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화제의 중심에 섰다. 출판가까지 강타한 ‘오디세이’ 열풍을 보면, 기원전 8세기에 나온 이 고전이 현재까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게 놀랍기까지 하다. 고전의 무엇이 이토록 오랜 생명력을 갖게 하는 걸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
‘오디세이’를 흔히 여정이나 여행을 뜻하는 말로 쓰곤 한다. 그 유래는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오디세우스의 모험담을 그린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목마로 잘 알려진 기막힌 전술을 세운 지략가다. 그리스 연합군이 무려 10년간 뚫지 못한 트로이의 성벽을 바로 이 트로이 목마 전술로 뚫었다. 그래서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으로 종종 그려지곤 했다. 과연 그는 진짜 전쟁 영웅이었을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호메로스의 이 고전을 ‘환대’의 관점으로 재해석했다. 이 영화에 자주 언급되는 ‘제우스의 법’을 통해서다. 제우스의 법은 고대 그리스의 ‘크세니아(Xenia)’를 가리키는데, 낯선 손님과 주인이 서로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환대의 규범을 말한다. 이른바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강령이 그것이다. 이 윤리적 규범에 따르면, 신의 이름을 빌려 주인은 걸인이든 나그네든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고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 손님 역시 주인의 호의를 악용해선 안 된다. 이런 환대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건 당시에도 ‘제우스’라는 신의 이름으로 강제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쉽지 않지만, 그것이 문명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라는 데 공감대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어떻게 했는가. 트로이 목마가 아테나 여신에게 바칠 제물이라는 거짓말로 잔혹한 살상과 약탈을 야기한 장본인이 아닌가. 호의를 악용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는 ‘크세니아’의 규범을 어긴 자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그 가까운 거리를 무려 10년이나 헤매고, 모든 병사를 잃은 채 결국 홀로 이타카로 돌아온다.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신의 형벌’로 그린다. 그의 병사들은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에게 잡아먹히고, 세이렌의 유혹에 바다로 뛰어들며, 거인족에 의해 학살되고, 키르케의 마법으로 돼지가 된다. 오디세우스는 바다의 여신이자 님프인 칼립소의 섬에 7년간 붙잡혀 지낸다. 그가 기억을 잃은 건 트로이 전쟁의 참혹함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고전은 어떻게 현재에 울림을 주는가
‘오디세이’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고전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의 시간을 넘어 당대의 사회적·문화적 맥락과 충돌하며 끝없이 새로운 의미를 파생시킨다. 이것을 독일 철학자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는 ‘지평 융합’이라는 개념으로 규명했다. 우리가 어떤 텍스트를 대할 때 완전히 백지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이 각자의 역사적·문화적 배경과 ‘선(先)이해’라는 지평을 갖고 접근한다는 것이다.
즉 고전이 해석될 때 고전이 탄생했던 당대의 고유한 역사적 지평이 그대로 현재에 복원되는 것이 아니다. 이를 바라보는 현재적 지평과 만나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는 이야기다. 고전은 이로써 고정된 유물이 아니라, 현재에 끊임없이 말을 거는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연극의 경우 ‘지평의 융합’이 가장 활발하게 이어지는 분야다. 최근 배우 최수종과 양준모가 더블캐스팅으로 참여한 연극 ‘오이디푸스’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기원전 5세기에 탄생한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모든 인간은 축복과 저주를 함께 끌어안고 태어난다”는 명제 아래, 운명 앞에 나약한 인간의 근원적 한계를 그린 고전이다.
재해석된 ‘오이디푸스’는 비극적인 ‘영웅의 몰락’이 아니라, 파멸적 진실 앞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숭고한 주체성’으로 옮겨놓았다. 결국 진실을 마주하고 제 두 눈을 찔러 시력을 잃은 채 테베를 떠나는 오이디푸스가 “내 발아,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라고 묻는 대사는 그 지점을 잘 드러낸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와 결혼할 거라는 신탁을 받아 발목에 쇠못이 박혀 버려진 아이였다. 그를 양자로 삼아 키운 코린토스 왕이 ‘부은 발’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즉 오이디푸스에게 발이란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가는 모습은 그 가혹한 운명에도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능동적인 저항이 된다. 그래서 2026년 새로 연극무대에 오른 ‘오이디푸스’는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된 평온에 안주하려는 이들에게 고통을 감내하더라도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를 갖는 것이 진정한 인간다움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최근 박근형과 신구가 참여한 연극으로 재탄생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시절 탄생한 이 작품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돈에 눈이 먼 악당으로 그려진다. 반면 기독교인 안토니오는 돈보다 중요한 우정의 가치를 드러내는 선한 인물이다. 결국 포셔의 기지로 기독교인들의 자비로운 재판이 펼쳐지고 악당인 샤일록이 단죄를 받는다. 현재의 관점으로 보면 기독교를 중심으로 타 종교에 배타적인 이야기로 읽힌다.

하지만 2026년 한국에서 재탄생한 ‘베니스의 상인’은 이러한 선악의 이분법을 깨고 샤일록을 혐오 사회의 가해자가 된 피해자이자 사회적 소수자로 그려낸다. 또한 안토니오와 기독교인 친구들은 자신들의 우정에는 목숨 걸 정도로 의롭고 고결해 보이지만, 유대인이라는 타자 앞에서는 뼛속 깊이 배어든 우월감으로 경멸과 조롱을 서슴지 않는 위선적인 모습으로 비친다.
이러한 균형 잡힌 시선으로 작품을 재해석하며 현대 사회가 정상성이라는 이름으로 소수자를 어떻게 배제하고 악마화하는지, 그리고 그런 억압이 어떻게 또 다른 폭력을 탄생시키는지 고발한다.

다시 고전의 시대, 고전의 힘은 세다
8월 5일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는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과 함께 출판가에도 오디세이 열풍이 불었다. 서점에 오디세이 관련 서적들로 오디세이 코너가 생기고, 베스트셀러 반열에도 올랐다.
출판가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여러 고전이 상위 리스트에 오른 게 눈에 띈다. 로마 제정기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사유를 편역한 ‘세네카, 오늘을 빼앗기고 있는 당신에게’나,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데미안’,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을 담은 ‘니체의 초월자’, ‘위버멘쉬’ 등이다.
고전이 다시 대중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설적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콘텐츠들과 정보의 홍수와 관련이 있다. 새로운 콘텐츠들은 너무나 빨리 등장해 금세 휘발되곤 한다. 고전이 눈에 띄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수백 년에서 수천 년 동안 사라지지 않고 대중을 위로하고 사유하게 했던 고전을 통해 쉽게 흔들리지 않는 생각을 접하고 싶은 욕망이 더 커진 것이다.

하지만 거듭 이야기했듯 고전은 과거의 재연에 머물지 않는다. 현재의 관점으로 재해석된다. 그건 어찌 보면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세계 문제의 해법을 고전에서 찾아보려는 노력에 가깝다. 달라진 시대, 다른 문제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살아가며 마주하는 문제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고전을 통해 그 문제들을 반추하고 당대의 해법을 살피며, 그것을 현재의 관점으로 적용하려는 노력이 그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고전의 재해석을 통해 ‘오디세우스’는 현재 벌어지는 전쟁을 되돌아보고, 환대하지 않게 된 세상을 향한 참회의 시선을 던진다. ‘오이디푸스’는 그저 운명에 꺾인 비극적 인간이 아니다. 운명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의지를 드러낸다. 샤일록은 악당이 아닌, 핍박받아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하게 된 소수자다.
고전이 고루한 옛것이 아닌 수천 년 세월을 버텨낸 지혜가 될 수 있는 것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현재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성세대가 어떻게 하면 지혜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주기도 한다. 그건 다름 아닌 현재를 수용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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