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에 따라 외도란 정도의 차원을 높여주는 디딤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인간은 정도를 걷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외도를 통해 확실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성을 넘어서는 외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르지 않은 길을 가다 보면 어느 순간 잘못된 길임을 깨닫게 되고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충동적으로 평소 해보지 않던 일을 해봄으로써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일들이 얼마나 내가 잘할 수 있고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인간이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 중 하나가 ‘외도’ 아닐까? 그것은 마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제목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처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 동경 같은 것이 항상 마음속에 내재돼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탄의 유혹에 빠진 이브와 아담처럼 삶의 곳곳에서 인간은 그런 유혹을 받으면서 사는 존재인 것 같다.
필자에게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있다. 인생관, 직업관 그리고 결혼관이다. 필자에게는 필자만의 그릿(Grit)이 있다. 그중에서 결혼관을 소개하면, 선택을 할 때 최대한 신중을 기하되 한 번 결혼하면 그 결혼에 대해 책임을 지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배우자에게 부족한 면이 있다면 좋게 만들어줘야 한다. 이러한 삶은 결코 쉽지 않지만 결혼할 때 대부분의 부부는 그렇게 사랑하고 노력하며 살 것을 약속한다. 이러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면 실존주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사르트르처럼 계약결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결혼할 때 약속한 것들을 서로 이행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졸혼이나 이혼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이는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사랑과 용서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인간은 실수를 행하기 마련이고 신은 이를 용서한다”는 말이 있다. 한정된 지능을 지닌 인간이 무한한 변수가 작용하는 이 세상을 사는 과정에서 한 번쯤 실수나 외도는 있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존재하는 말이 아닐까? 그래서 성당에서는 고백성사를 통해 신부님이 신자들의 실수나 지은 죄까지도 용서를 해주는 것 같다. 물론 보속이라는 속죄의 과정이 필수적으로 따르기는 하지만. 따라서 배우자가 외도나 실수를 했을 때도 한 번쯤은 용서해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실수는 한 번으로 끝나야지 두 번 다시 반복돼서는 안 된다.
나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혼한 사람에 대해서는 좋지 않게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그만한 사정이 있어 어찌할 수 없이 선택한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대동소이한 삶을 살고 있기에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노력하면 문제는 극복이 된다고 본다.
우리는 정도와 원리원칙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외도를 했을 때도 한 번쯤은 정도를 걷기 위한 디딤돌로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필자의 아내는 필자가 너그러운 사람인 줄 아직 모르는 것 같다. 마치 단 한 번의 실수나 외도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볼 게 분명하다. 이제 필자의 아내가 이 글을 읽는다면 다소 그런 편견이 바뀔 수도 있을 것 같다. 여기서 한 번쯤의 외도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외도가 아닌 일상에서의 탈출, 보다 확실한 정도를 걷기 위한 한 번쯤의 일탈이라고 해두면 어떨까?
2017년 정유년 열 번째 아침이 밝았다.
우와~
오늘따라 유난히 쨍한 햇빛이 가슴에 와 박힌다. 하도 눈이 부셔 윙크하듯 눈이 저절로 찡긋해지고, 촬영할 때 라이트를 가득 받은 사람처럼 온몸이 자연에 발가벗겨진다.
거실과 안방의 먼지들도 모든 죄를 천지에 드러내듯 하나하나가 작은 차돌만큼 크게 보인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지고 용서를 바라는 마음처럼 겸손해지는 날이다.
날 선 추위는 곁에서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듯하다.
이런 대단한 햇빛을 본 게 과연 언제였던가.
그날도 그랬지.
친구 소개로 예쁜 여학생 만나 학교에서 늘 붙어 다니고 서로의 강의시간표도 달달 외웠지. 강의가 비는 시간이면 친구들의 볼멘소리 뒤로 하고 둘만 아는 장소로 뛰어가 나중에 오는 사람이 나타날 골목길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기다렸지. 개나리와 진달래 필 때는 고궁을 거닐었지.
여름방학이면 일을 해야 하는 필자 때문에 뚝섬 모래사장에서 만나 흐르는 강물을 보는 게 고작이었지만 마냥 즐겁기만 했지. 차비까지 탈탈 털어 국화빵 사 먹으며 한 없이 걷고 또 걷는데도 발이 안 아팠지.
우리가 만날 때는 왜 그리도 비가 자주 내렸을까. 변변한 우산도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 비닐우산은 우리를 급속도로 밀착시켜 비 오는 날씨를 은근히 고마워했지. 그 시절엔 눈도 왜 그리 많이 왔는지 함박눈 내리는 날이면 우산을 털어가며 걸었고 넘어질까 걱정되어 더 밀착하고 걸었지.
그렇게 봄에서 겨울까지 일 년을 꿈같이 보냈지.
다음 해, 봄도 오기 전 영장이 나와 입대를 하고 훈련받는 동안 우리 소대에서 가장 많은 편지를 받았지. 자대배치 받은 부대에 면회도 자주 오고 즐거운 기대감에 병영생활이 희망찼었지.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한 다음 바쁘다며 편지와 면회가 뜸해지더니 상병 계급장 달던 날 오전에 절교 편지를 받았지. 그날 본 하늘이 오늘 본 하늘과 같았지.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렸지만, 10여 통의 편지를 보내도 끝내 소식은 오지 않았지. 소개해준 친구를 통해 같은 은행원 상사와 만난다는 소식을 들었지. 제대하고 만났을 때 결혼을 약속했다는 말을 듣고 축하해주며 끝냈지.
그동안 잊고 살았는데 오늘 눈부신 햇빛이 그 시절을 끄집어낸다. 첫사랑은 다시 할 수 없지만 우리가 만났던 장소들이 하나하나 모두 생각나는 걸 보니 ‘첫’이라는 단어만큼 여전히 두근거리고 아름다운 추억임이 분명하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는 말은 일이 공교롭게도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서 억울하게 의심을 받을 때 하는 말이다. 이를 불교에서는 악연(惡緣)이라 한다. 악연을 설명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배나무에 앉아있던 까마귀가 나무를 박차고 날아오르자 꼭지가 약한 배가 그만 떨어져 버렸다. 불행하게도 땅에 있던 뱀의 머리에 배가 정통으로 떨어져 뱀은 죽고 말았지만 까마귀는 알 리가 없었다. 까마귀는 뱀을 죽일 이유도 없었고 죽은지도 모른 채 제 갈 길을 갔을 뿐이다.
뱀은 다음 생에 멧돼지로 환생했고 까마귀는 꿩으로 환생했다. 봄이 되어 꿩은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부화를 위해 품고 있었다. 하필 그 위쪽에서 멧돼지가 먹이를 찾아 해매고 있다가 그만 바위를 건드렸고 구르는 바위는 꿩의 둥지를 덮쳐 꿩은 알과 함께 압사하고 말았다. 다음 생에서 꿩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냥꾼이 되어 늙은 멧돼지를 활로 쏘았다. 이렇게 악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끝없이 이어진다고 한다. 우리가 모르고 저지르게 되는 악연도 무수히 많지만 말을 잘못해서 참으면 될 것을 참지 못해서 악연을 만들기도 한다. 알면서도 진실을 말하지 않아 상대방이 억울한 누명을 쓰게 하거나 참고 용서해줄 만한 일도 원칙과 정의감에 사로잡혀 사람을 보지 못하고 남을 사지에 몰아넣는 악연을 만드는 일도 있다.
필자는 군에서 보병대대에서 보급사병을 담당했다. 그 당시는 군수물자가 귀했다. 상급부대에서 군화가 내려왔는데 새 군화를 받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물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직접 군화를 들고 내무반을 돌면서 상태가 아주 나쁜 군화를 바꾸어주라는 상관인 보급관의 지시가 있었다. 당시 내 계급은 일병이었기 때문에 나보다 계급이 위인 상급 병사들이 수두룩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새 군화를 받기위해서는 아니꼽지만 내무반 침상위에 헌 군화를 내 놓고 필자의 심사를 받아야 했다.
필자가 앞쪽에서 현품 심사를 하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상병 한 사람이 헌 군화를 내놓고 새 군화를 슬쩍 훔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것을 못 본 척 묵인하면 질서는 무너진다. 필자는 다짜고짜 뛰어가서 필자보다 상위계급인 상병의 뺨을 후려 갈겼다. 그 자리에는 병장, 하사들도 있었지만 하극상의 내 행위를 어쩌지는 못했다. 자기 잘못이 있지만 뺨을 맞은 상병은 아픔보다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창피했을 것이다. 지금 같으면 ‘거기 손대지 말아요! 다 보고 있어요.’하고 소리만 질러도 될 일이었다.
다음해 이 병사는 유격대 조교로 차출되어 전출을 갖고 필자가 소속된 본부중대가 유격훈련을 받는 날이 돌아왔다. 고된 유격훈련에 조교와의 악연이 있으니 보복을 당해 반쯤 죽을 각오를 했다. 마음속으로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길 바라고 자기가 맞을 짓을 했다는 것을 인정해주길 바라고 휴가라도 가서 제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불행하게도 유격장에서 마주섰다. 전세는 역전되어 악명 높은 유격조교와 조교의 지시를 따라야하는 훈련병으로 만났다.
붉은 모자의 유격조교는 필자를 정확히 기억하고 앞으로 불러냈다. 그는 이미 유격대의 고참 병장이었고 나에 대한 적개심으로 눈빛이 이글거렸다. 한참을 노려보더니 ‘너 오면 반쯤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널 만나니 그러지 못하겠다. 나는 다른 유격장으로 갈 테니 훈련 잘 받고 가라’ 하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고 다른 유격조교에게 우리 팀을 인계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유격조교인 그가 무슨 트집을 잡아서라도 나를 반쯤 죽일 수 있었다. 그는 통 크게 나를 용서하는 것으로 악연을 끊었다. 만약 그가 지나친 형벌을 내게 가했다면 나 또한 보복의 칼을 갈았을 것이다.
군대이야기 하면 제일먼저 생각나는 이 사건이고 이 사람이다. 누구나 잘못을 할 수는 있다. 정의감에 불타 잘한 일이라고 한 것이 반대편에서는 너무 억울하고 창피 할 수가 있다. 기계적으로 잘못만 보지 말고 그 뒤의 사람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빵을 훔친 장발장의 행위보다 그의 배고픔을 알아줘야 따뜻한 사회다. 알고는 악연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서울 변두리 어느 우체국 집배원의 얘기다. 달동네로 우편물을 배달하려면 오토바이를 밀고 올라가야 하는 좁고 가파른 골목이 여러 군데 있었다. 그날도 어느 허름한 집 앞을 지나다 마침 대문 앞에 떨어진 수도세 고지서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수도세가 좀 이상했다. 그 집에는 할머니가 혼자 살고 계셨는데 보통 때보다 수도세가 거의 5배가 청구된 것이다. 수도관이 새거나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배원은 초인종을 누르고 할머니가 나오시자 고지서를 내밀며 수도관을 고쳐야겠다고 말했다.
“그럴 일이 있어요. 거동이 불편한 이웃 할머니 다섯 분을 우리 집으로 모셔왔어요. 나는 아직 건강하니까 도우려고요. 빨래를 많이 해서 그래요.”
과연 할머니 댁의 빨랫줄에는 빨래가 엄청 널려 있었다. 집배원은 그다음 날부터 점심시간을 이용해 할머니 댁에 와서 빨래하고 개키는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났다. 집배원은 그날도 점심시간에 할머니 댁에 왔다가 깜짝 놀랐다. 여러 대의 오토바이가 죽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더 놀란 이유는 다른 집배원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마다 슬며시 사라지는 동료가 수상해 미행했다가 이런 선행을 하는 것을 알고는 함께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사랑과 배려는 확실히 전염성을 갖는다. 또 그런 전염병에 걸리면 살아가는 이유를 알게 된다. 요사이 우리나라가 어지럽다. 나라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더욱 용서와 사랑과 희망을 말해야 한다. 탐욕에 물든 사람들이, 이기심으로 균형을 잃은 사람들이 너그러움이 무엇인지 깨끗함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또 맑게 치유되는 감동을 선사받았으면 좋겠다. 들으라 하고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은 경청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되어 상생하는 삶을 알게 되면 좋겠다. 우리는 각자의 장소와 시간 안에서 자기 역할을 해내야 한다. 새해도 오니 희망의 전염병이 많이 번지기를 기대한다.
올 한해 활동하고 있는 정책기자단에서 힐 다잉을 경험했다. 죽음을 미리 체험해보는 일이라 해서 솔직히 가기 싫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아직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싫고 먼 훗날의 이야기라며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친구가 얼마 전 다니는 절에서 임종체험을 했다고 한다.
필자는 그런 걸 왜 했냐고 질색했는데 뜻밖에 그 친구는 그 시간이 매우 평온하고 좋았다고 한다. 스님이 인도하는 대로 관에 누워 명상까지 했다고 해서 필자는 그런 건 하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넌 죽음이 무섭냐?”고 내게 물었다.
친구는 이제 자기는 저세상에 간다 해도 무섭지 않다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필자로서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아마 종교의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필자는 왜 죽음이라는 게 이렇게 두려운 걸까? 아직 세상에 미련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아직 즐거움과 희망이 있는 세상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일까?
임종체험은 4년째 운영되고 있으며 1만7000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죽음을 앞둔 분이나 삶에 갈등을 느껴 자살 충동이 있는 분이 많이 찾아와 마음의 평안을 얻고 생각을 바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체험 순서는 영정사진을 찍으며 시작되었다. 체험 전에는 강의가 있었다. 강의장 안에는 여러 문구가 걸려 있었는데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습니다. 여러분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화해와 용서 그리고 사랑의 실천,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나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에게 사죄합니다’ 등의 글이 눈에 띄었다. 그 글을 보니 절망에 빠져 이곳에 온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생각을 바꾸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사는 임종체험을 하면 나를 돌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집에 돌아가면 주변을 돌아보고 마음을 전할 수 있을 때 전하고 잘해주라고 했다.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니 ‘있을 때 잘하라’는 유행가 가사가 진리처럼 다가온다. 천년만년 살 줄 알고 반성을 안 하며 살지만, 이런 체험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니 한 번쯤은 경험해봐도 괜찮을 것 같기는 하다. 강사는 웃음의 강도로 수명을 예측하기도 한다며 많이 웃고 살라는 말로 강의를 마쳤고 우리는 위층 체험장으로 이동했다.
계단에 줄지어 서 있는데 드라마에서 보았던 저승사자가 나타나 우리를 안내했다. 체험장에 들어섰을 때 기분이 너무나 이상했다. 어두컴컴한 넓은 공간에는 수십 개의 관이 있었고 촛불만 어슴푸레하게 켜져 있었다. 우리는 옆에 준비된 수의로 갈아입고 좀 전에 찍어둔 영정사진이 놓인 작은 책상에 앉았다. 마음이 착잡했다. 유언장을 쓰는 순서가 되었다. 다들 기자였으므로 글쓰기가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모두들 머뭇거렸다. 필자 역시 실감이 나지 않아 유언장 내용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 이런 상황이 현실이라면?’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슬퍼졌다. 그냥 가족에게 사랑한다는 말로 유언장을 정리했다.
다음 순서는 관에 들어가 누워보는 것이었다. “이제 여러분은 죽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자동으로 관 뚜껑이 소리를 내며 닫혔고 곧이어 못 치는 소리가 탕탕탕! 들려왔다. 눈을 떠봐도 깜깜하고 작은 공간에 갇혀 있어 숨이 막히는 듯했다. 폐쇄공포증이 있는 분은 절대 체험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나저제나 문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동안 정말 무서웠다. 시간이 더 지체됐다면 필자는 발로 관 뚜껑을 찼을지도 모른다.
정말 길게 느껴졌던 시간이 지나자 문이 열리고 불이 켜졌다. “여러분은 이제 살아났으니 기쁜 마음으로 일어나라”는 말이 들려왔다. 필자는 관에 있었던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8분이었다고 한다. 그 8분이 필자에게는 몇 시간처럼 느껴졌고 두렵고 힘들었다. 밝음이 이렇게 감사하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 있다는 게 고마웠다.
다른 분들은 어두운 관 속에 누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살아온 날을 반성했을까? 앞으로는 더 나은 생각을 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수도 있다. 우리 시니어에게 이런 체험이 필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는 일에 지쳤을 때 임종체험을 하면 용기를 얻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니 한 번 체험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 수양이 덜 된 사람인 모양이다. 임종체험을 했어도 반성은커녕 너무 무서워서 다시는 이런 체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두려움이 많다니 필자가 생각해도 우습다.
사람은 언제 행복함을 느낄까? 행복은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우선인 것 같다. 필자가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처음 경험한 것은 결혼하고 약 8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아내가 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다음 해인 1989년 필자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영세를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영세는 절대자인 신으로부터 과거의 모든 죄에 대해 사함을 받는 것이다. 필자는 이날 큰 은총을 받았다. 살면서 수없이 많은 죄를 짓고 허물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고 하니 어찌 행복하지 않았겠는가.
더욱이 아내와 함께 종교를 갖게 되어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부부로서 영세 이후의 대화는 이전보다 훨씬 더 편안해졌고 소통도 잘됐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장남과 8남매의 막내딸이었던 필자와 아내는 가정문제로 대화를 하면 항상 평행선을 달리며 입장 차이를 쉽게 좁히지 못했다. 그러던 우리 부부가 신앙생활을 한 뒤로 평행선이 만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아니 그보다도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주일마다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외식을 하는 생활이 우리 가정에 새로운 문화를 가능하게 해준 전기가 되었기에 더욱 행복한 크리스마스로 기억되는 것 같다.
또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 영세를 받았기에 필자도 마치 새롭게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필자의 생활은 이런저런 혼돈의 블랙홀 속에 빠져 있었다. 경제적,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 풍조 속에서 방황도 많이 했다. 그러나 아내와 함께 종교생활을 하면서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물질적 충족보다는 정신적으로 풍요로울 때 비로소 평화롭고 충만해짐을 알게 됐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1989년 크리스마스가 유난히 행복한 날로 기억되는 것은 영세라는 축복 말고도 필자의 삶에서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아내가 우울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아들 둘을 낳고 나서 몹시 지쳐 있던 아내는 성당을 다니면서부터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다. 당시 필자는 아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심각한 가정의 위기까지 느꼈다. 결혼 후 어려운 살림을 하면서 휴일도 없이 장남의 맏며느리로서 오랫동안 강행군을 해왔던 아내였기에 그 고충이 십분 이해됐다. 미안한 마음에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일찍 퇴근해 아이들을 돌보면서 아내가 자신만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성당에 다니도록 했는데 그 후 아내의 얼굴에 미소가 다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도 신이 은총을 베풀어주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물론 아내의 미소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레지오 활동, 성지순례 등이 있는 날이면 필자가 두 아들을 돌봤다. 아내의 활동이 많아질수록 필자의 자유로운 생활이 제약받았지만 그래도 아내의 미소를 보면 행복했다.
두 번째는 영세를 받는 날 필자가 신으로부터 은총을 받고 철천지원수 같은 직장 동료를 용서해주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신념과 종교적 신념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인간의 신념은 강한 것 같아도 어느 한순간에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은 순교자처럼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정도로 강력한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영세를 받는 날, 하느님에게 원수와 같던 동료를 용서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때부터 동료가 회의 때나 모임에서 필자를 향해 공격을 해도 대응을 안 했고 그를 용서해달라고 하느님께 빌었다. 그리고 동료의 장점을 생각해보려 애쓰고 동료가 없는 곳에서 칭찬을 시작했더니 어느 날부터 행동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필자는 한 사람을 다시 얻게 되었다. 하느님과의 약속을 이행했더니 은총을 또 내려주신 것이다. 1989년 크리스마스는 이래저래 영원히 기억될 것 같다.
세월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마는 크리스마스 날이 예전과 다르게 이렇게 조용하게 변할지는 몰랐다. 어릴 적 크리스마스이브는 무조건 교회 가는 날이었다. 교회 가는 목적은 단 하나, 종이봉투 속에 빵과 사탕 몇 개를 담은 선물 봉지를 받고 싶어서다. 그 당시 시골 아이가 크림이 들어 있는 단맛 나는 빵과 알록달록한 사탕과 과자를 얻어먹는다는 것은 횡재라고 부를 만큼 기쁜 일이었다. 제삿날 밤늦게 기다리다 얻어먹던 하얀 쌀밥에 참기름 넣은 나물 무침과 상어고기 한 토막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예전에는 크리스마스 무렵이 되면 온 동네가 시끌벅적했다. 전자제품 A/S센터가 없던 시절이라 골목마다 라디오 고치는 전파사가 있었는데 하루 종일 징글벨 노래가 울려 펴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루돌프 사슴코 노래도 엄청 들었고 창밖을 보라, 실버 벨, 기쁘다 구주 오셨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등 메들리 캐럴송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교회에서는 긴 망토를 입은 세 명의 동방박사가 예수님 탄신을 경배하기 위해 찾아가고 예수님은 구유에서 태어나시는 모습을 주제로 한 연극을 했고 어린이 관객은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필자가 고등학생일 무렵에도 떠들썩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변함이 없었다. 교회 다니는 신도들보다 교회 다니지 않는 친구들이 더 야단이었다. ‘광란의 올나이트’라고 이름 붙이고 밤새 춤추고 노래 부르며 놀았다. 그날만큼은 통행금지도 없었고 교인들의 행렬도 장관이었다. 특히 연인들은 그날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야 하는 날이었다.
필자가 초년 직장인이었던 시절에는 경제 부흥의 여파로 세상이 역동적이고 경기도 좋았다. 크리스마스를 시발점으로 하여 연말연시는 늘 시끌벅적했다. ‘Ma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라는, 즉 크리스마스와 새해 신년인사를 함께 하는 카드를 주고받는 것이 유행이었다. 일 년 내내 소식 한 번 전하지 않고 지내다가도 이때 다양한 카드를 주고받으면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 그림 솜씨가 좋은 학생들은 직접 그린 수제 카드를 길거리에서 팔았다. 그림이나 글귀가 좋은 것은 책상 유리 밑에 끼워두고 오래 보기도 했다.
요즘은 크리스마스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넘어간다. 길거리에서도 캐럴송을 들어본 지 오래다. 캐럴송이 사라진 이유는 저적권법에 걸려 고액의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노랫소리가 듣기 싫은 사람들이 소음공해로 민원을 제기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TV 방송이나 라디오에서도 예전만큼의 캐럴송이나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한 가슴 훈훈한 이야기들을 특별히 소개해주지 않는다.
부처님 오신 날이든 예수님 탄신일이든 정부에서 경축 기념일로 정한 날은 세상이 좋은 쪽으로 조금은 시끌벅적하면 좋겠다. 해당 종교를 안 믿는 사람에게도 공휴일의 혜택은 다 같이 주어지기 때문에 종교 기념일이라고 굳이 색안경을 끼고 반대할 명분도 약하다. 해당 종교를 믿든 안 믿든 기쁜 날로 생각하며 시끌벅적 사람 사는 냄새가 나면 좋겠다.
브라질의 삼바 춤 축제는 열흘이나 이어진다고 한다. 일본에도 지역별로 진행되는 다수의 ‘마츠리’ 축제가 있다. 건강, 사업 번창 등을 기원하는 일종의 종교행사다. 우리나라도 예전부터 농한기가 되면 풍악을 울리고 명절 때는 마을마다 다양한 놀이가 있었다. 이런 자발적인 축제는 이제 다 없어지고 얼토당토않은 관 주도의 행사에 뒷말만 많다. 크리스마스 날만이라도 저작권료나 소음공해민원 걱정 없이 신나는 캐럴송이 온 나라에 울려 퍼지는 좀 시끌벅적한 날이 되면 좋겠다.
어느 누구도 부모님께 낳아달라고 해서 이 세상에 나온 사람은 없다. 요즘 금수저, 흙수저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누구나 살아내느라 고생이 많은 인생이다. 우리 세대는 모두 어릴 적 너나없이 어려운 시절을 살았다.
필자는 월급이 제 날짜에 나오는 교사의 딸로 유복하지는 못했어도 큰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 그런데 어느 해 친정아버지께서 갑작스럽게 퇴직을 하게 됐고 이후 사업을 하다가 몇 번 실패하면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수밖에 없었다.
이 시절 열심히 살았던 습관이 몸에 배었는지 결혼 후 아이가 아직 어렸을 때 동네 아줌마들과 정보를 나눈다는 핑계로 수다나 떨면서 편안하게 지내는 필자가 스스로 마음에 안 들고 용서도 안 됐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아다니면서 열심히 배웠고 개미같이 일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환갑의 나이가 됐다.
어떤 사람은 피곤하면 편도선이 붓는다. 어떤 사람은 입술이 부르튼다. 필자는 얼굴의 볼 부분이 아프고 전신이 피곤했다. 이때부터 나를 위한 힐링의 시간을 가졌다. 피부관리숍에 가서 마사지를 꾸준히 받았다. 전신마사지까지는 안 해도 얼굴과 등 관리만 받아도 힐링이 된다. 그 시간에는 코까지 드르렁 골면서 잔다.
피부관리숍을 처음 찾아갔을 때 필자의 상황은 매우 안 좋았다. 남편의 병간호가 계속되는 상황이었고 아이들도 사춘기라서 대책 없이 속을 썩였다. 어느 날 심신이 다 지친 몸으로 피부관리숍을 찾아갔을 때 원장이 얼굴에 석고팩을 해줬는데 울음이 터져 나와 석고팩 아래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물론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은 눈물이었다. 그 뒤로도 소리 없이 운 날이 많았다. 그러나 천성이 낙천적이고 안 좋은 마음을 오래 품지 않는 성격이라 금세 잊어버린다.
또 하나 ‘나를 돌보는 시간’이 있다. 헤어 디자이너에게 머리를 맡기는 시간이다. 필자는 한가한 날을 잡아 퍼머, 커트, 염색, 헤어매니큐어, 크리닉퍼머를 한다. 이 중 하나 이상을 하고 나면 힐링이 된다. 누군가 필자의 머리를 만져주면 피로가 풀린다. 헤어숍을 들어갈 때와 달리 변신한 모습에 기분도 좋아진다. 단골 헤어숍에 갈 때는 특별히 많은 대화를 나눈 헤어 디자이너가 늘 필자의 안부를 물어준다. 이런저런 일상사를 얘기할 때마다 마음을 열고 응대해주는 헤어 디자이너의 리액션도 필자를 힐링시켜준다.
올해에도 노벨문학상 유력 수상 후보로 거론됐던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 에서 “죽음은 삶의 대극(大極)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재해 있다”고 말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일상과 무관하고, 삶과 거리가 있게 느껴지지만 사실 죽음은 늘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대단히 죽음에 인색하다. 입에 올리는 것마저 거북해한다. 매일 죽음을 접하는 사람은 다르게 느낄까? 이 단순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가톨릭관동대학교 국제성모병원 마리아 병동(호스피스 병동)의 이인순(李仁順) 수녀를 만났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저는 죽음이 삶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인간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니까요. 하루하루 죽어가는 존재라는 이야기도 있고요. 모든 여정에는 그 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가 던진 우문(愚問)에 이인순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소인의 입장에선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매일 죽음을 맞닥뜨리는 일이라니. 일이 어렵거나 도망치고 싶을 것 같다고 얘기했더니 이인순 수녀는 되레 의아해한다. 소임받은 일에 의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인순 수녀가 이 호스피스 병동에 부임한 것은 국제성모병원이 개원한 2년 전.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에서 근무하다 수녀회로부터 소임 이동 명을 받고 이곳 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한데, 이 수녀는 간호사이면서도,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 대학원 과정을 이수했다.
“물론 이곳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에겐 이곳 일이 쉽지만은 않아요. 다들 젊은 나이이기도 하고요. 24시간 교대근무를 하는 간호사들은 환자와 가족들과의 만남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은데 병동에서 함께 산다고 볼 수도 있죠. 돌보던 환자가 돌아가시면 습(襲)까지는 아니지만 시신을 정성껏 닦고 새 옷을 입혀드립니다. 그리고 장례식장으로 보내드리는 일까지 모두 직접 해요. 스트레스도 적지 않아요. 그래서 함께 일하는 팀원들의 소진 예방을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합니다.”
가족이 치료 대상이 되는 이유
이렇게 어려운 일인 호스피스는 무엇일까?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말 그대로 더 이상 적극적인 치료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환자를 대상으로 치료보다는 통증 경감과 기타 신체적 증상 조절, 심리·사회·영적 돌봄을 통해 ‘남은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진행되는 의료서비스를 말한다. 완치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죽음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생의 마감과 가족과의 이별을 돕는 것이 목적이다. 정부에선 지난해 7월부터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국민건강보험 적용 대상으로 지정해 운영 중이다. 국민건강보험에서는 말기 암 환자만을 대상으로 하지만, 앞으로 그 대상이 다른 질환의 환자까지 확대될 예정이다. 현재 이인순 수녀가 있는 마리아 병동에는 33개 병실이 있다. 환자가 머무는 시간은 평균 한 달 정도. 물론 길면 두 달, 짧으면 일주일 이내에서 몇 시간까지 차이가 있다.
호스피스 병동이 일반 병동과 다른 것 중 하나는 바로 ‘가족’에 대한 관점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선 가족도 돌봄의 대상으로 바라본다고 이 수녀는 말한다.
“‘사별 상실 스트레스’라는 말이 있어요. 말 그대로 가족을 잃은 상실감이죠. 보통은 13개월에서 3년 정도면 사별 상실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다고들 해요. 하지만 그 이상 길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그 정도 되면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죠. 여전히 배우자와의 사별이 가장 큰 충격, 즉 삶의 스트레스 1위이지만 최근에는 형제·자매와의 사별도 그 충격이 매우 큰 것으로 보고되고 있어요.”
이러한 사별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비슷한 고통을 겪은 다른 사람들과 슬픔을 나누는 것이라고 한다. 사별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겐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별 상실 스트레스를 겪는 분들이 말합니다. 자녀나 가족들로부터 ‘이제 그 얘기 좀 그만해. 잊을 때도 됐잖아’라는 말을 듣는다고요. 죽음을 터부시하고 외면하고 싶은 심리가 있으니까, 고인에 대한 이야기도 못 꺼내게 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태도는 사별 가족 모두에게 좋지 않아요. 심한 경우 50년이 지나서 사별 상실의 슬픔이 터져 나오는 경우도 있어요. 사별을 겪었던 당시에 상실의 슬픔을 충분히 표현하거나 극복하지 못한 채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 결국은 표출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러한 슬픔은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나’와 ‘슬퍼하고 있는 그 당시의 나’를 대면하고 인정하면서 극복해나가야 합니다.”
병명 알고 죽음 맞는 환자 적어
현재 호스피스 병동은 말기 암 환자를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일단 입원하면 모든 환자가 암 환자다. 그러나 실제로 병명과 상태를 정확히 알고 오는 환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이 수녀의 설명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가족에게 권하는 것이 ‘진실 통고’ 혹은 ‘나쁜 소식 전하기’예요. 환자의 알 권리를 존중하자는 것이지요. 환자에게 병명이나 의료적 상태를 정확히 알리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보호자, 즉 자녀분들이 당사자들에게 말기 암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아요.”
환자에게 가벼운 병명으로 둘러대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심지어 미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왜 이런 거짓말을 하는 걸까?
“‘진실 통고’를 권하면 보호자들 반응이 대부분 비슷해요. ‘아마도 충격을 받으실 겁니다, 얼마 안 남으셨는데 꼭 그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요, 삶의 끈을 놓으실 것 같습니다’ 등등 이유가 많습니다. 하지만 삶의 주인공은 나 자신, 환자 본인이잖아요. 자신의 남은 삶을 삶의 주인이 갈무리해야 하는데, 그것을 자녀들이 막는 셈이죠. 환자의 권리를 앗아가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본인들에게 진단명이라는 이름으로 말기 암을 알리고 현재의 의료적 상태를 알렸을 때 심리적으로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만약 환자에게 진실 통고를 할 때 심적 부담이 된다면, 보호자가 그 짐을 떠안을 필요는 없어요. 원래 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의료진의 몫이니까요. 가족 중에 말기 암 환자가 있다면 환자는 물론이고 가족 모두가 환자 상태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손주들, 즉 어린아이까지요.”
어린아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이 수녀는 말한다. 어린아이들이 놀란다는 이유로 혹은 어리다는 이유로 부모 사별 현장 또는 조부모 사별 현장에서 배제된다. 결국 남는 것은 기억뿐인데, 부모와의 마지막 추억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수녀의 이야기다.
병명을 확실하게 언급하지 않고 숨기더라도, 환자는 병 진행에 따른 본인의 몸 상태의 변화나 병동의 환자들, 주변 분위기를 보고 눈치를 채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환자는 자신이 어떤 상태라는 걸 안다는 사실을, 또 가족은 환자가 눈치 챘다는 것을 알아도 입을 닫는다. 서로가 서로를 안타까워하며 현실을 외면하고 숨기는 것이다. 슬프게도.
시한부 환자가 겪는 5단계
그렇게 알게 된 말기 암에 대한, 본인의 몸 상태에 대한 환자의 심리적 반응은 어떨까.
“호스피스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 Ross)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5단계로 설명했어요. 맨 처음엔 부정하죠. 결과를 믿지 않고 다른 병원을 찾아가요. 그러나 같은 결과를 듣게 되지요. 그럼 ‘하필 내가 왜?’라며 자신이나 가족 또는 병원 직원, 더 나아가 신에게까지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환자가 존경과 이해와 지속적인 관심을 받으면 격한 분노가 한결 누그러집니다. 진실과 인내가 필요하죠. 그러면서 사실을, 죽음을 인지하지요. 하지만 타협하는 과정을 거쳐요. 종국에는 신과의 타협입니다. 그것이 끝나면 우울해지고 수용하는 과정을 맞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만나는 환자들은 반드시 이 순서대로 감정 상태를 보이지는 않아요. 감정의 기복이 큽니다.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에 따라 완전히 달라져요.”
그렇게 죽음을 수용하는 과정을 거친 후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어떤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은 죽음일까. 또다시 튀어나온 모호한 질문에 이 수녀는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분명하게 해줬다.
“그 전에 바르게 사셔야 해요. 잘살아야 잘 죽을 수 있는 것이지요. 흥청망청 살다가 인생 말년에 웰다잉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가족과의 불협화음이 있는 경우의 환자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아요. 마지막까지 외롭고 힘든 과정을 거치게 되더라고요. 환자 본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확실하게 의사표현을 해서 정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특별히 경제적인 문제는 남은 가족한테 떠넘기지 말고 본인이 해결하셨으면 좋겠어요. 사별의 아픔을 겪는 가족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남기는 셈이니까요.”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죽음 역시 인생의 방점이고 현실이니까. 로맨틱할 이유도, 동정만 할 일도 아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자택 임종’ 하고 싶어도 못해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의학적으로 임종 시기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단다. 때문에 그 시기가 가까워지면 환자를 임종실로 모시고 차분히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가족들과 이별할 시간도 마련한다.
“임종실을 해밀방이라고 불러요. 해밀은 비온 뒤 맑은 하늘을 뜻하는 우리말이에요. 해밀방으로 옮겨지면 환자와 가족들이 그간 하지 못했던 말,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라고 권해요. 서로가 청할 것이 있으면 청해서 용서받고, 화해하라고요. 이런 과정은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도움이 돼요. 한번은 의식이 없는 아버지(환자)와 가족 모두가 마지막 인사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환자의 의식이 살짝 돌아와, 네가 했던 말 다 들었다고 하면서 고맙다고 표현하신 거예요. 환자의 큰아드님이 감격스럽고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가셔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환자는 의식이 없어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귀는 열려서 듣고 있었던 거죠.”
그렇게 환자가 임종하면 이 수녀와 담당 간호사는 고인의 몸을 닦고 준비해뒀던 옷, 생전에 좋아했던 옷으로 갈아입힌다. 이 수녀는 이 과정을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보람 있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에 피를 토하는 환자가 있어요. 그러면 고인의 얼굴을 잘 닦아드리고 정돈된 모습으로 가족과 마지막으로 인사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드려요. 그러면 가족들이 기억하는 고인의 마지막 모습은 피 토한 흔적 없는 깨끗하고 편안한 모습이에요. 그 모습에 가족은 위로를 받아요. 편한 얼굴을 보고 편하게 돌아가셨다고 믿고 싶은 거죠.”
환자들은 생의 마지막 장소로 병원을 어떻게 생각할까. 사실 많은 환자들이 임종 장소로 집을 원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병원이 선택되는 이유는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이다.
“집에서 환자를 24시간 간호한다는 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요. 환자를 돌보는 문제도 있지만,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난 뒤에도 문제가 있어요. 사망 확인을 위한 행정적인 절차가 꽤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호자들이 겁을 먹는 경우가 많아요. 죽음의 현장이 자연사임에도 불구하고 죽음 자체가 익숙하지 않고 낯선 것이니까요. 죽음을 터부시하는 문화의 영향이 지배적인 거죠. 현재는 꼭 가정에서의 임종이 아니어도 가정형 호스피스 제도를 통해 호스피스 서비스를 가정에서 받으실 수 있어요. 올 3월부터 시범사업을 시행 중인데, 병원에서와 같은 돌봄을 가정에서 받을 수 있고 돌봄 제공자들이 연계되어 가정으로 방문합니다. 환자들이나 가족들의 반응도 좋아요.”
죽음 앞에서 가족들의 모습은 어떨까. 이 수녀는 예외 없이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수고했다. 고통 없는 좋은 데로 가라”고.
“다들 그러세요. 고생 많았다. 수고했다. 고통 없는 데로 먼저 가라고 하면서 덧붙이는 말이 있어요. 다시 만나자고. 아마 우리네 민간신앙이 바탕에 깔렸겠지만, 죽음 너머에는 여기가 아닌 어딘가가 있다고 믿는 것이죠. 그래서 이야기해요. 좋은 곳에 먼저 가 있으라고. 다시 만나자고.”
이 수녀는 마지막으로 잘 죽는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송나라의 주신중(朱新中)이 훌륭한 죽음에 대해 5멸(五滅)의 실천을 이야기했어요. 멸재(滅財), 재산을 남기지 말고 죽을 것. 멸원(滅怨), 원한을 남기지 말 것. 멸채(滅債), 남에게 빚을 남기지 말고 죽을 것. 멸정(滅情), 정분을 남기지 말고 죽을 것. 마지막으로 멸망(滅亡),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을 것이라고요. 인생 여정의 붙잡고 있기와 놓아주기를 균형 있게 한다면 하루하루 잘 죽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영화로 보는 오페라가 있다. 처음엔 실제 무대에서만 보았던 오페라를 영화 화면으로 본다는 게 탐탁지 않았다. 몇 번의 큰 무대 오페라 작품을 보았던지라 그 생생함을 어떻게 화면으로 느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 영화로 보는 오페라 두 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가진 후 그런 기우는 말끔히 사라졌다.
와 를 보았는데 두 작품 다 아는 내용이었고 실제로 보는 무대는 아니었지만 오페라 실황을 그대로 촬영한 거라 느끼는 감동은 같았다. 오히려 인터미션(중간 휴식시간) 부분에선 좀 전까지 연기하던 배우를 인터뷰하는 장면과 작품 소개 등 더 세세한 작품 배경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방금 죽을 듯 연기하던 배우가 인터미션에 웃으며 인터뷰하는 모습이 다소 생소했지만 흥미로웠다. 잠시 후 이 배우는 다시 진지한 연기로 노래를 부를 것이다.
영화는 센트럴 메가박스에서 상영하는데 이 극장에선 미리 신청하면 영화를 보는 동안 와인을 마실 수도 있다. 좌석에 작은 테이블이 있어서 음식을 먹는 사람도 있었다. 필자도 이번엔 케이크 한 조각과 보온병에 커피를 준비해서 영화를 보는 동안 우아하게 즐겼다. 오늘 작품은 다. 오페라에서 나 , 등은 잘 알려진 작품인데 는 내용을 알지 못한 채 관람하게 되어 더욱 몰입해야만 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이야기로 나이 어린 애인을 향한 질투와 애증이 적나라하다. 늙은 여왕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나이가 20세나 어린 로베르토 데브뢰 에식스 경이다.
그러나 데브뢰에게는 사랑하는 공작부인 ‘사라’가 있었다. ‘사라’는 데브뢰의 친구 노팅엄 경의 부인이다. 여왕은 그에게 반역의 죄는 용서할 수 있어도 배신하는 꼴은 못 본다며 노심초사한다. 그리고 여왕의 총애를 받는 그를 질시한 귀족들이 반역죄로 몰아 데브뢰는 처형당할 위기에 처한다.
(늙은 여왕과 연적인 젊고 아름다운 공작부인 ‘사라’)
여왕은 마지막 사인을 하지 못하며 그를 용서하려 하는데 공작부인과 사랑하는 사이라는 증거가 나오자 사형선고를 내리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인다. 친구 데브뢰를 구하려던 사라의 남편 노팅엄 경도 배신감에 분노한다. 이들의 사각 관계가 가슴이 아프다. 사랑이 뭐길래 이렇게 얽히고설키는지 모르겠다.
엘리자베스는 왕비의 자리에 오른 후 천일 만에 참수형을 맞은 앤 볼린의 딸이다. 이 이야기는 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튜더 왕가 헨리 8세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해 버림받았고 자신의 야망 때문에 수많은 사람을 죽인 ‘앤’은 자신의 딸을 여왕으로 만들기 위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지금도 마지막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엄마가 처형당하고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를 들으며 쓸쓸히 뒤돌아서던 어린 엘리자베스. 그렇게 애처롭던 아이는 여왕이 되어 영국을 잘 다스렸다고 한다. 그런데 왜 말년에 나이 어린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그런 고통을 받았는지 인생은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소프라노와 테너인 주인공들은 3시간여 동안 계속 노래를 불렀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그들 목소리의 여운은 귓가에서 오래 사라지지 않았다. 도니체티의 오페라 는 역사적 사실에서 사랑 이야기에 좀 더 초점을 맞춰 각색한 작품으로 네 명의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과 비련의 사랑 이야기를 아름다운 아리아로 가득 채웠다. 빗나간 사랑 이야기는 언제나 가슴이 저리다. 깊어가는 가을, 참으로 멋진 오페라 한 편을 영화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