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후회할 때가 있다. 대학입학 때는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할걸”, 대학졸업을 할 때는 “스펙 좀 쌓아둘걸”, 결혼을 할 때는 “돈 좀 모아둘걸”, 직장을 다닐 때는 “좀 더 성공했으면” 하고 아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2013년에 출간된 의 저자 브로니 웨어는 10여 년간 은행원으로 일하던 중 문득 자신의 삶이 너무 단조롭고 무의미하다고 느껴 모든 생활을 접고 호주에서 호스피스 간병인으로 생활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수많은 이가 죽음의 순간에 후회하는 것들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는 그 경험으로 쓴 책이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것 5가지는 ① “내 뜻대로 살걸” ② “일 좀 덜 할걸” ③ “친구들과 연락하며 살걸” ④ “내 감정에 좀 더 충실할걸” ⑤ “도전하며 살걸”이다. 5070세대도 이런 후회를 해본 적 있을 것이다.
5070세대가 젊었을 때 자신의 뜻대로 살아본 적이 있을까? 일에 치여 야근이 일상이었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 사이 아이들은 다 커버렸고, 아내와도 너무 멀어진 것 같다. 현역에 있을 때는 나름 네트워크가 탄탄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은퇴하고 나니 연락은커녕 전화를 받지 않는 친구도 많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고 정승이 죽으면 개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세상 이치가 다 그렇지!”라고 스스로를 달래보지만 서운함을 감출 수는 없다. 과거 직장생활할 때 눈치 보느라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속병만 키우던 시간들, 하고 싶은 것 하나 제대로 해본 적 없이 살아온 세대가 지금의 5070세대인 듯싶어 씁쓸하다.
지금까지 후회스러운 삶을 살았다면 이제부터라도 달라지면 된다. 5070세대가 앞으로의 삶을 보다 행복하고 가치 있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돈·연금·봉사·기부 등 사람마다 가치를 두는 대상이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가족을 생각할 것이다. 이에 이번 호에서는 가족관계 측면에서 가치 있는 노후의 삶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보고자 한다.
‘가족관계’ 회복을 위한 시간을 충전하라
영원한 청년작가 최인호(1945~2013) 선생은 1975년부터 2010년까지 25년간 월간 에 자전적 수필 ‘가족’을 연재했다. 가족에 대한 그의 애틋한 사랑은 사후에 로 발간되었다. 그가 부인과 나눈 마지막 말은 “사랑해요”, “여보, 나도 사랑해”였다고 한다. 황혼이혼과 졸혼이 회자되는 세상이지만, 그의 마지막 말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최인호 선생이 세상에 던지고 간 마지막 선물이다. 가족을 의미하는 영어 ‘FAMILY’는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의 첫 글자를 딴 것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가족은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소홀하기 쉬운 ‘가족관계’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지난달 고등학교 선후배 모임에 참석했을 때 퇴직한 한 선배가 해준 이야기다. 그동안 일밖에 모르고 살았던 선배는 퇴직한 지 6개월째에 접어들었다. 해 뜨기 전 눈뜨고, 해 지면 집으로 돌아오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해 뜨면 눈뜨고, 해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는 신세가 됐다며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동안 가족을 위해 고생했다고 격려하며 지원하던 아내도 이제는 은근히 불편해하는 눈치 같아서 걱정이란다. 선배가 조심스레 아내에게 “여보! 우리 여행이나 같이 다닐까?” 하자, 동네 스포츠센터 언니, 동생들과 함께 여행 가기로 했으니 혼자 가란다며 푸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 퇴직 전에는 늘 가족과 함께 여행 가자고 하던 아내가 이제는 자기보다 더 바쁜 사람이 되었다며 걱정한다. TV나 신문에서 퇴직 후에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니 아내와 취미생활을 함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라고 했을 때 무시하고 지나친 게 지금의 서먹함으로 이어진 것 아닌지 후회가 된다고 했다.
[표1]에서 보는 것처럼 5070세대가 배우자와 나누는 대화시간은 하루 1시간 미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50대의 70%, 60대의 60%, 70대의 50%가 그 정도밖에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공무원 인생이모작 교육에서 만난 어느 수강생의 이야기도 씁쓸하기는 마찬가지다. 주말에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학원에서 돌아온 막내아들이 인사를 하고 자기 방으로 휙 들어가버렸다는 것이다. 한 시간 정도 지나 아들이 방에서 뭘 하는지 궁금해졌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 불러볼까 하다가 나올 때까지 그냥 기다렸다. 하지만 자신이 거실에 있는 동안 나오지 않아 포기했단다. 부모가 언제부터 이렇게 자녀들과 서먹해진 걸까? 자녀교육을 시킬 때 무관심이 최고라는 말도 안 되는 개똥철학으로 그동안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한 건 아닌지, 흘러간 시간이 너무 아쉽다며 속내를 털어놓는다.
5070세대는 특히 은퇴한 뒤에 배우자는 물론 자녀와의 관계에서 뜻밖의 위기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가족들에게 휘둘리거나 조급해하면 가족 파탄의 불씨가 될 수 있다. 배터리를 충전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김치가 맛있어지려면 오랜 시간 익어야 하는 것처럼, 가족관계 회복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가치는 무엇인지 숙고하다 보면 이 기다림의 시간도 잘 여물어갈 것이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 늘리자
건강검진 후 “검진결과가 생각보다 좋지 않게 나왔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좀 그렇지만 앞으로 살 날이 9개월 정도 남으신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당황스럽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을 것이다.
몇 년 전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라는 카피로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광고가 있었다. ‘가족시간계산기’로 앞으로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해주는 내용이었다.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자신의 나이와 앞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 잠자는 시간, TV 보는 시간, 스마트폰 보는 시간, 친구 만나는 시간, 혼자 보내는 시간 등을 빼보니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나왔다. 결과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9개월! 참고로 필자의 경우는 약 11개월이었다.
‘가족시간계산기’는 누구나 쉽게 계산할 수 있다. [참고1]의 ②번 기대여명은 통계청 홈페이지를 방문해 연령별 기대여명을 확인하면 알 수 있다. 귀찮다면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인 82세에서 자신의 나이를 빼고 계산하면 된다. ‘가족시간계산기’를 작성하다 보면 그동안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이었는지 점검해볼 수 있다.
가치소비를 통해 가족관계 강화해보자
‘가족시간계산’을 통해 그동안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점검이 이루어졌다면 앞으로 어떤 배우자, 부모가 될 것인지 액션플랜(action plan)을 작성해보는 것은 어떨까? 특히 가족과 함께하는 가치 있는 소비야말로 소통과 공감의 시간을 풍부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가령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반드시 가족과 함께 식사하기’, ‘배우자와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데이트하기’, ‘배우자와 마주앉아 한 시간 이상 대화하기’, ‘배우자 또는 자녀와 함께 여행하기‘ 등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시간을 마련해본다. 가족과 함께하는 가치 있는 소비와 삶을 위한 징검다리를 하나씩 옮겨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몇십 년을 같이 살아왔어도 배우자와 자녀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며 살아왔다면 반성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가치 있는 소비와 실천으로 꽉 막힌 대화의 문을 열어보자. 처음에는 ‘언 발에 오줌 누기’밖에 안 되더라도 인내심과 배려심을 갖고 접근하면 봄눈 녹듯 그동안의 소통 단절은 스르르 사라질 것이다. 필자도 당장 실천하겠다.
자신의 무게, 즉 자아라는 의식의 무게는 지구의 무게보다 무겁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무게는 얼마나 될까? 결혼한 지 40년째에 접어드는 지금도 아내가 생각하는 가장의 책임과 무게는 남편이 생각하는 책임과 무게와는 많이 다른 것 같다. 가끔 가장의 권위를 존중해 달라고 하면 지금 같은 시대에 무슨 권위가 필요하냐고 되묻는다.
아내에게 농담으로 “당신과 결혼해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사글세나 전세 한 번 살게 한 적 없었소!” 하면 아내는 “고마워요” 하기는커녕 “난 결혼 전에도 사글세나 전세로 살아본 적 없어요. 늘 우리 소유 집에서 살아왔어요” 한다. 8촌 이내 친척 모임에서 누나들 소개로 아내와 맞선을 봤다. 그 뒤 아버지께서 집안을 알아보시고 좋다고 하셔서 7남매 장남 역할을 잘해보겠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했다. 필자는 결혼 전에 이미 방 두 개짜리 13평 아파트를, 당시 현금 20만원과 19년 분할상환 융자조건으로 확보하고 있었다.
아내가 첫딸을 출산했을 때는 겨울이었다. 울산에서 해 뜨기 전에 집을 나서 쇠를 다뤄 화물선 만드는 조선회사에 8시까지 출근했고, 퇴근은 해가 진 후 한참 지나서 했다. 매일 매일이 피곤했다. 그날 저녁에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한밤중에 딸아이가 계속 울어댔다. 좀처럼 떠지지 않는 눈을 비벼대며 자는 아내를 흔들어 깨워 “여보, 아이가 계속 울어대니 좀 달래시오” 했다. 그러나 여전히 딸아이가 울어대는 통에 할 수 없이 일어나 앉았다. 일어나 보니 아내는 일어나 아이를 달래기는커녕 돌아누워 쿨쿨 자고 있었다. 순간 무시당했다는 감정이 일어나면서 화가 솟구쳤다. 피곤한 가장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아내가 미워 상당히 아프게 얼굴을 때려버렸다. 그러자 아내는 벌떡 일어나 자는 사람에게 왜 그러느냐고 대들었고 밤새 언쟁을 했다. 그 후 아내는 필요할 때마다 그날의 일로 두고두고 공격을 해오곤 했다. 산후 몇 달간 쏟아지는 잠을 야속하게도 몰라줬다는 것이었다.
첫째에 이어 둘째, 셋째가 태어날 때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녀들에게 여러 보험을 들어줬다. 또 7남매의 장남이다 보니 동생들 학비에 결혼식 등 돈 쓸 일이 끊이지 않아 목표한 저축과 목돈 모으기가 어려워 아내가 힘들어했다. 어느 날인가 여동생 결혼식을 마치고 피곤한 상태에서 집으로 가다가 가전제품을 파는 상점에 들어가 세탁기를 즉흥적으로 샀다. ‘이렇게 열심히 힘들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과연 남는 게 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뭔가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그때까지 아내는 손빨래를 했던 것이다. 갑자기 배달된 세탁기에 아내는 눈을 크게 뜨고 “갑자기 무슨 세탁기예요?” 하며 놀랬다.
결혼 10년째가 되니 아이들 나이가 10세, 8세, 5세가 됐다. 당시 회사가 특별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책상을 치우고 교육을 시켰다. 150여 명이 제자리에 못 돌아올 위기에 처했을 때 필자는 그야말로 시베리아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듯한 고독과 아픔을 느꼈다. 마치 홀로 지구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처럼 가장으로서 무거운 마음뿐이었다. 나라는 존재 가치와 능력에 대해 자괴감이 몰려왔고 아내에게는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이 필자를 오랫동안 포박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가장으로서의 책임은 더 강해졌다.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아내와 하고 싶은 것들을 과감하게 실천하기 시작했다. 결혼 25주년 때 하와이를 가자고 하자 아내가 킬리만자로를 등정하고 싶다고 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5000미터 높이 이상의 눈 덮인 킬리만자로 산 정상까지 가고 싶다고 해서 3주간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 겸 떠났다. 그리고 아마추어로서는 가장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다는 킬리만자로 산의 두 봉우리(해발 5685미터 길만스포인트와 5895미터 우후르피크)도 등반했다.
지금은 정년퇴직한 지 9년째다. 6시 반에 출근해서 아침식사를 하고 조찬회의를 하던 생활을 10년도 더 넘게 해서 그런지 지금까지도 느긋하게 늦잠을 자거나 아침 일찍 일어나도 다시 누워 휴대용 라디오를 들으면서 유유자적하는 게 좋다. 가능하면 하고 싶은 일들을 다양하게 즐기려고 한다.
아내와는 가끔 언쟁도 하는데, 아내는 필자가 권위적이라며 불평을 하고 필자는 가장의 권위를 좀 존중해 달라고 한다. 아내와 감정 대립을 할 때면 필자는 침묵 상태로 들어간다. 일상생활은 하면서 상당 기간 아내와 말을 삼가는 것이다. 필자 의견을 주장하고 설득시키려 하거나 이기려 하면 감정의 회오리와 더 큰 혼란에 빠지는 것을 반복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른바 묵언수행 또는 침묵피정 같은 행위를 자처하는 것이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면 침묵으로 부족하니 스킨십이 많아지고 급기야 터져 나오는 웃음을 서로 참지 못한다. “내 스킨십에 눈물 좀 찔끔 흘려줘야 하는 거 아냐?” 하면 아내는 “아직도 너무 권위적이십니다요!” 한다.
연필화를 수년간 그려온 아내는 최근 수채화를 배운다. 어느 날은 아내가 표본 책을 가지고 오더니 “선생님에게 큰 스케치북에 표본 그림을 모두 그려보겠다고 했어요” 한다. 필자는 “잘했소! 하다가 못하면 가장인 내가 다 해줄게요” 했다. 그러자 아내는 “어휴! 또 도졌네요, 그 병이!” 한다.
그해 늦은 여름, 갑자기 달라진 주변 상황에 안절부절못하고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서둘러 떠나보내고 나면 후련할 것만 같았는데 영 그렇지 않았다. 바람이 실컷 들어간 풍선 같은 마음을 다잡고 차를 돌려 근사한 간판이 눈에 띄는 곳으로 향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는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분위기 있는 카페가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모처럼 혼자가 된 것을 자축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묘한 기분은 발걸음을 그냥 집으로 향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날, 새벽부터 일어나 커다란 가방 속에 이것저것 주섬주섬 집어넣었다. 짐이 한 가득이었다. 남편을 겨우 달래 미국으로 보내고 인천공항에서 한 시간 남짓 도망치듯 달려온 탓에 두 다리가 뻐근했다. 오랜만에 남편 대신 운전을 한 탓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편 없이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피부로 와 닿지 않았다.
그동안 남편은 어쩌다 짧게 집을 비우는 일이 있었지만 이번 외출은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었다. 숨 쉴 틈 없이 열심히 살아온 우리 부부는 IMF라는 국가적 경제 위기 속에서 아주 위태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어디론가 떠나 휴식이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있는 것이라곤 밤마다 끙끙대며 해결책을 찾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 난제들뿐이었다. 이러다가는 큰일 날 듯싶었다. 남편에게 미국 여행을 권했다. 그렇게 남편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우선 멋지게 보이는 카페로 들어가 제일 아늑하고 편안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훤하게 보이는 창가 쪽 아주 푹신한 곳에 도도하게 다리를 꼬고 자유분방한 여인처럼 우아하게 앉아 가장 비싸고 맛있게 보이는 메뉴를 주문을 했다. 홀가분함이 넘쳐흘러 주체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닥쳐온 풍파 속에 마구 쏟아지던 폭풍우가 그 혈기를 다 풀어놓은 듯 아주 조용하고 쾌청한 마음이었다. 온 세상이 내 것처럼 당당했다. 그 황홀함과 넘치는 행복이 사라질까봐 마구 주워 담고도 싶었다. 그 후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시간이 많았지만 자유로움을 지켜내려고 애를 썼다.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한 잎 두 잎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왔다. 필자에게도 계절은 바람처럼 거침없이 불어왔다. 가뜩이나 무서움을 잘 타는 탓에 자다가 깨어나면 우두커니 걸려 있는 옷걸이가 사람처럼 보였다. 집안 쓰레기를 버리는 등 궂은일까지 혼자 감당해야만 했다. 더구나 남편이 마무리 짓지 못한 일까지 책임을 져야만 했다.
혼자가 되었다는 홀가분함은 사라지고 하루하루가 고단했다. 정신적, 물질적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 몸에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면역체계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병원에서는 당장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혼자만의 행복과 자유로움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남편도 외로워서 도저히 견디기 힘들다며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충분히 이해가 됐다.
끝내는 가족이 있는 울타리 속에서 남편과 함께 고난이든 기쁨이든 함께 나눌 때, 그만한 행복이 따로 없음을 진지하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잠시라도 남편과 떨어져 있으며 그렇게 원하던 자유를 몸서리치게 체험해봤다. 그리고 가족, 남편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필자 곁에서 건강하게 살아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또한 살아 있는 모든 의미 있는 존재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이다.
시대를 상징하는 목소리가 있다. 포크음악의 전설 세시봉의 막내인 김세환의 목소리가 바로 그렇다. 1970년대를 수놓았던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노랫말과 귀공자 같은 외모와 함께 어우러져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화려하게 부활한 세시봉의 멤버로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이어가고 있는 그는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변치 않는 사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모습 그대로 천진난만한 긍정의 에너지로 가득했던 그와의 인터뷰.
관과 공연장에서 보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전혀 그 나이로 보이지 않는 놀랄 만한 동안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듣기도 싫어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내 마음, 내 현재가 중요하지.”
나이라는 숫자에 뭔가를 맞춰야 한다는 강박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 70대를 맞이하는 김세환의 철학이었다. 같은 70세라도 생각하는 게 다 다르잖냐는 그의 반문은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바꿀 수 없지만 속은 바꿀 수 있잖아요? 칠십이 되면 그 나이에 맞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 그건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애들한테도 물어봐요. ‘나 이러는 거 이상하냐?’ 그러면 ‘아니, 아빠는 어울려’라는 대답이 돌아와요. 그럼 오케이죠.”
내 마음, 내 현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김세환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이런 삶도 있구나 싶었다. 그 이미지를 총체적으로 정의하자면 긍정과 해맑음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며 “감사하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저는 지금 꿈이 없어요. 하루하루가 즐거우니까요. 범사에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그리고 저는 정말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고민? 지금은 없어요. 굳이 찾자면 아이들인데, 아이들이 아직 직업이 없으니까. 하지만 푸시 안 해요. 다 지 팔자니까요. 제 아버지도 그랬거든요. 아버지도 저에게 큰소리 한 번 친 적 없어요. 그래야 내가 편하죠. 내가 편해야 애들도 편하고. 렛 잇 비.”
“노래도 마이너는 싫다. 밝고 즐거운 노래가 좋다”고 말하는 그의 지론은 흡사 그의 노래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같은 삶의 태도다.
“글쎄요. 난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자랐으니까. 가요계에 나같이 고생 안 하고 가수 된 사람 없어요. 신인상 받고 그다음에 대상 받고. 그때가 총각이었을 땐데 집도 사고. 얼마나 감사해.”
물론 그도 사람이다. 인생에서 무조건 즐겁고 좋은 일만 있을 리 없다.
“저도 희로애락이 다 있죠. 그런데 슬프고 아픈 걸 굳이 계속 삭히는 건 싫어요. 빨리 잊어버려야지. 예를 들어 부부싸움 안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런데 부부싸움을 하면 내가 답답해. 그래서 내가 먼저 풀려고 해요. 난 비자금도 없어요. 비자금이 있다는 건 ‘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잖아요.”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르쳐주신 부모님
그는 자신이 긍정적인 성격이 된 것이 가족의 영향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100세까지 사셨던 어머니께 감사해요. 어렸을 때는 돈을 더 타내려고 어머니에게 거짓말도 하고 그러잖아요? 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예를 들어 어머니에게 ‘5000원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어머니는 옷장에 있는 가방에서 꺼내 가져가라고 해요. 그런데 애들 욕심에 6000원 가져가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하지만 어머니는 나중에 내가 더 달라고 하면 또 주실 거라는 확신을 주셨어요. 그래서 그런 욕심을 내본 적이 없어요.”
“나도 널 믿을 테니 너도 양심의 가책 없게 행동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은 바른 삶에 대한 지침과도 같았다. 그의 어머니는 얼마 전 10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한복만 입는 분이셨죠. 그래서 저는 학교 다닐 때 스타킹만 봐도 이상했어요. 집에 여자 스타킹은 아예 없고 남자 형제 셋이니 남자 신발만 잔뜩 있었어요. 아내와의 관계요? 며느리 눈치 보셨었지(웃음). ‘딸 같다 얘’ 이러고. 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시집살이 절대 시키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본인이 많이 고생하셨으니.”
그의 어머니는 피아노, 아버지는 성악을 했다. 그가 노래를 하게 된 데에도 두 사람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그의 아버지 김동원은 당대의 모든 상을 휩쓸었던 대배우였다. 그러나 집에 들어오면 그런 간판에 매달리는 일 없이 아들에게 “나 팝송 하나 가르쳐줘라” 하며 함께 어울리는 아버지였다. 김세환의 긍정적이고 해맑은 자유분방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를 보며 우는 남자
“우리 마누라 끝내주지.”
아내와는 어떻게 만났느냐고 묻자 나온 대답이다. 거두절미하고 아내를 ‘끝내준다’고 표현하다니 팔불출도 이런 팔불출이 없다.
“아내와는 조병화 시인 딸의 결혼식 사회를 보게 되면서 만났어요. 한눈에 반했죠. ‘띠옹’ 하더라고. 첫사랑이었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말했죠. ‘나를 일단 사귀어보고 네가 선택해라. 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할게.’ 그리고 아직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고 있어요(웃음).”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첫사랑마저도 성공한 셈이다.
“그러게. 그래서 막장 드라마가 싫어요. 누군가는 재밌다고 열심히 보는데 난 싫어요. 피하고 싶고. 그래도 감정이 많아 영화 보면 막 울기도 해요. 에서 우승하는 거 보고 울기도 하고. 그러면 애들이 ‘아빠 왜 그래?’ 묻고. 막 소리 내서 우니까(웃음).”
그는 매사 긍정적이고 해맑은 사람이지만 싫은 것은 절대 못 참는 사람이기도 하다. “싫은 사람과는 같이 숨쉬기도 싫다”는 그는 사람의 성장 과정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했다.
“똑같은 나무라도 자라는 모습이 다 달라요. 사람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배우고 느끼는 게 중요합니다. 그게 안 되면 통제가 안 되니까요.”
그는 긍정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려면 상대를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는 간단하게 말했다.
“바꿔서 생각하면 편해요. 난 애들에게 ‘공부해’라고 말 못했어요. ‘만약 내가 자식이라면?’ 하는 생각을 하니까요. 제가 고3 때 텔레비전에 조영남이 나오면, 어머니는 나를 불러 ‘세환아, 조영남 나왔다. 이거 보고 공부해’라고 말씀하시곤 했죠. 나로선 참 고마웠지. 그렇게 느낀 고마움들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틈만 나면 자전거 탈 생각
김세환은 소문난 자전거광이다. 1986년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MTB를 타기 시작해서 벌써 30년 넘게 자전거를 타고 있다. 아니, 자전거에 대한 애착은 더 강해져서 요즘은 그가 속해 있는 자전거 클럽인 ‘한시반클럽’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자전거는 어느 면에서는 편해요. 헬멧 쓰고 안경 끼면 내가 김세환인 줄 아무도 모르니까요. 더구나 서 있을 일도 없으니. 그러니 나에게 딱 맞아요. 그리고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지. 땀은 나를 배신하지 않아요.”
그와 함께 자전거를 타던 사람들이 주말 오전에 볼일을 보고 한강에서 모이면 오후 한 시 반 정도가 되곤 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바로 한시반클럽이다. 1990년대 초부터 시작한 한시반클럽에는 40~60대에 속하는 스물다섯 명 정도가 모인다고 한다. 연령대로 보면 김세환이 가장 고참이다. “구멍이 나는 자전거가 있으면 주인보다 내가 고치는 게 더 빠르고 낫다”고 말하는 그를 중심으로 ‘형제보다도 더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다. 이 모임을 오랫동안 해올 수 있었던 것은 확고하게 짜인 규칙들 덕분이다.
“아, 운동만 잘해선 안 되겠구나 싶을 때가 있었어요. 사람이 삐딱해질 수가 있거든요. 한시반클럽만 봐도 강북 팀과 강남 팀이 생각하는 게 달라요. ‘그럼 오늘은 총무가 정한 대로 가자’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멤버의 관혼상제 때는 반드시 100% 참석하게끔 하고 있어요. 그러니 든든하죠. 또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잖아요. 우리 모임에는 죽음조와 보험조가 있어요. 죽음조는 엄청 달려요. 그 대신 일찍 가서 보험조가 올 때까지 기다리죠. 느림과 빠름이 있듯이 비우는 사람, 채우는 사람,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삶을 존중해주는 우리끼리의 규칙들이 생성되었어요. 이렇게 가다 보니 모임이 오래갈 수 있었다고 봐요.”
세시봉 멤버로서 받은 사랑 보답하고 싶어
김세환은 한시반클럽 외에도 해동방모임이라는 모임에도 참석하고 있다. 배우이자 연출가인 이해랑 가족들과 김세환의 아버지인 김동원 가족들, 그리고 연출가 윤방일의 가족들이 함께 만나는 모임이다.
연극계 거물들의 모임이 그들의 후손들 모임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참 드물다. 어쩌면 오랫동안 깊이 있게 모이는 사람들과의 꾸준한 관계가 김세환의 인간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 아닐까.
“인생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라면 아버지와 형을 꼽을 수 있겠어요. 아버지는 땅, 형은 기둥이었죠. 음악을 알려준 게 형이었으니. 가수를 안 했으면? 제가 신방과를 졸업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세시봉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나밖에 없어(웃음). 아마 방송국 피디가 됐겠죠.”
세시봉 멤버로서 그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많은 사람이 궁금해할 것이다. 그는 그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그 사랑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조만간 시청 앞 광장에서 무료로 공연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MC 없이 우리만의 공연으로. 이 얘기를 하니 다들 좋다고 했어요. 송창식에게만 말하면 돼요.”
후회되는 일은 없다, 오직 감사할 뿐
그는 매일 열한 시 전에 잠든다고 한다. 그리고 새벽 세 시나 네 시께 일어난다.
“그 새벽이 내 시간이에요. 인터넷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죠. 최고야 최고. 사진, 의상, 스키, 운동, 신문, 유튜브… 다 있어요. 그것만 해도 하루가 바빠요.”
단순히 그가 가수라서가 아니라, 그는 현재의 트렌드와 함께 숨 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가 나이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은 그러한 본능에 가까운 동시대성 덕분일 것이다.
“나를 의식하면 불편해집니다.”
김세환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일관된 지론을 듣다 보니, 그가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늙어가는 자신’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 것 아닐까.
“후회되는 거요? 하나도 없어요, 그저 감사할 뿐이지. 편한 대로 가는 게 삶이에요.”
아름다운 동반자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
주연; 조안 우드워드, 폴 뉴먼
제작연도; 1990년
상영시간; 126분
명망 있는 변호사 월터 브리지(폴 뉴먼)는 한여름에도 조끼와 넥타이를 갖춘 정장 차림을 고집하고, 행진곡풍 음악만 들으며, 극장에 가면 잠을 자고, 태풍이 시속 75마일로 불어와 모두 지하실로 대피하는 상황에서도 꿈쩍하지 않고 풀코스 정식을 마치는 고지식한 인물이다. 젊은 여성과 재혼한, 자유분방한 정신과 의사 친구 알렉스 사우어(사이먼 캘로우)는 성적 농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브리지에게 “정열이라는 단어를 알아?”라고 다그친다. 20년을 근속한 노처녀 여비서는 무심하다고 원망한다.
브리지의 아내 인디아(조안 우드워드)는 남편 의견이 곧 내 의견이라 여기며 남편 그늘 아래서 곱게 살아왔다. 주변 친구들의 진보적 의견과 자식들의 자기주장에 소외감과 혼란을 느끼며 정신과 상담을 받아볼까 생각해보지만, 브리지는 “나한테 얘기하면 되오”라며 일축한다.
장녀 루스(카이라 세드윅)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배우가 되겠다며 뉴욕으로 떠난다. 차녀 캐롤린(마가렛 웰시)은 대학도 마치지 않고 배관공 아들과 결혼한다고 난리를 피우더니 이제는 도저히 못 살겠다며 툭하면 친정을 찾는다. 아들 더글라스(로버트 숀 레오나드)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끔찍하게 싫어하며 남몰래 누드집을 본다.
전 세계 중·상류층 가정에서 누구나 겪을 것 같은 이야기 는 에반 S. 코넬l의 소설 (1959)와 (1969)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브리지 부인과 브리지의 입장에서 본 가정생활을 그린, 100여 편의 삽화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두 소설을 통합하여 1930년대 말 미국 캔자스 시의 상류 가정사를 안정적으로, 재치 있게 시나리오화한 이는 ‘인도의 찰스 디킨스’로 불리는 루스 프라워 자브발라다. 에피소드 중심의 산만하고 지루한 이야기로 전락시키지 않고, 유머 감각과 인물 성격을 잘 살려낸 점이 돋보인다.
는 브리지 부인의 세상 인식, 남편과 자식을 대하는 생각의 변화와 자각을 조심스럽게 그린 온건한 영화다. 일상과 감정 묘사가 섬세해서 쉽게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브리지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고지식하고 완고한 성격 탓에, 아내가 그토록 원하는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지 못한다. 심장에 이상을 느낀 그는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 아내를 은행 금고로 데려가 보험증과 증권 서류를 설명해준다. 물질적 기반보다는 남편과의 정신적 교류를 원했던 인디아는, 결혼 전 시를 읊어주었던 남편을 상기시키며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나요?”라고 묻는다. “사랑하니까 은행 금고까지 데려오지 않았소”라고 말하는 브리지. “그럼 가끔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세요”라고 아내가 말하자 그는 “나는 변호사지 시인이 아니요”라고 답한다. “보상받지 못하는 사랑은 싫어요”라고 말하며 이혼하겠다고 앙탈을 부리던 인디아는 남편의 뜨거운 키스에 그만 모처럼의 용기를 잃는다.
자식들은 엄격한 아버지보다 어린아이같이 순진한 어머니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어머니가 의존적인 삶을 살아와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엇이든 참견하고 돌봐주려 하자 불편해한다.
남편과 다투고 친정으로 쫓겨온 둘째 딸에게 “여자가 참아야 한다”고 말하는 인디아는 “어머니처럼 당하고 살지 않겠어요”라며 쏘아붙이는 딸의 말에 상처 입고는 기껏 “핫초콜릿 타줄게”라는 말밖에 하지 못한다. 보이스카우트가 된 아들은 “어머니에게 감사 키스를 해드려라”는 단장의 말에 머뭇거리고, 아들로부터 키스를 받지 못한 인디아에게 브리지가 대신 키스를 해준다.
인디아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왜 사는지 모르겠다”며 끝내 자살을 택한 친구 그레이스 바론(블리드 대너)이다. 은행가 남편의 앞날을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파격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레이스에게 인디아는 “나도 인생이 무언지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러나 잘 모르겠어. 그러나 우리는 많은 혜택을 받았으니 그걸 생각해봐”라고 말한다. 그레이스의 죽음에 오열하는 인디아를 브리지는 이렇게 달래준다. “그녀 남편은 무엇이든 해주려 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주변 사람을 힘들게 했소. 그녀가 남편이나 아이들을 생각이나 했는가?” 자아가 뚜렷한 아내를 둔 보통 남편 바론의 심경을 대변해준 셈이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해도 사랑, 존경, 인격은 바뀌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브리지. 뭔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혼자서는 남편 그늘과 자식들에게로 향한 맹목적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인디아. 부모의 품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그토록 갈망했지만 세상이 녹록지 않음을 알고 결국 부모 곁으로 돌아오는 자식들.
브리지 가족의 옛날 흑백 기록 필름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여, 가족사와 이후 이야기를 자막으로 처리하면서 끝나는 는, 이상적인 혈연 공동체를 희구한다. 이상의 구심점은 결국 아내와 어머니라는 것. 거친 세상을 휘젓고 다녔어도 마음 내키면 언제나 돌아와 쉴 수 있는 아내와 어머니의 품. 그래서 그 아내와 어머니는 세상의 세파를 맞받지 않고 순결한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아내와 어머니를 지켜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속삭인다. 여권 운운하는 입장에서는 성에 안 차는 영화이겠지만, 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장수 프로로 자리 잡았던 것처럼 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크게 비난할 거리가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 같은 주제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눈이 몹시 내리던 날, 인디아는 외출을 위해 차고에서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 시동이 걸리지 않아 밖으로 나오려 하지만 차고 문이 자동차 문을 꽉 막아 밖으로 나올 수가 없다. 배기가스가 가득 차 호흡이 곤란해지자 도움을 청하는 그녀의 음성은 너무나 가냘프다. 차창 위로는 눈만 가득 쌓인다. 혼자서는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없는 아내와 어머니를 상징하는 듯하다. 브리지가 시간 맞춰 와준 덕분에 인디아는 무사했지만 화가 난 브리지는 그 자동차를 폐기처분시킨다.
불안이 없지 않지만 남편과 아이들 속에서 행복한 노년을 맞이한, 세파를 모르는 귀여운 어머니상을 연기한 조안 우드워드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폴 뉴먼의 아내인 조안 우드워드는 에서처럼 아까운 배우 인생을 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녀의 연기력이 나무랄 데 없는데,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영화 출연이 뜸했기 때문이다. 1958년에 결혼한 두 사람은 폴 뉴먼이 200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았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는 미국 출신이지만, 인도인 제작자 이스마일 머천트와 인도인과 결혼한 독일 출신 작가 루스 프라워 자발라와의 협업으로, 300만 달러 내외 제작비로 품격 높은 작품들을 내놓은 것으로 유명했다.
인도의 거장 사타야지트 레이와 프랑스 고전 영화계를 대표하는 장 르누아르의 영향을 받은 초창기 작품들은 영국과 인도를 배경으로 한 이질적 문화 충돌을 다뤘다. (1965), (1970), (1893)이 이에 속한다.
고전문학 작품을 우아한 시대극으로 재창조하는 데 남다른 열정과 재능도 발휘했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이 원작인 (1970)와 (1984)와 (2000),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 소설이 원작인 (1985)과 (1987)와 (1992), 일본계 영국인 이시구로의 소설을 각색한 (1993), 가 그러하다.
예술가를 꿈꾸는 현대 뉴욕 젊은이들 이야기인 (1989), 여성 편력을 중심으로 한 피카소 일대기 (1996), 미국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의 파리 대사 시절을 그린 (1995), 다이앤 존슨의 베스트셀러가 원작인 (2003)도 삼인방의 필모그래피에서 처지지 않는 작품들이다.
마늘, 파, 부추, 달래, 무릇(흥거) 등 우리 사찰에서 금하는 다섯 가지 채소를 ‘오신채(五辛菜)’라고 한다. 재료의 성질이 맵고 향이 강해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오신채를 사용하지 않고 만든 음식을 흔히 ‘사찰음식’이라 부른다. 이러한 사찰음식의 개념을 넘어 ‘한국 전통 채식’의 의미를 더한 무신채(無辛菜) 식단을 지향하는 맛집 ‘마지’를 찾아갔다.
순하게 즐기는 우리 전통 채식
서울 경복궁 인근 서촌마을에 위치한 ‘마지'는 아담한 한옥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2012년 사찰음식 도시락을 선보였던 마지는 이듬해 서울 방배동 매장을 마련했고, 올해 4월 지금의 서촌 분점을 열었다. 그 출발은 ‘사찰음식’이었지만, 오랜 연구와 고민을 거듭하며 현재는 ‘한국 전통 채식’이라는 의미로 확장해나가고 있다. 종교음식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마지의 김현진 대표는 “사찰음식점으로 유명해지긴 했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한국 전통 채식’입니다. 식물은 저마다 독성이 있기 때문에, 짧게라도 열처리를 해서 독성을 제거해야 해요. 그게 한국 전통 채식의 조리법이라 할 수 있죠. 우리는 그 방법을 고수해 음식을 만들고 있습니다”라며 이곳 음식의 의미와 고집을 드러냈다.
목사님도 즐기는 부담 없는 사찰음식
마지를 찾아오는 손님들은 대개 스님이거나 불교 신도들 아닐까? 이에 김 대표는 선입견에 불과하다고 했다. “서촌점 개업 날도 스님보다 목사님이 더 많이 방문했어요. 단골을 봐도 스님, 목사님, 신부님 비율이 거의 비슷하죠.” 또 한 가지 반전은 김 대표는 한때 잘나가던 수학선생님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사찰음식으로 전향하게 된 데에는 가족의 영향이 컸다. 암으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부쩍 건강에 신경을 쓰던 그녀의 몸에 이상증세가 나타났다. 병원에 가보니 항생제 알레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근력을 키우기 위해 즐겨 먹었던 (항생제 처리된) 닭고기가 화근이었던 것. 그길로 자신이 먹는 식재료들의 근원을 탐구하기 시작했고, 사찰음식에 눈을 뜨게 됐다. 그리고 마지가 문을 열기까지 그의 어머니인 백련성(본명 이춘필) 백련사찰음식 연구소 소장의 역할이 컸다.
재료 본연의 맛에 집중하다
선재 스님에게 사찰음식을 사사한 백련성 소장 역시 과거 고기를 먹다가 급체한 이후 채식만 먹게 됐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식재료 하나하나에 더욱 신경을 쓰고 정성을 다할 수 있었다. 마지의 대표 메뉴는 연밥올림 한상차림(1만7000원)인데, 여기에 쓰이는 연잎 한 장도 직접 엄선해 사용한다. 5월에서 10월까지, 여름내 촉촉이 비를 맞고 가을에 제대로 영글어진 백련 잎만을 고집한다. 여러 연꽃 중에서도, 백련 잎은 향이 진하고 약용 성분이 풍부해 연밥을 지었을 때 맛이 좋고 건강에 도움이 된다. 이곳에서는 지름이 50cm 정도인 큰 연잎에 흰 찹쌀만 넣고 연밥을 만든다.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지 않아도 건강한 자연의 향을 머금은 밥맛이 풍족하게 느껴진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깍두기는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 인공조미료나 액젓 대신 과일소스와 간장으로 양념한다. 흔히 식당에서 즐기는 새콤하게 무른 깍두기와 달리, 아삭아삭하면서도 기분 좋은 알싸함과 단맛이 느껴진다. 다른 반찬들 역시 천연 효소나 최소한의 양념만 넣어 담백하게 요리한다.
마지의 삼일(3·1) 캠페인
사찰음식의 맛에 눈뜬 사람이라도 가격이 부담스러워 자주 즐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이곳에서는 8000원부터 1만원까지, 비교적 부담 없는 가격으로 맛볼 수 있는 메뉴들을 선보이고 있다. 부담 없는 가격으로 부담 없는 한 끼를 즐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김 대표는 ‘삼일 캠페인’을 제안한다. 세끼에 한 번, 3일에 한 번, 또는 외식 세 번 중 한 번은 가벼운 음식을 먹어서 과한 영양 섭취에 지쳐 있는 우리 몸을 편안하게 해주자는 것. 그렇게 서서히 우리 몸과 영양의 균형을 찾는 식단을 마련하는 게 마지의 목표다.
마지에서는 주마다 종교학, 음식학, 철학 등을 아우르는 ‘인문학밥상’ 강의가 열린다. 단순히 밥을 먹는 식당을 넘어서 불교를 흥미롭게 접하고 종교 간 화합을 마련하는 소통의 장으로 발돋움하고 있다(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5길 19).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반세기 전 떠나간 여자 친구 이야기를 황경춘 전 외신기자 클럽 회장이 보내주셨습니다.
황경춘 언론인
엽(葉)아, 이렇게 네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네가 교통사고로 비명에 간 지 반세기가 지났구나. 차량 왕래가 드문 시골길에서 일어난 너의 사고 소식을 뒤늦게 알았을 때, 마흔도 못 채운 너의 짧은 인생이 한없이 나를 슬프게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네가 살던 도시의 중학교에 입학한 내가 하숙을 구하지 못하자 아버지가 너의 집을 임시 거처로 정해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의 집 문간방에서 네 남동생과 함께 한 학기를 지낼 때 너는 단발머리의 초등학교 5학년생이었지.
만사에 엄격한 너의 어머니는 내가 있는 문간방에 나보다 한 살 위인 너의 언니를 비롯한 세 자매가 출입하는 것을 엄금했어. 그러나 어머니가 교회에 가는 일요일이면 너희들은 내 방에서 깔깔대며 놀 때가 많았지. 세 자매는 객지에서 하숙하는 나의 쓸쓸함을 잘 달래주었어.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대학으로 유학 간 내가 다시 너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5~6년 뒤의 여름방학 때였다. 지리산에 가까운 어느 초등학교 교사였던 너는 우리 동네에 있는 너의 큰집에 다니러 온 길이었어. 젊은 처녀로서 남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뚱뚱해졌지만 너는 쾌활하고 꿈 많은 문학소녀였지. 상냥한 미소와 맑은 목소리는 어릴 적 그대로였고.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만 자란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너의 큰집은 빈촌인 우리 마을에서도 가난한 부류에 속하는 소작농이었다. 너의 사촌오빠는 한때 우리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고, 너의 큰아버지도 우리가 일본에 있을 때 우리 집에서 일했지. 어린 내가 어른들을 따라 좀 거리가 있는 이웃 마을 극장에 갔다가 잠들어 너의 큰아버지 등에 업혀 귀가한 적도 몇 번 있었어. 이런 배경 때문인지, 광복 얼마 전 네가 고향 학교로 전근해온 뒤에도 우리 부모님은 가깝게 지내는 우리 사이를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셨지. 일본군 징집영장을 집에서 기다리던 전쟁 말기의 어수선했던 시절, 거의 자포자기 상태인 나를 너는 따뜻하게 위로해주었고, 내가 읽던 책을 빌려가기도 했어.
다시 몇 년이 흐르고, 결혼한 네 언니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뒤, 얼마 있다가 네 남동생과 여동생도 연달아 세상을 떠났지. 다시 지리산 근처의 학교로 전근해간 네가 서른을 넘은 노처녀로 지낸다는 소식이 들리더구나.
한국전쟁이 끝난 뒤 나는 서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처음으로 너의 편지를 받았다. 이때까지도 우리는 서로 상대 이름을 불렀고 글도 옛날처럼 친구지간에 쓰는 말투 그대로였다. 이때부터 1년에 한두 번 오는 너의 편지는 언제나 “경춘아…”로 시작되었고, 차츰 편지 내용은 세상을 등진 문학소녀 같은 허무주의 냄새를 풍기곤 했지.
너는 여름방학에는 교원 강습이나 출장으로 서울에 자주 왔지. 강습이 끝난 뒤 함께 남산공원을 산책한 적도 있다. “경춘아…” 하는 너의 말투는 여전했어. 우리는 어디까지나 친구였지. 일제강점기 때 내가 빌려준 책 속의 일본 허무주의 시인의 시, “동해 작은 섬 바닷가 하얀 백사장에서/나는 눈물이 쏟아져 게와 장난질하다”를 네 신세를 한탄하는 편지 속에서 발견하고 놀라기도 했다. 어떤 편지에서는 결혼 안 한다고 심하게 꾸짖는 네 어머니를 원망하기도 했지.
나는 이런 편지에 한 번도 답장을 쓰지 않았으나 너는 탓하지도 않았어. 다만 가끔 내가 너무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항상 바쁘게 일하고 있다고 비아냥대듯 말했는데, 너는 그저 씩 웃기만 했지.
그러던 어느 날, 시골에 사는 누님이 네가 사십 줄의 노총각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상대가 그냥 노총각이 아니라 아이가 하나 있는 상처한 동료 교사라고 알려주었어. 너의 교통사고 이야기는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들었기에 더욱 슬펐다.
엽아, 네 마음의 아픔은 충분히 알 것 같구나. 그러나 우리는 끝내 좋은 친구였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저세상에서 서로 좋은 친구로 다시 만나자. 부디 주소 없이 보내는 이 편지를 읽고, 평소에 답장 한 통 보내지 않은 나를 용서해다오.
“하나, 둘, 셋, 넷….” “꽃손, 주먹손, 칼손, 재즈손.”
방배동의 한 무용 연습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음색의 목소리들이 구령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까르르 숨넘어가는 웃음소리도 난다. 여학생들일까?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마주하고 나니 맞는 것 같다. 표정과 마음, 몸짓까지 생기 넘치는 치어리더팀. 우리는 그들을 낭랑 18세라 부른다!
평균 나이 74세, 색다른 세계에 발을 내딛다
치어리더. 스포츠 경기장에서 운동선수의 승리를 위해 응원하는 이들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야구장 또는 농구장에서 만날 수 있다. 멋진 포즈와 율동으로 선수뿐 아니라 경기를 보러 온 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경기장의 꽃’ 치어리더. 젊고 화려한 여성의 전유물처럼 보이는 이 무대에 평균 나이 74세 ‘낭랑 18세’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소녀처럼 웃고 떠들다가도 치어리더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서면 영락없는 치어리더 아가씨로 변신한다. 본격적인 치어리딩 연습에 앞서 다리를 움직이고 팔을 하늘 위로 뻗고 허리를 제법 유연하게 돌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놀랍다. ‘나이 들어도 저렇게 섹시(?)할 수 있구나’란 생각마저 들 정도. 진짜 낭랑 18세의 모습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고나 할까. 작년에는 기아 타이거즈 홈 경기장에서 멋진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시니어 치어리더팀이 세상 빛을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낭랑 18세 시니어는 전국에 50여 명이 있다. 그중 서울에 있는 20여 명이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치매예방체조 배우다 치어리더가 되다
낭랑 18세는 (사)세계전통문화놀이협회(이하 협회·대표 조혜란)의 치매예방체조 프로그램 ‘낭랑스쿨’로 출발했다. 조혜란 대표는 8년 전, 처음 이 협회를 만들면서 시니어의 건강에 관한 관심이 많아졌다.
“협회 초기부터 쭉 전통놀이를 바탕으로 한 치매예방체조를 했어요. 그런데 제가 협회 대표를 하면서 동시에 대한치어리딩협회 실버분과를 맡은 적이 있었어요. 시니어들도 치어리더 옷을 입고 뛰어보니 생각보다 잘하시더라고요.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믿었어요.”
낭랑 18세로 활동하는 시니어들 대부분 처음에는 ‘다리가 아프다, 팔이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했다고. 몸이 아파 오랫동안 심신이 약해진 시니어들에게 ‘스스로 설 수 있다’는 생각운동이 치어리딩을 하는 데 무엇보다 필요했다.
“전통놀이로 치매 예방도 하고 무엇보다 일어서서 나도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것이 필요했어요.”
치어리딩 연습을 하기 전 낭랑 18세들은 빙 둘러앉아 손뼉을 치고 손가락을 접으면서 큰 소리로 셈을 한다. 이 모든 활동이 치매예방운동이자 전통놀이를 통한 생각운동이라는 것. 무엇보다 이곳에서 치어리딩을 하는 시니어들 대부분은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할 만큼 체력이 좋아졌다.
“보건소에 가서 체력 측정을 할 때마다 근력도 늘고 전반적으로 건강이 좋아졌다는 말을 듣고 있어요.”
치어리딩 지도자로 제2인생을 열다
현재 낭랑 18세 회원 중 12명은 실버 지도자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이곳에서 치어리딩을 배운 시니어가 동년배를 가르칠 수 있도록 삶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지도자 실습을 두 차례 정도 다녀온 회원도 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인정받고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시니어다. 낭랑 18세를 향한 각종 매체의 취재 경쟁(?) 또한 부쩍 늘었다. 치어리딩 연습에 방송에도 얼굴을 비춰야 하니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다. 낭랑 18세는 오늘도 초록색 치맛바람 휘날리며 목청껏 응원의 함성을 외치고 있다. 낭랑 18세 파이팅!
mini interview
내 인생 다하는 날까지 파이팅~ (김순덕·80)
치어리딩을 시작한건 1년 됐어요. 원래 다리가 많이 안 좋았어요. 처음 제가 여기 왔을 때 조혜란 대표님이 걷는 모습을 보더니 “뛸 수 있을까요?” 하면서 걱정하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남에게 지지 않을 만큼 잘 뛰고 있어요(웃음). 제가 여기서 나이가 제일 많아 다들 왕언니라고 불러요. 규칙적인 운동을 하니까 다리가 정말 눈에 띄게 좋아졌어요. 치어리딩을 하면 아무래도 즐겁죠. 병원에서는 제가 나이도 있으니까 평소에 살살 걷고 약으로 달래가면서 생활하라더군요. 그래서 처음에는 수영이랑 걷기를 했어요. 그러다 우리 딸이 여기 팀장인데 한번 와보라고 해서 왔다가 완전 재미를 붙였습니다. 좋은 친구 만나 대화도 하고 도시락 서로 싸와서 뷔페식으로 나눠 먹으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앞으로도 치어리딩을 계속할 생각이에요. 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요.
치어리딩 새내기입니다! (임창애·67)
동네에 형님 한 분이 계신데 나를 보더니 운동하러 가자면서 난타를 배우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뭔 난타냐고 그랬어요. 쫓아와보라고 해서 ‘그래 한번 가보자’ 하고 왔지요. 안 그래도 운동은 하려고 했어요. 무릎이 아파서 몸을 움직이지 않고 쉬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요즘 운동은 저같이 나이 든 사람보다는 젊은 사람에게만 맞춰진 것들이 많잖아요. 그건 또 따라 못할 것 같고. 와서 여러 형님들 하는 거 보니까 나도 조금만 하면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재밌어 보이더라고요. 3월에 들어왔으니까 몇 번 안 했죠. 이번에 새로운 유니폼으로 바꾼다는데 기대가 돼요.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모임에서 친구들과의 수다 중에 한 친구가 남편이 꽃바구니를 사 들고 들어온 이야기를 했다. 5명의 친구들 반응은 반반으로 갈렸는데 두 명은 “어머, 좋았겠다.”였고 필자를 포함한 3명은 “아유~난 꽃 선물은 싫어,”였다.
필자를 포함 싫다고 한 사람들은 꽃바구니 선물 받은 친구가 부러워서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는 정말 꽃을 선물 받으면 반갑지 않다. 꽃보다는 케이크이나 초콜릿이 더 반가우니 이런 필자자신이 참으로 낭만적이지 못하고 팍팍한 것 같아 속이 상하기도 하다.
그러나 처음 꽃다발이나 꽃바구니를 받을 땐 싱싱하고 예쁘던 것이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서 시들거리다가 마침내 꽃잎도 축 늘어지고 색도 변하면서 쓰레기통에 버려져야 하게 되는 것이 안타깝고 불쌍하게 생각되는 게 내가 꽃 선물을 반가워하지 못하는 큰 이유 중 하나랄 수 있다.
예뻤던 꽃이 추하게 변하여 내다 버리는 것도 일이었고 사람에게 비교해 보면 어리고 젊을 때 한창 예쁘다가 나이 들어 늙으면 이렇게 보기 싫어지는 게 서글프게도 닮아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기도 한 것이다.
아름다운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꽃은 무언가 사람에게 보는 것만으로 위로 해 주는 힘이 있기도 하고 우울한 기분을 사라지게도 한다.
동양의학 이론으로는 꽃 중의 여왕 장미는 갱년기 여성의 심리적 육체적 불안감을 달래주는 효과가 있으며 특히 장미의 향기는 심신의 피로에서 회복시켜준다고 한다.
장미의 향은 꽃보다 잎에서 더 많이 나오기 때문에 꽃꽂이를 할 때 잎을 너무 많이 쳐내지 말라는 말도 있다. 그리고 잎과 꽃의 습기 조절 작용이 활발해 건조해지기 쉬운 실내공기의 적정 습도를 지켜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휴식공간인 침실에는 숙면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꽃이 좋은데 안개꽃이나 아이리스가 있으며 이런 꽃은 긴장을 완화시켜주고 편안한 기분이 들게 해 준다고 한다.
고혈압 환자에게는 프리지어처럼 맑고 상쾌한 향기가 나는 꽃이 좋으며 향기가 교감신경에 직접 작용해 흥분된 신경을 억제하고 혈압을 정상적인 수치로 되돌려 주는 효과가 있는 꽃이라고 한다.
흰색 분홍색 국화는 두통 어지러움에 도움이 되며 노란색 국화는 식욕을 증진시키고 심신을 편안하게 달래주기도 한단다.
이렇게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몸에 좋은 효과도 볼 수 있게 해주는 꽃을 왜 반갑게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
낭만을 사랑하던 시절과 다르게 꽃값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웬만한 일에 축하한다고 3만 원이나 5만 원 하는 꽃다발이나 꽃바구니를 준비하기가 쉽진 않다.
꽃을 기르는 분들에겐 죄송한 말이지만 꽃값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다.
무식하게 말한다면 먹을 수도 없는 것이 그냥 잠깐 보고 즐기려고 사기엔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인데 나도 원래 이렇게 무식하게 꽃을 돈으로 생각하는 여자는 아니었다.
친구에게 멋지게 포장한 꽃다발 선물하는 것도 좋아했고 때때로 남대문시장 꽃가게에서 작은 꽃망울의 예쁜 꽃들을 한 아름 사 신문지에 싸 와서 항아리에 꽂으며 즐거웠던 적도 있었는데 나이 들면서 예쁜 호르몬이 다 없어졌는지 이렇게 투박해져 버렸다.
요즘은 축하할 일이 생기면 꽃보다 케이크를 사 들고 간다.
이렇게 감정이 무뎌져 버린 내가 안타깝고 아쉽기는 하다. 낭만을 사랑하던 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봄기운이 완연한 4월. 곳곳마다 피어난 꽃구경에 눈이 호강하는 달이다. 이맘때쯤이면 주꾸미도 제철을 맞는다. 한껏 물오른 주꾸미를 더욱 특별하게 선보이는 곳이 있다. 올망졸망 기지개를 켠 꽃송이만큼이나 앙증맞게 짧은 다리를 활짝 편 주꾸미의 조화가 예사롭지 않은 이곳, ‘우미대가왕쭈꾸미’를 찾아갔다.
이 조합이 가능해? 한식과 양식이 한곳에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위치한 ‘서오릉(西五陵)’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사적 198호로 지정된 명소다. 다섯 능을 돌아보며 걷기에 부담 없어 봄나들이 코스로도 제격이다. 한 바퀴 산책을 마치고 나면 서오릉에서 도보로 10분 거리, 벌고개 인근 식당가를 찾게 된다. 식당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서 쓱 훑어보면 ‘우미대가왕쭈꾸미’ 건물이 눈에 띈다. 개나리처럼 노란 외벽에 갈색 지붕, 파란 창문이 인상적이다. 외관상으로는 카페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주꾸미집이라고 하니 조금 의아하게 느껴진다. 단순히 주꾸미 집으로 알고 들어서면 또 한 번 생소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이곳의 메뉴 구성이다. 주꾸미와 피자, 불고기와 파스타, 김치말이국수와 꽃 샐러드 등 색다른 조합이 가능하다.
국가대표 셰프가 만드는 요리 앙상블
한식과 양식의 독특한 만남은 총괄 셰프인 조우현 대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한민국요리 대표팀 ‘수라’의 팀장이자 감독을 맡았던 그는 2009 아시아컬리너리컵 대상, 2014 룩셈부르크요리월드컵 은상·동상을 수상하는 등 각종 세계요리대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조 대표는 “아무리 톱 셰프일지라도 고객이 만족하는 음식을 만들 수 없다면 최고라 할 수 없다”는 철칙으로 고객의 입맛을 사로잡고자 했다. 그렇게 다양한 시도를 통해 탄생한 것이 지금의 메뉴들이다. “주꾸미 집에서 파는 피자가 맛이 좋겠어?”라고 시큰둥하다가도 막상 먹어보면 여느 피자 전문점 못지않은 맛에 감탄하게 된다. 오히려 그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피자 반죽만 해도, 취나물을 갈아 넣어 숙성한 도우를 사용한다. 일반 밀가루 도우보다 영양분은 물론, 더 쫄깃하고 담백한 식감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사시사철 만끽하는 봄기운 한 상
이곳 메뉴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재료가 있다. 바로 ‘식용 꽃’이다. 팬지, 카네이션, 패랭이, 국화, 장미 등 알록달록 꽃들이 피자와 샐러드 등에 올라간다. 크게 맛을 좌우하는 재료는 아니지만, 시각적으로도 예쁘고 기분도 산뜻해지는 요소가 된다. 단골들이 가장 선호하는 구성은 불주꾸미와 꽃 피자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세트 메뉴다.
외식을 하면서 이 세 메뉴를 한 상에서 만나볼 일은 극히 드물 것이다. 생소한 조합이지만 예상외로 궁합이 잘 맞는다. 매콤하고 쫄깃한 주꾸미볶음을 먹고 얼얼해진 입안을 폭신하고 고소한 피자가 달래준다. 반대로 치즈가 들어간 피자를 먹다가 느끼하다 싶을 때 칼칼한 주꾸미를 먹으면 입안이 개운해진다. 특별한 경험의 연속인 이곳에서는 물 한 잔도 평범하지 않다. 생수나 보리차 등 일반 식당에서 내오는 식수가 아닌, 로즈메리 허브차를 제공한다. 찻주전자를 고체 연료 위에 올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차가 따끈하게 유지된다. 티타임을 더 즐기고 싶다면 야외 정원 카페를 이용해보자. 투명한 벽면으로 된 카페에서는 아름다운 봄 풍경이 그대로 한눈에 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