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입문 차 수개월 째, 정규 홀을 나가려 하니 겁부터 난다. 제대로 드라이버를 칠 수 있을까, 연습장에서처럼 아이언이 잘 맞아줄까, 캐디의 시선은, 다른 이들에게 민폐만 끼치는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걱정에 정규 홀을 나가기까지 2년 이상이 걸리는 사람도 있다. 그 시간을 줄이는 방법으로 9홀 골프장에서 사전 연습을 해보길 권한다.
연습장에서 백날 드라이버 연습했다고 그린에서 제대로 골프를 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잔디를 밟으며 걷는 즐거움과 함께 공을 잘 치겠다는 욕심에 잔뜩 힘이 들어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정규 홀을 돌 때 1인당 소요비용은 캐디피를 포함하여 20~25만 원 선이다. 골프가 있는 사람들의 운동이라고 불릴만한 비용이다. 자신의 문제점이 과연 무엇인지, 얼마나 또 어떻게 연습을 해야 할지 점검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어떤 골프장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까?
퍼블릭은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골프를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연습 패턴을 점검하는 시간을 제공한다. 또한 체력적으로 정규홀을 다 돌기 어려운 시니어들이 그린 위를 걸으며 자연과 함께하는 골프의 매력을 충분히 느끼게 해 준다.
첫 라운딩이라면 넉넉하게 골프공을 챙겨 퍼블릭 CC를 찾아보자. 방향과 거리에 정확성이 떨어져 연못에, 숲 속에 떨어져 찾을 수 없는 볼에 연연하지 말고 다음 공을 꺼내 스윙하면서 빠른 진행의 골프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하도록 한다.
서울 근교 가볼 만한 퍼블릭 골프장
△ 아도니스 CC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포천로 2499
18홀 정규홀과 9홀 퍼블릭을 함께 운영, 퍼블릭도 그린이 잘 관리되어 있다. 노캐디, 코스가 짧은 편이고 폭이 좁아 정교한 티샷을 연습하기 좋다. 카트를 선택할 수 있는데 1인용 수동, 전동카트와 4인용 승용카트가 있다. 2인 플레이로 예약하면 다른 2인 팀과 조인 가능하다. 수동카트 이용 시 운동하기 좋으며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만큼 시간이 지체될 수 있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
이용료 : 6월 그린피는 주중, 주말, 티오프 시간에 따라 4만 원~6만 5000원. 수동카트(1인) 5000원, 전동카트(1인) 8000원, 4인 카트 4만 원.
△ 락가든 골프클럽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화동로 738
정통 미국식 퍼블릭코스를 지향, 페어웨이나 그린 관리가 잘 되어 있고 카트가 페어웨이로 진입할 수 있다. 9홀 플레이 시간이 2시간 이내로 비교적 짧고 클럽하우스가 캠핑카 스타일로 단출하다.
이용료 : 9홀 그린피 주중 7만 원, 주말 8만 원선 티오프 시간에 따라 금액이 달라짐, 2인 플레이도 가능. 2인 카트로만 운영되며 카트비 1인 기준 9홀이나 18홀 동일하게 1만 원
△ 블루원 용인CC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보개원삼로 1534번길 40
회원제로 운영되는 정규홀인 서코스, 중코스, 노캐디 퍼블릭으로 운영하는 동코스가 있다. 전반전과 후반전이 같은 코스지만 티 박스와 그린의 핀 위치가 달라서 다른 코스를 도는 느낌이 든다. 웬만한 정규홀 보다 그린 관리가 잘되어 있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용료 : 9홀 그린피 주중 7만 원, 주말 8만 5000원. 카트 팀당 4만 5000원,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운행.
△ 한림 안성CC(구 레이크힐스 안성CC)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양성로 349-61
초급자가 이용하기 좋은 골프장으로 최근 그린 관리가 나아졌다는 평을 받고 있다. 9홀 기준 이용료 : 그린피 7만 5000원. 18홀 10만 원. 시간대와 주중, 주말이냐에 따라 요금을 다르게 책정하고 있으며 2인 플레이가 가능, 노캐디. 승용카트 또는 전동카트 이용 가능, 카트비 9홀 5만 원, 18홀 9만 원
△ 123골프클럽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통일로 43-168
1.2.3 골프 클럽은 9홀은 아니지만 6홀짜리 캐디 있는 골프장으로 무조건 선착순으로 대기해야 한다. 1~2인은 조인을 해 골프를 진행할 수 있다. 요즘 같은 시기에는 1~2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는데 이때 한 바구니에 9,000원짜리 연습용 공을 구입하여 250M 인도어에서 연습하는 시간을 가져도 좋다. 저렴하게 즐길 수 있고 서울에 가깝다는 이점이 있지만 그린 관리가 잘되어 있는 편은 아니다.
이용료 : 주중 6홀 2만 6000원 주말 2만 9000원, 캐디피는 1인당 1만 원, 카트비는 1인당 2000원.
저무는 놀빛 앞에선 허허롭다. 서산 너머로 사라진 해는 이제 어느 숙소를 찾아가는가. 인생 황혼에 접어든 사람은 어디로 가나. 만족은 없고 갈증은 자글거린다. 요즘 말로 ‘심쿵’은 멀고, 딱딱한 가슴에 먼지만 폴폴 날린다. 이건 겁나게 먹은 나이에 보답하는 정경이 아니다. 어이하나. ‘나, 물처럼 살래! 흐르는 물이 돌부리에 걸리거나 진땀 빼는 법이 있던가, 물이 답이자 선생이다!’ 문순우(73) 화백은 그리 생각한다. “너, 나를 물로 보니?”라 할 때의 그 물이다. 옳다구나, 가급적 만만하게 살자는 얘기일 게다. 그게 잘 사는 길이라는 소식이다. 노자가 설한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그 물이니 문순우 기자, 아니 문순우 도사가 취재한 ‘도(道) 뉴스’일 수 있다.
못 믿을 게 도인이다. 나는 그렇게 본다. 그러하니 문순우를 도사로 읽는 건 결례이거니와, 그는 ‘도’라는 거룩한 단어 자체를 아예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는 그저 물이 좋아 물을 닮고자 한다. 물처럼 거침없이 흘러가는 노경(老境)을 선망한다. 그렇기에 나는 그를 물로 봐야 한다. 그게 예의에 맞다. 이 물은 오늘 숲속의 잠잠한 초록호수처럼 평온하다.
“나 요즘 편안하거든. 만족스럽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고. 여기에서 더 바랄 게 없는 것이에요.”
문순우의 올해 나이 일흔셋. 이미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연치(年齒). 이젠 귀신조차 바라보일 시절이다. 그러나 그가 요새 주로 뚫어지게 바라보는 건 캔버스다. 죽자사자 그리는 것 같다. 창작이란 방울방울 피를 뿜는 일. 흔히 산고(産苦)에 견준다. 이 힘든 일을 왜 용을 쓰고 하나, 싶지만 문순우는 힘 안 들이고 대꾸한다.
“힘은 무슨 힘? 영감(靈感)이 나를 데려가는 것을.”
‘영감’이라는 물건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서 후루룩 내려오는지 난 모르겠다. 그러나 매사를 힘들이지 않고 시원하게 해치우는 문순우의 내공이랄까, 그런 게 영감님을 모셔다주는 모양이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만, 문순우는 그림만 그리진 않는다. 그는 사진으로 예술에 입문했다. 도예도 주 종목이다. 목수이자 오디오 평론가이기도 하다. 와인과 재즈에 통달한 전문가다. 아마도 둘째가라면 서러워 남몰래 눈물을 훔칠 요리의 달인이기도 하다. 이 기똥찬 다재를 일컬어 ‘전방위 예술가’라 한다. 어찌 보자면 이도 저도 아니다.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하나를 들입다 파더라도 도로아미타불에 그치기 쉬운 게 예술이다. 하나에 쉬 질리거나 옹골차게 돋우지 못해 여럿을 동시에 신나게 파 젖히는가? 딴엔 그게 자연스럽다. 물에 무슨 경계가 있던가. 열에 열 골 물이 하나로 통하고 모이는 게 물의 생태 아니던가.
나부터 사랑하기
문순우가 점심 요리를 한다. 아내 박미광(64)이 조수로 나서 묵은 김치를 물에 헹궈 숭숭 잘게 썬다. 그 사이 그는 양파와 토마토 등 갖가지 재료를 올리브유에 지지고 볶아 소스를 만들고 국수를 삶는다. 이름은 묵은지 파스타. 작은 꽃송이와 향신채소 잎 두어 개를 파스타 위에 살짝 얹고 요리 끝! 그러나 진정한 마무리는 아니다. 촛불을 켜고 글라스에 레드와인을 채우고서야 식사가 시작되니까. 나는 한낮의 식탁에서 제 몸을 사르는 촛불에 황송하다. 생일 밥상을 받은 기분이다. 촛불 보시를 한 이여, 복되도다.
“웬 촛불이냐고? 이게 격(格)이라는 것이지. 우린 항상 촛불을 켜고 식사를 해요. 라면을 먹더라도 초를 켠다고. 하하핫. 이왕이면 소소한 일상이더라도 축제처럼 사는 게 좋지 않겠어요? 내가 나를 기쁘게 하기, 내가 나를 소중하게 대하기, 내가 나부터 사랑하기, 그런 게 돼야 남을 즐겁게 할 수 있지 않겠어? 그게 생활의 격이라 보는 것이지.”
“요리는 언제 배우셨지?”
“마흔 살 넘어 사진 공부를 위해 파리에서 유학했는데, 그때 요리를 배웠어요. 내겐 특이한 성향이 하나 있어요. 왕성한 호기심, 그거! 중학생 땐 전축에 호기심이 불붙어 진공관식 앰프를 직접 만들었다고. 남들은 어떻게 사나, 그런 호기심을 누를 길 없어 유목민처럼 평생 곳곳을 떠돌기도 했어요. 파리 유학 시절엔 프랑스 요리에 호기심이 들끓더라고. 그 무엇보다 파리의 살롱 문화에 반해버렸고.”
“궁정과 귀족의 저택을 무대로 성행한 프랑스의 사교 모임, 그게 살롱의 유래죠? 사르트르나 피카소가 즐겨 드나들었던 몽마르트의 카페들이 그 후신일 테고.”
“한마디로 문화 사랑방이라 해야겠지. 프랑스 문화의 기저, 단순히 예술가들의 집합소가 아니라 논쟁과 소통이 다반사로 벌어져 당대 문화와 예술을 주도해나간 공간, 다종다양한 보헤미안들이 몰려들어 생을 즐긴 아지트. 꼭 필요한 그게 한국엔 드물다는 걸 알고 귀국하자마자 살롱을 차렸어요. 재즈 클럽 ‘라 끌레’라고 삼청동에 있었다고. 너무도 빨리 망하고 말았지만.(웃음)”
나에겐 삼사 년 전 문순우의 거처에서 한나절을 놀았던 추억이 있다. 당시 그의 집은 시골 숲속에 있었다. 그의 집이랄 것도 없다. 그는 돈이라는 게 당최 없다. 남의 헌털뱅이 대형 창고를 빌려 집으로 개조해 부부가 살았다. 그게 집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오만가지 진기한 사물들이 절묘한 미학으로 어울린 예술적 파빌리온. 작업실과 와인 바와 집채만 한 오디오 장비가 혼융된 그 창고 건물은 그가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 살롱 용도로 쓰였다. 수많은 예술 동네 종족들이 물방개처럼 부산히 드나들었다.
현재 그의 거처는 안성시 외곽 대로변에 있다. 큼직한 신축 건물에 산다. ‘제네시스 미술관’이라 쓴 손바닥만 한 팻말이 붙어 있다. 이 집도 그의 것이 아니다. 갸륵한 후배들이 지어 내준 건물이다. 내부는 전에 살았던 창고 건물 풍경과 거의 이하 동문이다. 고스란히 옮겨 적절히 반죽해 치장했다. 별개의 사물과 사물들이 뫼비우스 띠처럼 이어져 공감각적 코러스를 자아낸다. 오디오를 켜면 그의 귀는 칡넝쿨처럼 뻗어 선율을 빨아들일 게다. 와인 병이 즐비하니 취하고 싶을 때 취할 테지. 이 집의 모티브 역시 살롱이다. 사적으로는 미술 작업실이고 공적으로는 재즈 클럽이다. 그는 재즈에 홀려 산다. 재즈의 무엇에 심취하지?
“재즈 가수 빌리 홀리데이 얘길 해볼까. 그녀의 대표곡 ‘이상한 과일(strange fruit)’은 백인 인종주의자들에게 살해된 흑인들의 억울함과 슬픔을 노래했어요. 자유와 해방, 그걸 노래로 외쳤다고. 그게 재즈 정신이에요. 재즈를 듣다가 인생이 변한 사람도 있는 걸 보면, 재즈란 고도의 매혹적 예술이겠고.”
“이곳에서 매월 한 차례씩 재즈 공연이 펼쳐진다죠? 재즈 전도사로 나선 거예요?”
“한국의 암 발생률이 세계적으로 최고 수준이라더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난 문화의 열악함에도 원인이 있다고 봐. 예술이란 어디에 쓰이느냐, 남들에게 이바지하는 거, 즉 사회적 공헌에 목적이 있다고 난 봐요. 내 그림도, 재즈 공연 기획도 문화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데에 일조하길 바라며 하는 짓들이지. 공연 때 놀러오라고. 1세대 재즈 밴드를 비롯해 국내 최고 수준의 재즈 뮤지션들이 오거든.”
“비쌀 텐데, 개런티!”
“기름값밖에 못 주지만 부르면 다들 기꺼이 달려와요. 자유로운 영혼들이거든. 게다가 내가 일찍이 한국 재즈 발전에 기여한 바가 있어서.”
집문서 없어도 잘 산다
인생이란 희로애락을 다탄두로 매단 럭비공을 닮았다. 문순우의 삶이 그걸 알게 한다. 젊은 날의 그는 날품팔이나 구두닦이로 밥을 벌며 세상이라는 정글을 배웠다. 공수부대원으로 3년간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가진 거라곤 돈뿐이던 시절도 있었다지. 디자인 분야 사업을 해 17명의 직원들을 거느렸고, 스포츠카를 몰았더란다. 그러다 회의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돈에 덜미 잡힌 삶이 원숭이를 껴안고 블루스를 추는 것처럼 요상하고 우스웠던 모양이다. 해서, 사업을 접었다. 돈벌이의 노예로 사느니 천성인 방랑벽을 고이 살려 유목민으로 살자, 늦깎이로나마 예술과 한판 붙어보자, 그런 작심을 야무지게 하고 프랑스 유학에 나섰던 것. 이후 오늘날까지 예술이라는 참호 속에 들어앉아 세상을 겨눈다.
돌아다닌 세상, 겪은 세사가 많아 일화도 숱하다. 누적된 연기(緣起) 속에서 명멸한 기억들…. 아프기론 월남전에서 목도한 참상이다. 곱살하기론 걸레스님 중광의 해맑은 심혼이 남긴 잔상으로, 일테면 그건 문순우가 보유한 정신적 체력을 북돋운 한 가지 양분이었던 것 같다. 들어볼까.
“언젠가 용산역 앞에서 어느 스님이 건달들에게 호되게 당하고 있더라고. 그걸 내가 뛰어들어 수습했어요. 알고 보니 중광 스님이더라고. 묘한 인연이었지만 이후 가족처럼 지냈지. 내 삶으로 육박해온 가장 청명한 성좌였다 할까. 때로 파격의 괴물이었으나 근본은 순진무구의 화신이었어요.”
“사람이 새벽이슬도 아닌 것을, 순진무구를 유지하며 이 난잡한 속세를 견딜 수 있을까요? 때 묻히고 살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지 않나?”
“그렇기에 용케도 순수한 사람들이 그립고 좋고 사랑스러운 게 아니겠어? 이 순수란 증류수와도 같은 무균 상태가 아니라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품성과 실천을 말하는 것이라고.”
“당신 역시 봄바람처럼 따사로워 인간적이지만, 일면 자학적이기도 해요. 그 독한 파이프담배 아니면 시가만을 피우다니, 그거 자학 아닌가?(웃음)”
“애연가 등소평은 아흔네 살까지 살다 간 것을.(웃음) 그가 말했지. 흡연은 젊은이에겐 낭만을, 늙은이에겐 위엄을 부여한다고. 와인은 또 얼마나 좋은가. 내가 아
술타령으로 죽을 쑨 인생이 많지만, 술이 건진 고통과, 술이 익힌 시와 노래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는 와인과 노닐어 멋과 낭만을, 작업의 효율을 구가하는 것 같다. 버선목이 아니라서 문순우의 속을 뒤집어볼 순 없지만, 그의 내부에도 고독과 불안이 고여 있을 테지. 그 어찌할 수 없는 생의 우수를 술과 음악으로, 또는 창작으로 청소하길 능란하게 하는 사람. 해서, 태연하고 평온하게 노년을 영위하는 사람. 그게 문순우이며, 이런 그에게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전혀 없는 건 돈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모두 그 앞에서 절을 하는 물신(物神)의 가호를 받지 못한 채로 영일(寧日)을 누리다니. 늙어서도, 심지어 죽어가면서도 돈이라는 감옥에 갇히기 십상인 게 삶이지만, 그는 감옥 밖에서 말짱하다. 비결이 뭘까? 그를 물로 보면 답이 나온다. 어디든 흘러가 채워주는 물! 목마른 자에게 흘러들어 한 잔의 샘물이 되는 삶! 그는 그런 지향으로 살아왔다는 게 아닌가. 그 결과 집문서는 없으나 사람문서를 쥐게 됐다.
“나를 부르주아라 오해하기 십상이지. 시가에 와인에, 고급 음악에, 모든 호사를 누리는 걸로 보일 테니까. 그러나 난 가진 게 없어요. 옷가지도 30년째 입는 것들이 대부분이라고. 작품 재료도 모두 폐품을 활용한다고. 전화기도 오래된 폴더 폰이야. 식재료도 텃밭에서 손수 길러 쓰고 말이지. 딱히 잡기라는 것도 없어요. 돈 들어갈 게 뭐란 말인가.”
“날마다 한두 병씩 마시는 와인은 어디서 오죠?”
“작품이 팔리면 와인부터 비축하지만, 작품이 팔리는 일은 드물지. 그걸 잘 아는 제자나 후배들이 와인이며 시가며, 심지어 거처까지 마련해주더라고. 차후 ‘문순우 기념관’을 만들겠다고 하더군. 아아, 내가 헛되이 살진 않았구나. 그런 생각 자주하는 것이여.”
“반대급부 없는 도네이션은 없는 법.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었기에 그토록 받으시지?”
“좌우명을 말해볼까? ‘남을 대하기를 나를 대하듯이 하자.’ 이기심을 버리는 게 자유롭게 사는 지름길이라 여기며 살았어요. 주변과 타인을 채우는 샘물로 살아야겠다, 언제 어디서든 남을 소중하게 아끼면 그게 메아리로 돌아온다, 그게 나를 채우는 길이다, 그런 신념을 잊지 않고 실천했어. 사실, 우리는 모두 빚쟁이 아닐까? 남들에게, 세상에게 신세지지 않고 존재할 수 있던가? 그렇다면 날마다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사는 게 옳지 않나?”
이 악물고 살 거 없다, 계산 없는 물로 돌아가 세상 빚을 갚으면 빛난다! 그게 문순우의 비결이다. 윽! 난 오늘 한 방 맞았다. 허울 좋은 처신과는 격이 다른 고수(高手)의 이타(利他), 그 실천적 뉴스에.
그에게 정원은 놀이터다. 아침마다 커피 한 잔 들고 문을 나서면 그만의 소우주가 펼쳐진다. 오감이 천천히 깨어나면서 확장된 시간을 체험하는 시간이다. 마음속 풍경은 매일매일 꽃사태다. 이 놀이를 제대로 한번 즐겨보고 싶어 도시 탈출을 감행한 건 40대 중반 무렵. 김형극(金炯克·66) 씨는 마치 특별 초대장을 받아든 사람처럼 성큼성큼 자연 속으로 입장했다. 정원에 빠져 산 지 어느새 23년째. 그 사이 서른두 평 아파트와 맞바꾼 폐가는 ‘들꽃의 향기가 머무는 뜰’로 다시 태어났다.
소확행(小確幸)이 메가트렌드가 된 세상. 그러나 실행은 쉽지 않다. 시계추 같은 일상을 탓하며 시간을 어이없이 흘려버리거나 또 다른 욕망으로 허둥대다 기회를 놓쳐버리곤 한다. 저지르듯 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김형극 씨는 잘 알고 있었다. 은퇴가 아직 먼 나이였지만 그의 결단은 신속했다. 다 쓰러져가기는 해도 감나무 다섯 그루가 우뚝 서 있는 안성의 한옥도 다행히 마음에 들었다.
“도시에서 살 때 주말마다 아내와 함께 산으로 강으로 떠났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지낼 바엔 아예 시골로 내려가 사는 건 어떨까?’ 하고 생각했어요. 당시 중학생이었던 딸아이는 학원을 네 군데나 다니느라 밤 12시가 다 돼서 집에 들어오더라고요. 공부는 해야 하지만 어린 딸에게 너무 가혹한 건 아닐까? 안쓰러웠어요. 자식들 출세를 위해 모두 서울로 가던 시절 저는 과감히 시골로 내려왔죠.”
40대 중반에 감행한 도시 탈출
가족과의 의견 충돌은 없었다. 어쩌면 무모해 보이기도 했을 제안이었지만 아내와 딸은 잘 따라줬다. 그러나 치러야 할 대가가 만만치 않았다. 텃밭은 오랫동안 가꾸지 않아 잡초가 무성했고 기와집은 비가 샐 정도로 엉망이었다. 마당은 여기저기서 갖다 버린 쓰레기들로 넘쳐났다. 더구나 서초구청 공무원이었던 그는 매일 왕복 200km나 되는 거리를 오가야 했다.
“도시를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일산, 양평, 용인 등 안 가본 데가 없어요. 사람하고 집은 연분이 닿아야 한다잖아요. 여러 집을 봤는데 포도 산지인 안성이 고즈넉하고 마을 사람들 인심도 좋아 보였어요. 특히 이곳에서 본 한옥이 자꾸 눈에 밟히더군요. 100년도 더 된 집이었는데 폐가와 다름없었어요. 그 집을 산 뒤 뜯어 고치고 어른 키만 하게 자란 풀 뽑아내고 정리하느라 몇 년 동안 고생했습니다. 출퇴근도 난제였죠. 지금이야 도로가 뻥뻥 잘 뚫려 있지만 그 시절은 안성에서 서울 가려면 네댓 시간은 족히 걸렸어요. 눈 내리는 겨울에는 서울에 오피스텔을 얻어놓고 회사를 다녔어요. 빙판길 운전이 엄두가 안 났거든요. 혹여나 시골 좋다고 내려가더니 출근시간도 제대로 못 지킨다는 소리 들을까봐 도시에서 살 때보다 더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어요. 그렇게 몸은 고됐어도 꽃 심고 나무 심을 때는 마냥 좋더라고요.(웃음)”
어떤 이에게는 돈으로 꾸며댄 정원을 감상하는 것처럼 따분하고 심드렁한 일이 없다. 뜬금없이 웅장함을 자랑한다거나 아무렇게나 불쑥불쑥 화려한 색을 들이미는 곳에서는 감흥이 작동하지 않는다. 정원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한 정원을 지향한다는 김형극 씨는 2015년 경기농림진흥재단(현 경기농식품유통진흥원)에서 주관하는 ‘경기정원문화대상’ 동상을 수상했다. 당시 심사위원은 그의 정원에 대해 “소박하고 순수하다. 구석구석 주인의 손길이 안 간 데가 없다. 이 사람은 정말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고 평가했다. 화이불치는 아니어도 검이불루의 뜻은 펼친 셈이다.
“지인이 ‘경기정원문화대상’ 공모를 알려주면서 ‘당신 정원은 틀림없이 상 받을 거다’ 하더군요. 가벼운 마음으로 응모를 해봤죠. 그때 정원 이름을 ‘들꽃의 향기가 머무는 뜰’이라고 지었어요. 실제로 들꽃을 많이 심었거든요. 그런데 심사가 꽤 까다롭더라고요. 1차 심사는 일반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이 했고, 2차는 전문가, 3차는 전문가와 일반인이 같이 와서 꼼꼼히 둘러봤어요. 주로 제가 좋아하는 꽃들을 심고 소박하게 가꿨는데 운 좋게 상까지 받았습니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이 좋다
이 공모전을 계기로 재단에서 지원하는 일본 정원 견학 기회도 얻어 수상자들과 함께 다녀왔다. 3박 4일 머무는 동안 공통 주제 하나로 친구가 된 일행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다시 만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들의 정원에서 한 발짝씩 걸어 나와 함께 멍석을 깔았다. 민간정원문화 활성화에 기여하기로 뜻을 모아 ‘정원문화대상수상자모임(정수모)’을 결성한 것. 그는 회장으로 추대됐다.
“기왕 이렇게 만났으니 우리 역할을 찾아보고 전국적으로 정원 문화를 전파하는 데 힘을 보태자는 제안을 하자 다들 좋다고 하더군요. 각자의 정원을 좀 더 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공유 정원’으로 확대하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최근 우리 모임이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꽤 알려진 모양입니다. 수상자들의 정원을 보고 싶다는 단체 견학 문의가 종종 옵니다. 혼자였다면 하지 못했을 일들이라고 생각해요. 함께한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또 한 번 느끼고 있습니다.”
현재 ‘정수모’ 회원은 14명. 두 달에 한 번씩 부부동반으로 만나 친목도 다지고 정원 관련 정보도 나눈다. 가을이 되면 각자의 정원에서 돌아가며 음악회도 여는데, 이 근사한 계획은 김 회장 머리에서 나왔다. 사실 그는 서초구청이 개장한 충남 태안 서초휴양소 소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민들과의 교류를 위해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를 기획한 이력이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늘 사람들을 모아 정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곤 했다. 그게 시너지를 만들고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수모’ 음악회도 회원들을 기쁘게 해줄 방법을 고민하다가 아이디어를 얻었고 지금은 정기적인 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58세에 퇴직을 했으니 올해로 벌써 8년이 됐다. 하지만 지루할 틈이 없다. 사진 찍기, 도자기 빚기, 수석 수집, 통기타 연주 등 취미와 재주가 많아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간다. 그래도 매일 그를 설레게 하는 건 역시 정원이다.
“저는 모과가 달려도 첫눈 올 때까지 절대로 따지 않아요. 노랗게 익은 모과 위에 흰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모습을 꼭 봐야 하거든요. 정원은 영원한 풍경이 없어 더 아름답다고 하잖아요. 정말 그래요. 계절마다 얼굴을 바꾸고 매년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요. 정원에서는 눈도 꽃으로 보여요. 봄에는 꽃들의 안부가 궁금해서 새싹들을 자주 들여다봅니다. 보슬비가 내리는 날에는 빗방울을 머금고 있는 꽃잎에 반할 수밖에 없고요. 혼자 보기 아까운 풍경들이에요.”
그의 정원에는 200여 종의 꽃과 나무들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그들에게 물 주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는 그는 요즘 겨울 정원을 구상하느라 잔뜩 들떠 있다. 텃밭에 가식(假植)해놓은 몇몇 주인공들이 데뷔를 기다리고 있다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꽃과 나무들에게 배우는 것들
은퇴한 사람들에게 일과를 물어보면 아침에 일어나 김밥과 물 싸들고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게 전부라는 사람이 많다. 딱히 갈 데가 없어 지하철을 타고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의 지인들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퇴직을 같이한 한 친구는 평생 취미활동이라곤 해본 적이 없어 어쩌다 동창들 만나 약주 한잔씩 하는 게 전부라고 한다. 은퇴 후의 단조로운 일상에 대해 들려오는 얘기들을 듣다 보면 일찍 시골로 내려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점점 더 든다.
“제가 지금도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면 여전히 정원에 관한 로망에 젖어 있을 겁니다. 주말마다 자연을 찾아 떠났을 테고요. 안성에 내려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하루 종일 풀이나 뽑으면서 왜 그 고생을 하냐?’고 물었던 사람들도 이제는 은근히 저를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부러워하면서도 여전히 실행에 옮기지는 못해요. 다른 삶을 펼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이기 때문이죠. 돈이 무서운 이도 있어요. 물론 자식들 뒷바라지 하느라 경제활동을 그만두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하지만 모을 줄만 알지 한번 손에 넣으면 도무지 꺼낼 줄 모르는 사람도 많아요. 결국에는 다 놓고 갈 것들입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 좀 쓰고 살아도 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노후 준비는 50대부터 준비하는 게 맞다고 조언한다. 중요한 건 반드시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활동이나 일을 먼저 찾는 것. 은퇴 후에 어떤 사람은 이런 삶을 살더라, 저런 삶이 멋져 보이더라 하면서 흉내를 내면 얼마 못 가 한계가 오고 그 삶을 즐길 수 없게 된다는 의미다.
“어느 날 친구 따라 밤낚시를 갔어요. 밤새 깜깜한 곳에서 낚싯바늘에 지렁이를 끼웠죠. 새벽에 보니 손톱 사이로 지렁이 살이 잔뜩 끼어 있고 말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친구는 그 손을 대충 닦고 밥을 먹더라고요. 낚시하는 동안은 수염도 못 깎고 행색이 엉망이 됩니다. 그래도 좋아서 하는 일이니 그게 다 극복이 되고 본인은 행복한 거 아닐까요?”
올해도 그의 정원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릴 것이다. 그러면 또 감 따는 핑계를 대고 지인들이 와서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축제 같은 열기 속에 흠뻑 빠졌다 갈 것이다.
그는 날마다 정원에서 배운다. 아름다움을 이해할 때 인간의 삶이 제대로 보이고 행복을 두드려 깨운다는 사실을.
유행이 돌고 돌아 올가을에 호피무늬가 대유행이라고 한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치타 여사(라미란 역)가 즐겨 입던 호피무늬 옷을 거리에서 종종 보게 될 줄이야. 몇 해 전부터 불기 시작한 복고 열풍은 스치는 바람이 아니라 문화로 자리 잡아가는 것 같다. 학자들은 이 현상을 ‘삶이 고달파서’라고 해석한다. 사람들이 옛것을 통해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위안을 얻는다는 것이다. 세월은 고생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미화시키는 힘이 있으니. 세월을 비껴간 곳을 찾아 추억 여행을 떠나보자.
빈티지의 끝판왕, 을지로 인쇄소 골목
한국전쟁 이후 도시 재건에 필요한 모든 업종이 서울 을지로3가와 4가 일대에 자리 잡았다. 공구 골목, 도기·타일 골목, 재봉틀 골목, 조명 골목, 인쇄 골목 등이 거미줄 치듯 모여 거대한 산업단지를 이뤘다. 주변으로 고층 빌딩이 우후죽순 들어서도 을지로는 여전히 예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일과를 마친 노동자들이 ‘동원집’의 감잣국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1000원짜리 노가리 안주에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회포를 풀던 노가리 골목도 여전하다. 노가리 골목은 오히려 지금이 더 전성기인 것 같다.
후미진 인쇄소 골목에는 임대료가 저렴한 건물을 찾아 들어온 예술가와 젊은 창업자들이 정착하고 있다. 카페, 술집, 음식점도 많이 생겼다. 대부분 을지로 특유의 허름한 분위기를 부각해 건물을 꾸몄다. 카페 ‘커피한약방’과 양과자점 ‘혜민당’이 대표적이다. 이곳은 개화기 때 차림으로 입장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촌스러운 색유리 창문, 100년 된 자개장, 페인트칠이 벗겨진 나무 문, 전깃줄이 뒤엉켜 있는 골목 풍경이 내다보이는 2층 테라스마저 멋스럽게 보이니, 내 눈이 ‘복고깍지’를 쓴 것이 틀림없다.
Tip
을지로 일대에 오구반점, 을지면옥, 통일집, 안성집, 양미옥, 을지다방 등 개점한 지 최소 30년 이상 된 노포들이 즐비하다. 노포 순례를 하며 추억을 곱씹어보는 것도 좋겠다.
세월의 사각지대 익선동 한옥마을
북촌과 서촌에 이어 익선동 한옥마을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익선동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조성된 이후 재개발이 이뤄지지 않아 한옥이 잘 보존돼왔다. 전철 1·3·5호선이 교차하는 종로3가역과 인사동, 운현궁, 창덕궁, 종묘 등 서울 명소가 코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이 동네 시간만 1970~80년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미로처럼 좁고 복잡한 골목 안에 오래된 식당과 한복집, 점집, 가정집 등 한옥 100여 채가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요즘 익선동에 가보면, 상전벽해를 실감한다. 주택이 대부분 트렌디한 상가로 바뀌었다. 다행히 한옥 형태를 유지하고 내부만 개조해 익선동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옥인 ‘열두달’, ‘이태리총각’, ‘익선디미방’ 등에서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먹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수플레팬케이크를 파는 복고풍 카페 ‘동백양과자점’이다. 평일에도 가게 앞으로 늘어선 줄이 엄청나다. 신생 가게들이 속속 들어서는 중에도 익선동에서 가장 처음 문을 연 전통찻집 ‘뜰안’, 익선동이 인기를 끄는 데 일조한 빈티지 카페 ‘식물’, 착한 맛집 ‘익선동121’, 담장 허문 가맥(가게 맥주)집 ‘거북이슈퍼’ 등이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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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선동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이 가깝다. 운현궁을 둘러보고, 고즈넉한 서순라길(종묘의 서쪽 담장길)을 산책한 뒤 종묘까지 둘러보면 알찬 도보 코스가 완성된다.
서울의 사교육 일번지였던 돈의문박물관마을
돈의문(서대문) 터 근처에 있던 새문안 동네는 몇 해 전 돈의문 뉴타운을 조성할 때 근린공원이 될 뻔한 동네였다. 서울시에서 헐지 않고, 도시 재생해 동네를 통째로 박물관으로 조성했다. 조선시대 한옥, 1930년대 일본식 주택, 1960년대 도시 한옥, 1970~80년대 슬래브집 등 각 시대상을 반영한 건축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보존 가치가 있었던 것. 동네 역사도 흥미롭다. 1960년대에는 명문 중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집마다 과외방이 있었다. 1980년 과외 금지법이 시행된 뒤로는 동네의 90%가 식당으로 바뀌기도 했는데 당시 ‘문화칼국수’, ‘풍미추어탕’집이 유명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에는 당시의 가옥 구조를 복원한 집 40채가 있으며 전시관, 연구실, 공예작가의 작업실 및 체험 공방으로 활용 중이다. 방문객은 그림 그리기, 와인 강좌, 쿠킹 클래스 등 40여 가지 프로그램을 선택해 체험해볼 수 있다. 이 중 마을 투어 프로그램을 강력 추천하고 싶다. 도슨트와 마을 골목길을 함께 돌면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건축 양식의 변화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하루 두 차례, 무료로 30분 동안 진행되며, 신청은 돈의문박물관마을 홈페이지(www.dmvillage.info)에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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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박물관마을 맞은편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던 경교장이 있다. 서울 성곽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홍난파 가옥, 권율 장군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3·1운동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미국 특파원 앨버트 테일러가 살았던 딜쿠샤를 만날 수 있다.
‘그땐 그랬지’ 국립민속박물관 추억의 거리
국립민속박물관 야외에 ‘추억의 거리’가 조성돼 있다. 1960~70년대 거리 풍경을 실감나게 재현해놓았다. 마치 촬영장 같은 분위기다. 창신사장(사진관), 근대화연쇄점, 장미의상실, 고향식당, 약속다방, 화개이발관, 고바우만화방, 인쇄소, 좋은소리사(레코드점) 등을 실물 크기로 짓고, 소품을 구색 맞춰 비치했다. 구멍가게 안에 진열된 과자, 음료수, 과일, 달걀, 아이스크림을 보며 아련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 시절의 아이들은 부모님이 구멍가게를 하는 친구를 가장 부러워했다. 화개이발관에는 종로구 소격동에서 2007년까지 약 50년 동안 영업한 이발관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창신사장, 약속다방, 북촌국민학교는 내부 입장이 가능한 체험 공간으로 꾸몄다. 창신사장에서는 옛날 교복을 빌려 입고 옛날 사진관에서 사진 찍듯 기념 촬영을 할 수 있다. 추억의 거리가 기성세대에게는 추억을 소환하는 공간으로, 젊은 세대에게는 이색 체험 공간으로, 재미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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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과 경복궁은 연결돼 있다. 단풍 고운 날, 고궁 산책과 더불어 추억의 거리를 거닐어보자.
“맛이 서로 싸우는 걸 알아야 해요.” 명인의 한마디는 예사롭지 않았다.
20여 년간 커피와 함께한 삶. 육화된 시간의 두께가 느껴졌다. 엄살도 없고 과장도 없다. 오로지 그 세월과 맞짱 뜨듯 결투한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절창이다. 국내에 커피 로스터가 열두 대밖에 없던 시절, 일본에서 로스팅 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그가 문을 연 청담동 ‘커피미학’에는 각지에서 맛을 보러 온 커피 애호가들로 북적였다. “여종훈 커피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비싸다”는 소문에도 아랑곳없었다.
20대 때부터 커피를 달고 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서커피에서 나온 무늬만 커피인 믹스커피를 마실 때 그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커피를 사다 마시곤 했다. 드립 커피에 대한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대에 퍼컬레이터로 원두커피를 추출해 하루 열 잔 이상씩 마셨다니 요즘식으로 말하면 커피 덕후였다.
“당시 원두커피를 파는 다방들은 많지 않았어요. 신촌의 몇몇 다방은 양키시장에서 깡통커피 MJB, MJC를 사다가 썼죠. 그때는 바리스타를 ‘주방장’이라고 불렀어요. 지금 그러면 기겁할 일이지만 커피 전문 주방장들이 원두커피 맛을 높이기 위해 담배꽁초나 칡뿌리 등을 몰래 넣기도 했어요.”
아직 무림의 고수들이 등장하기 이전이었다. 여종훈(呂鐘勳·64) 명인의 커피 인생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됐다. 식품공학과를 졸업하고 원예 사업을 해보려고 20대 중반에 시골로 들어갔던 그는 6년 만에 다시 도시로 나오고 말았다. 지금처럼 성능 좋은 농기계가 없던 때라 삽으로 직접 흙을 파야 했는데 허리가 견뎌내질 못했다. 젊은 패기에 농사일을 너무 우습게 봤던 것이다. 원예 사업을 접은 뒤에는 몇 번 직업을 바꿨다.
“손에 딱 잡히는 일이 없어 이런저런 생각이 많을 때였어요. 어느 날 일본에 살던 친구가 사업 구상차 한국에 왔는데 드립 세트랑 원두커피를 트렁크에 넣어왔어요. 마셔보니 맛이 기가 막힌 거예요. 어디서 가져온 커피냐 물었더니 일본에서 ‘커피미학(珈琲美学)’이라는 커피 전문점을 운영하는 장인이 볶은 콩이라고 하더군요. 국내 커피랑은 전혀 다른 고급스러운 향과 맛의 품격이 느껴졌어요. 반해버렸죠. 제가 커피를 정말 좋아하긴 했나봐요.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맛있는 커피를 한국에서 계속 마실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커피 사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어요.”
일본에서 온 친구는 그와 함께 청담동에서 커피미학을 운영한 재일교포 나가시마 요시코였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그는 곧바로 일본으로 가 오하라 히로시(小原博 )를 만났다. 명성대로 꼬장꼬장했다. 그에게 로스팅 기술을 배우고 ‘커피미학’이라는 브랜드를 가져오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결국 승낙을 받아냈다.
“1년간 공부했어요. 고달팠죠. 커피 맛을 보기 위해 매일 30~40잔의 커피를 마시고 혈변을 보는 바람에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어요. 최고의 맛을 찾고야 말겠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죠.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련했어요. 한 모금 입에 넣고 맛만 보고 뱉어버려도 되는데 다 마시다가 그 사달이 났으니 말이에요.”
그는 해외유학파 1세대로서 일본 커피 명장의 인정을 받는다. 대학교 때 커피숍에서 일하다 마신 원두커피 한 잔이 인연이 되어 장인 명단에까지 이름을 올린 오하라 히로시는 많은 제자를 두었지만 여종훈 명인을 마지막으로,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었다. 제자들이 자신이 가르친 범주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여종훈 명인은 제자들을 가르쳐보고 나서야 선생의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됐다.
“강의할 때 ‘이렇게 하면 안 돼요’라고 말하면 배우는 사람은 그걸 곧이곧대로 믿습니다. ‘왜 안 돼?’ 하면서 의심해보지 않는다는 거죠. 오하라 선생은 그런 면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게 큰 의미가 없고, 오히려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로스팅을 10년 해본 사람과 20년 해본 사람은 감별 능력이 다릅니다. 20년간 로스팅을 해온 저도 헤맬 때가 있어요. 맛에는 정답이 없어요. 그래서 연구는 끝이 없어야 합니다.”
그는 커피 맛을 스펙트럼에 비유해 설명한다. 맛의 정점이 한곳에 모여 있는 콩도 있고 넓게 형성되어 있는 콩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원두 종류에 따라 반응하는 온도가 다른데 로스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풍미가 달라진다는 의미다.
“약배전으로 해줘야 맛이 제대로 나는 콩이 있어요. 그럴 때는 약배전으로 끝내야 해요. 더 볶으면 제 맛을 잃어요. 또 어떤 콩은 강배전일 때 최고의 맛이 나죠. 이런 콩을 약배전으로 볶으면 맛이 망가집니다. 이런 감별 능력은 경험치에서 나와요. 끊임없이 테스트를 해본 사람만이 섬세한 맛의 차이를 구별해낼 수 있는 거지요. 이런저런 방법 다 써봐야 맛의 정점에 가까운 로스팅 방법이 구해집니다. 제가 오하라 선생을 만나러 일본에 갔을 때 매장에 내놓은 커피가 70여 종이나 되었는데 참 대단한 분이에요. 커피에 미치지 않고서는 그 많은 콩의 맛을 감별해내기 힘들거든요.”
청담동 ‘커피미학’에서 ‘커피쌤’의 시대로
일본에서 돌아와 청담동에 커피미학을 열고 그는 40여 종의 커피를 메뉴판에 올렸다. 맛에 있어서만큼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가 직접 로스팅하고 핸드드립으로 정성껏 추출한 커피를 내놓자 난리가 났다. 당시 에스프레소 한 잔 가격이 무려 1만 원이나 했는데도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매장 안은 커피 애호가들로 북적였다.
“커피값이 밥값보다 비쌌어요. 그래도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거의 매일 들락거렸지요. 우스갯소리로 커피미학에서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청담동 사람이 아니라는 말까지 나돌았어요. 연예인, 스포츠인들도 자주 왔는데 손님들 중 3분의 1은 연예인이었어요. 손숙, 윤석화, 임예진, 최민식, 송강호, 차인표, 김선아 등이 그때 단골이었죠. 드라마나 영화 촬영이 끝나면 기자들 데리고 와서 인터뷰도 하고 금융권에서는 특별한 날 아예 하루 빌려 행사를 치르기도 했어요.”
다양한 문화인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던 커피미학은 지금까지도 그 시절을 추억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그만큼 편안하고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유럽풍의 고급스러운 실내 분위기와 넓은 정원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지하에 쿠바, 탄자니아, 에티오피아 등지의 나라에서 수입한 생두를 로스팅하는 공장까지 세팅해놓아 마니아들에게 신뢰감을 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종훈 명인의 커피 맛이 일품이었다. 한창 입소문을 탈 때는 신문과 잡지, TV 등에도 자주 소개되었다. 커피미학에서 로스팅한 콩을 가져다 쓰는 커피 전문점도 점점 늘어났다.
“인기가 대단했어요. 지금은 원두를 팔기 위해 영업을 하지만 그때는 아무데나 안 주고 커피 맛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지 심사를 한 뒤 콩을 줬죠. 그래도 간혹 커피를 재탕해서 쓰는 곳이 있었어요. 그런 소리가 들려오면 바로 공급을 중단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커피미학은 2010년 문을 닫는다. 1998년 청담동 본점을 시작으로 인사동, 롯데백화점, 현대백화점, 안성 등지에 새 둥지를 틀었다가 이런저런 부침을 겪은 후 재정상황이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이다. 또 매해 급상승하는 월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현재 여종훈 명인은 경기도 용인민속촌 근방에서 ‘커피쌤’이라는 브랜드로 공방과 매장 운영을 하고 있다. 갓 로스팅한 그의 커피를 한 번이라도 맛본 사람들은 빠져나오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온라인에서도 여종훈 커피 맛에 중독되어가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온라인 판매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 위력에 놀랐다고 한다. 이참에 브랜드에 명인 이름을 좀 더 부각하는 게 어떠냐고 묻자 그는 손사래를 친다.
“맛으로 보여주면 됩니다. 그 이상 뭐가 필요하겠어요. 그렇게 해서 방송에 나가고, 광고하고, 해외 산지 돌아다니다 보면 로스팅 연구는 뒷전이에요. 연구 안 하면 맛의 퀄리티는 당연히 떨어지는 거고요. 그런 커피 내놓기 싫습니다.”
“커피 맛은 농부와 조물주가 결정합니다”
그는 최근 지나치게 낮은 가격의 커피가 유통되는 상황이 염려스럽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드립 에스프레소는 식어도 맛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좋은 원두를 써야 하는데 요즘 인터넷에서 파는 원두 가격을 보면 놀라워요. 제대로 된 콩이라면 생산지에서 절대 그 가격에 사올 수 없습니다. 저가 커피는 품질을 의심해봐야 해요. 한때 유통업자들이 유통기한 지난 커피를 봉지갈이해서 팔았던 적도 있어요. 한두 가지 생두를 사다가 배전도에 따라 커피 이름을 마음대로 붙이기도 했죠. 커피 시장이 비정상적으로 성장하던 때였어요. 지금은 마니아가 워낙 많아 맛을 속이면 금방 들통이 납니다.”
요즘도 그는 새 로스팅 기계가 나오면 도전한단다. 기존의 로스터로 최고의 맛을 찾았을 텐데 뭐하러 새 기계를 들여와 그 힘든 과정을 다시 시작하냐고 물었다. 대답이 걸작이다.
“새 기계는 자동차로 비유하면 벤츠예요.(웃음)”
솔직히 호기심도 있고, 새로운 룰을 만들면서 긴장하는 시간이 즐겁단다. 커피에 대한 그의 애착은 식을 줄 모르는 것 같다. 요즘도 어디 커피가 맛있다더라 하는 소리가 들리면 당장 가서 마셔보고 분석한다.
“사람들은 맛이 싸우는 걸 몰라요. 커피를 다루려면 커피 마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맛이 다투는 걸 먼저 느껴보고 로스팅은 그다음이에요. 세미나 할 때 하는 질문들을 들어보면 빤해요. 저는 이미 다 고민해본 것들이거든요. 어느 날 블렌딩 비율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조금 무겁네요, 요걸 한번 빼보세요’라고 말해줬더니 무릎을 탁 치더군요. 돌아가서 조언해준 대로 해보고는 전화를 했어요. 맛이 훨씬 좋아졌다고.”
서로 지지고 볶아대는 그 내밀한 다툼의 맛을 봐버린 그는 자신을 더 경계하게 됐을 것이다. 그래서 생두를 볶을 때마다 첫 마음, 처음 그 자리로 돌아간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기술이고 전략이며 내공이리라.
“커피 맛은 농부와 조물주가 결정합니다. 로스팅은 생두에 열을 추가해 그 맛을 최대한 살리는 과정일 뿐입니다. 원재료가 형편없어도 로스팅 기술로 맛을 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틀린 말입니다. 밥 짓는 솜씨가 좋다고 정부미로 아끼바리 밥맛을 낼 수는 없잖아요.”
농부와 조물주의 공을 먼저 챙기는 명인. 그에게도 얼마 전 직업병이 온 모양이다.
“로스팅하면서 연기를 하도 많이 마셔서 그런지 2년 전부터 폐가 안 좋아졌어요. 아파보니 ‘잘못되는 게 순간이구나’, ‘생과 사의 경계선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후 욕심이 사라졌어요. 예전에는 인간들 비리만 보이고 그랬는데 요즘엔 좋은 모습들만 생각해요. 참 감사한 일입니다. 앞으로 일도 좀 줄이고 제자도 키워볼 생각입니다.”
참 감사하다는 말이 오래 귓전에 머문다. 잘 숙성된 커피처럼 향이 깊다. 맛을 섬겨왔듯 이제는 그의 몸을 받들어 모실 때다.
마음 한쪽에 늘 담아두고 있는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아래윗집에 살아 눈만 뜨면 만났다. 잘 싸우기도 했지만 금세 풀어져 또 어울려 놀곤 했다.
초등학교는 10여 리를 걸어서 가야 했다. 비 오는 날이면 개울물이 불어나 금방이라도 우리 몸을 집어삼킬 듯했다. 그런 개울을 몇 개나 건너야 학교에 도착했다. 겨울은 우리를 더 혹독하게 단련시켰다. 눈보라치는 벌판의 추위는 살을 에는 정도가 아니라 공포였다.
그렇게 늘 붙어 다녔던 친구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를 따라 이사를 가버렸다. 그날의 서운했던 마음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고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5학년이 되던 해 필자도 고향을 떠났다. 친구가 가끔 보고 싶었지만 헤어진 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 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어느 날 우연히 친구 소식을 듣게 됐다. 부지런한 한 친구가 누님, 형님 등을 두루 동원해 수소문했던 모양이다. 요즘 유행하는 카톡의 힘이었다. 며칠 뒤 전화가 걸려왔다.
“나 영길인데, 너 종섭이 맞니?”
“뭐? 영길이라고?”
마치 묻혀 있던 유물이 빛을 보는 순간 같았다. 통화를 하며 친구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 시절 그는 외가가 있는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를 했고, 중학교 때 키가 185㎝나 되어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배구선수로 뽑혀 들어갔단다. 그러나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아 국가대표로는 발탁되지 못하고 H중공업에 취업했다. 일을 잘해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에 큰 사업도 맡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건설 현장에서 떨어진 무거운 물체가 그의 머리를 내리쳤고 그 여파로 척추까지 주저앉아 하반신을 못 쓰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 후 경기도 안산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동안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또 세상이 원망스러웠을 테지. 많은 생각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고통 때문에 얼굴도 많이 상하고 우울증으로 성격도 많이 변했을 것 같은 선입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친구의 모습은 필자의 우려를 한 방에 날려 보냈다. 비록 휠체어를 타고 있었지만 어두운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환한 얼굴이었다.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성경도 많이 읽고 영어와 한문 등 공부도 하면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감동스러운 얘기도 들려줬다. 같은 고향에 살던 여자 동창이 아이를 낳고 암으로 일찍 사망했는데 보육원으로 보낸 아이를 데려와 30년 동안 키우고 가르쳐 결혼까지 시켰다는 내용이었다. 지금도 세 명의 아이를 더 돌보고 있다고 했다. 몸이 불편하면서도 장애를 입었을 때 받은 보상금과 산재로 나오는 돈으로 이웃을 돌보며 살아왔던 것이다.
머리가 희끗해진 나이가 되었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은 우리를 단번에 동심으로 돌아가게 했다. 밝게 사는 그의 모습에서 오히려 필자가 에너지를 받은 느낌이었다. 필자가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고 하니 친구는 “내가 너는 그럴 줄 알았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필자는 지위의 높고 낮음, 돈이 많고 적음의 차이가 아니라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해줬다. 자신도 힘들 텐데 남을 돕고 기쁨을 주면서 긍정적으로 사는 친구야말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힘주어 말해줬다.
돌아오는 길, 휠체어에 의지한 채 멀리서 손을 흔드는 친구에게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고맙다, 친구야! 네가 진정한 영웅이다~”
“교재를 망가트려 죄송합니다.”
월요일 수업에 들어간 나는 제자들에게 45도로 고개를 숙여 정중히 사과했다. 평소에 “학생들에게 교사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교재다”라고 강조해왔다. 옷차림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완벽해야 직성이 풀렸던 필자인데 이 노릇을 어쩌랴? 교재인 얼굴을 심각하게 손상시켰으니 교사로서 참으로 체통이 안 서는 상황이었다. 필자는 덧붙여서 말했다. “다 나을 때까지 내 얼굴 정면으로 쳐다보는 애는 배신자다.”
“교장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며칠 쉬시지 왜 벌써 나왔어요.”
걱정할 것 같아 인사차 교장실에 들른 필자 얼굴을 교장선생님은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대형사고를 쳐놓고서 무슨 염치로 결근을 하랴! 미안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더 열심히 수업을 했다.
2005년 3월 5일 토요일. 그날은 우리나라 교육계에서 첫 번째로 시행되는 놀토였다. 전 교직원들은 첫 놀토를 기념할 겸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안성 서운산으로 등산을 갔다. 산 정상에 올라서자 넓적한 바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20대 후반의 남자 체육선생님이 이쪽 바위에서 저쪽 바위로 가볍게 몸을 날리며 건너뛰었다. 순간 ‘나도 한번 뛰어볼까?’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동시에 필자는 벌써 바위를 건너뛰고 있었다.
“오늘이 며칠이에요?”
“내가 왜 여기에 있어요?”
발이 미끄러지며 바위에 머리를 부딪힌 필자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깨어난 후에도 계속 헛소리를 하는 통에 동료 교사들은 상태가 꽤 심각하다고 생각했는지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 상황에서도 필자는 ‘내가 이러면 우리 애들은 어떡하지? 이렇게 정신이 없으면 수업은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걱정을 했다.
20대 젊은 남자 선생님이, 그것도 날렵한 체육선생님이 바위를 건너뛴다고, 50대 중반의 여자가 주제파악도 못하고 따라하다가 완전 대형사고를 친 거다. 딸에게 필자의 별명은 럭비공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 사고를 쳤으니 동료 교사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날의 사고 때문에 모든 일정이 취소되어 점심 한 그릇씩 겨우 먹고 헤어졌단다.
“물의를 일으켜서 정말 죄송합니다. 모처럼의 나들이를 제가 망쳐놔서 정말 죄송합니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사과하는 필자의 모습을 보며 한 선생님은 혀를 내둘렀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예의를 차릴 수 있냐고,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못할 거라고.
바위를 건너뛰었던 체육선생님은 놀라서 자신의 손수건으로 지혈을 시켰고 다른 남자 선생님과 부축을 해줘서 간신히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곧 119구급차가 도착했고 필자는 평택 굳모닝병원으로 실려가 정수리 부분을 다섯 바늘이나 꿰매고, 바위에 무참하게 갈려나간 얼굴을 치료받은 후 겨우 귀가할 수 있었다.
지금도 고마운 분은 정보처리과 부장님이었다. 필자의 직속상관이었던 그분은 당신이 사는 14층 아파트로 달려가 손수 키우던 알로에를 가져오셨다. 심각했던 얼굴의 상처가 깨끗이 아문 것은 순전히 그 덕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그날 아파트 엘리베이터까지 고장 나 14층까지 걸어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고 하니 지금도 두고두고 감사한 마음이다. 인간은 결코 혼자 살 수 없다. 세월이 지나보면 늘 누군가의 정성과 배려 속에서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인생 후반전에서 만나는 취미활동은 이전의 취미들과는 그 무게감이 다르다. 그저 시간을 때우거나 유희를 통한 만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몸담았던 직장에서 은퇴한 공백을 대신하기 때문. 그래서 상당수의 시니어들은 은퇴 후 갖게 된 취미를 ‘제2직업’처럼 소중히 여긴다. 또 자신과 궁합이 아주 잘 맞는 취미를 찾아낸 은퇴자들은 종종 취미를 ‘두 번째 인생의 반려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동안 가 만난 시니어들은 어떤 취미로 인생의 반전을 이끌었을까?
“옻칠 공방으로 창업해요” 이수매(李秀梅·63)씨
이수매씨가 옻칠과 인연을 맺은 것은 남부기술교육원의 옻칠나전학과를 통해서다. 옛 문화재를 보며 전통공예의 매력에 빠졌다는 이씨는 규방공예를 거쳐 옻칠까지 배우게 됐다. 미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덕에 배우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는 이수매씨는 “외국인들이 사고 싶은 물건을 만들어 한국의 전통공예를 외국에 널리 알리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또 그녀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은 물론 힘들고 어렵지만, 그간 우리가 겪었던 희로애락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직 무언가 배울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고 적극적으로 시도해보면 좋겠어요”라고 당부했다.
“그림으로 외롭게 사는 방법 배웠죠” 윤성호(尹性浩·65)씨
그가 송파의 한 화실의 문을 두드린 것은 2012년. 환갑의 나이에 붓이라곤 평생 제대로 잡아본 적 없었다. 하지만 열정은 욕심을 만들어냈고, 욕심은 많은 연습량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배운 것은 인생이었다.
“그림에 쏟는 시간이 늘면서 성격이 많이 차분해졌어요. 이제 이 나이쯤 되면 외롭게 사는 방법, 슬기롭게 외로울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할 텐데, 전 그 방법이 그림인 셈이죠.”
4년간 화실을 열심히 다니다 보니, 작품 수도 늘고 전시회 참여도 많아졌다. 한국전업미술가협회 회원 가입에 도전해 정식 작가도 됐다.
“붓을 잡고 세 번째 인생 살아요” 하효순(河孝順·67)씨
하효순씨의 그림 사랑은 수집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남편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뉴욕의 갤러리에서 종일 멍하니 그림만 보기를 반복하던 그녀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도통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선물받은 컬러링북에 색칠을 반복하다 직접 그려보겠다는 용기를 갖고 근처 화실을 찾게 됐다고. 그림을 그리면서 겪은 변화를 그녀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지금은 다르게 보여요. 이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꽃잎이 어떻게 나고 지는지. 세상이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유심히 관찰할 수 있게 됐죠.”
“취미로 유년 시절의 꿈 이뤘죠” 윤민용(尹民鎔·80)씨
그가 자랐던 고향 죽산에는 유난히 다양한 모양을 한 돌이 많았다. 유년 시절 어린 마음에 이를 알아내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은퇴 후 고향으로 내려와서야 그 꿈을 이루게 됐다. 안성시에서 문화관광해설사제도를 시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본격적인 교육을 통해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게 된 것. 물론 공부는
쉽지 않았다.
그의 해설은 이제 칠장사(七長寺)에 전해 내려오는 박문수(朴文秀)의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 이야기와 함께 명물이 되었다.
“수영은 이제 삶의 일부죠” 서은희(徐銀姬·58)씨
그녀의 수영 경력은 올해로 25년. 과장해서 표현하면 사반세기다. 결혼 후 생활이 안정적으로 접어들 무렵 동네 체육센터가 문을 열었고 그때부터 수영을 시작해 아직도 쉬지 않고 물살을 가르고 있다. 오랜 기간 수영을 해온 덕에 건강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다. “같은 수영교실의 선배들을 보면 삶의 활력이 느껴져요. 당연히 모두 건강하고요. 회원들과 함께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을 땐 몰랐던 건강과 체력의 소중함을 알게 됐고, 수영이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깨닫게 됐어요.”
“취미 덕분에 교우의 폭 넓어졌죠” 김호영(金好榮·72)씨
평생 교직에서 아이들을 위해 살아온 김호영씨. 그는 교직에서 은퇴하기 직전 심장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두 차례나 받아야 했다. 갑작스런 건강의 이상 증세와 은퇴는 그를 바로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렸다고.
“뭐라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취미를 찾다 어릴 적부터 관심 있었던 기타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문화센터에 교육과정이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시작했습니다.”
과거 학교에서 불타올랐던 교직생활처럼 그의 열정은 다시 불타올랐고, 지금은 문화센터 기타반 반장까지 맡게 됐다. 그가 꼽는 취미로서의 연주가 갖는 최고의 미덕은 봉사활동이다.
“치매센터나 어린이집 같은 곳에서 연주를 통해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인생의 또 다른 보람을 찾게 됐어요.”
“평발 이겨내고 마라톤에 중독됐죠” 김학윤(金學倫·58) 원장
42.195km의 마라톤 완주만 어림잡아 90회 이상. 수영 3.8km, 사이클 180km, 마라톤 풀코스를 하루에 뛰는 철인3종경기 아이언맨 코스는 네 번이나 달렸다. 정형외과 전문의인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한 선배 덕분이다.
“어느 날 의사 등산모임에서 훨씬 나이 많은 선배에게 뒤처지는 거예요. 비결을 물었더니 마라톤이라더군요. 그래서 바로 시작했죠.”
평발인 그에게 고통은 따라다녔지만, 조금씩 참고 극복하는 법을 익혔다. 그러다 마라톤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고, 그의 관심은 마라톤에서 수영, 자전거로 옮겨가며 ‘아이언맨’이 되었다.
따로 산 지 11년 됐다. 남편은 경기도 파주에, 아내는 서울 이태원에 산다. 딱히 언제 만나자고 약속하지 않지만 만남의 장소는 남편이 사는 파주 집이다. 그곳에 아내가 오면 남편은 그냥 왔나보다 한다. 서재에서 책을 읽고 커피를 내려 함께 마신다. 언제 떨어져 살았냐는 듯 이 부부의 행동은 무척이나 다정다감하고 여유롭다. 도대체 별거는 왜 하십니까? 별거 11년 차 이안수(60)·강민지(57) 부부의 이유 있는 별난 별거 이야기를 들어봤다.
전생에 나라를 구해 얻은 축복이 우리의 별거생활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부가 떨어져 산다’고 말하면 색안경부터 끼고 본다. 부부 금실을 지적하거나 부부 위기 심지어 가정문제로까지 생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 중년 부부의 별거생활은 지극히 일상적인 선택에서 시작됐다. 아내 강민지씨의 얘기를 들어봤다.
원래는 서울에서 같이 살았죠. 11년 전에 파주 헤이리 마을로 집을 지어 오면서부터 따로 살게 됐어요. 아이들이 다 따라올 수가 없었어요. 이사 당시 둘째 딸이 고2라 하숙을 시켰더니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집을 얻었습니다. 막내아들이 파주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또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왔죠. 중대 연극과 다니던 큰딸 캠퍼스가 안성에서 서울로 이동하면서 또 서울에 근거지가 필요했어요. 따로 살려고 했던 의도는 전혀 없었어요. 제 직장도 서울이라서 자연스럽게 파주에서 떨어져 나간 거예요.
파주에 있는 집은 모티프원이라는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고 있다. 다 같이 살기 위해 세 자녀의 방도 따로 마련했었다. 그나마 막내아들이 파주에서 3년 생활한 것 말고 두 딸은 파주 집에서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다. 현재 큰딸은 서울에서 아내 강민지씨와 생활하고 둘째 딸은 프랑스에, 아들은 군생활 중이다. 남편 이안수씨는 이곳에 산다. 모티프원을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을 정리하고 집안을 돌본다. 이 외에도 하는 일이 너무도 많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혹은 상담이 필요한 사람의 진솔한 대화상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별거 부부, 이들이 사는법
파주 사는 남편 이안수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나는 정말 혼자 있을 동안에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자아성찰도 해야지, 상담이 필요한 사람들과 대화도 해야 합니다. 하루에 상담이 몇 건인지 몰라요. 수없이 많아요. 별의별 전화가 다 와요. 갑자기 그렇게들 연락을 해요. 찾아오거나 전화를 하거나 심지어 외국에서도 전화가 와요. 제가 모르는 사람에게서도 연락이 오죠. 제 책을 읽었거나, 블로그에 쓴 글을 봤거나, 누구한데 소개를 받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나를 아는 불특정 다수가 연락을 해옵니다. 자식과 소통의 문제, 부부간 문제 등 그 내용도 다양해요. 솔직히 아내가 집에 와도 둘이 얼굴 괴고 앉아서 볼 시간이 없어요. 아내한테는 한 시간도 안 내줘요.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글도 써야 하고 말입니다.
서울 사는 아내 강민지 “오기 싫으면 안 와요”
쉬는 날이면 우선은 파주에 오려고 마음먹었었죠. 그런데 그냥 지금은 오기 싫으면 안 와요(웃음). 피곤해요. 가끔 너무 안 가서 미안하기도 해요. 남편은 쉬는 날이 언제인지도 잘 모르면서 매일 물어봐요. 몇 시에 오냐고, 오늘 저녁 몇 시에 퇴근하냐고요. 사실 지금 다니는 직장이 퇴근이 칼 같아요. 퇴근시간 이후에는 영화를 본다거나 운동을 한다거나 해요. 추위에 상관없이 달리기를 하는데 다니는 병원 안에 체육관 시설이 있거든요. 지금 서울에서 큰딸이랑 둘이 사는데 딸아이와도 시간을 보내야죠. 수다도 좀 떨어야 아이가 요즘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있잖아요. 딸아이랑 맥주 먹는 시간을 갖기도 해요.
‘그립다’기보다는 ‘예의’를 지키면서 사는 거죠
쉰다섯까지는 그리워했던 거 같아요. 지금은 그립다는 생각보다는 보필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워서가 아니고(웃음).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때가 되면 잘 해드려야죠. 와서 예쁘게 삼시세끼를 차려드리고 싶기는 한데 요즘은 잘 안 해드려요. 사실 남편은 먹는 것에 크게 신경을 안 써요. “따뜻한 밥 먹어야 해.” 이러지 않아서 내가 느슨해지는 것 같아요. 진짜 삼시세끼를 갖다 바쳐야 하는 남자도 있잖아요. 음식 투정 하면 여자 요리가 많이 늘 수밖에 없어요. 정말 여자한테 잘해주는 남자예요. 진짜 편해요. 신혼 때도 회사 사람들이 집에 와서 저녁 먹고 그러잖아요. 저 힘들다고 밖에서 다 해결하고 왔어요. 사실 김치도 안 담가요(웃음). 담그는 방법은 알지만 큰언니가 해주거든요. 반찬도요. 제주 사는 동생은 귤도 보내줘요.
아내의 진짜 속마음 “파주 집, 남편 보고 싶어 와요!”
내가 여기 오는 진짜 이유는 서방님이 보고 싶어서 오는 거예요. 동네 보고 싶어서 오는 게 아니라고요. 내가 바라보고 얘기해달라고 하니까 남편이 안 좋아해요(웃음). 커피를 타줘도 쳐다보지를 않아요. 계속 컴퓨터만 보고 있어요. 여자들 마음을 모른다니까! 여자 심리를 저렇게 모를까? 평생 모를 거 같아요. 우리 동네 손잡고 함께 산책하는 것이 소원이에요. 산책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예전에 해모(키우던 반려견 이름)가 있을 때는 나를 해모 대하듯이 해달라고 했어요. 해모보다 내가 서열이 밑이었다니까요. 해모는 낑낑거리면 바로 나가서 산책도 시켜주더라고요.
남편 생각, 떨어져 있는 시간에 그리움을 키운다
중년의 삶에 있어서 적절한 별거는 축복입니다. 부부가 적절하게 떨어져 있는 시간은 그리움을 키우는 시간이라고 봐요. 물론 아이들한테 사랑을 듬뿍 줘야 하는 시간, 공동으로 협업해야 하는 시간은 같이 있어야죠. 한 공간을 점유하는 것만으로도 서로 위로가 되는 거예요. 뭐 얼굴 마주치고 그렇게 가는 것은 중년부부 스타일은 아니라는 거죠. 노상 손잡고 그러는 거는 젊을 때나 하는 거죠. 60,70에 손잡고 산책하는 부부라면 아마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이 아닐까요(웃음)?
별거 가장 이안수가 말하는 별난 부부 유지법
부부간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황금률
아내에게 “당신이 담근 김치만 먹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더운밥만 해다오”라고도 절대 말 안한다. 황금률, 즉 자기가 예우받고 싶은 대로 예우하라는 것. 불변의 진리다. 부부간에도 자기 삶을 스스로 이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 자기가 한 것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 문제다. 아내가 영화를 보든, 윈드서핑을 하든, 등산을 하든, 락 클라이밍을 하든 그건 각자 삶의 영역이다. 나도 여행을 하고 독립적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실 아내가 언제 오는지 모른다. 심지어 안 와도 된다. 오는 날인데도 혹시 안 왔다면 그냥 안 오는 날이었다고 여기면 된다. 예우받고 싶다면 서로 존중해야 한다.
부부, 각자 잘하는 역할에 집중하자
아내는 아이들한테 현명한 방향을 제시해준다. 내가 결정을 잘 못 내리는 우유부단한 상황에 있으면 칼같이 끊어주는 용기 또한 있다. 큰 책임이 따르는 문제에서 아내는 많은 결정을 대신했다.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그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지겠다, 남한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당사자로서 같이 풀어가겠다는 뜻이다. 아내의 장점이다. 한마디로, 김치를 못 담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자기가 잘하는 역할을 하면 된다. 나는 가정의 대소사를 챙긴다. 집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한다. 아내는 시장을 보거나 관공서, 은행 일을 본다. 아내는 쓰레기 분리수거를 해본 적이 없다.
창의적인 성장을 도모하자
부부가 지루해지고 싫증이 나는 것은 창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30년, 50년 동안 사는데 매일이 같으면 어떨까? 한 사람과 하룻밤 긴 얘기 해보면 다 드러난다. 내일은 새로운 게 뭐가 있으랴 생각하기 쉬운데 관계가 오래 지속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부부도 마찬가지다. 욕정에 끌리는 것은 단시간이다. 그 단계가 지나면 의무로 살아야 하는데 의무감만으로는 관계를 지탱할 수 없다. 내버려두면 딴짓하게 된다. 요사이 너무 바빠 독서를 많이 못하지만 아내는 나한테 누군가가 보낸 책, 사놓은 책을 먼저 읽고 인상 깊었던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서 메시지로 보내거나 느낌을 정리해서 준다. 아내에게 잘하고 있다는 얘기를 해본 적은 없지만 아내가 어떠한 그릇으로 커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젠가 아내가 긴 머리를 확 깎고 나타났다. 상의 한 번 안 했다.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30년 동안 쪽 찐 머리로 살았던 아내다. 그 정도면 됐다 싶었다.
함께 빚은 배우자는 바로 ‘나’
노년의 부부가 서로를 탓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젊었을 때부터 서로 함께 살아가면서 만들어가고 빚은 얼굴이 노년의 자기 얼굴이다. 부부는 결과나 목표에 집중하기보다는 함께한 과정, 즉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따로 또 같이 사는 것은 우리의 축복이다. 같이 붙어사는 사람은 좀 떨어져 살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참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먼 길을 다녀왔다. 가락동에서 몇 번 전철을 갈아타고 택시를 한 번 더 타고서야 친구네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어릴 적 돌담을 사이에 두고 십 여년을 살았던 이웃이었다. 그러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 때 친구가 먼저 이사를 하고 필자도 5학년 때 고향을 떠나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 동네가 커서 50여 호의 집들이 있었고 자녀를 보통 5~6명씩 낳는 것이 기본이어서 남녀 또래 친구들도 많았다. 이사를 간다 하니 어린 마음에 여자친구들이 이별의 선물을 주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제 나이가 예순이 막 넘어 머리가 희끗희끗해서야 서로 연락을 하게 되어 김영길이란 친구도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외가가 있는 안성으로 이사해서 중학교 때 이미 키가 180CM 가까이 되어 배구 선수를 하다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특기자로 뽑혀 갔다 했다. 그런데 그 후 185cm까지밖에 안되어 더는 국가대표에 뽑히지 못하고 울산에 있는 H 중공업에 취업을 하여 직장생활을 하였다 한다. 나이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능력을 인정받아 큰 사업을 맡게 되어 활발하게 일하던 중 현장에서 무거운 물체가 떨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치고 그 여파로 척추까지 주저앉자 머리에 대 수술을 하고 하반신도 못쓰는 장애가 되었다 한다.
이런 친구가 이제야 연결이 되어 만나보게 되었다. 현재 안산 근처 상록수라는 마을에 살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고생하며 살아왔을 생각을 하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어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며 대면하게 되었다. 자신을 비관하고 세상을 원망하면서 살았다면 아마 인상도 어둡고 성격도 우울해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그러나 만나본 친구의 모습은 어두운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얼굴 모습은 변하여 어릴 때 윤곽이 약간 있을 뿐이지만 횔체어를 타고 필자를 대하는 모습에서는 기쁨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차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해 보니 그동안 혼자 성경책을 수없이 읽고, 영어, 한자 등 공부도 많이 하고 밝게 살게 되었다고 한다. 고향에 있던 여자 동창이 아이를 낳고 암으로 일찍 사망하자 고육원으로 보내게 된 아이를 데려와 30년 동안 키우고 가르쳐 주며 작년에 결혼시켜 분가해줬고, 세 명의 아이를 더 돌봐 자녀를 네 명이나 두고 있다고 했다. 본인도 장애이면서 당시 보상금과 산재에서 나오는 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살아왔던 것이다.
점심을 함께하면서 우린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어릴 때 추억이 오롯하게 되살아났다. 수십 년이 지나 머리가 희긋한데도 당시로 돌아가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마음속 저 깊은 곳에 묻혀 있던 추억들이 하나하나 모래를 헤치고 나오는 사금처럼 세상으로 살아 나오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밝고 긍정적으로 사는 친구에게 필자는 고마움을 전했다. 대학에서 이 나이가 되도록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필자에게 성공했다고 치켜세우기에 필자는 그 말에 단호하게 선을 그어줬다. 성공은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각자가 있는 곳에서 행복한가? 만족한가? 라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해줬다. 그렇게 본인도 힘들면서도 더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 남을 위해 기쁨을 주며 긍정적 삶을 사는 친구야말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필자는 힘주어 말해줬다.
그는 진정 성공한 사람이다. 친구야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