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마주하는 일은 거울을 보는 일과 같다. 자연이 거대하고 단순할수록 내 안의 껍데기는 사라지고 알맹이만 투명하게 드러난다. 그곳에서 느끼는 나는 아주 작고 또한 아주 크며 힘없고 미약한 존재다. 동시에 우주를 포함한 자연이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의 강렬함을 잊을 수 없다. 여행이란 교실에서 배운 지식들을 현장에서 직접 느끼고 체험하는 시간이 아닐까. 많은 이의 버킷리스트인 우유니(Uyuni). 잘 알려진 소금사막과 바람이 만들어낸 놀라운 기암괴석,
붉은 빛깔의 호수, 안데스의 희귀동물 라마까지 신비함이 가득한 곳이다. 새롭고 아름다운 그 세계로 떠나보자.
해발 3660m,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 ‘라파스’
볼리비아는 남미의 가장 가난한 나라이지만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불가사의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모험심 많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꼭 한 번 가보고 싶어 하는 꿈의 여행지이기도 하다. 우유니 사막에 가려면 먼저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로 들어가야 한다. 볼리비아의 헌법상 수도는 수크레이지만 실질적인 행정수도는 라파스로 ‘평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멀리서 해발 3660m에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면 오색 성냥갑으로 만든 산처럼 보인다. 대표적인 사가르나가 거리 골목에는 안데스 특유의 패브릭과 장신구들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다. 재래시장은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안데스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모자를 사서 쓰고 나니 금방이라도 빗자루를 타고 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부풀린 치마에 중절모를 쓰고 등짐을 진 컬러풀한 의상의 인디오 여성들 모습에서는 이국적인 향기가 느껴진다. 높은 지대라서 모든 길이 언덕처럼 되어 있어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지만 거리마다 가득한 상점들과 사람들 보는 재미에 힘든 줄도 모른다.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신비한 ‘마녀시장’
사가르나가에서도 가장 유명한 골목은 ‘마녀시장(Witch Market)’이다. 이곳엔 말린 라마의 태아와 향료들이 기묘한 냄새를 풍기며 진열되어 있다. 온갖 색상의 돌과 장식품을 작은 병에 담아 행운의 상징으로 팔기도 한다. 남미 대부분의 나라가 그러하듯 이곳 또한 스페인이 전파한 천주교가 안데스의 전통적 제의와 만나 독특한 형태로 발전되었다. 하지만 토속신앙도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천주교도인 인디오들은 하나님께 중요한 소원을 빌 때 살아 있는 라마를 잡아 바치는데, 이때 말린 라마 태아를 올리기도 한다. 온갖 허브와 목각, 희귀한 진열품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빗자루를 탄 마녀가 나타나 마법을 부릴 것 같다. 이곳 골목은 뭔가 음험하면서도 삶의 비밀을 들킬 것 같은 으스스함이 함께 느껴져 색다른 감흥이 일어난다. 1549년에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 산 프란시스코 성당과 레스토랑, 전통 공예품을 파는 상점들, 여행사들이 즐비한 좁은 골목들은 여행자들에게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를 제공해준다. 라파스에 머무는 동안 시간이 허락된다면 달의 계곡(Valle de la luna) 투어를 떠나보자. 달 모양과 흡사하다고 해서 달의 계곡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은 마치 화성에 온 듯한 느낌을 갖게 해줄 것이다.
푸른 하늘과 맞닿은 소금사막 ‘우유니’
볼리비아 남서쪽, 해발 약 3600m에 자리 잡은 우유니 사막(Salar de Uyuni)은 남미를 대표하는 매혹적인 여행지다. 원래 바다의 땅이었던 우유니는 대륙붕의 충돌로 바다 아래의 땅이 하늘 가까이 솟구쳐 오르면서 만들어졌다. 고지대의 공기가 건조해 시간이 흐르면서 바닷물이 증발되었고 이로 인해 생겨난 소금평원 우유니는 언제 가도 아름답지만 특히 12~2월의 우기 때 가면 비가 고인 물에 푸른 하늘이 반사되어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나기도 한다. 서울과 경기도를 합친 것보다 넓은 면적의 거대한 소금사막을 사륜구동차를 타고 가로질러가다가 다른 행성에 착륙이라도 한 듯 소금사막 한가운데 발을 내딛었다. 선글라스를 끼지 않으면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사막의 풍경 앞에서 모두들 카메라 셔터를 눌러가며 인생샷 한 장이라도 건져보기 위해 바쁘다. 소금사막의 광활한 풍경 앞에 서면 삶의 가장 소중한 것들이 떠오른다.
2박 3일의 우유니 사막 투어가 가장 인기
우유니 사막 투어는 초입의 작은 광산마을 포토시에서 시작한다. 이곳에서 사람을 모아 1일 투어, 2박 3일 투어 등 다양한 투어를 한다. 시내에는 많은 여행사가 있다. 경쟁이 심한 만큼 몇 곳을 비교해서 선택하는 것이 좋다. 길이 험해 사륜구동차를 이용해야 하며 투어 비용은 한 대를 기준으로 책정되므로 함께 투어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비용은 낮아진다. 우유니 사막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려면 2박 3일 투어가 좋다. ‘우유니’ 하면 대부분 하얀 소금사막만 생각하는데, 기암괴석으로 가득한 사막 지대와 플랑크톤 작용으로 인해 붉은 빛을 띠는 신비로운 호수, 눈 덮인 산, 수많은 플라밍고를 볼 수 있는 호수까지 희귀한 풍경이 가득하다. 또 소금호텔을 둘러본 후 눈부신 사막 한가운데 앉아서 맛보는 라마 스테이크의 맛은 잊을 수 없다. 조금 전 귀엽다고 쓰다듬어주었던 라마가 입속으로 들어가는 상황은 조금 께름칙하지만 그토록 부드러운 고기는 태어나 처음 맛보는 진미였다.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온천욕
덜컹거리는 지프를 타고 뜨거운 태양 아래를 달리는 동안 바라보는 창밖 풍경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바람이 깎은 예술조각들이 가득한 협곡과 붉은 빛깔의 신비로운 호수를 지나 무리지어 날아오르는 플라밍고를 만날 때까지….
이토록 짧은 기간에 신비로운 풍광을 흠뻑 경험할 수 있는 곳도 드물다. 변화무쌍하고 이국적인 향기를 열린 마음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준 건 함께 차를 타고 2박 3일 동고동락한, 칠레와 독일에서 온 친구들이다.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할 때는 국경이나 언어 장벽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칠레에서 온 친구는 어디선가 커다란 타조 알을 주워와 우리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여행 마지막 날, 칠레 국경을 넘기 전에 만난 노천 온천은 축복이었다.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물도 잘 나오지 않는 곳에서 씻지도 못한 채 다니다가 대자연 속에 거짓말처럼 준비되어 있던 따스한 온천을 만나자 모두들 앞뒤 재지 않고 옷을 벗어던지며 뛰어들었다.
볼리비아의 자연은 거칠고 투박하지만 곳곳에 반짝이는 풍경이 많다. 팀 케일은 ‘나를 유혹한 낭만적인 곳들’이라는 책에서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먼 곳까지 가는 색다른 모험을 꿈꾸었다. 이런 꿈은 가슴 설레게 하는 꿈 아니었는가?” 하고 묻는다. 그의 말처럼 그 시절처럼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고 있다면 지금 당장 떠나야 한다. 안 그러면 영원히 떠나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이루지 못한 꿈을 아쉬워하며 자신에게 큰 죄를 저질렀다며 안타까워할지도 모르니까.
travel tip
항공>> 한국에서 볼리비아 라파스로 가는 항공편은 미국과 페루를 경유한다. 라파스에서 우유니는 국내선 항공이나 버스를 이용한다. 우유니 마을에 있는 여행사를 통해 다양한 사막투어에 참여할 수 있다. 당일치기로 소금사막을 즐기는 1일투어와 우유니를 출발해 칠레 북쪽의 사막도시 산페드로데 아타카마로 가는 2박3일의 투어가 인기가 좋다.
비자>>
볼리비아는 여행시 비자가 필요한 나라다. 여행비자의 경우 30일 단수비자가 발급된다. 한국에서 볼리비아 영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아 출국할 수도 잇지만 비용이 비싼 편이다. 라파스 국제공항으로 입국시 한국에서 준비하는 것보다 저렴하고 간편하게 비자를 받을 수 있다. 남미의 다른 나라를 거쳐서 볼리비아로 들어간다면 페루 쿠스코영사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영사관, 브라질 상파울루 영사관, 칠레 산태아고 영사관 등에서 무료로 발급이 가능하다.
고산병>>
해발3600미터에 위치하고 있어 간혹 고산증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지만 라파즈에서부터 오는동안 어느정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유니에서 고산증을 호소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산병은 낮은 지대에서 해발 2000-3000미터 이상의 고지대로 이동했을 때 산소가 희박해지면서 생기는 신체반응으로 피로, 두통, 호흡곤란, 체온저하 등이 있다. 대처방법은 낮은 지대로 이동하는 가장 좋으며, 물을 충분히 마시고, 천천히 걷는 것도 도움이 된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가수 남궁옥분 님이 선배 가수 송창식 님에게 쓴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자연인 송창식!
참으로 맑고 하얀 웃음이 아름다운 당신!
소년처럼 순수하고 맑고 구김살 없어 보이는 당신!
30년을 넘게 가까이서 바라보며 지내오는 동안
일관성 있었던 당신의 행동들로 미루어볼 때
그 누가 뭐라 해도 당신의 독특하고 기이한 그 모습들도
당신 그 자체임을 인정합니다.
그러하기에 존경하는 마음을 조금도 늦춰본 적 없는 열혈팬임을 먼저 밝히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당신은 마치 인간계와 신선계를 넘나드는 도인처럼
눈빛으로 일단 압도하시며 마음속을 훤히 읽고 계신 것 같아서
늘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했기에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심안(心眼)을 통해 제 안의 크고 작은 때 묻은 마음들을
당신께 들키는 것도 행복입니다.
언제나 고요한 당신의 한마디 한마디는 큰스님의 법문처럼
울림이 있었고 사랑이 쌓여 천사의 경지에 계신 수도자들의 무언의 가르침 같은 걸 경험하게 하시며 어떠한 조바심도 흐트러짐도 없이 눈을 맞춰주시고 최선을 다해 얘기를 들어주시니 당신을 만나면 언제나 행복합니다.
그렇게 평화로운 당신 곁에서 얼마나 편했는지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노래!
당신의 노래는 근본부터 다른 곳에서 오는 듯싶습니다.
깊은 단전에서 끌어올리는 붉은 목소리는
만년설을 녹이고도 남습니다.
당신의 몸 가장 깊은 곳에서 공명이 되어 터져나오는 소리는
세상 어떤 악기에도 비유할 수 없이 언제나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그 주옥같은 노래들을 기타 하나에 실어 엄청난 가창력으로 토해내는 당신!
그 노래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대한민국 최고입니다.
어찌 그리 많은 장르의 좋은 노래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지,
어찌 그리 많은 노래들을 소화해낼 수 있는 건지,
자신이 만들고 불러서 알려진 노래만으로 무대를 채우는 가수는
당신이 유일하기에 당신이 더욱 존경스럽습니다.
반백 년을 그리 지켜주신 그러한 당신이기에
천년이 지나도 대한민국 가요사에 전설로 남을 것입니다.
왜 밤에만 당신이 깨어 있어야 하는지는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지만 밝은 시간 태양 아래서 당신을 만났던 게 언제였던가?
1980년대 중반쯤이었으니 참 오래된 것 같습니다.
밤에만 당신이 다니는 까닭은 나름대로의 수행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까다로울 때도 있는 당신!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게 금전이 아니라는 것쯤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당신께는 충분한 이유가 있고
그것이 진실에 가깝다는 걸 아는 사람들 중에 제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특별한 당신의 옷들만 봐도 당신의 정신세계를 짐작할 수 있고
얼마나 우리의 전통을 지키려 함인지 알 수 있지요.
당신의 독특하고 신비한 삶이 빛나는 이유는
당신의 영혼이 맑고 순수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주제넘은 생각을 해봅니다.
당신은 지금을 살면서도 지난 몇 생(生)과 앞으로 올 세상을 모두 알며 가는 사람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랬기에 1970년대에 만든 노래들이 30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사람들의 가슴에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겠지요.
혹시 당신이 지구인보다 훨씬 앞선
어느 행성의 외계인(?) 아닐까 의심을 해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당신의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히트곡들 때문에 더러는 배가 아프기도 하지만
당신의 노래가 제 무대의 단골 레퍼토리로 자리하고 있는 한
당신을 미워하기는 힘들 듯싶습니다.
머릿속에 맴도는 당신 노래들만 꺼내 불러도 며칠 밤은 새워야겠지요?
당신이 씨 뿌리고 다져놓은 옥토에서 당신의 노래를 지켜내고 부르며 자라온 많은 사람들!
당신의 노래를 듣고 노래를 시작하게 된 또 다른 무리들!
그 속에서 제가 당신을 향해 달려가면 만날 수 있는 게
가수로 살면서 누리는 엄청난 특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오래오래 당신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오래오래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정말 오래오래 당신의 영혼을 깨우는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당신의 환갑날!
지인들과 여럿이 달려간 미사리 카페!
다시 한 살 되셨다며 기뻐하시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아직도 미사리에 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우리에겐 축복이지요.
한편으론 귀한 당신이어야 하는데
누구나 달려가서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현실이 싫을 때도 있지만
그렇게 세상과의 소통을 단절하지 않으시는 당신이기에
다행이라는 생각도 함께 옵니다.
모두의 청춘 시절부터 지금까지 영원한 친구 송창식!
그러한 당신을 제가 감히 사랑합니다.
진심이 느껴지는 당신이기에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세배 받을 나이가 되었지만
이번 설날 당신을 찾아뵙고 응석부리고 싶습니다.
>>가수 남궁옥분
1979년 ‘알게 될 거야’, ‘보고픈 내 친구’를 발표하면서 데뷔했다. 1981년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가 각종 가요차트 1위를 차지하면서 일약 스타가 됐다. 1982년, 1983년 최고 인기 가요상을 수상했다. 네이버밴드 ‘남궁옥분과 수다’, ‘남궁옥분 가수다’를 통해 그녀의 수다를 들을 수 있다.
2018년 1월 1일. 짝지의 60세 생일이다. 이제는 헤아리기도 버거운 시간을 지내왔다는 사실이 낯설다. 그 많은 시간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어쩌다 보니 같이한 세월도 34년이다. ‘인생 금방’이라는 선배들의 푸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그 시절 데이트는 대부분 ‘두 발로 뚜벅뚜벅’이었다. 좋아서 걷고, 작업하려고 걷고, 돈이 없어서 걷고, 사색하느라 걷고. 애꿎은 다리만 중노동하듯 시달렸다. 남자 친구가 학교에서 여자 친구를 만나 집까지 데려다 주다가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서 잤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남산, 능동 어린이대공원, 경복궁, 덕수궁, 동숭동, 인사동, 명동, 북한산, 수락산, 소요산 등등 참 많이도 걸었다. 그중 최고는 조국순례대행진! 8월 1일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대학생들이 한곳에 집결해 광복절 기념식을 하는 국가적 행사였다. 학교당 4인 1조로 참여하는 이 걷기순례에서 많은 추억과 인연이 만들어졌다.
필자 팀은 김천에서 출발해 청주까지 꼬박 14박 15일을 걸었다.
8월 한여름 태양을 머리에 이고 걷던 수많은 청춘의 진한 땀 냄새가 가득했다. 필자 인생에서 더 이상 가보지 못한 길들이다. 50대에 시작한 등산에는 그 시절에 대한 로망이 묻어 있음을 본다. 특히 지리산 종주 산행은 그때의 용기를 떠올리게 하는 자조의 시간이기도 했다.
조국순례대행진 때 추억을 만들어준 몇몇 인연이 58년 개띠였다. 아삼삼한 기억을 돌려보면 온통 개판이다. 참가자들의 학번이 대부분 77, 78이었으니 말이다. 두 발 데이트에 딱 어울리는 것은 영화와 연극 관람이다. 국도극장, 대한극장, 명보극장, 단성사, 피카디리극장, 동숭동 소극장, 덕수궁 옆 창고극장, 명동 소극장, 장충동 국립극장. 그 이름만으로도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DJ의 에코 멘트와 리퀘스트가 있던 음악다방. 어둠침침했던 레스토랑! 서양 필이 나던 커피 맛! 공강시간이면 내 아지트처럼 달려갔던 구석진 그곳! 학교 주변 호프집과 시장통 선술집 기억은 거의 없다. 그 주님(?)과 친하지 못한 관계로 특별한 에피소드도 없다.
그 시절 인기 있는 장소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또 있다. 바로 동네마다 들어서 있던 작은 서점과 만화방이다. 서점도 데이트 장소로 인기였다. 필자의 취미이자 특기인 독서는 만화책 읽기와 연애시집 사기에서 시작됐다. 가끔씩 집 정리를 하다가 발견되는, 자식 나이보다 더 오래된 누런 책을 아이에게 권해본다.
레코드판도 서점에서 구입했던 것 같다. 용돈 아껴 한 장씩 사 모았던 LP판. 이제는 골동품이 되었다. 서점 한쪽에 LP판을 매입한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추억을 팔 수는 없다! 하고 간직하고 있지만 보관이 어려워 애물단지다. 최근 턴테이블을 찾아 모양을 갖춰봤다. 어느 날 한 번은 꼭 틀어볼 셈이다. 옷과 가방을 구입할 때는 명동이나 이대 앞, 동대문시장이 최고였다. 전자제품은 세운상가나 용산전자상가로 갔다. 그러고 보니 당시 핫 아이템이었던 소니 워크맨을 사러 신촌 미제시장까지 갔던 기억이 난다.
우연히 들어갔던 당구장은 남자들과 담배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금녀의 공간이라기에 분위기가 어떨지 조금 궁금했는데 딱히 충격적이거나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없었다. 40대 초반에 배운 포켓볼. 담배 냄새 없는 집 근처 당구장을 찾아 열공했던 시절도 있다. 주인장은 온종일 당구장에서 큐대를 들고 낑낑대는 필자를 보고 “아줌마! 밥하러 안 가세요?” 했다. 그러면 “밥 미리 해놓고 왔어요~” 했다. 그것도 벌써 20년 전 일이다.
그 시절은 포크송이 대세였다. 송승환과 왕영은이 사회를 보던 1980년대 인기 음악 프로그램 ‘젊음의 행진’에서 이어진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해변가요제의 등장으로 누구나 한 번쯤은 통기타 메고 가요제 참가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필자도 길거리에서 밴드 보컬 제안을 받은 쑥스러운 기억이 있다. 교내 축제 공연이 있던 날, 술자리에서 급조된 짝지네 팀 밴드는 딕패밀리의 곡 중에서 신중하게 ‘나는 못난이’를 간택(?)해 참가했다. 공연하는데 전기가 나가 비록 앰프와 마이크는 꺼졌지만 젊은 혈기는 청춘의 생목으로 끝까지 완창하는 투지를 발휘했다. 과 동기의 의리로 베이스 담당 짝지에게 꽃다발 들고 응원을 갔건만 노래 제목처럼 되어버린 기억은 지금 떠올려도 재미나다. 결과와 무관하게 지난 시간들은 모두 그리운 추억이 된다.
이제 그 청년은 한쪽 어깨에 통기타를 메고 ‘동해 하조대해수욕장’이라는 간판을 배경으로 빛바랜 사진 속에 서 있다. 나팔바지에 청재킷을 걸치고 긴 머리를 쓸어 올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고혈압을 조심하는 육순의 장년이 되어 있다.
필자는 견공(犬公) 세 분과 산다. 12세 레드 닥스훈트와 2세 믹스 유기견, 그리고 58개띠 짝지 그분이다. 34년을 동고동락한 그분과의 세월보다 선한 눈빛과 따스한 체온, 변함없는 신뢰의 견공 두 마리에게 더 맘이 간다.
‘호모 사피엔스 짝지 vs 거의 호모 멍멍이우스’
필자와 동종이신 그분은 두 마리 견공에게 질투와 부러움을 대놓고 내비친다. 무엇을 해도 ‘개판’이 된다며 툴툴대는 58개띠 짝지님의 씩씩 건재함에 감사를 보낸다.
“저기요~ 앞으로 남은 시간 사이좋게 지내봅시다!”
자연은 우리에게 신비스러움을 안겨준다. 인간의 힘이나 손재주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경이로움 그 자체를 주곤 한다. 필자는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이야기 쓰기를 좋아한다. 특히 겨울철이면 그런 일에 빠져든다.
눈이 내리는 절기, 소설(小雪)을 기점으로 산야의 크고 작은 피사체에 서리가 내려앉는다. 이른 아침이면 태양의 부드러운 빛에 서릿발은 한 점의 영롱한 보석처럼 빛난다. 낙엽 된 이파리와 가느다란 줄기에 맺힌 서리는 한 송이 꽃으로 태어난다. 이름하여 서리꽃이다. 차가운 겨울철에만 만날 수 있다. 그것도 이른 아침에 부지런함을 떨어야 된다.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커야 한다. 샛별이 반짝이는 이른 새벽녘에 칼바람이 빚은 조각 꽃인 셈이다. 수줍음도 많은 듯 태양이 동녘 하늘을 솟아오르면 서서히 모습을 감춘다. 오밀조밀 세세히 만들어진 조각품은 마치 동화 속 겨울 왕국을 연상하게 한다. 가까이서 천천히 살펴보면 신비로운 모습에 숨이 멈춰진다. 고운 자태에 넋을 잃는다. 사진작가는 이러한 모습을 발견하면 더없는 기쁨에 환희를 지른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필자의 손이 가늘게 떨린다. 조심스레 구도와 앵글을 바꿔가며 셔터를 누르고 또 누른다. 무아지경이 된다. 행복한 겨울 아침이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누구에게 보여줄까? 사랑하는 당신이다. 셔터를 누르던 손길을 멈추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운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감동에 겨워하는 당신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필자의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 오늘 아침도 카메라로 수채화, 서리꽃을 그리며 마냥 행복해진다.
여행에 대한 정의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 세상에 살면서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여행 아닐까. 이왕이면 평소 사는 곳과 다른 곳일수록,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일수록 완벽한 여행지가 되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지. 하지만 누군가는 별을 보고 있다네”라고 했던가. 살면서 꼭 한 번은 밤하늘에 펼쳐지는 신비로운 빛을 만나보고 싶다. 그 황홀한 광경을 보고 나면 우주는 더욱 위대해 보일 것이고 우리네 삶도 조금은 숭고하게 느껴질 것 같다.
최고의 오로라 관측소, 옐로나이프!
전 세계적으로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 같은 북구의 나라와 미국 알래스카, 캐나다 화이트호스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중 옐로나이프는 나사(NASA)가 지정한 오로라 관측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이다. 여름에도 오로라를 볼 수 있지만 11월에서 4월 사이 밤이 긴 겨울이 가장 좋다.
북극광(northern light) 혹은 극광이라고도 불리는 오로라는 라틴어로 ‘새벽’을 뜻한다. 태양에서 방출된 플라스마 입자가 자석 성질을 가진 지구의 극지방 주변을 둘러싸면서 붉은색이나 녹색, 파랑, 노랑, 분홍 등 다양한 색의 자기 에너지 띠로 나타나는 것이다.
엘로나이프로 향하는 프로펠러 비행기 안. 일본인들과 중국인들, 영국 등지에서 온 유럽인들, 그리고 캐나다인처럼 보이는 가족들도 보인다. 일본은 오로라 여행이 대중화되어 일반인과 신혼여행객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오로라가 뜰 때 아기를 가지면 그 아기가 천재가 될 확률이 높다는 믿음 때문이라지만, 혹한과 어둠을 뚫고 세상에서 가장 보기 어려운 신비로운 빛을 함께 경험하는 일은 두 사람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을 선사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비행기 안에서 엷은 환호가 터져 나온다. “저기… 저기… 오로라다.” 반대편에 앉은 승객이 창 쪽을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자 기내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창밖으로 향한다. 나도 벌떡 일어나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깜깜한 하늘에 두 줄기 오로라가 어른댄다.
“아~ 저것이 말로만 듣던 오로라구나.”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오로라, 그것은 마치 바닷속의 돌고래를 보는 것과 같다. “고래다!” 하고 소리치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신기루 같은 존재 말이다.
오로라 빌리지를 통하면 모든 예약이 하나로
오로라를 보러 옐로나이프를 간다면 오로라 빌리지(Aurora Village)를 통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 한국에서 비싸기로 유명한 캐나다 구스는 영하 50도까지 내려간다는 이곳 옐로나이프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평소엔 입을 일이 없기에 오로라 빌리지에서 대여해준다. 방한 점퍼와 바지, 마스크, 두터운 신발과 장갑까지 착용하고 나면 마치 우주복을 입은 듯한 기분이 든다. 이제 저 하늘을 둥둥 떠다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옐로나이프 오로라 사진마다 등장하는 아름다운 원주민 텐트 ‘티피(teepee)’ 안엔 따뜻한 화로가 있고 간단한 수프와 빵, 차와 커피, 코코아 등이 준비되어 있어 장시간 오로라 사진을 찍거나 관측하다 꽁꽁 언 몸을 녹일 수 있다.
캄캄한 어둠속을 달려 오로라 빌리지에 도착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스고이”, “스고이”라는 일본말과 외국인들의 환호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뛰어나가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과연 지상에서 보는 오로라는 어떤 모습일까? 정말 사진에서처럼 그렇게 환상적일까? 깜깜한 밤하늘에서 처음엔 희미한 듯하더니 점점 더 강렬하게 하얀 빛줄기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20초. 마침내 신의 영혼인 듯, 천상의 빛인 듯, 신비롭고 영험한 기운이 내게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잊지 못할 오로라 여행이 시작되었다.
낮 동안의 신나는 북극 체험
전날 밤 오로라를 보고 숙소에 돌아온 시각은 새벽 3시. 이곳에서의 일정은 밤에 오로라를 보기 위한 기다림으로 채워진다. 바쁠 것 없는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내다보는 창밖 풍경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영화 속 엘사가 살던 ‘겨울 왕국’ 그 자체였다.
밤엔 매일 오로라를 관측하고, 낮엔 다양한 북극 체험을 했다. 얼어붙은 그레이트슬레이브 호수를 걸어보는 아이스로드(ice road) 체험, 시베리안 허스키를 타고 하얀 숲을 달리는 개썰매 체험, 이누이트 원주민들이 신던 스키를 신고 산속을 트레킹하는 스노슈잉(snow shoeing) 체험이 대표적이다. 이런 액티비티한 경험은 어디서도 해볼 수 없는 이색 체험들로 반드시 해보기를 권한다. 노스웨스트 의회 청사나 박물관에 들러 이곳의 역사를 알아보는 것도 흥미롭다. 노슨이미지(Nothern Image)에서는 원주민이 직접 그리거나 만든 예술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마지막 밤, 오로라를 보며 신에게 감사를
드디어 떠나기 전 날 마지막으로 오로라를 보러 가는 길, 호텔 로비의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밤 9시의 기온은 영하 33도, 체감온도는 영하 40도!!!!! 실제로 체험해보기 전엔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 기온이다. 그러나 언제나 상상이 더 무서운 법. 막상 가보면 별것 아니다. 오로라 빌리지에 도착하니 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오로라도 별이나 달처럼 날이 맑을수록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티피 안에서 코코아를 마시고 있을 때 밖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4박 6일의 여행기간 중 가장 눈부시고 화려한 오로라가 나타나줬다. 영하 40도의 혹한과 어둠을 뚫고 마지막 날 가장 아름다운 신의 영혼을 만날 수 있음에 감사의 마음이 북받쳐 올라왔다. 좀체 보기 힘들다는 핑크오로라도 볼 수 있었다. 마시초 갓(Mahsi-cho, god)! 원주민어로 “신이시여, 감사합니다”라는 의미다. 사진 속에서만 보던 ‘오로라의 아우라’를 실제로 체험하고 나니 오랫동안 꿈꿔왔던 소원 하나를 이룬 느낌이다. 모든 여행은 눈을 뜨고 꾸는 꿈이라 했는데,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꿈을 꾼 듯했다. 지구별이 아닌 다른 행성으로 다녀온 꿈 말이다.
travel tips>>
항공편>>인천-밴쿠버-캘거리-옐로나이프로 연결된다. 밴쿠버에서 옐로나이프로 바로 가는게 없고, 캘거리를 거쳐야 하므로 비행기를 최소한 세 번을 바꿔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가는데만 하루가 소요되는 힘든 길이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오로라 빌리지 예약 시스템>> 옐로나이프 여행의 핵심은 오로라빌리지이다. 모든 여행 시스템은 오로라빌리지를 중심으로 매우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개별여행자는 오로라 빌리지를 통하면 방한복 대여 및 오로라관측에 대한 일체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
Aurora village (www.auroravillage.com)4720 Northwest Territories Ltd. Yellowknife, NT, CANADA /Tel 867-669-0006
추천숙소>>
옐로나이프엔 혹한과 어두음을 피해 안락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숙소가 다양하다. 필자의 경우, 더운 나라에 갈때엔 저렴한 게스트하우스 등을 이용하는 편이지만 이곳은 혹한의 환경이라 가장 좋은 익스플로러 호텔을 선택했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호텔급에서부터 inn, B&B, 게스트하우스, 로지, 콘도스타일까지 다양하므로 취향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숙소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시내 중심의 관광 인포메이션을 제공하는 비즈니스 센터에서 얻을 수 있다.
Explorer Hotel 익스플로러 호텔 엘리자베스 여왕도 묵고 갔다고 해서 로비에 사진도 걸려있는 가장 럭셔리한 호텔이다. 그날그날의 일기예보는 물론 친절하고 품격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며 다운 타운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이 용이하다. 로비와 방에서 무료인터넷도 가능하다. (www.explorerhotel.ca) P.O.Box 7000, Yellowknife, NT, CANADA Tel 867-873-3531
추천레스토랑>>
극지방에 왔으니 다른 곳에서 먹어볼 수 없는 특이한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된다. 익스플로러 호텔 1층에 있는 트레이더스 그릴(Trader's Grill) 레스토랑은 극지방에서 잡아올린 신선한 해산물과 원주민 전통요리인 순록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늑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Address 4823-49th Avenue, Yellowknife, NT, CANADA
Tel 867-873-3531
추천 준비물>>
오로라 사진은 핸드폰으로는 잘 찍히지 않는다. 일정시간 이상 노출을 해야 하므로 오로라 사진을 찍고 싶다면 트라이포드(삼각대)와 수동설정이 가능한 카메라와 광각렌즈(18mm이상)를 준비해가는 것이 좋다.
★여행경비400만원 내외
서정주시인은 말했다.
자신을 키워준 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나를 키워준 것은 8할이 그리움이었다.
열네살 여름.
태양이 이글대는 아스팔트 포도 위에 부서지던 것은 “레이 찰스”의
‘I can't stop loving you’였고 내 가슴 또한 부서지고 있었다.
사랑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단테가 베아뜨리체를 피렌체의 한 다리 위에서 만난 것은 그의 나이 아홉 살 때였다.
그 후 단테는 평생 동안 그녀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되는데 그의 작품 ‘신곡’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됐다.
야학교의 B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내 나이 열네 살 때였고 이후 그것은 지워버릴 수 없는 화인이 되어 버렸다.
세월이 갈수록 숨이 막히도록 좋아할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분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이후로 어떤 사람도 내 마음을 그 선생님 같이 뿌리째 흔들어놓지는 못했다.
그것은 하얀 도화지 위에 뿌려진 첫 번 째 물감이므로.
나보다 일곱 살이 위인 B선생님은 전체적으로 약간 마르신듯한 호리호리한 체격에 눈매가 깊숙했으며 얼굴형은 군살이 붙지 않고 단아한 모습이어서 마치 그리이스 조각 같은 분이었다.
또한 키가 크신 B선생님은 걸음걸이가 ‘사뿐사뿐’하셨다.
장로님의 맏 아드님이며 독실한 크리스챤인 선생님은 어느 모로나 깍듯한 모범생의 면모를 보이셔서 나쁜 행동 옳지 않은 말은 전혀 하지 않으실 분 같았다.
아니 나쁜 면으로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하실 분 같았다.
한마디로 그 당시 내 눈에 비친 그분은 완벽한 이상형의 남성상이었다. 우리에게 ‘모짜르트의 자장가’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의 진지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잘못하면 몇 번이라도 되풀이해서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의 열성. 그것은 제자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리라.
음악을 깊이 사랑하셨으며 노래를 썩 잘 부르셨던 선생님이 좋아하시던 노래는 ‘고향의 폐가’ ‘너와 나의 시간’ 등이다.
우리에게 과학을 가르쳐 주셨던 B선생님이 방학숙제로 모터 만들기를 내주셨을 때, 다른 애들은 만들 엄두도 못 내었지만 나는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재료를 수집하였기에 무사히 모터를 만들 수 있었고 그것을 보신 B선생님의 칭찬을 들으니 그동안 만드느라고 힘들었던 기억은 말끔히 사라지고 가슴이 금 새 기쁨으로 가득해졌었다.
서둔교회를 다니던 B선생님이 그곳에서 성가대를 지휘하실 때 뵙게 되면 너무도 멋지게 보여서 마치 ‘꿈속의 왕자님’ 같았다. 그 진지한 눈빛에, 날렵한 몸짓이라니.
그렇지만 다른 애들은 춤을 추는 것 같다고 ‘킥킥’댔고 나는 그 애들이 너무도 미웠다.
그 애들 중에는 내 초등학교 때부터의 단짝 친구 정재화도 있었는데 그때만큼은 그 애마저도 미웠다
어느 해 방학동안에는 내가 버릇없이 엽서에다 소식을 담아드렸는데(졸필이라서 편지지에 많은 글씨를 쓰기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선생님은 곧바로 답장을 편지로 해 주셨다.
그때 선생님은 ‘고사리 같은 너의 손으로 쓴 편지 잘 받아 보았다’라고 쓰셨는데 의아스러운 것은 아무리 내 손을 앞으로 제쳐보고 뒤로 뒤집어봐도 고사리 같이 작은 손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엽서를 사용했는데 선생님은 편지로 보내 주신 것이 못내 죄스러우면서도 선생님의 성실성에 머리가 조아려졌다.
이 일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덕목 중 성실성에 후한 점수를 매기는 내게 선생님이 결정적으로 좋아지는 계기가 됐다.
그냥 흠모하였다.
멀리서라도 그분의 모습만 뵙게 되면 반가움에 가슴이 뛰고 너무 좋아서 숨이 막혀왔다. 친구들은 그 선생님이 오신다는 거를 내 모습을 보고 알았다. 친구들과 놀던 중에도 B선생님 모습만 보였다하면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이 빨개졌기에. 내 초등학교 동기동창생의 언니가 그 선생님과 데이트 중이라는 말을 듣고는 성실하고도 선한 그 언니가 이유도 없이 미웠다. 선생님이 배구를 하려고 상의를 벗어서 내게 맡기셨을 때는 어찌나 소중하던지 조심스럽게 안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구겨지면 안 되니까.
B선생님이 야학교를 떠나실 때는 내 가슴이 온통 ‘휑’하니 뚫려 버린 듯한 허전함과 세상을 모두 잃어버린 듯한 망실감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깊은 슬픔에 빠져버렸다.
나의 기쁜 맘 그대에게
바치려 하는 이 한 노래를
들으소서 그대를 위해 지은 노래
............................
쇼팽의 연습곡에 가사를 붙인 '이별의 노래’인데 B선생님이 우리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쳐주고 떠나신 곡이다. 내 나이 16세때 일이었고 그후 십여년이 넘어서도 나는 어디서라도 그 연습곡만 들으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이별의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았던 것이다.
야학을 졸업한지 2, 3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그날 버스에서 B선생님을 뵌 나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랐다. 선생님은 ROTC마크가 새겨진 서울대학교 교복차림이었다. 너무 좋아서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던 나는 선생님께 조용히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저…… 할 말이 있는 데요’
사무치게 그리웠던 선생님의 깊숙한 눈이 나를 응시하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는 이렇게 물으셨다
‘그래....... 뭔데?’
그리고는 나를 따라 내리셨다.
비가 온 뒤의 연습림은 온통 청신한 초록빛이었다.
갈참나무의 여린 새순은 연초록으로 빛났고 오솔길의 기다란 풀잎에는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 내리고 있었다.
흰 구름이 이따금씩 흐르고 있는 파아란 하늘을 쳐다보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궁금해 하시는 선생님 안색을 살피다 나는 어렵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 저…’
‘있잖아요 ………’
‘저기요……만 몇 번 하다가 그만 꿈이 깨어버렸다.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어요’ 꼭 한마디 하고 싶었는데 끝내는 그걸 못 해보고 꿈에서 깬 나는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스스로를 질책했다.
‘이 바보야 생시에 고백을 못하면 꿈에서라도 해야지’
세익스피어가 말했다.
‘짝사랑처럼 고독한 것은 없다’고
모파상의 단편 ‘사과나무 아래서’와 ‘의자 고치는 여인’에 나오는 가련한 두 여주인공들을 나와 동일시하여 자신이 너무 비참한 신분임을 뼈저리게 느끼곤 했다.
사랑이란 익모초 달인 물을 삼키는 것이다.
그리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도 하지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추억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
청마 유치환시인의 ‘그리움’과 시인 조병화님의 ‘추억’을 몇 번이고 되뇌이며 아픈 가슴을 홀로 달래었다.
좁디좁은 야학교운동장을 천천히 몇 바퀴씩 거닐며.
또 유치환님의 '바위’를 좋아한 이유는 ‘차라리 애증의 갈등을 느낄 수 없는 바위가 되었으면'하는 내 심정을 너무도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서였다.
선생님께 무언가 마음의 선물을 꼭 드리고 싶었던 나는 며칠간을 골똘히 생각해 본 결과 일기장이 가장 적당할 것 같았다.
있는 돈을 다 긁어모아 봤다.
시내의 큰 문방구점을 몇 곳을 전전하여 간신히 마음에 드는 것을 살 수 있었다.
일기장 뒷장에다 ‘난이 드리옵니다’ 라는 짤막한 글을 적는 데도 워낙 졸필이기에 연습장에다 몇 십번을 연습해서야 겨우 적을 수가 있었다. 포장지도 제일 예쁜 것으로 골라서 포장을 했으며 리본으로 꽃모양을 만들어서 붙인 후 서둔 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고 계신 선생님을 찾아갔다.
교회의 뾰족탑도 전나무 위에도 온통 은세계였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캐롤 송을 열심히 지도하고 계신 선생님의 모습을 뵌 나는 눈이 20cm이상 쌓여 있는 교회 창문 밖에서 언 발을 구르며 무려 2시간 이상을 기다렸다.
나의 뜻밖의 등장에 의아해 하시는 선생님께 ‘선생님 이거요’ 모기소리로 말하며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순간 깊숙한 눈매에 진지한 표정의 선생님은 다소 당황해 하시다가는 '고맙다' 웃으며 받으셨다.
다시 한번 내게 따뜻한 미소를 보낸 후 발길을 돌리시던 선생님이었다. 춥고 힘든 줄도 모르고 기다리던 그 시간이 행복했고 선물을 전해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 가슴은 온통 기쁨으로 출렁거렸으며 발이 땅에 닿나 싶었다.
엄마의 결혼생활을 어려서부터 쭉 지켜봤던 나는 근본적으로 결혼에 대해서 회의감 내지는 환멸감을 가지고 있었다.
B선생님을 남몰래 혼자 애 태우며 10년 이상의 세월을 외곬수로 흠모했으면서도 내 스스로가 ‘결혼’이라는 단어와는 결부시키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다는 것 자체가 불결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스물두세살 때 선생님이 결혼하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 가슴이 아팠던 나는 결혼식장에는 차마 가 보지도 못하고서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았다.
눈물이 강물이 되도록 울고 또 울었다.
장선생님이나 진선생님 등 다른 선생님들의 결혼식에는 다 참석을 해서 축하를 해 드렸으면서.
‘선생님, 난이 여기 있는데 어디로 가시옵니까’
그날 일기장에는 이렇게 쓰여졌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어느 누구의 것인들 소중하지 않으랴.
누가 감히 걸인부부의 사랑이, 사랑을 위하여 왕관을 포기한 윈저공의 사랑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거짓 없는 사랑은 위대하다.
내 짝사랑이 운명적으로 비극인 것은, 나는 그분을 결혼 대상자로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서부터 끝까지 단지 동경의 대상이었고, 언제나 먼 하늘의 별님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이 막상 다른 여자와 결혼했을 때는 천지가 무너진 듯한 절망감으로 목을 놓아 울었으니 이 무슨 모순된 행동이었던가. 그분을 연모하던 내가 무엇보다도 괴로웠던 것은 그분이 내 진심을 하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내 순정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고 고결한 것인데도 도덕적으로 전혀 흠이 없는 그분은 선생님으로서의 가슴은 따뜻했지만 여자인 나를 대하는 눈길은 차갑기만 했기에 나는 늘 거기에 상처를 받고는 못 견디게 괴로워했다.
나 스스로에게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며 스칼렛이 자기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모든 허물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레트한테는 북풍 같이 차갑고 상처만 주면서 이미 다른 여자의 남편인 애쉴리만 생각하는 것을 너무도 안타까워했다는 점이다. ‘저 여자는 왜 저렇게도 멍청한가’
그러한 내가 현실 속에서는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미 결혼을 해 버린 B선생님만을 가슴에 담아 두고 연모하느라고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내게서 떠나 보냈다는 사실이다.
야학 시절 친구들은 개성이 너무 강하고 고집불통이며 지독한 외곬수인 나를 스칼렛이라고 했었다. 스칼렛과 성격상 이미지가 흡사하다고. B선생님은 나의 애쉴리였다.
SBS 예능 프로그램 ‘동상이몽2’에 출연해 사랑스럽고 쾌활한 모습을 보이는 배우 추자현의 남편, 중국 배우 우효광은 ‘우블리’로 불리며 시청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장훈 감독의 영화 ‘택시운전사’에 독일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이 송강호와 함께 주연으로 나서 10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등 외국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KBS2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미국 배우 데이비드 맥기니스가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해 시청자에게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국내에서 최고 인기를 누릴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외국에서 K-Pop 열풍을 고조시키고 있는 아이돌 그룹 엑소의 레이는 중국 멤버이고, 트와이스의 9명 멤버 중 대만 멤버 쯔위와 일본 멤버 모모, 사나, 미나 등 4명이 외국인 멤버다.
최근 한국 방송 프로그램과 영화에 출연하는 외국인 배우가 급증하고 한국 무대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가수가 늘고 있다. 방송·영화의 외국인 연예인과 외국인 출연은 대중문화의 트렌드로 부상했고 외국인 멤버가 포함된 아이돌 그룹 활동은 대중음악계의 대세가 됐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 공연 무대의 일회성 출연에서 벗어나 아이돌 그룹의 지속적 활동과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의 장기간 출연을 위해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연예인도 늘고 있다. 또한, 외국인을 전면에 내세우는 프로그램도 급증하고 샘 해밍턴, 후지타 사유리, 샘 오취리 등 방송 출연을 통해 유명인 대열에 합류하는 외국인도 등장하고 있다.
1970~1980년대에도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외국인과 외국인 배우, 가수의 모습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추석 등 명절에 ‘외국인 노래자랑’ 같은 특집 프로그램이나 내한한 외국인 스타의 예능 프로그램 단발성 특별 출연을 통해서다.
1990년대 들어 국제결혼과 직장 근무 등으로 한국에 이주한 외국인 중 일부가 KBS1 ‘아침마당’ 등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국과 한국 문화·생활에 대한 소감을 들려줬다.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 독일 출신 귀화 한국인 이참, 미국 출신 로버트 할리, 프랑스 출신 이다 도시 등은 눈길을 끌어 예능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드라마에도 얼굴을 내밀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
한류가 본격화하고 국내 거주 외국인이 급증하기 시작한 2000년대부터는 국내 방송과 대중문화계에 진출한 외국인 연예인과 외국인이 증가했다. 중국, 독일, 미국 등 외국 미혼 여성이 출연해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KBS2 토크쇼 ‘미녀들의 수다’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방송돼 큰 인기를 끈 것을 계기로 외국인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이 붐을 이뤘다. 또한 KBS2 ‘개그콘서트’의 샘 해밍턴을 비롯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외국인도 많아졌다.
요즘 시청자와 만나는 SBS ‘내 방 안내서’, JTBC ‘비정상회담’, MBC 에브리원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KBS1 ‘이웃집 찰스’, JTBC ‘나의 외사친’, tvN의 ‘서울메이트’처럼 외국인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이 눈길을 끌고 있으며 ‘동상이몽2’의 중국 배우 우효광, KBS1 ‘이웃집 찰스’의 일본인 사유리, 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호주 출신 샘 해밍턴 등 외국인 출연자가 인기를 얻고 있다.
요즘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외국인 배우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봉준호 감독 ‘옥자’의 할리우드 스타 틸다 스윈튼, 홍상수 감독 ‘다른 나라에서’의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 나홍진 감독 ‘곡성’의 일본 연기자 쿠니무라 준, 김태용 감독 ‘만추’의 중국 스타 탕웨이, 허진호 감독 ‘위험한 관계’의 중국 배우 장백지, 장훈 감독 ‘택시운전사’의 독일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미국 배우 데이비드 맥기니스처럼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주연과 조연으로 출연하는 외국인 연기자가 많아졌다.
또한 일본 배우 ‘엽기적인 그녀2’의 후지이 미나, MBC ‘구가의 서’, SBS ‘추적자’의 오타니 료헤이처럼 아예 활동무대를 한국으로 옮겨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지속해서 출연하는 외국인 연예인도 적지 않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가수 역시 급증하고 있다. 연예기획사 관계자들은 아이돌 그룹 멤버 중 10% 정도가 외국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K-Pop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걸 그룹 트와이스의 9명 멤버 중 대만인 멤버 쯔위와 일본인 멤버 모모, 사나, 미나 등 4명이 외국인 멤버다. 또한 2PM의 태국인 멤버 닉쿤, 에프엑스의 중국인 멤버 빅토리아, 미국인 멤버 엠버, 엑소의 중국인 멤버 레이, 우주소녀의 중국인 멤버 성소·선의·미기, 블랙핑크의 태국인 멤버 리사와 뉴질랜드인 멤버 로제, 갓세븐의 홍콩인 잭슨, 태국인 뱀뱀, 미국인 마크 등 수많은 외국인이 아이돌 그룹 멤버로 활동하며 스타로 부상했다.
방송, 영화, 음악 등 한국 대중문화계에 진출한 외국인 연예인이 늘어나고 외국인을 출연시키는 프로그램이 증가하는 이유는 뭘까.
한류로 인해 한국 대중문화 위상이 높아지고 한국 연예계에 진출해 쌓은 경력과 인지도를 바탕으로 자국에서 연예인으로 활동하려는 외국인이 늘었기 때문이다. 아이돌 그룹 멤버를 비롯한 연예인이 되기 위해 한국을 찾아 연예기획사의 오디션이나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외국인 수는 엄청나다. SM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의 국내외 오디션에는 수천 명의 외국인이 참여한다.
외국인을 기용해 한류를 확산하려는 연예기획사, 드라마 제작사 등 대중문화 콘텐츠 관련 업체의 의도도 외국인과 외국인 연예인 출연 프로그램, 영화, 드라마, 음반의 증가를 가져왔다. 모모 등 일본 멤버가 3명이나 있는 트와이스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태국인 닉쿤이 멤버로 있는 2PM은 태국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는 등 외국인 멤버가 있는 아이돌 그룹이나 외국인이 출연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한류 확산에 긍정적인 영향을 드러내면서 외국인의 한국 연예계 진출이 붐을 이루고 있다.
국내 거주 외국인 급증도 외국인 방송 출연과 외국인 참여 프로그램 증가의 한 원인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6년 현재 국내 거주 외국인이 171만 명에 달한다. 2006년 53만 명이었던 외국인 인구가 10년 사이 3배 이상 증가할 정도로 국내 거주 외국인이 늘고 있다. 이러한 추세를 방송 등 대중문화에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전개되고 있다.
외국인 연예인의 국내 방송과 대중문화계 진출 붐은 대중문화의 지평을 확대하고 한류 진작(振作)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문화 차이, 한국어 부족으로 인한 소통의 어려움 등으로 문제도 종종 발생한다. 엑소를 탈퇴한 중국인 멤버 크리스·루한·타오처럼 소속 계약이나 수입 배분, 대우 등으로 연예기획사를 대상으로 한 외국인 멤버의 법적 소송이나 갈등이 늘어나면서 한국에서 외국인 연예인 활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많아지고 있다.
흔히 투우와 집시의 정열적인 플라멩코 정도로 알기 십상이던 스페인이 황영조라는 우리의 마라톤 영웅 덕분에 바르셀로나가 내게도 조금씩 부각되기 시작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는 어쩐지 친근한 도시로 여겨졌고 태극기가 휘날리던 그 도시의 몬주익 언덕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있게 되었다.
새벽에 이스탄불에서 작은 비행기를 타고 세 시간 반 정도 날아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했다. 책이나 영화 등으로만 보아왔던 스페인의 하늘에선 뜨거운 태양이 쏟아질 거란 막연한 기대는 간단히 무너진다. 구름이 가득 얹힌 하늘 아래 잠시 서서 스페인의 공기 속에 묻혀본다.
카탈루니아 광장 부근의 숙소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내다보는 거리 풍경이 내 가슴을 두근두근 설레게 한다. 그 거리를 오가는 까무잡잡한 피부와 높은 콧날의 스페인 사람들이 이 땅에 내가 왔음을 실감시켜 준다. 일단 예약해 두었던 호텔에 짐을 부려놓고 무조건 밖으로 나왔다.
가 볼 곳도 많고 해야 할 것도 있지만 우선 카탈루나 광장 계단에 걸터앉아 여행자의 자유로움을 느껴보기로 한다. 사람 반 비둘기 반이라고 할 만큼 사람과 비둘기가 바글바글하다. 물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둘기가 훨씬 많아서 수백 마리가 날개를 펴고 한꺼번에 날게 되면 여행자들에게 카탈루냐 광장의 추억을 단숨에 만들어주는 듯 한 풍경을 연출한다. 광장 옆 도로로 발걸음을 옮겨보니 마치 단체 여행객들을 쏟아놓은 것처럼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 골목이어서 놀랐다.
광장 지하의 여행자 정보센터에 가서 투어 브로슈어를 몇 가지 챙겼다. 긴 날짜가 확보된 여행이 아니긴 했지만 버스나 지하철, 그리고 트램, 푸니쿨라 정보를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 지하철 역에서 판매되는 교통권은 1회권이나 1일권이 있고 10회권, 50회권이 있기 때문에 계획된 동선이나 머무는 날에 맞게 구입하면 유용할 수 있다.
일단 여행지에서 한 달 살기라든지 2주 3주씩 머물 만큼 긴 시간이 주어지지 않다 보니 우린 짧은 날 동안이나마 바르셀로나를 충분히 느끼기 위한 마음을 활짝 열어둔다. 그리고 카탈루냐 광장을 벗어나 가우디의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시작했다.
외손자에게 손편지를 받았다. 지난 추석 전에 쌍둥이 손녀·손자와 외손자 세 손주에게 처음 썼던 내 손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것 같은데 생각만 머리를 맴돌아 며칠 동안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였었다. 이 녀석도 편지를 처음 쓰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을 터이다.
외할아버지께
할아버지 우리 요즘 많이 못 보았죠? 저희가 서울에서 가장 많이 가본 데가
할아버지네 집 같아요. 저희도 서울 많이 놀러갈 테니까 할아버지도 세종 많이 오세요. 그리고 모기는 어쩔 수 없이 물리잖아요. 모기 잡지 마셔도 돼요.
손자 수민 올림
주황색 봉투와 편지지에 연필로 또박또박 썼다. 몇 군데 맞춤법만 익히면 나무랄 데 없는 초등학교 1학년생의 정성어린 편지다. 손주들에게 편지를 쓸 때 가슴 두근거렸는데 외손자에게 답장을 받고 가슴이 뭉클하였다. 외가와 가까운 서울에서 살다가 몇 해 전 엄마의 근무처 따라 세종으로 이사하면서 외할아버지·할머니와 헤어지기 싫다고 울어댔던 녀석이다. 훌쩍 자란 모습이 대견스럽다.
‘튼튼한 수민아! 올해는 엄마가 휴직하고 너를 보살피고 있으니 재미있게 학교에 다녀라. 작년에 유치원 다닐 때처럼 내년에는 할머니와 교대로 자주 너를 보러 내려갈게.’ 제 엄마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썼다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서랍 속 깊이 손자의 사랑을 보관하였다.
헌데 편지를 부치고 한참 되어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추석에 와서도 편지를 받은 내색이 없었다. 발송 우체국에 배달조회를 하였다. 마침 그날 같이 보낸 빠른 우편물은 그 다음 날 배달이 확인 되었으나 보통우편물은 확인할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추석이 지나서야 서울의 쌍둥이 손주는 열흘 만에, 세종의 외손자는 두주가 지나고 겨우 편지를 받았다고 하였다. 국영 우정사업이 한참 뒷걸음질하고 있는 현장이다.
며칠 전 딸 가족이 왔다. 저녁에 즐겁게 놀고 잠잘 때가 되었다. 외손자에게 “누구와 잘거니?” 물으나마나한 질문을 하였다. 할머니와 엄마를 제치고 여느 때처럼 ‘할아버지’ 소리를 듣고 싶어서였는지 모른다. 내 곁에서 잠이 들었다. 뺨을 어루만져보고 흘러내린 이불을 덮어줬다. 관악산 위로 어렴풋이 먼동이 터왔다. 손자의 얼굴에 붉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쌍둥이 손녀·손자보다 5개월 늦은 이 녀석은 사촌들과 쌍둥이처럼 친하게 잘 지낸다. 아이들과 더욱 가깝게 지내려고 노력한다. 격식에 맞춘 보살핌은 아무 소용이 없다. 손주들은 할아버지의 가슴이 따뜻한지 차가운지 금방 알아차린다. 손주와 하룻밤을 지내면서 할아버지의 맹세는 하나씩 늘어간다.
매일 여러 차례 만나는 쌍둥이 손녀·손자는 아직 답장을 쓰지 않았다. 아이들 말마따나 바빠서다. 앞으로 더 배워서 6학년 때쯤 답장을 하겠다고 한다. 기다리자.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려고 더 실력을 기르고 있을지 모른다.
‘율아, 언아! 너희 재미있는 편지 기다릴게. 빨리 쓰려고 걱정마라.’
참 곱다. 다시 보아도 예쁘다. 눈을 크게 뜨고 요목조목 들여다보아도 신비스럽기도 하다. 겨울이 오는 문턱에서 가을을 노래하던, 여리고 작은 풀잎에 차가움이 서릿발 되어 살포시 내려 앉았다. 마치 영롱한 보석으로 치장한 여인네를 상상하게 한다. 자연의 변화 속에 신비스럽게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형상에 사진작가인 필자는 늘 매료된다. 그 시간은 마냥 행복하다. 소소한 일상과 작은 피사체를 렌즈로 즐기는 나만의 시간에 흠뻑 빠져들어서다.
온 산에 단풍이 가을을 수놓더니 채도가 낮아진 낙엽 되어 바람에 흩날려 길바닥에 구른다. 계절은 속절없이 흘러 한 겹의 나이테를 또 그려간다. 지난밤 추위에 잎새 끝자락에 무서리가 날을 세웠다. 추수가 끝난 들녘 논에 줄지어 서 있는 벼 이삭을 베어낸 한 뼘 벼 포기에도 내려앉았다. 성큼 다가선 겨울이 보인다. 이른 아침 산책길에 나선 손끝이 차갑다. 겨울이 소매 끝을 타고 스며든다. 이맘때면 낮과 밤의 기온 차이가 크다. 이슬이 하얀 서리 되어 대지 위에, 풀잎 위에, 나뭇가지에 자리를 틀었다. 바람에 구르는 낙엽 위에도, 마지막 안간힘을 쓰며 꽃을 피우고 있는 들꽃 꽃송이 위에도 내렸다. 마치 섬세하게 빚은 보석처럼 눈길을 사로잡는다. 초겨울의 문턱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순간이다.
계절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아 한 편의 이야기를 쓴다. 세월의 흔적을 기록한다. 간단없이 흘러가는 순간을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이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연말이면 더 그런 생각이 든다. 필자는 사시사철, 아침저녁 구분 없이 카메라와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어제도 그랬듯이 오늘 아침도 여전히 작은 풍광에, 일반인들이 눈길도 주지 않는 작은 피사체에 몰입하기를 좋아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남들과 다른 시각에서 발견하는 기쁨이 있어서다. 자신만의 즐거움이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여러 모습이 카메라를 잡은 손을 분주히 움직이게 한다.
대지 위에 구르던 노란 은행잎에도 겨울이 살며시 내려앉았다. 서릿발이 보석처럼 장식되었다. 눈이 부시다. 밤새 바람과 이슬이 빚은 고운 조각품이다. 영롱한 빛과 선 그리고 형상은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자연의 조화다. 동산에 태양이 솟아오르면 자취를 감출 이런 모습을 영원히 남겨두고 싶다. 아름다운 사물을 보았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를 사랑함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고 숨죽여 셔터를 누른다. 한 장의 그림을 그렸다. 겨울을 좋아한다던 그녀에게 띄우는 겨울엽서가 만들어졌다. 소슬한 바람에 실려 보낸다.
산책은 이어진다. 논두렁 사이 웅덩이 가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정겨운 가을 이야기를 나누는 이끼 같은 작은 이름 모를 풀 위에도 초겨울이 왔다. 촘촘히 얼음 꽃송이를 만들었다. 눈이 내리는 한 겨울 고산 지대의 나뭇가지에 피는 상고대를 닮았다. 곱디고운 형상에 가슴이 뛴다. 누구 한 사람 눈 여겨 보지 않던 풀 포기가 보석상 진열대에 놓인 사파이어를 상상하게 한다.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카메라로 소소한 모습들을 즐겨 찍었지만, 이런 신비스러운 광경은 오늘 처음 만났다. 혼자 보고 즐기기엔 너무 아까운 모습이다. 서둘러 카메라 렌즈의 초점을 맞췄다. 또 한 장의 그림엽서를 다시 카메라로 그렸다. 겨울철이면 산속 멋진 상고대 촬영을 특히 좋아하던 친구에게 띄우리라. 친구의 미소가 떠오른다. 자연의 변화를 기다리며 조각품처럼 빚어진 피사체에 빠져드는 필자는 속일 수 없는 사진작가인가 보다. 카메라와 함께 하는 아침 산책길이 더 행복해진다. 환갑의 나이에 뒤늦게 시작했지만, 참 잘 선택한 여가활동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근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