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국립무용단의 춤사위가 펼쳐졌다.
‘향연’ 이것이 우리의 춤이다, 라는 제목으로 관객에게 보인 무대는 숨 막힐 듯한 아름다움이다.
정중동이라는 말처럼 수십 명의 무희가 고요한 가운데 손짓하나 발걸음 하나까지도 어쩌면 그리도 똑같이 움직이는지 다음 동작을 놓치지 않으려 눈 한번 깜빡할 수 없었다.
한국무용을 보게 되니 옛 생각이 밀려왔다.
꿈 많던 여고 시절 우리 학교에서는 과외활동으로 특활반이 있었다.
교과 과정과는 별도로 여러 가지 많은 과목 중 원하는 수업을 받을 수 있었는데 공부에 취미 있는 친구들은 과학반이나 문예반 등을 선택했고 합창반, 무용반, 탁구반 등이 있어 배우고 싶은 반에 들을 수 있었다.
그중 무용반은 발레반과 고전무용반이 있어 필자는 고전무용반을 선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게 우리 고전무용반에서는 엄마의 한복 치마가 필수였다.
색색 가지의 엄마 한복 치마 하나씩 두르고 반장 언니의 장구 소리에 맞춰 고전무용을 익혔던 그때가 참으로 그립다.
그렇게 장단을 맞춰 고전무용을 배우던 시절을 추억하며 관람한 이 날 공연은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4번째 오르는 공연으로 2015년 초연부터 지금까지 매회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향연’은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를 엮어내며 1막 봄은 궁중무용, 2막 여름은 종교무용, 3막 가을은 민속무용, 4막 겨울은 신 태평무라는 테마를 표현해서 변화하는 계절처럼 서로 다른 춤으로 숨 가쁘게 이어졌다.
궁중무용부터 종교의식 무, 민속무용까지 한국 춤의 대가들이 모여 한국 춤 신드롬을 불러 일으킨 이 작품은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좋은 평을 받았다고 한다.
1막은 제의, 진연, 무의로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데 무대 한가득 정렬로 늘어선 새하얀 옷에 까만 망건 모자를 쓴 무희들의 정말 조용한 움직임으로 시작되었다.
움직일 듯 말 듯 한 동작이 어찌나 정교하게 똑같은지 고요 속의 태풍을 보는 듯 차가운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2막이 시작되면서 목검을 든 힘찬 몸짓의 남자무용이 펼쳐졌고 이어서 계속되는 무희들의 의상에서 우리 옷이 이렇게나 색이 곱고 멋있는지 감탄이 절로 났다.
바라춤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챙챙’ 하는 음향으로 필자의 마음을 울렸고 망자의 액운을 풀어주고 살아생전 삶의 애환을 달래준다는 살풀이춤, 요란한 꽹과리 소리로 잡귀를 물리친다는 진쇠 춤이 흥겨웠다.
3막 가을이 되어 무르익은 가을 연회도 고조되는데 선비 춤 장구춤, 소고춤, 오고무가 신나는 장단에 맞춰 신명 나게 펼쳐졌다.
4막 겨울에서 보여 준 신 태평무는 우리 궁중무용의 진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새빨간 궁중 복을 차려입은 한 떨기 꽃처럼 예쁜 여자 무희와 파란색 옷을 입은 남자 무용수와의 조화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50여 명의 무용수가 나라의 안녕과 태평성세를 축원하며 춘 우리 춤이 이렇게나 멋지고 아름답다는데 감동이 밀려왔다.
마지막 춤이 끝나고 국립무용단 단장과 예술 감독이 무대에 올라 인사를 할 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고교 시절 알록달록 엄마 한복 치마 하나씩 걸치고 장구 소리에 맞춰 무용 연습하던 그 날의 추억을 돌아보며 보았던 아름다운 춤의 ‘향연’이었다.
셋째 주 월요일, 코엑스에서 공연하는 클래식 티켓이 생겼다.
클래식에 무식한 필자는 실은 그동안 몇 번 참석해 보았던 오케스트라의 웅장함이 연상되어 갈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지루할지 모른다는 전제로 공연 좋아하는 후배에게 연락했더니 흔쾌히 좋다고 해서 동행해 같이 가게 되었다.
공연을 좋아하는 후배가 즐거워하니 필자도 따라서 마음이 즐거워졌고 팸플릿의 프로그램을 보니 다 필자가 좋아하는 음악으로 선곡되어 있어 오늘 밤 공연은 매우 멋질 것이라는 기대로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음악적 언어를 마음껏 구사하는 크리에이티브한 재능을 가진 앙상블 팀 ‘DE CODA 디코다’가 첫 내한공연으로 우리 곁에 왔다.
우아함과 열정, 세련됨과 섬세함으로 클래식의 대중화를 위해 미국, 영국, 독일, 아이슬란드, 일본, 홍콩에서 매혹적인 무대를 선보였던 디코다 챔버 앙상블이 드디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코엑스의 오디토리움에서 피아노, 비올라, 바이올린, 첼로, 더블베이스, 클라리넷, 바순, 트럼펫, 프렌치 혼의 악기를 10명의 연주자가 아름답게 들려주었다.
한 명씩 우리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며 자신의 악기로 들려줄 곡을 설명했고 리더인 듯한 클라리넷의 조원진 씨가 통역했다.
연주자 10명 중 한국인이 세 명 있는데 남자 바이올린 김시우는 5살 때 이민을 갔다는 데도 모국어를 아주 유창하게 했다.
또 다른 여자 바이올리니스트인 그레이스 박은 외국에서 태어나서 간단한 인사말 외는 영어로 설명했다.
음악이 흐르면서 필자는 하마터면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을 놓칠 뻔했다는 데 가슴이 철렁했다.
첫 번째 음악으로 비제의 카르멘 중 아주 야성적이고 열정적인 투우사의 노래가 울렸다.
행진곡으로도 많이 쓰이는 귀에 매우 익은 음악이다.
다음은 비발디의 사계 중 ‘가을 1악장’이 연주되었고, 젊은 날 가슴 조이며 좋아했던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가 필자의 가슴을 다시 물결치게 만들었다.
슈베르트의 ‘송어’도 좋았고 브람스의 ‘헝가리언 무곡’과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은 앉은 채로 어깨를 흔들게 했다.
그리그의 ‘아침 정경’의 아름다운 선율이 흐른 후 쇼스타코비치의 재즈모음곡이 울렸다.
재즈는 언제 들어도 끈끈하게 필자를 사로잡는데 다음 곡인 영화 ‘여인의 향기’에 나왔던 ‘포르 우나 카베사’에서는 영화 속에서 탱고를 추던 앞을 못 보는 노신사와 아름다운 여인이 떠올라 감동이 밀려와 눈물이 나기도 했다.
타이스의 명상곡으로 마음을 달래준 후 엘가의 ‘사랑의 인사’가 연주되었고 생상스의 백조가 울려 퍼졌다.
언제인가 어린 날 피아노를 배우면서 열심히 익혀 건반을 두드렸던 노래들이어서 자꾸만 그때가 생각나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인터미션이 지나고 2부에선 시네마 천국을 들려주었고 관객들이 앵콜! 을 외치자 미리 준비했던 듯 자기들은 뉴욕에서 온 팀이라며 ‘뉴욕뉴욕’ 그리고 빌리 조엘의 ‘뉴욕 스테이트 오브 마인드‘를 선사했다.
연주자와 관객 모두 흥이 나서 노래를 따라 부르며 환호했고 필자와 후배도 ‘앵콜’을 외치며 아름다운 곡들을 즐겼다.
마지막 앵콜곡 ‘시월의 멋진 어느 날’은 자막의 노랫말이 너무나 아름다워 가슴이 저려왔다.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같이 있어 줄 친구가 있는 이런 날이 있어 정말 살아볼 만한 아름다운 세상이다.
어제보다 아침 기온이 높다는데
얼굴 마주치는 바람의 흐름이 어제와 다르다.
내가 아는 신화엔 반드시 등장하는 바람.
인간에겐 본능적으로 바람에 관심이 많은 유전자가 있는지
영웅호걸이 등장하려면 폭풍이 불거나 회오리 몰아친다.
어떤 형태든
바람이라는 조연이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중간 중간 제 역할 해줘야
등장인물이 돋보이고 신비감 주는 건 당연한 스토리텔링.
예쁘지만
가시라는 양면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장미와 달리
모난 곳도, 가시도 없이
누구와 만났느냐에 따라 전해지는
바다, 비 내음, 삼림살내, 나무, 꽃 향은 탐욕과 고통을 잠재운다.
우리에게는 마파람이라는 봄바람이 있어 흥할 수 있었고
좋은 토질에서 누구도 부러워하는 작물을 생산할 수 있었다.
온 세상 존재하는 것은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 게 없지만
바람이라는 이름 하나로
죽지도 않고 우리의 몸과 마음 곁에 늘 있구나.
언제 태어나 몇 살인지 아는 이 없고 궁금해 하는 사람도 없지만
적어도 나 보단 훨씬 연배인 건 알겠는데
노후 내가 바라는바와 같이 나이티도 안 낸다.
내가 부르지 않아도
나름의 스케쥴 맞춰 매년 한 차례씩 정해놓고 찾아오고
무엇 때문에 성질났는지 몰라도
가끔 스팟으로 씩씩 있는 대로 성질내며
혓바닥 길게 뽑아 아무거나 핧으며 지랄 떨 때도 있다.
잔디에 흰 구름 보며 누워 즐거움에 젖을 때면
"너 혼자만 재미 있을려구, 너 혼자만 즐길려구" 하며
곁을 차지하지만,
내 품에 안겨지지도 않아 네가 외롭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구나.
아 하
그래서 여기 저기 집적대며
나뭇잎, 풀잎하고도 얘기하자 건드리며 흐느끼는구나.
심술부려 가로등 불꽃 일부러 꺼트린 게 그래서였구나.
다 익지 않은 꽃잎 떨어트린 것도 그래서였구나.
풀내음 다 걷어가며 나뭇잎 떨군 장난도 그래서였구나.
그리고
간다는 말은 없어도, 갔다는 표를 그리 내는구나.
그래도 나는 안다.
차디찬 겨울바람, 훈훈한 서풍, 곡식 병들게 하는 동풍, 꽃 피우는 남풍
너는 보이지 않는 악기로
청 보리밭, 옥수수 밭, 가랑잎, 대숲의 노래를
천만가지 외로움 연주하며 관심을 끌려하는 것을
무슨 이름욕심 그리 많아
산바람, 계절풍, 편서풍, 회오리, 무역풍 말고도
셀 수도 없이 지어내는 것도 외로워 누군가 필요해서라는 거
그래도
역할이 영웅을 찾는다는데
재주 많은 너는 야심은 아닐 것이고
할 수도 없는 일들을 거칠 게 없이 펼치는 바보의 전형이다.
개혁을 원하니
혁명을 원하니
종교는 갖고 있니
적어도 너는 자살은 안 하겠구나.
네 직업이 궁금하다.
바람도 지난 바람이 낫다는데
남에게 바라는 게 없으면 내 마음이 편하다지만
늘 곁에서 네 외로움 달래주는 내가되고 싶구나.
바람 없었으면 글쟁이들 뭘로 먹고 살았을까.
少小离家老大回,乡音无改鬓毛衰。(어릴 때 고향 떠나 늙어서 돌아오니, 고향의 내음은 변함없는 데 귀밑머리 희어졌구나.)
儿童相见不相识,笑问客从何处来。(어린아이를 만나니 알아보지 못하고, 웃으면서 ‘어느 곳에서 오신 손님이냐’고 묻고 있네.)
이 시는 성당(盛唐) 전기의 시인이자 관리인 하지장(贺知章)(659~744)이 나이 86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50여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느낀 감회를 읊은 시(詩)다.
필자가 평소 아끼던 시(詩) 한 구절을 친구를 통하여 받게 되었다. 요즘은 거의 쓰지 않는 붓글씨 서체(書體)였다. 친구가 이민으로 고향을 떠난 지는 꽤 오래된다. 30년이 다 되는 것 같다. 한참 풋풋한 30대 젊은 시기에 만나 환갑이 넘었으니 많은 세월이 흘렀다.
필자가 친구를 기억하는 것은 각별한 인연 때문이다. 우리가 대학원 다니던 시절 그는 좀 늦깎이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그 결혼식 사회를 봐달라고 필자에게 부탁한 것이다. 다른 친구들도 많을 텐데 굳이 필자에게 부탁을 해와 서울에서 경상도까지 버스를 타고 다녀오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교통편이 불편해 경상도까지는 거의 한나절이 걸리는 먼 거리였다. 꽤 큰 결혼식장에는 손님들로 가득했고 주례는 대학 총장님이 직접 맡아 주셨다. 친구의 인맥과 대학에서의 활동상을 한눈에 보게 되었다. 먼 길이었지만 보람도 있었다.
친구가 보내온 사진을 보니 그때 생각이 불현듯 떠올라 감회가 새로웠다. 새까만 머리에 야무진 눈매, 고운 피부에 젊음이 넘쳐나는 당당한 청년은 없었다. 이제 외국 사람이 다 되었겠구나 싶었는데 그는 아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않고 있었나 보다. 그곳에서 서예인 동호회를 만들어 붓글씨 연습도 하고 마라톤도 하면서 취미 활동도 하고 있다고 한다. 좋은 취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때 붓글씨는 우리 생활에 밀접한 부분이었다. 필자도 어렸을 적 붓글씨 학원도 다니고 한문도 꽤 배웠다. 거리에는 붓글씨 학원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일이 되었다. 그런데 고국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향수를 달래주는 좋은 연결 매체가 될 듯하다.
친구의 사진을 보면서 필자도 잠시 고향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고향이지만 자주는 가보지 못하고 명절 때나 한 번씩 가보곤 한다. 그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그 시(詩)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고향에 들어서면 어릴 때 내 모습이 골목마다 들판마다 그대로 있을 것 같았다. 잘 싸우고 화해하며 뛰놀던 사내들이며 계집아이들이 반가이 맞이하며 살아나올 것 같다. 이렇듯 반갑게 맞이해줄 것만 같은 고향인데 고향은 필자에게 늘 쓸쓸함만 안겨 주었었다.
언제나 필자는 그 마음으로 거기에 있었지만 고향 어린이들 모습은 친구들이 아니라 낯선 얼굴들이었다. ‘어디서 오셨나요? 누굴 찾으세요?’ 그들은 필자에게 항상 묻고 있었다. 기억을 잊어버린 유령들처럼 보였다. 아마 시인 하지장도 이 시를 쓰면서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시인도 뒤늦게 찾은 고향에서 그 쓸쓸함이 묻어난다. 친구의 검은 머리가 서리가 내린 것처럼 희끗희끗하게 변한 모습을 보니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의 심정에 공감이 간다.
반겨줄 사람 없어도 고향은 늘 우리 마음속 그리움의 샘이다.
반려동물이 예쁘고 귀여워서 무조건 받아주다 보면 잘못된 습관이 생겨 버릇 고치기가 힘들어질 수 있다. 가족으로 오래도록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려동물의 기본 습성을 이해하고
좋은 습관을 길러줄 필요가 있다. 훈련 방법들에 대해 알아봤다.
자료 제공 반려동물이야기
반려견 훈련 방법
혼자 있지 않으려 할 때 개는 무리 동물의 본능을 지니고 있다. 혼자 집에 있는 것을 싫어하고 외로움을 잘 느낀다. 하루에 30분만이라도 집중적으로 놀아줘야 한다.
자주 겁을 낼 때 천둥·번개나 비행기 소리 같은 큰 소리를 듣고 겁내는 반려견들이 있다. 그런 행동을 하면 못 본 척하며 평소와 같이 대해야 한다. 매번 달래주면 고치기 힘든 습관이 된다.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할 때 강아지에게는 평등개념이 없고 상하관계만 있다. 필요에 의해서 강아지를 잡고 있어야 한다면 그 상황이 끝난 다음에는 자유롭게 풀어준다.
놀랄 일이 생길 때 놀랄 때마다 리드 줄을 당기면 강아지가 더 긴장하게 되므로 편하게 풀어준다. 또한 가족이 당황하게 되면 강아지는 더 당황하기 때문에 침착하게 평소처럼 행동해야 한다.
사회성이 없을 때 생후 2~4개월까지는 사회화 시기다. 가능한 한 자주 외부 환경을 접할 수 있도록 해줘야 사회성 좋은 강아지로 성장한다.
아이와 놀면서 스트레스 받을 때 특히 아이가 개구쟁이일 경우 인내심이 많은 강아지라 해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할 때는 단호하게 타이르고 동물도 아파한다는 것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서열 과시하며 으르렁거릴 때 자기 서열이 높다고 과시하는 행동이다. 초기에 반드시 억제시켜야 한다. 으르렁거리는 즉시 “안돼!”라고 단호히 말하고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린다.
반려묘 훈련 방법
식습관 고양이에게 식사를 주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밥그릇에 사료를 한 번에 많이 담아놓고 먹고 싶을 때 언제든지 먹을 수 있게 하는 방법과 하루에 두 번 정도 정해진 시간에 일정한 양의 사료를 주는 방법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하루에 한 번은 밥그릇을 깨끗하게 닦아줘야 한다는 것. 첫 번째 방법을 이용할 경우에는 밥그릇을 닦아줄 때 사료도 새로 바꿔줘야 한다. 한 번 꺼낸 사료는 쉽게 상하고, 고양이의 침 등으로 변질될 수 있다. 사료가 남았더라도 아깝다 생각하지 말고 버려야 한다.
야행성 고양이 반려묘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늦은 밤 반려묘가 조용히 잠자는 것을 원할 것이다. 고양이의 야간 행동은 어릴 때 고치지 않으면 습관이 된다. 밤에 안 자면 실컷 놀아주면서 천천히 습관을 바꿔준다. 저녁에 밥을 먹이고 난 뒤 집중적으로 놀아주면 고단해서 아침까지 푹 잔다.
발톱 가는 버릇 발톱을 가는 것은 고양이의 본능이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어린 고양이도 작은 발로 발톱을 가는 흉내를 낼 정도다. 고양이의 발톱은 겹겹으로 되어 있다. 발톱을 갈면 오래된 낡은 발톱이 벗겨지고 날카로운 새 발톱이 나온다. 고양이의 이러한 행동은 단순히 오래된 발톱을 벗겨내려는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발톱을 갈면서 기분전환을 하고 마음을 진정시킨다. 혹은 발바닥에서 분비되는 물질을 묻혀 ‘마킹’을 한다. 마킹이란 고양이의 기본 습성 중 하나로 자기 구역 안에 자신의 냄새로 소위 도장을 찍는 행위다. 발톱을 갈 때는 발톱 전용 갈기(스크래처) 위에 고양이를 올려놓고 발을 가볍게 앞뒤로 움직이게 한 뒤 그곳이 발톱을 갈아도 되는 장소임을 반복해서 가르쳐준다. 카펫이나 가구 등 허락되지 않는 곳에서 고양이가 발톱을 갈려고 하면, 가볍게 앞발을 누르며 “안돼!”라고 말해준다. 가르쳐준 대로 잘 배워서 행동하면 충분히 칭찬해준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고양이는 발톱을 갈아도 되는 곳과 안 되는 곳을 알게 된다.
반려견의 무는 습관
어린아이가 무엇이든 입에 넣는 것처럼, 강아지도 무엇이든 물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특히 강아지의 경우 서열을 정하기 위해 무는 경우가 많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강아지들이 자기들끼리 물고 뒹구는 것은 마치 만화 속 장면처럼 귀엽게만 보이지만 사실 서열을 정하는 중요한 과정. 또한 스트레스 해소나 발육을 위한 행동이기도 하므로 어릴 때 물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강아지가 사람을 무는 행동을 제지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면 자신보다 서열이 낮다고 여겨 계속해서 문다.
기본 훈련 자신보다 서열이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을 방해하면 강아지는 무는 행동을 한다. “앉아”, “기다려” 등의 기본적인 교육을 통해 물면 안 되는 대상임을 알려준다.
무관심을 통해 가르치기 자거나 먹을 때 건드리면 짜증이 나는 것은 개들도 마찬가지. 매번 무는 습관을 보이면 천사처럼 자는 모습이 예뻐 보여도 침대 밑이나 발치에서 자도록 버릇을 들인다.
놀이를 통해 가르치기 강아지가 어릴 때부터 사람 손과 익숙해지도록 가르쳐야 한다. 만약 강아지가 손을 물 경우, 즉시 큰 소리로 “안돼!”라고 말해 무는 행동이 잘못됐다는 걸 인식하도록 한다. 손이 아닌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주는 것도 이런 습관화에 도움이 된다. 대형견은 사냥 욕구나 물고 싶은 욕망을 충분히 충족시켜주기 어렵다. 단단한 재질의 개껌이나 장난감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도록 해준다.
부드러운 손길로 가르치기 강아지가 물고 있는 손을 억지로 빼려고 하면 흥분해서 더 세게 물 수 있다. 이럴 때는 반대쪽 손으로 목 안쪽을 눌러 입을 벌리게 해 손을 뺀다. 평소 한쪽 손으로 먹이를 주면서 다른 손으로 강아지를 어루만져주면 사람의 손길에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아침 6시 40분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덜컹덜컹 몸이 흔들린다. 바깥 풍경은 오랜만에 선명히 잘도 보인다. 세련되지 않지만 뭔가 여유롭고 따뜻한 느낌이랄까? 한국 예술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부산포 주모(酒母) 이행자(李幸子·71)씨를 만나러 가는 길. 옛 추억으로 젖어들기에 앞서 느릿느릿 기차 여행이 새삼 낭만적이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들어간 부산포. 작은 낙서, 그림 하나, 스치는 공기까지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다.
부산의 마지막 주모를 만나다
부산 지하철 1호선 중앙역에서 용두산 공원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은 깨끗하고 단정하다. 신식으로 잘 닦인 거리. 오래된 주점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오른쪽으로 난 작은 골목에 釜山浦(부산포)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이곳에 우리나라 예술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주모 이행자씨가 있다. 깡마른 체구에 걸걸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행자씨는 중앙동 바로 옆 동광동에서만 42년째 주모로 살고 있다. 혹자는 이행자씨를 부산의 마지막 주모라고 말한다. 남들 다 떠나갈 때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옛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주막은 현재 부산포 하나다. 의미를 모르면 동네 흔하디흔한 주막, 조금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값진 역사와 예술가의 정이 흐르는 곳, 부산포다.
주막의 분위기는 주모가 잡는다
부산의 중앙동과 남포동 일대는 10여 년 전만 해도 부산의 굵직한 화랑들과 함께 인쇄 골목이 형성돼 있어 문인과 화가들이 넘쳐나는 이른바 예술의 거리였다. 지금은 해운대 일대로 예술 관련 사업이 옮겨가 작가들의 발길이 뜸해진 지 오래다. 외딴섬처럼 덩그러니 남겨진 부산포지만 그 안에는 옛 예술가들의 체취와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낙서 하나하나, 벽에 펜으로 휘갈긴 듯 그린 그림 속 인물은 한국 문단과 화단을 주름잡던 일류 작가군단이다. 매일 문지방이 닳도록 부산포를 오간 문화 예술인만 수백은 될 것 같다. 부산포 주모 이행자씨가 이토록 작가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내 고집대로 한 거지 뭐. (화장) 진하게 하고 나와서 하하 호호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그러니까 손님은 없어. 옛날이야 줄 섰지만. 내 성질이 개떡 같아. 손님들도 내쫓아요. 욕하는 사람, 슬리퍼 신고 오는 사람 다 쫓아내. 슬리퍼는 점심에 밥 먹을 때는 괜찮은데 저녁엔 옛날 어르신들 계시고 이라니까. 분위기도 내가 만들어주는 거지. 그냥 손님들이 만드는 게 아니야. 그래서 뺨때기도 때리고 젊을 때는 말 못해. 마대자루 들고 패지, 물바가지로 퍼붓지. 소문이 났어. 좋게 날 리가 없지.”
베테랑 주모의 애틋한 고객 관리(?)는 바로 어르신들을 제대로 알아보고 보살피는 게 전부였다. 이행자씨가 말하는 그 어르신들이란 1900~1920년생 한국 예술계 전설적 인물이 줄을 잇는다. 독립운동가이자 예술인 먼구름 한형석을 비롯해 오제봉, 김정한, 김종식, 오영재, 천재동, 공초 오상순, 하인두, 시인 구상까지 평생을 살아도 만나 뵙지 못할 귀한 인물들을 주모로서 극진히 맞이했고 술동무로 가시는 날까지 정성을 다해 모셨다. 손님을 가려서 받게 된 것도 문화계 원로 선생님을 모시는 일종의 방법이었다.
“손님들이 이상한 행동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들어왔는데 뭔가 느낌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장사 안 한다고 하고, 소주 보여도 소주 없다고 하고. 보면 알지. 매너가 엉망인 사람이 보인다고. 술 먹고 변할 사람들도 보이고.”
그런데 이행자씨에게는 철칙 하나가 있다. 절대 욕은 안 한다.
“내는 고함은 지르는데 욕은 하지 않아. 근데 누가 나더러 욕쟁이 할머니래. 와? 내가 욕하는 거 봤나. 내가 욕하면 쫓아내는데. 욕하는 사람이 나는 제일로 혐오스럽다. 나도 욕할 줄 알거든. 그런데 안 할 뿐이야.”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
이행자씨는 서른 초반이던 1970년대 말 ‘대구집’으로 문을 열었다. ‘골목집’이란 이름을 지나 1994년 지금의 부산포로 주막 간판을 바꿨지만 주모도 그대로 추억도 그대로다. 그렇다고 마냥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이상신호가 왔다.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믿고 지냈던 사람에게 보증을 서줬다가 건물이고 가게고 순식간에… 30여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것을 한 번에 다 날렸으니 난 어땠겠어.”
며칠씩 잠도 안 자고 하루 종일 담배만 3갑씩 피웠다.
“1세대 선생님들은 동동주하고 맥주하고 타서 ‘동맥’이라고 하시면서 섞어 드셨다 아이가. 그게 맛이 괜찮아. 30~40대부터 그렇게 술을 먹었는데 일 터지고 한 달 내내 그렇게 마셨어. 돈이고 뭐고 다 귀찮고. 술도 안 받는데 계속 그렇게 먹었어. 결국 몸이 고장 난 기지.”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한 달도 안 돼 치아가 빠지기 시작했다. 위암 초기였다. 그때 이후로 술은 끊었지만 담배는 손에서 떼지 못했다. 그렇게 쓰러진 주모 이행자를 위해 부산 예술인들을 주축으로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 판화가 주정이가 주축이 돼 주모 이행자씨를 돕는 특별전을 펼친 것. 그게 바로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2009. 7. 14~8. 31)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른들을 내가 잘 모셨어. 부산포를 살려야 한다 그라셔서 살려주신 거지. 대학에 있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전업 작가들이시고. 정말 십시일반 해서 도와주셨어.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하시던 이두식 선생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작품을 내주셨고.”
이 전시회를 통해서 3000만원이 훨씬 넘는 자금이 모였다. 그래서 현재의 부산포 자리로 옮겨 명맥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 새로운 곳으로 이전해 다시 활기차게 생활을 하지만 몸은 성한 곳이 없다. 예전에는 일하는 사람을 뒀지만 지금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주모 이행자씨의 손을 거친다. 이렇게 한 것이 6년째. 손가락에는 류마티스가 왔고 복숭아뼈 양쪽에 물이 차 추석쯤 병원에 가 치료를 받을 생각이다. 위암 정기검진을 받아야 할 시기가 지났는데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나는 지금 병원에 가면 눕혀서 못 나와. 병원 가면 문 닫아야 해. 그래서 안 간다 아이가. 한 1년 넘었어. 병원에서 전화 오면 ‘괜찮소. 나 아직 빨딱거리고 잘 돌아다니거든’ 이런다(웃음)! 약만 먹고 안 간다.”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좋아하던 산도 다리가 좋지 않아 갈 수 없다. 지리산이고 설악산이고 선생님들과 많이 오르고 종주도 했다.
“그 대신에 용두산 공원은 좀 걸어. 시간 있으면 올라가. 이제 아픈 것도 모르겠어. 이러다 병도 친구 삼아서 함께 같이 있다가 같이 죽자 한다(웃음).”
부산포 주모, 문화계 원로와 어깨를 나란히
“그림 작품 같은 거 잘 보시겠어요?”
이 질문에 피식 웃으면서 짧게 대답한다.
“살다 보면 눈에 보이지 뭐. 세월이 40년인데 좀 안 보이겠어?”
문화계 원로에 대한 얘기를 듣다 보니 주막 주모가 아니라 화랑 관장님과의 대화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이행자씨도 그런 얘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주모가 아니라고.
“많이 배우지. 좋은 얘기를 많이 듣고 해서 가끔 보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도 보여. 자기 스스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시인들한테도 이게 시냐? 편지 썼냐? 그런다(웃음).”
문화계 인사는 물론 방송국, 신문사 등 언론인, 대학 총장, 의사 등등이 주모 이행자씨의 고객이자 친구, 모시는 선생님들이었다.
“여행도 그런 분들이랑 많이 다녔어. 1993년도에 러시아에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러시아 가는 게 쉽지 않을 때잖아. 근데도 갔었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레 을 봤는데 정말 너무 잘 봤어. 진짜 값진 인생 살았다. 돈 주고도 못 사는 삶을 살았어. 결혼? 안 해도 돼. 외로워? 뭣 때문에 외롭노?”
결국 이 특별한 주모는 선생님들의 사랑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고 일평생 결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안 갔어. 그때 당시만 해도 희귀동물 같은 사람이었어. 드레스를 입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 해본 적이 없어.”
행여나 프러포즈를 해오고 연애하자는 자가 있으면 이행자씨한테 걷어차이기 일쑤였다.
“내가 깡패가 됐잖아. 우리 집에 옛날에 왔던 손님들, 어르신들 빼고 내 발로 팔꿈치로 안 차여본 사람이 없다. 어른들 말고는 다 맞았을 거다. 하도 집적거리니까.”
이행자씨는 어떤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매일 찾아오는 어르신과 대화하고 이야기 듣는 그 시간을 기다리고 사랑했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대가라는 사람들이랑 대화라도 하려면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신경 써야겠어. 아닌데도 맞다고 해줘야 하고 달래줘야지. 문인들이 아주 잘 삐진다. 붙어 싸우다 술 먹으면 또 화해하고 그랬다.”
당시에는 거의 가족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르신들이 한창 부산포에 드나들 때는 젊은 사람들은 들어와 앉을 자리도 없었다.
“그 시절에는 흥이 나서 놀다 누군가 지명하면 무조건 노래를 불러야 했어. 근데 절대로 젓가락 숟가락 못 두드리게 했다. 여기는 그냥 막걸리집 아니라고 절대 못하게 했다. 끝나면 박수치고 흥 나면 소리 안 나게 박수쳤지.”
이렇게 부산포 안을 가득 채우는 작가들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정확하게 돈을 받을 수 없을 때였다. 가난한 시절 라면값도 없던 분들이 많았다.
“대학교수도 있었지만 작품 활동만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감자 주고 우거지 주고 그럼 술 마시고 잡숫고 그냥 가셨다. 어른들이라 외상값 장부도 없었다.”
그냥 술만 팔면 될 텐데 스스로 예술가의 가치를 흠뻑 느꼈기에 정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르다고 했잖아. 요즘은 택도 없다(웃음). 주는 만큼 받아야지.”
주막이니까 주모로 불러야지
지금도 주모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모로 불리는 건 싫다. 누군가 무심코 그렇게 부르면 “내가 느그 이모도 아닌데 왜 그리 부르노!” 하며 부산 사투리가 강하게 터져 나온다.
주모라고 불리는 게 그럼 왜 좋을까?
“옛날에 동동주 팔고 그러던 곳을 주막이라고 했잖아? 어르신들이 있었던 곳. 그러니까 주모지. 원래 여기 세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거 하나 남았어. 강나루는 시인 마누라가 하는 곳이었는데 거기도 어려울 때 시인들이 시화전도 열어주고 했던 곳이야.”
그렇다고 모두가 주모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부산 사진의 역사라고 불리는 김탁돈(동아대 전 신문방송학과 교수) 정도는 돼야 부를 수 있단다.
“내가 올해 일흔두 살이니까 한 10년 더 살면 될까?”
갑작스러웠다. 아직도 젊고 생생한 주모의 입에서 그리움이 느껴졌다.
“어른들 참 많이 모셨지. 부산 세관장, TBC 사장, 대학 총장, 회장. 안 온 사람이 없어. 근데 이제 다 돌아가셨다. 나도 선생님들 따라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네. 지금도 선생님들 모여서 동맥 한잔씩들 하시겠지?”
부산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아직 물색 중이라고 했다. 술 팔고 밥 팔면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이 자리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정말 부산포를 다 접고 나면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옛날에 건물 있을 때는 시골 들어가 살려고 했는데 그건 안 되겠고. 슬슬 산책하고 살 수 있을까 몰라. 성질이 급해서 뭘 할는지. 뭐 일하면서 살겠지.”
9월 22일자로 63회의 헌혈을 했다. 30회의 헌혈을 하면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은장 훈장을 받고 50회를 하면 금장 훈장을 받는다. 필자는 1차 헌혈목표는 금장을 받는 거기까지 하기로 했다. 목표를 달성하고 한 일 년이 지났을 무렵 적십자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마디로 말해 헌혈이 부족하니 계속 헌혈을 해 달라는 것이다.
헌혈은 간단히 말하면 피를 뽑아 남을 주는 것이다. 남의 피를 받는 사람은 사고나 수술로 피를 공급받지 못하면 죽을 지도 모르는 급박한 사람들이다. 피는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기계로 만들 수 없고 동물의 피를 사람에게 대신 수혈도 불가능 하다. 오직 사람을 위해 사람에 의한 사람의 헌혈일 수밖에 없다. 피를 분석하여 여러 가지 건강상태를 체크하는 것처럼 피는 그 사람의 모든 건강정보를 담고 있다. 피를 통해 산소와 영양을 공급받고 우리는 살아간다. 오염된 피는 건강보다 질병이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깨끗하고 건강한 피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 헌혈자의 의무다. 필자는 헌혈예정 1주일 전부터 술을 멀리하고 가벼운 운동으로(심한 운동은 오히려 나쁘다)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헌혈을 하면 혈액에 대한 분석을 해서 보내주므로 약식의 무료로 받는 건강검진이다.
헌혈을 계속하던 사람은 69세까지 헌혈이 가능하다. 모든 행위는 해야 하는 목적과 달성할 목표가 있어야 계속 실천이 기능하다. 대한적십자사로부터 부탁도 있어서 그러면 100회까지 하고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까마득한 목표에 과연 달성할 수 있을까하는 불안감도 있지만 한발두발 뚜벅뚜벅 앞으로 횟수를 채워 나가고 있다.
헌혈을 하면 혈액관리 본부에서 헌혈자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다. 헌혈하는 동안 불편함은 없었는지 간호사는 친절했는지 등등을 물어온다. 설문결과를 통해서 서비스를 개선하겠다는 목적이지만 헌혈업무를 직접 담당하는 간호원 들에게는 무언의 압력이 될 것이다. 이런 대답을 제대로 하려면 한 곳의 헌혈의집에서 계속 헌혈하는 것 보다는 여러 곳의 헌혈의집을 방문하는 것이 비교가 되어 보다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있다. 그런 목적으로 가능하면 여러 곳의 헌혈의집을 순회하면서 헌혈을 하고 있다.
헌혈의집마다 운영실태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같은 제도 하에서 운영되는 헌혈의집 이다보니 헌혈하는 과정은 똑 같지만 고객을 대하는 태도는 조금씩 다르다. 특히 헌혈시간이 오래 걸리는 혈장헌혈에 있어서다. 헌혈자의 지루함을 달래주기위해 노트북을 제공해서 인터넷 서핑을 하도록 하는 곳도 있고 개인별로 TV를 시청토록 해주는 곳도 있다 헌혈도중 과자나 음료수를 주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헌혈 후에 휴식하면서 먹으라고 한다.
이런 고객 서비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피를 뽑는 지점이 양쪽팔의 팔꿈치 안쪽 1cm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한곳에 여러 번 주사바늘을 꼽으면 혈관에 난 상처는 어찌 되는가에 대한 걱정스런 의문이다. 간호원은 걱정 말라고 하지만 팔에 있는 여러 개의 주사바늘자국을 보면서 혹시 내 혈관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다. 헌혈자의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에 의료적인 믿을만한 대답을 해주면 좋겠다.
다음으로 간호원의 태도다. 주사바늘을 꼽을 때는 주의력을 최고로 하여 바늘 끝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똑 같은 행위를 오래해서 숙련되었다고 자신해서인지 안이하게 옆 사람과 대화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아는 사람이 왔다고 인사까지 하는 것을 보고 아연 실색했다. 딱 한번이지만 간호원의 실수로 주사바늘이 혈관을 관통하여 살에 박히는 일이 있었는데 결국 1주일정도 혈관이 붓고 멍이 들기도 했다. 헌혈자가 불안해 하지 않도록 주사바늘 찌를 때는 집중해 달라는 이야기를 나는 간호원에게 헌혈 전에 반드시 이야기를 한다. 앞으로도 불평하는 자기 있어야 세상이 발전하는 것처럼 헌혈의집이 불편해서 개선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매의 눈으로 살피겠다.
대기업에서 인사담당 임원으로 근무하다 퇴직한 이상철(57세)씨는 전 직장 동료들끼리 월 1회 정기적으로 모이는 OB(Old Boys) 모임에 가입했다. 그가 가입한 모임은 매월 특정한 주제에 대해 2시간 정도 강의를 들은 후 저녁을 먹으며 토론하는 학습모임이다. 이번 달 모임의 주제는 ‘저성장 고령화 사회에서의 생애설계’였다. 이번 강의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평균수명 76세 시대의 나이에 대한 개념과 평균수명 100세 시대의 나이에 대한 개념이 달라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강사는 청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간의 일생을 하루에 비유해 설명했다.
새롭게 생겨난 시간 ‘서드에이지(Third Age)’
평균수명 76세 시대의 인생시계를 4등분하면 오전 6시에 해당하는 나이는 19세다. 오전 6시는 기상시간에 해당하며 19세의 나이는 사회활동을 시작하는 나이를 의미한다. 그리고 정오가 되면 점심을 먹고 잠시 쉬고 오후 6시가 되면 퇴근시간이다. 인생시계에서 오후 6시, 즉 퇴근시간은 퇴직시기를 의미한다. 조퇴하는 사람도 있고 야근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오후 6시는 공식적인 퇴근시간, 즉 퇴직시기다. 하지만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 시간의 상징은 변한다.
오전 6시 기상시간은 25세가 된다. 그리고 낮 12시는 50세에 해당하고 퇴근시간은 57세에서 75세로 바뀐다. 100세 시대의 인생시계에 의하면 이상철씨는 현재 퇴근시간이 아니라 점심시간 직후에 있다. 100세 시대의 장수 보너스로 인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시간이 바로 50세부터 75세까지의 시간이다.
노년 전문가들은 이 시기를 서드에이지(Third Age), 즉 ‘제3의 연령기’라고 부른다. 미국의 사회학자 윌리엄 새들러 박사는 서드에이지를 ‘창조적 불확실성의 시기’라고 하면서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에 비유했다. 신대륙은 미지의 세계다. 그리고 예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회가 넘치는 세상이기도 하다. 부모님이나 선배들과는 다른 삶을 원했던 이상철씨는 서드에이지를 제2차 성장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역할에 충실한 삶에서 자아실현의 삶으로
퍼스트에이지(First Age)가 배움의 시기이고 세컨드에이지(Second Age)가 가족을 위해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시기라고 한다면 서드에이지(Third Age)는 자아실현을 위해 매진해야 하는 시기다.
이상철씨는 누구보다 열심히 세컨드에이지를 살았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지금부터 남은 인생은 좀 더 자기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삶을 살며 성장해온 시기를 ‘제1차 성장의 시기’라고 하면 자기 중심의 삶을 살면서 성장하는 삶은 ‘제2차 성장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중심의 삶을 살기로 한 그가 제일 먼저 한 작업은 하고 싶은 일들을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모두 적어보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자료1] 같은 양식지를 이용해 하고 싶은 일들을 구분해 정리해보았다.
이상철씨는 이 양식지를 이용해 하고 싶은 일들을 정리하면서 자기 중심의 삶을 위해 ‘꼭 하고 싶은 것’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과, 하면 좋지만 굳이 안 해도 상관없는 ‘하면 좋은 것’의 항목을 다음과 같이([자료2] 참조) 채웠다.
이상철씨는 직장에 있는 동안 인사업무를 하면서 조금씩 공부를 한 심리상담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본인과 상담을 한 후배나 동료들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심리상담소를 열어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심리상담사를 인생 2막의 직업으로 삼아보기로 했다. 아직은 자녀들이 독립 전이고 국민연금수령 시점도 6년이나 남아 기본소득에 대한 불안감이 없지 않지만 더 늦으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에 결심을 굳히기로 했다. 그리고 현재 대학에서 상담심리학과 교수로 있는 친구를 찾아가 심리상담사의 길에 대해 자문했다.
제2차 성장을 위한 재무 포트폴리오 변경
이상철씨가 심리상담소를 개소하기 위한 자격과 경험을 갖추기 위해서는 대략 5년의 시간과 대학원 석사과정을 포함한 교육비가 약 5000만원 정도 소요된다. 그리고 심리상담을 진행할 사무실이 필요하다. 당장 돈이 되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대신 새로운 직업을 위한 공부를 선택한 이상철씨는 가계의 재무구조와 소비구조를 바꿔야만 했다.
그는 현재 거주 중인 아파트를 매각하고 좀 더 외곽의 아파트를 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파트를 매각한 잔액으로 오피스텔을 사서 임대를 하기로 했다. 오피스텔의 임대료 수입은 현재의 생활비를 보조하고 향후에는 심리상담소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외 자녀독립 지원자금으로 준비해둔 자금의 일부는 본인의 교육비와 창업준비자금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자녀들에게 미리 뜻을 밝혔다. 그 대신 퇴직 후 건강을 위해 신경 쓰기로 한 운동 증 비용이 많이 드는 골프를 줄이고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또자동차를 통해 하는 여행보다는 자전거를 이용한 여행을 더 많이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대부분의 50대 퇴직자들이 제1차 성장기의 열매를 어떻게 잘 관리할까를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이상철씨는 100세 인생이 선물한 보너스의 시간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다시 한 번 더 배우고 성장하고 성숙하는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내가 바로 서야 가족이 바로 선다!’ 진부해 보이는 것 같은 이 말 속에 5070세대의 자아가 녹아들어 있다. 진부하다고 아재 자아로 치부하면 안 된다. 말이 진부하다고 5070세대의 인생이 진부한 것은 절대 아니다. 가족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 어느덧 20~30년이나 훌쩍 지났다. 쏜살같은 세월의 빠름에 총총하던 눈빛은 노안으로 시들고, 숯덩이 같았던 머리칼은 반백으로 눈부시다. 그 덕분인지 미약한 바람에도 쉬 꺾일 것 같았던 연한 연둣빛 새싹 가족이 짙푸른 이파리가 주렁주렁 달린 커다란 재목으로까지 자랐다. 이를 바라보는 5070세대의 마음속엔 뿌듯함이 가득하다. 그런데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기분이다. 그 구멍으로 그동안 잊고 지냈던 내면의 아이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며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 아이의 얼굴을 마주 보노라면 뿌듯함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공허함이 비집고 들어온다. 이 공허함과 함께 ‘나는 누구란 말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는가?’ 등의 질문이 솟구쳐 오른다. 이는 내면의 아이가 자신을 어루만져 달라는 메시지다. 5070세대가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행복한 노년을 일궈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애써 외면해왔던 내면의 아이와 잘 지내야 한다.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사주며 달래듯 나의 내면의 아이도 그렇게 달래야 한다. 어떻게 달랠 것인가? 내면의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면 된다. 일반적으로 명상을 많이 권하지만, 오롯이 자신을 위한 소비도 내면의 아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나 중심 소비’라고 해서 내가 원하는 물품을 맘껏 사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런 소비는 내면의 아이가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세파에 찌든 겉모습의 내가 원하는 소비일 가능성이 높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식의 소비로는 내면의 아이를 달랠 수 없다. 오히려 공허함만 깊어질 뿐이다. ‘나 중심 소비’에는 좀 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삶에 대한 태도가 담겨 있다. ‘나 중심 소비’를 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았던 커다란 가치를 발견하고 큰 성취를 이룰 수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잃어버린 꿈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흔히 청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한다. 청소년은 어른도 어린이도 아닌 주변인이다. 이 때문에 정서적 동요가 심하다. 그 동요가 강한 바람과 성난 파도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중년이라 불리는 5070세대 역시 주변인이다. 패트리샤 코헨이 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년은 “젊음에 집착하면서도 노년으로 흘러넘쳐 들어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중년 역시 질풍노도에 휘둘려 이리저리 떠돈다. 청소년의 질풍노도가 생물학적 특징에서 기인한다면 중년의 질풍노도는 다분히 사회적, 개인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청소년이 학업을 통해 질풍노도의 시기를 넘어가듯, 중년 역시 집중할 대상이 필요하다.
몽테뉴는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빈 땅이 기름지고 비옥하다면 수만 가지 쓸데없는 잡초만 무성해진다. 이 땅을 유용하게 이용하려면 이것을 개간해서 씨를 뿌릴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정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정신은 어떤 문제에 전념하도록 제어하고 강제하는 일거리를 주지 않으면 이런저런 공상의 막연한 들판에서 흐리멍덩히 헤매게 된다.(중략) 마음은 일정한 목표가 없으면 갈피를 잡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말처럼, 사방에 있다는 것은 아무 곳에도 있지 않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중년이 정신적으로 집중할 것은 바로 잊고 있었거나 잃어버렸던 꿈을 되살리는 일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인생에서 중년의 꿈 찾기는 몽테뉴가 말하는 비옥한 땅을 개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중년의 풍부한 사회적 경험은 그야말로 비옥한 땅이다. 이 땅에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도록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어릴 적 꾸었던 꿈에 그동안 모아온 자산의 일부를 과감히 헐어 사용해야 한다. 자식에게 물려줄 돈이라며 아끼다간 중년의 기름진 경험에 잡초만 무성하게 된다.
자식에게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떳떳하지 못한 노년으로, 그야말로 꼰대로 늙어갈 뿐이다. ‘나 중심 소비’는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준다. 뿐만 아니다. ‘나 중심 소비’는 잃어버린 꿈을 찾아준다. 인생이 더욱 풍요로워진다.
자신에 대한 투자다
꿈을 찾기 힘들다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도 삶을 윤택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누구나 하나 이상의 재능은 타고 나는 법이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내가 잘했던 일, 남으로부터 칭찬받았던 일이 분명 한두 개 정도씩은 있을 것이다. 이 일을 찾아내어 더 잘할 수 있도록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의 김경록 소장은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 우리는 퇴직 후 여명이 짧다 보니 별다른 생각 없이 지냈다. 하지만 이제는 3년을 투자하면 20년 이상을 써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전문성과 기술로 무장된 1인 1기는 고령화를 헤쳐갈 안전벨트가 된다.”
이런 점에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에 자산을 사용하는 ‘나 중심 소비’는 자신에 대한 투자의 다른 말이다. 투자 성격의 ‘나 중심 소비’는 생활의 활력소이자 든든한 노후지킴이를 만들어준다. 정년 이후에도 일정한 현금흐름을 계속 창출해주므로 노후빈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자식에게 민폐 끼칠 염려도 없다. 오히려 자식과 손주들에게 용돈을 주는 멋진 부모, 조부모로 대접받을 수 있다. 꽤 괜찮은 투자 방법이지 않은가?
소비를 지혜롭게 하면 기대 이상의 수확을 거둘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믿음이 없이 그냥 내지르는 소비는 ‘나 중심 소비’의 허울을 뒤집어 쓴 세태 추종적 소비일 뿐이다. 괴테는 에서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신뢰하게 된다”고 말했다. 자신을 믿고 ‘나 중심 소비’에 도전하는 5070세대는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밝힐 뿐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도 희망을 준다.
며느리가 어쩌다 다리를 다쳤다. 유아원에 다니는 4살 손자, 6살 손녀 둘을 할아버지가 자동차로 등하교 시켜 줬으면 좋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며느리 입장에서야 시아버지가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식으로 들락날락 아이들 돌보는 것이 여러모로 불편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아버지에게 SOS를 보내는 것은 마땅히 도움 청할 곳도 없는 모양이다. 오죽하면 시아버지에게 부탁할까 싶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했다. 아들네 집은 멀다. 우리 집에서 전철로 한 시간 반을 가야 한다. 전철에서 내려도 집까지 십 여분은 걸리는 거리이니 편도시간만 두 시간이 훌쩍 걸리는 길이다. 왕복 네 시간은 길에서 보내야 한다. 게다가 유아원은 10시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9시 반까지는 아들네 집에 도착해야 한다.
아이들 있는 집이 다 그렇지만 아침은 집안이 온통 전쟁터다. 아이들이 스스로 알아서 하는 행동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깨워야 하고 씻겨야하고 아침밥을 먹여야 하고 옷을 입혀야 한다. 며느리가 아픈 발을 동동거리며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하는데도 아이들은 도무지 남의 일처럼 생각은 딴대 있고 행동은 굼뜨다. 그 바쁜 틈에도 뽀로로 같은 만화영화를 보여 달라고 보챈다. 할아버지도 옆에서 눈치껏 며느리를 도와주는데 아이들 하는 행동을 보면 속에서 천불이 일어난다. 등짝이라도 한 대 후려 패 버리고 싶다. 며느리는 인내심 있게 계속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아이에게 설명하면서 어르고 달랜다. 필자가 자식들을 키울 때는 어땠는지 지금은 기억에도 희미하지만 틀림없이 이런 경우라면 달래기보다는 야단치고 매를 들었을 것이다. 전통적 육아교육에다 주먹구구식의 상식을 더해 아이를 우리가 키워 왔다면 현대의 젊은이들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육아기법을 배운다. 책꽃이를 둘러보아도 육아에 관한 책들이 많다. 젊은 세대가 우리세대보다는 아이들 키우는 방식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짬을 내어 냉장고를 보니 ‘어머니의 기도’라는 글귀가 붙어있다.
어머니의 기도 - 찰스 마이어
『 아이를 이해하고
아이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며
묻는 말에 하나하나
친절하게 대답해 주도록 도와주소서.
면박을 주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소서.
아이가 우리에게
공손하길 바라는 것과 같이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느꼈을 때
아이에게 잘못을 말하고 용서를 빌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아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비웃거나 창피를 주거나 놀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비열함을 없애주시고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며느리도 사람인데 울컥 화가 치밀 때는 매를 들고 싶은 유혹이 있겠지만 ‘어머니의 기도’와 같은 글을 자주 읽으며 마음 수양을 하는구나! 역시 내가 며느리는 잘 얻었구나! 하고 감탄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서 시집간 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너도 아이를 때려서 훈육하려고 하지 마라. 하고 며느리 자랑을 하였다. 딸을 통해 이 이야기는 아들에게 전해졌다. 아들이 폭소를 터트리며 한바탕 웃은 후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시아버지 앞에서 아이를 어떻게 때리느냐! 우리끼리 있을 때는 훈육의 매를 들기도 하지’ 하더라는 것이다.
아! 그래 맞다 이것이 할아버지의 힘이다. 우리도 어른들 앞에서는 아이들을 때리지 못하게 교육받았다. 화가 난 아버지를 피해 할아버지 방으로 도망가면 상황 끝이었다. 할머니 품속 치마 속은 엄마도 건드리지 못하는 치외법권지역이었다. 부모한테 매를 맞아 죽은 아이가 있다는 방송을 보면서 할아버지가 있는 집의 아이였다면 절대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할아버지가 아비나 어미보다는 한발 뒤에 물러서 있지만 매의 눈으로 손자, 손녀를 지켜보고 있다. 감히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넓은 보호막을 치고 있다. 정신이 온전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는 한 친부모라 하더라도 아이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은 용서하지 않는다. 이것이 가정교육이요 할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위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