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 마실 공간이면 충분하다는 뜻일까. 용암정 별서(別墅)엔 별반 있는 게 없다. 물가에 정자 하나 세우고 끝! 조선의 별서치고 이보다 가뿐한 구성이 다시없다. 별서란 요즘 말로 ‘세컨드 하우스’다. 상주하는 살림집 인근의 경치 좋은 곳에 지은 별장으로, 사교와 공부와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었다. 그래 일쑤 멋 부려 꾸몄다. 연못을 파거나 정원을 꾸리고, 객실을 보태기도 했다. 용암정은 다르다. 치레를 극구 삼갔다. 은자의 심중은 허허롭다. 차 몇 잔이면 하루가 가득 찬다. 그러니 정자 외에 무엇을 덧붙일 것인가.
용암정은 거창의 경승지인 위천(渭川) 중에서도 빼어나다는 요수천 계곡에 있다. 예로부터 신선이 살 만한 동천이라 이름난 골이다. 가을이 깊어 물가에 서린 고적한 정취가 짙다. 숲에선 단풍이 곱게 무르익다 못해 어느덧 잎잎이 지상으로 추락한다. 발길에 밟히는 마른 낙엽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짠해 정이 간다. 접때는 은성한 초록 잎이었던 게 순식간에 저물다니. 이게 잎사귀만의 일이라고 할 수 있겠나. 목숨 가진 것들 모두 머잖아 시들 수밖에 없다. 나날이 조락으로 가는 길이다. 가을은 이렇게 문득 삶의 순리를 바라보게 한다. 낭만과 여행을 즐기기에 제격인 계절이지만 그 뒷면엔 서러운 게 있다.
용암정으로도 낙엽이 분분히 흩날려 내린다. 고요한 눈길을 매달고 하늘하늘 내려오는 낙엽들. 스산하다기보다 애틋한 정경이라 가슴을 파고든다. 물가에 덩그러니 홀로 있는 늦가을의 정자 하나. 이는 어쩌면 내향적 풍경의 절정이다. 거기엔 뭔가 사람을 위무하는 기색이 완연하다. 그대여, 지친 마음을 여기에서 내려놓아라, 야윈 등을 기둥에 기대고 까짓것 세상 근심일랑 헹구어라. 정자가 그리 속삭이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면 정자란 사람과 교감할 수 있는 센서를 부착한 전위적 시설물이다. 사람의 마음을 끌어안는 시(詩)이자 추상화다. 하기야 정자를 폼 잡자고 지었으랴. 허영으로 지었으랴. 마른 멸치대가리처럼 누추한 게 삶일망정 마음을 돋워 생기를 얻을 방편으로 지은 공간일 것이다. 정자에 올라 자연으로 진입, 뿔과 발톱이 없어도 야성으로 생동하는 초목을 닮고자 지은 ‘정신의 집’일 테다.
용암정은 향촌의 선비 임석형(林碩馨, 1751~1816)이 지은 별서다. 그는 행실과 학문이 빼어나 당세는 물론 후세까지 추앙받았다더라. 그의 가문에는 벼슬길에 오르기보다 초야에 묻히기를 좋아하는 풍조가 대대로 이어졌다. 청빈을 삶의 꽃으로 삼았던가 보다. 임석형 역시 가풍의 영향을 받아 출세에 뜻을 두지 않고 평생 백수로 살았다.
예나 지금이나 재물과 권세라면 껌뻑 넘어가는 게 사람이다. 임석형은 여기에서 예외였다. 취직을 한 바 없어 생계는 팍팍했겠지만 배포는 태산이었나? 그는 적게 먹고도 유유하게 노니는 재능을 발휘했다. 일러 안빈낙도다. 생의 절반쯤을 백수로 살며 찬연한 족적을 남긴 연암 박지원을 비롯해, 조선의 인걸들 중엔 궁색한 호구에도 아랑곳없는 뚝심으로 기차게 활갯짓한 아웃사이더가 많았다. 임석형이 바로 이 늠름한 계보에 속한다. 그는 숲을 소요하는 낙을 최상으로 쳤다. 용암정을 지어놓고 읊조린 노래가 이랬다. ‘이곳에 만약 학을 탄 나그네가 찾아온다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숲에서 늙으리라.’
숲 사이 계곡으로는 물이 흐른다. 덕유산과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냇물이 합쳐진 물길로 수정처럼 맑다. 깊디깊은 산골짝 물도 아닌 것이 티 없이 순수하니 희한하다. 여름철엔 여기서 텀벙, 저기서 풍덩, 물놀이하는 이들이 숱하다. 늦가을의 물은 차가워 물빛조차 푸르다. 파란 유리를 얹어놓은 듯이. 물 위로는 당싯당싯 낙엽이 떠내려간다. 물 아래는 숫제 낙원이다. 크리스털로 세공한 양 투명한 물고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소풍처럼 몰려다닌다. ‘초사’(楚辭)에서 어부가 말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는다.’ 청정한 물에서 담백한 처신의 방법을 읽은 셈이다. 임석형이 청명한 물을 그윽이 관조할 수 있는 냇가에 정자를 지은 이유가 또렷해진다. 뒤집히고 또 뒤집히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이 요란한 소동을 청류로 빗자루 삼아 쓸어냈을 테다. 그런 뒤에야 풍류도 옹골찬 법이다.
물만이 용암정의 뜻과 멋을 돋우는 건 아니다. 보라! 희디흰 기암괴석이 지천으로 널브러져 한바탕 경연을 벌이는 게 아닌가. 물에 발목을 담근 바위들. 바위의 무릎을 베고 누운 소(沼). 바위벼랑을 쏜살처럼 내닫는 물살의 아우성. 이를 일러 임석형은 ‘하늘의 작품’이라 했다. 이곳을 ‘별유천지’라 일컬었다. 물과 바위의 컬래버레이션은 늘 성황리에 펼쳐지게 마련이다. 옛 선비, 자그만 정자 하나 짓고 볼 것 다 봤다. 큰돈 안 들이고 놀 것 다 놀았다. 풍류란 돈으로 살 수 없다. 주저앉은 생각을 탓할망정 주머니 사정 핑계될 일이 아니다.
답사 Tip
위천변엔 호젓한 오솔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다시 경승을 만날 수 있다. 용암정 위쪽에는 신선이 내려왔다는 강선대와 강선정이, 아래쪽으로는 요수정과 수승대가 있다.
이번 주말이 지나면 10월도 끝난다. 10월의 상징적인 이미지 때문일까. 이제 진짜 겨울이 찾아올 것만 같다. 그리고 더 추워지기 전에 주말 나들이를 즐기고 싶은 시니어들도 많을 터. 그런 시니어들을 위해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준비했다. 여유롭게 전시를 관람하며 힐링할 수 있는 전시회 세 곳을 추천해 본다.
월출산 국화전시회
국화꽃이 만개하는 계절이다. 국화꽃 향기를 맡으면 심신의 안정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월출산 국화전시회'가 전남 영암군의 기찬랜드와 도기박물관, 도갑사, 삼호 한마음회관, 영암군청 등 5개소에서 오는 11월 14일까지 열린다.
코로나19로 취소된 '월출산 국화축제'를 대신하는 전시회다. 도기박물관에는 시유도기와 왕인문이 전시된다. 아이들이 방문을 많이 하는 삼호 한마음회관에서는 미니언즈, 펭수 등 다양한 캐릭터 조형물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월출산기찬랜드는 구름다리 조형물을 새롭게 선보인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야심 차게 준비된 작품이다. 건물 3층 높이로 각별한 관리를 통해 만들어졌지만, 아쉽게도 사람의 출입은 통제된다.
내 이름 쓸 수 이따
논산시 한글대학 어르신들의 시화 작품 전시회 '내 이름 쓸 수 이따'가 오는 11월 5일까지 KT&G 대치 갤러리(서울시 강남구 영동대로 416, 1층 로비)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회는 한글날을 맞아 논산시와 한국방송예술교육진흥원, KT&G 상상마당이 손잡고 추진한 행사다.
'내 이름 쓸 수 이따'는 지난해 책으로 먼저 나왔으며, 엄마가 생각나는 따뜻한 도서로 주목 받았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어르신들이 직접 참여한 시화 작품과 시낭송 오디오 클립, 인터뷰 영상 등을 함께 전시해 눈과 귀로 동시에 느끼는 감동을 더한다.
한글을 배우는 것이 평생의 한이었던 어르신들의 유쾌하고 진솔하게 쓰여진 시와 그림은 울림을 준다. 또한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에 감동과 희망을 느끼는 전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인두 : 한국적 공간추상의 기수
이름이 독특한 하인두(1930~1989) 작가는 한국 현대미술 1세대 추상화가이다. 그를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웅갤러리, 갤러리라온에서 동시에 전시를 열었다. 웅갤러리에는 캔버스 회화, 갤러리라온에는 드로잉 중심의 종이 작품을 걸었다.
하인두는 김창렬·박서보 등과 추상표현주의 화가이지만, 독자 노선을 걸었다. 한국 전통의 형상성이나 불교사상에서 도출된 개념을 재구성하는 비정형의 추상을 선보이며 한국적인 추상화를 실현했다.
하인두 작품의 특징은 불교의 단청과 만다라의 조형성을 합체하고, 서구 종교의 스테인드글라스 기법을 색채 평면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거쳤다는 점이다. 그의 대표 작품으로는 '만다라', '무제' 등을 꼽을 수 있다. 전시는 오는 11월 6일까지 감상할 수 있다.
미술 작품 감상을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다. 곰곰 뜯어봐도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추상화 앞에선 머리에 쥐난다. 이게 관람객의 둔감 탓이라고만 할 수 있으랴. 작가 자신도 무슨 짓을 했는지 알 바 없이 휘갈긴 작품도 ‘천지삐까리’다. 작품이 난해하니 미술관에 가봐야 재미가 없다. 미술관들의 따분한 콘셉트에도 식상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여기에 꽤나 재미있는 미술관이 있다.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있는 가나아트파크다.
일영리는 산 좋고 물 좋은 전원이다. 예전부터 교외선을 타고 장흥역(현재는 폐역)에 내려 일영 일대의 산수와 찻집을 즐기는 데이트족들이 넘실거리던 곳이다. 유흥주점과 러브호텔로 불야성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다 2008년 ‘장흥문화예술특구’로 지정되면서 슬쩍 변신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알록달록 치장한 업소들이 난립해 어지럽지만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등 문화 공간 다수가 이 골짜기에 들어서면서 좀 색깔 있는 동네로 부상했다. 처음 문화예술의 공기를 주입한 건 토탈미술관이었다. 토탈미술관을 서울 평창동에 있는 가나아트센터가 인수하고 개조해 2006년에 문을 연 게 가나아트파크다.
가나아트파크는 ‘쉬운 미술관’을 표방한다. 설립자는 가나아트센터의 리더 이호재 씨. 화랑계의 ‘큰손’이자 진취적인 기획자다. 그는 문턱과 눈높이를 낮추고 재미를 부여해 누구나 쉽게 찾아와 미술 체험을 할 수 있는 미술관을 궁리하다 가나아트파크를 열었다. 그의 지향과 방책은 선명했다. 어린이들을 주 타깃으로 삼은 거다. 아이들에게 미술과 미술관도 사이버 게임처럼 아주 신날 수 있다는 걸 경험시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울러 아이들의 삶에 좁쌀만큼의 작은 크기로라도 미술이라는 소우주가 달라붙을 수 있길 바랐을 테고. 그게 결국은 미술 인구의 확대와 저변의 풍토를 다지는 지름길이라 보았을 테고.
이호재 씨의 이와 같은 궁리와 실천은 평범한 게 아니었다. 머리 잘 돌아가는 미술 사업가들이 많지만 아무도 ‘어린이 중심의 미술관’을 착상하지 못했던 시절에 기염처럼 토해낸 발상이었으니까. 요즘이야 어린이들을 주 고객으로 삼은 사립미술관이 꽤 있지만 예전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국내 최초의 어린이 미술관으로서 가나아트파크가 지닌 위상이 우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구름처럼 몰려오나? 연간 관람객 수가 10만 명 이상이라 하니 순항이다. 하지만 적자를 면치 못한다더라. 이건 사립미술관의 숙명에 가깝다. 무료입장 제도를 운용하는 국공립미술관의 관람객 유인력을 당할 재간이 없다. 비싼 입장료를 내고(사실 비싸지도 않지만) 사립미술관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아무려나, 가나아트파크는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뜀박질로 흥겹다. 그러라고 놀이터처럼 꾸며놓은 공간과 시설이 많다. 아이들은 다들 부모나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이끌려 이곳에 온다. 그러기에 아이들 못지않게 어른들도 많다. 젊거나 늙숙한 부부와 연인들도 전시실의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너른 정원에서 짧은 피크닉을 즐긴다. 자유로이 마음 보따리를 풀어놓고 쉬기 좋은 미술관이다. 즉 남녀노소가 어울려 체면 차릴 것 없이 일락(逸樂)할 수 있는 곳이다.
정원을 가로질러 본관 건물로 들어간다. 지상 2층과 지하 1층으로 지은 이 건물엔 각각 층고가 다른 6개의 전시실이 있다. ‘카페 오월’과 아트숍도 있다. 1층 전시실 옆댕이엔 아이들의 놀이장인 ‘볼풀 아일랜드’가 있다. 그림 관람을 하는 어른들과 잠시 헤어진 아이들은 이곳에서 맘껏 논다. 아이와 어른을 동시에 배려했다. 이런 기발하고도 친절한 미술관을 본 적이 없다. 아이들을 위한 전시실도 따로 구획해 ‘교과서 속 그림여행’이라는 이름의 상설전을 펼친다. 피카소, 앤디 워홀, 데미안 허스트 등 교과서에 나오는 거장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인기를 끄는 백남준 전시실
2층 5전시실에선 기획전이 펼쳐진다. 젊은 서양화가 허보리의 ‘Love My Hero’전이다.(4월 30일까지) 허보리는 만화가 허영만의 딸이란다. 전시실로 들어서자 탱크 한 대가 눈에 쑥 들어온다. 허보리의 설치 작품이다. 그녀는 은퇴한 가장들의 양복과 넥타이를 잔뜩 수집해 오브제로 삼았다. 천을 잘라 감거나 둘둘 뭉쳐 캐터필러를 비롯한 동체와 포신을 만들었다. 이 괴상한 헝겊 탱크로 어떤 메타포를 전하는가? 쉽다. 삶이라는 전장에서 먹이를 물어오기 위해 탱크처럼 진격하는 생활의 전사(戰士)를 오마주했다. 포신은 맥없이 바닥에 축 늘어졌다. 탱크처럼 밀어붙여도 어찌할 수 없이 돌아오는 생의 피로와 패배를, 무기력과 발기부전을 보여준다. 정육 쇼케이스 안에 총알과 수류탄 따위를 만들어 고깃덩어리처럼 진열한 작품 ‘무장가장’(武裝家長)도 노골적이긴 마찬가지다. 인생의 희로애락 중에서 작가는 ‘애’(哀)를 끄잡아냈다. 삶이 기쁘고 아름답다고? 잉? 그럴 리가! 허보리는 그리 따진다. 혹은 가혹한 삶을 위무한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들을 모은 전시실도 있다. 가장 인기를 끄는 공간이란다. 새와 나무, 꽃을 그린 크레파스화들에서 드러나는 백남준은 어린애다. 세 살짜리 천진이 끼적인 낙서처럼 알량하나 생기롭다. 백남준의 나이 67세에 이 유치한 그림들이 나왔다. 도통하면 애로 돌아간다. 달통하면 쉬워진다. 그에겐 닫힌 게 없어 막힐 것도 없었다. 관조의 눈으로 세사를 넓게 읽었다. 자전거를 탄 모니터들로 이루어진 작품을 보라. 골치 아플 거 없이 쉽고 재미있다. 거기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겠나. 백남준은 남들이 안 하거나 못 하는 걸 찾아 해치우는 재주를 창작의 견인차로 삼았을 뿐이다. 백남준이 괴로워한 유일한 문제는 어쩌면 경제였다. 당신은 왜 TV 모니터로 작품을 일삼는가, 이런 질문에 돌아온 답이 이랬다. “돈이 있어야 예술도 되거든. 집에서 보내주는 돈도 끊겼고, 뭘 해야 돈이 되나 궁리를 하다 하다 TV에 착안한 거라고.”
본동 외에도 가나아트파크엔 다수의 건축물이 있다. 동쪽 끝자락에 있는 아틀리에 두 개는 모텔을 사들여 개조한 건물로 많은 작가들이 입주해 창작활동을 한다. 루브르박물관과 대영박물관 내부 설계를 맡았던 장 미셸 빌모트가 개조 설계를 했다. 도드라지기로는 미술관 중심부에 나란히 선 박스형 건물 세 채. 각기 통째로 파랑과 노랑, 빨강을 입어 매우 강렬하다. 이 미술관은 피카소 작품 1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반가워라, 피카소! 파란색 건물에선 피카소 작품들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피카소의 일상을 담은 사진도 여러 점 내걸려 흥미롭다. 담배를 물고 싱긋 웃고 있으나 뭔가 길들지 않은 포악한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표정의 피카소. 살기등등한 송골매의 눈으로 작업을 하는 피카소. 그는 도발적인 화풍으로 타성에 갇히기를 거부했다. 피카소의 작품은 이제 고전이 됐지만, 치열했던 자유의지는 시대를 관통하는 패션으로 남아 세상의 모든 ‘우물 안 개구리’들을 일깨운다.
노랑 건물엔 섬유작가 토시코 맥아담이 아이들을 위해 만든 그물놀이터 ‘에어 포켓’(Air Pocket)이 있다. 공간을 가득 채운 초대형 뜨개질 작품이다. 이 기이한 구조물엔 구멍이 숭숭 뚫려 아이들이 기어 들어가 놀도록 했다. 거미줄에 매달려 곡예를 하는 거미처럼. 미지의 차원으로 넘어간 듯, 아이들은 신비감으로 도취될 수밖에 없겠다.
미술관의 너른 정원엔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조각 작품이 흔전만전하다. 류인, 문신, 강대철, 최종태, 앙투안 부르델, 조지 시걸, 세자르 발다치니 등의 작품들이 경연을 펼친다. 조각보다 보기에 좋은 풍경은 풀밭에 앉아 소풍의 한때를 지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정원을 희희낙락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해맑은 표정이다. 이 미술관은 풀밭 위의 도시락 식사도, 야유회도, 낮잠 때리기도 허용한다. 분노도 많고 긴장도 많아 남몰래 아픈 그대여, 여기서 쉬어가라! 미술관은 그리 권하고 싶은가 보다. 이렇게 확 열린 미술관, 본 적 있나?
●Exhibition
◇헬로, 스트레인저!
일정 12월 19일까지 장소 하자센터
‘낯설다’는 감각은 무엇인가? 익숙함이 자연스러운 자극을 마주했을 때 받는 감각이라면, 낯섦은 자연스럽지 않은 자극에 대한 불편한 느낌이다. 전시 ‘헬로 스트레인저’는 이런 낯선 감각에 집중해 우리 사회의 여러 고정 관념을 세 작가의 그림책으로 살펴보게 한다. 인간을 비커에 담아 실험하는 쥐 그림 등 어딘가 낯설고 기묘한 작품들을 통해 당연하게 여겨온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한다.
◇황금광시대 : 1920 기억극장
일정 12월 27일까지 장소 일민미술관
신문과 잡지를 통해 1920~30년대 경성의 모습을 돌아보고 이를 오늘날의 시선으로 재구성한다. 1920년대 문화주택의 뼈대를 표현한 ‘픽션 픽션 논픽션’, 100년 전 살롱을 재현한 ‘클럽 그로칼랭’, 가상현실(VR)과 신문 아카이브를 결합한 ‘구보, 경성, 방랑’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다. 조선희의 장편소설 ‘세 여자’ 속 잡지 편집실을 재구성한 전시작도 만날 수 있다.
◇박래현 : 삼중통역자
일정 2021년 1월 3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20세기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박래현을 재조명한다. 회화, 판화, 태피스트리 세 가지 매체를 넘나들며 활약한 그녀의 예술 세계를 총 4부에 걸쳐 소개한다. 1부에서는 현대 한국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2부는 화가 김기창의 아내이자 네 자녀의 어머니였던 작가가 생활과 예술 사이에서 고뇌했던 모습을 살펴본다. 3부는 세계 여행을 하고 이국 문화를 체험한 뒤 그린 추상화를, 4부에서는 판화와 태피스트리 기술을 익히고 동양화의 표현 영역을 확장하고자 한 작가의 마지막 도전을 조명한다. 총 138점의 작품과 아카이브 71점이 출품됐다.
●Book
◇오늘의 기분과 매일의 클래식 (조현영 저·현암사)
클래식은 듣고 싶지만 언제 어떤 곡을 들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을 위한 맞춤형 가이드북. 운전할 때, 외로울 때, 낮술을 즐길 때 등 다양한 상황, 기분에 따라 어울리는 클래식을 적재적소의 맞춤형으로 추천해준다.
◇지금 이 계절의 클래식 (이지혜 저·파람북)
크리스마스에는 어떤 클래식을 들어야 할까? 클래식 해설가 이지혜가 계절에 맞게 들을 수 있는 클래식 33곡을 소개한다. 곡에 대한 인문학적 해설도 포함돼 있어 보다 깊이 있는 교양을 쌓을 수 있다.
◇임동혁의 모망 뮈지코 (임동혁 저·서울음악출판사)
세계 3대 콩쿠르를 석권한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엄선한 피아노 악보집. 총 17곡이 실려 있으며, 곡마다 임동혁이 직접 감수한 연주 포인트가 적혀 있다. 부록으로 A2 사이즈 브로마이드도 제공한다.
●Movie
◇인생은 아름다워
개봉 12월 예정 장르 뮤지컬 감독 최국희 출연 류승룡, 염정아, 박세완, 옹성우
자신의 마지막 생일선물로 첫사랑을 찾아 달라는 아내 ‘세연’과 그녀의 황당한 요구에 마지못해 과거 여행을 떠나게 된 남편 ‘진봉’의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영화다. ‘극한직업’, ‘명량’, ‘7번방의 선물’, ‘광해, 왕이 된 남자’ 등 네 편의 천만 영화에 출연한 류승룡과 JTBC 드라마 ‘SKY캐슬’로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은 염정아가 첫 부부 호흡을 맞춘 작품으로, 배우들이 직접 노래 부르고 춤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중현의 ‘미인’, 이문세의 ‘조조할인’, 이승철의 ‘잠도 오지 않는 밤에’, 토이의 ‘뜨거운 안녕’ 등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세대를 아우르는 노래들이 연이어 등장하며, 흥겨운 노래 속에 담긴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기억과 따뜻한 가족애가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선사한다.
◇서복
개봉 12월 예정 장르 드라마 감독 이용주 출연 공유, 박보검, 조우진 등
인류 최초의 복제인간 ‘서복’을 극비리에 옮겨야 하는 임무를 맡은 정보국 요원 ‘기헌’이 서복과 동행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죽음을 앞둔 기헌과 영원 속에 갇힌 복제인간 서복의 아이러니한 만남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믿고 보는 두 배우 공유와 박보검의 감성 가득한 브로맨스가 기대를 모은다. 특히 박보검은 영화 ‘차이나타운’ 이후 5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해 한층 성숙해진 연기 실력을 선보일 예정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으로 섬세한 연출력을 인정받은 이용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조제
개봉 12월 10일 장르 멜로 감독 김종관 출연 한지민, 남주혁
일본의 원작 소설과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고 집 안에만 갇혀 살던 ‘조제’와 평범한 청년 ‘영석’의 아름답고도 쓸쓸한 사랑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설레면서도 두려운 조제와 그런 그녀에게 손을 내민 영석의 따스한 사랑이 잔잔한 울림을 선사한다.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애틋한 연기로 호평받은 한지민과 남주혁이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춰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Stage
◇노트르담 드 파리
일정 2021년 1월 17일까지 장소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연출 질 마으 출연 안젤로 델 베키오, 하바 타와지, 다니엘 라부아 등
추한 외모를 지닌 노트르담 대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와 아름다운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 세속적 욕망에 휩싸여 갈등하는 사제 ‘프롤로 주교’의 이야기를 담은 불후의 걸작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가 프랑스 오리지널 내한 공연으로 한국 관객을 만난다. 빅토르 위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15세기 파리의 혼란한 사회상과 부당한 형벌제도, 이방인들의 소외된 삶을 자연스럽게 녹여내 1998년 초연 후 오늘날까지 수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번 공연은 2015년 이후 5년 만이며, 초연 당시 프롤로 역을 맡은 오리지널 캐스트 다니엘 라부아를 국내 최초로 만나볼 수 있다. 거대한 세트장과 100kg이 넘는 대형 종 등 30t에 달하는 무대 장치가 압도적인 분위기를 더하며, 오리지널 배우들의 폭발적인 가창력과 프랑스 원어로 선보이는 감미로운 넘버가 잊지 못할 무대를 선사한다.
◇듀엣
일정 2021년 1월 31일까지 장소 KT&G 상상마당 대치아트홀
연출 이재은 출연 박건형, 문진아, 정철호 등
미국 대표 극작가 닐 사이먼의 작품으로, 추운 겨울을 포근하게 해주는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 성공한 작곡가 ‘버논 거쉬’와 신인 작사가 ‘소냐 왈스크’의 톡톡 튀는 사랑 이야기를 담는다. 2인극이지만 어색한 첫 만남부터 오해와 갈등, 사랑에 빠지는 순간까지 엎치락뒤치락하는 두 남녀의 변덕스러운 심리를 짜임새 있게 그려내 단 두 명의 배우만으로 무대를 가득 채운다.
◇작은 아씨들
일정 12월 20일까지 장소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연출 오경택 출연 이연경, 이혜란, 서유진, 전예지 등
남북 전쟁이 한창이던 1860년대, 성격이 각기 다른 네 자매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을 키우며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그린다. 전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가족 간 온정을 아끼지 않는 마치 가(家) 여성들의 따뜻한 마음이 코로나19로 힘든 시기를 겪는 관객들에게 시공간을 초월한 감동과 위로를 전한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고전 소설을 뮤지컬화한 작품이다.
백순실 관장은 반백년을 그림과 함께 살아왔다. 그렇게 해서 생산한 작품이 3000여 점. 몰입이 깊었으니 다작이 사필귀정이겠다. 창작으로 한 경지에 오르고자 하는 집념도 강했던 것 같다. “내겐 야망이 있었다”라 말하고 있으니. 이런 그가 미술관을 건립한 건 그게 사후까지 작품을 보전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미술관을 개관하고선 일이 많아졌다. 철따라 꽃을 피우는 야생화들을 돌보는 일이야 오래 즐겨온 낙이겠지만, 이젠 아침마다 미술관에 딸린 카페에 나가 하루치 커피콩을 볶는다. 전시 기획을 비롯해 제반 운영문제는 운영실장을 맡은 딸 김은영 씨가 전담한다. 백 관장의 나이 올해로 칠순. 허공으로 흩어진 세월을 영탄할 만한 시절이다. 하지만 그는 무슨 허무감 같은 것에 사로잡히는 법이 없다. 그림이 여전히 길이고 꿈이고 삶이기 때문이겠지.
“충실하게, 정직하게 창작에 전념하며 살아왔다. 허영이나 허세가 없는 작품을 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아직도 갈증을 느낀다. 요즘은 교향곡을 그림으로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100호 정도의 대작들이다.”
백순실 관장은 ‘동다송’ 연작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클래식 선율을 회화로 옮기는 작업으로도 호평을 받았다. 20여 년간 그려낸 음악그림이 300여 점.
“자의로 시작한 작업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깊이 빠져들더라. 클래식을 새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서 좋았다.”
선율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거. 이는 추상을 그리는 작가에겐 탐나는 소재일 것 같다. 독일의 파울 클레 역시 음악을 미술로 조형하길 즐겼더군.
“선율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기는 불가능하니 추상으로 갈 수밖에 없다. 나의 영혼까지 실린 음악그림이길 바라며 작업을 해왔다.”
추상화는 좀 어렵다. 때로 머리 아프다. 감상법을 말해 달라.
“작가의 지극히 주관적인 표현 장르이기에 난해하게 느껴질 수밖에. 그냥 보라. 어렵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떠오르는 느낌을 그냥 즐기면 된다. 그저 내 마음에 드는 색감 하나만 발견하는 것으로도 즐겁지 않던가. 차차 조형적 감각까지를 즐길 수 있다면 더 좋겠지.”
선생은 그림을 통해 ‘참자유’를 얻고 싶다고 했다. ‘참자유’란 무엇인가?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단순함, 그 안에 참자유가 있다고 본다. 난 이제 어지간한 욕망은 다 놔버렸다.”
마침내 자유로워졌다는?
“미술 행위 역시 단순해질 수 있는 구도의 길임을 알겠더라. 게다가 내겐 신앙이 있어 기도처럼 삶을 산다. 얽매임 없이.”
그의 작업실은 미술관 뒤편 후미진 자리에 있다. 솔과 대, 청매가 숲을 이룬 고샅에. 작업실 내부는 첩첩 쌓인 작품들로 초만원이다. 그림에 홀려 산 한 여자의 광량(光量)과 깡이 비쳐 정신이 번쩍 든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미치지 않고서 수준에 도달할 길이 없다.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을 떠도는 여행만큼 즐거운 게 다시 있을까. 생활의 굴레에서 해방된 자유로움. 모처럼 내숭이 없는 마음으로 풍경과 풍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의 관대함. 도취할 수밖에 없는 우연한 이벤트들과의 만남. 다채로운 비일상적 낭만의 향유와 감성 충전이 가능한 게 여행이다. 그러기에 흔히들 지친 ‘나’를 위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여행을 즐긴다. ‘스리랑카주의자’ 고선정(48)은 좀 다르다. 그는 여행으로 삶을 통째 뒤집었다. 종전의 관습을 획기적으로 바꾸었으니 반전이자 반역(?)이다.
신간들을 살펴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다 특이한 제목을 단 여행서 하나를 발견했다. “나는 스리랑카주의자입니다”라는 책. 스리랑카라는 나라를 좋아하기를 참을 수 없는 사람이 쓴 책임을 암시하는 제목이다. 스리랑카에 관한 한 고수임을 알리고, 풀만 먹기로 작정한 채식주의자처럼 스리랑카를 메뉴로 섭취해 삶과 정신을 살찌우겠다는 의도를 덩달아 밝힌 셈이다. 평소 제목에서 갖는 호감만으로 책을 충동 구매하는 버릇을 가진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이 점에서도 이 책의 네이밍은 꽤 근사하다. 부실한 내용을 담은 채 오직 호객을 위한 기술적 작명에 그쳤을 경우엔 노련한 독자들의 한숨을 자아내겠지만 ‘조금 특별한 여행기’임을 자처하는 이 책의 내용은 비교적 충실하다.
저자 고선정은 3년여 간 스리랑카를 집중적으로 드나들며 체험한 명소와 유적, 그리고 사람들에 관한 추억을 기반으로 책을 써나갔다. 자료와 정보의 수집에도 공을 들인 기색이 완연하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책엔 스리랑카의 역사와 종교, 문화와 환경 등등에 관한 인문적 정보들이 빼곡하다. 재미있는 건 여행 중에 만난 스리랑카 사람들이 보여준 정겹고 미더운 모습을 담은 에피소드들. 이는 건조한 문체와 평면적 묘사로 일관해 다소 밋밋한 맛을 풍기는 이 책에 고소하게 뿌려진 양념에 속한다. 스리랑카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에겐 요긴한 가이드북이 될 테다. 매체의 서평 담당자들이 딱히 이 책을 지목했다는 흔적은 별로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건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저자의 인생이 확 변했기 때문이다.
“책을 내고서 드디어 인생의 바닥을 쳤다고 생각했다. 대학 졸업 뒤 나는 25년간 수능학원 강사로 살아왔다. 수험생과 마찬가지로 휴일이나 명절에도 쉬지 못한 채 정말 바쁘게 살았다. 벗어나야지, 달아나야지 하면서도 얽매인 세월이었다. 항상 경제적인 측면을 중시하며 기관차처럼 달려온 날들이었거든. 책 출간을 계기로 이 지루한 단순반복에서 탈출, 인생 2막을 새로 시작하게 됐다.”
학원 강사에서 여행 작가로 변신한 셈이구나.
“요즘 두 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다. 국문학을 전공한 나에게 글쓰기는 오랜 꿈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꾸깃꾸깃해진 꿈이었다. 그 낡아가는 꿈을 스리랑카 여행을 계기로 복원할 수 있었지. 이제부터라도 좋은 글, 좋은 책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커지고 있다. 돈이 안 되는 일일지라도 열정을 불태워보겠다는 생각이다.”
심각한 글쓰기는 방울방울 피를 뿜는 고행에 가깝다. 학원 강사보다 지겨울 수 있는 게 문학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실로 힘든 일이라는 걸 왜 모르겠나? 스리랑카 이야기를 쓰며 많이 울었다. 어떻게 글을 끌어내야 할지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를 몰라 그지없이 막막하더군. 그러나 도전하고 싶었다. 내가 원래 좀 강한 캐릭터다. 몹시 힘든 상황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근성은 좀 있거든. ‘뭐 해보는 거지, 뭐든 하다하다 안 되더라도 죽기보다 더 하겠어?’ 이게 나의 방식이다. 어려운 일에 질겁하기보다 일단 세차게 부닥치고 보는 성향이라는 거.(웃음)”
시련을 기어이 이겨내는 타입? 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났기에? 당신은 25년간 강사 생활을 계속했다. 안심으로 안주한 날들이지 않았을까?
“사실 유난히 힘든 일을 겪지는 않았다. 게다가 완벽주의자라서 매사 엄청 노력했으며 덕분에 잘나가는 강사로 살았다. 경제적 기반도 다졌다. 그런데 중년에 접어들며 나를 돌아보자 허탈하더군. 긴긴 세월, 집과 학원만을 오가며 나를 너무도 조이고 누르며 살았다는 걸 깨닫고서였다.”
세상에 유쾌하기만 한 직업이 있겠나? 애환이 없는 인생이 가능하겠느냐는 얘기다.
“나는 일종의 패배감마저 느껴야 했다. 단조로운 생활을 계속한 결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숙한 인간, 미성숙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는 자괴감이 심했다. 한마디로 지나치게 경직된 삶이었지. 인간관계도 좁았고, 친구를 만나더라도 대화조차 풀려나가질 않더라고. 유치한 인생이었다.”
결국 빡빡하게 조여둔 나사를 여행으로 풀었나?
“마흔이 다 돼 처음 나선 해외여행으로 해방감이라는 걸 맛봤다. 여행이 나를 풀어놓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라는 걸 알았다. 이후 남미나 유럽 등 20여 개 국가를 여행했고, 이 와중에서 강사 생활을 청산했다.”
이상과 본성을 되찾게 해준 나라
첫 번째 해외 여행길에서 고선정은 ‘눈물을 콸콸 흘렸다’고 한다. 낯선 거리를 아무런 목적 없이 쏘다니며 즐거워하는 자신의 모습에 북받쳐서. 그가 감옥과도 같은 직장생활을 하거나 얼토당토 없는 쇼를 하며 살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지나온 날들이 족쇄에 갇힌 허울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회의감에 당황하고, 아울러 여행의 기쁨에 전율했던 모양이다. 진정으로 잘 산다는 게 어떤 것인가를 자문하며 여행이라는 신세계에다 자신을 방목하기로 결정했던 것 같다. 설명하기 어려운 추상화와도 같은 삶과 시간에 마침내 구체적 맥락이 잡혀나가는 계기였을지도. 이후 그는 자유로운 인간 유형의 한 가지 존재 방식인 여행자의 자격을 자신에게 부여하고 세상의 많은 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만난 게 스리랑카였다.
“여행길의 비행기에서 우연히 본 잡지 속 스리랑카 풍경 사진 한 장. 그게 나를 스리랑카로 달려가게 했다. 다분히 충동적인 끌림이었지만 치명적인 매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충격이 느껴질 정도였다.”
스리랑카의 그 어떤 매력에?
“첫 여행에서 여덟 개 도시를 돌아다녔는데 묘하게도 도시마다 색깔이 다르더라. 바다 경관도 실로 절경이었다. 10회 이상의 여행으로 아예 살다시피 하며 체험한 스리랑카는 ‘아름다운 물의 나라’였다. 이마저 불충분한 설명에 불과하다. 뭐라 딱 집어 예찬하기 어려울 지경으로 모든 게 좋았다.”
풍경은 물론 분위기까지 당신의 성향과 잘 맞았다?
“그렇다. 내면으로 스리랑카가 흘러들어 나의 모든 것을 흔들어놓았다. 여행을 통해 물처럼 흐르고 싶다는 것, 공기처럼 가볍게 떠돌고 싶다는 것, 이게 내가 원하는 목적이었는데 스리랑카는 적격이었다. 나의 이상과 본성을 되찾게 하는 여행지였으니까.”
스리랑카는 인도 남동부에 있는 작은 섬나라. 개발도상국이지만 사망률과 문맹률은 낮으며 명차 실론티의 산지이기도. 자연 풍광이 빼어나 ‘인도양의 진주’라 부른다. 세계적인 여행안내서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은 ‘2019년 세계 최고의 여행지’로 스리랑카를 선정, 논란을 야기했다. ‘론리 플래닉’은 고대로부터 상속된 불교와 힌두교 유적들, 훼손되지 않은 자연환경 등을 근거로 스리랑카 여행을 권장했지만 종교분쟁이 지속되고 있어서였다. 2019년 4월엔 수도 콜롬보에서 테러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위험 상황에 아랑곳없이 고선정은 스리랑카를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막상 가보면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위험지구는 영리하게 미리 피해야 하고 말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신중한 인간이다. 어릴 적 별명이 ‘애늙은이’였다.(웃음)”
‘론리 플래닛’의 스리랑카 예찬에 영국 외무부는 우려를 표했더군. 관광지에서 성희롱이 난무하는 나라라며.
“나도 툭툭(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스리랑카식 택시) 기사에게 불편한 농담을 들은 적이 있다. 달리는 툭툭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그러나 극히 부분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불편한 상황을 용납하거나 당할 나도 아니다.”
인간의 바람기와 장난기는 모든 곳에 공기처럼 감돌지도. 이게 여행자의 피로감을 가중하기도 한다.
“여행이 오직 즐거울 수만은 없다. 단독 여행자에게 외롭고 두려운 상황은 언제 어디서든 불시에 찾아들지 않던가. 안전을 최우선으로 현명하게 움직여야 하겠지. ‘여행하다 비명횡사는 하지 말자!’ 이건 나의 수칙이다. 항상 서툰 방심이나 일탈을 극구 삼가며 여정을 추진했다.”
약간의 일탈과 모험은 여행의 풍미를 돋우지 않나? 서머싯 몸은 ‘경찰이 보지 않을 때 슬쩍 딴짓을 하는 데에 인생의 재미가 있다’고 했다. 규율에 속박돼 살지 말자는 얘기였다.
“성격상 일탈은 나와 멀다. 나를 속박한 건 나 자신이었던 것 같다. 나를 자유롭게 풀어놓기가 너무도 힘들었거든. 그러나 스리랑카에서 달라졌다. 비로소 꽤나 자유로워진 나를 발견했던 거다. 그러니 스리랑카를 좋아할 수밖에.”
어떤 에너지를 받았기에?
“선량한 사람들, 가난하지만 밝고 따뜻한 사람들! 내가 만난 스리랑카인들이 그렇게 대부분 순박하고 친절했다. 그런 그들의 선의가 나를 풀어놓게 한 에너지로 작용했던 것 같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라지?
“돈을 중심에 두고 아웅다웅하는 자본주의에 덜 물든 덕분인 것 같다. 모두가 골고루 가난해 상대적 불행감이나 박탈감을 갖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나라다. 그들은 여행자를 가족처럼 진심으로 대했다. 가령, 하루 여정을 마치고 숙소로 귀환하는 저녁이면 미리 집 앞까지 나와 기다려주는 주인집 식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들 그런 식이었다. 내가 스리랑카에 심취한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리랑카로 이주해 살기로 했다
스리랑카 여행 중에 사람들은 고선정에게 곧잘 묻곤 했단다. “아니, 당신은 왜 항상 웃는가?”라고. 고선정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늘 웃는 인간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무심하고 차가운 세상의 이면을 스리랑카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학원 강사로 열심히 뛰었던 한국에선 맛보지 못한 깊은 만족감을 이국에서 비로소 만끽했다는 게 아닌가. 그러자 쪼그라들었던 자아가 돌연한 탄력을 받아 확장되었나? 그는 자신과의 불화 구조를 깨고 정체성을 찾았고 열린 감관으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것 같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평범한 여행 서사에 불과할 수 있겠다. 그런데 고선정의 행보는 한층 역동적이다. 한 권의 여행기로 스리랑카에 꽃을 바친 그는 자신을 위해서도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아예 스리랑카로 이주해 살기로 결심했다는 게 아닌가. 이미 스리랑카에 터를 사들여 살아갈 집을 짓기 시작했다.
“눈뜬 아침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스리랑카다. 나를 꿈꾸게 하고, 열정을 심어준 나라. 거기에서 군더더기는 다 내려놓고 즐겁게 살고 싶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건축 일정에 차질이 생겼지만 올 연말엔 스리랑카로 날아가 공사를 진척시킬 참이다.”
지구 저편으로 이주. 이는 그가 요번 생에 행한 가장 참신한 결단에 속하려나. 한 번뿐인 아까운 생을 나 살고 싶은 곳에서 살겠다는 의도에 무슨 결함이 있으랴. 그런데 스리랑카에서 산다 한들 삶의 고역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행복으로 도배할 수 있는 삶이 가능할까. 어디서건 인간은 외로운 존재라 하지 않던가. 여기에 대한 고선정의 생각은 이렇다.
“밝고 투명하게! 내가 살고 싶은 방향이 그렇다. 물론 스리랑카에 산다고 1급수처럼 해맑게 살 순 없겠지. 그저 2급수 정도만 돼도 좋겠다. 이마저 열정이 아니고선 얻기 어려운 차원일 거 같다. 하지만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으로 도전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인터뷰 중에 고선정이 자주 동원한 단어가 ‘꿈’, ‘열정’, 그리고 ‘도전’이었다. 실천을 결여하면 허영에 불과할 단어들이다. 그러나 그에겐 필생의 지표일지도.
2019년 인기리에 종영한 JTBC 드라마 ‘SKY 캐슬’은 대한민국 상위 0.1% 부모의 교육열과 입시지옥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화제를 모았다. 드라마 속 입시 코디네이터로 등장하는 김주영은 한서진의 딸 예서의 공부방을 살펴보더니, 벽에 걸린 다른 그림들은 모조리 떼어내고 한 그림만 걸어두라고 지시한다. 그 작품은 바로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의 ‘적색, 회색, 청색, 황색, 흑색이 있는 마름모꼴 콤퍼지션’이다. 김주영은 몬드리안의 그림이 집중력을 높이고 뇌 운동을 활발하게 해준다고 설명한다. 개인적으로는 공부로 혹사당하는 아이들의 뇌를 잠시라도 쉬게 해주려면 잔잔한 풍경화가 더 낫지 않을까 싶지만, 드라마 작가는 몬드리안 작품 특유의 안정된 구조와 규칙적인 리듬감이 뇌에 편안한 자극을 준다고 여긴 듯하다.
필자가 미술 교육과 관련해서 학부모들과 상담할 경우가 있는데 “저는 그림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하며 자신 없어 하는 이들도 몬드리안의 작품을 내밀면 미소를 지으며 단번에 알아보곤 한다. 그만큼 몬드리안의 그림은 유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의문들도 생긴다. 검은 선을 가로세로로 긋고 빨강, 노랑, 파랑으로 칠해놓았을 뿐인데, 어째서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로 인정받게 된 것일까? 이 정도 그림이라면 나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완성된 몬드리안의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시작은 다르다. 새로운 사조를 처음 만들어내는 아방가르드예술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혹독한 훈련과 내공을 필요로 한다. 이는 무(無)에서 창조해내는 유(有)의 의미와는 다르다. 기존의 예술 양식을 답습하고 연구하며 치열한 고뇌 끝에서 만들어낸 독창적인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몬드리안 역시 처음부터 추상화를 그린 작가가 아니다. 20대에는 다른 화가의 그림을 연구하고 모작하면서 나무, 교회 등 자연을 모티브로 한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그러던 중 자연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때부터 서서히 형체의 틀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그가 30대 후반에 그린 ‘돔뷔르흐의 교회 탑’을 살펴보면 구상화에서 벗어나 형체를 단순화한 뒤 대상의 본질만을 나타내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40대에 접어든 몬드리안의 작품 ‘생강 항아리가 있는 정물화 Ⅱ’에서는 더 담대해진 선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만 해도 무엇을 그렸는지 대충 알 수 있는 반구상화 형식을 보여준다. 50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콤퍼지션’ 시리즈를 제작한다. 대각선과 곡선을 배제하고 수평과 수직의 교차를 토대로 엄격한 기하학적 구도를 드러내며 삼원색(빨강·노랑·파랑)과 무채색(검정색·흰색·회색)만 사용한 점이 돋보인다. 몬드리안 고유의 화풍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중년 이후 자기 성찰과 고민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해나간다. 누군가의 그림을 좇으며 따라 그리던 젊은 시절을 지나, 자신의 본질을 깨닫고 고유한 예술세계를 펼쳐낸 중년의 몬드리안. 그는 오로지 선과 면, 색의 관계를 통해 순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겼고, 수직과 수평의 선이 작품에 역동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으며 균형과 평온함을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군더더기를 덜어낸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사물을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무엇일까? 어떠한 사고방식이 만들어낸 외형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닐까? 몬드리안의 다음과 같은 한마디는 이러한 물음에 더 파고들게 한다.
“아름다운 감정은 대상의 외형에 의해 방해받는다. 그래서 대상은 추상화돼야 한다.”
이선화 추상화가(52세)의 작품은 색채와 그림이 모두 인상적이다. 컬러풀한 색채는 열정과 에너지를 전하고, 역동적인 그림은 생명력과 자유로움을 이야기한다. 작가 자신도 늘 밝은 기운을 발산해 주변에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전시가 대부분 취소된 가운데, 고양시에 있는 한양문고의 ‘갤러리 한’에서 3월 3일부터 6월 8일까지 이선화 작가의 ‘생명소통’ 전을 진행 중이다. 이곳에서는 작년 8월에 초대전을 한 이후 반응이 좋아 2번째로 하는 전시다. 그는 20살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니 30년이 넘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10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게 너무 좋았어요. 중학교 때 마티스의 그림을 보고 ‘나도 색채의 마술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색감이 뛰어난 작가’라는 평을 듣는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꿨어요.”
대학졸업 후 여러 해 동안 미술 교사로 재직했을 때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외할아버지는 화가였고, 어머니도 어린 그녀를 무릎에 앉혀 놓고 목단꽃을 그려주곤 했다. 언니와 여동생 역시 그림을 그릴 정도로 예술가적인 분위기로 가득 찬 집안에서 성장하다 보니 화가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늘 생명력, 에너지, 색채에 관심을 두었고, 40대부터의 표현 주제는 생명소통이다. 작품과 제목에도 물고기와 새, 나무, 바람, 물 등 장자의 자유 사상과 생명체들 간의 소통을 담았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생기와 울림을 주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심리학과 동양철학, 명상 관련 책을 즐겨 읽은 덕분에 이런 사고가 가능하다.
“생명도 중요하고 소통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우주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한 줌도 안 되는데 서로 연결이 되어 있죠. 사람을 포함한 생명 하나하나는 우주 안의 하나의 세포라고 생각해요.”
그는 작품을 통해 추상화의 동서양적 만남을 시도했다. 추상화의 출발은 서양이지만, 추상적 사유와 미학은 동서양이 따로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저는 우리나라의 전통색인 오방색을 주로 써요. 오방색이 우리 민족의 심성에 가장 어울리는 색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음양오행의 의미를 담고 있는 청, 적, 황, 백, 흑색은 서로 충돌하면서 조화를 이루죠. 마치 카오스와 코스모스, 즉 혼돈과 질서가 함께 있는 우주와 같아요. 이런 것들이 생명력을 표현하는 제 회화를 만드는 요소들이에요.”
그의 작품들은 멀리서 보면 어떤 기운이 느껴지다가, 가까이서 보면 온갖 생명체들이 서로를 향해 꿈틀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관객들이 자신의 그림에서 때로는 온화하고, 때로는 격정적이며, 때로는 시원한 치유의 바람을 느끼길 바란다.
“컬러 테라피, 즉 색채에는 치유 효과가 있다고 믿고 있어요. 제 그림과 소통을 하는 모든 분에게 생명력과 에너지를 주고 싶어요. 그림을 통해서 감상자들의 트라우마를 줄여주고 활력 있고 행복한 삶에 도움을 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죠.”
그의 작업을 보면 현대미술 대중화를 위해 고민한 흔적도 읽을 수 있다. 선입견 없는 마음,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담으려고 인문학 공부를 꾸준히 한 덕분인 듯하다. 그 스스로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수행하는 마음으로 예술 활동에 정진하고 있다고 한다. 추상화를 어렵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가 전하는 감상법은 명쾌하다.
“예술가는 대상을 표현하고 평론가는 작품을 해석하려고 하죠. 그런데 감상자는 그 느낌 자체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작품을 머리로 해석하려 하지 말고 가슴으로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바람의 의미를 묻지 않고 바람을 느끼듯이, 꽃의 의미를 묻지 않고 꽃향기를 맡듯이, 파도의 의미를 묻지 않고 파도에 몸을 던지듯이 말이에요. 그때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것은 오롯이 감상자 고유의 것이 될 것이고, 감상자는 창조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화여대와 홍익대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그동안 20여 차례의 개인전과 100여 회의 단체전에 참석하며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해왔다. 중국 상하이를 비롯해 런던 ‘어포더블 아트 페어(Affordable Art Fair)’와 홍콩 ‘하버 아트 페어(Harbor Art Fair)’ 등 해외 여러 곳에서 전시를 했다. 2017년에는 20여 명의 한국 작가들과 함께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열린 ‘아트 쇼핑(Art shopping)’에도 참여했다. 국내에서는 키아프, 화랑미술제, 롯데호텔 아트 페어, 부산국제화랑미술제 등에서 단체전과 국회 아트갤러리, 현대백화점 등에서 초대 개인전을 했다. 작품은 박영사, 고영 테크놀러지, LG생활건강, 리더스경제신문사 등 많은 곳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는 SNS를 통해 대중들과 소통도 하고 있다. 자신의 작품을 활용해 스카프, 넥타이, 스탠드 조명 등의 아트상품을 만드는 것도 소통을 위한 일 중에 하나다. 5월 한 달간 ‘갤러리 한’ 전시장에서는 추상화 개인 레슨도 할 예정이다. 그동안 종종 자신의 작업실에서 캔버스와 물감, 붓 등의 재료를 제공하고 2시간 동안 작품을 완성할 수 있도록 지도해 왔는데 만족도가 높았다고 한다. 그 덕분에 추상을 힘들고 낯설게 생각했던 이들이 추상의 매력에 빠져들기도 한다.
벽에 그림 하나 걸어두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추상화를 가르쳐준 스승은 더는 알려줄 게 없으니 스스로 헤매며 길을 찾아보라 했다. 그 후 20여 년의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가끔 붓질이 그리웠지만 자신이 없었다. 더러는 행복해서, 더러는 안간힘을 쓰며 사느라 그림과 점점 멀어졌다. 그러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던 걸까. 오영희(吳英姬·67) 씨는 붓과의 오랜 별거를 끝내고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았다. 평온했던 시절도, 고통으로 발버둥쳤던 마음도, 거센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도 모두 ‘내 삶의 무늬’임을 지극하게 받아들이며.
오영희 작가는 자주 까르르 웃었다. 웃음소리가 쨍한 가을햇살처럼 환했다. “고우시다”고 하자 나이 들어 누가 그런 말 해주면 얼굴이 아니라 마음이 예쁘다는 소리로 들어야 한다며 슬쩍 귀띔을 한다. 성실하게 방황을 끝낸 자의 말씀이 저러할까. 군더더기가 없다. 한낮의 햇볕은 거실로 한바탕 쏟아졌고, 캔버스 아래 플라스틱 바가지와 붓과 물감들은 내내 그리워하던 무엇처럼 품에 안겨왔다. 그녀는 커피를 내려 거실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작은방 문을 열었다. 방 안 가득 쌓여 있는 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가 다작(多作)하는 편인데, 꽤 많죠? 붓을 들면 밤을 꼬박 새우는 날도 종종 있답니다. 40대 초반에 친구와 함께 추상화를 배웠어요. 그때 선생님이 스스로 헤매면서 방향을 찾으라 하셨는데 그 뒤로 작업이 잘 안 되더라고요. 재능이 없나보다 했죠. 그 시간을 잘 이겨내고 유명 화가가 된 친구가 작년에 서양화가 조국현 선생님을 소개해주셨어요. 덕분에 제 세계를 빨리 찾은 것 같아요.”
20여 년 만에 다시 든 붓
젊은 시절, 그녀는 무작정 그림이 좋았다. 화가는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집 벽에 그림 한 점 사서 걸어놓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문화센터에서 그림을 배우고 갤러리 전시회를 다니며 갈증을 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작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추상화였다.
“친구랑 거의 조르다시피 해서 그분께 비구상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하루는 10분 안에 100호를 다 채워보라는 거예요. 당황스러웠죠. 그때까지만 해도 고지식하게 그림은 붓으로만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제 고정관념이 완전히 깨져버린 날이었죠. 그리고 마치 붓에서 풀려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때부터 수세미, 막대기, 삼각자, 약병 등 온갖 것을 도구로 활용했어요. 요즘은 손주들 장난감을 많이 활용하고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거실에는 물감이 묻은 물건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심지어 싸리비와 커피 알갱이까지 도구로 활용한다니, 문득 “새로운 도구는 작가의 창의력을 확장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작품은 점, 선, 면이 반복되면서 마치 끊임없는 대화를 하듯 리듬감 있게 화면을 어우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재료와 도구의 경계를 허물어 색의 질감을 높이면서 풍부한 스토리를 만들어내 관객들의 관심을 많이 받고 있다. 리듬감과 스피드와 경쾌함은 그녀의 작품을 읽어내는 하나의 키워드다. 지난여름에는 제9회 대한민국청춘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조국현 화가의 권유로 출품했는데, 큰 상을 받은 것이다.
“조 선생님 화실에는 일주일에 한 번 갑니다. 미술계 돌아가는 얘기도 듣고 제 그림도 보여드리면서 조언을 얻고 오죠. 선생님이 다른 사람한테 제 칭찬을 하셨대요. 혼자 막 터지듯 그리는 그림이라면서 아주 감각적이라고요. 이런 감각은 타고나는 거지, 노력하거나 연구해서 되는 게 아니라면서요. 저야 잘 봐주시니 감사하죠. 용기도 나고요.”
그녀는 최근 초대전도 하고 홍콩과 일본 등지에서 열리는 교류전에도 참여하면서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한동안 몰아치는 폭풍 속에 서 있었다.
큰 고통 뒤에 받은 선물
2008년, 그녀는 남편에게 사고가 생겨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병원 실수로 일어난 일이라 그 충격은 더 컸다. 그래도 남편 얼굴 마주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처음에는 죽을 만큼 힘들었다. 맷돌같이 무거운 시간들이 흘러갔다. 나을 병이 아니라는 의사의 말도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정성을 쏟는 만큼 남편 몸이 좋아지리라 생각했다. 결국 그 마음이 더 이상 갈 데가 없을 때 포기가 됐다.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는 상태가 자유라는 걸 그때 알았어요. 내려놓고 나니 새털같이 가벼워지더군요. 불행한 것보다 행복한 게 더 많았는데 그때는 왜 그걸 몰랐을까요. 고통을 감수한 뒤에 깨닫게 된 거죠. 예전에는 다 가진 여자라서 감사한 줄도 모르고 살았어요. 요즘은 이리 봐도 감사하고 저리 봐도 감사한 일 천지예요.”
고통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한다. 선물도 하나씩 들고 온다. 그녀는 억울해하는 대신 ‘내게 맡겨진 숙제이니 기꺼이 하자’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혼돈의 시간이 사라지고 더 깊은 사랑이 찾아왔다.
“병원으로 남편 만나러 가는 날에는, 혹여 제 손에 무거운 게 들릴까봐 ‘오실 때 아무것도 사오지 마세요’ 합니다. 어느 날은 ‘당신이 보내주신 영양제가 도착했어요. 고마워요. 허리 통증은 좀 어때요?’ 하고 안부를 물어요. 손주들이 예쁜 짓을 할 때도 ‘우리 외손주 네 마리가 당신 닮아서 머리가 기가 막히게 뛰어난가봐요’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남편한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았어요. 이제는 제가 그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주고 싶어요.”
두 사람은 고려대학교 선후배 관계. 학교에 다닐 때는 모르고 지냈는데 졸업 후 인연이 돼 결혼까지 이어졌다. 남편 이발도 해주고 손발톱 깎아주며 소소한 얘기를 나눌 때면 ‘우리가 참 특별한 사랑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단다.
소풍 와서 놀듯 산다
다시 붓을 들었을 때 어떤 그림이 나올지 궁금했다는 그녀는 색채가 맑고 밝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힘든 시간을 그림으로 잘 승화했다고 말하는 지인들도 있다.
“예술은 고통이니 뭐니 하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그런 게 있다면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겠죠. 저는 작업할 때 계획을 세우거나 그러지 않아요. 그때그때의 감정에 집중합니다. 추상화에도 질서는 있어요. 혼돈 속의 질서, 우리네 삶과 참 많이 닮았죠.”
사진 촬영을 할 때 햇빛이 만들어낸 무늬가 스크린에 비치자 그녀는 홀린 듯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었다. 마치 큰 보석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귀한 것들 앞에서 예민해지는 그녀의 더듬이는 아직 젊어 보였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그녀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잘 익어가야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더러 실수를 해도 부족한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다른 사람의 허물도 너그럽게 볼 수 있어요.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질투하고 샘이나 내면서 사는 사람, 비교하면서 사는 사람을 보면 정말 안타까워요. 이제부터는 향기롭게 익어가야 해요.”
그러고 보니 벌써 칠십을 코앞에 두고 있는 그녀다.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 정신이 번쩍 든단다. 그렇지만 절대 무겁지 않게, 소풍 와서 놀다 가는 기분으로 살려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날이 앞으로도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누구든 이 무대를 떠날 날이 오지 않겠어요? 앞으로 제 맘대로 몸 움직이며 살 수 있는 시간이 10년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동안 고마웠던 사람들 많이 만나서 웃고 지내려고요. 나이 들면 ‘감사, 봉사, 밥사’가 최고라는데, 저는 ‘밥사’ 정도는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웃음)”
자수로부터 출발했지만 더 창의적이고 복잡하며 섬세한 미감을 자랑하는 예술로 거듭난 실그림. 손인숙(70)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작가는 1500여 종류에 달하는 색실을 다루는 실그림의 대가로서 우리나라의 전통예술을 현대예술로 이으며 독자적인 미학을 펼쳐 나가고 있다. 예술 선진국 유럽에서 먼저 인정받은 그녀의 실그림은 단순히 그림의 틀을 넘어 다양한 전통 장식 등 공예의 세계와 결합했고, 이제는 건축과의 컬래버까지 진행 중이다. 거침없는 예술가적 도전의식으로 한국 예술의 큰 숲을 수놓고 있는 그녀의 뜨거운 예술혼과 작품세계를 심층적으로 들여다봤다.
“전통은 예술이 넘어야 할 무의식적 소재의 바다인 동시에 의식적으로 넘어야 할 산과도 같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수 있는 문화예술의 숙명은 전통과 창작의 끊임없는 대화와 변형의 연속인 셈이죠.”
손인숙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작가는 우리 예술의 현재를 말할 때, 전통과 현대의 만남에 관해 가장 분명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예술가 중 한 명일 것이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길, 바로 전통 자수를 현대예술로 승화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유일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마음을 홀린 실그림
손 작가의 작품의 가치를 먼저 알아본 곳은 다름 아닌 서구 예술의 중심지인 프랑스였다. 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장관은 실그림을 감상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의 전통과 창의성이 완벽히 맞아떨어진 모습입니다. 너무나 모던하기도 하죠. 이 작품들을 볼 때면 신선한 숲속을 걸어갈 때 받곤 하는 자연의 향취가 느껴지는 듯해요.”
또한 유럽에서 가장 큰 동양미술 전문박물관인 기메박물관 관장인 소피 마카리우의 찬사도 여기에 더해질 가치가 있겠다.
“한국인의 내밀한 속, 한옥의 안채를 들여다보듯 흥분됩니다. 이건 사람의 손이 아니라 신의 손이 움직인 것 같습니다. 강하면서도 절제된 섬세함이 기가 막히기 때문입니다.”
소피 마카리우를 비롯한 프랑스 예술계 저명인사들의 찬사는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손 작가 작품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 표시로 기메박물관에서 전시를 열기로 한 것이다. 사실 손 작가는 2015년 한불 상호교류의 해에 정부 후원을 요청했으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랑스문화원 전 다니엘 올리비에 원장, 소피 마카리우 관장은 그녀의 작품이 한국의 전통문화 자수를 예술로 승화한 놀라운 성과라며 적극 나서서 한불 수교 130주년 공식 행사 인증을 따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프랑스의 ‘르 몽드’ 지와 ‘르 파리지앵’ 지 문화면에 손 작가의 실그림 관련 기사가 대서특필되면서 처음 유럽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6개월간의 기메박물관 전시로 성공적인 유럽 데뷔를 이뤄냈다. 250여 점이 출품된 이 전시회는 3개월 만에 8만 명의 관람객이 찾은 전시회로 기록되며 대성공리에 끝마쳤다. 이어서 프랑스의 니스동양미술관과 스위스 제네바 바우어재단 극동박물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현재 세계 미술계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손 작가의 작품은 세계 각 분야 문화 예술인과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더 큰 문화예술의 아트코어 역할을 해나가고 있다.
화가의 붓처럼 색실로 그려지다
손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자수에서 비롯됐지만 자수라고 하지 않고 ‘실그림’이라고 칭한다. 그녀의 작품을 보면 왜 그렇게 지칭되는지 바로 깨닫게 된다. 우리가 과거에 보고 접한 자수와는 다른, 훨씬 고도화된 미술 영역의 세계를 보여주며 손 작가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실그림이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수틀에 씌운 빈 천에 자신의 감성과 내면의 세계를 충실하게 투영해 즉흥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낸다. 재료와 기법에 얽매이지 않는 독특한 창작 방식이다. 마치 화가가 캠퍼스에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바늘이란 붓으로 실을 채색하듯 한 땀 한 땀 정직하게 실그림을 완성한다. 틀에서 벗어난 자유를 보여주며 영혼을 수놓는 것 같다. 화풍으로 보면 동양화와 서양화가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모습이다. 이때 전통 자수의 색채와 질감은 더 깊고 풍부하게 표현된다. 일반적인 전통 자수는 100여 개 안팎의 색실을 사용하지만 그녀가 쓰는 색실은 1500여 개에 이른다. 그 숫자의 차이만 봐도 그녀가 갖는 자부심의 합당한 근거를 알 수 있다. 그녀의 실그림 작품들이 기존 전통 자수의 색채와 질감을 넘어 풍부한 미학을 선보이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그녀의 작품들은 추상화, 풍경화, 목공예, 보자기, 회화 보자기, 인물화, 불교미술, 풍속화, 산수화, 서예, 한방 문화, 노리개, 복식, 주머니, 열쇠꾸러미, 걸개장식, 우드아트, 물푸레나무 조형물, 장신구, 병풍, 그리고 건축에 이르기까지 22가지 장르를 넘나든다.
세계가 먼저 알아본 실그림
손 작가의 작품들에 쏟아지는 호평의 근거는 무엇보다도 실그림만이 창조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예술적 디테일에 있다. 자수 작품은 앞면만 아니라 뒷면도 볼 수 있다. 뒷면을 보면 작품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손 작가는 이 부분의 디테일까지 신경 써서 작품을 만든다.
그녀 작품의 섬세함은 재료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자수 뒷면에 풀칠하는, 즉 배접 과정에 쓰이는 풀은 전통 방식으로 2년여에 걸쳐 만들어진다. 인물의 머리카락을 표현할 때는 실제 머리카락을 쓰기도 한다. 목재를 쓸 때도 경도를 따져서 10년 이상 말린 통나무를 사용한다. 이 모든 것들이 작품을 대하는 그녀의 엄격한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들이며 그녀의 실그림이 해외 갤러리에서의 감탄을 유발케 하는 근거들이다.
전통 건축물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자수라는 특별한 소재가 만들어내는 독자적 미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실의 결에 따른 음영과 입체감까지 고려해 표현한 것이 생생한 공간감을 색다르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만든 작품의 색감과 요철감을 확실하게 감상하려면 직접 보는 수밖에 없다.
실그림과 건축의 결합이라는 도전
실그림으로 표현한 건축물은 그녀로 하여금 실그림과 건축의 융합이라는 또 다른 세계를 추구하게 만들었다. 무려 20여 년째 제작한 것이란다. 어느 누가 자수와 건축이 결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겠는가?
“옛 선인들의 옷과 귀중품을 보관하던 대형 의걸이를 만들고 있어요. 흑단나무를 주재료로 해 전체를 꽃살문으로 디자인하여, 248개 서까래의 끝 부분에는 연화 문양의 실그림이 들어가게 됩니다. 몸체에는 96개의 문짝에 한국의 문살을 디자인해 단청 이미지의 실그림으로 표현했고 지붕에는 암키와 수키와가 조화를 이루며 네 귀퉁이 상단에는 용마루를 앉혔습니다. 곡선이 내려오는 처마 위에는 잡상을 얹어놓았으며 축 하단에는 운룡을 조각하고 봉황의 길을 만들어 집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하단 사방에는 건축을 지키는 해태를 조각해 대우주를 지키는 의미를 드러냈죠.”
단순히 자수틀에 수만 놓는 게 아니라 디자인한 큰 그림을 여러 영역의 파트너와 함께 만들어내는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또 다른 대작으로는 ‘수월관음도’를 들 수 있다. 수월관음도는 투명한 사라를 걸친 관음보살의 고귀한 자태가 어둠속에서 마치 달처럼 아름답게 빛나며 현신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신비롭게 묘사돼 있다. 표현기법상의 우수한 경지를 엿볼 수 있는 고려 불화 중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작품의 가치를 알아본 일본인들에 의해 대부분 해외로 유출되었고 국내에는 몇 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손 작가는 수월관음도를 실그림으로 창작해보고 싶었다.
일본 가가미신사(鏡神社)가 소장하고 있는 수월관음도는 길이 419.5cm, 너비 254.2cm로 현존 불화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수월관음도는 배경 부분과 정병, 선재동자로 이어진 부분에 손상과 훼손이 더러 있어서 손 작가는 화원의 입장이 되어 상상하고 디자인하여 창작하는 게 작업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재해석한 수월관음도는 각고의 노력 끝에 길이 5m가 넘는 대작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