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꽃철이 되면 아랫녘으로 떠나고 수목원을 찾지만 나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양천 향교에 간다. 서울시 강서구에 위치한 이곳에 가면 조용한 향교 담장 위로 피어난 능소화를 볼 수 있다. 옛 교육기관에서 꽃과 함께 고즈넉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이다.
도심 속에서 옛 시간과 소통하는 양천 향교는 마을 골목길을 따라 잠깐 걸어 들어가 사찰 홍원사 뒤편으로 가면 있다. 산을 등지고 안정감 있게 들어앉은 모양새다. 향교는 옛 성현들의 덕을 기리고 제를 모시며 지방 향리들을 교육하던 기관이다. 현대적 교육기관이 생겨나면서 대부분 해체되었지만 아직도 전국적으로 230여 개의 향교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유일하게 양천 향교만 남아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조선 태종 연간(서기 1411년경)에 설립된 양천 향교는 옛 선비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도 성인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맞춤형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미디어 시대에 맞는 생활예절 교육과 함께 다양한 소통 창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러나 현재는 코로나19 여파로 휴관 중이다. 그래서 더 조용해진 향교다.
담장을 둘러쌓았던 능소화도 예년에 비해 많이 줄어든 모습이다. 그래도 잊지 않고 피어나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듯 꽃잎을 활짝 열었다. 능소화의 전설 속에는 그 옛날 구중궁궐에 살던 소화라는 궁녀 이야기가 있다. 어여뻤던 소화는 임금의 사랑을 얻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어느 날부터 임금이 자신을 찾지 않자 그리움에 점점 병이 들어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담장 밑을 서성이고 내다보며 오매불망 임금만을 기다리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뜬 소화. 그녀는 “담장 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고 했고 그 영혼이 깃들었는지 소화가 지냈던 처소의 담장을 덮으며 꽃이 주렁주렁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바로 능소화다.
능소화는 오래전 사신들이 중국을 드나들며 가져온 꽃으로 화사한 색상과 모습이 기품 있어 양반꽃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로 사대부 뜰에서만 볼 수 있었고 민가에서는 함부로 심지 못했다. 사람들은 능소화가 다 피고 질 때 미련 없이 꽃송이를 톡 하고 떨어트리는 모습이 마치 소화의 지조를 닮은듯하다고 풀이한다. 능소화의 꽃말은 '영광', '기다림', '명예'다.
예전에는 능소화가 흔치 않았다. 그래서 이맘때면 멀리 경상도까지 내려가 운치 있는 한옥 담장을 뒤덮으며 피어난 능소화를 촬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한강변 산책길에서 굵은 나무 기둥을 칭칭 감으며 피어난 능소화를 볼 수 있고 고속도로변의 높은 벽을 뒤덮으며 피어난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능소화 터널을 이룬 신식풍 조경의 공원도 생겨났다. 어느덧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능소화는 역시 담장을 타고 피는 게 제일 어울린다. 마침 향교 관리인이 굳게 잠긴 문을 잠깐 열어주어 동재와 서재, 그리고 강학 공간이 있는 마당까지 들여다봤다. 향교 옆길로 한 걸음 옮기면 궁산 근린공원으로 이어진다. 울창한 숲길은 여름인데도 서늘하다. 길을 따라 나지막한 산책로를 걷는 즐거움이 있다. 아울러 겸재정선미술관과 궁산땅굴, 구암공원, 허준박물관으로 연결되는 강서 역사문화 둘레길을 알차게 돌아볼 수 있지만 생활 속 거리두기 때문에 실내 관람은 어렵다.
바이러스로 조심스러운 세상이다. 지금은 향교를 속속들이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주변 뜰을 거닐며 유생들의 선비정신과 능소화의 전설을 떠올리는 시간도 제법 괜찮다. 게다가 한적한 분위기가 유유자적 생활 속 거리 두기에 적당하다.
향교를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처럼 생각하기 전에 한 번쯤 옛 성현들의 흔적을 통해 차분한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지.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뜰에서의 담백한 어느 하루, 여름 햇살을 받은 능소화가 향교 담장 위에서 눈부시다.
주소: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234
△ 주변 볼거리
△서울식물원을 비롯해 겸재정선기념관, 구암공원, 허준박물관, 궁산땅굴이 이어져 있다. 향교 입구 부근에 위치한 사찰 홍원사와 전통 방식으로 면을 만들어 국수를 주렁주렁 널어놓은 ‘옛날국수’ 집 구경은 덤이다.
△이타제면소의 잔치국수(5000원)와 굴림만두(4000원)로 맛난 한 끼가 가능한 곳이 근처에 있다.
트레킹의 묘미라면, 정상이나 완주를 목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쉬엄쉬엄 거닐면 그뿐이다. 그렇게 어디든 걸어도 좋아서일까? 전국 방방곡곡 이름 붙은 코스만 수백여 곳. 이 길과 저 길 사이 고민하는 이들을 위해 올여름 떠나기 좋은 테마별 트레킹 코스들을 소개한다.
참고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및 각 지자체 홈페이지
여름에 제격, 탁 트인 해안 트레킹
◇ 변산반도 마실길 (전북 부안군)
물때를 잘 맞춰가야 길이 드러날 정도로 해안과 인접한 코스다. 특히 1코스 조개미 패총길은 밀물과 썰물에 따라 해안 야산길과 바닷길을 선택해 걸을 수 있다. 변산해수욕장, 고사포해수욕장, 격포항, 솔섬, 곰소염전 등을 거쳐 변산반도를 크게 도는 총 13개 코스로 구성된다.
[추천코스] 적벽강 노을길 산과 들, 바다를 동시에 감상하면서 갯벌체험이 가능하고 특히 석양이 아름답다. 격포항 주변 각종 해산물 맛집도 즐비함. 7㎞, 2시간 소요, 난이도 ★★☆☆
◇ 금오도 비렁길 (전남 여수시)
남해안에서 보기 힘든 금오도 해안단구 벼랑을 따라 조성된 트레킹 코스다. 길 이름 ‘비렁’은 여수 사투리로 ‘벼랑’을 뜻한다. 함구미 마을 선착장에서 출발해 촛대바위, 매봉전망대, 온금동전망대, 숲구지전망대 등을 둘러보는 총 5개 구간으로 조성돼 있다.
[추천코스] 3코스 함구미에서 배를 타면 곧바로 3코스의 시작인 ‘직포’에 도착한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기암괴석들이 이루는 장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구간. 3.5㎞, 2시간 소요, 난이도 ★★★★★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옛길
◇ 내포문화숲길 (충남 예산군)
이중환의 ‘택리지’ 팔도총론에서 언급된 지역으로, 충청남도 최장거리 트레킹 코스다. 가야산 주변에 남아 있는 불교와 천주교 성지,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흔적들을 따라 원효깨달음길, 내포천주교순례길 등 4가지 테마의 26개 코스가 마련돼 있다.
[추천코스] 22코스 여사울성지 입구에서 삽교성당까지 내포문화숲길에서 가장 긴 구간. ‘내포천주교순례길’ 중 한 코스로, 그야말로 순례하듯 오래 걷기 좋음. 23.8㎞, 7시간 소요, 난이도 ★★★★☆
◇ 밀양아리랑길 (경남 밀양시)
삼문동 밀양강을 따라 걷는 코스로, 아름다운 풍경은 물론 옛 성곽과 읍성, 봉수대 등을 돌아보며 오랜 역사를 만나게 된다. 밀양관아에서 시작해 영남루, 밀양향교, 추화산성, 충혼탑 등을 지나는 3개 코스로, 경남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밀양시립박물관도 들를 수 있다.
[추천코스] 2코스 밀양향교에서 시작해 밀양시립박물관까지, 밀양의 역사를 가장 함축적으로 느낄 수 있는 구간. 추화산성 주변으로 깔끔한 휴게시설이 마련돼 있음. 4.2㎞, 2시간 소요, 난이도 ★★☆☆☆
거동 불편한 시니어도 OK! 무장애 코스
◇ 가야산 소리길 (경남 합천군)
홍류동 옛길을 복원하고 다듬어 완만하게 걸을 수 있도록 조성한 저지대 수평 탐방로다. 홍류동 계곡을 따라 칠성대, 낙화담 등을 두루 살피며 길상암에서 해인사까지 걷는 단일 코스로 남녀노소 누구나 수월하게 탐방 가능하다. 2.1㎞, 1시간 소요, 난이도 ★☆☆☆☆
◇ 주왕산 탐방로 (경북 청송군)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인 주왕산과 더불어 용추협곡, 용추폭포 등 자연경관이 빼어난 길이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환자나 노인, 유모차를 타는 아이 모두 함께할 수 있는 무장애 단일 코스로, 곳곳에 장애인 화장실과 쉼터가 마련돼 있다. 2.2㎞, 3시간 소요, 난이도 ★☆☆☆☆
코로나19 거리 두기에 딱! 인원 한정 예약 구간
◇ DMZ펀치볼둘레길 (강원 양구군)
민통선 북방지역 화채그릇(punch bowl) 모양의 해안분지 내에 조성된 둘레길로, 형상 자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다. 미확인 지뢰지대와 인접해 탐방객의 안전과 산림자원 보호를 위해 예약제로 운영된다. 가이드와 동행해야 하며 탐방 가능 인원은 하루 200명이다(033-481-8565).
◇ 금강소나무숲길 (경북 울진군)
금강소나무숲길을 걸으며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과 천연기념물 서식지를 두루 탐방할 수 있는 코스다. 오지에서의 안전한 트레킹과 산양을 비롯한 멸종위기 동·식물 보호를 위해 숲해설가 동반 없이는 탐방이 불가능하다. 구간별 하루 40명만 예약 후 입장할 수 있다(054-781-7118).
◇ 백두대간트레일 (강원 양구군·인제군·홍천군)
백두대간 트레일 코스 중 아침가리 구간(인제군 기린면~홍천군 내면)은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 및 자연휴식년제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산림생태계 보전을 위해 산불 우려가 있는 봄, 겨울은 탐방이 어렵고 5~10월 중 하루 100명 한정으로 예약 후 이용 가능하다(033-461-4453).
◇ 점봉산 곰배령 탐방로 (강원 인제군)
점봉산 정상의 남동향 곰배령을 중심으로 희귀 야생화 및 산약초, 산채류 등이 다량 서식한다. 이로 인해 곰배령을 찾는 방문객이 많아지자 1987년부터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1일 450명 이내로 입산을 통제, 관리하고 있다(033-463-8166, 산림청 홈페이지 예약).
어딜 가도 좋을 때다. 혼자여도 좋고 함께라도 좋다. ‘걷기의 3요소’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걷기의 3요소’는 확실히 있는 것 같다. 날씨가 좋아야 하고, 풍광이 좋아야 하고, 마지막으로 함께 걷는 일행이 좋아야 한다. 특히, 처음 가보는 곳에 해설자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같은 풍경도 해설을 들으면 다르게 보이고, 안 보이는 것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강서지역의 테라피 장소인 개화산 둘레길로 트레킹을 간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서울 근교를 걷는 ‘감성테마여행’ 밴드에 가입한 건 몇 년 전이었다. “북한산과 한강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고, 김포공항이 보이는 하늘길 전망대에서 풍경을 감상하겠습니다. 초록의 숲에서 ‘힐링 오침과 음악감상 테라피’의 시간도 가질 예정이니 개인용 돗자리를 준비해서 오시기 바랍니다.”
도보여행가이자 ‘여행과 인간’ 호비문화연구소장 이성한 씨의 안내 글이 걷기 욕망을 충동했다.
햇살이 따가운 평일 오전에 40대부터 60대까지 남녀 회원 25명이 모였다. 출발 지점인 개화산 미타사를 시작으로, 공원 조망점, 해맞이 전망대, 약사사, 치현산 꿩고개, 메타세쿼이아 숲을 거쳐 돌아오는 11km를 5시간에 걸쳐 걸었다. 미타사는 큰 절의 말사 같은 곳으로 암자처럼 규모가 작았다.
강서 둘레길이라고도 불리는 개화산 둘레길은 오르막이나 내리막의 경사가 심하지 않다. 초급자나 시니어들도 쉽게 걸을 수 있다. 마스크를 쓰다 보니 초반부터 땀이 쏟아졌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세 명씩 짝을 지어 녹음이 우거진 숲길을 걸었다. 이렇게 천천히 걸으면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하늘은 파랗고, 산은 초록이고, 망초꽃은 하얗다.
개화산은 서울시 강서구 방화동에 있는 산으로 한강을 사이에 두고 행주산성과 마주 보고 있다. 높이는 약 128m이며 신라시대 주룡거사(駐龍居士)가 득도를 하기 위해 머무른 곳이란다. 그런 이유로 한때 주룡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그가 열반한 자리에서 꽃이 피어나 개화산(開花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멀리서 바라보면 산 모양이 꽃의 형상처럼 보인다.
특히 이곳은 주변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군사 요새로 활용됐다. 산 정상 두 곳에 있는 봉수대는 서쪽과 남쪽에서 봉화를 받았고, 임진왜란 당시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불화(火) 자를 넣어 개화산(開火山)이라 부르기도 했다. 풍수지리상으로는 ‘화리생연(火裏生蓮)’, 즉 불꽃 속에서 연꽃이 피는 형국이다. 말하자면, 개화산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꽃이 피어나는’ 산세라 할 수 있겠다.
한강, 방화대교, 북한산 등 멀리까지 보이는 해맞이 전망대를 지나 약사사, 치현산 꿩고개 둘레길을 거쳐 메타세쿼이아 숲에 들어서자 키 큰 나무들이 세 줄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초록 잎이 무성한 길을 걸으며 피톤치드를 들이마시려 심호흡을 했다. 산책로 끝까지 걷고 난 뒤에는 인적이 드문 숲속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었다.
이날 걷기의 하이라이트는 식사 후 1시간가량 숲에서 낮잠을 자는 것이었다. 평소 잠을 깊이 자지 못하는데 숲의 기운 때문이었는지, 편안함 때문이었는지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일행은 ‘숲속의 잠자는 공주’가 아니라, ‘숲속의 잠자는 시니어’가 되었다. 얼마 후 해설자가 틀어주는 음악소리에 부스럭거리며 일어났다. 피곤이 가셨는지 개운했다. 숲에서 잠이 든 것은 처음이었고, 깊은 잠을 잔 것도 신기했다. 사소한 피로와 가벼운 감기는 숲에 머물러 있으면 치료가 된다고 하던데 산림욕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해설사는 ‘걷기 예찬’의 작가 다비드 르 브르통의 책 ‘느리게 걷는 즐거움’을 꺼내 몇 구절을 읽어줬다.
"걷기는 세상의 쾌락으로 이어지는 통로이다. 잠깐 쉬었다 갈 수도 있고, 내면의 평정도 찾을 수 있으며, 주변 환경과 함께 끊임없이 살을 맞대며 아무런 제한도 장애도 없이 장소의 탐험에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여행은 감각을 통한 전진이요, 관능으로의 초대이다. 행복한 감각들은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순간, 그곳에 있음을 수없이 확인시켜준다."
서울 근처에는 걷고 싶은 길이 많다. 개화산 둘레길도 그중 하나다. 원점 회귀 직전의 하늘길 전망대에서는 김포공항 활주로에 줄지어 있는 비행기들과 그 옆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논, 멀리 녹음이 우거진 계양산까지 보였다.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무겁게 마음을 누르고 있던 것들이 바람과 함께 흩어지는 듯했다. 상쾌했다. 디톡스란 생리학적 용어로 신체에서 노폐물이나 독성물질을 없애는 방법이다. 풍광이 좋고, 일행이 좋고, 날씨까지 좋을 때의 걷기는 마음의 불순물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 같다. 불꽃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꽃중년들이 함께 걸었다. 함께 걷는다는 것은 그 꽃들을 하나하나 만나는 일이다.
한국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왔기에 그 감동은 몇 배나 더했다. 순천만국가정원과 순천만습지 두 곳을 관람하기에 하루해가 모자랐다. 입장료도 제법 비싼 편인데 통합관람권으로 구매하니 대폭 할인이 된다. 올해 3월 은퇴하면 해외여행을 하기로 했는데 코로나19로 진즉 포기했다. 대신 국내 여행으로 순천을 선택했다. 대만족이다. 날씨까지 화창하다.
순천만국가정원은 2013년 대한민국 최초로 국제정원 박람회를 개최했던 장소다. 112만 ㎥(약 34만 평) 부지에 23개국 83개 정원이 꾸며진 대한민국 1호 국가정원이다. 넓은 대지에 세계 유명 정원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뽐내고 있다. 언젠가 해외여행을 할 때 봤던 세계 정원과는 판이하다. 그때 본 정원들은 소꿉장난하듯 그 나라의 상징물들로 꾸며져 있었다. 순천만국가정원에서는 메타세쿼이아 길을 걷다가 숲길 따라 나라별 정원을 관람할 수 있다. 걷는 곳마다 꽃길이라 화사하고 잘 가꾸어놓은 잔디밭 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쉬어 갈 수도 있다. 누워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긴 의자도 준비되어 있다. 그야말로 자연 친화적 정원이다.
풍차가 있는 네덜란드 정원에서는 꽃향기에 취하고 각 나라의 정원도 마치 현장에 와 있는 것처럼 감상할 수 있다. 길이 175m인 ‘꿈의 다리’는 세계 최초로 물 위에 설치한 미술관이다. 14만여 명의 전 세계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동천이 흐르는 꿈의 다리를 건너 한국 정원에 이르는 길에 만나는 조그만 산은 전체가 철쭉 정원이다. 봄에 가면 천상의 세계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의 전통 양식을 잘 보여준다.
부지런히 걸어도 한 바퀴 돌려면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릴 듯하다. 돌아 나오는 길에 만나는 호수정원은 그림 같다. 잔디마당과 봉화 언덕이 있어 나선형의 꼭대기까지 걸러 올라가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다. 호숫가에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 가져온 책을 읽으며 쉬노라니 불어오는 바람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다.
국가정원을 관람한 뒤에는 순천만 습지로 연결되는 스카이큐브가 있어 바로 넘어갈 수 있다. 세계 5대 연안 습지인 이곳은 많은 사람이 찾는 관광지다. 녹색의 갈대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가슴이 확 트인다. 갈대 숲속에 만든 데크 숲길을 따라 걸으며 갈대들이 서로 몸 부딪히는 소리를 듣는다. 정겹다. 문득 올려다본 청명한 하늘에는 흰 구름이 가득하다. 마치 자연의 품속에 안긴 듯하다.
습지에서는 생물들이 살아 숨 쉬는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 순천만의 상징인 짱뚱어가 진흙 바닥에서 구멍을 뚫고 기어나 오는가 싶더니 다른 놈들과 영역 다툼을 치열하게 벌인다. 그러다가 인기척에 놀랐는지 후다닥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생긴 모양이 우스꽝스러운 짱뚱어는 겨울잠을 자는 동면 어류로 잠둥어라 불리기도 한다. 건강한 갯벌에서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순천만 습지의 또 다른 주인은 게다. 사다리꼴 모양의 칠게는 새의 먹잇감으로 유명하며, 도둑게는 벽을 잘 타고 동작이 재빠르다. 바닷가에 있는 민가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훔쳐 먹기도 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습지에서 한주먹하는 놈은 단연 농게다. 암놈은 몸집이 작고 두 다리도 짧지만 수놈은 한쪽 다리가 크고 길어 특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분명 기형의 모습인데 힘센 한쪽 다리를 치켜들며 갯벌을 주름잡는 듯한 자세다. 작은 다리로 갯벌의 먹이를 주워 먹고, 크고 긴 집게발은 자랑처럼 휘두르는 것 같아 재미있다. 학창 시절 힘자랑하던 친구가 떠올랐다.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을 포기하고 순천이라는 곳으로 달려왔다. 만족스럽다. 유럽의 어느 관광지 못지않다. 가끔은 이렇게 보물 같은 관광지를 찾아 국내 여행을 하는 것도 좋겠다. 계절마다 이곳의 모습은 다를 것이다. 지금은 녹음으로 가득하지만 가을에는 갈색의 갈대숲이 반길 것이고 겨울에는 철새들이 날아드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여운이 짙게 남는 여행이었다.
[관광 안내 정보]
관람시간: 순천만국가정원(08:30~20:00), 순천만습지(08:00~19:30)
입장료: 어른 8000원, 청소년 6000원, 어린이 4000원
통합입장권: 어른 1만2000원, 청소년 8500원, 어린이 5500원 (국가정원과 습지 입장 가능)
주소: 순천만국가정원(전남 순천시 국가정원 1호길 47), 순천만습지(전남 순천시 순천만길 513-25)
남한강이 단양 읍내를 말발굽 모양으로 에워싸고 흐른다. 그 물줄기에 단양 제1경인 도담삼봉이 자리했다. 최근 도담삼봉과 멀지 않은 강변에 만천하스카이워크와 단양강 잔도가 조성되어 인기를 끌고 있다. 잔잔한 남한강 물길 따라 걸으며 터줏대감 명소와 신생 명소를 두루 둘러봤다.
벼랑 위 까치발 단양강 잔도
남한강변 만학천봉 절벽 아래에 잔도(棧道)가 놓였다. 잔도란 벼랑에 선반처럼 매단 길을 말한다. 남한강 수면 위 약 20m 높이에 철기둥을 촘촘히 박고, 폭 2m 정도 되는 나무데크를 깔아 산책로를 만든 것이다. 잔도 맞은편에 위치한 단양역에서 바라보면 절벽 아래에 가늘고 긴 띠가 둘려 있는 듯하다.
단양강 잔도는 상진철교 아래에서 시작해 절벽 구간이 끝나는 만천하스카이워크 입구까지 이어진다. 길이가 1.2km 남짓 된다. 왕복으로 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수직으로 깎아지른 벼랑은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잔도가 벼랑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까치발을 들고 선 것 같다.
잔도길은 편안하다. 경사가 없는 데다 낙석 위험 구간에는 지붕을 덮어 안전에 신경 썼다. 감미롭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에 콧노래로 응답하며 느긋한 산책을 즐긴다. 잔도 바닥에 설치된 구멍 난 철판을 지날 때는 심장이 쫄깃해진다. 척박한 벼랑에서도 꿋꿋하게 자라는 붉나무, 고욤나무, 물푸레나무, 부처손, 생강나무 등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낮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면 야간 산책을 즐겨도 좋다. 일몰 이후부터 밤 11시까지 잔도에 야간 조명이 켜진다.
100m 높이 하늘길 만천하스카이워크
잔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만천하스카이워크 주차장과 매표소가 나온다. 매표소 앞에서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만천하스카이워크 입구까지 올라간다. 3대의 버스가 수시로 오가므로 대기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5분 정도 달리면 만천하스카이워크 아래에 도착한다.
만천하스카이워크는 해발 80~90m의 만학천봉 위에 세워졌다. 공룡알을 비스듬히 세워놓은 듯한 모양인데, 높이가 25m나 된다. 예상보다 규모가 커서 입이 떡 벌어진다. 회전 경사로를 빙글빙글 돌면서 스카이워크와 만학천봉 전망대가 있는 곳까지 걷는다. 경사로가 완만해 힘들지 않다.
꼭대기 전망대층에 오르면 단양 읍내와 상진철교, 소백산 비로봉, 양방산, 말발굽 모양을 한 남한강 물줄기가 발아래 펼쳐진다. 전망대 둘레에는 3개의 스카이워크가 공중을 향해 뻗어 있다. 길이는 각각 다르며 폭 2m의 고강도 삼중유리로 제작됐다. 관광객들은 높이가 100여 m에 달하는 스카이워크 앞에서 “네가 먼저 가라”며 서로 등을 떠민다. 나도 호기롭게 스카이워크 위에 서보지만,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하고 오금이 저려온다. 지금 서 있는 곳이 하늘 아래인지, 강물 위인지 아득하기만 하다.
스카이워크에서 내려올 때는 다시 셔틀버스를 타거나 짚와이어(zipwire)를 이용한다. 짚와이어를 타면 몸이 로켓처럼 발사되는 것 같다. “덜컹” 소리와 함께 몸이 “쓩” 공중을 가로지른다. “악” 소리 한 번 길게 지르면 스카이워크 매표소 2층에 도착한다.
단양 제1경 도담삼봉
단양팔경 중 제1경(명승 제44호)인 도담삼봉은 남한강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도담리에 있는 세 봉우리라 하여 도담삼봉이라 불린다. 고요한 수면에 세 봉우리가 데칼코마니처럼 비친 모습이 한 폭의 수묵화 같다. 아침 안개가 피어오를 때면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도담삼봉 중에 덩치가 가장 큰 바위가 장군봉이다. 장군봉 허리춤에는 삼도정이 걸터앉았다. 조선시대 개국 공신인 정도전이 이따금 삼도정에 올라 풍월을 읊었다고 한다.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지을 만큼 도담삼봉을 아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설화에 따르면, 도담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군에 있었다고 한다. 홍수 때 단양으로 떠내려와 지금의 자리에 멈췄다는 것이다. 그 뒤로 단양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매년 정선에 절경 값을 냈다. 소년 정도전이 이 사정을 듣고 강원도 관리에게 “우리가 삼봉을 떠내려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삼봉이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으니, 필요하면 도로 가져가라”고 한 뒤부터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벼랑에 뚫린 무지개 돌문
도담삼봉 주차장 끝 절벽에는 단양 제2경(명승 제45호) 석문이 있다. 제법 가파른 철계단을 오르고, 조붓한 숲길을 걸어야 볼 수 있다. 계단 아래에서 석문까지의 거리가 200m 정도인 게 다행이다.
석문은 남한강변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구름다리 혹은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오래전 석회동굴이 무너진 뒤에 동굴 천장의 일부가 남아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석문의 왼쪽 아래에 작은 동굴이 하나 있다. 옛날 하늘에 살던 마고할미가 물 길러 왔다가 이곳의 경치에 반해 평생 농사지으며 살았던 곳이라는 전설이 남아 있다.
석문 너머로 보이는 옥빛 남한강과 도담리 풍경에 눈길이 머문다. 석문이 천연 액자가 되어준 덕에 강마을이 돋보인다. 석문 전망대에 앉아 석문 밖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강바람을 맞는다. 마고할미가 부는 입김이라 상상해본다. 잃어버린 비녀를 찾으려고 맨손으로 땅을 팠는데 그게 99마지기 논이 되었다는 마고할미의 위력이라면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국내 최대 민물고기 전시관
2013년 단양 읍내 중심에 들어선 다누리아쿠아리움은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민물고기 생태관이다. 입구에 단양을 대표하는 물고기 쏘가리의 대형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관람 후 생각이 바뀌었다. 다누리아쿠아리움은 아이들만 좋아하는 곳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가장 최근에 생긴 전시관인 만큼 평창 동강민물고기생태관, 울진 민물고기생태관, 양평 민물고기생태관보다 시설이 좋다. 세계의 바다 생물을 총집합해놓은 듯한 아쿠아플라넷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민물고기 생태관으로선 국내 최고 수준이다. 수족관 속 조형물을 도담삼봉, 석문 등 단양팔경 명소를 본떠 만든 것이 인상적이다.
전시실에 마련된 130여 개의 수족관에는 국내외 민물고기와 세계 각지에서 모은 희귀 어종이 살고 있다. 남한강의 귀족 황쏘가리, 행운을 불러온다는 중국의 최고 보호종 홍룡, 아마존 거대어 피라루크 등이 볼 만하다. 민물고기 외 양서류, 파충류, 수서곤충류, 포유류 등도 만날 수 있다.
◇주변 명소 & 맛집◇
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 1980년대 남한강변 수양개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에 걸친 유적지(사적 제398호)가 발굴됐다. 수양개유적지 뒤편 언덕에 전시관을 짓고, 출토된 유물을 전시했다.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인 돌날몸돌과 슴베찌르개 등은 중국, 시베리아, 일본의 석기들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전시관 옆에는 야간 조명 포토존인 수양개빛터널이 있다. 단양군 적성면 수양개유적로 395, 09:00~22:00(월요일 휴관), 어른 2000원.
구경시장 다누리아쿠아리움과 단양시외버스터미널 인근의 구경시장이 뜨고 있다. ‘구경’은 단양팔경에 하나를 더해 9경이라는 의미다. 관광객이 몰리는 곳은 먹거리 골목. 그중에서도 단양 특산품인 마늘과 통닭을 함께 굽는 마늘통닭 골목이 가장 붐빈다. 통닭, 닭강정 박스를 들고 다니는 관광객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마늘순댓국, 마늘만두, 흑마늘빵, 마늘메밀전병, 마늘석불고기 등도 인기 먹거리다. 오일장은 매월 1일과 6일에 열린다. 단양군 단양읍 도전5길 31.
마늘정식과 쏘가리매운탕 단양 마늘은 작고 단단하며 맛과 향이 독특하다. 장다리식당에서 마늘 정식을 주문하면 마늘비빔육회, 마늘수육, 마늘통튀김, 마늘만두 등 단양 마늘 음식들이 한 상 가득 차려진다. 민물고기 매운탕을 좋아한다면 남한강쏘가리특화거리에 들러보길 권한다. 어부명가를 비롯해 소문난 맛집들이 모여 있다. 장다리식당, 단양군 단양읍 삼봉로 370, 10:00~21:00(첫째·셋째 월요일 휴무). 어부명가, 단양군 단양읍 수변로 87, 10:00~21:00.
본격적인 여름에 들어서자 하루에도 몇 번씩 마스크를 집어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산들산들 부는 자연의 바람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뿐이다. 사람들 북적이는 서울을 벗어나 쪽빛 하늘, 쪽빛 바다가 있는 청정지역에서 말이다. 간절히 원하면 길이 보인다 했던가? 지인에게서 지난 수요일 전화가 왔다.
“이번 주 주문진 아파트 비었는데 놀러가실래요?”
어이쿠 이게 웬 떡? 예정에 없던 주문진행 주말 나들이가 이뤄졌다. 주문진에 위치한 아파트는 지인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직원 복지를 위해 구입해 펜션으로 이용하는 곳이다. 몇 번 주말에 가겠다고 요청했는데 늘 대여 스케줄이 꽉 차 있어서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나보다.
6월 초 주말 스케줄이 빈 것을 확인하고는 얼른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놀기 좋아하는 사람에겐 이런 찬스가 아주 쏠쏠하다. 이렇게 해서 2박 3일 주문진 여행이 시작됐다. 사실 동해를 안 가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50대 중반을 넘겼으니 가 봐도 수십 번은 가봤을 곳이지만 그래도 일상을 떠나 바다를 보러 간다는 것 자체는 늘 설렘과 기대를 주는 아주 작은 행복 중 하나다. 특히 요즘과 같은 코로나 정국에서는 말이다.
나이 들면서 여행을 떠나니 여행지에서의 즐거움이 예전과 좀 달라진다. 광폭 행보로 이곳저곳 사진 찍기 바쁘게 움직이는 것보다 묵을 곳 정해놓고 동네 마실 다니듯 기웃거리며 보고 먹고 마시는 소소한 즐거움이 더 새롭다.
금요일 오후 동서울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탔다. 주문진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장치찜을 먹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주문진수산시장 쪽으로 재빠르게 걸어갔다. 수요미식회에서 소개한 장치찜을 먹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점심부터 굻고 왔다는 후배와 나는 부지런히 걸어 마지막 손님을 받고 한숨 돌리고 있던 월성식당에 무사히 터치다운했다.
닫으려는 문을, 서울에서 지금 막 내려왔다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며 읍소! 결국 주방일하는 남자 사장님에게 다시 앞치마를 두르게 하고 마침내 한 접시 수북한 장치찜을 맛봤다. 어라? 근데 이 장치라는 놈, 아구도 아닌 것이 장어도 아닌 것이 요상한 형태의 생선이었다. 살은 말랑말랑하고 적당한 기름기에 매콤한 양념이 어우러져 아구찜보다 기름지고 장어와는 달리 매콤해서 밥도둑이 따로 없다. 여기에 곰배령 생옥수수 막걸리까지 소박한 호사를 부리고 숙소로 갔다.
밤늦게 아파트에 도착해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다 잠이 들었다. 주위의 깊은 어둠 때문일까? 불면증 때문에 고생이라는 후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를 골며 잠을 자기 시작했다. 도시에 살아서 불면증일까? 늦은 저녁을 포식해서 잠이 쏟아진 걸까? 어찌됐든 오랜만에 자는 꿀잠이 도시에서도 계속되길 바랄 뿐이다.
아침부터 막국수
아파트가 위치한 주문진 소돌마을. 이른 아침부터 아파트 근처 곳곳에서 닭을 키우는지 여기저기서 닭이 우렁차게 울어댄다. 푹 자고 일어나 상쾌한 몸으로 한 바퀴 돌며 동네를 염탐해봤다. 멀지 않은 도로변에 깨끗하게 생긴 막국수 집이 눈에 띈다. 오픈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8시부터 문을 연단다. 흠 아침부터 막국수 먹는 사람이 많나? 부지런히 숙소로 돌아와 나갈 채비를 하고 막국수 집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인데 벌써 막국수 먹으러 온 외지인들이 하나둘 눈에 띈다. 실내를 둘러보니 심상치가 않다. 어젯밤 주문진수산시장 인근 월성식당에서 먹었던 장치찜도 수요미식회에 나왔다는 정보를 갖고 찾아갔는데 아침부터 막국수 먹겠다는 가상한 용기를 예뻐하셨는지 이 집 막국수 맛 또한 환상이다. 맛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 드렸다. 심드렁한 주인아저씨 왈, “우리 집 맛집이여. 모르는가벼?”
이번 여행은 주문진에서만 머물기로 했다. 일단 차가 없기 때문에 장거리 이동이 불편하기도 했고 몇 번씩 가본 곳들을 또 가려고 렌터카나 택시를 이용하기도 내키지 않았다. 오직 주문진 바닷가를 거닐고 산책하고 샛길, 오솔길, 큰길… 길이란 길은 다 걸어 다녔다. 시골 산길을 걷다 분위기 넘치는 돌계단이 있어 올라가 봤다. 계단을 오르자 양지바른 언덕에 고즈넉하게 단장돼 있는 누군가의 무덤이 나타났다. 뜻하지 않게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에게 잠깐 묵념을 하고 내려왔다. 묘역이 웅장하지 않지만 품위 있어 보였다. 후손의 정성스런 손길이 느껴졌다. 언덕 위 묘역에 잠드신 분보다 이렇듯 품격 있게 관리하는 후손이 더 대단해 보였다.
한참 돌아다닌 끝에 의외의 산책 코스를 발견했다. 주문진 바닷가 건너편 향호리에 위치한 호수 향호다. 향호는 강릉 경포대, 고성 송지호와 함께 강원도의 대표적인 석호라고 한다. 석호란 파도가 해변의 모래를 밀어 올려 둑을 쌓고 모래섬이 커지면서 바닷물이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길을 막아버려 생긴 호수다. 돌아갈 곳을 잃어버려 다시 그곳에 정착한 실향민 혹은 이민자 같다. 마치 내 신세 같다고나 할까? 바다 깊이가 얕고 밀물 썰물의 차이가 큰 서해안은 갯벌이 발달해 석호가 생기기 어렵지만 동해안을 끼고 있는 강원도와 함경도에는 큰 석호가 많단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경포대가 가장 큰 석호 중 하나이며 향호는 주문진 바닷물이 돌아가지 못한 작은 석호다.
바람의 길, 트레킹 코스
향호를 지나는 트래킹 코스도 발견했다. 이른바 강릉 바우길 13구간 바람의 길이다. 이 길은 주문진 해변에서 시작해 산간으로 들어오는 고속도로 교각을 지나 향호 호수 제방을 따라 산길까지 15km 구간을 트레킹하는 코스다. 산길을 거닐며 바닷바람을 맞을 수 있어 바람의 길이라고 불린단다. 이름이 참 예쁘다.
강릉 바우길은 제주 올레길 성공에 자극받아 지난 2009년도부터 개발됐다고 한다. 바우는 바위를 의미하는 강원도 말로, 백두대간의 시작인 강원도의 트레킹 코스를 일컫는 용어로 정착됐다. 기존 산악 등산로와 연결돼 손쉽게 개발된 코스 외에도 바우길 개척대가 신설한 코스 등을 합해 현재는 총 19구간으로 확대됐다. 2010년에는 사단법인 강릉 바우길이 설립돼 스토리텔링과 코스 개발 등을 맡고 있다.
산에 난 오솔길 등산로를 걷는 즐거움도 있지만, 강릉 바우길 13구간 바람의 길에서 향호 호수를 한 바퀴 도는 둘레길에서 매력을 느낀다. 산책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호숫가 옆에 나무데크를 설치해 호수를 노니는 물새들을 바라보며 갈대 숲길을 따라 걷다가 주문진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흐르는 땀을 식힐 수 있다. 중간중간 설치한 등나무 쉼터 벤치에 앉아 동네 촌로가 가꿔놓은 정갈한 경작지에서 자라는 야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 집 뒷마당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것 같은 편안함을 맛보게 된다. 등나무 벤치에 앉아 노래 한 곡을 듣고 일어났다. 이제 주문진 바닷가로 향할 참이다. 이른 아침 막국수 한 그릇으로 채운 배가 신호를 보낸다. 회는 언제 먹을 것이냐고. 주문진 바닷가를 향해 걸어가 본다.
관광객들이 모여 있는 주문진 바닷가에서 벗어나 소돌해변 쪽에서 들어가면 식객 허영만 화백의 백반기행에서 소개한 섭국 전문점 미경이네 횟집이 나온다. 메뉴를 찬찬히 살피다 일단 오늘은 회를 먹고 섭국은 내일 아침 식사로 도전해보기로 했다. 자연산 회와 소주 각 1병씩으로 운동의 피로를 적당히 풀었다. 부산스럽지 않은 여유로운 여행이 편안하고 즐거웠다. 이른 저녁의 술 한잔도….
바닷가를 걷다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해변을 어슬렁거리다 보니 버스정류장 앞에 외국 여학생들이 까르르르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호기심이 발동해 버스정류장을 살펴보니 2017년 BTS가 발매했던 ‘봄날’ 앨범 재킷 사진을 촬영했던 향호 해변이라는 설명이 보인다. 세상에나! 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구나. 우리 역시 라인업을 하고 쪽빛 바닷가를 배경으로 녹슨 버스정류장에서 인생 샷 한 컷을 건졌다.
아무 할일 없이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는 일은 인생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중대 사건이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면 몰라도 연령대별로 해야 하는 과업에 낙오하지 않고 패스하기 위해 우리는 늘 여유가 없었고 발을 동동 구르며 바쁘게 살아야 했다. 지하철 환승 칸을 체크하며 바꿔 탈 때마다 종종걸음으로 옮겨 다녔고 버스로 환승하는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성큼성큼 걸어 다녔다. 이제 인생의 숙제는 다 끝냈고 난 나의 길을 찾아 이길 저길 돌아다녀본다. 내게 맞는 길은 어디 있는지, 이 길은 맞는 길인지, 또 이 길은 어디로 맞닿을 길인지.
섭미역국은 모범생, 섭국은 깡패 같은 맛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이면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 마지막 할일 하나가 남았다. 섭국을 맛보는 일. 미각여행의 끝을 보고 말리라. 둘째 날 이른 아침 짐을 챙겨 일단 미경이네로 향했다. 아침 식사로 섭국을 맛보기 위해서다. 섭은 자연산 토종 홍합으로 옛날에 쌀이 귀하던 시절, 어민들이 채소에 밀가루 반죽을 입혀 홍합을 듬뿍 넣어 끓이는 국에 이 채소를 넣고 매콤하고 알싸하게 끓여 먹었던 국이라고 한다.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사장님이 서울 촌놈들을 대상으로 섭의 유래와 섭국 끓이는 법까지 일장 강의를 하신다. 강의가 끝난 후 섭국이 나왔다. 우리가 자주 먹는 국밥의 내용물이 홍합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해장에도 좋고 아침 식사 한 끼로도 충분했다.
그때 식사가 끝난 것을 본 사장님이 또 출동. 허영만 선생이 섭미역국은 모범생, 섭국은 깡패 같은 맛이라고 설명했다며 우리에게 맛이 어땠는지 물어보신다. 아! 집요한 사장님. 이래서 성공했구나. 우리 둘은 “알싸한 맛이 깡패 같아요“ 하고 대답해줬다. 매우 흡족해하신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해안가 산책을 한 번 더 하기로 했다. 걷다가 언뜻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어 가까이 가봤다. 도로변 나뭇가지에 나란히 꼬챙이에 꽂힌 오징어가 말라가고 있었다. 다리는 모두 잘린 채. 그 오징어 사이사이로 보이는 쪽빛 바다, 쪽빛 하늘…. 2박 3일 완벽한 힐링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뭔가 빠진 듯 내내 허전함이 느껴졌다. 뭐지? 이번 여행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꺼내본다. 맨 마지막 사진. 다리 잘린 오징어. 그 사진을 보자 떠올랐다. 맞아! 주문진은 오징어였지? 다음 여행을 기약해본다.
지난 5월 마지막 주, 수업을 같이 듣는 동료들과 제주 여행을 했다. 미션이 있는 워크숍 형식의 여행이었다. 첫째 날 조별 미션을 수행하고 둘째 날은 다시 조를 바꿔 자유여행을 했다. 자유여행은 각자 가고 싶은 곳을 확인해 동선이 비슷한 두어 군데를 묶기로 했다. 조 팀원 중 한 사람이 비자림에 한 번도 안 가봤다며 꼭 넣어달라고 한다. 비자림이야 자주 가도 좋은 곳이니 안 될 이유가 없다.
제주 관광지 추천 목록에 빠지지 않는 장소가 바로 비자림이다. 천연기념물 제374호로 지정 보호하고 44만8165㎡의 면적에 500∼800년생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빼곡하게 자라는 비자림은 사려니숲길과 함께 제주의 걷고 싶은 길로 손꼽힌다. 세계적으로 보기 힘든 높이 7m 이상의 비자나무들이 군집해 있다.
재질이 좋은 비자나무는 고급가구나 바둑판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비자열매는 구충제로 많이 쓰였다고 한다. 또한 비자림은 풍란, 콩짜개란, 흑난초, 비자란 등 희귀한 식물의 자생지이기도 하다. 울창한 비자나무 숲은 혈관을 유연하게 하고 피로회복을 도와 인체의 리듬을 되찾게 해주는 자연 건강 휴양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비자림 주변으로 월랑봉, 아부오름, 용눈이오름 등이 있어 가벼운 등산이나 운동을 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동료들과 찾은 비자림은 변함이 없다. 여전히 사람이 많다. 키 큰 나무들이 사방을 가린 초록의 숲을 걸었다. 오랜만에 마스크를 벗을까 잠시 유혹을 느꼈다. 여기저기 추억을 가두려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댄다. 처음 왔다는 조 팀원도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두 해 전 여름, 친구와 들렀을 때가 떠오른다. 해가 쨍쨍 내리쬐던 한여름 비자림에서 만났던 청춘들이 생각났다.
스물 초반 여학생으로 보이는 그녀들도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하얀 챙 모자에 흰 원피스를 입은 그녀와, 역시 비슷하게 생긴 모자에 디자인만 다른 똑같은 색 원피스를 입은 또 다른 그녀가 서로 포즈를 잡고 깔깔대며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우리는 만났다. 사실 만났다기보다 초록의 숲에서 흰 원피스를 입은 그녀들이 너무 화사해서 친구와 내가 걸음을 멈췄다. 사진을 찍어 확인하면서 깔깔대는 그녀들이 눈부셔 멈추고 바라본 것이다.
"사진 찍어줄까요?"
그녀들이 셀카봉을 들고 이리저리 포즈를 잡을 때 내가 물었다. 그들은 "감사합니다" 하면서 또다시 깔깔 웃었다. '굴러가는 나뭇잎만 봐도 웃을 나이지' 우리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그녀들과 헤어져 비자림을 걷고 주차장으로 막 나왔을 때 우리는 다시 만났다. 흰 원피스는 편한 반바지로, 챙 모자는 야구모자로 바뀌어 있었다.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아니었으면 몰라볼 뻔했다. 그녀들은 비자림에서 기억에 남을 사진을 찍으려고 소품을 미리 챙겨온 거라고 했다. '그랬구나.' 조금 전 초록 숲을 배경으로 서 있던 그들이 꿈인 듯 아득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다.
"우리도 나중에 원피스 챙겨 사진 찍으러 오자"
친구가 하는 말에 "그전에 살을 빼야 하지 않을까?" 했더니 그녀는 "어우 야~" 하면서 툴툴거렸다. 그날 우리는 한여름 태양 아래 다시는 갈 수 없는 청춘을 애잔해하며 낄낄거렸다. 우리 앞에서 깔깔거리던 그녀들의 청춘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흰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그들의 젊음을 훔치고 싶었던 것 같다.
흰 원피스가 펄럭이던 곳에서 동료들과 사진을 찍었다. 초록을 품고 높이 솟은 비자나무를 배경으로 어색한 포즈를 지으며. 생각난 김에 친구에게 전화해볼까?
"희정아, 흰 원피스 입고 비자림 가자"
소나무들 휘늘어져 산사 초입이 시퍼렇다. 나무 중 매양 으뜸으로 치는 게 소나무다. 고난이 덮쳐도 떠나지 않는 친구가 소나무라 했다. 사명대사는 한술 더 떠 ‘초목의 군자’라 일렀다. 솔에 달빛이 부서지면 그걸 경(經)으로 읽는 게 수행자다. 산사에 꽉 찬 솔의 푸름을, 그린 이 없이 그려진 선화(禪畵)라 해야 할까보다.
오래 묵어 한결 운치 있는 암자 세 곳을 둘러볼 수 있는 숲길이다. 매표소 앞 공터에 주차한 뒤, 봉정사와 영산암을 거쳐 1km쯤 산길을 오르면 개목사다. 천등산(해발 574m) 정상까지 오른 뒤 하산하는 코스(4km)엔 두 시간 반 정도가 소요된다.
안동 봉정사. 규모보다는 잘 늙은 전각들로 이름난 절이다. 국내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인 극락전을 비롯해 국보와 보물이 많다. 늙어 쇠락하기는커녕 웅숭깊은 격조로 아름다운 전각들. 풍상을 겪으면 겪을수록 환한 진면목이 드러나는가. 오랜 침묵과 풍화로 이미 해탈한 전각의 고색창연에 형언하기 어려운 깊이가 서려 있다. 법당의 갈라진 기둥에 시간의 불가해한 손길이 아른거린다. 시간은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무수한 빗금으로 터진 기둥이 통째로 시간의 족적이지 않은가.
고승의 법문은 심오해 더러 지루하다. 무심히 낡고 닳은 전각에 더 끌린다. 하염없이 늙었으니 가만히 조는 게 나의 일, 무슨 말이 필요하랴! 전각이 전하는 뜻이라면 그쯤일 게다. 그 완전한 방임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해진다. 전에 한국을 방문한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가장 한국적인 풍경을 보고 싶다”고 해 데려간 곳이 봉정사다. 여왕은 이곳에서 무엇을 보았나. 무애행(無碍行)으로 세상을 건넌 경허. 그는 “홀연히 생각하니 몽중(夢中)이라” 했다. 집착도 욕망도, 풍경도 법당도 헛꿈 아닌 게 없더란 얘기다. 꿈에서, 미망에서 조속히 깨어나는 걸 깨달음이라 했다. 전각만 곱살하랴. 깨친 눈엔 미추(美醜)도 생사도 하나일 게다.
큰 돌 잔돌 잘 끼워 맞춰 쌓은, 길고 높은 계단을 오르면 영산암이다. 봉정사와 이마를 맞댄 암자다. 절이 쌍으로 앉았으니 겹으로 포개진 극락인가. 초목들이 기차게 뿜는 초록 속에 앉아 있기는 영산암도 마찬가지다. 작아서 안온하고, 고요해서 그윽한 암자다. 뜰에선 꽃이 핀다. 부처의 말씀을 머금고 다소곳이 개화해 향화(香火)처럼 갸륵하다. 전각들의 노구마다 인자한 미소 같은 게 어려 통으로 관음보살이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이 암자에서 찍은 까닭을 짐작할 만하다.
제자들이 어느 날 조주에게 물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이유를. 이에 조주가 아주 알쏭달쏭한 답을 했다. “옜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다!” 판때기 이빨에 털 났다는 뜻이다. 이게 무슨 썰? 다 닥치고 의단(疑團, 의심을 일으키는 실마리) 하나로 맞짱 뜨라고 던져준 솔루션이었다. 불가의 전언들은 묘해서 일단 골치 아프다. 그러나 멍청이가 아닌 이상 끝내 쿨하게 알아먹지 못할 게 없다.
암자 뒤편으로 난 산길을 오른다. 소나무, 참나무, 물푸레나무, 소사나무 등속이 평범하게 어우러졌다. 아뜩한 벼랑이 없어 볼만한 게 드물지만, 술렁술렁 한가하게 걸을 만한 숲길이다. 스님들이 포행삼아 오르내리는 길일 게다. 불당만이 도량이랴. 금칠을 자신 불상만이 불상이랴. 삼라만상이 화엄경이니 나무도 숲도 경전으로 족하다. 곰삭은 둥치에 새 가지들 돋아 길길이 치오르는 저 고목을 보라. 죽어가며 살아 있으니 굳세어 선객(禪客)이다. 한 번 태어난 이승, 그냥 가기 섭섭해 마지막 기름을 짜 불을 댕기나? 백척간두진일보! 이미 종을 친 생이나 한 발 더 허공으로 내딛는다. 내가 삶에 바치고 싶은 기도는 대체로 저런 모습이다.
나무들이 분비하는 에테르를 머금어 공기는 그지없이 청량하다. 산 아래엔 바이러스가 들끓는다. 구차한 일상에 감염병까지 겹쳤다. 모두들 마스크로 입을 틀어막고 돌아다니는 세상을 상상이나 해봤던가. 모두들 용을 쓰나 저놈이 쎈 놈이다. 황소고집을 부린다. 코뚜레를 뚫을 곳이 없다. 천국의 한 치 곁에 지옥이 있고, 지옥의 한 치 곁에 천국이 있다 했다. 불가의 화법으로는 절체절명과 고립무원이 오히려 찬스다. 아픈 세상, 함께 아파하며 갈 수밖에 없다. 나무들처럼 사람도 더불어 살면 숲이다. 숲에 무슨 낙심이 있으며 무슨 패닉이 있겠나.
산길이 끝나는 자리엔 또 암자가 있다. 개목사다. 여기엔 바람소리와 새소리만 있다. 스님은 고적해 간혹 좀이 쑤실 게다. 오늘은 일삼아 일을 만든 날? 연장을 들고 활개 치는 몸짓이 흥겨워 댄스는 저리 가라다.
올해에는 벚꽃놀이도 없었고 봄꽃의 흐드러짐도 만나지 못하였다. 계절의 변화를 느낄 새도 없이 지나는 가장 젊은 날의 봄이 아쉽다. 연두색 새잎이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5월을 느끼기 좋은 곳이 어딜까 고민하다 창덕궁 후원을 떠올렸다. 가을에는 몇 번이나 갔으나 봄은 처음이다.
창덕궁은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 때 만들어졌다. 형제의 피를 묻히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꺼렸다. 1405년 새롭게 창건된 창덕궁은 이궁(離宮)이었으나 조선의 역사 속에서 종종 법궁(法宮)의 역할을 하였고 현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 평가받고 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면 회화나무 여덟 그루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백 년 된 노구에 연두색 새잎이 돋고 있다. 궁궐 안의 가장 오래된 돌다리인 금천교를 건너 좌측으로 방향을 틀면 정전인 인정전이 나온다. 그 뒤로 편전이었던 선정전, 왕의 침전이었다가 편전으로 사용한 희정당과 대조전이 있다.
왕과 왕비의 침실이기도 했고 왕자와 공주의 교육 장소로 쓰였던 대조전은 조선 멸망을 지켜본 비운의 전각이다. 한국을 일본에 넘기는 합병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고 ‘창덕궁 전하’라 불리던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이곳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전각들은 대부분 촘촘하게 붙어있어 수월하게 둘러볼 수 있다. 사대부 양식의 건물인 낙선재만 주 전각들과 약간 떨어져 있다. 이에 반해 후원은 꽤 발품을 팔아야 한다.
양옆에 긴 담벼락이 늘어선 길을 따라 후원으로 들어간다. 비밀의 정원답게 들어가는 입구가 길다. 이때부터 초록 샤워기를 틀고 그 아래에 선 듯 느껴진다. 대여섯 살 정도 된 딸 둘과 고궁 나들이에 나선 한 가족이 앞서 걷다가 감탄사를 터뜨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나 다를까 구부러진 길 끝부터는 더 깊은 초록의 터널이다.
싱그러움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열하게 달린다. 뽕나무, 은행나무, 쪽동백나무, 함박꽃나무, 느티나무.... 나뭇잎을, 그러쥐어 꾹 짜면 연두와 녹색이 절묘하게 섞인 5월의 색이 주르르 흘러내릴 듯하다.
숲 터널 끝에 자리한 부용지가 은밀하다. 사각의 연못을 가운데 두고 동쪽에는 영화당이 남쪽과 북쪽에는 각각 부용정과 주합루가 서 있다. 정조가 즉위한 해인 1776년에 만든 주합루는 계단식 구조물 위에 2층 누각 형태를 띠고 있는데 1층은 도서관인 규장각이, 2층은 학자들의 배움터이자 토론장으로 애용되었다.
부용지를 나와 숙종 때 만들어진 애련지와 조선 시대 양반가옥을 본떠 만든 연경당을 둘러보고 다시 시작되는 초록 샤워 길을 지나 왕의 휴식공간이었던 존덕정에 이르러 발길을 멈춘다. 쉼조차 싱그러운 봄이다. 너른 숲길에 작은 오솔길이 나 있다. 길을 따라 들어가면 인공적으로 물길을 낸 옥류천이 나타난다. 이곳 또한 휴식처이다.
5월의 창덕궁은 어느 곳 하나 싱그럽지 않은 곳이 없다. 전각과 후원의 생기 가득한 풀과 나무 사이를 걸으며 코밑까지 온 봄을 느낀다. 숨바꼭질 동무를 찾아 기쁘듯 숨어있다 얼굴을 내미는 연못과 정자에서 휴식의 기쁨을 누린다. 가는 봄날의 아쉬움이 달래 진다.
관람 안내 : 창덕궁의 전각은 휴관 일(매주 월요일)을 제외하면 상시 관람이 가능하지만 후원은 궁궐 전각 관람료(대인 3000원)와는 별도의 후원 관람료(대인 5000원)를 내고 들어간다. 후원 관람은 90분 정도 소요되며 해설사와 함께 회차 별 100명으로 입장을 제한하고 있다. 예약은 6일 전 오전 10시부터 입장 전날까지 받는다. 예약인원 50명, 당일 발권 50명이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해설사 없이 회차별로 입장하여 자유 관람하는 형태로 운영 중이다.
시집 ‘묵호’를 읽고 막걸리를 안 마실 수 없다는 선배의 SNS 글을 보고, 기억 속 묵호를 떠올렸다. 묵호등대마을의 비좁고 가파른 골목 끝에서 마주했던 검푸른 바다, 슬레이트집 담벼락에 그려진 소박한 벽화들, 묵호등대 턱밑 민박집에서 창문으로 감상했던 묵호의 밤 풍경을. 유난히 묵호에 끌리는 건, 왜일까. 좋은 건 이유가 없다더니 묵호가 그렇다.
논골담길 코스
묵호역▶ 대우칼국수▶ 묵호등대마을과 묵호등대▶ 묵호자연산활어센터▶ 묵호항▶ 묵호역
묵호가 한때는 말이야
올 3월부터 KTX가 동해 묵호역과 동해역에 정차한다. 서울역에서 출발해 2시간 30분쯤 뒤면 동해에 닿는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을 때 훌쩍 다녀올 수 있게 됐다. 봄기운이 완연한 주말 아침, 묵호행 첫 열차를 탔다. 열차 타고 동해에 가는 것은 처음이다.
언제나처럼 동해 여행의 시작은 묵호등대마을. 묵호역에서 묵호등대마을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걸린다. 택시나 버스를 타고 가도 되지만, 굳이 걷는 이유는 칼칼한 장칼국수를 먹고 싶어서다. 묵호역에서 묵호항 쪽으로 5분쯤 걸어가면 한자리에서 60년 동안 장사한 장칼국수집이 나온다. 허름한 건물 2층에 자리했다. 백발의 노부부가 주인이고, 딸 내외가 연로한 부모를 돕고 있다.
장칼국수는 칼국수에 고추장을 풀어 얼큰하게 끓인 음식이다. 국물이 어죽처럼 걸쭉하다. 먹으면 속이 확 풀려 해장 칼국수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주인장에게 맛 비결을 물으니 “멸치와 버섯으로 국물을 내는데, 고추장 맛이 가장 중요해요. 감자를 함께 넣고 끓여 구수하고요. 감자를 채 썰어 넣은 장칼국수는 흉내만 낸 거예요” 한다. 오래전 뱃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줬던 장칼국수가 요즘 사람들 입에도 맞는지, 오전 10시도 안 된 시간에 손님이 계속 들어온다.
장칼국수를 배불리 먹고, 묵호항과 활어센터를 지나 묵호등대마을로 향한다. 이 마을은 묵호등대가 세워진 산비탈에 형성돼 있다. 묵호항을 터전으로 살았던 이들의 거주지였다. 1936년 개항한 묵호항은 1940년대 국제무역항으로 성장해 1970년대까지 무연탄과 석탄, 수산물을 출하하는 항구로 전성기를 누렸다. 매일 밤 항구는 오징어잡이 배 불빛으로 대낮처럼 환했다고 한다. 길거리 개들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우스갯소리도 전해온다.
묵호항에 일거리가 넘치자 전국에서 인부들이 몰려와 산비탈에 슬레이트집을 짓고 정착했다. 아랫마을에는 주로 뱃사람들이, 윗마을에는 명태 덕장 인부들이 살았다. 덕장 인부들은 묵호항에 들어온 명태를 지게에 올려 산꼭대기 덕장으로 날랐다. 여자들은 빨간 고무 대야에 생선을 가득 담아 머리에 이었다. 지게와 고무 대야에서 줄줄 흘러내린 물 때문에 흙길은 논길처럼 질척거렸다. 그래서 ‘논골’이라 불렸다. “마누라와 남편은 없어도 살지만 장화 없이는 못 산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이 마을 사람들에게 장화는 생필품이었다.
묵호등대마을의 추억을 만나다
불꽃처럼 호황을 누렸던 묵호항은 1980년대 동해항이 개항하면서 쇠락했다. 젊은이들은 새 일자리를 찾아 묵호를 떠났다. 묵호 인구가 절반 이상 줄었고 빈집도 늘었다. 현재 거주자들은 대부분 노인이다.
스러져가던 묵호등대마을에 제2의 전성기가 찾아왔다. 2010년 마을 골목길에 묵호 사람들의 삶 이야기를 담은 벽화가 그려지면서부터다. 회색빛 마을에 생기가 돌았다. 이 벽화 골목을 ‘논골담길’이라 이름 붙였다. 논골담길 벽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묵호를 향한 애정을 꾹꾹 눌러 담은 절절한 연시이자 묵호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추억의 사진첩이다. 비탈길을 오르며 묵호의 옛 사진첩을 넘겨본다. 고된 뱃일을 마친 일꾼들이 매일 들러 막걸리와 노가리 안주로 하루의 피로를 풀었던 대폿집, 묵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오징어와 명태와 문어, 생필품이었던 장화, 코흘리개 아이들이 군침을 흘리며 넘겨다보았을 구멍가게, 명태 지게를 진 할아버지 그림에서 묵호의 청춘을 만난다.
벽화가 낡으면 새로 그린다. 그림이 바뀔 때마다 전망 좋은 언덕에는 카페와 게스트하우스, 펜션도 들어선다. 가끔 옛 그림과 누군가 담벼락에 써놓은 시가 그립다. “이제는 보라색 조가비랑 내 아버지 젊은 시절 팔뚝처럼 철철 힘이 넘치던 물고기랑 먹빛 눈물점이 슬펐던 목포집 주모랑…. 열이, 철이 내 친구들과 내 누이도 모두 떠나고 기억의 눅눅한 막국수 같은 호수만 남았네. 기억하리라! 정든 墨湖!” 이 시 때문에 묵호를 좋아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논골담길은 비좁고 가파르다. 시멘트 바닥은 굴 껍데기처럼 거칠다. 대문 없는 슬레이트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대문은 없어도 마당에 오징어와 명태를 말리는 건조대 하나쯤은 두고 산다. 창호지를 바른 나무 창살문을 그대로 사용하는 집도 있다. 이 문을 열면 바로 바다와 마주한다. 묵호등대마을의 집들은 허름해도 전망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전망 맛집 논골카페와 묵호태
논골담길 꼭대기에 있는 묵호등대의 전망대에 오르면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다랭이논 같은 산비탈에 빨강, 파랑, 노랑 양철지붕들이 갯바위의 따개비처럼 모여 있다. 멀리로는 두타산과 청옥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파견된 부사가 이곳 바다 물빛이 검고, 물새도 검다면서 마을 이름을 묵호라 지었다고 한다. 깊고 깊은 바다는 정말 칠흑 같다.
묵호등대 아래, 깎아지른 비탈을 ‘바람의 언덕’이라 부른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카페와 전망 데크도 들어서 있다. 전망 데크에 서면 묵호항과 묵호등대마을 전경이 손금 보듯 훤히 보인다. 시야가 탁 트여 바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하다. 카페의 폴딩 도어를 모두 열어젖히면 바다가 와락 품에 달려드는 것 같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차를 마시고, 그리운 이에게 엽서를 썼다. 카페 앞 느린 우체통에 넣으면 1년 뒤에 전달된다.
카페 앞 동해 특산물을 파는 매장에도 들러 묵호태를 샀다. 묵호태는 묵호에서 만드는 먹태다. 바람의 언덕에서 바라보이는 해발 70~80m 높이의 묵호 덕장에서 생산한 것이다. 11월 말부터 이듬해 3월까지 서리와 눈, 비를 맞히지 않고 전통 해풍 건조 방식으로 말린 명태다. 20여 일 동안 해풍으로만 말리기 때문에 바싹 마른 황태와 달리 속살이 부드럽다. 그냥 먹어도 맛있다. 새우깡도 아닌데 자꾸 손이 간다.
묵호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활어센터와 묵호항을 다시 들렀다. 오전과 달리 손님들로 붐볐다. 이곳 활어센터는 자연산 수산물만 취급한다. 구입한 횟감은 활어판매센터에서 회로 썰어준다. 인근 식당에서 초장과 채소 등 재료값만 내면 바로 먹을 수 있다.
묵호항 부두에서 갈매기 떼가 요란하게 떠들기에 가보니, 아침에 조업 나간 배가 막 항구에 들어왔다. 뱃사람들이 생선이 가득 담긴 상자를 부두 바닥에 쌓아 놓으면, 상인들이 웅성거리며 상자 주변으로 하나둘 모인다. 곧 경매가 시작될 분위기다. 활기 띤 항구 풍경에 왠지 안도감이 든다. 시장과 항구는 시끌벅적해야 제맛 아닌가.
◇ 주변 명소 & 맛집 ◇
천곡황금박쥐동굴
국내에 하나뿐인, 도심에 있는 동굴이다. 4~5억 년 전에 생성된 석회암 동굴로 황금박쥐가 서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총길이는 1400m, 관람 구역은 약 700m다. 베이컨, 오백나한상, 마리아상, 샹들리에 모양의 다양한 종유석을 볼 수 있다. 동굴 전시관에 황금박쥐를 테마로 한 동굴 탐험 VR 체험 시설을 갖췄다. 동해시 동굴로 50, 관람시간: 09:00~18:00, 관람료: 어른 4000원, 문의: 033-532-7303
무릉계곡
두타산과 청옥산 자락 골짜기의 계곡물이 무릉계곡 초입에 있는 반석 위로 힘차게 흘러내린다. 반석의 크기는 무려 4958m²(1500여 평)에 이른다. 반석에 빼곡히 새겨진 이름과 글귀들이 볼 만하다. 삼화사를 지나면 본격적인 숲길이 시작된다. 계곡 입구에서 쌍폭포와 용추폭포까지 가려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 가벼운 산책코스다. 좌우 두 개의 폭포가 하나의 소로 떨어지는 쌍폭포가 장관이다. 동해시 삼화로 584, 문의: 033-539-3700
장칼국수와 해산물 맛집
동해 원조 장칼국수집은 대우칼국수다. 인근 오뚜기칼국수도 유명하다. 묵호항 주변 동백식당의 해물탕과 해물찜, 부흥횟집의 물회, 물곰식당의 곰치국도 오래된 맛집 메뉴다. 까막바위 인근 어달리 회타운에서는 오부자횟집의 냄비물회, 동해바다곰치국의 생선구이가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