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의 선택은 보통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되기도 하지만 영화나 책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세상의 수많은 장소 중 하필 그곳이 선택된 데는 그만한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로 더 많이 알려진 울루루(Uluru)는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한 소녀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꼭 가고 싶어 했던 꿈의 장소로 나온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오랜 세월이 지나 연인이 혼자 찾아온 울루루는 시간이 가져다준 무게만큼의 황량함과 상실감을 안은 채 뭔가 허무의 기운마저 자아내는 듯했다. 떠난 소녀의 갈망을 대신 풀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매해 백만 명이나 되는 전 세계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온다.
아프리카보다 더 거칠고 혹독했던 땅, 호주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 여행기’에서 저자는 “오스트레일리아 내륙 지방에 대해 과장이란 있을 수 없으며 19세기 탐험가들이 느꼈던 표현할 수 없는 더위와 끊임없는 물 부족, 고난은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한다. 멜버른에서 시작해 그레이트오션로드, 애들레이드, 앨리스스프링스를 거쳐 울루루를 탐험한 뒤 서호주의 주도 퍼스, 몽키마이어, 웨이브록, 프리맨틀을 거치는 길고 험한 한 달간의 여정은 아프리카 여행이 무색할 만큼의 혹독한 인상을 줬다. 빌 브라이슨도 나와 같았다니 언제 만나서 한잔하며 호주라는 낯선 땅에 대해 수다라도 떨고 싶은 심정이다.
해가 떠오르면 40℃가 넘는 가혹한 더위와 파리떼에 시달려야 했고, 날이 흐리면 세찬 바람과 장대비, 천둥 번개까지 쳤던 곳. 호주라 하면 시드니 정도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서호주나 남호주, 울루루가 있는 사막 지역 센트럴 호주는 좀체 상상이 되지 않는 곳일 수도 있다. “‘자유로워지다’라는 것은 설령 그것이 잠깐 동안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멋진 것이다”라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했던가. 극한의 추위와 미세먼지로 마음마저 꽁꽁 얼어버린 겨울, 지구 반대편 뜨거운 땅 호주로 향했다.
세상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관문, 앨리스스프링스
울루루 여행을 계획할 때 주변에서 듣게 되는 대부분의 정보는 매우 더운 곳이니 반드시 열사병 약을 준비해야 하고, 모기방지 약을 뿌려야 하며, 파리들이 떼로 날아드니 망이 달린 모자를 써야 한다는 얘기 등이었다. 실제로 울루루 거점 도시인 앨리스스프링스에 가 보니 40℃가 넘는 땡볕의 날씨였다. 눈이 부셔 선글라스를 안 쓰면 강한 햇볕에 금방이라도 타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행 가기 전 예약해놓은 울루루 캠핑 ‘더락투어’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걸었을 뿐인데도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버렸다.
울루루로 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호주의 동서남북 주요 도시에서 앨리스스프링스로 와 투어에 참여하거나 차를 렌트하기도 한다. 편리한 여행을 원하는 사람들은 에어즈록공항에 내려 인근 호텔이나 리조트에 머물며 하루 이틀 울루루를 돌아본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다 해도 에어즈록공항에 내려 고작 몇 시간 머무르는 것만으로 아웃백(호주의 오지를 뜻함)을 체험하기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열흘에 가까운 종단 또는 횡단여행은 아니어도 최소한 2박 3일은 소요되는, 앨리스스프링스에서 울루루로 가는 아웃백 캠핑을 선택했다.
애보리진의 성지, 울루루
지구의 배꼽이라는 별칭처럼 울루루는 호주 대륙 한가운데, 앨리스스프링스 남서쪽 400km 지점에 있다. 약 5억 년 전 거대한 지각운동에 의해 융기한 모래바위로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바위로 알려져 있다. 1872년 탐험가 어니스트 길스가 발견했고 호주 초대 수상인 헨리 에어즈(Henry Ayers)의 이름을 따 ‘에어즈록’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울루루(Uluru)’가 일반 명칭이다. 애보리진(Aborigine)이라 불리는 이곳 원주민의 성지로도 알려진 울루루의 이름에는 ‘그늘이 지난 장소’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일출 때면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보이는 붉은 사암질의 바위는 크기가 해발고도 867m나 된다. 바닥에서의 높이는 330m, 둘레는 무려 8.8km에 이른다. ‘섬처럼 고립된 산’인 울루루는 바다의 빙산처럼 대부분의 덩어리는 땅속에 묻혀 있다. 암석 표면은 미세한 홈이 뒤덮고 있으며 측면에는 마치 동굴과 같은 깊은 홈이 나 있다.
바람에 실려 온 모래는 계속해서 암석을 깎아내린다. 비라도 내리면 측면의 홈을 따라 폭포가 형성되어 마치 붉은색 표면에 검은 혈관이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시시각각 바뀌는 바위의 색깔이 장관이라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온종일 주변에 머물며 색의 변화를 즐긴다, 일출에는 오렌지색, 이른 아침에는 적갈색, 정오에는 호박색, 그리고 해질 무렵에는 짙은 선홍색으로 바뀐다. 울루루 주변에는 멀가나무, 청회색의 백단향, 데저트오크, 블러드우드와 유칼리나무 숲도 있지만 킹브라운, 웨스턴브라운 같은 독사도 서식하므로 걸을 때 주의를 해야 한다.
울루루의 정상 정복은 매우 위험하고도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정상 등반을 적극 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정상 정복을 하려다 사망한 사람이 37명에 이른다.
둘레길을 따라 걷다가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발견했는데, 마치 신성한 원주민의 살에 철심이라도 박은 듯 잔혹하고 위험해 보였다. 그런데도 종종 울루루 여행기를 읽다 보면 정상 등반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성지를 보존하기 위해 2019년 10월 26일부터 등반이 전면 금지된다고 한다.
울루루-카타추타 국립공원과 킹스캐니언
2박 3일의 더락투어 일정에는 울루루 탐험 외에도 카타추타 국립공원과 킹스캐니언 탐험이 포함된다. 첫째 날엔 울루루, 둘째 날엔 울루루-카타추타 국립공원, 돌아오는 길엔 킹스캐니언 탐험이 일반적인 코스다. 1958년 호주 정부가 울루루와 카타추타를 호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자 토지를 소유한 원주민인 아그난족과 토지반환소송이 벌어졌다. 수차례의 협상 끝에 2084년까지 이 지역을 호주 정부에 임대해주는 것으로 합의가 됐다. 울루루와 함께 주요 성지로 유네스코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카타추타(1069m)의 이름에는 ‘머리가 많다’는 뜻이 담겨 있다. 카타추타는 다채로운 36개의 바위가 모여 바위산을 이루고 있는데, 혹자는 단순한 울루루 탐험보다 바위와 바위 사이를 가로질러 바람의 계곡을 트레킹하는 코스를 선호하기도 한다.
킹스캐니언 트레킹은 웅장한 협곡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장거리 코스와 협곡을 따라 산책하는 단거리 코스로 나뉘는데, 필자가 갔을 때는 비가 많이 내려 길이 유실되는 바람에 캠핑카에서 짐을 다 내리고 홍수가 난 강을 걸어서 건너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울루루에 내리는 비와 인사이드 트랙
애보리진의 신성한 바위를 조금이라도 느껴보기 위해 땡볕 속을 걸었다. 가시투성이의 덤불과 무자비한 풀 스피니펙스에 찔리지 않으려 조심했다. 또 더위와 파리떼의 습격에 대비해 머리엔 망을 써야 했다.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마법 같은 것! 5성 호텔의 그 어떤 호화로움도 수백만 개의 별이 쏟아지는 별밤 아래에서 잠드는 사치를 넘어서지 못한다.
울루루 아웃백을 탐험하는 동안 체코, 헝가리, 스위스, 영국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18명의 친구들은 낮엔 40℃의 태양을 견디고 밤엔 천둥과 장대비를 피하며 함께 웃고 떠들면서 2박 3일을 보냈다. 캠핑이 끝난 후 누군가는 케언스로 누군가는 고국인 동남아로, 나는 퍼스를 향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막에도 천둥 번개가 치고 그렇게 많은 비가 온다는 걸 처음 알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자연 속에서도 우린 즐겁게 살아남았다. 대자연은 힘들고 거친 환경 속에서도 서로 웃음을 나누고 즐기고자 한다면 진정 가능함을 가르쳐주려 한 것 같다.
여행 끝 무렵 프리맨틀의 한 서점에서 울루루를 제대로 탐험한 여성의 일대기가 담긴 책 ‘인사이드 트랙(Inside tracks)’을 만났다. 앨리스스프링스에서 출발해 울루루를 지나 인도양(샤크만)까지 무려 2700km를 낙타 4마리와 함께 273일간 도보로 횡단한 27세의 로빈 데이비드슨(Robyn Davidson)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녀 이야기가 담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내가 이 여행을 통해 깨달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당신이 허락하는 만큼 당신은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모든 시도나 노력에 있어 가장 어려운 일은
첫 결심을 실행에 옮길 때 내딛는 첫 발걸음이라는 사실이다.”
Travel Tip
가는 방법 호주의 대도시들(시드니, 퍼스, 애들레이드, 케언스)에서 앨리스스프링스공항이나 에어즈록공항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으며, 기차나 아웃백종단여행을 통한 방법도 있다. 앨리스스프링스에서 울루루까지는 차로 약 6시간 정도 소요되며 중간중간 유서 깊은 휴게소나 낙타농장 등 야생 체험도 할 수 있다.
울루루 캠핑투어 더락투어 therocktour.com.au
여행 루트 앨리스스프링스→울루루→울루루-카타츄타 국립공원→킹스캐니언→앨리스스프링스
15년 전에 살던 서울 광진구에 있던 아파트를 올 3월에 팔았다. 6월 4일 잔금 수령 일 등도 관계인들 요청으로 5월 말로 당겨 처리하였다. 현직에 있을 때 계약관계 일들, 법률적인 일들을 오래 처리한 경험이 있어 임차인과의 관계, 새 매입자 또는 매입자가 물색한 새 임차인과의 관계 등 복잡한 4자 관계에서 금전 정산일 들도 모두 정리하고 열심히 처리했다.
직접 모든 것들을 확인하며 발로 뛰며 처리했지만 돌아보니 미진한 점들이 많다. 현직에서 주어진 일들에 성실히 임하며 부모 역할도 열심히 한 후, 집 한 채와 일정 금액의 노후자금을 가진 은퇴자들이 본인의 재산과 일정 금액의 현금을 보호하고 활용하는데 내가 겪은 필수적인 몇 가지 정보와 지식은 상당히 유용하리라 생각되고 최소한 방어적으로 조심하도록 권유하고 싶다. 그것들은 질권, 재산세 부과기준일, 채권양도이다.
1 질권
근대사회 및 자본주의는 근대민법의 3대 원칙인 사유재산권(소유권) 절대의 원칙, 계약자유(사적자치의 원칙, 과실(자기)책임의 원칙에 따라 급속도로 발전했다. 물론,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빈부의 격차와 경제적인 공황 등으로 신의성실의 원칙, 권리남용 금지의 원칙이 보완되었다. 이중 소유권 절대의 원칙은 공산주의와 구분되는 큰 기준이거니와 여기에서 용익물권이라는 지상권/지역권/전세권과 담보물권이라는 유치권/질권/저당권이 나온다.
질권은 시계를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주는 것 같이 목적물을 유지하는 권리와 우선변제를 받는 권리이다. 시계 대신 임대차보증권/지명채권/주식 등 권리질을 잡을 수도 있다. 광진구에 2004년에 마련한 우리 부부의 새 아파트는 정년을 준비하며 잘 이용했고 3자녀들이 수도권에 적응하는 과정에 잘 사용하였다. 정년 후에도 잘 이용하다가 아내가 맞벌이하는 큰딸 부부의 의 두 아들, 즉 외손자들을 봐 줄 사정이 생겨 용인시로 이사 오면서는 전세(임대차)를 내주었다.
내 집같이 아끼며 사는 세입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 보니 4년 전인 2014년에는, 세입자께서 사업자금이 필요하여 은행으로부터 전세자금 3억 5천만 원을 융자받겠다며 절차상 필요한 소유주의 동의를 요청해 왔다. 동의를 해주겠다고 하니 첫 은행에서 전세자금 대출에 필요한 법적 요건인 질권 설정을 해야 하니 필요 절차와 서류의 동의절차를 요청해 왔다.
그러자고 했더니 먼저, 은행을 돕는 어떤 법무법인이 신원을 확인하며 직원을 용인 집에까지 보내 이런저런 서류에 도장을 받아갔다. 그런 다음 첫 융자은행은 친절한 안내문을 보내주었다. “임차인은 임대차보증금을 담보로 제공하고 저희 은행에서 대출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임대차보증금에 대해서는 본 은행이 임차인보다 먼저 반환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동시에 8가지 경우 발생 시에는 반드시 알려달라는 주의사항들을 안내해 왔다. 이 중에는 매매 등으로 소유권이 변경되는 경우와 다른 금융기관의 전세자금 담보대출을 허락한 경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2년이 지나 전세 계약 기간이 연장되었고 3년이 지나자 임차인께서 이번엔 은행을 갈아타면서 전세자금 융자 이자를 줄이는 융자를 하겠다며 동의를 요청해 왔다. 세입자도 60대여서 이자율을 낮추면 노후자금에 여유가 생길 터여서 또 동의해 줬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은행에선 전화확인만 해오고 사람을 보내어 서류 확인 등의 절차는 밟지 않았다.
아파트가 매매되고 6월 초에 매매 잔금을 받으려는데 임차인께서 5월 말에 두 번째 은행의 융자를 갚아야 하니 임대보증금을 맞춰서 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은행에 확인해 보니 임차인 명의의 융자금이 없다고 했다. 급기야는 첫 은행에 아파트 매매 사실과 그전에 임차인이 타 은행에 변경 융자한 사실을 알리며 임대차(전세)보증금을 아파트 소유자는 누구에게 환급할 의무가 있느냐고 확인했다. 그제야 임차인이 2016년 말에 융자금을 상환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무책임했다. 그리고 기어이 2016년 12월 20일 자로 질권 해지 통지서를 직접 받았다. 은행의 질권 설정 서류엔 2018년 6월 초까지 임대차기간이 명기됐었기에 그래야 법률적인 분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5월 말 임대차(전세)보증금을 돌려주면서 임차인과 두 번째 은행에 같이 가서 해당 융자금을 상환함을 직접 확인했다. 그래야 3억 5천만 원의 질권분쟁에서 벗어나고 아파트 매매에 따른 심적 부담을 개운히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선의로 임차인의 편의를 위해 질권 설정을 동의해 준다 해도 엄청난 법적 책임과 직접 발로 뛰는 확인 일들이 반드시 따른다는 것을 인지하고 동의해줄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질권 설정 금액의 두 배 이상 금액에 대한 분쟁과 손실 우려가 발생할 수 있겠다.
2 재산세 부과일 기준
광진구 아파트의 매매 전후의 하자보수비에 대한 매매 당사자들과 기존 임차인 및 새 임차인 간의 하자보수 책임과 비용 분담 등 잔잔한 일들을 다 정리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7월 어느 날 해당 아파트에 대한 재산세가 부과됐다. 매매 사실과 5월 말에 잔금 처리된 사실을 관계구청에 알리고 재산세 부과 정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매년 6월 1일 기준으로 재산세 반이 부과되고 9월에 나머지 반이 부과된다고 한다. 우리 부부 아파트의 소유권 변경 등기이전이 6월 1일 이후에 이뤄졌으므로 재산세 부과 정정을 않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9월에 부과되는 것만이라도 새 매입자에게 부과해 달라고 했으나 그것도 6월 1일 기준이라 안 된다고 한다. 근대민법의 3대 원칙 중에 가장 근간이 되는 소유권절대의 원칙에 따르면 소유 없이 재산세를 내는 격이니 고쳐야 한다고 본다. 매년 6월 1일을 기준으로 재산세가 부과되는 것은 다분히 행정편의를 손해를 끼친 것이므로 고쳐져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런 논쟁과 부담에서 벗어나려면 6월 1일 기준으로 재산세가 부과됨을 알고 특약조항에 재산세 납부자를 명기하거나 소유권 이전 의무 일을 합의하면 되리라고 본다. 혹은 매매대금 협상 시 알고 반영하면 될 일이다.
3 채권양도
20여 년 전 단독주택 2층에서 거주할 때 임차인이 1층 몇 칸을 얻어 우유 배달업을 하고 있었다.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사업이 성장일로이더니만 어느 날 전세보증금을 양도하고 우유 회사가 양수인이 되었음을 통보해 왔다. 급기야는 임차인이 이사하겠다고 하면서 전세보증금 반환 준비를 해달라고 해왔다. 채권양도양수 통보를 받은 후 수년이 지나서 잊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서 법정관리가 되고 회사정리법에 따른 복잡다단한 정리채권 확정의 소송들을 진행하던 때여서 양도채권의 효력을 알고 있었다. 받을 채권, 즉 금전에 대하여 압류, 임시압류, 추심명령, 이전명령 등 소위 법적 보전처분들이 뒤엉켜 있어도 채권양도가 통지된 이후엔 양도된 채권이 가장 효력이 강하여 이후의 보전처분들은 전혀 힘을 못 쓰는 것이었다. 만일 임차인에게 전세보증금을 내줬다면 우유 회사에 동일금액을 이중 반환할 법적 의무가 생기는 것을 알았기에 정중히 이해시키고 우유 회사와의 직접정산을 권유했다.
이렇게 질권, 재산세 부과 기준일, 채권양도 세 가지만의 기본 개념과 법적 효력을 잘 알고 구체적인 사례에 대처한다면 젊었을 때 오래도록 애써 모은 각자의 재산과 노후자금은 예기치 않는 손실이나 법적 분쟁을 막을 수 있는 파수꾼이 되리라고 본다.
통상 남자들이 주도하는 종친회 일을 오랫동안 수행 봉사하는 여자 친구들이 있었다. 친해져서 물어보니 오빠나 남동생 없이 자매들만 있다 보니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더 친해져서 자세한 가정사를 물어보니 한스러운 사연을 토로했다.
“우리 집은 어렸을 때부터 여자들만 있었어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언니와 나. 이렇게 넷이서요.”
“어떻게 그렇게 되셨어요?”
“할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부모님과 살다가 제 세 살 때 아버님께서 억울하게 돌아가셨대요. 그 후 할머니께서 어머니 개가를 강력히 주장하시어 어머니가 떠나가신 뒤론 할머니 밑에서만 크고 학교 다녔어요.”
그 후 자세한 사연을 들어보니 6ㆍ25전쟁 중이던 1950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갔다. 전쟁 중이라 집에서 편한 잠을 못 자던 함평의 작은 시골 마을. 11일 그날도 뽕나무 밑이나 외진 건물에서 자고 집에 들어와 조식을 빨리 먹고 동네 사랑방에 친척 다섯이 모였다고 한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친척들 안부와 전쟁 중의 소식을 서로 교환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총을 든 군인이 바로 따라왔었다고 한다. 모두 끌려가서 적과 내통하지 않았다고 여러모로 항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틀 후인 13일 모두 주검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참 지난 후 그 군인이 소속된 부대의 부대장이 동네를 찾아와 “모두 잘못 처리되었고 죄송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사과했으나 구두증거는 남지 않았고 다섯 사람은 다신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64년이 지났기에 가정과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확인해 봤다. 학교를 제대로 나오지 못했음은 물론 호적과 가족관계증명서들을 떼어보니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할 법적 당사자와 재력 가진 종친들이 별로 없었다. 힘들게 사는 종친들을 위로하기 위해 소송봉사를 하고 싶었다. 수원에 있는 친구 변호사를 선임하고 서류를 갖추어 비용을 일부 분담하고 나머지는 당사자들이 부담토록 하여 소송을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알아보니 함평 양민학살 유족회에서 조사한 피해자들이 우리를 포함해 천여 명이 넘었고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진상규명 신청서를 이미 접수하고 있었다. 인민군이 노령산맥을 거쳐 영광 법성포로 최종 퇴각하는 길목에 자리 잡은 함평지역엔 교전이 많아 시산혈해를 이뤘고 그런 중 양민피해도 컸다고 한다. 2008년 4월 14일 국가권력에 의한 피해라는 진상은 규명되었으나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3년이 지나갔다.
우리가 어렵게 살아온 종친들을 금전으로라도 위로해 주기 위해 소송을 제기한 2014년은 진상규명 후 6년째였다. 국가권력으로부터 피해를 받았어도 피해 사실이 규명된 후 3년 이내에 소송을 제기하지 않으면 설령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도 국가의 배상의무가 없다는 권위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법이 아직도 살아있었다.
친구 변호사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받은 수임료를 반납해 주었다. 통상 교과서에서 배운 형사 사항의 시효는 7년, 민사사항들의 시효는 10년이라고 알고 있다. 재산에 대한 소유권 절대의 원칙과 같이 생명가치에 대한 고귀성과 절대 원칙을 더 세우고 함평 우리 종친들 같은 피해자들과 우리 이웃들을 더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는 법들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여러 지역에 관계되는 그런 유형의 법들이 여럿 발의되었으나 통과 안 되고 계류상태로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얼마 전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명했다. 이는 2018년 2월 4일부터 시행된 것으로 연명 치료에 대해 자신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사전에 의사를 밝혀 놓는 것이다. 곧바로 정부 관련 기관 시스템에 정식으로 등록되었다는 문자 통보를 받았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임종 단계에서 연명 의료에 대해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제도이다. 즉, 심폐 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을 하지 않겠다는 본인 의사 결정이다. 4가지 모두 또는 4가지 중 선택해서 표시할 수도 있다.
이 제도는 잘 알려진 대로 김 할머니 사건이 시초가 되었다. 76세의 김 할머니가 폐암 발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검사를 시행하던 중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식물인간이 된 것인데 인공호흡기 같은 생명 연장 장치에 의해 연명하였다. 가족은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이므로 인공호흡기 제거를 요청했으나 병원 측은 이에 응하지 않아 결국 소송으로 간 것이다. 대법원은 회복 불능 사망 단계인 데다 환자가 연명 치료 중단을 추정할 수 있으므로 연명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종이 한 장으로 되어 있으며 반드시 본인이 자필로 작성해야 하며 마음이 바뀌면 취소도 가능하다. 아직 모든 관련법이 정비되어야 하므로 합법화된 것은 아니지만, 연명 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것으로 보면 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등록기관이 지정되어 있다. 지역 보건 의료기관 14곳, 의료기관 24곳, 비영리법인 또는 단체 10곳, 국민건강보험공단 전국 178개 지사를 담당하는 공공기관 1곳 등이다. 문제는 아직 이 제도가 잘 알려지지 않아 해당 등록기관에서도 잘 모른다는 것이다.
필자가 이 의향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살 만큼 살았다는 평소의 소신이기도 했지만, 얼마 전 백혈병 투병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지인을 보고 서두르게 된 것이다. 이 지인은 일 년 전 발병했을 때 체중만 급격히 줄었을 뿐 일상생활하는데 거의 지장이 없었다. 병원 검사를 통해 백혈병임을 알았고 그 후 항암 처치를 받으면서 급격히 건강이 악화했다.
이 지인이 죽기 한 달 전쯤 필자가 찾아갔었다. 얼굴색으로 보아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듯했다. 뭘 먹고 싶은지 사주겠다고 하자 그간 금기시했던 고기를 사달라고 했다. 소주도 마시고 싶다고 하여 사줬다. 식사 후 자리를 옮겨 인근 카페에서 커피도 마셨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더라면 먹고 싶은 것 실컷 먹고 죽음을 맞이했을 거라는 말을 했다. 항암제 투여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국 죽게 되어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주변에 중병으로 쓰러지는 또래의 지인들이 하나둘 생긴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누구나 사전에 대비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도 그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때로 선거나 시험은 도전 그 자체만으로 큰 의미를 부여받기도 한다. 얼마 전 제7회 지방선거에서 아홉 번의 출마 만에 당선된 송철호 울산시장이 그랬다. 범인들은 함부로 흉내 내기 힘든, 지치지 않는 도전은 과정만으로도 가치를 갖는다. 숫자의 크고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이제 5년 차 변호사가 된 한 사내가 있다. 경력만 보면 막 커리어를 쌓아가는 푸릇한 젊음이 연상되지만, 이미 초로의 몸이 됐다. 대신 그의 가슴에는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얻은 흉터와 사법고시 14전 15기라는 숫자가 훈장처럼 달려 있다. 오세범(吳世範·63) 변호사의 이야기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눈앞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선 맹수처럼 그를 둘러싼 카메라와 마이크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4년을 꼬박 도운 세월호 가족의 가슴을 후벼판 사건의 조사 결과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인을 제공한 방송사의 요청에 의한 조사였다. 결과도 대중을 쉽게 납득시키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방송인의 사회적 책임감 부족이 낳은 참사입니다.”
오세범 변호사는 얼마 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MBC의 ‘전지적 참견 시점’ 세월호 보도영상 사용 논란 사건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사건이 터지자마자 MBC로부터 긴급 진상조사위원회 참여를 부탁받았고, 조사에 참여후 위원회와 함께 언론에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세월호 유가족의 마음을 이해하는 만큼 누구보다 철저하게 조사하려고 애썼죠. 제작 과정을 모두 확인했는데 사회적 공감대와 상식 부족이 만들어낸 사건이에요. 편집 과정에서 다른 문제에 제작진의 관심이 쏠려 제대로 점검이 안 된 문제도 있었죠. 외부에선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세월호 유가족들은 사건으로 너무 힘들어하면서도 조사 결과를 이해해주셨죠.”
변호사 오세범 그리고 세월호
변호사 오세범을 이야기할 때 세월호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운명처럼 인연을 맺었다”고 표현했다. 그에게 세월호와 관련한 경험은 변호사가 되고 나서도 계속 가슴앓이를 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몸속에 박혀 있는 그것이 사회에서 진주 같은 존재로 변화되길 바랄 뿐이다.
“제가 변호사 일을 시작한 것이 2014년 2월이에요. 2011년 11월 사법고시 합격 후에 사법연수원에서 교육을 받고 정식 변호사로서 일을 시작했죠. 그런데 두 달도 안 돼 일이 일어났어요. 아이들이 죽어가는 과정이 온 국민이 보는 TV로 생중계됐잖아요. 다른 사람들처럼 저도 이건 아니다 싶었죠. 그래서 바로 자원봉사를 신청했어요.”
오 변호사는 그 길로 변호사를 대변하는 두 단체, 대한변호사협회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모두에 자원봉사를 신청했다. 유가족의 요청으로 법률지원 창구가 일원화되면서 만들어진 대한변협의 세월호 참사 피해자 지원 및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법률상담지원단 중앙지원팀장까지 맡았다.
“아시는 것처럼 부당한 여러 원인 때문에 유가족은 스스로 조직을 갖춰야 했어요. 그래서 상주 역할부터 당직까지 반별로 움직였는데, 이에 맞춰 변호사들도 반별로 담당이 정해졌죠. 전 2학년 1반을 맡아 특히 1반 가족들과 친분이 두터워졌어요. 반별 스케줄에 맞춰 저도 정기적으로 안산으로 달려갔죠. 뿐만 아니라 세월호 유족들과도 두루 친해졌어요. 4년을 함께 지냈으니까요.”
2학년 1반에서는 세월호 인양과 함께 뒤늦게 가족에게 돌아온 조은화 양을 비롯해 학생 18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오 변호사는 의지하는 기둥 중 하나였다. 그는 부당한 압력을 막는 법적 우산이 되고자 집회 참석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부가 세월호 특조위의 활동을 강제로 종료시키려 했던 2016년엔 다른 민변의 변호사들과 함께 릴레이 단식에도 나섰다.
옥사에서 울려 퍼진 목소리
애초에 그는 사회운동에 적극적인 청년은 아니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시절, 그는 학자를 꿈꾸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많은 학우들이 외치던 독재정권 타도는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4학년이 됐을 때 주변을 돌아보니 동기들이 사라졌더라고요. 상당수가 학생운동으로 구속된 거죠. 독재 말 상황에서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은 도피임을 깨달았어요. 그제야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 마음먹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유신타도와 헌법 개정을 외친 대가는 적지 않았다. 징역 2년.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그래도 적잖은 형량과 옥살이는 그를 기죽게 하진 못했던 모양이다.
“4월 19일이었어요. 구치소 안에서 누군가가 외치기 시작했어요. 누구인지 어디서 소리를 지르는 건지 알 수는 없어도 고함이 전해지는 걸 막을 순 없었죠. 목소리가 하나둘 늘어나면서 저도 외치기 시작했어요. 유신헌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 민주주의 회복을 말이죠. 결국 긴급조치 9호 위반의 혐의로 형량을 2년 더 받았어요.”
다행히 형량 4년을 모두 채울 필요는 없었다. 2년 4개월 만인 1979년, 그는 형 집행정지로 출소했다. 하지만 자유의 몸으로 보내는 시간은 짧았다. 이번엔 ‘YMCA 위장결혼식’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집회 자체가 불법이었던 시절, 사전신고 없이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결혼식으로 위장해 시위를 벌인 사건이었다.
“10·26 사태가 일어나고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될 거라 믿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으니까요. 민주화 인사들 사이에서 저는 갓 출소한 막내여서 유인물을 만들고 나르는 잡일만 맡았을 뿐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에요. 결국 1년 6개월 형을 받고 1년 만에 다시 형 집행정지를 받았어요. 중간에 잠깐 쉬고 총 3년하고 넉 달을 옥살이한 셈이죠.”
평범하게 끝나지 않은 평범한 삶
그 과정에서 그가 결심한 것이 하나 있었다. 평범한 소시민적 삶을 사는 것. 학생운동과 연행, 조사 과정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세상물정 몰라 그런다”라는 말 때문이었다. 진짜 세상물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갓 출소한 27세 청년은 학교에서도 제적당해 먹고살 길도 막막했다. 남들처럼 자격증도 따고 취직도 하기로 맘먹었다. 다행히 공부는 자신 있는 분야였다. 그렇게 고압가스와 열관리 자격증을 따고 제약회사 보일러실 담당으로 취업했다. 하지만 그 시기 사회는 또 다른 거대한 흐름과 마주하고 있었다. 바로 노동운동이었다. 큰 파도는 그렇게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노동운동이 태동하던 시기였죠. 하루에도 수십 개씩 노조가 만들어졌어요. 자연스럽게 제가 근무하던 회사에도 노조가 만들어졌고, 거기서 노조 총무부장을 맡게 됐죠. 노조활동을 반대하던 사 측에서는 제가 이력서에 서울대학교 중퇴 사실을 기재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았고, 결국 해고됐어요. 복직소송에선 졌지만, 그 과정에서 인권운동을 하던 김칠준 변호사를 만나게 됐어요. 법조인으로 도전하게 된 계기가 된 셈이죠.”
김칠준 변호사와의 인연은 의뢰인과 인권변호사의 관계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는 수원에 자리 잡은 김칠준 변호사 사무소에 상담실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다산인권센터와 법무법인 다산이 시작된 곳이다.
“노조와 관련한 5~6건의 소송 당사자이다 보니 자연스레 송사와 관련한 경험이 생기더라고요. 그 경험이 상담실장으로 일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죠. 당시엔 노동 상담에 관심 있는 변호사가 그리 많지는 않아 관련 사건을 독점하다시피 했어요. 인근에 있던 삼성전자나 기아자동차, 쌍용자동차 같은 큰 기업의 노동자들이 대상이었죠.”
1993년, 그는 장명국 발행인과의 인연으로 내일신문 창간에도 참여한다.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주축이 돼서 자주관리경영을 원칙으로 창간한 언론사다. 그는 이사 겸 업무 기획실장으로 신문이 정상궤도에 오를 때까지 4년간 일했다.
“말이 기획실장이지 잡다한 사무를 도맡아 하는 총무 같은 역할이었죠. 다들 잘 아는 것처럼 신문사라는 곳이 내 생활이 없는 곳이잖아요. 밤낮없이 마감에 시달리는 기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꽤 고생이었나봐요.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데 앞에 앉아 있던 여고생이 자리를 양보해줬어요. 지금 그랬으면 그런가보다 했을 텐데, 당시 마흔한 살이었던 제겐 충격적인 사건이었어요. 진짜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있는지, 이렇게 내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닌지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됐어요, 보람 있는 직업 중에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도울 수 있는 변호사가 제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사법고시 도전을 결심했어요.”
안정된 삶 뒤로 하고 책상 앞으로
변호사가 되는 일은 평범한 결심과는 결이 다르다. 요즘 몸이 좀 불었으니 아침마다 운동을 해야겠다는 결심 같은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두 딸의 아버지이자 가장인 남편이 고시생이 되겠다고 했을 때 쉽게 허락할 아내가 있을까.
그러나 그의 아내는 응원해줬다. 서울대학교 시절 농활에서 만난 1년 후배인 아내는 당분간 생계는 자기가 책임지겠노라고 했다. 오랫동안 그를 봐온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그는 “사법고시를 통과하는 데 평균 5년 정도 걸리니, 나도 그 정도면 될 것”이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들 대학 입시가 시작되기 전까지 끝내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1997년에 도전한 지 3년만인 2000년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번번이 2차 시험에서 고배를 마시는 일이 반복됐다.
“차라리 계속 떨어지기만 했다면 쉽게 포기했을 거예요. 2차 시험 결과가 매년 12월에 발표되는데 바로 석 달 후에 다시 1차 시험이 진행되거든요. 2차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 공부한 것이 아까워 다시 1차 시험을 보고, 합격하면 다시 2차 시험에 도전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더라고요.”
그렇게 7년이 지나자 고비가 다가왔다. 경제적으로도 삐꺽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다시 법무법인 다산에 들어가서 민사 사무장을 하면서 3년간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시간을 보냈다.
“신기하더라고요. 처음엔 붙어야 한다는 강박만 있었는데, 붙을 때가 되어서 그런 건지 나중엔 법 공부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어요. 아이들도 취업이 보장되는 의대와 육사에 합격해서 부담을 덜게 되면서 다시 일을 그만두고 정식으로 도전했죠.”
그리고 2011년 겨울, 드디어 사법고시 53회 시험에서 그는 최고령으로 합격증을 받는다. 첫 도전을 한 지 15년 만이었다. 2차 시험만 8번을 봤다. 매스컴도 주목했고,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제가 제일 좋아했어요.(웃음) 합격자 발표가 났을 때 이미 아이들은 취업한 상태여서 그랬는지 저만큼 좋아하지는 않더라고요. 이틀을 잠을 못 잤어요. 하루는 믿어지지 않아서, 하루는 너무 좋아서요.”
‘안전한 삶’ 위한 법조인 되고파
변호사가 된 뒤 그의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가 많은 인터뷰를 통해 말했던 ‘국민과 더불어 함께 웃을 수 있는 봉사하는 법조인’이 되었을까.
“제가 꿈꿨던 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생명안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죠. 사고에 무관심하고 사람이 죽어도 위자료 주고 끝내는 사회를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죠. 대한변협 생명존중재난안전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집단재난 현장지원 변호사 매뉴얼도 만들었어요. 큰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변호사도 우왕좌왕하기 쉬우니까요. 세월호 참사 이후 고양터미널 화재나 오룡호 침몰같은 재난 사건에서 얻은 경험을 결과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민변의 민생경제위원회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아파트는 단순한 거주공간 이상으로 생활 단위,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운영을 투명화하고 마을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주민, 특히 시니어 세대의 참여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서울시에서 50플러스재단을 통해 공동주택 입주자 대표가 되기 위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데 거기서 관련 민·형사 사례에 대한 강의를 맡고 있어요. 남들에게 잘하라고 말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해봐야 할 것 같아서 저도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입주자 대표자회의 감사를 맡았어요. 입주자 커뮤니티의 활약에 따라 입주자들의 삶과 안전까지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중년의 도전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지켜야 할 것이 너무나 많고, 실패했을 때 지고 견뎌야 할 짐도 무겁다. 자칫 영원히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 그에게 도전은 어떤 의미였을까.
“사실 주위 평가를 의식하며 사는 경우가 많잖아요.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말이죠.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첫 번째 요건이라고 생각해요. 도전하기 전에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해요. 그런 주관적 열망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음에는 그에 대한 객관적 판단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말이죠. 가장 가까운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저의 경우는 아내였죠. 그리고 도전 가능한 경제적 상황을 만드는 것까지 점검하면 실행에 옮기는 일만 남게 돼요. 막연히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이렇게 점검후 실천해나가다 보면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고 믿어요. 마음속에 어떤 열망이 뜨겁게 자리 잡고 있는지 찾아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1998년 개봉한 영화 ‘편지’는 죽음을 앞둔 주인공 환유(박신양 분)가 연인 정인(최진실 분)에게 남길 유언을 녹화하는 장면으로 유명했다. 당시만 해도 영상으로 유언을 남기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죽음준비교육이나 죽음학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유언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 여기에 스마트폰의 보급까지 더해지면서 영상 등 다양한 매체로 유언을 남기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에 필요 이상으로 엄숙해질 필요는 없지만 형식은 갖춰야 법적 효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유언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파악해야 할 것은 유언이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다. 유언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고인이 뜻한 바대로 사후에 여러 가지 조치들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법적 효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민법 제1060조에서는 유언의 방식을 5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자필증서와 녹음, 공정증서, 비밀증서,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이 그것이다. 유언의 방식이 엄격하게 정해진 것은 유언자의 진의를 명확히 해 법적 분쟁이나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법으로 정해진 요건과 방식에 어긋난 유언은 유언자의 진정한 의사에 합치되더라도 무효가 된다.
스마트폰 녹화 유언 효과 있을까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이 고인이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뜻을 남겨도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민법 제1067조를 보면 “녹음에 의한 유언은 유언자가 유언의 취지, 그 성명과 연월일을 구술하고 이에 참여한 증인이 유언의 정확함과 그 성명을 구술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규정 요건을 따라야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즉, 녹화 현장에 그 장면을 지켜보는 증인이 있어야 한다. 또 유언자의 이름과 날짜를 명확하게 언급해야 한다. 이 조건들 중 하나라도 갖추지 않으면 법적 효력은 사라진다.
정확히 같지는 않지만 실제로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2005년 A 씨는 유언장을 작성하면서 “본인의 모든 재산을 아들 B에게 물려준다. 사후 자녀 간에 불협화음을 없애기 위해 이것을 남긴다”는 내용으로 자필 유언장을 작성했다가 주소를 적어야 하는 부분에 ‘암사동에서’라고 기재했다. 결국 다른 자식이 이 부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 재판이 이뤄졌고, 대법원은 ‘법정 요건과 방식에 어긋나므로 무효’라 판단했다.
또 내용상으로도 법적 유언으로 인정하는 사항은 별개로 정의된다. 김재철 법률사무소의 김재철 변호사는 “아버지가 떠난 뒤 형제간에 우애 있게 살며 가업에 힘쓰라와 같은 도덕적인 의미를 가진 마지막 당부는 유훈으로서의 성격에 지나지 않고 민법상의 유언이 아니다”라고 설명하면서 “재단설립, 친생부인, 인지, 후견인 지정, 친족회원지정, 상속재산 분활 방법의 지정 및 위탁, 유증, 신탁에 대한 내용만 법률이 인정하는 유언사항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법조인들은 절차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애써 남긴 유언이나 유서가 되레 법정 분쟁의 씨앗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공정증서에 의한 유언’을 할 것을 권한다. 공정증서에 의한 유언은 공증인이 유언장을 작성하는 것인데, 전문가인 공증인이 하므로 유언의 효력에 관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매우 낮다. 공증인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평범한 변호사나 법무가는 해당되지 않는다. 법조인으로 10년간 근무경력을 갖춰 임명된 임명공증인이나 법무법인의 인가공증인을 뜻한다. 이들을 통해 유언장을 작성하게 되면 비용은 약 300만 원 선. 상속분쟁으로 인한 소송으로 발생하는 비용과 무형의 대가를 생각하면 비싼 비용은 아니라는 것이 법조인들의 설명이다.
우리 사회에서 유언을 바라보는 관점 중 하나는 엄숙주의적 시각이다. 법적 효력을 떠나 죽음을 앞둔 고인의 마지막 말을 남기는 과정인 만큼 신중히 작성되어야 하고 결코 가볍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정서가 있었다.
유언에 대한 엄숙주의 옅어져
그러나 최근에는 이런 분위기가 바뀌어 유언을 작성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기도 한다. 창동 노인복지관 박미연 관장은 죽음준비교육과정 중 하나인 유언 교육이 시니어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박 관장은 “죽음에 대한 성찰이 이미 이뤄진 시니어를 대해보면 유언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경우가 많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나 당부를 남기도록 권하고 있다”며 “유언이 재산상속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놓기도 하고 매년 쓰겠다는 이도 있다”고 설명한다.
이와 유사하게 유언을 새로운 삶의 계기로 삼는 사회 인사들도 있다. 이투데이 길정우 총괄대표는 최근 모교 동창회보 기고를 통해 “연말에 쓰는 일기처럼 가족들에게 남기고 싶은 얘기를 담아 매년 유서를 작성한다”며 “이렇게 누적된 유서는 훗날 나의 생각과 회한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는 나만의 기록물이 된다”고 말했다.
SBS 예능 프로그램 ‘동상이몽2’에 출연해 사랑스럽고 쾌활한 모습을 보이는 배우 추자현의 남편, 중국 배우 우효광은 ‘우블리’로 불리며 시청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장훈 감독의 영화 ‘택시운전사’에 독일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이 송강호와 함께 주연으로 나서 10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등 외국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KBS2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미국 배우 데이비드 맥기니스가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해 시청자에게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국내에서 최고 인기를 누릴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외국에서 K-Pop 열풍을 고조시키고 있는 아이돌 그룹 엑소의 레이는 중국 멤버이고, 트와이스의 9명 멤버 중 대만 멤버 쯔위와 일본 멤버 모모, 사나, 미나 등 4명이 외국인 멤버다.
최근 한국 방송 프로그램과 영화에 출연하는 외국인 배우가 급증하고 한국 무대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가수가 늘고 있다. 방송·영화의 외국인 연예인과 외국인 출연은 대중문화의 트렌드로 부상했고 외국인 멤버가 포함된 아이돌 그룹 활동은 대중음악계의 대세가 됐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 공연 무대의 일회성 출연에서 벗어나 아이돌 그룹의 지속적 활동과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의 장기간 출연을 위해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연예인도 늘고 있다. 또한, 외국인을 전면에 내세우는 프로그램도 급증하고 샘 해밍턴, 후지타 사유리, 샘 오취리 등 방송 출연을 통해 유명인 대열에 합류하는 외국인도 등장하고 있다.
1970~1980년대에도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외국인과 외국인 배우, 가수의 모습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추석 등 명절에 ‘외국인 노래자랑’ 같은 특집 프로그램이나 내한한 외국인 스타의 예능 프로그램 단발성 특별 출연을 통해서다.
1990년대 들어 국제결혼과 직장 근무 등으로 한국에 이주한 외국인 중 일부가 KBS1 ‘아침마당’ 등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국과 한국 문화·생활에 대한 소감을 들려줬다.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 독일 출신 귀화 한국인 이참, 미국 출신 로버트 할리, 프랑스 출신 이다 도시 등은 눈길을 끌어 예능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드라마에도 얼굴을 내밀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
한류가 본격화하고 국내 거주 외국인이 급증하기 시작한 2000년대부터는 국내 방송과 대중문화계에 진출한 외국인 연예인과 외국인이 증가했다. 중국, 독일, 미국 등 외국 미혼 여성이 출연해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KBS2 토크쇼 ‘미녀들의 수다’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방송돼 큰 인기를 끈 것을 계기로 외국인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이 붐을 이뤘다. 또한 KBS2 ‘개그콘서트’의 샘 해밍턴을 비롯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외국인도 많아졌다.
요즘 시청자와 만나는 SBS ‘내 방 안내서’, JTBC ‘비정상회담’, MBC 에브리원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KBS1 ‘이웃집 찰스’, JTBC ‘나의 외사친’, tvN의 ‘서울메이트’처럼 외국인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이 눈길을 끌고 있으며 ‘동상이몽2’의 중국 배우 우효광, KBS1 ‘이웃집 찰스’의 일본인 사유리,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호주 출신 샘 해밍턴 등 외국인 출연자가 인기를 얻고 있다.
요즘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외국인 배우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봉준호 감독 ‘옥자’의 할리우드 스타 틸다 스윈튼, 홍상수 감독 ‘다른 나라에서’의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 나홍진 감독 ‘곡성’의 일본 연기자 쿠니무라 준, 김태용 감독 ‘만추’의 중국 스타 탕웨이, 허진호 감독 ‘위험한 관계’의 중국 배우 장백지, 장훈 감독 ‘택시운전사’의 독일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미국 배우 데이비드 맥기니스처럼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주연과 조연으로 출연하는 외국인 연기자가 많아졌다.
또한 일본 배우 ‘엽기적인 그녀2’의 후지이 미나, MBC ‘구가의 서’, SBS ‘추적자’의 오타니 료헤이처럼 아예 활동무대를 한국으로 옮겨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지속해서 출연하는 외국인 연예인도 적지 않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가수 역시 급증하고 있다. 연예기획사 관계자들은 아이돌 그룹 멤버 중 10% 정도가 외국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K-Pop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걸 그룹 트와이스의 9명 멤버 중 대만인 멤버 쯔위와 일본인 멤버 모모, 사나, 미나 등 4명이 외국인 멤버다. 또한 2PM의 태국인 멤버 닉쿤, 에프엑스의 중국인 멤버 빅토리아, 미국인 멤버 엠버, 엑소의 중국인 멤버 레이, 우주소녀의 중국인 멤버 성소·선의·미기, 블랙핑크의 태국인 멤버 리사와 뉴질랜드인 멤버 로제, 갓세븐의 홍콩인 잭슨, 태국인 뱀뱀, 미국인 마크 등 수많은 외국인이 아이돌 그룹 멤버로 활동하며 스타로 부상했다.
방송, 영화, 음악 등 한국 대중문화계에 진출한 외국인 연예인이 늘어나고 외국인을 출연시키는 프로그램이 증가하는 이유는 뭘까.
한류로 인해 한국 대중문화 위상이 높아지고 한국 연예계에 진출해 쌓은 경력과 인지도를 바탕으로 자국에서 연예인으로 활동하려는 외국인이 늘었기 때문이다. 아이돌 그룹 멤버를 비롯한 연예인이 되기 위해 한국을 찾아 연예기획사의 오디션이나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외국인 수는 엄청나다. SM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의 국내외 오디션에는 수천 명의 외국인이 참여한다.
외국인을 기용해 한류를 확산하려는 연예기획사, 드라마 제작사 등 대중문화 콘텐츠 관련 업체의 의도도 외국인과 외국인 연예인 출연 프로그램, 영화, 드라마, 음반의 증가를 가져왔다. 모모 등 일본 멤버가 3명이나 있는 트와이스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태국인 닉쿤이 멤버로 있는 2PM은 태국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는 등 외국인 멤버가 있는 아이돌 그룹이나 외국인이 출연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한류 확산에 긍정적인 영향을 드러내면서 외국인의 한국 연예계 진출이 붐을 이루고 있다.
국내 거주 외국인 급증도 외국인 방송 출연과 외국인 참여 프로그램 증가의 한 원인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6년 현재 국내 거주 외국인이 171만 명에 달한다. 2006년 53만 명이었던 외국인 인구가 10년 사이 3배 이상 증가할 정도로 국내 거주 외국인이 늘고 있다. 이러한 추세를 방송 등 대중문화에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전개되고 있다.
외국인 연예인의 국내 방송과 대중문화계 진출 붐은 대중문화의 지평을 확대하고 한류 진작(振作)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문화 차이, 한국어 부족으로 인한 소통의 어려움 등으로 문제도 종종 발생한다. 엑소를 탈퇴한 중국인 멤버 크리스·루한·타오처럼 소속 계약이나 수입 배분, 대우 등으로 연예기획사를 대상으로 한 외국인 멤버의 법적 소송이나 갈등이 늘어나면서 한국에서 외국인 연예인 활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많아지고 있다.
빨리 늙어가고 있는 우리나라가 ‘고령사회’로 진입했다. 지난 2000년 ‘고령화사회’로 진입한 지 불과 17년 만의 일이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주민등록인구는 약 5175만 명으로 이 중 65세 이상 어르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의 14.02%인 725만 명으로 기록됐다. UN에서는 65세 이상의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사회’, 14% 이상은 ‘고령사회’, 20%를 넘으면 ‘초고령사회’로 구분하고 있다. 이처럼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늘어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상속 문제’다. 고도성장기 때 젊은 층은 자산을 축적할 기회가 많았다. 그런데 이들이 나이 들어가면서 유산을 가지고 친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자매끼리 벌이는 분쟁이 해마다 늘어가고 있다. 또한 자식들에게 자산을 효과적으로 이전해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깊어가고 있다.
특히 초고령 국가 일본에서는 ‘老老상속’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는 노인이 된 자식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더라도 자신을 부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일본 노인들이 죽을 때까지 자산을 자식에게 증여하지 않으면서 생겨난 신조어라는 점에서 씁쓸하기만 하다. 상속 시 발생하는 큰 문제는 ‘세금 줄이기’와 ‘상속인들 간 분쟁 방지’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5070세대가 앞으로 다가올 유산 분배와 관련해 자녀분쟁을 방지하고 효과적으로 세금을 줄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자.
상속인들 분쟁 방지를 최소화하는 방법
상속권 문제
상속이나 증여 관련 문제는 자신과 상관없는 문제로 인식하고 관심 없어 하는 경우가 많다. “가진 재산도 별로 없는데 무슨 상속, 증여?”라며 반문할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속과 증여는 평생에 한두 번 정도 발생하고, 증여의 경우는 당장 세금 문제가 생기다 보니 무관심하거나 준비 소홀로 이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이러한 준비 소홀은 가족 간의 분쟁은 물론이거니와 평생 일궈온 사업체가 없어지는 경우(가업상속) 또는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재산이 분배됨으로써 분쟁 방지와 절세(節稅)의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상속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내용은 ‘상속권’ 문제다. 상속인은 누가 되고 상속재산을 얼마를 분배받을 수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나라 민법은 상속의 방법을 ‘유언상속⇒협의상속⇒법정상속’의 순서로 정하고 있다. 피상속인의 유언이 있는 경우 유언대로 상속재산을 집행하면 된다. 하지만 유언이 없는 경우라면 상속인들끼리 협의를 하게 되고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법정지분대로 상속받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유언, 협의 상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 법정상속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속순위는 어떻게 될까? 배우자와 자녀(직계비속)가 1순위로 상속재산을 균등분할하되 배우자에게는 50%를 가산하게 된다. 가령 배우자와 아들, 딸을 두고 있는 홍길동씨가 10억원의 재산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고 가정하자. 남겨진 아내는 4억2000만원(10억원×1.5/3.5), 아들과 딸은 각각 2억8000만원(10억원×1/3.5)을 분배받게 된다. 다만 배우자가 없는 경우는 자녀가 동일하게(각각 5억원씩) 분배받게 된다. 2순위는 배우자와 직계존속, 3순위는 형제자매, 4순위는 4촌 이내 방계혈족으로 순위가 순차적으로 정해진다. 다만 상속순위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배우자는 1순위와 2순위 상속인이 있을 경우엔 단독이 아니라 공동 상속인이 되고, 직계비속과 존속이 없을 경우에만 단독 상속인이 된다는 점이다.
상속인의 ‘유류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유언의 자유가 존재하기 때문에 살아생전에 피상속인은 자신의 뜻에 따라 재산을 특정인에게 증여하거나 처분할 수 있다. 그럴 경우 남은 유가족은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때 유류분을 잘 챙겨야 하는데, 유류분은 상속재산 중 상속인에게 돌아가야 하는 최소한의 법정비율의 몫을 말한다.
유류분은 법정지분을 기준으로 배우자/직계비속의 경우는 1/2, 직계존속과 형제자매는 1/3이다. 그럼 간단하게 유류분을 계산해보자.
예를 들어 배우자가 없는 홍길동씨가 자신의 재산 6억원을 남기고 사망하였다고 가정해보자. 유가족으로는 아들1, 2와 딸이 있다. 그런데 홍길동은 아들1, 2에게는 각각 3억원을 남겨주고 딸은 출가외인이라며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 이런 경우 유류분은 어떻게 계산하고 딸은 누구에게 유류분을 청구할 수 있을까?
① 먼저 6억원이 상속재산인 경우 아들1, 아들2, 딸의 법정상속지분은 2억원이다.
② 유류분은 법정상속지분의 1/2이기 때문에 1억원
③ 따라서 딸은 아들1, 2에게 ‘1억원×3억원/6억원=5000만원’을 각각 유류분 반환청구할 수 있다. 참고로 유류분 반환청구는 만법상 상속개시일로부터 10년 이내, 상속개시 사실 및 증여나 유증 사실을 안 때로부터 1년 안에 청구하면 된다(민법 제1117조 소멸시효).
위의 사례는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유류분 계산 방법을 제시했지만, 실제의 유류분 계산은 복잡하다. 유류분 부족액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피상속인의 재산이 상속인과 그 외의 사람에게 어떻게 분배(증여, 유증)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또한 유류분 반환청구 소송은 경우에 따라서 복잡한 재산관계가 얽히거나 부수적인 쟁점사항(세금 등)들이 많기 때문에 반드시 변호사와 세무사의 도움을 받아 충분한 검토를 거쳐야 한다.
현명하게 유언장 작성하는 방법
유언을 통해 유가족의 ‘유류분’을 고려만 한다면 피상속인의 의사대로 재산을 분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유언은 민법에서 정하고 있는 5가지 방식(유언의 방식 참조)에 의해서만 유효하기 때문에 작성 시 신중을 기해야 한다.
특히 자필증서의 경우 유언서 전문, 연월일, 주소, 성명을 자서, 날인하지 않으면 무효가 된다.
과거 사회복지사업을 했던 A씨의 경우다. 2003년 11월에 세상을 떠났고 그 후 A씨의 금고에서 자필로 작성된 유언장이 발견되었다. 유언장에는 ‘유고 시 본인 명의의 부동산 및 금전신탁, 예금 전부를 B대학에 기부한다’고 적혀 있었다. A씨의 유족들은 유언장에 날인이 없으니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B대학은 자필로 작성된 만큼 날인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고인의 의사를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사례에서 120억원은 누구에게 귀속되었을까? 법원은 고인의 자필증서가 분명하지만 자필증서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유언장은 무효이고, 학교가 아닌 유족들이 상속재산 전부에 대해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다. 이는 유언장은 엄격한 형식에 따라 작성되어야 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자필증서에서 날인의 경우는 유언자의 인감도장뿐만 아니라 막도장도 무방하지만 사인은 안 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처럼 유언의 까다로운 요건 때문에 최근에는 유언대용신탁을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유언대용신탁은 가입자가 살아 있을 때는 자산을 운용해 수익을 돌려주고, 사후에는 상속인에게 재산을 이전하는 신탁상품이다. 그리고 살아생전에 재산을 분할함으로써 상속재산의 원만한 분배로 사망 후 재산분할에 관한 분쟁을 방지하고, 미성년자나 장애를 가진 상속인의 상속재산도 보존이 가능하며, 유언서 작성 및 복잡한 법적상속 절차를 생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활용 폭이 점점 커지고 있다.
상속·증여세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법
2017년 국세통계 1차 공개자료에 따르면, 2016년 상속세 신고세액은 2조3000억원, 상속세 신고 건수는 6217건으로 상속인 1인당 평균 신고세액은 3억7000만원으로 나타났다. 상속세는 6개월 안에 신고하고 납부해야 하기 때문에 당장 부담스러운 금액일 수밖에 없다. 상속세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상속세 기일(6개월)을 넘기지 마라
상속이 발생하면 고인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인해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재산분할이 원활하지 않아 상속분쟁이 장기화되는 경우 상속세 납부기일을 넘기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하지만 재산분배 등이 확정되지 않더라도 신고기한 내에 상속세를 신고해야 가산세 불이익(무신고 가산세 20%)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신고기한 내에 상속세를 납부할 경우 세금의 7%를 공제해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기한(6개월)을 넘길 경우 세금을 27% 이상 더 내 낭패를 보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기한 내 미신고 시 불이익 (상속 개시월의 말일로부터 6개월 이내)
-세액공제 불가 : 6개월 내 신고 시 산출세액의 7% 공제
-미신고 가산세 : 기한 내 미신고 시 산출세액의 20% 가산세
-납부 불성실 가산세 : 고지기한 내 납부 못할 경우 매년 10.95% 가산세
결국 1년만 늦어도 추가적인 부담이 약 37.95% 늘어나는 것이다.
줄 거면 빨리 줘라
상속세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평소에 피상속인의 재산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10년 단위로 자녀, 배우자에게 증여하는 방법을 활용하기도 한다. 배우자에게는 6억원, 성인 자녀에게는 5000만원까지 증여세가 부과되지 않는다. 특히 소득이 없는 자녀에게 사전증여를 한다면 향후 자금출처를 만들어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배우자와 자녀가 있는 상태에서 피상속인이 사망하면 최소 10억원은 상속공제(배우자공제 5억원, 일괄공제 5억원)가 되기 때문에 그 이하의 금액은 상속세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세대생략 이전(移轉)’ 고려해볼 만하다
부모가 자식에게 정상적으로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할아버지나 증조부가 세대를 건너뛰어 손자나 증손자에게 재산을 증여 또는 이전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들에게 물려준 증여재산의 과세표준이 1억원이면, 증여세의 세율은 10%가 적용되어 증여세 산출세액은 1000만원이 된다. 반면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증여한 경우에는 증여세의 세율이 13%(30%가산)가 되어 산출세액은 1300만원이 되기 때문에 아버지가 증여하는 경우보다 세금이 많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증여하고, 아버지가 다시 아들에게 증여하는 경우에는 증여세 산출세액이 2000만원이 되지만, 할아버지가 직접 손자에게 증여할 때는 1300만원이 되어 총액으로 볼 때는 세대생략 이전의 경우가 세금이 더 적다. 또한 피상속인(조부모)의 사망으로 상속세를 계산해야 할 경우에도 상속인(부모)에게 증여한 재산을 상속개시일 전 10년 내에 증여한 재산 모두 포함하지만 비상속인(손주)에게 증여한 재산은 5년 내에 증여한 재산만 포함하기 때문에 상속세 계산 시에도 유리하다.
생명보험을 활용하라
강남의 부자들이 거액의 상속세 납부재원을 준비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생명(종신)보험이다. 생명보험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상속세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활용 폭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계약구조(표 참조)에 따라 생명보험금이 상속재산에 포함되는 경우와 포함되지 않은 경우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병원비는 고인의 계좌에서 인출하라
고인의 병원비나 공과금, 장례비용, 채무 등은 상속세 계산 시 총 상속재산에서 빼도록 돼 있다. 장례비용의 경우 증빙이 없더라도 500만원을 공제해주며, 500만원을 초과하면 증빙에 의해 지출 사실이 확인되는 경우 공제해준다. 다만 장례비용이 1000만원을 초과하는 경우에는 1000만원까지만 공제해준다.
제목만 봐서는 범죄 수사 영화나 액션 영화로 착각할 수 있다. 상영관도 몇 군데 되지 않는다. 8월17일 개봉했으나 포스터도 안 보이고 홍보도 안 되어 있는 편이다. 예매순위도 잘나가는 영화 ,< VIP>, , 등에 가려 애니메이션 영화 수준이다. 눈썰미가 좋거나 관심을 갖고 찾아서 봐야하는 영화이다. 네티즌 평점 10점 만점에 9.8점의 수작이다.
최승호 감독으로 되어 있으나 KBS와 MBC출신 해고 기자, PD들이 만든 뉴스타파에서 제작했다. 다큐멘터리 영화로 출연에 전 대통령 이명박, 전 한국방송협회 부회장 김재철, 전 MBC 사장 김장겸 등 실제인물이 등장한다. 연장선상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도 등장한다.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공화국이다. 일반인들은 언론 탄압이 심하던 군부독재 시대 이후로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방송과 언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언론의 자유가 통제되면 일반 시청자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진실이 어떻게 호도 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영화의 시작은 MB정권이 진땀을 흘리게 한 미국산 쇠고기와 광우병 사태였다. MB정부는 이 사태가 언론 때문에 벌어진 일로 보고 언론 장악에 들어간다. 경찰력을 동원해 사장을 교체하고 낙하산을 투입한다. 그 과정에서 충돌한다. 2년 후 MB정권의 4대강 사업에 비판적인 MBC도 낙하산 인사를 투입하여 언론을 장악한다. 일단 언론이 장악되고 나서는 정부 홍보 일변도로 방송이 변하고 세월호 사고 당시에도 전원구조라는 엄청난 오보를 낸다. 국정 농단사태도 진실을 감추려다가 공영 방송 장악만으로는 막지 못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이런 일련의 투쟁 과정을 통해 담당 PD, 기자 등은 해고당하거나 제작진에서 물러나 한직으로 전보되었다. 처자식을 거느린 가장들이다. 이들이 그 후 얼마나 힘들게 살아오고 있는지도 보여준다. 300여명이 해고 내지는 업무 정지 처분을 받았고 소송을 통해 80명 중 71명이 복직되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이 영화에서 언론 장악 음모의 주범은 전직 대통령 이명박, 박근혜로 본다. 그리고 공범자들은 낙하산으로 투입된 사장들이다. 언론계에 있던 사람들이고 심지어 같은 회사에서 일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들은 무자비하게 파업에 동참하거나 정부에 불리한 기사를 내 보낸 담당자들에게 철저히 등을 돌리며 철퇴를 휘둘렀다. 권력의 하수인이 된 것이다.
용기 있는 사람들 덕분에 이 나라 언론이 죽지 않고 살아난다. 신뢰를 잃은 KBS와 MBC대신 종편으로 시청자들이 많이 옮겨 간 이유도 이런 역사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라서 재미가 없을 것 같지만, 어지간한 액션 영화보다 재미있다. 가끔 피식 웃음이 나오는 장면도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옮긴 영화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언론이 존재하지만, 습관적으로 시청하던 언론 편식이 얼마나 위험한 판단 기준을 주는지 알게 한 영화이다.
초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치매는 우리에게도 현실이 됐다. 문재인 정부가 ‘치매국가책임제’를 실현하기 위해 2000억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한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때 발생하는 문제점을 예측할 수 있는 좋은 사례를 곁에 두고 있다. 바로 일본이다.
치매 환자인 어머니를 모셨던 A씨는 지난 2012년 황당한 일을 겪었다. 서울 종로의 상가 건물 소유주였던 어머니에게 A씨의 삼촌 B씨가 접근해, 사후에 재산을 모두 자신이 맡는다는 위임장과 유언장을 받아낸 사실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A씨는 법원의 상속재산처분금지가처분신청을 받아냈지만, B씨는 법원의 결정 직전에 건물을 급히 팔아버렸다.
결국 소송을 벌인 끝에 2015년 법원은 치매로 법률적 의미와 효과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들을 배제하고 동생에게 모든 재산의 관리 처분 권한을 준 위임장은 무효라며, 건물을 산 매수인에게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말소하라고 판결했다.
유언자 의사 정상 여부 판정
이런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 민법에선 금치산 또는 한정치산 선고, 성년후견 심판 등의 제도로 법률 행위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면 모든 성인은 기본적으로 의사능력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속과 같은 법률 행위와 관련해 치매 같은 질환으로 인해 의사능력의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주장하는 자가 입증해야 한다.
이와 같은 문제는 유언장을 작성하는 사람에게도 현실적인 고민이 될 수 있다. 치매가 없거나 사소한 건망증이 나타나는 초기 치매의 경우 일상생활에는 장애가 없지만 병력이 법적 다툼의 소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언을 남겨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일이다.
일본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본의 메디컬리서치라는 회사는 최근 ‘의사능력감정(意思能力鑑定)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서비스는 유언 작성 전 작성자의 뇌 대사 기능을 아밀로이드 PET-CT 등의 장비를 이용한 진단과 정신과 전문의의 면담을 통해 의사능력의 유무를 감정하는 서비스다.
회사 측은 “일본은 치매환자 1300만 명 시대가 도래했고, 치매로 인한 상속 분쟁이 2014년 1만2577건에 달했다”며 “치매환자라도 유언장을 작성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의사능력감정을 통해 의사능력이 인정되면 분쟁의 소지를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직 국내에서는 분쟁이 발생한 이후에야 의사능력에 대한 의학적 견해를 묻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종합병원 신경과 전문의는 “법원에서 법적 분쟁으로 인해 소견서 작성을 요청받는 일이 왕왕 있다”며 “의학적으로 의사능력을 감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법적으로 첨예한 경우 소견서 작성이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법무법인 정앤파트너스의 의사 출신 성용배 변호사는 “국내에서도 유언장 작성자가 자발적으로 인지능력과 관련한 진료나 감정을 받고, 진료기록, 소견서 등 그 근거를 남기는 것은 고려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이는 의사능력의 존부에 대해 있을 수 있는 문제제기의 소지를 불식시킬 수 있는 방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치매환자 편히 치료받을 수 있도록
치매환자를 위한 일본 최초의 원격진료 서비스도 얼마 전 시작됐다. 준텐도(順天堂)대학교병원은 지난 7월 파킨슨병이나 알츠하이머병 환자를 위한 원격진료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는 IBM에서 개발한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운영되며, 환자나 보호자는 아이패드를 통해 병원과 치료 정보를 주고받게 된다.
병원 측은 “환자의 내원에 필요한 신체적,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가족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환자를 돕는 간병인을 통한 정보도 의사가 참고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멀리 떨어져 있는 환자에게 효율적인 진료 서비스 제공과 함께 지역 병원과의 연계도 쉬워진다”고 설명했다. 또 병원 측은 원격진료가 활성화돼 자료가 축적되면 치매환자의 빅데이터 분석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1996년 서울대학교병원이 원격치매센터를 설립해 일찌감치 원격진료 서비스에 대한 시도가 있었다. 이어 정부의 원격진료 시범사업을 통해 수년간 의료 인프라가 부족한 지자체를 중심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돼왔다. 그러나 원격진료를 ‘정보통신기술 활용의료’로 명칭을 바꾸고 대상도 축소해, 보건복지부가 발의한 의료법 개정안은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