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을 시작한 시니어를 수소문하던 중에 지인에게 지오아재를 소개받았다. 초겨울 날씨로 접어든 12월 초, 방배동에 위치한 연습실을 방문했다. 평소에는 주 2회 하루 3시간, 공연이 있으면 3~4회 연습을 한다고 한다. 상상했던 것보다 좁고 허름한 연습실이었다. 지오아재는 동년기자 두 명의 방문을 환영하는 의미로 캐럴을 화음에 맞춰 불러줬다.
지오아재(G.O.Age)는 노익장의 ‘그린 올드 에이지(Green Old Age)’를 독일식으로 발음한 이름이다. 구성원은 테너 박승호(76)와 이규대(67), 바리톤 주정서(67)와 손종열(65), 베이스 서준석(66)이다. 총 5명의 평균나이는 68.2세다. 지오아재는 그동안 KBS1 프로그램인 ‘인간극장’에도 소개됐고, 캠코(한국자산관리공사) 홍보대사로도 임명되는 등 매스컴도 좀 탔다. 음악으로 인생 2막을 시작한 할배돌에게 물었다.
Q. 어떤 목적으로 뭉치셨나요?
이규대 ‘평생 하고 싶어 하던 음악을 다시 한 번 해보자’ 하며 뭉쳤습니다. 열심히 사는 모습을 동년배에게 보여주면서 인생 2막의 삶에 대한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박승호 노래 잘하는 달란트를 활용해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나눠주면 좋겠습니다.
서준석청년과 시니어 간의 소통 역할을 담당하려고 합니다.
손종열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시니어도 프로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주정서 삶의 장르는 다양합니다. 음악은 인생의 한 장르에 불과합니다. 다른 분야에서도 인생 2막의 삶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주려 했습니다.
Q.어떤 과정을 통해 만나게 됐나요?
이규대 그룹 결성은 제가 생각한 일입니다. 고등학교 후배 손종열 씨가 아마추어 합창단 단장을 하고 있어요. 성가대 지휘를 45년간 할 정도로 음악에도 푹 빠져 있고요. 이 친구를 통해 파트별 대상자를 수소문했어요.
서준석 2016년 초부터 개별적으로 만나오다 그해 5월 다 같이 만나 그룹을 만들었습니다.
이규대 우리는 처음부터 프로 못지않았습니다. 음악 전공자는 아니지만 베이스 서준석 씨, 퍼스트 테너 박승호 씨 등 구성원의 재능이 많습니다. 진작 만났다면 큰 성공을 거두었을 거예요.
리더 이규대 씨는 1980년대 중반까지 활동한 7080세대 가수다. 다른 구성원은 프로는 아니지만 수십 년간 합창단과 성가대 활동을 해왔고 개인 음반을 낼 정도로 내공이 만만치 않다. 특히 이규대 씨가 작사·작곡이 가능하다는 게 그룹의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체력도 예전 같지 않고 기억력도 나빠져 가사를 외우는 데 시간이 많이 든다. 집중력과 순발력도 떨어지고 호흡도 짧아져 박자에 대한 감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연습을 많이 해도 며칠만 안 하면 금세 잊어버리는 율동은 소화할 수 있는 신체나이가 아니라 포기했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Q.그러면 할배돌은 포기하신 건가요?
이규대반드시 춤이 있어야 아이돌, 아니 할배돌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노래로 경쟁하기로 했습니다.
Q.음악을 하는 요즘, 행복하십니까?
서준석 이 나이에 할 일이 있으면 행복한 거죠.
주정서 가끔 저희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분이 있어 살짝살짝 연예인이 된 기분도 느낍니다.
박승호 그토록 하고 싶었던 노래를 하는데 당연히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지난날은 부도수표, 다가올 미래는 약속어음, 현재는 가장 확실한 현금입니다.
이규대 중학생도 알아보고 인사하니 기분이 좋네요.
주위에서 어떻게 바라보나요?
이규대 30여 년 만에 음악을 다시 해보겠다고 하니까 아내가 처음에는 사고만 치지 말라고 했어요. 2017년 첫 앨범을 낸 후 저러다 그만두겠지 했는데 포기하지 않고 1년 넘게 꾸준히 하니까 이제는 아내가 인정해주고 지원도 합니다.
손종열 친구들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저희들을 부러워합니다.
서준석 홍대 앞에서 버스킹할 때 젊은이들이 지오아재의 음악에 관심을 가져줘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제 손주 녀석들은 나이 들면 할아버지처럼 살고 싶다고 합니다.(웃음)
Q.추구하는 음악 장르는요?
이규대 솔직히 모든 장르를 다 해보고 싶지만 경쾌하면서도 삶의 진리, 사랑의 힘 같은 철학적 의미를 전해주는 음악을 선호합니다.
서준석 시니어에게 용기를 주듯 젊은이들에게도 음악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습니다. 공연을 보고 나온 한 젊은이가 슬그머니 다가와 “할아버지, 제가 나중에 할아버지 나이가 되었을 때 이런 공연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을 때 정말 행복했습니다.
지오아재는 ‘지금 여기’, ‘이제야 사랑을’, ‘그것이 내 인생’, ‘사랑별곡’ 4곡을 발표했다. 대표곡으로 ‘지금 여기’를 꼽는다. ‘지금 여기(Here And Now)’는 높고 낮은 음의 영역을 오가며 랩, 국악 장르를 포괄하는 경쾌한 리듬의 노래다. 신나게 부를 수 있는 곡이긴 하지만 시니어가 따라 부르기에는 다소 어렵고 오히려 젊은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곡으로서 의미가 있다. 가사에는 과거의 성공과 실패보다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철학적 의미를 담았다.
Q.첫 무대는 어떠했나요?
이규대 야심차게 준비한 ‘지금 여기’는 리듬도 빠르고 랩과 안무까지 완벽하게 소화해야 하는 곡인데 연습을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자를 살짝 놓치면서 음정까지 불안했죠. 그 순간은 반주 소리도 잘 안 들렸어요. 눈앞이 깜깜해지더라고요.
주정서 정말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Q.지금은 어떠신가요?
서준석 미꾸라지가 용 됐지요. 무대에 익숙해져 연주소리는 물론 청중들의 반응도 다 보입니다. 40여 회 공연을 하다 보니 무대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매니저나 기획사는 있나요?
이규대요즘은 매니저 대신 매니지먼트 기획사를 활용하는 추세입니다. 기획사와 일하려면 수입이 많거나 재정적 여유가 있거나 특출나게 잘나가는 경우에나 가능하지요. 아직 그럴 단계는 아닙니다. 대신 자체 기획사가 있습니다.
서준석 이규대 씨가 ‘예소리네’를 만들었습니다. 이규대 씨의 막내딸 이자람의 예명인 예솔, 그러니까 ‘예솔이네’를 소리 나는 대로 발음한 이름입니다. 이자람은 국악인으로 활동 중입니다.
Q.국악 리듬을 곡에 넣으셨더군요?
이규대 전통 리듬이 있어야 서양 음악인들이 관심을 보입니다. 서양 음악은 아무리 잘해도 별 반응이 없는데 국악을 연주하면 금세 빠져듭니다. 세계를 상대로 활동하려면 국악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봤습니다. 딸이 국악을 전공해서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Q.경비 조달은 어떻게 하시나요?
이규대 첫 앨범 제작비는 제가 댔고 활동비는 N분의 1로 부담합니다. 출연료를 받으면 반은 앨범 제작비를 공제하고 나머지는 공동 경비로 사용합니다. 많이 벌면 좋겠지만 아직 손익분기점에도 이르지 못했어요. 그래도 수입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Q.향후 계획을 말씀해주시겠어요?
이규대 올해 두 번째 앨범을 낼 계획입니다. 틈틈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해외 진출 계획도 있나요?
서준석 조심스럽게 계획하고 있습니다. 언어가 달라도 음악으로는 통할 수 있으니까, 전 세계 시니어와 소통을 해보고 싶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에 K-POP만 있는 게 아니라 K-GRAND POP도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이규대 해외 진출을 대비해 ‘지금 여기’를 영어와 일어로 번역해놨습니다.
2018년 6월, 홍콩 BTV가 기획한 ‘120세 기획 프로그램’에 지오아재의 활동이 소개됐다. 이 프로그램이 한국, 일본, 미국 등지에서 인생 2막의 삶을 사는 주인공을 촬영해 방영하는데, 한국에서는 지오아재가 출연했다. 지오아재는 기획사도 없고 연습실도 협소하고 수입도 많지 않지만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어 성공이 기대된다. 음악을 통해 시니어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주고 젊은이들에게는 닮고 싶은 시니어 모델이 되기를 희망한다.
Q.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이규대 시니어 모임에 많이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재능기부도 하고 싶고요. 무료공연도 가능하니 기회가 되는 대로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현재 노인대학, 복지관 등에서 재능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캠코 홍보대사로도 임명되었습니다. 캠코는 1000만 원 이하의 장기 소액 연체자를 위한 구제제도입니다. 이 제도를 활용해 인생 2막을 잘 기획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정서 나이 먹은 사람도 살아가는 의미가 남다르다고 생각해요. 앞날이 창창한 젊은 사람의 인생도 중요하지만 나이 든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죽을 때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자신 또는 남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규대 대부분의 방송이 20대에 편중되어 있어 시니어가 시청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별로 없습니다. 그나마 볼 수 있는 장수무대도 트로트나 뽕짝 일색입니다. 통기타 치고 팝송 부르던 세대를 만족시키는 무대가 없어 아쉽습니다.
손종열 가곡에 관심이 많아 가곡 부르기 모임을 인사동에서 매달 한 번씩 갖고 있습니다.
서준석 시니어 잡지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있는데 시니어를 위한 음악은 없습니다. 청춘합창단도 1회 행사로 끝났습니다. 낙원상가 4층에 있는 낭만극장에서 박 대표가 ‘딜라일라’를 부르면 60대 이상 청중이 모두 따라 부른답니다.
주정서 시니어의 반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춤추고 떼창하고 싶다”는 구호도 봤습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본 것처럼 시니어 떼창(합창) 모임이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서대문 문화일보 지하 홀에서도 시니어가 모여 함께 노래를 하고, 금요일과 토요일 그리고 일요일이 되면 낙원상가 4층 낭만극장에서도 음악 모임을 합니다. 시니어를 위한 무대에 다들 굶주려 있는 겁니다.
박승호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시니어 음악 무대 마련에도 힘써주셨으면 합니다.
과거의 모습
남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무척 힘들고 괴로웠다.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하고 끙끙 앓던 가슴앓이였다. 이상과 현실이 따라주지 않을 때 느끼는 좌절감은 쉽게 형언할 수 없다. 잘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때는 고통도 따른다.
어린 시절 나는 아나운서처럼 말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남 앞에 서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방망이질하듯 뛰었다. 좋은 조건에 타고난 끼와 재능을 가진 사람을 볼 때는 더 위축됐다. 학창 시절을 지나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내게는 늘 극복해야 할 두려움이 있었다.
자신과의 싸움
나 자신을 이기기 위해 크리스토퍼 리더십코스교육과정에 등록했다. 이 과정이 좋은 점은 강사들이 모두 무료 봉사를 해서 최소한의 운영비를 제외하고는 큰돈이 들지 않았다. 나도 교육을 마치고 강사로 5년을 봉사했다. 자신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맞닥뜨리는 것이다. 수영이나 자전거는 이론으로만 배우면 쓸모가 없다. 직접 물에 들어가거나 자전거에 올라 몸소 체험해야 한다. 정신적인 힘도 길러야 한다. 늙은 인디언 추장이 손자와 나눴다는 다음의 일화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우리 마음속에서는 늘 두 늑대 간의 큰 싸움이 일어난단다. 한 마리의 늑대는 악한 놈으로 열등감, 화, 질투, 슬픔, 죄의식 같은 감정으로 가득하고 또 한 마리의 늑대는 선한 놈으로 기쁨, 평안, 소망, 친절함을 잃지 않지.”
“싸우면 어떤 늑대가 이겨요?”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기지.”
마음속 불안과 용기란 놈도 이와 마찬가지다.
심리학에서는 지나치게 자신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을 ‘과열반사’, ‘과열의도’라 표현하는데 이는 모두 신경증의 원인이 되어 오히려 자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설화에 “너는 어떤 순서로 다리를 움직이느냐?”는 질문을 받은 지네가 그 문제에 집중하다가 전혀 다리를 움직이지 못해 굶어 죽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래서 정신과에서는 사고 중단, 반성 제거라는 치료법을 통해 지나치게 자기 문제에 집착하는 행위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새로운 삶 시작
실수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속에 갇히게 되면 점점 그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실수 좀 하면 어때, 설마 죽기야 하겠어?”라는 용기를 가지고 과감하게 부딪쳐봐야 한다. 나는 리더십코스교육과정을 끝내고 군부대로 재능기부 강의를 하러 다녔다. 군에는 관심병사도 많고 이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장교도 많다. 내가 이들의 인성교육을 맡아 2015년부터 지금까지 봉사한 시간이 200시간 가까이 된다.
서두에서 밝혔듯 남 앞에 서는 게 두려웠던 내가 오늘날 강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직접 몸을 던지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목표를 이루려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강사는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이다.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PPT 작성법도 익혀야 한다. 또 다른 사람 강의도 많이 들어봐야 한다. 나는 강의가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다니며 들었다. 재미도 있고 강의 기법 등 배울 것이 많았다.
지금도 현장에 가 보면 많은 학생과 청소년이 발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리 교육이 입시 위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발표나 토론 문화에 익숙지 않다. 나는 청소년들이 좀 더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발표하고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자신감과 발표력을 증진시켜주는 일을 하고 싶다. 내가 비록 명강사는 아니지만, 과거의 나를 이기고 여기까지 온 것은 대단한 일이다.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물론 앞으로도 자기계발을 꾸준히 해 명품 강사로 거듭나고 싶다. 군부대 강의도 기회가 되는 대로 적극 참여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도전하는 중이다.
2018년이 저물어가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 중 하나는 전방위적인 국방 개혁이다. 북한과의 관계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는 현재, 군대의 활용 또한 과거와는 다른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 속에서 국가보훈산업 또한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국가보훈과 사회발전을 위한 남다른 사명감으로 1994년 ㈜상훈유통을 창업한 후 24년 동안 지속성장을 실현하며 선진유통 전문기업으로 발전시킨 이현옥 회장이 올해 팔순을 맞았다. 지난 20여 년에 걸친 보훈산업의 산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를 만나 기업의 성공 스토리와 경영 철학에 대한 소신을 들어봤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창업’일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 러시가 걷잡을 수 없이 가속화되고, 일자리 부족으로 인한 청년층의 취업 실패가 누적되면서 모든 세대가 너도나도 창업에 뛰어들고 있다. 그러나 창업 후 3년 이상 존속하는 기업의 수는 매우 적다. 또한 현상 유지 수준을 넘어 지속성장을 이루는 기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1994년 상훈유통을 창업해 고용 창출과 국가 세수 증대에 기여하며 24년 동안 꾸준한 성장을 실현한 이현옥 회장은 자신의 업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태어나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보내고 인생 말년에 이르러 거대한 전환기의 기업 오너로서 사회적 역할을 다하고 있는 그는 창업을 생각하는 많은 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무모한 도전, 과감한 결단
“창업하기 전까지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에서 20여 년간 재직하며 국가 유공자들에 대한 지원 사업을 추진했는데, 정부의 보훈복지 예산과 사회적 관심 부족 등으로 애로사항이 많았습니다. 특히 다수의 국가 유공자가 정부 복지지원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현실이 늘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을 위해 개인적으로라도 무언가 도움을 드릴 만한 일을 할 수 없을까 고민하던 중 마침 기회가 주어져 KT&G 연관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이 회장은 사업 초기에는 자본이 부족해 살고 있던 아파트까지 처분했다고 한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모두가 말렸다. 그러나 이 회장은 보훈공단에서 관련 사업을 추진하며 쌓은 경험과 노하우, 신뢰기반 등을 감안할 때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실패할지라도 국가와 사회를 위한 뜻 있는 결단이었던 만큼 큰 후회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것이 현재의 강소기업 상훈유통이라는 보답으로 드러난 셈이다.
20여 년간 보훈단체에서 공직생활을 한 이 회장은 상훈유통을 세울 때 국가보훈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 일을 진행했다. 상훈유통은 SOFA (Status of Forces Agreement) 면세품 양도 양수 사업, 한국인삼공사 정관장 홍삼 제품 및 홍삼 음료 판매 사업 등을 갖고 있으며 상훈영농조합법인을 운영하는 기업이다.
전문가를 넘어 멀티 플레이어가 되라
이 회장은 창업에 뛰어드는 사람들에게 ‘멀티 플레이어’가 되라고 조언한다. 전문가 역량만으로는 기업을 이끌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기업이란 본질적으로 수익 창출을 위한 조직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마도 수익을 창출하는 일, 즉 돈을 버는 일일 것입니다. 경영자는 이 어려운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일반 직장인이라면 자신이 맡은 일 한 가지만 잘해도 조직에서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지만 기업을 이끄는 경영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남다른 비즈니스 감각과 리더십, 통찰력, 판단력을 지녀야 함은 물론 생산, 영업, 관리, 고객업무 등 기업 활동의 전 분야를 폭넓게 알고 이끌어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하면 성공을 거두기 어렵습니다.”
그는 기업이 발전할 수 있는 비결이란 “결국 고객이 필요로 하는 좋은 제품을 편리한 시스템을 통해 적정 가격에 공급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신뢰’라는 가치덕목 또한 강조했다. 기업이 고객들에게 우수한 제품과 서비스를 지속적, 안정적으로 공급할 것이라는 신뢰감을 심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기본 중의 기본에 대한 이야기들이지만 이 기본을 지키는 게 어려운 세상이다. 특히 보훈산업이라는 보수적인 분야에서 이러한 기본 가치들은 다른 산업보다 더 강조되고 지켜져야 한다.
돌발적인 외부 위기를 이겨내는 맷집
물론 상훈유통을 경영하면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관리 가능한 내부 요인보다는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치명적인 외부 요인이 기업의 미래를 위태롭게 만든다. 현재 세계 경제는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무역전쟁의 장기화로 그야말로 시계 제로의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러한 돌발 상황을 견뎌낼 수 있는 맷집이야말로 기업의 역량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닐까. 이 회장이 그 어려운 길을 돌파한 것 또한 군인 정신을 연상하게 하는 맷집이었다. 베트남전에서 하사로 참전했던 그의 경력도 무관치 않아 보였다.
“창업 후 1990년대 말 외환위기와 2000년대 후반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관련 정책과 제도 등의 변화로 몇 차례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기업이 외부 환경 변화로 어려움을 겪을 때 이를 어떠한 노력과 방법을 통해 타개, 극복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관건입니다. 제 경우에는 그때마다 고객과 직원들, 평소 성원해주신 주변 분들을 생각하며 이들에게만큼은 절대 실망을 주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그리고 이분들의 기대와 성원에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는 각오로 어려움을 참고 이겨냈습니다.”
군 관련 사업을 하는 만큼 정치적 부침에 따른 위기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몇 해 전에는 비즈니스와 관련해 모 기관에서 불거진 사건 때문에 자택 압수수색을 받기도 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조사관들 때문에 가족들이 놀랐음은 당연했다. 그러나 놀란 것은 조사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집안 살림이 너무 검소했고 조사를 거듭해도 문제가 발견되지 않아서 조사관들이 오히려 당황했던 것이다.
기업은 내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
온갖 어려움들을 견뎌내며 아직 현역으로 상훈유통을 진두지휘하는 이 회장은 무조건 기업 규모를 크게 키우는 일은 지양한다고 밝혔다. 이는 미래 상훈유통의 청사진이기도 하다.
“대기업이기보다는 오히려 강소기업, 또는 내실 있는 중견기업이 더 좋은 점이 많습니다. 특히 저는 상훈유통이 일본이나 유럽 기업들처럼 후세에까지 기업의 전통과 문화가 길이 이어지는 장인기업, 장수기업이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무리한 욕심을 경계, 절제하면서 내실경영, 안정경영 위주의 경영전략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회장이 바라는 상훈유통의 미래는 내실과 안정 기반을 갖춘 수성(守成)의 역사다. 사업 프로세스의 지속적 혁신, 전문 인재의 양성, 시장 및 고객다각화 등 가진 것을 전제로 차분하게 길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그의 생각은 사회를 향한 기여로도 이어지고 있다.
나눔을 통해 더불어 느끼는 행복
상훈유통의 시작이 국가 유공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세워진 만큼, 이 회장은 그동안 사회공헌 활동에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120억 원이 넘는 금액을 사회에 내놓은 이 회장은 자신의 막대한 기부활동에 대해 분명한 논리를 밝혔다.
“혹자는 기업의 사회적 기여 역할에 대해 ‘결과적 기여’, 즉 기업이 지속적인 사업으로 고용과 세수 증대 등에 기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에 더해 ‘의도적 기여’ 역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 기여만으로는 그 파급 효과가 느리고 수혜 범위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회장은 사회 각계에 대한 자신의 꾸준한 기부는 특별히 좋은 일을 한다기보다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라 생각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기업은 개인의 소유가 아닙니다. 기업이 추구해 달성하는 수익은 결국 사회로부터 창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눔과 상생의 철학으로 사업 수익의 일정 부분을 사회로 환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이를 어떤 방식으로 어느 분야에 환원할 것인가는 기업인들 각자가 판단할 몫입니다. 제 경우에는 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국가 유공자분들께 도움을 드리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고 이 분야의 지원활동을 꾸준히 실천해왔습니다.”
인재 놓치지 말 것
그는 팔순의 나이이지만 회사의 미래를 위한 성장동력을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최근 이 회장이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은 사내 인재 양성이다. 이를 위해 상훈유통은 ‘공익 가치를 창출하는 선진유통 전문기업’이라는 비전을 정립했다. 회사의 미래를 이끌어갈 차세대 인재는 이 비전에 기준해 선정되고 육성될 예정이다. 또한 미래 인재의 육성과 함께 회사 초창기에 입사해 아직까지 근무하는 장기근속 직원들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평소 충효사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회장은 가족애와 효의 모범을 보인직원들에게 특별휴가와 가족여행 전액을 지원하는 등 효 사상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또 신의를 중시해 한 번 인연을 맺은 사람과는 끝까지 교류를 이어간다. 일자리가 없는 사람에게는 알맞은 직장을 소개해주고, 결혼을 못한 사람에게 중매를 서고, 고충이 많은 사람 이야기에 귀를 내어주는 등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선뜻 나서서 기어이 해줘야만 마음이 편안해진다. 천성적으로 정이 참 많은 사람이다.
주변에서는 이 회장이 아무도 모르게 사람들을 도와주고 한결같은 자세로 보훈정신을 되새기고 받들어온 CEO라고 입을 모은다.
팔순의 나이에도 검은 머리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이 회장은 칠순에 골프를 시작할 정도로 그야말로 만년 청춘이다.
“바빠봐, 바쁘다 보면 늙을 시간도 없어요. 가는데 순서없고 빈손으로 다 가는거지. 일을 계속해야 늙지 않아요.”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올곧은 마인드가 우리 독자들에도 훈훈한 미담이 되길 바라면서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 회장께 올해가 가기 전에 뜨끈한 생태찌개 한 그릇 대접하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다양한 캘리그라피 작품과 마주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손글씨를 전문으로 하는 캘리그라퍼가 새로운 직업으로 탄생했다.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어 새로운 취미활동으로도 인기라는 캘리그라피를 김수영(66), 김종억(66) 동년기자가 배워봤다.
촬영협조 한국캘리그라피협회
서예와 비슷한 듯 다른 캘리그라피
캘리그라피(Calligraphy)는 그리스어 kallos(아름다움)와 graphy(쓰기)의 합성어로 ‘글이 가지고 있는 뜻에 맞게 아름답게 쓰다’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다. 쉽게 말해 ‘예쁘게 쓴 손글씨’라고 이해하면 된다. 간혹 캘리그라피를 서예와 혼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둘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특징을 가진다. 그렇다면 서예와 켈리그라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서예는 점과 선, 먹의 농담(濃淡), 문자 상호간의 조형미를 통해 완성되고 집필법, 완법 등의 규칙이 정해져 있다면, 캘리그라피는 기본 원리는 서예와 같지만 보다 자유로운 방식으로 글씨에 감정과 생각, 기분 등을 표현한 것이다.
한국캘리그라피협회 유현덕 회장은 “‘풍선껌’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뾰족뾰족한 글씨체보다 동글동글한 글씨체가 어울리듯 단어 분위기에 맞는 개성 있는 글씨체로 생동감을 살려 글씨를 표현하는 게 캘리그라피”라고 설명했다.
김수영 동년기자
처음엔 느낌을 담아서 글씨를 쓰라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럴 땐 단어를 입 밖으로 소리 낸 뒤 써보라는 선생님의 조언을 듣고 따라 해보니 효과가 있었다. 글씨에 강, 약을 표현했을 때 그 느낌이 달라진다는 점이 신기했다.
김종억 동년기자
솔직히 캘리그라피란 용어가 있는지 잘 몰랐다. 단순히 ‘예쁜 글씨네’, ‘잘 썼네’라고만 생각했던 글씨체들이 캘리그라피였다니! 글씨를 쓴다는 점에서는 서예와 다르지 않았지만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캘리그라피의 다양한 활용
개성과 핸드메이드를 선호하는 현시대에 캘리그라피는 새로운 트렌드로 주목받고 있으며 그 활용 범위도 점점 넓어지고 있다. 기업의 로고, 영화 포스터, 간판 등 폭넓은 시장에서 쉽게 볼 수 있으며 대표적인 예로 소주 ‘처음처럼’의 상표가 있다. 이처럼 캘리그라피의 사용이 대중화하면서 캘리그라퍼, 캘리그라피 자격증, 학원 등이 생겨났다. 유 회장은 “기본부터 다양한 선을 그리는 방법까지 꾸준한 연습이 중요하다”며 “최소 일주일에 한 번씩, 세 시간 이상 투자하는 것을 권장한다”고 조언했다. 캘리그라피를 배웠다면 단순히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엽서, 부채, 머그잔 등 일상 소품에 써넣어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해보는 것도 좋겠다.
김수영 동년기자
집 근처 문화센터에서 캘리그라피 교육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인터넷에 캘리그라피를 검색하면 수많은 교육기관에 대한 정보가 나온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배울 수 있으니 시니어도 한번 도전해보는 것이 어떨까. 특히 한 번 배우면 집에서도 할 수 있어 매력적이다.
김종억 동년기자
시니어들이 캘리그라피 자격증을 취득하면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을 것 같다. 재능기부뿐만 아니라 손주들에게도 멋진 캘리그라피 솜씨를 한껏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더불어 창작활동도 함께하면 약간의 수익 창출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캘리그라피
캘리그라피는 누구나 관심만 있으면 도전할 만하다. 물론 악필이어도 상관없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는 처음 시작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붓 또는 붓펜, 먹, 머루, 종이만 준비하면 끝. 고가 제품의 붓은 필요없다. 초보자에게는 1만 원짜리 정도면 적당하다. 유 회장은 “고가 제품의 붓은 필요 없다. 초보자에게는 선의 질감 등 다양한 표현을 담을 수 있다”며 “캘리그라피를 심도 있게 배우고 싶다면 붓펜보다는 붓으로 시작하는 것을 권한다”고 조언했다. 캘리그라피는 붓의 종류, 잡는 방법, 종이 종류 등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연출할 수 있다. 처음 시작할 땐 다른 작품을 따라 쓰는 것보다는 선 긋기, 원 그리기 등의 반복 훈련을 통해 기본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연습이 끝나면 인사말, 계절과 관련한 문구, 명언 등을 따라 써보자. 보다 즐겁게 연습을 마무리할 수 있다.
김수영 동년기자
처음엔 재미있다기보다는 어렵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평소에 붓을 사용하지 않다 보니 붓을 먹에 적시는 것부터가 어색했다. 긴장해서인지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붓을 든 손이 바르르 떨리기도 했다. 천천히 써야 하는데 자꾸 마음이 앞서 선생님으로부터 ‘침착하게 쓰라’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성격이 급한 시니어는 캘리그라피를 통해 마음을 다스려봐도 좋겠다.
김종억 동년기자
2시간의 체험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처음에는 서예를 배운 경험이 있어 아주 쉬울 것으로 생각했지만, 시각적인 요소를 고민하다 보니 마음처럼 예쁘게 써지지 않았다. 그다음엔 선생님이 쓴 글씨를 따라 써봤는데 웬걸… 더 이상할 뿐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고 나만의 느낌을 담은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점점 모양을 잡아가더니 마지막엔 꽤 괜찮게 문장을 만들 수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지속적으로 배워보고 싶다.
이렇게 세상 편해 보이는 사람 또 없다. 웃는 인상은 기본이다. 모두를 향한 감사가 담긴 듯 등을 굽혀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인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몸짓, 평생 몸에 밴 버릇 같다. 누군가 말을 건네면 온화하게 웃고, 나직하게 말한다. 속 깊게 생각한 뒤 유쾌한 해답을 찾아주는 사람, 한정수 동년기자를 만났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명품 패널!
한정수 동년기자는 최근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네이버 채널 시니어 패널로 등장했다. 1기부터 쭉 동년기자로 다방면에 참여해왔는데 이번에는 영상 출연에 과감히 도전한 것이다. 전자 체온계 사용후기에서부터 신세대 음료 마시기, 다림질 사용기를 통해 적절한 입담과 친근한 표정으로 프로그램 중심을 잡았다. 촬영을 진행했던 후배 기자도 한정수 동년기자의 준비성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촬영하는 거 재미있었어요. 저는 뭐든 시작하기 전에 봐야 할 자료가 있으면 꼭 여러 번 챙겨보고 숙지합니다. 따로 관련 자료도 찾아보고, 다리미 촬영 전에는 아내에게 다림질 방법을 물어도 봤습니다. 뭔가 하나 발견했을 때의 희열, 저는 그런 준비단계가 좋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 나서서 강연을 하는 직업이 촬영 현장에서 제대로 먹혔다. 적당한 타이밍에 호응하고 질문하는 것이 베테랑 방송인만큼이나 능수능란했다. 나서지 않으면서도 옆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실력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나를 가만히 보니까 리더는 절대 아니고 뒤에서 누군가를 보듬어주는 역할이 더 맞더라고요. 어디를 가나 리더들은 많이 흘리고 다녀요. 리더가 놓치는 것을 주워 담는 역할, 목적 달성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거나 낙오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힘을 줘서 몰고 가는 역할이 저에게 맞습니다. 그래서 제 별명이 양치기견인 ‘보더콜리’입니다.”
봉사와 우연이 천명이 되다
올해 일흔두 살의 전문 강사 4년 차인 한정수 동년기자. 변화관리와 인간관계에 관한 주제로 주로 강연한다. 강연장에서 한정수 동년기자의 인기는 정말 남부럽지 않다. 강의가 끝나면 박수뿐만 아니라 사진 찍자고 다가오는 이들에, 명함을 요구하는 이도 많다.
“그런데 처음부터 전문 강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사료 사업을 하다가 정년퇴직한 이후 ‘뭘 하면서 살까’를 고민했습니다.”
은퇴자로서의 고민은 봉사활동을 하도록 이끌었고 스피치 학원으로까지 인도했다. 공부를 썩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기에 대중 앞에 서서 방향을 제시하는 선생으로서의 삶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정년퇴직과 함께 ‘경로자 우대카드’를 받아들고 나니 뭘 해야 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대부분의 은퇴자들은 앞으로의 진로를 생각하면서 뭘 배우고 싶어 합니다. 이런 고민으로 대한노인회에 전화를 걸었더니 집에서 가까운 경로당에 가서 봉사를 하라더군요.”
처음에는 성의 없는 답변에 할 말을 잃었다. 화를 누르고 생각해 얻은 결론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모르면 어린애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대한노인회의 조언대로 경로당에 가서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봉사하러 가니까 경로당 총무가 ‘할 짓이 없어서 젊은 놈이 경로당에 나오냐’고 언성을 높이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생각한 바가 있어서 경로당에 나간 거잖아요. 한 달 근무를 해보니 너무 열악하더라고요. 정부에서 한 달에 36만 원씩 10개월을 줘요. 그 돈으로 전기요금, 난방비 등을 다 해결해야 하니까요.”
경로당에는 58명의 어른이 계셨다. 이런저런 비용을 따져보니 매일 한 사람당 200원을 지원받는 셈이었다.
“안되겠다 싶어서 그 길로 경로당 근처의 절, 성당, 교회, 기업체를 찾아다녔어요. 한 달에 한끼 식사비만 기부해 달라고 했더니 어르신 인원이 너무 많아서 힘들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줄 수 있는 일정 금액을 통장에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3만 원, 5만 원 조금씩 통장에 쌓이기 시작했다. 어르신들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나들이도 다녔다. 멀리 갈 일이 생기면 간호사도 동행했다.
“다행히 다니면서 사고 한 번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소문이 났어요. 다른 경로당에서도 봉사를 해달라는 요청을 해왔어요. 그런데 문제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결국은 돈 달라는 말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걸 많은 사람 앞에서 하려니 말이 잘 안 나오는 거예요. 정식으로 한국언어문화원에 들어가서 스피치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6개월 과정 동안 정말 열심히 배웠다. 발성 연습을 할 때는 30분 동안 페트병에 담긴 물을 두 병이나 마셔댔다. 6개월 하고 났더니 물 한 모금 안 마시고도 목소리가 자유자재로 나왔다.
“첫 강의는 한국생산성본부에서 했습니다. 스물아홉 명 앞에서 강의했는데 28장 되는 자료를 정말 달달 외워 갔습니다. 첫 번째 강의에서 만족도 조사가 아주 높게 나왔습니다. 만점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일을 한다니까 고교 동창들은 희한하게 보더라고요. 어렸을 때 제가 싸움질은 좀 했는데 공부는 못했거든요.(웃음) 처음부터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4년째 하고 있고 지금은 한국언어문화원에서 학생들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린 학생이 아닌 강사들을 위한 ‘파워 스피치’ 수업을 진행한다고. 주어진 시간 안에 대중이 알아듣고 또 새길 수 있는 이야기를 펼치는 방법을 전수 중이다.
“리더 성향은 아니지만 내 것이라고 강하게 느끼는 것이 생기면 끝까지 남아서 결국은 뭔가 하더라고요. 강의를 4년째 하다 보니 어디서 강의 들은 누구라고 인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강의안 자료를 모아 공동저서로 2015년과 2017년 책을 냈다. 그리고 올해 단독으로 ‘우연은 천명이다’란 제목의 책을 준비 중이다.
“저는 공부 잘하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경로당에 갔다가 말을 못해서 스피치를 배우고 눈에 띄어서 강사로 활동하고… 아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늦게나마 공부를 시작해 참 재미를 느끼며 살고 있어요. 우연히 하나씩 주어진 것을 받아먹은 거죠. 그 결과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길로 들어섰습니다. 제가 태어난 소명은 아마 누구를 가르치고 도우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많이 배우고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는 한정수 동년기자. 그런데 꼭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란다. 뭔가 알아야 누군가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장애인 인권과 관련한 공부를 하고 있다.
“사회적인 편견도 있고 장애인 인권에 대한 인식 부족 탓에 약해지고 비굴해지고 스스로 아무것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장애인들이 꽤 있습니다. 그냥 놔두면 낙오되거나 자연 도태됩니다. 그들을 잘 추슬러 끝까지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앞으로의 인생은 이 방면에서 펼쳐보려고 해요.”
사랑하는 아내 이야기
인터뷰 중간중간 ‘아내’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우선 3년 전 아내의 친구들이 살고 있는 일산으로 집을 옮겼다고 했다.
“강남에 살 때 종종 아내의 친구들이 우리 집에 자주 찾아왔습니다. 아내랑 놀려고요. 그런데 어느 날 힘드니까 저희 부부더러 이사 오라고 하더군요. 아내 친구가 민낯에 슬리퍼 끌고 와서 냉장고 열어 집에서 먹을 거 먹고요. 아내도 외롭지 않고요.”
한정수 동년기자뿐 아니라 친구들까지 아내를 극진히 보살피는 듯했다. 물론 이유가 있었다.
“아내가 근무력증을 앓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치매로 오래 편찮으셨어요.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9년 만에 아내에게도 병마가 찾아왔어요. 그때는 집에 가면 다 환자였습니다. 제가 뭘 했겠어요? 재롱부려야죠. 웃고 싱거운 소리 하면서 맨날 즐겁게 웃었어요. 어느 날 아내가 너무 아파 제가 어머니를 일주일 모셔봤어요. 도저히 못 모시겠더라고요. 너무 힘들어서. 그때 되게 울었어. 이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젊은 시절 만나 6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돈 열심히 벌어야 했던 시절에는 남편 뒷바라지, 어머니 아프실 때는 병수발. 이제는 자신이 몸이 아파서 하고 싶은 것도 못해보고 나이 들어버린 사랑하는 아내다. 연애 때 얘기 좀 들려 달라 하니 바로 어제 얘기를 꺼내는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진다. 조계사에서 흑석동으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바래다주다 통금에 걸린 일화, 일이 바빠 못 갈 뻔했던 신혼여행을 친구 때문에 다녀왔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많은 것이 부족하던 시절 감내하면서 남편을 믿고 지지해준 멋진 여인이 한정수 동년기자의 아내였다.
“제가 지방으로 강의 다닐 때는 아내와 꼭 같이 다닌다고 했잖아요. 아내가 사실 멀미를 해서 버스를 못 타요. 그런데 남편이 운전하는 차는 참 잘 타요. 타자마자 양말 벗고 발도 올려놓고 등도 뒤로 하고 잠도 푹 잘 자고요. 비 오는 날 차 타는 걸 좋아하는데 차 안에서 비 내리는 걸 보는 모습이 꼭 가을날 코스모스를 감상하는 소녀처럼 예뻐요. 생각만 해도 좋아요. 요즘은 아내의 친구들 덕분에 마음이 편해요. 저녁때는 대신 제가 집에 일찍 들어가죠.”
어머니가 남기신 유산
“살아왔던 모든 게 다…. 제가 어디에 글을 써도 은퇴 전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아요. 너무 힘이 들어서요. 다음에 그 얘기로 책 하나 내려고요.(웃음)”
옛이야기 좀 들려 달라고 하니 눈빛이 흔들렸다. 긴 웃음이 깊은 한숨으로 느껴졌다. 1940년대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고 GDP 60달러 시대. 없어도 너무 없던 시절이었다고 운을 뗐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뇌출혈로 돌아가셨어요. 제가 다섯 남매의 장남인데 아버지 장례 다 지낼 때까지 눈물 한 방울 안 흘렸어요. 아버지가 굉장히 미웠어요. 갑자기 돌아가셨잖아요. 그때 딱 드는 생각이 ‘어떻게 하면 굶지 않나’였습니다. 가족들 굶기지 않으려고 안 해본 것이 없어요. 얼굴에 웃음기도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자꾸 저더러 웃으래요. 싫어도 어머니 때문에 입이라도 웃었어요.”
얼굴을 찡그리면 어머니가 역정을 내셨다. 어머니 앞에서만이라도 웃어보려 노력했다.
“어머니가 슬퍼하는 게 싫었어요. 힘들어도 싫어도 짜증이 나도 무조건 웃었습니다. 그게 지금까지 습관이 됐고 긍정적인 사고로 이어진 겁니다.”
어머니는 한정수 동년기자에게 호 하나를 지어주셨다고 했다. 덕강(㥁姜)이었다.
“어머니가 너는 복이 오는 걸 원하지 말고 덕을 쌓고 살라며 지어주셨습니다. 그분 생각에는 제가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살고 있고 또 그렇게 살아지고 있습니다.”
한정수 동년기자랑 마주하고 얘기하다 보니 집중해서 보게 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왼쪽 뺨의 주름이다. 팔자주름이 깊게 패이면 사나워 보인다지만 왼쪽 팔자주름의 의미는 남다르다. 기꺼이 웃을 때 코의 왼쪽 근육을, 인위적으로 웃을 때는 오른쪽 근육을 사용해 웃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의 얼굴을 볼 때 유심히 본다. 한정수 동년기자의 왼쪽 팔자주름은 길고 깊다. 오랜 세월 웃음을 잃지 않고 시대를 이겨내며 살아온 우리 세대 아버지의 얼굴이다. 문득 ‘미남 주름’이란 말이 생각났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려 노력했던 한정수 동년기자. 그의 인생에 박수를 보낸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시간 부자’라 말할 정도로 4차 산업혁명과 수명 연장으로 인간에게 한가한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 일주일에 52시간 일하는 제도가 시행됐다. 미래학자들은 머지않아 주 10시간 근로로 충분할 수 있다고 예측한다. 사람이 하던 일을 인공지능 로봇이나 3D프린터 등이 대신하는 환경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데 가장 힘든 것은 할 일이 없는 경우다. 한마디로 무료한 생활. 장수가 축복이 아닌 고통으로 바뀐다. “하루가 열흘 같아요~”라던 100세를 훨씬 넘긴 어느 장수 할머니의 이야기가 이해된다.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고 그러한 희망으로 산다. 날로 늘어가는 시간을 잘 활용할 일거리를 찾아야 하는 근본적 이유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시니어 세대는 대체로 생업에 매달렸고 은퇴 후 여가를 보내는 방법에 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 “놀아본 사람이 잘 논다”라는 말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낼 준비나 훈련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여가를 재미있게 보낼지에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나는 여가를 보내는 방법을 강의하는데 카메라, 특히 스마트폰 카메라를 이용한 사진 취미를 권유한다. 스마트폰 사진은 취미로 삼았을 때 따로 장비를 사지 않아 비용이 적게 들고 혼자서 잘 놀 수 있는 문화라는 장점이 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은 선명도나 화질 등이 카페, 블로그 등 SNS 활용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진은 이미 대중화해 남녀노소가 따로 없고 영상 언어로 실시간 활용할 수 있다. 때로는 자신이 담긴 사진이 필요할 때도 생긴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찍을 수 있으나 누군가 주변에 없으면 스스로 촬영해야 한다. 주로 카메라를 한 손에 들고 찍거나 셀카봉을 활용한다. 이 경우는 한계점이 있다. 자기 전신이나 특정 행동은 촬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때 스마트폰 카메라의 기능 중 ‘타이머 설정’으로 해결할 수 있다. 타이머는 셔터를 누르면 설정한 시간 후 촬영된다. 가령 카메라 설정에서 10초로 했을 때는 셔터를 누르고 10초 뒤 촬영되는 기능이다. 자기 전신이 잡힐 수 있는 범위에 구도를 잡고 적정한 위치에 스마트폰을 고정해 셔터를 누른 다음 그 위치로 10초 안에 이동하여 자세를 취하면 된다. 나는 거치대 대용으로 빨래집게를 활용한다. 스마트폰을 빨래집게로 집어 고정하면 훌륭한 거치대가 된다(사진 참조).
물론 삼각대를 활용하면 편리하나 일상에서 삼각대를 휴대하기가 쉽지 않다. 빨래집게는 호주머니나 손가방에 넣고 다니기 수월해 쓸모가 많다. 지난봄 초등학교 동창회모임으로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 있는 하동호에 다녀왔다. 친구들이 곤히 잠에 빠져 있는 이른 아침에 혼자서 하동호 언덕배기에서 사진 촬영 장면을 호수 풍광 속에 담았다. 타이머 기능과 빨래집게를 거치대로 사용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한가한 시간을 홀로 보내며 고향의 추억을 되새겨보았다.
여럿이 여행을 떠나 기념사진을 찍으면, 누군가 한 명은 셔터를 눌러야 하기에 모두 함께 담기는 쉽지 않다. 이때 역시 타이머 기능과 거치대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타이머 설정 법은 스마트폰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타이머를 사용한 후에는 다시 기본 설정으로 바꿔둘 필요가 있다. 특별한 순간을 바로 찍어야 하는데 타이머가 작동하면 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타이머 기능을 해제해 두는 것이 좋겠다.
사진은 예술의 한 분야다. 무엇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마음을 행복하게 한다. 피사체에 몰입하는 순간 때론 무아지경에 이른다. 촬영을 위한 여행도 곁들이면 더욱 좋다. 나아가 사진을 통해 재능기부도 할 수 있으니, 여가를 보내는 것 그 이상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글 김민혜 동년기자(한국농어촌공사 창녕지사)
자연친화적이고, 느린 삶에 대한 도시민의 소망은 최근 TV 프로그램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설마 귀촌생활을 낭만적으로만 생각하는 건 아니시겠지요? 보통 귀촌에 대한 의견을 부부에게 물으면, 여자 분이 반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구도 없고, 놀러갈 곳도 없는 산속 오지에서 어찌 살란 말이오?” 하고 말입니다. 100% 공감합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 마치 양념 반, 프라이드 반 치킨 같은 깨알 귀촌 Tip 8가지를 준비했습니다.
귀촌 전 작은 주말농장이라도 경험해보자
새싹이 쏙쏙 올라오면 가슴이 설레나요? 식물과도 대화를 할 수 있나요? 밭이나 창고에서 혼자 일할 때 몸은 힘들어도 마음의 평화를 느끼시나요?
교직을 은퇴하기 전부터 반쯤 귀촌생활을 해온, 창원시에 거주하는 J 씨는 일주일의 절반은 300평 블루베리 농장에서 생활합니다. 푸른 하늘을 보며 야외 테이블에 멍하니 누워 있거나, 책을 보거나, 잡초를 뽑습니다. 요즘도 ‘나만의 놀이터’에 흠뻑 빠져 있습니다. J 씨처럼 이런 생활이 자신과 궁합이 맞는지 미리 경험해보세요.
귀촌하면 농사일 말고도 재미있는 일이 많다
귀촌이라 해서 땡볕에 쭈그리고 앉아 일만 하지는 않습니다. 부부가 모두 비슷한 성향이기는 어렵습니다. 귀촌 후에 마을회관에서 ‘노래 강사’를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또 시골 분들과 소통이 잘되어 마을 이장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군청 인근 지역이라면 도시민의 선입견과 달리 각종 문화시설도 갖춰져 있고,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습니다. 수영장, 게이트볼장, 각종 문화수업, 도서관, 예술회관도 있습니다. 또 여러분의 재능기부가 필요한 곳도 많습니다.
귀촌인이 많은 동네를 선택하자
귀농·귀촌 후 농촌생활 적응에 실패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가시는 분도 제법 있습니다. 비슷한 삶의 철학과 생활 패턴을 가진 이웃을 만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대안으로 제안할 수 있는 방법이 읍·면 인근 지역 또는 귀농·귀촌인이 많은 동네, 마을과 조금은 단절된 장소도 좋겠지요. 물론 장점과 단점은 있습니다. 기우(杞憂)일 수도 있겠지만 참고해서 결정하세요.
사전에 관공서 등을 방문해 정보를 모으자
농촌 인구 감소에 따라 지방자치마다 귀농·귀촌인에 대한 각종 지원이 최근 많아졌습니다. 사전에 해당 지역 농업기술센터, 농지은행, 읍·면사무소, 귀농학교 등을 방문해 각종 지원 사업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아두면 도움이 됩니다.
농지원부를 미리 만들어두면 농지 구입 시 취·등록세 50%가 감면되기도 합니다. 운이 좋으면 농지은행, 마을 이장님 등을 통해 적당한 임차농지, 임대용 시골집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골집을 덜컥 사기 전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마을 분위기를 먼저 알아보면 좋습니다.
마을 특유의 공동체적 요소를 이해하자
농촌 특유의 마을 운영 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동네 길을 만들기 위해 주민들이 조금씩 개인 소유 토지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즉 사도가 제법 있습니다. 당신이 걷는 길이 개인 땅일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또한 동네의 수도시설은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걷어 설치하는 경우도 있으며, 마을회관도 일부 비용을 개인이 부담한 경우도 있습니다. 마을의 꽃과 나무도 동네 사람들의 수고로 이뤄진 것이고, 청소도 마을회의를 통해 날짜를 정한 뒤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합니다.
마을 행사에 기부 조금 한다고 생각하자
마을 운영 방식이 도시와 다르므로 동네 주민 입장에서는 이방인이 각종 수혜를 공짜로 받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약간은 조심스러운 제안이지만, 마을 행사가 있을 때 금전적 지원을 포함한 적합한 방법을 고려해 참여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얼마 전 시골에 사는 친구는 아버지에게 연락을 받았다 합니다. 마을회관 건립 기금을 좀 내면 안 되겠냐고 말입니다. 너도 어차피 귀농할 거 아니냐 하면서요. 친구는 싫다고 했대요. 그런데도 친구 아버지는 언젠간 귀농할 아들을 위해 기부를 조금 했다고 합니다.
음식, 정보, 대화, 잡일 등 많이 베풀자
시골에서의 삶은 좋은 말로 하면 ‘더불어’ 사는 것이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사생활’ 보호가 잘 안 되는 생활입니다. 시골에서는 누구네 집에 자가용이 들어가는지, 누구네 아들이 왔는지, 누가 생일인지, 누구의 제사인지 다 알아요. 모든 게 오픈되어 있기 때문이죠.
시골 분들은 또 이웃과 정말 많이 나눕니다. 당연하지요. 이웃이 어릴 적 친구, 친구 아버지 또는 어머니입니다. 음식을 만들면 조금 더 만들어서 옆집, 경로당에 나눠줍니다. 장날 읍내에 갈 때도 어르신들을 모시고 다닙니다. 핸드폰 사용법도 알려주고요. 누가 내 밭의 농작물 조금 따 먹는 거 개의치 마세요. 가능한 한 자주 베푸세요.
귀농·귀촌 목표를 명확히 하고, 철저히 준비하자
단순한 귀촌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귀농·귀촌이 목표인가요? 즉 농사를 지어서 생활비를 벌어야 하나요? 만약 수익 창출을 내야 된다면 철저히 준비하셔야 합니다. 어느 분야나 새로 시작한 일에서 바로 수익을 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농사일도 전문화·기계화되어 있습니다. 1000평 농사짓는 거나 5000평 농사짓는 거나 에너지는 비슷합니다. 기계화가 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량생산을 위한 농기계 가격은 정말 비쌉니다. 나중에 정산을 하면 손해가 날 수도 있습니다. 도시가 힘들어, 농사나 짓지 하는 생각으로 시골에 내려가면 힘들 수도 있습니다 .
단순한 귀촌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귀농·귀촌이 목표인가요? 즉 농사를 지어서 생활비를 벌어야 하나요? 만약 수익 창출을 내야 된다면 철저히 준비하셔야 합니다.
김일태(63) 화백에게 금화의 선두주자라는 말을 쓰니 바로 지적이 날아온다.
“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세계에 없습니다.”
유일무이. 특유의 단호한 목소리 톤에서 자신의 업에 대한 자부심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김 화백이 예술가로서의 높은 긍지가 느껴지는 이 문답 너머에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아시아인 최초로 영국 사치 갤러리에서 단독 전시를 하고 교황청 집무실에 그의 금화가 걸렸다. 또 아시아태평양브랜드재단의 100대 브랜드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력이 화려한 그의 작품 세계가 궁금했다. 그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봤다.
얼마 전 김일태 화백은 우리나라 개인 최초로 아시아태평양브랜드재단(APBF) 100대 브랜드에 선정됐다. 2015년 영국 런던에 있는 사치 갤러리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단독 전시회를 가진 이후 들려온 또 하나의 낭보다. 사치 갤러리는 현대미술 콜렉터 찰스 사치가 운영하는 갤러리로 영국 현대미술의 판도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다. 그곳에서 단독으로 전시회를 가진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하나의 고유한 브랜드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금화를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자 연구했던 지난 40여 년간의 노력을 보상받는 느낌입니다. 예술도 인류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증거이기도 하니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죠.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독창적인 발상으로 세계적으로 알리게 돼 더 기쁩니다.”
김 화백은 구스타프 클림트 이후 화폭에 금을 조금 붙이는 기법은 있었으나 캔버스 전체를 금으로 된 물감으로만 완성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추구하는 것은 황금의 미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학의 영역에 닿아 있기도 하다. 금으로 된 물감이라는 기상천외한 소재를 만들기 위해 그가 추구했던 노력과 열정, 그리고 고통을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비싸고 좋은 금을 가지고 왜 저렇게 할까. 물질의 욕망에 사로잡힌 분들은 저를 거의 미친 사람 취급했죠. 그러나 저는 미술인이었기 때문에 독창적인 창의력만이 미래가 있다고 생각해서 재료가 비싸고 어려웠지만 그래도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금은 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소재
아무리 흉내 내기 힘든 금화라 해도 어째서 금이었을까? 얼핏 생각해봐도 회화의 재료로 쓰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물질이다.
“금이라는 소재는 인류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귀한 보석류에 속했기 때문에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기만 했죠. 그걸 감추기보다는 밖으로 드러나게 해서 문화로 발전시켜 다 같이 공유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그리고 왜 서양인이 만든 화학적인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반감도 있었죠. 농사도 유기농이 좋듯 순금의 다양한 색을 이용해서 작품을 만들자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금으로 된 미학을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 이것은 다른 사람과 다른 예술적 방향성을 지향하고 싶다는 김 화백 본연의 미학이 적용된 결과이기도 했다. 또한 재료로서의 금은 천 년이 지나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었다.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기에 미술품으로서 불멸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금의 매력은 보석이라서 있는 게 아니에요.”
김 화백이 금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 그것은 금 본연의 색이었다. 금이 가진 색은 햇빛에 비출 때, 비가 올 때, 바람이 불 때 등등 상황에 따라 나오는 색이 다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김 화백의 설명에 따르면 그 색은 총 아홉 가지. 착시 현상이 아니라 조도에 의해 색이 변한다는 것이다.
“황금이 한 색깔이 아니다. 그걸 알아낸 순간 엄청난 매력을 느꼈죠. 그래서 금을 물감화하기로 했습니다.”
황금 물감을 만들기 위한 천연오일 개발
김 화백의 작업실에 들어가자 뭔가 독특한 향내가 났다. 허브 향과 비슷한 이 냄새는 금을 물감으로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금의 소재를 계속 탐구한 그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금을 분말화해서 직접 개발한 천연오일에 섞어 칠을 합니다. 이 냄새는 천연오일의 향이죠. 천연오일을 쓰는 이유는 광물질은 기존 오일이 닿는 순간 새카맣게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콩과 식물 여섯 가지를 배합한 오일을 만들어내는 데 시행착오로 5~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야말로 기본적인 재료에서부터 차별화를 생각해 그림을 그린 셈이다. 그가 어째서 이런 생각을 품게 됐는지, 그 근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어머니가 37년간 미술교사로 교단에 있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었죠. 그러나 제가 대학에 들어간 1970년대 초에는 시대적으로 교사 돈으로는 자식의 대학 공부가 불가능했어요. 저는 많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했죠. 편안하게 그림을 그릴 여유가 없었던 시절이었어요.”
그렇게 10여 년을 그림과 상관없이 살았다. 그러다 운 좋게 돈을 벌게 됐고 그때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림을 그릴 것이냐, 아니면 물질의 욕망이나 추구하면서 편안하게 살 것이냐고.
“선택하는 데 5년 걸렸어요. 먹고살기 위해 장사를 할 것이냐, 하늘이 내게 준 재능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 내 인생을 던질 것이냐. 선택은 후자였죠.”
미술계의 이단아, 가족도 떠나다
김 화백이 생각하는 예술인의 조건은 간단명료했다. 예술인은 새로운 것에 도전해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그의 시도는 미술계에서는 파격이었다. 당연히 인정받기 힘들었다.
“기존 미술계 사람들은 서양인이 만든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공부합니다. 그러면서 무슨 창작을 논하고 독창성을 말할 수 있어요? 애당초 비교를 거부한다는 게 제 첫마디였어요. 그리고 떠났어요. 산에서 10년 6개월 동안 오로지 금을 갖고 작품화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내는 데 몰두했죠. 40대에서 50대까지 그렇게 시간을 보냈어요.”
‘언젠가는 틀림없이 예술의 가치가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칠 때가 올 텐데, 왜 지금 모방만 하며 사는가’라는 기성 미술계에 대한 그의 비판에는 그간 겪었던 고통의 나날들이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엄청난 끈기와 상상을 초월하는 재료비의 압박에 맞설 두둑한 배포가 아니고서야 이룰 수 없는 결과이거든요.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죠. 나는 미치지도 않았고 단지 미래를 준비하고자 하는 것인데 미친놈, 이단아로 취급했을 때 정말 죽고 싶었어요. 말을 아프게 던지는 사람은 쉽게 던지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상처를 입게 되는 법입니다.”
그를 버린 것은 미술계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아이의 엄마인 제 아내마저도 이해를 못했죠. 금으로 그리다 보니 재료비가 비싸요. 그래서 작은 부동산을 처분해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하니 미친 사람 취급했어요. 결국 이혼했죠.”
주변도, 심지어 가족도 이해 못했다. 그는 고립된 데다 답이 안 나오는 모서리에 매달린 기분이었을 게다. 정말로 미쳐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런 시간 속에서 그를 견디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어차피 최고가 되려면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세상은 긍정과 부정으로 나뉘어서 보게 되는데, 나에게도 언젠가 긍정의 세상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죠.”
그의 확신은 10여 년의 오랜 시간을 거쳐 마침내 그 결실을 봤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에 드디어 데뷔하면서, 데뷔 첫해에 작품들을 완판했다. 그 후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신라호텔에서 단독 전시회를 가졌고, 역시 그곳에서도 36점의 작품을 완판했다. 그의 이름은 서서히 다른 나라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해외 유수의 전시관에서 80여 차례 전시회를 가졌고, 그것들이 모여서 사치 갤러리에서의 단독 전시라는 쾌거를 이루게 됐다.
도자기와 금화의 결합 실험
김 화백의 그림은 다양한 사람이 봐도 공통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금이라는 소재가 주는 느낌의 보편성도 그렇거니와, 그의 작품관 자체가 추상보다는 해학적 상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독자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그것이야말로 독자들에게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만 아는 추상화를 그려놓고 네 맘대로 생각하라고 물음표를 던지는 건 예술인의 태도로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는 직관적인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작업실에서 본 그의 그림은 호박과 돼지, 집안의 온기, 어머니의 사랑 등을 많이 다루고 있다. 이는 한국 사람이 특히 좋아하는 소재들이라고 한다.
최근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바로 도자기와 금화의 결합이다.
“1300℃의 도자 가마에서 구워내는 작품을 작업하고 있어요. 굉장히 어렵습니다.”
우선 가마에 들어갈 도자기를 100개 정도 만든다. 그리고 흙을 구워낸 후 그 위에 유약 처리를 한다. 다음으로 유약 위에 금을 넣어서 낮은 온도에 구워낸다. 이런 작업으로 지난 7년 동안 단 열 개의 작품밖에 안 나왔다. 지독하게 비효율적이다. 그도 “그 시간에 그림을 그렸으면 200점은 그렸을 텐데…”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작업실에 있는 황금 도자기 거북이를 가리키면서, 어렵고 힘들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그가 금화를 그리게 된 유일한 동기라고 했다.
서양에서 먼저 알아본 금화의 가치
그가 자신의 뚝심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결정적으로 인정받은 것이 한국이 아니라 서양화의 본고장이었다는 점에서도 기인한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외국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을 때, 세계적인 스타 데미 무어, 보이 조지가 제 작품 장미를 사갔죠. 너무 아름답다면서. 그게 참 기억에 남네요.”
지금 김 화백의 작품은 각계각층 저명인사들의 선택을 받는 작품군 대열에 올랐다. 자신의 힘들었던 시절을 기억하는 그는 소외된 계층을 위해 그림이 팔리면 10%씩 기부를 하고 있다. 또한 그는 기독교인이라 성화는 제작비를 안 받고 제작한다. 의뢰인이 재료비, 즉 금을 사오면 그걸로 그려주는 것이다. 이 또한 그가 자신의 성공에 대해 세상에 보답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 아직 한국 시장은 도전해야 할 영역이다. 아니, 사실 고국은 모든 미술인에게 도전의 대상이 아닐까. 당장 미국의 저명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가진 작가여도 한국 대중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나’ 하는 정도의 반응밖에 못 받는 것이 우리네 미술인들의 현실이다. 김 화백의 말마따나 자신이 ‘배우라면 아카데미상을 열 번 받을 정도의 쾌거’를 이룬 셈이지만 대중에게 그의 이름은 아직 낯설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한 곡만 성공해도 전 국민이 다 알지만 미술인은 그렇지 않죠.”
그는 지금까지 편견과 부족한 예우, 척박한 환경을 버티며 작업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현실이 원망스럽다가도 좀 더 분발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듯했다. 미술인으로서는 전 세계 어느 작가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
“작가는 늘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작품을 독자에게 보여야 한다는 점에서 굉장한 중압감이 있죠. 미술은 온전히 캔버스와 나와의 싸움입니다.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단한 벽과 정면으로 부딪쳐야 하는 인생을 60여 년 산다는 것은 자존감으로 견디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일반인으로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것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지독하게 외롭고 고독한 길에서, 그림은 애인이고 자식 같은 것이 됐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여전히 거듭 다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이 음악처럼 삶의 교훈과 지혜,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현실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앞으로도 더욱 많이 그려서 독자에게 보답해야죠.”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시니어를 대상으로 진행한 버킷리스트 서베이에서 1위를 차지한 ’재능기부‘. 아직 망설이고 있다면, 사례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실천의 한 걸음을 내디뎌보자.
◇ 가죽공예 재능기부 전도사 윤난희 씨
결혼 후 30대부터 문화센터를 비롯한 다양한 기관에서 가죽공예 강의를 해온 윤난희(63) 씨. 지난해부터 오산시 5070청춘드림팀 재능기부단에 참여하며 나눔의 즐거움에 흠뻑 취해 있다. 이전에는 주로 아이들을 대상으로 가죽공예를 가르쳤는데, 최근에는 어르신들을 위해 재능을 나누는 그녀다.
“어르신들께 가죽공예는 생소한 분야잖아요. 젊은이들을 가르칠 때와는 수업 매뉴얼을 바꾸는 데 신경을 많이 썼어요.”
재능기부 대상에 따라 강의 방법을 달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윤 씨. 수강생의 세대나 특징을 고려하지 않고 접근했을 때는 호응을 얻기 어렵다고 조언한다. 이처럼 배려하는 마음이 없는 재능기부는 나눔이 아닌 자기 능력 뽐내기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내가 강사야, 선생이야’ 이런 걸 내세우기보단 최대한 그분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다가가야 해요. 제 경우에는 상담 봉사도 종종 하는데, 아이들에게 가죽공예를 가르치면서 이런저런 질문도 하면서 그 아이의 생각을 끄집어내려고 해요. 내가 가죽 수업 하러 갔다고 그것만 하고 오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다른 재능이 있다면 더 나눠주려 노력하고 있어요.”
윤 씨는 나눔이 주는 즐거움과 행복을 잘 알기에 자신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만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고 싶다 말한다. 그러나 한 가지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
“여러 기관에서 재능기부 요청이 와요. 수업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결국 재료비 때문에 진행을 못 하는 경우가 많죠. 기관마다 예산이 정해져 있는데, 가죽공예가 다른 수업에 비해 저렴한 편은 아니니까요. 기부자도, 기관도, 수강생도 재료비에 부담 없이 가죽을 즐길 방법을 연구하는 중입니다.”
재능기부 실천을 위한 TIP
❶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라 기관이나 재단 등에서 진행하는 수업도 좋지만, 먼저 내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곳을 살펴보세요. 저도 성당에서 먼저 시작했답니다. 동네 어린이집, 방과 후 교실 등 둘러보면 재능을 나눌 곳이 얼마든지 있어요.
❷ 하나의 재능만 나누려 하지 마라 수업의 특정 주제에만 얽매이기보다는 내가 가진 또 다른 능력을 끌어와 접목해보세요. 자칫 따분해질 수 있는 수업에 활력이 생기고 더 많이 나누고 얻을 수 있어 마음이 풍요로워집니다.
❸ 대화를 많이 나눠라 수업에 대한 내용만이 아니라 일상의 이야기나 고민도 함께 이야기해보세요. 친밀도도 올라가고 더 가슴 뜨거운 재능기부가 될 거예요.
◇ 서예 재능기부 17년 차 서병규 씨
오산시에서 재능기부하면 빼놓을 수 없는 나눔 베테랑이 있다. 농촌진흥청 공무원 은퇴 후 17년째 오산시에서 서예 재능기부를 하고 있는 정산(靜山) 서병규 선생이다. 동네를 거닐다 보면 아이, 주부 할 것 없이 ‘선생님’ 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고.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다양한 세대와 만나고 소통할 수 있어 노후가 즐겁다는 서 씨다. 알고 보니 그는 ‘서예’를 전공하거나,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 선비였던 아버지께 어깨너머로 글 쓰는 법을 익혔고, 그때부터 죽 지필묵을 달고 지냈을 만큼 오랜 취미로 삼았던 것이 서예였다.
“서예 재능기부를 하려고 전문 자격증이나 학위를 준비해본 적은 없어요. 스스로 터득한 재능을 나눠주고 있는 셈이죠. 내가 하는 일을 요즘엔 재능기부라 칭하지만, 맨 처음 서예 공부방을 열었을 때는 그런 말도 없었어요. 사실 나는 기부니 봉사니 그런 말이 부끄러워요. 수업을 하다 보면 결코 내 것만 나누는 게 아니거든요. 그 시간을 함께하는 모든 사람이 즐거움을 나누고, 배움을 얻는 거지요.”
서 씨가 처음 재능을 나눈 곳은 아파트 관리사무소. 오산시에 이사 온 기념으로 아파트에 글 한 폭을 써서 기증했는데, 이를 본 주민들이 서예를 가르쳐 달라 요청한 것. 그렇게 30명 남짓으로 시작했는데,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경로당과 어린이 교실까지 진행하게 됐다. 서예 수업이라 해서 붓만 슥 휘두르고 온다 생각하면 오산. 수강생들이 보고 베껴 쓸 체본을 만드는 데만 시간이 제법 걸린다. 한 장을 써서 종이를 복사하면 간편하겠지만, 하나하나 다른 문장을 직접 화선지에 써서 준비하며 공을 들인다.
“수강생들을 위한 배려이지만, 자기 수양까지 겸하는 과정이죠. 나도 완벽하지는 않잖아요. 수업을 하면서 내 글씨도 더 좋아졌고, 공부가 많이 됐어요. 함께 성장하는 거죠.”
재능기부 실천을 위한 TIP
❶ 취미도 나눌 수 있다 재능기부를 하겠다고 갑자기 없던 능력을 키우거나 자격증 따기에 매진하지 마세요. 평범한 재능, 오래된 취미 등도 충분히 나눌 수 있으니까요. 꼭 큰 것만 나눌 수 있는 건 아녜요. 작은 것도 나누면 즐거움이 배가됩니다.
❷ 머리 아닌 마음으로 나눠라 재능기부가 뜻깊은 시간이 되려면 머릿속 지식만 공유하지 말고, 따뜻한 마음도 함께 나누세요. 주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을 거예요.
❸ 나눔 외에 욕심 부리지 마라 재능기부를 통해 돈, 명예, 지위 등을 얻으려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선행은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학문은 공명을 탐하지 않는다’라는 제 좌우명을 나눠봅니다.
‘기업과 나라 걱정으로 가득한 사람’. 권오용(權五勇·63) 효성그룹 고문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느낀 그를 단 한마디로 정의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재계에서 ‘뼛속까지 홍보맨’의 요직을 거치면서 여러 굴지의 오너와 인연을 갖게 된 그는 국가와 사회,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채워진 사람이다. 그가 상임이사로 일하는 한국가이드스타(이사장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는 비영리 공익법인 평가를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다. 이곳에서 6년째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그가 발견한 자신의 의무와 책임, 그리고 공동체 모두가 잘 사는 길은 무엇인지 들어봤다.
“제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 1호 독자예요.(웃음) 2015년 1월호를 창간하기도 전에 정기구독 신청을 했고 지금까지 계속 보고 있죠. 평생 구독 회원이 될 것 같습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매거진 제1호 독자, 권오용 고문은 단순히 여가를 활용하고 문화만을 즐기는 게 아니라 현실 사회까지 다루는 중량감 있는 시니어 매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바로 그러한 바람이 구현된 잡지다.
“여가와 문화만을 즐기기에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급변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시니어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강물처럼 흘러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마치 저수지처럼, 필요할 때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시니어라고 봐요.”
부자는 돈을 잘 쓰는 사람
전경련 기획홍보 본부장을 거쳐 금호아시아나그룹, SK그룹 홍보실장, SK 사장, 효성그룹 홍보 고문까지, 스스로 재계에 취직했다고 하는 그가 공익법인 평가 법인에서 봉사로 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부터 그의 국가관을 들어봐야 한다.
“선진국의 기준이란 뭘까요? 바로 오랫동안 잘사는 나라가 선진국입니다. 중요한 건 기간이죠. 그런 의미에서 최고 선진국은 유럽이고, 그다음이 미국이죠. 그리고 일본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갔습니다. 중국에는 소득이 5만 달러 이상인 사람이 1억 명이나 된다고 해요. 그런데 잘사는 나라로 보여도, 기간으로 보면 졸부예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잘 쓰는지를 따지면, 그 부분에 있어선 선진국이 아니예요. 돈이 많은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돈을 잘 쓰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이 부자인 이유는 돈을 잘 쓰기 때문이죠. 평생을 쓰레기 주워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내놓은 할머니는 빌 게이츠 못지않은 부자입니다. 이런 부자가 많은 나라가 선진국입니다.”
세금을 안 내면 투명성으로 보답해야
돈을 잘 써야 공동체가 잘 산다. 기부가 대표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권 고문이 보기에 우리나라의 기부 문화는 많은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 기부금이 1년에 12조 원 정도 됩니다. 그중 7조 원이 종교단체에서 나와요. 그리고 5조 원은 공익법인이 마련한 기부금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기부금 시장이 양적으로는 굉장히 늘었는데, 어떻게 썼는지는 불투명하다는 게 문제입니다.”
공익법인 기부금의 어마어마한 액수에 기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문제들도 떠올랐다. 당장 얼마 전 한국 사회를 전율시켰던 ‘어금니 아빠’ 이영학의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행각 뒤에는 그저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풍족한 생활을 뒷받침해준 소위 ‘눈먼 기부금’이 있지 않았는가.
“세금은 국회를 통해 어떻게 쓰이는지 파악되지만 기부금은 잘 쓰이고 있는지 국민이 관심이 없어요. 막연히 잘 쓰이고 있겠지 생각만 하죠. 미국의 공익법인도 우리처럼 세금을 안 냅니다. 그런데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에 조세정의의 관점에서 일반 기업보다 훨씬 많은 투명성의 책임이 부여돼요. 우리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냥 방관하는 편이죠.”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한국가이드스타는 공익법인이 세금을 면제받는 대가로 국세청에 매년 제출하는 재무보고서를 분석 소스로 삼는다. 재무보고서를 분석해 운영을 제대로 하는지 안 하는지 검토하고, 결과를 점수화해 매년 공개하고 있다. 작년에 처음 발표했는데, 반응이 꽤 컸다고 권 고문은 자평했다.
“물론 평가는 다 싫어하죠. 학교도, 신문도, 개인도 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금을 내는 입장에서는 제대로 평가해주길 바라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이런 걸 정부에서 하면 탄압한다는 얘기를 듣게 돼요. 그래서 민간 쪽에서 하는 게 맞죠.”
한국가이드스타는 어떻게 보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를 실행하고 있는 셈이다. 모두가 필요한 일이라고 말은 하지만 여론을 주도하는 시민단체를 건드리는 일이기에 지원을 주저할 수 밖에 없다. 쉽지 않은 길이었고 ‘이 일을 내가 왜 하나’라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올해도 3월 14일 우리나라 공익법인 8993개를 대상으로 투명성과 책무성을 분석해 93곳만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좋은 평가를 받은 곳에서는 좋아하지만 나머지는 무슨 자격으로 평가를 하느냐고 항의가 쏟아졌다.
지원이 불가능했던 미르·K 재단 사건
“작년에는 데이터를 통해 공익법인의 생태계를 바꾸겠다는 저희 취지를 긍정적으로 보고 큰 지원금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한국가이드스타 평가를 중요한 참고 정보로 활용하는 기업도 생겼습니다. 보람 있죠. 공익법인에서는 싫어하지만.(웃음) 그러나 의무감을 갖고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권 고문은 공익법인 평가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정권 교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미르·K 재단 사건을 언급했다.
“권력을 이용해 자금을 요청하는 미르·K 재단 같은 곳은 어느 정권에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전경련에 공익법인들에 대한 운영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적이 있어요. 그 가이드대로라면 미르·K 재단은 돈을 줘선 안 되는 단체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돈을 주는 바람에 기업 회장들이 구속되고 전경련은 해체 위기에 몰렸으니…. 미안한 심정이죠. 공익법인 평가는 기업으로 하여금 그런 비정상적인 재단에 돈을 안 줄 수 있는 정당한 명분을 마련해줍니다.”
배려가 효율을 지속가능하게 만든다
그는 최근 오너십 체제와 기업 경제, 국가 발전이 함께 이뤄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다. 또 지금까지 변화된 오너십과 사회 환경의 장점들을 합쳐 한국만의 독자적인 모델이 개발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예전에 전경련에서 일할 때, 전경련 조찬이 7시 30분에 있는데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7시 35분에 도착한 일이 있었죠. 그때 그분이 회의가 늦게 끝나 미안하다고 말했던 게 기억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했더니 새벽 5시부터 이미 회의를 하나 끝내고 온 거였어요. 촌음을 아껴 시대를 누빈 선배 경제인들의 열정에 우리 경제가 여기까지 온 거죠.
정주영, 이건희, 구자경, 김우중, 최종현 등 오너의 삶과 성과를 바로 옆에서 본 사람답게, 그는 한국의 정치와 경제 관계를 정경일체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열정과 실행력이 일으킨 변화의 긍정적인 면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평창동계올림픽에 사람들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걸 유치한 게 이명박 전 대통령과 이건희 삼성 회장이에요. 정경일체가 되어 국가적 목표를 달성한 거죠. 서울올림픽도 마찬가지였죠. 감동과 투자는 별개가 아니에요. 그 과정도 봐야죠.”
그는 시니어를 ‘보이지 않는 자산’이라고 표현했다. 보이는 자산에는 투자가 잘 이뤄지지만 보이지 않는 자산에는 투자가 잘 안 이뤄진다. 그러나 정말 중요할 때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자산이다. 여기서 그는 공자의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 사실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를 인용하기도 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을 보는 배려의 힘이야말로 효율을 지속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열쇠라고 말했다.
“올림픽이 그다음에 열리는 패럴림픽으로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효율이 배려가 되는 교훈을 보여줬죠. 올림픽이 몇 초를 기록으로 서로 경쟁하는 ‘효율’을 목표로 한다면 패럴림픽은 ‘배려’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경기입니다. 그런데 패럴림픽이 88서울올림픽 때부터 시작됐다는 걸 아세요? 사실 우리나라가 효율과 배려를 세계 최초로 시행한 나라입니다.”
재계에 취직했다는 사람답다. 전문성을 갖고 일가를 이룬 만큼, 이제 그는 봉사라는 기회를 통해 청춘을 다시 찾아가고 있다. 철학이 샘솟듯 봉사활동을 통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권오용 고문. ‘브라보 마이 라이프’ 1호 독자의 행보라서 그런지 더욱 진한 여운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