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훈 네이버클라우드 AI SaaS 비즈니스 리더
온라인 게임에서 통용되는 단어인 본캐와 부캐. ‘본캐’는 주로 사용하는 본래 캐릭터, ‘부캐’는 본캐 생성 이후 만든 부차 캐릭터를 말한다. 근래 유명인들이 기존과는 다른 활동명과 캐릭터로 대중의 인기를 끌며 ‘부캐 열풍’이 일기도 했다. AI 전화 돌봄 서비스 ‘클로바 케어콜’을 성공적으로 이끈 옥상훈(53) 네이버클라우드 AI SaaS 비즈니스 리더에게도 그런 부캐가 있다. 바로 인스타그래머 ‘컵누들러’다. 아직 본캐만큼 왕성하진 않지만, 여러 가능성을 품고 일상의 감칠맛을 더하는 존재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부캐를 일컬어 ‘히든캐’(숨겨진 캐릭터)라고도 부른다.
먼저 본캐 이야기부터 해보자. 본캐 타이틀은 ‘네이버클라우드 AI SaaS 비즈니스 리더’. 얼핏 앞뒤 키워드만 떼어 보더라도 국내 굴지의 IT 기업인 네이버에서 특정 사업의 리더인 셈인데, 일단 본캐의 레벨도 심상찮게 느껴진다. 참고로 사스(SaaS)는 서비스형 소프트웨어를 뜻하는데,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네이버클라우드’다. 옥상훈 리더는 한마디로 자신의 역할을 ‘BD’라고 소개했다. 여기에도 본래 뜻과 그만의 숨은 뜻이 담겨 있었다.
“흔히 업계에서 BD라고 하면 비즈니스 디벨로퍼(Business Developer)를 말합니다. 직역하면 사업 개발자인데, 대개 새로운 사업에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담당하죠. 그것도 맞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비즈니스 디자이너(Business Designer)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AI 생태계를 만들어 클라우드 사업을 키우고 파트너로 성장시키는 과정이 비즈니스를 디자인하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같은 단어지만, 제 나름대로는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요.”
본캐의 전환, 본업 모먼트 시작
옥상훈 리더의 대학 시절로 거슬러가 보면, 그때도 본캐와 부캐가 있었지 싶다. 한양대학교 90학번으로 입학한 그는 생물학이 전공임에도 늘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더랬다. 그러다 졸업할 즈음 IT 소프트웨어 교육을 받았는데, 마침 관련 업계에서 개발자를 양산하던 분위기였다. 부캐도 쏠쏠히 키운 덕에 그는 IT 세계로 진입해 SI(System Integration) 개발자가 될 수 있었다. 부캐가 본캐로 전향된 것이다.
이후 본캐를 성장시키며 네이버와 인연을 맺었다. 2011년 입사 후에는 소프트웨어 개발이 아닌, 관련 사업을 만들고 제휴 맺는 업무를 맡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10여 년간 네이버 개발자센터 개편, 오픈 API 표준 제작, 네이버 D2 스타트업 팩토리 론칭 등 수많은 프로젝트를 담당해왔다. 최근 그가 집중하는 사업은 전화 돌봄 서비스 ‘클로바 케어콜’이다. AI 기술을 적용해 어르신의 말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기억까지 해내는 혁신적인 서비스로 주목받고 있다.
“코로나를 계기로 시작된 사업이에요. 당시 코로나 감염자에게 발열 여부 확인 전화를 사람이 일일이 했는데, 어느 순간 확진자가 대폭 늘어나며 인력으로는 감당이 안 됐던 거죠. 처음에는 성남시와 협력해 전화 업무를 AI로 대체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후 코로나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도입하는 지자체가 더 많아졌어요. 그러다 보니 서비스를 이용하는 지자체 쪽에서 아이디어를 주시더군요. 발열 여부만이 아니라 독거노인들의 안부를 확인하는 서비스로도 가능하겠느냐고요. 그렇게 부산 해운대구랑 도모해 처음 케어콜을 선보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초반 성적은 저조했다. 실제 사용자인 독거노인들이 보인 만족도는 50% 남짓이었다. 옥상훈 리더는 실패에 가까웠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기술을 고도화해나갔고, 생성형 AI와 하이퍼 클로바 기술 등을 적용했다. 초기 버전에서는 AI와의 자연스러운 대화가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이러한 문제를 극복해나가며 발전을 이뤄온 것이다.
“아무래도 대상자가 어르신이다 보니 AI 기술에 익숙하지 않으셨죠. 때문에 최대한 AI와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그 덕분인지 업그레이드한 서비스로 조사했을 때는 90% 정도의 만족도를 나타냈습니다. 놀라운 성장이죠. 그런데 이런 피드백이 있더라고요. AI가 말귀도 알아듣고 공감해주는 건 좋은데, 이전 대화를 기억 못 하니 얘기를 반복해야 한다는 문제였죠. 결국 2022년에 기억하기 기능을 탑재해 출시했어요. AI가 질환이나 병원 이력 같은 걸 기억해주는 덕분에, 이제는 케어로봇처럼 어르신들의 건강관리 쪽으로 발전 가능성을 보고 있어요. 아직은 독거노인이나 취약계층으로 대상자가 한정되지만, 장차 누구나 자기 편의에 맞게 맞춤형으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으리라 전망합니다.”
상극의 맛을 더할 때 최고의 궁합
본업 이야기를 한창 하던 중에도 그의 시선은 호시탐탐 한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촬영 소품으로 기자가 준비한 컵라면. 비닐봉지라는 베일에 가려진 컵라면들에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이제 본캐는 접고 부캐 이야기를 해보자고 운을 떼자, 그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까부터 계속 여기에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웃음) 좀 꺼내봐도 될까요? 이야, 다 새로 나온 것들이네요. 아직 못 먹어본 것들이에요. 어떻게 이렇게 골라오셨어요?”
옥상훈 리더는 신기한 듯 물었지만, 방법은 간단했다. 그의 인스타그램을 봤기 때문이다. 그의 인스타그램에는 400여 가지 컵라면 리뷰가 올라와 있는데, 첫 사진은 늘 위에서 찍은 컵라면 뚜껑이다. 메인 페이지만 봐도 그가 어떤 컵라면들을 먹었는지 한눈에 보인다. 리뷰도 간단명료하다. 면발, 맵기, 염도 등을 5점 만점으로 표기하고, 총평도 한두 줄 정도로 짤막하게 남긴다. 올리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편리한 방식이지만, 한 가지 아쉬움은 있었다. 컵라면 종류가 워낙 많아 특정 제품의 리뷰가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쉽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맞습니다. 저도 늘 새로운 컵라면을 사려고 하는데, 가끔은 ‘이걸 내가 먹어봤던가?’ 헷갈릴 때가 있어요. 오죽하면 아예 내가 컵라면 검색 엔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니까요. 그런데 뭐 마음만 먹고 아직 시도는 못 해봤습니다.”
지금의 컵라면 리뷰 인스타그램을 시작한 시점도 클로바 케어콜이 탄생한 시기와 맞물린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며 바깥에서 타인과 식사하는 일이 어려워진 터였다. 혼자 먹는 식사이니 간편하면서도 기왕이면 요리다운 메뉴였으면 했다. 그 두 가지 요구사항을 충족시키는 게 컵라면이었던 것이다.
“그 전까지는 컵라면을 잘 안 먹었어요. 그런데 계속 먹다 보니 나름의 철학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항상 이야기하는 건 ‘컵라면은 요리’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저 인스턴트식품 정도로 치부하지만 저는 하나의 요리로 인정해야 한다고 봐요. 궁극의 맛을 잘 응축해서 편리성을 극대화한 형태잖아요. 물만 부으면 끝나니까요. 게다가 요즘은 기술이 좋아져서 면발 상태나 수프, 건더기 맛도 다양하고 훌륭해졌어요. 또 컵라면끼리 조합해서 먹어보는 것도 흥미롭죠. 가령 짜장과 짬뽕, 크림소스와 매운소스처럼 상극의 맛을 더할 때 의외로 궁합이 잘 맞아요. 또 이건 저만의 팁인데 짜장컵라면에 콜라를 한 숟갈 정도 넣어보세요. 단맛이 확 우러나서 훨씬 풍부한 맛을 느낄 수 있어요. 그거 말고도 팁은 무궁무진해요.”
컵라면 이야기라면 밤을 새도 모자라다는 옥상훈 리더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며 컵라면 먹는 일도 줄었지만, 멈추지 않고 꾸준히 해나가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부캐의 장점 중 하나는 표면적인 성과가 없더라도 큰 타격이 없다는 것 아닐까. 본캐처럼 책임이나 강박을 느낄 필요도 없다. 마음이 동하는 대로 이따금씩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자기만족이 된다. 그 과정에서 얻는 일상의 즐거움과 신선함은 덤이다.
“가장 재미있는 순간은 새로운 컵라면을 찾았을 때예요. 라임 향 나는 컵라면이나 침대 회사에서 사은품으로 특별 제작한 컵라면을 손에 쥐었을 때의 기쁨도 잊을 수 없네요. 그렇게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맛을 찾아가는 게 참 흥미로워요. 편의점을 가더라도 컵라면 코너부터 둘러보고, 해외나 낯선 지역에 가도 컵라면부터 확인하죠.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게 편의점이고 컵라면인데, 손쉽게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또 그런 경험을 기록해가는 재미도 쏠쏠하고요. 나름 잘 정리해놓은 거라 라면 회사에서 제안이라도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아직 깜깜 무소식이네요.(웃음)”
본캐를 성장시키는 힘, ‘통찰력’
언젠가는 본격적으로 부캐를 키워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은퇴 이후쯤이 될 테다. 아직은 본업에서 할 일이 많고, 아직 학생인 아이들을 키우려면 더 오래 현업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다. 늘 선도하고 혁신을 일으키는 분야다 보니, 그에 따른 고충도 있으리라. 실제 그와 동년배인 50대 직장인들은 새로운 기술이나 MZ세대의 문화를 따라잡는 데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한다. 물론 그도 때때로 버거움을 느끼지만 독서와 학습을 통해 그 간극을 좁혀나가는 편이다. 일련의 노력을 통해 그가 본업에서 이루려는 목표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이 분야에서 좀 더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가령 클로바 케어콜의 경우에도 지자체로 치면 100곳, 사용자로 치면 2만 명 정도 되는데요. 더 다양한 범위로 확장해서 사업적 성과를 이루는 동시에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사실 기술이라는 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과 도구이지, 어떤 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기술들이 합리적인 비용으로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면 꽤 의미 있는 성과가 아닐까 합니다.”
옥상훈 리더는 IT나 신기술 관련한 책뿐 아니라 새로운 분야의 식견을 넓힐 수 있는 책도 고루 섭렵 중이다. 꾸준한 독서를 통해 인생에서 중요한 건 결국 ‘통찰력’이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끝으로 그에게 다소 엉뚱한 말을 던져봤다. ‘자신의 인생과 컵라면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이윽고 우문현답이 나왔다. 그간의 통찰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인생이든 컵라면이든 결국 ‘맛’이 중요한 것 같아요. 잘 숙성되고, 그것이 우러나야 진가를 발휘할 수 있죠. 정말 괜찮은 컵라면은 물을 붓기 전에도 그 가치가 느껴질 때가 있어요. 뜯기 쉬운 포장, 친절한 설명글, 풍부한 건더기 등. 역시나 먹어보면 맛도 진국이죠. 반면에 별로인 컵라면은 겉으로 보나 맛으로 보나 ‘정말 대충 만들었구나’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인생도 마찬가지 같아요. 스스로가 만든 인생의 가치를 정성스럽게 담아내고, 잘 표현해야 하니까요. 제가 지금까지 너무 맛없어서 못 먹고 버린 컵라면이 딱 두 개 있는데요. 제 인생도 잘 가꿔서 누군가에게 버려지지 않고, 좀 먹을 만한 컵라면 같은 존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럴 줄 몰랐다. 인천시 부평구에 일제가 만든 대규모 군수 병창 시설이 생생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는 걸. 1941년에 완공해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각종 무기를 생산했던 일본육군조병창(이하 ‘조병창’) 유적이다. 조병창의 터는 광활했다. 2023년 인천시에 반환된 미군기지(캠프마켓)와 부영공원 일대의 부지 115만여 평에 갖가지 시설물을 지었다. 건립 당시의 원형을 유지한 건물 30여 동이 현존한다. 허공으로 높이 치솟은 굴뚝과 대형 건물들의 규모에서 일제가 조병창에 쏟아부은 공력과 품은 야욕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가 부평에 거대한 무기 생산 공장을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1년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해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촉발했다. 이렇게 전쟁의 규모가 확산되면서 무기의 대량생산과 보급이 필요했던 것이다. 조병창에서 생산한 병기는 다양했다. 소총과 탄환을 주로 만들었지만 자동차, 잠항정, 항공기 부품까지 생산했다. 이곳에서 생산된 무기는 부평을 가로지르는 철길을 통해 인천항으로 운송됐다. 전국 각지에서 수탈한 놋그릇, 제기, 엽전 등 무기 제작의 재료도 철길을 통해 날랐다. 이 철길은 풀덤불에 묻혀 현존한다.
일제의 수탈 정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며 알 수 있는 국내 유적은 오늘날 대부분 철거돼 사라졌다. 부평 조병창은 다르다. 다수의 건물이 원래대로 남아 참혹했던 옛일을 웅변하는 게 아닌가. 침탈의 역사 한 자락이 이렇듯 증거물과 함께 숨을 쉰다. 이는 일본이 패전 뒤 달아나면서 버린 조병창을 미군이 접수해 80여 년 동안 사용했기에 가능했다. 개발 바람이 침투할 수 없는 영역이었던 것이다.
한편 조병창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는 극비문서까지 발견됐다. 경향신문은 2021년 8월 7일자 보도에서 ‘일제는 한반도를 총알받이로 쓰려 했다’는 제하의 기사를 썼다. 조건 동북아역사문화재단 연구위원이 일본 방위성 문서철 속에서 찾아낸 조병창 관련 극비문서에 관한 기사였다. 극비문서의 제목은 ‘1945년 3월 예하 부대장 회동 시 상황 보고, 인천육군조병창’이다. 120쪽에 달하는 이 비밀문서를 분석한 경향신문은 두 가지 사안에 주목했다. 하나는 ‘조선인을 강제동원해 조병창을 지하화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일본 도쿄 조병창을 부평으로 옮긴다’는 것.
일본엔 여러 개의 조병창이 있었다. 극비문서는 그중 도쿄의 조병창을 부평으로 이전하고 지하화함으로써 거둘 수 있는 전략상의 이점에 착안했음을 보여준다. 일제는 도쿄가 미군의 폭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도를 모색했던 것이다. 즉 전쟁은 이어가되 위험은 한반도에 전가하려 했다. 조병창이 운영되면서 부평은 사실상 전쟁 한복판으로 끌려들어갔다. 만약 일제가 항복하지 않고 전쟁을 지속했다면? 거대한 병참기지였던 부평은 미국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됐을지도 모른다.
극비문서에서 조선인 강제동원을 명시한 대목도 참담한 감정을 야기한다. 조병창을 지하화하고 도쿄의 조병창을 수용하는 데에는 방대한 공사와 노동력 투입이 필연적이었다. 일제는 이를 강제동원한 조선 노동자들을 통해 해결해나갔다. 극비문서는 ‘1945년 3월 1일, 부평 조병창에 소속된 노동자 중 9000명이 조선인’이라고 기록했다. 이후 1만 5000명을 추가로 동원할 계획도 수립했다. 강제동원은 전방위적으로 감행되었다. 인천과 경성은 물론, 경상도와 전라도 등 각지의 조선인을 강제동원했다. 주목할 것은 학도 동원이 많았는데 초등학생까지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더 있다. 조병창에서 있었던 독립투사의 행적이 그것이다. 조병창에서 무기 조작 기술을 익혀 독립운동을 하고자 잠입했다가 붙잡힌 오순환, 조병창에서 고려재건당을 만들고 무기를 입수해 임시정부에 넘기려다 체포된 황장연 등이 조병창의 어두운 역사에 한줄기 빛을 뿌렸다.
어린 학생들까지 강제동원돼
발길은 이제 부평구 산곡동 함봉산 자락에 닿는다. 이곳엔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만든 인공동굴들이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동굴만 27개로 통틀어 부평 지하호라 부른다. 이 지하호들은 일제가 획책한 조병창의 지하화 작업에 따라 만들어진 것들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침략전쟁에 광분한 나머지 남의 나라 지하까지 마구잡이로 파고들어 무기 생산을 도모한 만행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또렷한 증거니까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동굴들이 조병창에 딸린 군사시설인 걸 알지 못했다. 독립군들이 판 굴이라는 풍문이 나돌았지만, 흔히 새우젓 저장 창고로 알았을 뿐이다. 비로소 굴의 정체를 확인해낸 사람은 김규혁 부평문화원 과장이다. 굴의 정확한 내력을 알고 싶어 조사활동에 나선 그는 2016년, 이곳에 강제동원돼 굴 파기 노역을 했던 증언자들을 찾아내 실체를 규명했다. 이후 조병창 지하화를 계획한 극비문서가 발견되었고, 이로써 굴의 실체가 확연하게 밝혀졌다. 그는 중학생 신분으로 굴착 작업에 강제동원됐던 이로부터 노무자 대부분이 어린 학생이었다는 증언을 듣기도 했다.
부평동에 있는 ‘미쓰비시 줄사택’도 희귀한 역사 현장이다. 줄사택은 일제가 강제동원한 조선인들의 노동력을 쥐어짜 무기를 제작, 이를 조병창에 납품했던 전범기업 미쓰비시가 운영한 노무자 합숙소였다. 애초 143개 동에 1000여 명의 노무자들이 살았으나 광복 이후 점진적으로 줄어 현재는 4개 동만 남아 있다. 상처의 전시장이라 할까. 줄사택의 형상은 낡고 찌들어 간신히 버티어 선 고목등걸처럼 처연하다. 하지만 이 역시 일제강점기의 비극을 내장한 유적이다. 인근 주민들은 줄사택을 도시 경관을 해치는 흉물로 간주했다. 동네 집값을 떨어뜨리는 애물단지로 여겼다. 철거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이에 따라 부평구는 모두 뜯어내고 공영주차장을 설치할 계획을 수립했으나 사회단체들의 보존 요구에 떠밀려 추진을 중단했다. 문화재청 역시 줄사택을 보존할 가치가 있는 근대문화유산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부평구는 2021년 지역사회 각계 인사들을 구성원으로 포함한 ‘미쓰비시 줄사택 민관협의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아직 문화재 등록도 되지 않았으며, 보존과 활용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지 못한 상황이다.
조병창, 지하호, 줄사택, 이 모두 일제가 획책한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을 증명하는 역사유적이다.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일본 수구세력, 그리고 그들의 주장에 장단을 맞춰주는 일부 국내 세력은 물론 모든 사람에게, 나아가 세계인에게 알려야 할 가치와 당위가 충분한 역사 현장이다. 그럼에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골방에 방치된 형국이니 아쉽다. 기억만으로 간직한 역사는 연약하다. 오독되고 편집되고 훼손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장의 생생한 단서로 존재하는 역사는 강철처럼 굳건하다.
신동욱 부평문화원 원장
조병창 유적, 어떻게든 보존해야
인천시 부평구는 예로부터 곡창지대였다. ‘수확이 많은 넓은 들’이라는 뜻을 지닌 부평(富平)의 지명을 통해 전통적인 농업지대였음을 알 수 있다. 현대에 와서는 산업지구로, 베드타운으로 급속히 전환됐다. 외지인 유입도 매우 활발하다. 신동욱 원장은 이러한 부평의 특색을 문화에 접목하고자 한다.
“전라도나 경상도의 도시들과 달리 부평엔 토박이가 드물다. 겨우 8%에 불과하다. 전국 각지에서 온 주민들이 혼재됐다는 특색을 지닌 것인데, 이와 같은 다양성을 문화로 융합해 조화로운 도시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
부평의 역사 가운데 주목할 만한 대목은 어떤 것일까?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사회상에 큰 변동이 있었다. 일제가 만든 대규모 군수공장이 미친 영향, 광복 후 설치된 미군기지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조성된 부평산업단지가 불러들인 경제 효과 등도 부평에서 펼쳐진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부평엔 일제에 의한 조선인 강제동원의 수탈사를 볼 수 있는 조병창 유적이 있다. 조병창이 부평에 들어선 배경은?
“육로나 해양 수송로가 발달한 한편, 전시에 식량 조달이 용이한 곡창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 같다. 공습 차단을 위한 지형이나 기후 여건도 고려한 걸로 본다. 일본인들은 부평을 숫제 경성시로 만들 장기적인 플랜도 구상했다.”
신 원장은 조병창을 비롯한 강제동원 관련 유적들의 보존과 활용 필요성을 처음으로 지역사회에 제기했다. 현재의 진척 상황은 어떤가?
“보존 가치를 인식한 이들이 많지만 아직 진척된 게 없다. 보존 쪽으로 가자는 결정조차 완전하게 나지 않은 상황이니까. 이는 주도권을 가진 인천시장의 의지에 달린 문제다.”
유적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가능성은?
“가능성은 높지 않다. 원형이 훼손된 부분이 있어서.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되는 일이다. 이는 어렵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예산이 여의치 않다며 보존사업에 박차를 가하지 않는 지자체의 태도다. 그들은 역사유적을 문화공간으로 재생해 거둘 수 있는 경제 효과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줄사택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이보다 나은 역사 교육장이 드물겠다.
“철거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어떻게든 보존해야 한다. 너무 퇴락해 보존이 어렵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는 단견이다. 현대의 기술로 재생하지 못할 리가 있겠나.”
반환된 미군기지의 활용 방안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대형 식물원이 있는 공원을 만든다고 하지만 안일한 방향이다. 조병창 재생과 고품격 공연장 건립을 첨가한다면 유수의 관광지구로 부상할 수 있다. 특히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조병창을 역사문화공간으로 살린다면 세계적인 명소가 될 것이다.”
문화원의 역점 사업 하나를 소개한다면?
“부평에선 매년 풍물축제가 열린다. 이 축제를 주민 화합의 매개로 삼고 싶다. 주민들 각자 출신 고향의 고유한 풍물을 축제에서 자랑 삼아 경합할 수 있는 공연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어쩌면 누군가는 ‘복길이’ 이미지에 가둬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그 이미지를 벗기 위해 김지영은 부단히 노력했다. 어느덧 데뷔 30년 차 배우가 됐는데, 이제는 자신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또한 연기학과 교수로서 후배들을 이끌고 있으며, 삶을 관망하는 여유도 생겼다. 유명인과 일반 대중의 관계는 ‘인기’로 증명되는 터. 그는 “인기란 야속한 것 같다.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다”면서 양면성을 언급했다. 현재는 큰 인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들한테 인기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희귀병을 앓아 부모님 속을 썩였다고 생각하는 딸이기에 자식을 향한 애정이 더욱 특별하다.
‘전원일기’와 가족의 탄생
MBC ‘전원일기’와 복길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복길이 이미지 때문에 다른 역할을 못 맡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오디션도 많이 보고, 사이코패스 악역, 유흥업계 인물 등 갖은 역할에 도전해봤던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는 복길이로 인해 지금의 제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죠. 나이 들고 보니 배우로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라도 있으면 성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매우 고마운 작품이죠. 그리고 좋은 선배님들과 호흡하면서 연기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전원일기’는 결국 저의 학교였다고 생각해요.
SBS ‘토마토’에서 악역 연기를 펼쳐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그때가 전성기였을까요?
MBC에서 ‘그대 그리고 나’(1997년)로 신인상을 수상한 후라 자신감이 올라와 있었죠. 악역 제안이 들어왔을 때 고정된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겠단 생각에 출연했고, 촬영도 재밌게 했죠. 광고도 그때 제일 많이 찍었어요. 그렇다고 그때를 전성기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매번 진심을 다해 연기해서 작품 할 때가 늘 전성기라고 느껴요.
남성진 씨와는 동료에서 남편이 된 케이스인데, 관계의 변화에 어떻게 적응하셨나요?
‘전원일기’를 8년간 촬영하면서 정말 친한 오빠 동생 사이로 지냈죠. 이후 남편의 고백으로 사귀었는데 연애 기간은 불과 6개월이었어요. 그중 5개월은 제가 중국에서 촬영했죠. 연애다운 연애를 한 적이 없는데 바로 결혼하려니 조금 무섭고 도망가고 싶더라고요. 우정과 사랑을 구분 못 한 것이 아닌가 싶었죠. 그런데 세월이 지날수록 결혼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사람, 내 가족이 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느끼면서 사이가 깊어졌고, 고마워하고 있어요.
부부간 소통은 어떻게 하세요?
저희 부부는 성격이 극과 극이라서 지금도 종종 싸워요. 남편이 화가 많고, 버럭하는 스타일이에요. 불 같은 성격이죠. 그래서 말다툼으로 번지는데, 다행히도 저희 둘 다 금세 잊어 버리곤 해요.
어느 순간부터는 의견 차가 커도 남편한테 ‘고쳐줬으면 좋겠어’, ‘맞춰줘’ 등의 요구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남편의 말에는 짜증이 섞여 있지만, 내용은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어요. 그래서 서로 이성적으로 대화가 될 때 의견을 나누고 조율하려고 해요. 특히 아이 문제로 대화할 때는 아이의 생각을 가장 먼저 수렴하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결정을 내리죠.
얘기를 나눠보니 아드님에 대한 사랑이 크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아이가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할 수 있는 엄마가 되는 게 제 꿈인 것 같아요. ‘그렇게 살면 네 삶이 너무 없지 않아?’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그게 제 삶이라고 생각해요. 일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아이 옆에 많이 있어 주려고 노력했어요. 평소에는 편지나 메모를 남겨서 마음을 표현했고, 촬영이 없는 날에는 즉흥적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죠. 그런데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같이 있는 시간이 줄었어요. 나중에 성인이 되고 여자 친구가 생기면 나와 놀아줄 시간이 있을까 싶어요.(웃음)
과거 방송에서 보니 아드님도 배우가 되고 싶어 하던데요. 3대 배우 가족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하더니,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아요. 부모님, 조부모님한테 먹칠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더라고요. 그 부담감은 당연한 것 같아요. 저도 시부모님이 배우이다 보니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남편은 평생 그 부담을 안고 살았죠. 우리 아이는 그 부담이 배로 커진 거잖아요.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연기가 정말 하고 싶으면 해라. 너의 색깔을 찾으면 된다’고 조언해주고 있습니다.
시어머니인 배우 김용림 씨와의 고부 관계가 특히 주목받는데요.
굉장히 순탄한 고부 관계라고 생각해요. 같은 분야에 있으니까 잘 이해해주세요. 제가 종갓집 며느리인데 촬영 때문에 제사를 못 지낼 때도 있고, 촬영이 늦어져 새벽 5시에 집에 들어갈 때도 있잖아요. 그럴 때 어머니께서 이해를 넘어 ‘얼마나 힘드니’라고 위로해주시죠. 그런데 여느 관계와 마찬가지로 서로에게 서운한 마음이 생길 때도 있어요. 어머니께서 섭섭했던 부분을 말씀하시면, 저도 속상한 점을 얘기하기도 하죠. 어느덧 어머니와 함께한 세월이 20년 이나 되다 보니,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어떠신지 알겠더라고요. 전화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 있는 것 같으면, 바로 달려갑니다.(웃음)
삶과 인연을 소중하게
부모님에게는 어떤 딸이었나요?
어릴 때부터 희귀병으로 몸이 약했으니까 늘 집안의 걱정거리였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부모님의 사랑을 더 느낄 수 있었어요. 배우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몸도 안 좋은 애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셨겠죠. 그런 마음을 아니까 창피하지 않은 자식이 되고 싶어서 더욱 열심히 노력했던 것 같아요. 사실 어느 순간, 너무 우리 애만 챙기느라 부모님에게 신경을 못 썼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후회가 남지 않게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합니다.
희귀병 투병으로 삶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겠어요.
등에 혈관이 엉겨 붙는 혈종이 있었는데,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요. 가족들이 저를 살려보겠다고 별걸 다 해봤는데,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죠.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유서를 써놓기도 했어요. 말로 전하지 못한 얘기들을 남겨놓기도 했죠. 그러다가 고등학생 때 수술 후 완치돼 지금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다시 주어진 삶이 감사하고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어찌 보면 배우 활동이 체력이 강해진 기반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이제 50대가 되었는데, 중년 배우의 삶은 어떤가요?
20대 때는 작품을 한 번에 2~3개씩 하면서 바쁘게 보냈어요. 결혼 후인 30대, 40대 때 삶도 안정되고, 연기를 진심으로 생각하게 됐죠. 5년 전쯤부터 선배로서 안주하고 싶지 않고, 변화와 발전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 출연하려고 했죠. 선배님 또는 감독님이 부르면 예술 영화도 카메오 출연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예술대학교 연기예술과 학과장을 맡은 지도 7년이 됐네요.
저는 선생님이라기보다 선배라고 생각해요. 먼저 연기한 사람으로서 습득한 기술을 알려주려고 하죠. 오히려 제가 열정을 수혈받고 있어요. 사실 연기 활동을 하면서, 아이도 돌보면서, 학교 일도 하는 게 체력적으로 힘들기는 하더라고요. 그런데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학생들과의 연계성이라고 생각해요. 함께 성장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김지영에게 ‘관계’란 무엇일까요?
저는 소심하기도 하고, 관계에 예민한 편이에요. 지인들에게 마음 표현도 잘 못 했는데, 이제 용기 내서 먼저 다가가려고 해요. 모든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죠. 그런데 중요한 건 관계의 주체가 자신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좋은 관계도 성립되고, 많은 상처를 받지 않을 테니까요. 또 너무 애쓰지 않아야 재밌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요?
Bravo Question
나에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감사한 마음 아닐까요. 저부터 시작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제가 그 마음을 간과하느냐, 신경 쓰고 있냐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한데, 그 마음을 품고 지금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렇게 힘이 큰 사람도 아니고, 능력이 출중한 스타일도 아니에요. 그런 마음이 하나하나 쌓여서 저 자신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고, 제가 하고 싶은 일도 하나하나 이루어온 거죠.
‘시대의 어른’으로 추앙받은 이들이 있다. 여러 사람이 떠오르는 가운데, 고(故) 김수환 추기경과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을 대표 인물로 꼽아봤다. 그들은 왜 세상을 떠난 뒤에도 큰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김수환 추기경과 이어령 장관을 가까이에서 보고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다.
◇김수환 추기경의 소통법
“여기 명동대성당부터 명동역을 넘어 신세계백화점까지 조문 행렬이 이어졌죠. 지금도 장례식 때의 장관을 잊지 못합니다.” 서울대교구 대변인이자 김수환 추기경 장례위원회 홍보를 담당한 허영엽 신부는 10년도 더 지났지만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이 세상을 떠난 후 5일간 명동대성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됐다. 사망 당일과 장례 미사 당일을 제외한 3일의 기간 동안 방문한 추모객은 약 40만 명에 이른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도 많았다. 허 신부는 “우리 사회 어른으로서 추기경님의 존재감을 새삼 깨달았다”고 전했다.
김수환 추기경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허영엽 신부. 신학대 학생 시절 학보사 기자 활동을 한 그는 김 추기경과 처음 만났는데, 당시를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학생인데도 편안하게 따뜻하게 대해주셨다”고 회상했다. 이후 서울대교구 홍보팀에 있으면서 김 추기경과의 만남이 종종 있었지만, 같은 성당에서 함께 지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 얘기하는 대표 신부가 된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인연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듯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성직자뿐 아니라 사회운동가로 통한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이끈 사람으로 평가되며, 대표적으로 1987년 6·10 항쟁이 언급된다. 당시 대학생들은 피신을 위해 명동대성당에 들어왔고, 김수환 추기경은 그들을 품어줬다.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려는 경찰에게 김 추기경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다. 공권력을 투입하려면 나를 밟고 가라”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추기경은 교황 선출권을 가진 최고위 성직자다. 그렇게 높은 곳에 있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스스로를 ‘바보’라고 낮추며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려고 했다. 힘들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만나러 달동네를 찾아다녔고, 일자리를 연결해주기도 했다. 허영엽 신부는 “추기경님은 인간적으로 연민이 많고 늘 베푸시는 분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버려진 것이 아니라고 희망을 북돋아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선종 당시 김 추기경의 통장에는 1000만 원 정도의 잔액밖에 없었다. 그 돈마저도 신도들에게 묵주를 선물하라는 말을 남긴 터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왜 어른으로 통했을까. 허영엽 신부는 ‘소통법’이 답이라고 봤다. 허 신부는 “추기경님은 대화할 때 온전히 상대방에게 집중한다. 진심이 느껴진다. 대화의 시간을 그냥 때우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고, 기쁨을 느끼셨다”고 덧붙였다. 김 추기경에게 그동안 받은 편지는 지금도 값진 선물이다. 허 신부는 “크리스마스 때 신부, 수녀 등 많은 사람에게 일일이 편지를 써주셨는데, 상투적인 얘기가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 하나하나 기억한 내용이 담겼다”면서 본받고 싶은 인간적인 자세라고 말했다.
또한 김수환 추기경은 자기 생각을 강요하거나 지시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허영엽 신부는 “추기경님은 무엇이 됐든, 상대방이 누구든지 간에 ‘어떻게 생각해?’라고 먼저 물어보고 상대방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들어줬다. 그 후 좋은 의견이 있으면 제시하고,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으면 바꾸기도 한다. 생각의 유연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분이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허영엽 신부는 코로나19 이후 사회 전반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됐는데, 그중에서도 세대 갈등이 악화된 것을 우려했다. 이는 본지에서 진행한 ‘세대 간 존경-존중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와도 일맥상통한다. 5060세대와 2030세대 간 갈등 요인을 묻는 질문에 ‘소통이나 세대 이해의 부족’(36.0%)이 1위를 차지했다. 나이, 신분을 따지지 않고 소통하려고 했던 김수환 추기경 같은 어른이 필요한 이유다.
“평화와 화합을 위해서는 아랫사람도, 윗사람도 잘못한 것이 있으면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책임감 있는 어른의 자세 아닐까요? 추기경님께서는 선종을 앞두고 ‘나는 부족한 사람인데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큰어른이었던 추기경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집니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의미를 되새기고 미래를 지향하는 것일 테지요.”
◇이어령 장관의 감수성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에 위치한 ‘영인문학관’. ‘영인’은 고(故)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그의 아내 강인숙의 이름에서 한 자씩 가져와 붙였다. 이곳에서는 이어령 장관의 문화적 업적과 철학을 되새길 수 있다. 현재도 그를 기억하고 존경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은 “시간이 갈수록 선생이 더 그리워진다. 60여 년을 늘 옆에 있던 사람이니까. 혼자 있는 걸 좋아했기에 벌을 받는 건가 싶기도 하다”고 마음을 표현했다.
강인숙 관장은 동갑내기 남편을 ‘이어령 선생’이라고 불렀다. 남편이기 전에 사람으로서 그를 존경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강 관장은 “한눈 팔지 않고 원하는 길만 걸어간 선생의 용기를 존경한다”면서 “그와 함께하면서 진솔하게, 있는 그대로를 내보이는 정직성의 중요성을 알았고, 내 삶에서도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령 장관은 가장으로서도 어른스러운 삶을 살았을까. 강 관장은 “선생은 평생 직장 두 곳을 다니면서 글을 쓰는 바쁜 삶을 살았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나 가장으로서는 나무랄 데 없고 책임감이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일을 열심히 했던 이유도 아이들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가정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족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분이다”라고 답했다.
문학인부터 문화부 장관까지 직업도 다양했던 이 장관은 생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지금까지 누가 시켜서 일을 한 적이 없다. 다 좋아서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자의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를 따른다는 그는 “먹고 놀면 안 된다. 놀면서 먹어야 한다. 내가 돈벌이하자고 책 쓰고, 88서울올림픽을 하고, 교수를 했으면 다 실패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령 장관이 즐기면서 일하는 시간이 쌓이는 가운데 그를 따르는 사람도 늘어났다. 그의 글과 말, 즉 생각에서 배움을 얻었다. 강인숙 관장은 “이 선생은 팬이 많았다. 남이 할 수 없는 말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감동받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본다”면서 “팬은 정신적인 면에서 친지나 제자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령 장관이 좋은 영향을 끼치는 어른으로 추앙받은 이유에 대해 강인숙 관장은 “여러 분야를 어우르는 지식, 미래를 투시하는 안목, 독보적인 감수성 때문이 아닐까”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산 이 장관은 고독했던 것 같다.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김지수 저)을 보면, 그는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른들은 ‘다 안다’고 척을 할 뿐이라면서, 모르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고, 혼날 것이 두려워서 고분고분 둥글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전한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질문자의 삶을 산 이어령 장관은 “존경은 받았으나 사랑은 못 받았어”라고 고백했다. 또한 “다르게 산다는 건 외로운 거네. 그 외로움이 모든 사회생활에 불리하지만, 그런 자발적 유폐 속에 시가 나오고 창조가 나오고 정의가 나오는 거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말 이어령 장관은 존경받았으나 사랑받지 못한 삶을 살았을까. 강인숙 관장의 말로 답을 대신한다.
“얼마 전에 이 선생의 2주기였어요. 어느 회사의 회장인 제자가 큰 꽃을 집에 보내왔어요. 당시 저밖에 없어서 꽃을 방까지 가져와달라고 부탁했죠. 연세가 많은 기사분이 꽃을 나르다가 선생의 사진을 보더니 짐을 내려놓고 넋을 잃은 채 서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애독자였다’면서 ‘사랑한다’고 하더군요. 꽃 보내는 사람과 꽃 배달하는 사람 모두 진심으로 선생을 사랑하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고 지금도 선생을 스승이라고 말하는 제자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걸 보면, 이 선생은 잘 살다 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구 서른 바퀴 넘는 길을 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여행가 김찬삼은 ‘동양의 마르코 폴로’라 불릴 만큼 한국 해외여행의 선구자라고 일컫는다. 1958년부터 시작한 세계여행으로 그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160여 개국 1000여 개 도시에 이른다. 당시는 해외에 나가는 것이 어려웠던 때일 뿐 아니라 세계여행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인 걸 생각하면 가히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예나 지금이나 두말이 필요 없는 독보적인 여행의 아이콘이다. 하늘도시 영종에 그가 있다.
여신(旅神)이 내게 있어 내게 무슨 특혜를 베풀어준 것은 아니지만 매양 새로운 것을 보는 기쁨이 둘도 없는 힘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수난은 인간 수업에 있어서 고귀한 경험들이었습니다. -김찬삼의 ‘끝없는 여로’ 18쪽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을 기억하다
여행가 김찬삼 교수(1926~2003)는 인천인이며 세계인이다. 황해도에서 태어났지만 본적인 인천시 중구에서 성장하고 생을 마쳤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 지리 교사와 대학에서 지리학과 교수를 지내면서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죽은 지식”이라며 세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웠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김찬삼 교수의 여행 이야기를 인천의 하늘도시 영종에서 만날 수 있다.
바다와 공원이 어우러진 영종역사관은 봄을 코앞에 둔 계절에 여행가의 기획전시를 보여주는 중이다. 영종역사관 3층에서 열리는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특별기획전’은 3부로 나뉘어 전시된다.
1부는 ‘세계를 꿈꾸다’ 편으로 김찬삼 교수가 세계인의 꿈을 키웠던 인천에서의 성장 과정을 담았다. 학자와 저술가로서의 면모와 여행가로서 세계를 향한 도전 정신이 피부로 느껴진다. 2부는 ‘한국 최초의 세계여행가’ 편. 세계여행의 경로와 여정이 담긴 기록들을 귀한 자료들과 함께 소개했다. 세계일주의 첫 여행지 알래스카를 시작으로 40여 년 동안의 여행 이야기가 펼쳐진다. 3부는 ‘만인의 스승 김찬삼’으로 세계의 현장을 바탕으로 교육자로서 직접 보고 느낀 여정을 보여준다. 또한 그가 성장해온 인천과 후반기의 안식처였던 영종과 영종인으로서의 인연을 조명했다.
전시품 중 김 교수와 늘 함께했던 낡은 배낭과 모자와 신발은 특히 보는 이들에게 여행을 향한 강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마르코 폴로와 슈바이처를 사랑한 그는 여정 중에 슈바이처 박사도 만났다. 여행 중 굶주리다시피 해도 무한한 힘이 솟구치는 것은 매양 새로운 나라 사람들과 자연을 보는 기쁨이 둘도 없는 영양제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출간되었던 책과 포스터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하다. 카메라와 낡은 지도, 꼼꼼히 기록한 여행일지와 수만 장의 슬라이드 필름. 그중에 세계를 돌아다니며 몰았던 빨간색 딱정벌레차도 인상적이다. 1970년 독일 여행 중 독일인 친구에게 선물받았다는 폭스바겐이다. 또한 지도가방은 지도를 고정하는 형태의 캔버스 가방으로, 아크릴 덮개가 있어 비나 눈이 오는 경우에도 지도를 확인할 수 있다. 여행가에게 지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1960년대 중남미와 아프리카 여행 전에 친구에게 맡긴 유서는 여행가로서, 가장으로서 진중하다. “내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도 기쁘게 받으련다. 설령 내가 무슨 사고로 죽더라도 서러워 말고, 운명이라고 체념하고 부모에게 위로하여 줄 것이며 애들의 교육을 잘 부탁한다.”
그는 말한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인간 수업에 있어 여행처럼 좋은 것은 없다고 보인다. 세계 언어는 2000여 종, 이를 다 배우는 것보다는 소박하고 어진 미소가 무엇보다도 고귀한 것이 아닐까.” 전시장의 모든 사진마다 밝은 얼굴로 환하게 웃는 김찬삼 교수는 진정 세계의 나그네였다. (전시 기간 5월 31일까지)
하늘도시 영종과 김찬삼
우리에게 영종도는 듣기만 해도 먼 곳을 향한 그리움으로 짜릿해지는 곳이다. 그곳 어디쯤에서든 머리 위로 비행기가 날고 여행의 열망이 솟구친다. 그 옛날부터 영종도는 공항터가 될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이야기가 있다. 기록에 따르면 영종도의 옛 이름은 자연도(紫燕島)였다. 섬에 제비가 많이 날아 붙여진, 문자 그대로 자줏빛 제비섬이다. 제비는 그렇다 치고 자줏빛은 해 저무는 영종섬의 붉다 못해 자줏빛이었던 하늘을 말함이라. 일몰에 물든 자줏빛 제비의 모습으로 명명된 자연도라 하니, 옛사람들의 지명 정하기의 기지와 운치는 멋스럽기 그지없다. 영종 또한 긴 마루를 가진 섬이란 뜻으로, 오늘날 활주로가 펼쳐진 공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현재 그곳엔 몇 분 간격으로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영종도는 김찬삼 교수에게 특별한 곳이다. 세계여행가 김찬삼 교수의 여행 책은 당시 손꼽히는 베스트셀러였다. 그 시절 웬만한 집의 책꽂이에는 김찬삼의 세계여행 전집이 있었다. 인천인인 그는 책의 인세로 영종도 구읍나루터 인근 바다 언덕에 공간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휴식을 하고 여행 원고 집필에 몰두했다. 또한 여행문화원과 여행도서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더 많은 이들에게 세계여행의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픈 마음이었다. 하지만 영종국제도시가 생기면서 터를 잃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부근에 세계로 통하는 첫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이 자리 잡았고 이곳에 영종역사관이 들어섰다.
영종역사관 밖으로
영종역사관은 영종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알리기 위한 공간이다. 실내는 물론이고 외부에서 유적과 유물을 만나볼 수 있는 전통정원이 앞마당이다. 정원을 몇 걸음 거닐다 보면 숲을 이룬 메타세쿼이아가 빽빽하다. 영종진공원은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일본의 급습으로 마을이 불바다가 되었던 아픔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 역사적 상징물인 전몰영령추모비와 태평루라는 누각을 설치해서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메모리얼 정원으로 조성했다.
바다 옆으로 난 영종둘레길을 따라 건강백년길, 치유하늘길, 힐링바닷길의 산책 코스 또한 자연스럽다. 영종역사관을 둘러싼 시사이드파크는 영종하늘도시 인근의 공원으로 8㎞의 해변공원이 일품이다. 해변길을 따라 조성된 왕복 5.6㎞의 레일바이크도 신나고, 캠핑장과 하늘구름광장, 스카이데크 등을 두루 갖추고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저녁 무렵이면 갯벌 풍경과 어우러지는 일몰이 신비롭다.
인천의 작은 올레길 예단포둘레길
영종도의 예단포항 둘레길은 작은 올레길이라 할 만큼 예쁘다. 기왕 영종도에 갔다면 한 번쯤 가볍게 걸어보는 것도 좋다. 선착장에 주차하고 출발하면 입구의 대나무숲과 잠깐 쉴 수 있는 정자를 만난다. 언덕을 오르면 눈앞에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물이 빠졌을 때는 갯벌이 진득하다. 길 옆으로 손톱만 한 야생화가 반짝이고, 오래된 나무가 여름이면 울창한 숲을 이룬다. 바다와 산이 공존하는 시원한 풍경으로 가슴이 탁 트인다. 왕복 30분 정도 길이어서 가뿐히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영종도의 해변과 공항전망대
서해에 왔으면 바다를 따라 한 바퀴 달려보자. 마시안해변과 선녀바위해수욕장, 을왕리해수욕장과 왕산해변이 멀지 않은 간격으로 이어져 있으니 시원하게 돌아보면 된다. 해변가 주변으로 출렁다리와 숲도 있어서 시간이 여유롭다면 차분히 숲길을 걸어보는 맛도 운치 있다.
영종도 나들이길에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면 좋을 듯하다. 공항 서쪽 오성산 자락에 인천공항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의 해발고도는 172m지만 막상 올라보면 높은 느낌은 아니다. 오성산과 공항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고, 활주로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발아래로 공항철도가 지나가는 풍경은 덤이다.
외국계 제약회사 영업부에서 24시간 발로 뛰는 영업사원이었던 다카하시 노부노리 (高橋伸典, 67) 씨. 아이 둘을 키우는 싱글 대디로 매일 아침 아이들의 도시락을 만들고, 왕복 5시간을 출퇴근하면서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런 그가 조기 퇴직을 선언한 뒤 보육교사와 어린이집을 연결하는 헤드헌터를 시작하더니 시니어 컨설턴트, 작가라는 세 가지 업을 가지게 됐다. 정년 후 평생 현역을 꿈꾸는 독자들에게 그의 스리 잡(Three Job) 이야기를 소개한다.
열정 넘치는 싱글 대디
다카하시 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계 제약회사에 입사해 57세까지 근무했다. 그가 회사 다니던 시절은 회사원들이 온 마음을 바쳐 일하던 때였다. 그런 그의 회사 생활에서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입사 후 영업을 맡게 됐고, 적성에 맞아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해외연수 제도로 영국에 2년 동안 가기도 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본사가 다른 회사와 합병한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돌아와 보니 저는 인사부로 발령을 받았죠.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하게 된 거예요.”
두 회사가 기업 합병을 하면 다른 기업 문화로 여러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라지만, 좋아하던 영업 직무를 포기하고 갑자기 인사부로 이동해야 했으니 그도 당황했을 테다. 그런 데다 가사와 육아를 전적으로 책임지며 묵묵히 인내하던 아내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저는 일 중독자였어요. 온종일 회사에 있었고, 일을 마치면 동료나 거래처 사람과 술을 마시러 갔죠. 열심히 일해서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가정은 전혀 돌보지 않는 남편이었죠. 돌이켜보면 제가 오만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던 부엌에서 다음 날부터 두 아이를 위한 도시락을 싸야 했죠.”
TV의 건강음료 광고에서조차 ‘당신은 24시간 싸울 수 있습니까?’라는 곡이 흘러나오던 시대였다. 밤새워 일하고 주말에도 출근하는 게 당연하던 시기, 어떻게 아이 둘을 키우며 일을 양립할 수 있었을까? 다카하시 씨는 먼저 서점으로 가서 요리책을 샀다.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갈 때까지 도시락 싸는 것이 일과가 됐다.
“아이 친구 엄마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거래처와 중요한 회의를 하다가도 아이가 열이 나면 어린이집으로 달려가야 했죠. 나중에는 회사에서 집과 가까운 영업소에서 다시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줬습니다. 환경이 변하면 사람의 성격도 변한다는 걸 느꼈어요. 주변 사람들이 제가 아이들을 혼자 키우게 되면서 상냥한 사람으로 변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전에는 제가 좀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나 봐요. 집에서 육아를 전담하던 아내의 기분도 알 수 있었죠. 그동안 너무 가정을 돌보지 않았구나 싶어 반성도 많이 했습니다.”
오랜 세월 아이들 도시락을 싸다 보니 노하우가 생겨, 싱글 대디를 위한 요리 교실을 열어볼까 고민했다는 다카하시 씨는 본인 스스로도 그 변화에 놀랐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도와준 덕분인지,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상황을 헤쳐나간 덕분인지 아이들은 훌륭하게 성장해 사회인이 됐다.
조기 은퇴 후 쌓은 세컨드 커리어
다카하시 씨는 열정을 다해 다니던 제약회사를 57세에 조기 퇴직하고,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회사로 전직했다. 보통 은퇴 후 재취업을 한다면 경력을 살려서 가기 마련인데, 영업과 어린이집 운영이라니 전혀 관련이 없어 보였다.
“어린이집 보육교사 채용 업무를 담당하는 직무로 재취업하게 됐습니다. 제약회사 인사부에 있었을 때 채용과 연구 관련 업무를 맡았는데요. 인사부에서 쌓은 채용 스킬과 지식을 바로 적용할 수 있었어요. 물론 영업을 했던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유아교육학과를 방문해 대학 교수나 학생들에게 어린이집을 홍보하기 위한 영업도 필요했거든요. 제약회사 다닐 때 병원을 방문해 어떤 의사에게 영업해야 할지 고민했던 것과 같은 맥락의 마케팅 업무였어요. 가장 도움이 된 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에요. 사람을 만나는 업무에 가장 필요한 능력이죠.”
그간 힘닿는 데까지 일한 결과 전직한 회사에서도 도움이 됐다는 의미다. 다카하시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점과 점의 연결, 즉 현재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하고 있는 노력(점)이 미래에 어떤 형식으로든 연결된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그는 어린이집 운영 회사를 8년 정도 다니다 독립해 개인사업자로 등록했다. 여전히 어린이집 보육교사 채용을 위해 대학교를 방문해 영업 활동을 한다. 보육교사와 어린이집을 연결하는 헤드헌터로 거듭난 것이다.
시니어 N잡러를 위한 지침서
거기에 세컨드 시니어 컨설턴트라는 또 다른 직업을 선택해 투잡을 시작했다. 그는 시니어의 두 번째 커리어 지원을 위한 전문 컨설턴트로서 세미나를 열고 있다. 두 번째 커리어를 찾는 시니어 5000여 명을 강사로서 만났다. 세미나에 참여하는 수강자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물었다.
“정년을 앞둔 사람이 많죠. 100세 시대라면 향후에도 20~30년 동안 일해야 하는데,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해하는 분들이 오세요. 가본 적 없는 길을 처음 가는 거라 당황스러울 거라 생각합니다.”
은퇴 후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나던 다카하시 씨는 이들을 위한 지침이 필요하다고 여겨 ‘정년 1년째를 위한 교과서’라는 책을 출간했다. 퇴직 후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는 방법, 고독을 해소하는 방법, 정년 후 평생 현역을 실천하고 있는 다양한 사례를 책에 담았다. 다카하시 씨는 ‘강점 시트’를 만들어 특기를 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점이 중요한 이유가 뭘까?
“정년을 앞두면 정년 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을 가지게 돼요. 하지만 시니어들은 젊은 사람에 비해 많은 경험을 쌓았고, 실패 경험도 있어요. 이 안에 자신의 강점이 반드시 숨어 있기 마련입니다. 남들이 봤을 때 굉장한 것도 자신은 당연하게 여겨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나의 강점, 오리지널리티에 맞는 일을 찾는 건 시니어에게 더욱 유리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N잡러’라는 단어가 몇 년 전부터 나왔지만, 안타깝게도 고령자의 일자리는 대부분 단순 노무에 불과하다. 일본에서는 정년 전·후를 불문하고 부업·겸업을 장려한다. 사원이 다양한 커리어를 쌓을 수 있도록 기업이 실시하는 부업·겸업 장려책을 자사 홈페이지에 공표하라고 추천할 정도다.
다카하시 씨는 보육교사를 어린이집 운영 회사에 소개하는 헤드헌터, 정년 후 커리어를 제안하는 세컨드 시니어 컨설턴트 강사, 출판을 통해 작가라는 스리 잡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정년 1년째를 위한 교과서’ 출간 이후에는 실제로 좋은 길잡이가 되었다는 의견을 많이 받고 있다. 일본도 한국도 젊은이들처럼 정년 후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N잡러가 된다면, 시니어가 행복해질 가능성도 커지지 않을까. 시니어가 행복해지면 잔잔한 호수에 던진 조약돌로 물결무늬가 번지듯 사회의 행복 지수도 더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목원대학교 섬유패션디자인학과 학생들이 시니어 모델과 손잡고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특별한 패션쇼를 선보였다. ‘ 지역인과 함께 하는 미술과 디자인전공 융합 패션쇼’라 명명된 이번 행사는 목원대 대운동장 특설무대에서 지난 2일 개최됐다.
이번 행사는 목원대 미술디자인대학과 엘리트모델에이전시(EMA)가 공동으로 주최했으며, 대학혁신단과 라홍문화예술포럼이 후원했다. 패션쇼는 컨템포러리 여성복 브랜드 ‘트리플루트(Tripleroot)’의 이지선 디자이너와 목원대 미술디자인대학 학생들이 제작한 총 60점의 의상을 선보여 참석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날 패션쇼에는 엘리트모델에이전시의 전문 시니어모델들과 목원대 학생들이 모델로 참여하여 다양한 세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며, 세대 간의 융합과 화합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김성민 미술디자인대학 학장은 “이번 패션쇼는 목원대 미술디자인대학의 융합교육 성과를 확인하고, 학생들이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열정을 선보이는 자리가 되었다”며, “앞으로도 학생들의 창의적 역량을 강화하고 지역사회와의 연계를 통한 문화예술 행사를 지속적으로 개최할 것”이라고 전했다.
라홍문화예술포럼의 강라홍 대표는 이번 행사에 대해 “이번 행사는 세대 간의 화합과 융합을 촉진하는 마당으로서 이번 패션쇼가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며, “지역사회와 대학, 그리고 다양한 세대가 함께하는 문화예술 행사를 계속해서 후원함으로써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1991년 3월 15일 그리고 2024년 3월 15일. 정확히 33년의 서사를 쓴 대학로 소극장 ‘학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아침이슬’, ‘상록수’ 등을 부른 가수 김민기가 설립한 곳이다. ‘배울 학(學) 밭 전(田)’이라는 뜻의 이름처럼, 문화예술계 인재들의 못자리가 되어줬다. 한국 대중문화의 산실이었으며 역사적인 공간이었기에 학전의 폐관은 유독 안타깝다.
3월 15일 폐관 당일. 문을 닫은 학전 앞마당에는 쓸쓸함만이 감돌았다. 2주간 이어진 ‘학전, 어게인 콘서트’도 전날 종료된 상황으로, 장비와 물품 등은 어딘가로 바삐 옮겨지고 있었다. 아직 여운이 남아 있는데 이렇게 바로 정리되다니, 너무나도 야속한 속도였다.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에 학전을 찾아오는 시민들도 종종 있었다. 학전 앞을 천천히 둘러보며 사진을 남기는 사람들 사이로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연출가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교수인 김재엽이었다. 야외수업의 일환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학전에 온 터였다.
1990년대에 대학교를 다닌 김재엽 연출가는 학전에 자주 놀러왔고, 문화예술인의 꿈을 키웠다고 밝혔다. 학전과의 특별한 인연도 있었다. 그의 아내는 학전의 대표 아동극 ‘고추장 떡볶이’에 출연한 배우 이소영으로, 2월 24일 마지막 공연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김 연출가는 “학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연극인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대학로가 점점 상업화되어가는 와중에도 학전은 순수 창작 공연을 지향했다. 사람을 키워내는 예술 공간으로서 의미가 있고,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는 창이었다”고 말하며, 학전의 정신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학전, 어게인 콘서트’를 기획한 가수 박학기는 본지에 “학전은 제게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떠나 음악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평소에는 형님이라고 부르는 김민기 대표님을 뵈러 가끔 방문하면 큰 나무 그늘 아래 있는 것처럼 편안했고, 시골집에 온 기분이 들었다”며 아쉬움 가득한 소감을 전했다.
수많은 스타 배출한 학전
“모두 다 그저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지난 2월, ‘학전 블루 소극장이 2024년 3월 15일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밝히며 김민기 대표가 전한 인사다. 돈은 안 되지만 의미 있는 아동극 등의 공연을 이어가며 만성적인 재정난을 겪었던 학전. 여기에 코로나19로 큰 타격을 입었고, 위암 진단을 받은 김민기 대표가 투병하면서 결국 폐관을 택했다.
지난 33년간 학전에서 기획·제작된 작품은 총 359개다. 학전을 대표하는 작품은 단연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다. 학전은 180석 규모밖에 되지 않는데, 이 작품은 1994년 초연한 이래 4257회 공연, 누적 관객 73만 명을 돌파했다. ‘지하철 1호선’에 출연한 배우 설경구, 김윤석, 황정민, 장현성, 조승우는 ‘학전 독수리 오형제’로 불렸다. 특히 학전에서 포스터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설경구는 이 작품에 캐스팅되면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니, 그에게 매우 의미 있는 공간이 아닐 수 없다.
또 학전은 라이브 콘서트의 기틀을 마련한 곳이다. 가수 고(故) 김광석은 이곳에서만 1000회 공연을 채웠다. 그래서 학전 앞에는 김광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노영심, 안치환, 동물원 등도 많은 공연을 펼쳤다. 주요 멤버였던 박학기는 “그때의 저는 나름 전성기였다. 학전 개관 멤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공연을 많이 하면서 김민기 대표님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 또한 대단한 영광이었다”고 회고했다.
학전 하면 아동극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독일 그립스 극단의 원작을 김민기 대표가 번안, 연출한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등이 대표적이며, 순수 창작물도 많이 공연됐다. 김 대표는 돈을 더 벌 수도 있었으나 2008년 ‘지하철 1호선’ 공연을 돌연 중단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이 원했던 아동극 작업에 더욱 몰두했다. TV와 미디어 외에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체험적·문화적 토대를 만들겠다는 신념을 가졌던 터라 재정난을 겪으면서도 공연을 이어갔다.
김민기라는 존재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폐관 전날인 14일, 학전 소극장에는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울려 퍼졌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이는 배우 황정민, 가수 박학기, 권진원, 노래를찾는사람들, 알리, 정동하. 그들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학전, 어게인 콘서트’의 마지막이자 학전의 33년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학전, 어게인 콘서트’는 학전 폐관 소식을 들은 후배들이 자발적으로 뭉쳐서 연 공연이다. 가장 학전다운 방식으로 아름다운 이별을 하기 위해서다. 2월 28일부터 3월 14일까지 20회의 릴레이 공연을 펼쳤고, 3000명이 넘는 관객이 다녀갔다. 티켓은 단숨에 매진됐으며, 수익금은 모두 학전에 기부됐다. 윤도현을 시작으로 김현철, 윤종신, 유리상자 등 가수와 황정민, 설경구, 장현성, 이정은 등 배우들이 함께했다.
그렇다면 학전은 이제 어떻게 될까.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공연장으로 학전 공간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다만 ‘내가 없으면 학전은 없다’는 김민기 대표의 뜻을 존중해 ‘학전’ 명칭은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김광석 노래상 경연대회, 어린이극 등 학전의 기존 사업은 유지한다. 공연장 내부 시설 개보수 등을 거쳐 7월 재개관할 예정이다.
33년의 추억을 남긴 학전은 영영 사라진 셈이다. 그러나 학전을 일군 김민기 대표는 우리 곁에 있다. 과거 대한민국이 힘든 시기에 노래로 빛이 되어준 그. 이제는 후배들의 응원을 받아 다시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는 목소리가 높다.
학전의 마무리에 쓰라며 1억 원 이상 기부한 이수만 전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는 김 대표에 대해 “조용하며 나서지 않고, 나서야 할 때는 묵묵히 책임만 감수하는 순수하고 맑은 시인”이라고 표현하며 존경심을 표한 바 있다. 조승우는 “선생님이 꼭 쾌차하셔서 같이 작품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 말이 깊은 울림을 전한다. 박학기 역시 메시지를 남겼다.
“김민기 대표님은 그저 큰 산이고, 바다 같은 분이셨습니다. 더 이상의 수식어도 필요 없죠. 뻔히 손실 볼 것을 알면서도 꾸준히 어린이 연극과 뮤지컬을 해오면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한 분입니다. 우리 문화예술인 모두 대표님께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대표님의 편안한 노후를 보장해드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하시기만을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고령화에 따라 호스피스·연명의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정부는 치매, 심부전증, 신부전증 등 대상 질환을 늘리고 호스피스 전문 기관도 2028년까지 2배 수준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가 지난 2일 밝힌 ‘제2차 호스피스·연명의료 종합계획(2024~2028년)’은 ‘누구나 삶의 존엄한 마무리를 보장받는 사회’를 비전으로 삼고 호스피스 및 연명의료 결정의 △이용자 선택권 보장 확대 △제도 이행의 기반 강화 △제도 인식 개선 및 확산 등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호스피스·완화의료는 말기 질환을 가진 환자와 가족에 대해 완치적 목적의 치료가 아닌 생애 말기 삶의 질에 목적을 둔 총체적 치료와 돌봄을 의미한다.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은 치료 효과 없이 임종 과정의 기간만을 연장하는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하는 결정을 말한다.
노인 인구 증가 추세 및 생애 말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호스피스 서비스 확대 및 연명의료결정제도 확산에 대한 국민의 요구 역시 증대되고 있다. 이에 따른 호스피스·연명의료 종합계획은 ‘호스피스·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제7조에 따라 호스피스와 완화 의료 및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의 제도적 확립을 위해 5년마다 수립하고 있다.
우선 호스피스 서비스 수요 등을 반영해 대상 질환의 단계적 확대를 추진한다. 세계보건기구(WHO) 권고 기준(13개) 및 학계 의견 등을 고려해 현행 5개 대상 질환(암, 후천성 면역결핍증, 만성 폐쇄성 호흡기 질환, 만성 간경화, 만성 호흡부전) 범위를 점차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치매, 심부전증, 신부전증 등을 추가할 전망이다.
또한 연명의료결정 대상을 합리화하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관리를 강화한다. 우선, 의료진과 연명의료에 관한 의사소통을 조기에 시작할 수 있도록 연명의료계획서 작성 시기를 확대한다. 지금은 질환의 말기 진단을 받은 이후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할 수 있으나, 말기 이전에도 작성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할 예정이다.
연명의료중단 이행 시기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추진한다. 현행 연명의료 중단의 이행은 임종기로 국한되어 있어, 환자의 자기결정권 보장에 제한점이 되고 있다. 환자의 의사를 알 수 없고 결정할 수 있는 가족이 없는 경우, 연명의료 중단 결정이 불가했으나, 연명의료 중단이 가능하도록 제도를 보완할 예정이다. 아울러, 의료기관윤리위원회 미설치 기관도 연명의료 정보 조회가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연명의료 중단 등 제도 이행의 연속성을 제고할 계획이다.
호스피스·연명의료 인프라도 대폭 늘린다. 지난해 기준 188개소인 호스피스 전문기관은 2028년까지 360개소로 확대한다. 입원형 기관은 15개소를 증가한 109개소, 자문형 기관은 116개소를 늘어난 154개소로 확대할 계획이다. 가정형 기관의 경우 5년 내 두 배 늘려 80개소를 확충한다. 연명의료 중단 가능 의료기관에 설치된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지난해 430개소에서 5년 뒤 650개소로 확대한다. 종합병원은 전체의 75%, 요양병원은 전체의 20%까지 위원회 설치를 확대할 방침이다.
아울러 서비스 질을 향상하기 위해 현재 제도 중심의 호스피스 전문기관 평가 지표를 의료진·환자·보호자 만족도 등 이용자 중심의 질 평가 지표를 포함해 개선한다. 호스피스 전문기관의 인력 기준을 기존 ‘병상수’에서 ‘환자수’ 기준으로 변경할 계획이다.
호스피스·연명의료중단 제도에 대한 대국민 인식 개선에도 나선다. 노인뿐만 아니라 학생, 청년, 중장년을 대상으로 연령별 교육 과정을 개설해 '어떻게 삶을 마감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제도를 이용하는 환자의 가족을 돌볼 시스템도 준비 중이다.
전병왕 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존엄하고 편안하게 생애를 마무리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점차 커지고 있다”라며, “누구나 삶의 존엄한 마무리를 보장받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이번 종합 계획을 차질 없이 추진해 나가겠다”라고 밝혔다.
국민연금공단이 기초연금 도입 10주년을 기념해 ‘국민 참여 공모전’을 개최한다.
공모전은 기초연금 수급자뿐 아니라 다양한 세대가 참여할 수 있도록 공모주제와 공모부문을 선정했다.
주제는 ‘기초연금 관련 모든 이야기’다. 수급자 본인, 미래의 수급자, 수급자 가족 등 다양한 이들의 입장에서 기초연금에 관한 이야기를 낼 수 있도록 다섯 가지 세부 주제를 마련했다.
세부 주제는 △나의 노후생활을 지켜주는 기초연금 △기초연금과 함께하는 나와 내 가족의 일상 △기초연금의 장점 또는 필요성 △내가 바라는 기초연금 △기초연금을 떠올릴 수 있는 자유주제다.
공모 부문은 세 가지로 나뉜다. 먼저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동영상, 생활수기, 사진+한 줄 메시지 부문이 있다. 다음으로 기초연금 수급자가 지원할 수 있는 손글씨와 학생이 참여할 수 있는 포스터 부문이 있다.
수상은 독창성, 전달성, 활용성 등을 기준으로 예선과 본선 심사를 마친 뒤 ‘대국민 온라인 심사 이벤트’를 열어 선정할 계획이다.
수상자에게는 각 부문에 따른 상금과 함께 분야별 최우수상은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나머지 수상자는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상을 수여한다.
한편 ‘대국민 온라인 심사 이벤트’에 참여하는 이들을 대상으로도 100명을 추천해 5000원 상당의 모바일 상품권을 지급한다.
공모전은 3월 18일부터 시작해 오는 5월 6일까지 진행된다.
공모전과 관련된 안내사항은 공모전 누리집에서 확인하거나 사무국으로 전화해 문의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