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를 준비하는 유족이라면 의례나 절차 등에 관한 궁금증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장례 비용이 얼마나 들지에 대해 제일 궁금해합니다. 대략의 비용이라도 알고 있어야 비용 마련 계획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호부터 세 번에 걸쳐 장례 비용의 구성과 대략적인 비용이 어느 정도 되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2015년 한국소비자원이 조사한 우리나라 평균 장례 비용은 1380만 원입니다. 3일이면 끝나는 장례 절차에서 과연 어디에 이 많은 비용이 드는 걸까요?
장례를 치르면서 비용이 발생하는 부분을 구분해보면 크게 세 영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장례식장과 상조회사, 그리고 장지 부분인데요. 이번 호에서는 첫 번째로 장례식장의 비용 구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세 영역 중에서 가장 많은 비용을 차지하는 곳이 장례식장인데요. 임대 비용과 음식 비용, 기타 비용으로 나뉩니다. 기타 비용은 청소료, 관리비 등으로 큰 비용이 아니기 때문에 아래에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임대 비용은 고인을 모시는 안치료, 분향실과 접객실 사용료, 입관실 사용료 등인데, 이는 장례식장에 따라 상당한 금액 차이가 있습니다. 지방에서는 분향실과 접객실 사용료를 받지 않는 장례식장이 상당수 있는 반면, 수도권 대학병원 중에는 하루 사용요금이 500만 원이 넘는 장례식장도 있습니다. 안치료는 1일 사용료가 10만 원 이내이고, 입관실 사용료는 염습 시 1회 사용하는 비용으로 20만~40만 원입니다.
장례식장 표준약관에 의하면 임대료의 산정 기준은 입실을 기준으로 12시간 이내는 시간당 비용으로, 12시간이 넘어갈 경우는 24시간 비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보통 3일장을 진행할 경우 48시간 비용만 지불하면 되는 겁니다. 대부분 표준약관에 의해 비용을 받지만 간혹 3일장이니 3일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장례식장이 있을 수 있으므로 계약 시 꼼꼼하게 조항을 따져봐야 합니다.
음식 비용에는 유족과 조문객들에게 대접하는 식사와 제사음식 등이 있습니다. 평균 식사 비용은 대부분의 장례식장에서 큰 차이는 없습니다. 다만 지역에 따라 홍어회나 문어숙회 등을 사용하는 장례식장에서 음식 비용이 더 많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장례식장에 음식 비용이 대략 얼마 정도인지 문의하면 대부분 조문객 1명당 2만 원에서 2만 5000원 정도 생각하면 된다고 답변해줍니다. 장례식장에서 식사한 경험이 있는 분들은 이 금액이 얼마나 비싼 금액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사상을 차리는 경우 제사음식 비용이 발생하는데, 처음 빈소를 차릴 때 기본 제물, 입관 후 성복제, 상식과 발인제로 여러 번 제물을 바꿔 올립니다. 제물을 다 갖춰서 주문할 경우 총 비용이 100만 원을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 상에 간단한 상식 제물을 추가해 성복제나 발인제를 올리는 경우에는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습니다.
장례식장은 임대사업자인데 수도권의 일부 대형 장례식장을 제외하고는 임대보다 음식으로 수익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조문객도 많이 줄고 음식을 소비하는 비율도 줄다 보니 장례식장들도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았다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장례식장에서 발생하는 비용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호에는 상조회사 영역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전국~ 노래자랑” 약 70년 동안 일요일 아침 시청자와 만나던 ‘국민 MC’ 송해(95·송복희)가 방송계 동료들과 국민들의 추모 속에 영면에 들었다.
고(故) 송해의 영결식이 10일 오전 4시 30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유족과 지인, 연예계 후배들 80여 명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영결식의 사회는 개그맨 김학래가 맡았다. 장례위원장인 엄영수(개명 전 엄용수) 방송코미디언협회장은 조사를. 개그맨 이용식과 이자연 가수협회 회장은 추도사를 각각 낭독했다. 또한, 코미디언 유재석, 강호동, 조세호, 이수근 등과 가수 설운도, 현숙, 문희옥 등이 참석했다.
송해가 각별히 아낀 후배 이용식은 추도사에서 “이곳에서는 ‘전국노래자랑’을 많은 사람들과 힘차게 외쳤지만 이제 수많은 별들 앞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외쳐달라”면서 "선생님이 다니시던 국밥집, 언제나 앉으시던 의자가 이제 우리 모두의 의자가 됐다. 안녕히 가시라"라고 작별인사를 전했다.
이자연 대한가수협회 회장도 “선생님은 지난 70년 동안 모든 사람에게 스승이었고, 아버지였고, 형, 오빠였다”라면서 “송해 선생님은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결식장에서는 다큐 ‘송해 1927’에서 발췌한 고인의 생전 육성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영상에서 송해가 “전국”을 외치자 모든 참석자들은 “노래자랑”을 이어받으며, 마지막 ‘전국노래자랑’을 완성했다. 담담하게 영결식을 지켜보던 가족들은 고인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훔쳤고, 동료들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이어 이자연, 설운도 외 5명의 대한가수협회 가수들이 송해의 주제곡 ‘나팔꽃 인생’을 열창했다. 송해의 막내딸은 “존재만으로 희망의 상징이었던 아버지의 삶을 기억할 것이고 사랑을 많이 주신 많은 분들의 일상도 행복하길 바란다”라며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라고 감사를 표했다.
이어 임하룡, 전유성, 최양락, 강호동, 유재석, 양상국 여섯 명의 코미디언 후배들이 고인을 운구하며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운구차는 서울 종로구 낙원동 송해길과 여의도 KBS 본관을 거쳐 경북 김천시 화장터로 향한다.
고인의 유해는 아내 석옥이씨(1934~2018)가 영면한 대구 달성군의 송해공원에 안장된다. 송해는 생전에 대구 달성군을 ‘제2의 고향’으로 여겼고, 명예군민이었다. 달성군은 송해의 이름을 따 송해공원으로 명칭했다.
앞서 송해는 지난 8일 오전 서울 강남구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올해 들어 건강이 악화된 송해는 지난 1월과 5월 병원에 입원했으며, 3월에는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또한 최근 KBS 2TV ‘전국노래자랑’의 야외 녹화가 2년 만에 재개됐으나 송해는 연이어 불참했다.
송해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희극인장으로 치러졌다. 애초 5일장을 논의했으나 유족의 요청에 3일장으로 변경됐다. 방송계 인사들은 물론 정부와 정치권 인사들도 빈소를 찾아 애도를 표했다.
고인의 영정 앞에는 금관문화훈장이 놓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8일 송해에게 한국 대중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대통령실은 “지난 1955년에 데뷔한 송 희극인은 반세기가 넘는 기간 다양한 분야에서 희극인 겸 방송인으로서 활동하며 재치 있는 입담과 편안한 진행으로 국민에게 진솔한 감동과 웃음을 선사해줬다”라고 추서 배경을 설명했다.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앞의 송해길에는 시민들의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지난 9일 비가 오는 날씨에도 시민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송해의 동상 주변에는 근조 화환과 함께 시민들이 놓고 간 국화꽃이 수북이 놓여있었다. ‘전국노래자랑’으로 시민과 호흡해온 송해였기에 그의 죽음에 많은 국민들이 슬퍼했다.
송해길에는 송해의 개인 사무실과 그가 생전 자주 이용했던 국밥집과 이발소, 사우나 등이 있다. 특히 ‘이천원 국밥집’은 송해의 생전 단골집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송해길에 가면 송해를 만날 가능성이 높았다.
이 지역은 오는 15일 송해가 참석하는 ‘송해길 선포 5주년 기념 주민화합 축제’가 예정되어 있었던 터라 안타까움을 더한다. 종로구의 최재형 의원은 “다음 주 송해길 선포 5주년 행사 때 뵙고, 좋은 말을 나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아프다“면서 “모든 국민들이 사랑하고 존경했던 어른”이라고 애도했다.
송해는 1927년 황해도 재령군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 당시 남한으로 피난 온 뒤 1955년 창공악극단의 단원으로 무대에 오르며 연예계에 데뷔했다. 특히 그는 1988년부터 34년간 KBS 1TV ‘전국노래자랑’의 진행을 맡으며 ‘국민 MC’에 등극했다. 최근 영국 기네스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Oldest TV music talent show host)에 이름을 올렸다.
영화배우 강수연과 시인 김지하가 세상을 떠났다. 잇단 문화계의 비보에 대중은 큰 슬픔에 빠졌다.
강수연은 지난 7일 향년 55세로 별세했다. 지난 5일 자택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왔지만, 끝내 의식을 찾지 못했다.
강수연의 영결식은 오는 11일 오전 10시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된다. 영화진흥위원회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생중계될 예정이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현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이 장례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임권택·배창호·임상수·정지영 감독, 안성기·김지미·박정자·손숙·박중훈 배우 등이 장례위원회 고문을 맡았다.
4세 때 아역 배우로 활동을 시작한 강수연은 영화 ‘고래 사냥 2’(1985),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 등에 출연하며 청춘스타로 떠올랐다.
특히 1987년에는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로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월드스타 타이틀을 최초로 거머쥐었다. 삭발을 하며 연기혼을 보여준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로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도 최우수여자배우상을 수상했다.
1990년대에는 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9), ‘경마장 가는 길’(1991), ‘그대 안의 블루’(1992),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등 숱한 화제작을 내놓았다. 대종상영화제,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2001년에는 SBS 드라마 ‘여인천하’의 주인공 정난정 역할로 오랜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했다. 이 작품은 최고 시청률 35.4%를 기록하며 공전의 인기를 누렸고, 그해 강수연은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고인은 ‘써클’(2003), ‘한반도’(2006), ‘주리’(2013) 등 영화에 간간이 출연했지만 2010년대 이후로는 작품 활동이 거의 없었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는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최근에는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SF 영화 ‘정이’(가제)에 주연으로 캐스팅돼 단편 ‘주리’(2013) 이후 9년 만에 스크린 복귀를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정이’는 고인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의 작품을 남긴 김지하 시인은 지난 8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토지문화재단에 따르면 시인은 최근 1년여 동안 투병생활을 한 끝에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타계했다. 빈소는 연세대 원주 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유족으로는 장남 김원보 씨(작가)와 차남 세희 씨(토지문화재단 이사장 겸 토지문학관 관장)가 있다.
1941년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했다. 1969년 시 ‘황톳길’로 등단한 후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민족문학 진영의 대표 문인으로 꼽혔다. 이후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1980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1973년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했으며, 1975년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 로터스상과 1981년 국제시인회 위대한 시인상과 브루노 크라이스키상을 받았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2년에는 ‘타는 목마름으로’ 시집을 발표하며 저항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외에도 고인의 대표 저서로 ‘생명’, ‘애린’, ‘황토’, ‘대설(大設)’ 등이 있다. 2018년 시집 ‘흰 그늘’ 산문집 ‘우주생명학’을 마지막으로 절필을 선언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9일 페이스북을 통해 “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은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우리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고 시인을 추모했다.
#1 입관을 앞두고 가족들이 고인과 마지막 만나는 시간이다. 저마다 슬픔을 추스르며 고인에게 작별인사를 올린다. 어느 정도 인사가 끝난 것 같아 남은 절차들을 진행하려고 하는데 작은며느리가 잠깐 기다려달라고 한다.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고인의 귀로 가져다 댄 후 녹음된 음성을 틀어준다.
휴대전화에서는 코로나19로 입국하지 못한, 브라질에 거주하는 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엄마, 못 가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마지막 가는 길마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고마워 엄마. 너무도 사랑하는 우리 엄마. 이제 편히 쉬어.” 딸은 흐느끼느라 말을 맺지 못했다. 사랑하는 엄마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과 슬픔이 절절히 느껴졌다.
#2 아들은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임종을 지키러 입국하려 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들어올 수 없었다. 직계가족의 상이 발생할 경우 입국 시 코로나19 음성 판정이 나면 자가격리를 면제받을 수 있지만 운명하지 않은 시점에서 들어올 경우에는 15일 동안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
#3 일정이 맞지 않으면 장례식에 참가 못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아들은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대신 장례식이라도 참석하기 위해 임종 후 입국하기로 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입국한 상주를 받아주는 장례식장은 흔치 않았다. 우리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에서 발 벗고 나서 겨우 장례식장을 섭외할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고인 사망 후 상주가 입국해 자가격리 면제를 받은 후 4일 만에야 겨우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릴 수 있었다.
유족들은 코로나19 때문에 빈소를 차리지 않는 무빈소로 장례를 치르겠다고 했다.
“상주님~ 빈소를 차리지 않으면 아쉽지 않으시겠어요?” 조심스럽게 여쭤봤다.
“할 수 없지요. 빈소를 차리면 저희들이 조문을 받지 않겠다고 해도 직장 동료나 지인들이 참석해야 할지 말지 고민할 텐데…. 애초에 빈소를 차리지 않는 것이 주변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요.”
결국 빈소를 차리지 않았다. 참관식에서는 목사님과 여러 성도님들이 함께 발인예배를 진행하며 어머니의 천국 가시는 길을 배웅했다.
코로나19가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을 바꾸고 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도 예외가 아니다. 이 사태가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겠지만 종식된 이후에도 전과 같은 장례식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장례식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애도’에 있다.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을 통해 가족들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슬픔을 위로받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코로나19 이전 장례식에서는 이런 애도의 과정이 실종되었다. 운명한 직후부터 유족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빈소가 차려지면 조문받기 바쁘다. 발인하는 날은 장례식장에 비용을 정산하고, 화장장을 예약하고, 장지 계약하는 등 3일 동안 장례는 정신없이 돌아간다. 그나마 온전히 고인을 추도할 수 있는 시간은 염습을 참관하는 한 시간 남짓이 전부였다.
역설적이게도 코로나19 시대의 장례는 규모가 축소되었을지언정 그로 인해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이 훨씬 늘어났다. 부고를 하고 정신없이 조문을 받던 시간이 오롯이 가족들끼리 고인을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나는 깊이 있는 애도와 가족 간의 애틋한 추모를 위해서는 가족 추모식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추모식이라고 해서 거창할 것도 없고 형식을 따질 필요도 없다. 고인과의 추억을 이야기하거나, 고인의 사진을 함께 보고, 메모리얼 포스트(고인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를 작성해 나누면 된다.
내가 근무하는 협동조합은 코로나19 이전부터 추모와 애도가 중심이 되는 장례식을 준비해왔고 ‘채비’라는 브랜드를 론칭했다. ‘채비’는 추모식이 중심이 되는 혁신형 장례식이다. 우리 조합은 가족들이 추모식을 잘 진행할 수 있도록 기획, 연출, 진행을 돕는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의례가 사라졌다고들 한다. 하지만 ‘채비장례’를 통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죽음과 의례의 본질을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든 것은 양면이 있다. 죽음 또한 그렇다.
문화부 초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자대학교 명예석좌교수가 숙환으로 26일 8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생전에 문학평론가, 언론인, 작가, 교수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최고 석학 손꼽혔던 고인은, 노태우 정부 때 신설된 문화부 초대 장관(1990~1991)이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으로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0)를 비롯해 '축소지향의 일본인'(1984), '이것이 한국이다'(1986), '세계 지성과의 대화'(1987), '생각을 바꾸면 미래가 달라진다'(1997), '디지로그'(2006), '지성에서 영성으로'(2010), '생명이 자본이다'(2013) 등 수많은 저서를 펴냈다.
과거 고인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투병과정에 대해 “병까지도 인간을 이길 수 없게 하는 방법은 친구로 삼는 것이다. 적으로 맞서 싸우면 병을 이길 수 없다”며 투병이나 치병이 아닌 친병(親病)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그는 인터뷰에서 AI와 4차산업을 화두로 삼으며 새로운 지식 분야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을 표현했었다.
또 그는 본지 시니어 독자를 향해 당부의 이야기를 남겼었다.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공자님 말씀대로입니다. 인터넷 시대의 지지자(知之者)는 인간이 아니라 AI입니다. 지지자 위가 호지자(好之者)이고, 또 그 위가 낙지자(樂之者)입니다. 바로 지호락(知好樂)이지요. 연애가 노동이라면 비 맞아가며 연인을 기다리겠어요? 골프가 땅을 파는 노동이라면 18홀을 돌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 지호락을 추구하면서 임도 보고 뽕도 따는 마음과 자세로 사는 게 중요합니다.”
고인은 지난해 10월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 장남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차남 이강무 백석대학교 교수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며 유족 측은 5일간 가족장으로 치를 계획이다.
슬픈 일일수록 알리고 나눠야 한다는 핑계로 허례허식만 늘어난 우리나라 장례·추모 문화가 코로나19와 맞물리면서 변화하고 있다. 감염 우려로 인해 접객이 어려운 상황에서 기존의 불필요한 절차를 줄이고 추모에 집중하자는 취지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이 우리나라의 장례 문화가 과도하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이크로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에서 전국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인식 조사를 한 결과, 80.9%가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는 소모적인 경향이 있다’고 평가했다. 장례 준비 및 절차에 따른 경제적 부담, 추모보다 접객에 치우친 문화 등 관례에 얽매여 피로감이 쌓인 데 따른 응답으로 해석된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연합회는 복합장례 공간 ‘채비’를 마련해 조합원을 대상으로 삼일장을 간소화한 ‘1일 가족장’과 빈소 임대료·식대를 없앤 ‘무빈소 가족장’ 서비스를 제공한다. 1일 가족장은 채비에 빈소를 차려 하루 동안 직계존비속을 비롯한 친인척을 초대해 고인을 기리고 추억을 나눈다. 무빈소 가족장은 일회성 추모식을 진행한 후 장례를 마무리한다.
고인이 운명한 직후부터 부고하고 빈소가 차려지면 정신없이 조문받기에 치우친 장례식 대신 오롯이 가족들끼리 진심으로 지나간 이를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김기혁 채비 홍보팀장은 “코로나19와 시기가 맞물리면서 의식은 간소하게 하고 추모와 애도가 중심이 되는 고인 중심의 장례식이 더욱 성행하고 있다”며 “국내 상조 회사가 이익을 독식하는 불합리한 구조의 개선을 위해 장례용품의 원가를 공개하고 공동 구매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고 말했다. 이어 “대형 상조 회사와는 달리 불필요한 품목을 제외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도록 한다”고 덧붙였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비대면 추모·성묘에 관한 관심도 높아지는 모양새다. 한국장례문화진흥원에 따르면 623개의 국내 장사시설에선 코로나19에 따라 성묘객의 안전을 위해 온라인 성묘·추모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진흥원이 위탁 운영하는 ‘e하늘 장사정보시스템’ 누리집을 통해 제공되는 이 서비스는 유족들이 직접 고인에 대한 온라인 추모관을 만들고, 차례상·분향·헌화·사진첩 등 기능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가상현실(VR) 조문·추모관 서비스 업체 별다락은 3D 모델링으로 만든 샘플 조문·추모관을 자체 누리집에서 선보였다. 별다락은 코로나19로 인해 조문조차 꺼려진 상황에서 누구나 빈소를 방문할 수 있도록 무빈소 온라인 장례식을 기획했다. 박수인 별다락 대표이사는 “장례 이후에도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납골당 예약과 방문이 어려운 상황을 개선하고자 서비스를 만들었다”며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전했다.
이어 “현재 부고장 서비스와 함께 메타버스 추모관 제작을 진행하고 있다”며 “우선 안정적인 3D 화면으로 추모관을 볼 수 있게 구축하고, 이후 가상공간 안에서 아바타가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과 소통이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되고 16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기업이 친가와 외가 경조사 기준에 차이를 두고 있어 문제로 지적된다. 회사 자율로 마련한 기준이지만 다수가 '부계가족'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아 차별을 조장한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난 7월 12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친가와 외가를 나눠 복지 혜택을 차등 부여하는 기업행태를 근절해달라’는 내용을 담은 청원이 올라왔다. 대한민국에서는 친할아버지 죽음이 외할아버지 죽음보다 더 중요하게 평가되는데, 이게 문제라는 주장이다.
청원인은 “사회적 가치를 철저하게 분석해 이윤을 남기는 기업에서조차 외가를 친가와 구분 짓는다”며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경조 휴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개인 연차를 써 빈소를 지켜야 하는 불공평함을 누구를 잡고 토로해야 한단 말이냐”라고 불만을 제기했다.
이어 “현행법에서도 '본인이나 가족의 경조사를 위한 휴가'에 관한 별도 규정이 없다”고 말하며 “성 평등과 민주적 가족법을 구현하기 위한 개정 운동의 결과 2005년 3월 31일 호주제는 폐지됐지만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친가와 외가를 나눠 복지혜택을 차등 부여하는 일부 몰상식한 기업들과 이를 침묵으로 용인하고 있는 사회를 고발한다”고 말했다.
호주제 폐지 이후에도 기업이 외가와 친가를 구분해 경조휴가·경조비에 차별을 두는 것은 꾸준히 문제로 지적됐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2013년 82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1곳이 외가의 경조사에 경조휴가와 경조비 지급에 차등을 뒀다. 외조부모상에 경조비를 전혀 지급하지 않는 기업도 있어 인권위는 이를 "통념에 따른 차별"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인권위가 개선을 권고했으나 별다른 시정조치는 나오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7월 친족 사망에 따른 경조사 휴가 시 친가와 외가를 차별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발의 당시 박 의원은 “양성평등을 기초로 한 가족생활을 보장하는 것은 헌법이 정한 국가의 의무”라며 “법 개정을 통해 기업의 성차별적 상조 복지 제도가 개선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지만 해당 법안은 1년째 국회에 계류 중이다.
친가와 외가를 차별하는 규정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사실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2010년에 중·고교생 697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청소년들은 친가보다 외가에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조사에서 가족으로 볼 수 있는 대상으로 ‘이모’를 꼽은 응답자가 83.4%로 가장 많았고, 외삼촌이 81.9%로 뒤를 이었다. 반면 고모는 81.7%, 큰아버지·작은아버지는 79.8%로 친가보다 외가 친척을 더 가깝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앞서 소개한 청와대 국민청원은 8월 11일에 마감되는데 7월 29일 오후 1시 현재 2만641명이 청원이 동의하고 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이후경 소설가가 먼저 세상을 떠난 선배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순현 형, 하필이면 형을 보기로 했던 날, 만나서 형의 아내이자 내 친구인 J의 명예퇴직을 축하해주기로 한 날, 형은 쓰러졌지요. 바로 전날까지 테니스를 쳤던 건강한 형이 그길로 뇌사상태가 되어 열흘 뒤 간과 신장을 나눠주고 훌쩍 저세상으로 가버린 일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어요. 우리는 모두 불시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한 상태로 형의 장례를 치렀지요. 그런 자리에 빠지는 일이 결코 없는 형이 안 보이자 누군가, 순현 형이 왜 안 오지? 하는 실언을 했을 정도로.
코로나19 사태로 텅 빈 다른 빈소들과 달리, 슬픔에 겨워 달려온 조문객들로 북적였던 것만 뺀다면 사실 형의 장례도 평범했어요. 시장통처럼 번잡한 화장장에서 스산한 마음으로 대기하던 우리 모습도 유별날 건 없었지요. 그런데 그때 생각도 못한 사고가 생긴 거예요. 화장 예약이 실수로 취소되었다는!
장례지도사는 사색이 되어 ‘상조회사 1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며 어쩔 줄 몰라 했고, 우리는 우리대로 날벼락 같은 소식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죠. 급히 다른 곳을 알아봤지만 가능한 곳은 두 시간이나 가야 하는 S시의 화장장, 그것도 다음 날 아침 7시 자리 하나뿐이었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요. 너무 이른 시각이니 유족들은 S시로 내려가 자기로 했고, 조문객들은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갔지요. 나는 유족들을 따라 버스에 올랐어요. 날씨도 음울했고, 버스 안 분위기도 침울했지요. S시의 숙소가 코로나 때문에 그날부터 영업을 중지한다는 소식까지 들려오자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어요. 누구한테도 폐 끼치는 걸 싫어했던 형, 형처럼 선량한 사람의 마지막 가는 길이 왜 이래야 하는지, 나는 또 납득이 가지 않았지요.
화장장이 속한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넓은 공원에 세워진 깨끗한 건물이 텅 빈 채 기다리고 있었어요. 새 빈소에 영정을 옮겨놓고 형의 셋째 형님이 소주를 올리자 형의 얼굴이 단박에 환해진 듯싶었지요. 친구들과 조곤조곤 얘기하며 술 마시는 자리를 얼마나 좋아했던 형인가요. 방도 따뜻하고 아늑해서 형의 시골집에라도 놀러간 것 같았어요. 따로 숙소 구하지 말고 거기서 그냥 자자고 모두들 마음을 바꿨는데, 알고 보니 그날 밤 당직이 형의 처가 쪽 청년이었어요. 얼마나 신기했는지! 거기다 바람이나 쐬자고 건물 밖으로 나가니 이 3월에, 갑자기 함박눈이 쏟아지더군요. 우리는 한숨처럼 탄성을 뱉었지요. 말로는 전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형이 간절하게 보내는 것만 같았어요. 마음이 서서히 풀려갔지요. 저녁 식사 자리도 참 좋았어요. 우리는 인사도 나누고, 형에 대한 추억도 나누었어요. 따뜻한 작별 파티에 초대된 느낌이었지요. 어릴 때 형 별명이 제비였다면서요? 8남매가 모여 얘기할 때면 일곱째였던 어린 형은 제비처럼 마루 끝에 앉아 듣기만 해서요. 어떤 선행도, 배려도 드러나지 않게 은은히 하던 사람, 그런 형이 맏형님 댁에 얹혀살던 몸으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 때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요? 형수님의 얘기를 들으며 미루어 짐작만 해봤지요. 그런가 하면 여섯이나 되는 형의 처제들은 형이 아버지 같고, 오빠 같은 큰 형부였다고 그리워하더군요.
다시 빈소로 돌아와서도 작별 파티는 이어졌어요. 영정 속의 형은 여전히 제비처럼 가만히 듣기만 했지요. 얘기하다 형한테 술 한 잔 따르고, 술 마시다 형을 한 번씩 바라보고, 형과 함께 하룻밤 엠티를 온 것만 같았어요. 이 밤이 없었다면 너무 쓸쓸했을 거라고 누군가 말했지요. 알고 보니 예약 취소 버튼을 누른 건 순현 형이었나봐. 또 누군가 말하자 우리는 맞아, 맞아, 하며 웃음을 터뜨렸고요. 형의 몸이 머무른 마지막 밤은 그렇게도 기이하고, 아름답고, 정겨웠지요. 형의 죽은 몸은 아래층에 있다는데, 그 위의 절절 끓는 온돌방에 누워 자면서 나는 문득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지는 느낌에 아득해졌어요.
다음 날 아침, 새벽부터 출발해 내려온 조문객들의 얼굴엔 어제의 비통함이 그대로인데, 장례식장에서 담요 한 장 깔고 잔 우리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환했지요. 하지만 그 신비한 하룻밤을 전할 길은 없었어요.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얻어진 그 하룻밤은 어쩌면 형이 우리에게 보내는 형다운 작별 인사, 작별 편지였던가요? 그렇다면 이 편지는 그 답장인지도 모르겠네요.
하루가 밀린 덕분에 형의 몸이 불타 가루가 되는 그 아침은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이었고, 하늘 또한 티 없이 맑았지요. 나는 비로소 조금씩 납득이 가기 시작했어요. 고마워요, 형. 이번 생에 만나서 정말 기뻤어요. 어디서, 무엇이 되어 태어나든 다시 만나면 더 반가울 거예요. 형은 그런 사람이었어요. 아무도 우러러 떠받들지는 않았지만 우리 모두가 조용히 사랑했던 사람, 잘 가요, 순현 형.
이후경 소설가
바다를 포함한 모든 물, 산신령을 포함한 모든 신, 만년필을 포함한 모든 문구류를 좋아하는 글 쓰는 사람. ‘저녁은 어떻게 오는가’, ‘달의 항구’, ‘저녁의 편도나무’ 3권의 소설책을 냈다.
마치 1980년대 극장가를 휩쓸었던 영화 ‘돌아이’의 주인공 황석아가 다시 돌아온 느낌이었다. 전영록은 어리숙하면서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뜨거운 청년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채 인터뷰 내내 유쾌함을 잃지 않았다.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불티’,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와 같은 명곡들을 부른 주인이자 ‘바람아 멈추어다오’,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등 히트곡 작사 작곡자, 그리고 영화비디오테이프, 만화책, LP판, 심지어 피규어까지 수집하는 소문난 마니아다. 다양한 재능과 취미를 갖고 있는 전영록을 만나 그때 그 시절 7080 추억들을 꺼내 감성과 낭만의 시간으로 꽉꽉 채웠다.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 속에서 만능 엔터테이너의 모범을 보여줬던 이로 전영록을 지나칠 수는 없다. 당대 최고의 가수이자 흥행 배우로서, 그리고 작사 작곡까지 하는 아티스트로서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최고의 자리에 서 있었던 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들려온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그가 심각한 암 환자였고 사경까지 헤맸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아니 그게… 용종이 좀 큰 상태였는데 방송에서 이홍렬이 한 말을, 그걸 편집해서 사람을 암 환자로 만들더라고. 환장하는 줄 알았어요. 난 오래 살 거예요. 아니, 오래 살 거 같아.(웃음)”
일단 그가 암 환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정말 다행이었지만 이번에는 코미디언 이홍렬 씨와 그가 친구라는 게 또 놀라웠다. 그가 동안의 대명사라 믿기지 않았지만 실제로 이홍렬 씨와는 65세 동갑내기이며 중학교 동창이라 했다. 그는 여전히 젊다. 그러나 그 젊음이 외모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요즘은 블랙핑크가 좋다
“예전에 보람이에게 ‘난 티아라보다 포미닛이 좋다. 현아가 있어서’라고 말한 적이 있었죠.(웃음) 큰아들은 요즘 아이린을 좋아해요. 둘째는 쯔위를 좋아하고. 저는 블랙핑크가 좋아요. 걸크러시잖아요. 제가 이러고 살아요. 음반사에서 레드벨벳 포스터 구해놨다고 하면 얼른 가져와서 아들 방에 붙여주고.(웃음)”
전영록의 딸 전보람은 걸그룹 티아라의 멤버였다. 티아라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포미닛은 티아라의 라이벌 그룹이었으니, 그는 딸 앞에서 딸의 라이벌 그룹이 더 좋다고 칭송(?)한 셈이다. 요즘 아이돌 그룹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면 그가 말하는 아이린, 쯔위, 블랙핑크와 레드벨벳이 누구인지 이해가 잘 안 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모두 요즘 잘나가는 걸그룹과 아이돌 이름이다. 전영록의 취향 안테나는 그렇게 여전히 현재를 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골프 좀 치러 다니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난 아들들 케어해주는 게 더 좋아요.”
삶의 보람, 두 아들과 눈 맞추기
그 말처럼 두 아들 전유빈, 전효빈 군은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아들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요즘 아이들이 왜 부모와 얘기를 안 할까 고민해봤어요. 결론은 부모의 태도예요. 아이들이 대화를 좀 해보려 해도 대부분의 부모들은 ‘네가 뭘 알아, 어서 밥 먹고 공부나 해’라고 말하기 일쑤죠.”
그는 자식들을 존중한다. 어떤 때는 거의 친구처럼 대할 때도 있다고 한다.
“‘아빠가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응원이야. 물질적인 지원은 없어’라고 말하곤 해요.(웃음)”
그의 이러한 태도가 그를 젊게 만드는 걸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일상에도 여전한 젊음이 있었다. 연예계에서 손꼽히는 마니아 전영록은 요즘도 행복한 마니아로 살아가고 있었다.
“음반을 한 20억 원 어치 정도 샀어요. 피규어 레진은 지금도 모으고 있고. 피규어는 한 3억 원 어치 샀을 거예요. 영화, 만화, 게임 관련 자료들도 모으고 있고…. 물론 아내가 싫어하죠.(웃음)”
음반, 피규어를 사는 데 수십 억을 썼다면 집 안은 거의 박물관 수준이 아닐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얼마 전에 해결책이 생겼다.
“평창 알펜시아에 세계에서 가장 큰 피규어 박물관이 들어선대요. 친한 동생이 2층은 스튜디오로 쓰고 1층은 박물관으로 만든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 거 다 가져가라고 했죠.(웃음) 이런 제 취미 때문에 그동안 마음고생한 집사람이 그 얘길 듣고 너무 좋아하더군요.”
영화계와 만화계의 만남을 주선하다
물론 전영록의 ‘특별한 취미’가 아무 의미 없이 아내에게 스트레스만 준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나라 영화계가 만화를 소재로 영화로 만들기 시작한 게 바로 자신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이장호 감독에게 만화책을 갖다 준 건 ‘돌아이’ 시리즈 3편이 나올 무렵이었다. 처음 이 감독의 반응은 ‘야, 장난하냐?’였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형님, 보시고 별로면 버리시고, 이 만화로 영화를 만들어볼 의향이 있으면 이현세라는 만화가에게 연락해보세요’라고 했다. 그때 그가 건네준 만화책이 바로 이현세 원작의 ‘공포의 외인구단’이었다. 이 만화는 영화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만들어져 대성공을 거뒀다. 이 작품이 1980년대 중후반 한국 영화의 흥행을 이끌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다.
‘돌아이’를 제작한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은 전영록의 이러한 감각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전영록에게 메가폰을 잡아보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제가 액션 신을 찍으려면 카메라가 여러 대 필요하니 다섯 대만 준비해 달라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이 사장님이 ‘미친놈, 돌아이 짓 또 하네’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래서 못했어요. 정말 하고 싶었는데.”
내가 스티브 잡스를 싫어하는 이유
전영록의 얘기를 듣다 보니 그는 유행의 최첨단을 걷는, 독특한 얼리어답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스마트폰의 ‘스’ 자도 모르는 사람이다. 20년 동안 폴더폰을 쓰고 있는데 한 달 전에 고장이 나서 스마트폰 기능이 있는 폴더폰으로 겨우 교체했다. 당연히 카카오톡도 모른다.
“얼마 전에 지인을 통해 전유성 선배 어머니 부고 소식을 듣게 됐어요. 그런데 오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을 페북에 올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물었죠. 페북이 뭐냐고.”
그는 아날로그가 좋다고 말한다. 그래서 고장 난 폴더폰을 또다시 폴더폰으로 바꿨다. 그러니까 그는 새로운 것이라고 무조건 받아들이고 애정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오랜 세월 빚어진 자신만의 공고한 세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요즘 세태를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제가 스티븐 호킹 박사를 좋아하는데, 그분이 스티브 잡스를 싫어하셨어요. 저도 스티브 잡스를 싫어해요. 호킹 박사는 스마트폰에 매달리면 인성이 없어질 것이라 했거든요. 그 말대로 요즘 세대는 인성이 부족한 것 같아요. 애들이 잘못 배우고 있는 거예요.”
그는 최근의 미디어 문화와 예능 프로그램들에 대해 걱정이 많다. 요즘 사회가 점점 험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미디어에서는 절대 나쁜 말, 나쁜 행동을 하면 안 돼요. 그런데 처음에는 재미있어서 한 건데 그걸 방관한 게 문제였죠. 아이들이 예능인들의 거친 행동과 말투를 보고 자라면서 인성이 사라졌다고 봐요. 힙합만 봐도, 랩은 거의 욕이고 남을 헐뜯는 내용이잖아요? 그걸 왜 놔두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가수가 맛있게 불러주면 그걸로 만족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냐고 물으니 전영록은 ‘뮤직 셰프’라고 답했다. 그가 요즘 꾸준하게 밀고 있는 명칭이다.
“뮤직 셰프란 음악에 MSG를 쳐서라도 맛있게 들려준다는 의미예요. 아구찜이나 갈비찜에 설탕 풀어넣어 보세요. 정말 맛있어져요.”
음악인 전영록은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최고의 가수이자 작사 작곡가다. 그래서 그가 ‘요즘 애들은 다 베껴서 창작이 없다, 공부를 안 한다’고 한탄할 때 그 말에는 자연스럽게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쓴 것은 40곡이고 드린 분은 여섯, 일곱 명 정도 돼요. 인순이 씨에게는 초창기에 줬던 게 있고 정수라, 김희애, 양수경, 이은하, 민해경… 얼마 전에는 남진 선배에게 ‘잘살고 싶소’를 드렸죠.”
그는 25년 동안 곡을 안 썼다. 이유는 간단했다. ‘싫어서’. 그러나 어느 순간 다시 곡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진 선배를 필두로 선후배 가수들에게 자신이 만든 노래를 주고 있다. 그가 마음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자식들에게 유산을 남기고 싶은 거죠. 저작권료는 사후 70년까지 나오니까. 쓸 만큼, 먹을 만큼, 입을 만큼은 남겨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계속 만들고 있어요. 이 나이에 서점 가서 사전 보면서 작업하니까 재밌어요. 예전에도 가만히 있질 못했던 편이죠. 맛있는 거 나오네? 괜찮겠네? 그럼 썼으니까요.”
그는 선후배 가수에게 노래를 줄 때 작사 작곡비도 안 받고 그냥 줬다고 한다. 히트곡을 엄청나게 보유한 사람인데 아무것도 안 받았다니,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러나 아쉽지 않다고 했다. 그저 가수가 자신이 만든 노래를 맛있게 잘 부르면 그걸로 족하다는 것이다. 과연 뮤직 셰프다운 대답이었다.
연예인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
연예인 생활 46년 동안 어려운 순간을 잘 이겨낸 원동력이 무엇인지 묻자 ‘사람과 잘 안 만나고 그 시간에 하나라도 더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만큼 그는 음악을 체질적으로 업으로 삼았다. 문득 그의 집안이 연예인 가족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의 아버지는 200여 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영화배우 황해, 어머니는 ‘봄날은 간다’를 부른 가수 백설희다. 심지어 딸 둘도 아이돌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갑자기 가족이 연예인인 집안 분위기는 어떨까. 자연스럽게 궁금해졌다.
“나쁘죠. 안 바빠도 바쁜 척, 아닌 척해야 하니까. 방송 촬영은 아침부터 나와서 김밥 먹으며 리허설을 계속해야 하니 그것도 힘든 일이고.”
그는 부모님에게 ‘유전자만 물려받았다’고 했다. 꽤 엄격한 부모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 다 벽이었어요 벽. 당장 당신들이 인정을 안 하는데 뭘. ‘아버지, 연기 지도해주시면 안 돼요?’라고 물은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내가 너에게 지도를 해주면 넌 황해가 된다. 전영록은 없어’라고 대답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자식들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해라’ 잔소리 안 해요. 그러면 전영록이 되는 거니까요. 알아서 해야지.”
죽을 때까지 노래 만들고 싶다
최근 오랜만에 그의 싱글 앨범이 나왔다. 작사 작곡가 전영록의 부활과 함께 가수 전영록 또한 출격을 준비해왔던 것이다.
“전유성 선배가 어머니 빈소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갔어요. 그런데 조덕배와 이문세가 먼저 왔다 갔더라고요. 얘기를 들어보니 덕배도 요즘 곡을 쓰기 시작했답니다. 덕배의 음악세계를 좋아하는데 반가운 소식이었어요.”
그는 음악 활동과 함께 연기도 다시 시작했다.
“이천희가 주연인 영화를 찍었는데, 거기 카메오로 나와 달라고 해서 오프닝과 엔딩에 등장해요. 그리고 현재 제작 중인 드라마에 방송 PD 역할로 나갑니다. 좋잖아요.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거니까. ‘나 암 환자 아니다’라는 거고.(웃음)”
12월 미국 공연을 준비 중인 그는 여전히 공연의 엔딩곡을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로 끝낼 거라 한다. 팬들과 함께 부르기에 좋기 때문이다.
“팬들은 저와 과거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들이 제 노래를 들으면서 자기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인터뷰 중 그의 30주년을 회상하면서, 그때 그에게 헌정하기 위해 모인 가수들이 기라성 같은 이들이었음을 얘기했다. 그러자 “이제 그들은 다 원로가 됐고, 나는 고스트가 됐다”고 말했다. 함께 한바탕 파안대소했다. 스스로를 ‘고스트’라고 칭하는 이 유쾌한 남자의 미래 계획은 ‘죽을 때까지 지인들에게 곡을 주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노래를 만들겠다고 다짐하는 ‘고스트’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나 이 영원할 것 같은 젊음의 아이콘은 그 말이 안 되는 일을 말이 되게 만들 것 같다.
단톡방이 신호를 보냈다. 평소처럼 느긋하게 보리라 생각하며 하던 일을 마쳤다. 은퇴 후 인생이모작을 위한 수업을 함께 들었던 사람들이 만든 방이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자기 이름으로 자신의 장례일정을 안내하는 문구였다. 순간 장난하는 건가? 아직 60대 초반.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장난이라면 아주 실감나게 한 것이고 아니라면? 갑자기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전화를 눌렀다. 받지 않았다.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다른 동료들도 서로 이것이 진짜냐고 묻기만 했다.
장례일정 안내에는 구체적으로 입관 날짜와 출관 날짜가 있고 미사와 장지에 대한 안내까지 있었다. 일단 가봐야 확인이 될 것 같았다. 날은 엄청 더워서 세상이 열기로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내 마음 속은 서늘한 불안과 후회가 범벅이었다.
우린 스마트폰 사용법과 SNS 교육을 받고 팀을 꾸려서 강의를 같이 다녔었다. 스마트폰이 한창 나오던 시기여서 수요가 많고 보람도 있었다. 강의실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고 그만큼 공부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 교안까지 만들어야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처음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의욕으로 잘 해냈지만 점점 시간을 많이 요하는 작업이라 좀 지치고 꾀가 나기 시작했다. 각자 맡은 강의의 교안을 만들어야하는데 그가 다른 사람이 한 것을 업그레이드 시키지 않고 카피하는 것을 보고 내가 나무란 적이 있었다. 내가 감독으로서 잔소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그가 좀 불손하게 말을 해서 나도 화를 내며 돌아서 버렸다. 그동안 워크숍도 여러번 같이 가고 또 자료를 만들며 회의도 많이 하고 강사료를 받으면 맛 집도 찾아다니며 정을 나누었는데 그렇게 불손한 것이 섭섭했고 그도 뭔가 섭섭해서 우린 그것으로 찜찜하게 헤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 어느 날 단톡방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되어 내가 인사를 건넸고 그는 답을 했다. 서로 간단한 인사였지만 섭섭함을 상쇄한 나름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팀의 모임에 나오지 않았고 혼자 지방을 다니며 강의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그리곤 불쑥 자신의 장례를 안내하는 문구를 본 것이다.
장례미사가 있다는 성당에 도착해서 보니 단톡방에 올랐던 장례안내 표지판이 붙은 빈소에 그의 영정사진이 올려져있고 흰 국화꽃이 무심하게 어지럽혀져 있었다. 슬픔에 잠긴 아내와 십대의 딸 하나가 빈소를 지키며 오열하고 있었다. 평소 심장이 안 좋았는데 사단이 났다고 하며 갑자기 가는 사람을 차마 놓을 수 없는 슬픔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마주 볼 수도 없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모두 굳어버린 것 같았다.
미사에 참여해서 떠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마치 보상이라도 하듯 지인들에게 알려 받아온 봉투를 챙겨 건네며 그를 위해 조금이라도 뭔가를 했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시신을 따르며 부르는 성가, 망자를 다시 만나기를 바라며 보내야만 하는 아픔을 노래할 때 내 눈물은 자제력을 잃었다.
그와 함께 했던 추억의 조각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음식을 나누며 했던 농담들, 지친 몸으로 함께 걸으며 했던 얘기들….
눈물 고인 눈으로 바라보는 그의 영정사진은 관 앞에서 담담했다. 어른거리는 사진을 바라보며 웅얼거렸다.
“친구여, 잘 가시오. 잘 가시오.”
며칠 뒤 단톡방에 그의 이름으로 다시 글이 올라왔다.
“마지막 가는 길에 외롭지 않게 배웅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더운 날씨에도 어려운 걸음 해주시고 마음으로 함께 기도해주심에 유가족 모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그는 갔지만 난 다시 일상의 일에 치여 나만 생각하며 살고 있다. 태어나고 죽고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스치는 바람처럼 지나가고 잊히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잊히며 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