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마음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가벼운 너스레를 떨어야 한다.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강물이 제법 불었는데요.’ 하니까 ‘뭐 이정도 비가 와가지고…’ 하신다. 경계심이 많이 풀어진 얼굴이다. 별 부담 없는 대화로는 날씨 이야기가 제일이다. ‘ 그래도 비가 좀 왔다고 날씨가 많이 시원해 졌어요.’ ‘오늘 낮에는 또 무덥게 찐다는 데요.’ 하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전등 스위치를 켜면 불이 들어오듯이 할아버지는 경계심이 풀어지자 이런저런 말씀을 하신다. 올해 82세이고 젊어서 무역업에 손을 대어 돈도 꽤 벌었는데 지금은 대기업 다니던 아들에게 넘겨줬다고 하신다. 며느리가 똑똑해서 사업체를 100배나 키웠다고 며느리 자랑이 대단하다.
세상에 걱정 없는 사람은 없다 할아버지도 3년 전에 상처하고 결혼 못한 40대 후반의 아들과 함께 산다고 한다. 아들 장가보내는 것이 자기에게 남은 마지막 큰 짐으로 생각하신다. 친한 친구들도 대부분 저 세상 사람이 되고 살아있어도 거동들이 불편하니 만나서 말할 상대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아쉬워한다.
대화의 주제를 바꾸어 사업 이야기를 물어봤다. 빚내서 사업하지 말고 남과의 신의를 생명처럼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빚이 있으면 무리수를 놓게 되고 사업체가 망하기 쉽다고 한다. 신의를 잃으면 남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사업은 남의 도움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한다. 돈은 왜 버느냐? 남을 속이고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하고 버는 돈은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한번은 사업이 어려워 선배 돈을 쓰게 되었는데 도망가지 않고 집을 팔아 선배 돈을 갚았다고 한다. 몇 년 뒤 선배가 그 돈을 그대로 다시 주면서(은행을 경유하지 않고 현찰을 주고받던 시절이라 선배는 쓰지 않고 후배가 어떻게 하나 지켜보고 있었다고 함) 재기하라고 용기를 주었다고 한다.
나는 치매 전문 봉사자 일을 하면서 치매는 외로워 생기는 병이라 확신하고 있다. 말을 하려해도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고 나면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치매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수순이다. 이 분들에게 과거를 회상하게하고 말을 하도록 하는 일이 즐겁다.
살아있는 인생 선배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주옥같은 실화를 많이 들으려 한다. 그분들이 살아오신 인생역정을 들으면 안타깝고 눈물지을 때도 있지만 삶의 지혜와 용기를 얻는 이야기도 많다. 나이 60임에도 70대를 모른다, 70대는 80대를 모른다. 외냐면 미래를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나이를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제일 확실하다. 나는 미래지만 그 분에게는 오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