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시인 최돈선 님이 제자 최관용 님께 편지를 쓰셨습니다.
벌써 38년이 지났네. 자넬 처음 만난 지가. 이 사람아 자넬 만난 날이 무더운 한여름이었지. 8월의 매미가 지천으로 울어대던 그날, 나는 자네가 공부하는 2학년 2반 교실 문을 열었네. 교장선생님의 안내로 들어간 자네 교실은 창문을 열어놓아 시원했어. 창가 미루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렸지. 그때마다 미루나무 잎들은 은어떼처럼 바람에 재잘거렸어. 왜 그날 난 그게 선명히 기억났을까 몰라.
먼 바다 섬에서 오셨다고, 유명한 시인이라고, 실력을 갖춘 선생님이어서 이 학교가 정중히 모셨노라고… 과장되게 말씀을 마친 교장선생님이 나가신 뒤에도 난 한동안 창밖 미루나무 잎들의 재잘거림을 듣고 있었어. 이윽고 나는 칠판에다 내 이름 석 자를 쓰고 이렇게 말했지. 반가워요,
난 이 나라 남쪽 끝섬 완도에서 왔어요.
그 말에 학생들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 찼지. 그런데 그날 유난히도 두 학생이 내 시선을 끌었어. 한 학생은 미남형에 눈빛이 반짝거렸고, 한 학생은 소같이 우직한 인상에 곱슬머리였지. 책상에 앉은 둘의 눈빛이 어찌나 초롱초롱하던지…. 그랬어. 그렇게 자네들과 나는 만난 거야.
당시 강원고등학교에는 소설 쓰시는 선생님이 두 분 계셨는데 자네들은 그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고 있었어. 문예부원인 자네들은 시인 선생님이 온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마음 설랬는지 모른다고 했어. 그래, 그날의 엉뚱한 질문을 내 어찌 잊을 리가 있겠나.
자네 곁에 앉은 눈 초롱초롱한 최준 학생이 벌떡 일어났어. 선생님 한국에서 누가 제일 시를 잘 씁니까. 학생들이 모두 나를 주시했지.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이렇게 대답했어.
그야 물론…, 나 말고 또 누가 있겠나? 그 대답에 학생들이 일제히 와! 환호성을 내질렀어. 책상을 쾅쾅 치는 학생들도 있었다니까? 기억나나?
자넨 그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지. 질문을 던진 최준 학생은 어쩐 일인지 멍한 표정이었고…. 마치 한 방 먹은 표정이었다니까.
자네들은 늘 같이 붙어 다니다시피 했지. 하지만 둘은 모든 면에서 확연히 달랐어. 최준 군은 재기가 넘치는 학생이었어. 글쓰기는 물론이고 운동에도 뛰어난 소질을 발휘했지. 배구, 탁구, 축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어. 체육대회 때마다 학급 대표로 선발되어 혁혁한 승리를 따내곤 했지.
최준 군은 재기가 반짝였고 자넨 뚝심이 남달랐고. 그랬어. 확연히 다른 성격임에도 자네들은 단짝이었지. 자네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를 찾아와 꺼낸 말을 분명히 기억하네. 저희는 강원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아니라 강원고등학교 문예부를 졸업한 사람들입니다. 자네들의 이 오만과 자부심은 어디에서 왔겠는가. 자네들은 정말 시를 사랑하고 시에 온 정열을 쏟기로 결심했던 거야.
그 후 최준 군은 신춘문예와 문예지 당선으로 시작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자넨 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장교를 아내로 맞이했지. 그리고 이듬해 강원일보 문화부 기자가 되었네. 바쁜 기자생활 중에도 자넨 이따금씩 내게 찾아와 좀 괴상한 시를 내밀곤 했어. 나는 늘, 생각이 엉뚱한 자네를 두둔했지. 시가 되든 안 되든 그 발상이 남다르다는 데 나는 엄지를 치켜세워준 거야.
아니나 다를까. 자넨 ‘오늘의 작가상’ 최종심에 올랐건만 소설에 밀려 낙선의 고배를 마셨어. 당시 시와 소설이 함께 겨루는 독특한 작가상이었지. 춘천 출신 최승호 시인이 ‘대설주의보’란 시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기억이 나네. 그 후 ‘오늘의 작가상’은 아예 소설 등용문으로 바뀌어버렸어.
하지만 자넨 뚝심의 소유자였네. 이듬해 낙선의 고배를 안긴 민음사 ‘세계의 문학’에 재도전해 당당히 시인으로 등단했으니까. 그 후 난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를 위해 식구들을 데리고 서울로 갔네. 그리고 틈틈이 자네 소식을 듣곤 했지.
이보게, 관용이. 그래도 자넨 뚝심의 소유자이네. 서울서 내가 춘천으로 다시 내려왔을 때 자넨 염소를 키우는 농부가 되어 있었지. 밭일과 염소를 키우면서 격일제로 아파트에 보일러 놓는 일을 한다고 했어. 자넨 나를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했지. 전 길을 가다가도 친구나 아는 이를 만나면 얼른 골목으로 피하곤 했어요. 시도 못 쓰는 껍데기 시인, 직장도 없는 백수가 되었으니까요.
언젠가 내가 페이스북에다 자네를 염소시인이라 부르면서 사연을 적은 걸 기억하나? 그래서일까? 자넨 금세 염소시인이 되어 많은 페친과 사귀게 되었어. 그리고 드디어 자넨 시를 쓰기 시작했네. 길 가다가 골목으로 피하는 일도 없어졌고.
제가 요즘 푼돈을 모아두고 있어요. 시집 한 권 내려고요. 평생 단 한 권뿐인 시집을요. 자네가 그런 말을 내게 했을 때 난 가슴이 뭉클했다네. 그런데 그 모아둔 돈이 갑자기 병마에 시달리는 자네의 예쁜 딸 병원비로 보태어졌지. 그 돈이 있어 참 다행이에요, 하고 자넨 말했어.
빼앗기듯 다 내주고 헐벗고 굶주린 배를 움켜쥐더라도 덕두원 밤하늘에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은 꼭꼭 가슴에 품고 싶다. 보석처럼 땅문서처럼 장롱 깊숙이 감추어두고 싶다.
애인처럼 아끼던 염소가 죽어 눈물 흘리며 묻어주면 염소는 밤하늘 별이 되어 시인의 밤길을 초롱꽃처럼 밝혀준다.
얼마나 애절하고 가슴 아픈 글인지…. 자네 글을 메모해두었다가 이 편지에다 적어보네. 이 글은 차라리 소슬한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가 아닌가.
그래, 자넨 메모 쪽지처럼 글을 쓰더라도 그 글이 아름다운 시가 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는가?
결코 외롭다 생각 말게. 자넨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솔직한 시인일세. 춘천엔 염소시인 최관용이 있네. 그 염소시인을 멀리서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한 노인이 있다는 걸 꼭 기억해주길 바라네.
최돈선(崔燉善) 시인
강원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칠년의 기다림과 일곱 날의 생’, ‘허수아비 사랑’, ‘물의 도시’, ‘나는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등이 있다. 에세이집으로는 ‘너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속에 종이 울린다’가 있다.
호로록! 따뜻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차갑게 얼어 있던 몸을 녹여준다. 면을 힘껏 빨아올리자 국물이 얼굴을 때린다. 조금 튄 국물이 대수인가. 통통한 면발을 한입 오물거리다가 삼키면 그저 행복할 뿐이다. 쫄깃하고 깔끔한 우동을 맛보고 싶다면 ‘카덴’을 추천한다.
‘카덴’은 JTBC 에서 얼굴을 알린 정호영 셰프가 운영하는 우동 가게다. 일본 유학 시절 관심을 갖게 된 우동의 매력에 빠져 한국에 돌아와 가게를 차리게 됐다. 서교동 본점에 이어 연희동에 2호점이 생길 만큼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대한민국 레스토랑 가이드북 , 세계 최고 권위의 여행정보 안내서인 에 등록된 맛집으로 맛은 이미 보장된다고 할 수 있겠다. 가격은 6500원~1만2000원 사이로 부담스럽지 않다.
정성이 담긴 우동 한 그릇
일본 우동은 지역에 따라 육수를 내는 방법과 면의 종류가 다양하다. 가가와의 사누키 우동, 아키타의 이나니와 우동, 군마의 미즈사와 우동이 일본의 3대 우동으로 꼽힌다. ‘카덴’은 오사카 쪽으로 오면서 발달한 관서지방식 우동으로 우리가 흔히 먹는 사누키 우동과 비슷하지만 좀 더 부드러우면서 떡처럼 쫄깃한 식감이 특징이다.
면을 만들기 위해 밀가루, 물, 소금으로 반죽한 뒤 4시간 정도 1차 숙성을 거친다. 이후 발로 치대면서 반죽을 하는데 이때 체중이 실린 발이 반죽 속 공기를 최소화시켜 탄성을 높여준다. 이 반죽을 다시 여러 개의 덩어리로 나눠 12시간 숙성시키면 진정한 ‘카덴’의 면발로 탄생한다. 여름에는 10분, 겨울에는 13분 정도 삶아내는 과정을 통해 면발의 식감에도 특별히 신경을 쓴다. 우동은 국물의 맛 또한 중요하다. 카덴은 멸치, 고등어, 가다랑어를 우려낸 육수를 사용한다. 여기에 완도산 다시마와 말린 밴댕이 디포리를 사용해 진하고 깔끔한 맛을 낸다. 우스구치(국간장)를 사용해 간을 맞춘 국물은 자극적이지 않아 좋다.
가키아게 우동(7000원)을 주문하면 우동과 가키아게가 따로 나온다. 정호영 셰프는 “튀김을 국물에 넣어두면 눅눅해지기 때문에 따로 내놓는다. 튀김을 어느 정도 먹다가 국물에 넣어 먹으면 튀김의 맛과 기름이 섞여 농후한 우동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색다른 맛의 매력, 자루우동
자루우동(7000원)은 고이구치(진간장)와 육수를 섞어 만든 소스에 면을 찍어 먹는 우동으로 따뜻한 국물에 담겨 나오는 우동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실파, 생강, 간 무를 입맛에 맞게 소스에 넣고 면을 살짝 담갔다 먹으면 된다. 얼음물에 헹궈낸 쫄깃한 면발에 짭짤한 소스와 건더기가 달라붙어 감칠맛을 낸다.
주소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 173
예약 및 문의 02-337-6360
운영시간 평일 11:30~22:00 (15:30~17:30 브레이크타임) 토요일 11:30~21:30 일요일 휴무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노량(露梁)해전 대승첩이 없었다면 조선은 얼마나 가련하고 부끄러운 나라였겠는가! 만일 이순신 장군이 도망치는 왜적의 앞길을 가로막고 “한 척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분전하다가 살신성인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정말 의기도 결기도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임진년 국난 이래 중국에만 매달려 주권을 포기한 나라로 종전을 맞았다면, 수오지심도 모르는 나라가 되었을 것 아닌가.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무주공산을 달리듯 치고 올라와 채 20일도 못 되어 국도를 손에 넣었다. 대륙 교두보 상륙작전 같은 전쟁이었다. 지방 수령들은 소문만 듣고 도망쳤고, 조선 최고 장수라는 사람은 천험(天險)의 요새인 문경새재를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 진을 쳤다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벼랑에 떨어져 죽었다. 그는 최고 사령관 교지를 받고 전장으로 떠날 때, 군사가 없어 사흘을 모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떠났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실상을 웅변하는 사실(史實)이다.
왜적 침입보고가 한양에 당도하는 데는 나흘이 걸렸다. 긴급 보고체제인 봉수체계도, 역참제도도 다 고장 난 탓이었다. 상주에 진을 쳤던 어떤 장수는 적이 10리 밖에 온 사실도 모르고 있다가 “적이 가까이 왔다”고 알린 백성의 목부터 쳤다. 다음 날 적이 나타나자 그는 혼자 줄행랑을 놓았다. 임금은 적이 아직 멀리 있는데도 궁궐을 버리고 달아나면서, 중국에 내부(內附·복속)할 궁리만 했다. 전쟁이 터지기 10년 전, 1년 치 양곡과 재정비축이 없는 점을 들어 “진실로 나라가 아니다”라고 상소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한탄처럼, 조선은 나라라고 할 수 없는 나라였다.
이순신을 죽이려고 임금과 조정 중신들이 눈에 핏발을 세운 사이, 원균은 수군총수 자리에 앉았다. 그가 첫 전투에서 조선수군을 통째로 수장시켜 나라를 풍전등화에 내놓은 정유재란의 끝을 이순신이 통쾌하게 설욕했다. 그 노량해전 승첩이 있어 지금 옛일을 돌아보는 일이 부끄럽지 않다. 육전과 해전을 망라한 7년 전란 중 그렇게 통쾌하게 적을 토멸한 일이 없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노량전투 엿새만인 1598년 11월 25일자 에는 전과가 이렇게 기록되었다. “왜적의 배 100여 척을 포획하고 200여 척을 불살랐으며, 500여 급을 참수했고 180여 명을 생포했다.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아직 떠오르지 않아 그 수를 알 수 없다.”
뒷날의 집계로는 적 병력 1만5000명 이상을 수장시킨 것으로 돼 있다. 일본 측도 , 같은 기록을 인용한 에서 “일본 배가 더 많이 불타고 파손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가문의 함대 피해가 매우 컸다”는 식으로 패전을 전하고 있다.
노량해전 승첩 현장인 노량 바다에는 그날의 흔적이 없다. 이순신이 구국의 충혼을 불사른 관음포 바다는 거듭된 간척사업으로 내해가 훨씬 좁아졌다. 후세에 건립된 이락사(李落祠) 아래 올봄 준공된 ‘이순신 순국공원’의 시설물은 너무 현대적이고 크기만 해 오히려 옛일을 더듬고 추념하기에 불편했다. 100억 원이 넘게 들었다는 기념관의 시설물에는 갖가지 모조품류와 책에 다 나오는 상황도 설명문 류만 가득해 애써 찾는 이의 발품에 값하지 못했다. 오히려 진짜 유적인 이락사가 가려진 느낌이었다.
남해대교 아래 숨어 있는 충렬사(忠烈祠)와, 경내 초빈(草殯) 자리에 만들어놓은 장군의 가묘(假墓)가 옛일을 증언하고 있다. 1970년대 연육교의 효시였던 남해대교 아래 연안을 둘러보면서, 노량 바다의 오묘한 지리를 터득한 것은 현장을 찾아본 보람이었다. 남해대교 폭은 400m 정도다. 경상도 수역에서 전라도 바다로 들어서는 물목인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 섬 북단의 거리가 그것이다. 명량해협보다 조금 넓은 정도다.
그 물목을 지켜 섰다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구원하러 출동한 왜 함대 500척을 관음포 바다로 몰아넣고 독 안의 쥐잡듯한 전투가 노량해전이었다. 조명 연합수군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왜군은 남해 섬 뭍으로 상륙해 산을 넘어 도망치는 상황이었다. 그 틈을 타 유키나가는 남해 섬을 멀찌감치 돌아 구사일생으로 달아났다.
노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과 크게 다투었다. 순천왜성을 탈출하려는 유키나가의 뇌물작전에 넘어가 포위망을 풀어주려 한 것이다. 왜성 코앞인 광양만을 봉쇄하고 있던 그는 노량해전 3일을 앞둔 11월 16일 “남해 섬의 적을 먼저 쳐야겠다”면서 떠나려고 했다. 곱게 성을 비워주겠다는 감언이설에 혹한 것이다.
“남해의 적이란 왜적에게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이오.”, “왜적에 붙었으니 적이 아니면 무엇이오?”, “귀국 황제께서는 작은 나라 백성을 구하라 하셨다는데, 약한 그들을 죽이는 것은 황제의 뜻이 아닐 것이오.”, “우리 황제께서 누구라도 명을 어기거든 징치하라고 내게 긴 칼을 주셨소.”, “한 번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우리 백성을 죽이도록 두고 볼 수는 없소.”
칼을 꺼내 들고 위압적으로 나오는 진 도독에게 이순신이 의연한 자세를 굽히지 않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11월 18일 왜의 대선단이 노량으로 몰려온다는 탐망군의 보고를 알리자 진 도독도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조명 연합수군 합동작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쓴 에 따르면, 그날 밤 늦게 광양만을 떠나기 전 이순신은 배 위에서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하늘에 빌었다. “만일 이 원수들을 없앨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此讐若除 死則無憾].” 그러고는 모든 병정에게 하무를 물리고 조용히 진군했다. ‘하무’란 군사들이 떠들지 못하도록 입에 물리던 나무재갈이다.
임진년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조명 연합수군의 규모는 전선 250여 척에 병력은 2만1000명(조선군 8000명, 명군 1만3000명)이었다. 진 도독이 기함, 좌선봉은 명군 제독 등자룡(鄧子龍), 우선봉은 이순신이었다. 18일 늦은 밤 광양만을 떠난 연합함대는 19일 이른 새벽 노량해협에 이르렀다. ‘해협을 가득 메운 왜선들의 불빛이 긴 뱀처럼 줄지어 있었다.’ 행록에 묘사된 이 문장이 왜적의 규모를 말해준다. 사천 선진리 왜성에 주둔했던 시마즈 요시히로 군뿐만이 아니라, 멀리 울산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원군까지 합세한 500척 대함대였다.
연합함대가 캄캄한 노량 바다를 저어오는 왜적의 앞길을 가로막으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행록에는 ‘밤 10시쯤 조·명군이 함께 출발하여 새벽 2시쯤 노량에 도착, 적선 500여 척을 만나 아침이 되도록 크게 싸웠다’고 적혀 있다. 불화살이 날고, 각종 총통이 포효하고, 불붙은 장작더미가 왜선으로 던져졌다. 이순신의 기도처럼 단 한 척의 적선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는 조선수군의 분전이었다.
앞길이 막힌 왜적은 남해 섬 남쪽으로 진로를 틀어 활로를 찾으려는 모양이었다. 진 도독 함대가 추격하자 관음포로 달아나던 시마즈 요시히로 함대는 앞길이 막힌 것을 알고 되돌아서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연안에 닿은 배에서는 적병들이 뛰어내려 산으로 달아났다. 아직 닿지 않은 배들은 독 안에 든 쥐처럼 사납게 반격해왔다. 진린 함대를 뒤따라온 왜선들에게 기함이 협공을 당하게 되자, 너른 바다에서 왜적을 무찌르던 이순신이 급히 달려갔다.
“진린 도독을 구하라!” 이순신은 앞장서서 진 도독 기함으로 달려갔다. 날이 완전히 밝은 오전 7시 무렵이었다. 바다 위에는 부서지고 불타는 적선이 뒤엉키고, 바닷물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순신 함대가 도독의 판옥선을 공격하는 왜선들에게 총통과 불화살을 퍼붓는 사이 왜선들이 겹겹이 몰려들었다. 삼도수군통제사 깃발을 보고 이순신을 노린 것이었다.
적선의 접근에도 아랑곳없이 한 손에 활을 들고 또 한 손으로 북을 울리며 독전하던 이순신이 한순간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부장 송희립(宋希立)이 총을 맞았다는 보고에 그쪽을 돌아보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후일담이 전해져온다. 향년 54세였다.
옆에서 돕던 아들 회(薈)와 조카 완(莞)이 달려들어 부축하려 할 때 이순신이 남긴 마지막 말은 성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 고통과 회한을 삭이면서 끝까지 걱정한 것은 싸움의 결말이었다. 얼마나 많은 적선을 당파하고 분멸할 것인가,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왜적을 ‘나의 바다’에 수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
오직 그것만이 성웅(聖雄) 이순신의 관심사였다. 단재 신채호, 춘원 이광수, 노산 이은상 같은 선각자들은 우리 역사에서 특정 인물에게 성(聖)자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세종대왕과 이순신뿐이라고 말했다.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나라 걱정만 했다는 점에서 이 말에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웅의 죽음을 숨긴 채 회와 완이 장군처럼 독전기를 휘두르고 북을 울려 사기를 진작시킨 결과는 찬란했다. 임진년 이래 7년 동안 뭍에서건 바다에서건 이보다 큰 전과를 올린 일은 없었다. 격전 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요시히로는 남은 함선을 이끌고 남해를 돌아 부산으로 달아났다.
“통제공 수고 많았소. 어서 나오시오.” 싸움이 끝나고 이순신 기함을 찾아온 진 도독은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숙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조카 완의 말에 도독은 배 위에서 세 번이나 넘어졌다 한다. “공은 죽어서도 나라를 구하셨구려!” 그는 가슴을 치며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그 소리 탓에 성웅의 별이 관음포 바다에 떨어진 것을 조명 양군이 알게 되었고, 수백 척 전선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이 파도소리를 덮었다.
장군의 시신은 관음포 이락사 자리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노량 충렬사 자리로 옮겨져 초빈되었다. 며칠 후에는 고금도 통제영으로 모셔졌다. 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해안 옛 통제영 터에는 장군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월송대(月松臺)가 보존되어 있다.
고금도는 쉽게 가볼 수 없는 섬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육속이 되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강진군 마량항에서 고금도 북단으로 가로질러진 마량대교를 건너 10여 분 달리다 왼편으로 접어들면 이내 덕동리 해변이다. 잔잔한 바다가 섬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들어온 만(灣) 안쪽 아늑한 포구연안이 마지막 통제영 자리다.
사적 114호로 지정된 고금도 충무사는 이순신 영정을 모신 사당 앞에 아담한 사우가 몇 채 둘러섰다. 사당 왼편의 관왕묘 비가 눈길을 끌었다. 원래 도독 진린이 이 자리에 관왕묘(관우사당)를 건립했는데, 뒷날 충무사를 짓고 관왕묘는 묘비(廟碑)만 남겨두었다. 이곳이 명 수군 군영이었음을 증언하는 유적이다.
고금도 통제영을 굽어보는 덕동리 야트막한 언덕 위 솔밭(월송대)에 모셔졌던 성웅의 유해는 83일 만에 고향인 아산으로 모셔져 현재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 기슭에서 영면하고 있다.
고금도 통제영은 명량대첩 이후 적당한 진지를 찾던 이순신이 목포 앞바다 고하도(高下島)에서 정유년 겨울을 나고 옮겨온 마지막 진지였다. 이곳에서 장군은 전함을 건조하고 장정을 모집해 수군 재건에 힘쓰는 한편, 농지를 개간하고 군염(軍鹽) 제조사업으로 전력을 크게 회복시켰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주민들의 협력이 큰 힘이 되었다.
정부 지원 한 푼 없이 그렇게 힘을 기른 것이 진 도독의 마음을 산 밑천이 되었다. 1598년 7월 16일 진린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고금도 이순신 통제영에 당도했다. 이순신은 술과 안주를 성대하게 차려 배에 싣고 군대의 위의를 갖춰 군악을 울리며 멀리 나가 맞아들였다. 칠천도 패전 이후 중국 동해안 지방이 왜의 위협에 노출되자 명은 부랴부랴 조선에 수군을 파병했던 것이다.
통제영으로 맞아들여서도 성대한 환영연을 베풀었다. 여러 장수들은 잔뜩 취해 “이순신은 과연 훌륭한 장수로다” 하며 좋아했다. 사납고 오만하기로 소문난 진린도 융숭한 대접에 흡족해했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뜻밖의 변이 일어났다. 명나라 수군의 약탈과 부녀자 희롱으로 동네마다 통곡과 탄식이 터졌다.
보다 못한 이순신은 어느 날 크고 작은 막사를 헐고 옷과 이부자리를 배에 옮겨 실었다. 도독이 그 모습을 보고 달려와 까닭을 물었다. “귀국 군사들 행패를 견딜 수 없어 백성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옮겨가려 합니다.” 도독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즉시 이순신에게 명나라 수군의 탈법 행위 단속권이 허락되었다. 그 후로 명군의 행패가 사라졌다.
이순신은 크고 작은 전과까지 진 도독에게 양보해 체면을 살려주었다. 그 인품에 감격한 도독은 이순신을 제갈량에 비유하며 명나라에 가 벼슬을 하도록 권유하기까지 했다. 명나라 조정과 선조 임금에게 올린 서장에서 그는 이순신을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才)가 있으며,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功)이 있는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천지를 주무른 재주요, 하늘과 해를 손본 공이라는 평가는 진정 감화를 받지 않고는 인사치레로 쓸 수 없는 말이다.
그 서장에 감복한 명나라 신종은 도독인 참도 독전기 등 여덟 가지 물건[八賜品]을 보내 이순신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 전에 이순신을 살리기 위해 면사첩(免死帖)을 보낸 것도 그였다. 한양의 명군 총사령부에서는 영내에 빈소를 설치하고 성웅의 전몰을 애도했다.
그러나 우리 임금은 그 반대였다. 예조에서 그 사실을 전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하회를 구해도 선조는 대답이 없었다. 재차 하회를 요구하자 마지못해 “알아서 하라” 했다. 뒷날 논공행상 때도 그랬다. 선조는 굳이 원균을 이순신과 같은 정왜(征倭) 일등공신에 올리라 했다. 조정에서 부당하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너무 훌륭해 두렵고 질투 나는 이순신의 죽음을 반기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있겠는가.
조선 500년 역사에서 이순신을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만들고, 스스로 가장 용렬한 임금이기를 자청한 일이었다.
부천자생한방병원과 자생의료재단이 ‘농업인 행복버스’ 사업의 하나로 지난 14일 강화군 길상면 강남중학교에서 한방 의료봉사 활동을 펼쳤다. 이날 부천자생한방병원 임직원 20여명은 길상면 마을 주민 250여명을 대상으로 의료상담과 한방치료를 실시했다.
부천자생한방병원 박원상 병원장은 “농업인 행복버스를 통해 의료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농촌 고령 주민 건강을 돌볼 수 있게 돼 기쁘게 생각한다”며 “농촌 의료 인프라 해소를 돕고자 부천자생한방병원도 농업인 행복버스 사업에 더욱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농업인 행복버스는 자생 의료진이 전국을 돌며 의료 봉사활동을 벌이는 농촌 복지서비스로 농협중앙회와 농촌사랑범국민운동본부 등이 주관하고 있다. 자생의료재단은 지난 2013년 원년부터 의료지원기관으로 참여하고 있다. 자생의료재단은 앞서 지난 4월 충북 제천을 시작으로 경북 영천, 경기 포천, 전남 완도 등 농어촌 지역을 방문했다.
이맘때쯤이었다. 1962년 완도 앞바다의 햇살은 따뜻했다. 바닷가엔 조개껍데기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뱃머리에 선 소년은 이 정도 기온이면 다시는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있겠다 싶어 안심했다. 당시만 해도 전라남도 완도에서 서울로 가려면 배를 두 번 타야 했고, 꼬박 24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14세 소년은 멀고 긴 상경길이 걱정되지 않았다. 고향에는 다시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금의환향을 위해서는 차라리 먼 여정이 낫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눈 앞의 조개들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소년은 나전칠기 대한민국명장 임충휴(任忠休·67)씨다.
“원래 어릴 때부터 공부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서울로 가출을 했죠. 신문팔이며 구두닦이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그런데 서울의 추위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한 달 만에 집으로 도망쳐왔어요. 그리고 날이 좀 풀렸을 때 다시 서울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동네 이장이셨던 아버지는 그때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다시 도망쳐올 것 같으면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성공하려면 인내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임충휴 명장은 그날부터 아버지의 조언을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고 있다. 그의 작업실 한쪽에는 큼지막하게 쓰인 ‘忍耐’라는 글자 액자가 걸려 있다.
그는 두 번째 상경 때 생각을 바꿨다. 무작정 돈을 좇기보다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인천의 라이터 공장에 들어갔다. 그의 성실함이 통했는지 후암동의 한 공장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나전칠기 공장이었다.
나전칠기를 처음 본 소년은 바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영롱한 빛깔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 전복 껍질은 지천에 널린 흔한 것이었지만, 주걱 대신 무엇을 긁을 때 말고는 쓸모가 없었다. 그런 하찮은 것이 이렇게 아름답게 변하다니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았다. 그는 이 기술을 꼭 자기 것으로 만들겠노라 다짐한다.
월급·휴일 없어도 감지덕지
그러나 기술을 익히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처음 3년간은 월급도 받지 못했다. 그저 명절 때 주는 옷 한 벌과 간식 정도 사먹을 수 있는 용돈이 전부였다. 일요일도 없었다. 휴일은 한 달에 한 번뿐이었다. 그래도 숙식을 해결하며 어깨너머 기술을 훔쳐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작업만 고됐던 것이 아니다. 한겨울에도 찬물로 청소를 하느라 손과 무릎에는 생채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아직도 그의 몸에는 당시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말도 못하게 힘들었죠. 어린아이에게는 벅찬 일들뿐이었어요. 당시엔 기술자 중 상당수가 통영 분들이었는데, 연장 명칭은 죄다 일본어였죠. 전라도 출신 아이가 일본어가 섞인 경상도 사투리를 어떻게 알아듣겠어요. 그런데 말도 못 알아듣는다고 혼났죠(웃음).”
엄격한 교육은 요령을 부리지 않고 길고 번거로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제대로 된 완성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하도록 해줬다. 전통 공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그는 이미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중일(잡부가 아닌 정식 기술자의 초보 단계) 자리를 줄 테니 공장을 옮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된 공장은 보문동의 조안공예사. 이곳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김태희 선생의 제자 안승권씨가 운영하던 공장이었다. 임충휴 명장은 아직도 당시에 인연을 맺은 13명과 친목회를 통해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그를 담금질한 성공과 고난의 시간들
제대로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날아갈 것 같았지만 그 역시 순탄하지는 않았다. 옻칠에 사용되는 고운 토분(土粉)을 얻기 위해 매일같이 흙먼지를 마셔야 했고, 나무판자 표면을 곱게 고르는 작업에 종일을 바쳐야 했다.
그렇게 또 정신없이 5년을 보내고 나니, 임충휴 명장은 업계에서 꽤 알려진 기술자가 돼 있었다. 탐을 내는 사람도 많았다. 말 그대로 어엿한 기술자였다. 웬만한 화장대나 문갑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실력이 됐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스카웃 제의가 있었다. 이번에는 김호창 선생이었다.
“김호창 선생님 덕분에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죠. 제 성실함을 눈여겨보셨는지
4년 만에 그 공장에서 공장장을 맡게 됐어요.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많고, 실력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악착같은 제 모습이 맘에 드셨나봐요. 그곳에서 공장장으로 일하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제 회사를 차리게 됐어요. 독립하고 나서도 선생님이 하청을 주고 신경을 써주셔서 자리 잡는 데 큰 고생은 하지 않았어요.”
어렵게 융통한 300만원이 밑천이 됐다. 시작은 직원들 먹일 밥 지을 곳이 없어 비 맞으며 음식을 할 정도로 열악했다. 전라도 사람을 차별하는 풍토도 있어 어떻게든 신용만은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성공이라는 계단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그때는 9자 나전칠기 장롱이 300만원 정도 했어요. 그 돈이면 당시 시골에서 논 20마지기(약 6000평)를 살 수 있었어요. 고향에서 장롱이 그 가격이라고 하면 믿지 않았으니까요(웃음). 덕분에 여러 고관대작의 집에 들락날락했는데 그분들 중에 재벌이나 국회의원, 장관도 있었죠.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삼성종합건설의 부탁으로 쿠웨이트 영빈관에 줄 선물로 자개병풍을 만든 것이에요. 사진이라도 하나 남겨놨으면 좋았을 텐데….”
인내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뚝섬과 성남에 나눠져 있던 그의 작업장에는 직원이 어느 새 100명에 달했다. 제대로 된 9자 나전칠기 장롱이 만들어지는 데는 6개월이 걸리는데, 그의 작업장에서는 하루에 하나꼴로 완성됐다. 그만큼 꾸준한 수요가 이어졌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시장에서 사랑받았다.
“당시 나전칠기 장롱은 주부들에게는 일종의 로망이었어요. 누구나 갖고 싶어 했고, 부의 상징이었죠. 실제로 정부에서는 이 장롱을 사치품으로 간주해 특소세 인지가 있어야 거래가 가능하도록 했어요. 주부들이 자개장을 갖기 위해 계모임을 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어요.”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어려움이 닥쳤다. 1978년 2차 유류 파동에 잠시 휘청했던 사업이 좀 견뎌지나 싶더니 1997년 IMF라는 직격탄을 맞고 말았다. 현찰 대신 받았던 어음들은 줄줄이 부도가 났다. 당시 부도난 어음의 총규모는 12억8000만원 정도. 개인사업자가 넘길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당시 인사동과 명동, 신설동에 거래하던 가게들이 많았죠. 물론 대부분 어음으로 거래를 했어요. 받지 못한 돈이 12억이 넘었어도 절 믿고 따라준 거래처, 직원들을 실망시킬 순 없었죠. 몇 채 가지고 있던 집들을 모두 처분하고 빚잔치를 했죠. 직원들에게 퇴직금도 조금씩 챙겨주고. 그러고는 칠기와는 인연을 끊으려 했죠.”
실제로 그는 칠기와 잠시 이별했지만 다시 돌아왔다. 그도 천직을 잊기 어려웠지만, 그의 솜씨가 사장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주변의 만류도 컸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진성옻칠공예가 다시 부활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서 그는 과거의 제작 방식과 전통 소재에 더욱 집중했고, 이러한 노력은 2004년 노동부의 칠기 분야 명장 지정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는 명장 지정 이후에도, 전승공예대전 문화재청장상, 한국옻칠공예대전 금상 수상, 대한민국명장회 최우수 명장 위촉 등으로 진가를 제대로 인정받고 있다.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냈다며 주는 상 같았어요. 그간의 노력이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습니다.”
그는 명장 제도가 기능인들의 사기를 살리고, 상공인들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칠기에 대한 몇 가지 오해
나전칠기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자개 장식에 관한 것. 나전칠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수많은 자개 장식이다. 이 자개 장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구는 높은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일까? 임 명장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칠기의 생명은 곱고 투명하게 옻칠을 하는 실력과 옻칠의 재료인 칠액에 있어요. 칠액은 옻나무의 수액을 정제해서 만드는데 1Kg에 70만원을 호가하기도 해요. 그래서 예전엔 저렴한 동남아에서 캐슈(cashews) 나무 수액으로 만든 칠액을 쓰는 곳도 있었어요. 사실 자개가 가구 표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넓으면 넓을수록 만드는 과정은 쉬워요. 또 자개 재료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고요. 그래서 자개는 약간의 장식으로만 쓰인 옻칠 가구가 훨씬 귀하고 비쌉니다.”
또 옻칠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조금 다른 방법으로 진행된다. 말리는 과정이 그렇다. 칠액을 바르고 말리고 바르고 말리는 과정이 수차례 반복되어야 제대로 된 옻칠의 광택이 살아난다. 투명 옻칠은 이 과정을 스무 번 정도 반복해야 한다. 보통 말린다는 표현은 수분이 날아가 표면이 단단하게 굳는 것을 의미하지만, 옻칠은 물로 말린다. 습도가 80% 이상 되는 곳에서 표면을 굳혀야 특유의 투명함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업실의 건조장 바닥은 늘 흥건하다.
이렇게 천연재료로 만들어진 칠기는 모양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훌륭한 생활 도구가 된다. 환경호르몬이 원인으로 지목되는 아토피 같은 질환을 예방하는 데도 좋은 친환경 재료로 알려져 있다. 칠기 가구가 아기용 옷장으로 입소문이 난 것도 이 때문이다. 잘 썩지도 않고 불도 잘 붙지 않는다.
후진 양성을 위한 노력
임충휴 명장은 최근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옻칠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보통의 장인이라면 옻칠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 마음먹은 제자들 중에서 후계자를 골라 기술을 전수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 업계의 가장 큰 문제는 일할 장인이 없다는 것이에요. 특히 자개장 같은 건 기능인이 부족해서 웬만한 곳에서는 만들 엄두도 못 내요. 50세 정도는 이제 현장에서 젊은 축에 듭니다. 예전엔 옻칠조합 회원이 100명도 더 됐는데, 이젠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가 돼서 조합도 없어졌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후진 양성이다. 군포시에 위치한 서울남부기술교육원 옻칠나전학과에서 취업이나 취미를 목적으로 모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술을 가르친 지 2년이 됐다. 이제 그를 사사한 학생이 100명이 넘는다. 장인에게 기술은 밥줄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는 교육원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전통공예를 현대적 디자인에 접목하고 싶어도 매일 비슷한 것만 만들어온 사람들에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칠기 소비를 늘리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도가 필요한데 말이죠. 그런데 교육원에서 학생들을 만나면서 오히려 제가 배우는 기분이에요. 실제로 미술 전공자들도 많이 있고요. 이제 교육원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일은 제 인생에서 보람 있는 일 중 하나가 됐어요.”
계씨(季氏)편에 나오는 고사다. 공자에게는 백어(伯魚)란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자식인 백어에게 공자가 내린 가르침은 오직 두 가지, 즉 어느 날은 ‘시(詩)’를, 다른 날에는 ‘예(禮)’를 배우라고 한마디 한 것이 전부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와 아마 동일한 고사인 듯한데 양화(陽貨)편을 보면 공자께서 백어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기록이 나온다. “너는 시경(詩經)의 ‘주남(周南)’편과 ‘소남(召南)’편을 공부하였느냐? 사람이 ‘주남’과 ‘소남’을 공부하지 않으면 아마 담벼락을 마주보고 서 있는 것[牆面而立]과 같으리라!” 여기서 ‘담벼락을 마주보다’란 의미의 ‘장면(牆面)’ 또는 ‘면장(面牆)’이란 단어가 유래한다. 담벼락을 마주하고 서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으므로, 마치 학문 또한 공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는 비유이다.
이후 공부를 함으로써 요행히 ‘담벼락을 마주 보는 처지는 면했다’는 의미의 ‘면장면(免牆面)’이란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구당서(舊唐書) 염립덕전(閻立德傳)을 보면, “내가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서, 요행히도 담벼락을 마주보는 처지는 면하였고[幸免牆面], 지필묵과 인연을 맺어 겨우 여러분들 틈에 낄 수가 있었습니다[吾少好讀書 幸免牆面緣情染翰 頗及儕流]”라고 하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면장면(免牆面)’ 또는 줄여서 ‘면장(免牆)’이란 단어가 유래하니, 우리가 가끔 사용하는 ‘알아야 면장을 하지’라고 할 때의 ‘면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공부하지 않으면 또한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는 의미의 ‘면장(面牆)’은 이후 ‘담벼락을 마주 서듯 통하지 않아 답답하다’는 의미로 또한 바뀐다. 송(宋) 대의 대유학자인 주자(朱子)의 ‘영개창(詠開窓: 창문을 열고)’이라는 시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작일토장당면립(昨日土牆當面立) 어제는 흙 담에 얼굴을 대하고 섰다가,
금조죽유향양개(今朝竹牖向陽開) 오늘 아침은 해를 향해 대나무 창문 열었네.
즉, 도(道)가 깨우쳐지지 않는 답답함을 표현하면서 ‘토장당면(土牆當面)’이란 구절을 사용하였는데, 이후 이 표현은 조선 정조 때 다산(茶山)이 이재의(李載毅)와 사단(四端)에 대해 논쟁한 글인 ‘답이여홍(答李汝弘)’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이달 초 주신 편지에서 사단(四端)에 관한 주장을 차분히 살펴보니 제가 말씀드린 것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주신 글의 내용이 제 말과 합치되는데도 결론에서는 마치 이론(異論)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더군요... 지금 크게 바라는 것은 반드시 우리 두 사람이... 완도의 관음굴(觀音窟)로 함께 들어가 보고 듣는 것을 거두고 티끌세상을 벗어나, 마음속에서 환한 빛이 나오게끔 하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야 저의 당면토장(當面土墻), 즉 담벼락을 맞대고 있는 듯한 답답함과 노형의 장공편운(長空片雲), 곧 드넓은 하늘에 걸린 한 조각 구름 같은 의심이 모두 탁 트여서 말끔히 풀릴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비록 10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는다 해도 반드시 한곳으로 귀결될 리가 없을 것입니다.”
언사는 공손하지만 다산은 이재의의 글을 읽고 난 심정을 당면토장(當面土墻), 즉 흙벽과 마주하고 앉은 느낌이라고 적어, 그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봄이 좋아진다’고 입버릇처럼 되뇌던 옛 어른들을 기억하게 하려는 듯 ‘모든 게 파릇파릇 새롭게 시작되는 봄이 좋다. 아지랑이 아스라하게 피어오르는 봄이 좋다’고 말하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세대들을 갈수록 많이 만나게 됩니다. 생동하는 봄의 기운이 나이 든 세대에겐 삶의 기력을 되찾아 주는 효과가 있는 게 확실한가 봅니다. 그렇다고 연분홍 치마 흩날리며 가는 봄날을 한사코 붙잡아 둘 도리는 없고 그저 가는 세월을, 덧없이 가버린 봄날을 아쉬워하는 6월입니다. 그렇듯 가버린 봄날이 더없이 그리워지는 때 연분홍 봄날의 환희를 다시금 안겨주는 야생화가 있습니다. 바로 ‘개정향풀’입니다. ‘청춘의 연분홍 사랑이여 다시 한 번’이라고 외치고 싶은 이들에게 서·남해 바닷가를 찾아가 보라 권합니다. 가서 온 벌판을 핑크빛으로 물들이는 개정향풀을 만나 눈 깜박할 새 사라져버린 봄날의 생동감을 다시 한 번 느껴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개정향풀은 크게는 어른 키만큼 자라며 나팔 모양의 손톱만 한 연분홍 꽃이 고깔 형태로 다닥다닥 피는데, 많은 개체가 무리 지어 자생합니다. 10여 년 전 개정향풀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 일본인 학자가 표본을 남긴 이후 잊혔다가 민간 환경단체 회원들에 의해 90여 년 만에 다시 발견됐다고 언론에 대서특필된 것이지요. 그 후 서·남해안 여러 곳에도 자생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사라진 게 아니라 저 홀로 피고 지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는 게 정답이겠지요.
그렇듯 큰 키에 비해 꽃은 자잘하기에, 잘 살피지 않으면 개정향풀 꽃의 진가를 알아채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이름 앞에 붙은 ‘개’는 큰 키와 꽃 모양이 전남 완도와 인천 광역시 대청도 등 서해 섬의 산지에 자생하는, 같은 협죽도과의 정향풀[사진]을 닮은 풀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아예 ‘갯정향풀’로 불린다고 하는 걸 보면 얕잡아 부르는 개(犬)가 아니라, ‘갯가’ 식물이라는 뜻의 ‘개’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꽃 색은 정향풀은 하늘색, 개정향풀은 연분홍색입니다. 작약이나 투구꽃처럼 오각형 뿔 모양의 씨방이 농익으면 터져 씨가 여기저기로 날려 번식합니다.
Where is it?
도감에 따르면 중부 이북에 자생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서·남해안 섬에서 만났다는 사람들이 더 많다. 오래전 식물학자들이 표본을 채집했다는 충북 단양 경기도 여주, 평택 등 내륙에선 현재 자생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경기도 화성의 작은 섬 선감도와 안산 시화공단 인근 둔치에서 제법 풍성한 군락을 만날 수 있다. 최근에는 전남 신안 압해도와 강원 삼척, 경북 영덕 등 전국에서 자생지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경기도 화성의 경우 선감어촌체험마을 초입 수만 평의 논 사이에 작은 수로가 지나고, 그 수로변 100여m 구간에 어른 가슴까지 차오르는 개정향풀 군락지가 있다.
동·서양의 많은 미술가들이 배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즐겨 그리거나 조형물 또는 설치미술로 남겨왔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쳐 있고 강도 많아서 유년기, 성장기, 노년기 중 한때를 바다나 강 곁에서 살아 온 우리들에게 배는 아주 익숙한 풍경이다.
배는 물을 건너는 교통수단일 뿐 아니라 어업을 생계로 하는 이들에게 곧 삶의 터전이었다. 문학을 비롯해 여러 예술 장르로 배에 얽힌 주제는 독자들에게 많은 상상력을 키워 주기도 하고, 질박한 서민 애환에 공감대를 형성해 주기도 했다.
화가들은 마음 속 정서를 점, 선, 면으로 분할한 구도 속에 색채로 표출해 낸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시각을 통하여 화가의 깊은 정서에 접근하게 된다. 그 접점이 화가가 의도하는 사유에 근접하든 아니든, 그림을 보고 속뜻을 풀어 가는 과정이 보는 이들에게 때론 안온한 열락을, 혹은 거친 갈등의 아픔을 가져 온다.
그림 속의 배는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만, 언젠가 그 배는 물 위로 흘러갈 것이란 우리들의 인식이 잠재되어 있어, 배는 머무르되 물은 흐르고, 물은 잠시 머무르되 배는 흐른다.
박석호(1919~1994) 화가의 배 그림 ‘고선(古船)’을 처음 보았던 순간의 감흥은 아직도 생생하다. 인사동 어느 화랑의 유리 진열대에 덩그러니 혼자 걸려 있던 거칠게 짙은 청회색의 배 한 척이 두 눈 가득 다가왔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꿈을 꾸듯 하염없이 배를 바라보았다. 짙은 납빛 하늘에, 유려한 필선의 흐름이 돛과 배의 몸통을 슬며시 구분 지어서 그렇지, ‘저런 배도 있을까?’ 그렇게 며칠을 유리 밖에서 살피며 그림이 눈에 익을 때까지 천천히 의식을 작품 속에 이입해 보기도 했다. 초겨울 찬비가 내리는 저녁, 그림 중앙 작은 사각의 조타실과 선실 창틈으로 새어 나오는 노란 불빛에 시선이 빨려 들어가면서, 다소의 조급함이 풀리기 시작했다. 거친 마티에르에 여리게 스미고 번져 나오는 그 불빛, 거센 풍파에 깨지고 부서진, 아픈 여정을 이제 막 돌아온 고선(古船)에서, 그래도 내일의 새 항해를 꿈꾸는 화가의 자화상이리라 깨닫는 찰나, 그것은 환희이며 동시에 아픔이었다. 내가 소장하는 첫 번째 배 그림이 되었다.
홍익대학교 미대 1회 졸업생인 박석호는 이미 남관(1911~1990) 선생의 화실에서 미술의 기초 실력을 닦고, 김환기(1913~1974) 선생의 빛나는 제자로 인정받으며, 졸업 후 바로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박석호는 1966년 학교의 부조리한 인사에 강하게 저항하다 동료 교수 4명과 함께 주저 없이 강단을 뛰쳐나오게 된다.
신산한 삶 속에서도 산과 들, 사찰, 바닷가로 자유롭게 다니며 민초들의 힘겨운 삶의 현장과 주변의 보잘것없는 스산한 풍경까지 농밀한 화필로, 밀도 높은 작품을 이루어 간다. 1980년대에서 생의 말년까지 십 수 년은 배 그림을 유난히 많이 그렸다. 어시장, 이름 없는 작은 포구에 옹기종기 정박하는 어선, 이제는 배의 기능을 마친 앙상한 용골의 폐선, 비를 머금은 어부의 귀항 등을 유채, 수채, 파스텔의 재료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여 그렸다. 1994년 운명할 때 화실에 걸려 있던 유작이라 칭하는 ‘한촌(寒村)’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4호 사이즈의 작은 화폭이 수평으로 양분되고 하늘은 온통 노을과 구름으로 뒤덮였다. 먹청빛 짙은 바다 가운데 작은 배 한 척이 무심히 머물러 있다. 두세 번의 거친 붓질만으로도 작은 배는 시선을 확 사로잡는다. 붉은 노을빛이 바다에 어리고, 배 그림자도 파도의 흔들림 없이 잔잔한 바닷물에 번져 있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대구의 한 화랑에서 다른 화가의 배 그림 ‘새벽어촌’을 구입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배를 접안할 시설조차 마땅치 않은 남도 어느 포구에 작은 어선 위로 두 사람의 어부가 짐(물고기)을 들어 다른 한 사람의 등목에 얹고 있다. 배 위 어부의 등으로 하얗게 서리가 덮였다. 짐을 나르려는 어부는 발목이 젖은 모래에 박히고, 목에서 어깨까지 짐의 무게에 짓눌려, 목과 얼굴은 짐 상자에 녹아 붙어 버렸다. 손에 낀 장갑도 허연 성에에 뻣뻣하다.
어쩌면 평범한 어촌 일상이 보는 이를 잔뜩 긴장시킨다. 신선하게 느끼던 바다의 푸른 빛깔도 한 조각 얼음 되어 가슴에 박힌다. 침도 삼킬 수 없는 그 막막하고 아픈 고단함이 나를 깨운다. 크게 꾸짖는다.
‘너는 게으르지 않은가’
손장섭(1941~)은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치열하게 한 세대를 살아가는 올연한 거목 같은 화가이다. 우리나라 질곡의 긴 역사를 회화로 펼쳐 왔다. 해방, 남북분단, 민주화의 투쟁에 거침없는 화필로 포효해 왔다. 그러나 언제나 그의 그림 기저에는 우리네 이웃 서민들의 팍팍하고 고단한 삶을 따뜻이 어루만지고 있다. 특히 그가 자라온 어촌의 아낙들과 고깃배의 그림들은 하얀 물감을 덧바르는 특이한 채색으로 경직된 선의 분할이 서정적인 풍경으로 바뀐다.
‘외포리의 저녁’이라는 표제가 붙은 그림은 내가 세 번째 소장한 배 그림인데, 미술품 경매회사의 온라인 경매를 통해 구입한 작품이다.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에 머무르고 있는 배를 실경으로 담담히 그린 서경적인 작품이다. 석양의 하늘은 이미 붉은 노을로 질펀하다. 바다 건너 낮은 산들이 띠를 이루며, 모래톱에 배 너덧 척이 머물러 있다. 왼편 가까이 거의 부서진 하나는 배로서의 소임을 다 마친 채, 서서히 해체 되어 가는 폐선으로 보인다.
그런데, 바다에 녹아든 노을의 긴 그림자가 이 배를 포근히 휘감고 있다. 바닷물 가까이 우뚝한 큰 배는 당당한 위용으로 시선을 압도한다. 서너 개의 돛대가 노을을 수직으로 가른다. 뱃머리 돛대 위 푸른 깃발은 바람에 나부낀다. 범상치 않은 구도에, 잔잔하며 거친 붓질이 황혼녘의 포구를 아련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 그림을 한 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생 초·장·노년이 파노라마처럼 흐르고 있음은 나만의 감성일까?
이 그림의 화가 김태(1931~)는 함경남도 홍원의 해변마을에서 출생하여 월남, 서울대 미대를 졸업, 모교 교수로 정년을 한 사람이다. 비교적 과작(寡作)인 편인 이 화가는 특이한 구도, 과감한 붓터치, 원색의 광휘가 보는 이들을 그윽한 그림의 세계로 이끄는 매력이 있다. 특히 한적한 어촌이나 해변마을의 배가 있는 실경들은 우리에게 고향의 어린 시절 향수를 담뿍 느끼게 한다.
그림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그렇지만 그림을 제대로 보고 읽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림이란 표면을 통하여, 화가가 표출하고자 하는 세계에 발을 들여 놓으려는 진지한 자세가, 그 예술혼에 근접하려는 깊은 사색이, 화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살피는 과정이, 좋은 그림을 만나고 소장하고, 그 그림을 대할 때 깊은 마음 속 정화를 체험할 수 있다.
달빛이 유리창으로 고여 오는 늦은 저녁, 설거지를 마친 노처와 나란히 배 그림 앞에 앉아, 마른 뱃전을 적시는 바람 사이로 아련히 유년(幼年)의 바다를 떠올리고, 아직도 그 바다를 건너지 못하는 빈 배 위에 흰 세월 너울만 얹고.....
>> 글.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서울의 한복판 광화문을 중심으로 정남쪽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정남진(正南津) 장흥.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공기 좋고 물 좋은 전형적인 농어촌 지역이었다. 사람살기가 좋다고는 하지만 경제자립도가 열악한 농어촌지역. 인구도 점점 감소돼 다른 지방 도시들과 비슷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장흥군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관광산업의 육성과 군 이미지 제고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장흥군은 그 일환으로 아래에 소개할 사업을 진행하고 관광지를 조성해 군 이미지 상승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다.
야심차게 장흥군이 준비한 축제와 관광지들 그리고 사업까지. 이러한 장흥군의 노력은 한우와 각종 농수산물 등의 판매 증가와 관광소득의 증가로 이어졌다. 아울러 군민 소득 증대와 인구 증가 등 장흥군 경제 활성화에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전국 지자체와 상인회에서 연간 2000여명이 장흥군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다녀갈 정도로 타 지자체에 귀감이 되고 있다.
이제부터 장흥이 조성한 관광지 4곳과 축제 1가지 그리고 소개하려고 한다. 이 다섯 가지는 바다와 산림이 어우러진 장흥의 장점을 살린 관광지와 축제로 여행객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장흥을 찾았을 때 찾아 가봐야 할 5가지이자 장흥이 흥겨운 이유 5가지다.
Ⅰ. 상쾌한 산림욕으로 심신을 치유하다 '편백숲 우드랜드'
산과 들,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의 정남진 장흥에는 찾는 이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편백숲 우드랜드’가 있다.
아토피와 같은 각종 환경성질환 치유, 스트레스 해소, 심신안정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편백나무. 장흥읍 억불산(518미터) 기슭에 위치한 우드랜드는 약 100헥타르(ha)에 걸쳐 40~50년생 편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우드랜드는 통나무주택, 황토주택, 한옥 등 자연 친화형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다. 또한 생태 건축을 체험할 수 있는 목재문화 체험관과 편백 톱밥 산책로 등이 조성 돼 있다.
목공 체험장에서는 우리 생활에 필요한 공예품 가구 소품 등을 직접 만들어 보고 만드는 기법을 배울 수 있다. 건축 체험장은 우리 고유의 한옥은 물론 흙집, 목조주택 등 생태건축 기술을 익힐 수 있는 공간이다.
편백 소금찜질방도 관광객들에게 인기다. 편백 소금은 몸 속의 독소를 배출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주중에는 자정까지, 주말에는 24시간 운영한다.
‘말레길’도 빼놓을 수 없는 우드랜드의 상징이다. 억불산 정상까지 나무 데크로 된 3천736미터의 말레길이 조성돼 있다. ‘말레’는 장흥지역의 방언으로 ‘대청’을 뜻하는 것으로 ‘가족 간의 이해와 소통의 장’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길을 이용하면 노약자와 장애인들도 편안히 삼림욕을 즐기며 억불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심신이 피곤한 현대인들에게 편백 숲 우드랜드에서 삼림욕을 즐기는 것도 좋은 치유의 수단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Ⅱ. 저렴하게 즐기는 장흥 한우 '정남진 장흥 토요시장'
편백숲 우드랜드에서 치유를 했다면 ‘정남진 장흥 토요시장’에서 먹고, 보고, 사고, 즐길 시간이다. 매달 날짜의 뒷자리 2일과 7일, 그리고 매주 토요일에 장흥 토요시장에서는 장이 열린다.
토요시장은 값싼 한우고기를 포함해 장홍 삼합 음식, 표고 버섯, 헛개 등 각종 특산물로 즐비하다. 뿐만 아니다. 바닷가와도 인접해 있는 덕분에 키조개, 낙지 등 각종 해산물도 풍부하다.
특히 장흥군의 한우는 저렴한 가격으로 관광객들의 입맛을 돋구고 있다. 유통혁신을 통한 최저가 한우로 소비자 신뢰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것. 2012년에만 6250두의 소고기를 판매했고, 이 중 38%를 토요시장에서 소비했다. 저렴한 가격의 장흥 한우가 관광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자 2007년 4개소였던 한우판매장이 지난해 22개소로 약 5배 이상 늘었다. 장흥 한우는 명실상부한 장흥 토요시장의 최고 상품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토요시장에서는 옛 향수를 느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할머니 장터, 다문화 거리, 짚풀 공예, 염색 체험 등 각종 체험장과 공연장이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다채로운 행사와 풍부한 먹거리ㆍ즐길 거리로 토요시장은 주말 1일 평균 5천명, 성수기 7천~9천명의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Ⅲ. 남해바다를 한눈에 '정남진 전망대'
장흥군 관산읍 삼산리. 간척사업이 이뤄지기 전 우산도라 불렸던 이 곳에 지하 1층, 지상 10층 높이의 정남진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의 바로 밑은 바닷가로 해발기준으로 보면 106.9미터. 이 전망대에서는 남해바다 연녹색의 시원한 풍경과 함께 고흥반도와 완도, 금당도 등 서남해안의 다도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정남진 전망대는 육상으로 보면 가장 남쪽에 있지만 바다로 보면 가장 첫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때문에 제주도를 왕복하는 오렌지호에서 보면 정남진 전망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전망대 관람료는 일반인 2000원, 어린이 1000원이다.
Ⅳ. 무더위를 물의 향연으로 적시다 '정남진 장흥 물축제'
여름에는 장흥이 자랑하는 탐진강과 편백숲 우드랜드 일대에서 물의 향연이 펼쳐진다. 8월 1일부터 일주일 간 ‘물과 숲-휴(休)’를 주제로 ‘제7회 정남진 장흥 물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장흥 물축제는 탐진강의 맑은 물, 장흥댐 호수, 득량만 해수의 청정 수자원을 기반으로 한 여름 테마 축제다.
이번 정남진 장흥 물축제는 독특하고 시원한 프로그램으로 가득하다. 물싸움, 천연 약초 힐링 풀, 맨손으로 물고기 잡기 등의 프로그램을 보강했고, 슈퍼 슬라이드, 우든(Wooden)보트, 오리보트 등 수상 프로그램들도 운영된다. 이와 함께 다채로운 무대행사와 볼거리를 준비해 관광객들의 만족도를 높인다는 계획이다. 축제기간 동안 매일 구성된 저녁 무대에서는 국내 가수들의 특별공연과 뮤지컬 갈라쇼도 펼쳐진다.
물축제는 장흥 토요시장에서 맛볼 수 있는 음식이 더해져 관광객들을 사로잡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물축제의 운영 수익금 전액은 ‘세계 물 기근 국가 어린이 식수 개선사업 지원’을 위한 유니세프 기금과 불우이웃 돕기 성금으로 사용 돼 그 의미를 더한다.
Ⅴ. 장흥에서 제주까지 2시간 20분'오렌지호'
내 자동차로 바다를 건너 제주도를 간다? 장흥에서 출발하는 사람이라면 가능하다. 쾌속선 ‘오렌지 1호’가 있기 때문이다, ㈜제이에치페리는 장흥 노력항에서 제주 성산항을 잇는 오렌지호를 운항하고 있다.
오렌지 1호는 4200톤급 선박으로 825명의 인원과 85대의 차량을 태울 수 있다. 2010년 취항 이후 지난해까지 누적수송여객 167만2221명(차량 28만6086대)로 장흥지역 경제활성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현재 제주 성산항에 내국인 면세점(JTO)도 열려 이용객의 편의성을 증대했다. 또한 4월~5월 여행객을 위해 조기예약 할인 이벤트(주중 20%할인)를 실시하고 있다.
요금은 일반석 기준 일반인 왕복 7만6000원(터미널 이용료 장흥발 1500원ㆍ제주발 500원 포함)이다. 문의는 ㈜제이에치페리 홈페이지(www.jhferry.com)나 대표전화(1544-8884)를 통해 하면 된다.
한국관광공사는 '걷기 여행길'(www.koreatrails.or.kr) 웹사이트를 통해 4월 가볼 만한 전국 곳곳의 도보 여행지 10곳을 소개했다. 도보 여행지는 쉬운 코스와 보통 코스 등으로 구분이 돼 있다.
쉬운 코스는 경북 청송군의 주왕산 탐방로 주왕 계곡코스(2.2㎞)다. 대전사에서 출발, 자하교를 지나 용추폭포까지 이어지는 산책하기 좋은 평탄한 길이다. 주왕산의 기암괴석과 병풍처럼 둘러싼 절벽을 볼 수 있다.
전남 완도군의 청산도 슬로길 1코스(5.71㎞)는 영화 '서편제'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다. 유채꽃과 청보리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강원 강릉시 바우길 5구간 바다호숫길(16㎞)은 파도를 따라 해변을 걷다가 커피 거리에서 카페에 들릴 수 있는 코스다. 금강소나무 군락, 허균허난 생가, 죽도봉 공원 등을 거쳐간다.
보통 코스중 경남 하동군 '박경리 토지길' 2코스(13㎞)는 화개장터부터 십리 벚꽃길을 지나 불일폭포까지 닿는 구간이다. 4월 벚꽃 축제, 5월 야생차 축제가 열리는 대표적인 꽃길로 알려져 있다.
전남 화순군 무등산 자락에 있는 무돌길 11길(3㎞)에서는 4월 벚꽃에 이어 5월에는 철쭉꽃밭이 펼쳐진다. 무등산 산행 일정에 포함해도 좋다.
전북 김제시의 순례길 6코스(25.9㎞)은 금산사와 모악산 자락을 잇는 코스. 4월 18∼20일에는 모악산축제가 열려 템플스테이나 무형문화재 공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수도권에서는 대부도 해솔길 1코스(11.3㎞)가 가볼 만하다. 해변을 따라 걷다가 북망산에 오르면 인천대교, 시화호 전경 등이 펼쳐진다.
서울에서는 북서울 꿈의 숲 나들길(4.7㎞)과 서울숲 남산 나들길(8.8㎞)이 가족 나들이 코스로 좋은 것으로 꼽혔다. 지하철이나 버스와 연결돼 이동이 편리하고, 숨겨져 있던 서울의 역사적 명소를 둘러보고 시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