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크리스마스이브.
제대 후 복학하고 처음 맞는 성탄절이다. 통행금지도 없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의기투합해 생일을 따져 의형제를 맺은 동갑내기 형과 아우가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각자 장래를 약속한 여인들까지 여섯이서 만났다. 어쩌면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마지막 성탄이 될 것 같은 생각에 이른 시간에 만나 함께 온종일 몰려다녔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라 부처님이 외로우시겠다며 안국동에 있는 조계사로 가서 조용한 경내를 돌며 새해 소망의 기도를 올렸다. 비원에서는 앙상한 가지를 보며 별별 희한한 대화를 나눴다. 시간가는 줄 몰랐다.
호텔로 들어가서는 구멍가게에서 사온 술과 안주를 놓고 각자 앞으로 계획한 삶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새웠다. 되돌아보니 그때 계획한 삶대로 거의 비슷하게 살아온 듯싶다. 시공간을 초월해 아직도 그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잠시 벽에 기대어 졸고 있는데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호텔 직원들은 “근처에 화재가 발생해 거리가 혼잡하오니 투숙객께서는 서둘러 체크아웃하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며 다녔다.
알고 보니 22층의 그 유명한 대연각 호텔이 불타고 있었다. 우선 각자의 집에 전화부터 넣었다. 왜 이제야 전화하냐고 역정을 내시면서도 안심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니 너무 죄송했다. 나중에 신문에 난 기사를 보니 세계 최대 호텔 화재였단다. 기가 막힌 건 160여 명이 사망했는데 여력이 없어 피해 보상금은 놀랍게도 ‘0’.
일찌감치 소풍 끝내고 우리 함께 살 좋은 터 미리 잡으러 간다며 미소 띠고 이승 떠난 형과 자녀들이 있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형수, 대기업에서 전무로 정년을 마치고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막내와 제수씨 그리고 뒤늦게 공부에 미쳐 강사생활은 하늘에서 소명으로 주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돌아다니는 나.
나이 듦이 고마운 이유는 삶은 절대 별게 아닌 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