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극장은 체감형 공간이 돼가고 있다. 손에 잡힐 듯한 3D는 물론이고, 의자가 움직이고 바람과 물이 느껴지는 4D 영화도 상영한다. 극장의 진화로 테마파크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이상하다. 진화할수록 옛 극장이 그리워진다. 아날로그의 그 감성이.

3D 영화가 주는 멀미
새로 개봉한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아바타: 불과 재’를 보러 갔다. 당연하게(?) 3D를 선택했고, 입구에서는 안경을 나눠줬다. 평소 시력이 안 좋아 안경을 끼는 내게 3D 안경 또 하나를 덧씌우고 영화 보는 일은 고역이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아니어도 3D에 적응하기 어려운 중장년 세대는 어지럼증을 느꼈을 법하다. 어쨌든 인간의 감각은 일종의 ‘적응기’가 필요하지 않던가. 눈이 피곤하고 머리가 아픈 건 차를 처음 탄 시골 소년이 차멀미를 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서울에 올라와 눈이 핑핑 도는 건물들을 보면서 느꼈던 어지럼증까지. 물론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나는 현재 아무런 멀미 없이 차를 타지만, 3D 영화는 아직까지 내게 멀미를 일으키는 부적응 체험 중 하나다.
문득 영화 티켓 하나만 있으면 특유의 쾨쾨한 냄새와 어둠 속에서도 스크린을 바라보며 그저 좋았던 시절이 떠올랐다. 하루 두 편 동시 상영을 보기도 하고, 좋은 영화는 보고 또 보던 시절이 오래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멀티플렉스로 거대해진 극장은 체인화·시스템화된 지 오래다. 여기에 멀티플렉스는 돌비 애트모스(Dolby Atmos) 같은 체감형 입체 사운드를 설치하고, 의자가 움직이며 바람과 물이 느껴지는 4D 체험관을 만들었다. 아예 소수의 몇 명이 리클라이너 의자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음료와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는 부티크관도 있다. 이 정도면 극장은 더 이상 영화만 감상하는 공간이 아니다. 영상 콘텐츠를 체험할 수 있는 미국 LA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테마파크처럼 되어간다.
이 변화는 디지털 시대에서 비롯한 것이다. 디지털 배급(중앙 서버에서 여러 스크린으로 영화 파일을 전송하는 시스템)이 선명한 화질의 무한 복제를 가능하게 했다. 과거 아날로그 시스템(극장 수에 맞게 필름을 프린트해서 배급하는 방식)은 한 벌에 들어가는 제작비도 상당하지만, 여러 번 프린트할수록 화질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디지털 배급은 ‘필름 없는 극장 시대’를 열며 이런 문제들을 일거에 날려버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디지털은 극장에 위기를 불러왔다. 지금의 OTT 시대를 가능하게 한 것 역시 디지털이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1만 5000원 남짓 하는 영화 한 편을 보는 것보다 같은 비용을 OTT의 월 이용료로 치르면 영화부터 방송, 드라마를 무제한으로 마음껏 볼 수 있게 됐다. 꼭 극장에서 봐야만 하는 작품이 아니라면 굳이 극장에 갈 이유가 없어졌다. 이미 예고된 변화였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가속화됐다. 그래서 극장은 더더욱 극장만의 강점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체감형 공간, 나아가 테마파크처럼 변하는 건 생존을 위한 전략이 됐다.

‘아바타’는 극장의 미래가 되어줄까
이러한 시대 변화의 징후를 가장 전면에서 보여준 영화가 ‘아바타’다. ‘아바타’는 2006년 첫 작품이 나왔을 때부터 ‘영화의 미래’라고 불렸다. 당시 이 영화는 기술의 집합체 같았다. ‘퍼포먼스 캡처’라 불리는, 가상 캐릭터의 얼굴에 나타난 감정까지 표현 해낸 VFX(시각특수효과) 기술을 시도했다. 3D 기술도 혁명이라 불릴 만큼 진일보한 면을 보여줬다. 관객의 눈을 찌르는 듯한 돌출효과(Pop-out effect)에 집중했던 이전의 3D와 달리, ‘아바타’는 스크린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심도(Depth)를 구현해 공간의 부피감을 창조했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영화 속 세계에 깊숙이 들어가는 체험을 하게 됐다.
‘아바타’는 스토리 역시 이러한 새로운 세계의 체험을 담은 작품이다. 하반신이 마비된 제이크 설리(샘 워딩턴 분)가 ‘아바타 프로그램’에 참가해 자신과 연결된 아바타(분신)로 판도라라는 미지의 세계를 모험하는 이야기다. 제이크가 판도라라는 세계를 여행하는 과정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체험하는 과정 그 자체다. 관객들은 3D 안경을 쓰고 제이크에 몰입해 그를 분신처럼 느끼며 판도라를 체험한다. 제이크가 익룡처럼 생긴 동물을 타고 날아오르면 관객도 똑같이 나는 듯한 느낌을 경험한다. 2편에서 돌고래 같은 바다생물을 타고 바닷속을 유영하면 똑같이 물속을 여행하는 느낌을 경험한다. 심지어 ‘아바타’ 1편 마지막에서 제이크는 신적인 나무에 의해 그 영혼이 아예 아바타 속으로 들어간다. 이제 제이크와 분신은 하나다. 영화의 체험이 진짜 같은 완전한 경험이 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아바타’가 새로운 영화 체험의 출사표였다면, 그 후 이어진 ‘아바타: 물의 길’, ‘아바타: 불과 재’는 그 위에 얹은 기술의 진화 과정이다. 전통적인 초당 24프레임의 촬영과 상영을 넘어 48프레임을 사용한 이 시도는 더욱 매끄럽고 선명한 액션을 가능하게 했지만, ‘멀미’ 같은 저항감이 생겼다. 기존 영화(24프레임)의 다소 흐릿하고 거친 질감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픽션이고 환상이라는 미적 거리감을 제공한다. 하지만 48프레임의 지나친 선명함은 오히려 환상을 깨는 이질감을 준다. 이 이질감은 1920년대 유성영화가 도입된 지 100년 가까이 유지된 초당 24프레임이라는 영화의 표준을 바꾼 데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이러한 비판을 수용해 영화 전체를 48프레임으로 하지 않고 대화 장면에서는 24프레임을 쓰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 절충안은 일부 관객에게 “영상 속도가 오락가락해 멀미가 난다”는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미학적 거리감과 배우 아우라의 실종
영화 ‘아바타’의 기술을 둘러싼 상반된 의견은 영화의 기술적 성취가 반드시 관객에게 감상의 흥취로 돌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영화에 깊이 몰입하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영화에 동화(同化)되면서도 적당히 이화(異化)되어 균형을 이루어야 우리는 예술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미학적 거리감’이다. 나를 잊고 그 세계에 빠져드는 것을 온전한 감상이라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바타’의 제이크가 분신인 아바타와 완전히 하나 되는 것처럼, 기술은 허구인 영상에 완전히 몰입해 진짜 같은 체험을 하는 걸 꿈꾼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의 저항감도 커질 수 있다. 빠져나오고 싶어 하고 좀 더 멀리서 관망하고 싶어진다. 3D 안경을 끼고 한없이 그 실제 같은 영상 속에 빠져들다가도, 문득 어지럼증을 느끼며 안경을 슬쩍 벗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바타’에서 또 한 가지 몰입을 방해하는 건 배우들의 연기를 나비족의 형상으로 채운 VFX 기술이다. 앞서 말했듯 퍼포먼스 캡처 기술은 얼굴에 찍어놓은 점들로 배우의 미세한 표정 근육 움직임까지 포착해 100% 디지털 데이터로 옮겨놓는다. 그래서 ‘아바타’에서 조 샐다나가 연기하는 나비족 네이티리의 표정은 실로 디테일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디지털 데이터가 사람의 얼굴 연기에 담긴 배우의 아우라를 대치할 수는 없다. 우리가 배우들의 얼굴을 보면서 그 감정을 똑같이 느끼고 상황에 몰입하는 건, 같은 인간의 얼굴이 가진 독특하면서도 미세한 아우라 때문이기도 하다. 배우 고유의 맨얼굴이 갖는 느낌이나 땀구멍부터 얼굴 근육의 미세한 떨림까지, 우리가 배우의 연기를 통해 보는 건 액팅 그 이상이다. 기술의 과시는 이처럼 영화라는 예술의 감상을 오히려 가로막는 결과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감각도 바뀔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고전적인 의미의 영화와 극장을 향한 향수가 기술의 진화를 과거로 돌려놓을 것 같지는 않다. 우리의 감각 역시 미디어의 변화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 학자 마셜 매클루언은 일찍이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말로 미디어 그 자체가 우리의 삶과 감각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키는지 설명한 바 있다. 미디어는 지금껏 ‘감각의 확장’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Tele-Vision은 ‘멀리 있는 걸 가까이 당겨 본다’는 뜻이다)의 등장은 원거리에 있는 것들을 눈앞으로 가져온다는 점에서 시각의 확장을 만들었고, 라디오는 청각의 확장을 가능하게 했으며, 인터넷은 시공간의 확장을 불러일으켰다. 즉 이들 미디어가 없었던 시대의 사람들과 그걸 누리고 사는 우리의 감각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디지털 영상과 음성 기술에 대한 우리의 체감도 갈수록 변화하지 않을까.

실제로 디지털 네이티브는 ‘가상 캐릭터’를 대하는 이질감이 기성세대보다 적다. 그래서 가상 캐릭터로 이뤄진 ‘플레이브’ 같은 버추얼 아이돌의 열성적인 팬덤이 생겨난다. 가상을 대하는 감수성이 다르다는 것이다. 3D 영화를 보며 멀미를 느끼는 기성세대가 있지만, VR 헤드셋을 쓰고 게임을 하거나 그 안에서 영화를 보는 디지털 네이티브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레디 플레이어 원’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가상 세계에 접속해 진짜처럼 살아가는 일이 우리의 미래가 되지 않으리라 장담하긴 어렵다(아마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옛날 영화와 극장이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50년 넘게 익숙해진 감각과 감상의 경험을 어찌 쉽게 바꿀 수 있단 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