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 농산물 그 오해와 진실

기사입력 2025-06-25 08:00 기사수정 2025-06-25 08:00

[전원일기] 농사도 까다로운 서류 작업을 피할 수 없다

(어도비 스톡)
(어도비 스톡)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그때도 원자력발전소 건설은 인근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난항을 겪는 일이 빈번했다. 사회심리학자가 중심이 된 연구진이 주민들은 왜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반대하는지 그 이유를 심층적으로 탐색한 결과, 그곳에서 핵폐기물이 나온다는 오해가 과도한 불안과 근거 없는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걸 확인했다.

이후 주민들의 공포와 불안을 불식시키기 위해 원자력발전소에서 배출되는 건 핵폐기물이 아니라 원자력 부산물이며, 부산물은 선진국인 독일의 기술을 받아들여 안전하고 철저하게 관리한다는 사실을 주민 설명회를 비롯한 다양한 방법으로 널리 알림으로써 가까스로 주민 설득에 성공했다는 일화가 있다.

동일한 대상을 핵폐기물이라 부를 때와 원자력 부산물이라 부를 때 우리가 받는 느낌이 하늘과 땅 차이란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최근에도 후쿠시마 원전에서 나온 것이 핵 오염수냐, 아니면 처리된 방류수냐를 두고 온 나라가 홍역을 치렀다. 개념이 우리의 생각을 규정하는 걸 보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 분명하다.


(어도비 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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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다단한 인증 제도

3년 전 우리 농장에서 수확한 블루베리를 처음으로 세종시 로컬푸드 매장 ‘싱싱장터’에 출하했다. 그전에는 주로 개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가족 및 친지나 직장 동료를 단골로 확보하곤 했는데, 농장에서 10분 거리에 로컬푸드 매장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용기를 냈다. 일 년 내내 정성 들여 재배한 블루베리를 500g 용기에 담아 어엿한 상품으로 매대 위에 진열하던 날의 감동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 싱싱장터에선 하루에 두 번씩 판매자 휴대폰에 판매 상황을 알려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출하 첫날 20개 중 19개가 팔렸다는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야호!’를 외쳤던 기억 또한 어제 일 같다. 우리 블루베리 농장은 생산 규모가 어중간해서 생산량이 많지 않은 덕분일 테지만, 지금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완판을 거듭했으니 생각할수록 고맙기만 하다. 하늘의 도와주심도 감사하고, 비싼 과일값 타박하지 않는 단골들의 넉넉한 마음도 감사할 따름인데, 종종 ‘고퀄(High Quality의 요즘 표현이란다)’이란 칭찬까지 들려오면 기뻐서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한데 똑똑한 주부들이 로컬푸드 매장에서 과일이나 채소를 고를 때면 GAP(Good Agriculture Practice, 농산물우수관리 인증) 마크가 붙어 있는지 여부를 가장 먼저 확인하곤 한다. GAP 마크를 부착한 상품은 안전한 관리를 거쳐 출하된 농작물임을 정부가 인증해 주는 것이니, 먹거리 안전에 민감한 주부들에겐 신뢰할 만한 표식임이 분명하다.

다만 대부분의 소비자가 GAP 마크를 보는 순간 무농약을 떠올리고, 그 세 글자가 농약을 전혀 치지 않은 농산물임을 증명한다고 지레짐작하는 듯하다. 그러나 GAP 인증은 유기농 인증이나 무농약 인증과는 다른 제도다. 농부들도 일부러 공부해야 하는 형편이니 소비자가 복잡한 농산물 인증 제도와 그 세세한 차이까지 알기란 더욱 어렵다.

하지만 농사의 ‘ㄴ’자만 알아도 농약을 치지 않고선 판매에 적합한 농산물을 수확하기란 쉽지 않음을 십분 이해할 것이다. GAP 인증은 토양과 용수, 작물에 잔류 농약이 검출되는지 수시로 점검하는데, 요즘 농약은 농업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독성은 감소하고 잔류시간도 단축됐다. 농약을 친 후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 지나면 잔류농약은 거의 검출되지 않는다. 그러니 ‘벚꽃이라 쓰고 중간고사라 읽는다’는 학생들처럼 GAP 인증이라 쓰고 ‘잔류농약 검출되지 않음’이라 읽는 쿨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약제를 바꿔가며 사용해야 효과가 있어, 사용량보다 많은 종류의 농약이 필요하다.
▲약제를 바꿔가며 사용해야 효과가 있어, 사용량보다 많은 종류의 농약이 필요하다.


게을러 약 한 번 덜 칠까

밭작물 중에서 농약에 관한 한 고추를 따라갈 과일이나 채소는 없을 것 같다. 농촌에선 손바닥만 한 터만 있어도 가족들이 먹을 고추, 상추, 배추, 가지, 방울토마토 등을 알뜰살뜰 심어 먹는다. 고추는 평소에도 요리할 때 쓰임새가 많고 김장할 때 필수품이기에 직접 가꿔 먹는 집이 많다. 한데 고추 농가는 비만 오면 엄청 분주해진다. 비가 그치자마자 등에 농약통 짊어지고 나와 농약을 뿌리느라, 여기서 칙칙 저기서 치지직 온 동네가 소란스럽다. 고추는 탄저병에 약해서 비 온 뒤 즉시 약을 치지 않으면 그냥 녹아버리거나 곧장 말라버린다.

우리가 밥상 위에서 만나는 먹음직스러운 고추는 농약으로 샤워한 결과라 해도 과장이 아닐 게다. 주위에서 농약을 쳐대면 그 밭의 해충과 세균이 인근 밭이나 농장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기에, 농부들은 저마다 ‘나만 손해 볼 수 있나,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심정’으로 농약을 친다. 진짜 무농약으로 재배하려면 해당 지역의 모든 농가가 합심해서 한 농가도 빠짐없이 농약을 치지 않으면 될 테지만, 그건 현실에선 씨알도 안 먹히는 이야기다.

오히려 아마추어 농부일수록 일머리도 잘 모르고 일손도 늘 달리기에 부지런한 프로 농부가 서너 번 약을 칠 때 가까스로 한 번 칠까 말까 하니, 프로보다 아마추어 농부가 진짜 무농약 재배에 더 가까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니 초보 농부 시절 참깨를 심은 적이 있는데, 수확할 때가 되니 동네 분 여럿이 오셔서 “참기름 짜면 꼭 한 병만 팔어유” 하고 신신당부를 했다. “우리가 다 봤지, 약 한 번 지대로 못 치고 순도 안 딴 거. 그래도 이놈이 진짜배기라 맛은 엄청 좋을 겨” 놀리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블루베리는 살균제와 살충제를 섞어 한해 3회 살포한다. 안 그러면 쐐기나방 애벌레의 밥상이 된다.
▲블루베리는 살균제와 살충제를 섞어 한해 3회 살포한다. 안 그러면 쐐기나방 애벌레의 밥상이 된다.


크고 잘생긴 놈보다 못난이!

조치원은 복숭아로 유명한 고장이지만, 복숭아 농원 가까이 배 농장도 즐비하다. 덕분에 복숭아꽃·배꽃 필 무렵이면 여기저기서 꽃 대궐이 펼쳐진다. 환갑 지나 비로소 알아챈 ‘울긋불긋 꽃 대궐’에서 꽃눈이 잔잔히 날리는 날이면 만사 제쳐두고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고 싶어진다. 이곳 할머니들은 복숭아나 배 농장에 일 맞춰놓고 다니는 걸 큰 자랑거리로 여긴다. 자신의 일솜씨가 제법이라 정기적으로 출근하는 일자리가 있다는 이야기니 자랑할 만도 하다. 할머니들을 통해 귀동냥으로 듣는 과일 농사 정보가 쏠쏠한데, “차례상에 과일 올릴 때 너무 크고 잘생긴 과일일랑은 지발 올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신다.

어느 해인가는 추석이 예년보다 일찍 돌아오는 바람에 차례상에 올려야 할 과일에 비상이 걸렸다. 때가 일러 배가 크지도 않고 맛도 들지 않은 것이다. 그때 동네 할머니들이 귓속말로 “농장에 주사 놓으러 간다”고 해서 화들짝 놀랐다. 이 주사약은 한국 사람 제사나 차례 풍습을 간파한 일본에서 개발한 것으로, 주사를 맞은 과일은 “엄청스리 커지고 맛도 달다”고 했다. “우리야 살 만큼 살았으니 상관없지만, 어린 손주들은 그런 과일 절대로 먹이지 말라”며 혀를 끌끌 차셨다.

하기야, 우리 블루베리 농장 건너편 외삼촌네가 10년 전 대왕대추를 50여 그루 심었는데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된 수확을 못 했다. 서울 살며 가끔 밭을 둘러보니 제때 약을 치지 못한 탓이다. 대추는 꽃 피고 나서 열매 맺기 직전에 반드시 약을 뿌려줘야 한다. 그 시기를 놓치면 모조리 벌레가 들어앉은 대추를 수확하기 마련이다. 부지런한 대추 농장에선 최소 5번 이상, 많게는 7번까지 약을 친다는데, 게으른 농부는 벌레 먹은 대추만 손에 담게 되는 셈이다.


GAP 인증이 CAP인지는…

올해는 우리 블루베리 농장도 GAP 인증을 신청하기로 했다. GAP 인증은 농사 과정에서 위해 요소를 예방하고 관리한다는 데 방점을 둔다. 농산물 위해 요소로는 잔류농약·중금속 등의 화학적 위해와 세균·곰팡이 같은 생물학적 위해, 이물질·비닐 등의 물리적 위해가 있는데, 생산부터 유통에 이르기까지 위해 요소를 제대로 관리함으로써 먹거리 안전을 공고히 하자는 취지다.

교육받을 때 귀를 쫑긋하며 들은 바로는 2019년부터 PLS(Positive List System, 농약허용물질목록 관리제도)가 도입됐으니, 개별 농가에선 반드시 해당 작물에 사용해도 좋다고 등록된 농약만을 농협이나 농약상의 추천을 받아 구입해서 뿌려야 한다는 것이다. 농약 뒷면에 보면 자세한 사용설명서가 나와 있으니 꼼꼼히 읽어보고 정량을 투입하고, 특별히 잔류농약 허용 기준도 챙겨보라고 했다.

뒷줄에 앉아 계시던 연로한 할아버지 농부님, “배운 사람들은 뭘 몰러. 농약은 치라는 양보다 1.5배 아니면 2배는 쳐야 효과를 보는 겨. 정량대로 치면 벌레고 균이고 싹 안 죽는 거 몰러?” 하신다. 농약 중에는 제초제가 가장 독하다고들 하는데, 위험하기도 하고 잔류 기간도 긴 편이기 때문인 듯하다. 동네 분들도 입을 모아 풀약은 정량보다 두 배는 독하게 타라고 훈수를 두시니, 오랜 경험자의 말을 들어야 할지 배운 사람 말을 들어야 좋을지 잠시 망설여진다. 워낙 농약 종류도 많고 복잡해서, 농협이나 농약상에 물어봐도 “지도 잘 몰라유”를 입에 달고 사니 더욱 그렇다.

한데 모든 인증 제도가 그러하듯 일단 서류 작업부터 만만치 않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우수 사례는 모조리 대규모 농업법인이나 농사단체 몫이다. 심지어 귀촌·귀농에도 전관예우가 있어, 우리 동네에도 고위 공무원 출신이라는 분이 엄청 특혜를 받았다는 소문마저 들려온다. 그분 블루베리 농장은 후미진 곳에 있는데 “앞쪽으루다가 시 예산으로 아스팔트 길 싹 깔아주고, 인증도 공무원들이 알아서 대신 해주고, 체험용 농장 지정도 1호로 받았다”고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극처럼 농사에도 대농과 소농 사이의 격차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소규모 자영농의 서러움을 그 누가 헤아려주리오. 알뜰살뜰 손으로 풀 뽑고 약도 조금만 치고 문자 그대로 가족들 먹일 요량으로 농사짓는 할머니들은 인증 신청 절차부터 막막하기만 하다. 영농일지도 첨부해야 하는데, 할머니들이 손 글씨로 달력에 쓴 건 파일에 담을 수 없기에 한글이나 엑셀 파일로 작업할 것을 권유받는다. 평생 컴퓨터 앞에 앉아본 일 없는 진짜 농부들에게 GAP 인증은 ‘그림의 떡’일지도 모를 일이다.

인증 마크 대신 ‘잔류농약 없음’이라 표기하는 것이 오해를 불식시킬 테지만, 생산자도 소비자도 친환경 농산물이란 달콤한 거짓말을 포기할 마음은 없는 것 같다.

#귀농 #귀촌 #농사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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