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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여름휴가로 딱! 동남아 골프장 4곳
- 여름 휴가철이 다가오고 있다. 코로나19 빗장이 풀리며 해외 여행을 염두에 둔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골프 애호가라면 동남아시아를 눈여겨 볼만하다. 인도네시아의 보석 ‘발리 내셔널 CC’ 응우라라이 국제공항에서 20분 거리로 접근성이 매우 뛰어나다. 발리는 일 년 내내 25~30℃를 유지하며, 특히 7월부터 10월 사이 비가 내리지 않아 골프 치기에 매우 적합하다. 야생의 풍광 매력적인 ‘탄야 골프클럽’ 방콕에서 접근성이 좋고, 평지형 코스로 누구나 어렵지 않게 골프를 즐길 수 있다. 1인 1실의 프라이버시가 적용되는 최적의 숙박 조건을 갖추고 있어 주말이면 자리가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캄보디아의 신성 ‘프놈펜 바타낙 골프리조트’ 2022년 아시아·태평양 3위의 최고급 골프리조트로 선정된 곳. 파크랜드 타입의 코스 레이아웃으로 코코넛트리와 팜트리가 즐비하다. 동양적인 스펙터클함을 경험할 수 있다. 세계 100대 클럽 ‘더 블러프 호트램 스트립’ 베트남의 유일한 세계 100대 코스로서 그 아름다움과 레이아웃이 최고 수준이다. 홀과 홀 사이에 이어지는 엄청난 듄스(Dunes)는 한국에서 보기 힘든 최고의 경관을 자랑한다.
- 2023-06-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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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보다 관심, 역사 새기는 해외의 다크 투어리즘
-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뉴욕 911 메모리얼파크, 체르노빌 원전사고 지역 등은 연간 수백만 명이 다녀가는 세계적인 명소다. 같은 장소라도 눈으로만 보는 관광에 치중하기보다는 비극의 역사를 조명하고 마음에 되새긴다면 다크 투어리즘의 교훈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우리 역사와 연관됐거나 인접한 지역이라면 그 효과는 더 크게 나타난다. 이에 착안한 해외 다크 투어리즘 스폿 두 곳을 소개한다. [1] 독일: 베를린, 분단의 아픔을 기억하다 분단의 상처를 지녔다는 점에서 독일은 한국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 그런 독일의 역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구조물이 바로 ‘베를린 장벽’이다. 이 베를린 장벽 동쪽에 조성된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서는 1990년 전 세계 예술가들이 참여한 100여 점의 벽화를 만날 수 있다. 얼핏 보면 장난스러운 그림들 같지만 저마다 아픔과 희망, 평화의 메시지를 내포한다. 관광객들은 벽화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그림 속 포즈를 따라 하는 등(특히 ‘형제의 키스’가 유명하다) 야외 갤러리를 즐긴다. 다만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반달리즘의 영향도 적지 않아, 2009년부터는 복원과 보존을 위한 작업을 병행 중이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서 멀지 않은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에는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유대인 대학살 추모공원)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된 유대인 600만 명을 기리는 공간으로, 추모의 의미로 각기 다른 높이의 콘크리트 비석 2700여 개를 조성했다. 미로처럼 느껴지는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비석 위에 걸터앉거나 눕는 등 자유로운 모습이다. 경건함과는 거리가 먼 행동으로 보이지만, 오랜 시간 머물며 역사를 되새기게끔 몇몇 비석의 단을 의도적으로 낮췄다고 한다. 때문에 (무덤도 아닐뿐더러) 에티켓에는 어긋나지 않는다고. 그밖에도 독일은 ‘발길 닿는 곳곳이 다크 투어리즘 스폿’이라 할 정도로, 거리마다 역사를 기리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장소가 즐비하다. [2] 일본: 나가사키, 원폭의 잔해로부터 참상과 마주하다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는 핵무기가 폭발한 지점이나 피복 중심지를 뜻하는 용어다. 최근에는 뉴욕에서 발생한 9·11테러로 붕괴된 세계무역센터를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그라운드 제로’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원폭) 피복 지점을 가리키면서였다. 당시 1945년 8월 12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며 일본은 9월 2일 정식 항복했다. 전쟁은 종료됐지만, 원폭으로 인한 고통과 상흔은 오래 남았다. 그 참상을 기록하고 추모하기 위한 공간이 바로 나가사키 원폭낙하중심지공원과 평화공원 그리고 원폭자료관이다. 원폭낙하중심지공원 한쪽에는 피복 당시 지층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고열로 녹아내린 유리병이나 식기 등이 눈에 띈다. 인근 원폭자료관에는 폭격 당시 피해를 실감케 하는 자료들이 보관돼 있다. 공원과 자료관 사이에는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도 보인다. 당시 사망한 조선인은 1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낙하중심지의 북쪽 언덕에는 평화공원이 조성됐다. 전쟁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맹세와 세계 평화를 위한 소망이 담겼다. 한편 한국인으로서는 원폭을 계기로 해방과 독립을 맞았기에, 참상의 잔해를 마주할 때 마음이 불편한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을 잘 소화하고 곱씹어보는 과정도 중요하다.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 가슴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 그것이 시공간을 넘어 다크 투어리즘이 주는 교훈이다. 유형별 해외 다크 투어리즘 스폿 ㆍ전쟁 일본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미국 게티즈버그 국립군사공원, 베트남전쟁박물관, 태국 칸차나부리 국립묘지, 하와이 USS 애리조나 국립기념관 등 ㆍ항쟁·학살 체코 바츨라프 광장, 사이판 만세절벽, 캄보디아 투올슬랭 대학살박물관, 중국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 아르메니아 인종학살추모관 등 ㆍ노동 역사 세네갈 고레섬, 노르웨이 산업노동자박물관, 영국 셀라필드 원자력단지, 프랑스 노르파드칼레 광산,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소금광산 등 ㆍ재난·재해 일본 고베항 지진 메모리얼파크,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사고 지역, 미국 시애틀 언더그라운드 투어, 아일랜드 타이타닉 벨파스트 박물관 등 ㆍ격리·수용 싱가포르 창이교도소와 박물관, 미국 알카트라즈 감옥, 인도 바라나시 화장터, 호주 교도소 유적, 남아프리카공화국 로벤섬 등
- 2023-05-10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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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남아시아 캄보디아의 신성, 프놈펜 바타낙 골프리조트
- 프놈펜 바타낙 골프리조트는 2019년 개장한 캄보디아 최고·최대의 골프리조트다. 이곳을 소유한 바타낙은 은행과 건설사, 맥주·음료 제조사를 가진 캄보디아 대기업으로 이곳을 통해 캄보디아 골프장의 수준을 아시아 최고까지 끌어올렸다고 평가받고 있다. 36홀 챔피언십 코스는 골프의 전설 닉 팔도가 설계했고, 관리는 미국의 골프 기업 트룬(Troon)이 맡고 있다. 동 코스를 중심으로 아름다운 캄보디아의 신성을 소개한다. 바타낙 골프리조트는 2022년 아시아·태평양 3위의 최고급 골프리조트로 선정되었다. 동 코스(East Course)는 2020년 월드골프어워즈에서 캄보디아의 골프 코스 1위를 수상했으며, 서 코스(West Course)는 2021년, 2022년 2년 연속 수상했다. 위치는 프놈펜 국제공항에서 동남쪽으로 33km 떨어져 있으며, 프놈펜 도심에서 차로 45분 거리에 있다. 골프장 클럽하우스는 올해 말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클럽하우스가 될 것이라고 한다. 또한 골프장 내 호텔은 2024년에 완공된다고 한다. 캄보디아 문화유산에서 영감받아 동 코스(파72) 극적인 워터 해저드, 창의적인 벙커링, 다양한 형태의 토종 동물을 활용해 모든 수준의 골퍼에게 도전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전략적인 골프 코스다. 시엠레아프의 바이욘 사원(the Bayon Temple at Siem Reap)에서 영감을 얻은 독특한 디자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거대한 종교 기념물인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과 앙코르와트를 포함한 다른 선사 시대 건축물의 축적 모형이 있다. 이 디자인은 문화, 레저, 골프의 독특한 조합을 제공한다. 페어웨이는 버뮤다 419, 그린은 버뮤다 티프이글을 식재했다. 더운 지역에 최적의 잔디다. 긴 코스여서 토너먼트에 사용된다. 6개의 티 박스를 갖추고 있어 모든 수준의 골퍼들이 즐기기에 매우 적합하다. 11~13번 홀은 코스의 아멘 홀(어려운 코스)이라 할 수 있다. 많은 홀에서 워터 해저드를 만나며, 페어웨이를 따라 길게 이어지는 홀이 많다. 특히 9번 홀과 18번 홀은 큰 호수로 마주 보는 레이아웃이 백미다. 곳곳에 자리한 벙커들은 매우 위협적이다. 특히 그린 주변은 어김없이 벙커들로 둘러싸여 있다. 검은색의 침목을 벙커 안의 지지대로 활용한 곳도 자주 보여 멋진 운치를 자아낸다. 골프 코스 안에 있는 화장실은 깨끗하고 잘 관리되어 마치 호텔에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페어웨이의 높낮이 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그린의 고저 차는 매우 심해 난이도가 매우 높았다. 그린 스피드가 9피트를 넘어 오르막과 내리막을 잘 살펴야 하며, 브레이크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면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파크랜드 타입의 코스 레이아웃으로 곳곳에서 코코넛트리와 팜트리들을 많이 볼 수 있다. 3번 홀(파4) 챔피언 티 앞에 멋진 워터 데커레이션이 돋보인다. 일부 벙커들은 검은 침목으로 지지대를 받친 멋진 모습이 눈에 띈다. 곳곳에 깊고 큰 벙커들이 가득하며, 멀리 보이는 클럽하우스가 형태는 이미 완성되어 멋진 모습이 드러난다. 250야드 이상 장타자는 보이지 않는 오른쪽 워터 해저드를 경계해야 한다. 4번 홀 티 박스 옆에는 바이욘 페이스 축적 모형이 있다. 바이욘 페이스는 시엠레아프에 위치한 12세기 불교 사원인 바이욘의 가장 독특한 요소다. 각 탑의 네 개 면은 ‘신의 왕’(God-king)을 상징한다. 9번 홀(파5) 8번 홀과 큰 호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티 박스부터 그린까지 길고 큰 호수가 이어지는 화려한 뷰를 보여준다. 호수 중간에 있는 2층 건물인 파빌리온(Pavilion)은 앞뒤로 길게 물을 가르며 석재 다리가 멋지게 이어져 있다. 1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파티를 비롯해 식사, 위스키, 와인 등을 제공하는 멋진 장소다. 호수 중간 웅장한 파빌리온 명물 12번 홀(파3) 시그니처 홀이다. 티 박스 앞부터 그린 앞 10야드까지 큰 호수가 오른쪽으로 넓게 이어지면서 아름답고 광활하게 펼쳐진다. 충분한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한 클럽 더 잡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슬라이스는 곧 물속이 될 것이다. 14번 홀을 마치면 그린 뒤로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 축적 모형이 있다.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은 11세기에 지어진 고대 크메르의 사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15번 홀부터 17번 홀까지는 스트레이트 레이아웃의 특징을 보인다. 17번 홀(파4) 페어웨이 오른쪽을 따라 길게 물이 이어지는 인덱스 1번 홀이다. 그린 앞 10~80야드 사이에 큰 호수를 이루며 물길이 있어 그린을 공략할 때 주의해야 한다. 그린과 워터 사이에 10야드 정도 공간밖에 없어 충분한 거리를 염두에 두고 마지막 샷을 해야 한다. 12번 홀에 버금가는 멋진 홀이다. 18번 홀(파5) 왼쪽의 큰 호수를 사이에 두고 9번 홀과 멋진 평행선을 달린다. 큰 호수는 그린 왼쪽까지 이어지는 장엄한 모습을 보이며, 그린 뒤로 올해 말 완공을 목표로 한 멋진 클럽하우스가 우뚝 솟아 있다. 인상적인 마지막 홀의 위용을 보여준다. 호수 중간 건물인 파빌리온에서 찍은 멋진 사진들이 골프장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오랜만에 마스터피스를 보는 듯했다. 동양적인 스펙터클함과 역동성을 잘 갖춘 코스다. 아시아 최고의 골프장으로, 골퍼들의 새로운 버킷 리스트 목록에 추가되기를 기대한다.
- 2023-03-30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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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건강 행사주간’, 건강한 노년 위해 ‘눈 건강’ 챙겨요
- 보건복지부는 한국실명예방재단과 함께 ‘눈의 날’을 맞이해 13일(목) 서울 송파여성문화회관에서 ‘제52회 눈의 날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또한 21일(금)까지 ‘눈 건강 행사주간’ 기간 동안 충청남도 태안, 인천시 눈 건강검진, 교육과 홍보에 나선다. ‘눈의 날’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전 세계에 눈의 소중함, 실명과 안질환 예방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매년 10월 둘째주 목요일로 지정한 기념일이다. 우리나라도 이날을 기념해 행사를 열고 있는데, 올해 기념행사 주제는 ‘다 함께 밝게 보는 세상 ♥YOUR EYES’로 세상을 밝고 맑게 보기 위해서는 눈 건강과 안질환 예방에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이날 행사에서 복지부는 지난 한 해 눈 건강 증진 및 실명 예방사업에 힘쓴 기관과 개인을 선정,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 20점(기관 5점, 개인 15점)을 수여했다. 표창을 받은 화천군 보건의료원은 교통 여건이 열악한 의료취약지역의 취약계층 노인과 아동의 무료 안검진 사업에 참여해 안질환 치료가 필요한 대상자를 발굴하고, 적기에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 지역 주민의 눈 건강 증진에 기여했다. 표창을 수여받은 김형준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는 2010년부터 현재까지 노인안검진 등 국내 의료취약계층의 실명 예방에 기여했다. 캄보디아 무료수술 지원 사업에 참여해 열악한 의료환경과 빈곤으로 실명 위기의 캄보디아 지역민의 수술 및 진료를 지원해 해외 저개발국가의 실명예방사업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어 12일(수)부터 10월 21일(금)까지 10일간 ‘눈 건강 행사주간’이 진행된다. 국민들이 생활 속 눈 건강관리 방법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지역별 눈 건강검진, 교육과 홍보 등이 있을 예정이다. 한국실명예방재단에서는 노인과 취학 전 어린이를 주 대상으로 충청남도 태안군 등 8개 지역에서 눈 건강검진을, 인천광역시 동구 등 23개 지역에서는 ‘노인 저시력 예방교육’ 등 눈 건강 교육을 실시한다. 또한, 전래동화 심청전을 모티브로 한 눈 건강 인식 개선 만화도 온라인을 통해 제작‧배포할 예정이다. 김혜영 보건복지부 치매정책과장은 “노년기 건강한 생활을 위해서는 노화 속도가 빠른 눈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정부와 지자체, 한국실명예방재단 등 민간 기관이 협력하여 눈 건강 증진 및 실명예방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가겠다”고 말했다. 강윤구 한국실명예방재단 이사장은 “눈은 한 번 나빠지면 회복이 어려운 신체기관”이라며 “‘다 함께 밝게 보는 세상’을 위해 앞으로도 실명 예방을 위한 ‘눈 의료비 지원 사업’ 및 ‘찾아가는 눈 검진 사업’, ‘노인 저시력 예방교육 사업’을 확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전했다. 한편 대한안과학회와 대한안과의사회 역시 눈의 날을 기념해 10일(월)부터 16일(일)까지 ‘눈 사랑 주간’으로 지정했다. 올해는 ‘3대 실명질환, 안저검사로 한번에 빠르고 쉽게!’라는 슬로건 아래 녹내장‧당뇨망막병증‧황반변성을 쉽고 빠르게 진단할 수 있는 ‘안저검사’를 장려하는 캠페인을 시행하고 있다.
- 2022-10-13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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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대통령, 펠로시 美 하원의장 ‘외교 결례’ 논란... 이유는?
- 휴가를 이유로 아시아를 순방 중인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을 만나지 않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정치권의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펠로시 의장을 포함한 미국 하원의원 대표단이 탑승한 C-40C 전용기는 이날 밤 9시 26분께 경기 오산 미 공군기지에 3일 착륙했다. 미국 하원의장 방한은 2002년 데니스 해스터트 당시 의장 이후 20년 만이다. 앞서 대통령실 관계자는 브리핑에서 펠로시 하원의장 방한 시 윤 대통령과 만나는 일정은 없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의 여름휴가 기간(1∼5일)과 겹쳤기 때문에 별도의 일정을 잡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박진 외교부 장관도 이날 오후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비롯한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관련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캄보디아로 출국해 펠로시 의장과 만나지 않았다. 미국 하원의장은 대통령과 상원의장을 겸임하는 부통령이 동시에 궐위되는 사태가 생겼을 때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펠로시가 역임한 하원의장은 대통령 승계 서열 2위, 권력 서열 3위에 달하는 최고위직이며, 하원 위원회 구성원 선출권을 갖는다. 펠로시 의장은 현재 미국 의회 내 민주당 일인자로, 1987년 캘리포니아주에 출마해 연방 하원의원에 처음 당선됐다. 이후 지금까지 18선이며, 하원의장만 4번째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하원의장이며 현재까지 유일한 여성 의장이다. 보통 미국의 고위 여성 정치인으로 힐러리 클린턴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으나, 힐러리가 올랐던 영부인, 국무장관 위치는 하원의장과 의전 서열, 대통령 승계서열, 권한과 책임 범위를 비교했을 때 비교적 낮다. 윤 대통령이 펠로시 의장과 만나지 않은 것은 ‘외교 결례’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대만을 방문했던 펠로시 의장을 윤 대통령이 만날 경우, 중국을 크게 자극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이와 관련해 윤 대통령은 펠로시 미 하원의장과 외교와 국방, 기술협력 문제 등을 의제로 4일 오후 2시 반부터 40분에 걸쳐 펠로시 미 하원의장과 배석한 하원의원, 하원 외교위원장 등과 1+6 형식의 '전화 회담'을 했다. 김태효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1차장은 4일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은 통화에서 5월 21일 한미정상회담에서 바이든 미 대통령과 약속한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을 앞으로 발전시키는 데 미국 의회와도 긴밀히 협력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했다. 이어 “펠로시 의장은 윤 대통령의 첫 여름휴가 도중에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하다면서 한미동맹은 여러 관점에서 중요성이 있지만, 특히 도덕적으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김 차장은 전했다.
- 2022-08-04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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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열린 하늘길, 중장년 갈만한 해외여행지는?
- 백신 접종률이 높아지고 ‘트래블 버블(여행안전권역)’이 확대되면서 국제선 항공 탑승객이 늘고 있다. 국토교통부 항공 포털 통계에 따르면 지난달 국제선 이용자 수는 31만 3106명으로, 29만 1959명을 기록했던 9월과 비교해 소폭 증가했다. 국내 항공사들이 휴양지를 중심으로 운항을 재개하고 신규 취항에 나서고 있는 만큼 향후 탑승객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굳게 닫혔던 하늘길이 열리면서 일상회복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아직은 해외여행을 가더라도 일부 국가에 한정돼있고, 백신 접종을 완료해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현재 일반 여행객들은 30개국에 방문할 수 있다. 9일 마이리얼트립 ‘해외여행 스캐너’ 서비스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여행 목적으로 방문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 캐나다, 영국, 독일 등 30개국이다. 이들 중 사이판, 홍콩, 몽골, 캄보디아, 스웨덴을 제외한 25개국은 백신 접종 완료자에 한해 격리 없이 방문할 수 있다. 특히 시니어들이 안전하게 다녀올 만한 여행지는 하와이, 괌 등 휴양지와 치안이 좋고 백신 접종률이 87.5%로 높은 아랍에미리트 등이다. 캐나다도 좋은 여행지 후보다. 세계 생활비·여행정보 데이터를 제공하는 ‘넘비오(Numbeo)’에 따르면 아랍에미리트는 안전 지수 점수 84.65점으로 135개국 중 3위, 캐나다는 58.81점으로 55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73.14로 21위였다. 개별 국가에 따라 백신을 접종했더라도 추가적인 검사가 필요한 국가도 있고 승인하는 백신의 종류도 다르니 여행 전 외교부 해외안전여행 홈페이지나 방문국 대사관을 참고해 자세한 정보를 확인하는 게 좋다. 여행객들은 억눌렸던 여행 욕구를 해소할 수 있게 됐고 항공·여행업계는 국제선 업무를 재개할 수 있게 된 데 대해 반색하고 있다. 하지만 팬데믹이 종식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행객이 늘어나는 상황을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정부는 우리나라보다 먼저 ‘단계적 일상 회복(위드코로나)’을 시행한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신규 확진자가 늘고 돌파감염이 발생하고 있어 경계하고 있다. 외교부는 오는 13일까지 유효한 해외여행 특별여행주의보 연장 여부를 내부 검토 후 발표할 예정이다. 특별여행주의보는 지난해 발표돼 이미 수차례 재발령·연장된 바 있다. 이우성 외교부 해외안전관리기획관은 “단계적 일상회복(위드코로나)이 시작된 만큼 해외여행을 서서히 완화할 계획이다”라고 밝히며 “다만 해외여행을 가더라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위생수칙을 철저히 지키는 등 기본적인 방역수칙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 2021-11-11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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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영, 언제나 그 자리에서 긍정과 감사를 말하다
- 매일 오후 12시 20분이 되면 만나게 되는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대한민국 대표 라디오 프로그램. 바로 ‘싱글벙글쇼’다. 국내 시사 풍자 라디오 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싱글벙글쇼’의 안주인으로서 33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혜영은 공동 진행자인 강석과 함께 오랜 세월 사람들이 듣고 싶은 얘기들을 들려주고 웃음과 위로를 전하며 변치 않는 사랑을 받고 있다. 격동의 시대 한복판을 살아오면서 치른 김혜영의 삶과 깨달음이 위기의 시대인 지금 어떻게 다가올 수 있을지, 그녀와의 반가운 인터뷰를 통해 탐색해봤다. 가히 역병의 시대다. 코로나19로 기존의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세상이다. 일상에서는 언제 침입할지 모를 전염병이 걱정이고 경제 지표를 읽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경기 위축 현상이 불러올 혼돈을 걱정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1987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33년 동안 ‘싱글벙글쇼’를 진행하고 있는 김혜영 또한 아랑곳하지 않고 항상 우리 곁에서 힘을 보태주는 그런 이들 중 한 명이다.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사람 처음 인사는 흉흉한 상황인 만큼 코로나19 바이러스로부터의 안부를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은 하고 있는데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죠. 요즘 줌바 댄스에 재미 붙였는데.(웃음) 그래도 자기관리는 계속하고 있어요. 여의도공원과 여의도 아파트 광장을 수시로 걷고 PT도 계속 받아요. 최근에 춤추는 걸 한번 해보자 해서 줌바 댄스를 시작했는데요. 몸이 가벼워지더라고요. 그런데 어쨌든 상황이 이리 돼서….” 비록 안타까움이 묻어났지만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는 그 밝고 반가운 목소리 그대로였다. 김혜영은 무엇보다도 액티브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답게 많은 걸 배웠고 배우는 중이다. “필라테스, 우쿨렐레와 캘리그래피도 배우거든요. 라디오 녹음하는 날에는 스튜디오까지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요. 나이가 들면 허벅지 근육으로 살아야 하니까요. 건강하게 늙고 싶은 마음이에요. 오늘도 중요하지만 다음 일도 대비해야 하는데, 저희 같은 방송인은 몸 자체가 상품이잖아요? 다른 무엇보다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설 수밖에 없죠.” 그녀는 나이 들어 싫은 건 얼굴 주름뿐이고 나쁜 건 없다고 단언했다. 긍정의 에너지가 그녀 주위에 넘실거리고 있는 듯했다. “마음의 여유, 경제적 여유, 아이들이 다 큰 것에 대한 여유가 있죠. 그리고 남편이 내게 시간을 주는 것도 고마워요.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너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그냥 내가 건강하고 즐거우면 된다고 생각해요. 행복하냐고요? 그렇죠.” 남편과의 오래된 약속 그러고 보니 김혜영의 남편 얘기가 궁금했다. 김혜영이 유명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남편은 지금껏 미디어에 노출된 적이 없다. “나로 인해서 TV와 잡지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게 남편이 결혼 전 내걸었던 조건이었어요. 저는 십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실물은 공개 안 해요. 남편은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마음의 변화가 없는 사람이에요. 변덕을 부리면 제가 부리지, 남편은 한결같아요. 그래서 아가씨들이 저 사는 모습 보면 결혼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아무래도 그녀의 남편은 대쪽 같은 남자인 듯싶다. 그러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방송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쫑파티하고 밥 먹고 들어오는 것을 보곤 ‘너는 연예인이기 전에 가정주부니까 제 시간에 들어와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 번 대판 싸우고 제가 깔끔하게 정리했죠.(웃음) 그다음부터는 그런 거에 대한 얘기가 없어요. 현재까지. 그리고 제가 문제를 일으킬 일을 안 하니까요.” “사람이 너무 좋다” 김혜영은 요즘 동네 사람들과 다양한 취미활동과 함께 어른들을 모시는 사회공헌적 모임도 하고 있다. 1년에 한 번 5월에 소장품을 팔고 공연도 하는 등 행사를 크게 연다. 그녀 또한 나누는 일에 재미를 느끼게 된 걸까? 알고 보니 국제구호 NGO 단체인 월드채널에서 홍보대사로 일하며 10여 년 동안 매년 3000만 원씩 기부하고 있었다. 캄보디아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학교도 지었다니 그녀의 봉사활동 또한 묵직하고 오래된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관계맺기를 힘들어한다. 그런데 그녀는 나이 들어가며 그 관계망이 오히려 더 넓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 비결이 궁금했다. “저는 사람이 너무 좋아요. 그러니 말도 먼저 걸게 되죠. 그리고 방송인이 좋은 점은, 나는 상대를 몰라도 상대는 마음을 열어놓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다가가면 더 많이 마음을 열게 되는 거죠. 저는 사람을 만날 때 쭈뼛거리는 게 없어요. 그냥 편해요. 제가 그렇게 대하니 상대도 편해지는 거고요.” 어머니 덕분에 이룰 수 있었던 많은 것들 김혜영과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그녀가 뼛속 깊이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33년째 진행한 ‘싱글벙글쇼’에 대한 그녀의 생각 또한 그와 같았다. 많은 사람이 싱글벌글쇼를 푸근하게 들어줘서 종종 잊게 되지만, 사실 싱글벙글쇼는 시사 프로그램이다. 웃음을 밑바탕에 깐 시사 전달이 목적이다. 그러나 불편할 수도 있는 내용을 특유의 해학과 함께 시청자들에게 전하는 게 ‘싱글벙글쇼’의 강점이자 김혜영이 해내야 할 미션이기도 하다. 그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맞춰주는 스태프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너무 편하죠. 나이가 들어 고마운 게 그들이 나에게 맞춰주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만 그들을 안아주면 잘 따라오더라고요. 좋은 MC는 먼저 상대를 인정해주고 장점을 부각해주는 능력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김혜영은 싱글벙글쇼에서 다양한 연기를 펼쳐 보인다. 들어보면 자연스럽게 연기자로서의 능력이 높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자신의 그런 능력을 ‘어머니 덕분’이라고 돌렸다. “삶이 힘드셨던 분이었어요. 6남매를 키워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어머니가 나로 인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 ‘어떻게 하면 즐거워하실까’를 연구하곤 했어요. 그게 방송에 도움이 되었죠. 그리고 방송국에서 버는 돈을 어머니께 갖다 주는 게 제 기쁨이었죠.” 33년 동안 감사한 사람들 싱글벙글쇼는 원래는 강석이 하고 있었고 김혜영은 그의 상대역으로서 네 번째로 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당시 서세원이 진행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에 게스트로 출연하던 중이었는데, MBC 라디오국 김건영 부장이 그녀의 가치를 알아봐 ‘싱글벙글쇼’에 들어가게 됐다. 그 후로 33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 있게 될 줄 알았을까? “김 부장님은 정년퇴직하셨죠. 생각해보니 저랑 같이 일한 사람들은 다 정년퇴직했어요. 양희은 언니도 저에게 ‘MBC 라디오국에서 제일 독한 년이 너야. 열두 번도 그만뒀을 텐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이 봄날 저녁식사에 초대하고픈 중요한 사람도 바로 싱글벙글쇼 식구였다. “싱글벙글쇼 대본을 25년간 쓴 작가가 있어요. 박경덕 작가라고, 제가 힘들 때마다 그 품에 안겨서 많이 울었어요. 항상 ‘김 여사 참아, 견뎌내’라고 말해주며 25년 동안 많이 들어주고 토닥여줬죠. 고맙고 아련해요. 그리고 15년 된 김성 작가, 애기작가로는 이자원 씨가 있어요. 내 얘기를 가장 많이 들어준 사람들이에요.” 아직도 소녀처럼 김혜영은 철저한 방송인이다. 결혼식 당일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방송을 진행한 후 결혼식장에 갔을 정도다. 매일 라디오 방송을 하느라 해외여행 한 번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언제든 라디오를 그만두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계획을 짠 적이 있다고 한다. “한 달간은 절에 들어가 있으려고요. 그리고 애틀랜타에 가서 3개월 지낼 거예요. 지인이 있어서 거길 기점으로 여행을 많이 다녀보고 싶어요. 제주에서도 1년 살고 싶어요. 제주도는 너무 매력적이거든요. 그래서 귤 따고 당근 뽑는 알바도 알아봤어요.” 제주도에서 지내게 되면 아르바이트 일당을 받아 샌드위치, 와인, 과일을 사고 아침 일찍 해변에 가서 해 떨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있다 올 거라고 한다. 그렇게 일당 번 걸 다 쓰면 또 일을 할 거라고 한다. 낭만적인 상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참 소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딸이 그러더라고요. 걸어가도 시원찮은데 어떤 사람이 산에서 막 뛰어다니는 걸 보면 엄마 같은 사람 저기 또 있다고 그래요.(웃음)” 그녀는 방송인이 안 되었다면 연기자가 되려고 더욱 노력했을 거라고 말한다. 사실 그녀의 연기 욕심을 증명하듯 그녀는 코미디언이면서도 드라마를 많이 한 편이다. 첫 정극 연기는 국민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펼쳤다. 이후 ‘당신’이라는 드라마에도 출연했고, 신년 특집드라마 ‘우리들의 신부님’에서는 주인공 역을 맡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한지붕 세가족’. 평범한 부부의 아내 역할로 오랫동안 안방을 찾았다. 인생살이는 점수로 매겨지는 게 아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감사의 생활이 내재화된 사람, 그러나 그러한 외향적 성향은 많은 사람과 접촉하는 만큼 상처도 쉽게 받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떻게 자신을 지켜내고, 나이가 들어서도 바뀌지 않는 긍정과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 “다 받아들이고 다 인정해버리면 돼요. ‘누가 너보다 방송을 더 잘하네’ 하면 ‘오, 그래 잘하네’ 하고 인정해요. 그 순간부터 편해져요.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해도 ‘그래, 그럴 수도 있어’ 하죠. 힘든데 그게 돼요. 그래서 엄마가 너무 고맙고 감사해요. 이렇게 긍정적인 성격을 물려주셨으니까요.” 나이가 더 들면 영화에 출연해 재밌는 아줌마 같은 감초 역할을 하고 싶다고 웃으며 말하는 김혜영은 어쩌면 삶에 노련해질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 젊음을 간직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다. 도리어 그녀는 자신의 강점인 긍정의 힘으로 삶을 수용하고 품에 안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의 마지막 말에는 오랜 시간 끝에 감사와 긍정을 내재화한 사람이 본 세상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었다. “이기려고 하지 마세요. 상대를 이겨서 내가 더 잘났다고 여기는 건 자기 생각이지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아요. 인생살이는 점수로 매겨지는 게 아니니까요.”
- 2020-03-2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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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할 수 있는 나이 65세
- 대법원이 일할 수 있는 나이를 60세에서 65세로 연장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늘어난 것 등이 이유라고 했다. 일할 수 있는 나이 60세 기준은 평균수명이 남성 67세, 여성 75.3세였던 30년 전 판결이므로 지금은 수정되어야 하는 게 맞다고 본다. 이제 평균수명은 남성 79.7세, 여성 85.7세로 당시보다 10년 이상 더 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할 수 있는 나이와 일해야 하는 나이는 구별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더 벌어야 하거나 봉사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더 일해도 된다. 그러나 일만 하다가 죽을 수는 없다. 일을 하면 수입이 생겨 경제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개인의 삶에서는 그만큼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다. 나는 50세에 퇴직한 뒤 60세까지 개인 사업을 했다. 60세에 일을 접은 것은 성과도 없는데 살아남기 위해 더 투자를 하고 혹독한 고생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해외 박람회에도 열심히 쫓아 다니면서 바이어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생산기지였던 중국의 최저 임금이 너무 급격히 올라 베트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을 새로 개척해야 했는데 엄두가 안 났다. 그래서 사업을 과감히 접었다. 개인 사업을 할 때는 지인이 많아 큰 도움을 받았지만 협의를 하기 위해 실무자들을 만나면 내가 직책도 높고 나이가 많아 대하기 어렵다면서 젊은 직원을 보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실적이 불규칙해서 사람을 고용할 수도 없는 1인 기업이라서 젊은 직원을 따로 둘 수가 없었다. 몇 달간 얼굴도 모르고 메일만 주고받았던 해외의 한 바이어는 막상 내 얼굴을 보자 나이 때문인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중에 그 바이어에게 경쟁사의 젊은 여성이 드나드는 것을 알고 일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갑질하는 젊은 바이어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것도 힘들었다. 영업을 하면서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의 나이가 젊어서 내가 활동하던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60세 이후부터는 인생 2막의 삶을 시작하며 생활 방식을 바꿨다. 취미 활동과 사회봉사 활동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지인들 중에는 그 시기에 고인이 된 사람도 많아 인생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00세 시대라지만, 지금 시니어 중 100세까지 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의 건강수명은 남성 64.7세, 여성 65.2세다. 그 이후는 삶의 질이 떨어져 인생을 제대로 즐기기 어렵다. 얼마 전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오면서 느낀 점은 힘든 여행은 이제 다니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여행길에 동행할 사람을 찾아봤지만 모두 손사래를 쳤다. 나는 그나마 잘 다져놓은 체력 덕분에 무사히 다녀왔으나 지인들은 내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더 늦기 전에 여행길에 부지런히 나설 것을 권하고 싶다. 70대 중반만 되어도 여행사에서 꺼려한다는 얘기도 있다. 아직 체력이 받쳐주므로 먼 곳부터 먼저 다녀오고 더 나이 들면 가까운 곳을 여행할 작정이다.
- 2019-02-2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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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회가 만난 CEO 스토리] 이종수 한국사회투자재단 이사장·임팩트금융 추진위원회단장
- ‘누군가를 돕는 것은 스스로를 돕는 것이다’. 취약계층, 사회적 패자들의 자활을 돕고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디자인하는 이종수(63) 한국사회투자재단 이사장 겸 임팩트금융 추진위원회 단장, 남들이 ‘문제없다’를 외칠 때 그는 ‘문제 있다’를 외치며 우리 사회의 궁벽한 문제를 드러내고 찾아낸다. 그리고 해결을 도모한다. 철거민촌 소년이 글로벌 금융인을 거쳐 사회운동가가 되기까지의 진솔한 패자부활전 이야기를 들어봤다. 별명이 소셜 디자이너입니다. 왜 그런 별명이 붙었나요. “패자부활전을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격차와 갈등을 해소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디자인한다고 해서 언론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빈곤의 사전 예방, 차단을 위해서는 단순히 퍼주기 식의 복지 지원이 아니라 한 사회 생태계 구성이란 전향적-종합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고기를 주기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젠 고기 잡는 도구를 빌려주는 것까지 함께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장을 만들고 고기를 잘 잡을 수 있는 환경 조성까지 해야 합니다. 취약 계층 자활도 단순한 지원을 넘어 융자의 시대를 지나 이젠 사회투자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런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게 제 일입니다. 빈곤도 커다란 흐름 속에서 이해해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착한 금융 2.0은 복지 측면에서 개인 대상 직접 자금 지원이었다. 3.0은 사업 지원, 사업 아이디어 사전 자문과 사후 사업 멘토링까지 종합관리 시스템으로 패키지 지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4.0은 투자 생태계 마련, 즉 사회투자 방식으로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기업과 프로젝트를 발굴해 투자하고 이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다. 개인도 종합검진을 미리 하면 중병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이처럼 사회 빈곤, 취약 계층 발생도 사후 대책을 넘어 문제 요인을 사전에 진단, 예방하는 사회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취지다. 이 이사장은 사회투자금융 활동의 선구자로서 늘 앞장서 각 단계마다 진화를 주도해왔다. 사회투자라는 용어가 아직은 낯선데요. 사회와 투자라는 용어가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만. “사회 문제가 점점 많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합니다. 그러나 그 예산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문제는 너무 복잡해 주는 복지 방식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많습니다. 많은 사회 문제가 경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해결 방식도 전통적인 복지에 금융경영 등과 같이 시장적인 방법을 융합해 해결해야 합니다. 사회투자는 재원의 선순환을 이루면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주는 복지를 넘어 구조와 예방의 사회 인프라를 깔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사회간접자본과 같습니다. 다리, 항만 부두 등을 건설하는 데는 당장 비용이 발생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사회 발전의 근간을 마련하지 않습니까?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취약 계층을 지원하는 대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패자부활을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이고 예방적인 차원에서 지속가능하게 문제를 풀어가는 사업에도 투자하는 등 다층적 접근을 해야 합니다.” 사회금융기관은 일반 은행과 어떤 점이 다른가요? “일반 은행이 돈을 빌려줄 때 수익과 담보를 본다면 사회투자를 지원하는 사회 금융기관들은 그 기업과 프로젝트가 어떤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가, 그리고 그것을 추진하는 사람과 기업의 철학을 본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재무적 수치나 성과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 즉 장애인, 노숙자, 저출산, 고령화, 청년 일자리, 주거 문제, 환경 문제, 자살률 등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가를 우선적으로 판단해 투융자를 결정합니다. 돈의 회수 가능성을 본다는 점은 같지요. 공익적 개념이더라도 지속가능하게 사업을 진행하려면 재원의 선순환이 필수이니까요.” 은퇴자들과 매칭 포인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설립한 사회연대은행에서는 시니어브리지라는 프로그램을 수년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은퇴하였거나 은퇴를 앞둔 시니어들이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교육하고 논의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벌써 400명 이상의 시니어들이 교육을 받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전문성을 갖고 사회적 기업에 컨설팅을 하는 등 다양한 경로로 봉사가 가능합니다. 일정 교육을 받고 커뮤니티를 구성,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인생에는 두 가지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돈을 벌어 재무적 성과를 내는 재무적 가치, 사회적 의미를 두고 봉사하는 사회적 가치. 이 중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 가치에 점점 더 무게중심을 두게 되더군요.” 당면한 사회 문제 중 심각한 게 양극화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끝났다고들 말합니다. “부모의 가난이 새로운 연좌제가 되고 있는 것이죠. 요즘은 개천의 용을 보기가 힘듭니다. 개천에선 욕만 나오는 세태이지요. 싹수 있는 지렁이들의 신분상승 희망조차 개천 바닥 아래로 봉인돼버린 것입니다. 어느 나라이든 명문대 인재들이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존재해요. 영국의 이튼스쿨 출신, 미국의 아이비리그 출신 등. 우리 사회의 문제는 갈등과 적대감이지요. 리더들이 갈등을 부채질하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제도 개선 등 따뜻한 개천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이사장은 “실업, 저출산, 주거난, 장애인 문제 등이 곪아 터지면 결국 빈곤의 문제로 수렴된다. 이들이 벼랑에서 떨어져 사회적 비용이 더 크게 발생하기 전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이라는 책에서 “가난이 자존심에 미치는 영향은 공동체가 가난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방식에 결정적으로 좌우된다”며 “경제적 능력주의 사고는 가난한 사람을 불운한 게 아니라 실패자로 묘사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체제에선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고, 자선-복지-재분배-동정의 필요성은 갈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과연 빈곤을 그들만의 인과응보에 의한 책임으로 볼 것인가. 한 부모가 아이를 서울역으로 데려가 노숙자를 가리키며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산교육(?)을 했다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으로 다뤄진 적도 있지요. “가난의 책임을 개인에게 물을 수만은 없습니다. 현대사회는 복잡해서 여러 가지 사회적인 상황이 개인을 빈곤으로 몰아넣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국민총생산이 성장하는 것만으로는 그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국민총생산이 늘어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소외되고 낙오되는 사람들을 보듬고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장입니다. 이를 위해선 공동체 정신, 커뮤니티 정신이 기본적으로 중요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온통 효율만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따뜻한 자본주의가 실현돼야 합니다.” 개인 이야기를 해볼까요. 이사장님도 흙수저 출신의 개천룡이십니다. 어떻게 글로벌 금융인이 되셨는지요? “사당동 달동네의 철거민촌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서강대 경영학과)에 들어갔어요. 민주화운동을 하다 민청학련사건으로 옥살이를 하게 됐습니다. 이게 빨간 줄이 돼 국내 일반 직장에 취업이 안 되는 겁니다. 신원조회를 하지 않는 외국계 기업 직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친구가 권해줘서 우연히 응시한 미국 은행 체이스맨해튼은행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참, 인생이란 알 수 없더군요.” 민청학련 경력(?)이 인생의 장애물이자, 도약대, 두 가지 역할을 했군요. “20대 때 세상의 불공평, 부조리에 대한 분노가 질풍노도 같았어요. 독재 정권에 대한 불만이기도 하고, 제 가난에 대한 불만이기도 하고, 화가 꾹꾹 쌓여 폭발 직전이었지요. 처음엔 독방에 수감됐는데 매일 고함을 치고 벽을 쳤어요. 3개월 후 잡범들과 합방을 하면서 비로소 제 마음속 억눌린 화가 풀리더군요.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가난이라고 불만을 가졌던 게 사치였던 겁니다. 비교도 안 되게 별별 힘든 사연이 다 있더군요. 그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자’는 생각을 했지요. 책으로 배운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그 결심으로 대학생활 내내 구로동 공단에서 야학을 열심히 했어요.” 그 후에도 초심을 잘 유지하셨나요. 젊은 시절의 결심은 계속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법인데요. “하하. 웬걸요. 몇 번의 초심 재생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레드카펫 깔린 외국 직장에서 고연봉의 좋은 대우 받고,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7명이나 딸린 해외생활을 하면서 ‘그때 그 마음’이 바래버렸어요. 꿈은 이루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힘들어요. 내 삶은 우연찮게 사건이 ‘사연’을 상기하게 만들어요.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돌아보게 되었지요. 1996년 캄보디아에서 은행을 설립할 때인데요. 가난을 한탄할 틈마저 주지 않는 매정한 세상에 지친 서민들의 우울한 눈동자를 봤어요. 까맣게 잊고 있던, 감옥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과 예전 결심이 떠오른 겁니다. 내 삶을 돌아보게 됐고 사표를 냈지요.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이라고 하지만, 가슴에서 발까지의 결심이 더 힘들더군요. 이후 캄보디아 농촌 빈민을 위한 자활 프로젝트, 인도네시아 농촌 빈민 직업 훈련 프로젝트 등 ‘가슴이 시키는 일’에 연달아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캄보디아 내전 등 내부 문제 때문에 아쉽게도 끝까지 추진하지 못하고 접어야 했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에겐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이때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에 영감을 받아 귀국해 사회연대은행을 설립하게 된다. 당시 국내에선 개념조차 없는 때라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한국형 사회연대은행을 기초부터 공부해가며 시작해 실행까지 도맡아서 했다. 세계 최대 보험중개사인 에이온코리아 사장으로 계시다 비정부 시민사회 단체인 사회연대은행 대표로 옮기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10년간 양다리 기간이 있었습니다. 두 곳이 인근 건물이어서 상호 양해 하에 두 곳의 장(長) 역할을 왔다 갔다 병행했지요. 그러다 사회연대은행 운영이 어려워져 직원 급여도 못 주는 상황에 직면했어요. 3개월 월급 못 줄 땐 가시방석이었어요. 웬만한 직장에서 그랬다면 야단이 났을 텐데, 마이너스통장 쓰면서도 견디는 모습을 보며, 나 혼자 편하게 지내도 되나 갈등이 생기고, 인간적으로 모순 상황을 못 견디겠더라고요. 고민 끝에 에이온에 사표를 냈고 마음이 가는 바를 좇고 나니 편해지더군요. 온전한 헌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진정한 이익과 불이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니 결정이 오히려 쉬웠습니다. 버는 거야 옛날과 비교할 수 없게 줄었지만요. 막상 살아보니 상상했던 것보다는 불편하지 않아요. 밥값 내던 시절은 잊고 빈대가 되고, 기사 딸린 승용차를 타는 대신 대중교통 이용하고…. 많이 벌면 많이 쓰고, 조금 벌면 조금 쓰게 되는 게 사람 사는 이치더군요(웃음).” 사표를 쓴 당일에 스페인 산티아고로 직행, 혼자 도보순례를 하셨다면서요. “모양만 좋은 ‘데코레이션 나’가 아닌 진짜 ‘내 안의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만나기 힘든 게 나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살면서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 나이기도 하고요. 자신만이 답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 사람들 눈에 보이는 나는 내 참모습과 일치하는가.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어보는 시간이었어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나에게 지지 말자고 결심했지요.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지?’ 하는 매일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말씀을 들으니 이사장님의 삶 자체가 끊임없는 패자부활전, 초심 회복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하, 그런가요. 격렬한 희망과 내려놓기, 그것이 제 나름의 인생 지혜입니다. 격렬한 희망이란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긍정적 기회로 볼 수 있는 것, 그것이 나를 일으켜 세웁니다. 하나하나 보면 실패였지만 돌아보니 그게 저수지가 됐어요. 감옥에 들어간 일이나, 젊은 시절의 방황이나 해외 돌아다니면서 은행을 설립한 일이나…. 또 하나는 내려놓기입니다. 돈뿐 아니라 일에 대한 욕심도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따라오더군요.” 이 이사장은 인터뷰 중 일어나더니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을 펼쳐 한 대목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읽어주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출발이다. 과거를 지움으로써 현재를, 지금을 버림으로써 미래를 들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다른 것을 쥘 수 없는 것처럼 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다. 내려놓음은 익숙함에 찍는 단정한 마침표다. 나를 타성, 관성, 습성에 젖게 했던 세상의 기준과도 이별이다. 그는 자신이 지은 집에서 80대 노부모를 모시고 산다. 소셜 디자이너란 별칭처럼 ‘남이 디자인해준 집’에서 사는 것은 재미없기 때문이란다. 아버님(86)은 시력을 상실하시고, 어머님(85)은 치매이시지만 그는 이 역시도 문제로 보지 않는다. ‘노인의 문제는 곧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인 병환, 공양 문제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풀 것인가, 노인들이 어떻게 존엄한 삶을 살게 할 것인가, 양질의 서비스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기회로 받아들인단다. 타고난 소셜 디자이너 이종수 이사장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 2017-09-30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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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이상희 헤어팝’ 이상희 원장
- 그녀는 뽀얗고 하아얀 뭉게구름 같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색다르고 기발한 발상이 피어오른다. 집중해서 듣자니 성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이상희 헤어팝’의 이상희(李相熙·56) 원장. 직업은 미용사인데 그녀 인생에서 봉사를 뺀다면 삶이 심심할 것만 같다. 손에 익은 기술을 바탕으로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니 말이다. ‘누군가를 돕는다’란 말에 백만 개의 하트풍선이 ‘뿅뿅’ 터지는 그녀의 환한 얼굴과 마주했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가 감사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하루하루가 감사해요. 저는 되게 감사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감사’라는 단어를 꺼낸다. 열 손가락이 성한 가운데 기술을 배운 것도, 그 기술을 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있어서 감사하단다. “미용기술을 배울 때 돈만 벌기 위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한 달에 네 번 봉사를 간다면 나머지 시간은 봉사를 가기 위해 미용실에서 일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거든요. 제 이름이 서로 ‘상’에 빛날 ‘희’거든요. 말 그대로 상희답게 사는 거죠.” 어려운 이들을 만나면 뭔가 해줄 수 있어 좋고 자신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후배들이 잘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이상희 원장을 만난 것은 5월 말. 본인 스스로가 정한 인생의 안식년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미용실을 계속하면 쉴 수 없겠더라고요. 원래 하던 넓은 미용실을 4월 30일까지만 하고 5월 1일 철거했어요. 저와 오래 일했던 디자이너들이 일할 곳을 마련해 지금의 아파트 상가로 옮겼어요. 이성적으로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철거하던 날 잠이 안 오더라고요. 안식년이라 해도 두 손 다 노는 게 아니라 그런지 다음 날부터는 잠이 너무 잘 왔어요.” 그런데 그 안식년이란 것 말이다. 대부분 휴식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한다. 이상희 원장은 그 하고 싶다던 일(?)에 더 빠져보려 미용실 운영 대부분을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맡겼다. 벌여놓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 당장 앞두고 있었던 새터민 결혼식에 피부 관련 사업, 매달 있는 봉사, 새로운 봉사, 미용인의 처우 개선 등 쌓이고 쌓인 일을 보니 이게 안식년인가 싶다. 봉사와 업(業)이 하나인 인생을 구상하다 전라북도 정읍 출신인 이상희 원장은 성공하려고 미용계에 입문했다. 미용실에 갔더니 기술을 배우면 서울도 갈 수 있고 해외도 갈 수 있다고 말해줬다. 솔깃한 말에 응시한 미용 자격증 필기시험에 떡하니 붙었고 곧바로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학원 안 다니고 미용실에서 연습했어요. 고등학교 친구들 데리고 가서 머리 잘라주면서 두세 달 정도 훈련했고 합격 1년 정도 후에 상경했죠.” 서울에 오자마자 당시 유명했던 미용실에 취업한 이상희 원장은 일주일을 못 다니고 그만뒀다. 줄지어 서 있는 거울에 헤어디자이너의 이름이 아닌 번호가 붙어 있었다. “큰 미용실 가야 성공한다기에 들어갔는데 거기선 사람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요. 적응하기 힘들더라고요. 제가 시골 애였지만 자존감은 있었거든요.” 서울살이 초반 20대의 이상희는 걷기도 많이 걸었다. 집이 있던 상도동을 지나고 한강다리 건너, 숙대, 남대문시장.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신호등 앞에 있는데 파마가 막 말아지는 거예요. 다시 미용을 해? 돈 많은 남자 만나서 미용실을 열어? 가난해서 걷고 고민하면서도 걷고. 그렇게 내린 결론이 나를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 성공하겠다는 거였어요.” 머리 자르는 미용기술 외에도 머리를 올리는 ‘업스타일’에 ‘메이크업’ 기술도 할 수 있어야 했다. 다니던 미용실 원장과 선배, 동료에게 양해를 구해 시간을 마련했고, 잘살던 친구에게 학원비를 부탁해 메이크업 학원에 등록했다. 선후배 관계가 수직적이고 딱딱하던 시대였지만 업무시간을 배려받고 학비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더욱 완벽한 미용사로서 비상을 꿈꿨다. “후배들에게 돈과 시간이 없어서란 변명을 하지 말기를 당부해요. 꼭 해야 할 일이고 열정이 있으면 누구든 도울 테니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해요.” 20대는 미용사 이상희로서 삶을 채우는 시간이었다면 30대는 그것을 바탕으로 존중하고 돕고 깨치며 살아갔다. ‘높임말’과 ‘봉사’는 철칙 서른 살의 나이, 자신의 이름을 단 미용실을 열었다. 개업과 함께 이상희 원장이 철칙으로 삼았던 두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직원들 사이에 높임말 사용이었다. 당시는 손님이고 미용사들이고 서로에게 함부로 하던 시절이었다. “저희 때는 디자이너와 스태프가 같이 앉아 밥도 안 먹었어요. 솔직히 미용기술에는 차이가 있지만 사람 차이는 없잖아요. 그래서 오픈할 때부터 높임말을 사용했어요. 혹여 함부로 하는 손님이 있으면 더 예의를 갖춰 말했어요. 구두며 유니폼도 갖춰 입었습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바꿨어요.” 두 번째는 바로 봉사다. 한 달에 한 번은 전 직원이 봉사하기로 했다.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좋은 일에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교, 지역 그 어떤 것도 따지지 않고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어려운 이웃과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 찾아서 봉사했던 곳이 가난한 마음의 집이라는 곳이었어요. 1990년대에는 메이크업이 아주 강할 때였어요. 장애우들이 저희를 보고 놀라서 숨는 거예요(웃음). 그래도 몇 번 가니까 친해졌어요. 봉사하다 보니 새터민과도 연결이 됐어요.” 어렵던 시절 동료들과 친구의 도움으로 메이크업을 배운 것이 두고두고 고맙다는 이상희 원장. 좋은 마음이 모여 얻은 기술이기에 봉사를 할 때 더없이 기분이 좋다. “미용실 열고 1년쯤 돼서 어떤 손님이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러시아 여자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민이 결혼식을 하는데 메이크업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요. 제가 메이크업을 한다는 걸 몰랐던 손님인데 말입니다. 당연히 좋다고 했죠.” 봉사한다는 게 알려지면서 놀이처럼 재미있고 기획력 있는 봉사가 이어졌다. 정부 지원이 어려운 틈새 청소년들을 위해 일일찻집을 열고, 산골 아이들을 위해 자전거도 사주고 고아원에 세탁기도 기증했다. “손님들에게 이건 꼭 약속했어요. 우리 미용실에 와서 머리를 하면 그 일부는 다른 사람들 위해 쓰인다고요. 제가 그렇게 좋은 일을 하면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 복을 받는 거잖아요.” ‘K뷰티’와 ‘뷰티엔젤’ 봉사의 중심에 서다 2000년대 중반에는 한·일 미용인 간의 세미나가 자주 있어서 일본에 갈 기회가 많았다. 그때 일본의 성년의 날과 우리나라의 성년의 날에 대한 의문과 고민이 일었다. “일본에 갔는데 일본 젊은이들이 기모노를 많이 입더라고요. 예쁘기도 하지만 그 나라 문화잖아요. 그런데 일본의 ‘성인식’은 공휴일인데다가 자치단체에서 큰 잔치를 열어요. 기모노 입고 화장과 머리를 하고. 이 모든 게 다 미용실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함께 일본에 방문하고 온 미용실 원장들에게 우리 청년들을 위한 성년의 날을 특별한 날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메이크업과 머리손질은 미용실에서 도움을 주고, 한복은 당시 이상희 원장이 다니던 우석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미르’에서 만난 지인이 공급해주기로 했다. “연세대학교 다니는 손님한테 학교 대동제 때 성년식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했어요. 단, 스마트폰으로 한복 입은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학생들에게만 기회를 주기로 했어요. 2011년 5월에 이틀 동안 저희가 준비한 성년식에 300여 명이 참여했어요.” 이 행사를 계기로 K뷰티디자인협회의 시초가 된 한국업스타일협회를 창설했다. “일본에 같이 다녔던 미용인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서 좋은 일도 하고 미용실 손님도 우리 손으로 오게 하자고 말씀드렸어요. 한국업스타일협회는 이후 좀 더 의미를 넓혀 지금의 K(Korea)뷰티디자인협회가 됐습니다.” 이상희 원장의 또 다른 활동 영역은 뷰티엔젤이다. 미용실 개업 초기 직원들과 다니던 봉사가 주위 미용인들과 함께하는 한국미용봉사회로 이어지다가 누구든 함께 참여하는 연합봉사 형태의 ‘뷰티엔젤’로 탄생했다. 한국 봉사는 물론 캄보디아 미용기술 지원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미르’의 박문희 원장님이 의료진하고 캄보디아 봉사를 간다고 머리를 하러 오셨어요. 제가 ‘의사들은 너무 좋겠다, 다른 나라 가서 봉사도 하고’ 그랬더니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봉사를 하게 된다면 저는 미용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게 진행이 됐어요. 그쪽 아이들 미용기술 가르칠 생각을 시작하니까 잠이 안 왔어요.” 캄보디아 봉사는 이상희 원장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20년 넘게 많은 사람을 도우며 살아왔지만 처음의 그 에너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캄보디아 봉사를 앞두고 느꼈어요. 왜 잊고 있었지? 친구 한 명의 도움으로 내가 20대를 살았는데 지금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난해도 여자가 기술을 배우면 자식교육 시킬 수 있고 생활고에서 나아지니까 공부는 늦게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두 번의 캄보디아 미용기술학습프로그램을 통해 20명을 지원했다. 학비뿐만 아니라 숙식과 생활보조금까지 지원하는 사업이라 매년 할 수 없다고 한다. “캄보디아 아이들과도 약속한 것이 있어요. ‘너희가 성공을 하면 한 사람을 가르쳐라.’ 그게 약속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캄보디아에 미용실 오픈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곳 아이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거죠.” ‘미용복지사’라는 직업 멋지지 않나요? 안식년이라는 본인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매달 13일 레드엔젤(청년응원단체)과 함께 K-컬처 콘서트를 개최한다. 2~3개월에 한 번씩은 다른 봉사단체와 연합활동도 한다. 캄보디아는 물론 올가을 새터민 합동결혼식도 계획 중이다. 미용인으로서의 고민도 남다르다. “미용은 보건의 개념도 있지만 지금 사회에서는 복지의 개념입니다. 형편은 되는데 거동이 힘들어서 미용실에 못 오시는 경우가 있잖아요. 현재 미용은 이동 미용이 안 됩니다. 환자 외에는요. 미용복지사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미용사의 새로운 직업에 대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고령화 사회 시니어들의 복지에 대한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다. 이외에도 한류로 인해 유입되는 외국 여행객에게 보다 친근하게 한국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뷰티존’을 만들어 세계에 한국 문화와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단다. 미용실을 작은 평수로 옮기면서 ‘손아당(蓀雅堂)’이라는 공간도 만들었다. 뜻 맞는 사람들이 모여 봉사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허브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근데 저는 생각하는 게 예쁜 거 같아요. 끊임없이 꿈을 꾸는 거 같아요. 내가 만일 미용 일에서 손을 뗀다면 내 직함을 뭘로 하지?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 이상희로 불리면 어떨까 하는데 되겠죠?”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를 꿈꾸는 그녀의 입에서는 이쁘다(예쁘다)라는 말이 참으로 많이 흘러나온다. 자주 쓰는 단어에는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이 담겨 있다. 그녀의 이쁜 마음이 영원하길 지지하고 응원한다.
- 2017-07-10 1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