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철훈의 사진 이야기] 봄을 기다리는 마음

기사입력 2015-04-03 09:08 기사수정 2015-04-03 09:08

▲사진=함철훈 사진가

이제 겨우 북방나라 몽골의 계절을 한 번씩 맞고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직 새내기에 불과한 우리 부부의 몽골살이는 서투르기만 합니다. 그래도 얼떨결에 맞은 작년과는 다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차이입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몽골에 사는 사람답게 기후의 변화에 민감해졌습니다. 겨울이 긴 추운나라에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계절에 무덤덤할 것이라 추측했는데 막상 들어와 함께 살아보니 이들의 다른 면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계절에 예민한 겨울왕국 사람들입니다.

4월에도 기본이 영하 10도 이하인 기온 때문에 봄은 아주 멀리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건 오랜 기간 사계절의 기후를 당연한 듯 살아온 나의 몸 때문이었습니다. 내 동네가 전부이고, 내 나라가 세상의 중심이고, 나에게 익숙한 생활이 세상의 표준이라고 여기고 있는 우물 안 개구리인 우리는 아직 몽골에서 동면 중입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한겨울입니다. 사실 4월이면 벌써 봄이지만 우리 몸의 관성 때문에 가만히 주위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섣부르게 뛰어 나갔다간 큰 낭패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몽골사람들의 봄을 기다리는 정서를 그냥 지나칠 뻔하였습니다.

땅바닥이 아직 얼음투성이라 서로 손을 잡고 걸어야 하는 몽골국제대 교정의 계단화단을 나서며 아내는 나를 은근히 불렀습니다. 소리마저 낮추며 너무나 부드러운 표정으로 잡은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대학 본관 앞 메마른 화단에서 버들강아지의 새봄을 보았습니다. 아내의 얼굴에 띤 홍조를 분명 보았습니다. 아내는 그 화단 주위를 돌며 더 많은 버들강아지의 새순을 찾아내었습니다. 하나를 찾아낼 때마다 아내의 얼굴과 몸에선 꽃이 미리 피었습니다. 겨우내 영하 삼사십도에 그대로 노출된 나무가 준비한 새순을 본 나의 맘에도 숨어 있던 봄기운이 일렁거렸습니다.

북쪽나라 몽골에서 겨울을 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입니다. 서로 약속하지 않았지만, 추위에 다치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며 온 나라가 암묵적인 동면의 분위기가 6개월을 넘었습니다. 외출을 삼갔을 뿐 아니라, 창밖도 가급적 자주 보지 않았습니다. 몽골의 스산한 추위는 보는 것만으로도 으스스 몸이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무서운 추위를 온몸으로 받아낸 생명은 여리고 가늘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거기엔 부드러운 솜털도 보였습니다. 아직 우리가 디딜 수 있는 모든 땅에는 내린 눈이 녹지 않아 온통 얼음판인 동토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기 사는 원주민들은 당연히 이렇게 이들의 언 땅을 닮아 투박할 것이라 미뤄 짐작하였습니다. 겨울 찬바람을 차단하기 위해 손 전체를 가릴 수 있도록 길게 늘어뜨린 팔의 소매와 여기저기 동여맨 두껍고 긴 옷 때문에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몽골사람들의 새순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직 긴 겨울을 살아온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따듯함이었습니다.

▲사진=함철훈 사진가

우린 내친 김에 집 뒤 자이슨 산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용기는 없어도, 오랜만에 맑은 공기를 숨쉬고, 차 안에서라도 햇볕을 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이된 일입니까? 산 입구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줄을 지어 산에 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발에 아이젠을 신지 않고는 오를 수 없는 상황인데도 울란바토르 시민들은 스스로 겨울 산에 꽃으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 산을 오르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특별했지만, 갓난아이에게 볕을 쪼여주기 위해 강보에 싸매 들쳐 안고 산을 오르는 우락부락한 부성(父性)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쩌지요? 이런 난감한 광경-산을 오르다 미끄러져 발을 다친 무거운 아내를 업고 얼음 비탈 산길을 힘겹게 내려오는 남편.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섣부르게 정의할 순 없지만, 간절함과 연관이 있음을 몽골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봄과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는 곳일수록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오히려 더 절박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게 어디 봄뿐이겠습니까?

섣부른 선입견으로 만든 내 잣대들이 부끄러워집니다. 사진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였는데, 이제 나의 생각과 선입견도 바꾸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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