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뒤덮은 미세먼지, 쾨쾨한 매연, 고막을 괴롭히는 소음…. 공해로 얼룩진 도시의 묵은 때를 자연의 민낯처럼 깨끗이 씻어내고 싶다. 일상의 번잡함일랑 잠시 내려두고 너른 자연의 품 안에 뛰어들어보자. 갑자기 떠날 곳이 막막하다면,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국립자연휴양림’을 이용해보는 것 어떨까?
◇ 수도권
아쉽게도 서울에는 국립자연휴양림이 없지만, 도심에서 가까운 경기도에는 5곳이 있다. 그중에서도 ‘산음자연휴양림’은 3km 거리의 ‘치유의 숲길’, 산림치유프로그램, 건강증진센터 등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방문객을 대상으로 산림치유지도사가 진행하는 다양한 치유 프로그램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양주시에 위치한 ‘아세안자연휴양림’은 필리핀,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10개국의 전통가옥과 놀이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이색적인 곳이다. ‘유명산자연휴양림’은 우리 꽃 자생식물원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라면 유익하다.
-산음자연휴양림(양평군) 산림치유지도사 상주
-아세안자연휴양림(양주시) 이국적인 객실 외관
-운악산자연휴양림(포천시) 가마터 향토유적지 인근
-유명산자연휴양림(가평군) 우리 꽃 자생식물원 보유
-중미산자연휴양림(양평군) 산림레포츠 오리엔티어링
◇ 경상도
한려해상국립공원 북단에 위치한 ‘남해편백자연휴양림’은 피톤치드를 뿜어내는 편백나무 숲이 조성돼 있어 삼림욕을 즐기기 좋다. 아울러 전남 여수와 경남 남해 앞바다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통고산자연휴양림’은 불영사 계곡, 덕구온천, 백암온천, 동해안 해수욕장 등과 연계한 관광 코스로 이른바 3욕(금강소나무숲 삼림욕, 해수욕, 온천욕)을 함께 체험할 수 있다. 더불어 관동 8경 중 하나인 월송정과 명사십리의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망양정도 가까워 즐길거리, 볼거리가 풍성하다.
-검마산자연휴양림(영양군) 책 4000여 권의 숲속도서관 운영
-남해편백자연휴양림(남해군) 편백나무숲 산림욕, 나비더테마파크
-대야산자연휴양림(문경시) 문경 8경 중심부, 천연염색체험
-신불산폭포자연휴양림(울주군) 통행차량이 없는 고즈넉한 분위기
-운문산자연휴양림(청도군) 야생식물관찰원, 농경시대 귀틀집
-지리산자연휴양림(함양군) 토요 숲속야학, 한지체험관 운영
-청옥산자연휴양림(봉화군) 그린스쿨, 자연학습 체험 교육
-칠보산자연휴양림(영덕군) 금강송숲 탐방, 숲속 작은 음악회
-통고산자연휴양림(울진군) 3욕(삼림욕·해수욕·온천욕) 체험
◇ 충청도
충남 서부의 최고 명산으로 불리는 오서산 자락에 있는 ‘오서산자연휴양림’은 가족 단위 방문객이 편히 쉴 수 있는 휴양관과 물놀이장, 야영장, 숲속교실 등을 고루 갖췄다. 휴양림에 자생하는 대나무 숲을 거닐며 숲 해설은 물론, 활쏘기 투호 등 놀이체험과 목공예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희리산해송자연휴양림’은 산 전체가 해송(海松)으로 뒤덮인 희리산의 푸름을 만끽할 수 있는 명소다. 휴양림 수종의 95%가량을 차지하는 해송에서 피톤치드와 테르핀 성분이 다량 분비돼 삼림욕을 하기에도 제격이다.
-상당산성자연휴양림(청주시) 유아, 학생 대상 산림교육 프로그램
-속리산말티재자연휴양림(보은군) 휴양림 내 토속 식용·약용식물 자생
-오서산자연휴양림(보령시) 어린이물놀이장, 대나무숲 체험장
-용현자연휴양림(서산시) 백제 후기 문화유산·유적지 인근
-황정산자연휴양림(단양군) 황정산 암벽지대 소나무 군락 경치
-희리산해송자연휴양림(서천군) 해송 삼림욕, 솔방울 공예 체험
◇ 전라도
‘방장산자연휴양림’ 내 ‘에코어드벤처’에서는 숲속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동하면서 자연을 감상하는 친환경 레포츠 ‘집라인(zipline)’을 경험할 수 있다. 이외에도 편백나무를 이용한 비누, 문패, 액자 만들기 프로그램 등이 마련돼 있어 아이들과 함께 즐기기 좋은 곳이다. 낙안읍성민속마을 2km 지점에 자리한 ‘낙안민속자연휴양림’, 덕유산국립공원, 무주리조트 등과 가까운 ‘덕유산자연휴양림’, 변산반도국립공원에 위치한 ‘변산자연휴양림’ 등은 주변 관광지, 휴양지와의 접근이 편리하다.
-낙안민속자연휴양림(순천시) 낙안읍성민속마을 주변 경관
-덕유산자연휴양림(무주군) 야생식물관찰원, 반딧불이 관찰
-방장산자연휴양림(장성군) 에코어드벤처 친환경 레포츠
-변산자연휴양림(부안군) 모항해수욕장, 변산해수욕장 인근
-운장산자연휴양림(진안군) 휴양림 내 7km의 갈거계곡
-진도자연휴양림(진도군) 2017년 개장, 남도소리체험관
-천관산자연휴양림(장흥군) 휴양림 진입로에 동백·비자나무숲
-회문산자연휴양림(순창군) 유아·청소년 대상 ‘열려라곤충나라’
◇ 강원도
1989년 개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휴양림 ‘대관령자연휴양림’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 어우러진 대관령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휴양림 내 50~200년생 아름드리 소나무 숲 중 일부는 1920년대 인공으로 소나무 씨를 뿌려 조성해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다양한 목공예 프로그램을 즐기고 싶다면 ‘백운산자연휴양림’을 추천한다. 휴양림 내 ‘숲속공예교실’은 2013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로부터 지속가능한 발전교육(ISD) 공식프로젝트로 인정받았다. 또한 대한걷기연맹에서 지정한 ‘제1호 건강숲길’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가리왕산자연휴양림(정선군) 정선오일장(아리랑시장) 인근
-검봉산자연휴양림(삼척시) 오토캠핑장, 산림문화 프로그램
-대관령자연휴양림(강릉시) 숯가마를 활용한 체험·공예 프로그램
-두타산자연휴양림(평창군) 두타산 두근두근둘레길 탐방
-미천골자연휴양림(양양군) 휴양림 내 통일신라시대 선림원지
-방태산자연휴양림(인제군) 인근 내린천 래프팅 체험
-백운산자연휴양림(원주시) 숲속공예교실 문화 프로그램 특화
-복주산자연휴양림(철원군) 용탕골 계곡과 잠곡리 경관 수려
-삼봉자연휴양림(홍천군) 오대산국립공원 인근 활엽수
-용대자연휴양림(인제군) 다람쥐 등 다양한 야생동물 서식
-용화산자연휴양림(춘천시) 등산·캠핑 전문 산림레포츠 휴양림
-청태산자연휴양림(횡성군) DIY목공교실, 인도네시아전통전시관
그 선택은 누가 봐도 모험이었다. 준공무원급으로 평가받는 안정된 직장을 스스로 박차고 나와 산으로 들어갔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위험한 가장의 선택이었다. 그래도 그는 “조금 더 빨리 들어왔으면 어땠을까?” 하고 말한다. 경상북도 청송에서 만난 신왕준(申旺俊·53)씨의 이야기다.
신왕준씨가 고향인 청송 ‘부곡마을’로 돌아온 것은 2015년 3월. 선산이 있는 고향이라고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 상경한 후 청송은 그에게 명절 때 가끔 찾아오는 곳일 뿐이었다. 여생을 이곳에서 보낼 결심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연고가 없는 곳에 내려온 것과 다름없었죠. 이웃들의 얼굴을 익히는 것부터 자연에서 사는 법, 작물을 키워내는 방법 등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습니다.”
느닷없는 귀촌을 결심하게 된 것은 그가 다니던 산림조합중앙회의 직원 대상 명예퇴직 신청이 계기가 됐다. 막연히 인생 후반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고민하던 그에게 선산을 활용해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명색이 산림경영팀장이었으니까.
“가족과 상의 없이 명퇴신청서를 제출했어요. 당시 아내는 펄쩍 뛰었지만, 지금은 제 선택을 존중해주고 있어요. 아내도 자신의 삶이 있고, 저도 여기에서 완전히 자리가 안 잡힌 상태라서 주말부부처럼 지내고 있지만 함께 살 시기를 앞당기려고 노력 중이에요.”
자연 속의 삶, 현장에서 배우고 익혀야 한다
‘마을 주민’이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웃들과의 친분을 쌓기 위해 그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서울에선 중년에 속했지만, 주민들의 평균 나이가 60대 후반인 마을에서 그는 젊디젊은 청년이자 막내였다.
“동네에 가만히 있으면 하루에 한두 분 뵙기도 힘들어요. 아침에 눈뜨면 마을회관에 들러 일찍부터 나와 계신 할머니들에게 인사하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어요. 그리고 밭일을 돕기도 하고. 그렇게 얼굴을 익혀나가자 동네 주민 자녀들이 제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더라고요. 부모님에게 연락이 안 되거나 급한 일이 생기면 절 찾기 시작한 거죠. 그렇게 이곳 구성원이 됐어요.”
서울에선 산림경영 분야의 전문가 대접을 받던 그였지만 산은 ‘초짜’를 알아봤다. 명예퇴직 후 1년간 다시 전문 분야 수업을 들으며 귀촌을 준비했지만, 결국 현장에서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다.
“이론과 현실은 많이 다르더군요. 새로 배우면서 많이 반성했습니다. 또 노력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었죠. 올 초 가뭄이 심했을 때는 정말 아찔했습니다.”
그래도 서두르지 않고 체계적으로 준비한 것은 조금씩 성과를 냈다. 그가 제안한 산림복합경영단지 조성사업은 산림소득 사업공모에 뽑혀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았고, 이를 기반으로 밭이 아닌 산속에 자리 잡은 최초의 상업용 산나물 주말농장 청송 뫼살이 농장을 시작했다. 5평짜리 텃밭 90개를 분양해 일반인들도 쉽게 곰취나 잔대, 미역취 같은 산나물을 심고 수확할 수 있도록 한 농장이다. 수확된 산나물은 대신 팔아주기도 한다.
자연에서는 농사도 사업도 천천히 흐른다
서울에서 살던 그가 자연으로 들어온 후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는 ‘스트레스 없는 삶’을 가장 큰 변화로 꼽았다.
“제가 이 산의 대표이자 의사결정권자니까요. 계획한 대로 차근차근 실천해나가면 스트레스받을 일은 많지 않아요. 신선한 새벽 숲의 공기를 마시고,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산길을 산책하는 일은 정말 즐겁죠. 딱히 일이 없어도 정해진 시간에 숲으로 출근하는 것은 그 때문이에요.”
아직은 작은 농장에 불과하지만 이제 그의 꿈은 기지개를 펴고 있다. 먼 미래를 보고 계획을 세운 뒤 하나하나 진행 중이다. 산속에 전기를 들이는 일도 3년에 걸쳐 진행했다. 산농사는 초기 투자가 많고 수확을 하려면 2~3년 걸리기 때문이다.
“7만4000평 규모의 산에서 활용하는 땅은 5000평이 안 돼요. 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단순히 농작물을 심고 수확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에게 자연과 숲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체험공간을 제공하고 싶어요. 요즘 주목받는 야외활동인 오리엔티어링(orienteering, 지도와 나침반만을 이용해 목적지를 찾아가는 야외 스포츠)이나 라디엔티어링(radienteering, 지도와 나침반 대신 라디오를 지참하고 정해진 주파수에서 방송되는 안내에 따라 정해진 지점으로 이동하는 게임) 같은 서비스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자연으로 오셔서 맘껏 즐겨주세요(웃음).”
광고 속 회사원은 낙하산을 타고 나타난 과장 때문에 상한 속을 인삼으로 달랜다. 주말 예능 프로그램 연기자들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다 지치자 인삼을 찾는다. 또 인삼 관련 매장은 이제 공항 면세점 한쪽을 차지하게 돼, 과거와는 위상이 달라졌다. 이렇듯 인삼은 우리 생활과 아주 밀접한 건강식품이 됐다. 뿐만 아니다. 마트에서 판매되는 음료나 초콜릿 등에도 인삼은 단골 첨가물이 됐다. 피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이렇게 넘쳐나는 인삼을 우리는 제대로 알고 먹는 것일까?
도움말 본디올대치한의원 최철한(崔哲漢) 원장
먼저 인삼의 종류부터 알아보자. 인삼은 크게 생육 환경과 가공 방식에 따라 구분한다. 생육 환경에 따라서는 밭에서 인공적으로 키워낸 재배삼(栽培蔘), 산삼의 씨를 산림에 인공적으로 뿌려 키운 산양삼(山養蔘)과 장뇌삼(長腦蔘), 자연적으로 자라난 산삼(山蔘)이 있다. 가공 방식에 따라서는 가공하지 않은 생삼(生蔘)과 수삼(水蔘)이 있고, 껍질을 살짝 벗겨 햇볕에 건조한 백삼(白蔘), 생삼을 수증기에 쪄서 익힌 다음 건조시킨 홍삼(紅蔘)이 있다. 이밖에 찌는 대신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건조시킨 태극삼(太極蔘)도 있다.
인삼은 생으로 먹는 게 좋다?
서양의학을 공부한 일부 의사들 중 “인삼은 생으로 먹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가공 과정이 규격화되어 있지 않고 쉽게 확인도 어려운 상태에서는 차라리 날것 그대로 먹는 게 낫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인삼의 주성분인 사포닌(saponin)이 고열에 증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삼의 모든 효능이 사포닌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것. 단지 화학적 성분만으로 가치를 평가한다면 100년 묵은 산삼 대신 5년 묵은 인삼 여러 뿌리를 먹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인삼을 쪄서 홍삼이 되면 성분이 변화하는 것도 이들이 주장하는 이유다.
최철한 원장은 “실제로 수삼에는 20여 가지의 사포닌이 있지만, 이것을 찐 홍삼은 30여 가지의 사포닌이 있습니다. 찌는 과정 중에 새로운 사포닌이 만들어지는 것이죠”라고 설명한다.
그는 가장 보편적인 인삼의 섭취 방법으로 홍삼을 권했다. “홍삼이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인이 먹더라도 큰 문제가 없으면서 약효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섭취 방법은 가루나 고(膏)의 형태를 입에 오래 머물고 있다 삼키는 것이 좋습니다. 차로 먹을 때도 입에 오래 머금었다 드세요. 즉 입에 물고 있다가 침이 많이 나오면 그때 삼키는 것이 좋습니다.”
다양한 인삼 제품 모두 좋을까?
최근 인삼이나 홍삼 성분이 포함된 여러 종류의 제품이 시중에 출시되고 있다. 농축액은 캡슐 제품에서부터 스틱 형태까지 가공 가능한 종류는 거의 다 나와 있다. 그 대상도 갱년기 여성에서부터 성장기 청소년까지 다양하다. 심지어 홍삼 성분이 포함된 기능성 화장품과 애완동물용 사료도 있다.
일각에선 이러한 다양한 상품화가 결국 세대를 막론한 홍삼의 과용을 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실제로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이 인삼을 과다 복용할 때 인삼오남용증후군(ginseng abuse syndrome)과 같은 질환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가볍게 볼 문제는 아니다. 이 증후군은 고혈압, 불면, 피부발진, 설사 등을 유발한다.
최 원장은 지나친 상업화는 경계해야 하지만 약재에 있어 선악론은 있을 수 없다고 선을 긋는다. 효과가 없는 제품들은 자연스럽게 시장에서 사장되지 않겠냐는 것. 그는 “효과 없는 것은 없습니다. 효과가 적다면 양이나 복용 횟수를 늘리면 됩니다. 병든 그 사람에게 필요한 약재를 먹게 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물도 중요한 치료제가 될 때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장뇌삼은 전부 가짜다?
몇 년 전까지는 수긍할 수 있는 이야기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장뇌삼 등으로 불리던 것을 산림청에서 용어를 재정립하여 산양삼으로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산지관리법 제2조 제1호의 정의에 따르면, 산양삼은 산지에서 차광막 등 인공시설을 설치하지 않고 생산되는 삼(건조된 것을 포함)을 말한다. 산양삼은 임산물로 임업 및 산촌진흥촉진에 관한 법률에서 자연성·청정성이 보장되도록 관리되고 있다.
실제로 2007년 경상남도 함양을 시작으로 각 지자체별로 산양삼 생산이력제가 순차적으로 도입됐다. 이 제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재배 전 토양이 농약에 오염되지 않았는지 인증받아야 하고, 판매 전까지 주기적으로 농약 성분이나 중금속 검출 검사를 받아야 한다. 산림청등 관계 부처에서도 산양삼이 고부가가치 임산업 제품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계속하고 있다. 따라서 산양삼을 무조건 색안경 쓰고 볼 필요는 없다.
회사에서 매월 하루 오전시간에 두 시간 정도 시간을 내어 사무실 주변 청소를 한다. 기업의 사회봉사활동 차원이다. 근무시간에 하는 일이므로 엄격히 말한다면 회사가 임금을 주고 시키는 일이다. 예전에는 자발적이라는 이름으로 근무시간 전에 출근하여 이런 봉사활동을 했는데 이제는 개인의 인권이 신장되고 민주화가 많이 되었다고 느낀다.
예전에는 이런 유사하고 잡다한 일들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명령조로 시켰다. 학생들이나 직장인에게도 ‘저축의 달’이나 ‘불조심강조기간’이라는 리본도 달게 하고 표어, 포스타를 상금을 내걸고 만들게 했다. 쥐잡기 날 행사도 하면서 실적을 측정한다고 쥐꼬리를 잘라오게도 했고 식목일이면 나무 심는 사방사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사무실주변청소는 물론 교통질서 캠페인에도 동원되었지만 형식은 다 자발적이었다.
그래도 우리세대는 약과였다. 아버지세대에는 부역이라 하여 국가에서 아무런 금전적 보상 없이 길을 닦거나 풍수해재해방지의 목적인 산림녹화 사업에 주민을 동원시켰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참가하지 못하면 벌금까지 물어야 했다. 이런 일은 왕권시대는 더했을 것이다. 오랜 관습이다 보니 불평하기보다는 부역이라는 이름의 국가가 하는 일에 동원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모두들 인식하고 순종했다. 권력이라는 힘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군림하고 많이 배운 사람은 못 배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세상인 것으로 알았다.
우리나라는 4.19학생혁명을 계기로 민중이 지배계급에 반기를 들었다. 힘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 법의 사회를 갈망했다. 법이나 제도에 근거하지 않고 아무런 보상 없이 국가가 국민을 동원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인식을 국민들이 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힘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법치주의 사회가 되었다.
길에 담배꽁초나 쓰레기를 버리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있다.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한다. 이러한 법이 엄연히 있는데도 누가 버렸는지 알 수 없는 쓰레기기 길바닥에 나 뒹군다. 모르고 실수로 버린 것이 아니라 알면서 버린 것이다. 몰래버린 쓰레기 속에 양심까지 담아 던져 버렸다.
법을 집행한다고 쓰레기 투기자를 찾아서 벌금을 부과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다. 쓰레기를 뒤져 영수증이나 이름이 적힌 단서를 찾아야 하는데 인력이 소요되는 등 쉽지 않다. 자칫 빈대 한 마리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처럼 득보다 실이 많다. 이제 우리사회는 보이는 곳에서 움직이는 법치의 사회에서 아무도 보지 않아도 스스로 행하는 양심이 지배하는 사회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배고파하는 사람에게 밥을 주고 목말라하는 사람에게 물을 나누어주는 것은 법에 없는 일이다. 약자를 돌보지 안 했다고 법적인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약자를 돌보는 이런 선량한 양심이 없으면 세상은 법은 지켜지지만 도덕과 윤리가 없다면 약자의 저주와 반항이 일어나고 세상은 삭막해진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쓰레기를 던져버리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속일 수 없는 자신의 양심이 지켜보고 있다. ‘깨진 유리창 이론’이라고 쓰레기가 있는 곳에 쓰레기는 더 쌓인다. 내가 깨끗이 치워 놓으면 남들이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 우리들 스스로 양심을 쫓아 질서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기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고 정신없이 살았다. 격동의 시기 경쟁사회에서 주어진 틀에 맞춰 살다 보니 자기 인생을 살지 못했다. 정답과 정해진 틀이 있다 생각하며 살았다. 주위 시선을 의식하고 세속적 성공에 집착해 살다 보니 행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남의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기로 했다. 물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우선으로 살핀다. 너무 편하고 자유롭다.
◇하고 싶은 일 바로 실행하기
남을 우선으로 배려하다 보니 자신의 일은 미룰 때가 많았다. 이제는 자신한테 쓰는 돈을 아끼지 않겠다. 일이나 취미활동도 열심히 하겠다. 얼마 전에 산림치유지도사, 바리스타, 고미술 감상 등의 과정을 이수했다. 해외여행도 1년에 한두 번을 간다. 그동안 무심했던 자신에게 선물도 주고 투자도 하겠다. 나 자신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존재다. 자꾸 “다음에” 하면서 순서를 늦추다 보면 영원히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바로 실행하자.
◇내면이 이끄는 대로 살기
바쁘게 살면 놓치는 것들이 많다. 느리게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자신의 속도에 맞추면 된다. 이제 세속적 지위에 집착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높이 올라가도 결국 내려올 수밖에 없다. 빛이 강하면 어둠도 깊다. 기회가 주어지면 일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자. 내면이 이끄는 대로 살아보자.
◇실수 두려워하지 않기
실수가 두려워 완벽함을 추구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많았다. 누구든 실수를 한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 하나의 환상일 뿐이다. 이제는 실수에서 자유로워지기로 했다. 부담을 덜어내면 의외로 뜻밖의 결과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시도해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실수를 해도 그것을 빨리 수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으면 된다. 절창 앞에서 노래도 불러보고 고수 앞에서 재주도 부려보자. 배짱 좀 부려보면 어떤가.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면 된다. 고수도 처음부터 고수는 아니었다.
◇나만의 양탄자 짜기
살아오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생각대로 안 되는 것이 세상일이다. 인간관계에서 원칙을 지키느라 쓰라린 고통도 당하고 손해도 많이 봤다. 남에게 피해를 주느니 차라리 필자가 당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니 이제는 충분히 사랑받고 배려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책은 그만두자. 자기 긍정이 중요한 나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배려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다. 잘나가는 상대를 모방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결국 자신의 양탄자를 짤 수밖에 없다. 자신만의 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마음을 비우니 너무 편하다.
사계절마다 특색이 있듯 인생의 각 시기도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중년과 노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겉은 비록 낡아가도 보이지 않는 속은 날마다 새로운 모습이다. 세상의 이치와 진리를 지속적으로 깨닫기 때문이다. 관조와 여유는 젊은이들이 흉내 낼 수 없다. 쉬지 않고 공부를 하며 내면을 가다듬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열심히 자신의 길을 정진한 사람에게서 풍기는 자신감과 여유가 아름답다. 멋있게 나이가 들고 주어진 시간 최대로 즐기면서 이 세상 여행을 마치고 싶다.
파주시 법원읍 금곡리에 자리 잡은 쇠꼴마을. 소 먹이를 주던 곳이라는 뜻을 가진 쇠꼴마을은 김교화씨가 수년간 공을 들인 복합체험농장. 원래 목재사업을 크게 하던 김씨는 사업을 큰아들에게 물려주고, 둘째 아들과 고향에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고향인 이곳에 조금씩 땅을 마련한 지는 꽤 오래됐어요. 몸이 불편한 여동생을 위해 1979년에 땅을 사서 소를 몇 마리 키우도록 했어요. 목부도 고용하고요. 그러다 나무를 심으면 좋다고 해서 땅을 사서 밤나무도 심고, 배나무도 심고 그랬어요. 배하고 사과는 수입이 안 된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심기 시작했죠.”
그러다 본격적으로 쇠꼴마을 사업을 시도한 것은 2001년. 주말농장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배나무에선 배가 주렁주렁 열리는데 문제는 판로였어요. 고민을 하다 배를 살 손님을 끌어모으면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서울의 유명 백화점에서 VIP 고객을 대상으로 체험형 주말농장을 시도했죠. 그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억만송이 배꽃축제’와 같은 다양한 행사를 주최했어요.”
이것이 쇠꼴마을이 체험형 농장으로 변신한 계기가 됐다. 행사를 하다 보니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고, 아이들이 더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했다.
“칠순 기념으로 태국 체험형 여행 프로그램을 경험하게 됐는데, 아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있더라고요. 이거다 싶었어요. 당장 한국에 와서 아이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죠. 요즘 아이들은 스마트폰과 컴퓨터에 갇혀 자연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하잖아요. 인성교육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산림조합에서 김교화씨의 쇠꼴마을을 인정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6차산업, 그러니까 임산물을 생산하는 1차산업과 그것을 가공하는 2차산업, 여기에 유통, 관광, 교육사업을 접목한 3차산업이 한자리에서 모두 이뤄지기 때문이다.
현재 김교화씨의 쇠꼴마을은 7만 평이 넘는 면적에 배나무 과수원과 배즙 등을 만들어내는 가공시설이 갖춰져 있고, 다른 한쪽에는 뗏목타기, 전통농업·문화체험, 농·임산물 수확체험 등을 할 수 있는 시설이 들어서 있다. 현재 쇠꼴마을을 찾는 학생 수는 1년에 약 1만 명 정도나 된다고 한다.
김씨는 “2001년 이태원의 여름농민대학을 다닌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농수산대학, 농촌사랑지도자연수원 등 관련 교육을 한 해도 빠짐없이 다녔어요. 덕분에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 같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귀산촌을 준비하는 동료들에게는 당부의 말도 남겼다.
“기본적으로 산에서 일하려면 재력과 땅, 건강이 확보되어 있어야 합니다. 규모가 작으면 결과를 만들어내기 어려워요. 여기에 다른 사람의 경험, 성공사례 등을 벤치마킹할 수 있어야 해요. 사업적인 부분은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요. 특히 행정적인 부분은 현실적 괴리가 있을 수 있으니까 필수적인 사전 점검을 강조하고 싶어요.”
“산에 들어가 살아야지.” 중년이라면 한 번쯤 무심코 내뱉어봤음직한 말이다. 산속에서 사는 것을 상상해보면 멋진 영화의 장면들이 오버랩된다. 새벽의 신선한 찬 공기와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볕. 통나무집 식탁 위에 차려진 신선한 음식. 상상만 해도 뿌듯하다. 하지만 실제로 그럴까? 현장의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귀산촌은 냉정한 현실이라고. 영화 같은 낭만과는 거리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귀산촌이 갖는 매력은 분명히 있다. 제대로 알고 도전한다면 귀농보다 더 다양한 재미를 느끼며 살 수 있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귀산촌을 알기 위해서는 개념부터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귀산촌은 다른 업종에 종사하던 사람이 사유림을 구매하거나, 갖고 있던 사유림을 활용해 임업에 종사하며 새로운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귀산촌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사유, 즉 내 산(山)이다. 기존에 임업을 하고 있지 않는 이상 귀산촌과 관련한 다양한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은 산주가 되는 것뿐이다. 산에 들어가서 사는 것을 생각해보자. 산 깊숙한 곳에 들어가 움막이나 텐트를 짓고, 수렵이나 채집을 하며 원시인에 가까운 생활을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산에서 생활하며 올릴 수 있는 소득과 내가 살 집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다행히 이런 고민, 특히 소득과 관련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이 있다. 바로 산림조합이다. 농촌에 농협이 있고, 어촌에 수협이 있는 것처럼 산에는 산림조합이 있다. 한때는 임업협동조합, 임협으로 불렸던 기관이다.
산림경영계획과 정부의 다양한 지원책
임업 분야에선 산을 활용해 수익을 내는 행위를 ‘산림경영’이라고 말한다. 내 땅을 어떻게 가꾸고, 어떤 사업을 통해 수익을 내고, 어떤 시설을 지을지는 자유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땅의 종류에 따라 건축물을 지을 수 없는 경우도 있고, 비닐하우스와 같은 생산 시설도 허가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또 국가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지원을 받으려면 산림경영계획이 필요하다. 또 전문가도 아니면서 계획 없이 무턱대고 덤비다가는 수익은커녕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전문가들이 귀산촌을 위해 땅을 사기 전에 미리 임업 전문가와 산을 둘러보고, 가치가 있는지, 어떤 사업이 적합한지 조언을 받으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산림조합중앙회 선도산림경영지도 팀의 민도홍 팀장은 귀산촌에 필요한 준비 과정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산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계획을 수립하게 되는데 그것을 산림경영계획이라고 불러요. 10년 단위로 수립한 산림경영계획을 산림청에서 인가받게 되면 산립사업비 보조나 융자를 지원받고 소득세, 상속세, 증여세, 재산세 등을 감면받을 수 있어요. 숲을 사업적으로 가치있게 만드려면 솎아베기와 같은 준비 작업이 필요한데, 산림경영계획을 인가받으면 정부와 지자체 지원만으로 할 수 있게 돼요. 이 밖에도 다양한 지원책들이 있는데, 결국 혜택을 받아 사업을 진행하려면 산림경영기술자의 도움을 받아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좋습니다.”
임업을 통해 수익을 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나무를 심은 뒤 목재가 될 만큼 자라면 벌목해 판매하는 것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관련 법규상 벌목할 수 있는 시기는 수종에 따라 30년에서 40년이 걸린다. 게다가 수익도 그리 크지 않아, 1ha당 200만~300만원 수준이다. 전문가들이 ‘부수익’이라 말하는 이유다. 두 번째는 버섯이나 나물 등 단기 소득 작물을 키워 판매하는 것이다. 산지축산이나 양계도 수익 방법이 될 수 있다.
최근 정부와 산림조합에서는 농·임업인들의 소득 확대를 위해 6차산업 육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임산물이 생산되면 이것을 단순히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부가가치가 생겨날 수 있도록 가공하고, 그 과정을 체험관광 형태로 관광객들에게 공개하는 방식이다. 체험형 농장이나 숲해설 프로그램, 숙박을 결합한 레저 프로그램 등 다양한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땅을 살 때 고민해야 하는 것들
내게 어떤 임산업이 맞는지,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를 충분히 고민했다면 땅을 알아볼 차례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임지를 구매할 때 ‘경매’를 통한다. 경매 물건을 둘러보다가 괜찮은 땅이 나오면 누가 먼저 가져갈까봐 급한 마음에 덜컥 구매 결정을 내려버리기도 한다. 파주시 산림조합의 백철종 팀장은 가격만 보고 땅을 결정하는 것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잃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간혹 어떤 땅인지, 거기서 무엇을 할지 구체적인 고민도 없이 땅을 사시는 분들이 있어요. 평당 몇 만원이라면 공짜나 다름없다면서 말이죠. 하지만 이런 기준으로 땅을 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땅을 사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맹지(길이 없는 땅), 골짜기 같은 땅이었다며 후회하는 사람들도 있죠. 반대로 잘 알아보고 산다면 지적도 상에는 길이 없지만 실제로는 이전할 일이 없는 군부대가 사용하는 길이 있어 사실상 활용에 문제가 없는 경우도 있죠. 결국 본인이 현장을 충분히 확인하고, 그 땅을 사서 무엇을 할 것인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그는 귀산촌을 위해 땅을 알아보고 있다면 여러 후보지를 놓고, 그 지역 산림조합을 찾아 전문가의 조언을 듣는 것이 좋다고 충고했다. 예를 들어 도시에서 내려오는 경우는 농가주택과 주차장 부지도 함께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평균 경사도 18° 미만의 준보전임지가 좋고, 그렇지 않다면 약간의 농지가 붙어 있는 임지가 적절하다고 말했다.
도시생활 방식 답습하면 실패
정착도 문제가 된다. 귀산촌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산속에 나 홀로 사는 삶이 아니다. 결국 기존의 거주민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사느냐가 귀산촌의 성패를 가름한다. 거주민과의 불화는 전문가들이 꼽는 귀산촌 첫 번째 실패 이유다. 백철종 팀장은 거주민과의 조화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마을과 붙어 있는 산은 그 마을의 공동 소유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해요. 그런데 어느 날 산을 샀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가장 먼저 하는 게 측량이에요. 여기까지가 내 땅임을 확실히 구분하고 싶으니까요. 그러고는 울타리를 세우고 CCTV까지 달아요. 그러니 곱게 보기 어렵죠.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잘 지내면 그들이 울타리가 되고, CCTV가 되어줍니다. 임산물로 소득을 올리는 과정도 마찬가지예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조합 작목반에서 공동으로 활동하면 국가의 생산지원 예산배정 순위가 빨라지고 판로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서 활동하면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해요.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죠.”
표고버섯 농사를 예로 들면 경작을 위한 원목부터, 비닐하우스 시설, 포장디자인 지원, 차량 구매, 건조시설과 저장창고까지 국고 지원과 융자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지역마다 배정된 예산이 한정되어 있고 우선순위가 있어 지역 내에서의 활동이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수익은 어떨까? 민도홍 팀장은 산으로 얻는 수익은 유·무형의 것을 다양한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떼돈을 벌 목적이라면 귀산촌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리를 잡고 어느 정도 노력을 기울이면 일정 수준 이상의 수익도 가능하고 실제로 고소득을 올리는 분들도 적지 않아요. 은퇴자들 입장에선 등산이나 휴양을 즐길 수 있는 환경적 요인, 나무와 같은 후대에 산을 활용할 수 있는 가치, 산림을 개발해나가는 보람 등을 고려하는 것이 좋습니다.”
인간은 언제부터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해온 것일까요? 나라는 존재는 상대가 없으면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개념인지도 모릅니다. 그 상대적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성찰함으로써 나의 독자성, 개별성을 알게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 시조에 재미있는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누가 지은지 몰라 무명씨 작으로 돼 있습니다. “내라 내라 하니, 내라 하니 내 뉘런고/내 내면 낸 줄을 내 모르랴/내라서 낸 줄을 내 모르니 낸동 만동 하여라.”
이 시조에는 ‘내’가 아홉 번, ‘낸’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언어유희 같기도 한 말을 통해 자아에 대한 탐구의 진지성을 알게 해줍니다.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이 의문이 무명씨의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우리 옛시조에 이렇게 자아를 탐구한 작품이 있다는 게 자랑스럽고 다행스럽습니다. 수직적 질서와 순종적 윤리 덕목에 의해 유지되던 왕조시대에는 나에 대한 자각, 개인의 자유와 독자성에 대한 인식이 계발될 수 없었습니다. 두드러지는 개별적 자아는 장려되기는커녕 오히려 모진 수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표암 강세황(1713∼1791)의 69세 때 자화상(1782년)에는 이런 화제(畵題)가 씌어 있습니다. “저 사람이 누구인가. 수염과 눈썹이 하얗구나. 머리에 오사모를 쓰고 야인의 옷을 입었네. 이것으로 알 수 있지. 마음은 산림에 있지만 이름은 조정에 오른 것을…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스스로 낙을 찾아 즐길 따름일 뿐.”
표암의 모습은 갓 쓰고 자전거를 타거나 트레이닝복 차림에 베레모를 쓴 격입니다. 자화상이 이렇게 특이한 이유는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산림에 은거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그는 집안이 몰락해 초야에 묻혀 살면서 서화로 이름을 날리다 60세가 넘어 영조의 배려로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명문가 출신이 벼슬 욕심이 없을 리 없었지만 막상 벼슬살이를 해보니 다시 산림이 그리워진 것입니다. 한 화면을 통해 드러난 두 마음은 이율배반이나 이중성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인간감정의 발로라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상(1910~1937)의 시 ‘거울’은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다,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다, 거울 속의 나는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왼손잡이다, 거울 속의 나는 참 나와는 반대지만 또 꽤 닮았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다” 등의 말이 이어집니다.
이런 현대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옛글에서도 자신을 들여다보는 작품을 쉬 볼 수 있습니다. 자화상에 마음을 부치기도 하고 거울 속의 자신과 대화하거나 죽음을 앞두고 삶을 차분히 정리하기도 합니다. 참된 나를 찾는 모습은 자만(自挽) 자명(自銘) 자전(自傳) 자지(自誌) 자찬(自讚) 등 다양한 문체를 통해 드러납니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살다 간 선비 홍길주(1786~1841)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도 그런 글입니다. “나는 자네와 일심동체일세”라고 말을 걸기 시작한 이 글은 자신의 독서 경향을 질타하고 경계하면서 반성을 촉구하더니 “내가 자네와 함께 도에 나아갈 수 있다면 아주 큰 행운이겠네”라고 말합니다. 요즘 말로 쉽게 이야기하면 청언소품(淸言小品), 즉 짧고 감성적인 에세이만 즐겨 읽으려 하는 자신에게 “그러지 말고 사서삼경 등 고전으로 돌아가라”고 일깨우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교훈적이고 딱딱한 고전만 읽을 수 있겠습니까? 밥도 먹고 군것질도 해야 하고 술도 마셔야지요.
그런데 홍길주가 살던 시대는 청언소품이 크게 유행해 글쓰기 방식마저 달라지는 바람에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으로 지식인들을 윽박지르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기분열과 갈등의 문장, 남들에게 자신의 ‘알리바이’를 밝히는 글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재미있다기보다 딱하고 안타까운 글입니다.
다시 현대로 돌아와 김광규의 시 ‘나’의 전문을 읽어봅니다.
“살펴보면 나는/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나의 아들의 아버지고/나의 형의 동생이고/나의 동생의 형이고/나의 아내의 남편이고/나의 누이의 오빠고/나의 아저씨의 조카고/나의 조카의 아저씨고/나의 선생의 제자고/나의 제자의 선생이고/나의 나라의 납세자고/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나의 친구의 친구고/나의 적의 적이고/나의 의사의 환자고/나의 단골술집의 손님이고/나의 개의 주인이고/나의 집의 가장이다.//그렇다면 나는/아들이고/아버지고/동생이고/형이고/남편이고/오빠고/조카고/아저씨고/제자고/선생이고/납세자고/예비군이고/친구고/적이고/환자고/손님이고/주인이고/가장이지/오직 하나뿐인/나는 아니다//과연/아무도 모르고 있는/나는/무엇인가/그리고/지금 여기 있는/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나는 무수히 많고, 모순되기도 하고, 다 아는 것 같아도 아무도 모르는 존재입니다. 더욱이 이걸 하고 싶은데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고, 이렇게 행동하고 있지만 속마음은 정반대인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경험하며 삽니다. “차가운 진실보다는 따뜻한 기만이 낫다”는 말도 갈등을 느끼게 합니다. 제도와 규율 때문이든 체면과 위신 때문이든 자신을 절대적으로 속이지 않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와 나의 화해 또는 통일이며 나와 남의 조화입니다.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 “군자는 남과 함께 어울리되 같지 않지만 소인은 남과 같은데 어울리지 못한다”는 논어의 말도 이런 조화를 강조하는 것이겠지요. 이 말이 나와 남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면 文質彬彬 然後君子(문질빈빈 연후군자), “겉과 속이 함께 빛나야 군자”는 나 자신의 조화와 균형의 중요성을 알게 해주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는 나는 남이 아는 나와 다르고, 내가 아는 남은 남이 아는 남과도 다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알기는 참 어렵습니다. 자기보다 큰 적은 없다고 합니다. 중국 송 나라 때의 보제(普濟)선사는 “나 말고 누가 나를 괴롭히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것도 나, 나를 망치는 것도 나입니다. 그러니 자기부터 이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논어에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라”는 극기복례(克己復禮)가 나옵니다. 노자 도덕경 3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로울 뿐이지만 자신을 아는 자라야 명철하다. 남을 이기는 자는 힘이 센 데 불과하지만 자기를 이기는 자라야 진정한 강자이다.”[知人者智 自知者明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남을 아는 것은 상대적 분별이지만 스스로를 아는 것은 절대적 자각입니다. 바로 이 절대적 자각을 탐색하고 궁구하는 것이 인류역사이며 사상사의 발전이 아니겠습니까?
한 해가 바뀌는 시점에는 누구든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지나온 일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삶을 위한 다짐에는 ‘자지자명(自知者明)’의 가르침이 절실합니다.
그런 자지자명의 반성으로 이제 ‘BML 칼럼’을 접으려 합니다. 2년 동안 서투르고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길이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해묵은 손때’를 떠나보내려 합니다.
>> 임철순(任喆淳)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시니어희망공동체 이사장.
여기 우리나라 맞아? 원대리 자작나무 숲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북유럽이나 백두산 처럼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자작나무가 인제의 한 산골짜기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자작나무 숲으로 가려면 원대리에 있는 원대산림감시초소에서 인적사항을 기재하고 임도를 1시간 정도 올라가야 한다. 자작나무 숲에 도착해 보면 발품판 것이 억울하지 않을 테니 즐거운 마음으로 오르자. 임도는 콘크리트 포장도로와 흙길이 번갈아 이어진다. 길 양 옆으로 활엽수가 울창하여 가을에 단풍이 들면 멋지다.
계절에 따라 꽃구경, 단풍구경, 눈 구경을 하며 1시간쯤 산을 오르면 왼쪽에 아이를 품은 여인을 형상화한 목각상이 보인다. 목각상에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목각상 너머로 새하얀 몸통을 지닌 자작나무 숲이 펼쳐진다. 입은 닫고 마음은 연채로 대나무처럼 곧게 뻗은 자작나무들 사이로 걸어 들어간다. 앞선 사람들이 울창한 숲으로 빨려 들어가듯 금새 사라지고 만다.
자작나무는 껍질이 탈 때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고 하여 자작나무라 불린다. 플라타너스처럼 생긴 잎을 밟을 때도 자작소리가 난다. 걷다가 자작나무 벤치가 보이면 그곳에 않아 눈을 감아 보자. 나뭇잎 사이로 비껴드는 햇살이 새하얀 수피에 반사되어 눈꺼풀 위로 아른 거린다. 바닥에 누워 따사로운 볕이 얼굴을 간질이는 느낌도 느껴보자. 한참을 누워 있어도 조급한 맘이 들지 않는다. 시간은 숲 안에서 정지되고 바닥에 누인 팔다리는 나무뿌리가 되어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이곳은 휴대전화 조차 터지지 않는 두메산골이라 나만의 시간을 방해하는 이도 없다.
자작나무는 수피가 하얘서 겨울에는 더욱 눈부시다. “숲의 여왕”이란 애칭을 갖고 있는데 겨울에는 “눈의 여왕”이라 부르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코발트 불루빛 하늘을 향해 하얀가지를 뻗어 올린 모습은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며, 가을엔 황금 빛 단풍이 가슴을 뛰게한다. 사계절 아름답지 않은 때가 없으니 이 숲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테레사 수녀의 통신에 따르면 ‘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다. 덧없고 허무한 게 삶이라는 얘기다. 과연 그렇지 않던가? 부평초처럼 떠돌다 허둥지둥 저승에 입문하기 십상인 게 삶이다. 그저 따개비처럼 견고하게 들러붙은 타성의 노예로 간신히 살다가 파장을 보기 쉽다. 어이하나? 저마다 나름의 대책과 궁리가 있을 터인데, 백발의 사진가 이종원씨(72)는 산골로 들어가는 일을 방책으로 삼았다.
내내 도시에서 살았던 그는, 인생의 다양한 골목골목을 편력했다. 공무원으로, 사진가로, 교수로, 언론인으로 뛰며 존재를 돋우길 거듭했다. 때로는 돌부리에 걸려 엎어지거나 뒤집어졌으나, 특유의 깡과 오기를 발동한 나머지 얻은 것도, 이룬 것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이, 마음은 늘 산골의 자연으로 향했다. 나 마침내 산중에 살리라! 그런 작심을 무시로 다지며 근 20년쯤을 고민하고, 모색하고, 탐색했다. 내가 발붙일 곳이 어디냐, 하며 여기저기 국토의 많은 곳을 훑었다는 게 아닌가.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에, 마침내 귀촌을 결행했다. 더 미룰 수 없는 결정적인 상황 때문에. 그가 애지중지하는 아내 이현숙씨(70)가 중병에 걸렸던 것. 두 종류의 암에다가 당뇨병까지 겹쳤으니 위중한 형편이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산골에서 요양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딱히 모아 둔 자금이라는 것도 없었지만 일을 서둘렀다. 그렇게 해서 옴팡지고 외지고 수려한, 충북 보은 땅 팔메실의 산골짝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제가 말이죠, 사진 장르 중에서도 생태사진, 특히 곤충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라는 1시간짜리 영화를 만들어 각광을 받기도 했지요. 그러면서, 생태사진을 실컷 찍으며 살아갈 수 있을 만한 산골을 갈망하고 찾았어요. 그러던 차에 아내가 중한 병에 걸린 겁니다. 뜸 들일 수가 없었어요. 용케 제가 원하던 산골을 찾아냈고, 곧바로 귀촌을 감행했어요. 모든 것을 다 내려놔야겠다는 생각으로, 갖고 있던 방대한 서적과 자료들까지 다 불 질러버리고,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겠다는 심정으로 산골에 들어왔어요. 아내에게 참회하기 위해서였죠.”
“그토록 참회할 게 많았어요?(웃음)”
“많았죠. 제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무모하게 확 저지른 일들도 많았고, 사기를 당해 곤경에 빠진 일도 있었고, 우쭐대기도 했고, 마누라로서는 참 힘들었을 겁니다. 이제부턴 아내의 병 치료를 위해 순수한 남편 노릇을 해야겠다, 올인해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산골살이를 시작했어요.”
“맘먹은 대로 됐나요?”
“노력한 만큼의 좋은 결과가 왔어요. 귀촌 이후 제가 살림살이를 도맡다시피 했어요. 가령 밥 짓고 국 끓이는 일을 전담했죠. 세상의 거의 모든 아내들은 남편을 위해 사오십 년을 뒷바라지하는데, 그 노고에 보답해야 하지 않겠어요? 적어도 10년쯤은 남편이 가사와 살림을 맡아 빚을 갚는 게 도리라 봅니다. 여하튼, 산골에 살면서 아내의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언젠가 작가 이외수에게서 들은 얘기가 있다. ‘우리 부부는 부부애가 아니라 전우애로 살았다!’ 아내란 사랑스러워 꽃향기를 뿜기 마련이다. 하지만 서방들은 흔히 교만과 방심을 일삼아 숱한 실수를 반복한다. 급기야 맹숭맹숭한 관계로 추락하거나 왕따를 자초한다. 어쩌면 세계평화보다 구현하기 어려운 게 부부간의 화평이다. 그러나 이종원씨는 귀촌을 통해 부부애를 고양했으니 이게 경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은, 귀촌 이후의 이종원을 두고 이런 논평들을 한단다. 당신, 새사람이 됐구먼.
집 앞 계곡에 수력 발전기까지 설치해
월든 호숫가 숲 속에 살았던 H.D소로는, 강인한 스파르타인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산골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투의 얘기를 했다. 사실 귀촌이란 낙원으로의 입장 같은 것과는 다르다.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선 응분의 고군분투가 따라야 한다. 이종원 역시 진땀과 비지땀, 팥죽땀을 쏟아야 했다. 솔바람과 꽃향기 그윽한 산중에서 오붓하게 누릴 수 있을 법한 한가한 풍류나 낭만은 오랫동안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냇물이 돌돌돌 흐르는 산자락 둔덕에 터를 잡은 직후 지프차 안에서 잠을 자며 산골살이를 시작했다. 그 얼마 뒤엔 140만원을 주고 중고 컨테이너를 구입해 거처로 삼았다.
“땅은 샀으나 집이 없어서 집을 지어야 했어요. 아내와 함께 컨테이너에서 살며 어떻게 집을 지을 것인가, 궁리하고 설계하고, 나무를 심고 텃밭을 일구고, 그런 뒤에서야 집짓기에 착수할 수 있었어요. 힘든 시절이었죠. 이게 왜 이렇게 됐는가 하면,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제가 말이죠, 평생 돈 욕심 없이 살았는데요, 그럼에도 일을 늘 저질렀고, 결국은 성사시키고 그랬어요.”
“뚝심으로?”
“부단히 노력하는 근성으로.”
“이곳의 터전은 호방한 맛이 있고, 무엇보다 선생의 집이 보기에 좋아요. 주변의 자연과 소박하게, 겸손하게 조화를 이룬 구색이라서.”
“제가 손수 지은 집입니다.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 집을 지을 수 있을지, 자나 깨나 연구를 많이 했어요.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했으나 시원한 답이 나오질 않더라고. 돈을 덜 들이고 좋은 집을 짓는다는 게 사실상 이율배반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그러나 밀어붙였어요. 내 손으로 집짓기의 모든 걸 감당하자는 작정을 하고서 말이죠.”
“건축에 문외한이었던 사람이 단독으로 127㎡(38평)짜리 집 한 채를 손수 지은 거예요?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죠?”
“소소하게 남들의 일손을 빌린 대목들이 있긴 하지만 거의 저 혼자 지은 집입니다. 미리 뒷산에 올라 나무를 베어다가 말려 기둥을 쓸 목재를 준비하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아울러, 건축 시공 현장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견학했고, 관련 책자들도 철저하게 독파했죠. 집의 설계 과정에선 아내의 의견을 100% 수용했습니다. 제가 원래 과학적인 성향과 재간이 좀 있는데요, 공부하고 연구한 건축 지식들을 토대로 상·하수도 배관, 정화조 설치, 전기 작업 등등 중추가 되는 공정들을 전부 혼자 해냈어요. 그러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귀촌 4년 만에 착공을 했고, 이후 7년 세월을 이 집에서 만족스럽게 살아왔지만, 외벽 단장이라거나 아직도 미완성된 부분이 남아 있어요.”
“집을 지으며 염두에 둔 지향이 있었겠죠?”
“에너지 자립형 주택을 짓자는 게 목표였어요. 그게 상당히 성공적으로 구현되었어요. 단열을 철저히 하거나 태양열을 이용해 전력 소비를 줄이자는 것, 차가운 냇물을 끌어들여 냉방을 하자는 것, 그런 것들이죠. 집 앞 계곡에 수력 발전기를 설치하기도 했어요. 아직은 완성되지 않아 가동을 못 하고 있지만, 조만간 가동시킬 작정입니다.”
“수력 발전기까지? 놀랍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렇게 많은 일들을 손수 해치운다는 게 너무 버겁진 않으세요? 그저 적당히 대충 작은 집을 지어 몸 고생을 더는 게 낫지 않나?(웃음)”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탕진이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 집 짓다가 사람이 죽기도 한다던데, 그게 실감이 나더라고.(웃음) 그러나 뭐든 끝장을 보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서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육체노동으로 스트레스를 풀어
장기간의 노역을 통해 근사한 집을 지은 그는 농사도 꽤 많이 짓는다. 몇 해 전에 구입한 6만6000㎡(2만 평)의 임야에 약초를 재배하기도 한다. 예사로운 힘이 아니다. 집념, 또는 깡. 이종원씨의 내부엔 그런 성분이 가득한 것으로 보인다. 살아온 날들의 굴곡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살아갈 날들의 꿈과 상상을 실현하기 위해 산골에서 새로운 기반을 닦아가는 사람의 온몸에 박혀 있는, 짱짱한 패기. 그걸 열정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니 고희를 넘긴 이종원은 여전한 열혈 청년이다. 나로 말하자면, 이왕지사 인생의 늘그막에 조용하고 평온한 산림에 몸을 들였다면, 누추한 산방에서나마 가급적 한가하게 노닥거리며, 이를테면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먼 곳의 벗을 불러들여 한잔 착실하게 걸치는 식의 도락을 누리며 느긋하게 사는 게 흐뭇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종원씨에 따르면, 유유자적이란 가당치 않은 물건이다.
“시골생활에서 유유자적이라는 게 가능할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집이나 터를 작게 잡아 살아갈 경우엔 여유를 부릴 수도 있겠고, 사실은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저의 경우처럼 일을 많이 벌인 귀촌자들은 온몸으로 투신해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게 마련이에요. 그런 상황을 자청해서 뛰어든 사람에게 그게 고역이랄 것도 없고 말이죠. 저는 육체노동을 아주 좋아합니다. 일상의 스트레스를 노동으로 풀고 있어요.”
“산골생활의 즐거움이 노동에 있는 거예요?”
“제가 말이죠, 일을 안 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습니다.(웃음) 그렇다고 일만 아는 일벌레로 오해는 마시라. 저 역시 자연이 주는 기쁨과 행복에 충분한 즐거움을 누리며 사니까. 원했던 일을 실현해 나가고 있다는 성취감! 그게 무엇보다 큰 즐거움이고 말이죠.”
“선생께서는 산골에 살며 실컷 생태사진을 찍고 싶다 했어요. 그 점에서도 많은 성취가 있었나요?”
“사진가가 사진 작업을 하는 건 날마다 밥을 먹는 일처럼 일상이지 않겠어요? 저에겐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귀촌 귀농에 관한 책, 사진이론에 관한 책, 한국의 자연 풍경을 집대성한 도감, 이 세 가지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이곳에 사진박물관을 만들어 문화적 공간으로 가꿀 계획도 포기할 수 없고 말이죠.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미적 가치를 승화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겁니다.”
박물관까지라니. 웅장한 포부렷다. ‘늙음’은 때로 ‘낡음’일 수 있다. 그러나 안일하고 범속한 매너리즘을 거부한 채, 산골에서 기운 찬 숫말처럼 양양하게 뛰는 이종원씨는 낡음을 허하지 않는다. 아직은 미완인 게 많지만.
>>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