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인북은 브라보 독자들께 영감이 될 만한 도서를 매달 한 권씩 선별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해당 작가가 추천하는 책도 함께 즐겨보세요.내가 새로 둥지를 튼 이곳은 지은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서울 변방의 어느 주택가에 꽤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니어하우스다. 말 그대로 노인들만의 세상. 어디를 봐도 내 또래와 눈이 마주치는 곳. 이곳에 아는 얼굴은 없다. 머리 허연 학생들이 가득한 학교에 전학 온 기분이다.
-‘명랑한 독립’, 10~11p
85세, 남편을 떠나보낸 뒤 시니어하우스로 옮겨간 윤명숙 작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며 비로소 노년의 독립을 이뤘다. 그는 딸과 함께 새로운 보금자리에서의 일상을 기록하고 있다. 모녀의 따뜻한 이중주는 그렇게 완성됐다.

윤명숙 작가는 한국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의 아내다. 2023년 남편을 떠나보낸 그는 시니어하우스 입소를 결정했다. 실버타운이라고도 하는 시니어하우스는 만 60세 이상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주거 공간이다.
윤명숙 작가는 스무 살에 결혼하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떠났고, 이후 65년 동안 아내이자 엄마로 살아왔다. 미술치료사인 딸 박승숙 작가는 엄마가 오롯이 ‘윤명숙’으로 살아가길 바라며, 엄마의 선택을 묵묵히 지지했다. 윤 작가 역시 “평생 살면서 오직 내 의지대로 결정하고 실행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책 ‘명랑한 독립’의 부제는 ‘내향형 할머니의 시니어하우스 적응기’다. 입소 제한 상한 연령인 만 85세를 가까스로 통과한 윤 작가는 낯선 공간과 사람들 속에서 적응해간다.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공간은 식당이다. 하루 세 번 식사를 함께하며 친구가 되고, 때로는 오해와 갈등도 피어나는 곳이다.
윤 작가의 기록은 딸의 권유에서 시작됐다. 딸은 67세에 등단하고 83세에 첫 책을 낸 엄마의 꿈이 이어지길 바랐다. 책은 엄마와 딸의 이야기가 번갈아 이어지는 구성이다. 윤 작가가 시니어하우스의 일상과 감정을 풀어내면, 박승숙 작가는 엄마의 변화와 뒷이야기를 덧붙인다.
‘명랑한 독립’이 말하는 독립은 혼자 사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끝까지 나답게 살아가는 용기다.

‘명랑한 독립’을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나요?
명숙 시니어하우스에서 살아가는 제 일상을 일기 쓰듯 기록한 책이에요. 오늘 있었던 일,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 책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죠.
승숙 엄마는 글을 썼고, 책의 구성과 방향은 제가 맡았죠. 시니어하우스가 시설과 프로그램 위주로 소개된 적은 많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더라고요. 엄마의 기록을 통해 ‘진짜 일상’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독자분들은 모녀의 관계와 가족의 의미에 더 공감해주시더라고요. 의도와는 조금 달랐지만, 그것 역시 이 책이 전하는 또 하나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시니어하우스 입주를 희망한 지 오래되셨다고요.
명숙 아마 20여 년 전, 남편이 크게 아팠을 때 같아요. 그때 언젠가는 나도 아플 수 있고,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떠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의료시설을 갖춘 시니어하우스에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살아보니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럽습니다.
승숙 엄마는 오래전 도심형 시니어하우스를 분양받으셨는데, 아버지가 끝내 반대하셔서 입주하지 못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갑자기 시니어하우스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20여 년 전부터 품어온 계획이었던 거죠.
시니어하우스에서의 루틴은 어떻게 되나요?
명숙 아침 일찍 일어나 6시 전에 공동사우나에서 샤워를 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매일 의자체조 수업을 듣고, 일주일에 한 번 합창 동호회 활동을 해요. 그림도 다시 그리고 싶은데 아직 시작을 못 했네요. 하루 중 가장 활기찬 시간은 식당에서 같은 식탁에 앉은 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할 때입니다.

시니어하우스 생활에서 가장 달라진 점은 ‘관계’였다고요.
승숙 엄마가 결혼 후에는 아버지 중심으로 관계가 형성돼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관계를 만들어갈 기회가 거의 없었거든요. 여기에 계시면서 사람과 가까워지는 법, 반대로 멀어지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 것 같아요.
명숙 짝꿍으로 지내던 분이 건강상의 이유로 갑자기 떠났을 때는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동창과는 금세 가까워졌죠. 여러 일을 겪으며 지금은 적당한 거리 두는 법을 배우게 됐습니다. 깊이 의지하기보다 서로 하소연을 듣고 도와주는 정도의 관계를 이어가요. 그래도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특별한 인연입니다. 지금 제 나이 여든여덟 살, 인생의 마지막 무렵에 만났으니 소중한 인연이죠.
시니어하우스에서 함께 보내는 월요일은 어떤 시간인가요?
명숙 사실 딸이 오는 월요일만 기다리죠. 책을 쓸 때는 솔직히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어요. 글을 다 못 썼거나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무슨 이야기를 하지?’ 하는 마음이 들었거든요.(웃음) 딸과 식당에서 밥을 먹고 책과 세상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참 행복합니다. 우리 딸은 붙임성이 좋아 입주자분들도 “오늘은 딸 안 왔어?” 하며 먼저 찾으세요.
승숙 저는 엄마를 만나러 오는 시간이 의무처럼 느껴진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여기 오면 시간이 정말 금방 지나갑니다. 입주자분들과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마다 살아온 삶이 느껴져요. 그래서 많은 위로와 에너지를 얻고 돌아갑니다. 월요일은 제게도 가장 기다려지는 힐링의 시간입니다.
두 분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명숙 저에게는 과분한 딸이에요. 늘 엄마를 먼저 생각해주는 게 느껴져요. 지금도 에어컨이 고장 나거나 노트북에 문제가 생기면 금세 달려와 척척 해결해준답니다. 정말 ‘홍반장’ 같은 존재죠.(웃음)
승숙 어릴 때부터 엄마를 정말 좋아했어요. 지금도 가장 애착이 가는 사람이죠. 화가 나거나 슬퍼도 내색하지 않은 채 묵묵히 가족을 위해 사셨어요.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같은 여성으로서 그 삶이 너무 안타까워요. 그래서 지금 ‘윤명숙’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큰 기쁨입니다.
(주민욱 프리랜서)엄마에게는 항상 ‘공간’이 중요했다. 집을 의미하는 여러 단어 중 ‘둥지’나 ‘보금자리’라는 말을 엄마가 자주 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얼마든지 훌쩍 날아올라 떠돌 수 있는 새가 편히 깃들어 아늑하게 머물고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를 수 있는 곳. 엄마를 생각하면 나는 ‘깃들다’라는 동사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 그래서 엄마의 인생은 공간사가 되었다.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살았던 당신의 모든 집을 기억하신다.
- ‘명랑한 독립’, 140~141p
박서보 화백은 어떤 남편이자 아버지였나요?
명숙 우리 부부의 관계는 사랑이라기보다 단단한 인간관계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물론 미울 때도 있었지만, 늘 존경하는 마음은 있었습니다. 제가 닮을 수 없는 강점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한 번도 후회하거나 낙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죠.
승숙 저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들어요. 무언가를 시작하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나 몰입하는 성향이 그렇죠. 그래도 아버지의 자기 확신만큼은 참 대단했던 것 같아요.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도 목표를 세우면 끝까지 밀고 나갔고, 달성하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노력하셨거든요. 그 점은 지금도 가장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시니어하우스를 추천하고 싶으신가요?
명숙 나이가 들면 한 번쯤 자신에게 맞는 시니어하우스를 찾아 견학해보길 바랍니다. 요즘은 한 달 정도 살아볼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도 잘 마련돼 있거든요. 막연한 두려움을 갖기보다 직접 경험해보고 판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승숙 외로움을 덜 느끼며 노년을 보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어요. 엄마를 보면서 느낀 건 시니어하우스 생활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점입니다. 같은 처지라는 데서 오는 연대감과 위로가 큰 힘이 되지만, 반대로 늘 같은 환경 속에서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죠.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쌓는 동시에 취미나 공부를 이어간다면 만족스러운 노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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