 우리가 우리를 돌아보면서 잊고 있던, 또는 잃어버렸던,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되살펴 보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야말로 잘못한 것 아무것도 없는데 보이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병에 걸려 고통을 받고 죽어가는 사람이 지천인 이 지경에 제법 우아하고 고상한 참회록을 아무리 진정으로 쓰고 발언한다 하더라도 그 아픔과 고통을 진정시키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는지요. 이 기회를 통해 죽음은 모든 이에게 평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귀한 분의 발언도 어쩐지 어색하고, 여전히 확진자가 나오고 사망자가 이어지는데 우리 방역을 세계에서 모두 우러르고 배우려 한다는 자찬도 조금은 거북하고, 신의 심판이니 이제까지의 잘못을 이 기회에 단단히 뉘우치자는 진정한 설교도 좀 부담스럽습니다. 내가 음압병상에 누워 있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힘이 날는지요. 내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부모가 이 병으로 세상을 떴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위로가 될는지요.
착한 분들의 아름다운 사연도 끊이지 않고, 거의 탈진할 것 같은 지경에서 애를 쓰고 계신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노고도 끊임없이 들립니다. 얼마나 고마운지요. 언젠가는 틀림없이 치료약도 나오고 백신도 만들어내겠지요. 그때가 되면 옛말하며 오늘을 회상하겠죠. 저는 인간을 신뢰합니다. 아무리 못나도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가진 존재이니까요. 그 자존심으로 저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겁니다.
그때가 오기까지, 우리는 물론 온 세계가 이제는 확진자가 생겨나지 않고, 사망자도 없다는 보도가 나오기까지, 저는 열심히 손을 씻고, 마스크를 쓰고, 공연히 사람들 만나 시시덕거리지 않고,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이 사태가 이러니저러니 하지도 않고, 살겠습니다. 다만 부지런히 이 찬란한 봄을 마음에 서리서리 담아 그 소식이 들릴 때 내 가족과 내 친구와 내 이웃과 우리 인류 모두를 위해 활짝 펴고 싶습니다. 아프다 쾌유한 분들에게, 그리고 먼저 먼 곳으로 떠나신 분들에게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창간 5주년을 축하드립니다.
나이 먹음에 저항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추레해진 노년으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노년다운 노년을 스스로 짓고 좇고 이루려 애쓰게 됩니다. 그 또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노년은 노년 나름의 아름다움과 무게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이러한 노년의 삶을 도와주려 우리 사회에 탄생한 드문 잡지입니다.
그동안 다섯 해를 지내면서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노인들에게, 노인이 되어간다고 느낀 분들에게, 많은 것을 되살피게 해주었습니다. 아주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꿈을 안겨주었습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꿈의 공간으로 우리 옆에 늘 있어주었습니다.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노년에 새 로운 꿈을 지니게 해주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노년들에게 참 드문 놀이터를 제공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 놀이터에서는 꿈의 실현이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실증하는 온갖 놀잇감을 펼쳐놓고 누구나 마음껏 즐기도록 해주었습니다. 익숙한 이제까지의 삶을 다듬을 수 있는 놀이도 할 수 있고, 그야말로 꿈도 꾸지 못했던 모험을 할 수 있는 놀이도 감행할 수 있고, 보고 듣고 만지고, 그리고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놀이도 지천으로 쌓여 있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점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 꿈의 공간이, 그 즐거운 놀이터가, 까맣게 높거나 멀어 내가 가 닿을 길이 없다는 생각을 한 노년도 있을지 모른다는 염려가 가끔 스며들기도 했습니다. 꿈의 자리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는 느낌보다 자신의 초라함과 누추함을 새김질해야 하는 계기를 만나야 하는 것은 노년에게는 무척 견디기 힘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분들을 위한 자리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하지만, 그런 노년에게 드리고 싶은 설명만큼의 자성을 스스로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성숙한 놀이터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다시 다섯 해, 어떤 모습으로 우리 노년들의 삶 안에서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자리를 잡을지 궁금합니다. 제가 그때까지 있어야 할 이유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는데, 어쩌면 그것의 가능성 여부는 매달 나오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결정해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듭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창간 5주년을 축하드립니다.
- 정진홍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인생 이모작의 나침판 ‘브라보 마이라이프’ 창간 5주년을 축하드립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베이비부머들의 본격적인 은퇴가 시작될 무렵 창간되었지요. 마침 귀농.귀촌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 때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으로 창간기념 메시지에서 농업과 농촌이 은퇴자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후 저는 3년 6개월의 장관직을 끝으로 고향집으로 돌아와 노모를 모시며 텃밭을 가꾸는, 꿈에도 그리던 은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여느 농부와 다름없이 봄이면 씨앗을 뿌리고 땀 흘려 가꾸어 수확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늙고 지친 농업과 농촌, 무너지는 지역공동체를 보며 과연 무엇을 하였는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지방 소멸과 농촌 붕괴를 막는 일이 급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농사 짬짬이 경상북도의 농촌살리기 자문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고위공직에 있던 사람이 낙향해 노모와 사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직접 농사를 짓고 하위직 공무원으로 일한다는 게 없던 일이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요. 선하심후하심(先何心後何心)이란 말처럼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처처히 걷는 나그네에게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당산나무처럼 위안과 격려를 주는 소중한 친구가 됩니다. 더 크고 푸른 거목으로 자라나 판에 박힌 삶에 지친 방랑자들이 기대어 가치 있는 인생을 꿈꾸며 쉬어갈 수 있도록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탄생한 지 5년이 됐다니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특별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충실히 담아내고 애로점을 함께 고민하며 다양한 정보와 공감의 메시지를 담은, 어른을 위한 잡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큰 언덕이 됩니다. 사실 나이 들어가면 몸이 힘들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마음도 시들어갑니다. 거기다 최근에는 코로나19 사태로 너무 지치고, 불안으로 피로가 쌓여가고 있습니다. 다들 잠을 많이 자고 푹 쉬어도 피로가 가시지 않는다고 호소합니다. 몸이 쉬어도 뇌가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로토닌에는 감정을 조절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 습관’을 잘 들여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명상을 하면 행복과 사랑의 뇌 신경물질이 많이 분비됩니다. 세로토닌과 옥시토신이 그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한 말과 행동으로, 봉사와 배려로, 옥시토신과 세로토닌을 분비시켜 젊고 건강하게 희망 바이러스가 퍼지기를 바랍니다.
UN이 평생연령 기준을 다시 정립해 발표했습니다. 0~17세는 미성년자, 18~65세는 청년, 66~ 79세는 중년, 80~99세는 노년, 100세 이후를 장수노인으로 구분했습니다. 이 기준대로라면, 시니어 대다수는 아직 청년입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 여러분, 청년이 되어 올 한 해도 행복하고 활기차게 살아갑시다~
- 이시형 세로토닌문화원장
늙지 않으려는 노력 같은 것은 없다. 잘 늙어가기 위한 원칙과 소신이 있을 뿐이다. 멋진 에이징 철학을 인생 선배들에게 들어봤다.
✽어르시니어: 새로운 어른+시니어
나이 듦의 품격, ‘어르시니어’에게 듣는다
정진홍(83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또 새해입니다. 새해를 일컬으며 살아온 햇수가 여든을 훌쩍 넘었는데, 아직 또 새해를 겪습니다. 송구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딱히 누구에게 그러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습니다. 두루 제 주변에 있는 혈연들로부터 친구들, 이웃들, 바라보는 하늘과 바람을 실어다 주는 나무와 밟고 다니는 대지에 이르기까지, 그러니까 있는 것들 모두에게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내내 미안한 것은 저 자신입니다. 제가 저한테 이리도 성하지 못한데 왜 세월은 ‘또’를 떼어 내주지 않고 이어지는지요.
사람 목숨이 참 길어졌습니다. 노년을 짚어 말하는 세는 나이도 쉰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순을 넘어 일흔에 이르렀는데 바야흐로 이도 넘어서는 듯합니다. 이제 인생은 그루갈이(二毛作)를 하는 게 마땅하다는 주장을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그저 늙어가지 않습니다. 너도나도 나이를 먹으면서 새 삶을 꿈꾸고 짓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10년도 길다 하고 세상살이의 틀과 결이 통째로 바뀝니다. 이제 세월의 흐름을 연속으로 묘사하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대나무의 나이테처럼 뚜렷한 마디들을 지으며 그때마다 새 삶을 의도하지 않고는 세월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마디마다 겪는 새로움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자는 다짐은 백번 옳지만 몸은 세상살이의 격한 바뀜에 맞추어 되시작하겠다는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마냥 낡아가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루갈이보다 더 긴요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물에서나 서른에서의 시작과 예순이나 일흔에서의 시작이 시작은 시작이되 같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눈을 뜨는 일이 그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달리 말하면, 세상살이의 바뀜에 맞춰 내 삶을 고쳐 적응하되 적응의 모습을 늙어간다는 사실을 준거로 하여 다듬어야 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창때의 시작은 쌓아 올리는 일을 위한 비롯함이었다면 스스로 늙어간다고 여길 즈음의 되시작은 덜어 내리는 일을 위한 처음이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월은 흘러도 삶은 쌓입니다. 정도 쌓이고 한도 서립니다. 가진 것 늘었다 싶은데 어느덧 없습니다. 그런 일도 쌓입니다. 애써 앞섰고 올랐는데 어느 틈에 뒤처지고 내려앉았습니다. 그런 일도 쌓입니다. 팔팔했는데 후줄근해진 몸도 흐르지 않고 쌓여 내 삶을 더 커다란 더미가 되게 합니다.
노년의 그루갈이는 이 더미를 추스르는 일부터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억을 걸러 남길 것과 버릴 것 나누어 그렇게 하고, 삶을 감쌌던 세월의 천을 씻고 빨아 때도 얼룩도 지우고, 마음도 그 속을 퍼내고 쓸어내어 가볍고 고요하게 비우고, 그렇게 하고는 이윽고 회상이 낳는 미소를 머금고, 말간 세월의 너울로 몸을 새로 두르고, 날아도 소리쳐도 마음껏 활갯짓해도 거침없는 자유를 누리는, 한살이 내내 꿈꾸었던, 그루갈이에 들어서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노년의 새 삶이 아닐는지요.
또 새해입니다. 아직 ‘또’를 일컬을 수 있는 한, 우리의 삶은 ‘유예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다시 삶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어찌 보면 축복입니다. 아니, 분명히 그렇습니다. 여전히 내가 더 멋있고 그윽하고 넉넉하고 따뜻하고 환하고 든든한 한 인간이, 한 늙은이가, 될 수 있는 여유를 확인하는 거니까요. 누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 자신을 위해서, 제가 저에게 덜 미안하기 위해,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노인은 그래야 할 때에 이른 사람을 일컫는 거니까요.
‘논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일컫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다 보면 한이 없습니다. 그것은 게으름의 다른 이름이라는 데서 온전한 행복의 다른 표현이라는 데 이르기까지 그 폭이 엄청납니다. 그러니 어떤 것이 놀이이고, 어떻게 놀아야 놀이다운 놀이를 하는 것인지 금을 긋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두루 살펴보면 우리네 문화는 놀이를 저어하는 태도를 꽤 진하게 이어온 것 같습니다. 논다는 것은 많은 경우에 게으름, 하릴없음, 비생산적임, 낭비, 무절제, 철없음 등과 나란히 놓입니다. 이에 맞서는 것들로 근면과 성실, 점잖음과 어른스러움을 드는 것을 염두에 두면 놀이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의 그림이 환하게 떠오릅니다. 오랜 유교적인 근엄함 탓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풍토에서는 우리네 시니어들이 잘 놀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놀이가 낳는 직접적인 경험이 무언지 생각해보면 좀 다른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무어니 무어니 해도 놀이는 재미있고, 그래서 즐겁고, 그래서 온갖 것에서 풀려난 홀가분함을 만끽하게 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보면 그것은 각박함에서의 여유이고, 노동에서의 휴식이며, 긴장에서의 풀림이고, 절제가 낳은 보상이며, 노력이 맺은 결실이기도 합니다. 결국 누구나 꿈꾸는 행복한 삶이란 잘 노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야말로 사람이 바라는 꿈의 실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네 시니어들에게 ‘당신네들이야말로 마땅히 잘 놀아야 한다!’고 거들어주는 일보다 더 현실적이고 귀한 추임새는 없습니다.
그런데 놀이와 노년을 부정적으로 잇든, 긍정적으로 맺든, 위에서 묘사한 그러한 놀이에 대한 이해는 아무래도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놀이라는 삶이 따로 있고, 놀이 아닌 삶이 따로 있는 것같이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일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멈춰 쉬고 싶고, 일의 사슬에서 벗어나고 싶은 꿈을 지닙니다. 그러다 잠시 일에서 풀려나면 그리 즐겁고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 순간을 채워주는 대표적인 것이 놀이입니다. 그 내용은 어떤 것도 좋습니다. 그저 즐겁고 신나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살다 보면 산다는 것은 잘 노는 삶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매 순간의 삶이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니기보다 그 과정의 끝에 이르러 비로소 누리게 될 ‘잘 놀기 위한 삶’의 준비 과정이 되는 거죠. 수단적인 가치로서의 삶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삶은 놀이하며 사는 행복한 지경에 이르기 전의 삶을 어떤 상황도 참고 견뎌야 하는 무거운 색깔로 채색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견디며 지워야 할 삶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기다리며 즐거울 삶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자칫 일상의 삶을 연민과 고통으로만 여기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놀이 아닌 삶은 삶이 아니라는 자학에 이를 수 있으니까요.
그런가 하면 일에서 벗어나 이제는 잘 놀면서 살리라는 기대를 실현한 삶이 뜻밖의 엉킴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친구는 은퇴를 하고 나서 자기가 평소에 늘 꿈꾸었던 사진에 몰입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행복’을 저리게 만끽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제게 감동스럽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해 뒤에 만난 그 친구는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내 ‘놀이’를 위해 시간도 자금도 엄청나게 투자를 했네. 뿐만 아니라 내 가족을 포함해 많은 것을 희생하기까지 했지. 그러다 보니 내가 은퇴 이전에 일에 몰입하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더군. 이제 좀 쉬어야겠어!” 이 또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일이 아닌 삶은 삶이 아니라는 무의식이 놀이조차 일로 여기는 삶을 살아가도록 한 것이니까요.
문제는 이제 시니어가 되었으니 모든 일에서 벗어나 잘 놀아야 한다든지, 그러기 위해서는 시니어가 되기 전에 일에 몰두해 그런 삶을 준비해야 한다든지 하는 이분법적인 판단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식을 과외공부에 뺑뺑이를 돌릴 수밖에 없이 살아온 맞벌이 부부의 이야기가 문득 떠오릅니다. 그 엄마는 과외하러 가는 자식에게 늘 이렇게 말했답니다. “너 오늘은 수학 과외 가는 날이구나. 거기 친구들과 수학을 가지고 재미있게 놀다 오거라. 내일은 피아노 선생님한테 가는 날이네. 선생님하고 재미있게 놀다 와라. 다녀와서 놀던 이야기를 엄마 아빠에게 들려줘. 우리도 정말 그렇게 놀고 싶거든!” 그런데 그다음 이야기가 제게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전해졌습니다. “그 녀석이 돌아와서는 재미있던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었던 일, 속상했던 일도 다 말하더군요.”
일상의 삶과 단절된 ‘잘 노는 삶’이 따로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기다리는 놀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놀이가 있을 뿐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나이가 충동하는 ‘찾아야 할 즐거움’도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전쟁 직후이니까 한 해를 보태면 70년 전 일입니다. 그해 겨울을 간신히 지내고 이듬해 이른 여름에 저는 ‘길에서 주워온 아이들’을 돌보는 ‘시설’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저는 6세에서 12세까지 아이들 여섯 명이 기거하는 방에 배정을 받았습니다. 기묘한 구조의 커다란 한옥 구석방이었는데 햇빛이 들지 않았습니다. 저까지 모두 일곱 명이 나란히 누울 수도 없는 크기여서 다른 아이의 배나 등에 발을 얹거나 팔을 감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벽에는 사방에 횃대가 있어 거기 옷을 걸었고, 작은 판지(板紙) 상자 세 개가 있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책을 거기 넣어두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방을 열었던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작은 쪽문을 열자 아이들은 일제히 13세인 저를 바라보았는데 제가 압도된 것은 그 눈망울들이 아니라 그 방의 냄새였습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저는 그 냄새를 묘사할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악취였습니다. 그것도 역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습니다. 코가 막힐, 그래서 숨이 막힐, 그런 냄새였습니다. 가장 가깝게는 시궁창 냄새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그것으로는 모자랍니다.
이윽고 그 냄새가 역하지 않게 되고, 그 냄새가 내 냄새라고 여기게 되었을 즈음에, 저는 비록 그 냄새를 묘사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명명할 수는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곳에 살지 않는 밖의 사람들이 ‘우리’를 묘사하는 언어였는데 그것은 ‘거지새끼들 냄새’였습니다.
그 명명은 옳았습니다. 듣는 우리의 자존을 마치 발꿈치로 싹싹 비비는 것 같은 ‘독한’ 발언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래도 그 표현에는 ‘사람’이 들어 있어 다행이기조차 했습니다. 그때 제가 지금 표현하듯 그렇게 다듬어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시궁창 냄새’로 몰아 치워버리는 것보다 ‘거지새끼들 냄새’는 냄새의 주체가 사람인 것만은 인정하고 있는 반응이라는 어떤 느낌이 제게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랬습니다. 씻지도 않고, 빨래도 잦지 않고, 대소변 가리지 못하는 어린아이도 있고, 남몰래 먹을 것 감춰둔 것이 상하기도 하고, 비를 맞은 담요가 곰팡이가 나도 바꿔 덮을 것이 없는 터에 시궁창이 바로 그 방인데, 그 냄새가 극한 악취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살고 있는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냄새에는 웃음도 시샘도 다툼도 살핌도 섞여 있었습니다. 거창한 개념어를 사용한다면 그 냄새에는 꿈도 절망도, 희망도 자학도 섞여 있었습니다. 그리움도 있었고 회상도 있었습니다. 울부짖는 잠꼬대 끝에 깨어난 아이에게 웬 악몽이냐고 물었을 적에 “엄마를 만났어!” 하는 대답마저 섞인 냄새였습니다.
저는 악취가 싫습니다. 당연합니다. 누구나 그러합니다. 그런데 저는 향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좋아하면 안 된다는 이상한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집안에 제사가 있는 날이면 제게 주어진 일은 향로를 닦고 모사(茅沙)를 담아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제사 때 피어나는 향이 참 그윽했습니다. 그 향의 맑은 기운이 돌아가신 조상의 혼령을 모셔올 만큼 지금 이곳을 정화(淨化)해준다는 어른들의 설명이 감동스러웠습니다. 인간의 아픔이 가장 순수하고 오롯하게 다듬어지는 종교의례의 차례가 분향(焚香)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은 지나칠 수 없는 귀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종교사를 공부하던 어느 계기에 저는 난데없는 ‘고약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에게, 또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에게, 자기의 ‘아픔’을 아뢰어야 한다면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다 드러내야지 왜 아름다운 냄새로 자기를 치장하면서 “잘 봐주십사” 하고 아뢰나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정성이고 예의이지 하는 설명이 없는 것은 아니고, 또 그러한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왠지 ‘분향’은 ‘외식(外飾)’의 극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니 제단에서 나는 향기가, 그곳이 어떤 종교의 제장(祭場)이든, 점점 불편해집니다. 향이 저어해지는 것입니다. 향기로운 냄새를 풍겨 추한 곳을 가리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몸에 향수를 뿌리는 일조차 조심스러워집니다. 늙은이 냄새는 목욕을 아무리 해도 가시지 않으니 향수를 뿌려 견딜 수밖에 없다면서 귀한 프랑스제 향수를 선물로 준 친구가 있습니다. ‘나한테서 그리도 역한 냄새가 나느냐’면서 고맙게 받긴 했지만 아직도 그 향수를 사용하지 못해 못내 미안할 따름입니다.
삶은 냄새를 지닙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맛도 없고, 만질 수 없어도 냄새는 어디에나 언제나 어떤 것에나 있습니다. 삶은 이런저런 냄새를 지니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혹 내게 마땅치 않은 냄새라도 ‘잘 맡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나도 냄새를 지닌 주체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맑고 따뜻하고 그윽한 냄새를 풍겨야 합니다. 하지만 ‘모자란 냄새’를 지우거나 더 좋은 냄새를 내려, 냄새에 냄새를 더하는 억지를 부려 자칫 악취만을 낼 수도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는 까마득한 ‘거지새끼 냄새’가 새삼 그리워집니다. 삐뚤어진 생각 고치고 늙은이 냄새를 향수로 조금은 가려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이나저나 제가 사람 노릇을 하면 사람 냄새를 지니고 고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하여 아예 냄새에 대한 ‘긴장’을 털어내는 일이 우선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아침이 좋습니다. 그래서 늦잠을 자지 못합니다. 아예 밤의 끝자락에서 깨어 눈을 바짝 뜨고 새벽을, 아침을, 기다립니다. 때로 밤을 새우기도 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각이 들쑥날쑥하긴 하지만 대체로 남보다 더 많이 자는 셈인데 일어나는 시각은 늘 새벽 4시쯤입니다.
이러한 저를 보고 기가 차서 말을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아니, 꽤 많습니다. 가까이에는 제 아내가 그러하고, 멀리에는 이제 ‘남’이 되어 자기네 식구 거느리고 사는 자식들이 그러합니다. 자식들은 제 그러한 모습을 ‘문화사적’으로 단정합니다. 농경시대의 마지막을 사시던 분이니 산업사회 이후의 ‘밤이 있는 문화’를 제대로 짐작하실 까닭이 있느냐는 것이 저에 대한 자기네 이해의 변(辯)입니다. 아내의 반응은 이보다 훨씬 ‘실존적’입니다. 자정이 지나면서 비로소 마음도 몸도 차분해지면서 바야흐로 삶이 삶다워진다는 그녀의 삶의 리듬에서 보면 저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기를 지나 그지없는 연민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어린아이처럼 어둠을 무서워하고, 그윽함을 낯설어하며, 깊은 고요를 견디지 못하고,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빛을 눈부셔하는 모자란 사람이 됩니다. 나아가 소음이 침묵하면서 겨우 들리는 바늘귀 꿰는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어둠의 아련하고 아득한 정경에서 비로소 이룰 수 있는 뮤즈[詩神]와의 만남을 스스로 차단해버린 딱한 사람, 그래서 연민조차 넘어 이제는 어찌 해볼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아침을 좋아하는 저에게 가해지는 양쪽 모두의 묘사를 저는 조금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밤이 있는 문화’가 지닌 의미와 가치를 폄훼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는 아내가 누리는, 제가 미처 다가가지 못한, 뿌듯한 행복을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침을 좋아하는 것은 문화가 결정한 것만도 아니고 사람됨이 그러해서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저는 저 스스로 내가 주인이 되어 내 삶을 꾸려 나아간다는 자의식을 지니고 아침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아침이면 저는 무엇보다 세상이 밝아지는 과정이 그리 좋을 수가 없습니다. 동트는 무렵이면 해를 등지고 서쪽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서서히 어둠이 걷히는 것이 보입니다. 사물이 자기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저는 어두워 더듬거리던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면서 어떤 질서의 정연함을 확인합니다. 사물에 대한 앎이 다듬어지고, 그것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도 뚜렷해집니다. 당연히 그러한 것들과의 만남에서 제 판단도 어둠에서와는 달리 밝음에서 차분하게 이루어질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세상이 차츰차츰 밝아지면서 마침내 저는 온누리를 한꺼번에 안습니다. 제가 경험하는 새벽은 그러합니다. 새벽은 저로 하여금 세상을 품에 안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품은 세상은 어제의 세상이 아닙니다. 비록 어제저녁 어둠에 잠기는 것을 보면서 제가 스스로 잠들며 닫아버린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사라졌거나 달라졌을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침은 어제를 ‘잇는’ 마디가 아닙니다. 어제를 ‘지운’ 마디입니다. 그래서 아침입니다. 아침은 저에게 “내가 보여주는 세상은 어제의 세상이 아냐! 그러니 너는 지금 이 아침에 어제가 없었듯 그렇게 네 하루를 시작해야 해! 그것이 내가 너에게 주는 아침의 선물이야!” 하고 말합니다. 저는 그 선언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듣습니다. 아침에는 세상을 그렇게 만나야 하는 거라고 저는 스스로 다짐합니다. 그래서 아침이면 저는 언제나 ‘미지의 세상’과 만납니다. 그 세상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그림책 같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입니다. 그것을 내가 커다랗게 품는 때가 아침입니다. 가슴이 설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래서 아침이 좋습니다. 서둘러 아침을 맞으려 일찍 일어납니다. 결국 아침은 새로운 탄생이니까요.
하지만 저녁이 없으면 아침은 없습니다. 미지의 가능성을 채우면서 이렇게 저렇게 뛰며 사느라 조금은 피곤해 쉬고 싶은 하루가 저녁의 붉은 노을에 서서히 잠길 때면 그 노을이 아침의 신비와 겹치는 것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나 자신을 토닥거리며 ‘잘 지냈다. 하루 종일. 이제 푹 쉬거라!’ 하고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면 아침은 오지 않습니다. 불면의 밤은 밤만을 상처내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침도 산산이 조각나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해가 뜨는 아침만이 아침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것만이 아침을 좋아하는 모습도 아니고, 저녁을 지새우는 것만이 밤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맞는 새날을 내 삶이 새롭게 펼쳐지는 뚝 떨어진 천복(天福)으로 여기는 감격, 그리고 그에서 솟는 고마움을 하루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잘 펼쳐 내가 사는 세상이 조금이라도 낮을 낮답게 밤을 밤답게 누리며 살 수만 있게 된다면 아침이든 저녁이든, 일찍 자든 늦게 자든, 일찍 일어나든 늦게 일어나든 무슨 상관이 있을는지요. 아침의 좋고 그름, 저녁의 좋고 그름을 이야기할 까닭이 있을는지요.
그런데 문득 아침을 맞지 못할 밤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저녁을 맞지 못할 낮도 있을 겁니다. “아직은~”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죠. 저도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침이 펼쳐주는 미지의 가능성 속에는 그 사실조차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나잇값을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저리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지 않을 아침 때문에라도 저는 한껏 오늘 아침을 겸손하게 그리고 황홀하게 맞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