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결혼식이 많은 토요일이었다. 양재역에서 지하철을 탈까하다가 논현동에 있는 호텔 결혼식에 늦지 않으려고 택시를 탔다. 그런데 택시문을 열고 좌석에 앉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운전석에서
“안녕하세요? 오늘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언뜻 백밀러로 비치는 기사님의 얼굴은 백발의 노신사였다. 요즘 택시를 타면 싸움이라도 하고 막 돌아온 사람처럼 화난 얼굴을 하고 있거나, 무뚝뚝하게 아무 말도 안하고 있어서 먼저 목적지를 말하면 마지못해 겨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예”하고는 운전만하는 기사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특이한 분이라 생각되어 말을 걸었다.
“그 연세에 어떻게 즐겁게 운전을 하세요?”
“아아! 아니예요, 저는 40대 청년인데요....”
마침 주말이라 10분정도 걸릴 거라 생각했던 길이 차가 밀리는 바람에 50여분이 걸렸다.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그 기사 분은 신나는 말투로 자신이 왜 즐겁게 손님을 대하고, 신바람 나게 운전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주었다. 그 기사분의 정확한 나이는 36년생이니 우리나이로 팔십 둘이다. 그 나이라면 친구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이 반이 넘고 하루를 어떻게 무엇을 하며 소일할까 고민하거나 갈 데도 별로 없이 쓸쓸하게 지내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서른살 때부터 운전을 했으니 50여 년간 택시를 운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부터 20년전 환갑이 지나면서 택시운전은 물론 세상이 싫어졌다고 했다. 손님들이 보기만 해도 짜증스럽고, 운전은 갈수록 하기 힘들어지고, ‘왜 나만 이런 힘든 일 하고 살아야 하는가?’하는 자학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운전대를 던져버리고 무작정 쉬면서 산에도 가고, 없는 돈에 해외로 놀러 다니고, 좋아하지도 않았던 술도 마음껏 마셔보기도 했다. 그러나 무작정 놀고먹는다는 게 점점 힘들기 시작했다. 몸이 좋아지고 마음이 편해지기는커녕 몸에는 전에 없었던 당뇨와 고혈압이 생기고 얼굴의 표정은 점점 어둡게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더구나 운전대를 놓은 지 6개월이 지나니 오라는 데도 없고 갈 데조차 없어지면서 세상과 격리되어 나 혼자라는 것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운전이야말로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는 소중한 사실을 알게 된 어느 순간 손님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고, 일의 소중함도 서서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아하, 그렇구나! 내 생각을 먼저 바꾸자’를 마음먹었다.
“아하, 그렇지! 모든 게 내 탓이다. 내가 모든 걸 내려놓고 거꾸로 생각하자. 세상의 주인은 남이 아니고 바로 나다. 나를 바꾸어보자!”
그분의 행복의 개념도 욕심에서 봉사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후 그분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변화의 시작을 하기로 하고 부인에게 무조건 존대말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로 긍정의 하루하루를 시작, 평소에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집안 청소를 도와주는 작은 일부터 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거리감응 느껴왔던 할머니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외출할 때는 연인들처럼 늘 손을 잡고 다니게 되었다.
1년만에 다시 완전히 놓았던 택시운전대를 잡게 되었는데, 서울에서 가장 친절한 기사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시작한지 벌써 20년째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이미 손자들까지도 모두 대학생이 되고 아무 할일도 없을 나이지만 지금 집안에서의 위치가 상당히 달라졌다. 한때는 자식들이 언제 용돈이라도 듬뿍 주려나 기다리기도 했고, 자주 찾아주지 않는 자식, 손자들이 야속하가도 했지만 지금은 거꾸로 며느리나 손자들에게 가끔 용돈까지 주다보니 당당한 아버지, 할아버지가 되었다.
덕분에 지금은 심각했던 당뇨도 다 없어졌고,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믿기지 않을 만큼 5,60대 건강을 유지하여, 지난해 말 종합검진에서 거의 만점을 받았다. 오히려 의사들이 “이처럼 건강한 비결이 도대체 뭐예요?”하며 묻더라고 자랑을 했다.
정말 ‘아하, 그렇구나!’라는 말 한마디의 효과는 만병통치약이요, 자신을 변화시켜 세상을 바꿔나가는 대단한 역할을 해낸 것이다. 그날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 하루하루 신나게 택시에 실어 나르는 긍정바이러스의 힘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