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 요즘 ‘청산별곡’을 부르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꿈꾸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지난해 귀농·귀촌한 사람도 50만 명에 달한다. 자연과 농촌, 어촌, 산촌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높아진 관심이 TV 화면 속으로 옮겨졌다. 자연·자연인 열풍이 TV를 강타하고 있다.
최근 들어 자연과 농촌·어촌·산촌·오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일상을 담은 교양 프로그램과 예능 프로그램들이 급증하고 있다. 시청자의 반응도 높아 자연과 자연인의 삶을 다룬 프로그램들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자연과 자연인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으로는 오지, 산골 등 자연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사연과 일상, 자연에 대한 생각들을 들어보는 MBN의 , 전국 방방곡곡 산간 오지를 찾아 그곳의 생활을 경험하는 TV조선의 , 오지를 찾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꾸미지 않은 삶과 생활을 보여주는 SBS의 등이 있다. 또한 도시생활에 지친 연예인들이 자연으로 떠나 그곳에서 만난 젊은 자연인(30~40대)과 함께 생활하며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보는 O tvN의 , 강호동·김희선·정용화 등 도시에서 사는 연예인들이 섬에 일정 기간 머물면서 섬사람들의 생활과 일상을 경험하고 도시인이 생각하는 자연과 자연인에 대한 단상을 보여주는 올리브TV의 , 농촌이나 어촌에서 생활하며 먹거리를 직접 구해 식사를 해결하는 tvN의 등이 자연과 자연인을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으로 재미를 주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자연과 자연인을 여행이나 체험 등 다양한 소재·형식과 결합해 만든 프로그램들도 양산되고 있다.
외국의 오지 사람들을 만나 용기, 지혜, 위로를 얻는 MBC의 ,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제주에서 생활하는 이효리·이상순 부부 집에 일정 기간 민박을 하며 바다와 자연을 접해보는 JTBC의 , 김병만·이상민 등 연예인들이 어촌과 바다를 찾아 혹독한 미션을 수행하며 어촌 생활과 먹거리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보는 SBS의 등도 자연·자연인의 모습과 의미를 엿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밖에 귀농·귀촌인이 많기로 소문난 충남 홍성군 홍동면 사람들의 일상을 방송한 KBS의 (6월 25일 방송분) 등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도 최근 들어 자연인과 귀농·귀어·귀촌하는 사람들을 소재로 하는 경우가 크게 늘었다. 전국 각지를 돌며 농촌·어촌·산촌의 사람들과 그들의 모습을 전달해주는 KBS의 은 근래 들어 코너도 다양해졌고 시청자의 관심도 높아졌다.
왜 이처럼 자연과 자연인, 귀농과 귀촌 등을 다룬 TV 프로그램들이 급증하는 것일까. 의 박상혁 PD는 “많은 사람, 특히 도시 주민이 일, 건강(힐링), 가치관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농촌·산·숲·바다·섬으로 대변되는 자연에 대해 관심이 많이 늘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욕구와 관심이 자연과 자연인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 증가 원인이 됐다”라고 분석했다. 치열한 경쟁이 일상화하고 돈과 물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의 삶에 염증을 느끼거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진정한 행복을 꿈꾸며 자연 속의 삶을 동경하기 시작한 것도 자연과 자연인 관련 프로그램의 증가를 초래했다. 또 환경 변화와 의학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연장됐지만, 은퇴시기가 빨라져 인생 2막을 열어야 하는 장·노년과 산업화로 고향을 떠나 서울 등 도시에서 살던 사람들 중 여생을 농촌이나 어촌에서 일하면서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구가 자연·자연인 프로그램 제작으로 이어졌다.
일자리가 감소하고 높은 주거비와 생활비로 어려움을 겪는 도시에 비해,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고 주거비와 생활비도 저렴해 생활환경이 크게 개선된 농어촌을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현상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부부가 결혼관계를 유지하면서 생활은 따로 하는 졸혼 등 새로운 가족 형태가 등장하면서 그동안 가족 때문에 선택하지 못했던 자연인의 삶을 사는 사람도 증가했다. 이러한 사회적·문화적 현상을 프로그램에 수용하는 방송 제작진의 움직임이 자연과 자연인을 다루는 프로그램의 양산으로 연결된 것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귀농어·귀촌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귀농·귀촌을 선택한 사람은 49만 6100명에 달했다. 도시에서 읍·면으로 이주한 사람 중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귀농인은 2만 600명, 읍·면으로 거주지를 옮겼지만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귀촌인은 47만 5500명이었다. 자연과 자연인을 다룬 프로그램은 대중,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함께 힐링과 위로의 시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귀농과 귀촌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주는 등 긍정적 효과가 적지 않다. 서울에서 사업하는 박문수(57)씨는 “자연과 자연인의 삶을 다룬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도시의 피곤한 일상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는다. 노년에 서울을 떠나 농촌으로 내려가 생활하고 싶은데 이에 대한 다양한 정보도 얻어 좋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연과 자연인, 농어촌과 농어민의 삶을 다룬 프로그램의 폐해도 적지 않다. 이들 내용이 농어촌, 농어민의 현실과 실상이 거세된 것들이 주류여서 시청자에게 자연과 자연인에 대한 왜곡된 환상을 심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디어 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에서 미디어가 농촌 현실과 농민의 노동을 도외시한 채 농촌을 목가적 이상향으로 그리거나 촌스러운 곳으로 취급한다고 비판했듯 자연과 자연인의 삶을 다룬 TV 프로그램의 상당수가 자연과 자연인의 삶을 이상적인 삶의 전형으로만 현시하는 데만 열을 올린다. TV 프로그램에서의 농어촌과 자연은 각박한 생활에 지친 도시인들의 휴식 공간이자 도시에서 실패한 사람들의 재기 무대인 경우가 허다하다. TV 속 농어촌에는 심화하고 있는 도시와 농어촌의 양극화 문제, 1년 365일 일해도 빚만 느는 현실, 악화하는 가족 해체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꼽아보니 횟수로 벌써 5년 차다. 필자가 K사의 SNS 계정에 가입한 날은 지난 2012년 4월 25일이었다. 그곳은 고교 동창이 친구맺기(요즘 말로 선팔)하자며 보내온 톡에서 처음 접한 ‘신세계’였다. “그래! 바로 이거야” 하며 혹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여태 몰랐어?” 하고 물었던 친구의 SNS 계정엔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한 중년의 프로필 사진은 물론 필자가 청춘을 보냈던 부산의 고향 풍경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리 잘 찍지 못한 일상의 평범한 일명 ‘뽀샵’ 사진들과 간단한 메시지가 대부분이었지만 필자를 30여 년 전 시간여행자로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필 받은 김에 즉시 회원가입을 했다. 그런데 가입 절차를 마친 뒤 한참 고민스러웠다. “도대체 뭘 올려야 하지?”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던 탓도 있지만 평소 주위에 뭘 알리며 자랑 같은 걸 잘 못하는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결국 고민 끝에 ‘귀요미’ 두 아들의 사진을 첫 번째로 올렸다. 베개 하나를 놓고선 둘이 붙어서 잠자는 모습이라니. 늦은 밤 퇴근한 아빠의 눈에 들어온 두 아들의 모습은 참으로 흐뭇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요즘에야 각자의 방에서 자고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해서 좀처럼 보기 힘든 옛 모습이 되고야 말았지만.
소소한 일상에 여행이나 산행 다녀온 후기 등으로 SNS에 한참 빠져 살던 어느 날, 동네 미용실로 밤마실을 갔다. 두 녀석들 머리 자르는데 산책삼아 함께 다녀오라는 마님의 ‘협박’도 있고 해서 마지못해 따라나선 길이었다. 잠시 후 엄청난 일이 벌어질 줄 감히 짐작도 못하고 말이다.
“아버님, 오늘 처음 오셨죠?”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솔 톤 목소리로 오버하며 맞이하는 원장님 목소리에 미용실 안에 있던 여자들이 모두 필자를 쳐다봤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그러곤 막무가내로 ‘훅’ 밀고 들어오셨다. 두 아들은 직원에게 맡기더니 잘해드리겠다며 미용할 생각도 없던 필자의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건조하다며 뭔가 척 바르더니 꾹꾹 누른 뒤 두피 스케일링이라나 뭐라나 뭔가를 머리에 씌우고선 한참 후끈후끈하게 해준다. 또 이건 특별 ‘싸비스’라 다음번엔 공짜가 아니라며 묻기도 전에 선수를 치신다.
그런데 제법 시원했다. 처음엔 좀 부담스럽더니 어차피 내맡긴 머리, 비슷한 가격에 새삼 스타일도 살아나면 내심 이참에 내 단골집도 바꿀 수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 순간, 또 뜻밖의 제안을 하는 원장님!
“안경을 벗고 있어 잘 안 보일 테니 머리하는 모습, 인증 샷 삼아 한 장 찍죠?” 한다. 무심코 “예” 하고 말았다.
사단이 난 건 바로 그날 밤이다. “버섯돌이??(부산 사는 중학교 친구), 삼촌 완전 웃겨… 나 완전 때굴때굴 거실 바닥을 구르고 있어~~ 때굴때굴...쿵(수원 조카), 파마로 급선회함 해보지(동탄 친구), 인생 즐기다 가는 겨, 하고 싶은 거 다 해봐야 안 되겠나?(초등학교 친구), 목에 두른 꽃분홍 수건도 한몫하네(양산 친구), ㅍㅎㅎ 상태야, 예쁜 상태!(고교 친구), 예쁜 파마 했나, 후기 올려라(대학 친구), 피부도 좋으세요(직장 후배),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같다, 나도 관리 좀 해야겠네.”
왜? 무엇 때문에?
밤중에 쏟아진 뜨거운 반응, 급기야 견자단(홍콩 액션배우) 닮았다는 반응까지… 평소 잠잠하던 필자의 SNS에 불이 난 이유는 미용실 원장님이 찍어준 그 사진을 ‘나만 보기’가 아니라 전체 공개로 잘못 올린 탓이었다.
“안 그래도 요리조리 셀까 찍는 거 좀 못마땅했는데 애도 아니고 아닌 밤중에 이게 뭔 주책이냐고!”
평소 안 긁던 마님의 바가지란 바가지는 그날 한참이나 이어졌다.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이 무모한 주책없음은!
어쩌면 특별할 거 없는 필자의 SNS 계정에 꾸준히 찾아와주는 팬들을 위해 뭔가 ‘꺼리’가 필요하겠다는 나름의 현실 직시 내지는 봉사정신으로 작심하고 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소동은 며칠 동안 이어졌다.그 와중에 정말 내 편이 따로 있구나! 했던 것은 “아빠 대박! 꽃향기가 나네요, 향기 나는 아빠 ㅋ”라며 엄지 ‘척’ 해준 사춘기 큰아들의 반응이었다. 사진 속 꽃병에 담겨져 있던 꽃을 아빠와 ‘콜라보’시켜준 녀석의 기특한 해석력이라니!
“아들아! 우리 정말 잘해보자구~”
마님의 증언에 의하면 이 말은 아들 녀석 탯줄 자를 때 필자가 감격에 겨운 나머지 했던 말이라나 뭐라나. 이 한 몸 망가져 여러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다면야, 또 뜻대로 되지 않는 우리네 삶, 한 번쯤 아무 생각 없이 웃어볼 필요도 있지 않나?
“그래~ 오늘 주인공은 당근 내다, 맞제? 꽃보다 남자! 바로 이런 기 그기다 안 그렇나, 함 웃자!”
800회를 목전에 두고 여러 날 쉬고 있는 SNS 계정도 아쉽지만 이젠 접어야 할 거 같은 생각이 든다. 헤어진 친구도 만나게 해주었고 새로운 인연도 만들어주며 웃고 울게 만들었지만 요즘 요상스러운 것들이 너무 많이 생겨버렸다.
참, 그날 이후 혼자 방 안에서 ‘킥킥거리던’ 마님, 주책없다며 잔소리할 땐 언제고 여태 몰래 꺼내보남? 참 나!
요즘 손목이 아프다. 병원에 갔더니, 갑자기 너무 과도하게 사용해서 엄지로 이어지는 힘줄에 염증이 생겼단다. 통증 때문에 일상생활에도 불편함이 몰려왔다. 세안을 하거나 머리를 감는 일조차 수월치가 않으니 짜증이 나고 우울했다. 다 나을 때까지 그저 손을 쉬게 해야 한다는 처방전, 손끝 하나 까딱 안 하고 우아하게 살 방법 없을까.
그러는 필자에게 그는 무언의 일침을 가했다. 웬 엄살이더냐고!
엊그제 그를 만났다. 연초록 나뭇잎이 눈부시던 남산자락의 국립극장, KB하늘 극장에서 열린 ‘대한민국휠체어합창단 정기연주회’에서 지휘봉을 힘차게 휘젓고 있던 정상일씨는 더욱 밝아진 표정에 유머도 늘었다. “장애인이 되니 좋은 게 참 많더라구요, 대통령이나 그 어떤 높은 사람이 와도 앉아 있을 수 있잖아요”라며 너스레를 떨어 좌중을 웃음 짓게 했다.
현재 세한대 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5년 전 11층 난간에서 떨어지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당시 담당의사는 살아 난 것만도 기적이라고 했다고 한다.
“며칠째 사경을 헤매고 의식불명일 때 내 손을 놓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눈을 떴고, 세상에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워낙 중증이어서 앉을 가능성도 희박했었죠. 모두가 이제 정상일은 회생불가라고 했답니다.” 그는 다시 태어남에 감사하며 일 년에 걸쳐 열 번 이상의 대수술을 받은 후에 기적적으로 휠체어에 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소식을 듣고 필자가 처음 병문안을 했을 때가 사고 후 일 년이 지났을 즈음이다. 그는 폐활량이 일반인의 40% 밖에 안 되어 호흡이 가쁜 상태였고, 대화가 단답식처럼 짧게 끊어가며 힘겹게 이어갔다. 생리적 현상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몸에는 특수 장치가 달려있어 일정 시간이 되면 간병인이 인위적으로 처리를 해주었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과 삶에 대한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뜨거워졌다.
이후 ‘휠체어 탄 기적의 지휘자’로 불리며 2014년에 자신의 이름인 ‘정상일‘의 이니셜로 CSI퓨전오케스트라를 창단했고, 이어 2016년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로만 구성된 ‘대한민국 휠체어 합창단’을 창단해 벌써 오스트리아와 로마까지 공연을 다녀오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다.
“30여명의 휠체어단원을 이끌고 첫 번째 해외 공연을 다녀왔는데 엉덩이에 욕창이 생겨있었습니다. 아주 심했지요. 귀국하자 바로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힘들다는 생각은 없어요.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요”
지금은 기립형휠체어로 바꾸어 몸놀림이 훨씬 자유로워져서 욕창도 재발되지 않는다고 한다. 올 여름에는 모스크바로 공연을 떠날 예정이고, 가을에는 미국의 카네기홀까지 진출할 예정이라니 그의 용기와 거침없는 추진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는 연주회 준비를 위해 매주 토요일마다 100여명의 합창단원을 이끌고 대학로 이음센터에서 연습을 해오고 있다. 단원 중에는 멀리 광주광역시, 경남 양산, 심지어 미국 뉴욕에서 오는 명예회원도 있다고 하니 그들의 열정 또한 대단하다.
이번 연주회에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노래를 불러 이목을 집중시킨 사람이 있다. 바로 이남현씨다. 사고로 목신경이 끊어져 전신마비 장애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노력해 ‘기적을 노래하는 바퀴달린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남현씨처럼 하반신 마비 중증 장애인들로 구성된 단원들은 호흡하기도 힘들다는데, 그들이 이뤄내는 하모니가 너무 아름다워 듣는 내내 감동이 밀려왔다. 일반인들보다 몇십 배 더 노력했을 시간들이 짐작이 미루어 되고도 남았다.
마지막 앵콜 곡으로 대중가요인 ‘무조건’을 부르며 이번 음악회의 화려한 막을 내렸다. 이곡을 선곡한 것은 대한민국 어디든, 세계 어느 곳이든 휠체어 합창단을 불러주면 무조건 달려가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함이란다.
“ 제가 장애인이 되고서야 장애인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문턱하나 넘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이제 남은 생, 그들을 위해 이 한 몸 아낌없이 봉사하고 싶습니다. 다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정부단체에서 우리 합창단에게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해외공연이나 국내 무료공연을 다닐 때 모두 자비로 진행해왔습니다. 앞으로 우리 휠체어합창단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국익에도 한 몫 하고 싶은 소망입니다.”
그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인지 다음 목표는 평창동계올림픽이란다. 올림픽 개막식 때 100명의 휠체어합창단원이 무대에 올라 당당히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 꿈이라고. 그럼으로써 전 세계 모든 장애인에게 희망이 되고 싶다는 그의 행보는 오늘도 거침이 없어 보인다.
시니어들의 모임에 나가보면 나이 들어서도 얼리어답터임을 내세우며 스마트폰을 잘 다루는 것을 대단한 자랑으로 여기고 이 대열에 끼지 못하는 다수의 노인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꼭 있다. 무엇이든 잘하는 것은 젊으나 늙으나 좋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 스마트폰에 중독되다시피 푹 빠져 있는 분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다.
맛 집에 초대되면 진짜 이집이 맛 집이 맞는지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는 실례를 범하면서 ‘나 이런 사람이야’ 하고 자랑스러워하면 스마트폰 중독자다. 이건 초대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모욕을 주는 것임에도 본인은 눈치조차 채지 못한다. 누구도 이런 행동에 제재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능수능란한 스마트폰 사용에 부러움을 보내는 모습이 못 마땅하다. 한번만 물어보면 제대로 찾아갈 길도 사람에게 묻기보다 스마트폰에 물어본다. 도심에서도 길을 묻는 사람 보기가 점점 드문 것은 잘 정비된 건물주소 덕이 아니라 스마트폰 덕이다. 반면 스마트폰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사람과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어 사람 사는 냄새가 없어진다.
스마트폰이 잠을 잘 때도 머리맡에 있어야하고 길을 걸을 때도 주머니 속에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회의 중이거나 대화 중에도 수시로 스마트폰을 열어서 카톡이나 문자왔는지를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앞에서 강사가 열심히 강의 하는데 죄책감 없이 스마트폰을 검색하는 스마트폰 중독자가 점점 늘어난다. 특별히 할 일 없는 노년이 될수록 이런 스마트폰에 대한 몰입도가 강해지고 심지어 취미로까지 발전시켜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걸 경계한다.
스마트폰 중독은 정신적 육체적 황폐를 불러오고 나이 들수록 그 피해는 더욱 심각하다. 첫 번째가 정신적 황폐다. 가족들의 즐거운 외식자리에서도 식구들끼리 대화에 집중하기보다는 스마트폰으로 남들과 문자 대화를 한다. 몸은 가족과 같이 있지만 마음은 딴대가 있다. 생일 같은 기념일에 축하 말을 보낸다고 인터넷이나 카톡방에 좋은 말들을 복사하여 죄의식 없이 날린다.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글로 표현해서 보내주면 좋으련만 남의 글을 내가 쓴 것처럼 도용하고도 시치미를 뚝 뗀다. 스마트폰의 전자파 위험도 있지만 인간과의 진솔한 감정 소통 부족으로 치매의 싹을 키운다.
두 번째는 육체적 황폐다. 머리나 손톱은 잘라도 다시 자라지만 인체의 오감을 느끼는 세포들은 한번 망가지면 재생이 어렵다. 스마트폰의 작은 글씨를 보려고 눈을 혹사한다. 죽을 때까지 함께 해야 할 시력이 점점 떨어진다. DMB를 통해 연속극을 보면서 귀에 꽃은 이어폰이 얼마나 청력세포를 망가지게 하는지 통 관심이 없다. 머지않아 보청기가 노인의 필수품이 될 것이다.
세번째는 사고력의 저하다. 스마트폰의 즉문즉답에 익숙하다보니 사고력이 줄어든다. 대학을 나왔어도 계산기 없으면 여럿이 먹은 밥값을 합산과 분배를 못해 쩔쩔맨다. 곱셈나눗셈은 구구단이 가물거려 붓셈으로 언제 풀어봤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남의 말을 믿지 못하고 이게 아니다 싶으면 면전에서 스마트폰의 인터넷기능으로 즉각 검색하여 상대를 머쓱하게 한다. 모든 정보는 내 손안에 있다고 인터넷 정보를 맹신하지만 다 맞는 것은 아니다. 오프라인의 공부를 하지 않으면 거짓정보와 참 정보의 변별능력이 부족하여 헛똑똑이가 될 가능성도 많다.
네 번째는 마음의 안정을 못 찾는 불안증세가 걱정된다. ‘카톡’하는 소리만 들어도 무슨 내용인가 궁금해서 참지 못한다. 수시로 스마트폰을 열어보지 않으면 안달이 난다. 혼자 스마트폰의 인터넷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혼자 고립화된다. 스마트폰과 친하다보니 사람과 사귀면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이 점점 부담스러워져 외톨이가 양산된다.
나이든 사람들은 젊을 때 하지 않던 스마트폰에 덜 익숙한 것이 당연하다 노년에 새로운 정보에 좀 어둡고 뒤 처져도 큰일 날 일이 별로 없다. 스마트폰을 들고 혼자서 길을 찾을 것이 아니라 출발전에 PC로 갈 곳을 대충 검색하고 목표지점에서 주위 사람에게 물어보는 옛날 방식을 쓰면 된다. 남들이 맛 집이라 하면 그렇다고 믿어주고 남의 말에 검색까지 하면서 일비일희를 하지말자. 나이 들수록 느리게 살고 더듬거리며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다.
교통사고 무서워 자동차를 타지 않는다면 바보다, 조심해서 운전하고 적당히 자동차를 이용해야 한다. 스마트폰도 마찬가지로 적절하게 사용만 한다면 문명의 이기임에 틀림없다. 과유불급이라고 지나치면 좋지 않다. 특히 나이 들어 지나친 사용을 경계해야 한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의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정유재란 때 울산왜성은 일본군 최전선 보루였다. 위도 상으로는 가장 북쪽이었고, 방위로는 일본과 가까운 동쪽 끝이었다. 일조유사시 언제라도 도망쳐 가기 쉬운 위치였다. 호랑이 같은 조선수군도 없고, 망망대해와 맞닿아 철수작전에 큰 장애가 없는 전략적 요지였다.
그런 지리적 요인에다 왜군 선봉대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본진이어서 울산성은 정유재란 전투 중 손꼽히는 현장이 되었다. 허물어진 성벽만 남은 학성공원에서는 전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성이 무너진 것은 세월의 작용이지, 전투 때문이 아니다.
서울을 떠나 밤늦게 돌아온 울산 나들이에서 그 처참했다는 울산왜성 전투의 흔적은 찾아보지 못했다. 성터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천지개벽 같은 변화에 세월의 두께만 느꼈을 따름이다. 먹을 것이 없어 적병의 시신을 뒤졌다거나, 기갈을 면하려고 제 오줌을 받아 마시고, 말을 잡아 피를 마셨다는 아수라장을 엿볼 단서는 찾아내지 못했다.
울산왜성은 3개 층으로 된 구조다. 해발 25m 지점에 산노마루(三之丸), 조금 위에 니노마루(二之丸), 맨 위에 혼마루(本丸)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석축 일부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큰 돌을 다듬어 경사면에 비스듬히 축대를 쌓은 것이 전형적인 왜성이다. 성문을 들어서면 급하게 방향을 꺾도록 돼 있는 호구(護口)도 그렇다. 기마병이나 보병에게 성이 뚫려도 바로 본성으로 달려갈 수 없도록 여러 굽이를 만들어 속도를 늦추려는 설계다. 호구에서 병력이 주춤거리는 사이 침입자에 대한 공격을 쉽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때 없었을 것은 너무 많았다. 우선 허허벌판이었을 격전지가 지금은 대도시 울산의 도심지가 되었다. 42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너져 내린 성터에 수목과 초개가 우거져 울산성은 야산의 모습으로 변했다.
격전지가 공원으로 변해 울산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가 된 것이 제일 큰 변화일 것이다. 해발 50m 성 마루에 오르면 사방에 보이는 것은 온통 아파트와 빌딩 숲, 그리고 공장들이다. 상전벽해라는 말로는 표현이 한참 미흡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뜬금없이 대중가요 ‘울산 큰 애기’가 떠올랐다. 1960년대 초부터 방방곡곡에 울려퍼진 이 노래 가사가 너무 신기하고 이채롭게 느껴진다. 두 세상을 살고 있는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내 이름은 경상도 울산 큰 애기 / 상냥하고 복스런 울산 큰 애기 / 서울 간 삼돌이가 편지를 보냈는데 / 서울에는 어여쁜 아가씨도 많지만 / 울산이라 큰 애기 제일 좋대나 / 나도야 삼돌이가 제일 좋더라.
반세기 남짓 전 울산은 큰 애기와 삼돌이의 연정이 아름답던 동해안 갯마을이었다는 증언이다. 눈 아래 펼쳐진 풍경과 비교하자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50년 세월의 간격이 이러할진대 420년 세월이야 어떠하랴.
이 노래 가사 2절에는 “성공할 날 손꼽아 기다려만 준다면 좋은 선물 한 아름 안고 온대나”란 소절이 있다. 답답한 시골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성공’을 향해 서울에 간 연인을 다소곳이 기다리면서 선물받을 날을 꿈꾸는 큰 애기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울산성은 차츰 지옥으로
울산왜성 전투가 왜병들에게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성을 빼앗고 이 땅에서 왜를 몰아내지 못한 전투 결과로 보면 분명 조명연합군의 패전이지만, 왜군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그 비극성이 잘 전해져온다.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서쪽 산악지대에서 발원한 태화강은 동쪽으로 곧게 흐르다가 급히 동해로 든다. 그 하구 언저리에 제법 널찍한 들판이 형성되어 까마득한 옛날부터 인간이 터를 잡는 살기 좋은 땅이었다. 들판 한가운데 외로이 솟은 야산에 가토 기요마사는 성을 쌓았다. 급히 자리를 잡았던 탓인지 성안에는 식수가 없었다. 남쪽으로 좀 더 가면 임진년에 쌓은 서생포성이 있는데, 태화강 너머에 진을 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던 걸까. 직산 싸움에서 패하고 도망쳐 내려가다가 잡은 입지라 했다.
조명연합군은 그 성을 둘러싸고 군량과 탄약 등의 보급품과 식수공급 루트를 차단했다. 벌판에 우뚝 고립된 성을 몇 겹으로 둘러싼 조명연합군 포위망에 갇혀 현지조달도 막힌 상황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의 운명적 대결을 그린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소설 에는 당시의 참상이 이렇게 그려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 병사들의 다리는 가느다란 막대처럼 되었고, 그 때문에 각반이 흘러내렸으며, 얼굴은 여위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한다. 물을 찾아 야밤중 성 밖의 우물가에 가보면 우물 안에 시체가 던져져 있어서 물을 먹을 수 없도록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성내의 소와 말은 모두 잡아먹었다. 그것이 동나자 적병의 시체에서 먹을 것을 구했다. 담벼락 흙을 빗물에 풀어 마실 때도 있었다. 두 달이 지나자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울산성은 차츰 지옥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기록이란 한 참전무사가 남긴 ‘조선이야기[朝鮮物語]’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낮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밤이면 우물을 찾아 성을 빠져나오지만 우물마다 돌로 메워졌거나 시체가 썩어가고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태화강 강변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피로 물든 강물이라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지옥과도 같은 울산성에서 기아에 빠진 가토 기요마사의 농성군은 구원군의 손에 간신히 구조되어 한숨을 돌렸다. 4만의 조명연합군은 3만의 일본군을 보고 철수했다. 그들 역시 일본군의 총격으로 상당한 사상자를 냈기 때문이었다. 포위에서 해방된 농성군이지만 양식이 떨어진 그들은 종이를 씹고 담벼락의 흙을 파먹었다고 한다. 기요마사의 수염도 자랄 대로 자랐고, 뺨이 말라서 쑥 들어간 채 구원군 앞에 나섰다.”
4만 병력 조명연합군의 철수
울산성의 참상은 라는 기요마사 문서에도 나온다.
“성내의 사기 조상(阻喪)은 정점에 달했다. 식량과 식수가 없어 성병(城兵)은 벽토(壁土)와 종이를 먹었고, 자기 오줌과 군마의 피를 마시는 판이었다.”
이런 극한 상황을 겪은 가토는 훗날 구마모토 성을 지을 때 천수각 다다미에 고구마 잎줄기를 섞어 짜도록 했다. 식수난 경험으로 성내에 우물을 120개나 팠다. 지금도 당시의 우물이 20여 개 남아 있다.
일본 측 기록에 나오듯 4만 병력의 조명연합군은 완공도 되지 않은 평지성을 오래 포위하고도 왜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먼 나라에 와 피를 흘리기 싫었던 명군 장수 양호(楊鎬)와 마귀(麻貴)가 내린 통한의 결정이었다. 35km 남쪽 서생포에서 달려온 왜군 1만3000명에게 배후를 공격당하자 싸워보지도 않고 철수한 것이다.
“중국 장수가 군대를 후퇴시키면서 먼저 보병을 내보내고, 스스로 기병을 거느리고 뒤를 막으면서 후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장수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 산 위의 적들이 줄지어 내려와 한꺼번에 사살했는데, 보병 중에 살아 돌아온 자가 많지 않고, 기마병도 죽은 자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갑옷과 투구를 버리고 맨몸으로 탈출하기도 했는데, 아군의 사상자도 많았습니다. 당당했던 대세가 순식간에 꺾이고 다 죽어가던 적이 도리어 흉독한 기세를 멋대로 부렸으니 진실로 통곡할 일입니다.”
에 실린 이 한 줄의 보고서가 역전된 전투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용열한 원군 장수의 결정이 조선 민중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생생한 증거다.
울산왜성은 아직 완공도 안 된 상태였다. 포위작전을 조금만 더 끌었어도 승리는 저절로 굴러들어왔을 것이다. 조명연합군의 첫 공격이 12월 23일이었으니 착공 2개월여도 못 되었을 때였다.
맹렬하게 불화살을 쏘아
일본군의 출진기지였던 규슈 나고야(名護屋)성 임진왜란 박물관에 걸려 있다는 울산성전투도에는 전투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묘사되어 있다. 들판에 홀로 솟아 있는 울산왜성을 조명연합군이 개미떼처럼 둘러싸고 공격을 퍼붓는 장면이다. 전투 중에도 성안에서는 말을 잡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종군승려 케이넨(慶念)의 종군일기 에는 전투 상황이 이렇게 씌어 있다.
“아침에 연기가 솟아오르고 대포소리가 연달아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적군이 기습을 해왔다고 한다. 적군은 돌담 밑에서 맹렬하게 불화살을 쏘아댄다. 성안에는 물건들이 수없이 많은데 침구와 의복, 재물과 보석 등을 담은 상자에 불이 붙었다. 타오르는 연기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화재로 많은 무사와 인부들이 타죽었다.”
울산성 건축물 외곽에는 사방으로 삥 둘러 목조회랑이 설치되어 있었다. 바깥쪽으로 작은 창구를 설치해 거기에 총을 걸고 결사적으로 소총을 쏘았다. 수많은 창구에서 불을 뿜는 총격으로 조명연합군에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13일간의 전투에서 피아 1만2000명 가까이 죽었다는 기록이 전투의 참상을 말해준다. 연합군 포위망이 열흘 넘도록 이어지자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 기요마사는 인근의 동료 장수에게 보낸 문서에서 자결의사를 비추기도 했다. 라는 일본 기록물에는 “나는 여기서 할복자살을 할 것이니 당신은 그 성에서 (할복) 하시오”라는 말이 나온다.
케이넨 일기에는 “드디어 물도 식량도 떨어졌다. 더 이상 성을 방어할 수 없게 되었다. 내일은 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밤새 부처님의 자비에 감사드리고 그 마음을 읊는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기요마사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은 인근에 주둔했던 일본군 지원 덕분이다. 왜성을 에워싼 조명연합군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태화강 하구를 봉쇄해 지원병력의 울산 접근을 차단했다. 바닷길로 울산에 온 병력이 격퇴당한 기록도 있고, 육로로 인근 양산에 온 적을 물리친 기록도 있다.
그러나 끝을 보지 못했다. 방심 아니면 포기였을 것이다. 기요마사 지원에는 숙적 유키나가 군대도 동원되었다. 둘은 불구대천지수 사이였지만 상대가 적군에게 함락되는 것만은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마지막 전투
울산왜성 전투는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였다. 너무 혼이 났는지 일본군은 그 뒤로 수성전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몇 달 뒤 히데요시 사망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를 계기로 임진·정유 7년 전쟁은 끝났다.
“성주님이 나에게 배를 타라고 하신다. 너무도 기쁘고 도무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성을 내려올 때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렸고,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울산성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간 병사가 남긴 이날의 감회 한마디가 전쟁의 비극을 잘 말해준다.
정유년에 다시 쳐들어온 왜군은 한양을 목표로 진군하다가 충청도 직산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게 패했다. 전열을 가다듬어 남쪽 해안으로 퇴각한 그들은 각 군별로 농성 준비에 들어갔다.
기요마사가 울산에 당도한 것은 그해 10월 말이었다. 기요마사 토벌을 목적으로 경주에 본진을 설영한 조명연합군에 맞서기 위해 기요마사는 태화강 북안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쌓은 서생포성을 두고도 가까운 북쪽에 또 성을 쌓은 것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한양을 다시 도모하려면 태화강 북안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축성에 동원된 병력은 가토의 부장(部將) 구키 히로다카(九鬼廣隆) 등 5개 부대 병력 1만60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 일본에서 차출되어온 일반 농민 등이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케이넨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새벽부터 산에 끌려가 건축자재 벌채에 동원되었는데,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다 감독에게 들키면 목이 잘렸다 한다.
기요마사는 ‘일곱 자루의 창’이라 불린 히데요시 근습(近習) 가운데 주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가신이었다. 입이 무겁고 충직한데다가 무술까지 뛰어났으니, 그만한 자격을 갖춘 사무라이가 없었다. 유키나가는 머리는 좋지만 무(武)가 부족하고, 이시다 산세이(石田三成)는 머리만 뛰어난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주군 히데요시 인척이었다. 기요마사의 어머니는 히데요시 부인과 시누이 올케 사이였다.
히데요시 문하에서 그는 단연코 으뜸가는 사무라이가 되었다. 타고난 체격 조건과 근면성, 주군과의 관계를 의식한 충직성이 그를 모범적인 무사로 만들었을 것이다. 무사로 인정할 수 없는 유키나가에게 조선출진 제1군 장수의 명예를 빼앗긴 그는 사사건건 유키나가와 대립했다. 그러나 우직한 그는 유키나가의 지략을 당하지 못했다.
기요마사는 조선의 왕자 임해군을 인질로 잡은 일과 한국의 호랑이를 다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임금이 몽진한 평안도 방면을 유키나가에게 빼앗기고 함경도 방면을 맡게 되었는데, 뜻하지 않게 조선의 왕자 둘을 인질로 잡았다는 것이다.
함경북도 회령에 피란해 있던 임해군과 순화군은 거기서도 횡포를 멈추지 않았다. 수령을 닦달하고 아랫사람들을 시켜 백성들을 노략질했다. 민심이 극도로 이반되어 있는 터에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이 일어났다. 왕자들의 한심한 작태에 혀를 차던 그는 제일 먼저 두 왕자를 붙잡아 기요마사에게 넘겨버렸다.
그는 호랑이를 사냥해 호피를 히데요시에게 바쳐 신임을 사기도 했다. 일본은 호랑이가 없는 나라였다. 그러니 영물의 상징인 호랑이보다 귀한 선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호랑이 고기가 강정식으로 좋다”는 시의들 말을 들은 히데요시는 고기도 보내라고 지시했다. 기요마사는 내장까지 말려서 바쳤다. 59세에 아들을 얻은 후로 그는 더욱 호랑이고기를 찾았다 한다. 이런 이야기가 기요마사와 호랑이가 엉킨 전설의 연원이다. 지금도 구마모토 토산품에는 어김없이 호랑이 이미지가 들어간다. 축제 때가 아니어도 기요마사가 호랑이를 잡는 모형이 번화가에 장식된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서 유명해졌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수립을 중재한 미국의 요청으로 1954년 일본을 방문해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와 마주앉은 자리였다.
“한국에는 호랑이가 많다던데 아직도 많습니까?”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요시다 총리가 이 대통령에게 운을 떼었다. 이 말에 대통령은 “이젠 없습니다.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이 다 잡아먹었습니다” 하고 말을 받았다. 동석했던 김용식 주일공사에 의해 이 말이 전해지자, 재일동포 사회는 통쾌한 반격이라고 크게 반겼다. 물론 국내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기요마사 승자의 영화
히데요시 사후 기요마사는 주군을 배반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편에 섰다. 천하의 패권을 놓고 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 때 유키나가가 히데요시 아들 편에 섰던 것과 너무 대조적인 처신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유키나가가 비참한 최후를 마친 것과 대조적으로 기요마사는 승자의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자신을 길러준 히데요시를 배반한 죄의식 때문이었는지 도쿠가와, 히데요시 양 가문의 화친을 위해 애쓰다가 50세에 세상을 떴다. 그 일을 못마땅해 한 도쿠가와 측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울산 방문은 해군 상륙함(LST) 일출봉호 진수식 참석이 목적이었다. 막강한 기동력과 화력을 갖춘 그런 배가 당시에도 있었다면 울산전투가 그렇게 치욕적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망상에 젖다가 귀경 KTX에서 부족한 잠을 청했다. LST는 없어도 압도적인 병력과 전세의 이점을 살리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워 쉬 잠을 이루지 못했다.
1977년 10월 24일 김포공항. 자유로운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시기.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생이별을 앞둔 인파로 가득했다. 한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형제, 자매와 조카까지 모두 공항에 자리를 잡았다.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고, 힘줘 잡은 두 손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곧 먼 이국의 땅으로 떠날 파독(派獨)광부들을 환송하는 자리. 그 자리에는 만삭의 아내와 두 아이를 끌어안고 이별을 고하는 민석기(閔錫基·66)씨도 있었다. 그리고 39년이 흘러, 그는 이날의 이야기를 자서전에 기록해 세상에 내놓았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소협조 Frenchie B
1960년대 초 대한민국. 당시 경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박정희 군사정권 초반 시행한 경공업 위주의 수출 지향 정책은 되레 실업자 양산과 외화 부족 현상을 증가시켰다.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된 방안 중 하나가 바로 ‘인력 수출’이다.
당시 독일은 ‘라인 강의 기적’이 완성돼가고 있었다.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했고, 일자리는 많았지만 사람이 없었다. 일자리를 고를 수 있는 상황에서 거친 일을 하려는 사람이 부족했다. 당연히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일자리는 외면당했다. 독일 정부 역시 비슷한 선택을 했다. ‘인력 수입’이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3년부터 1980년까지 약 7900여 명의 광부가 독일에서 근무했다. 500명을 모집했던 첫해, 첫 번째 모집에는 4만6000여 명이 몰릴 만큼 좋은 일자리는 절실했다. 민석기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독일에서 찾던 ‘경력 광부’
한때 광부만 2000명이 넘었던 함태광업소. 사촌누나와 매형 덕분에 광부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2년을 일했다. 독일로 갈 사람을 뽑는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도 그때였다.
“독일로 갈 광부를 뽑는다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어.” 동료 광부의 전언이 계기가 됐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민석기씨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고 했다. 당시 독일 광부들의 월급은 600마르크(약 160달러) 정도로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제가 독일에 지원했던 시기는 파독광부제도 시행 후반이었어요. 초기에는 해외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 만한 머리 좋은 사람들을 주로 뽑았죠. 처음에는 대학생들이 많이 갔는데, 일을 안 하고 요령 피우는 친구들이 많았나봐요. 그래서 힘쓸 만한 사람들 위주로 뽑았더니 이번엔 폭력사건이 골치를 썩였죠. 그래서 독일 측에서 요구했대요. ‘진짜 광부’를 보내달라고. 이때 탄광일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우대해줬고, 저도 되겠다 싶어 지원하게 됐죠.”
들어 올리지 못했던 가마니
영화 에는 파독광부를 지원했던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가 체력시험을 보는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반드시 합격하겠다는 일념으로 쌀가마니를 힘겹게 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장면. 1977년에는 그 체력시험이 서강대학교에서 있었다. 독일인 심사관도 통역을 받으며 지원자들을 지켜봤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와 달랐다. 번쩍 들 필요도 없이 어깨 위에 들쳐 매기만 하면 됐는데 그것조차 되질 않았다. 쌀 대신 모래가 들어 있던 60kg짜리 가마니는 꼼짝도 하질 않았다.
“시원하게 떨어졌죠. 이해할 수 없었어요. 평소 같으면 쉽게 들 수 있었을 텐데 안되더라고요. 요령이 없었나봐요. 그렇게 풀이 죽어 태백으로 돌아갔는데, 후에 연락이 왔어요. 다시 시험을 보라고. 그래서 서울로 향하기 전에 열심히 모래가마니를 들어올리는 연습을 했어요. 그것도 열심히 하니까 요령이 생기더라고요.”
두 번째 도전에서는 필기시험까지 일사천리로 합격했다. 합격하고 나서도 독일로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경비가 30만원이나 됐다.
“당시에 대구에서 집 한 채 사는 데 150만원이었으니 엄청나게 큰돈이었죠. 하지만 돈을 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요. 그 시절에는 ‘독일 가는 데 돈 좀 빌려달라’고 하면 잘 모르는 사람도 선뜻 빌려줬어요. 그만큼 파독광부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신용도 높았어요. 어떤 기수는 한국에서 한 달짜리 사전교육까지 다 마쳐놓고도 떠날 날짜가 자꾸 미뤄져 빚이 늘어나는 경우도 있었어요. 곧 독일에서 큰돈을 벌 테니까 하는 마음에 빚으로 흥청망청 생활했던 거지요. 다행히 저는 사전교육을 제대로 마칠 수 없을 정도로 출국일이 급하게 잡혀 별일 없이 독일로 향할 수 있었어요.”
3년 후 돌아오겠다는 약속 못 지켜
“3년만 꼭 참아. 3년만 참고 일하면 한국에서 잘살 수 있을 거야.”
출국심사를 하기 전 눈물을 흘리는 아내에게 민석기씨는 이렇게 말했다. 기본 계약이 3년이었으니 그 시간만 채우고 돌아오면 한국에서 무엇을 시작해도 쉽게 할 수 있는 밑천을 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자신의 귀국이 훨씬 늦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도 못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과 곧 대구의 시댁으로 내려가야 하는 아내를 뒤로 한 채 그는 루프트한자 항공기에 올랐다.
“당시엔 비행기 자체가 신기했던 시대였으니까요. 타고 있던 커다란 것이 두둥실 떠오르면서 진짜 떠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젠 내릴 수도 없고, 도망갈 곳도 없다는 현실이 체감됐어요.”
버스는 어둠 속을 5시간을 넘게 달렸고, 잔뜩 겁먹은 얼굴의 한국인 무리가 낯선 향기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차에서 내렸을 때 그들은 딘슬라켄의 땅을 밟고 있었다. 이들이 독일의 광부로서 생활을 시작한 로벡 광산이 있는, 먼 훗날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아리랑파크’가 건립된 장소였다.
“처음엔 말도 못하게 고생했어요. 말이 안 통했으니까요. 이걸 들라는 건지 내리라는 건지 당기라는 건지 밀라는 건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죠. 멍하니 들고 서 있을 때가 태반이었어요. 망치, 톱, 정 같은 공구 이름도 전혀 몰랐고요. 갱도 내에서는 무전으로 지시를 받는 경우가 많아 더 알아듣기 힘들었어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저녁에는 괜한 군기를 잡겠다는 선배들의 괴롭힘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역시 지옥 같은 갱도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00m쯤 갱도를 내려가면 작은 터미널 같은 것이 나와요. 개미굴같이 여러 소규모 갱도들로 연결되는 철로들이 집결되는 곳이죠. 거기서 열차를 타고 10분 넘게 들어가면 다시 지하로 내려가야 하고, 내려가서 실제 작업하는 곳까지 다시 수백m를 더 들어가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내려가고 들어가기를 여러 번 반복하기도 했고요. 석탄을 찾아 따라다니는 것이죠. 공기가 공급되는 환풍기 근처는 찬바람 때문에 서늘했지만, 바람이 통하지 않는 곳은 지열 때문에 40℃가 넘기 일쑤였죠. 거기서 독일인들의 고함을 들어가며 일했어요.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고.”
그래도 말이 들리고 일이 익숙해지자 독일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변했다. 한국에선 쉬는 날도 없이 작업시간이 길었지만 독일은 달랐다. 주 5일 근무에 공휴일도 꼬박꼬박 쉬었고, 하루에 8시간만 근무하면 그만이었다. 막장에 들어가는 데 1시간, 나오는 데 1시간,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면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5시간에 불과했다.
독일에서 나 홀로 이름 지어본 ‘새마을협동농장’
처음에는 3년만 있자 하고 온 독일이었지만, 첫 휴가는 그보다 훨씬 뒤인 7년 만에 이뤄졌다. 한 달 휴가 동안 도로공사나 다른 일을 하면 큰돈을 쥘 수 있었고, 더 돈을 모아 금의환향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한국에 도착했을 땐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8남매가 모두 모여 민석기씨를 환영했다. 형제 대부분이 직·간접적으로 독일에서 큰돈을 벌고 있는 민석기씨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빨갛고 파란 테두리가 그려진 아빠의 국제우편을 늘 기다리던 막내는, 막상 난생 처음 아빠를 만나자 낯설음에 뒷걸음쳤다가 곧 아빠 품에 안겼다. 그렇게 가족들은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었다.
휴가 때 그의 마음을 흔든 것 중 하나는 ‘새마을운동’이었다.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조국은 많이 변해 있었고, 그 변화의 중심에 새마을운동이 있다고 믿었다.
“당시에 전 기숙사를 나와 인근 마을의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농장에서 지내는 것이 훨씬 편했고,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었으니까요. 주말에 시간이 남는 한국인 광부들을 유혹하는 것들은 너무나 많았어요. 전 아예 나와 있어서 이런 유혹을 피할 수 있었고 농장일로 가욋돈까지 벌었죠. 그때 농장 주인의 제안으로 빈 땅에 직접 배추와 무, 갓 등을 심으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새마을협동농장이라고 이름을 지었죠.”
후에 그의 이 농장은 현지 신문에 소개되면서 지역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그의 ‘외도(?)’가 회사에까지 알려져 곤란을 겪기도 했다.
외로운 말년의 파독광부 많아
한때 아이들을 독일로 불러 완전한 정착도 꿈꿔봤지만, 아이들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자 1989년 민석기씨는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왔다. 휴일도 없이 일해서 모은 목돈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리라 기대했지만 돌아와서 보니 그것과는 먼 삶이었다. 다른 파독광부들처럼 남의 손에 관리가 부탁된 돈들은 형제들에게 그리고 처가로 스며들었고, 되찾기 어려운 상황이 돼 있었다.
“잘된다는 말만 믿고 형님 건설회사에 계손 돈을 보탰지만, 실제로는 까먹기만 했어요. 또 처가 쪽으로도 돈이 흘러가 수중에 남는 게 없었죠. 결국 가기 싫다는 아이들을 설득해서 독일에서 엄마와 살게 했고, 전 딸아이와 한국에 남았어요. 그 후 식당일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죠. 건강이 나빠졌을 때는 간이식을 받으러 중국까지 갔었어요. 굴곡이 많은 삶이었지만 그래도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고 잘 살아온 것 같아요.”
독일로 가 인생의 대박을 맞이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어려움이 많았던 민석기씨. 그렇다면 다른 광부들의 사정은 어땠을까.
“파독광부들이 잘산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요. 독일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300명 정도의 사람들은 돌아오고 싶어도 못 돌아오는 상황인 거죠. 한국에 돌아온 사람들 중 주변 사람들에게 속아 빈털터리가 된 경우도 적지 않아요. 심지어 재산권 때문에 ‘오지 말라’고 하는 친척들도 있죠.”
마침 그를 만난 12월 9일은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발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날이었다. 민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가결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 소식을 듣는 그의 표정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읽혔다. 현 대통령의 아버지에 의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고, 또 평생을 지지했는데, 이제는 상당수 국민이 그의 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로서는 명쾌하게 답을 낼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그래도 독일에 다녀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광부들이 한국인의 성실함을 몸으로 증명했기 때문에 경제성장의 동력이 된 차관도 독일로부터 빌려올 수 있었죠. 또 조국과 민족, 가족을 위한다는 마음이 있어 막장에서도 그렇게 열심히 일할 수 있었고요.”
민씨의 이야기는 가족과 부모 이야기를 자서전으로 엮는 회사 ‘뭉클스토리’의 기획 행사에 선정돼 함께 독일에 다녀온 간호사 노금희, 황보수자씨의 이야기와 함께 책으로 만들어져 지난 10월 정식 출간됐다.
매달 시니어의 제2인생과 직결된 새로운 직업을 소개해온 이 코너가 2017년 정유년(丁酉年)을 맞이해 새해 각오와 어울릴 만한 주제를 준비했다. 바로 특정한 직업이 아닌 ‘창업’이다. 취미활동이나 공부를 통해 익숙해진 일 혹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회사를 세우는 것. 창업은 시니어에게는 거창한 일로 여겨지지만, 벤처나 스타트업이 뜨고 있는 요즘 사회에선 어렵지만도 않다. 또 시니어의 창업을 돕기 위한 관련 기관의 도움도 쏠쏠하다. 새해 계획을 이미 세워놨다면 ‘창업’이라는 꿈을 하나 더 집어넣어보면 어떨까?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올해 사업 활동 결과는 이상이며, 내년 사업 계획을 보고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스크린의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응시하는 사람은 말쑥한 정장 차림도, 대기업 임원도 아니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 여성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니어의 모습.
지난해 12월 7일 도심권50플러스센터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가 진행하는 인큐베이팅 지원사업에 참여한 단체들이 지난 1년간 사업 결과를 평가하고 다음 해 활동을 소개하는 자리. 현장에선 센터에 의해 ‘보육’되고 있는 스타트업 기업 10개 업체의 대표자들이 모여 성과를 자축했다.
비록 프레젠테이션이 서툴러도, 아직 대표라는 직함이 쑥스러워도, 한 회사를 설립해 성장시키고 있다는 보람 때문인지 이들의 표정은 밝아보였다. 이들은 어떻게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을까.
창업은 ‘소자본’ 1억원 내외로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2017년 한국경제 7대 이슈’ 보고서에서 60대 이상의 연령층에서 경제활동인구 증가가 취업자 증가보다 커 고용 여건이 악화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그만큼 시니어들의 취업활동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취업활동이 어렵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대안 중 하나는 ‘창업’. 그러나 막상 사업을 시작하려 해도 종목 선정이나 자금 마련, 동료나 직원 확보, 판로 개척 등 막막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시니어들은 어떻게 창업을 추진할 수 있을까?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는 최근 은퇴 후 창업 시 망하지 않는 5가지 원칙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소자본으로 창업하기 ▲365일 묶여 있는 창업 피하기 ▲가족의 지지 확보하기 ▲잘 알고, 좋아하는 일 선택하기 ▲사업가 마인드로 무장하기 등이다.
소자본 창업을 추천하는 이유는 상당수의 시니어들이 창업할 때 은퇴 자금을 한꺼번에 투자해놓고 사업이 안 되면 곤란을 겪기 때문이다. 또 잘 알지 못하거나 가족의 도움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다면 그 사업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창업 금액은 1억원 내외가 적당하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창업진흥원의 시니어 창업기술센터 프로그램을 활용하자
창업을 원하는 시니어들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장치들이 정부기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기관 중 하나는 창업진흥원. 만약 어떤 ‘아이템’을 갖고 사업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창업진흥원을 노크해보라. 창업진흥원에서는 각 지역 23개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를 운영하면서 시니어의 창업을 돕고 있다. 또 별도의 시니어 기술창업스쿨을 통해 창업에 필요한 기술교육도 제공하고 있다.
창업진흥원 지식서비스창업부 이경희 대리는 창업진흥원의 활동을 이렇게 설명한다.
“창업진흥원에서 기술창업, 즉 기술을 바탕으로 한 창업을 지원하는 이유는 시니어의 창업에 가장 적합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시니어들은 창업에 올인할 경우 사회적 약자가 되기 쉽고,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은 창업은 폐업률이 높습니다. 때문에 창업에 필요한 지식과 준비 과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기술교육을 지원해 안정적인 창업활동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창업진흥원은 지난해까지 진행했던 시니어 기술창업스쿨을 올해부터는 각 지역의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로 이관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다.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는 교육뿐만 아니라 설립된 회사들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입주공간지원 사업, 창업자금지원, 마케팅활동지원 등 다양한 도움을 주고 있다. 기업이 설립되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지원받을 수 있는 셈이다. 또 시니어에 국한된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창업진흥원의 창업지원 교육이나 프로그램들은 연령 제한이 없기 때문에 창업 전 꼼꼼하게 살펴보고 도움을 받으면 좋다.
모임과 함께 사업 계획 다듬은 뒤 출발해도 늦지 않아
하고 싶은 사업은 있는데 누군가의 힘을 빌리고 싶다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바로 서울50플러스재단 산하 각 지역의 50플러스센터에서 운영하고 있는 커뮤니티와 인큐베이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도심권50플러스센터가 대표적인 사례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의 정현주 대리는 현재 센터를 통해 성장하고 있는 회사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센터에서는 2016년 현재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통해 10개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사업계획 심사와 인터뷰를 통해 10개 업체를 선정해 사무공간을 제공하고, 각 분야 전문가들의 멘토링을 통해 사업이 다듬어질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또 지자체나 다른 기관과의 연계가 필요하다면 저희가 다리 역할을 하고, 사업 내용에 따라 센터가 직접 돕기도 합니다.”
센터에서 지원 기업을 선정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은 일반 창업지원 기관과는 다소 다르다. 기업 활동을 통한 이윤이나 생존을 위한 기존 기업 혹은 청년창업 기업과의 경쟁에 그 초점이 맞게 되면 취지와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거나, 사회 참여적 조직, 협동조합, NPO(비영리 민간단체)를 지향하는 곳을 우선시한다. 물론 사업성이 있어야 함은 기본이다.
이 때문에 상당수 기업들은 전 단계로 센터 내 커뮤니티를 선택한다. 동호회 활동과 비슷한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사업 계획을 보완하고 아이디어를 덧붙이는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다. 또 센터 내 활동을 통해 인력을 확보하기도 한다.
실제로 현재 인큐베이팅에 참여하고 있는 기업 중 일부는 이미 협동조합을 갖췄거나, 사단법인의 형태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 참여 기업 중 한 곳인 주식회사 리스타트의 경우 창업투자회사를 통해 자금 투자를 약속받기도 했다. 준비하고 있는 기업의 일자리와 은퇴 후 구직자들을 맞춰주는 서비스가 좋은 평가를 받은 덕분이다.
| 전국 시니어 창업 기술센터 |
서울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로 232 서울테크노파크 1203호(02-944-6038), 서울특별시 마포구 매봉산로 18 마포창업복지관 601호(070-7727-4101),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 211 성북벤처창업지원센터 B104(02-941-7257) | 경기 경기 의정부시 경의로 114 영빈빌딩 4층(031-828-8877), 경기 수원시 영통구 광교로 107 창업보육동 B2(031-259-6692), 경기 성남시 분당구 야탑로 205번길 26, 213호, 214호(031-707-5962) | 부산 부산광역시 남구 신선로 365 행정관 302호(051-629-7971) | 울산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곡천동문길 20-22(052-277-1996),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진순환도로 1138(HRC빌딩8층)(052-219-8632) | 대구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수로 64, 1층(053-784-8261),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로 128, 1층(053-643-7994),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서대로 675, 복지관 3층(053-589-7932) | 경북 경북 칠곡군 왜관읍 공단로 1길, 2층(054-973-9605) | 인천 인천광역시 남동구 인주대로 506-1 서울외과 4층(032-567-5051) | 광주 광주시 동구 금남로 238 무등빌딩 10층(062-236-3262) | 경남 경남 양산시 주남로 288 영산 테크노폴리스 산학협력관 3314호(055-380-9577), 경남 진주시 동진로 33 경남과학기술대학교 8동 3층(055-751-3610) | 강원 강원 춘천시 동면 장학길 48 한림성심대학교 산학관 1층(033-240-9833) | 충북 충북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377-3 서원대학교 글로벌관 B203호(043-217-1311), 충북 청주시 상당구 교서로 8-2, 3층(070-4814-6515) | 전북 전북 전주시 덕진구 기린대로 945-6 소상공인희망센터 희망관 1층(063-717-1322), 전북 익산시 인북로 187, 1층(063-841-7480) | 전남 전남 목포시 석현로46 목포문화산업지원센터 1층(061-280-7492)
혜화역 4번 출구를 나와 혜화동 로터리에서 길을 건너 3분가량을 걸었다. 한무숙 문학관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심히 걷고 뛰던 대학로 길 옆. 이 익숙한 거리를 수없이 지나다니면서도 문학관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니. 조용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문학관 입구가 보였다. 긴 숨을 내쉬고, 무거운 나무 대문을 열고. 그녀와 첫인사를 나눴다.
한무숙(1918~1993)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소설가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학교보다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중이염, 폐결핵 등을 앓아 어렸을 때 어른들이 ‘서른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고 한다. 서른까지만이라도 살아달라는 당부였다. 뇌막염으로 왼쪽 청력을 잃었지만 삶에 대한 의지와 탐구는 끊임없었다. 그림 재능이 있어 초등학교 2학년 때 독일 베를린 만국 아동 전시회에서 입상했다. 언어 능력도 뛰어났다. 독학으로 영어와 프랑스어를 익혀 쓰고 읽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화가를 꿈꿨지만 1940년 결혼 이후 그림 그리는 것이 쉽지 않아 펜과 종이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글쓰기로 전업했다. 1941년 잡지 장편소설 현상 공모에서 ‘등불 드는 여인’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대표 소설로는 , 등이 있다. 은 폴란드어, 영어, 프랑스어, 에스토니아어, 체코어, 중국어로 번역됐다. 대표적인 기념사업으로 1995년부터 한무숙문학상을 재정해 1년 중 활약이 돋보인 중견 소설가에게 상을 주고 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한무숙 소설 독후감 쓰기 대회’도 2011년부터 진행하고 있다.
작가의 흔적, 문학관에 담다
한무숙 문학관은 작가가 40년 동안 살았던 종로구 명륜 1가의 한옥집에 세워졌다. 대청마루에 꾸민 1전시실과 2전시실인 응접실, 집필실, 한무숙 작가의 사진과 다양한 소품 등을 전시해놓은 3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입구로 들어가 바로 앞에 보이는 널찍한 대청마루가 1전시실이다.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한무숙 작가의 대표 소설 에서부터 단행본, 평소 썼던 메모지, 여권, 여행을 하면서 가지고 다녔던 주사기 등 한무숙 작가의 대표 소장품들이 전시돼 있다.
2전시실은 응접실이다. 한무숙 작가가 살았을 때보다 집안 내부 규모를 넓혔다. 2006년 공사를 진행했는데 응접실 중앙에 있는 기둥을 기점으로 왼쪽이 원래는 뒷마당이었다고 한다. 펄벅 여사를 비롯해 국내외 유명 인사들이 다녀간 이곳에는 작가의 소품과 유명 문인과 화가들이 직접 선물한 족자 등이 전시돼 있다.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곳
한무숙 문학관의 백미는 집필실이다. 작가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살아생전에는 책이 더 많았는데 수천 권에 이르는 책을 숙명여대에 기증했다고 한다. 전시를 위해 책상의 방향을 관람객 쪽으로 돌려놓은 것 말고는 옛 모습 그대로다. 책상 위에는 작가가 쓰던 만년필과 잉크, 손녀가 그린 그림 등이 놓여 있어 따뜻함을 더해준다. 평소 사용했던 오래된 양산과 우산도 방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3전시실에 들어가면 작가가 시집갈 때 만들었던 수공예품을 비롯해 초기작 영인본을 감상할 수 있다. 드라마로 제작됐던 소설 의 비디오 등도 전시돼 있다.
한무숙 문학관은 사립박물관이지만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박물관보다 작다. 관람료는 받지 않지만 박물관 측은 방문 전에 꼭! 예약을 해달라고 당부한다. 예약을 하면 상주하는 문학사가 관람객들과 전시실을 함께 다니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한무숙 작가의 아들인 김호기 관장은 어머니의 소설을 이해하는 관람객을 소중히 모시고 설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매일 관람객이 꾸준히 찾고 있다.
관람 정보
관람시간 평일 9:30~5:00 (전화 예약 후 관람 가능), 주말 및 공휴일 휴관 (토요일 오전 관람 가능) 입장료 무료 문의 및 예약 02-762-3093 위치 서울시 종로구 명륜1가 33-100(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 혜화초등학교 방향 약 200m) 홈페이지 www.hahnmoosook.com
야간통행금지가 시행되던 시절 통금이 해제된 크리스마스는 젊은이의 가슴에 불을 댕겼다. 통금해제 크리스마스이브 인파에 밀리고 진눈개비에 눌려 아내에게 선물할 우산은 이미 부서져버렸지만 그래도 선물은 선물이었다.
야간통행금지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실시되던 야간통행금지는 1982년 민심회유책으로 해제할 때까지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위반자는 파출소에 연행되어 즉결재판을 받고 과태료를 납부해야 했다. 밤 11시가 되면 귀가전쟁이 벌어졌다. 대중교통이 끊기면 택시 잡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도심 광화문·을지로·충무로는 늘 귀가 인파로 뒤덮였다.
통금시간의 거리에서는 야경원의 호루라기 소리만 요란할 뿐 사람 한 명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세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통금해제는 그야말로 별천지와 다름없었다.
통금해제 체험
젊은 시절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날, 필자는 퇴근 후 근처에서 근무하는 몇몇 친구와 광화문 네거리에서 만났다. 그날은 마침 눈까지 내려 눈꽃에 취한 우리는 저녁식사에 반주까지 곁들였다. 결국 술기운이 불을 붙였다. “통금해제를 체험하자!” 누군가의 제안에 “옳거니!” 맞장구를 치고 말았다. 연년생 아이들이 어려서 외출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를 그만 깜박 잊고 말았다. 코트 주머니에는 아내에게 줄 예쁜 우산이 들어 있었다.
당시에는 미니스커트 입고 꽃무늬 우산을 든 미녀들이 방송 화면에 자주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양산 겸용 접이식 우산은 숙녀들의 소지품으로 인기가 높았다.
부서진 우산
수천·수만의 인파 구경이 통금해제 체험의 전부였다. 자정이 넘어도 귀가전쟁이 없는 것 말고는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초저녁에 내리던 눈이 자정 무렵 진눈개비로 변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날씨가 안 좋아 대중교통이 거의 끊겨 걸어서 귀가를 해야 했는데, 걸어가는 동안 통금해제로 몰린 사람들과 부딪치고 진눈개비에 젖었다. 도리 없이 아내에게 주려고 산 우산을 펴들고 말았다. 그래도 집에 도착했을 때는 물에 빠진 생쥐 모양새가 되었다. 우산을 살펴보았다. 비에 젖은 천은 말짱하였는데 살은 이미 구부러지고 부러져서 선물이 아니라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물건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산을 아내에게 쑥스럽게 내밀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 우산 덕분에 걸어서 무사히 집에 왔다. 다음에 더 좋은 선물할게!”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진눈개비 피하는 우산으로 사용하면 되지! 살 몇 개 고치면 새것과 똑같겠네!” 천사의 대답이었다.
‘꽃보다 할배’ 탤런트 백일섭 씨가 갑자기 검색어 상단을 차지했다. 무슨 사연인가 찾아보니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이 ‘졸혼’ 상태에 있음을 고백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졸혼’의 뜻을 몰라 부인이 죽었나 했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니 ‘졸혼’이란 결혼을 졸업했다는 뜻이란다. 이혼은 아니고 결혼을 졸업하다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이혼하자니 주변의 여러 관계나 자식들 문제 등 생각보다 복잡해서 호적은 놓아둔 채 서로 떨어져 살아가는 것이 말하자면 ‘졸혼’의 심오한(?) 개념이었다. 백씨는 현재 부인과 떨어져 남해 여수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낚시를 즐기며 신나게 혼자 살고 있단다. 남의 집안 사정은 잘 모르겠으나 하여튼 떨어져 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웃어넘겼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건 노인네건 이혼이 늘어나는 추세 속에서 어찌 보면 ‘졸혼’이 현명한 태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황혼이혼’이라고 문학적 수사를 곁들여 근사하게 표현하지만, 이혼이 그리 쉬운 일인가. 이혼의 사유부터 이혼하는 과정 속에 또 얼마나 많은 상처가 쌓이겠는가. 배우자의 죽음보다는 덜 하지만, 이혼도 말년에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임에 틀림없다.
옛날에는 유명인의 이혼이 신문에 대서특필되곤 했지만, 요즘은 이혼이 개들도 물고 다닐 정도로 흔해빠지다보니 소리 소문 없이 이혼하고 어느 날 불쑥 ‘화려한 돌싱’이니 뭐니 하며 나타나는 일이 흔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다양한 개념의 ‘신상품’도 등장하는구나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상처 없는 이혼’이라는 브랜드로 새로운 유행이 될 조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지 않아도 젊은이들이 결혼을 못 해 혼자 사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마당에 이혼하는 이들까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대는 바람에 혼자 사는 것이 대세가 되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TV에서는 이미 그런 낌새를 눈치채고 혼자 사는 프로그램을 마구 쏟아내고 있고 ‘혼밥’이니 ‘혼술’이니 하는 용어도 난무하고 있지 않은가.
우치다 타츠루라는 일본인 저술가가 쓴 를 보면 혼자 사는 사람이 늘어난 결과 “점점 사람들이 아이들이 되어간다.”고 진단한다. 그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 유무로 어른과 아이를 구분한다. 예컨대 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것이 ‘모두의 일’이기에 하지 않는다면 아이, ‘모두의 일’이므로 줍는다면 어른이다. ‘아이’가 늘어날수록 사회는 퇴화한다는 뜻이다.
경쟁 시스템의 교육 제도가 이런 ‘아이’들을 양산하고, 자본주의는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어른 없는 사회’를 부추긴다. ‘미운 우리 새끼’라는 TV 프로에서 나이가 50이 다 된 아들들이 아이처럼 노는 모습을 보며 우치다의 진단이 그럴듯하게 들린다. 장가가야 어른이 된다는 옛날 어른의 말씀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 한 인간으로의 책임감이 싹튼다는 말이겠다.
아무쪼록 백일섭 씨의 ‘졸혼’ 실험이 성공하길 빈다. 아무래도 이혼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삶에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므로 그들의 선택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삶이 자칫 사회적 동물인 인간을 사회에 적응 못 하는 ‘아이’로 퇴화시킬 수 있다는 경고가 마음에 걸린다. 주변의 솔로들에게 빨리 중매라도 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