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제각각 피로를 벗어나는 자신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내 경우에는 ‘나‘를 벗어나 조금이나마 ’다른 존재‘로 살아보기 위해 아무 연고가 없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곤 한다. 이번 가을에도 그런 이유로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찾은 곳이 동해시다. 오래전부터 두타산과 청옥산의 무릉계곡이 있는 동해시에 가고 싶었다.
동해시의 무릉계곡은 백두대간의 줄기로 동서 간 분수령을 이루는 깊고 험준한 두타산과 서쪽의 청옥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이다. 내가 동해시의 무릉계곡에 갔을 때 두타산과 청옥산의 능선에 내려온 가을은 노랑, 빨강의 색들이 서로 합쳐지며 있었다. 그들은 서로 뒤엉키고 섞이면서 하나의 층을 이루었다. 가을 햇빛은 차가운 공기와 잘 어우러졌다. 언제 이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는지. 갈색 나뭇잎들은 가지를 길게 빼고 툭툭 떨어졌다. 숲속 길에, 골짜기 흐르는 물 위에.
아프리카 격언- ‘너무 빨리 걷지 말아라.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어라.’
그렇게 걸을 수 있는 길이 무릉계곡의 길이다. 가파르지 않은 산길을 ‘남’이 되어 걸으면서 ‘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길이다.
입구의 관리사무소를 지나 조금 걸어가면 계곡 바로 옆에 있는 1,500평 정도의 넓은 반석을 만나게 된다. 이 반석 위에는 이곳에 왔던 명필가와 묵객들이 새겨놓은 수 많은 크고 작은 석각들이 있다. 그 글 중 이 계곡을 무릉선원(武陵仙源)으로 표현한 글귀가 있다.
무릉반석 위쪽에는 유서 깊은 사찰인 삼화사가 있다. 신라 시대 선덕여왕 11년(642년)에 창건한 사찰로 고려 태조 때 ‘삼화사’로 개칭되었다. 이곳에는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철조 노사나불 좌상’이 있다. 길을 따라 서 있는 사찰의 담에는 배고픈 담쟁이덩굴이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가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절경들로 학소대, 관음폭포, 선녀탕, 쌍폭포, 용추폭포 등이 있다. 화강암 암반 위에서 떨어지는 이 폭포와 소(沼)들에는 저마다의 사연과 풍경이 있다. 각각의 이야기와 풍경을 함께 하다 보면 유체 이탈된 나를 만나게 된다.
무릉계곡 입구 맞은편에 맑은 공기와 물소리, 새소리로 신선한 기운을 찾을 수 있는 ‘동해무릉 건강숲’이 있다. 이곳은 심각해지는 환경성 질환을 예방하고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다. 하루 100여 명이 이용할 수 있는 친환경 숙박동과 테마체험실, 자연식 건강 식당 등을 갖추고 있다. 친환경 숙박 시설은 황토와 편백나무 등 친환경 자재를 이용해 만든 숙박 시설로 38개의 객실이 있다. 테마체험실에는 건강에 좋은 소금 동굴 등 각종 찜질방과 산소힐링방 등을 갖추고 있다.
‘동해 무릉 건강 숲’에서 힐링의 밤을 보낸 다음 날 ‘한국인이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에 선정되었던 ‘추암촛대바위’가 있는 해안으로 갔다. 미묘한 해안 절벽을 따라 만들어진 길에서부터 이어진 추암근린공원까지 잘 조성된 하나의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그중에서도 동해의 맑은 바닷물과 크고 작은 바위에 잘게 부서지는 파도, 그리움이 배인 촛대바위는 해안의 주인공이었다. 촛대바위의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그리움이 가슴 깊이 새겨졌다. 그 그리움은 단지 힘이 세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움의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나에게 물었다. 움츠러든 가을 여행자의 마음을 토닥거려주었다.
동해시는 너무 볼 것이 많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자연체험 학습장인 ‘천곡천연동굴’도 도심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VR 체험 시설과 함께 석회암 동굴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한국에서 가장 긴 걷는 길인 ‘해파랑길’에 속하는 바닷가 길도 동해시에 있다. 해파랑길은 총 길이 770km로 부산의 오륙도에서부터 고성군의 통일전망대까지 동해안을 따라 걷는 ‘태양과 걷는 사색의 길’이다. 이중 ‘해파랑길 33코스’와 ‘34코스’가 동해시에 속하는 길이다. 한섬에서 출발해 천곡항을 향해 걸었다.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바다를 낀 소나무 숲길도 좋았고, 잘 닦여진 데크의 계단에 앉아 바라보는 바다도 좋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해파랑길을 걸을 때 들었다. 누구라도 무엇엔가 사로잡혀 있지 않은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데... 아직도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내가 꿈꾸는 나가 내 안에서 두 개의 심연으로 존재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래, 언제까지고 가슴 아픈 방황을 계속해보자. 내 마음 깊은 곳의 온갖 울림과 떨림, 미세한 균열과 변화의 틈새를 지켜보자. 조금씩 전과 다른 나를 향해 아주 느리게 변해가는 나를 발견해보자.’
가을의 어느 날에 간 동해시 여행을 통해 1㎜(밀리미터) 변한 내가 보였다.
▪ 무릉계곡: 강원도 동해시 삼화로 538.
▪ 동해 무릉 건강 숲: 관련내용 홈페이지 참조 (http://forest.dh.go.kr)
▪ 천곡천연동굴: 강원도 동해시 동굴로 50.
▪ 추암촛대바위: 강원도 동해시 촛대바위길 6.
▪ 해파랑길: 동해시청 관광과
사의재 (四宜齎)
꽃 한 조각 떨어져도 봄빛이 죽거늘
수만 꽃잎 흩날리니 슬픔 어이 견디리...
‘그늘이 되어주시던 주상이 승하하시고 나니 이 한 몸 간수할 곳이 없구나. 주상이야말로 나에겐 꽃이셨네. 꽃 잎인 한 분 형님은 순교하시고, 다른 한 분 형님은 따로 떨어져 다른 곳으로 유배되고...... 견딜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희망의 창이 보이지 않는 것이구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약용은 그의 형들과 함께 신유사옥(1801년) 때 유배를 당한다. 그는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그가 강진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를 둘러싼 세상은 온통 절망이었다. 유배가 그렇듯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게 무의미해 보였다. 그의 나이 40세.
그는 길을 잃었다. 눈에 보이는 길이 아닌 마음의 길, 인생의 길을 잃었다. 길을 잃은 그가 선택한 것은 미친 듯이 걷는 것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헤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패라는 상실감이기도 했고, 끝나버린 인연의 아픔을 곱씹는 것이기도 했다. 어쩌면 치밀하게 준비했던 인생 계획표가 없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강진에 온 정약용의 초기 생활을 지켜보던 주막의 나이 든 주모가 어느 날 그에게 한마디 했다.
“어찌 그냥 헛되이 살려고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부터 그는 변했다. 스스로 생활의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사소한 기대를 통해 우선 현실을 극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작은 의미 부여와 노력을 통해 절망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태도를 바꾼 순간 다산은 자기가 겪고 있는 시련의 의미를 찾아냈다. 그때부터 4년 동안 그는 그곳에 머물며 후학을 양성했다.
또한, 삶의 의미를 철저하게 현실 속에서 찾은 다산에게 이 시기는 민초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묵묵하게 성실히 살아가는 백성들의 모습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해서 본인이 묵은 방을 ‘생각을 맑게, 용모를 단정히, 말은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라는 의미로 ‘사의재(四宜齋)’로 지었다.
본래 경세제민을 실천하는 가정환경에서 자라기도 했지만, 이때의 시간이 그의 명저 ‘목민심서’를 구상하는데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강진군에서는 다산의 뜻을 기리고자 그가 유배를 와서 초기에 머물렀던 사의재를 복원하여 한옥 체험 시설로 운영하고 있다. 단순히 먹고 자는 공간이 아니라 복합 문화공간으로 구성하였다. 다양한 볼거리, 먹거리, 체험거리를 제공한다. 사의재가 있는 위치가 강진읍의 중심지여서 걸어서 ‘영랑 생가’와 ‘세계 모란공원’도 둘러볼 수 있다.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긋함과 함께 마루 턱에 앉아 고즈넉한 가을밤 달구경 하는 시간을 가져 보자. 가슴 깊숙한 곳에서 다산의 삶의 지혜가 울려오는 밤이 된다.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의 외가는 해남 윤씨로, 어머니가 문인인 윤선도의 딸이다. 학문을 중시하는 외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강진으로 유배를 왔지만, 외가인 해남이 가까이에 있는 것이 다산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해남의 외가에는 자체적으로 장서를 수집해 보관해 놓는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유배기간에 학문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그는 외가에서 마련해준 이곳 다산초당에서 1808년부터 유배가 끝나는 1818년까지 지냈다.
다산은 유배를 온 신분의 한계 때문에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지내면서 기존 제도의 개정을 논하는 ‘경세유표’, 지방관이 부패하지 않도록 권고하는 ‘목민심서’, 공정한 재판을 논하는 ‘흠흠신서’ 등 실학과 조선 유학, 법의학 등 500여 권의 저서를 썼다. 그의 생애 업적 대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그에게 학문은 살아가는 것 그 자체였다. 기본이 유학자이다 보니 먼저 자기 성찰과 세계 인식의 기준이 성리학에 바탕을 둔 실학이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공부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변화가 필요한 다양한 분야에 대해 그토록 많은 글을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생겼던 것이다.
다산의 유배 생활로 인한 세상과의 단절을 메꿔준 이는 벗이자 스승이며 제자인 ‘혜장선사’였다. 그들은 대화하고 공감하며 화합하기 위해 초당 뒤 만덕산 백련사 가는 오솔길을 무수히 걸었다. 제한된 세상과의 통로였지만 소나무 숲길, 동백꽃 길, 차 밭으로 이어진 이 길을 걸으며 그는 세상을 제대로 보는 법을 터득했다.
가두어진 하루하루는 생의 의미를 사라지게 하는 물리적 장치다. 하지만 다산은 초당 지붕 끝에서 흘러내리는 가을비 소리에 번뇌를 멈추고, 약천(藥泉)에 달인 차로 속기(세속의 기운)를 씻으며 스스로 인생의 격조를 올렸다. 그가 위대한 이유다.
다산초당은 노후화되어 붕괴한 것을 1957년 복원한 것이다. 소나무 뿌리가 뒤엉킨 소나무 숲 ‘뿌리의 길’을 800m 정도 올라가면 고적한 유배 생활의 정취가 서려 있는 초당이 나타난다. 다산이 직접 새겼다는 ‘정석 바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茶竈 ㆍ 차 달이는 부뚜막)’ 등을 초당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초당으로 가는 숲속 길에서부터 절제되고 제어된 기운이 느껴진다. 다산초당은 단순하다. 그 단순함이 다산 학문의 핵심과 통하는 것이다.
가을이어서 그런지 벌써 겨울이 기다려진다. 아마, 동백꽃 핀 다산초당 숲길을 걷고 싶어서 그런지 모른다.
백운동 원림
10년 동안 시베리아에서의 감옥과 유배 생활을 마친 후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스토옙스키는 “죽음의 집의 기록(Notes from a dead house)”이라는 장편 소설을 썼다. 그는 감옥과 유배 생활을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집’으로 표현했다. 그만큼 유배의 시간은 고통이고 지옥 같은 생활이다.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와 ‘구원에 대한 희망’을 본인 문학의 화두로 삼았던 도스토옙스키는 유배 생활을 통해 무엇이 모든 죄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을까? 그것은 ‘단절’이었다. 단절은 고립이고 대립이며, 증오와 이기주의의 시작이다.
유배지의 폐쇄적 환경인 단절을 벗어나기 위해 다산이 선택한 길은 ‘사랑’이었다. 사랑은 실천적 사랑과 공상적 사랑으로 나뉜다. 유배지에서 다산의 실천적 사랑은 후학 양성과 학문 탐구다. 공상적 사랑은 초의선사, 이시헌 등과의 교류와 월출산 줄기를 중심으로 한 자연과의 만남이었다.
다산이 제자들과 함께 강진의 자연을 만난 곳이 백운동 원림(園林)이다. 백운동 원림은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동과 함께 ‘호남 3대 정원’으로 불린다.
17세기에 이담로가 조성한 이곳은 자연과 인공이 적재적소에 배치된 균형 잡힌 조화를 보이고 있다. 집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을 인공적으로 끌어들여 마당의 상지와 하지를 거쳐 아홉 굽이 휘돌아 나가는 유상구곡(流觴九曲)의 구조를 갖추었다. 화단에는 소나무, 대나무, 국화, 난초 등이 자라고 있다.
다산은 그림을 잘 그리는 초의를 시켜 ‘백운동도’를 그리게 했다. 스스로는 12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칭송하는 시를 읊어 시와 그림을 묶은 ‘백운첩’을 남겼다.
백운첩에 담긴 12곳이 ‘백운동 12 승경’이다. 1경: 옥판봉 (절경의 월출산 산봉우리) 2경: 산다경 (원림입구 동백나무 숲길) 3경: 백매오 (집 주변 언덕의 매화나무) 4경: 홍옥포 (대문 앞 단풍나무와 작은 폭포) 5경: 유상곡수 (마당의 여섯 굽이 물굽이) 6경: 창하벽 (다산이 붉은 먹으로 쓴 푸른빛 석벽) 7경: 정유강 (언덕 위, 용 비늘처럼 생긴 소나무) 8경: 모란체 (본채 아래 3단의 화단) 9경: 취미선방 (고즈넉한 세 칸의 초가 사랑채) 10경: 풍단 (창하벽 위 단풍나무) 11경: 정선대 (창하벽 위 정자) 12경: 운당원 (왕대나무 숲)
강진의 자연을 정원에 담은 이곳에서 다산은 견뎌냈다. 유배지에서의 견뎌냄은 사랑의 힘이었다.
강진 백운동 원림은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백운동 원림에 가기 위해서는 주차장 옆에 있는 소나무와 동백나무 우거진 숲길을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
늘 그렇듯이 숲길을 걸을 때 느껴지는 신선한 자연의 공기가 온몸을 깨운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하얀 가을 햇살이 눈 부시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대문 앞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에 서려 있는 녹색 이끼는 자연의 시간이다. 낮은 담벽을 타고 올라오는 넝쿨은 수줍은 듯 여행자를 훔쳐본다.
곧게 뻗은 대나무 사이로 청정한 가을바람이 살짝 불어왔다.
앞마당이 보이는 툇마루에 앉아 한나절을 보내고 싶다. 다산처럼 건너편 차 밭에서 실려 오는 가을내음을 맡으면서 자연과 통(通)하는 시간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지리산 중턱 해발 926m 회남재 숲길 10km를 걸었다. 내 고향 청학동 삼성궁을 출발점으로 하동군 악양면 등촌 마을까지. 단풍 소식이 남녘을 향하는 이맘때쯤이면 더욱 고향이 그리워진다. 마을마다 잎 다 떨어진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감이 정겨운 계절이다.
남쪽이지만 높은 지대여서 지금쯤 단풍이 곱게 물들지 않았을까? 고향을 찾는 기쁨과 함께 단풍 구경 기대감으로 들뜨기도 했다.
10월 26일 열린 ‘하동군 지리산 회남재 숲길 걷기 행사’에 참여한 많은 이들과 함께 했다. 청학동 삼성궁 주변에는 아직 단풍이 제 모습을 찾지 못했으나 먼발치로 올려다본 산등성이는 단풍으로 울긋불긋했다. 가을 하늘의 파란색과 보색 되어 산세가 웅장하면서도 또렷이 다가왔다. 머지않아 청학골까지 곱게 물들지 싶다.
이 숲길은 회남(回南)재 정상에 있는 회남정을 중간 지점으로 지리산 중턱을 돌고 오르내리며 하동군 청암면과 악양면을 잇는다. 청학동의 신비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무대, 평사리 최참판 댁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회남정 위로는 지리산의 시루봉과 삼신봉, 아래로는 남해로 뻗은 산줄기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한 폭의 산수화다.
지리산 삼신봉 줄기를 타고 청학동 삼성궁에서 토지 마을 최참판 댁이 있는 악양면 등촌까지 이어진 구불구불한 10km 고갯길이다.
삼성궁에서 회남재 정상까지는 흙길이나 승용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너비다. 산 중턱을 도는 평지를 걷는 듯한 6km 둘레길이다. 중간에 톱밥을 펼쳐놓은 길은 발걸음을 더 편하게 했다.
회남정에서 등촌 마을까지는 승합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4km 포장도로다. 걷기엔 다소 힘든 코스지만 아름드리나무로 둘러쳐진 숲길이어서 힘들지 않게 느껴진다.
세 갈래 코스가 있고 모두 회남재 정상을 중간거점으로 한다. 첫 번째 길은 삼성궁에서 악양면 등촌까지의 편도 10km. 두 번째는 삼성궁에서 청학동 초입에 있는 묵계초등학교까지의 편도 10km. 또 하나의 코스는 삼성궁에서 회남재까지 왕복하는 12km다.
첫 번째 코스를 걸었다. 일행들의 사진 촬영도 맡아 더 많은 걸음을 했다. 걷기뿐만 아니라 고갯길을 도는 짜릿함으로 산악자전거 트래킹 코스로도 유명하단다.
'회남재’는 조선의 대표적 선비 남명 조식 선생으로부터 유래했다.
산청군 덕산에 살던 선생은 청암을 거쳐 살기 좋다는 악양을 찾아 나섰다. 두 지역의 경계지점 산등성이에 올라 내려다본 악양골이 너무 깊었고 섬진강 흐르는 모습이 풍수지리학적으로 길한 곳이 아니라 판단하고 그 자리에서 돌아갔다. 남명 선생이 되돌아간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회남재를 갈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서울 등지에서 이용하기 쉬운 길은 대진 고속도로 단성IC에서 나와 지리산 중산리 방향으로 가다가 산청양수발전소 인근에서 삼신봉 터널을 지나면 청학동이다.
또 하나는 남해고속도로 하동IC를 나와 아름다운 길 섬진강 변을 따라가다가 악양면으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진주시와 하동읍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청학동행 버스를 탈 수도 있다.
충북 보은군 장안면 개안길 10-2에 위치한 ‘보은 우당 고택’은 속리산 천왕봉에서 흘러내리는 삼가천의 물줄기 가운데 있는 국가민속문화제 제 134호로 지정된 99칸의 한국 전통 가옥이다.
서원계곡 끝자락 소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지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안담으로 둘러친 사랑채가 있다. 오른쪽에 다시 안담을 가진 안채가, 그리고 두 본채 사이를 걸어가면 별도의 담을 가진 사당이 자리해 있는 구성이다. 안채 뒤켠으로는 전국8도의 장독대 800개가 모여 장관을 이룬 모습도 보여진다.
선민혁(72세)의 말에 의하면 이 고택은 전남 고흥 일대에서 부를 쌓은 보성 선씨 집안의 18세손 우당 선영홍공이 1900년 초에 이곳에 터를 잡고 당시 유명한 궁궐 목수 방대문을 도편수로 참여케 하여 십여년에 걸쳐 지었다고 한다
또한 선씨 집안은 선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라는 ‘위선최락(爲善最樂)’이라는 가풍에 걸맞게 사비로 우수한 인재를 양성을 위해 노력했으며 마을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많이 베풀어 주위에 배고픈 이들이 없었다고 한다.
삼천평이 넘는 이 고택 이곳 저곳에는 잘 익은 감이 주렁 주렁 열려있고 그윽한 향을 풍기는 노란 탱자나무가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돌담들을 따라 피어난 꽃들과 담쟁이, 영글어 익은 빨간 나무 열매들과 함께 풍성한 가을을 만끽할 수 있다.
걷기 쉬운 둘레길이다. 산이 높지 않고 구간 거리도 짧은 편이니까. ‘백범 명상길’ 2코스(3km)를 걸을 경우 한 시간 반이 소요된다. 볼 것 많은 거찰, 마곡사 답사도 즐겁다. ‘정감록’은 마곡사 일대를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십승지의 하나로 꼽았다.
마곡사(麻谷寺) 들머리. 노보살의 허리가 기역자(子)로 휘었다. 향초가 들었을까? 야윈 등허리에서 작은 배낭이 대롱거린다. 그마저 무거워서겠지. 발걸음은 추를 매단 듯 더디다. 하지만 아랑곳없다. 안간힘을 다해 오르고 또 오른다. 노인은 오늘 불단 앞에 엎드려 알량한 아들놈의 복덕을 빌려나? 까마득한 고대에도 우리네 어머니들은 저렇게 절을 찾았을 게다. 부처 아니고선 기댈 언덕이 없어, 삶의 절박한 굽이를 만날 때마다 산을 올랐을 게다. 모든 어머니의 모든 기도는 시공을 초월해 애절하다.
불자들만 절을 찾는 건 아니다. 세상 쓴맛을 본 사람들도 곧잘 절집을 찾아든다. 백범 김구. 그도 마곡사에서 짧은 한때를 보냈다. 보리심(菩提心)에 이끌린 출가가 아니었다. 몸을 숨기려는 입산이었으니까. 간도 크고 통은 더 컸던 사람. 그의 행보엔 거침이 없어 파란도 많았다. 1896년, 백범 나이 스물하나 때엔 이른바 ‘치안포 사건’을 야기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에 대한 분노가 들끓던 때였다. 혈기 방장했던 청년 백범은 일본군 특무장교 하나를 척살했다.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집행일 직전, 탈옥(고종의 형집행정지 명령으로 가출옥했다는 설도 있다)에 성공했다. 그 뒤 마곡사에 은신했던 거다.
마곡사는 태화산 품에 안긴 절이다. 마곡사로부터 산 곳곳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엔 ‘백범 명상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백범이 명상했던 길이란다. 세상의 명명(命名)들은 왜 이렇게 화려할까? 도망자 신세가 된 백범의 뒤엉킨 젊은 가슴에 명상이 고일 자리가 있기나 했을까. 억울하고 서러워 갈피없이 흔들리지 않았을까. 그저 백범을 명상하는 길이라 읽자. 백범의 굳센 기개를, 은신의 고독을, 시대에의 울분을 헤아리며 천천히 걷기에 좋은 둘레길.
산이 있으니 물이 흐르고, 절이 있으니 향내가 번진다. 마곡사 경내엔 진초록을 뿜는 향나무 한 그루가 있다. ‘백범 향나무’다. 광복 직후인 1946년, 어느덧 노경에 접어든 백범이 마곡사를 다시 찾아 심은 나무라지. 옹골차게도 자랐다. 거목은 아니지만 거목이다. 백범이라는 거인의 아우라 아롱져서. 그렇다면 저 고결한 향나무, 백범이 후세에 건넨 숭고한 봉헌이라 해두자. 변하지 않는 세상의 실없음과 누추함을 질책하는, 신랄한 역설의 봉헌.
산길을 오른다. 도회의 익숙한 길에서 빠져나온, 이 들썩이는 기분은 해방감? 상가와 차량으로 너절한 도시에서와 달리, 숲에서 둘러보면 모든 게 순도를 머금고 다가온다. 풀들은 낮은 바닥에서도 얼마나 태연한가. 나뭇가지를 툭 치며 세차게 날아오르는, 저 조막만 한 새의 생존은 얼마나 자립적인가. 어쩌면 산에 사는 것들이야말로 진실을 구현한 존재다. 사람만 부질없다. 진실을 캔다 하고서 제 무덤을 판다. 그게 사람만의 일도 아니지. 역사도 시대정신도 대개 진실과 거리가 멀다. 암살로 생을 마친 백범의 불행이라니. 어처구니없음이라니.
궁색한 잡념을 굴리다 백련암에 들어선다. 백범이 은거해 도를 닦았다는 암자다. 산중턱 작은 암자라 별안간 앞이 탁 트인다. 모든 별안간 탁 트이는 순간들은 희열을 가져다준다. 그마저도 말 그대로의 순간일 뿐이고, 이내 기갈(飢渴)이 몰려든다. 백범은 작은 암자에서 어떻게 견뎠을까. ‘백범일지’를 보면, 그는 ‘굴갓 쓰고 염주 걸고 바랑 지고’ 한동안 중 생활을 했다. 개울가에서 삭발례를 하고, 원종(圓宗)이라는 법명까지 얻었으니, 위장 은신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는 아무나 닦는 게 아니다. 절구통처럼 진득이 눌러앉는 취미가 있는 자여야 수행에 목을 걸 수 있다. 백범은 그런 개성이 아니다. 그가 한 마리 잉어라면, 자기 배만 채우고 마는 게 아니라, 강물을 통째 퍼다 모든 배들을 채워줘야 직성이 풀리는 잉어가 아니었을까. ‘백범일지’를 또 보면, 그는 ‘중놈’이 된 것을 ‘자소자탄’하며 마곡사의 날들을 견디었다. 한마디로 고(苦)라! 진통제를 삼키고 돌아가는 세상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으니.
승냥이 우는 산방에 홀로 머물며 소나기처럼 울고 난 뒤였을까? 백범은 어느 날 홀연히 절을 떠났다. 은사에겐 금강산에 공부하러 간다 했다. 그러곤 광복운동 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숲길 군데군데, ‘백범 명상길’ 팻말이 걸려 있다. 명상은 오간 데 없으나, 마음엔 샘물이 고인다. 백범의 행장 한 자락 훔쳐보자니.
바스락바스락 낙엽이 뒹구는 10월, 가을의 중턱에 읽을 만한 신간을 소개한다.
◇ 취미로 직업을 삼다 (김욱 저ㆍ책읽는고양이)
일흔의 나이에 안락한 노후를 뒤로하고 취미였던 독서를 밑천 삼아 밥벌이를 시작한 늦깎이 번역가의 생존분투기를 그렸다. 저자는 젊은 시절 문학인이 되고 싶었지만 생계를 위해 신문기자의 길을 택한다. 퇴직 후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쫄딱 망해 남의 집 묘막살이 신세로 전락했지만, 그는 잠시 잊고 지냈던 꿈을 다시 펼쳐보기로 한다. 그렇게 일흔이 넘어 시작한 제2직업을 통해, 15년 동안 무려 200권이 넘는 책을 번역했고 ‘폭주 노년’, ‘삶의 끝이 오니 보이는 것들’ 등의 저서를 펴내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저자는 이번 책을 통해 “우리는 모두 미지의 존재”라며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재능은 나이 들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욱 풍성해진다”고 용기를 갖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길 조언한다. 더불어 사회적 운명에 휘둘리며 보낸 과거를 벗어나 이제라도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나가길 강조한다.
◇ 죽음의 에티켓 (롤란트 슐츠 저ㆍ스노우폭스북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될 죽음의 전 과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어린아이, 청년, 노인, 그리고 저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각기 다른 죽음의 방식을 보여주고, 현재 삶의 의미를 고찰하게 만든다.
◇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임운석 저ㆍ시공사)
돈, 시간,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현대인들을 위한 짧은 걷기 여행 팁을 담았다. 피톤치드 가득한 숲길부터 빈티지 감성 골목길, 수도권 인근 바닷길 등 다양한 콘셉트에 따라 사시사철 걷기 좋은 40가지 코스를 소개한다.
◇ 품위 있는 삶 (정소현 저ㆍ창비)
2019 이효석 문학상 최종심에 오른 ‘품위 있는 삶, 110세 보험’을 비롯한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렸다. 예기치 못한 죽음, 또는 준비된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외면할 수 없는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 대한민국 요즘 여행 (옥미혜, 서준규 공저ㆍ알에이치코리아)
각종 빅데이터를 활용해 약 3년간 공들여 찾아낸 국내 여행지 32개 도시, 738개 장소를 명소, 맛집, 카페, 숙소 등으로 나눠 정리했다. 22가지 테마 여행 콘텐츠를 비롯해 휴대용 ‘베스트 150 지도’까지 담겨 있어 실용적이다.
어느 해인가 추석 즈음 닭실마을에 간 적이 있다. 푸른 논 너머로 기와집들이 보였다. 기와지붕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 봉긋 솟았다. 마을 앞에는 계곡이 흘렀다. 풍수지리를 몰라도 이곳이 명당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을 아낙네들은 부녀회관에 모여 추석 한과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한 할머니가 손에 쥐여준 한과를 맛봤다. 500년 전통을 이어온 닭실한과였다. 그 뒤로 이맘때면 닭실마을이 생각난다.
걷기 코스
봉화공용터미널에서 택시 탑승▶ 석천계곡 입구 하차▶ 삼계서원▶ 석천계곡▶ 석천정사▶ 솔숲길▶ 징검다리▶ 닭실마을 충재박물관▶ 청암정▶ 충재고택▶ 닭실마을 부녀회관▶ 닭실마을 정류장에서 버스 탑승▶ 봉화공용터미널 하차
전통마을인 닭실마을은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이 세운 마을이다. 충재 선생이 기묘사화 때 이곳으로 내려와 정착하면서 안동 권 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의 후손이 지금까지 전통을 지키며 대대로 살고 있다. 마을에 충재 종택, 청암정, 석천정사, 삼계서원 등의 충재 선생 관련 유적지가 남아 있어 사적 및 명승으로 지정됐다. 2012년에는 살기 좋고, 풍광이 뛰어난 마을로 인정받아 ‘대한민국 농어촌 마을’ 대상을 수상했다.
닭실마을은 ‘닭 모양의 마을’이란 뜻이다. 한자로는 닭 酉(유), 골짜기 谷(곡), 마을 里(리)를 쓴다. 닭을 닮은 산이 알을 품듯 마을을 감싸고 있는 모양이어서 옛날부터 길지로 알려졌다. 경상도에서는 닭을 ‘달’로 발음해 마을 사람들은 달실마을이라 부른다.
닭실마을을 구석구석 여행하려면 삼계서원을 먼저 둘러보고 석천계곡을 지나 마을로 들어가는 코스가 좋다. 닭실마을의 옛 입구인 석천계곡으로 가기 전에 왼쪽 길로 빠져 삼계서원에 잠시 들른다.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이정표 삼아 시골길을 걷는다. 5분쯤 걸으면 은행나무 앞에 있는 삼계서원에 닿는다. 이곳은 충재 선생의 장남인 권동보(1518~1592)가 안동 부사의 도움을 받아 부친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충재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서원을 둘러보고 석천계곡으로 향한다. 삼계서원에서 석천계곡 입구까지는 코 닿을 거리다.
석천정사를 품은 석천계곡
석천계곡은 폭이 넓고 골이 깊지 않다. 여름철에는 봉화 사람들이 이곳에서 물놀이와 견지낚시를 하며 피서를 즐긴다. 석천계곡 입구의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부터 조붓한 솔숲길이 이어진다. 숲길에 들어서자 ‘청하동천(靑霞洞天)’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버티고 섰다. 청하동천은 ‘하늘 아래 신선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다. 옛날 기암괴석이 많은 석천계곡에 밤마다 도깨비들이 몰려와 놀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선비들 공부에 방해가 되자 충재 선생의 5대손인 명필 권두웅(1656~1732)이 바위에, ‘이곳은 신성한 곳이니 오지 말라’는 뜻을 품은 청하동천을 새기고 붉은 칠을 했다. 그 뒤로 도깨비들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청하동천 바위를 지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콸콸” 경쾌한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계곡 입구에서 400m 정도 걸으면 소나무 사이로 석천정사가 보인다. 석천정사는 권동보가 봉화의 곰솔인 춘양목으로 지은 건물이다. 기암괴석과 금강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풍경이 병풍에서 튀어나온 듯 운치 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석천정사를 바라보고 섰는데 그 모습에 반해 발걸음을 떼기 어렵다. 석천정사로 가기 위해 계곡에 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넌다. 석천정사에 관리인이 있으면 내부를 구경할 수 있다. 석천정사 마루에 올라 문을 열면 석천계곡이 앞마당이 된다. 계곡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난간에 앉아 있으니 마치 신선이 된 것 같다. 고요한 밤에는 우렁찬 계곡물 소리가 도깨비 떠드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다. 문득 선비들이 도깨비 때문에 공부를 못했다는 건 핑계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계가 눈앞에 있는데 글이 눈에 들어왔을까.
거북바위에 올라앉은 청암정
석천정사를 지나자 시야가 트인다. 기품 넘치는 소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멀리 닭실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키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높이 자란 소나무들이 마을로 인도한다. 이 길 왼쪽에는 개울이 흐른다. 간밤에 비가 내려 개울물이 제법 불었다. 꼴깍꼴깍 자맥질하는 징검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넌 뒤 왼쪽 찻길로 접어든다. 1차선 찻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닭실마을 초입에 있는 충재박물관에 도착한다. 박물관 옆에 닭실마을의 대표 명소인 청암정으로 통하는 쪽문이 있다.
청암정은 충재 선생이 집 안에 지은 정자다. 충재고택의 솟을대문 쪽으로 들어가면 집 안 깊숙한 곳에 안방마님처럼 자리했다. 단풍나무, 소나무, 느티나무가 둘러선 연못 한가운데에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가 솟아 있다. 바위 위에 丁자 모습을 한 청암정이 올라앉아 있다. 마치 연못에 사는 커다란 거북이 등에 청암정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북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청암정의 주춧돌과 기둥 길이를 조절해 균형을 맞추는 등 자연미를 한껏 살렸다. 연못가에는 ‘충재’라 이름 붙인 서재가 있다. 충재 선생이 청암정보다 먼저 지은 건물이다.
연못 안에 있는 청암정에 오르려면 각목처럼 생긴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충재 선생이 청암정을 신의 영역이라 여겨 돌다리 폭을 좁게 만들었다고 한다.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발을 떼며 돌다리를 건너 신선의 세계로 든다. 청암정 난간 앞에 서면 풍요로운 논과 석천정사가 자리한 남산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청암정 천장에는 퇴계 이황, 미수 허목, 번암 채재공과 같은 대학자들이 쓴 편액이 상장처럼 걸려 있다.
500년 전통의 닭실한과
청암정 쪽문으로 나와 마을 앞 큰길로 나선다. 솟을대문을 갖춘 큰 고택이 충재고택이다. 종손이 대대로 살고 있다. 사유지이므로 문이 닫혀 있을 때가 많다. 돌담 아래 핀 꽃을 구경하며 마을 끝에 있는 부녀회관까지 걷는다. 부녀회관에 닭실마을 아낙네들이 모여 닭실한과를 만든다. 아낙네들은 대부분 70~80대 고령이다. 닭실마을이 안동 권 씨 집성촌이므로 모두 한집안 식구다. 이들이 충재 선생 불천위 제사에 올리는 오색 한과의 500년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닭실한과는 화려하다. 흑임자, 자하초 등의 천연재료로 물들이고, 쌀 튀밥으로 꽃 모양 고명을 올린다. 분홍색 유과는 아기 꽃신처럼 예쁘다. 달지 않고 바삭하며 입안에 들러붙지 않게 만드는 것이 맛의 비결이다. 여름에는 습도가 높아 유과를 만들지 않고 약과만 만든다.
제사상에 올리던 닭실한과가 입소문을 타고 전국적으로 팔린다. 작업장 선반에 발송 대기 중인 한과 상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명절을 앞두면 닭실마을 아낙네들이 더 바빠진다. 찹쌀 반죽을 온돌에 48시간 말리고, 반죽을 늘려 튀기고 조청을 발라 튀밥 옷을 입혀 완성한다. 꼬박 사흘이 걸린다. 수작업으로 만들기 때문에 하루에 생산하는 한과 세트는 서른 박스 정도다. 명절용 한과는 일찌감치 예약 마감된다. 어느 댁 혼례에 쓰일 한과인지 할머니들이 바구니에 오색한과를 색깔 맞춰 담고 분홍색 보자기로 곱게 포장한다. 곁에서 작업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니 한 할머니가 맛보라며 유과를 건넨다. 바삭하면서도 폭신한 유과가 깨물자마자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닭실마을 주소 경북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963.
주변 명소 & 맛집
봉화 송이돌솥밥
봉화는 전국 송이 생산량의 15%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송이 산지다. 송이는 살아 있는 소나무 뿌리에서 자란다. 봉화의 금강소나무숲에서 자란 봉화송이는 육질이 단단하고 향이 짙어 최고 품질로 손꼽힌다. 봉화에 송이로 돌솥밥을 짓는 이름난 식당이 여러 곳 있다. 그중 솔봉이식당, 용두식당, 인하원이 송이버섯돌솥밥과 능이전골로 유명하다. 올해 봉화송이버섯축제는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열린다.
충재박물관
충재박물관은 충재 선생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충재일기, 근사록을 비롯한 보물 482점과 고서 및 고문서, 서첩 총 5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전시물 중에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유물이 상당하다. 재산 분배에 관해 적어놓은 분재기, 양자 입양과 관련한 예조입안,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 과거시험 답안지, 서원에서 제사지낼 때 쓰던 제기, 닭실마을 종부들이 온종일 만들었던 동고떡 모형 등이 전시돼 있다.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30, 개방 10:00~17:00(동절기 10:00~16:00) 매주 월요일 휴무.
바래미전통문화마을
바래미마을은 봉화읍 해저리에 있는 전통마을이다. 의성 김 씨 집성촌이며 마을이 생긴 이래 200년 동안 과거 급제자가 수십 명에 달한다. 일제강점기에는 50여 가구에서 독립운동가가 14명이나 배출됐다. 토향고택, 만회고택, 남호고택, 개암종택, 김건영가옥, 소강고택 등 옛 모습을 잘 간직한 한옥도 많다. 만회고택, 남호고택, 소강고택은 여행자를 위한 고택 체험 및 한옥스테이 시설을 갖추고 있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 바래미1길.
여행 정보 걷기 Tip
•봉화공용버스터미널이나 봉화역에서 21번, 23번 버스를 타고 삼계정류장에 하차하면 된다. 택시로 5분 거리이며 도보로는 15분 걸린다. 닭실마을에서 나올 때는 닭실마을 정류장에서 53번, 50번, 51번, 25번, 16번 버스를 타고 봉화공용버스터미널로 이동한다. 약 15분 소요.
•봉화공용버스터미널 앞에 봉화장터가 있다. 2, 7일마다 오일장이 선다.
•석천계곡 입구에서 닭실마을까지는 도보로 한 시간 남짓 걸린다.
병산서원 앞 병산 아래로 낙동강이 굽이친다. 서원 답사 뒤에는 강변 산책을 즐겨볼 만하다. 인근 부용대 쪽엔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한 옥연정사가 있다. 병산서원을 기점으로 하는 둘레길인 ‘선비길’도 운치 있다. 한 시간쯤 걸으면 하회마을에 닿는다.
꽃다운 시절은 저물었어도, 꽃 하나쯤 마음에 두는 맛까지 포기할 수 없다. 때로 꽃 보러 뜬금없이 길을 나선다. 해동 무렵엔 동백꽃 보러 월출산에 간다. 몸통에서 분리된 멸치 대가리처럼 이미 맹탕이 된 꿈, 그게 꽃을 본들 푸르륵 새삼 날갯짓을 하겠는가. 꽃을 봐도 꽃이 없다. 하나, 피기만 하는 게 꽃은 아니다. 목숨 있는 것들, 머잖아 다들 저문다. 그러니 저무는 꽃도 꽃이요, 저무는 인생도 인생이다. 순리를 안다는 건 내 주제를 깨달아 수긍하는 일일 게다. 야야, 저문 꽃날에 앙앙불락할 거 없다! 꽃 보러 간 내게 꽃이 하는 얘기가 대개 그렇다.
안동 병산서원에 꽃이 한창이다. 꽃빛 번져 천지가 붉다. 배롱나무들 일제히 꽃을 피워 서원의 뜰과 늙은 기둥과 잠잠한 기와지붕에까지 붉은 물이 든다. 화양연화(花樣年華), 배롱나무의 아름다운 시절이 바야흐로 절정에 달했다. 백 일쯤 계속 피는 꽃이니 절정치고는 별나게 길다. 폭죽처럼 일시에 작렬하다 일시에 지는 벚꽃은 명함도 내밀 수 없다. 언제 한 번 꽃 피어본 일 없는 인생은 차라리 혀를 깨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나.
배롱나무의 개화기가 긴 건 기묘한 전략을 써서다. 꽃을 아끼는 꽃이지 않은가. 한꺼번에 꽃을 피우지 않고 차례로 개화하도록 꾀를 쓰는 게 아닌가. 한 송이가 지면 또 한 송이가 연이어 올라온다. 먼저 핀 송이가 지자마자 대기해 있던 망울이 송이로 벌어져 빈자리를 채워 넣는다. 꽃들의 ‘인해전술’이다. 무릇 욕망을 아껴 쓰지 않고 욕망을 이룰 수 없다. 빠르게 가는 것은 천천히 가는 것들보다 오래갈 수 없다.
병산서원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터를 잡아 건립했다. 서원 뒤편, 서애의 위패를 모신 사당 존덕사 계단 옆에 사는 배롱나무의 수령은 400년에 가깝다. 유학자들은 배롱나무를 선비의 표상으로 여겼다. 이 나무는 허물 벗는 뱀처럼 스스로 껍질을 벗는다. 그래 줄기가 미끈하다. 군더더기 없이 깨끗하다. 유학자들은 그걸 청렴결백의 상징으로 봤다. 절집에 흔히 배롱나무가 있는 것도 비슷한 까닭에서다. 집착이라는 허물, 망상이라는 허울을 훌훌 벗은 수행승의 참모습을 걸친 것 없는 배롱나무의 형상에 견주었다. 전혀 다른 눈도 있었다. 오히려 불경하게 취급해 집 안에 심기를 꺼렸다. 배롱나무의 맨 살갗에서 발가벗은 여체를 연상했던 것이다. 나무 하나를 놓고도 사람들의 감관이 이렇게 서로 다르다.
불난 호떡집도 아닌 것을, 병산서원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복닥거린다. 하기야 꽃놀이패가 배롱나무의 호시절을 놓칠 리 없다. 여름날의 병산서원 배롱나무꽃은 이미 파다하게 알려졌다. 꽃구경은 보너스로 치고, 서원의 고풍(古風)과 풍취에 반해 한 번 찾은 뒤로 다시 찾는 이도 많다. 한국의 서원 건축 가운데 가장 빼어나다는 평도 숱하다. 산수 간에 들어앉은 건축물이 구현할 수 있는 최상의 자연스러움을 지니고 있어서다.
거저 얻은 자연스러움이 아니다. 건축을 할지언정 인위의 개입을 애써 자제한 흔적이 그걸 알게 한다. 몸을 낮추고서도 한 번 더 몸을 낮추는 일, 유학자들은 그걸 본분으로 삼았다. 신독(愼獨)이라 하지. 홀로 있는 골방에서도 들여다보는 눈이 곁에 있는 것처럼 스스로 삼가길 수양의 방편으로 알았다. 그러니 집을 짓더라도 분에 넘치는 치장을 할 리가 있었겠는가?
서원이란 한마디로 학교. 서책만을 도구로 삼지 않았다. 자연을 경(經)으로 읽어 심성을 북돋우는 노력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그 점에서 병산서원은 자연을 가르치는 교실이기도 했다. 만대루(晩對樓)를 보라. 자연 풍경을 끌어들이기 위해 서원 전면에 세운 누각이다. 사방으로 벽이 없으니 뭐 하나 가두지 않는다. 솔바람이 지나가고 물소리가 흘러간다. 나비가 날아들고 잠자리가 쉬어간다. 달빛이 들이치고 노을빛이 다녀간다. 사람인들 가둘까보냐. 만대루에 오르거든 마음의 감옥에서 탈주할 일이다. 내가 나를 가두지 않는 한, 나를 가둘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득달같이 알아차릴 일이다.
‘네덜란드-벨기에로 열흘간 여행 간다’고 하니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곳에서 그렇게 볼 게 많아?” 하면서. 결론부터 말하면, 미술 작품 순례만으로도 볼 것이 차고 넘쳐 시간이 부족할 정도다. 누가 여전히 같은 질문을 또 한다면 자신 있게 대답해줄 것이다. “네덜란드, 벨기에 미술관 어디까지 가봤니?”라고. 고흐, 렘브란트, 루벤스, 페르메이르, 마그리트 등 스탕달신드롬(뛰어난 예술작품을 접했을 때, 그 충격과 감흥으로 인해 일어나는 정신적·육체적 이상 반응)까진 아니어도 명작을 코앞에서 감상하면서 작가들의 삶의 편린도 함께 접할 수 있는 가슴 두근거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대표 작가 Big3와 미술관을 소개한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의 작품을 포함, 15~19세기 네덜란드 유명 화가 작품 5000점, 조각품 3000여 점이 연대별로 전시돼 있다. 반 고흐의 자화상, 얀 페르메이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 17세기 네덜란드 상류층의 호화로운 생활상을 보여주는 가구 미니어처 ‘인형의 집’도 볼 만하다. ‘인형의 집’은 ‘집과 가구 모형을 실제와 똑같이 정교하게 만든 미니어처’다. 호화롭기 그지없는데 당대에는 서민 주택 한 채와 맞먹을 정도로 비싼 가격이었다고 한다.
렘브란트의 ‘야경’
뭐니 뭐니 해도 이 미술관의 대표작은 렘브란트의 ‘야경(夜警)’이다. 이곳에서 일부러 이 그림을 찾지 않아도 관람객이 제일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따라가면 ‘야경’ 앞에 이른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2층 명예의 전당 전면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 렘브란트의 인생처럼 팔자가 센 작품이다. 전시 중 황산 세례와 칼로 그어지는 등 두 차례 수난을 당했다. ‘야경’을 완성한 해에는 첫 번째 부인 사스키아와 사별을 했고, 이후 혼인빙자간음죄로 고소당하는 등 사회적 명성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파산 등 경제적 문제도 몰아닥친다. 또 고객들의 요구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아 불만을 사면서 화가로서도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평이 있다.
‘렘브란트의 모든 것’
올해는 렘브란트 서거 350주년. 기념행사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6월까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는 ‘렘브란트의 모든 것’ 전시회가, 7월부터 연말까지는 대표작 ‘야경’의 복원 과정을 보여주는 행사가 열린다. 우리가 갔을 때는 ‘렘브란트의 모든 것’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22개의 작품, 60점의 드로잉, 300점의 판화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렘브란트는 자화상도 40여 점 그렸는데 연대별로 주요 자화상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던 게 큰 수확이었다. 자부심을 넘어 야망과 당당함을 보여주는 청년기 모습, 기름기와 욕망이 적당히 반죽된 중년기의 모습, 특히 쓸쓸한 눈빛을 한 노년기의 자화상에서는 ‘나 아직 살아 있어’ 하고 외치는 듯한 내면의 모습이 느껴졌다.
렘브란트 하우스
인간 렘브란트를 보다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곳. 성공의 상징이자 몰락의 원인이 된 호화저택이다. 암스테르담 중심가인 요덴브레이스트라트에 위치한다. 1639년부터 20년간 살면서 작업을 했던 지역이다. 그 시절의 살림, 미술 도구, 호사스런 수집품들(코뿔소 뼈 등)이 층별로 전시돼 있다. 예술가뿐만이 아니라 수집가, 사업가, 거장으로서의 면목도 감상할 수 있다.
반 고흐 미술관
본관 상설전시관과 신관 기획전시관 건물이 유리 현관으로 연결돼 있다. 유화 200여 점, 소묘 500여 점, 편지 700여 통과 함께 고흐가 수집한 우키요에(일본 판화)와 회화를 포함한 컬렉션이 전시돼 있다. 규모는 세계 최대. ‘꽃피는 아몬드 나무’, ‘감자 먹는 사람들’, ‘해바라기’, ‘자화상’, ‘노란 집’ 등 전시 작품들이 다 걸작이다. 이곳에서는 하이라이트 중심의 감상보다는 전시 동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천천히 작품을 느끼는 게 좋다.
“열흘 내내 딱딱한 빵 조각을 유일한 음식으로 삼았지만, 이 그림 앞에 앉아 머물 수 있었기 때문에 인생의 10년은 행복할 것이다.”
고흐가 렘브란트의 작품 ‘유대인 신부’를 보고 외친 말이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옆 자신의 이름이 걸린 전용 미술관이 세계 명소가 된 것을 안다면 그는 무슨 말을 할까.
크뢸러 뮐러 미술관
고흐 미술관이 도심 속 미술관이라면, 이곳은 공원 속 미술관이다. 한적하기 때문에 여유롭게 감상을 즐길 수 있다. 뮐러의 부인 헬레나가 수집한 작품들을 기증받은 네덜란드 정부가 작품을 보관, 전시하기 위해 1938년 개관했다.
고흐의 유화 작품 90여 점, 드로잉 170점 등이 전시돼 있으며 규모는 세계에서 두 번째다. 이 미술관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작품은 ‘밤의 카페테라스’.
“푸른 밤, 카페테라스의 커다란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어. 그 위로는 별이 빛나는 파란 하늘이 보여. 바로 이곳에서 밤을 그리는 것은 나를 매우 놀라게 하지. (중략) 특히 이 밤하늘에 별을 찍어 넣는 순간이 정말 즐거웠어.”
고흐가 프랑스 아를에 머무르던 시절, 이 작품을 그리며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밤하늘에 별을 하나씩 찍어가며 열정에 차 작업하는 고흐의 모습, 이 시절을 함께한 우체부 조제프 룰랭, 의사 가셰, 카페 마담 지누, 화가 고갱 등이 함께 어우러져 밤의 카페테라스에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미술관이 위치한 호게 벨뤼베 공원은 네덜란드 최대 규모의 국립공원이다. 서울 여의도의 7배 면적인 70만 평 규모. 매표소에서 미술관까지는 2.4km나 되는데 자전거를 타고 가도 30여 분이나 걸린다. 매표소 입구에는 무료로 대여해주는 자전거가 진열돼 있다. 숲길의 나무와 반짝이는 나뭇잎 등이 고흐의 작품 ‘사이프러스 나무’의 풍경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얀 페르메이르와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
마우리츠호이스라는 이름은 이 집의 첫 번째 소유주였던 요한 마우리츠에서 따왔다. ‘마우리츠의 집’이란 의미를 갖는다. 네덜란드의 16~17세기 작품 8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렘브란트를 일약 유명 화가로 만들어준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파울루스 포테르의 ‘어린 황소’ 등이 하이라이트. 색깔이 다른 벽지로 전시장을 구분하고 창가엔 커튼도 달려 있어 얼핏 보면 가정집 같은 분위기다. 창 너머로는 호프페이베르 연못이 보인다. 백조들이 떼 지어 떠다니는 모습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창가엔 의자도 있어 중간중간 쉴 수도 있다. 창밖의 호수 풍경, 전시장의 작품 중 어느 것부터 볼지는 관람객 마음에 달려 있다. 편안하고 폭 감겨오는 미술관을 고르라면 단연 이곳을 꼽고 싶다.
우리는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에 도착하자마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기 위해 직행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우유를 따르는 여인’ 등의 작품을 감상했지만 이 작품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원화를 보자마자 모두에게서 터져 나온 말은 “생각보다 작네?!”였다. 그림 크기는 44.5×39cm. 이러한 사이즈는 당시 네덜란드의 경제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그림을 걸어놓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로 일반 시민의 미술품 수요가 컸다. 작품의 크기가 작은 이유는, 붙였다 떼었다 하기 편한 그림이 판매하기 쉬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이아몬드 링’ 베이커리와 페르메이르
페르메이르의 흔적은 헤이그 인근의 델프트 시에 많다. 그는 태어나고 자란 이 지역을 평생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한다. 그의 묘지도 이곳에 있다. 델프트 시에는 ‘다이아몬드 링’이라는 빵집이 있다. 1796년부터 운영해온 유서 깊은 점포다. 프랑스인 발타자르 드 몽코니가 일기에 기록해놓았다는, 빵집과 페르메이르의 인연 한 토막이 특별하게 들려온다. 몽코니가 명성을 듣고 페르메이르의 집을 방문했는데 작품이 한 점도 없었더란다. 근처 빵집 주인이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가 보니 600길드를 주고 산 작품이 있었다. 또 페르메이르가 빚을 갚기 위해 담보로 제빵업자에게 그림을 줬다는 기록도 있다. 그 얘기를 듣고 ‘우유를 따르는 여인’을 보니 우유병 앞에 놓인 바구니 속 푸짐한 빵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다이아몬드 링’에서 팔던 빵들과 닮아 있다. 시 광장 주변에서는 네덜란드의 전통 나막신 제작 과정을 보여준다. 델프트 거리에는 앤티크 숍이 많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 유명해진 푸른색 터번, 델프트 블루 타일, 클래식풍 스탠드에 이르기까지 제품이 다양하다. 심지어 한국 탈을 판매하는 곳도 있다.
인천 무의도에 딸린 섬, 소무의도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2012년에 소무의도 둘레길인 무의바다누리길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무의도는 해안선 길이가 2.5km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섬 여행의 매력을 다 갖췄으니 가성비 좋은 섬이라고나 할까. 섬 둘레를 걸으며 고깃배가 들락거리는 아담한 포구와 정겨운 섬마을 풍경, 74m 높이의 아담한 산과 푸른 바다를 두루 즐길 수 있다.
추천 코스
용유역에서 무의도행 1번 버스 탑승▶광명항 하차▶소무의인도교길▶마주보는길▶떼무리길▶부처깨미길▶몽여해변길▶명사의해변길▶해녀섬길▶키작은소나무길▶광명항에서 1번 버스 탑승/하나개해수욕장 하차▶하나개해수욕장 촬영세트장▶해상관광 탐방로▶1번 버스 타고 용유역 하차
미니버스 타고 무의도로 가는 길
올해 4월 무의도에 연륙교인 무의대교가 놓였다. 배 출항 여부와 상관없이 언제든 맘 편히 섬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됐다. 무의도로 가는 길은 대중교통 환승 시스템이 잘 돼 있어 뚜벅이 여행자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인천공항 자기부상 철도를 타고 용유역에 내린 뒤, 길 건너에서 무의도행 1번 미니버스로 갈아탄다. 거잠포와 잠진도를 지날 때 차창 밖으로 반짝이는 갯벌 위에서 낮잠 자는 작은 고깃배와 조개를 캐는 주민들이 보인다. 무의대교가 생기기 전, 잠진도 선착장과 무의도를 무시로 오갔던 배 두 척은 먼바다에 한가로이 떠 있다. 승선 시간이 고작 5분이었지만, 뱃머리에 서서 섬 여행의 설렘을 만끽했던 일이 영영 추억으로 남게 됐다.
미니버스가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무의대교에 올라타자 차창으로 바닷바람이 훅 밀고 들어온다. 무의도 큰무리선착장에 도착한 미니버스는 고개 넘어 섬 끝 광명항으로 달린다. 미니버스가 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요리조리 잘도 달린다. 고갯마루에 오르자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옆자리 앉은 중년여성이 “아, 너무 좋네. 자주 와야겠다”라며 혼잣말로 감탄사를 연발한다. 어디가 그렇게 좋은지 물으니 반문한다. “안 좋으세요? 무의도에 사세요? 전 서울에서 여기 처음 왔는데 너무 좋네요. 다음에 남편이랑 같이 와야겠어요.” 무의도의 매력을 오래전에 깨달은 터라 그저 미소로 답한다.
무의도의 진주, 소무의도 무의바다누리길
미니버스의 회차 지점인 광명항(소무의도 입구)에 하차한 뒤 무의인도교를 향해 걷는다. 이 다리가 광명항과 소무의도를 잇는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무의바다누리길 안내판을 훑어본다. 무의바다누리길은 소무의도 해안을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이다. ‘마주보는길’, ‘몽여해변길’, ‘부처깨미길’ 등 구간이 8개나 되지만 총 거리는 2.4km밖에 되지 않는다.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무의바다누리길의 1구간인 ‘소무의인도교길’를 건너며 소무의도를 굽어본다.
갯벌이 드러난 떼무리포구에서 고깃배 대여섯 척이 물 들어오길 기다린다. 포구 앞 서쪽 마을에는 원색 지붕을 얹은 단층집이 옹기종기 모여 섬마을 정취를 뽐낸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처음 만난 구멍가게에 들러 시원한 미숫가루 한 잔을 사 마시고 더위를 식힌다. 인상 좋은 주인에게 듣는 마을의 이모저모는 덤이다. 떼무리포구와 서쪽 마을 앞을 지나는 방파제길이 2구간 ‘마주보는길’이다. 방파제 끝까지 걸으면 관광안내소가 나오는데 안내소 옆 계단으로 오른다. 계단 끝에서부터 그윽한 숲길이 이어진다. 당산이 있는 이 숲길이 3구간 ‘떼무리길’이다.
흙길과 데크길을 번갈아 걷다보면 4구간 ‘부처깨미(꾸미)길’ 안내판이 나온다. 전망데크와 망원경이 설치돼 있다. 옛날에 소무의도 주민들이 만선과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소를 제물로 바치고 풍어제를 지냈던 곳이라고 한다. 부처깨미에서 다시 1분 정도 오르면 전망대가 또 나오는데 이곳은 포토존이라 할만하다. 초승달 같은 몽여해변과 동쪽 마을이 발아래 시원하게 펼쳐진다. 멀리 대부도, 영흥도, 선재도 등이 어렴풋이 보인다. 서해는 누렇다는 편견을 반박하듯 오늘따라 바다 빛이 푸르디푸르다. 전망대와 연결된 계단을 내려와 5구간 ‘몽여해변길’을 거닌다. 부모와 놀러 온 아이들은 갯바위 사이에 바닷물이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 어쩔 줄 모른다.
산과 바다를 여유롭게 즐기는 산책길
바다 풍광 좋은 몽여해변에 카페들이 하나둘 생긴다. 한 카페에 들어가니 카페 주인이 바다 쪽 폴딩도어를 활짝 열어준다. 손님들이 “와 오늘 바다 예쁘다!” 환호한다. 빨간 파라솔 아래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지나가는 고깃배들을 구경하는 여유를 부려본다. 카페 가까이에 있는 바다이야기박물관을 지나면 곧 언두꾸미에 닿는다. 이곳은 갯벌에 참나무를 세우고 언둘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는 주목망 어업을 하는 곳이다. 언둘꾸미가 변해 언두꾸미가 되었다고 한다. 방파제에 둘둘 말아놓은 그늘이 잔뜩 쌓여 있다.
언두꾸미를 지나 울퉁불퉁한 갯바위를 타고 넘어 6구간 ‘명사의해변길’에 도착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이 휴양 왔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은 몽돌 해변이다. 바닷가에 하얀 굴 껍데기가 가득 쌓여있다. 우뚝 선 절벽이 해변을 감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이 든다. 명사의해변을 지나면 안산 꼭대기로 오르는 숲길이 시작된다. 가파른 나무 계단도 기다린다. 숨을 조절하며 중간쯤 오르니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해녀도가 훤히 보인다. 옛날에 해녀가 물질하다가 쉬었던 곳이라고 한다. 해녀도 뒤로 섬들과 풍력발전기 대여섯 기가 아슴아슴 보인다. 바다와 섬 사이에 해무가 껴 섬들이 공중에 뜬 것처럼 보인다. 계단을 내려가던 사람들이 이 환상적인 풍경을 배경 삼아 기념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이 길이 7구간 ‘해녀섬길’이며 무의바다누리길에서 풍광이 가장 좋다.
계단을 조금 더 오르면 안산 정상에서 하도정이라는 정자를 만난다. 하도정 주변에 해풍 맞고 자란 소나무가 많다고 하여 8구간을 ‘키작은 소나무길’이란 이름 붙였다. 하도정 이후로는 내리막길이다. 계단을 내려오면 소무의인도교가 코앞에 있다. 다리를 건너며 아래를 굽어보니 어느덧 바닷물이 차올라 갯벌에 박혀 있던 배들이 둥둥 떠올랐다. 광명항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하나개해수욕장으로 향한다.
바다 위를 걷는 하나개해수욕장 해상관광 탐방로
하나개해수욕장은 ‘섬에서 가장 큰 개펄’이라는 뜻을 지녔다. 해변은 모래밭이고, 썰물 때는 진득한 갯벌이 드러난다. 보드라운 갯벌 흙이 발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감촉을 즐기며 일몰을 감상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나개해수욕장은 일몰 명소로 유명하다.
해변에 오래전에 방영됐던 드라마 ‘천국의 계단’과 영화 ‘칼잡이 오수정’의 주택 세트장이 있다. 실내 관람은 할 수 없다. 세트장 뒤로 해안관광 탐방로로 가는 길이 이어진다. 이정표를 따라 데크를 걷다 보면 호룡곡산 등산로와 해안관광 탐방로의 갈림길이 나온다. 등산로를 뒤로 하고 해안 쪽으로 내려선다. 해안관광 탐방로는 작년에 무의도 해안절벽 옆에 조성한 해상산책로다. 만조 때는 파도 때문인지 약간 흔들거린다. 바다 위를 걷는 느낌이 꽤 스릴 있다. 해안절벽에 있는 진기한 모양의 바위에 이름을 짓고, 탐방로 난간에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억지스러운 이름도 있지만, 자꾸 안내판 사진과 비슷한 바위를 찾으려 애쓰게 된다. 밀물 때는 갯바위가 잠겨 일부만 찾을 수 있다. 가장 그럴싸한 바위는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안고 있는 형상의 원숭이 바위다. 탐방로 끝 해안가에 있다.
이 탐방로는 한낮보다는 해질녘 바닷바람 맞으며 걸어야 제맛이다. 매일 물때가 변하므로 이곳에 갔을 때 바닷물이 싹 빠져 갯벌이 드러나 있을 수도 있다. 바다 위를 걷는 스릴을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안내판 속 바위들은 다 찾을 수 있으니 밀물이어도, 썰물이어도 좋으리라. 탐방로 개방 시간은 일출 때부터 일몰 때까지이다.
주변 명소&맛집
무의도의 휴양지 실미도
실미도는 무의도의 부속 섬이다. 1971년 8월에 발생한 실미도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실미도에서 북파공작원 훈련을 받던 부대원들이 정부의 사살 명령을 받고 온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해 청와대로 가던 중 자폭한 사건이었다. 2003년에 이 사건을 영화화한 ‘실미도’가 개봉해 큰 관심을 얻었다. 하루에 두 번 썰물 때마다 무의도와 연결된 징검다리가 드러난다. 이 다리를 건너 실미도를 관통하는 숲길을 지나면 섬 반대편 해변이 나온다. 실미도 영화 세트장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갯바위와 고요한 해변만 남았다. 실미도와 마주 보고 있는 실미유원지에는 100여 년 된 아름드리 노송 군락이 울창하게 우거졌다. 숲에서 야영을 즐기는 여행객들이 많다. 하나개해수욕장보다 한적한 해변을 산책하거나 바닷가 식당에서 해산물 요리를 즐기기에 좋다.
맛집과 카페
무의도는 바지락 칼국수와 영양굴밥, 조개찜이 유명하다. 하나개해수욕장과 실미유원지, 광명항에 횟집과 식당이 많다. 실미유원지에서는 ‘해송회식당’이 입소문 났다. 진한 바지락 국물에 감자와 각종 채소로 맛을 낸 바지락칼국수가 일품이다. 칼칼한 국물이 입맛을 당긴다. 용유역 앞 ‘은행나무집’은 영양굴밥을 잘한다. 소무의도 몽여해변에 있는 ‘섬카페좋은날’은 루프톱 카페다. 옥상에 폭신한 소파를 준비해두었다. 길가에 있어 걷는 중에 잠시 들리기 좋다.
여행 tip
1. 대중교통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3층 7번 탑승장에서 2-1, 222번 버스 탑승, 용유역에서 하차한다. 용유역에서 무의도행 1번 버스를 타면 된다.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역에서 모노레일로 갈아타 종착역인 용유역에 하차, 무의도행 1번 버스를 탄다. 모노레일은 무료이며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8시 15분까지 15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인천국제공항역에서 용유역까지 약 12분 걸린다.
-용유역 앞에서 1번 버스가 매시 정각과 30분에 출발한다. 주말에는 10여분 늦어 질 수 있다. 배차 간격이 넓으므로 하차할 때 버스 시간을 알아두는 게 좋다.
2. 실미도는 썰물 때만 들어갈 수 있다. 하나개해상관광탐방로는 물때 상관없이 출입할 수 있으나 바다 위를 걷고 싶다면 물때를 확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