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론 크로우 감독 작품이다. 주연에 바람둥이 데이빗 에임즈 역에 톰 크루즈, 데이빗의 이상형 여자 소피아 역에 페넬로페 크루즈, 섹스 파트너 줄리 역에 카메론 디아즈가 나온다.
‘바닐라 스카이’는 인상파 화가 모네 작품에서 하늘빛이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담은 것에서 유래되었다. 그러고 보니 빈센트 반 고흐의 풍경화도 비슷한 작법이었다. 그래서 이 생소한 단어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된 셈이다.
남자의 자격에서 인기를 얻은 가수 배다해가 활동하던 그룹 이름이 ‘바닐라 스카이’였다. 한국 영화 ‘루시드 드림’ 감상평을 블로그에 올렸더니 누군가가 꿈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이 영화를 보라고 추천했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소 난해하다. 꿈이라는 소재가 등장하고 바닐라 스카이처럼 시시각각 판단에 따라 인생이 바뀐다는 뜻도 담고 있다.
데이빗은 아버지 유산으로 받은 잘 나가는 출판사 사장이다. 돈 많고 잘 생겨서 주변에 사람이 많다. 여자도 많아서 바람둥이이다. 이미 줄리라는 애인이 있는데 그의 33세 생일 파티 때 운명의 여인 소피아가 나타난다. 첫눈에 소피아에게 반한 데이빗은 그때부터 소피아에게 사랑이 옮겨 간다. 줄리는 질투에 불타서 데이빗을 차에 태우고 질주하면서 동반 자살을 꾀한다. 차량 전복사고로 줄리는 죽고 데이빗은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추한 얼굴이 된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을 잃는다. 여기서 피해 의식이 발동한다. 잘 생긴 외모는 그만큼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추한 얼굴이 된 데이빗은 실의에 빠져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다. 다행히 의사의 노력으로 데이빗은 제 얼굴을 회복하고 소피아도 옆에서 보살핀다. 그러나 데이빗은 소피아에게서 줄리의 환상을 보며 정신 착란에 빠진다. 소피아를 줄리로 착각하며 질식사 시키고 범법자가 된다. 그리고 난해한 꿈의 세계에 들어간다. 개를 동결시켰다가 해동해서 다시 회생시키는 기술이 등장하는가 하면 어디선가 본 듯한 남자가 나타나 꿈은 편집이 가능하다고 한다. 좋은 것만 남기고 나쁜 기억은 없애는 것이다.
일반적인 평범한 사람에게는 지우고 싶은 나쁜 기억이라는 게 사실 별로 없다. 무난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인(凡人)이라고 한다. ‘꽃길만 걷고 싶다’는 좌우명을 카톡스토리에 담고 있는 사람도 많다. 범인들에게 인생은 사실 지나온 과정이 모두 꽃길이다. 특별한 고난의 나쁜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데이빗은 줄리에게는 빼앗길 수 없는 백마 탄 왕자였다. 그러나 “행복이 무엇이냐?”는 줄리의 질문에 데이빗은 줄리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데이빗의 사랑은 소피아에게 사랑이 옮겨 갔다. 줄리에게는 데이빗이 행복의 전부였던 것이다. 그래서 동반자살을 꾀한 것이다. 여자는 사랑에 목숨을 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결국 데이빗은 잘 생긴 외모를 잃으면서 인과응보의 죄 값을 받은 셈이다. 지우고 싶은 나쁜 기억이 되는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빛처럼 순간의 판단도 그때마다 중요하다.
깊어가는 가을밤 지금 충무아트홀에서는 ‘벤허’가 공연 중이다.
벤허의 내용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이다.
얼마 전 리메이크된 영화도 있지만 그래도 벤허를 생각하면 필자의 젊은 날 대한극장의 와이드 화면으로 보았던 찰톤 헤스톤 주연의 작품을 떠올리게 된다.
여고 시절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면 전교생이 대한극장에 가서 단체로 명화를 관람했다. 당시에는 극장 중에서 가장 크고 화면이 넓은 곳으로 대한극장을 꼽았다.
대한극장에서 많은 명작을 보며 꿈을 키우고 가슴 설렜던 그때가 눈앞에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대한극장에서 보았던 ‘벤허’는 누구에게나 큰 감동을 주었다. 와이드 화면에 펼쳐졌던 수많은 명장면은 잊을 수 없는 감동이다.
특히 마차 경주 장면은 아무리 리메이크를 한다 해도 다시는 따라 할 수 없을 정도의 명장면이라는 생각이다.
신당동의 충무아트홀에서 ‘뮤지컬 벤허를 보았다.
뮤지컬을 좋아해서 몇 번 와본 공연장이지만 벤허의 그런 스펙터클한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지 매우 궁금했다.
벤허의 방대한 내용을 3시간 안에 어떻게 연출했을지도 기대되었는데 역시 훌륭한 배우와 연출가의 역량으로 탄탄하게 잘 함축되었다.
그 긴 스토리도 어느 곳 하나 허술하지 않게 잘 연출되었으며 뮤지컬 배우들의 열연은 여느 뮤지컬보다 더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영화와 뮤지컬의 차이를 알면서도 자꾸만 찰톤 헤스톤의 벤허와 비교하며 이 장면은 어떻게 표현할지 미리 상상해 보는 나쁜 관람 태도가 있었지만 억울한 누명으로 노예선에 탄 장면은 깜짝 놀랄 만큼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뒤 배경으로 영상을 띄웠는데 진짜 노예선에 탄 사람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느낌을 주며 멋지게 연출되었다.
그러나 역시 마차 경주 장면에선 웃음이 나왔다. 흰말 검은말 8마리의 모형 말이 방향을 바꾸어가며 움직여 마차 경주 장면을 연출했는데 무대 여건상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하면서도 우스웠다.
그래도 마차에 탄 두 배우 벤허와 멧살라의 연기는 진지하고 멋지게 다가왔다.
서기 26년 예루살렘은 제정 로마제국의 폭정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벤허는 명망 높은 유대의 귀족으로 오랜만에 로마의 장교가 되어 돌아온 친구 메셀라와 재회한다.
메셀라는 전쟁 중에 고아가 되어 벤허의 가문에서 거두어 벤허와 친구로 자란 사람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벤허를 질투하여 증오심을 가진 인물이다.
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장교가 된 그는 벤허에게 유대인 폭도의 소탕을 도와 달라 하지만 벤허는 거절한다.
벤허의 여동생 티르자는 메셀라를 좋아한다. 어느 날 로마 총독의 행군을 옥상에서 구경하던 티르자가 메셀라를 찾아보다 기왓장을 떨어뜨리는 사고를 낸다.
메셀라는 이를 문제 삼아 벤허 가문 전체에 반역죄를 씌운다.
나쁜 놈, 키워준 은혜를 모르는 나쁜 놈이라는 욕이 절로 나온다.
억울한 누명을 쓴 벤허는 노예선에 오르게 되고 부유한 귀족이던 어머니와 여동생은 지하 감옥에 갇혀 지내다 문둥병 환자가 되는 비극을 맞는다.
노예선에서 해적과의 난투 중 사령관을 구한 벤허는 그의 양자가 되어 로마 귀족이 된다.
생사의 갈림길을 극복한 벤허는 모든 것을 앗아간 메셀라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전차경주에서 메셀라는 다쳐서 죽고 벤허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한편 예루살렘은 나사렛에서 유대의 새로운 왕이 온다는 소문으로 술렁이고 예수의 고난이 시작된다.
예수님의 은총으로 문둥병이 사라진 어머니와 여동생과 사랑하는 여인 에스더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잘 함축되어 보여 졌고 관객들은 웅장한 음악과 배우들의 열연에 뮤지컬이 끝나고도 계속 기립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잘 아는 내용임에도 또다시 큰 감동을 준 멋진 뮤지컬 ‘벤허’였다.
명품인 줄 알고 샀는데 짝퉁임을 확인했을 때의 기분이랄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작품이며 그 감독이 유명한 코폴라 패밀리의 일원이라는 정보만 믿고 기대에 차서 본 영화인데 보고 난 후 조금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글쎄 칸이 보는 관점과 필자의 시각이 달라서일까? 소피아 코폴라가 칸을 설득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필자를 설득하는데 미흡했던 것은 분명하다.
영화 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에 있던 가톨릭 여자 기숙학교 판즈워즈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치열한 전쟁 한복판에 있는 학교는 사람들이 대부분 떠나버리고 교장과 여교사 그리고 다섯 명의 학생만 남아 있다. 나무들이 잘 관리된 너른 정원과 중세풍의 우아한 흰색 건물은 이곳이 전쟁 중임을 잊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워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그 적막한 공간에 한 남성이 침입한다.
학생 에이미(우나 로렌스)는 늘 하던 대로 버섯을 따러 정원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다리 부상을 입고 군대를 이탈한 북군 병사 존(콜린 파렐)을 발견한다. 그는 교장 마사(니콜 키드먼)의 지휘로 안으로 옮겨지고, 적군이지만 기독교적 박애 정신으로 치료받는다. 물론 그 적군은 미남으로 설정되어 있으니 여자로만 구성된 집단에서 당연히 주목받고 여자들 간에 미묘한 긴장감이 조성된다.
그중에서 두드러진 관계는 많은 사연을 지닌듯한 여교사 에드위나(커스틴 던스트)와 선천적인 팜므파탈의 끼를 지닌 조숙한 학생 알리시아(엘르 패닝) 사이에서 벌어진다. 알리시아는 노골적으로 유혹하고 에드위나는 자기를 사랑한다는 존의 고백에 흔들린다. 마사는 마사대로 존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는다. 영화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존은 그들과 모두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런 상황을 즐긴다.
치료에 대한 보답으로 정원을 돌보며 이곳의 일원이 되어가던 존은 어느 날 애정행각이 발단되어 운명이 한순간에 뒤바뀐다. 에드위나가 자신을 사랑한다던 존이 알리시아와 침대 위에 있는 모습을 보게 되고 변명하려던 존을 밀치자 계단에서 구르며 정신을 잃는다. 상처가 터진 모습을 본 마사는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썩어들어 간다며 그가 기절한 사이 존의 다리를 잘라낸다.
지루하게 흘러가던 영화가 이 지점부터 스릴러로 변신한다. 깨어나 다리가 잘린 것을 알게 된 존은 괴물로 변하고 격분한 남자와 일곱 여자의 대결로 치닫는다. 그래도 미련이 남은 에드위나는 미친 듯이 날뛰는 존에게 다가가 사랑을 나누고 나머지 여자들은 그를 죽이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 그를 처음 발견했던 에이미가 독버섯을 따오고 마지막 만찬이 차려진다.
자, 여기까지 스토리는 매우 흥미진진하지만, 영화의 초점이 불분명하여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여자들 중 여교사 에드위나만이 어느 정도 심리와 욕망이 드러나 있을 뿐 마사와 알리시아의 심리는 불확실하고 행동의 개연성도 부족한 채 그저 예쁨만 있다. 더구나 존은 내면이 없이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자아가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니 전반부는 지루하고 후반부는 맥 빠진 스릴러가 되고 말았다.
원작이 그러한가 하여 관람 후 검색해 보니 원작과 많이 달라져 있고, 1971년도에 만들어진 영화와도 관점이 다른 것을 알게 되었다. 원작에 있던 흑인 하녀도 빠져 있고, 무엇보다도 1인칭 시점으로 처럼 등장인물이 각기 다른 시각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인물의 깊이를 창조했던 원작과 달리 밋밋한 3인칭 시점으로 스토리를 끌고 가기에 바쁘다 보니 생긴 허점들이었다.
굳이 소피아 감독 입장에서 변명하자면 아름다운 화면과 스타일을 중시하는 감독의 취향 때문으로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왔던 1971년 영화와 달리 소피아가 여성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것도 이 영화가 정적인 흐름을 형성한 이유일 것이다. 다만 칸이 이런 여성적 정물화를 선호한다고 본다면 수상을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끝까지 남는 의문은 마사가 존의 다리를 자른 것이 정말 의학적 필요에서일까? 질투심에서일까?
개 같은 놈! 또는 아주 개판이야!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이 많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하는 말이다. 많은 짐승 중에 하필 사람과 가장 친근한 동물을 빗대어 욕을 하는 이유는 뭘까?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개가 다른 동물과 달리 먹이에 너무 집착한다. 여러 마리의 개에게 하나의 먹이통에 먹이를 주면 목을 길게 뽑아 다른 놈 앞의 먹이를 먼저 먹는다. 자기 앞의 먹이만 먹어도 충분히 배를 채울 수 있는데 남의 것을 탐하는 것이다. 먹이통이 크면 아예 앞발을 먹이통에 넣고 다른 놈이 먹지 못하게 어깨로 방어까지 한다. 식판이 완전 개판이 되고 만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개 두 마리가 한집에서 주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잘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중 한 마리가 “이 집에서 개라고는 너와 나 둘뿐인데 사이좋게 지내자”라고 말하자 다른 개 한 마리가 “그래 우리는 전에 별것 아닌 걸로 싸웠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어. 우리가 함께 주인집을 지키면 주인님도 우리를 공평하게 대해주시잖아 그런데 왜! 가끔씩 싸웠는지 몰라” 하며 의기투합했다. 앞다리를 들어올리며 “우정 만세, 싸움, 질투, 원망아 모두 사라져라!” 하고 크게 외치며 서로 힘껏 껴안기까지 했다. 그때 주인이 뼈다귀 하나를 던져줬다. 순간 두 마리는 동시에 뼈다귀를 덮쳤고 서로 먼저 먹으려고 싸웠다. 조금 전 화해의 브라보는 아예 잊어버렸다.
사람은 개가 아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체면 때문에 굶었으면서도 밥을 먹었다고 해야 할 때가 있다. 훗날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면 배고픔도 기꺼이 감수한다. 허리띠를 졸라 매면서 저축을 하는 이유다. 하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알지 못한다’고 개처럼 먹이(이익)가 눈앞에 있으면 돌변하는 사람이 있다. 승진이나 좋은 보직을 위해 동료와 친구를 음해한다. 배부를 때는 우정을 찾다가 어려울 때는 싸늘하게 돌아서 버리는 사람이 있다. 뼈다귀를 보고 달려드는 개와 다를 바가 없다.
계속 사귈 만한 친구인가를 알아보는 바로미터는 돈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를 보면 된다. 오락으로 하는 작은 놀음판에서도 그 사람의 속마음을 알 수 있다. 친구가 돈을 잃으면 돈을 딴 친구가 은근슬쩍 돈 잃은 친구에게 져주는 친구가 있다. 반면 오늘은 운수가 좋은 날이라며 벌이 꿀물 빨듯 친구 돈을 쪽 빨아먹는 친구가 있다. 돈을 딸 때는 콧노래를 부르지만 돈을 잃을 때는 하늘이 무너진 듯 한숨을 쉰다. 심심풀이 오락삼아 잠깐 동안 하는 놀이인데도 적은 판돈에 집착을 한다. 친구의 상황은 아예 관심도 없다. 오직 내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이런 친구와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한다.
술에 취해 다음 날이 되어봐야 그 술이 좋은 술인지 머리 아프게 하는 술인지 안다. 마실 때 목넘김이 좋다고 좋은 술이 아니듯 향기로운 말을 하는 사람도 다 좋은 사람은 아니다. 사람을 시험해보려면 그 사람이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면 안다. 경제관념이 없이 흥청망청도 써도 안 되지만 돈에만 집착하는 자린고비도 짜증난다. 돈을 너무 밝히는 사람은 먹이를 탐하고 주인을 무는 개와 같다. 언젠가는 반드시 사고를 친다.
1925년 7월 10일은 필자 어머니의 생년월일이다. 지금까지 그 연세치고는 젊게 보이고 건강도 괜찮은 편이시다. 그리고 아직도 어여쁜 모습을 잘 간직하고 계셔 정성을 다해 단장을 하면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우시다. 특히 오뚝한 코와 시원한 이마등 이목구비가 여전히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필자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고운 한복을 입고 자주 입으셨다. 한복 차림으로 학교에 오시면 친구들이 “영애야, 엄마 오셨다. 정말 예쁘시다!” 하며 부러운 듯 쳐다보았다. 그러면 으쓱해지면서 필자 얼굴엔 웃음꽃이 만발했다.
어머니는 못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일본 여학교를 다녔던 어머니는 자로 잰 듯 정확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을 많이 낳았으면서도 그런 것들을 자상하게 가르쳐준 적이 없다. 학교 갔다가 오면 어머니는 맛난 것들을 만들어놓고 우리를 기다리셨다. 우리는 그저 맛나게 먹기만 했다. 몇 년 전에 왜 음식 만드는 것도 딸들에게 안 가르쳐줬냐고 물으니 다 자기 방식대로 잘해서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시시한 대답만 하셨다.
옷본만 있으면 무슨 옷이든 만들었고 수선하는 일에도 선수였다. 하지만 우리 딸들은 하나도 배운 게 없다. 어머니는 딸들에게 여자로서 살아가면서 필요한 어느 한 가지도 가르쳐준 게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그때 방법을 찾아내며 살았다. 막내는 큰언니인 필자에게 가끔 전화를 해서 묻기도 하지만, 둘째나 셋째와 필자는 스스로 알아서 결혼생활을 했다. 어머니의 조언 같은 건 전혀 없었다.
8년 전 어머니랑 함께 살게 되었다. 이 기회에 모든 것들을 전수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곧 희망으로 마음이 들썩였다. 어머니의 미모 유지법이 도대체 뭔지 알아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이 따로 있는지도 눈여겨보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 특별한 비법이 있을까 해서 물으면 그런 거 없다는 짧고 싱거운 대답만 하셨다. 그럴 때면 은근히 야속한 마음이 보글거렸다.
딸들에게 당신의 철학을 얘기해주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그럴 마음이 없는 듯 보인다. 이것이 질투심에서 나오는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그저 혼자 즐기면서 남들에게 칭찬받고 사는 걸로 만족하시는 듯하다. 우리 딸들은 아무도 어머니의 미모를 닮지도 못했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 그러나 동안 유전자만큼은 제대로 받은 거 같다. 딸들이 제 또래보다 모두 젊어 보이니 말이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면 될 텐데 가끔 유별나게 피어오르는 작은 분노가 잘 삭혀지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 때문이다. 아버지가 딸들 교육을 맡아 하셔서 어머니는 아예 우리에게 신경을 안 썼던 것이다. 딸은 어머니의 거울이라는데, 본받아야 할 것들이 있는데…. 어머니의 장점들을 물려받지 못한 원인이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 때 아주 가끔 조잘 안 되는 마음들이 웅성거리곤 한다.
5070세대 대부분은 보릿고개가 있을 정도로 먹고살기 힘들던 지난날이 있었다. 청년들에게 나의 어린 시절 경험을 들려주면 마치 임진왜란 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현재의 청년들이 체감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식민지배와 전쟁을 겪으면서 개개인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다. 당시 어른들이 굶주리며 일할 때 지금의 시니어들은 가사를 도와가며 열심히 공부했고 달려왔다. 책도 부족하고 TV나 라디오도 흔치 않았던 시대, 아이들의 정서 함양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친구와 싸웠을 때 어떻게 풀어야 할지, 친구는 어떻게 사귀어야 할지, 부모님께 꾸중 들으면 화가 나는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다른 사람 마음을 헤아리기 힘들 때 아이들 옆에는 만화가 있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 세상을 알려준 만화에 대한 기억들을 꺼내보자.
최초의 단행본 만화 작가 ‘코주부’ 김용환
코가 뭉뚝하고 키는 작달막하지만 다부진 모습의 ‘코주부’는 김용환 작가의 대표 캐릭터다. 때론 모자를 쓰고 점잖은 어른으로 나와 신문에서 당대의 사회문제를 다루는 시사만화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코주부’가 알려진 것은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1952년, 잡지에 연재된 를 통해서였다. 청소년 교양지였던 은 10만 부 가깝게 판매되었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로 인기 잡지였다. 책이 부족했던 시절, 읽을거리가 풍부했던 이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그곳에 빼어난 이야깃거리인 를 그림으로 만날 수 있었으니 당시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에 연재된 ‘코주부 삼국지’는 1955년 만화책 로 발행되면서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다.
김용환의 만화는 세련된 그림, 재미있는 이야기로 아이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갔다. 그는 를 발표하기 이전부터 이미 아동만화를 많이 발표한 작가였다. 최초의 단행본 만화를 발표한 작가도 김용환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발표된 만화는 1909년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의 만평이라고 소개하지만, 어린이에게 친숙한 만화책이 처음 나온 것은 해방 후였다. 바로 동화작가 마해송의 작품인 를 김용환이 만화로 각색해 1946년에 발표한 다. 이 작품은 해방 후 아동문화를 만들기 위해 을유문화사에서 만든 아협만화문고 시리즈 중 하나다. 한국 최초의 단행본 만화로 기록되었고 2013년, 등록문화재 제537호로 등록되었다.
김용환은 만화 발표 외에도 만화신문과 만화잡지를 직접 발행하고 기획하기도 했다. 1948년, 최초의 만화신문인 의 기획자, 작가로서 참여했고 도 직접 발행했다. 또 한국전쟁 후인 1956년엔 성인시사만화잡지인 를 통해 시사만화의 새로운 장을 열기도 했다. 물론 각종 신문에도 시사만화를 발표했다. 이렇듯 김용환은 한국 만화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방송인 만화가 신동우
가정에 TV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 한 만화가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즉석에서 슥슥슥 그림으로 그려냈는데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충격적이었다. 바로 신동우 작가였다. 그가 유명 방송인이 된 것은 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1967년 1월 7일 서울 대한극장을 비롯해 많은 극장에서 상영된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만화영화)이 전국을 강타했다. 이 작품의 탄생은 신동우 작품 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은 1965년부터 1969년까지 에 연재된 후 단행본으로 출판된 작품인데, 이 연재만화를 대본으로 신동우 작가의 형인 신동헌 감독이 우리나라 최초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든 것이다. 홍길동에 관한 만화는 이전에도 많았고 이후에도 많은 작품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신동우 작가의 은 홍길동에 대한 이미지를 고착화시킬 정도였다. 이 작품은 허균의 에 대한 가슴 벅찬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홍길동’ 외의 주변 인물인 ‘호피’와 ‘차돌바위’, ‘곱단이’ 등의 캐릭터도 개성 있게 묘사되어 있어 매력적이다.
신동우는 1970년대에 유행했던 잡지의 만화 광고로도 유명하다. 오랫동안 진주햄소시지 제품을 일상 만화로 풀어냈는데, 광고임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끌었다. 요즘 유행하는 브랜드 웹툰의 시조격이라 할 수 있다.
슬픔의 미학으로 전쟁의 상흔을 위로한 김종래
휘영청 밝은 달은 금준의 마음을 알듯 구름을 머금고 내려다본다. 나쁜 사또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중에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일하러 간 엄마가 돌아오지 않자 엄마를 찾아 나선 금준은 괴나리봇짐을 지고 풍천노숙을 하며 전국을 떠돌다 지쳐 장승에 기대어 엄마를 불러본다. 김종래의 중 한 장면이다. 김종래는 한국전쟁 이후 많은 사람이 파괴된 삶과 가족과의 이별로 고통스러워할 때 슬픔을 어루만져주는 감동 만화로 인기를 누린 작가다.
1956년에 발표한 은 한국전쟁 당시 충남 예산의 한 가족사를 다룬 만화다. 주인공 김일, 최도천, 향순이가 전쟁을 겪으면서 비극적인 운명에 처하게 되는 내용으로, 전쟁 후유증을 겪던 이들의 심금을 울리며 김종래라는 이름을 독자들에게 알렸다. 특히 1958년 에 연재했던 는 당시 독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엄마를 찾아 길을 떠난 금준이 전국을 떠돌며 온갖 위기에 맞서 나가는 사이, 두만강 건너로 팔려간 엄마는 모진 수모를 겪으며 아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틴다. 이렇게 아들과 엄마가 만날 듯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아슬아슬한 이야기 구조는 독자들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버렸다. 구구절절한 사연은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청소년은 물론 어른들까지 그의 만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1962년에 발표된 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피란을 가던 한 가족이 엄마와 헤어져 무일푼으로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며 겪는 이야기다. 엄마 없이 힘겹게 살아가는 영진이네 가족 이야기이지만 전쟁 이후 사람들의 사나운 인심, 영진이 선생님 같은 선량한 사람들의 모습을 감동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김종래의 만화는 치밀한 구성과 감성적인 문장으로 이산가족의 아픔을 애잔하게 보여주며 사람들의 힘든 마음을 위로했다. 또한 길가의 돌부리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섬세한 필체가 특징이다. 25년간 4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그중 시리즈는 빼놓을 수 없는 수작이다.
소녀들의 판타지를 보여준 엄희자
1960년대 초반에는 예쁜 공주들이 만화책 속에 등장했다. 이전에도 소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만화가 다수 있었지만 엄희자 작가의 등장으로 순정만화의 신세계가 펼쳐졌다. 큰 눈 속에 들어가 있는 빛나는 별, 머리를 장식한 예쁜 리본,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주인공은 순식간에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주로 영화나 영미소설의 스토리를 각색한 작품이 많았는데, 현대적인 패션들을 한껏 뽐내며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최고 인기였다.
소설 을 만화로 만든 , 소설 을 각색한 등 서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화려한 패션이 눈길을 끌었다. 그래서 만화방에서 빌려온 엄희자의 만화책을 보면 찢긴 페이지가 많았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걸친 주인공의 모습이 소녀들의 소유욕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만화 주제는 권선징악이었고 순정만화는 그러한 교훈이 더 강했다. 만화 속에 나오는 악당은 착한 주인공을 질투, 음해하고 모함하지만 결국은 주인공의 선행으로 회개하고 반성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엄희자의 작품에 그려진 아름답고 순수하고 맑은 감성도 이 스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소년·소녀들의 명랑사회를 보여준 길창덕
1970년대는 ‘꺼벙이’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만화 속의 주인공들은 모범생이나 천재나 능력자가 많았다.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어린이상이 그러했던 것이다. 비록 아이일지라도 어른들의 몫을 나눠서 해냈어야 했다. 그러나 조금씩 먹고사는 것이 안정이 되던 1970년대엔 아이들에게 더 이상 어른의 몫을 나누지 않아도 되었다. ‘개구장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는 광고카피가 등장할 정도로 아이들의 철부지 같은 모습이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런 시대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 길창덕의 다. 1970년에 에서 연재를 시작해 으로 옮겨 1977년에 완결된 작품으로 잡지뿐 아니라 단행본으로도 만들어져 1970년대를 풍미했다.
머리의 기계충 자국과 졸린 눈에 약간 모자란 듯하지만 착하고 여린 심성의 꺼벙이는 엉뚱한 생각과 행동을 많이 해서 항상 부모님과 선생님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드는 명랑 어린이다. 시골에서 할아버지와 살다 상경한 여동생 꺼실이가 후에 등장하면서 그 재미는 한층 더 배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 , , 등 그의 작품 속 어린이들은 하나같이 말썽을 부리고 엉뚱했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 속에는 개인의 이기심이 아니라 가족들과 친구들,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잘 살자는 마음이 숨어 있었다.
가족의 희로애락 그려낸 이상무
가난하지만 명랑한 아이인 독고탁은 학교 갔다가 집에 돌아올 때면 항상 대문에서 주저한다. 대문을 열면 집에서 키우는 개가 아직 어린아이인 독고탁의 키만큼 달려들기 때문이다. 개는 독고탁이 좋다고 달려들지만 그는 자기 몸집만큼 큰 개에 겁을 먹는다. 무서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항상 머리를 굴리며 대문을 들어서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구사한다. 이상무의 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귀여운 모습과는 달리 희귀 성인 ‘독고’와 강한 이름인 ‘탁’이라 불리는 이 아이는 6남매의 막내로 식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그러나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엄마의 자리를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어서 슬프다. 아버지의 실직과 교통사고, 일찍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권투 유망주였던 형은 돈을 받고 경기를 하게 된다. 독고탁의 가족에게 벌어진 시련은 1970년대 여느 가정에서 겪었을 법한 일들이다. 독고탁은 누나들의 살뜰한 보살핌이 필요할 정도로 어렸지만 집 안의 어두운 분위기를 재빨리 눈치 채는 섬세한 아이였다. 또, 그런 독고탁을 통해 가족 드라마의 희로애락을 만화 속에 진하게 담아낸 작가가 이상무였다.
그의 작품에는 가족과 스포츠가 등장한다. 특히 같이 야구를 소재로 한 만화는 끝없는 경쟁을 해야 하는 스포츠 세계의 현실을 만화 속에서 시련을 극복하는 자기훈련과 노력들로 보여준다. 좌절의 순간에는 가족들의 응원이 있었고 무한 경쟁이 아닌 사람 간의 교류가 있었다. 이상무 작품의 인물들은 악인이라도 사람 냄새가 난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노량(露梁)해전 대승첩이 없었다면 조선은 얼마나 가련하고 부끄러운 나라였겠는가! 만일 이순신 장군이 도망치는 왜적의 앞길을 가로막고 “한 척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분전하다가 살신성인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정말 의기도 결기도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임진년 국난 이래 중국에만 매달려 주권을 포기한 나라로 종전을 맞았다면, 수오지심도 모르는 나라가 되었을 것 아닌가.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무주공산을 달리듯 치고 올라와 채 20일도 못 되어 국도를 손에 넣었다. 대륙 교두보 상륙작전 같은 전쟁이었다. 지방 수령들은 소문만 듣고 도망쳤고, 조선 최고 장수라는 사람은 천험(天險)의 요새인 문경새재를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 진을 쳤다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벼랑에 떨어져 죽었다. 그는 최고 사령관 교지를 받고 전장으로 떠날 때, 군사가 없어 사흘을 모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떠났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실상을 웅변하는 사실(史實)이다.
왜적 침입보고가 한양에 당도하는 데는 나흘이 걸렸다. 긴급 보고체제인 봉수체계도, 역참제도도 다 고장 난 탓이었다. 상주에 진을 쳤던 어떤 장수는 적이 10리 밖에 온 사실도 모르고 있다가 “적이 가까이 왔다”고 알린 백성의 목부터 쳤다. 다음 날 적이 나타나자 그는 혼자 줄행랑을 놓았다. 임금은 적이 아직 멀리 있는데도 궁궐을 버리고 달아나면서, 중국에 내부(內附·복속)할 궁리만 했다. 전쟁이 터지기 10년 전, 1년 치 양곡과 재정비축이 없는 점을 들어 “진실로 나라가 아니다”라고 상소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한탄처럼, 조선은 나라라고 할 수 없는 나라였다.
이순신을 죽이려고 임금과 조정 중신들이 눈에 핏발을 세운 사이, 원균은 수군총수 자리에 앉았다. 그가 첫 전투에서 조선수군을 통째로 수장시켜 나라를 풍전등화에 내놓은 정유재란의 끝을 이순신이 통쾌하게 설욕했다. 그 노량해전 승첩이 있어 지금 옛일을 돌아보는 일이 부끄럽지 않다. 육전과 해전을 망라한 7년 전란 중 그렇게 통쾌하게 적을 토멸한 일이 없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노량전투 엿새만인 1598년 11월 25일자 에는 전과가 이렇게 기록되었다. “왜적의 배 100여 척을 포획하고 200여 척을 불살랐으며, 500여 급을 참수했고 180여 명을 생포했다.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아직 떠오르지 않아 그 수를 알 수 없다.”
뒷날의 집계로는 적 병력 1만5000명 이상을 수장시킨 것으로 돼 있다. 일본 측도 , 같은 기록을 인용한 에서 “일본 배가 더 많이 불타고 파손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가문의 함대 피해가 매우 컸다”는 식으로 패전을 전하고 있다.
노량해전 승첩 현장인 노량 바다에는 그날의 흔적이 없다. 이순신이 구국의 충혼을 불사른 관음포 바다는 거듭된 간척사업으로 내해가 훨씬 좁아졌다. 후세에 건립된 이락사(李落祠) 아래 올봄 준공된 ‘이순신 순국공원’의 시설물은 너무 현대적이고 크기만 해 오히려 옛일을 더듬고 추념하기에 불편했다. 100억 원이 넘게 들었다는 기념관의 시설물에는 갖가지 모조품류와 책에 다 나오는 상황도 설명문 류만 가득해 애써 찾는 이의 발품에 값하지 못했다. 오히려 진짜 유적인 이락사가 가려진 느낌이었다.
남해대교 아래 숨어 있는 충렬사(忠烈祠)와, 경내 초빈(草殯) 자리에 만들어놓은 장군의 가묘(假墓)가 옛일을 증언하고 있다. 1970년대 연육교의 효시였던 남해대교 아래 연안을 둘러보면서, 노량 바다의 오묘한 지리를 터득한 것은 현장을 찾아본 보람이었다. 남해대교 폭은 400m 정도다. 경상도 수역에서 전라도 바다로 들어서는 물목인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 섬 북단의 거리가 그것이다. 명량해협보다 조금 넓은 정도다.
그 물목을 지켜 섰다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구원하러 출동한 왜 함대 500척을 관음포 바다로 몰아넣고 독 안의 쥐잡듯한 전투가 노량해전이었다. 조명 연합수군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왜군은 남해 섬 뭍으로 상륙해 산을 넘어 도망치는 상황이었다. 그 틈을 타 유키나가는 남해 섬을 멀찌감치 돌아 구사일생으로 달아났다.
노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과 크게 다투었다. 순천왜성을 탈출하려는 유키나가의 뇌물작전에 넘어가 포위망을 풀어주려 한 것이다. 왜성 코앞인 광양만을 봉쇄하고 있던 그는 노량해전 3일을 앞둔 11월 16일 “남해 섬의 적을 먼저 쳐야겠다”면서 떠나려고 했다. 곱게 성을 비워주겠다는 감언이설에 혹한 것이다.
“남해의 적이란 왜적에게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이오.”, “왜적에 붙었으니 적이 아니면 무엇이오?”, “귀국 황제께서는 작은 나라 백성을 구하라 하셨다는데, 약한 그들을 죽이는 것은 황제의 뜻이 아닐 것이오.”, “우리 황제께서 누구라도 명을 어기거든 징치하라고 내게 긴 칼을 주셨소.”, “한 번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우리 백성을 죽이도록 두고 볼 수는 없소.”
칼을 꺼내 들고 위압적으로 나오는 진 도독에게 이순신이 의연한 자세를 굽히지 않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11월 18일 왜의 대선단이 노량으로 몰려온다는 탐망군의 보고를 알리자 진 도독도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조명 연합수군 합동작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쓴 에 따르면, 그날 밤 늦게 광양만을 떠나기 전 이순신은 배 위에서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하늘에 빌었다. “만일 이 원수들을 없앨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此讐若除 死則無憾].” 그러고는 모든 병정에게 하무를 물리고 조용히 진군했다. ‘하무’란 군사들이 떠들지 못하도록 입에 물리던 나무재갈이다.
임진년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조명 연합수군의 규모는 전선 250여 척에 병력은 2만1000명(조선군 8000명, 명군 1만3000명)이었다. 진 도독이 기함, 좌선봉은 명군 제독 등자룡(鄧子龍), 우선봉은 이순신이었다. 18일 늦은 밤 광양만을 떠난 연합함대는 19일 이른 새벽 노량해협에 이르렀다. ‘해협을 가득 메운 왜선들의 불빛이 긴 뱀처럼 줄지어 있었다.’ 행록에 묘사된 이 문장이 왜적의 규모를 말해준다. 사천 선진리 왜성에 주둔했던 시마즈 요시히로 군뿐만이 아니라, 멀리 울산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원군까지 합세한 500척 대함대였다.
연합함대가 캄캄한 노량 바다를 저어오는 왜적의 앞길을 가로막으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행록에는 ‘밤 10시쯤 조·명군이 함께 출발하여 새벽 2시쯤 노량에 도착, 적선 500여 척을 만나 아침이 되도록 크게 싸웠다’고 적혀 있다. 불화살이 날고, 각종 총통이 포효하고, 불붙은 장작더미가 왜선으로 던져졌다. 이순신의 기도처럼 단 한 척의 적선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는 조선수군의 분전이었다.
앞길이 막힌 왜적은 남해 섬 남쪽으로 진로를 틀어 활로를 찾으려는 모양이었다. 진 도독 함대가 추격하자 관음포로 달아나던 시마즈 요시히로 함대는 앞길이 막힌 것을 알고 되돌아서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연안에 닿은 배에서는 적병들이 뛰어내려 산으로 달아났다. 아직 닿지 않은 배들은 독 안에 든 쥐처럼 사납게 반격해왔다. 진린 함대를 뒤따라온 왜선들에게 기함이 협공을 당하게 되자, 너른 바다에서 왜적을 무찌르던 이순신이 급히 달려갔다.
“진린 도독을 구하라!” 이순신은 앞장서서 진 도독 기함으로 달려갔다. 날이 완전히 밝은 오전 7시 무렵이었다. 바다 위에는 부서지고 불타는 적선이 뒤엉키고, 바닷물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순신 함대가 도독의 판옥선을 공격하는 왜선들에게 총통과 불화살을 퍼붓는 사이 왜선들이 겹겹이 몰려들었다. 삼도수군통제사 깃발을 보고 이순신을 노린 것이었다.
적선의 접근에도 아랑곳없이 한 손에 활을 들고 또 한 손으로 북을 울리며 독전하던 이순신이 한순간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부장 송희립(宋希立)이 총을 맞았다는 보고에 그쪽을 돌아보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후일담이 전해져온다. 향년 54세였다.
옆에서 돕던 아들 회(薈)와 조카 완(莞)이 달려들어 부축하려 할 때 이순신이 남긴 마지막 말은 성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 고통과 회한을 삭이면서 끝까지 걱정한 것은 싸움의 결말이었다. 얼마나 많은 적선을 당파하고 분멸할 것인가,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왜적을 ‘나의 바다’에 수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
오직 그것만이 성웅(聖雄) 이순신의 관심사였다. 단재 신채호, 춘원 이광수, 노산 이은상 같은 선각자들은 우리 역사에서 특정 인물에게 성(聖)자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세종대왕과 이순신뿐이라고 말했다.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나라 걱정만 했다는 점에서 이 말에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웅의 죽음을 숨긴 채 회와 완이 장군처럼 독전기를 휘두르고 북을 울려 사기를 진작시킨 결과는 찬란했다. 임진년 이래 7년 동안 뭍에서건 바다에서건 이보다 큰 전과를 올린 일은 없었다. 격전 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요시히로는 남은 함선을 이끌고 남해를 돌아 부산으로 달아났다.
“통제공 수고 많았소. 어서 나오시오.” 싸움이 끝나고 이순신 기함을 찾아온 진 도독은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숙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조카 완의 말에 도독은 배 위에서 세 번이나 넘어졌다 한다. “공은 죽어서도 나라를 구하셨구려!” 그는 가슴을 치며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그 소리 탓에 성웅의 별이 관음포 바다에 떨어진 것을 조명 양군이 알게 되었고, 수백 척 전선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이 파도소리를 덮었다.
장군의 시신은 관음포 이락사 자리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노량 충렬사 자리로 옮겨져 초빈되었다. 며칠 후에는 고금도 통제영으로 모셔졌다. 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해안 옛 통제영 터에는 장군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월송대(月松臺)가 보존되어 있다.
고금도는 쉽게 가볼 수 없는 섬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육속이 되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강진군 마량항에서 고금도 북단으로 가로질러진 마량대교를 건너 10여 분 달리다 왼편으로 접어들면 이내 덕동리 해변이다. 잔잔한 바다가 섬 내륙으로 깊숙이 파고들어온 만(灣) 안쪽 아늑한 포구연안이 마지막 통제영 자리다.
사적 114호로 지정된 고금도 충무사는 이순신 영정을 모신 사당 앞에 아담한 사우가 몇 채 둘러섰다. 사당 왼편의 관왕묘 비가 눈길을 끌었다. 원래 도독 진린이 이 자리에 관왕묘(관우사당)를 건립했는데, 뒷날 충무사를 짓고 관왕묘는 묘비(廟碑)만 남겨두었다. 이곳이 명 수군 군영이었음을 증언하는 유적이다.
고금도 통제영을 굽어보는 덕동리 야트막한 언덕 위 솔밭(월송대)에 모셔졌던 성웅의 유해는 83일 만에 고향인 아산으로 모셔져 현재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 기슭에서 영면하고 있다.
고금도 통제영은 명량대첩 이후 적당한 진지를 찾던 이순신이 목포 앞바다 고하도(高下島)에서 정유년 겨울을 나고 옮겨온 마지막 진지였다. 이곳에서 장군은 전함을 건조하고 장정을 모집해 수군 재건에 힘쓰는 한편, 농지를 개간하고 군염(軍鹽) 제조사업으로 전력을 크게 회복시켰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주민들의 협력이 큰 힘이 되었다.
정부 지원 한 푼 없이 그렇게 힘을 기른 것이 진 도독의 마음을 산 밑천이 되었다. 1598년 7월 16일 진린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고금도 이순신 통제영에 당도했다. 이순신은 술과 안주를 성대하게 차려 배에 싣고 군대의 위의를 갖춰 군악을 울리며 멀리 나가 맞아들였다. 칠천도 패전 이후 중국 동해안 지방이 왜의 위협에 노출되자 명은 부랴부랴 조선에 수군을 파병했던 것이다.
통제영으로 맞아들여서도 성대한 환영연을 베풀었다. 여러 장수들은 잔뜩 취해 “이순신은 과연 훌륭한 장수로다” 하며 좋아했다. 사납고 오만하기로 소문난 진린도 융숭한 대접에 흡족해했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뜻밖의 변이 일어났다. 명나라 수군의 약탈과 부녀자 희롱으로 동네마다 통곡과 탄식이 터졌다.
보다 못한 이순신은 어느 날 크고 작은 막사를 헐고 옷과 이부자리를 배에 옮겨 실었다. 도독이 그 모습을 보고 달려와 까닭을 물었다. “귀국 군사들 행패를 견딜 수 없어 백성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옮겨가려 합니다.” 도독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즉시 이순신에게 명나라 수군의 탈법 행위 단속권이 허락되었다. 그 후로 명군의 행패가 사라졌다.
이순신은 크고 작은 전과까지 진 도독에게 양보해 체면을 살려주었다. 그 인품에 감격한 도독은 이순신을 제갈량에 비유하며 명나라에 가 벼슬을 하도록 권유하기까지 했다. 명나라 조정과 선조 임금에게 올린 서장에서 그는 이순신을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才)가 있으며,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功)이 있는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천지를 주무른 재주요, 하늘과 해를 손본 공이라는 평가는 진정 감화를 받지 않고는 인사치레로 쓸 수 없는 말이다.
그 서장에 감복한 명나라 신종은 도독인 참도 독전기 등 여덟 가지 물건[八賜品]을 보내 이순신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 전에 이순신을 살리기 위해 면사첩(免死帖)을 보낸 것도 그였다. 한양의 명군 총사령부에서는 영내에 빈소를 설치하고 성웅의 전몰을 애도했다.
그러나 우리 임금은 그 반대였다. 예조에서 그 사실을 전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하회를 구해도 선조는 대답이 없었다. 재차 하회를 요구하자 마지못해 “알아서 하라” 했다. 뒷날 논공행상 때도 그랬다. 선조는 굳이 원균을 이순신과 같은 정왜(征倭) 일등공신에 올리라 했다. 조정에서 부당하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너무 훌륭해 두렵고 질투 나는 이순신의 죽음을 반기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있겠는가.
조선 500년 역사에서 이순신을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만들고, 스스로 가장 용렬한 임금이기를 자청한 일이었다.
장마철은 이미 지났는데 요즘 폭우가 계속 내리고 있다.
얼마 전까지 34도가 넘나드는 무더위로 힘들었었기 때문에 오히려 비가 내려 선선해지니 기분이 상쾌하다.
오락가락하는 빗속을 뚫고 일요일 오후 뮤지컬 한 편을 보러 강남 나들이에 나섰다.
역삼동의 LG아트센터에는 뮤지컬을 즐기러 온 사람들로 활기가 넘친다.
이날의 공연은 로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뮤지컬이다.
‘시라노’는 남보다 훨씬 크고 못생긴 코가 콤플렉스지만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이자 철학자이고 용맹한 검객이자 모험가로 외모 외에는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뮤지컬이나 오페라에 등장하는 ‘시라노’는 실제 모델이 존재한 인물로 작가였다.
그는 유난히 큰 코 때문에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지만, 지적인 달변가로 그의 코에 놀란 사람들도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귀를 기울이고 그에게 빠져들었다고 한다.
필자의 젊은 시절 명동 한복판 가장 번화한 예술의 전당 건너편에 ‘시라노’라는 이름의 작은 미니 백화점이 있었다.
유명한 음악가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씨의 어머니가 운영했다는 이 백화점의 이름을 ‘시라노’라고 지은 건 외면보다 내면의 그 인품이 뛰어났기 때문에 선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라노’라는 인물은 매력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뮤지컬의 주인공 ‘시라노’는 시를 사랑하는 검객으로 싸움과 도전을 좋아하는 호쾌한 남성이다.
그러나 마음으로 사랑하는 연인 ‘록산’ 앞에만 서면 콤플렉스인 큰 코 때문에 몸을 숨기기 급급하다.
뮤지컬은 한 여자와 세 남자가 얽히는 서사시이다.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사촌 동생인 아름다운 ‘록산’을 좋아하지만 ‘시라노‘는 그녀에게 다가가기엔 자신의 외모가 너무 흉하다고 생각해 가까이하지 못한다.
부대의 지휘관인 ‘드기슈’가 ‘록산’에게 구애하지만, 어느새 ‘록산’은 ‘시라노’의 친구인 잘생긴 ‘크리스티앙’에게 마음을 사로잡힌다.
‘록산’의 마음을 안 ‘시라노’는 ‘록산’의 행복을 위해 두 사람을 이어주겠다며 지식이 부족한 ‘크리스티앙’ 대신 편지를 써주게 된다.
‘크리스티앙’의 편지를 본 ‘록산’은 유려한 글에 더욱 빠져들고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이를 안 ‘드기슈’는 질투로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이 있는 부대를 최전방의 전쟁터로 내보낸다.
전쟁터에서도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계속 편지를 쓰는데 사실 그 편지는 자신의 심경을 표현한 것으로 ‘록산’을 향한 마음이 더욱 깊어진다.
그의 편지로 ‘록산’의 ‘크리스티앙’에 대한 마음이 점점 더 커지는데 필자는 편지를 쓴 사람을 ‘록산’이 알아봐 주기를 가슴 조이며 바라보았다.
결국, 세월이 흐른 후 ‘록산’은 ‘시라노’가 죽음을 앞둔 순간에 그가 편지를 쓴 사람이었음을 알게 된다.
‘록산’은 눈먼 사랑을 한 자신을 한탄하지만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의 사랑도 자신만큼 진심이었다고 말해 준다.
참으로 품위와 예의를 지키는 성숙한 멋진 남자라는 생각이다.
못생긴 외모를 연기한 배우가 매우 미남이었다는 점이 재미있다.
안생에 한 번쯤은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 사랑을 겪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슬픔이라는 뮤지컬 의 말이 가슴에 남아 필자의 지난 날 그런 사랑이 있었을지 되돌아보게도 했다.
가슴 뭉클하고 감동적인 뮤지컬이 마음을 울렸다.
특별히 잘 알려진 대작이거나 이슈가 되는 영화는 아니어도 편안히 볼 수 있는 오래된 영화자료들이 집에 있어서 요즘 틈날 때마다 한 편씩 본다. 하치 이야기(八チ公物語)라는 아주 오래전의 일본 영화도 그중의 하나다. 장르는 가족드라마이고 청소년도 관람할 수 있는 영화다. 자극적이고 도가 지나치는 이야기들에 익숙해져가는 요즘 사람들이 보면 신파 같다며 재미없어 할지도 모르겠다.
온 동네와 주변 산과 들이 눈에 뒤덮이고 계속해서 눈이 펄펄 내리고 있는 아키타 현의 풍경이 친근하다. 이병헌과 김태희의 러브스토리가 부럽도록 펼쳐지던 몇 년 전의 드라마 의 배경이었던 곳. 여전히 엄청난 눈이 아키타 현의 본모습처럼 첫 화면부터 다가온다.
그렇게 흰 눈이 소담스레 내리던 날, 어미 개의 산고가 진행되고 곧 이쁜 강아지 두 마리가 태어난다. 그리고 그중 한 마리가 동경제대 은사님에게 보내진다. 사랑에 빠져 연애 중인 외동딸과 교수 부부의 관심 속에서 살게 된 강아지는 우뚝 버티고 선 모습이 八자 같다 해서 '하치'라 이름 붙여진다. 그리고 곧 결혼해버린 외동딸의 빈자리를 채우며 하치는 우에노 교수와 깊은 정을 나눈다. 하치는 우에노 교수가 출근하는 아침에 역까지 늘 배웅한다. 뿐만 아니라 퇴근 때도 시간을 맞춰 기다린다. 하치와 늘 함께하는 우에노 교수의 행복한 표정은 강아지를 키우고 싶은 필자의 생각을 다시금 부추긴다.
하치의 가족들은 말한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개에게도 견격이 있어. 견격을 존중해줘야 한다구.”
기억해둬야겠다. 견격~
10년 넘게 우에노 교수와 하치의 사랑 넘치는 관계는 가족들에겐 질투를, 그 지역 모든 사람들에게는 즐거움을 준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또 날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행복은 단지 그 대상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바라보는 이들에게도 전염이 되는 법.
그러나 어느 날 뜻밖에도 우에노 교수가 강의 도중 갑작스럽게 뇌일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난다. 이때부터는 쓸쓸하고 슬픈 하치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사계절의 모습이 몇 번씩 화면을 지나가고 시부야역 앞에서 퇴근하는 교수를 기다리는 하치의 애타는 눈빛 때문에 보는 사람의 가슴속에 눈물이 가득 고인다. 그렇게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영원히 오지 않을 주인을 기다리던 하치는 흰 눈이 펄펄 내리는 어느 날 시부야역 앞에 쓰러져 쌓여가는 눈에 덮여간다.
1987년 일본판 영화인데 1923년부터 있었던 실화에 기초해 영화화된 것이다. 그리고 이 미담을 기리기 위해 동상까지 제작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도쿄에 갔을 때 시부야역 근처의 그 동상을 일부러 찾아갔다.하치는 우리나라의 진돗개와 같은 일본의 명견 아키다견으로 천연기념물이라고 한다. 많은 이들을 슬프게 한 이 영화는 1920년대가 배경이라서 고답적인 풍경이 화면에 가득하다. 또한 요즘과는 다른 어색한 연기와 대사까지도 마음을 훈훈하게 해준다. 마치 영화 같은 분위기가 나름대로의 재미를 준다고 할까? 그리고 눈부시게 벚꽃이 흩날리고, 비가 쏟아지거나 낙엽이 날리는 스산한 가을까지도 일본 특유의 분위기로 전한다. 눈이 내리고 쌓이는 아키타 현의 겨울 풍경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영화의 원작을 미국에서 가져가 할리우드 리메이크 버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리처드 기어가 우에노 교수를 연기한 영화를 필자도 보았다. 개와 사람 간의 특별한 교감을 다룬 영화는 많다. 하치 이야기는 자극이 난무하는 세상에 가슴속에 잔잔히 감동을 일으키며 평화로움을 준다.
지인의 페이스 북에 만화계의 큰 별 신동헌 화백의 6월 6일 별세 소식이 올라왔다. 국내 최초의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으로 대종상을 받으신 분이라고 한다. 동생이신 신동우 화백의 만화는 어릴 적 많이 봐서 좀 더 친근하게 기억되고 있다.
어릴 때부터 필자는 만화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방학 때는 하루 종일 만화책 방에 틀어박혀 살아서 저녁밥 때가 되면 엄마가 필자를 찾으러 오기도 할 정도였다.
대전천 개천 옆의 판잣집이 단골 만화방이었는데 우중충한 그곳이 어찌나 아늑한지 온종일을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던 이상한 추억이 있다.
점심때가 되어도 집에 돌아가지 않는 아이들에게 만화방 아줌마가 나누어 주었던 찐 고구마는 참 달콤한 맛이었다.
그때 보았던 라이파이와 제비양, 김 박사는 지금도 기억나는 캐릭터이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던 라이파이는 매우 멋진 모습으로 필자 머릿속에 남아있다.
필자는 만화책 보는 것만을 좋아한 게 아니라 초등학교 시절엔 한 때 만화를 직접 그리기도 했었다.
반을 접은 도화지에 칸을 치고 그림을 그리고 말을 넣어서 가운데를 실로 꿰매어 서투른 만화책을 만들었다.
한창 예쁜 아이들이 발레를 하면서 벌어지는 스토리의 만화가 유행이어서 즐겨 보았는데 필자도 따라서 발레 하는 여자아이들의 질투와 우정에 관한 만화를 그렸으며 주인공 이름은 그때부터도 필자 마음에 쏙 드는 ‘마리’를 주로 썼다.
동네 아이들에게 스케치북 한 장씩을 받고 필자가 그린 만화를 보여주었다.
그냥 공짜로 보여주는 것보다 도화지를 한 장씩 받고 보여주는 게 더 권위 있고 품위가 있어 보이는 것 같았고 아이들이 서로 먼저 보겠다고 종이를 내밀 때 기분이 퍽 좋았던 기억이 있다.
받은 종이는 실제로 아무 쓸모가 없었다. 아버지가 선생님이셔서 우리 집엔 종이가 풍족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왜 그렇게 유치하냐는 말까지 들으면서도 필자는 만화영화를 즐겨보았다.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을 볼 때마다 그 아름다운 그림과 풍경묘사에 마음이 찡할 정도였다.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같은 애니메이션은 장면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큰 감동을 받았다.
TV 프로그램에 ‘빨간 자전거‘라는 만화영화가 있었다. 채널을 돌리다 이 애니메이션을 만나면 꼭 챙겨보게 되었다.
원래 한국만화의 전설이라 불리는 김동화 화백의 만화 ‘빨간 자전거’를 오랜 기획 끝에 애니메이션으로 완성한 작품이라 한다.
어느 시골 마을에 잘 생긴 우편배달부 아저씨가 있다. 이 아저씨는 꽁지머리를 하고 있고 멜빵 있는 바지와 모자를 눌러쓰고 다닌다. 집집마다 편지를 배달해주고 그 편지를 읽어주기도 하는데 요즘은 고지서 전달하는 일이 더 많다고 한다.
이 시골 마을은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남아 농사를 짓고 있는 ‘옛 동’과 이제 막 조성된 전원주택인 ‘새 동’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 길 위를 빨간 자전거를 타고 소식을 전달하는 게 아저씨의 임무인 것이다.
집배원 아저씨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전달하며 슬픔, 기쁨, 아픔, 웃음 등 모든 소소한 작은 일상의 이야기를 배달하고 있다.
오늘 보았던 내용도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였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나는 ( )처럼 ( )이 되고 싶다’ 를 숙제로 내 주셨다.
많은 아이들이 신이 나서 나는 무엇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 반에 다문화 가정의 아이가 한 명 있었다.
피부색이 달라 가끔 놀림을 받기도 했던 그 아이는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 아이의 엄마가 숙제를 보고는 미국 대통령 이야기를 해 주었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도 어릴 때 피부색이 남과 달라 놀림도 받았지만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으니 너도 걱정하지 말라는 격려를 받고 ‘나는 (오바마)처럼 훌륭한 (대통령)이 되고 싶다’라고 숙제를 마친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내용으로 가득한 ‘빨간자전거’라는 애니메이션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남들이 철없어 보인다고 할지라도 나는 어른 동화인 ’빨간자전거‘ 를 계속 사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