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얻으려면 ‘지갑은 열고 입은 다물라’고 한다. 나이든 꼰대( 꼰대라는 말은 나이 많은 걸인을 일컬었다. 나중에 아버지나 선생님을 비하하는 은어로 사용되고 있다. 백과사전에서 인용)들에게 하는 말이다. 젊은이들이 숨어서 하는 은어에 대해 뭐라고 말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이든 사람마저도 젊은이의 위세에 눌려 비굴하게도 참 맞는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옆에 있는 나이든 사람에게 그렇게 행동하라고 옆구리까지 찔러댄다. 시니어들을 상대로 하는 교육장의 강사들도 무슨 대단한 노소화목(老小和睦)의 진리를 발견한양 그렇게 해야 한다고 떠드는 사람이 많음을 보고 나도 모르게 탄식이 절로 나왔다.
동방예의지국이니 경노사상이니 이런 거창한 것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무한 존경받아야할 아버지나 선생님을 늙은 거지인 꼰대로 취급하는 것도 참지 못하겠는데 ‘돈은 내고 입은 다물어라!’니 이런 불공평한 처사가 어디 있는가. 돈을 냈으면 말이라도 하게 해줘야 당연하지 않는가.
우리는 미국이나 선진국 사람들에 비해 기부를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당신은 기부만 하고 경영에는 일체 참여하지 말라는 지나친 간섭배제를 지향하는 것도 기부를 망설이는 이유 중에 하나다. 일본의 국왕이 통치는 하지 않지만 왕으로서 위엄을 갖고 있는 것처럼 기부한 사람에게도 그만한 대접을 해줘야 기부를 팡팡할 것이 아니겠는가!
외국에는 기부를 한 사람이 경제적으로 갑자기 어려워 질 때 자신이 기부한 금액에서 일정금액을 되돌려 받는 제도까지 있다. 줬다가 뺏어간다는 생각을 하기보다 기부자의 삶이 어려워지면 역으로 도움을 받았던 기관에서 보살펴야 한다는 인간애가 흘려야 옳다.
돈을 내면 말이라도 하게하자. 내가 낸 돈을 허투루 쓴다면 되돌려 받는 제도도 만들어야 한다. 기부금을 냈으면 낸 것으로 끝내고 우리가 회사(단체)를 말아먹든 말든 아무런 간섭을 하지 말라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학비를 대주는 아버지가 아들의 학업성적표를 보자는 것이 당연하다. 자식이 보내준 학비로 무슨 짓을 하던 말하지 못한다면 형평에 어긋난다. 돈을 낸 사람은 주주와 같은 사람이다. 알아야 되고 말할 권리가 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우리 속담의 하나로 새겨 볼 만하다. 선무당은 '서툴고 미숙하여 굿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무당'을 뜻한다. 의술에 서투른 사람이 치료해 준다고 하다가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게 되니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의미를 지닌다. 스스로 생각하기엔 다 잘 아는 것 같아도 실제 능력이 모자라 제구실을 할 수 없음을 모른다. 함부로 나서다가 오히려 큰일을 저지르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어설픈 선무당이 작두를 타다가 발을 베었다’, ‘경제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 그가 경제에 대해 아는 척을 하니 선무당이 따로 없다’ 등으로 쓰인다. 실제 우리 생활 주변에서 선무당을 종종 만나게 된다.
나이가 들면 대체로 나서기를 좋아하고 때로는 노파심이란 변명을 전제로 깔기도 한다. 그런 탓에 젊은이에게 잔소리 많은 ‘꼰대’라는 비칭을 듣는다. 장기판에 둘러서서 구경하는 사람 중에 뺨을 맞으면서도 훈수꾼이 나서는 이유다. 골프연습장에 가면 그런 경우를 많이 본다. 신입 회원이 나타나면 엊그제 배우기 시작한 사람도 한 수를 거들고 싶어 안달한다. 넓게 생각하면 관심일 수 있으나 훈수를 듣는 초보자에게는 간단하지만 않다. 배움의 시작점에서 제대로 익혀야 기술을 빨리 연마할 수 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듯 최초에 잘못 배우거나 알게 되면 이를 다시 고치기가 쉽지 않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 큰일은 아니어도 상대가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남을 가르치거나 조언해줄 땐 신중히 해야 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해도 초보자는 진실을 알 수 없고 가르치는 사람의 고마운 마음을 받아들이려 하기에 이야기를 경청한다.
최근에 필자는 어느 취미활동 연극단이 공연 준비하는 창극단에 배우로 캐스팅되어 연습하고 있다. 한 배역을 맡은 여인이 나름의 지식으로 다른 배우들에게 훈수를 자주 한다. 예를 들면 극 중에 대사를 할 때 함께 무대에 오른 대화 상대인 배우보다 관객을 보고 말을 하라고 수차례 조언한다. 순수 아마추어인 다른 배우들은 그 말에 따라 연습을 해왔다. 한 달 정도의 연습 기간이 지났으니 그런 태도가 몸에 뱄다. 필자는 연극을 한 경험이 몇 번 있어 관객을 보기도 하야야 하나 대화 내용에 따라 달라져야 함을 잘 안다. 무대에 나와 대화를 하는 상대를 보기보다 관객 쪽으로 고개를 돌려 대사를 하니 어색할 수밖에 없다.
더 좋은 공연을 위하여 연극 전문 교수를 초빙하여 연습을 지켜보게 하고 조언을 듣는 기회를 얻었다. 교수의 첫 번째 지적은 관객을 주로 향하여 대화하는 배우들의 시선 처리였다. 극 중 대화의 가장 바람직한 시선 처리는 앙상블이라 했다. 평소 대화하듯 하면 된다는 점이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듯 서투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지도함으로써 다시 고쳐야 하는 번거로움을 준 사례다. 남을 가르치는 일은 좋은 재능기부다. 섣부른 지식을 바탕으로 하게 되면 이중 삼중의 시간 낭비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다시 고쳐야 하는 번거로움을 준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남을 가르칠 땐 신중함을 잃지 말아야 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이 올바른지, 맞는 기법인지를 정확히 한 후에 알려주어야 한다. 제2 인생을 살아가는 시니어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는 속담은 다시 되뇌어 볼 필요가 있지 싶다.
며칠 전이었다. 의외의 사람에게서 애먼 소리를 듣고 마음이 몹시 상한 일이 있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의외였고,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말을 필자가 했다고 하는 애먼 소리를 들은 것이다. 며칠을 우울하게 지내며 생각해봤다.
사회적인 성공과 부가 곧 인격의 수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만심이나 오만으로 연결되기 쉽다. 훌륭한 지위나 부를 누렸던 사람들은 계급장을 뜯긴 상황에서도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잘나가던 사람인가를 강조하며 그때와 같은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은퇴 후 사회 부적응이 심해지기도 한다. 그런 대우는 그곳에서만 받을 수 있었던 것인데 아무 데서나 대우받기를 바라며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현실 인식이 부족하고 현명하지 못한 처사다. 또 스스로를 외롭게 만든다.
괴로운 마음이 가라앉자 교훈을 얻은 기분이 들었다. 각자의 생김새에 따라 생각하는 것이니 개의치 말자. 겸손한 자세와 말씨로 흔들리지 않아야 결국 필자가 옳다는 것을 알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남의 눈의 티끌은 지적하면서 자기 눈의 대들보는 못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한 이유가 있다. 사람의 얼굴에 있는 눈은 밖으로 향하고 있어서 자신을 보지 못한다. 만약 안으로 향해 있다면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눈이 적당히 안 보이는 것도 그동안 못 볼 것도 많이 보고 살았으니 적당히 그만 보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지인이 얼마 전 백내장 수술을 했다. 안 보이던 것까지 다 보여서 청소할 일이 많아져 몸이 고달프다며 푸념을 했다. 다시 수술 전으로 돌아갈까 하며 웃은 일이 있다. 상대 얼굴의 티만 보여서 안도했는데 자기 얼굴의 검버섯까지 보여 괴롭다는 얘기였다.
내친김에 그럼 귀가 둘인 이유는 뭘까? 한쪽으로 듣고 다른 쪽으로 흘려야지 마음이 부대끼지 않는다는 의미일까. 그게 아니라면 남의 얘기를 이것저것 많이 들으라는 것일까. 귀를 닫고 자신의 말만 하기 시작하면 꼰대가 된다는 경계의 말도 있다.
마지막으로 입은 하는 일이 많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 먹기 위해 씹고 뜯고 맛을 본다. 입으로 남을 헐뜯고 귀를 깨물 수도 있고 칼이나 창과 같이 독기(毒機)가 되기도 한다. 입으로 들어오는 것은 좋은 것이 들어오지만 나가는 것은 부정과 긍정이 함께 있다. 입으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지만 용기와 희망을 주기도 하니 항상 입을 조심해야 한다.
늙으면 잊어버리는 것이 많아지는 이유는 뭘까? 그동안 보고 듣고 기억할 것이 많으니 보는 것만이라도 잊어버리라는 의미다. 동작이 느려지고 굼떠지는 것은 그동안 바삐 종종거리며 살았으니 이제 편하게 느리게 살라는 의미다. 그래서 노년을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오히려 편안함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는 의미다.
육체의 눈이 성할 때는 마음의 눈이 어두웠지만 이제 육안이 흔들리는 대신 심안이 트이기를 바란다. 요즘 감사해하며 사는 마음 수련을 하고 있다. 며칠 흔들렸지만 다시 감사해하며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거리의 인문학자라 불리는 김찬호(金贊鎬·57)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그는 인간의 영혼이란 매우 여리고 취약한 것이라 말한다. 누구든 작은 말 한마디와 눈빛만으로도 타인의 영혼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자기 영혼을 다스릴 수 있는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아울러, 이러한 감수성은 인간의 언어를 ‘경청’하는 경험에서 나온다고 덧붙인다. 그는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서해문집)를 통해 인생 선배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본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구술생애사를 통해 본 희망의 노년 길 찾기’라는 부제의 도서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공동저자인 김찬호 교수와 문학평론가 고영직, 여성학자 조주은은 각자 베이비부머를 한 사람씩 인터뷰하며 그들의 생애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반평생 은행원으로 일하다 늦깎이 시인이 된 최영식 씨, 전업주부로 살며 포기했던 꿈에 다시 도전하는 김춘화 씨, 이우학교를 만들고 현재는 ‘50+인생학교’ 학장이 된 정광필 씨. 그중에서 김 교수가 만난 이는 정광필 학장이다. 일전에도 대안 교육과 관련한 공식 모임에서 만난 적은 있지만, 단둘이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은 처음이다.
“아는 사이지만 사적인 대화를 한 적이 없어 호기심이 생겼어요. 정광필 학장은 고등학생 때부터 정치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고 용기 있는 실천을 해왔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을 텐데, 모든 일을 게임 감각으로 풀어나가는 경쾌한 분이었어요. 그런 점에서 인생 선배에게 배운다는 게 이거구나, 말보다는 어떤 기운으로 그가 살아온 인생이 묵직하게 느껴졌죠.”
그는 10시간 가까이 정 학장을 인터뷰 했지만, 한 가지 묻지 못한 것이 있었다. “오랜 시간 누군가에게 내 삶을 말 해보니 어떤가요?”라는 것. 질문을 바꿔 김 교수에게 물어봤다. “오랜 시간 누군가의 삶을 들어보니 어떤가요?”
“나의 스토리가 누군가에게 전해질 때, 즉 스토리가 텔링이 되면 또 다른 힘이 생깁니다. 수박 겉핥기이지만, 한 사람의 60년 인생을 따라간 거 아녜요. 일종의 시간 여행이죠. 그분의 삶을 통해 나를 잠깐 떠나볼 수 있는, 나를 객관화하고 낯설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인터뷰할 땐 그 사람의 삶에 온전히 들어가 있으면서 동시에 나와 있어야 하거든요. 살아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그의 표정과 함께 다가올 때, 그 삶을 내가 잠깐 살아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인터뷰라는 게 참 재미있죠.”
삶의 공백을 채우는 자기 언어
김 교수는 생애 전환기의 중장년 세대가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그 발걸음이 품고 있는 내재율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자기 삶을 되짚어보길 바랐다.
“베이비부머가 압축 성장한 산업화 시대를 살았다고 하는데, 당시엔 민주화도 아주 급진적으로 이뤄졌어요. 그 시기 산업화와 민주화의 공통점은 자기 삶이 없다는 거예요. 그냥 내던진 거죠. 돈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그 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친구들이 끌려가고, 가족이 죽고, 자기도 당하고, 그런 아픔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채 살아왔죠. 그런데 세월이 흘러 외적으로는 뭔가 생겼어요. 돈, 지위, 명예… 내적으로는 굉장히 공허한데 말이죠.”
그는 현재 시점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음미해볼 것을 권했다. 이를 위해서는 삶의 여백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여유로운 중장년의 경우 삶의 여백이 많다고 할 수 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백과 공백은 다르죠. 디자인도 잘못한 걸 보면 여백이 아니라 공백처럼 느껴지잖아요. 마찬가지로 시간이 비었다고 무조건 여백은 아닙니다. 노후에 할 일이 없고,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엔 공백이라고 봐야죠. 그러니 공허한 거고요. 빈 시간이 여백이 되려면, 그만큼 자기 마음에 그릇이 생겨야 해요.”
마음의 그릇은 어떻게 만드느냐고 묻자, 김 교수는 ‘자기 언어’가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가 강조하는 ‘자기 언어’는 무엇일까?
“언어는 단순한 정보 전달의 도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의 한마디가 사람들을 울릴 때가 있잖아요. 또 극한의 고통에 빠진 사람이 세상을 향해 외치는 호소, 그때의 언어는 신호가 아니거든요. 그 존재가 다가오는 거지. 이때 느끼는 자기 언어의 생명력은 대단한 학식이 없더라도 누구나 경험하고, 감동할 수 있죠. 자기 언어는 내면에서 생성되는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 바깥에서 지식으로 언어를 흡수하기 때문에 일상의 언어가 도구화되어 버렸죠.”
그는 특히 중장년 세대가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하고 살아왔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명령의 언어, 힘겨루기의 언어, 과시의 언어 등에 익숙해져버린 것. 이에 대한 해답 역시 ‘경청’이라 제안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에 경청할 여유가 없었고, 반대로 온전히 나를 경청해주는 사람 앞에서 말해본 적도 없어요. 늘 대화하면서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생각하죠. 그건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닌 견제거든요. 서로 위협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정서적 신뢰를 쌓는 안전한 관계가 필요한 거죠.”
내 남은 생애가 쓰이길 바라며
경청이 중요한 것은 알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마음먹고 잘 들으려 하다가도 어느새 잔소리를 늘어놓기 일쑤다. 이에 김 교수는 ‘감수성’ 차이에서 오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내가 잘해주고 싶은 것보다 상대가 필요로 하는 걸 헤아려야죠. 그게 감수성이고, 센스인데, 의지만으로 생기지 않는 것들이에요. 먼저 자기 삶을 들여다보는 훈련이 돼 있어야 해요. 관찰, 통찰, 성찰은 함께 이뤄져요. 상대에 대한 이해는 나에 대한 이해와 같습니다. 남에게 친절한 사람은 그만큼 자신을 사랑하는 거고, 늘 화내는 사람은 자신과도 불화 관계에 있다고 생각해요.”
나와 잘 지내기가 곧 남과도 잘 지내는 방법이라는 것. 그렇다고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게 꼭 자기만 생각하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삶을 좋게 만들고자 할 때 자연히 나의 삶과 관계도 편안해질 수 있다고.
“꼰대질이라는 걸 왜 하게 될까요? 에고(ego)에 갇혀 있기 때문이에요. 에고에서 벗어나려면 자기를 넘어선 세계를 지향해야 합니다. 공적인 영역,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역사의식 등이죠. 내 남은 생이 인생 후배들의 삶을 위해 쓰이도록 초점을 맞춰야 해요. 그러면 꼰대질을 덜 하게 되죠. 꼭 내가 인정받지 않아도 되니까요. 여생의 능력이 쓰여 누군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여기면 내가 대접받고 아니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져요.”
책 말미에서 정 학장은 “나이 들어 더 좋은 게 있다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세월이 갈수록 이해가 많이 된다. 스스로 내려놓으면 오히려 많은 걸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김 교수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비슷한 대답이 나왔다.
“포기할 게 많아진다는 것?(웃음) 선택지가 줄어들거든요. 이미 많은 게 굳어진 상태니까요. 좋은 의미의 체념이랄까? 고민할 게 줄어드니 마음이 한결 편안합니다.”
시니어가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받지 못하고 시쳇말로 “꼰대” 소리를 듣는 가장 큰 이유는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해서다. 어떻게 보면 관심이지만, 잔소리로 들리기에 십상이다. “가능한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고 한 말이 생긴 배경이다.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는 배경은 나이가 들어 잔소리가 늘어나는 이유도 있지만, 평소에 말을 조리 있게 하는 연습을 하지 않아서이기도 한다. 어느 모임에서건 3분을 벗어나면 듣는 사람이 지겨워한다. 말을 재미있게 하면 다르기도 하나 대체로 그렇지 못한다.
얼마 전 새로 만들어진 글쓰기를 하는 모임의 첫 회의에 참석했다. 참석자는 15명이었다. 첫 모임이라 서로를 알 필요성이 있어 진행자가 한 사람이 5분 이내로 자기 소개를 하도록 했다. 15명이라 정확하게 5분을 지켜도 교대하는 시간 등을 고려하면 1시간 20분(발표시간 15 x 5 =75분, 교대시간 10분) 정도 걸려야 끝날 수 있다. 모임에서 소개 시간을 그 정도 한다면 긴 편에 속한다. 마지막 사람은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리는 꼴이다.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고 정해진 시각을 지키는 사람이 아주 적다는 데 있다. 그날도 역시 15명 중 시간을 지키는 사람은 3명에 불과했다. 대체로 10분 가까이 사용했고 몇 분은 20분을 넘기기도 했다. 진행자가 시간을 줄이도록 신호를 보내도 막무가내였다. 나이가 많은 사람과 여성이 길었다. 참석자 중에서 나이가 가장 젊은이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스마트폰의 스톱워치를 켜놓고 시작하여 제시간을 지키는 치밀함을 보여주기도 해 눈길을 끌었다.
또, 한번은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13분이 참가한 공동 저서였다. 작가별로 발표시간이 주어졌다. 출판기념회라 축하 손님도 많이 참석했다. 작가들의 이야기 시간이 너무 길어져 참석자들이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그 내용 또한 출판기념회 참여 작가로서의 내용을 벗어난 분야를 넘나들기도 하고 불필요한 내용 등으로 어수선한 시간이 되었다. 작가들의 이야기 시간이 너무 길어져 예정 시간을 1시간 정도 넘겨 끝났다. 저녁 시간대라 끝나기 전에 축하객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떴다. 한 분은 이런 점을 고려해서인지 5분에 맞게 종이에 글로 써와 낭독하여 다른 측면을 보여주었다.
왜, 그렇게 길게, 또 중구난방식이 될까?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준비를 하지 않고 이야기를 한다는 점을 큰 이유로 들고 싶다. 앞의 예에서 보면 모임이나 출판기념회에 참석하여 이야기해야 하는 목적을 분명히 하고 거기에 적정한 이야기 구성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고 싶다. “대충 이야기하면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만을 갖고 참석해서다. 나이가 들면 으레 금방 한 말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한 말을 반복하거나 목적에 맞지 않는 말을 하게 되고 시간 또한 염두에 두지 않게 된다. 3분 스피치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고 말을 해야 할 줄거리를 미리 만들어 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3분은 어떻게 보면 긴 시간이다. 이를 닦는 데 가장 적정한 시간이 3분이나 3분을 쓰는 사람이 많지 않음과 견주어 보면 이해가 된다. 가요 1소절을 부르는 데도 3분 내외가 걸린다. 노래를 부르듯 기승전결(또는, 서론 본론 결론) 3분 스피치를 연습해두자.
차갑고 각박한 세상에 따듯하고 훈훈한 소식이 들려왔다. 환갑을 맞이한 연극배우를 위해 젊은 연극인들이 뭉쳤단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한평생을 오직 연극만 알고 살아온 극단 가교의 대표이자 배우 겸 연출가인 박종상의 특별한 환갑 헌정 공연 현장으로 들어가 봤다.
극단 가교를 지킨 바보 배우 이야기
박종상은 배우다. 무대에 서는 것을 좋아한다. 그가 속해 있는 극단은 가교. 예부터 최주봉, 윤문식 등 걸출한 배우가 몸담고 있던 60여 년 전통의 악극단이다. 워낙 대단한 배우들 틈에 끼어 있었기에 박종상은 자신에게 맞는 역 한 번 맡아보지 못했다. 그래도 톱 배우들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의미와 의의가 있었다. 어느 날 박종상과 띠동갑 정도 차이 나는 선배들이 극단을 더 이상 이끌어갈 수 없다고 해체 통보를 해왔다. 극단 가교가 아닌 곳에서 연극을 해본 적이 없던 박종상은 당황했다.
“제가 연극을 시작한 곳이 가교고 단 한 번도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어요. 1979년 말에 들어왔으니까 38년을 가교에 있었죠. 해체 얘기가 나왔을 때가 2011년이었는데 제 나이에 어딜 가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지금까지 해보고 싶었던 작업을 해보겠다는 생각에 극단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해체 수순을 밟기를 원했던 선배들의 원성이 있었지만 마음만은 좋았습니다. 대신 극단을 완전히 쇄신하자며 나만의 극단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남아 있던 후배들에게는 있을 거면 오디션을 보고 아니면 마음대로 하라고 했더니 뿔뿔이 흩어져서 나갔습니다.”
악극단 이미지를 벗고 젊은 연극인과 만나다
박종상 대표의 실험이 시작됐다. 극단에 새로운 기운을 만들기 위해 소극장으로 찾아들었다. 젊은 작가와 연출가들을 만나 함께 창작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만난 젊은 연극인이 변영후 연출가였다. 각각 다른 극단의 대표이지만 같이 편하게 어울리고 함께 연극 작업에 힘을 모은다.
“단순하게 극단 가교와 작업을 하자는 개념을 넘어서 환경이 여의치 않은 젊은 연극인들한테 연습실을 거의 무상으로 빌려주셨어요. 제작자로서 투자할 힘은 없으니 공간을 내주신 거죠.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도움이 됩니다. 본인도 어려우실 텐데 밥도 사주시고. 그래서 그런지 유독 젊은 친구들이 많이 따르는 분입니다. 연극 혹은 연기를 향한 성취나 유명세보다는 그냥 어두운 곳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을 긁어주는 분이십니다.”
서일대학교 연극반 출신이라는 박종상은 연극반 후배들을 위해 연출을 해주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연극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덕에 주위에 젊은 연극인들이 모여들고 꼰대(?)와는 먼 멋진 선배로 지금까지 함께 작업해오다가 헌정 기념공연에 이르렀다.
헌정 기념공연을 후배들에게 선물받다
“과연 될까? … 걱정됐습니다.”
고희(古稀)도 아니고 요즘 환갑은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라고 느꼈다. 그런데 오채민 작가를 비롯해 젊은 친구들의 적극적인 행동에 마다할 틈이 없었다.
“공연을 하려면 제작비용이 필요해요. 그래서 지원을 조금이라도 받을 생각에 오채민 작가가 쓴 이번 작품을 ‘이인극 페스티벌’ 지원사업에 접수를 했는데 그만 떨어졌습니다. 공연은 틀렸구나 생각했는데 오채민 작가가 극장을 무료로 섭외해왔습니다. 힘을 많이 썼어요. 밀어붙이더라고요(웃음).”
헌정 연극 를 보고 나니 오채민 작가가 공연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것 같다. 그가 배우 박종상에게 주고 싶었던 최고의 선물은 몸에 딱 맞는 배역이었다.
“이번 역할은 이제까지 했던 것 중에 나한테 가장 잘 맞습니다. 내 옷처럼 맞는다. 이 정도? 배우가 자기 몸에 딱 맞는 게 어디 있겠어요. 그만큼 노력을 해서 거기에 끼어 들어가는 거죠.”
후배들이 준비해서 멋지게 환갑 헌정 기념공연이 막을 내렸지만 한편으로는 부담감이 크다. 이번 공연을 본 많은 분들께서 칠순 공연 때 또 보자는 인사를 건네니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딱 무서워지기 시작했어요. 내가 그때까지 버텨야 된다는 건데. 지금까지도 진짜 힘들게 버텨왔는데. 나보고 10년을 더 버티란 말인 건가? 무섭지만 한편으로는 지켜봐주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걸 또 힘으로 해서 가겠죠.”
환갑의 나이까지 오면서 굴곡 없이 연기 인생 살아온 것도 배우 박종상은 좋다고 했다. 후배들이 신경 써준 덕에 즐거웠다고.
“어쩌다 헌정 공연까지 하게 된 거고 거기에 대해서 사실 쑥스럽죠. 대단하게 해놓은 것도 아닌데 헌정을 한다니까. 사실은 행복한 거죠. 어떤 사람한테 이렇게 누가 해줄 것이며… 운이 좋다고 생각을 해요.”
‘내가 바로 서야 가족이 바로 선다!’ 진부해 보이는 것 같은 이 말 속에 5070세대의 자아가 녹아들어 있다. 진부하다고 아재 자아로 치부하면 안 된다. 말이 진부하다고 5070세대의 인생이 진부한 것은 절대 아니다. 가족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 어느덧 20~30년이나 훌쩍 지났다. 쏜살같은 세월의 빠름에 총총하던 눈빛은 노안으로 시들고, 숯덩이 같았던 머리칼은 반백으로 눈부시다. 그 덕분인지 미약한 바람에도 쉬 꺾일 것 같았던 연한 연둣빛 새싹 가족이 짙푸른 이파리가 주렁주렁 달린 커다란 재목으로까지 자랐다. 이를 바라보는 5070세대의 마음속엔 뿌듯함이 가득하다. 그런데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기분이다. 그 구멍으로 그동안 잊고 지냈던 내면의 아이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며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 아이의 얼굴을 마주 보노라면 뿌듯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공허함이 비집고 들어온다. 이 공허함과 함께 ‘나는 누구란 말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는가?’ 등의 질문이 솟구쳐 오른다. 이는 내면의 아이가 자신을 어루만져 달라는 메시지다. 5070세대가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행복한 노년을 일궈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애써 외면해왔던 내면의 아이와 잘 지내야 한다.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사주며 달래듯 나의 내면의 아이도 그렇게 달래야 한다. 어떻게 달랠 것인가? 내면의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면 된다. 일반적으로 명상을 많이 권하지만, 오롯이 자신을 위한 소비도 내면의 아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나 중심 소비’라고 해서 내가 원하는 물품을 맘껏 사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런 소비는 내면의 아이가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세파에 찌든 겉모습의 내가 원하는 소비일 가능성이 높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식의 소비로는 내면의 아이를 달랠 수 없다. 오히려 공허함만 깊어질 뿐이다. ‘나 중심 소비’에는 좀 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삶에 대한 태도가 담겨 있다. ‘나 중심 소비’를 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았던 커다란 가치를 발견하고 큰 성취를 이룰 수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잃어버린 꿈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흔히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한다. 청소년은 어른도 어린이도 아닌 주변인이다. 이 때문에 정서적 동요가 심하다. 그 동요가 강한 바람과 성난 파도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중년이라 불리는 5070세대 역시 주변인이다. 패트리샤 코헨이 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년은 “젊음에 집착하면서도 노년으로 흘러넘쳐 들어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중년 역시 질풍노도에 휘둘려 이리저리 떠돈다. 청소년의 질풍노도가 생물학적 특징에서 기인한다면 중년의 질풍노도는 다분히 사회적, 개인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청소년이 학업을 통해 질풍노도의 시기를 넘어가듯, 중년 역시 집중할 대상이 필요하다.
몽테뉴는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빈 땅이 기름지고 비옥하다면 수만 가지 쓸데없는 잡초만 무성해진다. 이 땅을 유용하게 이용하려면 이것을 개간해서 씨를 뿌릴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정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정신은 어떤 문제에 전념하도록 제어하고 강제하는 일거리를 주지 않으면 이런저런 공상의 막연한 들판에서 흐리멍덩히 헤매게 된다.(중략) 마음은 일정한 목표가 없으면 갈피를 잡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말처럼, 사방에 있다는 것은 아무 곳에도 있지 않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중년이 정신적으로 집중할 것은 바로 잊고 있었거나 잃어버렸던 꿈을 되살리는 일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인생에서 중년의 꿈 찾기는 몽테뉴가 말하는 비옥한 땅을 개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중년의 풍부한 사회적 경험은 그야말로 비옥한 땅이다. 이 땅에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도록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어릴 적 꾸었던 꿈에 그동안 모아온 자산의 일부를 과감히 헐어 사용해야 한다. 자식에게 물려줄 돈이라며 아끼다간 중년의 기름진 경험에 잡초만 무성하게 된다.
자식에게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떳떳하지 못한 노년으로, 그야말로 꼰대로 늙어갈 뿐이다. ‘나 중심 소비’는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준다. 뿐만 아니다. ‘나 중심 소비’는 잃어버린 꿈을 찾아준다. 인생이 더욱 풍요로워진다.
자신에 대한 투자다
꿈을 찾기 힘들다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도 삶을 윤택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누구나 하나 이상의 재능은 타고 나는 법이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내가 잘했던 일, 남으로부터 칭찬받았던 일이 분명 한두 개 정도씩은 있을 것이다. 이 일을 찾아내어 더 잘할 수 있도록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의 김경록 소장은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 우리는 퇴직 후 여명이 짧다 보니 별다른 생각 없이 지냈다. 하지만 이제는 3년을 투자하면 20년 이상을 써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전문성과 기술로 무장된 1인 1기는 고령화를 헤쳐갈 안전벨트가 된다.”
이런 점에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에 자산을 사용하는 ‘나 중심 소비’는 자신에 대한 투자의 다른 말이다. 투자 성격의 ‘나 중심 소비’는 생활의 활력소이자 든든한 노후지킴이를 만들어준다. 정년 이후에도 일정한 현금흐름을 계속 창출해주므로 노후빈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자식에게 민폐 끼칠 염려도 없다. 오히려 자식과 손주들에게 용돈을 주는 멋진 부모, 조부모로 대접받을 수 있다. 꽤 괜찮은 투자 방법이지 않은가?
소비를 지혜롭게 하면 기대 이상의 수확을 거둘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믿음이 없이 그냥 내지르는 소비는 ‘나 중심 소비’의 허울을 뒤집어 쓴 세태 추종적 소비일 뿐이다. 괴테는 에서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신뢰하게 된다”고 말했다. 자신을 믿고 ‘나 중심 소비’에 도전하는 5070세대는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밝힐 뿐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도 희망을 준다.
목욕탕에서 웃고 떠드는 한패의 젊은이들의 팔뚝에 전부 입을 벌리고 있는 물고기 잉어의 문신이 있다. 순전히 문신 때문에 이들로부터 조폭의 냄새를 맡는다. 요즘 들어 부쩍 문신한 사람들이 많아졌다. 과시용으로 또는 남들과 차별화된 멋으로 한다. 예전에는 문신한 사람을 경찰에서 불신검문 하기도 하고 문신이 지나치면 군대에도 가지 못했는데 요즘은 민주화 바람을 타고 처벌이 많이 완화된 모양인지 많다.
나이든 우리세대는 문신이란 조폭이나 행실이 나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역사적으로도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 이마에 낙인을 찍기도 하고 노예의 표시로 새기는 불도장도 있었다. 지금도 가축을 구별하기 위해 인식표로 불도장을 찍는다. 우리의 조상들은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불감훼상이 효지시야라’하여 우리의 몸을 훼손하는 것을 불효로 쳤다. 당연히 금방 자라는 머리카락도 자르지 않았다. 하물며 몸속에 검은 먹물이나 이물질을 넣는 문신은 생각지도 못할 큰일 날 자해행위였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조폭을 검거하면 조폭 조직을 나타내는 단체 문신을 보여줬다. 이런 학습효과로 목욕탕에서 등짝에 커다란 용무늬 문신을 한 젊은이를 보면 혹 조폭이 아닌가? 겁이 나서 슬금슬금 피하는 것이 일반인의 보편적 행태다.
오늘 보니 내가 자주 가는 편의점의 총각도 팔뚝에 꽃과 뱀의 조화를 이룬 문신이 있다. 그동안 문신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여름이 되어 소매 없는 티셔츠를 입으니 확 들어났다. 평소 얌전한줄 알았는데 문신을 보는 순간 총각에 대한 이미지가 신선함에서 불편함으로 변했다. 혹시 이 총각이 조폭? 아니면 비행소년?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기분이 씁쓸하다.
편의점 총각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물어봤다.
“그 문신 얼마나 오래 가는 거야?”
“ 평생 가지요.”
말투와 표정으로 보아 당당하고 문신을 한 것에 자랑스러움이 배어난다. 이런 총각을 상대로 문신이 몸에 해롭고 어쩌고저쩌고 해봐야 소귀에 경 읽기고 꼰대소리만 듣는다.
문신에 대해 너그러운 사회가 되었음도 잘 안다. 지하철 에서 가끔 보는 광경이지만 탤런트처럼 아주 예쁘고 날씬한 아가씨의 팔뚝에 꽃무늬 문신은 복점처럼 귀엽고 깜직하다. 스포츠 선수가 보다 강렬한 인상을 주기위한 문신은 팬 서비스의 일종으로 보기 좋다. 시대가 변했는데 미용의 한 방법으로 하는 가벼운 문신까지 나쁘다고 말하거나 이를 탓하려는 마음은 없다. 문신의 부작용으로 피부를 상하게 하는 것도 감수하고 스스로 하겠다는 사람을 굳이 말릴 생각도 없다.
입술에 바르는 립스틱처럼 색조에 변화를 주면서 사람을 돋보이는 지워지는 문신은 애교로 봐주고 싶다. 하지만 문신이 흉악하고 저질스러워 바라보는 사람에게 혐오감이나 위압감을 준다면 하지 말아야 한다. 젊은 한때 우쭐하는 만용으로 문신을 한 사람이 나중에 후회하고 돈을 들여 다시 지우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다. 문신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보자.
심기석 세일ENS 사장은 별명 ‘ 다이소 누님’과 ‘건달’로 유명하다. 2007년 최고경영자로 승진, 현재 장수경영자로 10년째 성가와 성과를 함께 올리고 있다. 인터뷰 당일, 그녀는 살구색 재킷에 인어 스타일의 샤방샤방한 스커트 차림으로 나타났다.
심기석 세일ENS 사장(63)의 별명은 ‘다이소 누님’이다. 등산을 갈 때면 자신의 155cm의 가냘픈 체구보다도 더 큰 집채만 한 배낭을 지고 나타난다. 가파른 산을 올라가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짐을 넘기는 법이 없다. 1착으로 올라가 산마루에서 자리 펴놓고 일행들에게 바리바리 싸온 것을 풀어 먹인다. 짧은 일정의 여행에도 그는 거의 이민 갈 태세의 큰 가방을 밀며 나타나기 일쑤다. 그 커다란 산타자루 아니 트렁크에선 구호품(?)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과일, 홍삼액, 심지어는 플라스틱 소주 컵, 야외 주방도구 일습에서 이쑤시개까지…. 사랑을 퍼주고 나눠주는 선샤인, 아니 문샤인 리더십 덕분에 그의 주변에는 남녀노소가 늘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심 사장이 전통적 의미의 퍼주고 헌신하는 100% 모성형 리더만은 아니다. 그녀의 또 다른 별명은 ‘건달’이다. 바로 건배사의 달인이란 뜻이다. 술자리에선 능숙하게 소맥을 제조하고, 멋진 모습으로 술을 따르는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씩씩한 건배사로 분위기를 선도하는 그녀는 일자리에선 쓴소리를 피해가지 않으며 군기를 세게 잡는다.
심 사장에 대한 조직 내외의 공통된 평가의 핵심은 양수겸장 리더십이다. 호탕한 형님과 따뜻한 누님의 장점을 다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남자 같지는 않지만 남자처럼 일하고, 여성성을 내세우진 않지만 여성성을 최대한 살린다는 평이다. 심 사장의 양극단 별명 조합처럼 건달 누님 리더십이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어중간한 중성의 평균 타협이 아니다. 상황별로 각각의 장점을 살려 평형을 맞추는 게 심 사장 리더십의 특성이다. 아낌없이 베풀며 모범을 보이되, 돌직구 직언도 아끼지 않는 ‘어른의 품격’을 보여준다. 지인들은 심 사장을 가리켜 요즘 시대에 흔치 않는 ‘어른의 롤모델’이라고 입을 모은다.
‘건달 누님 리더십’은 그녀가 전문건설 설비업계 세일ENS에서 뼈가 굵어 최고경영자에 올랐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건설업은 일반적으로 남성 주도의 업종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 공조업이란 ‘여름엔 얼마나 시원한가, 겨울엔 얼마나 따뜻한가와 관련한 냉난방 배관설비를 건축물 내에 시공하는 사업’을 뜻한다. 거대한 건물 속의 모세혈관을 유지하는 일로서 세심한 손길과 관리가 필요하다.
초창기(1970년대 초반)에 책상 두 개와 직원 세 명밖에 없었던 작은 규모의 회사는 이제 직원 100여 명, 일용근로자 2300명 내외의 튼실한 전문건설 설비업계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재수하던 중 전화나 받는 자리로 잠깐 취직한 회사에서 ‘불독 신세’로 사무실만 지킨다며 찔찔 울던 10대 소녀는 그 사이 60대 초반의 통 크고 손 큰 ‘건달 누님’이 됐다.
원래부터 성격이 담대하고 씩씩했나요?
“아니에요. 환경 탓이 큽니다(하하). 살아남기 위해 변화한 겁니다. 건설업계가 남성 주도 업종이다 보니 여자 관리자는 고사하고 직원조차 드물었습니다. 어느 자리이고 참석하면, 홍일점이란 이유만으로 눈에 띄는 겁니다. 회사 안에서나 밖에서나 직급과 상관없이 ‘한 말씀’을 요청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다못해 자기소개 인사말이라도 하라고요. 이때 ‘준비 안 해 못 한다’고 하거나 ‘시킬 줄 몰랐다’고 수줍은 척 뒤로 빼면 ‘능력 부족’으로 못나 보이잖아요.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자, 기억에 남도록 하자는 생각에 늘 공들여 준비했어요. 저는 여자 후배들 교육시킬 때도 ‘건배사 제대로 하는 법’부터 가르칩니다. 차례가 돌아오기보다 자원하라고 말해줍니다. 또 두루 쓸 수 있는 범용 건배사와 자신만의 특성을 살린 필살기 건배사 두 가지를 준비해두라고 강조하지요. 각자 맡은 분야에서 실력은 노력하면 되지만 네트워킹, 사회적응 훈련은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은 선배로부터 배우는 게 효과적이니까요.”
입에 척척, 귀에 쏙쏙 감기는 건배사가 허투루 즉흥적으로 튀어나온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심 사장은 책, 신문을 읽다가도 응용할 것이 있으면 메모하고, 변형하고, 외우고 연습한다. 사자성어로 신조어 건배사를 만들기도 한다. 최근의 히트 건배사는 인사불성(인간을 사랑하라는 말은 불경에도 나와 있고 성경에도 나와 있다), 적반하장(적당한 반주는 하느님도 장려하신다) 등이다. 술을 따르더라도 진기명기의 방법을 개발해 한편의 그럴듯한 퍼포먼스로 승화시킨다. 지방출장을 가든, 해외여행을 가든 사람들의 사는 모습, 먹는 모습, 마시는 모습은 관찰의 대상이고, 그것은 여러 가지 퍼포먼스와 아이디어에 스파크를 일으킨다. 관찰과 사고, 연습의 조합에서 의미와 재미와 흥미의 창조적 아이디어가 탄생한다.
고교 졸업하고 1973년에 취직해 44년간 한 직장에서 근무했습니다. 사원에서 사장까지 오른 성공 비결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내 일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비결이라고 말할 것도 없이 평범하지만 진실입니다. ‘시간이든 돈이든 비용을 덜 들이고, 더 효과적으로, 더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사원, 정확하게는 전화 받는 사환으로 온갖 궂은일을 할 땐데요. 세금계산서가 들어 있는 편지봉투를 그대로 버리는 게 아까운 거예요. 글자가 쓰인 부분만 자르고 봉투 뒷면을 사무실 내에서 메모지로 썼지요. 내 것이란 생각으로…. 구매 일을 할 땐 견적을 뽑아보고 어떻게 협상해야 보다 좋은 제품을 싸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어요. 예전보다, 항상, 남보다 최고 2% 싸게 사는 작전과 목표를 세워 실천했습니다.”
구매 일을 하면서 사람 보는 법도 부가적으로 배웠다고 말한다. ‘저 사람은 곧 그만두게 될 사람, 독립할 사람, 독립해서 공장까지 지을 사람’ 등 나름대로 사람 보는 눈이 생기더라는 것. 10명 중 7명은 심 사장의 예상대로 운이 풀렸다. 족집게 적중률의 근거는 바로 주인의식이란다. ‘내 일처럼’ 진실, 성실, 창조적으로 하는 사람이 독립해서 사업도 잘하더라는 게 나름의 경험상 얻은 결론이다.
회사와 함께 개인적으로도 성장하셨는데요. 회사가 급성장하면 창업공신의 성장속도가 그에 미치지 못해 도태되는 경우도 있더군요.
“중간관리자 시절, 선행학습을 충분히 한 게 도움이 됐습니다. 중간관리자는 말하자면 조직의 관절이에요. 윗사람, 아랫사람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학습하게 되지요. 그러면서 각 입장을 고루 관찰하고 이해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선행학습할 수 있었습니다. 또 마흔 넘어 영업을 하며 고객의 외부적 시각, 내부의 시각을 다 고려해보게 되더군요. 결국은 단계별로 자기의 그릇을 키울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릇이 작으면 상을 차려줘도 밥을 못 챙겨먹습니다. 그릇을 키우는 게 먼저입니다.”
먼저 베풀고, 내 일처럼 하는 회사일, 좋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신세대들은 헌신하다 소진하고 탈진돼 헌신짝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일을 통해 기쁨을 얻는 것 그 자체가 아닐까요. 남의 보상이나 인정을 갈구할수록 실망할 일이 많아집니다. 오히려 남에게 의존적이 되고요. 내가 열심히 하고, 배우는 것을 우선순위로 놓으면 활용당하거나 보상이 적다고 실망하는 일이 적어집니다. 결국은 자기 실력으로 쌓이는 것이거든요. 자신의 시간에, 삶에 충실하지 않고 대충 일하는 것이야말로 책임, 인생 유기이니까요. 성실히 일하면 단기적으로 손해 같지만, 장기적으론 투자입니다. 비유하면 농사와도 같습니다. 씨앗을 많이 뿌린다고 해서 모두 싹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씨앗을 많이 뿌리지 않으면 싹이 날 확률이 줄어듭니다. 일단 노력과 열정을 기울이는 것이 먼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고민을 털어놓는 젊은이를 만나면 ‘잘나가는 것만 부러워하지 말고 어렵고 힘든 부서에 가서 몇 년만 버텨보라’고 말합니다. 나만의 노하우를 쌓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다른 회사, 다른 부서, 어디에서든 잘할 수 있거든요.”
쓴소리 잘해서 ‘비즈니스계의 윤여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들 ‘밥은 사고 말은 참는 것’이 어른의 의무라고들 하는데요.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해서 올바른 소리를 피하는 것은 진정한 어른이 아니지요. 그저 뒤에서 혀만 쯧쯧 차기보다는 뭇매를 맞더라도 옳은 말을 해주는 게 어른의 역할입니다. 당장은 듣기 싫더라도 행동에 도움이 된다면 해야지요. 열 명에게 얘기해서 한 명이라도 받아들여 변화되고, 사회를 밝게 한다면 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나서서 쓴소리를 하는 이유입니다.”
‘사원에서 사장까지’ 성공신화 뒤에 숨은 콤플렉스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왜 없었겠습니까. 지금이야 예순을 넘었으니까 조금 자유로워지긴 했지요. 한창때엔 고루고루 콤플렉스투성이였습니다. 보다시피 제가 인물이 좋습니까, 키가 큽니까, 가방끈이 깁니까. 지금 이 나이니까 어느 정도 풍화됐지만 그때는 정말 고민이 많았어요. 영업을 할 때는 ‘내가 팔등신 미모에 좋은 학벌, 돈 많은 사람’이라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됐을까 많이 아쉬웠지요. 또 내가 처음에는 술을 잘 못했거든요. ‘소주 두 병만 마실 수 있으면 업계 판도를 바꿨을 텐데’ 등등 별의별 생각을 다 했어요(웃음). 돌이켜보니 콤플렉스, 결핍이 오히려 다행이었어요. 부족하고 모자라서 더 노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수수하게 낳아주신 것에 감사하고요. 실력과 학력이 부족한 걸 알기에 더 노력했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건배사 개발도 술을 많이 못 먹어 술자리나 재미있게 만들자는 궁여지책에서 시작됐다. 그가 국내든, 국외든 자주 들르는 곳이 있는데 바로 전통시장이다. 이곳에서 컵 홀더 등 특이하고 스토리가 있는 소품들을 사와 지인, 고객들에게 마음을 담아 선물한다. 골프를 치고 오면 같이 간 일행들의 골프 폼과 대화 등 후일담을 메일로 전하기도 한다. 심 사장에겐 마음을 나누고,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기쁨의 선순환이 사업가로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의미요, 재미다.
이야기가 인맥 쪽으로 좀 흐른 것 같습니다. 모든 관계에서 개척 못지않게 중요한 게 유지관리 아닙니까.
“맞습니다. 잘나갈 때는 누구나 잘해줄 수 있습니다. 위기 때의 태도가 신뢰의 증표입니다. 진정한 신뢰는 못나갈 때도 한결같이 잘해주는 것입니다. 직원들에게 늘 말하는 게 있습니다. ‘우리 세일은 이익이 날 때뿐 아니라 밑지더라도 잘하자!’ 도장을 찍었으면 이유 불문 책임을 지고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자 합니다. 돈을 잃을망정 사람까지는 잃지 말자는 것입니다. 품질이든, 원가든 당초 약속을 반드시 지키자는 것이지요. 평판은 얻기는 힘들지만 잃기는 쉬운 법이거든요. 우선 나부터 충실하고 튼실해져야 합니다. 내가 급급해하면 남을 챙기고 지켜줄 여유를 갖기 힘듭니다. 개인이나 회사나 다 똑같습니다.”
심 사장은 밑질 때의 마음 다스리기 법을 들려주었다. 가령 5억이 남을 줄 알았는데 5억이 밑지면 일반적인 셈법으로 ‘10억을 손해봤다’며 억울해한다. 그는 신용을 지켰으니 3억만 밑진 것으로 나름의 가감승제법을 적용한단다. 당장의 손해가 앞으로 어떤 이익을 가져올지 모른다고 ‘투자’라 생각하며 위로를 한다는 내공 어린 고백이다.
경영자 등산모임 ‘시애라’의 회장도 맡고 계시지요. 최근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봉 트레킹을 열흘간 다녀오시기도 했는데요.
“여행은 가슴 떨릴 때 가야지, 다리 떨릴 때 가면 안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더 나이 들기 전에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육체적 자신감은 물론이고 심리적 에너지를 많이 얻었습니다. 웅장한 자연도 좋았지만 그보다 의미 있는 것은 절대고독의 시간이었습니다. 몸을 뒤척이기조차 힘든 옹색한 싱글 방에서 휑뎅그렁하게 있으며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일에 대한 욕심까지도 포함해서 세속의 먼지를 떨어내고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성공한 경영자들이 의외로 가정 경영은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여성 경영자로서 애환이 더 많았을 것 같은데요.
“‘아침밥은 얻어먹고 다니십니까?’가 내조 점수 체크 질문이지요. 저는 남편이 아침밥을 차려준답니다. 행복하고도 감사한 일이지요. 저는 계란 프라이가 있어야 아침을 먹는데요. 한번은 출장을 갔는데 지인에게 그 사실을 알려줬어요. 밖에서도 계란프라이를 먹도록 챙겨줄 정도예요(하하). 어차피 집안일, 회사일을 다 잘하긴 힘들어요. 솔직히 말해 사장 되고선 주방 들어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잘하는 일을 선택해, 집중하는 게 효과적이에요. ‘집에선 당신 부인이지만, 밖에선 남의 부인으로 생각하라’고 말할 정도로 전투적으로 산 게 우리 시대, 여성 리더의 생존전략이었어요. 기본적으로 서로 소통하고 이해를 구하고 신뢰를 쌓는 것, 그것 이상의 방법은 없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은퇴 계획을 묻고 싶습니다.
“‘박수칠 때 떠나자’는 게 제 신조입니다. 외부 평가보다 내부 평가가 더 좋은 리더로 기억되고 싶고요. 우선 3년 후에 있을 회사 50주년 행사 준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은퇴 후에는 제 장점을 살려 나만의 재미나는 놀이터를 만들고 싶어요. 가깝고 편한 사람들끼리의 작은 공간, 행복살롱을 만들고 싶습니다.”
3시간여 격정적인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심기석 사장이 필자의 명함을 다시 꺼내들었다. 건달 누님 리더십의 직설본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긴장하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조언이 쏟아졌다.
“명함의 글자가 너무 작아요. 글자 배치도 조금 앞으로 와야겠군요.”
어른이 내리치는 죽비소리는 아프기보다는 시원한 법이다. 요즘 신세대들이 기성세대를 꼰대라고 탓하는 것은 ‘발언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발언 자격’의 문제가 아닐까. 어른의 품격은 바른 소리가 아니라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자격에서 우러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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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70세의 중견 배우 윤여정이 인기 고공비행을 하고 있다. 바로 젊은 연예인과 신세대 스타들의 전쟁터로 변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예능 프로그램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윤여정은 인도네시아 발리 인근 섬에서 작은 한식당을 열고 운영하는 과정을 관찰 예능으로 담아낸 tvN 에서 사장 겸 요리사로 나섰다. 윤여정은 에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젊은이들에게 꼰대 짓을 하지 않는 바람직한 어른 이미지를 보여주며 시청자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상승한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맹활약하고 있다.
에서 특유의 소탈함과 함께 현명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 81세의 신구 역시 에서 아르바이트 점원으로 열심히 일하면서도 젊은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고 KBS 에 출연해 기상천외한 입담을 과시하며 장·노년 연예인 예능 스타 붐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70세의 여배우, 81세의 원로 남자 연기자. 한국 대중문화와 연예계에서 이들은 어떤 의미일까. 이 나이쯤 되면 일반적으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은커녕 비중 있는 조연 맡기도 힘들다. 가족이 밥 먹는 장면에만 출연하는 ‘식탁용 배우’로의 전락을 감수해야만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중견 연예인들의 의미 있는 반란과 도전이 시작됐다. 그 반란과 도전의 진원지는 바로 젊은 연예인의 전유물이자 10~30대 젊은 시청자들이 주로 시청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중장년 연예인들이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와 끼, 면모를 보여주고 친근감을 배가시키며 시청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한 이미지의 확장과 인기 상승을 바탕으로 드라마와 영화의 주연으로 나서는 선순환이 이뤄지면서 중장년 연예인의 재스타화가 속속 이뤄지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을 중장년 연예인의 재발견 창구로 부상시킨 것은 바로 2013년 방송된 tvN 다. 황혼의 해외 배낭여행 포맷으로 진행된 는 파격적으로 노년(老年) 예능을 표방하며 당시 78세였던 이순재, 77세 신구, 73세 박근형, 69세 백일섭을 출연시켰다.
를 연출한 나영석 PD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많은 우려를 했다. 중장년 예능 프로그램이 전무한데다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자는 주로 젊은 층이었기 때문이다. 촬영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원로 연기자 이순재·신구·박근형·백일섭씨의 모습을 보면서 성공을 예감했다”고 말했다.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은 에서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하고 의외의 재미있는 모습을 드러낸데다 연륜이 주는 현명함까지 전달돼 할배 신드롬이 일었고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장·노년 출연자가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의 성공 이후 방송사들은 경쟁적으로 중장년 연예인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쏟아냈다. 또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젊은 연예인들과 함께 고정 멤버로 출연하는 중장년 연예인도 많아졌다.
결혼을 졸업했다는 고백으로 우리 사회에 ‘졸혼(卒婚)’을 화두로 던지며 공론화했던 백일섭(73)과 이혼 이후 혼자 살며 다양한 취미생활과 여행을 하며 활기차게 장년의 삶을 사는 김용건(71)은 각각 KBS 과 MBC 를 통해 살림살이에서 여가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들은 혼자 사는 장·노년 사람들의 생활 트렌드를 이끌 뿐만 아니라 유익한 삶의 정보까지 제공해 사랑을 받고 있다.
김국진(52), 강수지(50) 등이 출연하는 SBS 과 김건모(50)가 나오는 SBS 는 중년 연예인의 이미지 확장과 인기 부활 예능 프로그램 역할을 하고 있다. 혼자 사는 중년 연예인들이 여행을 하거나 미션, 놀이를 하면서 싱글 중년의 삶과 문화, 그리고 사랑에 대한 실태와 인식을 보여주는 에서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로맨틱한 김국진의 모습, 소탈한 김완선의 이미지 등을 엿보면서 많은 사람이 중년 연예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의 출연을 통해 천진무구한 모습과 충격적인 행태를 보인 김건모에게 대중은 더욱더 친근감을 느끼고 있다.
에서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이순재·윤여정, 백일섭·신구·김용건·이한위·김구라를 비롯한 중년 및 장·노년 연예인들이 이미지를 확장하고 새로운 모습과 끼를 선보이며 예능 스타 반열에 오르고 있다.
김용건은 “를 통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줄 수 없는 사적인 부분을 편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는 부분이 많았다고 하더라.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이 드라마나 영화의 캐릭터 확장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며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중년, 장·노년 연예인의 재발견과 인기 부활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젊은 시청자들에게 중장년, 노년층에 대한 이해의 접점을 확장하는 계기도 마련해준다. 에서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노년 예능 프로그램을 선보인 나영석 PD는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장·노년 연예인의 모습을 보면서 젊은 시청자들이 이들 세대에 대해 더 많은 부분을 알게 되고 이해의 범위도 넓어져 세대갈등 해소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백일섭은 “드라마와 영화를 할 때는 중장년 사람들이 나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와 등 예능 프로그램을 하면서 10~30대 젊은 팬이 많이 생겼다. 거리에서 젊은이들이 사인을 요구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