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중년 남성의 상경은 슬펐다. 40년 가까이 한곳만 바라보며 달려온 인생이다. 가난했지만 불꽃같은 열정과 투혼이 있어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었다. 그 꽃은 많은 사람에 꿈과 희망과 용기를 줬다. 중년 남성의 얼굴 곳곳에 깊게 파인 주름은 고단하고 치열했던 삶을 대변한다. 하지만 40년이란 세월 속 온갖 사연을 담은 그의 눈은 슬퍼 보였다. 2000년 10월, 제2의 인생을 위해 서울행을 선택한 그는 한국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 김봉연(金奉淵·63)이다. 그의 야구인생은 그렇게 씁쓸한 마침표를 찍었다.
1963년의 어느 날이다. 소년 김봉연(당시 10세)은 두 살 터울 형 김봉구에 의해 야구부 훈련 장면을 지켜보게 됐다. 형 김봉구는 김봉연보다 먼저 야구를 시작했다. 그땐 야구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훈련이 끝나고 형이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리던 형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창문 밖에서 교실 안을 훔쳐보니 깜짝 놀랄 광경이 펼쳐졌다. 형이 야구부원들과 함께 자장면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아! 야구부원이 되면 자장면을 먹을 수 있구나.” 어린 김봉연에게 자장면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김봉연의 야구 입문은 그렇게 자장면의 유혹으로 시작됐다.
어린 김봉연은 야구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운동이었지만 방망이를 휘둘렀다 하면 담장을 넘어갔다. 하지만 김봉연의 진짜 야구인생은 군상상고에 진학하면서다.
1968년 야구부를 창단한 군산상고는 김봉연에게 야구 유니폼을 입혀 ‘역전의 명수’를 만들어갔다.
군산상고 3학년이던 1972년 7월 19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황금사자기 부산고와의 결승전에서는 9회까지 1-4로 끌려가다 5-4로 역전 우승하며 한국 야구사에 지워지지 않을 명장면을 남겼다. 당시 군산상고의 ‘역전 용사’는 김봉연, 김성한, 김준환, 현기봉, 송상복 등이다. 이 우승은 김봉연의 야구인생 전환기가 됐다.
서른한 살 김봉연, 프로야구 무대 밟다
이후 김봉연의 야구인생엔 걸림돌이 없었다. 군산상고에 ‘역전의 명수’란 수식어를 안겼다면 연세대 재학 시절엔 본격적인 홈런포를 가동했다. 대학 4년 동안 홈런왕을 놓치지 않을 만큼 그의 방망이는 위력을 발휘했다.
홈런만이 아니다. 아마추어 시절엔 공·수·주를 가리지 않고 맹활약했다. 대학 1학년 때인 1973년에는 고려대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연세대 졸업 후에는 한국화장품에서 3연타석 홈런을 세 차례나 기록했고, 대통령배 실업야구 3년 연속 홈런왕에 오르는 등 한국 최고의 거포로 군림했다.
그리고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은 또 다시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당시 김봉연은 어릴 적 꿈이었던 교사가 되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이미 그의 나이는 서른에 가까웠다. 뒤늦은 모험보다 어릴 적 꿈이던 교사가 옳은 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김봉연은 장고 끝에 일생일대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까짓 거 한 번 부딪혀보자.”
김봉연은 프로야구 원년 22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초대 홈런왕에 올랐다. 그의 홈런포는 이듬해인 1983년에도 불을 뿜으며 해태의 전기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해 여름 올스타전 브레이크에서 가족과 함께 전남 여수에 다녀오던 김봉연은 교통사고를 당해 머리만 200바늘(총 314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었다. 동승자가 사망할 만큼 생명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봉연은 입원 한 달 만에 다시 일어나 후기 리그 우승 팀 MBC 청룡과의 한국시리즈에 출전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불을 뿜은 그의 방망이는 사경을 헤매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한국시리즈 성적 1홈런 포함 19타수 9안타(0.474) 8타점을 기록한 김봉연은 해태에 첫 우승을 안기며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바로 그 우승이 해태(KIA) 10회 우승의 시발점이다.
김봉연은 이듬해부터 부상 후유증과 체력적 한계, 그리고 상대 투수들의 견제로 슬럼프 늪에 빠졌다. 4번 타자의 부진은 해태의 침체로 이어졌고, 1984년 롯데, 1985년 삼성의 우승을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그는 1986년 2년 만에 재기에 성공, 생애 두 번째 홈런왕(21홈런)에 오르며 해태의 두 번째 한국시리즈 제패를 이끌었다. 그것이 김봉연 야구 인생의 정점이었다.
정년퇴직까지 2년…제3의 인생은 다시 광주에서
김봉연은 1988년 은퇴까지 630경기에 출전해 2145타수 596안타(0278) 110홈런 334타점이라는 화려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한국 야구의 영웅이자 호남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의 은퇴는 씁쓸한 마침표였다.
“스포츠신문을 통해 ‘김봉연 은퇴’란 제목의 기사를 봤다. 세상에 나도 모르는 은퇴가 어디 있나.” 구단의 일방적인 은퇴 결정은 아직도 선수생활에 대한 미련으로 남아 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작한 코치생활도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2000년 김응용 감독이 삼성 사령탑을 맡으면서 후배 김성한이 후임 감독으로 정해진 것이다. 결국 김봉연은 제2의 인생을 위해 야구판을 떠났다.
그리고 15년이 지났다. 김봉연은 지금 충북 음성의 극동대학교에서 사회체육학과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어릴 적 교사 꿈을 교수가 되어 이룬 셈이다.
“야구를 그만둔 지 벌써 15년이나 됐다. 이제 정년도 2년밖에 남지 않았다. 정년퇴직하더라도 강의는 계속하고 싶다. 학생들 가르치는 일이 즐겁다.”
그는 야구판을 떠나서도 신명나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다.
“내 야구 인생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프로 감독을 못했다는 점이다. 일흔이 되기 전에 꼭 KIA 감독을 맡고 싶다.” 바로 그것이 해태를 떠나 지낸 15년 세월도 즐겁게 생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해태는 가난했지만 모든 선수들이 책임감이 강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뛰었다. 해태와 KIA의 차이점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KIA엔 그게 없다. 그래서 더 KIA로 돌아가고 싶다.”
그는 그렇게 제3의 인생을 설계했다.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는 역전 드라마의 마침표가 김봉연의 잊힌 야구 열정에 또 다시 불을 지피고 있다.
광복 이후 출판시장은 1950년의 6·25, 1960년의 4·19와 1961년의 5·16, 1972년의 10월 유신,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 1989년의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1997년의 IMF 외환위기,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등으로 말미암아 대체로 10년을 주기로 많이 읽히는 책의 유형이 달라진다. 광복 이전이 암흑기였다면 광복 이후 6·25가 터지지 직전까지는 민족문화 재건기로 볼 수 있다. 이후 1950년대는 전후 허무주의, 1960년대는 이데올로기, 1970년대는 산업화, 1980년대는 역사성, 1990년대는 대중출판, 2000년대는 글로벌 출판, 2010년대는 디지로그 출판 시대로 정리할 수 있다.
글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사진
◇ 광복~1949년 민족문화 재건
“아버지가 들고 온 『조선역사』란 책에 빨려들어 밤새도록 읽고 모자라 수업시간에까지 읽다가 들켰다. 그 바람에 전교생 앞에서 10여분이나 을지문덕이 수나라의 대군을 무찌르는 대목을 소리 높여 읽는 수모를 겪었다. 그 바람에 학생들은 그 책이 동이 나도록 모두 구입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대 사학과 교수였던 김성칠(金聖七, 1913∼1951)이 보고 겪은 6·25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담은 『역사 앞에서』(창비)에 실린 신경림 시인의 추천사에 나오는 글이다. 신 시인은 한 칼럼에서 『조선역사』가 “한글을 깨치고서 처음 읽은 책”이라고 말했는데 이 책이 광복 이후 최초의 베스트셀러다.
해방 공간 시기에는 우리 역사와 글, 문학을 펴내고자 하는 욕구와 읽고자 하는 욕구가 넘쳤다. 이런 욕구 때문에 『우리말 큰사전』(한글학회, 1947), 『조선어표준말모음』(조선어학회, 1946) 등의 사전과 학술교과서가 인기를 끌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로는 『해방 전후』(이태준), 『내가 넘은 삼팔선』(후지와라 데이, 1949),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크리미센코, 1948),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1948), 『목넘이 마을의 개』(황순원), 『렌의 애가』(모윤숙), 『청록집』(조지훈 외) 등이 있다.
◇ 1950년대 전후 허무주의
1950년대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는 정비석의 『자유부인』이다. 한국전쟁으로 한반도의 전체 인구 3000만 명 중 3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전쟁의 후유증이 적지 않았을 때에 대학교수 부인의 파탄적 행동을 그린 소설이 1년 만에 10만 부가 팔리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자 이 소설이 “문화의 파괴자로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적군”(서울대 법대 황산덕 교수)이라는 공격이 나왔고, 작가는 열띤 논쟁을 벌여야 했다. 『우리말 큰사전』이 여전히 인기를 끄는 가운에 젊은 세대에게 유머감각을 크게 심어준 『얄개전』(조흔파)이 등장했다. 이 시대의 베스트셀러에는 『슬픔은 강물처럼』(최희숙), 『마음의 샘터』(최요안), 『청춘극장』(김래성),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조병화) 등이 있다.
◇ 1960년대 이데올로기
1960년대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는 최인훈의 『광장』이다. 소설 속 철학도 이명준은 북에 올라가 북한의 정치체제에 가담해보지만 남의 ‘밀실’과 북의 ‘광장’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방황하다 제3국행을 택한 끝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이야기는 4·19의 성과를 5·16세력에게 빼앗긴 경험을 지닌 지식인에게 깊은 허무감을 안겼다. 이 시기의 베스트셀러에는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박계형), 『저 하늘에도 슬픔이』(이윤복), 『석녀』(정연희), 『조선총독부』(유주현), 『거대한 뿌리』(김수영), 『금강』(신동엽) , 『빙점』(미우라 아야코) 등이 있다.
◇ 1970년대 산업화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로 대표되는 ‘청년문화’가 등장한 1970년대는 『별들의 고향』(최인호), 『영자의 전성시대』(조선작), 『겨울 여자』(조해일) 등의 이른바 ‘호스티스 소설’들이 한 흐름을 이뤘다. 산업사회로 본격적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여성의 상품화 현상을 ‘호스티스’라는 사회적 존재에 초점을 맞춰 다루고 있는 이 작품들은 고도성장의 이면에 숨은 우리 사회의 그늘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그늘은 또 있었다. 부랑노동자의 삶을 그린 황석영의 『객지』와 도시빈민의 삶을 그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다. 이 시대의 주목할 베스트셀러로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박완서), 『김약국의 딸들』(박경리), 『서울 1964년 겨울』(김승옥), 『데미안』(헤르만 헤세) 등이 있다.
◇ 1980년대 역사성
1980년대는 이념의 시대이자 불의 시대였다. 대학과 신문사에서 쫓겨난 지식인들이 출판계에 유입되어 변혁이론의 창출과 보급에 앞장섰다. 대표적인 성과로 강만길의 『한국근대사』와 『한국현대사』를 비롯한 근현대사 관련 서적을 꼽을 수 있다. 1980년대는 대하소설의 시대이자 시의 시대이기도 했다.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홍명희의 『임꺽정』, 박경리의 『토지』 등은 모두 대중에게 정치적 각성을 하게 만든 ‘역사교과서’였다. 1980년대 내내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나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등의 이념시나 민중시가 거대한 트렌드였지만 정작 불로 뜨거워진 대중의 몸을 식혀준 것은 쉽게 읽히는 서정시였다. 서정윤의 『홀로서기』,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이해인의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등의 시들은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대중에게 위안을 안겨주었다. 이밖에 이 시기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로는『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마광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바스콘셀로스), 『숲속의 방』(강석경), 『인간시장』(김홍신) 등이 있다.
◇ 1990년대 대중출판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된 직후 시작된 1990년대가 만들어낸 최고의 상품은 ‘개인’이었다. 1990년대 최초의 밀리언셀러인 『세계는 넓고 (내가) 할 일은 많다』(김우중)에서부터 1990년대 말의 서갑숙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까지 책 제목에 ‘나’는 넘쳤다. 세계화와 정보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컴퓨터 길라잡이』(임채성 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한호림),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스티븐 코비) 등 개인의 성공 욕망을 자극하는 실용서나 자기계발서가 상한가를 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의 출판시장을 휩쓴 『소설 동의보감』(이은성), 『소설 토정비결』(이재운), 『소설 목민심서』(황인경) 등의 역사인물소설 트로이카들도 사실상 자기계발서 역할을 했다.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이었던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김진명), 『일본은 없다』(전여옥),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 등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책들이 인기를 끌었으며,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박완서), 『물 위를 걷는 여자(신달자)』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천년의 사랑』, 『모순』(양귀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공지영), 『혼자 눈뜨는 아침』(이경자) 등 사랑(결혼)과 일이 충돌하는 모습을 그린 소설들이 인기를 끌었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베스트셀러로는 『퇴마록』(이우혁), 『드래곤 라자』(이영도), 『여보게 저승갈 때 뭘 가지고 가지』(석용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잭 캔필드 외), 『오체불만족』(오토다케 히로타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등이 있다.
◇ 2000년대 글로벌 출판의 시대
2000년대는 절대 고독의 개인이 발견되는 여정이었다. 고학력 사회가 되었지만 고학력자일수록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가 양산되는 바람에 성공욕구만 넘쳐났다. 덕분에 베스트셀러의 산실은 자기계발서였다.『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로버트 기요사키 외),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스펜서 존슨),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탄 줘잉),『화』(틱낫한), 『설득의 심리학』(로버트 치알디니), 『아침형 인간』(사이쇼 히로시), 『마시멜로 이야기』(호아킴 데 포사다 외), 『배려』(한상복),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켄 플래차드 외), 『긍정의 힘』(조엘 오스틴), 『시크릿』(론다 번) 『이기는 습관』(전옥표)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에 대중은‘성공’을 버리고 ‘행복’으로 말을 바꿔 탔다. 2000년대의 베스트셀러로는‘해리포터’ 시리즈(조앤 K. 롤링) ,『다빈치 코드』(댄 브라운), 『연금술사』(파울로 코엘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과 같은 블록버스터 소설, MBC 방영도서,‘Why’를 비롯한 스토리만화 등이 있다. 이 밖에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국화꽃 향기』(김하인), 『가시고기』(조창인) 등과 같은 극도로 축소된 인간관계를 다룬 소설들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류시화)도 있다.
◇ 2010년대 디지로그 출판의 시대
1998년의 국지적인 IMF 외환위기와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차원이 달랐다.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광풍 앞에 개인은 오로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대안적인 사람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2010년대 초반에는 ‘셀프힐링’의 책들만이 인기를 끌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 등 멘토가 던져주는 ‘위로와 공감’의 어록집,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장하준) 등 사회적 어젠다를 담은 책, 대안의 삶, 성찰, 관계나 소통 등을 다룬 책들이 인기를 끌었다. 이밖에 『해를 품은 달』(정은궐), 『미생』(윤태호) 등의 미디어셀러와 『서울 시』(하상욱) 등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다.
이 시대에 인기를 끄는 것은 위로와 공감의 어록, 관계와 소통을 다룬 책들이다. 이제 개인은 오로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대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일까.
한기호(韓淇皓)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학 학사, 2000년 제41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기획부문 출판상, 학교도서관 저널 대표이사.
‘야~ 야~ 야~ /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마음은 하나요 / 느낌도 하나요 / 그대만이 정말 내 사랑인데…세월아 비켜라/ 내 나이가 어때서 /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오승근의 ‘내 나이가 어때서’ 가 방송에서, 길거리에서 울려 퍼진다. 한국갤럽이 2014년 10월 2일부터 29일까지 전국 13세 이상 남녀 17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한국인 애창곡’ 1위로 선정된 곡이다. 10~20대에게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는 엑소를 비롯한 유명 스타 가수들의 노래를 누르는 이변(?)을 연출했다. 젊은이들의 다양한 사랑이 스크린을 장악한 가운데 4월에 눈길 끄는 영화가 있다. 강제규 감독의 ‘장수상회’다. 박근형과 윤여정이 장년의 설레는 사랑을 그린다. 중장년의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점차 늘고 있다. 20~30%대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MBC ‘전설의 마녀’를 비롯한 수많은 드라마가 중장년의 멜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인생 이모작이 일상화되고 중장년층의 물리적 나이 조정이 필요한 100세 시대를 맞이한 요즘 변화된 대중문화의 단면들이다. 최근 들어 중장년의 사랑과 연애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급증하고 있다.
사랑과 연애는 나이,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늘 관심과 설렘을 촉발한다. 사랑과 연애의 설렘은 이상적인 데이트 상대로 구체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중장년이 데이트하고 싶은 이상적인 유명인은 누구일까. 중장년 여성들은 탤런트 최불암(75)을, 중장년 남성들은 연기자 박정수(62)를 가장 데이트하고 싶은 이상형 1위로 꼽았다.
최불암은 잘생긴 장동건도, 국민배우 안성기도, 그리고 영원한 청춘스타 신성일도 제쳤다. 박정수는 섹시한 김혜수도, 단아한 이영애도, 그리고 빼어난 미모의 김태희도 눌렀다.
결혼정보업체 선우 부설 결혼문화연구소가 지난 1월 중장년 3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중장년이 데이트 하고 싶은 유명인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성이 꼽은 데이트 하고 싶은 인물로, 최불암 뒤를 이어 박근형(75)이 2위를 차지했고 노주현(69)과 안성기(63)가 공동3위, 그리고 신성일(77)과 이덕화(62) 순이었다. 조각미남으로 알려진 장동건(44)과 자상하고 멋진 차인표(48)는 각각 7위와 10위에 머물렀다.
중장년 남성들이 데이트하고 싶은 여성으로 박정수가 첫 손에 꼽혔고 다음은 김혜수(45), 김희애(48, 공동2위), 이미숙(55, 4위), 강부자(74), 고두심(64), 사미자(75),이영애(44, 공동 5위) 순이었다.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는 김태희(35)는 9위에 머물렀다.
중장년 남녀에게 데이트하고 싶은 상대 1위로 꼽힌 최불암과 박정수는 “영광스럽고 감사하다”며 1위에 오른 소감을 밝혔다.
그렇다면 최불암과 박정수는 1위에 오른 원인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중년 여성들에게 데이트하고 싶은 상대 1위로 꼽힌 최불암은 “연기자로서 살아온 50여 년 동안 드라마나 영화에서 야비한 역할을 하지 않고 악한 캐릭터보다는 착하고 자상한 남자나 권위 있지만 강압적이지 않은 아버지 역할을 주로 했기 때문일 것 같다”며 극중 캐릭터로 유발된 이미지를 1위 원인으로 꼽았다. 여기에 최불암은 “아내(중견 연기자 김민자)와의 오랜 시간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도 데이트 이상형 1위 선정에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며 특유의 소탈한 웃음을 짓는다.
중년 남성들이 가장 데이트하고 싶어 하는 박정수는 “매력적인 여자 스타들이 많은데 솔직히 내가 왜 1위에 올랐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드라마에서 아마 억척스러운 배역보다는 품위 있고 단아한 분위기의 캐릭터를 많이 맡은 때문인 것 같다. 캐릭터와 저를 연관시켜 1위로 꼽아준 것으로 보인다”며 드라마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박정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저의 외모나 행동을 보면서 여전히 소녀 같은 감성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 것도 설문조사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고 했다.
작업을 함께 하는 동료 연기자들이 생각하는 최불암과 박정수의 매력은 무엇일까. ‘전원일기’ 등 수많은 드라마에서 부부로 나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실제 최불암의 아내로 오해까지 하는 김혜자는 “소탈하고 편한 외모에 늘 한결같은 심성과 믿음직스러움,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을 위한 헌신 등이 최불암씨의 강점이자 매력이다”고 설명했다.
박정수와 함께 1972년 MBC 5기 탤런트로 함께 연기를 시작했고 최근 방송에서 “40년 동안 박정수를 짝사랑했다”는 발언으로 눈길을 끌었던 이계인은 “박정수씨는 세월이 비켜 간 듯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외모와 여리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 좋다. 박정수 씨는 남자가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여린데 이것이 남성들에게는 연애 감정을 촉발한다”고 말했다.
중장년들이여, 만물이 생동하는 봄날에 아내와 남편을, 그리고 연인을 사랑하며 설레는 감정을 다시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오승근의 노랫말처럼 사랑에는 나이가 없고 지금이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이기에.
음반을 모으면서 예전에 가지고 있던 것들은 물론 분야별로도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게 되자 이제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것까지 욕심을 내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전에 소개했던, 중학교 때 본 라는 영화의 OST(Original Sound Track)로 음반가게에만 가면 한 번씩은 꼭 확인을 해 보았다.
그러다가 1997년쯤 미국에 갔을 때, 그때도 예외는 아니어서 틈만 나면 음반가게들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던 중 타워 레코드 체인점에 들러 음반을 보다가 우연히 한쪽 구석에 비디오 코너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비디오에 별 관심이 없었고 집에 VTR조차 없었지만 그 전에는 음반가게에서 비디오를 파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지라 호기심도 생기고 또 시간도 좀 있고 하여 그쪽으로 가 보았다. 그런데 아, 그곳에 그렇게 찾아다니던 가 그것도 영화까지 볼 수 있는 비디오테이프로 있지 않은가.
우연히 조우한 ‘사랑의 종이 울릴 때’의 감동
그뿐이 아니었다. 청순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젊은 시절 나의 우상 중 하나였던 오드리 헵번의 ‘로마의 휴일’ ‘녹색의 장원(Green Mansion)’과 나탈리 우드의 ‘초원의 빛’도 있었고 이름만 들어도 사춘기 소년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마릴린 먼로의 ‘나이아가라’와 ‘돌아오지 않는 강’, 진 켈리와 데비 레이놀즈의 춤과 노래가 너무나도 신나던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 In The Rain)’도 있었다. 또 안동에서 군 복무 중 휴가를 가던 길에 기차시간이 남아 안동극장에 들어가서 보다가 기차시간이 되어 중간에서 나오는 바람에 늘 결말이 궁금했던 ‘피와 장미(Blood And Roses)’라는 영화도 있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옛날의 명화들이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비디오에는 워낙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이런 영화들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터라 이 순간은 필자에게 또 하나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잊혀졌던 영화에 대한 향수가 다시 되살아나면서 ‘자빠진 김에 쉬어간다’고나 해야 할까, 타워 레코드에서 이들 영화 외에도 전에 본 기억이 있던 상당수의 비디오테이프를 더 샀고 귀국해서는 바로 VTR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국내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 주로 인터넷을 통해 미국에서 옛날 영화들을 사 모은 것이 200여 개를 넘어섰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우리나라에도 옛날 영화들이 비디오로 출시되고 있다는 것, 비디오 테이프의 총판들이 황학동 도깨비시장에 모여 있다는 것 등을 알게 되어 이때부터 틈나는 대로 주로 황학동과 그 외에도 비디오를 파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찾아다니면서 본격적으로 비디오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1950, 60년대의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유럽영화의 경우, 꽤 인기가 있었던 것들 중 국내에서는 물론 인터넷에서도 팔지 않는 것이 여러 개 있었으나 얼마 전 그들 중 몇 가지는 일본에서는 발매되었음을 알게 되어 ‘아가씨 손길을 부드럽게’와 ‘부베의 연인’, ‘지하실의 멜로디’를 일본어 자막판으로 구했고 그 후 일본을 자주 다니던 고교동창 K군을 통해 ‘형사’와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도 구할 수 있었다.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미오……”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미오……”
알리다 켈리가 구슬픈 목소리로 부르는 ‘죽도록 사랑해서(Sinno Me Moro)’라는 주제가가 흐르는 가운데 고도(古都) 로마의 한 주택가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도둑이 도망가는 장면으로 ‘형사’라는 영화는 시작된다. 임신한 애인에게 목돈을 마련해 주려고 도둑질을 하다가 살인까지 저지르게 돼 결국 경찰에 잡혀 연행되어 가는 애인 디오메데의 이름을 절규하며 뒤쫓아가는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이 영화는 영화도 영화지만 주제가가 엄청나게 유행했다.
한편 는 프랑스인들의 눈으로 본 미국의 흑백 인종갈등을 그린 영화로 백인소녀를 사랑한 죄로 흑인소년이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요행히 피부가 흰 친형이 동생의 복수랍시고 백인처녀들을 범하고 다니면서 범행이 끝날 때마다 동생의 하모니카로 ‘갈색의 블루스’라는 주제가를 연주하는, 영화는 그저 그렇고 그랬지만 가슴을 저미는 듯 파고드는 주제가는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된 아버지께서도 무척 좋아하셨던 영화라 다시 보는 감회가 더욱 깊었다.
명화 4000여 장 수집의 재미
그런데 영화 수집을 이렇게 구입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만난 영화(1)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10 수년 전의 몇 년간은 KBS, MBC, SBS, EBS 등 각 TV 방송이 명화극장이나 주말의 명화 시간 등에 방영하는 영화들 중 필자가 소장하지 않은 영화는 거의 모두 녹화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신문이나 TV를 통해 영화 방영계획을 확인하여 예약녹화를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녹화해 놓은 영화도 400장은 훨씬 넘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명화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또 그들 중에는 외국영화뿐 아니라 국산영화도 꽤 많이 있고 국내에서 방영은 되었지만 비디오나 DVD로 출시되지 않은 것들이 상당히 많다. 최근에는 비디오 대신에 DVD를 모으고 있지만 이제는 50, 60년대 영화나 그 이전 것들뿐만 아니라 그 후 최근까지 나온 영화들 중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한 것들 중 구할 수 있는 것은 대개 다 모았다. 녹화한 것들까지 포함하면 이것 역시 정확히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족히 4,000여 장은 되는 것 같다. 가끔 필자에게 그 영화들 다 보느냐고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러면 필자는 집에 있는 사전을 그 안에 있는 단어들 다 찾아보려고 가지고 있느냐고 반문하곤 한다.
그분들은 어느 순간 갑자기 옛날 영화 생각이 날 때 그것을 찾아서 다시 보며 음미하는 재미를 모르실 것이다. 필자는 주변에서 옛 추억의 영화를 그리워하는 분이 계시면 언제든지 빌려드린다. 그리고 경복궁 옆 사간동에 있던, 또 다른 고교동창 K군이 운영하는 화랑 베아르떼에서 매월 1회씩 교양미술 강좌를 하던 큐레이터 P씨의 제안에 따라 2008년 12월부터는 그 화랑의 고객과 고교동창들을 대상으로 화랑이 익선동으로 이전하게 된 2012년 12월까지 강좌가 끝난 후 매월 한 편씩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1944년 서울 출생.
아호 무애(無碍). 경기고, 서울대 토목공학과 졸. 서울대대학원 교통공학 박사. 서울대, 명지대 토목공학과 및 교통공학과 교수 역임. 현재 명지대 명예교수, 서울특별시 무술(우슈)협회 회장 홍익생명사랑회 회장, 월드뮤직센터 이사
월례 조찬 모임 백강포럼(회장 윤은기)에서 만난 조석준(趙錫俊) 전 기상청장은 포럼 진행뿐만 아니라 리스타트 공부를 하고 있었다. 백강포럼은 이른 아침에 하는 조찬 모임인데 200여 명씩 몰리며 문전성시를 이루는 등 학구열이 어느 모임 보다도 뜨거운 모습이다. 조 전 청장도 자기가 선택한 것을 자기만의 속도로 해나가는 ‘프리스타일’이라는 점에서 자신에게서 출발하는 공부를 한다. 그는 아침 조찬회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공부나 지식으로서의 공부가 아니라 삶의 변화를 동반하는 상생의 지표를 찾고 있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최근 조 전 청장은 1년 동안 참석한 백강포럼 조찬회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사업의 그림을 그리고 실행에 옮기고 있는 중이다. SNS 소셜미디어 시장에서 ‘메가시너지 아카데미’를 열어 보겠다는 야심찬 생각으로 기획하고 있다.
백강포럼은 일반 포럼이나 조찬회처럼 일방적인 지식 전달이나 단순한 성공담을 전하는 차원의 강의 콘텐츠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진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몸담아 왔던 디지털과 방송 미디어 그리고 강연 콘텐츠를 융합하기에 충분했다.
조 전 청장이 기획하고 있는 ‘메가시너지 아카데미’는 개인이 갖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체계화시켜 독창적인 콘텐츠로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며, 아울러 융·복합과 협업적 방식으로 개인과 조직의 핵심역량과 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지속적 네트워킹을 지원한다는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메가시너지 프로강사 과정은 자신의 독창적인 콘텐츠(지식, 경험)을 다듬고 연마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또한 신개념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기법을 전수하여 자신의 콘텐츠를 사회 전반에 확산시킬 수 있는 역량을 길러주고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을 지향하고 있다.
프리스타일 공부로 얻은 ‘메가시너지 아카데미’
조 전 기상청장이 백강포럼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013년 발기인대회에서부터였다. 그때부터 백강포럼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조 전 청장은 2014년 말까지 10여 회의 조찬 모임을 진행했다. 어느 강의나 마찬가지겠지만 양질의 강사를 확보하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저희도 노력했죠. 사실 예전에는 이런 포럼이라고 하면 주로 지식 전달, 그때그때 유행하는 리더십으로 대개 콘텐츠가 이뤄졌어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50년이 넘는 성장의 배경에는 분야별로 많은 발전이 있었던 거죠. 그 내용을 살리는 게 백강포럼의 취지와도 부합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우리 사회 각 분야별로 존재하는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하여 보여주는 거죠. 물론 어두운 측면도 강연을 통해 알려 계층 간 소통을 원활히 하자는 겁니다. 상생과 협력으로 가자는 거죠.”
조 전 청장은 강의는 공급자와 수요자가 함께 있어야 하며 그 둘이 함께 만나 콘텐츠 질을 높여야 한다고 밝혔다. 작년 말에 진행했던 손욱 행복나눔25 운동본부 이사장의 감사 나눔이 실제적인 혁신으로 이어져 성공했던 것도 그런 바탕이 있었다는 설명.
이제 강의는 공급자와 수요자가 상생해야
“과거 지식인 사회에서 주류를 이뤘던 건 호흡이 긴 콘텐츠였는데, 이제는 짧고 핵심적인 정보를 다루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의 체질이 스피드와 핵심 축약을 선호해요. 사실 그런 기질이 한국의 압축적 발전의 원동력이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부분을 보다 구체화하여 정리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게 메가시너지 아카데미의 목적입니다.”
세상의 빠른 변화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개인이 갖고 있는 경험과 지식을 더 단순명료화하여 브리핑하게 하는 것, 그리고 좋은 내용으로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다.
“과거에는 세상의 커뮤니케이션 주도가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변화가 빨라서 TV, SNS 등이 더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이제는 CEO가 ‘잘라내는(편집하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과거에는 CEO 밑의 사람들이 신문 스크랩 등을 해서 CEO에게 교육용으로 전달해줬는데 그건 이제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어떤 소식이 퍼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대미지(피해)도 오래 걸렸지만 요새는 두 시간만이면 전세계에 모두 퍼지고 데미지도 그만큼 빨리 영향을 주기 때문이죠. 이젠 어떤 조직이든 끊임없는 소통이 중요해진 세상입니다. 뭔가 잘못된 정보가 나왔을 때 ‘그건 아니다’라고 바로 말할 수 있는 게 필요하다는 거죠.”
손 안의 방송사,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 필요
강연들을 보면 대개 한 시간이나 두 시간 동안 이뤄지곤 했다. 그런데 요새는 나 처럼 15분짜리 강연이 나와서 호응을 얻고 있다.
“의미가 있다고 봐요. 그렇게 강연이 짧아지는 추세가 점점 심플해지는 미디어의 발달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죠. 앞으로는 30, 40분 강의를 두 개쯤 배치하는 것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짧으면서도 임팩트 있는 구성에 더 초점을 맞춘다는 거죠.”
조 전 청장은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이 공유되어 사람들이 일정 수준 이상은 아는 시대가 됐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신선한 강연 콘텐츠가 많지 않다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조 전 청장이 내용을 함축적으로 전달해주고자 하는 것도 강연만이 아닌 강연 후 토론을 통해 일방적인 강의가 아닌 커뮤니케이션으로 이어지게끔 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방송사에는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조찬회도 방송과 똑같이 그런 군더더기 없는 시나리오가 필요합니다. 일정한 수준의 편집 및 가공이 필요하다는 거죠.”
조 전 청장은 스마트폰이야말로 손 안의 방송사와 똑같다고 분석했다. 지금 시대는 촬영에서부터 송출까지 가능한 기기가 손 안에 들어와 있는 상황이다. 조 전 청장은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예로 들었다. 루게릭병 치료 홍보를 위해 시작된 아이스버킷 챌린지 캠페인은 일 년에 20억 원 정도이던 모금액을 한두 달만에 그 열 배인 100억 원 가까이 모으게끔 만들었다. 이는 전통적인 미디어가 못해내는 일을 SNS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1980년대 초였다면 KBS와 MBC만 있었어도 통치가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SNS 채널이나 스마트폰이 있어 방송사를 갖고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콘텐츠를 어떻게 정리하여 활용하느냐에서 판가름날 것입니다.”
그는 “은퇴를 앞두고 있는 신중년들은 스스로 전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쥐고 있는 한 줌을 지키려 애쓴다. 공부는 이런 통념을 깨고 자신을 바꾸는 과정”이라며 “강의 콘텐츠에 새로운 메커니즘을 구축해보겠다”고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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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백강포럼
좋은 강의가 좋은 세상을 만든다
대한민국 백강포럼(회장 윤은기)은 좋은 강의를 통해 계층·세대·이념 간 갈등을 치유하고 우리나라가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 보탬이 되고 있어 타 지식포럼의 귀감이 되고 있다.백강포럼은 사회
각 분야에서 인정을 받아온 100명의 명사들이 강의를 통한 사회 공헌을 실천하기 위해 모였다.백강포럼(100인 강사 포럼)의 구성원은 윤은기 한국협업진흥협회장을 비롯해 관료, 학자, 문화인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다.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100명의 강사는 좋은 강의가 사람을 변화시키고 이 사람들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기치 아래 강의를 통해 사회공헌을 하고자 한데 뭉친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백강포럼은 봉사정신을 바탕으로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 회원 간 지식 공유하는 지적 커뮤니티를 지향하고 있다.
회원으로 박재갑 전 국립암센터 원장, 김신배 SK그룹 부회장, 홍석우 전 지식경제부 장관, 최광식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손욱 행복나눔125운동본부 이사장, 이희범 전 산자부 장관, 김은기 전 공군참모총장, 서규용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안종배 한세대 교수, 권대욱 아코르 앰배서더 호텔 대표, 김혜정 경희대혜정박물관 관장, 김동수 전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신각수 전 주일 대사, 김재우 한국치협회 회장, 성영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이영하 전 레바논 대사, 조현정 비트컴퓨터 회장, 명동성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한미영 세계여성 발명기업인협회장 등 정치·산업·교육·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다양하게 참여하고 있다.
백강포럼은 봉사 정신을 바탕으로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 회원간 지식을 공유하는 지적 커뮤니티를 지향하고 있다. 재능기부 강의 등 다양한 사회 공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특히 상업적 모임이 아닌 공익을 추구하는 모임으로 정치적 중립, 극단의 배제,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가치 창출, 융·복합적 소통 등이 백강포럼의 원칙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서울 컨벤션 도심공항 3층에서 한달에 1회, 오전 7시부터 조찬포럼을 진행하고 있다.
“(서킷 코너링을 위해) 바이크와 함께 몸을 옆으로 점점 뉘이다가 급기야 뺨이 지면에 닿으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바로 그때 느껴지는 짜릿함이란 말로 형언하기 어렵죠.”(웃음)
전국 바이크 족들이 모여 실력을 뽐낸다는 경기도 가평 유명산 정상. “크앙~”하는 거친 굉음과 함께 날렵하면서도 묵직한 기운이 느껴지는 슈퍼 바이크(배기량 1000cc이상) 한 대가 멈춰섰다. 이 바이크에 앉은 라이더가 헬멧을 벗자 마초(남성) 라이더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머리를 단아하게 뒤로 빗어 넘긴 준 연예인급 미모의 여성이 시선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녀가 바로 내년 하늘의 뜻을 깨닫는다는 지천명(知天命·50세)의 나이를 바라보는 아마추어 슈퍼 바이크 레이서 겸 주부, 전규정(49)씨였다.
◆우울증 = 그녀의 바이크 인생은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의 한 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그래픽 디자인 등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던 그녀에게 우울증이란 진단이 떨어진 것이 바로 그 즈음이다.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하고, 직장과 집만 오가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삶이 낳은 결과였던 것. 즐겁게 빠져들 수 있는 것을 찾아보라는 의사의 권유에 사격을 비롯해 승마, 스킨스쿠버, 보드, 심지어 킥복싱까지 영역을 넓혀 갔다. 바이크도 그때 시작했다.
“강원도의 한 리조트 근처에서 할리 데이비슨 바이크 400대가 무리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했죠. 오토바이 하면 택배 배달만 생각했는데 저렇게 타는 사람들도 있구나 했죠. 그길로 서울의 한 바이크 교습소를 찾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교관이 스쿠터 레이스도 나가보라고 해서 레이싱 세계에 입문하게 된 거예요.”
◆와인딩 = 슈퍼 바이크는 최고속도가 300㎞를 넘나든다. 전씨 역시 경주용 서킷에서 시속 200㎞를 훌쩍 넘겨 내달릴 정도 스피드에도 자신있다. 남성에 비해 체력적으로 떨어지는 여성인 데다 아마추어 라이더라는 점을 감안하면 준 선수급이라는 것이 주변의 얘기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즐기는 플레이는 따로 있다. 바로 와인딩(굽이길)이 그것. 서킷에서 바이크와 몸을 뉘어 업-다운을반복하며 코너링할 때 느껴지는 스릴감이 그녀가 바이크에 앉는 가장 큰 이유라고. 특히 코너를 돌 때 바이크가 기울어져 얼굴이 땅에 부딪칠듯한 느낌이 들 때가 가장 희열감이 느껴진단다. 이때 속도가 무려 시속 140㎞에 이른다. 그런 스피드가 무섭긴 하다고. 하지만 바이크를 서서히 세우며 코너를 탈출할 때 느껴지는 ‘해냈다’는 해방감은 그녀에게 가장 큰 성취감을 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녀는 바이크 투어링에 나설때 굽잇길을 골라서 다닌다. 도로가 뱀처럼 꼬불꼬불 꼬이면 금상첨화다.
강원도 느랏재, 태기산, 구룡령, 대관령, 한계령 등이 그녀가 주말이면 즐겨 찾는 투어링 코스라고. 특히 굽잇길이 심한 지리산 뱀사골이 라이딩 재미에는 그만인데 너무 멀어 자주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차량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평화의 댐도 그녀의 단골 투어링 코스다.
“업-다운으로 이어지는 와인딩은 바이크 타기의 백미예요. 내년에는 BMW원메이커 레이스 대회에 출전할 계획이에요. 더 늙기 전에 나가서 남성들과 당당히 실력으로 겨뤄보고 싶어요.”
◆남편보다 좋은 것 = 전씨의 바이크에 대한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나름 절약을 아는 주부 9단 그녀도 바이크 앞에선 한없이 무너진다. 이런 이력은 미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이크를 만난 이후
로 돈을 버는 족족 바이크에 투자했던 것. 그래서 지금 소유하고 있는 바이크만 3대다.
가장 아끼는 애마는 BMW S1000RR. 가격이 무려 4000만원에 이른다. 나머지도 예사롭지 않다. MV아구스타 브루탈레675는 대당 2000만 원을 호가한다. 베스파 이태리 스쿠터도 전씨가 즐겨타는 바이크다. 레이싱용 장비까지 합하면 금액은 더 올라간다. 레이싱용 슈트를 비롯해 헬멧, 부츠, 라이딩 자켓, 라이딩 바지, 글로브 등을 합치면 2000만 원을 훌쩍 넘는다고. 여기에 2년 전부터 바이크 세계에 입문한 남편 바이크(할리데이비슨)와 장비를 합치면 추가로 수천만 원이 더해진다. 바이크 라이딩 취미생활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주부다. 바이크에 투자하는 돈 이외에는 지독할 만큼 아낀다. 일단 자신을 치장하거나 꾸미는 데 돈을 들이지 않는다. 성형은 물론이고, 그 흔한 피부 마사지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다. 심지어 양말 살 돈을 아끼기 위해 남편 양말을 신기도 한다고. 그녀의 털털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이렇다 보니 여자들이 다들 좋다고 한다는 명품 가방하고도 거리가 멀다.
“피부관리요? 일단 저를 누가 만지는 것 자체가 싫어요. 그래서 팩도 안 하고 미용 같은 것에 관심이 별로 없어요. 제 유일한 취미는 바이크죠. 바이크에 들인 돈이 엄청나긴 하지만 아깝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남편보다 바이크가 더 좋으니까요.”(웃음)
◆스턴트 우먼 = 바이크는 그녀의 직업도 바꿔버린다. 다니던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스턴트우먼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된 것. 교습소에서 바이크 레이싱 교육을 받는 동안 알게 된 영화제작자에게서 “운동신경이 남다르다. 스턴트 전문 교육을 받아보는 게 어떤가”라는 말을 듣고, 그 길로액션 스쿨에 등록한 것. 각종 무술과 액션 기술을 두루 섭렵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지난 2005년 반올림 드라마에서 배우 고아라 대역(여자 경찰)으로 나왔고, 드라마 막상막하에선 배우 성유리 대역(군인)으로 바이크를 탔다. 특히 MBC 베스트 극장에선 건물 3층에서 트럭으로 뛰어내려는 스턴트를 선보이기도 했다. 요즘도 대역배우 요청이 들어오면 선별해서 방송출연하기도 한다고. 내년 지천명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지만 여전히 현직으로 활동하고 있을 정도로 건강에 자신이 있다. 이외에도 오토 바이크 로드매니저로도 활동하고 있다.
“강해지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부터 남자 형제들하고 자라다 보니 여기저기 치이면서 자랐거든요. 특히 남존여비라는 개념이 너무 싫었죠. 내가 강해져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스턴트가) 저도 무섭긴 한데 그런 두려움과 긴장감이 저를 더 즐겁게 해요. 바이크를 타는 것도 일맥상통하는 셈이지요.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사는 게 즐거워요.”
◆국제 여성라이더 협회 = 그녀의 바이크 사랑은 해외로도 이어졌다. 지난 2012년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국제 여성라이더 협회 행사에 한국 대표(4명)로 참가하게 된 것. 총 300명 정도 참여하는 국제 행사에 당당히 그녀가 이름을 올린 것이다. 그녀는 국제적인 행사에 태극기가 찍힌 레이싱복을 입고 한국여성 라이더의 위상을 알리는 기회를 얻게 돼 영광스런 자리였다고 했다. 게다가 투어형 바이크를 현지에서 렌트해 약 12일 동안 오스트리아 곳곳을 누비며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 금상첨화였다고.
그렇지만 전씨는 바이크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없어졌으면 한다고 했다. 바이크 타는 사람들 전체를 폭주족이나 불량배로 매도하고 배척하는 세태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는 얘기다. 오토 바이크 타는 사람들의 취향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바이크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것도 불만이다. 자동차 전용도로는아예 발을 들여놓을 수도 없는 데다 일반도로에서도 사륜차들의 텃세에 치여 배척당하기 일쑤라는 것. 외국에서는 바이크를 출퇴근용으로 더 권장하기도 하고 사륜차들이 오토바이에 길을 비켜주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는데 한국은 선진국과 대조적인 모습만 연출되고 있다고. 그녀는 여성 라이더에 대한 편견도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 금녀의 구역이다 보니 처음에는 미친 여자 취급까지 받았다고. 특히 자신을 여성이 아닌 똑같은 라이더라 봐달라는 것이 그녀의 부탁이다.
“체계적인 라이더 훈련을 받고 경험을 쌓은 후 자기 실력껏 바이크를 타면 그리 위험하지 않아요. 조금 빠른 자전거를 탄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우리나라는 오토바이를 타면 안 좋게 보는 이유가 유교적인 사상에 기인한 것 같아요. 오토바이 타면 주렁주렁 치장하고 문신하고 하다 보니 더 곱지 않은 시선을 주는 것도 있고요. 자기 취향일 수 있는데 말이지요.”
◆바이크 미술 전시회 = 그녀는 아직도 도전하고 싶은 일들이 남아 있다고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대학에서 전공했던 미술(서양화)이다. 전씨는 본인의 천직은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미술만으로는 먹고 살기 어려워 직장생활에 파묻혔고 바이크를 타면서 더 등한시하게 됐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얘기다.
더 나이를 먹기 전에 놓았던 붓을 다시 쥐고 짬짬이 작품활동을 해서 미술 전시회도 연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다. 여기서도바이크는 빠지지 않는다. 바이크를 조형화하거나 형상화한 이미지를 모티브로 그림을 그리겠다는 구상이다. 그래서 전시회 이름도 ‘바이크 미술 전시회’로 벌써 지어놨다.
“바이크는 나의 심장이고, 삶의 원동력이에요. 바이크가 없으면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셈이지요. 체력이 닿는 때까지 바이크를 탈 생각이에요. 특히 나이를 먹으면서 좀 더 진지한 자세로 바이크를 생각하고 즐기고 있어요. 젊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이있어 좋기도 하구요. 단순히 멋있어 보인다거나 스피드만 즐기기 위해 타는 이들도 많은데 저는 이제 (그런 것은) 초월했어요. 바이크는 제 인생을 바꿔준 대상이고, 삶의 가치를 높여 풍성하게 해준 최고의 친구예요. 이젠 누구보다 진지하게 바라보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바이크를 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순재, 신구, 나문희, 성병숙이 연극 ‘황금연못’으로 뭉쳤다.
한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기대를 모으는 출연진이 죽음을 앞둔 노부부와 그 딸과 갈등과 화해를 그려낸다. 1990년대 미국 극작가 어니스트 톰슨의 대표작인 ‘황금연못’(9월 19일~11월 23일, 서울 DCF 대명문화공장 수현재컴퍼니 1관 비발디파크홀)은 1981년 할리우드 스타 헨리 폰다와 캐서린 헵번의 동명 영화로 큰 사랑을 받은 바 있다. 각각 노만과 에셀 역을 맡아 MBC ‘거침없이 하이킥’ 이후 약 7년 만에 다시 부부 호흡을 맞추는 이순재와 나문희를 최근 수현재컴퍼니에서 인터뷰했다.
△ 이순재 “존경하는 노장 배우 두 사람이 열연한 이번 작품을 나이 들어 꼭 해보고 싶었다.”
연기 경력 50여년의 국민 배우 이순재는 헨리 폰다와 캐서린 햅번에 대한 존경으로 운을 뗐다. “힘들고 어려운 작품이지만 용기내서 참여하게 됐다.”
여전히 도전을 멈추지 않는 그는 올해 나이 79세다. 지난 2010년 말과 2012년 이순재는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펼쳐진 연극 ‘돈키호테’에서 쟁쟁한 카리스마로 꿈을 노래해 호평을 이끌었다. 이와 달리 최근 이순재는 결을 달리해 친숙하게 다가온다. 처음으로 고두심과 부부 호흡을 맞춘 전작 ‘사랑별곡’도 그 대표적인 예다.
“나이 먹은 사람들의 철학이 담겨 있는 가벼운 일상을 통해 담겨 있는 의미를 추구한다. 가장 개똥철학일지 몰라도 말이다.” 이순재는 늘 작품 본위 태도를 우선시한다. “연극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이다. 좋은 작품에서 좋은 연출이 나오는 게 정설이다. 영상도 마찬가지다. 배우가 표출하는 대사마다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늘 고민한다.”
이순재가 돌아본 ‘황금연못’의 매력은 무엇일까. “평생을 함께한 부부다. 미국 사회에서 평생을 함께 한 부부가 쉽지 않다. 생을 마지막까지 함께 하면서 이뤄낸 사랑 이야기가 무척 아름답다. 대사가 기술적으로 멋있는 게 아니라, 일상성의 대화 속에 감동이 다 들어있다. 대사 한 마디에 다 동의할 수 있을테니까.”
△ 나문희 “남 얘기가 아니라 내 얘기라고 생각했다.”
연극은 발을 땅에 닿아야 할수 있다고 늘 강조하는 나문희다. 이번 작품 역시 자신의 삶을 꺼내어 비추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극 중 남편은 펜실베니아대 영문과 교수를 퇴직해 딸과 갈등도 많다. 내가 맡는 엄마는 그 경계에서 편안하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인물이다. 실제로 나 역시 영감은 영어선생님이고, 딸도 셋이다. 딸과 갈등도 깊게 있었다. 심리적으로 꽤 깊이 파고드는 이번 작품이 친밀한 이유다.”
우리네 가정에서 남편과 아버지는 호통치거나 말 수 없어 무뚝뚝한 남편이다. 미국 작품이지만 극 중 인물에서 우리네 향취가 풍겨난다. “우리나라 엄마들이 남편과 살면서 많이 겪는 삶의 안간힘 같은 걸 표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이 참으려고 하는 엄마의 성격이다. 최대한 우리나라 엄마들에게 초점을 맞춰서 현실을 연기하고 싶다.” 나문희는 ‘황금연못’의 극본을 으뜸으로 쳤다.
“의연하게 살다 가셨던 할머니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풍부한 감성의 글로 아름답게 나와있다. 저는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극 중 에셀은 죽음을 눈앞에 뒀다고 해서 조바심 내지 않는다. 갖고 있는 현실에서 즐기고 만족하는 것이다. 실제로 저 역시 무대에서 관객들을 향해 그렇게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다.”
강화도 초지대교 지나 해안대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작은 섬 하나가 연결되어 있다. 5000만평의 세계 3대 갯벌이 신비롭게 펼쳐져 있는 ‘동검도’란 섬이다.
조용했던 동검도가 최근 ‘영화의 섬’으로 불리우며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갯벌 앞 섬마을에서 희귀 영화를볼 수 있는 특별함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흔히 접하기 힘든 세계고전, 예술영화, 작가주의 영화를 365일 상영하는 예술극장이 오픈했다. 도시에서도 사라지고 있는 예술극장을 섬에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그를 만나기 위해 동검도로 영화여행을 떠나보자.
글 김미숙 객원기자 mebranding@naver.com 사진 이형용 MeBranding 이사
얼굴을 들면 탁트인 갯벌과 하늘, 내려다 보면 구불구불 시골길… 섬 풍경 가운데 현대적인 건축물이 한 프레임에 담긴 조화가 인상적이다. ‘DRFA 365 예술극장 & 조나단의 커피’ 감각적인 하얀 입간판에 먼저 눈길이 간다. 건물에 들어서면 벽에 걸린 걸작영화 포스터, 세계 유명 감독들의 흑백사진들, 진한 커피향과 잔잔한 음악까지. 마치 영화 속으로 빠져들어간 기분이다.
서너명의 중년남성들이 편안한 웃음으로 관객을 맞이한다. 도시의 일반극장에선 보기 힘든 스태프 구성이다. 그리고 한 남자가 친절하게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덥수룩한 수염, 순수하고 털털한 인상이 섬 촌장님 같다. 그가 바로 DRFA 365 예술극장의 조나단 유(본명 유상욱, 51세) 대표다.
“누구신가요?” 첫 질문에, 0.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라이터이자 동검도 DRFA 365 예술극장 대표인 조나단 유입니다. ” 당당히 자신을 표현하는 모습은 외모와 전혀 다른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극장 안 카페에서 동검도에 극장을 지은 이유부터 오직 영화 한 길을 걸어온 삶, 그리고 新청춘(중년)들과 나누고픈 영화 & 힐링문화에 대한 생각까지 그와의 담론이 시작됐다.
#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넣다
이 극장이 생긴 취지는 소중한 세계 고전영화, 제3세계, 예술영화의 복원과 상영을 위해서라 했다. 1999년 DRFA(Digital Remastering Film Archive)란 동호회 형식으로 시작되었다.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보여줄 좋은 작품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조나단 유 시나리오 스쿨과 DRFA 회원들은 영화 복원과 함께 일반인들에게 공유할 극장 마련에 힘썼다 . 그리고 마침내 2년여 준비 끝에 접근성 좋고, 천혜자연의 동검도에 DRFA 365 예술극장을 설립하게 됐다.
유 감독은 시나리오 스쿨을 함께 운영 중이다. 젊은 작가들은 물론 작가를 꿈꿨던 시니어들에게도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모티브를 제공하고, 작품과 감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계속해서 작가들을 발굴하고, 좋은 작품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해외 희귀 작품을 번역하고, 본인 스스로도 30년째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뼛속까지 영화인이자 시나리오 작가이다.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사장될 뻔한 훌륭한 고전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세상에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한다. 우리는 그로 인해 좋은 영화를 경험할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됐다. 영화 저작권을 15000편이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수익이 생길 때마다 또다시 영화 번역과 디지털 복원, 저작권 구입 등 재투
자하는 그의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 중년의 청춘 감성 일깨워
동검도 DRFA 365 예술극장의 주 관객층은 50~60대 중년여성층이다. 최근 들어 10대 학생들부터 70대 장년까지 남녀노소 관객층이 다양해졌다. 그래도 이곳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꽃누나 언니들’이다. 그 이유는 중년 감성을 깨워주는 유 감독만의 섬세함과 배려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는 영화 전문가로 영화와 시나리오 외에도 재주가 참 많다.
하루 두 번 영화가 시작되기 전 직접 피아노를 연주한다. 영화 OST나 상영될 영화와 관련 음악을 선곡해 연주하고, 영화배경과 감독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가 시작 전부터 이미 중년 여성관객들로 하여금 젊은 날의 추억과 로맨스로 빠져들게 한다.
피아노 선율은 영화에 몰입도를 높여주고, 닫혔던 마음을 열어주는 사랑의 묘약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유 감독은 영화와 음악 외에도 음식학-사상체질학 등에도 조예가 깊다. 관객들 하나하나의 모습을 살피고, 각 개인에 체질에 맞는 차나 음식을 권한다. 관객들은 영화를 본 이후 영화 주제 뿐 아니라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커피,영화, 소통을 즐기면 저절로 행복한 표정이 된다.
1. 김미숙 객원기자와 영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조나단 유 감독
2. 갯벌 풍경이 내려다 보이는 극장 2층의 카페 공간 내부
3. 1층 벽면, ‘피아노 치는 조나단 유’ 감독의 흑백사진이 걸려있다.
4. 1층 ‘조나단의 커피’ 내부. 커피 한 잔 가격으로 영화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5. ‘DRFA 365 예술극장 &조나단의 커피’ 입간판 및 극장 건물 외관 밤 풍경
6. 1층 벽 한 켠에 걸려 있는 조나단 유 감독의 환영 인사말
7. 조나단 유 감독이 영화 상영 전에 작품 배경, 감독성향, 제작 배경 등 영화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한편 “인간의 삶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 성경을 51번 읽었는데 매번 새롭더라구요.”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다양한 삶의 모습에 관심이 많다. 자신의 콘텐츠와 장점을 최대한 발휘해 서비스하는 모습 역시 그의 또 다른 삶의 모습이기도 했다. 관객들은 동검도에서 그의 섬세한 배려와 서비스 정신이 영화의 감동과 함께 깊은 인간적인 여운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동검도를 다시 찾는 이유 중에 하나가 될 정도로 말이다.
# 영화와 공유로 새로운 문화 창조
오후 3시. 오후 6시 하루 두 번 영화가 상영된다. 해질녁 동검도 갯벌의 노을 빛에 젖어 있노라면, 피아노 연주가 들리고, 영화 시작을 알린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60~70대 여성관객들이 많았던 날. 노년이지만 여전히 청춘인 두 자매의 로맨스를 그린 ‘라벤더의 여인들(영국,2004)’이 상영됐다. 누가봐도 관객들의 취향, 스타일을 고려한 영화다.
영화가 끝난 후, 자리를 쉽게 뜨지 못하는 사람, 잃었던 감성을 다시 찾은 느낌이라며 유 감독에게 감사를 전하는 사람, 다섯 번 봐도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답다는 사람 등 어느 대형영화관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 목격됐다. 모두가 영화 주인공들처럼 소녀 감성으로 돌아간 청춘들의 모습이었다.
유 감독은 DRFA 365 예술극장은 35개 좌석의 소극장이지만, 최고의 사운드 시설을 설치했다고 했다. 영화를 최상의 컨티션으로 즐길 수 있도록 디자인하고 프로그래밍한다며. ‘영화’를 매개체로 공감할 수 있는 소통공간이 영화인으로써 늘어나길 바란다고 했다.
“이제 이 공간은 더 이상 제가 주인이 아닙니다. 관객이 6000원을 내고 6000원의 가치를 함께 소유하고 있는 공유 공간이 됐습니다.”
개관 후 꾸준히 관객들을 통해 입소문이 나면서 종교, 여성, 다문화가정 단체 등 관객층도 다양해졌다. 관객 다양화는 극장의 활용도 마저 바꿔놓았다고 한다. 심야영화제, 여성영화제, 이달의 감독전 등 유감독이 기획하는 프로그램 외에도 관객 스스로 영화를 매개로 하는 힐링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안한다. 극장 이상의 놀이터, 새로운 문화가 꽃피는 ‘아이디어 창조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도시의 기업형 예술극장도 경영상 어려움으로 사라지는 이때, 문화 소외지인 섬에 있는 예술극장 관객수와 프로그램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 꿈과 낭만이 흐르는 섬, 동검도
마지막으로, 그에게 꿈을 물었다. “동검도에 제2예술극장과 작가들을 위한 창작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지금처럼 영화로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봉사하며 살고싶은 게 개인적인 비전입니다.”
이것은 유 감독만의 꿈은 아닐 게다. 요즘처럼 몇 백만이 들었는가가 우선시되는 시대. 극장을 나오면 제목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상업영화 홍수 속에서 우직하게 영화의 작품성과 순기능을 지키는 DRFA 365예술극장의 자원봉사자들, 후원자들 그리고 영화를 사랑하는 순수 관객 모두의 꿈일 것이다.
동검도에는 꿈이 흐른다. 커피 한 잔 가격으로 영화는 물론 5000만평의 갯벌, 억새풀밭, 하와이안 코나 커피, 백만불짜리 산소를 선물 받는다. 잊혀질 예술영화를 살리고, 잃었던 청춘의 낭만이 되살아나 더욱 행복하다.
아름다운 영화의 섬 동검도로 좋은 사람들과 시네마기행을 떠나보자. 동검도 영화 인생, 조나단 유 감독이 당신의 영화여행의 매력적인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
◆영화감독·시나리오 작가 조나단 유
MBC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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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2년 연속 영진위
시나리오 공모전 대상
백상예술대상
시나리오상 수상
대종상
시나리오상 수상
◆김미숙/브라보 마이 라이프 객원기자-퍼스널 브랜딩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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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딩 컨설턴트, 강사, 카피라이터, 커리어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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