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 mute93@daum.net
‘책의 역사에 대한 현학적인 진술’은 삼가겠습니다. 그러면서 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형편에서 보면 책은 아무 데나 있습니다. 너한테도 있고 나한테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책은 낯설지 않습니다. 지천으로 아주 흔한 것이 책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을 대체로 그리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벼운 발언입니다. 하지만 드물지 않은 것이 책이라는 뜻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책의 품격이 다른 사물들보다 당연히 높게 평가되어야 할 까닭이 별로 없다는 뜻에서도 그러합니다. 필요하면 찾고, 더 이상 간직할 까닭이 없게 되면 언제나 버릴 수 있는 것이 책입니다.
아무튼 아무 데나 있고 아주 많은 것이 책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책이 없으면 존립이 불가능하다고 일컫는 대학 도서관에서 ‘철 지난 책’들을 버리는 ‘작업’을 본 일이 있습니다.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파기’되는 책들을 보면서 “책이 많았구나. 아니 정말 많았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찍이 책에 관해 익힌 것들은 이렇게 묘사하는 ‘풍경’과는 전혀 다릅니다. 책은 귀한 것, 드물게 귀한 것, 아주 귀한 것이라는 거의 ‘절대적인 선언’이 책과 관련하여 하나의 풍경을 이룹니다. 책에 관한 이러한 태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아득한 때부터 그래 왔습니다. 이 주장만큼은 변하지 않는 이른바 ‘규범적 당위’도 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책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그 당위를 뒷받침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성숙을 기해야 합니다.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잘못 안 것을 고치게 되고,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을 상상하게 되면 삶이 얼마나 넓어지고 깊어지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책에 대한 규범적 당위는 ‘독서의 필연성’을 절대화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책-풍경은 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책은 책이되 모든 책이 책은 아니다’라는 데서부터 그 당위는 심한 소용돌이를 짓습니다. 읽어야 할 책과 읽어서는 안 될 책들이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한 판단 준거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이를 실제로 실천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힘’이 행세를 합니다. 금서목록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필독도서목록도 등장합니다. 게다가 그 목록은 힘의 바뀜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 책을 읽고 이런 감동을 경험하지 못한다면’이라든지 ‘여기 기술된 분노에 공감하지 않는다면’이라든지 하는 규범조차 그 힘은 당위로 요구합니다. 책읽기는 때로 힘에의 ‘예속’과 다르지 않다는 묘사를 하게 합니다.
이런 ‘커다란 풍경’ 아니고도 자디잔 모습들에 대한 묘사도 곁들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쓰여 있나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왜 그것을 저자가 썼을까를 알기 위해 행간을 읽어야 그것이 책을 읽는 것이다”하는 ‘잔 말씀’에는 아직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꼼꼼하게 읽어야’라든지 ‘듬성듬성 읽어도’라든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만’이라든지 ‘흥미조차 없어도 읽어 마땅한 것이라면’이라든지 ‘재미가 있는 것을 읽어야’라든지 ‘무릇 쉽고 단순해야 그것이 좋은 것’이라든지 ‘삼매경에 이르지 못하면’이라든지 하는 데 이르면 이어 겸손하기가 꽤 어려워집니다. 그러다 ‘새벽독서를 하는 것이’라든지 ‘여행 가방에 책 몇 권 넣는 것이야말로’라든지 ‘한 달에 도서 구매비가 얼마는 되어야’라든지 ‘국민 1인당 독서가 연간 몇 권도 안 되는 우리는’ 하는 데 닿으면 ‘폭발하는 질식’을 묘사할 수도 있게 될지 모르는 풍경이 그려집니다.
뿐만 아니라 ‘책을 위한 책 간직하기’에서 비롯하여 ‘책을 위한 책 읽기’에 이르는 책-풍경조차 묘사할 수 있습니다. 책을 기리는 책에 대한 당위적 규범은 마침내 ‘책-종교’를 낳고 있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아득한 때부터 이렇듯 책-종교의 신도로 책을 만나고 읽고 간직해 왔습니다. 종교인들이 경전을 모시듯 그렇게 책을 모셔 온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흔히 아주 못된 전제라고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책은 지천입니다. 책이 아니고도 책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는 매체가 얼마나 다양해졌는지 모릅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 문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책을 안 읽어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고,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책 없으면 더 쉽고 편하게 그렇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조차 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책을 다 버릴 필요도 없고, 책을 가볍게 볼 까닭도 없습니다. 여전히 책은 책다움을 지니고 지금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하지만 책-종교의 신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 삶을 위해 아무런 ‘적합성’을 갖지 못합니다. 허황한 환상을 좇게도 하기 때문입니다. 바야흐로 사람들은 ‘책으로부터 벗어나 책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스스로 책이나 책 읽기의 주인이 되는 일입니다. 마구 말씀드린다면 이 일에 누구의 어떤 조언도 거절하는 태도를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내 책과 책 읽기의 태도에 책임 주체가 되어 기존의 책-문화에서 놓여나기를 기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당장 내 옆에 있는 책을 집어 읽기 시작하면 됩니다. 읽으면 알게 되고, 읽으면 스스로 책과 책 읽음의 주인이 됩니다. 이보다 더 쉬울 수가 없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한 책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단 하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터득한 감격을 다른 사람들에게 ‘책과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이를 읽어야 할 것인가’ 하는 거창한 주제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기를 아울러 다짐하는 일입니다. 어차피 ‘책 없이도 살 수 있는 책 많은 세상’인데 조금만 겸손해도 그것이 훌륭한 미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정진홍(鄭鎭弘) 서울대 명예교수
1937년 충남 공주 출생. 서울대 종교학과 졸. 서울대 대학원 석사, 미국 유나이티드 신학대학원 석사,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 박사. 명지대. 서울대. 한림대. 이화여대 교수. 아산나눔재단 이사장, 울산대 철학과 석좌교수 역임.
‘KDB시니어브리지’는 KDB나눔재단의 후원으로 설립한 센터인데, 이는 민간 최초의 시니어 지원기관이다. '시니어, 재능 나누고 행복 더하기' 라는 목표를 세우고, 시니어가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전문성을, 지역사회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사회공헌활동을 통해서 사회참여를 함과 동시에, 남은 삶을 잘 설계하고, 교육을 해서, 시니어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설립목적이다.
필자는, 시니어가 되고 부터 ‘노인 한사람을 잃으면 도서관 하나를 잃는 것과 같다’는 말을 자주 들어 봤는데, 그것은 시니어가 쌓아온 경험과 재능, 전문성이 우리사회의 중요한 자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KDB시니어브리지센터에서는 시니어의 후반생 설계를 돕는 교육과정으로, ‘시니어 브리지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시니어의 경험과 전문성을 활용할 수 있는 ‘사회공헌 인턴십’ 과정을 두고 있다. 또, 시니어 관련 정책, 취업·창업 정보 등 각종 ‘정보제공’을 하고, 소그룹 활동을 지원하는 ‘교류 공간제공 서비스’도 하고 있다.
KDB시니어브리지센터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교육 받은 것을 활용해서, 사회에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활동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교육을 하고 있다.
필자도 요즘, KDB시니어브리지센터에서 시니어 브리지 아카데미의 전략직종 과정인 ‘신용상담’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45명 교육생 중에 40명이 금융기관을 퇴직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금융기관을 퇴직한 사람들의 참여율이 높은 이유는, ‘신용상담’은 개인회생이나, 워크아웃과 관련된 상담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융관련 경험과 전문성을 갖춘 사람들이 그 지식과 재능을 활용하기 좋은 직종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많은 시니어들이 KDB시니어브리지센터를 이용해서 삶의 질을 높이고, 남은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그리고, 보람차게 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어느 언론사 기자가 문주장학재단에 대한 기사를 썼는데 내가 환갑이 되기 전에 기금 200억 원 달성이 목표라고 마음대로 쓴 거야. 그래서 당신 때문에 200억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랬지. 그래서 달성해 버렸어(웃음).”
국내 디벨로퍼(부동산개발 업체) 1세대의 대표주자인 문주현(文州鉉·58) MDM 한국자산신탁 회장은 유쾌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서 비범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문 회장은 자신의 회사와 함께 문주장학재단을 세웠다. 그리고 재단은 어느새 회사 자본금보다 더 큰 규모가 됐다. 이제 남부럽지 않은 경력과 성취를 이루게 된 그가 어째서 그토록 사회 환원을 추구하는 걸까? 문 회장이 갖고 있는 돈과 사회, 그리고 시니어로서의 삶에 대한 철학을 들어본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 사진 이준호 기자 jhlee@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만 하는 ‘노예’처럼 살았던 그는 검정고시에 합격한 후,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독하게 가난했다. 후배 집에 얹혀살면서 생활비를 벌어 겨우겨우 필요한 돈만 메꿨던 생활. 2015년 매출액 4193억원을 기록한 MDM의 회장이자 한국자산신탁 회장을 겸하고 있는 국내 디벨로퍼 1세대 성공 신화의 주인공 문주현 회장의 20대 시절 얘기다.
가난한 사람이 돈의 소중함을 안다
“그러던 시절, 대학교 3학년 때 모 독지가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그때가 시작이었어요. 세상에 아무런 조건 없이 어려운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과 약속했습니다. 내가 돈을 벌게 되면 나도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그의 약속은 현실이 되었다. 그는 현재 200억 원가량의 기금으로 운용되는 문주장학재단을 갖고 있다. 2014년 기금 100억 원을 달성한 후 불과 2년 만에 그 두 배를 달성한 것이다. 재단은 2002년부터 초·중·고·대학생 1750여 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2001년에 장학재단을 세우니 직원들 사이에선 회사 일을 안 하려나 보다 하고 소문이 났어요. 그러나 사람은 자기만족이잖아요? 내가 약속한 거고 신세를 졌는데, 해야지.”
문주장학재단의 수혜 대상자는 무조건 형편이 어려운 사람으로 선정된다. 그 외 특별한 선정 기준은 없다. 요즘은 돈을 많이 가질수록 공부도 더 잘하는 세상이다. 문 회장은 가난한 이들은 돈을 소중하게 쓴다는 신념이 있다. 그것은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세상에 증명한 사실이다.
“장학 대상자는 웬만하면 바꾸지 말라고 해요. 다만 성적이 급격히 떨어지면 바꾸라고 하죠. 돈까지 대주는데 공부를 안 하는 건 기본이 안 된 거니까.”
돈이란 내 것이 아니다
문 회장은 장학재단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이 쑥스럽다고 말했다. 그저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을 할 뿐이라는 말이었다.
“장학재단을 하다 보니 나를 돈을 많이 벌었다고 소개를 안 해주고 좋은 일을 한다고 소개해줘요(웃음). 아 세상이 이렇구나 싶었죠. 물론 나보다 돈 많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런 거겠지만, 회사보다 자본금이 더 큰 장학재단을 갖고 있어서 그렇겠죠.”
문 회장의 사회를 향한 지원에는 장학재단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고향인 전라남도 장흥의 모교에 씨름부를 만들고 공공버스도 운용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덕분에 전국 우승도 다수 경험하는 강한 씨름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청에 마련된 서울책방이 다시 문을 여는 데는 문 회장이 쾌척한 1억원이 있었다. 국내 최초의 여자바둑대회에는 2억원을 내놨다. 모교인 경희대학교에도 매년 1억원 이상을 기부한다.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그가 갖고 있는 돈의 철학이란 무엇일까?
“돈이란 무엇인가? 내 것인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사회로부터 얻은 거고,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관리하라고 맡긴 겁니다. 이걸 갖고 자기 거라고 유세를 떠는 건 잘못된 거예요. 그리고 이 돈이 내게 관리하라고 온 것은 일정 부분을 사회에 내놔야 한다는 의미라고 봅니다.”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을 돕지 않으면 이 사회의 양극화가 해소될 방법이 없고 시장경제가 지탱할 수 없다. 문 회장의 ‘돈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그러한 진실을 우회해서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그가 유독 젊은이들에게 기부의 타깃을 맞춘 것도 그들이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잘못 만난 것은 자기 탓이 아닙니다. 대신 정신이 올바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문주장학재단은 예술계 쪽 지원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 아직 본격화된 것은 아니지만 여러 방향에서 검토하는 중이다.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보니 문화예술계 쪽이 굉장히 어려워요. 그런 사람을 도와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능력 있고 자질 있는 사람을 골라서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이상문학상’처럼 공모를 통해 권위가 있도록 만들어야겠죠. 아직 밑그림을 정확하게는 안 그렸지만 오페라, 소설, 악기 쪽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시재생, 사회를 위한 또 하나의 인생 목적
최근 문 회장이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도심재생 사업이다. 그에게 시기가 괜찮은지를 물어보자 확신처럼 ‘해야 할 시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시재생을 지금까지는 자기 지역, 구역 별로 민간에서 했는데 민간이 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앞으로의 세계는 도시가 국가 브랜드입니다. 싱가포르, 홍콩, 도쿄, 뉴욕 등등을 봐요. 관광할 때 그 나라를 왜 가느냐는 겁니다. 관광은 자연관광과 도시관광으로 나눌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자연관광이 취약합니다. 그렇다면 도시관광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을 도시 관광 국가로 만들려면 도시재생이 이뤄져야 합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살 거주 공간으로서의 도시의 공급이 부족했다. 그래서 신도시를 마구, 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저출산, 저성장기가 도래했다. 더 이상 신도시는 안 만들어질 것이라고 문 회장은 진단했다. 그렇다면 오래된 도시를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도시재생이 중요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문 회장은 발 벗고 뛰는 적극적인 ‘전도사’였다.
“공청회나 세미나를 하자, 우리나라의 발전 방향을 토론해보자. 하다못해 광화문, 테헤란로 등등으로 나눠 섹터 별로라도 하자라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는 민간과 같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에요. 도시 부동산은 대개 개인 소유라.”
문 회장은 우리가 아이디어가 부족한 나라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관광을 대개 일본이나 홍콩, 싱가포르로 가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가서 보는 게, 결국 우리나라 건설회사들이 지어 놓은 걸 보는 거예요.”
실로 예리한 한마디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개발과 보존은 공존해야 합니다. 북촌이나 서촌 같은 문화적 가치가 있는 지역은 보존해야죠. 다만 재개발해야 하는 곳은 과감하게, 제대로 개발해야 합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대성공하면서 흔히 강남스타일이라는 표현을 하지만, 막상 강남을 가면 갈 데가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밤이 되면 거리는 죽고 뒷골목만 살아난다. 문 회장의 주장대로 도로 옆에 문화공간을 배치하여 문화 향유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함으로써 진짜 ‘강남스타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건설회사는 도면대로 짓고, 도면이 없으면 한 삽을 못 떠요.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죠. 반면 디벨로퍼는 지휘자고 소프트웨어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상상력을 실현하는 이들이죠.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우리나라에도 종합부동산 금융그룹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버타운, 도시와 함께 하는 공간이 되어야
“나이 들어 은퇴하면 인생에 낙이 없어요. 즐거움, 기쁨, 재미가 없어지죠. 젊었을 때는 뭐든 재미있었는데. 그래서 더욱 손주에게 끌리는 거겠죠. 나도 늦둥이가 있어요. 지금 제주도에 있는데 ‘네가 아빠 희망이지’라고 말하곤 해요. 손주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시니어이자 부동산 전문가로서 문 회장은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의 마음도 꿰뚫고 있었다.
“실버일수록 도심으로 들어오고자 합니다. 전철, 공원, 병원 옆으로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손주들을 못 보기 때문이에요. 실버가 되면 외롭습니다. 그러니 무조건 전철역 근처에 자리를 잡게 되는 거예요. 어느 성공한 시니어가 하는 말이, 자식들이 손주를 데리고 와서 자신에게 맡기고, 장을 보러 간다든지 하면 손주와 함께 있는 게 그렇게 즐겁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신이 지방에 있으니 전화만 하고 안 와서 섭섭하다는 겁니다.”
문 회장은 실버타운을 짓는다면 신경을 써야 할 부분으로 기능적인 구분을 꼽았다. 몸이 불편하여 간병인 등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곳과 건강한 사람들이 모여 친구들과 취미 생활 등을 할 수 있는 시니어 타운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혹은 두 영역을 합친다 해도 중간에 병원을 두어 병원을 중심으로 분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둘 다 도심에 있어야 한다는 건 공통된 조건이다.
“실버타운은 구성원의 특성상 죽음과 밀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젊음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사람들과, 도시와 섞여 살아야 해요. 구분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장은 굉장히 성장할 것이고, 정부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주위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산다
문 회장은 올해로 환갑을 목전에 둔 나이가 됐다. 그에게도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 있을까?
“사실 후회를 좀 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돈은 벌었을지 모르지만 내 청춘이 가버렸잖아요. 생각해보세요. 제가 연애를 잘 해봤겠어요? 당구도 못 치지. 그때는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삶 자체가 옆을 볼 수가 없었던 시절이었죠. 아내가 저에게 ‘음악을 알아?’, ‘그림을 알아?’ 하고 물어요. 그럼 저는 ‘몰라’라고 대답할 수밖에요. 저는 솔직한 얘기로 너무 안 해본 게 많고 모르는 게 많아요. 내 업무와 내가 하는 부분만 알지. 그래서 요즘은 정말 여행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될 수 있으면 비행기로 6시간 이내로 끊어서 가려고 해요. 좀 더 많은 여행을 하는 것, 그게 제 인생을 위한 중요한 일이겠네요.”
문 회장은 아내가 자신을 보며 종종 불쌍하다고 말한다고 한다. 일밖에 모르니까. 그런데 그는 일이 없으면 공허해지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말하자면 문 회장은 자신을 돌보고 아끼는 데 익숙하지 않은, 그 부분을 일로 채우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렇게 안 하려고 해도, 그게 쉽게 안 돼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비빔밥이에요. 비벼서 빨리 먹고 일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인 거죠. 그리고 비생산적인 데에는 투자를 안 하려고 해요. 와이프는 왜 남은 도와주면서 자기는 그렇게 안 하냐고 타박합니다. 그런데 남을 도와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는 일이죠.”
힘들었던 어린 시절, 서른 살이 넘어 입사한 나산에서의 승승장구, IMF 한파로 인한 퇴직, 퇴직 후 MDM 설립과 한국자산신탁 회장이 되기까지. 고난과 성공을 오가며 쉼 없이 살았던 그가 살면서 이것만은 지켜야겠다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 주위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내 돈 몇 푼이 중요한 게 아니고 뭘 하든지간에 같이 상생할 수 있는 일을 우선했습니다. 이 일을 하면 참여자들이 만족하느냐, 소비자가 만족하느냐, 사회가 만족하느냐가 기준이었죠. 그래서 저는 디벨로퍼의 도덕성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건물을 짓는다고 했을 때, 이걸 짓다가 멈춰 서버리면 사회적 악이 돼요. 금융사, 시공사, 협력업체, 분양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시의 흉물이 되잖아요. 그만큼 디벨로퍼란 정> 문주현 MDM 회장
1958년 전남 장흥에서 9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1978년 대입 검정고시를 보고 군대까지 다녀온 뒤 1983년, 27세의 늦은 나이에 경희대 회계학과에 입학·졸업했다. 1987년 나산실업에 입사, 부동산개발 사업에 발을 들였고, 7번의 특진을 통해 최연소 임원이 됐다. 하지만 나산그룹은 IMF 외환위기를 맞아 부도를 맞았다. 그는 재취업을 고민하다가 1998년 분양대행 업체인 MDM을 만들었다. 2007년 첫 시행사업에 나서기 전까지 ‘분당 코오롱 트리폴리스’, ‘분당 파크뷰’, ‘목동 현대 하이페리온’ 등 굵직한 주상복합 건물의 분양대행을 도맡았다. 2001년 재단법인 문주장학재단을 설립해 현재 출연금을 200억원까지 늘렸다. 2010년 한국자산신탁을 인수했으며 2012년 한국자산캐피탈을 창립했다. 2013년부터 서울시탁구협회 회장, 2014년부터 한국부동산개발협회 회장, 2015년부터는 전국검정고시 총동문회장을 맡고 있다.
내리쬐는 태양이 뜨겁다. 입추의 절기가 지났는데 폭염은 식을 줄 모른다. 자기도 모르게 짜증스러워진다. 군중을 향한 집단테러를 비롯하여 상상을 초월한 일련의 사건들이 혼돈에 빠뜨리게 한다. 간혹 조물주는 느슨해지는 인간에게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고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지 모른다. 현세는 각박한 삶의 연속이라 말하는 사람도 많다. 얼핏 보기에 그런가 싶지만, 눈을 지긋이 감으며 다시 바라본 세상은 아름답다. 폭염 아래에서 여름의 낭만을 즐기는 사람도 많아서다. 자연과 사람이 아름답다. 백사장 모래톱에 두 발을 나란히 담그고 바라보는 자정이 넘나드는 밤하늘의 별은 신비하기조차 하다. 서산에 걸린 상현달은 그림이다. 볶고 지지며 사는 세상이라 하여도 요모조모 살펴보면 정겹다. 살맛이 나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현자(賢者)들은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 설파했다. 마음먹기에 달렸고 보기 나름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나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를 좋아한다. 일상의 분주한 생활에서 카메라를 들면 세상이 네모 상자 안에 아름답게 자리한다. 눈에 보이는 생명체가 모두 정겹고 기쁨으로 다가온다. 세상의 번잡함을 잊는다. 요즘 철에는 숲 속 부엽토를 비집고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버섯이 눈길을 끈다. 먹을 수 있는 버섯과 먹을 수 없는 독버섯이 제철을 맞는다. 대부분의 버섯이 독을 지녔지만, 나는 그 색감과 자태에 매료된다. 좋은 피사체다. 망태버섯이 그 대표격이다. 노란 색깔과 벌집 모양의 패턴 구조가 신비스럽다. 지고 피는 시간도 짧아 행운의 수간과 만나야 담을 수 있다. 산속에서 만나는 버섯의 아름다움에 아침마다 빠져든다. 저녁노을에 붉게 반짝이는 모래사장의 눈부신 빛깔이 있다. 해변가를 거니는 아가씨의 농익은 각선미가 시선을 사로잡지만, 땀방울이 맺힌 농부의 구릿빛도 얼굴도 좋다. 초봄의 여린 연둣빛에서 초록으로 짙게 바뀌는 산야의 녹음방초가 그렇다. 가슴에 뜨거운 열정을 불러일으켜 주었던 흐드러지게 핀 철쭉이 그랬고 한두 송이 피어나는 오뉴월의 여왕 장미도 그랬다.
그러나 나는 일반인이 눈여겨 보지 않는 들녘에 피어난 이름 모를 작은 들꽃에 더 정감을 갖는다. 살지 못할 것만 같은 바위 틈새에서 생명력을 보여주는 한 떨기 갓난아기 손톱만 한 꽃송이에도 매료된다. 바람에 작게 흔들리는 쇠뜨기 군락도 장관으로 보이고 메마른 돌부리 많은 언덕에 안쓰럽게 피어난 하얀, 분홍, 샛노란 씀바귀도 주변에 자라는 가느다란 줄기와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가 된다. 카메라 화면에 들어 앉는 이러한 모습은 환상이다. 고색창연한 돌담 곁에 작지만, 고고하게 꽃대를 올리는 개망초는 여지없는 동양화다. 봄철엔 산과 들의 습한 구석에 떼지어 노랗게 핀 애기똥풀도 있었다. 이름 자체가 귀엽고 이른 아침 해가 나무 사이로 비추면 군락으로 핀 그 모습은 더욱 환상이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구석이 있음을 발견한다. 개미를 위하여 꿀샘을 줄기에 뿜어내어 놓는 애기똥풀의 나눔 정신도 배워 볼만한 교훈이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그들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가슴을 활짝 열면 여유롭게 흔들리며 바람 부는 대로 살아가는 자연의 섭리가 다가온다. 산새들과 풀벌레의 노래도 배경음악이 되어 어울린다. 참 아름다운 모습에 빠져들고 정겨운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보잘것없는 그들에게도 놀랄만한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초대받은 귀한 손님이 되어 어우러져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런 모습을 발견한 나는 큰 기쁨을 얻는다. 감동이다. 작은 관심으로 얻는 기쁨이다. 그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는다.
사진은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라 하는 이유다. 유명한 사진 촬영지 여행보다 주변의 돌담길이나 들판, 산언저리, 강가나 실개천 가를 거닐기를 좋아하는 이유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동네의 사람 냄새가 나는 이웃들의 일상에서 행복을 찾기를 좋아한다. 공원 나무 그늘의 벤치에 줄지어 앉아 세상살이를 이웃처럼 얘기하는 동네 할머니들의 모습도 즐겨본다. 문 닫힌 가게 앞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 모습도 즐겨 찍는 사진 소재다. 수양 버드나무가 휘늘어진 둑길을 드물게 지나가는 허리 굽은 할머니를 기다리면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한다. 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다. 사진은 기다림이라고 했지 않은가? 세상의 모든 잡다한 일들을 렌즈에 담아 고운 모습으로 승화하려 한다. 곱게 보면 모두가 아름다워지는 생활의 진리다.
카메라로 담아내는 행복한 세상의 이야기다. 글도 글이지만 한 장의 사진으로 그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기를 좋아한다. 사진으로 써 내려가는 무언의 글이다. 이웃이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가까운 사람들과 공유하기도 즐겨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누기를 좋아한다. 렌즈로 본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을 말이다. 아름답게 보니 아름답다.
강좌를 하나 들으려고 해도 비용이 만만치 않다. 1년이고, 2년이고, 지속적으로 이런 강좌, 저런 강좌, 골라서 듣게 된다면, 그 비용은 모두 얼마나 들까? 아마도 대부분의 시니어들은 비용 때문에 강좌를 골라 듣기는커녕, 강좌 한 개를 들으려고 해도 이리 재보고, 저리 재보고, 그러고도 망설이다가 결국 포기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전국적으로, 자치단체나 복지관에서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무료나 아니면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도록, 많은 강좌를 열고 있다. 시민이나 지역 구민에게, 자신들이 필요한 대로 마음껏 골라서 배워,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국민의 행복을 위한 복지정책을 펴고 있는 것이다.
또, 지금은 ‘자원봉사와 나눔’이 화두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봉사하기를 희망하는 시대가 되었는데, 강사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의 복지정책에 힘입어 실력 있는 강사들의 재능기부 덕분에 고품격의 질 높은 강의를 마음껏 들을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필자도 시니어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면서 이런 무료교육을 골라서 계속 듣고 있는데, 이제라도 잃어버린 꿈을 찾아서 이루어 보려는 것이다. 7월에는 ‘시낭송 교육’을 받았다. 필자는 시인이 되려는 꿈을 갖고 있는데, 시가 너무 어렵게 느껴져서 우선, 시낭송을 취미로 하면서 시와 가깝게 지내기 위해서다. 그 꿈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꿈을 꾸고 있을 때가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를 생각하면 그 순간 멈추게 되므로,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오랜 시간을 두고 꾸준히 해 보려고 한다.
이다음, 필자가 아주 나이 많아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사람들과 말 한마디 나누어보지 못하는 시간들을 맞닥뜨리게 될 때가 오면, 그때에는 큰소리로 시 낭송을 하고 싶다. 그러면 입에서 곰팡이는 피지 않겠지! 이런 말을 듣는 지인 중에는 너무 서글프다고 하는데, 필자는 서글픈 것이 아니라,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는 방법을 만드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나이든 부모가 바쁜 자녀들에게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데, 그것이 더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젊은 사람은 바빠서 힘들고, 또, 바빠야 살 수 있는 것을, 왜 모르는가! 자녀들이 바빠서 찾아오지 못 할 때는, 불평 말고 혼자서도,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 일을 미리 만들어 두는 것이 지혜다.
시 낭송은 또 한편으로는 자꾸만 마음이 메말라 가고, 영혼이 피폐해져 찌들어가는 삶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해준다. 필자는 가끔, 한편의 시 낭송을 통해서 영혼을 순화시키곤 한다.
이렇게, 정부의 복지정책을 찾아서 잘 활용하면 삶이 훨씬 더 행복해지고, 품격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필자는 재능기부로 이루어지는 교육을 통해 새로운 꿈이나, 혹은 잃어버린 꿈을 찾아 이루어 나가기를, 많은 시니어들에게 권하고 싶다.
필자는 지난달 6월 23일부터 24일까지 1박 2일 간의 ‘인생나눔교실’ 멘토봉사단 강원권 1차 교육 워크숖을 다녀왔다. 2개월 전 지인의 소개로 사업을 알게 되었고 지원신청서를 접수한 후, 1차 서류 심의와 2차 면접 심의를 거쳐 멘토봉사단 후보로 선발되어 이번 워크숖에 참석하게된 것이다.
인생나눔교실에 대하여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하여 간단히 소개해 드린다면, 문화체육관광부가 사업 지원 및 운영 총괄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멘토 선발과 교육을 담당하며 사업의 전반적인 세부계획을 수립합니다. 전국의 5개 권역(수도권, 강원권, 충청권, 영남권, 호남·제주권)에 있는 지역주관처는 멘토 관리와 활동을 지원하고 멘티 기관에 매칭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튜터는 멘토를 가장 가까이서 지원하는 기획자로 멘토링 프로그램 설계 시 멘토의 경험과 지혜가 멘토링에 잘 스며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5개 권역별로 튜터 5인, 멘토 50인 내외를 선발하여 멘티기관(중학교, 지역아동센터, 보호관찰소, 군부대, 북한이탈청소년대상기관 등 총 250개 그룹)과 연계하여 멘토링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 사업을 추진하게 된 동기는 급속히 진행되는 핵가족화와 전통 커뮤니티의 붕괴는 각종 사회문제로 이어져 어려움을 겪는 초보자 세대들이 많아지고 있다. 전통사회에서는 결혼, 육아, 취업, 입대 등의 문제가 그리 큰 어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나, 현대에는 초보자들에게 커다란 어려움과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이러한 다양한 문제는 국가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어 이를 해결하기 위한 나눔·소통·배려의 인문정신가치가 구현될 수 있는 사업을 필요로 하고 있는 상황이다.
2014년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인생나눔교실은 이와 같은 우리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경험하고 극복한 숙련(은퇴)세대와 초보자(새내기)세대 간에 나눔과 배려·소통·공감의 인문정신가치가 체계화 되도록 하는데 주요한 목적이 있다.
그러다 보니 교육내용은 인생나눔교실에 참여하는 핵심주체인 멘토는 숙련세대, 은퇴세대, 노년세대 등으로 지칭되지만, 고령사회로 전개되는 현대사회 흐름 속에서 멘토로 새롭게 인생2막을 열어갈 수 있도록 하고, 사회적 변화에 긍정적인 인식을 확장하고, 다양한 환경과 세대 층으로 구성된 멘티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멘토에 대한 개념적 이해와 소양과 마음가짐을 갖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물질적 성장이 정신적 풍요로 이어지지 못하고 점점 더 마음이 빈곤해지는 현재의 안타까운 현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전 세대가 함께 고민하는 과정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사회변화 속에서 전 세대 모두에게 중요한 물음이 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노년(숙련)세대는 삶을 통해 켜켜이 쌓아온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여러 세대와 소통하고 교감하면서, 인생 선배이자 삶의 길잡이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선배세대의 삶속에 녹아 있는 인문적, 정신적 가치를 다른 새내기 세대와 나누고 교류하며 함께 행복해지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인생 나눔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번 교육을 다녀오며 특히 지금까지의 삶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고, 미천한 필자의 경험과 지혜일지라도 봉사하려는 마음과 열정을 되새기는 좋은 기회였다.
인생선배인 시니어 세대가 삶을 통해 쌓아온 지적, 정신적 자산과 몸소 겪으며 체득한 지혜와 연륜은 훌륭한 가치가 있다. 이를 다른 세대들에게 나누고자 할 때 가뭄에 단비처럼 촉촉이 마음을 적시고 세대를 넘어선 공감을 이끌어 내는 힘을 발휘할 것이라 믿는다.
제주도에는 가끔 갔지만 한라산에 올라 백록담을 못보고 내려오기를 여러 번, 기어코 이번에는 백록담을 보고 오기로 하고 2박3일의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 인생이라는 게 다 그렇 듯, 다람쥐 채바퀴 돌 듯 돌아가는 세상에 늘 퍽퍽하고 지루하기만 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고자 군 시절의 동기인 3부부가 의기 투합하여 꽃향기가 그윽한 5월의 어느 날 제주도로 떠났다. 2박3일 중, 한라산 등반은 두 번 쨋날로 정했다.
상판악에서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한라산 등반!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잠속으로 빠졌들었는데…. 또드락 뚝딱! 또드락 뚝딱… 고요한 아침공기를 깨고 거실 쪽에서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가 아련하게 귓전을 울렸다. 눈을 번쩍 떠보니 창문너머로 환하게 동이 터오고 아직은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주방에서 식사준비를 하는 아낙들의 조용하면서도 부지런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덕분에 아침식사는 걸쭉한 전복죽으로 영양을 보충하였는데, 각자가 한라산 등반을 대비하여 두세 그릇씩을 뚝딱 비워 든든하게 속을 채웠다.
해발 1950m의 한라산 정상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는지 걱정은 태산이면서도 웬 먹을거리를 그리도 많이 준비하였는지? 돼지고기 수육에 홍어회와 양념장류, 각종 나물류, 그리고 금세 지은 밥을 바리바리 배낭에 넣고 그것도 모자라 막걸리에 물까지 챙겨 넣고 보니 배낭무게만 해도 어깨가 묵직하기 그지없었는데, 설상가상 무거운 카메라까지 목에 걸고 보니 아득하기만 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랴! 한창 젊은 시절에는 웬만한 고지는 단숨에 뛰어오르던 역전의 용사들이 아니던가?
한라산 백록담까지 오르기 위해서 성판악코스를 택했는데 성판악코스는 편도 9.6km 이며 보통 걷는 시간만 4.5시간을 잡아 왕복 19.2km로 총 9시간을 걸어야만 하는 험난한 코스였다. 다행히 코스자체가 완만하다고 하여 한결 마음은 놓였지만 그래도 마음은 놓이지를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한라산 등반길, 다행히도 비가 그친 산길에는 시원한 나무그늘과 신선함이 묻어났고 싱그러운 숲속에서 산들산들 바람이 불어와 상쾌하게 발걸음을 시작하였다. 완만한 등산로라고 하지만 제주도 특유의 울퉁불퉁 돌계단으로 이어져 걷기가 만만하지가 않았다.
일행 중, 최 박사는 무릎이 좋지 않아 전 날부터 걱정을 했다. 한라산 등반을 하기 위해 두어 달 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집근처 야트막한 산을 연습 삼아 오르곤 했다는데 딱 2시간만 걸으면 무릎에 신호가 와서 걱정이 태산이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등반이 시작되자 제일 앞에서 씩씩하게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 산비둘기 소리가 산중에 울려 퍼지고 가끔은 까마귀가 머리 위를 빙빙 돌면서 환영을 해주었는데, 일행과 뒤질세라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아낙들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제주도 특유의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삼나무 숲이 나오는데 삼나무 숲을 지나니, 해발 1,140m에 위치한 속밭대피소가 나왔다. 세 부부가 조금씩 떨어져 오르고 있었으니 숨도 고를 겸 선두에서 오르던 팀이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일행들과 합류하기로 하였다.
1차 휴식! 달콤한 휴식이었다. 물도 마시고 간식도 먹으면서 재충전을 하였다.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속박대피소에서 1차 휴식을 취한 후 본격적인 오름이 시작되었다. 끝없이 이어진 돌계단과 중간 중간을 이어주는 데크… 그래도 싱그러운 숲내음과 선들 한 바람, 그리고 환영이라도 하 듯 울어주는 산새소리를 동무삼아 꾸역꾸역 오르고 있었다.
이 시기에 한라산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진달래를 볼 수 있다고 하는 소리를 반신반의 하면서 혹, 멋진 진달래꽃밭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기도 하였다.
육지에서는 이미 져버린 진달래꽃을 정말 볼 수 있을까? 강화도 고려산 진달래 능선에서 보았던 붉고 화려한 꽃잎을 상상하면서 오르다 보니 드디어 진달래 밭에 도착하게 되었다. 진달래 밭 대피소 앞에 배낭을 내려놓고 2차 휴식을 취했다.
데크에 다리를 쭉뻗고 털썩 주저앉아 초콜릿을 먹고 있는 최박사의 모습은 마치 몇날며칠 전투를 하다가 지쳐서 휴식을 취하는 곤궁한 병사의 그 모습이라면 과장일까? 물한모금 마시고 다시 기운을 내서 배낭을 짊어지고 올라선 길에서 저 멀리 옅은 구름에 둘러싸인 한라산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스라이 구름에 닿은 길에는 울긋불긋 등산객들이 행렬을 지어 올라가고 있었는데, 평일임에도 산을 찾는 이들이 이토록 많을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는 60대의 시니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르다가 잠시 뒤돌아보면 짙푸른 녹음이 길게 드리워진 산자락 밑, 서귀포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그 끝에는 일렁이는 검푸른 바다가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수령(壽齡)을 짐작할 수 없는 주목(朱木)이 등산로 양옆으로 이어져 있고 그 중에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폐목(廢木)이 되어 고고하게 바람을 견디어 내는 주목도 있었다. 한라산 정상에 가까워오자 가파른 등산로는 테크로 계속 이어졌고 물밀 듯 불어오는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아! 드디어 백록담이 지척에 보인다.
아! 한라산 백록담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미리 백록담에 도착한 필자는 속속 도착하는 동료들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입구 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곤한 몸을 이끌고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띤 채 드디어 해냈다는 기쁨으로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는 동료들을 일일이 환영하며 사진을 찍었다.
인증 샷을 위해 백록담 표지석 아래로 길게 줄이 이어졌는데, 어찌나 바람이 세게 불던지 황급히 배낭에서 바람막이 옷을 꺼내 입었다. 5월임에도 불구하고 변화무쌍한 날씨가 필자 일행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허둥지둥 인증 샷을 마치고 말로만 듣던 백록담을 보러 조금 위로 올라섰다. 초겨울의 싸늘한 바람이 천둥치듯 불어대는 가운데 백록담을 조망(眺望)할 수 있었으니 역시 변화무쌍한 한라산은 그 높이가 백두산 다음가는 산중의 산인가보다.
바로 밑 양지바른 테크에 배낭을 풀고 가져간 음식들을 꺼내놓으니 이보다 더한 진수성찬이 있으랴! 돼지고기 수육에 홍어, 그리고 막걸리를 곁들인 삼합이 갈증 나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올라오면서 고생담을 비롯한 온갖 이야기꽃을 피우며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던 중에 홀로 쓸쓸하게 앉아서 비스킷을 먹고 있는 외국인 청년을 보게 되었다.
세 남자들은 모두 그를 데려다가 음식을 좀 나누어먹이자고 의견을 모으니 마님들께서는 먹던 음식을 어떻게 권하느냐고 반대의 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언어구사가 무난한 최용호박사가 다가가서 몇 마디 나누고는 그를 우리 자리로 데리고 왔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고 주도해 온 우리들의 캡틴 海松 김금섭 대장의 사위가 미국인이기도 하거니와 우리의 아이들도 미국의 콜로라도주 덴버에 살고 있기에 혹여 마음이 더 쓰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자신의 이름을 ‘마이클’이라고 소개한 그 외국인은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은 스페인 청년이었다. 이것저것 챙겨주니 먹기도 잘하였는데, 아마도 몹시 시장했던 모양이었다. 헌데 그 녀석, 막걸리는 물론 돼지고기 수육을 된장에 꾹 찍어 잘도 먹어댔다.
막걸리 한 잔 쭉 들이키던 마이클이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났다며 데크에 벌렁 나가 자빠졌는데, 어찌하랴! 모두가 달려들어 털이 북슬북슬한 그 녀석의 다리를 붙잡고 마구마구 주물러 주었더니 괜찮아 졌다고 하였다. 입식문화에 익숙한 그가 데크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서 음식을 먹다보니 쥐가 난 모양새다. 어쨌거나 밥과 반찬은 물론이고 이것저것 잘 먹으면서 여간 고마워하던 그가 기념사진을 찍겠다고 하면서 두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 친구를 데려다가 음식을 나누어 먹인 것은 어찌 보면 보잘 것 없는 작은 배려이지만 참 잘한 일인 듯싶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우리가 낮선 외국에 여행을 갔을 때를 생각하면서 작은 관심과 배려의 차원에서 나눔은 역시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몇 번이고 고맙다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그 스페인 청년을 보내고 나니 내려올 일이 꿈만같았다.
드디어 해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일 터, 육십 고개를 넘어 이제 내리막길에 가속을 붙일 시기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한라산 등반. 그 하산 길에서는 피로가 온 몸을 엄습했다. 아침 여덟시에 시작한 한라산 등반은 오후 6시 30분에 모든 동료들이 성판악 주차장으로 되돌아오므로 써 장장 10시간 30분의 고단한 여정이 끝났다. 고단한 가운데서도 모두가 해냈다는 뿌듯함이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언제 또다시 이 곳을 찾을까마는 명산중의 명산 제주도 한라산을 당당하게 정복했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샘솟았다. 거기에다가 날씨까지 좋아서 멋진 백록담을 볼 수 있었으니 얼마나 상쾌한지 모르겠다.
우리 인생에 있어 더 이상 젊은 시절은 돌아올 수 없으나 늘 긍정적인 사고로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글 유장휴 디지털습관경영연구소 소장/ 전략명함 코디네이터
디지털 자원봉사란?
주변을 보면 자원봉사 활동을 열심히 하는 분이 많다. 가까운 지인들만 봐도 복지관, 양로원 혹은 자원봉사 센터에 가서 일손을 돕는다. 자원봉사를 꾸준히 지속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두 번 나가고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좋은 뜻에서 시작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시간이 부족해서, 내가 원하는 활동이 아니라서라는 등 이런저런 핑계거리가 생기고 결국 그만두게 된다. 자원봉사는 거창하게 시작하면 지속하기가 어렵다. 작지만 가볍게 그리고 재능과 어울리는 자원봉사를 시작하는 게 좋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 자원봉사를 생각해 보자. 디지털 자원봉사는 해외에서 프로보노라는 전문가 봉사활동에서 나온 개념이다. 디지털 자원봉사를 하려는 정년을 앞둔 사람에게는 일정 기간 준비시간을 준다. 그리고 기업생활의 경험이나 전문적인 능력을 비영리단체가 처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활용토록 한다. 직접 찾아가서 돕는 게 아닌 컴퓨터나 스마트폰처럼 디지털 장비를 이용하여 궁금한 점을 알려주거나 컴퓨터를 원격으로 제어하고 어려운 도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디지털의 힘을 빌리면, 무쇠팔?
“디지털 자원봉사를 하려면 전문성이 있어야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디지털과 사람을 연결하면 나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여행을 오면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여행 중 다쳤거나,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도움을 주고 싶은데 언어가 안 통하면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이럴 때는 주위에 언어가 가능한 사람을 찾는 방법도 있지만 스마트폰으로 번역 봉사를 하는 사람과 연결해주는 방법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bbb코리아라는 NGO단체가 있다. 통역을 도와주는데 특이하게 휴대폰으로 통역을 도와준다. 길에서 만난 외국인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bbb통역이란 어플로 해당 언어를 선택하면 통역을 할 수 있는 자원봉사자와 연결이 된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총 19가지 언어가 있어서 외국인이 도움을 요청하면 당황하지 않고 도와줄 수 있다. 비록 나에게는 없는 통역 능력이지만 연결해 주는 것만으로도 도울 수 있다는 게 디지털의 힘이다.
필요할 때 요청하는 봉사활동
bbb코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는 우리와 같은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공부나 일을 하는 중에 스마트폰으로 도움 요청이 울리면 일을 잠시 그만두고 통역을 도와주는 방식이다. 이렇듯 봉사하는 방식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가도 스마트폰으로 도움을 요청하면 짬을 내서 도와준다.
이와 비슷한 봉사가 있다. 시각장애인을 도와주는 활동이다. 시각장애인들은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이 많지만 그중에서 유독 불편한 상황이 있다고 한다. 우유를 사왔는데 유통기한이 얼마 남았는지 확인하고 싶거나, 약을 먹으려 하는데 약 봉투에 쓰여진 글자를 보고 싶을 때 난감하다고 한다. 이럴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be my eyes’라는 어플이다.
시각장애인이 스마트폰으로 도움을 요청하면 가장 빨리 받을 수 있는 봉사자에게 연결되고 봉사자는 시각장애인과 연결된 스마트폰 화면을 동시에 보면서 말로 설명해 준다. 떨어진 물건을 찾아주기도 하고 어떨 때는 외출할 때 색깔 옷을 골라주기도 한다고 한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원봉사자들의 입소문으로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고 한다. 많은 시간을 내어서 하는 봉사가 아닌 짧지만 요청이 있을 때 도와주는 디지털 방식의 봉사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짧지만 누군가를 도와준 강력한 경험이 다른 봉사활동으로 이어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나눔의 경험을 만들어 보자.
이민을 왜 꿈꿀까? 대부분 이민하는 이유는 단연 자식 때문이라고 부모들은 말한다. 도대체 자식이 뭐길래 자식교육을 위해서라면 내 나라도 등 지는 것일까. 필자는 미국에서 사는 동안 너무나 많은 한인들이 초심의 목적을 잃고 체념하면서 한숨으로 살고,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어린 아이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한인타운에 사는 후배가 전화를 했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시간 좀 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짬을 내기가 힘들었지만 좀처럼 편치가 않아 시간을 냈다. 달려가는 차창 밖으로 캘리포니아의 쾌청한 하늘이 묵직한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타운 내 카페로 갔을 때 그녀의 눈가는 퉁퉁 부어 있었고 얼굴은 많이 수척해 있었다. 지금 막 수용소에서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당황한 마음에 다그쳐서 묻기 시작했고 그녀는 가녀린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고는 서러움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미국문화는 절대로 상대방의 나이를 묻거나 신상이야기는 금기사항이었다. 필자는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녀는 5년 전에 딸과 함께 전남편에게 내몰려 한국을 등지게 됐다고 했다. 미국에 와서는 5년 동안 주방 일부터 페인트칠하는 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전남편에게 버림받고 미국 까지와서 졸지에 불법 체류자가 되었고 한인식당에서 웨이츄레스 일을 하다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고 했다. 새 남편은 시민권 자로써 3년 전 이혼을 하고 딸 하나와 살고 있었다. 결국 이쪽 저 쪽, 네 식구가 그녀의 한집에서 같이 동거를 시작했다. 살다 보니 새 남편의 12살짜리 아이가 얼마나 천방지축인지 지 멋대로 버릇도 없다며 침을 튀겨가며 하소연을 해왔다.
두 가정이 합치면서 좁은 아파트 하나에 사춘기에 접어든 전혀 남남의 고만고만한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서로 다른 부모와 두 딸들은 부딪치기 시작했고 새 남편은 자기 딸 편만 들었다고 했다. 불편한 가정의 불화는 계속되었고 급기야 부모의 입장에서 참다 못해 작은 몸싸움이 있었다고 했다. 새 남편의 아이는 손목에 조그만 상처가 남았고 그녀는 알지도 못했다고 했다. 어느 날, 집 앞에 폴리스가 와서 무조건 수갑을 채우고 그 길로 수용소로 끌려 갔다는 것이다. 아동학대 격리 수용을 당한 것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한 달이나 있다 왔다고 눈물 범벅이 되어 서러움을 토해냈다. 미국은 아동학대가 굉장히 무서운 법이었고 의무적으로 신고를 해야만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그 아이 손목을 유심히 보고는 왜 그러냐고 물었단다. 아이는 그 길로 카운셀러(상담자)에게로 보내졌고, 그 아이는 대책 없이 느끼는 그대로 답을 한 모양이었다. 아이가 지금 어디 있냐고 물었다. 아이는 그 길로 가출을 해 버렸고 새 남편은 술로 산다며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었다. 또 벌어진 엄청난 상황에 무어라 말문이 막혔다. 미국에서는 아이 때문에 내 나라를 등지고 오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일들이 비일비재 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일단 아이를 찾고 그리고 아파트를 방3개짜리로 옮기라고 했다. 그녀는 지겹다며 남편과 빨리 헤어지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3번 4번 복잡한 삶의 연속이 뻔하지 않느냐며 설득을 시켰다. 한인타운에는 살다 헤어지고 또 살다 싫으면 갈라서고 도대체 그것도 선진국 문화랍시고 아무렇지 않게 아이들을 무시한 채 부모들의 태만한 행동들이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며칠 후 연락이 왔다. 아이가 나눔 선교회에 있다는 것이다. 그 곳은 갈 곳없이 버려진 아이들의 집합 소였다. 자기는 만날 수가 없으니 제발 만나달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내 아이들에게도 쏟아보지 못한 정성으로 선물을 준비했고, 사랑의 글이 담긴 예쁜 카드도 마련했다. 나눔 선교회는 말 그대로 나눔을 함으로써 선교를 하는 곳이었다. 그곳을 향하면서 깜짝 놀랐다. 어느 목사님의 봉사정신으로 시작된 곳이었는데, 건물은 허름하고 이층 비상계단 난간으로 머리 빡빡깍은 등치 좋은 아이들이 듬성듬성 서있는 모습이 섬찟해서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작게 나마 성의금을 전달하기 위해 목사님을 만났다. 목사님은 주변에 널려진 마약으로 청소년기를 방황하는 한인 아이들이 대다수라고 설명을 하더니 그 아이를 만나게 해주었다. 조그맣고 예쁘게 생긴 아이가 얼굴은 엄청 밝았지만 진하게 화장을 해 성숙해보였다. 건들건들 껌을 씹고 필자를 바라보며 다리를 흔들었다. 담배 냄새가 코를 확 찔러왔다. 어린 나이에 망가져 버린 작은아이를 보며 화보다는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누구라고 밝히지는 않은 채 아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는 그녀를 아줌마라고 불렀고 너무 간섭을 하는 것이 싫다고 했다. 친 엄마도 가끔씩 만나왔고, 같이 사는 이상한 언니가 싫다고 했다. 아이는 모든 것 들이 불만투성이였지만 나눔선교회는 또래 친구도 많고 관심을 갖고 잘해주니까 좋다고 했다.
필자는 돌아오면서 몇 번이고 그 아이를 뒤돌아보았다. 부모라는 이름이 무겁게 다가와 마음을 칙칙하게 했다. 어린 나이에 아무 생각 없이 부모 따라 온 아이들, 그리고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2세, 십대 아이들이 사춘기 혼란 속에 정체성을 잃은 채, 외로움에 허덕이고 불안감에 못 이겨 너무나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부모들은 말로는 아이들 때문에라고 하면서도 당장 먹고 살기 힘드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어쩔 수없이 그대로 아이들을 방치하고, 무분별한 미성년자는 활짝 열려있는 색다른 문화 속에 그 유혹에 못 이겨 그대로 망가져 갈 수밖에 없다. 부모는 과연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갖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채워줘야 하는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다행히도 나눔 선교회로 들어온 많은 아이들이 가정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한다고 하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 아이도 오래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방3개 짜리로 이사를 했다고 했다. 얼마 후 그 아이는 고모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녀의 아이는 못살겠다며 한국으로 나와 아빠와 함께 산다고 했다. 결국 미성년자의 모든 것들은 부모의 책임이었다. 초심을 잃은 부모들이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어린아이들을 험난한 곳으로 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해 왔다.
로즈와이
레코드판에는 욕심이 많았으나 오디오 기기에는 욕심을 부릴 형편이 못 되어 결혼 후 얼마간은 야외휴대용 전축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당시 국산 중에서는 가장 낫다는 ‘별표 전축’을 구입했다. 이것을 들여놓은 날은 마치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필자가 이 별표 전축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뉴욕대학교 폴리테크닉대(Polytechnic Institute of New York)의 방문교수로서 1985년에 미국으로 건너갈 때였다. 이때쯤은 전축도 상당히 낡았고 또 아들 넷을 동반하자니 짐이 많아 도저히 이것까지 가져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뉴저지에 얻은 셋집에서 모처럼 음악이 없는 삶을 살던 어느 날, 뉴욕의 5번가를 따라 한인상점들이 많은 지역을 걷고 있는데 ‘Fisher Audio Sale!’이라는 광고가 필자의 눈을 때렸다. 당시까지 필자는 외제 오디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지만 지도교수이셨던 C교수께서 항상 자랑하시던 것이 바로 ‘Fisher 오디오’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점포에 들어가 보니 물론 교수님 댁 것과 같은 고급 모델은 아니었지만 성능이나 모양도 그럴듯하고 가격도 큰 무리 없이 살 수 있는 정도여서 그 자리에서 바로 구입했다. 이 오디오는 귀국 후에도 친구들이 ‘서린 카페’라고 부르던 필자의 서린아파트 거실을 차지하고 가족들은 물론 놀러오는 친구들에게 많은 음악을 선사하였다.
1990년 초, D건설에 근무하던 친구 K군이 동대문운동장 옆 민자 지하주차장 건설 현상공모를 위한 기본계획 수립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다행히 이 작품이 당선되자 그 친구는 음악을 좋아하는 필자가 제대로 된 오디오 하나 없는 것이 늘 아쉬웠다며 돈 대신 오디오를 한 세트 기증하고 싶다고 제안하였다. 당시 필자는 전설적인 DJ 최동욱씨와 몇 번 방송을 같이 한 적이 있어서 상의해보니 영국의 B사 제품을 추천하며 용산 전자상가에 있던 ‘태양오디오’라는 B사 대리점을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B사 오디오보다 기기별로 특성이 있는 컴포넌트들을 모아서 꾸며보라고 권하였다. 그래서 프리앰프 분리형 Audio Innovation 진공관앰프, Thorens 턴테이블, Sony CD플레이어, Teac 카세트데크, Elac 스피커 등 최고급은 아니지만 매우 실용적인 컴포넌트로 구성된 본격적인 오디오 시스템을 처음으로 가질 수 있게 되었다. Fisher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이 오디오로 인하여 ‘서린 카페’의 격은 한층 더 높아졌으며 친구들도 더 자주 찾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용인으로 이사 온 후인 2000년대 중반까지도 가끔씩은 친구들을 불러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곤 하였다. 최근에는 이 오디오를 쓰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그 대신 수년 전에 구입한 Teac 소형 올인원 오디오로 종종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이 오디오는 LP나 카세트테이프의 음악을 CD에 녹음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옛날에 좋아하던 LP음악을 차에서 들을 수 있도록 CD에 녹음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필자와 매우 가까운 친구인 (재)월드뮤직센터의 강선대 이사장은 필자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음악 수집광으로, LP나 CD만 해도 필자의 10배 정도인 수 만장을 가지고 있다. 또 음악을 비롯한 각종 문화예술 관련 책자, 외국의 각종 민속악기 등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그는 특히 세계 각국의 민속음악에 많은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잡지에 글을 쓰기도 했다.
필자는 명지대 교양학부에 ‘세계의 민속음악’이라는 과목을 개설하고 그를 겸임교수로 초빙하도록 하였다. 이 강좌는 수년간 인기리에 운영되었다. 우리들은 현재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을 토대로 전 세계 음악자료의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아카이브와 국내외 음악 관련 학술 연구 지원 및 세계음악의 대중적 보급을 위한 세계음악문화연구소 등의 설립을 추진해 나가는 한편, 다문화사회로 진입한 우리나라에서 서로 다른 문화가 공존하고 나눔과 소통을 도모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는 법인을 설립할 필요가 있음을 공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2009년 7월, 강 이사장을 중심으로 필자와 몇몇 사람이 모여 월드뮤직센터 설립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그리고 약수동에 사무실을 얻어 소장품을 옮겨온 후 정리를 시작하였고, 2011년에는 국내외 월드뮤직 전문가 및 활동단체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후 2012년 11월에는 (재)월드뮤직센터를 정식으로 설립하였고 세계 음악학회와 공동으로 “다문화 사회와 음악: 글로벌 현황과 우리의 실천적 과제”라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2013년에는 아카이브 구축을 시작하였고, 북촌우리음악축제를 후원하기도 했다.
2014년 3월에는 국민대 김희선 교수를 소장으로 세계음악문화연구소를 설립했고, 4월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 여러 단체의 후원을 받아 Asia Society와 공동으로 ‘뉴욕 한국음악 페스티벌:산조와 판소리’(New York Korean Music Festival: Sanjo and Pansori)를 주최하였다.
또 9월부터 11월까지는 매주 월요일 오후 3시부터 90분간씩 국민대학교 명원민속관(한규설 대감댁)에서 강 이사장, 음악평론가 황우창, 세계음악학회장 박미경 등의 강의로 월드뮤직 가깝게 듣기 시민강좌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비엔날레로 개최되는 아시아 월드뮤직 어워드를 제정하여 제 1회 수상자로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와 그가 이끄는 실크로드 앙상블을 선정하고 10월 27일 13시 30분에 예술의전당 푸치니 홀에서 시상식을 가졌다. 그 다음 날은 관계자들과 더불어 그들의 공연을 만끽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