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오늘도 그냥 추운 겨울의 어떤 하루에 불과하건만, 왠지 이날은 특별한 듯해 보인다. 그래서 너도나도 깊은 밤 추위를 무릅쓰고 산에 오르거나 동해 바다로 몰려들어 새벽에 돋는 해를 바라보곤 한다. 날이 밝으면 만나는 이들에게 덕담을 주고받으며 마치 상이라도 받은 얼굴로 미소가 가득하다. 아마도 이날은 특별한 음식도 먹으리라. 요즘 유행하는 말로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인간은 온갖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 붙이는 행위를 통해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 왔으며, 시간에 질서를 부여하고 문명을 건설했다. 그것이 사실이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다. 나라나 민족에 따라 첫해의 시작이 다른 경우가 있는 것은 이를 입증한다. 그저 자기 나름대로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면 그만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올해가 무술(戊戌)년이란다. 풀이하면 ‘황금 개’의 해다.
지난해가 닭의 해라 해서 특별히 닭을 많이 먹거나 닭과 관련한 일을 한 것도 없었듯이 올해가 개의 해라서 개가 우리에게 특별할 일도 없으리라. 사실 올해가 왜 개의 해인지도 알 수 없다. 간지에 등장하는 동물 중에는 우리 풍토와 거리가 먼 것도 있으니 멀리 중국에서 흘러들어온 유행에 편승했을 수도 있다. 다만 간지에 가축이 많은 것은 나름 인간의 생존에 끼친 공로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국내에 번역된 책 중에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고인류학자인 팻 시프먼 교수가 쓴 '침입종 인간'이 흥미로운 주장을 했다. 종래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개를 가축화한 것이 대략 1만 5천 년 전쯤 메소포타미아 유역에서 농경 생활과 함께였을 것으로 생각해왔으나 2008년 벨기에에서 3만 2000년 전 개의 유골이 발견되고 2011년에는 시베리아에서 3만 3000년 전 개의 두개골이 발견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팻 시프먼 교수는 위의 책에서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3만 5천 년 전 개와의 동맹을 통해 점차 네안데르탈인을 이기고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그러니까 늑대를 길들인 개와의 협업을 통해 더 많은 사냥감을 획득하였고 이로 인해 네안데르탈인보다 생존 능력에서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추측이다. 물론 개도 이러한 협업을 통해 안정적으로 먹이를 얻었고 안전을 보장받았다.
시프먼 교수는 개와의 동맹이야말로 인류의 생존과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본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에서 호모사피엔스에게는 누구보다 뛰어난 ‘픽션을 창조하는 능력’이 있었기에 다른 영장류를 이기고 지구를 지배하는 종족이 되었다‘라고 주장했는데 어쩌면 그러한 창조적 상상 능력이 발휘된 놀라운 결과물이 바로 개들과의 동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개는 인간에게는 최초의 친구이며 가축인 셈이다. 그 덕에 개도 인간과 함께 지구상에 번성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개는 뛰어난 충성심으로 오늘날에도 반려동물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개와 관련한 미담이 많다. 경북 구미에는 의구총(義狗冢, 의로운 개의 무덤)이 있을 정도로 개와 친숙하다. 비록 너무 친숙해서 서양 선진국의 눈총을 받기도 하지만.
고령화가 가파르게 진행되고 독신 가정이 늘어갈수록 반려동물로서 개의 수요는 늘어날 것이다. 늙으면 개와 벗하며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인간으로 못 할 짓을 하면 보통 개만도 못하다고 한다. 인간사회가 개만큼의 신의만 있어도 한결 좋은 세상이 되리라. 그러니 새해에는 개 관련한 욕은 사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모두 개에게 부끄럽지 않은 한해 되시길 빈다.
인적 드문 시골 마을에 전국 각지에서 하나둘 사람이 모여들었다. 강원도 산골에 누가 오기나 할까 의심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나름 알아서 잘들 찾아와 쉬다, 놀다, 힐링했다며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여간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조용하던 이곳에 세상 모든 이들의 쉼터 왕산한옥마을이 소담스럽게 자리 잡았다.
유유자적 시골 체험
강릉 톨게이트를 나와서 바다가 아닌 대관령·성산 방면으로 향한다. 왕산터널을 지나고 차로 5분여를 가면 한눈에 봐도 최근에 지어진 신식 한옥이 보인다. 바로 왕산한옥마을(위원장 정길수)이다. 이곳은 말 그대로 한옥 살아보기를 하는 곳이다. 전국 각지에 잘 꾸며지고 정리된 한옥마을이 많지만 이곳은 아직 날것(?) 그대로다. 한옥 밖은 온통 농촌 풍경. 관광객을 위한 시설이라고는 왕산한옥마을이 전부다. 이곳이 유명 관광지로 변하기 전에 꼭 가보기를 권한다. 시골 순수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말이다. 생각해보니 이곳의 모습은 쉽사리 바뀌지 않을 것이다. 강릉 시민이 먹는 물의 상수원보호구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역 전체가 우렁이 농법을 비롯해 친환경 농업 재배를 유지하는 곳이라고. 그래서일까? 마을 전체에 깊고 맑은 공기 가득 자연의 향이 드리워져 있다. 환경의 혜택을 제대로 받은 곳이다.
왕산한옥마을 둘러보기
왕산한옥마을에는 12개 객실과 함께 세미나와 단체 수련회를 할 수 있는 ‘시강원’, 왕산권역의 친환경 농산물로 음식을 만들고 체험할 수 있는 ‘수라간’이 있다. ‘시강원’ 옆 ‘왕산정’이라고 쓰인 너른 정자도 매력적인 공간. 날씨 좋은 날 마을 주위를 둘러보다 누워 뒹굴기 제격이다. 이외에도 떡가공 시설, 풋살 경기장, 야영장, 남녀 샤워시설을 갖추고 있다. 지난해 11월 준공식을 마친 왕산한옥마을은 그 이전인 7월부터 문을 열고 손님들을 맞고 있다. 그렇지만 시설을 꼼꼼하게 살피고 개선하는 데 시간을 투자해야 했기에 한옥 체험 이외 프로그램을 제공하지 못했다. 올해부터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신설하고 강화할 계획이라고 김정희 사무장은 말했다.
“왕산한옥마을은 말 그대로 한옥과 농촌살이를 잠시나마 알 수 있는 공간이에요. 이곳의 주제를 친환경, 농촌 체험 휴양마을로 생각하고 있어요. 재활용 물건을 이용한 전통놀이 장난감 만들기, 친환경 제품 만들기 등 환경 친화적인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준공이 지난해 말이지만 어떻게들 알았는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문의하고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한적한 환경에다가 삼척, 속초, 동해 등을 여행하고 다녀오는 이용객들이 꽤 있다. 듣자 하니 왕산한옥마을 근처에 가볼 만한 곳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커피나무가 있는 ‘커피커퍼 커피박물관’과 차옥순 할머니가 2011년까지 26년 동안 자식과 가족을 위해 돌탑을 쌓아놓은 모정탑이 근방에 있다. 해발 1100m의 고랭지 채소 단지인 안반데기도 한옥마을에서 멀지 않다.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는 공간
왕산한옥마을은 2011년 농림수산식품부의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 공모에 당선되면서 추진된 지역 사업이다. 건물은 강릉시 소유이지만 왕산권역 지역 주민이 세운 법인체가 운영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곳에서 수익이 나면 지역 주민에게도 매년 소득이 발생한다. 왕산한옥마을을 이용하는 것이 지역을 살리는 방법인 것이다. 김 사무장은 이를 통해 지역 주민의 일자리가 좀 더 늘어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고.
“이곳에서 농산물을 연계해서 판매가 이뤄지기도 합니다. 한과를 하시는 분이 한옥마을에 시식 코너를 제안하고 무인으로 판매할 수 있게 해놓았는데 다 팔았어요. 수라간에서 식사할 때는 마을 주민들이 와서 요리를 합니다.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면 좋을 것 같아요.”
시니어 계층의 이용은 대환영이라고 김 사무장은 덧붙였다. 지금까지 만난 시니어 이용객이 시설을 깨끗이 이용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다고. 그만큼 이곳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왕산한옥마을은 계절마다 느껴지는 모습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언제든 와서 쉬어도 좋은 곳이란다. 지대가 높아 비교적 늦게 피는 왕산초등학교 벚꽃이 일품이라고 김 사무장은 귀띔했다. 한여름 밤 한옥마을 위로 쏟아지듯 빛나는 별이 장관이란다. 사계절 언제 가도 할머니의 품처럼 푸근하게 안아줄 곳을 찾는다면 왕산한옥마을에 가보기를 권한다.
이용안내>>
주소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도마길 21
전화·팩스 033-648-7179
전화문의 9~18시
홈페이지 wangsan.kr
지구온난화니 뭐니 해도 겨울은 겨울입니다.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에서 차디찬 냉기가 느껴지는 게 엊그제 불던 가을바람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아, 정녕 봄은 아직 멀고 복수초는 눈 속에 묻혀 있는 12월입니다. 제아무리 ‘따뜻한 남쪽 나라’ 제주도라고 해도 한겨울 해변에는 세찬 바닷바람만 오갑니다. 초가을부터 서너 달 동안 바닷가를 지켜왔던 보랏빛 해국도, 제주 해변 특유의 왕갯쑥부쟁이도, 노란색 감국과 산국도 저마다 여기저기 한 무더기씩 깡마른 흔적만 남긴 채 스러졌습니다.
‘봄은 아직 멀고 복수초는 눈 속에 묻혀 있는’ 한겨울, 그러나 제주도의 바닷가가 그저 텅 빈 것만은 아닙니다. 모든 꽃이 지고 스러진 계절 바닷가 현무암 더미 위에, 그리고 바다를 에둘러 난 둘레길 길섶 곳곳에 송골송골 황금빛 꽃송이를 가득 단 국화가 노란색 카펫이 깔리듯 풍성하게 피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 이름도 낯선 갯국입니다. 등심붓꽃이나 뚜껑별꽃, 국화잎아욱, 좀양귀비 등과 마찬가지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에 외국에서 들어와 제주도의 자연 상태에 적응하고 뿌리를 내린, 일종의 귀화식물인데 기존의 자생식물들이 겨울나기에 들어간 시기 쓸쓸한 바닷가에 황금빛 활력을 불어넣는 ‘핀치 히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제주도와 남해안의 벼랑이나 길섶에만 자생하기 때문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최근 일부 수목원이나 식물원 등지에서 일부러 심어 가꾸고 있지만, 대개는 눈여겨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입니다. 대부분의 식물도감에도 소개되지 않고 있고, 국가표준식물목록에는 재배식물로 분류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애초 원예용이나 조경용으로 들여온, 일본 동해안이 원산지로 알려진 갯국은 특히 제주도의 바닷가에 잘 적응해 갈수록 자생지가 늘고 있습니다. 덕분에 12월부터 1월까지 눈 내리는 한겨울 제주도를 방문하는 이들은 황금색 갯국이 핀 장관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자생지의 특성을 따서 해변국화, 꽃 색을 반영해 황금국화라고도 불리는데 꽃 못지않게 잎이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잎 뒷면에 하얀 솜털이 촘촘히 돋았는데, 그로 인해 잎 가장자리에 은색 띠를 두른 듯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촘촘히 난 솜털은 눈 내리는 동지섣달에도 갯국이 시들지 않게 보온재(保溫材)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겨울 살을 에는 추위와 바닷바람을 이기고 피는 갯국의 특성을 반영한 듯 꽃말은 곧은 절개, 일편단심입니다.
Where is it?
지금까지 알려진 자생지는 제주도 및 거제도 등 남부 다도해 지역에 불과하다. 제주도에서는 최근 수년 동안 해변 및 해안도로를 따라 자연적으로 피어난 야생 갯국이 늘고 있을 뿐 아니라, 일반 주택의 화단 등지에서 가꾼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서귀포 송악산 인근 해안도로변에 핀 갯국은 저 멀리 눈 덮인 한라산과 우뚝 솟은 산방산, 짙푸른 하늘과 바다, 검은색 현무암과 어우러져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어 인기다.
5호선 둔촌동 역 근처에는 둔촌 전통시장이 있다. 3번 출구 뒤편이다. 한체대 사거리까지 약 300미터가 먹자골목이다. 여러 가지 먹거리가 있지만, 특히 3번 출구 뒤 포장마차 같이 생긴 음식점들이 파는 생선 매운탕이 먹을 만하다. 11월에는 도루묵 매운탕이 제 철이다. 2만 원 정도 받는데 둘이 각각 도루묵 세 마리 정도를 먹을 수 있다. 알이 꽉 차게 밴 암컷이 맛있고 살이 탄탄한 수컷도 먹을 만 하다. 가을 무가 단맛이고 도루묵도 달아 국물 맛이 달다. 거기 미나리 향이 감칠맛을 더해 준다. 대구 매운탕이나 복 매운탕 같은 생선매운탕을 파는 일식집들이 도루묵을 취급하지 않는 이유는 단가가 너무 싸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도루묵은 맛없다는 사람이 있는데 11월 도루묵을 냉동했다가 여름에 팔기 때문이다. 냉동한 알배기 도루묵은 알이 고무처럼 질기다. 강원도에서 군대 생활 한 사람들은 도루묵이 자주 밥상에 오르자 질렸다는 사람도 있다. 11월이면 도루묵이 알을 낳기 위해 해안에 몰려들기 때문에 가장 흔한 생선이다. 원래 바다 속 해초에 알을 낳아야 하는데 바다 속 생태계가 파괴되어 알 낳을 장소가 없어 해안에 그냥 알을 낳는다는 것이다.
매번 도루묵만 먹기 꺼려진다면 곰치 매운탕도 권할만하다. 흐물흐물한 육질에 국물 맛이 끝내준다. 동해안에 가면 더 맛있을 것 같지만, 현지 음식점에 갔다가 실망한 적이 있다. 서울 조미료 입맛에 길들여져서인지 둔촌시장 매운탕이 더 낫다.
11월에 잡히는 양미리도 먹을 만 하다. 알이 푸짐하다. 구워 먹거나 찌개를 끓인다. 뼈째 먹어서 칼슘도 풍부하다. 반 건조한 양미리는 프라이팬에 살짝 구우면 별미이다.
생굴이나 껍질 째 파는 석화도 제철이라 좋다. 여름철에는 독성이 있어 못 먹고 11월 들어서야 먹을 수 있는 메뉴이다. 꽁치나 청어로 만든 과메기도 제 철이다. 갑오징어도 여름철보다 육질이 탱탱하다. 날씨가 추운 것은 싫지만, 추워야 먹을 수 있어 즐겁다.
평소에도 기름기 있는 소고기나 돼지고기 양고기 같은 육고기는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다. 요즘은 주변 지인들 중에 여러 가지 성인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해산물이나 생선 메뉴가 적합한 것이다. 국물 없는 낙지, 쭈꾸미도 맛이 있지만, 너무 매워서 문제가 있다. 요즘처럼 추운 날씨에는 국물 있는 매운탕이 더 낫다.
둔촌시장은 맞은 편 둔촌주공 아파트가 재건축에 들어가면서 손님이 반으로 줄었다. 다시 새 아파트가 들어서려면 몇 년 걸릴 것이다. 그래서 요즘 가면 더 대우 받는다. 새 아파트가 들어설 때까지 문 닫지 않고 유지되면 좋겠다.
옥의 티는 시장의 화장실 인심이 박하다는 것이다. 키를 갖고 가야 사용할 수 있는 공동 화장실이 있으나 위생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어려운 손님을 대동하기는 꺼려진다. 친한 사이끼리 가는 곳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하는 취미는 무엇일까?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갤럽에 의하면 등산이다. 2015년 9월 25일 발표한 조사 결과인데 국민 100명 중 14명이 등산을 꼽았다. 그다음은 영화 및 음악감상(6%), 운동헬스(5%), 게임(5%)순이었다.
등산은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 가장 선호하는 취미라고 한다.
나도 한때 주말이면 어김없이 산에 오르던 시절이 있었기에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결과다. 지금 살고 있는 파주로 이사 오기 전까지 서울 관악산 자락 아래 살면서 ‘동네 뒷산’을 오르는 일로 주말 아침을 열곤 했다. 아파트 뒷길로 해서 관악산으로 곧장 이어지는 왕복 3시간 코스의 산을 걷다 보면 지나간 일주일 동안의 스트레스, 관계의 고단함 등으로 꼬여 있던 마음의 매듭이 사르르 풀리면서 홀가분해지는 느낌을 받곤 했다.
혼자 하는 산행이 몰입과 명상에 가깝다면, 함께하는 산행은 관계의 충만함을 준다. 가파른 봉우리를 나란히 오르다 보면 어느새 동지애 비슷한 느낌이 생기면서 서로의 삶 속에 한 발 더 다가선 느낌이 든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모임이 봄가을 산에서 개최되는 것은 다 까닭이 있다. 한국인의 취미 1위로 꼽히는 등산은 이처럼 몰입과 관계성 모두를 충족시킨다.
몰입의 황홀함
교육학·심리학의 세계적인 권위자 칙센트미하이 박사는 그의 저서 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몰입하는 순간 삶이 변화된다고 말했다. 어딘가에 빠져든다는 것, 몰입은 황홀한 경험이다. 몰입은 현재의 나와 단절이자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삶이 고단하고 그 무게로 인해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고통스런 현재와 잠시라도 단절할 수 있다면 고통은 견딜 만하다. 정신분석가이자 거리의 치유자로 불리는 정혜신 박사는 세월호로 자식을 잃은 유가족을 위해 치유공간 ‘이웃’을 마련했는데 세월호 유가족 엄마들의 그 고통스런 시간을 버티게 해준 것은 따뜻한 치유의 밥상과 뜨개질이라고 말했다. 뜨개질을 하는 동안만큼은 고통을 잊을 수 있어서 엄마들은 무서운 집중력과 속도로 뜨개질에 몰입했고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나는 요즘 달리기에 빠져 있다. 일주일에 평균 3회를 달린다. 퇴근 후 밤늦게 한 시간 정도 달리다 보면 어제 걸었던 길이 오늘은 다르게 느껴지는 등 매번 새롭다. 새로움은 신선한 자극이자 즐거움의 원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달리는 순간만큼은 내 몸의 변화에 몰입하게 되면서 어제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된다. 달리기 전엔 지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다가도 막상 달리다 보면 몸이 살아남을 느낀다. 몰입이 주는 경이로움이다.
내년이면 한국 나이로 오십에 들어서는 나는 갱년기라는 인생의 피할 수 없는 터널을 지나는 중이다. 오후만 되면 몸이 땅속으로 꺼질 듯한 피로감이 몰려오고 무력감으로 도통 의욕이 생기질 않는다.
3년 전 경기 북부 신도시로 이사해 출퇴근 시간이 길어진 탓에 집에 도착하면 떡실신이 되어 침대에 쓰러지기 일쑤다. 저녁이 있는 삶은 요원하고, 버티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었다. 우울감과 심리적인 변덕도 불쑥불쑥 찾아왔다.
이런 변화들을 보면서 스스로 갱년기라 진단내리고 시작한 것이 걷기와 달리기였다. 몰입과 명상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기, 현실의 얽힌 매듭을 내려놓음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는 데는 딱이었다. 달리다 보면 변하고 있는 나, 기존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기쁨도 찾아온다.
그래서일까. 출구가 아직은 한참 남았지만 갱년기, 더 나아가 노년기도 삶의 일부로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든다.
시니어에게 취미는 행복의 필수 조건
젊은 사람들에게 취미는 일의 고단함을 덜어주는 여가생활에 가깝다. 반면 생활전선에서 은퇴한 후 상대적으로 시간이 넉넉한 대다수 중장년층 또는 시니어들에게 취미는 생활을 활기 있게 구성하는 핵심 축이다. 젊은 사람들에게 취미가 일의 보완재라면 시니어들에게는 필수 항목에 가깝다.
취미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삶이 지루할 틈이 없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 다양한 취미로 생활을 즐겁게 꾸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시니어에게 넉넉한 시간은 견뎌야 하는 지루한 날들이 아니라 축복이다.
몇 달 전 일이다. 경의선 퇴근길에 라이딩 복장을 한 어르신 몇 분이 내 옆자리에 앉게 되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파주에 사는 자전거 동호회 회원인데, 지난봄 개통된 동해환상자전거길을 3박 4일 라이딩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함께 달리고, 먹방도 시도하는 즐거움 속에 삶이 매번 새로워진다며 즐거워했다.
실제로 행복한 시니어가 친구 관계를 즐긴다는 사실이 여러 지표에서 나타나고 있다. 돈이 있고 친구가 없는 것보다 돈이 없어도 친구가 많은 사람이 행복하다는 사실에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상식이다. 특히 여성일수록 취미, 교양, 스포츠, 친구가 많을수록 행복하다고 한다. 친구 또는 이웃과 함께할 때 더불어 행복의 기쁨을 알고 추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의 기쁨은 홀로 느끼는 행복감과는 비교할 수 없다.
사람은 늙어서 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놀지 못해서 늙는다는 말도 있다. 나이 듦을 핑계 삼아 삶을 무료하게 보내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고 잘 놀아야 멋지게 나이 들어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잘 노는 것은 취미생활을 잘 꾸린다는 것과 동의어다.
행복은 더불어 잘 놀 때 찾아오는 것
노년의 행복에 있어 소득과 건강의 역할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이 두 가지를 제쳐둔다면 행복한 노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 활용이라고 한다. 수많은 행복연구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바다. 특히 가족,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 행복감은 고조된다고 한다.
한국 노인 사회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사회로부터의 고립’이다. 고립은 정서적 소외감으로 이어지면서 삶의 질, 행복을 저하시킨다. 고립되지 않도록 누군가와 연결되는 것, 즉 사회적 관계는 삶의 질 회복을 위한 버팀목이다. 물론 가족의 역할이 일차적으로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가족에만 의지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그래서 노년으로 갈수록 사회적 교류, 관계성 회복이 절실하다.
취미활동은 사회적 관계를 자연스럽게 활성화시키는 시간 활용 방법이다. 다양한 문화·레저 활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관계를 가질 때 행복감은 높아진다. 50플러스재단, 인생이모작센터 등을 중심으로 최근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노후 프로그램은 대체로 취미활동을 즐겁게, 이왕이면 경제적으로도 유익하게 꾸리도록 하는 데 있다.
많은 노인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TV 시청은 오히려 행복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드라마에 푹 빠져 재미를 느끼는 것은 그 순간일 뿐 지속적인 즐거움이 없다. 무엇보다 함께 도모하고 나누는 ‘관계’에서 비롯된 기쁨이 없다. 행복은 더불어 함께할 때 온다. 가족이든, 친구이든, 이웃이든. 인생의 황혼이 깊어갈수록 절실하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노량(露梁)해전 대승첩이 없었다면 조선은 얼마나 가련하고 부끄러운 나라였겠는가! 만일 이순신 장군이 도망치는 왜적의 앞길을 가로막고 “한 척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분전하다가 살신성인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정말 의기도 결기도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임진년 국난 이래 중국에만 매달려 주권을 포기한 나라로 종전을 맞았다면, 수오지심도 모르는 나라가 되었을 것 아닌가.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무주공산을 달리듯 치고 올라와 채 20일도 못 되어 국도를 손에 넣었다. 대륙 교두보 상륙작전 같은 전쟁이었다. 지방 수령들은 소문만 듣고 도망쳤고, 조선 최고 장수라는 사람은 천험(天險)의 요새인 문경새재를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 진을 쳤다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벼랑에 떨어져 죽었다. 그는 최고 사령관 교지를 받고 전장으로 떠날 때, 군사가 없어 사흘을 모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떠났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실상을 웅변하는 사실(史實)이다.
왜적 침입보고가 한양에 당도하는 데는 나흘이 걸렸다. 긴급 보고체제인 봉수체계도, 역참제도도 다 고장 난 탓이었다. 상주에 진을 쳤던 어떤 장수는 적이 10리 밖에 온 사실도 모르고 있다가 “적이 가까이 왔다”고 알린 백성의 목부터 쳤다. 다음 날 적이 나타나자 그는 혼자 줄행랑을 놓았다. 임금은 적이 아직 멀리 있는데도 궁궐을 버리고 달아나면서, 중국에 내부(內附·복속)할 궁리만 했다. 전쟁이 터지기 10년 전, 1년 치 양곡과 재정비축이 없는 점을 들어 “진실로 나라가 아니다”라고 상소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한탄처럼, 조선은 나라라고 할 수 없는 나라였다.
이순신을 죽이려고 임금과 조정 중신들이 눈에 핏발을 세운 사이, 원균은 수군총수 자리에 앉았다. 그가 첫 전투에서 조선수군을 통째로 수장시켜 나라를 풍전등화에 내놓은 정유재란의 끝을 이순신이 통쾌하게 설욕했다. 그 노량해전 승첩이 있어 지금 옛일을 돌아보는 일이 부끄럽지 않다. 육전과 해전을 망라한 7년 전란 중 그렇게 통쾌하게 적을 토멸한 일이 없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노량전투 엿새만인 1598년 11월 25일자 에는 전과가 이렇게 기록되었다. “왜적의 배 100여 척을 포획하고 200여 척을 불살랐으며, 500여 급을 참수했고 180여 명을 생포했다.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아직 떠오르지 않아 그 수를 알 수 없다.”
뒷날의 집계로는 적 병력 1만5000명 이상을 수장시킨 것으로 돼 있다. 일본 측도 , 같은 기록을 인용한 에서 “일본 배가 더 많이 불타고 파손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가문의 함대 피해가 매우 컸다”는 식으로 패전을 전하고 있다.
노량해전 승첩 현장인 노량 바다에는 그날의 흔적이 없다. 이순신이 구국의 충혼을 불사른 관음포 바다는 거듭된 간척사업으로 내해가 훨씬 좁아졌다. 후세에 건립된 이락사(李落祠) 아래 올봄 준공된 ‘이순신 순국공원’의 시설물은 너무 현대적이고 크기만 해 오히려 옛일을 더듬고 추념하기에 불편했다. 100억 원이 넘게 들었다는 기념관의 시설물에는 갖가지 모조품류와 책에 다 나오는 상황도 설명문 류만 가득해 애써 찾는 이의 발품에 값하지 못했다. 오히려 진짜 유적인 이락사가 가려진 느낌이었다.
남해대교 아래 숨어 있는 충렬사(忠烈祠)와, 경내 초빈(草殯) 자리에 만들어놓은 장군의 가묘(假墓)가 옛일을 증언하고 있다. 1970년대 연육교의 효시였던 남해대교 아래 연안을 둘러보면서, 노량 바다의 오묘한 지리를 터득한 것은 현장을 찾아본 보람이었다. 남해대교 폭은 400m 정도다. 경상도 수역에서 전라도 바다로 들어서는 물목인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 섬 북단의 거리가 그것이다. 명량해협보다 조금 넓은 정도다.
그 물목을 지켜 섰다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구원하러 출동한 왜 함대 500척을 관음포 바다로 몰아넣고 독 안의 쥐잡듯한 전투가 노량해전이었다. 조명 연합수군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왜군은 남해 섬 뭍으로 상륙해 산을 넘어 도망치는 상황이었다. 그 틈을 타 유키나가는 남해 섬을 멀찌감치 돌아 구사일생으로 달아났다.
노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과 크게 다투었다. 순천왜성을 탈출하려는 유키나가의 뇌물작전에 넘어가 포위망을 풀어주려 한 것이다. 왜성 코앞인 광양만을 봉쇄하고 있던 그는 노량해전 3일을 앞둔 11월 16일 “남해 섬의 적을 먼저 쳐야겠다”면서 떠나려고 했다. 곱게 성을 비워주겠다는 감언이설에 혹한 것이다.
“남해의 적이란 왜적에게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이오.”, “왜적에 붙었으니 적이 아니면 무엇이오?”, “귀국 황제께서는 작은 나라 백성을 구하라 하셨다는데, 약한 그들을 죽이는 것은 황제의 뜻이 아닐 것이오.”, “우리 황제께서 누구라도 명을 어기거든 징치하라고 내게 긴 칼을 주셨소.”, “한 번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우리 백성을 죽이도록 두고 볼 수는 없소.”
칼을 꺼내 들고 위압적으로 나오는 진 도독에게 이순신이 의연한 자세를 굽히지 않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11월 18일 왜의 대선단이 노량으로 몰려온다는 탐망군의 보고를 알리자 진 도독도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조명 연합수군 합동작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쓴 에 따르면, 그날 밤 늦게 광양만을 떠나기 전 이순신은 배 위에서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하늘에 빌었다. “만일 이 원수들을 없앨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此讐若除 死則無憾].” 그러고는 모든 병정에게 하무를 물리고 조용히 진군했다. ‘하무’란 군사들이 떠들지 못하도록 입에 물리던 나무재갈이다.
임진년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조명 연합수군의 규모는 전선 250여 척에 병력은 2만1000명(조선군 8000명, 명군 1만3000명)이었다. 진 도독이 기함, 좌선봉은 명군 제독 등자룡(鄧子龍), 우선봉은 이순신이었다. 18일 늦은 밤 광양만을 떠난 연합함대는 19일 이른 새벽 노량해협에 이르렀다. ‘해협을 가득 메운 왜선들의 불빛이 긴 뱀처럼 줄지어 있었다.’ 행록에 묘사된 이 문장이 왜적의 규모를 말해준다. 사천 선진리 왜성에 주둔했던 시마즈 요시히로 군뿐만이 아니라, 멀리 울산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원군까지 합세한 500척 대함대였다.
연합함대가 캄캄한 노량 바다를 저어오는 왜적의 앞길을 가로막으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행록에는 ‘밤 10시쯤 조·명군이 함께 출발하여 새벽 2시쯤 노량에 도착, 적선 500여 척을 만나 아침이 되도록 크게 싸웠다’고 적혀 있다. 불화살이 날고, 각종 총통이 포효하고, 불붙은 장작더미가 왜선으로 던져졌다. 이순신의 기도처럼 단 한 척의 적선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는 조선수군의 분전이었다.
앞길이 막힌 왜적은 남해 섬 남쪽으로 진로를 틀어 활로를 찾으려는 모양이었다. 진 도독 함대가 추격하자 관음포로 달아나던 시마즈 요시히로 함대는 앞길이 막힌 것을 알고 되돌아서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연안에 닿은 배에서는 적병들이 뛰어내려 산으로 달아났다. 아직 닿지 않은 배들은 독 안에 든 쥐처럼 사납게 반격해왔다. 진린 함대를 뒤따라온 왜선들에게 기함이 협공을 당하게 되자, 너른 바다에서 왜적을 무찌르던 이순신이 급히 달려갔다.
“진린 도독을 구하라!” 이순신은 앞장서서 진 도독 기함으로 달려갔다. 날이 완전히 밝은 오전 7시 무렵이었다. 바다 위에는 부서지고 불타는 적선이 뒤엉키고, 바닷물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순신 함대가 도독의 판옥선을 공격하는 왜선들에게 총통과 불화살을 퍼붓는 사이 왜선들이 겹겹이 몰려들었다. 삼도수군통제사 깃발을 보고 이순신을 노린 것이었다.
적선의 접근에도 아랑곳없이 한 손에 활을 들고 또 한 손으로 북을 울리며 독전하던 이순신이 한순간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부장 송희립(宋希立)이 총을 맞았다는 보고에 그쪽을 돌아보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후일담이 전해져온다. 향년 54세였다.
옆에서 돕던 아들 회(薈)와 조카 완(莞)이 달려들어 부축하려 할 때 이순신이 남긴 마지막 말은 성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 고통과 회한을 삭이면서 끝까지 걱정한 것은 싸움의 결말이었다. 얼마나 많은 적선을 당파하고 분멸할 것인가,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왜적을 ‘나의 바다’에 수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
오직 그것만이 성웅(聖雄) 이순신의 관심사였다. 단재 신채호, 춘원 이광수, 노산 이은상 같은 선각자들은 우리 역사에서 특정 인물에게 성(聖)자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세종대왕과 이순신뿐이라고 말했다.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나라 걱정만 했다는 점에서 이 말에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웅의 죽음을 숨긴 채 회와 완이 장군처럼 독전기를 휘두르고 북을 울려 사기를 진작시킨 결과는 찬란했다. 임진년 이래 7년 동안 뭍에서건 바다에서건 이보다 큰 전과를 올린 일은 없었다. 격전 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요시히로는 남은 함선을 이끌고 남해를 돌아 부산으로 달아났다.
“통제공 수고 많았소. 어서 나오시오.” 싸움이 끝나고 이순신 기함을 찾아온 진 도독은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숙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조카 완의 말에 도독은 배 위에서 세 번이나 넘어졌다 한다. “공은 죽어서도 나라를 구하셨구려!” 그는 가슴을 치며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그 소리 탓에 성웅의 별이 관음포 바다에 떨어진 것을 조명 양군이 알게 되었고, 수백 척 전선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이 파도소리를 덮었다.
장군의 시신은 관음포 이락사 자리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노량 충렬사 자리로 옮겨져 초빈되었다. 며칠 후에는 고금도 통제영으로 모셔졌다. 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해안 옛 통제영 터에는 장군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월송대(月松臺)가 보존되어 있다.
고금도는 쉽게 가볼 수 없는 섬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육속이 되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강진군 마량항에서 고금도 북단으로 가로질러진 마량대교를 건너 10여 분 달리다 왼편으로 접어들면 이내 덕동리 해변이다. 잔잔한 바다가 섬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들어온 만(灣) 안쪽 아늑한 포구연안이 마지막 통제영 자리다.
사적 114호로 지정된 고금도 충무사는 이순신 영정을 모신 사당 앞에 아담한 사우가 몇 채 둘러섰다. 사당 왼편의 관왕묘 비가 눈길을 끌었다. 원래 도독 진린이 이 자리에 관왕묘(관우사당)를 건립했는데, 뒷날 충무사를 짓고 관왕묘는 묘비(廟碑)만 남겨두었다. 이곳이 명 수군 군영이었음을 증언하는 유적이다.
고금도 통제영을 굽어보는 덕동리 야트막한 언덕 위 솔밭(월송대)에 모셔졌던 성웅의 유해는 83일 만에 고향인 아산으로 모셔져 현재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 기슭에서 영면하고 있다.
고금도 통제영은 명량대첩 이후 적당한 진지를 찾던 이순신이 목포 앞바다 고하도(高下島)에서 정유년 겨울을 나고 옮겨온 마지막 진지였다. 이곳에서 장군은 전함을 건조하고 장정을 모집해 수군 재건에 힘쓰는 한편, 농지를 개간하고 군염(軍鹽) 제조사업으로 전력을 크게 회복시켰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주민들의 협력이 큰 힘이 되었다.
정부 지원 한 푼 없이 그렇게 힘을 기른 것이 진 도독의 마음을 산 밑천이 되었다. 1598년 7월 16일 진린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고금도 이순신 통제영에 당도했다. 이순신은 술과 안주를 성대하게 차려 배에 싣고 군대의 위의를 갖춰 군악을 울리며 멀리 나가 맞아들였다. 칠천도 패전 이후 중국 동해안 지방이 왜의 위협에 노출되자 명은 부랴부랴 조선에 수군을 파병했던 것이다.
통제영으로 맞아들여서도 성대한 환영연을 베풀었다. 여러 장수들은 잔뜩 취해 “이순신은 과연 훌륭한 장수로다” 하며 좋아했다. 사납고 오만하기로 소문난 진린도 융숭한 대접에 흡족해했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뜻밖의 변이 일어났다. 명나라 수군의 약탈과 부녀자 희롱으로 동네마다 통곡과 탄식이 터졌다.
보다 못한 이순신은 어느 날 크고 작은 막사를 헐고 옷과 이부자리를 배에 옮겨 실었다. 도독이 그 모습을 보고 달려와 까닭을 물었다. “귀국 군사들 행패를 견딜 수 없어 백성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옮겨가려 합니다.” 도독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즉시 이순신에게 명나라 수군의 탈법 행위 단속권이 허락되었다. 그 후로 명군의 행패가 사라졌다.
이순신은 크고 작은 전과까지 진 도독에게 양보해 체면을 살려주었다. 그 인품에 감격한 도독은 이순신을 제갈량에 비유하며 명나라에 가 벼슬을 하도록 권유하기까지 했다. 명나라 조정과 선조 임금에게 올린 서장에서 그는 이순신을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才)가 있으며,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功)이 있는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천지를 주무른 재주요, 하늘과 해를 손본 공이라는 평가는 진정 감화를 받지 않고는 인사치레로 쓸 수 없는 말이다.
그 서장에 감복한 명나라 신종은 도독인 참도 독전기 등 여덟 가지 물건[八賜品]을 보내 이순신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 전에 이순신을 살리기 위해 면사첩(免死帖)을 보낸 것도 그였다. 한양의 명군 총사령부에서는 영내에 빈소를 설치하고 성웅의 전몰을 애도했다.
그러나 우리 임금은 그 반대였다. 예조에서 그 사실을 전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하회를 구해도 선조는 대답이 없었다. 재차 하회를 요구하자 마지못해 “알아서 하라” 했다. 뒷날 논공행상 때도 그랬다. 선조는 굳이 원균을 이순신과 같은 정왜(征倭) 일등공신에 올리라 했다. 조정에서 부당하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너무 훌륭해 두렵고 질투 나는 이순신의 죽음을 반기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있겠는가.
조선 500년 역사에서 이순신을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만들고, 스스로 가장 용렬한 임금이기를 자청한 일이었다.
하늘을 뒤덮은 미세먼지, 쾨쾨한 매연, 고막을 괴롭히는 소음…. 공해로 얼룩진 도시의 묵은 때를 자연의 민낯처럼 깨끗이 씻어내고 싶다. 일상의 번잡함일랑 잠시 내려두고 너른 자연의 품 안에 뛰어들어보자. 갑자기 떠날 곳이 막막하다면,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국립자연휴양림’을 이용해보는 것 어떨까?
◇ 수도권
아쉽게도 서울에는 국립자연휴양림이 없지만, 도심에서 가까운 경기도에는 5곳이 있다. 그중에서도 ‘산음자연휴양림’은 3km 거리의 ‘치유의 숲길’, 산림치유프로그램, 건강증진센터 등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방문객을 대상으로 산림치유지도사가 진행하는 다양한 치유 프로그램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양주시에 위치한 ‘아세안자연휴양림’은 필리핀,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10개국의 전통가옥과 놀이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이색적인 곳이다. ‘유명산자연휴양림’은 우리 꽃 자생식물원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라면 유익하다.
-산음자연휴양림(양평군) 산림치유지도사 상주
-아세안자연휴양림(양주시) 이국적인 객실 외관
-운악산자연휴양림(포천시) 가마터 향토유적지 인근
-유명산자연휴양림(가평군) 우리 꽃 자생식물원 보유
-중미산자연휴양림(양평군) 산림레포츠 오리엔티어링
◇ 경상도
한려해상국립공원 북단에 위치한 ‘남해편백자연휴양림’은 피톤치드를 뿜어내는 편백나무 숲이 조성돼 있어 삼림욕을 즐기기 좋다. 아울러 전남 여수와 경남 남해 앞바다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통고산자연휴양림’은 불영사 계곡, 덕구온천, 백암온천, 동해안 해수욕장 등과 연계한 관광 코스로 이른바 3욕(금강소나무숲 삼림욕, 해수욕, 온천욕)을 함께 체험할 수 있다. 더불어 관동 8경 중 하나인 월송정과 명사십리의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망양정도 가까워 즐길거리, 볼거리가 풍성하다.
-검마산자연휴양림(영양군) 책 4000여 권의 숲속도서관 운영
-남해편백자연휴양림(남해군) 편백나무숲 산림욕, 나비더테마파크
-대야산자연휴양림(문경시) 문경 8경 중심부, 천연염색체험
-신불산폭포자연휴양림(울주군) 통행차량이 없는 고즈넉한 분위기
-운문산자연휴양림(청도군) 야생식물관찰원, 농경시대 귀틀집
-지리산자연휴양림(함양군) 토요 숲속야학, 한지체험관 운영
-청옥산자연휴양림(봉화군) 그린스쿨, 자연학습 체험 교육
-칠보산자연휴양림(영덕군) 금강송숲 탐방, 숲속 작은 음악회
-통고산자연휴양림(울진군) 3욕(삼림욕·해수욕·온천욕) 체험
◇ 충청도
충남 서부의 최고 명산으로 불리는 오서산 자락에 있는 ‘오서산자연휴양림’은 가족 단위 방문객이 편히 쉴 수 있는 휴양관과 물놀이장, 야영장, 숲속교실 등을 고루 갖췄다. 휴양림에 자생하는 대나무 숲을 거닐며 숲 해설은 물론, 활쏘기 투호 등 놀이체험과 목공예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희리산해송자연휴양림’은 산 전체가 해송(海松)으로 뒤덮인 희리산의 푸름을 만끽할 수 있는 명소다. 휴양림 수종의 95%가량을 차지하는 해송에서 피톤치드와 테르핀 성분이 다량 분비돼 삼림욕을 하기에도 제격이다.
-상당산성자연휴양림(청주시) 유아, 학생 대상 산림교육 프로그램
-속리산말티재자연휴양림(보은군) 휴양림 내 토속 식용·약용식물 자생
-오서산자연휴양림(보령시) 어린이물놀이장, 대나무숲 체험장
-용현자연휴양림(서산시) 백제 후기 문화유산·유적지 인근
-황정산자연휴양림(단양군) 황정산 암벽지대 소나무 군락 경치
-희리산해송자연휴양림(서천군) 해송 삼림욕, 솔방울 공예 체험
◇ 전라도
‘방장산자연휴양림’ 내 ‘에코어드벤처’에서는 숲속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동하면서 자연을 감상하는 친환경 레포츠 ‘집라인(zipline)’을 경험할 수 있다. 이외에도 편백나무를 이용한 비누, 문패, 액자 만들기 프로그램 등이 마련돼 있어 아이들과 함께 즐기기 좋은 곳이다. 낙안읍성민속마을 2km 지점에 자리한 ‘낙안민속자연휴양림’, 덕유산국립공원, 무주리조트 등과 가까운 ‘덕유산자연휴양림’, 변산반도국립공원에 위치한 ‘변산자연휴양림’ 등은 주변 관광지, 휴양지와의 접근이 편리하다.
-낙안민속자연휴양림(순천시) 낙안읍성민속마을 주변 경관
-덕유산자연휴양림(무주군) 야생식물관찰원, 반딧불이 관찰
-방장산자연휴양림(장성군) 에코어드벤처 친환경 레포츠
-변산자연휴양림(부안군) 모항해수욕장, 변산해수욕장 인근
-운장산자연휴양림(진안군) 휴양림 내 7km의 갈거계곡
-진도자연휴양림(진도군) 2017년 개장, 남도소리체험관
-천관산자연휴양림(장흥군) 휴양림 진입로에 동백·비자나무숲
-회문산자연휴양림(순창군) 유아·청소년 대상 ‘열려라곤충나라’
◇ 강원도
1989년 개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휴양림 ‘대관령자연휴양림’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 어우러진 대관령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휴양림 내 50~200년생 아름드리 소나무 숲 중 일부는 1920년대 인공으로 소나무 씨를 뿌려 조성해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다양한 목공예 프로그램을 즐기고 싶다면 ‘백운산자연휴양림’을 추천한다. 휴양림 내 ‘숲속공예교실’은 2013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로부터 지속가능한 발전교육(ISD) 공식프로젝트로 인정받았다. 또한 대한걷기연맹에서 지정한 ‘제1호 건강숲길’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가리왕산자연휴양림(정선군) 정선오일장(아리랑시장) 인근
-검봉산자연휴양림(삼척시) 오토캠핑장, 산림문화 프로그램
-대관령자연휴양림(강릉시) 숯가마를 활용한 체험·공예 프로그램
-두타산자연휴양림(평창군) 두타산 두근두근둘레길 탐방
-미천골자연휴양림(양양군) 휴양림 내 통일신라시대 선림원지
-방태산자연휴양림(인제군) 인근 내린천 래프팅 체험
-백운산자연휴양림(원주시) 숲속공예교실 문화 프로그램 특화
-복주산자연휴양림(철원군) 용탕골 계곡과 잠곡리 경관 수려
-삼봉자연휴양림(홍천군) 오대산국립공원 인근 활엽수
-용대자연휴양림(인제군) 다람쥐 등 다양한 야생동물 서식
-용화산자연휴양림(춘천시) 등산·캠핑 전문 산림레포츠 휴양림
-청태산자연휴양림(횡성군) DIY목공교실, 인도네시아전통전시관
얼마 전에도 우리는 ‘잠깐 다녀올까?’ 하면서 한 마디씩 나누고 강원도로 냅다 달려 북쪽의 끝머리 고성의 통일전망대를 향해 치달았지요. 거진항에서 찝찔한 갯내음을 맡으며 싱싱한 생선회를 먹고 일상에서 묻힌 마음의 먼지를 바닷바람에 훌훌 날리고 새벽을 달려서 돌아왔습니다. 언제나 가보아도 동해의 푸른빛은 변함이 없는데 우리네 삶은 왜 그리도 잘 변하는 빛깔을 가지고 있는지요.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쉽게 달려갈 수 있는 바다를 스무 살이 조금 넘었을 무렵 땀냄새가 가득한 밤기차를 타고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 떠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피곤에 찌들어 겨우겨우 강원도에 도착해서도 털털거리는 버스를 몇 번씩이나 갈아타면서 도착한 어느 해변을 보면서 우리는 환호를 했었지요. 이십 대의 환호는 바다 위에서 너울거리고 한참의 세월을 더 보낸 지금의 바다는 차분하고 평화로움이었으며 일상의 갈등도 납죽 받아서 바닷속으로 침잠시키고 있더군요.
그 해 여름 바다에서 놀다 지쳐 해안가의 마을을 어슬렁거리던 필자는 아주 낯익은 군부대의 표지판을 보았지요. 어딜 가도 강원도는 군부대의 방향표시를 지금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내 눈에 들어온 그 숫자의 부대는 필자가 자주 위문편지를 보냈던 울 오빠의 군부대 번호 숫자였답니다.
'가자, 가는 거야' 친구들과 즉석에서 의견 일치를 보았고 겁 없이 나선 우리는 물어물어 산길을 돌아 걸었지요. 한여름의 쨍쨍한 뙤약볕을 받으며 가도 가도 끝없는 오빠 찾아 수 십리의 고행을 했답니다. '부모님들이 면회 갈 때는 인절미랑 통닭이랑 한 보따리씩 싸들고 가던데 이렇게 빈손으로 가면 인사가 아닐 텐데?" 하하호호 떠들면서 그 먼 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렇게 찾아간 곳에 하필 오빠는 부대 업무차 시내에 나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지요. 우리는 오빠의 방에 안내되어 쉬면서 기다리며 이것저것 구경을 하면서 기다렸는데 제대를 앞둔 대위 계급의 군의관이어서인지 여러 권의 의학 관련 전공서적도 눈에 띕니다. 사실 필자는 내심 함께 갔던 한 친구를 소개해 줄 마음이 있었는데 책상 위에는 위문편지를 가장한 연애편지 비슷한 것도 있어서 생각이 복잡해지기도 했지요. 어쨌든 저녁 무렵 돌아온 오빠의 황당한 표정에 재미있어하며 우리는 그 날 저녁 박봉의 군인 아저씨 오빠의 환대를 톡톡히 받은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지요.
지금도 가끔 친구에게 '널 우리 오빠에게 소개하려고 했었어" 하면 그 친구는 '내가 그때 적극적이어야 했었는데...'하면서 가슴을 치는 시늉을 하며 히히거립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서로를 존중하고 보고 싶어 하는 그런 친구가 있어서 행복합니다. 이런 마음인 걸 생각하면서 친구가 오빠와 결혼하고 우리가 한 가족이 되었다면 그게 가능키나 했을까요. 때때로 나는 친구사이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흔히들 고정관념의 틀 속에 가족을 가두기 일쑤잖아요. 꼭 이래야 되는데... 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서 탈피하기 어려운 것이 가까워진 사이의 어려움이거늘 내 맘 같지 안 다해서 조급해하거나 너무 가까워지려고 애쓸 일 없이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한 발짝 정도 사이가 떨어진 친구사이,
다양한 시선으로 사람을 볼 수 있어서 너무나 좋고 끊임없는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이, 이제는 그것이 더 좋은 사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조병화님의 시처럼 ‘작별이 오면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만남’.
글쎄, 이조차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압니다.
요즘이 휴가철이긴 한가보다. 꽉 막힌 고속도로를 보니 확실히 느껴진다. ‘다들 어디 가려고 이렇게들 나온 걸까?’ 했지만 우리처럼 여름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일 것이다. 밀리면 밀리는 대로 여행 시작의 들뜬 기분은 필자를 설레게 한다.
참 오랜만에 여름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아이가 어릴 땐 여름, 겨울 꼭 휴가를 갔는데 한동안 휴가 여행이라는 걸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텐트에 물놀이 기구, 밥해 먹을 도구, 식료품을 가득 싣고 아이와 함께 떠나는 여행은 정말 즐거웠다. 요즘에야 어딜 가든 잠잘 곳을 예약하고 떠나지만, 예전엔 가다가 마음에 드는 곳에서 민박을 하거나 야영지에서 텐트를 쳤다.
우리가 주로 택했던 여행지는 동해안과 설악산이었다. 1년에 두어 번씩 다니다 보니 강원도 인제 원통을 지나서 가는 길이 고향길처럼 익숙하고 정겨웠던 기억이 난다. 오색약수를 지나 한계령으로 올라가는 길은 참으로 아름답기도 하고 즐거운 추억을 많이 남겨준 고마운 코스다. 당시 새로 지어진 한옥 민박집. 수다스러웠지만 훈훈한 인심을 보여줬던 할머니도 생각나고 물레방아 휴게소에서 맛있게 먹었던 점심마저도 그립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건 바람불이 계곡에서의 야영이다. 설악산의 세찬 물살이 흐르는 계곡 옆 유료 야영장 ‘바람불이’에서 텐트를 치고 테이블을 펼쳐 파라솔을 꽂으며 자연 속에 동화되었던 시간들이 생각난다.
관리소 마룻장 밑에 잔뜩 들어 있던 뱀을 보며 소스라치듯 놀랐던 일, 밤하늘의 쏟아질 듯 가득한 별을 세 식구가 바라보았던 추억이 아직도 아름답게 남아 있으니 여행의 소중함은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크면서부터는 사는 일에 바빠 가족 여행이 점점 줄어들다가 언제부터인지 휴가 여행이라는 말을 아예 잊고 살았는데 얼마 전 낚시를 같이 다녀온 시동생 부부가 멋진 펜션을 예약했다고 해서 휴가를 같이 보내게 되었다. 목적지는 안면도로 섬 안 바다와 호수가 마주 보는 장소에 우리가 지낼 펜션이 있었다. 어디나 펜션이 있는 곳은 경관이 뛰어나다. ‘레이크 앤 시’라고 이름 지은 이 펜션은 주인이 어떻게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풍광이 아주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숙소 선정부터 여행 내내 스케줄을 미리 짜보았다며 시동생이 의기양양하셨다. 점심은 ‘딴뚝’ 이라는 곳에서 간장게장을 먹을 것이며 저녁은 가는 길 홍성의 한우매장에서 고기를 사서 준비하고 다음 날 아침은 그 지방에서 유명하다는 게국지라는 음식과 함께 바닷가에서 회를 먹을 예정이라고 했다. 게국지는 게로 만든 찌개인데 먹기가 좀 불편한 음식이었다. 게살을 발라먹기가 귀찮았지만 국물은 아주 시원한 게 괜찮았다. 이러니 맘먹은 다이어트는 멀리멀리 떠나버렸고 식도락에 빠져 휴가 내내 행복하기만 했다.
특별 이벤트로 시동생이 요즘 취미로 푹 빠지신 색소폰 연주회도 있을 거라고 했다. 펜션 주인과는 구면으로 같이 색소폰을 연주한다고 했다. 펜션 관리실에는 조촐하고 아담한 음악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가끔 연주회도 열린다는데 아름다운 풍경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색소폰 선율이 한여름 밤의 정취를 한껏 높여주었다.
펜션의 잘 가꾼 마당을 지나면 바다 건너편으로 큰 호수가 있고 그곳에 낚시터가 있었다. 사유지로 통해서인지 매우 깨끗하게 관리가 잘되어 있어 특별히 낚시를 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장소였다. 이번엔 아예 읽다가 만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가방에 넣어왔다. 지난번 낚시터에서 다들 낚싯대 찌만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통에 낚시를 좋아하지 않는 필자는 경치 감상밖엔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파란 잔디와 잔잔한 호수, 깔끔하고 예쁜 집, 어느 곳에 눈길을 줘도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낚시를 하며 희희낙락 즐거운 식구들을 바라보다가 벤치에 앉아 소설책 한 페이지를 넘기니 마치 동화 나라에 들어온 것처럼 환상적인 기분이었다. 2층 숙소의 삼각 창을 통해 밖의 경치를 내다볼 때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된 기분도 들었다. 유치하긴 하지만 아직 녹슬지 않은 필자의 감성이 기쁘다.
빠듯한 일상을 살다 보면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어 휴가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지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일부러 짬을 내서라도 휴식시간을 갖는다면 몸과 마음이 재충전된다. 한동안 잊고 지낸 휴가를 잘 보냈다. 훗날 생각해보면 오늘도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장면이 될 것이다.
이른 아침 갈매기 울음소리에 눈이 떠진다. 찬거리가 부족하다 싶으면 낚싯대를 들고 방파제로 나서면 그만이고, 수평선을 장식하는 저녁놀은 훌륭한 안줏거리가 된다.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만큼이나 누구나 꿈꾸는 노후생활 중 하나는 어촌에서의 삶이다. TV 속 예능 프로그램이 간간이 보여주는 바닷가 마을에서의 유유자적한 생활은 어촌생활에 대한 동경을 더욱 증폭시킨다. 현실에서도 그럴까? 전문가들은 무작정 어촌으로 떠난다고 해서 즐거운 인생이 보장되지는 않는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잘만 준비하면 평범한 귀농보다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는 귀어·귀촌이다.
우리가 귀어·귀촌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귀어·귀촌에 대한 명확한 정의다. 귀어 혹은 귀어업은 어업활동을 하기 위해 타지에서 어촌에 거주하는 것을 의미하고, 귀촌 혹은 귀어촌은 어업활동 여부와 관계없이 타지에서 이주하는 것을 말한다. 즉 어촌에서 ‘어업활동’을 하는가가 핵심이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은 관계부처에서 수산업·어촌 발전 기본법 등을 근거로 이주자들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다.
귀어·귀촌이 뜨는 이유
최근 사회적으로 귀어·귀촌이 관심을 받는 이유는 대략 3가지 정도다. 먼저 활발한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이다. 고령화로 몸살을 앓는 어촌 지역에 젊은 도시민을 유치해 활력을 불어넣고, 이를 통해 채집이나 양식 중심의 어업에서 가공이나 관광 등 2·3차 산업과의 접목을 꾀한다는 계획이다. 실제로 이를 위해 정부에서는 창업자금을 1인당 최대 3억원, 주택마련 지원자금을 최대 5000만원까지 연리 2%, 5년 거치 10년 분활상환 형태로 제공하고 있다. 이외에도 수산업 경영인 육성사업 등을 통해 별도의 사업자금 지원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조선업계의 구조조정으로 취업시장으로 몰려나오고 있는 조선업 퇴직자의 구제 방안 중 하나로 귀어·귀촌제도가 활용되고 있다.
증가하고 있는 어가 소득도 귀어·귀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유 중 하나다. 지난 5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어가경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어가 평균소득은 가구당 4708만원으로 2015년(4389만원)에 비해 7% 증가했다. 이는 2013년 이후 4년 연속 증가한 수치다. 해양수산부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40대 이하 경영주 어가의 선전과 정부의 지속적 지원이 효과를 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수산물 소비도 늘고 있다. 지난해 국내에서 소비된 수산물 식자재는 1인당 58kg 정도로 일본(45kg)을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이다. 공급에 비해 소비가 늘면서 단가와 수익도 자연스레 오르고 있는 모양새다.
무작정 바닷가 마을로 떠나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귀어·귀촌은 정서나 생활방식, 소득 마련 등 모든 면에서 도시에서의 삶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연고가 없는 사람이라면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해야 할지 더욱 막막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귀어·귀촌을 희망하지만 배경 지식이 없어 도움이 절실한 희망자들을 위해 운영되는 곳이 있다. 귀어귀촌종합센터다.
바다에서 무엇으로 먹고살까
귀어귀촌종합센터는 한국어촌어항협회가 설립하고 해양수산부가 지원하고 있는 기관으로, 귀어·귀촌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각종 지원제도 안내에서부터 업종 및 품목별 전문적인 기술상담, 창업계획서 작성 자문까지 돕는다.
귀어귀촌종합센터에서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담당하는 홍순택 전문위원은 다양한 지원책이 마련되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의지와 노력을 통한 사전준비라고 조언한다.
“보통 특정 지역에 연고가 있고, 집안에서 하던 어업 업종이 있으면 비교적 귀어·귀촌이 쉽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본인에게 맞는 정착 지역과 먹고살 업종부터 찾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대신 결정해주지는 않아요. 또 지원제도가 잘되어 있어서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현지인들 사이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어야 정착에 성공합니다.”
일반적으로 귀어·귀촌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경쟁력 차이가 크다고 전문위원은 설명했다.
“새 아이템으로 창업을 해보려는 20~30대와 은퇴 후 제2인생을 준비하려는 50~60대, 그리고 도시생활에서 도태돼 갈 곳을 찾는 40대로 나눌 수 있어요. 물론 정착을 가장 잘하는 부류는 자신만의 아이템으로 준비가 잘된 20~30대예요. 반면에 도피처를 찾는 40대들은 쉽게 정착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뭘 해야 할지 구체적인 아이디어도 없는 상태이니까요.”
귀어·귀촌을 통해 할 수 있는 업종은 다양하다. 가장 많이 선택하는 것은 배를 사서 고기를 잡는 어선어업이다. 귀어업의 약 65% 정도가 배를 탄다. 이 중 3톤 미만의 작은 배를 사서 연안에서 조업하는 형태가 70%가 넘는다. 정부지원자금만으로도 창업이 가능하고 일을 배우기도 쉽다. 실패했을 때도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데다, 평균 노동시간은 하루 3~5시간, 조업 일수도 연간 동해안은 150일, 남·서해안은 200~250일 정도로 다른 직종에 비해 짧다. 금어기가 존재하고 기상에 따라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최근 각광받는 업종 중 하나는 양식어업이다. 사전 지식과 자금 확보가 필수이지만 부가가치가 높기 때문에 인기가 많다. 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김, 굴, 전복 등의 해수면 양식 외에 육지에서 할 수 있는 내수면 양식도 있다. 뱀장어나 미꾸라지, 아열대성 민물새우인 큰징거미새우가 대표적이다.
이밖에 수산물 유통업, 가공업이나 소금산업 등도 선택되고, 최근에는 어촌관광이나 해양수산레저 사업을 포함한 어촌 비즈니스 사업에 대한 관심도 높다.
고령 은퇴자의 경우 해안가에서 조개나 낙지 등의 수산물을 채취하는 ‘맨손 어업’을 선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촌에 정착만 잘 하면 맨손 어업만으로도 기본적인 생활 유지는 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성공적인 정착을 위한 필수 요소
전문가들은 귀어·귀촌을 위한 정보와 기초준비 단계로 귀어귀촌종합센터에서 상담을 받은 후, 각 기관에서 마련하고 있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해볼 것을 권한다. 교육 프로그램은 해양수산인재개발원에서 진행하는 귀어가, 귀어촌 정착교육 과정과 귀어귀촌종합센터에서 개최하는 귀어귀촌아카데미와 코칭클래스가 대표적이다. 또 어선어업, 양식업, 해양레저 등 업종에 따른 전문 교육기관도 있다.
귀어·귀촌 생활을 경험할 수 있는 귀어촌 홈스테이 지원사업도 있다. 귀어·귀촌 희망자가 어촌에서 미리 살아보고 정착 여부나 업종 선택 등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정부와 지자체 예산으로 숙박비와 컨설팅 비용의 80%까지 지원한다.
귀어·귀촌 지역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각 지자체의 도시민유치희망 정보를 확인하는 것도 방법이다. 도시민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지자체의 경우 어촌계 가입비 면제, 어업권 매입 안내, 주거용 사택 실비 제공, 일자리 알선 등 여러 가지 지원을 하고 있다. 다만 지자체 여건상 이런 지원책들은 지속성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귀어귀촌종합센터의 SNS를 팔로우해두면 편하다.
또 귀어·귀촌 경험자들은 원하는 지역에서 미리 살아보고 마을 주민들과 사전에 의사소통을 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귀띔한다. 지역에 따라 어촌계 가입이 까다롭거나 불가능한 경우도 있고 배타적, 폐쇄적 성향을 띠는 마을도 있기 때문이다. 연안어업이 가능한 어장이나 양식을 위한 해수면, 해산물 채취가 가능한 해안 등 대부분의 지역 해양자원은 어촌계의 공동소유로 관리된다. 이는 어업권이자 자산의 개념이므로 어촌계의 일원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고 경우에 따라 큰 비용이 들기도 한다. 한 지역 어촌계장은 “도시민들은 어촌을 생활공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실제로는 생활공간이자 생업의 현장입니다. 따라서 마을의 예법이나 상호간의 약속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