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은 후에는 모두 빙 둘러앉아서 수건돌리기 놀이와 ‘어, 조, 목 놀이’도 했다. 어, 조, 목 놀이는 리더가 종이방망이를 들고 다니다가 한 사람을 지목한 후 어, 조, 목을 몇 번 되뇌다가 ‘어’ 하면 제한된 시간 안에 재빨리 물고기 이름을 대야 하며 ‘조’ 하면 새 이름을, ‘목’ 하면 나무 이름을 대야 한다.
3초 안에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종이방망이로 한 대씩 얻어맞았는데 엉겁결에 ‘조’ 하면 “새!” 하거나 '목’ 하면 “나무!”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있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곤 했다. 당황한 가운데 터져 나오는 틀린 대답이 하도 우렁차서 우스웠던 것이다.
찹쌀떡먹기 놀이를 할 때는 출발 신호와 함께 일제히 뛰어가 뒷짐을 진 후 쟁반 위 밀가루 속에 감춰진 찹쌀떡을 입으로 찾아서 하나씩 물고 오느라 얼굴이 온통 밀가루 범벅이 되어서 우스꽝스런 모습들이 됐다. 그래도 좋다고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웃으며 서로의 옷에 묻은 밀가루를 털어주곤 했다.
보는 사람이 안타까워했던 것은 과자따먹기 놀이였다. 뒷짐을 지고 입으로 과자를 따먹는 놀이였는데 따먹을 만하면 줄을 올리고 입이 과자에 닿을 만하면 줄을 올려 모두의 애를 태웠던 것이다.
'선생님 앞에서 어떻게 입을 벌려….'
필자 성격으로는 찹쌀떡먹기나 과자따먹기는 절대로 못할 놀이였다. 선생님들은 자꾸 “너도 해봐” 하시는데 필자는 “싫어요, 저는 못해요” 하며 구경만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하라면 하는 거지 ‘못해요’가 가당키나 했던 일인가. 그러나 야학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싫어하는 일을 강제로 시키지 않았다. 체육에는 소질도 취미도 없는 필자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런 필자가 좋아하는 놀이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보물찾기였다. 사각으로 접힌 조그마한 종이쪽지는 소나무 가지 틈 사이에 꽂혀 있기도 했고 나무껍질 속 또는 바위틈에 숨겨져 있기도 했다. 그 속에 적혀 있는 상품 이름이 무엇인가는 둘째 문제였다. 풀숲이나 바위틈에 뱀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보물찾기는 너무 재미있었다. 종이쪽지를 찾아다니는 내내 기대감으로 가슴이 ‘쿵광쿵광’ 뛰었고 긴장감으로 숨이 막혀올 정도로 스릴이 있었다.
필자가 제일 싫어하는 놀이는 달리기였는데 선생님들은 1등을 한 사람에게는 으뜸상, 그다음은 버금상, 그다음은 더 잘함상, 심지어 꼴등한 사람에게까지 애씀상을 주셨다. 모든 아이들에게 빠짐없이 상을 주시면서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주신 것이다. 그래서 소풍을 갔다 온 뒤 얼마 동안은 노트를 따로 살 필요가 없었다.
노래부르기 대회를 할 때면 모두들 신이 났다. 특히 선생님들은 다들 노래를 잘 부르셔서 전문 성악가들이 울고 갈 지경이었다. 레퍼토리가 ‘돌아오라 소렌토로’, ‘산타 루치아’, ‘보리수’ 등 이탈리아나 독일 가곡 등이었는데, 한 단계 더 높은 유명 오페라의 아리아, 베르디의 ‘여자의 마음’, 푸치니의 ‘별은 빛나건만’ 등을 폭포수같이 쏟아내시기도 했다.
팝송과 가요는 처음 얼마간은 굉장히 당기지만 어느 새에 싫증이 나곤 했는데 가곡이나 정통 클래식은 언제 들어도 가슴에 와 닿았다. 우리들에게 늘 가곡을 부르도록 지도해주시고 정통 클래식을 감상하는 요령을 가르쳐주시던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발성법이 두성법이 아니고 목에서 나는 소리이면 유행가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이라며 지적을 해주시곤 했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하고 기억력이 왕성한 10대에 보고 들은 것들은 평생에 걸쳐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이후 클래식 음악은 책과 영화와 함께 필자의 가장 좋은 친구가 돼주었다.
‘어쩜 저렇게 잘 부르실까.’ 특히 필자가 좋아하는 B선생님이 노래를 부르실 때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쳐다보곤 했다. 선생님의 작은 동작 하나하나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필자 눈에는 다른 사람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선생님만 보였다. 노래를 부를 때 그 선생님을 보면 더 멋있어 보였고 그야말로 꿈속의 왕자님이 따로 없었다.