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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릎 관절 수술 받은 새 어머니 병문안
- 친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재혼하셨다. 벌써 30년 전 일이다. 아버지가 유난히 주사가 심하고 권위주의적이라 우리 형제들은 멀리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아버지가 재혼하셨으니 큰 짐을 던 셈이다. 20년을 같이 사시다가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다. 새 어미니가 혼자가 되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당연히 집안 행사 때마다 찾아 갔었지만 보통 때 일부러 찾아 가자니 마땅치 않았다. 우리가 가면 이것저것 먹을 것을 만들어야 하니 움직여야 하는데 폐를 끼치는 것 같고 막상 만나봐야 서먹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본 것도 아니고 해서 기른 정도 없다. 아버지가 재혼할 무렵 우리도 바로 결혼해서 나왔기 때문에 같이 지낸 기간도 없다. 그래서 얼굴 뵙자고 일부러 간 일은 없다. 어쩌다 전화를 해도 바로 연락이 안 되었다. 집 전화는 부재중인 경우가 많고 미사 중에는 전화를 받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성당에 다니시느라 늘 바쁘다지만,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우리도 바쁘고 사실 친어머니처럼 정이 든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명절이나 제사 때 같이 보기는 하지만, 안부나 묻는 정도였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것이 편하기도 했다. “어머니!”라고 불러야 마땅한데도 막상 친어머니 생각에 그런 호칭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할머니!”라고 불렀다. 내 입장이 아닌 애들 입장으로 본 촌수이다. 새 어머니가 이번에 고령으로 서울대 병원에서 무릎 관절 수술을 받았다. 가족 밴드로 연락은 받았지만, 바쁘다 보니 병문안도 못 갔다. 보름 간이나 입원했다는데 못 간 것이다. 사실 친어머니 같았으면 당연히 갔다. 새 어머니이다 보니 등한 시 된 것이다. 그것이 못내 걸렸었는데 마침 조카 손주 돌잔치를 한다고 해서 모였다가 생각나서 새 어머니 병문안을 제의한 것이다. 서울대 병원에서 동네 병원으로 옮겨 거리도 가깝고 면회 시간제한도 없어 편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마침 운동 삼아 복도를 왔다갔다 하시다가 우리와 마주 친 것이다. 회복 단계라서 통증도 별로 없고 3~4개월 지나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수술비도 좀 드리고 했어야 한다. 그러나 처지가 나보다 훨씬 나으니 그런 부담까지 안을 필요는 없다. 무릎 외에는 건강한 편이다. 고령이지만 우리보다 더 오래 살지도 모르니 같이 늙어가는 처지이다.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특별한 인연이 되었으니 잘 모셔야 한다는 생각은 한다. 그러나 잘 모실 뾰족한 방법이 마땅치 않다. 내가 차라도 있으면 여기저기 모시고 다닐 수 있겠지만, 여건이 안 되니 마음만 있다. 어쨌든 병문안을 못가서 찜찜하던 일이 이번 일로 덜게 되니 홀가분했다. 몸은 아픈데 찾아 줄 사람이 없을 때 외로웠을 것이다. 자식들이라고 멀쩡하게 있는데 오지 않으니 원망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더위가 좀 식으면 남한산성 불당리 계곡의 닭죽집에라도 모실 생각이다. 생전에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갔던 곳이다.
- 2016-08-22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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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들어 갈수록 단순하게 살자
- 음악을 들으며 수학문제를 푸는 학생이 있습니다. 봉제공장 작업장에서 라디오를 계속 켜놓고 라디오 연속극도 듣고 뉴스도 들으며 옷감 재단도 하고 재봉틀로 박음질도 합니다. 별 실수 없이 두 가지 일을 해내는 걸 보면 젊은 사람이고 젊음이 좋기만 합니다. 나이 들면서 두 가지 일이 어렵습니다. 은행가서 카드로 돈을 찾고 통장정리하고 시계방에 가서 손목시계 전지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오겠다고 집을 나섰는데 은행가서 돈 찾고 통장정리만 하고 그냥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시계 전지 교체는 은행과 연관성이 없다가보니 잊어버립니다. 어떤 때는 통장정리 하겠다고 통장을 가방 속에 넣고 나가서 며칠째 은행 앞을 지나면서도 까마득히 잊어버립니다. 당장 통장 정리가 절박한 것이 아니니까 두뇌가 기억을 깨우쳐주지 않습니다. 물건을 쓰고 아무데나 두면 시간이 지나서 다음에 쓰려고 찾을 때 어디 둔 곳을 몰라 찾느라고 애를 먹습니다. 나이가 들면 물건은 늘 두던 제자리에 두는 Only One 저장법이 최고입니다. 라면을 끓이는 시간은 짧아서 별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빨래를 삶거나 사골 곰국을 끓이면서 지루한 시간을 활용한다고 텔레비전을 보다가는 사고 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재미있는 텔레비전에 온통 신경이 몰입 되는 순간 물이 쪼그라들고 내용물이 타는 걸 깜박합니다. 내용물이 아니라 냄비 까지 태울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평소하지 않던 것을 여러 가지 하려다 생기는 일입니다. 망하는 기업들도 대부분 문어발식으로 기업을 확장하다가 자금 경색이나 예기치 못한 일이 터져 모기업까지 문을 닫습니다. 농촌에서도 우리 부모님세대는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논농사 밭농사만 합니다. 수입이 별로여서 그렇지 빚지고 살지는 않습니다. 망하려고 해도 망할 꺼리 가 없습니다. 빚을 크게 내어 가축도 키우고 특용작물을 한다고 덤비다가 실패하면 억대의 빚을 집니다. 해오던 것을 하지 않고 부실한 준비로 큰일에 덤벼들었기 때문입니다. 짐 콜린스의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에 나오는 ‘고슴도치와 여우’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많은 것을 아는 여우와 큰 것 한 가지를 아는 고슴도치와의 게임에서 승자는 늘 고슴도치라고 합니다. 여우가 갖은 머리를 짜내 고슴도치를 공격하지만 고슴도치는 결정적인 순간 몸을 둥글게 하여 가시넝쿨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여우가 물러갈 때까지 인내합니다. 잔꾀 많은 여우가 복잡한 상황을 만들어 고슴도치를 유인하지만 고슴도치는 이것저것 고민하지 않고 한 가지만 하기 때문에 살아남는 다고 합니다. 섣불리 물로 뛰어들거나 빠른 걸음으로 도망가는 행동을 취했다면 여우의 밥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이 들수록 하루 한 가지만 Only One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등산하는 날은 등산만 해야지 등산 갖다 와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약속을 하면 곤란합니다. 약속시간에 늦어버리거나 하산 주 몇 잔에 약속자체를 잊어버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루 한건의 약속 이상은 하지 않습니다. 상대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지만 여러 사람과 여러 약속을 할 만큼 바쁜 일도 없습니다. 부모님 제삿날이라면 아무하고도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Only One 제사 생각만 합니다. 운전을 할 때는 운전만하지 라디오도 듣지 않습니다. 처음 가는 길은 인터넷으로 검색하거나 네비게이션으로 행선지 길을 머릿속으로 그려봅니다. 그러면 여유롭고 편안한 길이 됩니다. 나이 들면 많은 것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Only One 의 여유가 최고입니다.
- 2016-08-17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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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 제사 변천사
- 어렸을 적 제사는 꽤 부산했다. 필자 집이 장손으로 친척들이 다 모였었기 때문이다. 제사는 하필이면 한밤중에 지냈으므로 그냥 안 자고 기다리거나 자다가 깨우면 일어나서 제사에 참여해야 했다. 대부분 잠들었다가 한 밤중에 일어났다. 온수도 없을 때였으므로 찬 물에 세수하는 것이 싫었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쇠고기 산적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쇠고기 산적은 먹기만 하면 한 보름은 위에서 신물이 올라와 고생해야 했다. 고기도 안 먹다가 먹으면 몸에서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어머님이 먼저 돌아가셨을 때는 아들 역할을 자청하던 목사 주관으로 추도식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상을 가득 채우던 음식도 없이 간단히 추도식을 한다는 것이 보기에 안 좋다는 반응이 나왔다. 사업을 하는 둘째는 전통방식으로 해야 한다며 반발했다. 그래서 한 동안 제사를 종교별로 1부 추도식, 2부 전통식으로 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다시 전통식으로 돌아 왔다.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우리 형제들이 주관하여 집안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고조부까지 제사를 지냈으므로 설과 추석까지 하면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제사가 꽤 자주 있었다. 어머니 혼자 제사 음식을 준비하다가 점차 나이가 들자 며느리들이 도와달라고 했다. 그러나 첫째 형님은 돌아가시고 나서 형수님이 혼자 오려고 하지 않았다. 무릎 수술까지 해서 거동도 불편하니 도움도 되지 않았다. 둘째 며느리는 아이들 교육 차 늘 캐나다에 가 있고 셋째인 내 아내는 직장에 다닌다는 이유로 적어도 일박을 해야 하는 제사 음식 준비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넷째 며느리에게까지 차례가 간 것이다. 어머님이 8순이 되자 더 이상 힘들어서 집에서 제사를 모시기 곤란하다고 했다. 장자 역할을 하는 둘째가 모셔가야 하는데 시내 절에서 제사를 치르자는 제안을 했다. 남부터미널 근처의 절인데 회비만 내면 절에서 제사를 집행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각 형제마다 종교가 달라 불교식 염불에 맞춰 제사를 지내는 것이 불편했다. 둘째 형님은 사업 상 조상을 잘 모셔야 한다며 굳이 고조부 제사까지 모셔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렇게 몇 년을 하다 보니 2세들이 평일 제사에는 직장 퇴근이 늦어 참석이 어려웠다. 청년 취업난시대에 제사지낸다고 일찍 퇴근하다가 밉보이면 안 되니 오지 말라고까지 했다. 어머니도 무릎이 안 좋아서 더 이상 참석이 어렵다고 했다. 우리 형제들만 모이다 보니 제사의 원뜻인 돌아가신 분을 추념하고 그 때문에 모인 산 사람들의 친목을 도모하려는 취지가 무색해졌다. 집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면 제사를 지내는 중간에 서로 대화도 한다. 그러나 절에서는 2시간 동안 제사를 주관하는 스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하며 숨소리마저 조심해야 한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도 어려운 불경을 따라 읽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이럴 바에는 절에서 지내는 제사를 재고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차라리 제사를 우리 형제들 집에서 돌아가며 단출하게 직계 부모만 지내자고 했다. 형식적인 제사상을 차리지 말고 참석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뉴로 상을 차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2세들이 모일 수 있게 주말을 택해서 모이자고 했다. 어버이날이나 생일도 그렇게 한다. 당일이 평일이면 모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세대는 우리가 죽고 나서도 2세들에게 제사를 강요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산소도 없고 유골을 산이나 강물에 뿌리기도 한다. 시대가 바뀌어 버린 것이다. 기일에 꽃다발 들고 유골함 모신 곳에라도 와주면 고마울 정도이다.
- 2016-07-12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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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그리움을 넘어
-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 하는 사람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리움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어렸을 때의 일을 글로 한번 꼭 표현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항상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만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돌아가 볼 수 없는 정말 그리운 그 시절의 추억을 끄집어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정말 기쁜 마음이다. 유년시절 필자는 살아오면서 자신을 서울 토박이라고 생각해 왔다. 60년 인생에서 50년이 넘는 시간을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당연히 서울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는데 실은 고향은 대전이다. 필자 머리가 특별히 좋은 건 아니지만 유년 시절의 많은 일을 기억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마 서너 살 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와 유성온천 만년장호텔의 개울 위 다리에서 벚나무에 기대어 사진을 찍었던 일도 기억나고, 만년장 객실의 커다란 전면 유리창 밖으로 봄날의 벚꽃이 하나 가득 흩날려 쏟아지던 것도 생생하다. 필자는 1952년 아름다운 계절 6월의 첫날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전 근교에서 큰 포도밭을 하시는 할아버지의 장남으로 많은 동생을 보살펴야 했으므로 피아노를 좋아하셨지만 예술가의 길로 가지 못하고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셨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평양이 고향인 이북 사람이셨다. 할아버지는 경성제대를 졸업하시고 충남대학교에서 사학과 교수로 평생 후학을 길러내셨으며 명망이 두텁고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아주 인자하고 훌륭한 분이였다. 아버지는 대전 사람이지만 어머니는 서울 옥인동이 고향이고 진명여고를 다니다 대전으로 피난 가서 대전여고를 졸업했다 어머니도 역시 피아노를 전공해서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었는데 거기서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집엔 피아노가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었다. 전쟁도 있었고 다들 어려운 형편이었을 텐데 두 시림은 어떻게 피아노를 그렇게 잘 쳤는지 존경스럽다. 필자가 태어난 동네는 대전역 건너편 골목의 정동이라는 동네였다. 아주 어릴 때의 일인데도 그때 있었던 일들이 기억이 나니 필자 머리가 보통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한다. (크면서 공부는 잘 못 했지만…. 부모는 딸 셋을 낳고 더는 아이를 갖지 않으셔서 필자 집은 세 자매가 되었다. 필자 집은 대전역 건너편의 중심가에 있었고 친가는 조금 떨어진 가양동, 외가는 10km쯤 떨어진 문창동에 있었는데 아주 어릴 때부터 외가를 좋아해서 거기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곳이 그렇게 좋았던 이유는 바로 꿈과도 같은 집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제 나라로 돌아간 일본 사람의 적산가옥이라 불리던 집을 외할아버지가 장만하셨는데 그 집은 정말 꿈의 동산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집 건물이 있고 왼쪽으로는 커다란 팽나무에 할아버지께서 필자를 위해 매어주신 기다란 그네가 보였다. 필자는 언젠가는 꼭 이 집에 대해서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필력이 모자라 표현을 어찌해야 할지 항상 머릿속에 담아 두고만 있었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는 마음만 갖고 있었다. 마당에는 일본 사람 특유의 정원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수 있을 정도의 동산과 돌다리가 걸쳐진 연못이 있었다. 연못 속에 돌로 만든 거북도 멋있었고 연못 속에서 피어난 늘씬하게 쭉쭉 뻗은 수선화의 초록 이파리와 꽃도 아름다웠다. 대문에서부터 집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까지 놓인 발 디딤돌 외의 공간에는 빼곡히 알록달록 키 작은 채송화가 융단처럼 깔렸기도 했는데 외할머니께서 가꾸신 것이다. 오른쪽으로 가장 끝에 부엌이 있고 그 옆에 칸 칸으로 나누어진 커다란 미닫이 유리창이 안방 문이었다. 부엌 앞에는 아래위로 손잡이를 움직이면 언제나 콸콸 시원한 물이 쏟아지는 펌프가 있었고 안방을 지나 돌출된 현관을 가진 작은방 옆에는 석류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새빨간 석류가 딱 벌어져서 그 안에 보석 같은 알맹이가 가득 들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외가에 들어와 본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필자는 덕분에 동네의 헤로인이 될 수 있었다. 놀이할 때에도 필자는 우선권을 가질 수 있었으며 동네의 또래 아이들은 모두 필자를 떠받쳐주었기 때문에 그곳이 그렇게 좋았을 수도 있겠다. 필자는 항상 집이 부자인 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당시 처절하게 돈을 모으셨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부족함 없이 딸 셋에게 풍족하게 해 주려고 부모가 많이 노력하셨다는 걸 알았다. 필자는 어릴 땐 숫기 충만하고 남 앞에 서는 걸 좋아했었던 것 같다. 대흥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책 읽기를 잘해서 4학년 때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교장 훈화하는 단상에 올라 동화구연을 하기도 했다. 욕심 많은 어부의 아내 이야기로 어부가 잡아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부리다 망한다는 교훈적 이야기였던 것도 생각난다. 동화구연이 끝나고 과자를 사 먹으려고 교문 밖 문방구에 갔더니 주인아줌마가 “너 참 잘하더라” 라고 말씀을 해서 군것질을 못 사고 공연히 연필 한 자루만 사 들고 오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공인이 되면 그렇게 체면치레도 해야 하는가 보다. 필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유행가도 잘 불렀다. 또 어머니와 영화를 보고 온 날은 아이들 앞에서 어찌나 실감 나게 연기를 해 보였던지 극장에 갔다 온 것보다 더 재미있다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어릴 때 그런 재주가 있었다. 이렇게 신나게 살던 필자 맘에 꼭 드는 도시인 대전을 떠날 일이 생겼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서울로 이사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전이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필자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필자는 식구들이 필자만 외가에 두고 떠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지만 며칠 후 초등학교 6학년이 시작되던 해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의 첫 집은 아현동에 있었고 아현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아현동 집은 대문 앞에 대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어서 대추나무 집이라고 불렸으며 아주 예쁘고 깔끔한 한옥이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 다녔던 아현초등학교를 한 학기만 마치고 전학을 간 곳은 돈암초등학교였다. 집이 돈암동으로 이사했기 때문이었다. 돈암동 집 역시 한옥이었다. 그때로써는 더 좋은 동네로 옮긴 거지만 요즘으로 따져보면 아현동은 지금 너무나 발전한 고층빌딩 숲으로 시내 중심가가 되었으니 이사하지 않고 그냥 그 대추나무집에 살았다면 어머니, 아버지는 재테크를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후 돈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필자는 동대문 밖 창신동에 있는 동덕여중에 들어갔다. 동덕여중은 일제 강점기에 여성교육에 큰 뜻을 품으신 조동식 박사가 설립한 민족 학교라 할 수 있는데 교정이 아름답고 건물이 너무나 멋졌다. 본관 건물의 빨간 벽돌담을 초록 담쟁이가 가득 뒤덮어 고풍스러운 모습은 그림 동화책을 보는 듯 마음을 설레게 했다. 등교하던 모습도 생생하다. 허리를 졸라매는 하얀 블라우스와 군청색 스커트의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등굣길의 버스 안이 얼마나 만원이었는지 그때 학교에 다녔던 학생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터질 듯한 버스 속으로 안내양이 등으로 밀며 필자를 구겨 넣었다. 그러면 운전기사 아저씨는 일부러 차체를 흔들어 뭉쳐 있는 사람들을 고루 뒤섞어 놓았다. 버스에서 내리면 반듯하게 다림질하고 주름 잡아 허리를 매어 입은 교복이 구겨지고 삐뚤어져서 한동안은 동소문동 집에서부터 보문동, 신설동을 돌아 창신동 학교까지 걸어 다니기도 했다. 혜경, 대학생이 되다 그리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고3 때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꼭 가고 싶었던 이화여대는 아니어도 청파동 언덕의 아름다운 숙명여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과도 영문과나 불문과 아니면 국문과가 좋았지만 예비고사 성적에 맞추어 무난하게 경제학과를 지망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최고의 학과이지만 그 당시 필자가 경제학과 학생이 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뭐 어쨌든 이렇게 청춘 시대가 활짝 열렸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공부보다는 노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은 듯하다. 수많은 미팅도 있었고 친구들과 명동이나 종로 등 좋아하는 거리를 섭렵하며 다녔다. 이렇게 미팅 전성시대를 누렸지만 정작 결혼은 매우 철저한 중매로 했으니 아이러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었으나 그런 추억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 아닐까? 필자는 학교 다니는 동안 교직과목을 듣고 교생실습을 거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땄다. 친구들은 취직한다고 동분서주했지만 필자는 그때도 놀기만 했다. 교사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근무지였다. 서울에서는 임용고시가 너무나 어려워 통과하기 어렵다고들 했다. 그래서 많은 친구가 경기나 지방으로 교사가 되어 떠났다. 지방은 서울보다는 선생님 되기가 쉬웠다고 한다. 그러나 딸만 셋인 아버지는 필자를 지방에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결국 필자는 본의 아니게 빈둥빈둥 노는 신세가 되었다. 끔찍하게 딸들을 사랑한 아버지 덕분에…. 20대 후반이 됐는데도 시집을 못 가 나이가 27세가 되자 어머니는 매일 한숨을 내 쉬며 걱정했다. 대학 시절 그렇게 연애를 많이 했는데 정작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시집을 못 간 것이다. 그래서 선을 보기 시작했다. 무척 많이 보았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필자가 자타공인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많은 선을 보았는데 어느 날 부모님이 강력히 추천하는 사람을 만났다. 약대를 나왔고 시아버지는 변호사라고 했다. 어머니는 첫딸이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야 동생들도 그렇게 될 거라며 이 사람을 만나보라고 했다. 선을 봤는데 남자가 너무 못 생겨 보였다. 못 생겨서 싫다고 했더니 제 복을 제가 찬다면서 야단치셨다. 그런데 이야기해 보니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그래서 이 사람으로 결정해 버리고 말았다. 부잣집 맏며느리? 이 남자를 만나보니 인물보다는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더구나 어느 날 자기 집 얘기를 하는데 집에 수영장이 있다는 게 아닌가. 필자는 거짓말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 외국 영화에서 본 것처럼 넓고 푸른 잔디밭에 파란 물이 출렁이는 예쁜 풀장을 생각한 것이다. 실제 가서 보니 뭐, 거짓말은 아니고 정말 집안에 수영장이 있긴 했다. 집은 장충동 고급 주택가인데 어머니가 손수 지휘하셔서 아주 공들여 지은 집이었다. 필자가 상상한 그런 수영장이 있는 집은 아니었지만 멋지고 좋은 집이었다. 전면으로 볼 때 3층이었고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오른쪽으로는 분수가 나오는 정원이 있고 왼쪽으로 반지하인 1층이 있는데 그 층에 운전기사 방과 제사나 명절 때만 사용한다는 넓은 부엌이 있고 그 구석에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를 위해 네모난 풀장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 수영장을 보고 필자가 엉뚱하게 상상했던 게 생각나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결국 결혼했다. 처음엔 결혼하고 바로 분가하기로 했었는데 사정이 있었다. 시아버지가 첩이 있어 따로 살고 있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집이 너무 큰 데 식구가 없으니 몇 년 만 같이 살자고 제의했다. 이혼의 위기에서 그런데 그렇게 시댁은 빌딩도 여러 채 갖고 있고 분당이 개발되기 전에 서현동이라는 곳에 정원이 아름다운 크고 근사한 별장도 있었으며 시아버지가 아직 현역 변호사로 활동하는 등 굉장한 부자이긴 했지만 첩과 나가 계셨기 때문에 좀 복잡했다. 그렇게 멋진 집에서 5년을 살고 분가했다. 분가는 친정 옆 동네로 했다. 시댁의 가정사가 복잡한 것과 대조해서 친정은 너무나 인자하신 아버지가 있어 언제나 평화로웠다. 특히 아버지는 손자를 목숨처럼 사랑했다. 이혼의 위기 부잣집 맏며느리라고 부러움을 받고 살던 필자에게 큰일이 일어났다. 상속받은 소공동 프라자호텔 뒤편 북창동에 있던 5층 건물이 넘어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 건물은 시아버지가 죽기 직전까지 변호사 사무실로 쓰고 있었던 알토란같은 건물이었다. 위치가 좋아 건물세도 잘 나오고 필자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다고 표현하며 좋아했었는데 마음만 착한 남편이 사기에 걸려 보증을 서는 바람에 날려 버렸다. 그런 상황에 놓이자 이혼도 고려하게 되고 심각해졌는데 필자는 이혼하지 않았다. 아들을 생각해서 온전한 가정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주변에선 필자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가끔 남편을 구박하기도 하고 화풀이도 하지만 이혼 안 한 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큰 재산을 잃었지만 든든한 시댁과 친정아버지 덕분에 그리 힘들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다. 아들이 잘 자라주었고 키우는 동안 너무나도 기쁘거나 즐거운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없어진 큰 재산이 아깝긴 해도 무난하게 살아왔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주 예쁜 손녀와 돌 지난 손자, 아들, 며느리를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 행복한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큰 불행이 닥쳤다. 남편이 큰 병에 걸렸다. 정말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이다. 투병 중인 남편을 보며 한때 재산을 없앴다고 못되게 굴었던 일도 후회돼 마음이 아팠다. 이런 상황이 되어 보니 유행가 가사가 다 진리로 다가온다. 있을 때 잘하라는 유치한 말이 정말 가슴에 와 닿고 누구에게나 해 주고 싶은 말이다.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소풍 나온 이 한 세상 잘 살았으며 이별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을 갖자고 다짐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 2016-06-30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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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을 맞으며] 6월엔 더 특별한 동작 충효길
- 집 밖으로 나서면 초록빛 싱그러움을 흠뻑 느낄 수 있는 6월. 그래서 이 계절에 숲길을 걷는 건 언제, 어디서나 즐겁다. 어딜 걷는다 해도 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연의 맛을 느낄 수 있겠지만 6월에 걸으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길이 있다. 나라를 위해 충의를 다했던 사람들을 추모하면서 깊은 산 속 정취까지 느낄 수 있는 곳, 국립현충원과 서달산을 잇는 동작충효길 1코스, 2코스가 바로 그 길이다. 국립현충원 하면 딱딱하게 느껴지지만 정문을 들어서면 묘역을 넓게 감싸고 있는 산 위 풍경이 아름답다. 50년 동안이나 산림을 일반에 개방하지 않았던 덕에 수풀이 우거지고 공기가 신선하다. 국립현충원은 한국전쟁 전사자는 물론 국가원수, 애국지사, 국가유공자 등 국가를 위한 공로가 현저한 자들이 안장된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단종에게 충절을 바친 사육신의 제사를 모시던 ‘육신사’가 있던 곳으로 전해지니 이곳은 충의를 갖고 나라를 위했던 사람들의 유훈을 들어볼 수 있는 뜻깊은 공간이다. 전직 대통령 묘역에서부터 장군 묘역, 일반병사 묘역을 둘러본 뒤 현충원 안의 연못, 공작지에서 호국 영령들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많은 사람이 숲 속 벤치에 앉아 있으나 새 소리만 무성할 누구의 목소리도 방해하지 않아 사색하기에도 참 좋다. 국립현충원을 돌아보고 상도출입문으로 나오면 서달산 숲길과 바로 연결된다. 편안하게 만들어진 숲 속 오솔길을 걷다 보면 양손을 힘차게 흔들며 걷는 사람들과, 삼삼오오 산책 나온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서달산은 해발 179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숲이 무성하다.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만나는 풍경이 다채로워 걷는 재미가 있다. 이 길의 자랑은 곧게 뻗은 잣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는 잣나무 숲길이다. 먼 곳에 있는 자연휴양림에라도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잣나무가 우거져 있다. 거기서 잠시 쉬며 잣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를 마시면 가슴 속까지 시원해진다. 몸이 불편한 사람이나 노약자들이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무장애길도 조성돼 있다. 총 463m 목재산책길로 만들어진 이 길은 경사로 8% 미만에 소나무, 잣나무, 산벚나무 등이 심어져 삼림욕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는 산 중턱에 만들어진 녹색쉼터는 걷기 불편한 사람뿐 아니라 잠시 쉬며 산속 공기를 마시려는 사람들에게도 인기만점이다. 이 길이 좋은 점은 간편한 복장으로 생수 한 병 손에 들고 손쉽게 걸을 수 있다는 점이다. 동작충효길 1코스 고구동산길은 지하철 9호선 노들역에서 시작할 수 있고, 2코스 현충원길부터 걷고 싶으면 지하철 4,9호선 동작역에서 출발하면 된다. 6월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호국보훈의 달’이다. 우리의 평화로운 삶 뒤에는 순국선열들의 희생이 있음을 기억하기에, 6월엔 충의 기개로 가득 찬 현충원에서 서달산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걸으며 나라를 위해 애쓴 사람들을 기억해 보면 어떨까?
- 2016-05-09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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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한과문화박물관 김규흔 관장
- 10여년 전 여름, 한 사내가 한과 공장의 사무실 안에서 비닐 봉투에 든 상추 잎사귀 수십 개를 늘어놓고 살펴보고 있었다. 공장 인부들은 기이한 그의 행동이 이상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내가 사장인 탓에 모두 바라만 볼 뿐이었다. 매번 그런 식이었다. 그의 열정은 남들과는 다른 결과를 불러왔고, 그래서 그는 한과에 미친 한과광인(韓菓狂人)으로 불리기도 했다. 나라에서는 그런 그를 명인(名人)으로 부르기도 했고, 한과명장(韓菓名匠)이란 칭호도 부여했다. 한과문화박물관 김규흔(金圭欣·60) 관장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자취방 집주인의 강권에 나간 맞선자리. 찻집에서 만난 상대는 체구가 자그마한 아가씨였다. 그런 그녀가 신문지에 싼 무엇을 그에게 수줍게 내밀었다. 약과였다. 서울 월곡동에서 한과 공장을 하던 부모 몰래 싸온 것이었다. 처음부터 불타오른 사랑은 아니었지만, 만날 때마다 내미는 약과 뭉치는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게 하는 용매 역할을 했다. 경상북도 영덕의, 한과가 귀했던 작은 바닷가 마을 출신의 청년 김규흔에게 약과는 무척 달콤한 것이었다. 매달 나오는 월급을 아끼려고 크림빵 하나에도 큰맘 먹어야 했던 그에게 그 약과는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김규흔 관장은 어릴적 한과와의 추억을 이렇게 기억한다. “어릴 적 한과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집안에 제사가 있거나 명절 때에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어서, 시장통에서 산 약과나 넓적한 한과, 빨간 옥춘 사탕이 전부였죠. 때때로 배가 아플때 할머니께서 약이라며 과자를 물려 주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한과가 발효식품이라서 그 장점을 체득해서 아셨던 것 같아요.” 한과공장을 하던 처가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그의 운명 속에 한과가 등장하게 만들었다. “공장을 맡아 운영하던 처남이 군대를 가게 되자, 처가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죠. 그래서 다니던 제약 유통회사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을 해 보니, 한과가 사업성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친 듯이 다른 분야에서 일을 했던 제 눈에 한과 만드는 사람들은 너무 대충 일하는 것 같았어요. 제 계산으로는 검은깨를 하루에 2~3가마는 볶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걸리 마시랴, 담배 태우느라 겨우 1가마만 볶는 식이었죠. 그런데도 대목을 지나면 다들 목돈을 만지던 시기였어요.” 그렇게 한과 시장에 눈을 떠가던 즈음, 처남이 제대해 그의 설 자리가 줄어들었다. 3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셈이 밝았던 그에겐 충분한 준비시간이었다. 그래서 아내와 직원 한 명만을 데리고 월곡동에서 조금 떨어진 월계동에 공장을 차렸다. 성공한 회사를 보니 모두 궁(宮)이나 왕(王)자가 들어간다는 것에 착안에 회사 이름은 ‘신궁(新宮)’으로 지었다. 1981년의 일이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거래처를 확보하는 일이었어요. 다들 큰 공장 눈밖에 날까봐 소규모 업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죠. 오랫동안 어렵게 안면을 익히고, 신용을 쌓은 후에야 좌판 아래에 한 두 박스를 숨겨두고 몰래 팔아주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중부시장 같은 큰 시장 대신 월계동, 이문동, 장위동, 석관동을 돌면서 구멍가게에 외상 거래를 했죠. 자전거에 박스를 싣고 직접 돌았습니다.” 그의 성공의 원동력에는 이런 성실함과 함께 남과 달라야 한다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남들과 다르게 만들어야 팔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죠. 시장을 휘어잡던 큰 회사들은 늘 만들던 대로 만들어도 쉽게 팔아치울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요. 보통은 국화 모양으로 만들던 것을 코스모스, 연꽃, 해바라기, 무궁화 무늬로 바꾸어 만들었습니다. 약과판(藥果板)의 도안부터 제작까지 제 손으로 직접 했습니다.” 제대로 된 디자인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던 청년사업가였지만, 그에게는 사방 천지가 교실이고 교과서였다. 외화와 함께 외국 문물이 폭발적으로 밀려들어오던 시절, 거리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낮에는 배달하는 자전거에서, 늦은 밤 귀가길 버스 차창 너머로 만나는 세상은 한과 생각으로 가득찬 그에게 다양한 도형과 화려한 색상의 영감을 불어넣었다. 이런 노력이라도 알아본 것일까. 하늘이 도와줬다. 1984년 한과시장의 대목인 추석을 앞두고 마포구 망원동에 물난리가 났다. 그 주변에 밀집돼 있던 한과들이 한강물에 쓸려 내려가 버리자, 시장에 물량이 동이 났다. 덕분에 한과 시장 큰손들에게 외면받던 신궁전통한과가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고, 그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들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상인들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가장 신경썼던 것은 신용이었습니다. 매년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 역시 일종의 신용이었죠. 상인들이 신제품을 기대하도록 만들고, 거래처들이 다른 상인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는 무기를 쥐어주려 노력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의 흔적은 그가 2008년 건립한 한과문화박물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무로 직접 만들던 약과틀을 주조방식을 활용해 금속으로 대체하고, 대량 생산을 위해 원형 틀을 만들었던 기록들은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한과문화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것들은 한과의 역사이자 그의 역사인 셈이다. 앞서 언급한 ‘상추 실험’도 답습을 거부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그의 성향을 잘 나타내는 일화 중 하나다. “보통 한과 공장들은 여름에 문을 닫았어요. 1년 매출의 90퍼센트 정도는 설과 추석에 모두 팔려나가기도 하고, 매출이 적은 여름에 한과를 만들어봤자 상해서 돌아오는 것들을 반품받기 바빴으니 아예 생산 자체를 거절한 것이죠. 거래처용으로 돌리는 스티커에 여름에는 만들지 않는다는 문구를 박아 넣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여름에도 한과를 만들고 유통시키고 싶어, 포장부터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다양한 포장지를 놓고 가장 빨리 시드는 상추로 실험을 했던 것이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핵심은 ‘산소투과율’에 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제대로 알았지만, 모든 공장들이 사용하는 포장재질은 한과를 쉽게 상하게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했다. 그리고 유통기간 6개월이라는 혁신적인 한과를 시장에 내놓았다. 이후에는 한국식품연구원에 연구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쌀겨에서 추출한 ‘감마오리자놀’을 한과에 첨가해 기름의 산화를 막고, 신선도를 유지하는 기술을 특허로 인정받기도 했다. 신궁전통한과가 궤도에 오르면서 그가 찾은 곳은 대학이었다. 1995년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시작으로 11개 대학원을 쉬지 않고 다녔다. “대학원서 유통의 변화와 혁신을 미리 체험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통시장이 쇠락하고, 편의점이나 백화점, 대형마트 중심의 유통체계가 도입될 것이라는 것을 배워 대비할 수 있었죠. 늘 우리 것을 따라한 미투상품(모방한 유사제품)으로 괴롭히던 한과공장 사장이 자기네 제품을 유통시켜 달라고 제게 사정할 때 통쾌하기도 하면서,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2013년에는 대학 학부에 대한 미련 때문에 신흥대학 호텔조리학과에 입학해 작년 2월 졸업했다. 아들보다도 어린 학생들과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었다. 웬만한 교수보다도 많은 나이에 사회적으로 알려진 터라 손가락질이 무서워 대충대충 할 수 없었다. 이 과정은 한과의 세계화를 위한 과학적 지식과 계량화 등의 바탕이 됐다. 김규흔 관장의 한과에 대한 사랑의 집약체는 역시 한과문화박물관이다. 포천 산정호수 인근에 지어진 이 박물관을 한 번 둘러보면 그의 한과에 대한 철학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박물관에 체험을 위한 공간이 많은 것이 인상적이라 하니 반색하며 설명한다. “맞습니다. 경험을 통해 아이들이 한과를 체득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어릴적 입맛이 평생을 간다고 믿기 때문에, 아이들이 한과를 외면하면 시장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때문에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전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 볼 수도 있고, 맛볼 수도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박물관을 바탕으로 한과 전문가 교육과정을 만들어 인력 배출에도 앞장섰다. 한과 만드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시장이 커지고, 활성화된다는 생각에서다. “태권도가 세계적 스포츠가 된 것도 결국 태권도 선수들이 세계 각지에서 교육을 통해 그 정신을 보급했기 때문이죠. 한과도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과 전문가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7년 동안 300명의 전문가를 배출했습니다. 또 박물관 주변에 군부대가 많아 간부 가족을 대상으로 한과 교육을 진행했는데, 한미연합사령부로 전출 간 장교를 통해 미군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까지 진행한 적도 있습니다. 사람을 통해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맞아 떨어진 셈입니다.” 그가 한과를 만들어 오며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도 2000년 서울에서 열린 ASEM(아시아-유럽 정상회의)에서 세계 정상들에게 그의 한과를 맛보게 한 것이다. 이런 세계화의 끝에는 한과의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있다. 한과를 단순한 음식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그의 뜻이 담겨 있다. “한과는 우리 민족의 얼이 담겨 있는 음식입니다. 차례와 제사, 명절 때마다, 우리네 희로애락(喜怒哀樂)과 늘 함께하면서 우리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죠. 조선시대에는 한과의 종류가 254종이나 됐습니다. 그중 지금 저희가 재현하는 것이 160가지 정도 되고요. 이런 풍성한 문화를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작년 한과협회를 사단법인으로 설립했고, 올해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해 나갈 계획입니다.” 김 관장의 말을 듣다보니 멋진 외국 호텔의 디저트로, 세계 과자들이 모여든다는 일본의 답례품(미야게, みやげ) 시장에서 우리의 한과가 자리 잡을 날이 머지않았음을 기대하게 된다.
- 2016-02-0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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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들의 요리 PART3]요리는 삶의 질을 바꾼다
- >>글 박찬일 로칸다 몽로(夢路) 셰프 텔레비전을 틀면 요리사가 나오고, 백종원이 요리를 한다. 요리사를 넘어 ‘셰프테이너’라는 말이 나오고, 광고까지 점령했다. ‘냉장고를 부탁해’와 백종원이 나오는 여러 프로그램이 요리사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요리사가 대중 매체의 총아가 된 셈이다(심지어 글 쓰고 작은 식당하는 내게도 출연 섭외가 빗발쳐서, 거절하느라 진땀을 뺀다). 백종원은 이른바 전문 셰프들과 다른 길을 걸어서 오히려 가치가 더 높아지고 있다. 전문 요리사들이 엔터테이너로서의 재질을 뽐내면서 ‘특별한’ 요리들로 눈 호강을 시켜주는 반면, 백씨는 누구나 먹는 평범한 요리들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그가 나오는 프로그램 이름이 ‘집밥 백선생’이라는 건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는 갑자기 뜬 스타가 아니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요리 책을 내고 자신의 브랜드를 여럿 운영하고 있는 사업가이기도 하다. 그가 뜨고나서 그동안 펴냈던 책도 같이 뜨고 있다. 여담이지만, 별 어려움 없이 몇 해 전에 그의 책을 펴낸 출판사들이 대박을 맞았다. 그가 이렇게 뜰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남자 요리 시대 개막 원래 대중매체의 요리는 여자들의 몫이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궁중요리 전문가 황혜성 선생과 그 딸들인 한복려, 한복선 등은 물론이고 왕준련, 한정혜, 나중에는 이종애선생 등이 텔레비전과 여성지 요리 면을 담당했다.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여성잡지들이 창간되고, 텔레비전에서도 ‘오늘의 요리’ 같은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요리는 현모양처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고,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들 학교 보낸 후, 저녁이 되기 전에 여자들의 요리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이후 이 프로그램들은 아침 시간으로 옮겨 더욱 번창했다. 고도 경제성장기에 아내들도 집에서 요리로 국가경제에 기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주부클럽이니 대한부인회의 입김이 커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들어 마이카 시대가 개막되고, 사람들은 ‘맛집’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대중매체는 요리 선생보다 맛있는 식당을 소개하는 데 더 열을 올렸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그 맛집의 요리를 담당하는 ‘셰프’의 시대가 도래한다. 이른바 ‘글로벌시대’를 맞아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셰프들이 대중 스타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바로 에드워드 권 등이 그 시대의 인물이다. 요리 선생 중에 남자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독특한 목소리의 이정섭, 쉬운 한식 요리로 인기를 끌었던 김하진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남자 요리 시대’의 개막을 알린다기보다는 성적 역할이 배제된, 그저 여자 요리 시대의 보조였다. 이정섭 선생의 ‘여성적인 캐릭터’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이제 진짜 남자들의 요리 시대가 개막되었다고 한다. 남자들이 집에서 요리를 한다. 백종원 등이 그 희망(?)을 북돋웠다. 주 5일 근무, 핵가족의 심화가 이를 부추겼다. 쉬는 날이 늘어나니 남자들이 집에서 무언가를 하게 되었고, 요리도 그 선택지의 하나가 되었다. 서양남자들처럼 작업실을 갖고 무언가를 만들거나 잔디를 깎으며 주말에 아이들과 야구를 할 수 없는 한국 남자들에게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수도 있다. 아파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이들 유모차를 끌거나 마트에 가거나 요리를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핵가족의 심화도 영향을 끼쳤다. 부모를 모시지 않고 사는 남자들은 부담없이 부엌에서 앞치마를 둘렀다. 요리 잘하는 남자들을 조망하는 여러 담론도 생성되었다. 요리가 단순히 먹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소통의 도구로 등장했다. 요리 잘하는 남자들이 섹시하다는 그 지긋지긋한 섹시 수사도 등장했다. 이제 남자들은 멋지게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자동차를 운전해서 성적 매력을 풍겨야 하고, 집에 가서는 오븐부터 켜서 특별요리를 만들어야 하고, 자신의 블로그는 제대로 된 맛집 리뷰를 실어야 하며, 요리사 친구도 하나 사귀어야 하며(프랑스식, 한식, 일식 등 장르별로 하나씩 있으면 더 좋고), 영양사처럼 칼로리 계산도 해야 한다. 사실, 요섹남(요리하는 남자가 섹시하다)은 결국 남자들이나 여자들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을 만들어서 소비하는 걸 좋아하는 대중매체가 먼저 떠들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이제 무엇이든 다 잘하면서 요리도 잘하기를 바라는 대상이 된 것이라면 무리한 주장일까. 결과물에 대한 반응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사회적 담론이 생성되면서 남자들도 요리를 해야 한다는 불안감과 부담이 노출되었다. 그런데 요리 자체의 흥미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도 만들어지고 있다. 누군가 내게 “요리의 장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지체없이 대꾸한다. “한 시간 안에 어떤 일의 결말이 생기고,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다. 재료를 준비하고, 그것을 요리해서 어떤 놀라운 결과가 나오는 데 한 시간밖에 안 걸리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나. 게다가 그 비용도 싸며, 결과물에 대한 반응도 뜨겁다. 바로 먹어서 미각을 충족시키며 혈당도 올려주기 때문이다. 역사 이전에 원래 남자들은 사냥을 했고, 여자들이 요리했다. 그 후에는 직업적인 선택으로 남자들이 요리를 했으며, 요리를 베푸는 것도 남자들의 권력에 봉사했다(여전히 오래된 가문의 제사에서 제수 장만은 반드시 남자들이 하는 것은 확실한 그 증거다). 이제는 남자들이 흥미와 스스로의 요구로 요리를 한다. 예를 들어, 가루로 된 어떤 물질(밀가루)이 물리(부푸는 것). 화학(겉이 익어서 구수해지는 것), 생물(이스트의 작용)의 통합적인 반응으로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남자들의 놀이로서 엄청난 반응을 얻어낸다. 바로 빵 만들기 말이다. 이런 세상에서 특히 중년 남자들이 요리에 빠지는 것은 더욱 주목할 현상이다. 가부장적인 세대인 그들이 접시를 만지고 불을 다루는 것은 신기할 정도다. 아마도, 이것은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징조인 듯도 하다. 100세 시대 중년 남자들은 이제 놀이를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길고, 사회적 활동기는 짧다. 요리를 한다는 것은, 그럼으로써 삶의 질을 바꾸는 중년 남자들의 열망으로 보이기도 한다. >> 박찬일 필자는 서교동 ‘로칸다 몽로(夢路)’ 셰프이면서 문학과지성사 편집장이다. ‘글 쓰는 셰프’ 박찬일 편집장은 요리사이자 음식에 관한 칼럼을 쓴다. 훤칠한 외모를 하고도, 그는 신문과 잡지에 글을 쓴다. 저자로 이름을 올린 책도 20여 권에 달한다. 그의 글에는 항상 음식과 문화, 역사, 정치 이야기가 버무려져 있다. 등의 책을 썼다.
- 2015-10-02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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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테마②] 이번 추석엔 가족묘지를 이야기해 보자
- 추석은 가족이 모여 수확의 풍족함에 대해 자연과 조상에게 감사하는 날이다. 가족이 모이면 으레 가족 대소사가 화젯거리가 된다. 그중 묘지도 단골 주제다. 묘지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은 조상과 후손을 연결시켜 줌으로써 그 사회가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전승시켜 사회의 지속성과 사회적 통합, 연대를 담보하는 것이다. 그래서 묘지는 우리 가족제도를 구성하고 뒷받침하는 근간이자 뿌리다. 우리 사회가 서구 사회에 비해 비교적 높은 사회적 점성(粘性)과 유대를 유지하는 것도 이러한 묘지제도의 순기능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묘지가 가지는 이러한 순기능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려면 묘지가 다양하고 복잡하게 살아가는 현대의 가족들을 보다 쉽게 모이게 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예전의 분묘(산소)처럼 이 산저 산,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 후손들이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더더욱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후손들의 수도 급격히 줄어들 뿐 아니라 묘지를 돌볼 후손들도 나이가 많아 일일이 찾아가 벌초하고 때맞추어 성묘하고 관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결론하여 자연장지를 조성해 한 곳에 모아 쉽게 찾아가고 관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옛것만 고수하다가는 전통 그 자체는 물론 거기에 담긴 소중한 문화자산의 가치 자체가 멸실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묘지는 조상이나 부모뿐 아니라 자신과 자녀들의 사후를 어떻게 보장할 것이냐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로 이는 곧 삶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묘지를 어떻게 마련하고 구성할 것이냐는 가족들이 모일 때 협의해 결정하는 것이 좋다. 중요한 건 세상이 변했다는 것이다. 세대 구성이나 가족 구성, 우리 사회의 유동성을 고려하면 단연 묘지를 모아야 한다. 매장이든 화장한 후 봉안당에 모시든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 가족들이 찾아뵙기가 수월치 않다. 가족묘원이든, 종중묘원이든 일단 한곳으로 모아야 한다. 그래야 할 이유는 많다. 우선 예전처럼 대가족이 아닌 핵가족이고 그것도 일인가족, 부부가족 등 비전형적 가구들이 폭증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 합계 출산율은 1.2 내외다. 남녀 둘이 결혼해 겨우 1.2명의 아이를 낳는다는 이야기다. 아들로 내려가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남자계승은 확률적으로도 3대를 넘기기 쉽지 않다. 여자가 계승한다 해도 4~5대를 넘기기는 쉽지 않다. 결국 3~5대만 지나면 묘지를 돌볼 후손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후손들로부터 그나마 절이라도 받으려면 조상 묘를 모아야 하고 부모나 자신도 그런 가족묘원에 사후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선산이나 시골, 고향에 가족이나 종중 묘원을 마련하기가 여의치 않으면 집 가까운 곳의 봉안당이나 자연장지 등에 선대부터 자신, 자녀들이 들어갈 묘원을 마련하는 것이 좋다. 또 고려할 게 매장할 것이냐, 화장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문제다. 굳이 시대변화를 말하지 않더라도 지금은 화장이 대세다. 매장이냐 화장이냐는 가치, 선호의 문제라기보다는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의 문제다. 비교적 적은 인구가 전국에 널리 골고루 퍼져 살던 시대에는 매장이 대세였다. 가까운 곳에 매장 분묘를 구하기도 쉬웠고 비용도 많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인구가 도시에 모여 살기에 도시 근교에 매장할 땅을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러니 이젠 매장보다는 화장이 대세가 된 것이다. 거기다 화장이 가지는 장점도 많다. 보다 신속하게 자연으로 회귀할 수 있는 방법이고 비용도 저렴하며 위생적이다. 화장한다 해도 화장 유골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도 중요하다. 예전엔 주로 분묘 형태의 봉안묘를 만들어 모시는 분들이 많았으나 이젠 이것도 자연장이 대세다. 자연장(自然葬)은 말 그대로 자연훼손을 최소화하며 고인을 신속히 자연으로 되돌리는 장법이다. 선산에 30~40평의 가족 자연장지를 만들어 나무와 꽃, 잔디를 심고 조상을 모시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조상 묘들을 한곳으로 모을 수 있음은 물론, 자신과 자녀들의 묘지도 마련된다. 서양의 녹림장(Greenwood Burial)과 우리의 전통 매장을 적절하게 조합한 장법이다. 가족묘원을 조성하는 게 어려워 보이지만 맘만 먹으면 의외로 간단하다. 선산이나 고향에 전답이 있다면, 모퉁이에 30~40평 정도를 할애해 잔디와 나무를 심으면 된다. 가족 공원을 꾸민다고 생각하면 된다. 여기저기 있는 산소를 파묘해 화장한 다음 옮겨와 나무 밑이나 잔디밭에 묻으면 그만이다. 일례로 전통 대가였던 경주최씨 문중은 인덕원이란 종중묘원을 조성해 운영하고 있다. 후손들이 명절이나 제사에 찾아와 종중묘원에서 제를 올리고 성묘를 한다. 일부 후손들은 종중묘원으로 소풍을 오기도 한다. 사시사철 풍광도 즐기고 후손들에게 예를 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잔디밭에서 뛰어 놀고 어른들은 돗자리를 깔고 담소를 나누며 조상을 추억하기도 한다. 이렇게 공원 같은 가족, 종중묘원을 조성해 놓으면 향후 묘지 걱정도 없게 되고 후손들이 더 자주 찾게 되며 묘원에서 가족이나 다른 일가도 만나게 돼 가족 간, 친족 간 우애도 돈독해진다. 요즘은 아파트 시대라 작은 공간에 가족 이외의 친족을 초대하기는 쉽지 않다. 가족 묘원을 만들면 낮에 묘원에서 약속해 같이 식사하고 헤어지면 된다. 요즘 라이프스타일에도 딱 맞는 게 바로 가족, 종중 묘원이다. 잔디를 심고 온갖 꽃나무로 추모목(追慕木)을 심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가족자연장지가 여의치 않다면 집단화된 자연장 묘원, 이를테면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하늘숲추모공원 같은 곳에 자연장 해도 된다. 묘지는 단순히 고인을 처리하는 장소가 아니다. 묘지는 시대변화에 맞추어 당대인의 생활상과 가치를 담아내고 상징적으로 극화시켜 사회 구성원의 연대를 강화해주는 문화적 제도다. 현재를 사는 후손들이 선대를 방문해 소통하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공간이다. 가족묘지, 이번 추석에 가족들이 모이면 진지하게 토론해 보자.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모두가 관련되는 공통주제로 가족 간 끈끈함과 정을 나눌 수 있는 소재이자 기회이다. △ 강동구(姜東求) 생사의례문화연구원장 (재)한국장례문화진흥원 이사, 서울대 사회학과 졸, 동국대 대학원 졸(행정학박사)전 동국대 불교대학원 생사의례학과 교수
- 2015-09-21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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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 변호사의 상속 가이드] 기여분(寄與分)
- 아들도 딸도 있는 A씨가 사망했다. 자녀들 중에서는 둘째 딸 B씨가 가장 자주 A씨를 찾았다. 지방 살림을 정리하고 서울로 와 아버지를 부양하면서 살기도 했다. B씨는 다른 형제들보다 더 많은 상속분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형제자매 중 유일하게 생활비와 병원비를 보탠 자식이나 아버지를 모시고 생활하며 제사를 모신 자식, 주말과 휴일에 찾아와 돌본 자식, 부모의 치료비와 약값을 부담한 자식은 그러하지 않은 다른 자식보다 더 많은 상속분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위의 예와 같은 경우, 즉 공동상속인 중에서 상당한 기간 동거, 간호, 그 밖의 방법으로 피상속인을 특별히 부양하거나 피상속인 재산의 유지 또는 증가에 특별히 기여한 자에게 다른 상속인보다 더 많은 재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기여분(寄與分)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부모의 생활이나 투병, 재산 형성에 기여한 자식은 다른 상속인보다 상속분이 더 인정돼야 한다. 그런데도 법원은 얼마 전까지도 기여분을 잘 인정하지 않았다. 2013년 이래 기여분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오고 있다. 위에서 본 B씨의 경우 상당한 기여분을 인정받아 A씨의 대부분의 재산을 상속받았고, 그 외 사례에서도 기여분이 인정되고 있다. 기여분 인정에 대한 변화는 부모 봉양이나 부양이 당연한 의무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조금은 안타까운 부분도 있다. 그러면 기여분은 어떻게 산정될까? 기여분의 금액이나 비율이 특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기여의 시기, 방법, 정도와 상속재산의 액 기타의 사정을 참작한다. 기여분이 인정되는 경우 상속재산은 기여분을 제외한 재산이된다. 상속인이 피상속인의 자녀로 C씨, D씨 2명이며 상속 개시 당시 상속재산이 1억 5000만원, C씨의 기여분이 3000만원이라면 기여분을 공제한 1억 2000만원이 상속재산이 된다. 따라서 위 상속재산 1억 2000만원을 2분의 1하여 각각 6000만 원을 상속받게 되어 C씨는 기여분과 상속재산을 합한 9000만원, D씨는 6000만원을 상속받게 된다. 상속인으로서 기여분을 많이 받는 경우 다른 상속인의 유류분을 침해하지 않는지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상속인이 모두 피상속인의 자녀로 E, F, G 3명이고, 상속재산 가액이 1억 5000만원인데 E에게 1억 2000만원의 기여분이 인정된 경우 F, G 각각의 유류분(법정상속분 2분의 1에 해당하는 2500만원)을 침해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기여분은 유류분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기여분의 가액이 상속재산의 상당한 금액에 해당되더라도 유류분을 침해하지 않는다. 단지 기여분의 가액을 결정할 때 유류분 역시 고려의 대상이 될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기여분은 향후 부모를 부양하는 자녀들의 지위를 인정해 주는 제도로 정착될 개연성이 농후하다. 과거에는 부모에 대한 봉양이나 부양을 당연한 의무로 인식하였으나 현대 사회에서는 그러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강제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도록 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부모 부양의 의무를 이행하는 자녀를 다른 자녀들과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이 법적으로 타당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인 만큼 법원이 부양 의무를 이행하는 상속인에게 상당한 기여분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2015-06-02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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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와 나 - PART3] ‘키즈 마스터’ 백종화의 좋은 조부모 되기 지침서
- 손자녀들을 보면 괜히 미소가 나온다. 보고 있으면 맛있는 것 입에 넣어주고 싶고, 좋은 옷 입히고 싶은 것이 조부모 마음 아닌가. 그런데 가끔은 자녀들이 아이를 잘못 키우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우리 때와 다른 육아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다. 좋은 조부모가 되는 방법, 자녀·사위·며느리와 부딪히지 않고 육아 잘하는 비결을 SBS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의 자문위원인 백종화 아동청소년심리상담센터 소장이 알려준다. ◇손자녀에게 다가가려면 자녀를 노크하라 좋은 조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자녀라는 문을 두드려 손자녀에게 다가가는 것이 좋다. 손주 교육에는 방관과 관심의 균형을 적절히 맞추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손주를 키우는 철학이나 양육 방법을 듣고 존중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자녀와 상충됐을 때 마찰이 생기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손자녀가 불안함을 느끼고 혼란스러워 할 수 있다. 그러면 아이가 신경질적인 기질로 변할 수 있다. 또한 손자녀에게 주는 지나친 관심은 손자녀들이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아이가 아이답게 크지 못하고 조부모의 눈치를 보며 조부모가 원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이것이 손자녀들이 느끼는 부담감이다. 부담감을 가진 손자녀들은 성장할수록 조부모를 만나는 것을 꺼리게 된다. 자녀의 양육 방식과 철학을 이해하고 그런 방식을 존중할 때 손자녀들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존중 받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아 존중이라는 덕목을 체득할 수 있다. 거기에 자녀들도 부모들이 자신들의 방식을 존중해 준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껴 더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자녀는 손자녀에게 다가가기 위한 필수 관문이다. 자녀의 방식과 의견을 얼마나 존중해주느냐에 따라 손자녀의 행동도 달라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가족문화를 만들 때는 추진력 있게 이끌어라 조부모에서 자녀, 손자녀로 이어지는 3대 가족 문화를 만들 때는 조부모의 역할이 커야 한다. 이때는 가족의 큰 어른으로서 목소리가 커도 괜찮다. 어떤 가족이 그 가정만의 뚜렷한 문화가 있다는 것은 10세 이하 손자녀의 정서 안정에 큰 도움을 준다. 가족 문화는 제사나 생일 등의 대소사도 있지만, 한 달에 한 번 함께 밥 먹기, 3개월에 한 번 할머니 집에서 자기 등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도 좋다. 특히, 조부모와 함께 하루를 공유한 후 잠을 같이 자는 것이 좋다. 하루를 함께 공유하면 아이는 가족의 틀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나중에 사고를 넓히는 데 영향을 미친다. 백종화 소장은 “삶을 섞어라. 자녀·손자녀와 지지고 볶아라”라고 조언한다. 손자녀들이 부모에게서 떨어져 조부모와 삶을 섞는 것은 다양한 환경을 체험해 다양한 상황에서 적응력을 높이는 데 이롭다. 그래서 백 소장은 1년에 두 차례 손자녀와 함께 잠자리를 할 것을 추천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손자녀들과 함께 손잡고 하루만 자연체험을 하고 같이 잠자자. 조부모들이 자연에서 자랐던 경험과 그 느낌, 분위기는 아이들의 감성을 풍부하게 해 줄 수 있다. 여행은 삶을 섞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문화 중 하나다. 자녀·손자녀와 함께 정례적인 여행를 가는 것도 좋다. 격년으로 한 번씩 여행을 같이 하거나, 자녀·손자녀와의 5박 6일 여행 중 2박 3일을 함께 여행해 보는 것은 어떨까. 거기에 가족의 화목을 도모하는 가족 단체티까지 맞춰 입고 간다면 금상첨화다. ◇손자녀들의 느티나무, 넓은 땅이 되라 조부모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조부모의 역할은 부모의 역할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부모는 가정의 느티나무와 넓은 땅이 돼 손자녀들이 편안하고, 부담스럽지 않게 뛰어 놀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또한 손자녀들의 부모가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주는 것이다. 예컨대 손자녀를 정서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것은 조부모의 역할이 부모의 그것보다 훨씬 크다. 부모들은 사회생활과 육아 스트레스에 찌들어 여유를 갖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역할은 삶의 경험이 많은 조부모의 것이다. 백종화 소장은 “손자녀들의 기억 속에 조부모는 여유있고, 인자하고 편안한 기억으로 남는 것이 중요하다. 손자녀는 중학생이 되면 곁에서 떠나가는 것도 인정해야 하고, 그들이 떠나갔을 때를 섭섭해 하기보다 이후에도 좋은 기억 속에 조부모가 있는 곳을 ‘쉼터’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자녀의 양육방식이 마음에 안 들 때 자녀의 양육방식을 100%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금물이다. 세대가 세대인 만큼 30%밖에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녀를 키우면서 경험한 좋은 방법이 있더라도 그것을 손자녀에게 강요하다보면 손자녀들이 조부모를 만나기 꺼려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때로는 손자녀에게서 느낀 섭섭함이 자녀와의 마찰로 번지기도 한다. 이때는 대화로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 하는데 말의 어조와 순서 바꾸기, 느낌보다 본 것 말하기만 기억하면 된다. 전자는 말 그대로다. 손자녀를 양육하는 데서 오는 섭섭함이 자녀에게 생겼을 경우 감정적으로 말하기보다는 자녀에게 고마웠던 것부터 써보고 직접 이야기를 해보라. 예를 들어 “아이가 착한 것은 네가 잘 키워서 그런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녀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고 뜸을 들인 다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 말할 때는 “~해라”의 명령조보다는 “내가 살아보니 이 방법으로 훈육을 하니 꽤 쓸만 하더라”라고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인데 좋은 것을 추천해 주는 것이다. 주 양육자가 되기보다는 육아의 조언자가 되는 것이 현명한 조부모가 되는 법이다. 아이가 산만하거나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때 자녀에게 양육을 잘못한 것이라고 다그치는 것은 좋지 않다. 아이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표현하는 것도 자제하는 것이 좋다. 자녀와 조부모간의 감정만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아이를 섣부르게 판단해 느낌을 표현하기보다는 본 사실만 그대로 이야기해주는 것이 좋다. △백종화 소장이 제안하는 멋진 조부모 10계명 1. 거울을 보고 입꼬리 올리는 연습을 하세요. 2. 손자녀의 말에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쳐주세요. 3. 아이 놀이가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처럼 진지하게 지켜봐주세요. 4. 손자녀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아빠, 엄마의 좋은 점을 찾아주세요. 5. ‘요즈음 아이들’이라는 말로 손자녀와 거리를 만들지 마세요. 6.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스마트폰이나 물질로 손자녀를 유혹하지 마세요. 7. 동요 2~3개를 더듬지 않을 수준으로 연습해서 손자녀와 함께 불러보세요. 8. 손자녀 앞에서 다른 조부모와 손자녀를 흉보거나 비교하지 마세요. 9. 손자녀 여벌옷, 칫솔, 베개를 준비해서 갑자기 와도 편히 놀 수 있게 하세요. 10. 헤어질 때 귓속말로 “할머니, 할아버지가 00를(을)많이 사랑한다”고 해주세요. △손자녀에게 현명하게 선물하는 법 무작정 선물을 하다 보면 “버릇 나빠진다”거나 “이거 필요 없는데”라며 자식·며느리·사위에게 싫은 소리 들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물을 하는 것이 현명할까? 물건을 사줄 때 리스트를 작성하라. 그리고 자녀들에게 어떤 것이 필요한지 물어봐라. 그들에게 직접 리스트를 받아도 좋다. 이렇게 되면 자녀들과 손자녀가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 갈등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 손자녀에게 선물을 했다면 자식·며느리·사위에게도 조그만 선물을 하는 것도 좋다. 이럴 경우 손자녀들은 자신의 부모가 사랑 받는 존재라는 인식을 갖기 때문에 부모와 조부모를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즉, 선물을 주는 행위만으로도 손자녀 교육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알아둬야 할 것은 손자녀 교육에서 자녀를 배제하면 손자녀가 부모를 무시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는 것이다. △자녀가 손자녀를 혼낼 때? 이때는 자녀에게 센스있는 부모가 될 수 있는 기회다. 손자녀에게 “엄마가 XX와 할 말이 있는 것 같으니 잠시 할머니 나갔다 올게”라고 말하고 자리를 피하라. 그곳에서 손자녀의 편을 든다면 자녀는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된 훈육을 할 수 없다. 반대로 자리를 피하는 경우, 자녀도 마음이 편해져 이성적으로 아이를 훈육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 다시 그곳으로 가서 손자녀의 기분을 풀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조부모가 직접 훈육을 하는 것보다는 자녀가 훈육하는 것을 완화해주는 쿠션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럴 경우, 가랑비에 옷 젖듯 조부모의 영향력이 증가한다. △‘꺼리’를 만들면, 유쾌한 조부모 될 수 있다 이럴 때가 있다. 손자녀들과 노는 데 놀 소재가 떨어져서 선물 공세를 펼치거나, 먹을 것만 주야장천 권할 때 말이다. 이것은 놀 거리, 볼 거리, 즐길 거리, 먹을거리 등의 ‘꺼리’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유쾌한 조부모가 되는 법은 ‘꺼리’만 만들면 된다. 손자녀들과 만나기 전 이런 ‘꺼리’들을 준비해 함께 즐기는 것은 손자녀들이 조부모를 유쾌하게 느끼고 기억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전래 놀이나 책을 읽어주는 것도 좋다. 특히 조부모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의외로 손자녀들에게 잘 먹히는(?) 아이템이다. 조부모도 그 이야기를 하면서 동심에 빠질 테지만 손자녀들도 그것을 들으면서 매우 신선하고 신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의 마음이 움직여 조부모를 더욱 친근하고 매력적으로 느끼게 된다. - 도움말 백종화 아동청소년심리상담센터 소장 이화여대 아동학과 겸임교수, SBS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 전문자문위원, EBS ‘선생님이 달라졌어요’ 전문자문위원, EBS ‘학교의 고백’ 전문자문위원, 저서 , ,
- 2015-05-23 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